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조선 기사

[인터뷰] 시민운동가 徐京錫 목사

『낙선·낙천운동이 위법이라는 大法院의 판결이 나왔는데도, 內部 비판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非正常이다』

글 정순태 기자  2010-0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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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선·낙천운동에 대한 찬반 양론

―徐목사께서 처음에 月刊朝鮮의 인터뷰 요청을 받지 않으려 했던 까닭은 무엇입니까.

『月刊朝鮮이 시민운동을 비판하는 데 이론적 근거로 활용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인터뷰에 응한 까닭은 무엇입니까.

『시민운동 내부에서 토론되고 있는 自省(자성)의 목소리를 시민사회에 알릴 필요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작년 총선에서 낙선·낙천운동을 주도했던 총선시민연대가 중심이 되어 2월중에 새로운 상설연대기구를 만든다는 얘기가 있는데, 徐목사님의 입장은 어떻습니까.

『경실련 등을 중심으로 결성된 기존의 시민연대(市民協: 한국시민단체협의회)가 한가롭고 보수적이라 하여 총선시민연대를 주축으로 강한 연대를 새로 만들자는 것인데, 시민운동의 발전을 저해하는 연대틀이라면 기존의 市民協을 스스로 해체해가며 새 연대기구에 가담할 이유를 발견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새로운 시민단체 상설연대기구 창설에 반대하는 것입니까(徐京錫 목사는 시민협의 사무총장이다).

『우리는 한국의 모든 시민단체들이 한데 모여 상설 네트워크를 만들자는 의견에는 반대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모든 시민단체를 포괄하는 네트워크가 만들어짐으로써 서로 다른 그룹 사이에 불필요한 경쟁과 대립 상태를 피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바로 그러한 생각에서 6년 전에 市民協을 만들어 지금까지 활동해 온 것입니다. 다만 새로 만들어지는 상설네트워크는 우리가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 연대틀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럴 경우 우리는 市民協을 발전적으로 해체할 용의도 있습니다』

―市民協 그룹과 개혁연대 그룹 사이에 노선 차이가 있습니까.

『결정적 차이는 없습니다. 최근 몇년간 거의 모든 사안을 놓고 공동연대가 이루어져 왔습니다. 다만 한 가지, 16代 총선 시기의 총선시민연대 활동을 평가하는 데 있어서 차이를 보이고 있습니다』

―그 차이는 무엇입니까.

『이제까지 市民協은 합법운동을 시민운동의 기본자세로 견지해 왔습니다. 따라서 준법의 틀을 넘어서서 활동한 총선시민연대의 낙천·낙선운동에 대해 시민단체들이 찬반의 논란을 벌이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고 자연스런 일이며 오히려 시민운동의 건강한 발전에도 도움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도 이런 차이를 보수와 진보의 차이로 규정하고 매도한다면 시민운동은 동맥경화증이 걸리고 중병이 들고 마는 것입니다』


『획일주의로 가면 시민운동 죽는다』

―16代 총선시기의 낙선·낙천운동을 紅衛兵(홍위병) 활동으로 낮게 평가하는 시각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런 시각에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저의 처(신혜수 「여성의 전화」 대표)도 총선시민연대의 공동대표로 참여했습니다. 저는 처에 대해서도 문제제기를 한 적이 없었습니다.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그 운동이 사회에 기여한 바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런 의미에서 저는 소극적인 참여자였던 셈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입니까.

『총선시민연대에 대한 정직한 평가 없이 다음 운동을 만들어낸다는 것은 맞지 않다고 생각했지요. 낙선·낙천운동에 대한 외부의 비판은 많았지만, 시민운동 내부에선 전혀 비판이 없었어요. 저는 이렇게 획일주의로 가면 시민운동이 죽는다, 그래서 목소리를 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낙선·낙천운동이 위법이라는 대법원 판결이 나왔는데, 시민운동 내부에 찬반 양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건 非정상적이에요. 저는 그런 방식의 운동은 작년 한 해로 족하다는 주장을 펴는 겁니다. 낙선·낙천자의 명단을 발표하는 등의 일은 반드시 후유증이 따르고 해서는 안 될 일입니다』

―낙선·낙천운동은 그 동기야 어떻든 집권자가 바라는 바를 행동에 옮긴 것입니다. 金大中 대통령이 총선시민연대의 활동을 고무하는 발언을 했거든요. 바람직한 연대틀은 어떤 것이어야 합니까.

