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조선 기사

서울 역사 地圖

우리곁에 살아 있는 역사의 맥박과 숨결

글 정순태 기자  2010-0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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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百濟의 都城

漢城 백제의 핵심부 夢村土城

서울 송파구 올림픽공원의 심장은 夢村土城(몽촌토성:꿈마을토성)이다. 몽촌토성에 가면 2000년 역사의 地層(지층)과 만날 수 있다. 이곳은 漢城百濟(한성백제)의 都城(도성) 혹은 핵심적인 關防(관방)이었으며, 그후엔 한반도 최강의 지배세력이 번갈아가며 차지했던 전략적 요충이었다. 몽촌토성의 능선에 오르면 어느덧 우리 역사와 오늘을 사는 사람의 혈맥이 하나로 이어지는 듯한 감동을 느낄 수 있다.

漢江(한강)의 지류 城內川(성내천)이 휘감고 돌아가는 몽촌토성은 그리 높지 않다. 제일 높은 곳이라고 해봐야 해발 45m다. 그런데도 여기선 서울을 남북으로 가르는 한강, 그리고 한강 南岸(남안)에 버티고 있는 風納土城(풍납토성:바람들이토성)이 고함치면 들릴 만큼 가깝다.

몽촌토성의 남쪽으로는 南漢山城(남한산성)이 우뚝 솟아 있다. 우리 古代의 남한산성은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의 뒤를 받쳐 주는 漢城 최후의 보루였다. 조선왕조 시대에도 그러했다. 1636년 12월, 丙子胡亂(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남한산성에서 淸軍(청군)을 막으려고 都城 서울을 빠져나온 仁祖(인조)는 몽촌토성에 잠시 들러 아픈 다리를 쉬어 갔다.

百濟(백제)의 도읍지라고 하면 흔히 公州(공주)나 扶餘(부여)를 연상한다. 하지만 백제가 제일 오랫동안 도읍한 곳은 지금의 서울 지역이다. 백제시대 678년의 全기간 중 漢城백제가 490여 년, 熊津(웅진:공주)백제가 50여 년, 泗(사비:부여)백제가 130여 년 동안 존속했다. 송파구에는 백제시대의 고분들이 널리 분포되어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이 石村洞(석촌동)의 초기 백제 고분군이다. 이곳 積石塚(적석총)은 만주 輯安(즙안:고구려 古都)에 있는 장군총과 쌍둥이처럼 비슷하지만 바닥면적은 더 크다.

三國史記(삼국사기)를 보면 고구려 시조 東明王(동명왕)의 아들 沸流(비류), 溫祚(온조) 형제는 王位계승 경쟁에서 밀려나 여러 사람들을 데리고 남행, 漢山(한산)의 負兒嶽(부아악:지금의 북한산)에 올라 새로운 터전을 물색했다. 여기서 형 비류는 彌鄒忽(미추홀:지금의 인천)로 가고, 아우 온조는 慰禮城(위례성)에 도읍하여 백제를 건설했다. 위례성이란 나무울타리를 치고 흙을 쌓아 만든 성읍이란 뜻이다. 기원전 18년의 일이었다. 위에서 나오는 한산, 부아악, 위례성 등은 서울의 강북지역이다.

삼국사기에는 또 온조왕 13년(BC 6)에 왕이 漢水(한수) 남쪽을 순시하고, 그곳이 도읍할 만한 곳이라고 하면서 漢山 아래 목책을 설치하고 위례성의 백성들을 옮긴 다음 궁궐을 짓고, 이듬해 천도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漢水는 지금의 한강, 漢山은 지금의 남한산을 말한다. 이 대목에서 백제의 수도가 한강의 북쪽인 三角山(삼각산) 아래 위례성에서 한강의 남쪽 南漢山(남한산) 자락으로 옮겼던 것을 알 수 있다.

백제의 전성시대는 近肖古王(근초고왕:346~375) 때였다. 근초고왕 代의 백제는 평양을 공격하여 고구려의 故國原王(고국원왕)을 敗死(패사)시켰다. 그러나 고구려의 전성기를 연 廣開土王(광개토왕:391~413)은 대세를 역전시켜 백제의 아신왕 스스로가 「奴僕(노복)」을 자처할 만큼 백제를 굴복시켰다. 고구려의 남진정책은 광개토왕의 아들 長壽王(장수왕:413~491) 때 본격화되었다.

백제 21대 蓋鹵王(개로왕)은 중국의 北魏(북위)와 동맹, 고구려의 남진을 막으려 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長壽王은 간첩인 중 道林(도림)을 밀파하여 蓋鹵王을 유흥에 빠지도록 유도했다. 놀기 좋아했던 개로왕은 바둑 고수인 도림과 바둑에 몰입하고, 도림의 건의에 따라 王宮 수축 등 대규모 토목사업에 國力을 집중시켰다.


개로왕이 참수된 워커힐호텔 뒷산

드디어 장수왕 63년(475), 고구려는 3만명의 군사로 백제를 침공하여 漢城을 포위했다. 개로왕은 守城戰(수성전)을 벌이는 한편 왕자 文周(문주)를 신라에 급파하여 지원군을 요청토록 했다. 그러나 고구려軍은 바람을 이용하여 성문을 불태우면서 공격했다. 도성 內 군민들은 동요하여 속속 고구려軍에 투항했다.

대세가 기우는 가운데 개로왕은 수십 기를 거느리고 도성을 탈출하다가 고구려軍에 생포되어 지금의 광진구 워커힐호텔 뒤 阿且山城(아차산성)으로 끌려가 살해되었다. 왕자 文周가 신라 원군 1만명과 함께 漢城에 이르렀을 때는 이미 도성은 고구려軍의 수중에 떨어져 있었다. 왕자 文周는 남쪽으로 내려가 웅진을 새 도읍으로 정함으로써 漢城백제 시대는 막을 내렸다.

고구려軍에게 함락된 위례성의 정확한 위치는 불확실하다. 漢城백제의 都城에 관해서는 강동구 風納土城, 송파구 夢村土城, 南漢山城(남한산성), 二聖山城(이성산성:하남시 春宮洞) 등 네 가지 설이 팽팽히 맞서고 있다. 어떻든 위의 네 곳이 서로 인접해 있어 漢城백제의 수도권을 이루는 핵심부인 것만은 확실하다.


2. 고구려·신라 시대의 서울

북한산 碑峰에 진흥왕의 巡狩碑

문주왕의 남천으로 서울 지역은 고구려의 통치권역에 들어가게 되었다. 고구려는 이곳에 北漢山郡(북한산군)을 설치하고, 南平壤(남평양)이라고 했다. 고구려는 서울지역을 백제, 신라를 제압하는 거점으로 삼은 것이다.

이런 고구려의 南進정책에 대해 백제와 신라는 공동전선을 폈다. 드디어 551년, 신라 眞興王(진흥왕)과 백제 聖王(성왕)은 연합작전으로 지금의 서울지역에서 고구려軍을 몰아냈다. 신라는 한강 상류지역을 차지했고, 백제는 한강 하류의 옛땅을 회복했다. 그러나 신라는 553년 백제의 한강 하류지역까지 횡탈해 버렸다. 백제가 가야·왜와 연합하여 對신라 복수전을 벌였다. 그러나 554년, 聖王은 불운하게도 지금의 대전 지역에서 신라군의 매복작전에 의해 포로로 잡혀 참수되고 말았다.

진흥왕 29년(568)에는 왕이 북한산에 올라 강역을 정하고 巡狩碑(순수비)를 세웠다. 거기가 바로 북한산 碑峰(비봉)의 頂上(1972년 경복궁 회랑으로 이전)이다. 이로부터 서울지역은 신라의 북방 전진기지가 되었다. 이런 사실로 미루어 보면 서울을 차지하는 사람이 한반도의 最强(최강)이었다.

그후 고구려는 다시 이 지역을 탈환하기 위해 여러 차례에 걸쳐 북한산성 등에 대한 공격을 시도했지만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평강공주의 남편으로 고구려의 명장이었던 溫達(온달)이 신라에게 빼앗긴 한강 유역을 탈환하기 위해 출정했다가 아차산성(워커힐호텔 뒷산) 싸움에서 신라군의 화살을 맞아 전사한 것은 591년의 일이었다.

신라의 文武王(문무왕)은 백제, 고구려 멸망에 이은 對唐 8년전쟁 때 남한산에 晝長城(주장성)을 쌓아 唐軍의 남하에 대처했다. 통일신라 이후 이 지역은 漢陽郡(한양군)이 되었다. 한양군은 신라 9주 중의 하나인 漢州(한주:廣州) 소속으로서 지금의 양주와 고양을 領縣(영현)으로 삼았다.

신라 말기 孝恭王(효공왕) 2년(898)에는 후고구려의 弓裔(궁예)가 漢州 관내 30여 성을 공략함에 따라 서울지역은 궁예에게 돌아갔다. 918년, 王建(왕건)이 궁예를 타도하고 高麗(고려)왕조를 창건함과 동시에 고려의 남방 전진기지가 되었다.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함과 함께 지명이 楊州(양주)로 바뀌었다.


3. 고려시대의 南京

고려시대의 南京은 三角山 아래

고려 11대 文宗(문종) 때 楊州知州事(양주지주사)가 南京留守官(남경유수관)으로 승격되면서 지금의 서울지방은 다시 주목을 받게 되었다. 즉 文宗 21년(1067)의 南京 설치는 고려 太祖 때 평양에 설치한 西京, 成宗 6년(987)에 경주에 설치한 東京에 이어 세 번째의 副都(부도)가 된 것이다.

文宗이 南京을 설치한 것은 개국 후 160년에 삼각산을 帝京(제경)으로 삼으면 9년 만에 四海(사해)가 조공해 온다는 道詵(도선)의 「三角山明堂記(삼각산명당기)」를 중시했기 때문이다. 고려왕조는 앞서 평양과 경주를 이미 西京과 東京으로 승격했던 만큼 백제의 古都 한양을 南京으로 삼은 것은 민심 수습 차원에서도 유리했다. 고려가 삼국의 전통을 함께 계승하겠다는 국책을 세웠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30여 년이 지난 肅宗(숙종) 6년(1101)에는 다시 南京개창도감이라는 임시관서를 설치하고, 남경의 건설공역을 크게 일으켰다. 이에 앞서 숙종 4년 9월, 왕은 宰臣(재신)과 日官(일관:天文·曆書 담당관) 등과 南京 건설을 논의하고 이어 왕비와 원자, 여러 신하를 데리고 삼각산 밑으로 친행하여 새 도읍지의 터를 둘러보았다. 숙종 7년 봄에는 中書門下(중서문하)의 주청에 의해 도시구역을 동쪽은 낙산, 남쪽은 沙平渡(사평도:용산), 서쪽은 안현(길마재), 북쪽은 북악으로 구획했다.

대규모적인 건설공역은 약 3년에 걸쳐 진행되었다. 숙종 9년 8월, 왕은 大臣과 內官을 대동하고 南京으로 거둥하여 佛事 등의 행사를 거행하고 開京(개경:개성)으로 돌아갔다. 우선은 巡周(순주)의 도읍지로 예정한 것으로 보인다.

숙종이 재위 10년 만에 승하한 후 예종과 인종도 수시로 南京에 행차하여 延興殿(연흥전)에서 신하들의 조회를 받으며 연회·佛事를 베푼 기록이 高麗史(고려사)에 보인다. 그러나 인종 6년(1128)에 南京에 화재가 일어나고 이듬해 西京에 大和宮(대화궁)을 크게 지으면서부터 南京의 존재는 전과 같지 못했다. 忠烈王(충렬왕) 때에 이르러서는 南京유수관이 한양부로 격하되고 그후 50년간 별다른 변동이 없었다.

그러다 恭愍王(공민왕:1352~1374) 때부터 천도문제가 다시 대두하여 漢陽이 그 후보지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대륙방면에서 몽골족 元(원)과 한족 明(명)의 세력이 쟁패전을 벌이고 왜구의 침략이 심해지던 무렵이었다.

공민왕 5년, 왕은 元의 내정간섭 기구인 征東行中書省理問所(정동행중서성이문소)를 혁파하고, 99년간 元에 빼앗겼던 雙城(쌍성:함남 영흥) 등의 땅을 수복했다. 또 압록강 건너 요동 8站(참)을 공격하여 婆沙部(파사부) 등 3참을 점령하고 元의 연호 至正(지정)의 사용을 금지했다. 이와 아울러 判書雲觀事(판서운관사:天文·易書 담당 관청의 책임자) 등을 南京에 보내어 도읍지를 살피도록 했다. 이에 백성들이 다투어 남쪽으로 피난하는 등 민심이 동요했다.

공민왕은 왕궁을 수축했지만, 천도를 단행하지는 못했다. 다만 공민왕 5년과 6년에 한양, 한양윤의 칭호가 南京, 남경유수로 다시 격상되었다.


우왕 때 일시 천도

남경 천도를 시행한 것은 공민왕을 후계한 禑王(우왕)이었다. 홍건적·왜구의 잇따른 침입으로 나라가 어지럽게 되자, 개경에 정도한 지 오래되어 땅기운이 쇠했기 때문이라는 주장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우왕 8년 9월, 왕은 궁녀들에게 옷감 5000필을 주어 행장을 차리게 하고 시중(수상) 李子松(이자송)에게 개경을 지키게 한 다음 개경을 떠나 한양으로 옮겼다.

그런데 이때의 천도는 그 해 8월에 결정하고 9월에 시행했던 만큼 준비가 부족했다. 관청이나 관원들의 주거가 모두 천막이 아니면 징발된 민가였다. 그해 겨울을 지나는 동안 고난과 민폐가 적지 않았다. 게다가 종묘 사직과 여러 관청이 대개 개경에 그대로 남아 있었기 때문에 이듬해 2월에는 다시 개경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그후에도 한양을 중시하고 또 천도 후보지로 생각함에는 변함이 없었다. 우왕 13년 겨울에는 한양산성의 수축을 의논하면서 문하평리(종2품) 禹仁烈(우인열) 등을 한양부로 보내 북한산성의 형세를 살피도록 했다. 이듬해 봄에는 시중 崔瑩(최영)과 함께 요동 정벌을 도모하면서 개경의 坊里軍(방리군:지방군)을 동원하여 한양의 重興山城(중흥산성:북한산성)을 쌓게 했다. 이는 대륙방면의 정세가 예측을 불허하는 당시의 상황에서 한양을 제2의 방어거점으로 삼으려는 데에도 그 목적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恭讓王(공양왕) 2년(1390)에도 한양 천도가 시도되었다. 천도의 이유는 개경이 임금을 쫓아내는 땅이라는 도참설 때문이었다. 개경에서 禑王과 昌王(창왕)이 차례로 폐위를 당했던 것이 공양왕의 마음에 걸렸던 것이다. 유약했던 공양왕이었지만, 천도에 대해서만은 강경했다.

공양왕 때의 천도는 다른 어느 임금 때보다 격식을 차렸다. 각 관서를 나누어서 일부는 개경에 두고 일부는 新都 한양에 설치했다. 그러나 新都로 옮긴 반년 만에 官署(관서)가 양분되어 행정의 체계가 서지 않고 관민들의 불평이 적지 않았다. 吉地(길지)라고 하는 한양에서 큰 호랑이가 門下府(문하부:정무를 관장하던 최고의 관청) 관아에 뛰어들어 사람을 물어가기까지 했다. 공양왕 3년 2월, 조정은 다시 舊都(구도) 개경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4. 조선 초기의 都城 건설

白岳 남쪽에 都城 건설

위화도 회군으로 대권을 장악한 李成桂(이성계)가 조선왕조를 세운 것은 공양왕 4년(1392) 7월17일이었다. 개경 壽昌宮(수창궁)에서 즉위한 조선 태조는 진작부터 도읍을 한양으로 옮기려 했다. 태조가 개경을 떠나려 했던 이유는 고려조 후반기 이후 개경의 地氣(지기)가 쇠했다는 설이 끊임없이 제기되어 온 데다 그에 의해 고려왕조의 신하들이 많은 피를 흘렸던 만큼 그 본거지 개경에서 민심을 잡기가 그리 수월하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새 도읍지로는 한양 이외에 鷄龍山(계룡산) 아래도 후보지로 떠올랐다. 태조는 2년 2월 政堂文學(정당문학:문하부의 정2품) 權仲和(권중화)의 계룡산 吉地說(길지설)에 따라 일시 계룡산을 답사하고 新都의 건설계획을 진행시켰다. 그러나 그곳이 지리적으로 남쪽에 치우치고 또 풍수학적으로도 불길하다는 河崙(하륜)의 주장에 의해 폐기되었다. 이듬해에는 白岳(백악) 남쪽, 지금의 서울 성곽 안을 중심으로 하는 새 도읍지를 정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런 풍수설이 한양 定都의 결정적 이유는 아니었다. 한양과 계룡산이 도읍의 후보지로 경합했을 때 태조는 『漕運(조운)이 통하지 않는다면 어찌 도회지라고 할 수 있는가』라면서 조운에 대한 적극적인 관심을 보인 바 있었다. 실로 한양은 조운의 적격지였다. 한반도의 중앙을 관통하는 한강변에 위치하고 있어 수로와 해로의 이용이 수월하고, 또한 옛 고려의 漕倉(조창)들을 관리하기에도 편리한 곳이었다.

근대화 이전의 우리 사회에 있어서 육상교통은 그리 발달하지 못했다. 우리나라는 산과 하천이 많을 뿐만 아니라 이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도 제한적이었다. 비록 전국 각지에 도로가 개설되어 있다고 해도 그것은 驛路(역로)와 擺撥路(파발로) 중심이었고, 화물의 운송은 수로를 통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실제로 定都에 있어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한 鄭道傳(정도전), 河崙, 成石璘(성석린) 등의 언행을 보면 모두 조운을 가장 중요한 입지조건으로 내세우고 있다.

태조는 3년 9월부터 新都궁궐조성도감을 설치하여 건설계획을 진행하는 한편 10월에는 한양천도를 단행했다.

뒤이어 종묘, 궁궐, 관아, 성곽 등의 시설을 갖추어 나갔다. 이때 왕궁을 어느 방향으로 앉힐 것이냐를 놓고 王師 無學(무학)과 태조 제1의 참모 鄭道傳의 견해가 팽팽하게 맞섰다. 無學은 인왕산을 主山으로, 북악을 좌청룡, 남산을 우백호로 삼으려고 했다. 이에 정도전은 예로부터 제왕은 南面(남면)하고 나라를 다스리는 것이 법도이기에 인왕산을 주산으로 삼으면 궁궐을 남향으로 앉힐 수 없다고 반대하며 북악 主山說을 주장했다. 향후 서울의 발전 방향을 결정하게 되는 이 중요한 논쟁에서 정도전이 승리했다.


景福宮과 四大門

1395년 9월, 390여 칸의 새 궁궐 건물이 완성되었다. 궁궐과 종묘가 완공되자 같은 해 윤 9월, 왕과 정부기구가 객사 건물에서 새 궁궐로 옮겨왔다. 자축 연회에서 태조는 새 궁궐 여러 전각들의 이름을 짓도록 정도전에게 명했다.

정도전은 10월7일, 詩經(시경) 대아편의 「술을 마셔서 취하고 많은 은덕으로 배부르니, 군자께서는 만년토록 큰 복(景福)을 누리소서」라는 구절을 인용, 새 궁궐의 이름을 「景福(경복)」으로 하기를 청했다. 그리고 正殿(정전)을 勤政殿(근정전)이라 하여 정사에 부지런할 것을 강조했다. 정무를 보는 전각은 思政殿(사정전)이라 하여 정치행위에 있어 먼저 사색해야 함을 거듭 강조했다.

