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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洪州牧本百濟周留城”의 숨은 의미

정순태의 백제부흥전쟁(10)

글 鄭淳台 기자  2019-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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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루성→ 두루미성→ 鶴城→ 周留城으로 바뀐 사연
  
 우리 답사팀은 山城里(산성리)의 석성산성(제1鶴城)에서 하산한 후 1km 서쪽 大峴里(대현리)의 趙煥雄(조환웅) 씨 댁 뒤쪽의 제2학성을 관망했다. 고려대 사학과 출신인 趙煥雄 씨는 1996년 필자의 제1·제2鶴城 답사를 안내했었다. 여기서 제1학성과 제2학성에 대해 조금 설명해둘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원래 제1학성은 馬韓(마한) 시대의 城邑(성읍)국가인 沙尸良國(사시량국)이 戰時(전시)에 대비한 왕궁성이었다. 396년 고구려 廣開土王(광개토왕)의 침략을 받았던 사시량국이 戰後(전후)에 지세가 험한 이곳에 처음으로 王宮城(왕궁성)을 축조했던 것이다. 高度(고도) 255m, 城 둘레 1350m의 규모이다. 제1학성은 원래 두루城이라 불렸는데, 먼 훗날 이것을 한자로 옮기면서 두루미를 뜻하는 鶴城(학성)이라 표기했다.


사시량국은 475년 고구려 長壽王(장수왕)의 공격으로 漢城(한성)백제가 무너지고 文周王(문주왕)이 웅진으로 遷都(천도)하자, 內浦(내포)지방의 다른 城邑국가들과 함께 백제에 순응했다. 사시량國도 백제의 사시량縣(현)으로 개편되었다.


그러나 사시량縣의 治所(치소)로서 제1학성의 접근로는 너무 험했다. 그래서 인근(지금의 大峴里)에 제2의 鶴城이 축조되었다. 이제는 제2학성도 숲속에 파묻혀 있다. 해발 212m의 봉우리를 중심으로 둘레 1174m의 석축성이다. 대부분 붕괴되어 성돌이 산사태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동쪽에는 높이 2.5m의 성벽이 비교적 잘 남아 있다.


 제1·제2 학성을 중국史書(사서)에서는 현지 주민들의 호칭인 ‘두루城’에 착안하여 ‘두루 주(周)’ 자에다 ‘머무를 류(留)’를 더해 周留城이라 명명했다. 한편 일본사서에서는 州柔城(쓰누사시) 또는 石城(샤쿠사시)라고 표기했다.


 1996년 답사 때는 향토사학가 趙換雄 씨가 石城에서 下山(하산)한 필자를 인근 철광지로 안내했다. 다음은 그때 필자의 답사기사에서 발췌한 것이다.


<石城에서 下山하여 인근 장곡면 산송리 산 48번지의 철광지로 직행했다. 鐵鑛口(철광구)에는 빗물과 지하수가 고여 못을 이루고 있는데, 주변에는 벌건 철광석이 아직도 그대로 드러나 있다. 조환웅 씨는 이런 야철광이 이 일대에 10여 군데 있다고 했다. 1300여 년 전 백제부흥군은 이곳의 철로 무기를 만들었을 터이다.>    







烏棲山 중턱에 위치한 ‘福信 굴’


 『일본서기』에 의하면 天智(텐치) 2년(663) 5월에 왜국의 犬上君(이누우에노기미)가 고구려에서 使行(사행)을 마치고 귀로에 샤쿠사시(石城)에 들러 豊王(풍왕, 부여풍)을 만났다. 이때의 石城은 주류성이다. 왜냐하면 그때 부여풍이 주류성에 있었던 것이 확실하기 때문이다.


그 무렵, 福神(복신)이 부흥전쟁 초기부터 동지였던 僧將 道琛(승장 도침)을 살해하고 도침의 兵力(병력)까지 차지했다. 이런 까닭으로 풍왕과 복신 사이에 불화가 더욱 깊어졌다.
 그런 상호 불신 속에서 복신은 身病(신병)을 이유로 窟室(굴실)에 몸져누워 버린 시늉을 했다. 풍왕이 문병을 오면 그를 죽인다는 것이 복신의 속셈이었다. 그러나 복신은 풍왕에게 將計就計(장계취계)를 당하고 말았다. 풍왕은 심복 무사들을 데리고 문병을 한다며 굴실로 들어가 복신을 가죽끈으로 묶었다. 『일본서기』는 福信의 최후를 다음과 같이 전한다.


 <백제왕 豊璋(풍장)은 복신이 謀反心(모반심)이 있다고 의심하고, 가죽으로 손바닥을 뚫어 묶었다. 그러나 혼자 결정하기 어려워 어찌할 바를 몰랐다. 諸臣(제신)에게 물어 “복신의 죄는 이미 이렇다. 斬(참)할 것인가, 아닌가?”라고 물었다. 그때 달솔 德執得(덕집득)이 “이 惡逆人(악역인)을 放免(방면)할 수는 없습니다”라고 말하였다. 복신은 執得의 얼굴에 침을 뱉고, “썩은 개, 미친놈”이라고 말하였다. 왕은 健兒(건아)에게 勅(칙)하여 斬하고 그 머리를 젖갈로 담궜다.>


用兵(용병)에 능하다고 해서 부흥군 병사들의 신뢰를 받던 복신의 죽음은 충격적이었다. 당연히 사기가 떨어졌다. 그렇다면 복신이 풍왕의 기습을 받았던 窟室(굴실)은 어디였을까?
주류성 인근에 복신이 꾀병을 앓았던 암굴이 있었을 것이다.
장곡면 출신 향토사연구가인 金鉀鉉(김갑현) 씨와 趙煥雄 씨가 烏棲山(오서산)에 그런 자연 암굴이 있음을 알아냈다. 위치는 주류성에서 서쪽으로 4km 떨어진 오서산 중턱에 있다.