『우선 다양성을 인정하고 이를 존중해 주는 연대기구여야 합니다. 市民協은 작년 9월 개혁연대 그룹과 연대기구를 만드는 논의에 참여했으나 「다양성 존중」에 대한 확신이 서지 않아 새로운 연대틀의 준비위원회에 가담하는 문제를 일단 유보하고 최종 결정을 금년 2월로 미룬 바 있습니다. 우리는 새로운 연대틀이 다양성을 존중하지 않아 다른 의견을 허용하지 않을 경우에는 그러한 연대틀에 참여하지 않을 것입니다』

―개혁을 밀어붙이기 위해 강한 연대를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은 옳은 생각입니까.

『강력한 연대는 반드시 시민운동의 자발성을 훼손시킵니다. 강한 연대를 지향하는 것은 과거 권위주의 시절 在野운동의 논리일 뿐입니다. 참으로 개혁을 촉진시키려면 우리 사회의 다양한 세력을 지지의 대열에 끌어들여야 하는데, 획일주의식 강한 연대를 지향하면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결과적으로 시민사회 전체를 대변하지 못하게 되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특정 편향을 가진 연대틀로 전락하고 맙니다』

―최근 일부 시민운동단체의 모습을 보고 NGO가 Non Government Organization(非정부기구)이 아니라 Near Government Organization(親정부기구)라고 비판하는 데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거기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現 정부에 대한 견제의 기능이 좀 떨어진다고 얘기할 수는 있겠지요. 시민운동 내부에는 야당 시절의 金大中 정부 사람들과 가깝게 지낸 분들이 많습니다. 독재정권에 대한 투쟁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공감대가 이뤄진 부분도 적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現 권력에 대한 견제에 소홀한 모습을 보였다면 심각하게 반성해야 합니다. 반대해야 할 것을 딱 부러지게 반대하지 않는다면 시민운동단체의 존재 이유가 없습니다』


金大中 정부가 민주주의를 배반한다면…

―金大中 정부가 출범 초부터 국회의원을 빼가는가 하면 총선 후 DJP 공조체제를 회복한 것은 무리라고 생각지 않습니까.

『그것이 소수파 정권의 콤플렉스에 비롯된 것이든 정치현실상 원내 과반수를 중시한 것이든 국민들을 실망시켰습니다. 근본적으로 정부의 진정한 힘은 도덕적인 힘과 국민의 신뢰에서 온다고 생각합니다. 在野시절의 金大中 대통령이 東京에서 납치되어 돌아오고 나서 얼마 후 YWCA에서 연설을 했는데, 그 제목이 「도덕정치의 회복」이었습니다』

―검찰의 중립성 논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작년 총선거는 사실상 돈선거였습니다. 야당측에서 명명백백한 증거와 함께 문제를 제기했는데도 불구하고 검찰은 기소를 하지 않았습니다. 기소의 편파성이 심각했죠. 검찰 수뇌부에 대한 탄핵결의안이 야당에 의해 정당한 절차를 밟아 국회에 상정되었는데, 그 처리를 물리적으로 봉쇄한 여당의 행위는 잘못된 겁니다』

―이른바 「안기부 자금의 정치권 유입」 논란을 어떻게 보십니까.

『철저한 수사가 이루어져야 하는 사안임에도 불구하고 공정한 수사가 이뤄지지 않은 채 政爭의 도구가 되고 있다는 인상을 많은 국민들이 받고 있습니다. 차제에 정부는 특별검사제를 도입하여 與野 불문하고 공정하게 수사해야 할 것입니다』

―당면한 경제위기는 어떻게 풀어야 하겠습니까.