정도전은 직접 백악, 인왕산, 남산, 낙산에 올라 都城을 쌓을 자리를 실측했다. 이어 1396년 1월9일부터 2월28일까지 49일 간에 걸쳐 도성을 쌓았다. 이어 그해 가을 농한기를 이용하여 역시 49일간 2차 공사를 일으켰다. 이렇게 都城 축조공사가 진행되면서 4대문과 4소문을 만들었는데, 그 이름 역시 정도전이 지었다.

정북은 肅靖門(숙정문), 동북은 弘化門(홍화문:속칭 동소문), 正東은 興仁門(흥인문:속칭 동대문), 동남은 光熙門(광희문:속칭 水口門), 正南은 崇禮門(숭례문:속칭 남대문), 서남은 昭德門(소덕문:속칭 서소문), 正西는 敦義門(돈의문:속칭 서대문), 서북은 彰義門(창의문)이라고 했다. 이렇듯 도성의 문에 유교국가의 정치이데올로기로 표방되는 仁義禮智(인의예지)의 4大 덕목을 상징적으로 표현, 정치철학과 건축물을 대등하게 결부시켰다.

이듬해 4월, 한성부 5部의 방명표를 세우게 했다. 이에 정도전은 동부 12방, 남부 11방, 북부 10방, 중부 8방의 구획을 정하고, 그 이름을 지었다. 도성 안의 주요 도로 건설계획도 이렇게 행정구역이 분할되는 과정에서 三司使(삼사사) 정도전, 판문하부사 權仲和에 의해 수립된 것으로 보인다.


李芳遠의 通仁洞집이 王子의 亂 진원지

새 도읍의 건설을 주도한 정도전은 태조 7년(1398) 4월26일, 6언절구의 新都八景詩(신도팔경시)를 지어 완성된 도읍의 모습을 찬양했다. 開國(개국) 제1의 공신으로서 조선왕조가 대대로 복록을 누릴 것을 빌었지만, 그 자신은 곧 제1차 왕자의 난으로 제거되는 비운을 맞게 된다.

서울이 새 수도로서 정치적·사회적으로 안정되어 가던 무렵에 제1차 왕자의 난이라 불리는 왕실과 정권 내부의 일대 변란이 일어났다.

태조 7년(1398) 8월에 신의왕후 韓씨(조선왕조 개국 1년 전 별세)의 소생인 정안군 李芳遠(이방원)이 세자책봉과 私兵(사병) 혁파에 불만을 품고 安山군수 李叔蕃(이숙번)과 私兵을 동원하여 정도전을 제거한 사건이었다. 세자 芳碩(방석)과 왕자 芳蕃(방번:방석의 同腹형)은 귀양가는 도중에 죽음을 당했다.

태조는 繼妃(계비) 신덕왕후 康씨 소생인 여덟째 아들 방석을 세자로 세우고 정도전에게 보좌의 대임을 맡겼다. 정도전은 당시 군권과 정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이에 조선왕조 창업에 공이 많은 다섯째 아들 방원이 불만을 품고 쿠데타를 감행했다. 때마침 태조는 와병 중이었다.

당시 방원의 집은 俊秀坊(준수방), 경복궁의 서문인 迎秋門(영추문)과 가까운 지금의 종로구 통인동 137번지 코코노래방 자리에 있었다. 이곳은 바로 한 해 전(태조 6년) 4월, 뒷날에 세종대왕이 되는 방원의 셋째 아들 忠寧君(충녕군)이 태어난 潛邸(잠저)이기도 하다. 방원은 세력이 약했던 만큼 선수를 쳤다. 경복궁 남문에 쿠데타軍을 배치하고 즉각 정도전을 습격했다.


鄭道傳 피살된 곳은 한국일보 건너편

정도전은 현재의 수송동 146번지 종로구청 자리에서 살았다. 그곳을 百子千孫(백자천손)의 명당이라 하여 壽進坊(수진방)이라 명명했다. 그 시각에 정도전은 자택에서 가까운 소실 집에서 개국공신 南誾(남은), 세자 방석의 장인 沈孝生(심효생)과 환담을 하던 중 불의의 일격을 받고 함께 죽음을 당했다. 정도전의 小家(소가)가 있었던 곳은 지금 한국일보 건너편 미국대사관 직원 사택이 모여 있는 종로구 송현동 49번지이다.

정권을 장악한 방원은 정도전이 얼마나 미웠던지 그의 수진방 집을 몰수하여 궁중의 말을 먹이는 司僕寺(사복시)가 사용하도록 했다. 이 자리는 일제 때 수송국민학교가 들어섰다가 폐교되고, 현재 종로구청과 종로소방서가 들어서 있다.

왕자의 난이 일어나자 新都 한성에는 불안하고 황량한 기운이 감돌았다. 태조는 둘째아들 芳果(방과:定宗)에게 양위했다. 천도 후 1년 만에 사랑하는 신덕왕후 康씨가 병사하고, 康씨 소생의 아들 방번과 방석까지 잃은 태조는 한동안 불덩이 같은 것이 목구멍을 막아 말을 할 수 없는 병을 앓았다. 정종도 피비린내 나는 한성이 싫었다. 정종 원년에 왕은 생모 신의왕후 韓씨의 능에 참배한다는 구실로 개경에 갔다가 그곳 수창궁에 눌러앉아 버렸다.

그해 3월, 太上王(태상왕)의 신분으로 서울을 떠날 때 이성계는 회한의 눈물을 흘렸다. 신덕왕후의 貞陵(정릉:지금의 중구 貞洞 영국대사관 자리) 앞을 지나다가는 좀처럼 발길을 떼지 못하면서 『처음 한양으로 옮긴 것은 내 뜻만이 아니고 國人들과 의논한 것』이라고 한탄했다. 또 개경으로 간 다음에는 『내가 한양에 천도하여 왕비와 아들을 여의고, 지금 다시 천도하니 정말 都人들에게 부끄럽다』고 자괴했다. 특히 개경에서 시중 尹桓(윤환)의 옛집을 임시거소로 삼아 입주할 때 아직 날이 밝지 않은 새벽 시간을 택했다는 것은 당시 태조의 심경을 잘 나타내 주는 일화이다.

정종은 개경을 아예 수도로 삼을 방침이었다. 왕은 『지금 과인이 舊京에 있는데, 종묘는 新都에 있으니 참으로 미안한 일이다. 종묘를 옮겨 모시고 친히 제사를 받들려고 하는데 어떠하냐』고 신하들의 의견을 물었다. 新都 한양에 세운 종묘를 다시 개경으로 옮기겠다는 의견이었다.

그러던 정종 2년, 개경에서 제2차 왕자의 난이 일어났다. 이번에는 同腹(동복) 왕자들 사이인 방원과 넷째형 芳幹(방간)이 각각 私兵을 동원하여 시가전까지 벌였다. 여기서 승리한 방원은 명목상의 임금에 불과했던 정종으로부터 양위를 받으니 그가 바로 太宗(태종)이다.


신촌·연희동의 定都 거부한 太宗

태종은 야심이 많았던 만큼 과단성도 있었다. 그는 왕권을 강화하면서 조선왕조의 기틀을 다져갔다. 당시 개경에 뿌리를 박고 있던 舊臣世家(구신세가)들은 한양 환도에 반대했다.

그러나 태종은 王씨의 500년 터에 새 왕조를 정착시키기 어렵다는 점을 꿰뚫어 보고 있었다. 바로 이 점에서 태종은 父王 태조의 견해와 같았다.

태종은 환도를 반대하는 중론을 천천히 무마하면서 4년(1404) 8월 각 관서의 관원 1인씩을 한양에 보내어 관청의 건물을 수리하고, 9월에는 다시 성산군 李稷(이직) 등을 漢城離宮造成提調(한성이궁조성제조)로 임명하여 한양에 새 궁궐 昌德宮(창덕궁)을 짓게 했다.

그러나 태종의 한양 定都는 우여곡절을 겪었다. 태종의 제1의 책사였던 진산군 河崙이 또다시 도참지리설을 내세워 지금의 신촌과 연희동 일대인 毋岳(무악) 아래에 定都할 것을 청했던 것이다. 하륜은 태조 때부터 무악을 도읍의 적지로 거듭 주장해 온 인물이었다. 태종은 한양으로 오는 길에 무악에 올라가 사방을 두루 살펴보고 여러 신하들의 의견을 물었다. 의견이 분분했다.

태종은 종묘에 참배하고 난 뒤 동전으로 길흉을 점쳐 개경, 무악, 한양 중의 하나를 선택하기로 했다. 그 결과, 한양은 二吉一凶(2길1흉), 개경과 무악은 二凶一吉로 나타났다. 이로써 환도에 반대하거나 무악 定都를 주장하던 신하들의 이견을 완전히 꺾어버렸다.

이렇게 한양을 도읍으로 확정한 다음 태종은 환도를 서둘렀다. 이듬해인 태종 5년 2월, 왕은 다시 한양으로 와서 蓮花坊(연화방:지금의 종로구 원남동)에 있는 영의정부사 趙浚(조준)의 집을 時御所(시어소)로 정하고 昌德宮(창덕궁:東闕) 공역 등을 독려했다. 각 관서에서도 모두 漢城에 分司(분사)를 설치하고 관청·사택 등을 지었다. 태종은 아직 창덕궁이 준공되기도 전인 그해 10월에 한성으로 환도했다. 환도 후 열흘이 지난 10월20일 성대한 환도 겸 창덕궁 入御式(입어식)을 개최함으로써 한양은 도읍지로서의 위치를 확고히 할 수 있었다.


都城 안 3개의 간선도로

정도전이 새 도읍의 설계자라면 태종은 漢城의 인프라를 건설했던 임금이다. 종루를 중심으로 펼쳐진 商街(상가)인 市廛(시전)의 大행랑을 짓고, 廣通橋(광통교:광교) 등 청계천의 남북을 연결하는 다리를 건설했다. 태조 때 쌓은 도성의 성벽 가운데 山地(산지)에 위치한 부분은 토성이었는데, 태종은 이를 모두 石城(석성)으로 개조했다. 시전 가운데 특정상품 전매, 즉 독점 판매의 특권과 國役(국역) 부담의 의무를 갖는 六矣廛(육의전) 제도는 仁祖 이후에 확립된다.

한성의 주요 간선도로가 완성된 시기도 태종 때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惠政橋(혜정교:광화문우체국 동쪽)-창덕궁 입구, 종루-숭례문 등의 간선도로변에 펼쳐진 시전의 大行廊(대행랑)이 태종 12년에 시작되어 14년(1423)에 완공되었기 때문이다.

당시 도성 안에는 세 개의 대로가 있었다. 즉 黃土峴(황토현:지금의 광화문 네거리)에서 경복궁 앞까지 통하는 대로 역시 황토현을 중심으로 해서 東으로 興仁之門(흥인지문:속칭 동대문)까지와 西로는 慶熙宮(경희궁:前 서울고 자리) 앞까지 연결되는 동서관통 대로, 그리고 崇禮門(숭례문:속칭 남대문)에서 廣通橋까지의 대로다. 조선왕조 당시의 도성지도를 보면 광화문-덕수궁- 남대문에 이르는 현재의 간선도로는 없었다.


조선 초기의 숙제…청계천 물난리

한성의 가장 큰 지형적 약점은 남산이 높기 때문에 빗물이 한강으로 잘 빠져나가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큰비만 내리면 開川(개천:지금의 청계천)의 물이 범람하여 다리가 떠내려가고, 이재민이 대량으로 발생했다. 태종은 한성에 환도한 지 3개월 후인 6년 정월에 경운궁(덕수궁), 창덕궁 등 궁궐 건설에 동원된 장정 3000명 중 600명을 한성부에 나누어 開川 굴착공사에 종사시켰다. 이어 9월에도 중앙정부의 관리들로 하여금 科品에 따라 일꾼 수명씩을 出役(출역)하게 하여 개천을 정비했다.

그러나 이는 근본적인 배수시설이 되지 못했다. 태종 7년 5월부터 다시 수해를 입기 시작하여 거의 매년 되풀이되었다. 태종실록에는 「큰비로 도성 안에 물이 넘치고 鐘樓(종루) 以東에서 흥인문까지 사람의 통행이 막혔다」는 등의 기사가 보인다. 태종 10년의 경우 한 해 동안에 5월, 7월, 8월의 세 차례에 걸쳐 큰 홍수 피해를 겪었다.

드디어 태종 12년 1월15일부터 2월15일까지 역군 5만명을 동원하여 대대적인 하천 정비공사를 벌였다. 하상을 파내고 하폭을 넓히는 한편 제방을 쌓았다. 상류부분의 제방은 석축으로 하고, 지금의 종로 3·4가에서부터 水口門(수구문:광희문)까지의 제방은 나무로 쌓았다. 또 大·小광통교, 혜정교 등 중요한 곳의 다리는 종래의 木橋(목교) 또는 土橋를 石橋로 바꾸었다.

이 大역사는 충분한 사전계획과 役軍(역군) 보호를 위한 대비책을 세웠는데도 불구하고 병사자 64명을 냈다. 하지만 1412년에 완공된 이 공사에 의해 590년의 세월이 흐른 오늘날에도 강북의 중심부를 흐르면서 모든 빗물과 下水를 받아내는 청계천의 원형이 만들어진 것이다.

자연하천을 넓고 깊게, 고르게 파서 여간한 비에도 견딜 수 있는 인공하천으로 만드는 일은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그것은 왕조 초기의 숙제였다. 배수시설이 갖추어졌다고 할지라도 지류와 細川(세천)은 아직 자연 그대로의 상태였으며, 성곽 아래 설치한 水口 역시 처음 도성을 쌓을 때 설치한 그대로였다. 따라서 집중호우만 내리면 漢城은 계속 물난리를 겪었다.

그럼에도 태종은 이미 잦은 부역으로 민력이 소진되었다고 판단하고 민심 수습 차원에서 다시 工役을 일으키지 않았다. 태종 같은 강력한 군주도 만세의 기초를 일시에 성취하려는 것은 지나친 욕심이라면서 참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廣橋의 건설에 사용된 신덕왕후 陵石

태종은 도성 안에 있던 神德王后(신덕왕후)의 貞陵을 성 밖으로 이전시키는 등 私感(사감)을 푸는 데도 거침이 없었던 임금이다. 신덕왕후라면 태조의 계비로서 태종에게는 계모다.

신덕왕후 康씨는 고려 말의 명가 출신으로서 변두리 무장 출신인 이성계가 개국을 하는 데 상당한 역할을 했다. 이성계와의 사이에 방번·방석 등 2남과 敬順(경순)공주를 두었는데, 태조 5년(1396) 8월13일에 승하했다. 태조는 신덕왕후 康씨가 세상을 떠나자 궁궐과 가까운 皇華坊(황화방:중구 정동)의 北原(북원:지금의 영국대사관 자리)에 능을 조영했다. 그리고 그 願刹(원찰)로 능 동쪽에 170여 칸의 興天寺(흥천사)를 세워 曹溪宗(조계종)의 본산으로 삼았다.

신덕왕후를 미워한 태종은 왕에 오른 지 3년 만인 1403년 흥천사의 노비와 농지를 삭감하고 陵域(능역) 100보 밖에는 주택을 지을 수 있도록 했다. 이에 하륜 등 유력자들은 시세에 따라 정릉의 숲을 베어내고 다투어 집을 지었다. 태조에게는 피눈물이 나는 일이었다.

1407년 태조 승하 후 정릉을 옮기자는 의견이 나오고, 태종 역시 지난날의 앙금도 있어 다음해인 1408년 2월23일에 성 밖인 지금의 성북구 貞陵洞(정릉동)으로 능을 옮겨버렸다. 한 달 후에는 그 옛 정릉의 정자각을 헐고 목재와 석재는 중국 사신의 숙소인 太平館(태평관)을 짓는 데 썼다. 태평관은 지금의 서소문동 주택은행 서소문로지점 자리에 있었다.

뿐만 아니라 1410년 생모인 神懿王后(신의왕후) 한씨를 태조의 유일한 正妃로 삼아 태조와 함께 그 신위를 宗廟(종묘)에 부묘하면서 신덕왕후를 후궁의 지위로 격하시켰다. 신덕왕후가 복권된 것은 그로부터 200여 년 후인 宣祖(선조) 때의 일이다. 또 그해 廣通橋가 홍수에 무너지자 옛 정릉의 석물 중 일부인 屛風石(병풍석)을 광통교 복구에 사용케 했다. 아무나 밟고 지나다니라는 얘기다. 광통교는 1970년대에 청계천이 복개될 때 지하수로 터널 안으로 들어갔다. 그 위치는 중구 삼각동 조흥은행 본점 바로 밑이다.


梨大 동대문병원 자리엔 野人館

조선왕조 당시에는 4대문과 4소문의 역할이 달랐다. 중국 사신은 돈의문(서대문)을 통해 입성하여 太平館에서 묵게 했다. 여진 사신은 혜화문(동소문)으로 들어와 지금의 이화여대 동대문병원 자리에 있던 北平館(북평관:속칭 野人館)에 머물게 했다. 왜국의 사신은 광희문으로 들어와 지금의 중구 인현동 192번지에 있던 東平館(동평관)에 숙박시켰다. 광희문은 서소문과 함께 도성 안의 시체나 상여가 나가는 저승길이었다.

태조는 1408년 5월24일, 창덕궁 별전에서 74세로 승하했다. 태조는 생전에 계비 신덕왕후 康씨와 황화방의 정릉에 함께 묻히기를 바랐다. 그러나 태종은 父王의 유언을 따르지 않았다. 태조는 지금의 경기도 구리시 健元陵(건원릉)에 묻혀 있다. 건원릉 주변엔 후대 왕과 왕비의 능들이 들어와 58만 평의 대지 위에 東九陵(동구릉)을 이루고 있다.

강력한 중앙집권제를 실시하여 500년 왕업의 기반을 닦았지만, 인간적으로는 아버지의 분노를 사고 형제에게 칼을 들이댄 太宗 이방원. 왕위를 세종에게 물려주고 上王으로 있으면서도 병권만은 장악했던 태종도 세종 4년(1422)에 승하했다. 태종과 그의 비 元敬(원경)왕후가 함께 묻힌 곳이 獻陵(헌릉)이다. 헌릉은 강남구 내곡동 산 13-1번지 대모산 남쪽 기슭에 자리잡고 있다. 지금 이곳을 獻仁陵(헌인릉)이라고 부르는 것은 제23대 임금 純祖(순조)와 순원왕후의 仁陵(인릉)이 그 아래에 조영되었기 때문이다.

태종 때의 開川大役(개천대역)이 있은 지 10년 만인 世宗 3년(1421) 6월7~9일 물을 퍼붓는 듯한 큰비가 계속 내려 많은 익사자를 내었는데, 6월12일에도 큰비가 내려 開川이 범람했다. 세종은 한성의 배수시설을 전면적으로 보완해 나갔다. 태종 때와는 달리 일시에 큰 공역을 일으키지 않고, 세종 4년 1월부터 16년 2월까지 12년간에 걸쳐 농한기만 이용하여 꾸준히 보수·확장을 거듭함으로써 開川의 배수기능을 완비했던 것이다.


새문안·新門路의 유래

세종 23년에는 하천의 水位를 측정하고 단위시간당 雨水量(우수량)을 측정할 수 있는 水標(수표)와 측우기를 書雲觀(서운관)에 설치했다. 기계에 의한 과학적·수량적 강우량 측정법은 세계 최초의 발명이었다. 1958년 청계천이 복개됨에 따라 중구 장충동 장충단공원으로 옮겨져 있는 정교한 水標橋(수표교)도 세종 때 만들어진 돌다리다. 세종은 한글 창제, 6진 개척 등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각 방면에 업적을 남긴 우리 역사상 최고의 군주였다.

