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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아시아史의 결정적 순간―白村江 전투

정순태의 백제부흥전쟁(12)

글 鄭淳台 기자  2019-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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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촌강 일대의 海岸은 온통 허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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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진시 고대면 슬항리 長項橋(장항교)에서 바라본 孫梁(손량)과 지벌포의 遠景(원경). 패전한 왜군의 시체가 밀물에 밀려간 손량과 지벌포는 지금은 간척사업으로 육지화됐다.



 


우리 답사팀은 피성 답사에 이어 615번 지방도로로 北上(북상)하는 도중에 高大面 大村里(고대면 대촌리)의 막무덤(패전한 왜군의 무덤)을 답사했다, 이어 瑟項里(슬항리)의 장항교 부근에서 잠시 하차해 『삼국유사』에서 백강구 戰場(전장)의 일부로 기록한 孫梁·只伐浦(손량·지벌포) 등의 遠景(원경)을 살피고 박태신 원장의 설명을 들었지만, 이 부분에 대해서는 뒤에서 상술할 것이다. 어떻든 막무덤·손량·지벌포 등은 백촌강 전투 현장들인 만큼 백촌강과 서로 가까워야 논리적이다.


먼저 석문면의 白沙場어항(용무치항)부터 들렀다. 해변이 온통 허옇다. 지질학적으로 변성암 지대이다. 硅酸(규산)을 화학 성분으로 하는 硅砂(규사), 즉 石英(석영)과 長石(장석)의 작은 알맹이로 된 흰 모래사장이 깔려 있기 때문이다.
하얗고 잘게 부숴진 石英의 백사장이 무려 4km. 『삼국사기』에서 왜의 수군 1000척(사실은 400척)이 입항했다는 ‘白沙(백사)’가 바로 이곳이라는 느낌이 팍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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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국 함대 400척이 입항한 白沙[백사, 당진시 석문면 白沙場漁港(백사장어항)]



 


백사장어항 바로 서쪽에는 해발 70m의 石門山(석문산)이 해안에 바짝 붙어 솟아 있는데. 국내에서는 유일하게 日出·日沒(일출·일몰) 광경을 한 곳에서 볼 수 있는 곳이다. 선착장 주변의 기암괴석과 연안에 떠 있는 어선들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바로 앞바다에는 1894년 청일전쟁의 戰端(전단)이 열린 豊島(풍도)가 떠 있고, 그 뒤로는 백제패망사에서 자주 거론되는 德積島(덕적도)가 보인다.


박성흥說을 따르면 백사장어항이 663년 8월 27일 왜국 함대 400척이 입항해 정박했던 白村(하쿠스키·석문면 三峰里 1區)이다. 백사장어항에 입항한 데 이어 왜군의 정찰대는 곧 백사장어항의 구릉(지금의 石門山)에 올라가 사방을 관측했다. 바로 그 동쪽의 항구에 열흘 전쯤에 먼저 입항한 170척의 당 함대가 정박해 있었다. 박성흥說에 따르면 이곳이 『日本書紀(일본서기)』에 기록된 ‘白村江’, 『舊唐書(구당서)』의 ‘白江口’, 지금의 熊浦(웅포)이다.


 최근 석문면의 웅포 앞바다로부터 松山面(송산면) 두포에 이르기까지의 11.4km에 石門防潮堤(석문방조제)가 건설되어 백촌강 해전 당시의 모습을 상상하기가 어렵다. 이런 필자의 고민을 풀어준 것이 아래 첨부한 1916년版 지도다. 조선총독부가 ‘大正 5년’에 발행한 이 지도를 보면 웅포(백촌강)가 항아리 모습의 良港(양항)으로 그려져 있다. 지금의 長項灣(장항만)도 그때는 지금보다 넓고 깊었다, 이제는 매립공사로 반듯해지고 국가산업단지 등이 들어선 당진의 북쪽 해안이 100년 전만 해도 요철이 극심한 리야스式 해안이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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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6년 조선총독부가 제작한 석문면(백촌강) 지도



 


물때와 風向을 무시한 왜국 함대의 대패


 663년 8월 27일, 왜국의 장수들은 백촌강에 정박한 당의 함대가 弱勢(약세)라고 판단하고 先制(선제) 공격을 감행했다. 주류성에서 달려온 백제의 騎兵隊(기병대)는 해안 어귀의 언덕에 포진해 왜선을 엄호했다. 이어 왜국 선단이 선제공격을 했는데, 전황이 불리하자 바로 물러났다. 왜국 측으로서는 威力偵察(위력정찰)을 했던 셈이다.