『경제문제의 바른 대처를 위해서는 구조조정 및 公的자금의 집행과정에서 공정성·일관성·투명성이 미흡했음을 정직하게 반성하고 이를 책임지는 풍토가 우선되어야 합니다. 지금부터라도 근본적이고 지속적인 구조조정, 국민적 합의에 기초한 국가경쟁력 提高를 착실히 실천함으로써 국내외의 신뢰를 회복해 가며 조금이라도 반짝경기 부양이나 미봉책으로 문제를 덮거나 미루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특히 公的자금 투입이 개별 기업에 대한 특혜성 금융지원의 방식으로 되어버리면 정경유착의 의혹만 키우게 될 것입니다. 앞으로 公的자금의 집행과정은 국민에 의해 투명하게 감시되어야 합니다』

―金大中 정부의 언행이 일치하지 않는 부분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金大中 정부는 도덕정치를 포기하고 정권再창출을 위해 「강한 정부」를 내세우며 黨利黨略으로 나가고 있습니다. 강함이 어디서 나오느냐, 저는 다수의석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하지만, 그것이 도덕적인 힘을 가지고 있느냐, 국민들에게 믿음을 주느냐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金大中 정부는 바른 길을 가고 있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과연 이 정부가 구조조정을 바르게 하고 집단이기주의에 결연하게 대처하여 우리 사회의 난국을 해결해 줄 수 있느냐, 저는 극히 회의적입니다』

―그렇다면 오랜 세월, 민주화를 열망해 온 사람들을 허탈하게 만드는 것 아닙니까.

『金大中 대통령은 민주화세력인데, 그 정부가 민주주의에 대한 배반으로 가버린다면 우리 사회의 미래가 어떻게 될 거냐, 자라나는 청소년들이 가치기준을 잃어버려 정신적 공황상태에 빠지고, 민주화운동이 戱畵化(희화화)하지 않겠는가, 너무나 심각한 걱정거리예요.

金大中 정부에게 하고 싶은 말은 우리처럼 상식적인 사람이 「바르다」고 생각하는 정치를 해달라는 거예요. 정부가 하는 일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정권再창출을 위한 것으로 비쳐서는 곤란합니다. 민심이 정권을 이반하고 있는 것으로 보여지거든요. 저는 정책에 관한 한 한나라당보다 민주당에 가까운 사람입니다』


파란의 삶을 자청한 사람

―제가 오늘 목사님을 만나자고 한 것은 시민운동 내부의 움직임에 관한 것보다 실은 「徐京錫의 인생역정」에 대한 관심 때문이었습니다. 장래가 촉망되던 엔지니어의 길을 포기하고 시민운동가의 험난한 길을 걸어 온 까닭이 궁금했습니다. 목사님의 출신 배경은 무엇입니까.

『저는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목사로서 한국 최초의 교회인 황해도 소래교회와 서울 새문안교회를 세운 분이 바로 저의 증조부 徐景祖(서경조) 목사님입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새문안교회의 장로였습니다. 아버지는 해군제독을 거쳐 국영기업체의 사장을 지내셨습니다. 서울고등학교 3학년 때는 전교 수석을 차지할 만큼 모범생이었습니다. 그런 제가 대학에 가서 학생운동을 하다가 어느덧 사회혁명가로 살겠다고 결심했습니다. 대학 시절에는 무신론자임을 자처했고 「앞으로 사회주의 혁명의 소총수가 되겠다」고 자임했습니다. 얼치기 사회주의자가 되었던 것이죠』

서울대 공대 기계학과 4학년 재학중 새문안교회에서 전태일(분신자살한 평화시장 노동자) 추모데모 주동. 대학 졸업 후 해군 장교(중위)로 복무중 제대를 3개월 앞두고 민청학련사건을 배후에서 조종한 혐의로 검거되어 20년 형을 언도받고 11개월 간 감옥살이를 하다가 2등병으로 강등되어 출감.

장로회 신학대학에 진학하여 1년 수료 후 미국에 유학을 가서 목사가 되어 6년 만에 귀국. 基社硏(기사연·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의 원장직을 맡았으나 운동권 후배들로부터 「개량주의자」로 매도당해 쫓겨남. 운동권에서 축출된 지 3개월 만에 한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시민운동단체 경실련(경제정의실천운동연합) 창설.

현직은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 집행위원장과 한국시민단체협의회 사무총장이며 서울조선족교회 담임목사. 이렇게 徐京錫 목사는 파란만장한 삶을 자청해온 사람이다.