도성 축조 당시 서대문은 慶熙宮(경희궁:前 서울고등학교 자리)의 서쪽 담과 거의 맞닿아 있었다. 서대문을 지금의 의주로 네거리 쪽으로 이전한 것은 세종 4년(1422)의 일이었다. 그 후 새로 성 안으로 편입된 지역을 새문안, 그 도로를 新門路(신문로)라고 불렀다.

우리나라는 면적이 넓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크고 작은 산맥이 얽혀 있고, 그 사이로 강이 흘러 교통을 방해하고 있다. 전국의 도로가 집중하는 수도 한성 주위에도 삼각산·인왕산·무악재·관악산·청계산·도봉산 등이 都城 진입을 억제하고 있고, 남쪽에는 한강이 가로 놓여 있어 이를 건너기가 쉽지 않았다. 당시의 토목기술로는 강폭이 넓은 한강에 다리를 놓는다는 것은 불가능했던 만큼 양안에 나루터를 설치하여 사람과 물자를 건네주는 것은 필수적인 일이었다.

조선왕조 초기에 이러한 나루터를 조성하여 한강 양안을 연결하는 사업은 태종과 세종 때 그 골격이 완성되었다. 광나루(廣津), 삼밭나루(三田渡), 서빙고나루(西氷庫津), 노들나루(露梁津), 동자개나루(銅雀津), 삼개나루(麻浦津), 서강나루(西江津), 양화나루(楊花津) 등이 그것들이다. 지금 한강에 걸린 다리들은 모두 조선조 당시의 나루터 양안을 연결한 것이라고 보면 된다.


首陽大君의 쿠데타와 上王복위운동

金宗瑞가 기습당한 집은 지금 농업박물관 자리

세종의 뒤를 이은 文宗(문종)은 재위 2년 만인 39세의 한창 나이에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端宗(단종)은 문종이 죽은 지 6일 만인 1452년 5월18일 경복궁 근정전에서 즉위식을 가졌다. 12세의 단종은 혼례도 치르지 않았고, 그를 낳아준 大妃(대비)도 이미 죽고 없었다. 父王(부왕) 문종이 죽기 전에 어린 아들을 위해 취한 조치라고는 金宗瑞(김종서)·皇甫仁(황보인) 등 원로대신들에게 아들을 부탁하는 정도였다.

단종이 즉위한 이후 문종의 顧命(고명)을 받은 대신들과 종친 사이에 대립이 격화되는 상황에서 이를 중재할 만한 권위를 가진 사람은 없었다. 더욱이 단종의 숙부들인 首陽大君(수양대군)과 安平大君(안평대군)이 권력을 다투었다. 왕위에 오른 지 1년 만인 1453년(단종 원년) 10월10일, 首陽大君이 정권을 장악하기 위해 쿠데타를 일으켰다. 이것이 이른바 癸酉靖難(계유정난)이다.

계유정난은 수양대군이 그의 潛邸(잠저)에서 장사패를 데리고 서대문 밖에 있던 좌의정 金宗瑞의 집을 습격, 집 밖으로 그를 유인한 다음 그의 머리를 불시에 철퇴로 가격함으로써 전개되었다. 수양대군으로서는 智勇(지용)을 겸비한 6鎭 개척의 大虎(대호:별명) 김종서를 먼저 제거해야만 쿠데타가 성공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김종서의 집은 지금의 경향신문 사옥과 농협중앙회 사이에 있는 농업박물관 자리에 있었다. 세조는 이곳을 여행자에게 말을 빌려주는 雇馬廳(고마청)으로 격하시켜 동네이름도 고마동이 되었다.

수양대군의 집은 明禮宮(명례궁)이 되었다. 명례궁은 지금의 중구 명동인 明禮坊(명례방:진고개)에 있었는데, 조선 후기에 지금의 성공회 서울대성당(중구 정동 3번지) 자리로 옮겨졌다.

수양대군은 이어 경복궁으로 달려가 『김종서가 반역을 꾀했으므로 죽였는데, 일이 매우 절박하여 임금께 아뢸 여가가 없었다』라고 상주했다. 그리고 왕명으로 신하들을 경복궁으로 불러들인 뒤 미리 계획했던 대로 영의정 皇甫仁(황보인), 병조판서 趙克寬(조극관), 이조판서 閔伸(민신), 우찬성 李穰(이양) 등 반대파 중신들을 대궐 문 앞에서 죽였다. 이들의 죄명은 안평대군을 추대하여 종사를 위태롭게 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죽은 줄만 알았던 김종서는 다시 깨어났다. 다음날 그는 중상의 몸으로 왕을 만나기 위해 가마에 탄 채 서대문·서소문·남대문을 전전하며 도성 안으로 들어오려 했지만, 끝내 입성을 저지당하고 수양대군의 심복들에 의해 살해되었다. 이로써 수양대군은 왕위에 오를 수 있는 기반을 만들었다. 따라서 계유정난은 靖難(정난:나라의 위난을 평정함)이 아니고 수양대군의 반란이었다.


死六臣이 처형된 곳은 프레스센터 앞

1455년 윤 6월11일, 수양대군은 단종을 上王으로 밀어내고 경복궁 경회루에서 왕위에 올랐다. 그가 조선 제7대 임금 世祖(세조)다. 단종은 퇴위당한 후 창덕궁을 거처로 삼았다가 다시 錦城大君(금성대군:세종의 여섯째 아들)의 집으로 옮겼다. 단종이 上王으로 물러난 지 1년 만인 세조 2년(1456) 6월, 上王복위를 꾀한 사건이 발생했다. 成三問(성삼문), 朴彭年(박팽년) 등이 明의 사신을 환영하는 연회에서 세조를 비롯하여 세자·韓明澮(한명회)·權擥(권람)·申叔舟(신숙주) 등을 죽이고 上王을 추대하려고 모의한 것이었다.

그러나 연회 당일, 세조가 갑자기 창덕궁의 연회장 자리가 좁으니 雲劒(운검)을 그만두라고 명했다. 운검이란 임금이 정좌한 앞에 큰칼을 들고 서는 儀典武官(의전무관)을 말하는 것으로 당시 도총관 成勝(성승:성삼문의 아버지)과 兪應孚(유응부)가 그 역할을 맡기로 되어 있었다. 이에 거사가 차질을 빚자, 모의에 가담한 바 있는 김질이 동지들을 배신, 밀고했다.

사육신 등 관련자들은 지금의 軍器司(군기시:지금의 서울 시청과 프레스센터 자리) 앞에서 모두 잔혹한 車裂刑(거열형·수레로 사지를 찢어서 죽이는 刑罰)에 처해졌다. 성삼문·박팽년의 아내 등은 공신들의 비첩으로 넘겨졌다. 그러나 死六臣(사육신)의 시신들은 지금의 동작구 노량진동 산 344번지 사육신공원 묘소에 묻혀 후인들은 물론 후대의 왕들로부터도 추앙을 받아왔다. 세조에게는 「역적」이었지만, 후대의 왕들에게는 자기 신하들도 본받아야 할 「충신」이었기 때문이다.

성삼문은 지금의 정독도서관(前 경기고 자리) 뒤편 종로구 화동 23-9번지, 박팽년은 화동 105번지에 살았다. 단종은 上王에서 魯山君(노산군)으로 강등되어 영월로 귀양을 갔다. 영월에 유배된 그해에 금성대군이 다시 단종 복위를 도모하다가 발각되었다. 이 여파로 단종은 庶人(서인)으로 강등되어 사약을 받고 죽었다.


압구정동의 유래

세조의 謀士(모사) 한명회는 그의 두 딸을 睿宗(예종)의 妃와 成宗(성종)의 妃로 넣고 벼슬이 영의정에 이르는 등 한평생 영화를 누렸다. 그러면서도 「갈매기를 벗 삼아 유유자적」하게 산 사람이란 말을 듣고 싶어 한강의 東湖(동호)가 내려다보이는 장소에 정자를 짓고 狎鷗亭(압구정)이라는 현판을 붙였다. 오늘의 압구정동이란 이름은 여기서 유래한다. 위치는 지금의 동호대교와 영동대교 사이, 한강의 벼랑과 여울이 돌출된 곳이다.

그러나 死後의 한명회는 갑자사화 때(1504) 연산군의 생모 尹씨가 사약을 먹고 죽은 일에 관계되었다는 죄를 받아 무덤을 파서 관을 쪼개고 시신의 목을 베는 剖棺斬屍(부관참시)를 당했다.

成宗은 조선왕조의 문물제도를 완성시킨 임금이다. 청계천 보수공사, 市廛行廊(시전행랑) 공사, 箭串橋(전관교:한양대 아래 살곶이다리) 등도 성종 때 완공되었다. 成宗代에는 壽康宮(수강궁)을 크게 확장하여 昌慶宮(창경궁)이라고 이름을 고쳤다. 수강궁은 원래 세종이 생존한 상왕인 태종을 위해 지었다. 東國與地勝覽(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효심이 깊은 성종은 貞喜王后(정희왕후:세조의 비), 昭惠王后(소혜왕후:성종의 모후), 安順王后(안순왕후:예종의 비) 등 살아 있는 세 大妃를 편안히 모시기 위해 창경궁에 명정전·문정전·통명전 등을 증축했다.


趙光祖의 집은 校洞초등학교 자리

성종에 이어 등장한 임금이 조선왕조 제1의 폭군인 燕山君(연산군)이다. 그는 戊午士禍(무오사화)와 甲子士禍(갑자사화)를 일으켜 士林派(사림파)를 대량 숙청 학살하고, 언문(한글) 사용을 금하는가 하면 圓覺寺(원각사:지금의 종로2가 탑골공원)를 헐어 기생들의 놀이터로 만들었다. 민생을 수렁텅이로 빠뜨리며 유흥과 음행을 일삼던 연산군은 1506년 中宗反正(중종반정)으로 폐위당하고 강화도로 귀양을 가서 죽었다.

反正 초기 中宗은 억센 功臣(공신)들에 휘둘렸지만, 차츰 왕권을 회복하고 理想國家(이상국가)를 꿈꾼 혁신주의자 趙光祖(조광조)를 중용하여 개혁정치를 시도했다. 조광조의 上奏(상주)로 反正공신들의 僞勳(위훈)이 삭감당하고, 미신 타파를 위해 궁중의 비빈들의 점이나 굿거리를 맡아서 해주던 昭格署(소격서)가 혁파되었다. 소격서는 경복궁의 동문인 建春門(건춘문) 건너편, 지금의 국군서울지구병원 자리에 있었다.

그러나 조광조는 백성들의 인기가 그의 한몸에 집중되는 데 대한 中宗의 두려움과 훈구파의 반격 때문에 결국 귀양을 가고 거기서 사약을 마시고 죽었다. 조광조의 집은 지금의 종로구 校洞(교동)초등학교 자리에 있었다. 교동초등학교는 고종 31년(1894) 9월18일 우리나라의 첫 근대적 초등교육기관인 「관립 교동소학교」로 개교한 이래 현재까지 尹潽善(윤보선) 前 대통령 등 3만5000여 명에 달하는 졸업생을 배출했다.

이 집에 드나들면서 개혁정책을 논하던 金湜(김식)·安處謙(안처겸)·朴薰(박훈) 등 신진사류도 이때 모두 제거되었는데, 이것이 중종 14년(1519)의 己卯士禍(기묘사화)다.


불교 중흥의 잃어버린 찬스 상징 奉恩寺

排佛崇儒(배불숭유)를 國是로 내건 조선왕조에서 불교가 중흥할 뻔한 기회가 꼭 한 번 도래했는데, 그 중심지가 지금의 강남구 삼성동 아셈회의장 건물 건너편에 있는 奉恩寺(봉은사)다. 봉은사는 明宗의 母后(모후)로서 조정의 실권을 장악한 文定王后(문정왕후)가 숭배하던 당대의 고승 普雨(보우)를 주지로 맞음으로써 크게 번창했다. 당시 봉은사는 그 山門이 지금의 인터컨티넨털 호텔 자리에까지 뻗어나와 있을 만큼 경내가 넓었다.

중종 5년(1550) 12월15일, 문정왕후는 禪敎 兩宗(선교 양종)을 부활시키는 왕의 備忘記(비망기)를 내리게 했다. 이후 승려들의 도첩제도가 부활되는가 하면 승려들의 과거인 度僧試(도승시)도 실시되었다. 봉은사 마당에서 시행된 도승시에서 급제한 승려가 임진왜란 때 승병을 일으켜 큰 공을 세운 西山大師 休靜(서산대사 휴정)과 그의 법제자인 泗溟堂 惟政(사명당 유정) 등이다.

문정왕후는 명종 20년(1565)에 승하했는데, 그녀가 묻힌 곳이 지금의 노원구 공릉동 산 223-19번지 泰陵(태릉)이다. 태릉선수촌과 태릉 국제종합사격장 사이에 위치해 있다. 문정왕후 死後에 보우는 유생들의 배척과 불교 탄압을 주장하는 거듭된 상소에 따라 제주도에 귀양을 갔다가 제주목사 邊協(변협)에게 매를 얻어맞아 죽음을 당했다. 보우는 抑佛(억불)시대에 불교를 중흥시킨 순교승으로 평가받고 있다.


5. 國難期의 漢城

서울 최대의 환란, 壬辰倭亂

보광동에 陣 치고 있던 金命元의 도주

연산군 이래 신진사류는 勳舊派(훈구파)에 의해 거듭 수난을 당했지만, 드디어 宣祖(선조) 대에 이르면 士林派가 정계의 주류를 형성했다. 그러나 사림파는 곧 東人과 西人으로 분열했다. 소장세력의 영수 金孝元(김효원)이 서울의 동쪽인 낙산 기슭에 산다고 하여 그 당인을 東人, 그 반대파의 영수 沈義謙(심의겸)의 집이 서울의 서쪽인 인왕산 기슭에 있기 때문에 그 당인을 西人이라고 불렀다.

서울은 동인과 서인 간의 당파싸움이 벌어지긴 했지만 평온했다. 그러던 宣祖 25년(1592) 4월14일, 왜군 15만명이 부산포에 상륙하여 부산진성을 함락시키고 북상했다. 선조 조정은 순변사 李鎰(이일)을 남하시켜 왜군을 막도록 하고, 이어 申砬(신립)을 都巡邊使(도순변사)로 삼아 이일 軍의 뒤를 받치도록 했다.

4월25일, 이일은 군사 800명을 거느리고 尙州(상주) 북천변에 진을 치고 있다가 왜군 제1번대인 고니시 유키나와(小西行長) 軍(2만명)의 공격을 받고 휘하 군사가 전멸하는 가운데 혼자 도주했다. 申砬은 군사 8000명을 거느리고 충주의 탄금대에서 배수진을 치고 있다가 4월28일 고니시가 지휘한 1만8000명의 왜군에 패전하여 달래강에 뛰어들어 자결했다.

4월26일, 이일의 보고에 의해 尙州 패보를 접한 조정은 뒤늦게 도성 수비전략을 세우고 병조에서는 도성 안의 군사를 징발했다. 이런 상황에서 곧이어 申砬이 충주에서 패전했다는 보고가 올라오자 왕은 피란을 결정하는 한편 한강에서 왜군의 북상을 저지하기로 했다. 이에 따라 李陽元(이양원)을 留都大將(유도대장)으로 삼아 도성을 지키게 하고, 金命元(김명원)을 도원수로 임명하여 군사 1000여 명을 거느리고 한강 도하가 가능한 濟川亭(제천정:지금의 보광동) 일대에 배치시켰다. 강 남안의 나룻배는 모두 강 북안으로 옮겨 계류시켰다.

4월30일, 왕이 당시의 제1대로(한성-의주)를 따라 피란길에 오르자 도성 內에서 하층 백성들이 폭동을 일으켜 노비문서가 보관된 掌隷院(장예원)과 刑曹(형조)에 이어 경복궁·창덕궁·창경궁을 방화했다. 이때 많은 관아와 민가도 불탔다.


왜군 총사령부는 조선호텔 자리에

5월2일 정오께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거느리는 1만2000명의 왜군 제2번대가 한강 남안에 당도했다. 한강 남안에서 왜군은 조총을 쏘아대면서 조선군의 사기를 저하시켰다. 金命元은 싸워보지도 않고 옷을 바꿔 입고 임진강을 향해 도주했다. 留都大將 이양원도 마찬가지였다. 가토는 병사 한 명을 시켜 北岸에 매여 있는 나룻배를 南岸으로 몰고 오도록 하여 축차적으로 도하를 완료했다.

이 무렵 충주에서 楊根(양근:양평) 방면으로 북상한 고니시 휘하의 왜군 제1번대는 북한강을 건너 동대문 방향으로 진입하여 텅 빈 도성에 무혈 입성했다. 이어 왜군 2번대도 남대문으로 입성했다.

이후 서울은 1년간 왜군의 점령하에 있었다. 수많은 서울 사람이 살상되거나 굶어 죽어 그 시체가 길을 메우고 백골이 나뒹굴었다. 선조실록에는 서울사람이 「人相殺食」(인상살식)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사람이 사람을 죽여서 먹었다는 얘기다. 漢城 정도 이래 가장 크고 참혹한 환란이었다. 당시 왜군의 총대장 우키다 히데이에(宇喜多秀家)는 지금의 조선호텔 자리에 사령부를 설치하고 있었다. 왕은 평양을 거쳐 압록강변 의주까지 몽진하여 明에 원병을 요청했다. 고니시의 제1번대는 평양성을 점령하고 있었다.

이듬해 1월6~9일에 걸쳐 李如松(이여송)이 지휘하는 明의 원병 4만여 명과 조선군 1만여 명이 평양성 탈환전을 벌였다. 조-명 연합군의 대포 공격에 견디다 못한 왜군은 1월9일 밤, 평양성을 버리고 퇴각했다. 고니시는 개성에 주둔하고 있던 고바야가와(小早川隆景) 軍과 함께 한성에 들어왔다.

1월27일, 明의 부총병 査大受(사대수)와 경기방어사 高彦伯(고언백)의 기병 3000여 기가 여석령(숫돌고개:한성 서북쪽 30리 지점)에 포진하고 있던 고바야가와 軍을 공격했다. 朝·明 연합군의 기병은 지형이 협소하고 땅이 질어서 제대로 기동을 못하고 고전했다. 때마침 조선군 7000명이 증원됨으로써 겨우 열세를 만회하고 있었다.


서울 출신의 전쟁영웅들

권율 장군의 집은 행촌동 고지대

접전이 계속되는 동안 이여송이 부장 몇 명과 친위기병을 거느리고 碧蹄館(벽제관:한성 서북쪽 45리)을 지나 격전장으로 달려갔다. 이여송의 친위부대는 酒幕里(주막리) 일대에 매복하고 있던 고바야가와 軍의 기습을 받아 일거에 궤멸당하고 말았다. 이여송만은 간신히 포위망을 탈출하여 파주로 퇴각했다. 이날 전투는 날이 저물자 양군이 모두 兵을 거둠으로써 끝났다. 이후 이여송은 왜군에 위축되어 공세를 취하지 못했다.

이런 明軍의 사기를 되살리고 왜군의 漢城 방위계획을 교란시킨 것이 幸州山城(행주산성) 전투였다. 왜군이 벽제관 전투에서 朝·明 연합군을 격퇴시키고 있을 무렵, 전라감사 權慄(권율)이 의병 3000여 명을 거느리고 은밀히 한강을 건너 幸州山城을 점거했다. 승장 處英(처영)의 승병 2000여 명도 권율 軍에 합세했다.