오서산(791m)은 충남에서 鷄龍山(계룡산, 845m) 다음으로 큰 산이다. 廣城里(광성리) 마을을 거쳐 오서산 동남쪽 자락에 이르렀더니 과연 멀리 중턱에 하얀 석굴이 보였다. 취재차를 타고 그 아래에 위치한 內院寺(내원사)에 이르렀다. 內院寺라는 이름의 절은 국내에 여러 곳에 있지만, 모두 여승들이 머무는 사찰이다. 박태신 원장은 내원사의 내력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일본의 불교서적인 『原亨釋書(원형석서)』에 따르면 백제 말기에 왜국을 여러 차례 오가며 불법과 의술을 전했던 여승 法明(법명)이 창건한 사찰이라고 합디다.”


내원사 뒤로 300m쯤 오르면 큰 암벽이 보인다. 동굴과 연결되는 작은 구름다리가 암벽에 매어 있다. 다리를 따라 50m쯤 전진하면 암벽 사이에 자연 석굴이 있다. 높이 2m, 폭 4.2 m, 길이 5.3m쯤 되는 岩窟(암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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福信(복신) 굴의 遠景(원경, 홍성군 장곡면 廣城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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福信(복신)이 稱病(칭병) 하고 누웠던 굴의 내부



 



古山子의 기록 “洪州牧本百濟周留城”의 숨은 의미는(?)
 
오서산에서 하산한 우리 답사팀은 6km쯤 北上(북상)해 廣川邑(광천읍, 홍성군)에 잠시 들렀다. 광천은 淺水灣(천수만)으로 통하는 溺谷(익곡)인 廣川灣(광천만)의 최상단에 위치해 있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어선이 많이 들어와 호황을 누렸지만, 이제는 갯골이 좁아져 어선이 들어오지 못한다. 그러나 오서산 廢(폐)금광 동굴에 넣어 숙성한 ‘廣川새우젓’은 아직도 전국적으로 명성이 높다.


 광천에서 10km쯤 북상해 홍성읍에 진입했다. 해발 약 100m의 ‘꽃조개 고개’를 넘을 때 아기자기한 地名(지명)이라 기분이 좋았다. 洪城은 조선조에선 정3품 牧使(목사)가 주재하여 洪州(홍주)로 불렸는데, 아직도 邑城(읍성)의 일부와 성문인 朝陽門(조양문)이 보존되어 있다. 우리 답사팀은 朝陽門路에 있는 內浦古代(내포고대)문화연구원에 들러 차를 마시면서 제1일차의 답사를 결산했다.


古山子(고산자) 김정호는 『大東地志(대동지지)』 홍주목성 條의 서두에 <洪州牧本百濟周留城>(홍주목은 본래 백제 주류성이다)이라고 썼다. 그러나 지금도 잘 보존되어 있는 홍주목성은 平地城(평지성)이기 때문에 지세가 험한 주류성이 될 수 없다. 그렇다면 “홍주목 관할 하에 본래 주류성이 있었다”라고 풀이한다면 古山子의 기록이 마냥 틀렸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이어 홍성읍에서 다시 8km쯤 북상해 伽倻山(가야산) 기슭 修德寺(수덕사, 예산군 덕산면 사천리) 寺下村(사하촌)에 도착했다. 수덕사 대웅전은 현존하는 목조건물 중 최고참(1308년 건립)으로서 국보 제49호이다, 고려시대의 柱心包(주심포) 목조건물로서 형태미가 매우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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洪州牧城의 현재 모습, 사진 홍주in뉴스



 


內浦지방의 중심인 伽倻山은 불교가 도입되기 전엔 ‘검은 산’, 그 토지는 ‘검은 들’이라 불렸다. 박태신 원장에 의하면 백제부흥군 지도자 중 1人인 黑齒常之(흑치상지)의 고향 風達郡(풍달군)이 바로 덕산면(禮山郡)이라는 傳承(전승)도 있다. 黑齒常之가 처음 거병했던 임존성도 예산군 大興面(대흥면)에 있다. 임존성은 뒤에서 거론할 것이다.


德山 온천마을의 한 펜션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9월2일 아침에 기상해 창문을 열어젖혔다. 가야산(678m)의 古雅(고아)함이 눈앞에 전개된다. 世道家(세도가)였던 安東 金씨로부터 ‘상갓집 개’라고 멸시를 받았던 흥선군 李昰應(이하응)은 일찍이 어느 地官(지관)으로부터 가야산의 伽倻寺(가야사) 자리가 “2代 天子(천자)를 나오게 하는 名堂(명당)”이라는 말을 듣고 그 자리에다 그의 아버지 南延君(남연군)의 묘를 移葬(이장)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의 꿈은 이뤄졌다. 그러나 그 꿈은 조선 백성들의 꿈은 아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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