미국에 가서 북한의 실상을 알게 돼

민청학련사건으로 감옥살이를 하고 난 후 그는 한국기독학생총연맹(KSCF) 간사, 한국교회사회선교협의회 총무로서 운동권의 핵심부에 서 있었다. 그는 YH 여공들이 신민당 당사에서 농성투쟁을 하도록 교사한 혐의로 투옥되었다.

―왜 하필이면 야당 당사에 들어가 농성하도록 했습니까.

『당시에는 노동자들이 농성을 해도 신문에 기사 한 줄 나지 않던 시대여서 여론을 불러일으키려면 어찌 되었건 보도가 돼야 한다고 생각했고, 이를 위해서는 정치권과 접목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文東煥(문동환) 목사님 등이 상도동에서 金泳三(김영삼) 총재를 만나 新民黨(신민당) 당사를 농성장소로 삼는 데 대해 미리 허락을 얻었습니다』

10·26 사태가 일어난 그해(1979년) 12월12일 재판에서 그는 사상 전례가 없는 10만원의 보석금을 내고 가석방되었다. 그리고 1980년 불안한 「서울의 봄」이 왔다. 4월15일 그는 동일방직 해고 노동자들과 복직을 위한 가두 캠페인을 벌이다가 계엄법 위반으로 구속되었다. 그로선 세 번째의 옥살이였다.

―출옥 후 신학대학에 진학하게 된 동기는 무엇입니까.

『인권운동을 하는 목사, 십자가를 앞세우고 正義를 위해 자신을 바치는 목사가 되고 싶었습니다』

광나루에 있는 장로교 신학대학에서 1학년을 수료한 그는 미국 프린스턴 신학교로 유학했고, 이어 유니언 신학교에 들어가 윤리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1985년에는 미국장로교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고 뉴욕에서 한국민주화운동에 종사했다.

『5년여의 기간 동안 나는 오히려 복음주의 신앙을 되찾는 소중한 경험을 했습니다. 신학적인 측면 이외에 이념적인 측면에서도 큰 변화를 겪었습니다』

―그럴 만한 계기가 있었습니까.

『미국의 신학교에서 공부할 때 은사들로부터 민중신학에 빠진 제가 「학생의 견해는 좁다」는 지적을 받고 느낀 바가 많았습니다. 가장 진보적인 신학교에서 거꾸로 복음주의신앙으로 되돌아오는 경험을 하게 된 것입니다. 더욱이 제가 미국에 갔던 1982년은 美洲동포들이 북한방문을 서서히 시작할 무렵이었습니다.

그때부터 5~6년간 많은 美洲동포들이 북한을 방문했습니다. 그들 가운데 5~6일 머물면서 북한이 보여 주는 부분만 보고 돌아온 사람도 있었고, 한 달 이상 머물면서 북한 사회의 실상을 보고 느끼고 온 사람도 있었습니다. 북한에서 보여 준 부분만 보고 온 사람은 북한에 대해 감동에 가까운 좋은 인상을 갖고 있던 반면 북한에 깊숙이 들어갔다 돌아온 사람들은 북한에 대해 아주 냉소적인 모습을 보입디다.

그러는 과정에서 북한이 지상낙원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북한 경제가 심각한 위기에 빠져 있을 뿐만 아니라 인권문제가 심각해서 일체의 개인의 자유, 언론의 자유, 거주이전의 자유가 없고 金日成 유일사상이 사회 전체를 이끌고 가는 그런 사회라는 것을 분명히 알게 되었습니다』


『소신 있는 개량주의자로 살겠다』

1988년 1월, 만 40세의 나이로 귀국한 그는 운동권 논리를 개발하던 基社硏 원장서리를 맡게 되었다. 귀국 도중 東京에서 만난 한 후배로부터 『한국에 가거든 「내가 아는 게 뭐 있나. 니들한테 배워야지」라고 말하고 절대로 나서지 마십시오. 특히 「사회주의 혁명은 안 된다」는 말은 절대로 입에 담지 마십시오』라는 충고를 들었다고 한다.