왜군은 권율이 행주산성에 포진한 것을 뒤늦게 알고 상당한 위협을 느꼈다. 왜군 총대장 우키다 히데이에는 朝·明 연합군의 主力이 접근하기 전에 행주산성의 의병을 격멸하기로 하고, 漢城 주둔 3만여 병력을 모두 7개 부대로 편성하여 차례로 공격에 투입했다. 1593년 2월12일 오전 6시부터 오후 6시까지 파상공격을 감행했던 왜군은 수천 명의 전사자를 내고 한성으로 철수했다. 권율은 기병으로 추격전을 전개, 다시 왜병 130여 명을 사살했다. 이 전투 후 권율은 곧 도원수로 승진했다.

권율 장군은 사직터널 위쪽 종로구 杏村洞(행촌동) 1-113번지의 고지대에 살았다. 담벼락에는 樹齡(수령) 430여 년의 은행나무(樹高 20m)가 우뚝 서 있다. 지금의 洞名 행촌동은 바로 은행나무골의 한문 이름이다. 권율은 원래 인왕산 기슭인 지금의 종로구 弼雲洞(필운동) 12번지 배화여중고 자리에서 살았다. 배화여중고 교정에 서면 도성 안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이런 점들로 미루어 보면 그는 원래 달동네를 체질적으로 선호한 듯하다.

영의정 權轍(권철)의 아들이었던 권율은 이웃집 개구쟁이 소년이었던 李恒福(이항복)을 맞사위로 맞아들여 「필운동 집」을 물려주었다. 이곳 바위벽에는 이항복이 쓴 弼雲臺(필운대)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이항복은 임진왜란 기간, 왕을 호종했으며 이후 다섯 차례에 걸쳐 병조판서를 맡아 국난 극복에 공을 세웠고, 선조 35년(1602)에 영의정에 올랐다.

조선왕조 500여 년을 통해 가장 유머러스한 大臣(대신)으로 손꼽히는 鰲城府院君(오성부원군) 이항복은 소년기부터 李德馨(이덕형:아호 한음)과 단짝이 되어 온갖 장난을 저질러 많은 일화를 남겼다. 그것이 한국판 「톰소여의 모험」인 「오성과 한음의 얘기」다. 이덕형은 임진왜란 직후 明에 건너가 원병을 요청, 원병이 들어오자 明將 이여송의 接伴官(접반관)이 되었고 나중에 벼슬이 영의정에 이르렀다. 이덕형의 집은 지금의 중구 남대문로 5가 대우재단빌딩 자리에 있었다.


명보극장 자리에 있었던 李舜臣 장군집

임진왜란 때 최고의 구국 영웅은 李舜臣(이순신) 장군이다. 이순신은 현재 명보프라자(극장)가 들어서 있는 중구 인현동 1가 40번지에서 태어나 성장했다. 이 동네를 조선시대에는 마른내골(乾川洞)이라 했다. 오늘날엔 이 동네 앞을 지나는 도로가 마른내길로 명명되어 있다.

임진왜란 발발 1년 전, 조정에 이순신과 권율을 천거한 인물이 국난을 맞아 좌의정, 영의정, 都體察使(도체찰사)를 역임했으며 조정에서 물러나서는 임진왜란의 교훈을 담은 명저 懲毖錄(징비록)을 저술한 柳成龍(류성룡)이다. 류성룡은 이순신과 이웃인 남산 기슭(중구 필동 2가 51의 1번지)에 살았다. 지금 이 동네 옆을 지나 남산으로 오르는 도로의 이름이 유성룡의 호를 따 西崖(서애)길로 불리고 있다.

이제는 금싸라기 땅이 된 강남구 삼성동 도심 한복판에 있는 宣靖陵(선정릉)은 임진왜란 때 왜군에 의해 능묘가 파헤쳐지고 梓宮(재궁)이 불태워지는 수난을 당한 현장이다. 선정릉은 宣陵(선릉)+靖陵(정릉)인데, 선릉에는 성종과 계비 장헌왕후, 정릉에는 중종이 묻혀 있다. 도심 한복판에 이런 광대한 녹지의 역사유적을 끼고 있다는 것은 古都 서울의 프리미엄이라 할 수 있다. 지하철 2호선 선릉역 가까이에 있어 들르기 쉬운 곳이다.

1593년 10월1일, 漢城으로 환도한 선조는 왕궁이 모두 불타버린 형편에서 지금의 德壽宮(덕수궁)에 行宮(행궁:왕의 임시거소)을 설치했다. 이곳은 원래 성종의 친형인 月山大君(월산대군:1454~1488)의 집이었다.

선조의 뒤를 이은 光海君(광해군)은 이곳 행궁에서 즉위한 후 1611년에 慶運宮(경운궁)으로 고쳐 부르면서 왕궁으로 사용하다가 1615년에 창덕궁으로 옮겼다. 경운궁에는 선조의 계비 仁穆大妃(인목대비)를 거처케 했다.


仁祖反正과 이괄의 난

反正軍의 수뇌들이 칼을 씻은 洗劍亭

광해군 15년(1623) 3월13일 새벽 김유, 李貴(이귀), 崔鳴吉(최명길), 金自點(김자점), 沈器遠(심기원) 등이 쿠데타軍 6700명을 거느리고 弘濟院(홍제원:홍제동)에 모였다. 綾陽君(능양군:나중의 仁祖)의 친병과 장단부사 李曙(이서)의 부하 700명도 합류했다. 이들은 김유를 대장으로 삼아 대오를 가다듬고 깃발을 세웠다. 새벽 3시경이었다.

反正軍(반정군)은 洗劍亭(세검정:지금의 종로구 신영동)을 거쳐 彰義門(창의문:도성의 서북문)을 통과하여 창덕궁으로 진군했다. 洗劍亭이란 반정군의 지도자 김유·이귀 등이 이곳을 흐르는 내에서 칼을 씻어 칼집에 넣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창덕궁을 수위하던 훈련대장 李弘立(이홍립)은 사전약속대로 궁문(돈화문)을 열어주고 몸을 피했다. 반정군이 궁궐에 난입하자 광해군은 사다리를 놓고 궁성을 넘은 다음 내시에게 업혀 도망갔다가 생포되었다.

反正軍이 내세운 명분은 두 가지였다. 그 첫째가 형(임해군)과 아우(영창대군)를 죽이고 母后(모후:인목대비)를 폐한 反인륜적인 행위였고, 둘째는 明에 대한 의리를 저버리고 오랑캐(後金=淸)와 교분을 맺었다는 것이었다.

광해군은 1618년 선조의 계비인 인목대비의 존호를 폐지하고, 경운궁을 西宮(서궁)이라고 낮춰 부르게 했다. 따라서 폐비 문제는 그렇다고 할지라도 後金(후금)과의 관계개선은 국가이익 확보에 있어 오히려 긍정적인 평가를 받아야 할 대목이었다. 따라서 인조반정은 당시의 집권당 大北의 독주에 대한 반대 정파의 반격이었다는 측면도 없지 않았다. 인조반정의 주체세력은 광해군 시절에 배척을 받았던 西人들이었으며, 모두 李恒福(이항복:반정 당시 故人)의 문하생들이었다.

西宮에 유폐되었다가 反正으로 궁중의 최고 어른이 된 인목대비는 자신의 소생 永昌大君(영창대군)을 죽인 광해군을 증오하여 『하늘 아래 같이 살 수 없는 원수』라며 『목을 잘라 망령에 제사지내고 싶다』고 고집했다. 그러나 여러 신하들의 만류로 광해군은 신문과 형벌을 겨우 면하고 강화 喬洞島(교동도)로 귀양을 갔다.

인조는 경운궁 즉조당에서 즉위하고 창덕궁을 정궁으로 삼았다. 이후 경운궁은 270년 동안 別宮으로 사용되었다.

인조반정은 황음무도했던 燕山君(연산군)을 쫓아낸 中宗反正 때만큼 백성들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 그런 가운데 인조반정 당일 軍心(군심)을 잡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李适(이괄)이 論功行賞(논공행상)에 대한 불평을 감추지 않았다. 원래 이괄은 모의 단계부터 참여한 주체세력이 아니었으나 用兵(용병)에 능통하다고 하여 거사 직전에 포섭된 인물이다. 北兵使(북병사)로 부임하려던 그는 임지로 가지 않고 쿠데타軍에 합류했다.

그런데 거사 전날 밤, 대장 김유가 약속장소인 홍제원 張晩(장만:서울지구 연락책 격인 최명길의 장인)의 집에 나타나지 않았다. 고변으로 역모 관련자에 대한 체포령이 떨어졌다는 소식을 듣고는 몸을 사렸던 것이다. 이런 소문을 들은 오합지졸들이 무너지려 하자 다급했던 李貴가 李适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대장 김유가 오지 않고, 일이 이미 이쯤 되었으니 그대가 대장이 되어야만 여러 사람의 마음을 진압할 수 있을 것이오』

대장으로 추천된 이괄에 대해 이귀는 다시 『나 자신은 물론 누구든 기율을 어기면 목을 베시오』라고 말했다. 이에 군사들이 줄지어 이괄에게 절하며 복종을 맹세했다. 이괄이 반정군을 진발시키려 할 무렵, 김유는 뒤늦게 수하의 병졸을 모은 다음 전령을 보내어 이괄을 불렀다. 이괄이 크게 노하여 가지 않으려고 하는데, 이귀의 중재로 김유가 다시 지휘권을 잡는 우여곡절을 겪었다.


연세대 뒷산 길마재의 패전

反正 성공 후 김유·이귀·김자점·심기원·이홍립 등 주모자들은 거의 1등공신으로 판서의 반열에 올랐다. 그러나 이괄은 2등공신, 한성판윤의 자리밖에 차지하지 못했다. 이괄은 反正 후 아무런 공로도 없는 자기 아들까지 공신으로 만든 김유를 노골적으로 비방했다.

문제는 인조반정이 당시 東아시아의 최강국이던 後金을 긴장시켰다는 점이다. 明·淸과 등거리 외교를 펼치던 광해군이 쫓겨나고 노골적으로 親明反金(친명반금)을 내건 새로운 정권이 들어섰기 때문이다. 이런 긴장 상황에서 왕은 張晩을 도원수, 이괄을 부원수 겸 평안병사에 임명하여 서북의 방비를 강화하도록 했다.

그러던 인조 2년(1624), 이괄 父子 및 韓明璉(한명련)·奇自獻(기자헌) 등이 변란을 꾀한다는 고변이 들어왔다. 국청에서는 우선 서울에 있던 기자헌 등 40여 명을 붙잡아 문초했으나 아무런 단서도 잡지 못했다. 그러나 이귀는 왕에게 이괄을 서둘러 붙잡아 오도록 건의했다. 왕은 일단 이괄은 제외하고 이괄의 아들과 한명련 등을 서울로 붙잡아 올리도록 금부도사를 영변으로 보냈다.

이괄은 분노했다. 그는 부하 장수 李守白(이수백)·奇益獻(기익헌) 등과 대책을 숙의했다. 이괄은 반란을 결심했다. 서울로 잡혀가던 한명련도 이괄에 구출되어 반란군에 가담했다. 1월24일 영변을 출발할 때 이괄 軍은 1만2000명에 달했다. 임진왜란 때 항복했던 왜인 130여 명이 선봉에 섰다.

반란군은 도원수 장만 軍과의 충돌을 피하기 위해 영변-자산-평산-개성을 잇는 샛길로 진군했다. 평양의 도원수 張晩은 관군을 동원하여 반란군의 남진을 막으려 했다. 그러나 황주·평산·마탄·송도·청석동, 그리고 수도방위 요새인 임진강의 전투에서 관군은 잇따라 패했다.

임진강의 방어선이 무너지는 그날 밤, 인조는 서울을 떠나 공주로 피난했다. 2월10일, 이괄 軍은 아무런 저항 없이 서대문을 통해 서울에 입성하여 백성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이렇듯 난세의 백성들이란 언제나 승자를 따르게 마련이다. 이괄은 반란군을 景福宮에 주둔시키고 宣祖의 열번째 아들 興安君(흥안군)을 새 임금으로 세웠다.

한편 같은 날, 도원수 張晩은 前部大將(전부대장) 鄭忠信(정충신), 경기감사 李曙(이서) 등과 함께 군사를 이끌고 뒤따라와 안현(길마재:무악)에 진을 쳤다. 이튿날 아침에야 이를 안 이괄은 한명련을 선봉장으로 삼아 군대를 출동시켰다. 승전을 확신한 이괄이 구경을 하라고 漢城의 백성들을 집 밖으로 내모는 바람에 민초들은 서대문 쪽 성벽과 남산 등에 새카맣게 올라 양군의 결전을 관전했다.

처음에는 동풍이 크게 불어 바람을 등진 이괄 軍이 유리했다. 그러나 갑자기 풍향이 서북풍으로 바뀌어 전세가 역전되었다. 관군은 승세를 몰아 이괄 軍을 추격했다. 이괄과 한명련은 남대문으로 입성했으나 서울 인심이 싹 변하자 수구문으로 빠져나와 이천까지 도주했으나 제 살길을 찾으려고 배반한 부하 기익헌·이수백 등에 의해 목이 달아났다.


丙子胡亂:淸軍 선봉부대가 강화도

가는 길 막아

1636년 4월, 後金의 太宗 홍타이지는 국호를 淸(청)이라 고치고 황제를 칭하면서 조선에 신하의 예를 갖추도록 요구했다. 仁祖 조정이 이를 거절하자 淸은 그해 12월에 12만8000명의 조선원정군을 편성했다.

그해 12월8일, 淸軍의 선봉장 馬夫大(마부대)는 기병 6000기를 거느리고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 당시의 제1대로를 타고 漢城을 향해 남하했다. 마부대 軍은 질풍같이 달려 12월14일에는 벌써 漢城 근교 梁鐵里(양철리:지금의 은평구 불광동과 대조동 사이)까지 진출했다. 그런데도 淸軍 침입 제1보가 조정에 전달된 것은 12월13일 오후였다.

조정은 크게 당황하여 이튿날 아침 일찍 비빈, 왕자, 종실, 백관의 가족들을 급히 강화도로 들어가게 했다. 이날 오후, 인조도 급히 세자와 백관을 거느리고 강화도로 피난하기 위해 남대문 바깥으로 나갔다. 그러나 이미 불광동에 진출한 馬夫大가 기병 2000기를 보내 양화진과 개화리 일대에 배치하여 강화도 가는 길을 끊고 있다는 급보가 날아들었다.

최명길이 馬夫大의 진영에 찾아가서 지연전술을 벌이는 사이에 인조는 수구문(광희문)을 통과하여 왕십리-살곶이다리- 뚝섬에서 송파나루로 건너간 다음 몽촌토성을 거쳐 이날 밤 늦게 西門을 통해 남한산성으로 들어갔다. 한성의 남부 요충지인 남한산성에는 유사시를 대비하여 국왕의 임시거처인 行宮이 마련되어 있었고, 상당한 식량과 무기도 갖추어져 있었다.

인조는 산성 內 상주 병력과 왕을 따라 입성한 어영청, 총융청, 훈련도감 등의 군사 1만3000명으로 방어군을 편성했다. 그리고 8도의 감사와 兵使에게 교서를 내려 각 지방에서 근왕병을 모집하여 남한산성으로 집결시키려 하는 한편, 明에 사신을 급파하여 원병을 요청했다.

12월14일 하루 동안 弘濟院(홍제원:홍제동)에 머물고 있던 馬夫大의 선봉부대는 4000여 병력을 이끌고 뚝섬의 신천나루를 도하하여 이날 저녁 삼전도에 당도하여 남한산성 서편에 병력을 분산배치하고, 주력부대의 도착을 기다렸다. 12월18일 한성에 입성한 淸의 좌익군은 다음날 2만4000명의 병력으로 한강을 도하하여 남한산성 동쪽과 남쪽에 포진했다. 이로써 남한산성은 淸軍에 의해 포위되고 말았다.

12월21일까지 조선군과 淸軍 사이에는 몇 차례의 소규모 전투가 있었을 뿐인데, 그동안 淸軍은 조선의 世子를 인질로 보내는 것을 조건으로 화의를 요구해 왔다. 그러나 인조는 이를 거절하고 항전을 결의했다. 12월22일 아침, 淸軍은 화포의 엄호 발사 아래 大병력을 동원하여 남한산성의 동·서·남·북문을 동시에 공격했다. 그러나 조선군의 완강한 저항으로 淸軍이 격퇴되었다.

12월23일에도 淸軍은 1만여 병력을 동원하여 再공세를 취했다. 이번에는 조선군이 먼저 성 밖으로 나가 선제공격을 가했다. 정오까지 전투가 계속되어 조선군 80명이 전사하고, 淸軍 200여 명이 사살되었다.


치욕의 현장 三田渡는 잠실 炭川 하구

淸軍은 단시일內 성을 함락시키기 어렵다는 판단 아래 남한산성을 고립시켜 군량을 소진시키는 장기전으로 들어가 산성 주변 요소요소에 목책을 설치하여 통로를 차단했다. 남한산성은 평야지대에 우뚝 솟아 있어 외부와의 연락이 두절되기 쉬운 약점을 지니고 있었다.

한편, 12월29일 한성에 입성한 淸 태종은 다음날 4만여 명의 병력을 거느리고 한강을 도하하여 삼전도에 지휘소를 설치하고 포위망을 강화했다. 이러는 동안 남한산성의 조선군 진영은 군량과 말먹이 사정이 악화되어 굶주림과 추위에 허덕이게 되었다. 지방에서 올라오던 근왕군들도 淸軍에 각개 격파되어 남한산성의 에움을 풀지 못했다.

1월22일, 淸軍의 우익군이 강화도를 함락시키고, 그곳에 피난해 있던 비빈·왕자·종실·백관의 가족을 포로로 획득했다. 이 소식은 1월26일 淸軍에 의해 조선 측에 통보되었다. 淸軍은 1월27~28일 이틀 동안 계속적인 포격으로 무력시위를 벌이면서 인조가 출성 항복할 것을 강요했다.

1월30일 인조는 백관을 거느리고 남한산성 西門을 나와 지금의 마천동-거여동- 가락동- 오금동 길을 거쳐 삼전도로 나가 受降壇(수항단) 아래에서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조아리는 수모를 당하며 淸 태종에게 항복했다. 이로써 45일간에 걸친 남한산성의 항쟁은 막을 내리고 조선왕조는 淸을 황제국으로 섬기게 되었다. 서울과 그 주위는 2개월간 淸軍의 말발굽으로 무자비하게 유린당했다. 철군 때 淸軍은 젊은 여성 등 수만 명을 포로로 잡아갔다.

三田渡는 지금의 서울종합운동장 북쪽, 탄천 하구에 위치해 있었다. 이 나루는 삼밭게·세밭나루·뽕밭나루라고 불렸으며, 세종 21년(1439)에 설치되었다. 한강나루, 노들나루와 함께 京江三津(경강삼진)의 하나로 상인들이 많이 이용했고, 젓갈류·어류 등이 하역되어 인근 송파시장이 번성했다.

淸은 조선조의 항복을 받은 뒤 굴욕의 현장인 삼전도에 「大淸寬溫仁聖皇帝功德碑(대청관온인성황제공덕비)」를 세우라고 강요했다. 이것이 속칭 삼전도碑다. 삼전도비는 「辱碑(욕비)」라고 하여 땅 속에 파묻히기도 했지만, 후세의 경계로 삼아야 한다는 뜻에서 발굴하여 다시 세웠다. 다만 그 현장이 탄천의 범람으로 자주 물에 잠기는 바람에 보존을 위해 지금은 송파구 석촌동 289번지 어린이 놀이터 옆으로 옮겨져 있다. 전철 8호선 석촌역 서쪽 100m 지점의 주택가 한복판이다.