熊浦(웅포·백촌강)의 灣內(만내)는 동서가 1.7km, 남북이 1.7km쯤 되니 상당히 넓지만, 출입구가 300~400m에 불과하고, 출입구 부위의 海中(해중)에는 긴 白色巖脈(백색암맥)이 外海(외해) 방향으로 뻗어있어 항내 진입에 제약을 받게 되어 있었고, 밀물·썰물 때 流速(유속)도 매우 빨랐다. 함대 세력을 보면 당군이 170척, 왜군이 400척이었지만, 당의 병선은 대형인 듯하고, 왜군의 병선은 상대적으로 소형이었다. 왜군 병력 1만여 명이 400여 척에 分乘(분승)했던 만큼 1척 당 평균 승선 병력은 25명인 셈이다.


다음날인 8월 28일, 본격적인 접전이 전개되었다, 신라의 기병이 왜군 함대를 엄호하던 백제부흥군 기병을 선제공격해 제압했다. 이날 해전의 경과에 대해 『일본서기』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일본 장수들과 백제왕(부여풍)은 氣象(기상)을 살피지 않고 서로 일러 말하기를, “우리들이 다투어 싸우면 저들이 스스로 물러날 것이다”라고 하면서, 中軍(중군)의 군졸들을 이끌고 隊伍(대오)가 어지럽게 나아가 굳게 陣(진) 치고 있는 당의 군대(함대)를 공격하였다. 당이 바로 좌우에서 배를 협공하여 에워싸고 싸우니, 잠깐 사이에 일본군이 계속 패하여 물에 빠져 죽는 자가 많았고, 배가 앞뒤를 돌릴 수 없었다. 에치노다쿠츠가 하늘을 우러러보며 맹세하고 분하여 이를 갈고 성을 내며, 수십 인을 죽이고 전사하였다. 이때 백제왕 풍장(부여풍)이 몇 사람과 함께 배를 타고 고구려로 달아났다.>
 
『舊唐書』에 따르면 왜장들은 전함의 수가 많은 것을 믿고, 조수(물때)와 풍향을 무시한 채 선제공격을 감행했다. ‘輕敵必敗(경적필패)’의 戰訓(전훈)을 무시했던 것이다. 『資治通鑑(자치통감)』에는 전장의 모습을 “4전4승했다. 연기와 화염이 하늘을 뒤덮고, (왜군들이 흘린 피로) 바닷물이 붉게 물들었다”고 표현했다. 이를 음미하면 왜군은 赤壁大戰(적벽대전) 이래 중국 水軍(수군)의 常用(상용)전술인 火攻(화공)에 걸려든 것이었다.


군함이 木造(목조)였던 시대에는, 洋의 東西를 不問하고 함선의 효과적인 파괴법으로 구사된 것이 火攻이었다. 이 화공 전법에 동원된 무기는 火船(화선), 火箭(화전), 火毬(화구), 火槍(화창) 등이었다. ‘火船’은 소형선이지만, 可燃性(가연성) 물질을 가득 적재한 것으로서 적 함대에 돌입시키는 것이었다. 화선은 단독, 혹은 함대의 前衛(전위)로서 투입된다.


이런 火船 공격에 대한 방어법으로는 긴 장대로 火船을 밀쳐낸다든지, 船體(선체)에 진흙을 두텁게 발라 燃燒(연소)를 방지하는 등의 방법이 구사되었다. 특히 帆船(범선)의 활대, 즉 돛 위에 가로 나무를 火箭으로 불태워 적선의 航行(항행) 능력을 빼앗는 방법도 구사되었다. 백촌강 해전에서 당군은 水戰(수전)의 기본기를 잘 활용했던 것 같다.


백촌강 전투에서 부여융·부여풍 형제는 운명의 장난도 심해, 서로 다른 진영의 괴뢰가 되어 싸웠다. 의자왕 제5자인 부여풍은 패전 직후에 고구려로 도주했지만, 668년 9월 나당연합군에 의해 평양성이 함락되자 당나라로 끌려갔다. 그곳에서 그는 다시 嶺南[(영남, 지금의 廣西(광서)·廣東省(광동성)]으로 귀양을 갔는데, 그 후 그에 관한 기록은 失傳(실전)되었다.


의자왕의 제3자인 부여융(615~682)은 백촌강 전쟁 2년 후인 665년 웅진도독이 되어 신라 문무왕과 함께 白馬(백마)의 피를 마시면서 就利山(취리산, 공주시 우성면 연미산) 會盟(회맹)까지 했지만, 나당 7년 전쟁(670~676)이 발발해 웅진도독부가 소멸되던 671년 무렵 신라군에 쫓겨 다시 당나라로 들어갔다. 그 후 그는 웅진도독 帶方郡王(대방군왕)에 봉해졌지만, 신라군이 겁나 백제 故土(고토)로 돌아가지도 못하고 遼東(요동)의 建安城(건안성) 등지를 전전하다가 죽었다. 그의 墓碑(묘비)는 수십 년 전 도굴꾼에 의해 洛陽(낙양)의 北邙山(북망산)에서 발견되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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