당시 기독교운동의 상황은 어른들도 젊은 실무자들의 눈치를 보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었다. 운동권은 主思派(주사파)에 의해 장악되어 있었다. 主思派들이 낸 문건 가운데는 북한 방송을 그대로 녹취해서 만든 것이 많았다.

―基社硏 원장직을 왜 1년도 채우지 못하고 그만두셨습니까.

『연구단체의 원장이라면 지식인 집단의 책임적인 자리인데 내가 실무자들의 비판이 두려워 눈치나 보고 침묵만 할 수 없더군요. 그러다가 쫓겨난 것입니다』

―이유는 무엇입니까.

『민족민중운동에 제대로 복무하지 못했다는 겁니다. 와서 보니까 「美 제국주의자의 가슴에 비수를 꽂아라」 든가 「미제의 각을 떠라」라는 구호가 나돕디다. 목사가 돼 가지고 제가 어떻게 각을 뜨는 행동을 함께 할 수 있었겠습니까. 도저히 안 되겠습디다. 나는 미국에서 목사가 되어 한국에 돌아왔고 「원수를 사랑하라」는 성경 말씀을 갖고 설교를 하면서 내가 사람의 각을 뜨는 운동을 한다는 게 말이 될 법한 일인가, 그러고서 어떻게 사람들 앞에서 설교를 할 수 있는가 어떻게 하면 성경의 말씀을 실천하면서 동시에 운동권이 될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이 저의 머릿속에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때 머릿속에 떠오른 성경 구절이 「惡에 지지 말고 善으로 惡을 이겨라」였습니다』

―이길 자신이 있었습니까.

『확신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증오에 기초해서 운동을 하는 일은 절대로 할 수 없었습니다. 이것은 제가 목사로서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저의 정체성에 관한 문제였습니다. 이런 생각을 실천하다가 실패하는 한이 있더라도 더 이상 운동권의 꽁무니를 따라다니지 않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지역구도 정치의 타파에 실패

1989년 5월 基社硏 원장을 그만 두던 날 그는 基社硏 이사장 박형규 목사를 찾아가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基社硏의 젊은 간사들이 나더러 원장 자격이 없다고 하는데, 앞으로 제가 정말 그런 사람인지 스스로 검증해보겠습니다. 저는 밑바닥으로 내려가서 다시 운동을 시작하겠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도 리더십이 없다는 평가를 받으면 나는 영원히 운동을 포기하겠습니다. 하지만 이번에 새로 시작할 때에는 소신 있는 개량주의자로 살겠습니다』

基社硏에서 쫓겨난 지 3개월 만에 그는 경실련을 창설하고 그 사무총장이 되었다. 그는 「합법운동, 합리적 대안 모색, 국민적 공감대에 기초한 시민운동」을 제창하면서 「목표뿐만 아니라 방법까지 선한 운동」을 천명했다. 경제정의 실현을 위한 경실련 운동은 국내뿐만 아니라 全세계적으로 시민단체운동의 모델로 부각되었다.

그는 경실련 운동이 사회적 영향력이 절정기에 달했던 1995년 2월, 경실련 사무총장직에서 스스로 물러났다. 사퇴의 변은 『경실련이 곧 서경석이고, 서경석이 경실련이라는 인식이 경실련 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후 그는 金大中씨가 깨고 나간 민주당에 들어가 「지역구도 정치의 타파」에 앞장섰다가 실패하고 9개월 만에 다시 시민운동 현장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오늘의 시민운동은 「개혁을 밀어붙이기 위한 강한 연대」를 주장하는 그룹과 「다양성을 존중하는 연대」를 주장하는 그룹으로 양분된 모습이다.

이 인터뷰는 2월9일과 11일 양일의 낮과 밤에 걸쳐 서울 제기동 한국시민단체협의회 사무실과 구로동 서울조선족교회에서 이뤄졌다. 이처럼 그는 매우 바쁜 사람이다.

―한 달 수입은 얼마나 됩니까.

『한국시민단협의회에서 130만원의 월급을 가져가고 교회에서 30만원의 활동비를 받습니다. 원고료·강연료 수입도 있어 월 몇 백만원은 됩니다』

―자녀들은 학교에 다닙니까.

『딸은 대학을 졸업했고, 아들은 다니고 있습니다』

―시간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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