6. 朝鮮왕조 말기의 漢城

朝鮮 천주교의 自生的 발상지

천주교가 우리나라에 전래된 것은 17세기 들어 北京을 찾은 사신 등을 통해 한자로 쓴 西學(서학) 책이 도입되면서부터였다. 이렇게 들어온 서학서들은 성호 李瀷(이익) 등 서울 근교의 南人 실학자를 중심으로 읽히면서 조선 후기 실학운동에 새로운 자극을 주었다. 이익 문하의 소장 학자들 가운데는 西學에 대한 학문적 연구 차원을 넘어서서 천주교를 신앙으로 받아들이는 그룹이 형성되었다. 한국 천주교에서 聖祖(성조)로 받드는 李蘗(이벽)을 비롯, 權哲身(권철신)·權日身(권일신)·李家煥(이가환)·李昇薰(이승훈)과 丁若銓(정약전)·丁若鍾(정약종)·丁若鏞(정약용)의 3형제 등이 그들이었다.


明洞성당 자리의 초가집이 초기 예배 장소

그들은 경기도 광주군 퇴촌면 우산리 앵자산 천진암에서 강학회를 갖고 신앙공동체를 만들었다. 또 이벽의 주재로 明禮坊(명례방:지금의 중구 명동)에 있던 中人 金範禹(김범우)의 초가집(지금의 명동성당 자리)에서 예배를 보다가 형조의 禁吏(금리)에 적발되기도 했다. 그러나 南人을 등용하려고 애썼던 正祖 때여서 극단적인 탄압은 없었다. 다만 정계의 주류인 노론 벽파(영조 때 정조의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죽음에 찬동했던 당파)를 의식해 부모의 신주를 불태운 천주교 신자 尹持忠(윤지충) 등을 사형에 처했을 정도였다. 이후 천주교는 星湖左派(성호좌파)로 불리던 소장학파의 테두리를 벗어나 지역적·계층적으로 광범위하게 전파되었다.

당시 西學에 대한 대응방법을 놓고 정계가 두 파로 갈라지는데, 서학을 받아들인 세력을 信西派(신서파)라 하고 서학을 邪敎(사교)라 공격한 세력을 攻西派(공서파)라 불렀다. 신서파는 대부분 야당인 南人과 일부 時派(시파:영조 때 사도세자의 죽음을 동정하던 당파)였고, 집권당인 공서파는 대부분 노론 벽파였는데 일부 남인도 끼어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1800년 6월 正祖가 승하했다. 조선왕조 中興(중흥)의 군주였던 正祖의 죽음은 노론의 전횡을 막을 수 있는 마지막 보루가 무너졌음을 뜻하는 것이었다. 만 10세의 純祖(순조)가 즉위함에 따라 노론 벽파인 慶州金氏(경주김씨) 가문 출신인 貞純王后(정순왕후:英祖의 繼妃)가 수렴청정을 하게 되었다. 그녀는 정조 재위 시절에 등장한 혁신세력 또는 蕩平策(탕평책)을 추진했던 인물들을 숙청하기 시작했다.

정순왕후를 중심으로 하는 노론 벽파가 시파 및 신서파를 공격하기 위한 구실로 삼은 것은 천주교였다. 순조 원년(1801), 남인 信西派 등 가톨릭 신자에 대해 辛酉邪獄(신유사옥)을 일으켜 이가환(충주목사), 이승훈(조선 가톨릭 최초의 세례교인), 정약종(정약용의 셋째 형으로 조선가톨릭 초대 전도회장) 등 200여 명을 서대문 밖 형장(지금의 서소문공원)에서 목을 벴다.

大학자 정약용은 이미 背敎(배교)를 했음에도 18년간이나 전남 강진 등지에서 귀양살이를 해야 했다. 정약용의 둘째 형 정약전도 흑산도로 귀양을 가서 물고기 생태학을 연구하여 명저 「玆山魚譜(자산어보)」를 남기고 거기서 죽었다. 신유사옥으로 양반 지식층이 탈락한 가운데 이후 천주교는 크고 작은 박해를 거치면서 주로 평민층을 중심으로 은밀히 교세를 확장해 나갔다.


세도가 安東金씨의 처음 거주지는 청운동

노론 벽파가 時派에 대해 정치적 보복을 하는 와중에 노론 가문의 金祖淳(김조순)이 정권을 장악했다. 그는 자신의 딸을 순조의 妃(비)로 들이는 데 성공함으로써 이후 63년간의 安東金氏(안동김씨) 勢道政治(세도정치)를 개막시킨다. 더욱이 1804년 정순왕후가 사망하자 김조순은 일족 지배의 정치구도를 만들었다. 그의 권력은 그의 가문에서 계속 왕비를 들임으로써 그의 아들과 손자대로 이어졌다.

김조순의 집은 紫霞洞(자하동:지금의 청운동)에 있었다. 자하동은 경복궁의 서북쪽 창의문 아래 북악과 인왕산 사이다. 자하동을 줄여서 「자동」이라고도 했는데, 급하게 부르면 壯洞(장동)으로 들렸다. 이런 까닭으로 세상에서 안동김씨를 장동김씨 또는 壯金(장김)라고 불렀다. 壯金이란 호칭은 김조순이 집을 校洞(교동)으로 옮긴 후에도 그대로 사용되었다. 교동에는 김조순 사후에도 그의 아들 金左根(김좌근)과 손자 金炳冀(김병기)가 살았다.

순조·헌종·철종은 모두 壯金의 세도정치에 휘둘리는 허수아비 임금이었다. 더욱이 철종은 부모와 함께 강화도에 유배되어 농사를 짓다가 壯金에 의해 갑자기 서울로 불려 올라와 창덕궁 인정전에서 즉위했다. 壯金의 부패는 극에 달했다.


大院君 전성시대의 雲峴宮

1963년 음력 12월 말 「강화도령」 철종이 후사도 없이 세상을 떠났다. 새로 왕위에 오른 이가 흥선군 李昰應(이하응)의 둘째 아들 命福(명복), 즉 高宗(고종)이다. 13세의 命福이 왕위에 오르게 된 것은 순전히 아버지 흥선군이 翼宗(익종:순조의 아들인 효명세자로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21세에 요절하여 추존됨)의 妃인 趙대비과 密議(밀의)하여 상호 동맹관계를 굳혀 놓았기 때문이다.

왕실의 관례상 임금이 후사 없이 사망할 경우 후계왕 지명권은 왕실의 최고 어른에게 있었다. 이 시점에 趙대비는 왕실의 최고 어른이 되었다. 趙대비는 壯金에 한이 많이 맺혀 있었다. 야망을 감추고 保身(보신)을 위해 파락호 행세를 함으로써 壯金에게 「상갓집 개」로 취급당했던 흥선군도 그 점에서는 마찬가지였다. 고종이 즉위하자 흥선군을 대원군(임금의 아버지)으로 높였다.

고종이 태어난 潛邸(잠저)는 옛 書雲觀(서운관:觀象監)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雲峴宮(운현궁:종로구 운니동 114-10번지)이라 불렸다. 興宣大院君(흥선대원군)의 저택으로 사용되던 운현궁은 크게 증축되었다. 한때 대원군은 운현궁과 창덕궁 사이에 특별한 통용문을 만들어서 그만이 이곳을 통해 입궐했다.

대원군이 권력을 장악하려 들자 세도가 壯金의 일원인 金興根(김흥근)은 조정에서 드러내 놓고 반대했다.

『옛날부터 임금의 아버지는 정치에 간섭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집으로 돌아가 부귀나 누리게 해야 합니다』


대원군이 安東金씨에게 뺏은 별장 石坡亭

대원군은 이런 김흥근을 壯金 가운데서도 가장 미워했다. 김흥근의 별장이 북문 밖 삼계동(지금의 종로구 付岩洞 자하문 터널 윗 동네)에 있었는데, 서울에서 경치가 제일 좋았다. 대원군은 그 별장을 사려고 했지만, 김흥근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팔 수 없으면 하루만이라도 거기서 놀 수 있도록 빌려주시오』

원래 정자는 누가 빌어서 놀기를 청하면 빌려주는 것이 서울의 풍습이었다. 이쯤 되자 김흥근은 마지못해 빌려 주었다.

김흥근에게 정자를 빈 대원군은 그 정자 구경을 하자면서 고종을 모시고 갔다. 일이 이렇게 되자 김흥근은 그 정자를 다시는 쓸 수 없게 되었다. 왜냐하면 임금이 노닐던 곳은 신하가 놀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다시는 삼계동에 가지 않아 마침내 대원군의 소유가 되고 말았다. 대원군의 아호를 따서 명명한 별장 石坡亭(석파정)의 사랑채는 원래 자리에서 가까운 세검정의 궁중요리점 石坡廊(석파랑:종로구 홍지동 125번지)에 이축되어 있다.

대권을 장악한 대원군은 壯金의 세력을 삭감하고 부정부패에 철추를 내렸다. 또한 안으로는 유교적 민본정치의 부흥과 부국강병을 추구하고, 밖으로는 열강의 도전과 침략을 배격하는 鎖國攘夷(쇄국양이) 정책을 강행했다.

그러나 그의 개혁정책이 결실을 맺기 전에 서구 세력의 파도가 먼저 밀어닥쳤다. 러시아는 수차례에 걸쳐 두만강을 넘어와 통상을 강요했다. 대원군은 천주교도를 통해 프랑스·영국과 3국동맹을 체결, 러시아의 남하를 저지하려는 비밀교섭을 추진했다. 당시 조선에는 베르뇌 등 프랑스 신부 12명이 포교활동을 하고 있었고, 신도수가 2만여 명에 달했다.


西小門공원은 천주교도 학살 장소

천주교도들은 이 비밀교섭을 성사시켜 신앙의 자유를 얻으려고 했다. 하지만 대원군의 밀명을 받은 천주교도 南鍾三(남종삼)의 지지부진한 행동, 그리고 趙대비 등 왕실과 조정 중신들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쳐 교섭이 이뤄지지 못했다. 이에 대원군은 태도를 돌변하여 천주교 탄압령을 내리고 1866년 1월부터 수개월 간에 걸쳐 프랑스 신부 9명과 천주교도 8000여 명을 학살했다. 이것이 丙寅迫害(병인박해)다.

南鍾三 등 많은 천주교도가 처형된 장소는 西小門(서소문) 밖이었다. 이곳은 조선조 500년 동안 중죄인의 처형장이어서 「斬(참)터」라고 불렸다. 당시 백사장이었던 참터는 오늘날엔 서소문공원이 되었는데, 경내엔 순교자현양탑이 세워져 있다. 서소문공원이 내려다보이는 중구 중림동 언덕 위에는 천주교 약현성당이 건립되어 있다.

병인박해 당시의 또다른 처형장은 切頭山(절두산)과 새남터다. 절두산은 강 건너로 여의도 국회의사당이 보이는 마포구 합정동 한강변에 위치한 나지막한 야산이다. 이 야산이 切頭山이라고 불린 것은 이곳에서 무수하게 목이 잘렸기 때문이다.

새남터는 沙南基(사남기)라고도 불리던 곳으로 용산역에서 한강철교에 이르는 강변에 위치해 있다. 병인박해보다 20년 전에 일어났던 기해박해(1846년:헌종 12) 때 조선인 최초의 신부 金大建(김대건)이 참수된 곳도 바로 새남터다. 천주교는 이들 순교의 현장 가까이에 모두 성당을 세워두고 있다.

이때 박해를 모면한 프랑스 신부 리델은 조선을 탈출하여 중국 천진에 체재 중이던 프랑스 인도지나함대 사령관 로즈 제독에게 조선에 남아 있는 신부와 신도들을 구출해 주도록 요청했다. 로즈 제독은 1866년 9월18일에 3척의 군함을 이끌고 강화도 주변과 지금의 양화대교가 위치한 양화진까지 정찰하고 돌아갔다.

다시 이 해 10월13일, 로즈는 7척의 함선과 해병대 600여 명을 이끌고 강화도를 침범했다. 프랑스軍은 강화성과 문수산성을 점령한 뒤 한강 어귀를 봉쇄하여 조선을 굴복시키려 했다. 그러나 프랑스軍은 정족산성의 전투에서 패배하자 1개월 만에 철수했다. 이것이 丙寅洋擾(병인양요)이다.


행방불명된 보신각의 斥和碑

1871년 6월1일에는 미국의 아시아함대 사령관 로저스 제독이 5척의 군함과 1230명의 병력을 이끌고 강화도를 공격했다. 이는 1866년 7월 미국 선박 제너럴 셔먼號가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와 평양성 밖에서 통상을 요구하다가 평양 관민의 공격을 받아 불타버린 사건을 빙자하여 통상조약을 체결할 목적이었다. 미군은 우세한 화력으로 해안포대를 제압하고 강화도에 상륙했다. 미군은 6월10~11일 양일간의 광성진 전투에서 승리하기는 했지만, 조선군의 결사적 저항을 보고 서울 진격이 어렵다고 판단하여 7월3일 철수했다. 이것이 辛未洋擾(신미양요)이다.

신미양요를 전후하여 대원군은 斥和碑(척화비)를 만들어 종로의 보신각 등지에 세웠다. 비문의 主文은 「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양이침범 비전즉화 주화매국)의 12자다. 서양 오랑캐가 침범하는 데 싸우지 않으면 화해할 수밖에 없고 화해를 주장하면 나라를 파는 것이라는 뜻이다. 보신각의 척화비는 그후 경복궁 근정전 서쪽 회랑에 옮겨져 있었는데, 지금은 누가 가져갔는지 행방이 묘연하다.

대원군은 왕실의 위엄을 세우기 위해 임진왜란 때 불탄 경복궁을 중건했다. 그 과정에서 부족한 재정을 충당하기 위해 8도 부호의 명단을 뽑아 강제로 願納錢(원납전)을 거두었기 때문에 파산하는 사람이 속출했다. 이를 세상에서는 願納錢이 아니라 怨納錢(원납전)이라고 빈정거렸다. 그래도 재원이 부족하자 常平通寶(상평통보)의 액면보다 100배 되는 當百錢(당백전)이란 惡貨(악화)를 만들어 유통시킴으로써 인플레를 일으켜 재정 혼란이 가중되었다. 대원군은 순조 이후 勢道政治(세도정치)의 악폐를 척결하는 데는 상당한 성과를 올렸지만, 무리한 경복궁 중건의 후유증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대원군의 집권시대는 10년 만인 고종 10년(1873)에 막을 내렸다. 고종과 민비의 조종으로 동부승지 崔益鉉(최익현)이 대원군의 실정을 조목조목 탄핵하는 상소를 올렸다. 고종은 그해 11월3일, 친정을 선포하고 대원군의 정치 간여를 금했다. 대원군은 운현궁을 떠나 양주 直谷山莊(직곡산장)으로 은퇴했다. 대원군이 정권에서 물러나자 국왕친정이란 이름 밑에 외척인 민비 일족이 정권을 장악했다.


壬午軍亂의 발원지는 남대문시장 수입상가 자리

고종 13년(1876), 민씨정권은 군함 雲揚號(운양호)를 파견하여 개항을 요구한 일본에 굴종, 강화도조약을 체결했다. 이것은 근대적 국제법 토대 위에서 맺은 최초의 조약이었지만, 불평등조약이었다. 이 조약에 의한 開港(개항)으로 일본의 조선 진출이 가속화된다. 이런 가운데 민씨정권은 부패 타락하여 민심을 잃었다.

고종 18년(1881)의 군제개혁으로 신식군대가 우대받는 반면 푸대접을 받은 6營 등의 구식군대는 불만에 차 있었다. 그러다 고종 19년(1882) 6월, 13개월이나 밀려 있던 봉급미의 부당한 지급을 계기로 구식군대의 분노가 폭발했다. 주무관청인 宣惠廳(선혜청) 관리들이 내주는 쌀은 물에 잠겨 썩은 것이 아니면 쌀겨나 모래가 절반이나 섞인 것이었고, 그나마도 양이 차지 않았다.

이때 武衛營(무위영) 소속 군졸들이 반발하여 선혜청 관리들을 구타했다. 구타 사건의 현장은 지금의 중구 남창동 284번지 남대문시장 수입상가 자리에 있던 선혜청 창고였다. 이 소식을 들은 선혜청 당상이며 병조판서인 閔謙鎬(민겸호)는 김춘영·유복만 등 난동 주동자들을 체포하여 감옥에 가두었는데, 곧 사형에 처할 것이라는 소문이 장안에 쫙 퍼졌다.

체포 투옥된 군인들이 위험에 처하게 되자 김춘영의 아버지 김장손, 유복만의 아우 유춘만 등은 6월9일 통문을 돌려 구원운동을 벌였다. 통문을 받은 군인들은 곧 동료를 구원하기 위해 먼저 자기들의 직속상관인 무위대장 李景夏(이경하:병인박해 당시의 포도대장)를 집으로 찾아가서 자기들의 억울한 사정을 풀어줄 것을 호소했다. 이경하의 집은 지금의 을지로 입구 롯데호텔 자리에 있었다.


典獄署 자리는 동아일보 사옥 옆 갑을빌딩

대원군파인 이경하는 민겸호에게 서신으로 營兵(영병)들의 뜻을 전하고 선처를 요망했으나 반응이 없었다. 이경하는 운집한 군졸들에게 안국동 민겸호의 집(운현궁 뒤쪽 前 국세청 자리)에 가서 호소하라고 했다. 군졸들이 민겸호의 집 앞에 이르렀을 때 공교롭게 봉급미를 지급하던 문제의 아전을 발견, 그를 뒤쫓아 민겸호의 집안으로 난입했다. 민겸호는 집에 없었고, 문제의 아전도 놓치고 말았다.

이에 격분한 군인들은 민겸호의 집을 불지른 다음 東別營(동별영)으로 몰려가 무기고를 깨고 무장을 갖추었다. 동별영의 위치는 지금의 종로 5가 담배인삼공사 자리다. 난병들은 典獄署(전옥서)를 습격 파괴하여 구금된 동료들을 구출하고, 계속하여 의금부를 습격하여 衛正斥邪(위정척사)의 상소문을 내어 체포 투옥되었던 백낙관을 석방시켰다. 포도청 감옥은 동아일보 사옥 옆 광화문 우체국~갑을빌딩(前 서린호텔) 자리에 있었고, 의금부는 지금의 종로 2가 종로타워(국세청 청사) 자리에 있었다.

군인들은 대원군이 자기들을 도와줄 것이라고 생각하여 다시 운현궁으로 몰려가 호소했다. 대원군은 난병들을 달래는 척하면서 가만히 난군의 지도자 柳春萬(유춘만) 등에게 밀계를 주는 한편 그의 심복 許煜(허욱)에게 난병을 지휘하도록 했다.

운현궁에서 물러나온 군인들은 여러 대오로 나누어 한 대오는 강화유수 閔台鎬(민태호)를 비롯한 민씨 척족의 집을 차례로 습격 파괴하고, 일본 군사교관이 있는 別技軍(별기군) 병영을 습격하여 일본군 공병 소위 호리모도(掘本禮造)를 죽였다.

다른 한 대오는 직전의 선혜청 堂上으로서 부정부패가 심했던 金輔鉉(김보현)이 감사로 있는 경기감영을 습격하여 병기를 탈취한 다음 그 길로 일본공사관으로 달려갔다. 당시 경기감영은 지금의 평동 164번지 서울적십자병원 자리에 있었고, 일본공사관은 그 조금 서쪽편의 靑水館(청수관) 건물에 들어 있었다.

날이 저문 가운데 난병들은 난민과 합세하여 일본공사관에 불을 질렀다. 이때 일본공사 하나부사(花房義質) 이하 공사관원들은 어둠을 틈타 인천으로 도피하였으나 난중에 일본인 13명이 살해되었다.


창덕궁에서 민겸호·김보현 학살

백성들이 폭동에 합류하고 나서자 6월10일 아침, 대원군의 친형이면서도 민비파에 붙은 영돈영부사 李最應(이최응)의 집을 습격하여 그를 창으로 찔러 죽였다. 기세가 오른 난군은 창덕궁 돈화문을 향해 밀려들었다. 사태가 급박해진 가운데 고종은 곧 대원군을 청해 들였다. 그러나 궁내로 밀고 들어온 난군은 창덕궁에 은신중이던 민겸호, 김보현 등을 학살한 다음 민비까지 해치려고 했다.

민비는 궁녀의 옷차림으로 변장하고 武監(무감) 洪啓薰(홍계훈)이 멘 가마를 타고 창덕궁을 탈출했다. 그녀는 지금의 중부고속도로로 편입된 조선시대의 제5대로를 따라 남하하여 장호원에 있는 충주목사 閔應植(민응식)의 집에 숨었다. 정권을 다시 장악한 대원군은 민비의 실종을 「薨去(훙거)」라면서 國喪(국상)을 공포했다.

이때 민비는 천진에 가 있던 金允植(김윤식)을 통해 청국의 원조를 요청했다. 내정간섭을 바라고 있던 淸의 북양대신 李鴻章(이홍장)은 丁汝昌(정여창), 馬建忠(마건충), 吳長慶(오장경)이 이끄는 군함과 병사 4500명을 조선에 파견했다. 이들은 한성에 들어와 대원군을 납치하여 천진의 保定府(보정부)에 3년간 유폐시켰다. 은신처 장호원에서 환궁한 민비는 다시 권력을 잡았다.


갑신정변의 3일天下

임오군란을 계기로 淸과 일본이 크게 대립하자 조선의 정계도 두 갈래로 갈라져 첨예하게 대립했다. 일찍이 대원군의 쇄국정책에 반대하던 민비는 이제 청국에 기대는 事大黨(사대당)이 되었다. 그 핵심 인물로는 閔泳翊(민영익)과 閔升鎬(민승호) 등 척족과 정계의 김홍집, 김윤식, 어윤중 등이었다. 한편 일본의 明治維新(명치유신)을 본받아 개혁을 단행하려 한 金玉均(김옥균), 朴泳孝(박영효), 洪英植(홍영식), 徐光範(서광범) 등 소장파를 開化黨(개화당) 또는 獨立黨(독립당)이라고 했다.


거사 장소는 견지동 체신기념관

고종 21년(1884), 淸佛전쟁의 패전으로 청국의 위신이 흔들리자 김옥균 등 개화당은 일본 공사 다케조에(竹添進一郞)와 밀의, 쿠데타를 일으켜 혁신정부를 세우기로 했다. 동원병력은 개화당 행동대원 50명과 일본공사관 수비대 150명. 거사 장소는 우정국(당시 典洞·지금의 종로구 견지동 39번지 체신기념관)의 낙성 기념 연회장이었다. 거사 시나리오는 서광범의 집과 담이 붙은 別宮(별궁:현재의 풍문여고 자리)에 방화하고, 그 혼란을 틈타 연회 현장에서 군권을 장악한 親淸 수구당의 민영익(右營使)·이조연(左營使)·한규직(前영사)·윤태준(後영사) 등 4營使를 격살한 다음 창덕궁으로 달려가 개혁에 대한 왕의 윤허를 받아낸다는 것이었다.

12월4일 저녁, 우정국 총판 홍영식의 초청으로 낙성 연회에 참석한 인사는 서울 주재 외교관과 정부요인 등 모두 19명이었다. 그러나 별궁 방화는 순라군에게 들켜 실패했다. 방화 실패의 보고를 받은 김옥균은 우정국 바로 뒷집에 불을 지르라고 지시했다.

밤 9시경, 우정국 건물 바로 뒤편에서 불길이 솟아올랐다. 한규직이 먼저 달려나갔다가 칼에 찔려 피를 흘리며 연회장으로 되돌아왔다. 이어 민영익도 우정국 대문 앞에서 행동대원의 칼을 맞고 쓰러졌다. 9시30분경 김옥균·박영효·서광범은 校洞에 있던 일본공사관으로 달려가 일본 수비대의 지원 의지를 확인했다.


현대그룹 계동 사옥 자리의 景祐宮에 피신한 高宗

교동 일본공사관 건물이 있었던 곳은 조선조 中宗 때 도학정치의 이념을 내걸고 급진적인 정치개혁을 시도하다 己卯士禍(기묘사화)로 목숨을 잃은 趙光祖(조광조)가 살던 집터. 이곳은 나중에 우리나라 최초의 초등학교인 교동소학교가 들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12월5일 새벽, 김옥균이 金虎門(금호문:창덕궁의 西門)을 두들기자 수문장이 문을 따주었다. 수문장은 김옥균의 심복이었다. 김옥균 일행은 임금이 자고 있는 편전으로 갔다. 대청 바깥에 나와 있던 柳在賢(유재현) 등 내시들이 앞을 가로막자 김옥균은 호통을 쳤다. 김옥균의 목소리를 알아들은 고종이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김옥균 일행은 왕의 침실로 들어가 『변란이 일어났다』고 아뢰고 正殿(정전)을 옮길 것을 상주했다.

이때 하늘을 진동하는 폭발음이 들렸다. 김옥균의 지시를 받은 행동대원들이 通明殿(통명전)에서 터뜨린 폭약소리였다. 통명전의 위치는 비원 입구. 편전까지는 400m 남짓하다. 패닉현상을 조성한 것이었다.

김옥균은 왕에게 일본공사에 호위병력을 요청할 것을 건의했다. 『그렇게 하라』는 고종의 윤허가 채 끝나기도 전에 민비는 『청국군에게도 요청하라』고 말했다. 김옥균은 日·淸 양측 모두에 사람을 보내는 척했지만, 청국군에는 사자를 보내지 않았다.

임금과 김옥균 일행은 창덕궁을 빠져 나와 景祐宮(경우궁)으로 갔다. 경우궁은 순조의 생모인 수빈 박씨의 사당으로서 왕으로 등극한 아들을 낳은 후궁의 위패를 모셨던 조선왕조 7궁 중의 하나다. 그 자리는 휘문고교의 부지가 되었다가 지금은 현대그룹의 계동 사옥이 들어서 있다. 김옥균은 청국군의 공격에 대비, 창덕궁보다 방어가 유리한 경우궁으로 고종을 移御(이어)시킨다는 시나리오를 준비하고 있었다.

왕이 경우궁 정전 뜰에 이르자 박영효와 다케조에가 일본군을 거느리고 달려왔다. 임금과 비빈이 자리를 잡은 뒤 개화당 요인들과 일본공사가 좌우에 도열했다. 徐載弼(서재필)이 사관생도 13명을 이끌고 임금을 시립했다. 개화당 행동대원들은 入侍(입시)하려고 경우궁에 들어오던 閔台鎬(민태호) 閔泳穆(민영목), 趙寧夏(조영하) 등 사대당 대신들을 죽였다. 李祖淵(이조연)·尹泰駿(윤태준)·韓圭稷(한규직) 등 營將(영장)과 사대당에 동조하던 내시 柳在賢도 격살되었다.

이 무렵 청국군 1개 소대가 경우궁 근처에서 동태를 살펴보고 자기 진영으로 돌아갔다. 당시 漢城 주둔 청군 1500명은 창덕궁·창경궁과 인접한 지금의 연건동 서울대학병원과 을지로 6가 국립의료원 자리에 분산하여 군영을 설치하고 있었다.

피를 많이 흘린 12월5일 새벽이 지나고 날이 밝았다. 쿠데타 이틀째인 이날, 정부요직에 대한 인사가 단행되었다. 전후영사에 박영효, 좌우영사에 서광범, 병조참판에 徐載弼이 임명되었다. 거사의 주역인 김옥균은 호조참판으로서 재정권을 장악했다.

이어 각국 공사들에게 새 정부의 수립을 통고하고 14개 개혁정책을 발표했다. 그 내용은 청국에 대한 조공 폐지, 청국에 유폐된 대원군의 환국 요구, 문벌의 폐지, 내시부·규장각 혁파 등이었다.

이런 가운데 고종과 민비는 창덕궁으로의 환궁을 요구했다. 다케조에도 경우궁이든 창덕궁이든 능히 수비할 수 있다고 장담했다. 개화당 정부는 고종을 옹위하고 창덕궁으로 되돌아오고 말았다.

개화당 정권은 창덕궁 내 觀物軒(관물헌)을 지휘본부로 삼고, 경계를 강화했다. 서재필이 사관생도들과 함께 殿內(전내)를, 일본군 140명이 대궐 안을, 4營의 군사들이 대궐 밖을 지켰다.


서울대 병원 자리가 淸軍陣營

쿠데타 3일째인 12월6일. 袁世凱(원세개)가 청병 1500명을 이끌고 창덕궁과 창경궁을 공격했다. 총소리와 포성이 들리자 왕과 민비는 북한산 쪽으로, 대왕대비와 대비는 北關廟(북관묘) 쪽으로 피신했다. 김옥균은 왕을 뒤쫓아 나섰다. 고종은 이미 궁문을 빠져나가 뒷산 기슭을 오르고 있었다. 김옥균은 임금을 만류해 다시 延慶堂(연경당:창덕궁 중앙에 위치)으로 모셨다. 창덕궁 안으로 총탄이 비오듯 날아왔다. 개화당 정권의 지휘를 받던 조선군 800명은 청국군에 가담했다.

대세가 기울자 김옥균은 왕을 모시고 인천으로 피신, 차후를 도모하려 했다. 고종은 완강히 거부했다. 다케조에도 임금을 호위하는 것이 더 위험해질 수 있다며 일본군을 퇴각시키려고 했다. 고종과 민비는 북관묘 쪽으로 피신한 대왕대비 등을 뒤쫓아 갔다. 북관묘는 중국인에게 關帝(관제)라고 추앙받는 촉한의 장수 關羽(관우)를 모시는 사당(종로구 명륜동 성균관대학교 쪽)인데, 임진왜란 후 건립되었다.

북관묘는 이미 청국군이 점령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홍영식과 朴泳敎(박영교:박영효의 형)는 임금을 따라갔다. 홍영식·박영교는 淸兵들의 칼을 맞고 목이 떨어졌다. 김옥균·박영효·서광범·서재필 등은 일본군과 함께 급히 일본공사관(현재 교동초등학교 자리)으로 퇴각했다.

이어 일본공사관은 조선군과 난민의 습격을 받았다. 김옥균·박영효 등 개화당 11명은 다케조에와 함께 日兵의 호위를 받으며 서대문을 거쳐 인천으로 도주했다. 12월9일, 이들은 일본 상선 치도세마루(千歲丸)를 타고 일본으로 망명했다.

이후 사대당은 더욱 수구적이 되고, 淸·日간의 각축은 더욱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국내에 잔류했던 개화당 관련자들은 서소문 밖 형장(지금의 서소문공원)에서 모두 참수되었다. 그들의 집도 역적 처벌의 관례에 따라 모두 헐려 못이 파여졌다.


金玉均의 집은 前 경기고 자리,

朴珪壽의 집은 헌법재판소 자리

김옥균의 집터 종로구 화동 106번지에는 경기고등학교가 위치해 있다가 강남으로 옮겨가고 이제는 정독도서관이 들어서 있다. 이 집터는 사육신의 한 사람인 朴彭年(박팽년)이 살았던 곳이다. 철종의 부마였던 박영효의 집터는 지금의 경인미술관(종로구 경운동) 자리다. 영의정을 지낸 홍순목의 둘째 아들인 홍영식은 지금의 헌법재판소(종로구 재동 83번지:前 창덕여고) 자리에서 살았다.

「홍영식 참판댁」은 갑신정변 직후 몰수당하여 1885년 4월10일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병원인 廣惠院(광혜원)이 되었다. 이 王立 병원은 개원 10여 일 만에 濟衆院(제중원)으로 이름이 바뀌었고, 1887년 구리개(을지로 2가 외환은행 본점 자리)로 이전되었다.

일찍이 김옥균·박영효·홍영식 등은 우의정을 지낸 朴珪壽(박규수·1807~1876)로부터 개화사상을 배웠다. 熱河日記(열하일기)를 지은 실학자 朴趾源(박지원)의 손자인 朴珪壽(박규수)는 고종 3년(1866) 평양감사로 있을 때 대동강을 침범한 미국의 무장상선 제너럴 셔먼號를 불질러 버렸지만, 開港(개항)을 적극 주장한 인물이었다.

박규수의 집 사랑방에는 김옥균·박영효·홍영식 등 北村(북촌)의 명문자제들뿐만 아니라 역관 吳慶錫(오경석), 한의 劉大致(유대치) 등 中人들과 奉元寺(봉원사:서대문구 봉원동)의 李東仁(이동인) 등 승려들도 드나들며 세계대세와 개항을 논했다. 수령이 600여 년이나 되는 白松(백송)이 아직도 고고한 자태를 뽐내고 있는 박규수의 집터는 홍영식의 집터 바로 뒤에 있는데, 두 곳 모두가 지금은 헌법재판소 구내로 들어가 있다.

박규수와 오경석의 사후에는 유대치가 개화파 청년들을 지도하여 白衣政丞(백의정승)이라고 불렸다. 오경석과 유대치는 中人들의 거리인 광교 부근에 살았다. 유대치는 갑신정변 실패 직후 사라져 다시는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갑신정변의 진압으로 일본세력을 견제하는 데 성공한 원세개는 그후 10년간 統理朝鮮通商交涉事宜(통리조선통상교섭사의)라는 직함을 갖고 마치 총독처럼 행세했다. 그는 李景夏의 집을 빼앗아 들었는데, 세상에서는 이곳(롯데호텔 자리)을 「袁大人陣前(원대인진전)」이라고 불렀다. 이로부터 淸商(청상)들은 구리개(지금의 을지로 입구) 일대에 진출하여 상권을 장악했다.

한편 일본으로 망명한 김옥균은 그후 10년간 민비정권에서 파견한 자객들을 피해 일본 각지를 방랑한 후 1894년 3월 이홍장과의 면담을 위해 上海로 건너갔다가 호텔 同和洋行(동화양행)의 2층 객실에서 자객 홍종우가 발사한 권총 세 발을 맞고 사망했다. 김옥균의 시신은 淸軍 군함에 실려와 조선정부에 인도되었다. 민씨정권은 양화진(지금의 양화대교 아래)에서 김옥균의 시신을 능지처참한 후 「大逆不道 玉均(대역부도 옥균)」이라는 팻말을 달아 효수했다.


淸日전쟁과 甲午更張

1894년 전라도에서 동학농민군이 봉기하자 민씨정권은 자기 힘으로 진압하지 못하고 청국에 파병을 요청했다. 청국군의 진입에 이어 일본군도 뒤따라 들어왔다. 신흥 일본을 두려워한 이홍장은 양국의 공동철병안을 제의했으나, 일본은 이를 거부하고 조선에 대한 공동간섭안을 제기했다. 일본군이 한성에 들어오자 원세개는 일본과의 교전을 겁내 급히 중국으로 돌아갔다. 원세개의 도주로 조선정부는 친일 일변도로 기울었다. 이로써 친일 개화정권이 수립되어 갑오경장이 단행되었다.甲午更張(갑오경장)의 방향은 남산 老人亭(노인정)에서 열린 조선대표 申正熙(신정희)와 일본공사 오토리(大鳥圭介)의 회담에서 결정되었다. 노인정은 지금의 남산 북쪽 기슭의 국립극장과 동국대 사이(중구 필동 2가134-2번지)에 있던 헌종의 장인 趙萬永(조만영)의 별장이었다. 이 해 7월10~15일까지 세 차례에 걸쳐 진행된 노인정 회담에서 오토리는 5개 조항의 내정개혁안을 제시하고 이를 실시할 것을 강압했다. 조선정부가 이 개혁안에 반발하자 일제는 7월23일 경복궁을 무력으로 점령하고 親日(친일)정권을 세웠다.

일본의 조종을 받은 친일정권은 청국과의 국교단절을 통고했고, 일본 해군은 서해 豊島(풍도) 앞바다에서 청국 군함과 병력 수송선을 선제공격함으로써 淸日전쟁의 막이 올랐다. 일본군은 성환전투, 평양전투 등에서 연전연승하여 요동반도의 요충 旅順(여순)·북양함대의 모항인 산동반도의 위해위 등을 함락시켰다. 힘의 부족을 느낀 청국이 화의를 제의, 1895년 4월 양국간에 시모노세키(下關)조약이 체결되었다.


奬忠壇은 乙未事變 희생자의 제단

이 조약으로 일본은 청국으로부터 요동반도, 대만, 팽호열도를 할양받았다. 그러나 러시아가 일본의 독주를 견제하려고 프랑스, 독일과 함께 「3국간섭」을 하여 요동반도의 할양을 중지시켰다. 이로부터 조선을 노린 러시아의 남하정책이 본격화된다.

이런 국제상황에 처한 민씨정권은 세력균형을 위해 親露(친로)정책을 구사했다. 일본은 친일정권 수립에 방해가 되는 민비 일파와 친로파를 거세하려고 획책했다. 고종 32년(1895) 10월8일 새벽, 일본공사 미우라(三浦梧樓)는 수비대를 보내 공덕동 我笑亭(아소정)에 칩거하던 흥선군을 호위하고 서대문으로 향했다.

한강변 공덕리에 있던 아소정은 실각한 대원군이 물러나 한을 달래던 곳이었다. 지금은 白凡路邊(백범로변)에 위치한 동도중·공고의 운동장이 되어버려 그 흔적조차 찾을 수 없다.

이날 새벽 5시경, 파루의 종이 울리면서 서대문이 열리자 미우라는 일본수비대 병사와 낭인 등을 이끌고 경복궁으로 침입, 옥호루에서 민비를 찾아내 칼로 난자하고 시신을 불태워 버렸다. 이때 훈련대 연대장이며 민비의 심복인 洪啓薰(홍계훈)과 궁내부대신 李耕植(이경식) 등도 피살되었다. 이것이 乙未事變(을미사변)이다.

을미사변·갑신정변·임오군란 때 순국한 대신과 장병들을 제사하기 위해 1900년에 설치한 제단이 중구 장충단공원 한복판에 있는 奬忠壇(장충단)이다. 장충단이라는 예서체의 글씨는 고종황제가 썼다.

서대문은 일제 때인 1915년 市구역 改修(개수)계획이라는 명목으로 도로를 확장하면서 헐리고 말았다. 일제는 서대문의 목재·기와·석재 등을 경매했다.

대원군은 미우라에 업혀 정권을 장악했으나 미우라가 본국 법정으로 소환되자, 정권을 내놓고 다시 은퇴했다. 1898년 그가 죽었을 때 아들 고종이 장례식에도 나타나지 않을 만큼 부자관계는 악화되어 있었다. 하지만 고종은 상여가 孔德里(공덕리:마포구 공덕동) 묘지를 향해 나갈 때만은 西大門 밖에 친히 나가 전송을 하면서 대성통곡했다고 한다.


俄館播遷과 대한제국

을미사변으로 국민의 對日감정이 극도로 악화되고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났다. 고종은 강원도 原州(원주)와 충청도 洪城(홍성)에서 봉기한 의병들을 은근히 지원했다. 전국이 소란해지자 러시아 공사 웨베르는 공사관 보호라는 명목으로 水兵 100명을 서울로 데려왔다.

이에 親露派(친로파) 李範晉(이범진:포도대장 李景夏의 아들) 등은 웨베르와 공모하여 1896년에 국왕을 궁궐로부터 정동에 있는 러시아 공관으로 모셨다. 이것이 俄館播遷(아관파천)이다.

이때 친일내각의 총리 金弘集(김홍집) 등은 육조거리에서 난민들에게 돌멩이를 맞아 살해되고, 내부대신 兪吉濬(유길준) 등은 일본으로 망명했다. 이어 李範晉(이범진)·李完用(이완용)의 친로내각이 조직되었다. 국왕이 러시아공사관에 체류하고 있던 1년 동안 모든 정치는 러시아의 수중에 있었다. 당시 탁지부 고문 알렉세예프는 사실상 재무장관이나 다름없었다.


러시아공사관은 경향신문사 뒤 언덕에

지금의 경향신문사 사옥 뒤쪽 언덕에 위치한 러시아공사관은 이후에도 러시아 남하정책의 전진기지가 되었다. 볼셰비키혁명 뒤에는 소련의 영사관으로 재차 개설되어 공산주의 선전본부가 되었으며, 광복 후에도 한동안 존속하다가 철수했는데, 6·25 사변 때 건물이 파괴되고 말았다. 웨베르가 활약하던 시기에 경성 사교계의 무대가 되었던 것이 손탁호텔이었다. 손탁은 러시아공사 웨베르의 처제였다. 손탁호텔은 러시아공사관 입구인 지금의 정동 이화여고 옆에 있었다.

고종은 러시아공사관에 머물면서 慶運宮(경운궁)과 慶熙宮(경희궁) 사이를 잇는 虹橋(홍교)를 건설하여 두 궁을 연결하고 경성역을 남대문에서 홍교 아래로 옮겨놓았다. 1889년 서대문-청량리 간 전차가 개통된 이후에는 虹橋 아래로 전차가 왕래했다. 이 거대한 石造(석조) 육교는 폴란드系 러시아인의 설계로 우리나라 서양건축의 鼻祖(비조)라 할 수 있는 沈宜碩(심의석)이 시공했다.

심의석은 원래 목수로서 미국 감리교 선교사들이 배재학당을 지을 때 서양건축 기술을 배웠다. 그는 이어 독립문·석조전·원구단 등의 건설에도 참여했다. 홍교는 韓日(한일)합병 후 서대문로를 확장하면서 헐렸다.

고종이 환궁할 장소로 택한 곳은 민비가 시해당한 正宮 경복궁이 아닌 慶運宮(경운궁:나중의 덕수궁)이었다. 경운궁은 영국·미국·러시아의 공사관과 이웃해 있어 우려되는 일본군의 침입에 대처하는 데 유리한 위치였다.

고종은 경운궁을 正宮(정궁)으로 삼기 위해 아관파천 기간 중 궁궐의 신축공사를 진행시켰다. 중화전·함녕전·선원전·경효전·흥덕전·사성당 등 여러 전각들이 이 때 완성되었으며, 특히 준명당·정관헌·구성헌 등의 洋館(양관)들도 궁궐 안에 들어섰다.

당시의 경운궁은 그후 거듭된 도시계획 등으로 축소된 지금보다 훨씬 넓었다. 1897년 2월, 고종은 러시아공관을 나와 경운궁에 移御(이어)했다.

경운궁 공사는 移御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경운궁 內의 본격적인 양식건물인 石造殿(석조전)은 1900년에 착공되어 1910년에 완공되었다. 고종은 석조전 2층에서 기거했다.


高宗황제 즉위식이 거행된 곳은 지금의 조선호텔

당시 貞洞은 서구인들의 거주지였다. 지금 貞洞 미국대사의 관저는 당시의 미국공사관 자리다.

미국공사관 자리는 고종이 미국의 선교사(北장로회 목사)이자 의사였던 호레이스 알렌에게 하사한 토지다. 알렌은 갑신정변 때(1884) 부상한 민영익을 고친 것이 고종의 신임을 받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알렌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근대병원인 廣惠院(광혜원)을 세우는 사업을 주도하는 한편 서양의술을 가르쳤다. 그는 대한제국 시절에 미국의 대리공사가 되었다.

경운궁으로 환궁한 직후, 고종의 황제 즉위를 촉구하는 朝野(조야)의 상소가 쇄도했다. 1897년 8월, 自主國임을 표방하기 위해 연호를 光武(광무)라고 정했다. 이어 10월 초에는 회현방(지금의 소공동)의 南別宮(남별궁) 자리에 圓丘壇(원구단)을 지었다.

10월12일, 고종은 거기서 하늘에 제사를 올린 다음 황제 즉위식을 거행했다. 大韓帝國(대한제국)의 탄생이었다. 이어 11월에는 비명에 간 민비를 명성황후로 올려 국장을 거행했다.

원구단은 웨스틴조선호텔 境內에 있다. 남별궁은 원래 태종의 차녀 慶貞공주가 趙大臨(조대림)에게 출가하여 살던 저택이어서 小公主宅으로 불렸다. 오늘날 이 일대를 小公洞이라 부르는 것은 여기에 연유한다. 소공동은 일제 때 조선주차군사령관이었던 하세가와(長谷川好道)의 이름을 따 長谷川町(장곡천정)이라고 했다.

이곳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왜장 우키다 히데이에의 주둔지가 되었다. 이듬해에는 明將 이여송이 여기서 머물렀다. 그 뒤에도 남별궁은 明, 淸의 사신을 접견하는 장소로 사용되었다.


개화기의 皇都

대한제국과 독립협회

조선이 대한제국이 되면서 서울은 조선의 王都(왕도)에서 대한제국의 皇都(황도)가 됨으로써 상징적 위상이 바뀌게 되었다. 서울을 皇都로 개조하기 위한 노력은 경운궁의 건설 이외에도 여러 방면으로 진행되었다. 가장 두드러진 것은 조선 초 이래 큰 변화가 없던 서울의 도로체계가 경운궁을 중심으로 개조되었다는 점이다.

즉, 경운궁을 중심점으로 북쪽으로 현재의 태평로에서 세종로로 이어져 경복궁에 이르는 길, 동쪽으로는 구리개길(현재의 을지로), 동남쪽으로는 현재의 소공로, 남쪽으로는 남대문으로 이어지는 길 등으로 방사형 체계를 이루었다. 그러나 근대도시를 지향한 대한제국의 皇都 건설은 곧 일본의 침략으로 중도에서 좌절되고 만다.


前 배재고 자리에서 독립신문 발간

1896년 4월7일, 우리 역사상 최초의 민간신문인 독립신문이 창간되었다. 아관파천 2개월 후의 일이었다. 독립신문의 대표자는 徐載弼이었고, 부책임자는 한글학자 周時經(주시경:1876~1914)이었다.

서재필은 갑신정변 후 미국으로 망명, 갖은 고초를 겪으면서 워싱턴대학 의학과를 졸업하고 개업의로 활동하다 金弘集(김홍집) 내각에 의해 사면을 받고 10년 만에 귀국했다. 독립신문의 사옥은 지금의 기독교 대한감리회 정동제일교회(1898년에 설립된 한국 최초의 개신교 교회) 남쪽 배재공원(옛 배재학당 자리) 안에 있었다.

배재학당은 우리나라에 최초로 서양문물을 소개한 신교육의 발상지다. 이 학당은 미국 선교사 아펜셀러 목사가 1885년 3월에 설립했는데,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李承晩(이승만) 등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배재학당 자리에는 1984년 2월 배재중고등학교가 강동구 고덕동으로 이전한 뒤 체이스맨하탄은행의 서울지점 건물과 러시아대사관(신축중)이 들어서 있다.

1896년 7월, 서재필을 중심으로 李商在(이상재), 尹致昊(윤치호), 李承晩이 적극 참여한 독립협회가 결성되었다. 독립협회가 태동된 곳도 배재학당이었다. 결성 초기에는 안경수, 李完用(이완용) 등 정부 요인도 다수 참가했다. 1897년 11월, 독립협회는 청국 사신을 맞던 迎恩門(영은문)을 헐고 그 자리에 獨立門(독립문)을 세웠다. 또한 중국 사신을 접대하던 慕華館(모화관)을 허물고 그 자리에 독립회관을 지었다.

1898년 독립협회 주최로 종로 광장에서 만민공동회가 열려 시국에 대한 6개조의 개혁안이 결의되었다. 독립신문은 친로파 정부와 탐관오리를 서슴없이 비판하고, 러시아의 내정간섭과 이권개입을 폭로함에 따라 정부로부터 탄압을 받아 1898년 11월 해산당했다. 독립신문은 1899년 12월4일자로 폐간되었다.


서대문-동대문-청량리 간 電車 통행

우리나라에 근대적 교통수단으로 전차가 처음 등장한 것은 1899년이었다. 고종은 비명에 간 명성황후(민비)의 묘가 있던 洪陵(홍릉:당시엔 청량리 천장산 언덕에 소재:1919년 경기도 미금시 금곡동 141-1로 이전. 지금 홍릉동엔 묘가 없다)에 자주 행차했다. 행차 때마다 가마를 탄 많은 신하들을 거느려 그 경비가 적지 않았다.

이것을 본 미국인 콜브란이 고종에게 전차의 부설을 건의했다. 이 電車(전차)사업은 황실과 콜브란 등 미국인이 50대 50으로 합작한 한성전기회사가 설립됨으로써 급속히 추진되었다. 동양에서는 일본 東京에 이어 두 번째로 전차가 다니게 되었다.

전차 개통일은 마침 초파일이었다. 여덟 대의 전차에 내외 귀빈들을 태우고 서대문에서 동대문으로 달렸다. 그러나 개통 열흘 만에 불상사가 발생했다.

당시 가뭄이 심했는데, 전차가 공중의 물기를 모두 흡수해 버린 탓이라는 유언비어가 시중에 번져나갔다. 그런 판에 어린아이가 전차에 치어 사망한 사건이 일어났다.

이를 본 시민들이 돌을 던지며 달려들자, 일본인 운전사는 도망갔다. 전차는 방화로 불타버렸다.

하지만 전차는 속도가 빠르고 편했기 때문에 서울의 교통수단으로 자리잡았고, 채산성이 좋아지자 노선도 점차 확장되어 갔다.

서대문에서 청량리까지 전차가 운행되고, 제물포(인천)-노량진 간 京仁철도 부설공사가 시작된 1898년부터 인구 20만의 서울은 근대도시의 외양과 함께 대한제국 수도로서의 얼굴을 갖추어 간다.

이 무렵, 동대문 밖에서 홍릉에 이르는 길은 우리나라 최초로 가로수가 있는 길로 다듬어졌다. 또한 원각사 터에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공원인 탑골공원이 조성되었다.


러·일전쟁과 을사보호조약

1904년 2월8일 밤, 旅順(여순)과 인천에서 일본군의 기습으로 러·일전쟁이 발발했다. 1905년 1월2일에는 러시아의 극동 요새 여순이 함락되고, 3월10일 奉天會戰(봉천회전)에서도 일본이 승리했다.

이어 5월27일 러시아의 발틱함대가 東海海戰(동해해전)에서 일본 연합함대에 의해 괴멸되었다. 미국의 중재로 9월5일, 러·일간에 포츠머드 강화조약이 체결되었다. 이로써 南만주는 물론 한반도까지 일본의 지배下에 들어가게 된다.

1904년 8월에 체결된 韓日의정서에 의해 남대문 밖 용산 일대는 거대한 일본군의 군사기지로 변모하기 시작한다. 韓日의정서 제4조는 일본이 「군략상 필요한 지점을 수시로 사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되어 있었다. 이 조항을 내세워 일제의 한국주차군사령관은 군용지로서 용산의 300만 평을 수용하겠다고 한국정부에 통고했다.

이어 일본은 남대문 밖에서 한강에 이르는 광활한 땅을 탈취하여 마음대로 경계를 정하고 군사기지를 건설했다.

1905년 러·일전쟁에서 승전한 일제는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당시 추밀원장)를 특파대사로 파견하여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는 을사보호조약 체결을 강요했다. 11월18일 새벽 2시, 을사보호조약은 다섯 대신에 의해 서명되었으나 최고 주권자인 고종의 재가를 받지 못했다.


閔泳煥의 집은 조계사 경내에

조약 강제 체결의 소식이 알려지자 전국은 분노에 휩싸였다. 시종무관장 閔泳煥(민영환)은 2000만 동포에게 보내는 유서를 남기고 칼로 목을 찔러 자결했다. 다음날 특진관 趙秉世(조병세)가 국민과 각국 공사에게 보내는 유서를 남기고 자결하는 등 분사자가 잇따랐다. 민영환의 집터는 현재 종로구 견지동 조계사 境內(경내)로 들어가 있다.

1906년 2월에는 통감부가 설치되었다. 한국통감부는 조선왕조 역대 왕의 신위를 모신 종묘를 正南에서 마주보는 자리, 대한제국의 본궁 경운궁이 내려다보이는 남산 아랫자락에 세워졌다. 지금 숭의여자대학과 리라초등학교가 들어서 있다.

1907년 4월20일, 고종 황제는 만국평화회의가 열린 네덜란드 헤이그에 3명의 밀사를 파견했다. 헤이그 밀사 파견은 자신이 비준하지 않은 을사보호조약의 무효화를 거듭 꾀한 것이다. 일본은 이를 기회로 고종을 帝位(제위)에서 축출할 방침을 세웠다.

1907년 7월3일, 경운궁으로 입궐한 일본 외무대신 하야시(林權助)와 통감 이토는 고종 황제에게 『그와 같은 음험한 수단으로 일본의 보호권을 거부하려거든 차라리 일본에 대해 선전포고하라』고 협박했다. 그때 남산에 배치된 일본군은 대포로 궁궐을 조준하고 있었다.

고종은 끝까지 수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日帝는 7월19일에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켰다. 7월20일 오전 8시, 경운궁의 中和殿(중화전)에서 고종의 양위식이 거행되었다. 그러나 고종은 참석하지 않았다. 고종황제는 순종에 의해 황궁이 창덕궁으로 옮겨진 후에도 경운궁에서 거처했다. 이 때부터 경운궁은 고종의 長壽(장수)를 비는 뜻에서 德壽宮(덕수궁)이라 부르게 되었다. 새 황제 純宗(순종)은 고종의 둘째 아들로서 1874년 창덕궁 관물헌에서 태어났다.


西小門 시가전

순종 즉위 5일째인 7월24일, 이완용과 이토 사이에 丁未(정미)7조약이 체결되었다. 거기에는 조선 정부가 시정의 개선에 관하여 통감의 지도를 받을 것과 재정 및 중요 행정상의 처분은 미리 통감의 승인을 얻을 것 등이 규정되었다. 특히 정미7조약의 부속 각서에는 군대 해산에 관한 조항이 있었다.

1907년 8월1일, 군대해산의 명이 떨어지자 시위대 제1연대 제1대대장 박성환 참령(소령)이 분노하여 권총으로 자신의 머리를 쏘아 자결했다. 그가 남긴 유서는 이러했다.

「군인으로서 나라를 지키지 못하고 신하로서 충성을 다하지 못했으니 만 번 죽어도 아까울 것이 없다」

박성환의 유서는 사실상 궐기를 촉구하는 격문이었다. 시위대 제1연대 제1대대와 제2연대 제1대대는 해산을 거부하고 일제히 봉기했다.

이들은 병영 주위에 경계병을 배치하고, 일본군과 결전할 태세를 갖추었다. 시위대가 주둔한 南別營(남별영)은 지금의 서소문동 58-17번지 명지서소문빌딩(현재 개축공사중:동아그룹 빌딩 정문 건너편) 일대에 위치하고 있었다.

이때 이 두 대대의 병영과 무기를 인수하기 위해 일본군 보병 제51연대 제10중대가 접근했으나 시위대 병사의 집중사격을 받고 퇴각했다. 일본군은 제10중대에게 제1연대 제1대대를 계속 공격케 하면서, 기관총 등으로 화력을 증강한 제51연대 제9중대와 공병을 투입했다.

또 기관총 2정을 남대문 벽루에 고정시켜 원거리 사격으로 제9중대와 제10중대의 공격을 지원했다. 그러나 시위대의 저항이 완강하여 접근이 어렵게 되자 다시 1개 중대를 더 투입했다. 교전중 일본군 제9중대장 가지오(梶原) 대위가 전사했다.


서소문동 명지빌딩 개축으로 성벽 파괴

일본군은 교착상태를 타개하기 위해 공병 폭파조를 투입하여 시위대 병영을 폭파했다. 진지가 파괴되고 탄약마저 떨어진 시위대 병사들은 병영에 돌입한 일본군과 백병전을 벌였으나 오래 버티지 못하고 병영에서 철수하여 성 밖으로 탈출했다. 패세를 만회하지 못하자 李忠純(이충순) 참위(소위)는 지금의 중앙일보 사옥 정문 앞에서 장렬하게 자결했다.

이 전투에서 일본군은 25명의 사상자가 났고, 시위대는 68명이 전사하고, 104명이 부상했으며, 516명이 포로가 되었다. 탈출한 시위대 병사들은 지방으로 내려가 의병 대열에 합류함으로써 이후 의병 투쟁이 확대되는 계기를 마련했다.

명지서소문빌딩-대한상공회의소 건물 뒤편 서소문 골목길에는 불과 수삼 년 전만 해도 조선시대의 石築(석축) 성벽이 50m쯤 남아 있었다. 그런데 명지서소문빌딩이 개축되면서 그 자취가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7. 日帝시대의 京城

조선총독부 시대의 전통 파괴

1909년 10월26일, 이토가 만주 하얼빈 역에서 安重根(안중근) 의사에게 권총 세 발을 맞고 사망했다. 이를 기회로 삼아 일본은 조선을 병합하려고 했다. 1910년 5월, 육군대신 데라우치(寺內正毅)가 3대 통감으로 임명되었다. 대한제국에 부임한 그는 헌병경찰제를 강화했다. 만반의 준비를 마친 그는 이완용을 앞세워 8월22일 韓日합방조약을 체결했다.

1910년 8월29일, 이 조약에 따라 대한제국은 일본제국에 합병당했다. 이날 경복궁 근정전에는 일장기가 게양되었다. 순종 황제가 퇴위당한 직후 창덕궁 仁政殿(인정전)에도 황제를 상징하는 日月圖(일월도) 대신 鳳凰圖(봉황도)가 내걸렸다. 그해 10월에 공포된 조선총독부 지방관제에 의해 漢城府는 경기도 소속의 京城府로 격하되었다. 1914년에는 대한제국의 자주권을 상징하던 원구단이 철거되고, 그 자리에 총독부 철도국이 운영하는 조선호텔이 신축되었다.

일제는 합병과 동시에 식민지 지배의 총본산으로 조선총독부를 설치했다. 조선총독부 청사는 남산의 통감부 건물이 한동안 그대로 사용되었다.

한국 강점 직후, 조선총독부는 남대문에서 서울역에 이르는 도로를 개수한 데 이어 1911년에 黃金町(황금정:지금의 을지로), 1912년에는 太平通(태평통:지금의 태평로)을 확장했다. 황금정은 일본인의 거주지인 南村(남촌)의 主도로가 되었으며, 총독부에서 서울역을 거쳐 용산에 이르는 남북축 도로와 함께 京城 도로망의 기본골격이 되었다. 1917년 10월에는 한강인도교가 준공되었다.

일제 식민지 지배방식은 기본적으로 무단통치였다. 강점 초기 일제는 헌병을 경찰로 둔갑시켜 1919년까지 헌병경찰제를 시행했다. 조선헌병대사령부는 지금의 중구 필동 1가 남산골 한옥촌마을(前 수경사 자리)에 있었다. 조선헌병대사령부는 1919년 3·1운동을 진압한 주역이었다.


삼성제일병원은 일본군 홍등가

당시 일본은 公娼(공창)제도를 인정하는 나라로서 군인들을 위한 性的(성적) 하수도가 필요했다. 그래서 지금의 동국대 후문에서 삼성제일병원에 이르는 곳에 「신마치(新町)」라고 부르는 홍등가가 들어섰다.

지금 청와대 자리로 옮기기 전의 조선총독 관저는 남산 중턱에 있었다. 지금의 서울시정개발연구원(前 南山 안기부 청사) 자리다. 이곳에 오르면 종묘와 창덕궁이 정면으로 내려다보인다. 조선총독부의 제2인자인 정무총감의 관저는 지금의 중앙대학병원과 이웃한 중구 필동2가 80의 20번지 한국의 집 자리에 있었다.

韓日합방 이후에는 충무로, 명동에 이르는 지역이 완전한 일본인 거주지역으로 변했다. 황금정(지금의 을지로)도 본정통(지금의 충무로)과 함께 일본인 거주지의 중심가로 성장한다. 일제의 식민통치가 지속되면서 1910년대까지만 해도 균형을 이루던 北村과 南村의 경제력이 1920년대에 이르러 현저한 차이를 보이게 되었다. 일제당국의 재정지출이 일본인 거류지에 편중되었기 때문이다.


3·1 운동과 폭탄 투척사건

1919년 3월1일 정오, 탑골공원에서 터져나온 「대한독립만세」의 함성은 곧 전국 각지로 확산되었다. 3·1독립선언서 2만 매가 인쇄된 곳은 天道敎(천도교) 계통의 인쇄소인 普成社(보성사)였다. 보성사는 지금의 조계사 후문 뒤쪽 종로구 수송동 44번지에 있었다. 민족대표 33인 중 28인이 모여 탑골공원 쪽과는 별도로 독립선언식을 거행한 장소는 요리집 泰和館(태화관)이었다. 태화관은 지금의 인사동 태화빌딩과 하나로빌딩 사이에 있었다. 이 자리는 안동김씨의 세도가 金興根(김흥근)의 집터였는데, 한때 이완용이 살기도 했다.

3·1 운동의 진원지 탑골공원은 1467년에 세워진 불교사원 원각사 자리였다. 이곳에는 국보 2호로 지정된 원각사지 10층 석탑 등이 보존되어 있으며 3·1 운동 때의 민족대표 孫秉熙(손병희)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당시 시위의 중심지는 보신각 일대 종로거리였다.

3·1 운동 직후 무단통치를 강행하던 데라우치 총독이 물러나고 사이토(齋藤實) 총독이 부임했다. 이때 남대문역에서 姜宇奎(강우규) 의사가 승용차를 탄 신임 사이토 총독에게 폭탄을 던졌다. 사이토는 무사했으나 3명이 사망하고 34명이 부상했다. 강우규는 거사 15일 후 체포되어 1919년 11월29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처형당했다.

1900년에 건설된 남대문역은 현재의 서울역과 염천교 중간(중구 봉래동 2가 288번지)에 위치한 2층 목조 건물이었다. 현재 서울역 청사로 사용되고 있는 경성역은 1922년 6월에 착공되어 1925월 6월에 준공된 것이다.

1921년 9월12일 오전 10시 중국에서 잠입한 의열단원 金益相(김익상) 의사가 조선총독부에 폭탄을 던졌다. 당시의 총독부는 南山의 숭의여자대학과 리라초등학교 자리에 있었다. 거사 후 김익상은 다시 중국으로 망명했는데, 日帝의 총리를 지낸 군벌 다나카(田中義一)를 上海(상해)에서 암살하려다 미수에 그치고 현장에서 체포되는 바람에 총독부 폭탄 투척사건까지 드러나 20년형을 살았다.


제일은행 본점 자리는 日帝의 종로경찰서

지금의 종로2가 제일은행 본점 건물은 일제 때 종로경찰서 자리였다. 당시 종로경찰서는 독립운동가 탄압으로 악명을 떨치던 곳이었다. 이런 종로서에 중국으로부터 잠입한 의열단원 金相玉(김상옥) 의사가 1923년 1월12일 폭탄을 던져 경찰 등 10여 명에게 중경상을 입혔다. 현장에서 몸을 피한 그는 후암동 친척집에 은신하다가 1월17일 새벽에 무장경찰 20여 명에게 포위되어 총격전을 벌였다. 김상옥은 순사 1명을 사살하고 수명에게 중상을 입힌 후 눈이 쌓인 남산으로 잠적했다.

일제는 경찰과 군대를 동원하여 남산 일대를 수색했으나 김상옥은 포위망을 벗어났다. 이후 그는 승복 차림으로 변장하고 왕십리, 수유동 등지로 전전하다가 효제동에 살던 동지 이혜수의 집에 은신했다. 이 사실을 탐지한 일본 경찰 1000여 명은 경기도 경찰부장 우마노(馬野)의 지휘 아래 효제동 일대를 겹겹이 포위했다.

김상옥은 양손에 권총을 쥐고 1시간 이상의 접전 끝에 구리다(栗田) 경부 등 16명을 살상했다. 실탄이 다하자 그는 마지막 남은 한 발로 자결했다. 이때 그의 나이 34세였다. 김상옥의 묘는 동작동 국립묘지에 있다.

조선식산은행과 동양척식주식회사(동척)는 일제의 대표적 경제 수탈 기구였다. 식산은행은 현재의 중구 소공동 롯데호텔 자리에, 동척은 중구 을지로 2가 외환은행 본점 자리에 있었다. 1926년 12월 말 의열단원 羅錫疇(나석주)는 후원자 金昌淑(김창숙) 등의 밀명을 받고 폭탄과 권총을 휴대하고 중국에서 서울로 잠입했다.

12월18일 오후 2시경, 나석주는 식산은행에 폭탄 한 개를 던졌으나 불발에 그쳤다. 그는 식산은행에서 나와 길 건너 동척으로 진입, 동척 사원 수명에 대해 총격을 가해 살상하고 폭탄을 던졌으나 역시 터지지 않았다. 이어 그는 현장으로 달려오던 경기도 경찰부 경부 다하타를 사살했다. 그러나 추격을 더 이상 피할 수 없었던 그는 자신의 가슴에 권총 3발을 쏘아 자결했다.


천도교중앙대교당은 3·1 운동의 발원지

일제시대 조선인들의 대표적인 옥내 집회장소는 천도교중앙대교당(종로구 경운동 88번지)과 황성기독교청년회관(종로2가 YMCA)이었다. 당시엔 이 두 곳 이외엔 많은 사람을 수용할 만한 조선인 소유의 건물이 없었다. 천도교중앙대교당은 3대 교주 孫秉熙(손병희)가 全교인 매호당 10圓(원) 이상씩 갹출하여 모은 돈으로 1918년 12월에 준공시킨 건물이다. 여기가 바로 1919년 3·1 독립선언문을 검토하고 독립선언서를 배부한 곳이다. 1920~26년에 천도교를 배경으로 발행된 종합잡지 開闢(개벽:통권 90호)의 발행처도 이곳에 있었다.

일제는 식민지 통치를 수행하면서 체제에 저항하는 조선인은 가차없이 체포·투옥했다. 일제시대 서울에는 현저동의 서대문형무소와 마포 공덕동의 경성형무소가 있었다. 정치범이나 사상범은 주로 서대문형무소에 수용되었다.

3·1 운동 때는 서대문감옥에 독립선언서의 첫번째 서명자 孫秉熙 등 관련자 30여 명이 수감되었다. 아우내 장터에서 독립만세를 부른 만 15세의 이화학당 여학생 柳寬順(유관순)이 서대문감옥에 수감된 것도 이 때의 일이다. 서대문형무소의 위치는 독립회관이 있던 자리를 차지, 독립문이 내려다보이는 곳이다. 「독립운동을 하면 감옥에 간다」는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서대문형무소는 광복 후 서대문교도소로 이름이 바뀌어 최근까지 존속했다. 이곳 사형장에서 1959년 進步黨(진보당)사건으로 曺奉岩(조봉암)이, 朴正熙 대통령 시해사건으로 金載圭(김재규)가 1980년 처형되었다.


일본인 거리, 진고개~필동

일제 때 남산 기슭은 일본인 거주지였다. 일본인이 많이 살았던 곳은 남대문로에서 동쪽으로 들어간 진고개(泥峴)에서 필동에 이르는 일대였다. 진고개는 원래 좁은 진흙탕 길이었다. 그러나 일본 사람들이 많이 들어와 도로가 확장되고 상가가 번성했다. 남대문로에서 들어가는 진고개 입구에 일본영사관이 있었고, 배후의 남산 중턱에는 일본공사관이 있었다. 1906년 2월1일 제2차 韓日협약에 따라 한국통감부가 설치되자 공사관이 폐지되어 통감 관저로 되었다.

현재의 명동(일제시대에는 明治町) 일대는 京城府청사, 조선은행, 미쓰코시(三越)백화점 경성지점을 비롯한 각종 기관들이 집중되어 있어 상업과 정치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지금은 한국은행이 조선은행, 신세계백화점이 미쓰코시백화점 경성지점, 제일은행 제일지점이 조선저축은행 본점, 미도파백화점이 조지아(丁子屋)백화점의 건물을 각각 차지하고 있다.

日帝는 조선왕조가 개국 초에 「木覓大王(목멱대왕)」이라는 작위를 부여한 남산을 그들의 국교인 신토(神道)의 聖地(성지)로 만들었다.

1925년, 이들은 조선왕조 시절 國泰民安(국태민안)을 기원하던 國師堂(국사당)을 허물고, 그 자리에 朝鮮神宮(조선신궁)을 건립했다. 조선신궁을 그들이 國祖(국조)로 받드는 天照大神(천조대신)과 메이지(明治) 천황을 祭神(제신)으로 하는 日帝의 최대급 官幣神社(관폐신사)였다. 남대문의 동쪽 끝에서부터 조선신궁에 이르는 참배로의 조성에는 남대문-남산 꼭대기 구간의 성벽을 부수어 建材(건재)로 사용했다. 조선신궁이 있던 자리에는 지금 남산식물원이 들어서 있고 그 아래쪽에는 안중근 의사 동상과 기념관이 건립되어 있다.

조선총독부는 1926년 10월에 경복궁 근정전 앞에다 새 청사를 짓고 이전했다. 근정전은 왕이 백관을 거느리고 정무를 보던 조선왕조의 심장부였다.

근정전을 가로막아 버린 지상 4층의 이 화강암 총독부 건물은 일본을 상징하도록 日자 형으로 설계되었다. 조선총독부 건물은 일제 패망 후 美 군정청, 중앙청, 국립박물관으로 사용되었는데, 1995년 해방 50주년을 기념하여 철거되었다.

1926년 11월에는 지금 서울시청 건물로 쓰이고 있는 京城府 청사도 완공되었다.

합병 당시 경성부 청사는 지금의 신세계백화점과 제일은행 제일지점 자리에 있던 통감부 시절의 理事廳(이사청:일본영사관) 건물을 그대로 사용했다. 이후 직원수와 업무량이 늘어나자 넓은 청사가 필요하게 되어 덕수궁이 내려다보이는 자리에 신축하게 되었던 것이다.

일제는 광화문에서 남대문으로 이어지는 조선왕조의 남북축을 조선총독부-경성부청-서울역-용산으로 이어지는 축으로 대치했다. 경복궁이 위치한 북악에서 남산의 국사당으로 이어지던 상징축도 조선총독부에서 조선신궁으로 이어지도록 탈바꿈시켰다.


신라호텔 자리는 伊藤博文 명복 빌던 곳

1932년, 일제는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명복을 빌기 위해 남산 기슭에 博文寺(박문사)를 지었다. 박문사의 山門은 慶熙宮(경희궁)의 정문인 興禮門(흥례문)을 뜯어 옮긴 것이었다. 현재 신라호텔이 들어선 박문사에서는 을미사변 때 순국한 영령을 모시는 奬忠檀(장충단)을 굽어볼 수 있었다.

1926년 이전 경성의 모습이 총독부 권력의 주도로 형성된 것이라면, 이후의 경성의 모습은 식민지 자본주의 토대 위에서 형성되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미나카이상점, 히라다상점, 미쓰코시백화점 등 진고개 일대에 자리잡은 일본인 상점들이 「불야성을 이룬 별천지」로 비쳐 아직 근대 시가의 모습을 갖추지 못한 조선인들의 전통적 상가 종로를 압도했다.

그러나 종로도 변하기 시작했다. 1928년 무렵에는 동아부인상회나 유창상회 등 신축 상점이 잇따라 들어서기 시작했다. 1930년대 종로 상권의 중심이었던 화신백화점은 朴興植(박흥식)이 종로 네거리에 있던 신태화의 화신상회를 1931년에 인수하여 1937년 지하 1층 지상 6층으로 신축한 것이다. 화신백화점은 시설면에서 당시로는 첨단을 걸어 엘리베이터와 에스컬레이터가 설치되었다. 화신백화점은 1990년대에 헐리고 지금은 超현대적인 종로타워(국세청 청사)가 들어서 있다.

1937년 7월 일본이 중국대륙에 대한 본격적인 침략을 감행함으로써 조선은 전시체제로 들어갔다. 경성에서 주목할 만한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한 것은 1941년 태평양전쟁이 발발한 전후의 시기였다. 변화의 중심은 군수산업 공장지대인 영등포와 물류의 중심인 용산이었다.

1930년 이후 용산의 철도부지 50만 평 위에는 철도국, 철도병원, 철도국 관사, 철도공장 등이 잇따라 들어섰고, 1940년대에는 주둔군의 규모가 커짐에 따라 兵營化(병영화)했다. 일찍이 시흥군의 군청 소재지였던 영등포는 일제 강점 이후 방적공장, 기계공장, 장유공장, 맥주공장 등 근대적 공장이 집중되었다.

1944년 11월 미군기의 東京 폭격의 충격으로 조선총독부는 疏開(소개) 정책을 시행했다. 소개지구 가운데 종로-필동 사이(폭 50m, 길이 1200m)와 경운동-남산 사이에 이르는 疏開空地帶(소개공지대) 조성사업이 1945년 6월 말에 완료되었다. 이 공터에 광복 직후의 행정 공백기 때 판잣집이 들어차는 바람에 두고두고 서울의 골칫거리가 된다.

8·15 광복을 꼭 3주 앞둔 1945년 7월24일, 府民館(부민관:중구 태평로 `1가 61번지 코리아나호텔 옆)에서 개최된 친일강연회장에서 폭탄이 터졌다. 朴春琴(박춘금) 등 친일파가 일제의 「대동아전쟁」 수행에 조선인의 협력을 촉구하는 연설을 하던 연단을 향해 趙文紀(조문기)·柳萬秀(유만수)·康潤國(강윤국) 등 3인의 의사가 폭탄을 던졌던 것이다. 일제 때 종합공연장이었던 부민관은 광복 후 국회의사당으로 쓰이다가 이제는 서울시의회 청사가 되었다.


8. 광복 후의 서울

현대그룹 사옥 건너편에 建準본부

1945년 8월15일, 일본제국이 연합국에게 무조건 항복했다. 광복된 서울에서는 좌익세력이 먼저 활동했다. 이날 아침, 呂運亨(여운형)은 조선총독부에서 엔도 정무총감과 회견했다. 이날 저녁, 여운형은 齋洞(재동) 84-2번지 임용상의 2층 양옥집에다 건국준비위원회(建準)의 본부를 설치하고 조직 활동에 들어갔다.

임용상은 마포 客主(객주) 출신의 부호로서 400여 평에 달하는 그의 재동 집(현대그룹 계동 사옥 주차장 건너편)을 여운형에게 헌상했다. 지금은 LG그룹의 공동 창업자인 許씨의 가족이 살고 있다.

8월16일, 여운형은 서대문형무소로 가서 사상범·경제범의 석방에 입회했다. 같은 날 오후 1시, 지금의 현대그룹 자리인 계동의 휘문중학교에서 광복 후 첫 정치집회가 열렸다. 建準(건준) 위원장 여운형은 수천 명의 군중 앞에서 정무총감 엔도와의 협상 내용을 알리는 한편 독립을 쟁취하고 건국에 나서자고 열변을 토했다. 여운형의 집터는 현대사옥 주차장 뒷담에 붙어 있는데, 지금 그 절반이 「안동손칼국수집」으로 사용되고 있다. 여운형은 1947년 7월19일, 혜화동 로터리에서 괴한이 쏜 총을 맞고 그 자리에서 절명했다.

계동과 길 하나를 사이에 둔 재동도 해방정국에서 중요 행사가 개최되었던 곳이다. 지금의 헌법재판소(종로구 재동 83) 자리에는 경기여고가 있었다. 1945년 9월6일부터 8일까지 경기여고 강당에서 전국인민대표자회의가 열렸다.

남북한 전국에서 상경한 「인민대표」 1000여 명은 대회 첫날 조선인민공화국 수립을 선포했다. 조선인민공화국의 주석에는 아직 귀국하지 않았던 李承晩이 추대되었다. 李承晩은 좌익세력도 주석으로 추대할 만큼 해방정국의 최고 지도자였다.

8월16일 아침, 명망가이기는 했으나 전향 경력이 있던 사회주의자들이 종로2가 YMCA 옆 長安(장안)빌딩에 모여 공산당을 결성하고, 조선공산당 간판을 내걸었다. 그러나 이 공산당은 朴憲永(박헌영)의 조선공산당이 창당되자 8월24일 자진해산을 했다. 그래서 세인들은 長安(장안)빌딩에서 창당된 공산당을 「長安派 공산당」 또는 「15일 공산당」이라고 불렀다. 장안빌딩은 화재로 재건되었는데, 지금도 「長安빌딩」이라는 문패를 달고 있다.


조선호텔 건너편에 조선공산당사

美 군정 시기에 강력한 조직력을 발휘한 조선공산당은 박헌영 일파에 의해 재건되었다. 장안파 공산당이 결성되자, 박헌영 일파는 장안파를 제압하기 위해 거리 곳곳에 「위대한 지도자 박헌영 선생 나오시라」는 벽보를 붙여 분위기를 잡았다.

박헌영의 조선공산당은 1945년 11월, 조선호텔 길 건너편의 맞춤양복 거리인 소공동 112-9번지 近澤(근택)빌딩에 처음으로 간판을 걸었다. 그후 근택빌딩 자리에는 1950년대 말까지 경향신문 사옥이 들어섰다가 철거되고 이제는 소공주차장으로 사용되고 있다.

조선공산당은 근택빌딩에서 기관지 解放日報(해방일보)를 발행했다. 근택빌딩 지하층에는 朝鮮精版社(조선정판사)라는 인쇄소도 있었는데, 1946년 5월 여기서 위조지폐를 다량 찍어낸 사실이 美 군정 당국에 적발되어 공산당 간부 등 16명이 검거되었다.

우익 진영의 韓民黨(한민당) 중앙당사는 광화문 네거리에 있는 前 동아일보 사옥(현재 一民문화재단 건물 자리) 안에 있었다. 전국에 산재한 동아일보의 지사·지국은 한민당의 지구당 등으로 사용되었다.

광복 당시 우리나라의 최고급 호텔은 지금의 롯데호텔 자리에 있던 반도호텔이었다. 여기에다 광복 후 진주한 미군들이 사령부를 설치했다. 사령관 하지 중장의 숙소도 반도호텔에 있었다.


金九의 거처 京橋莊은 삼성의료원

강북병원 구내에 아직 보존

신문로의 문화일보 사옥 건너편에 있는 삼성의료원 강북병원 자리에는 上海임시정부 주석 金九(김구)가 귀국 후 머물던 京橋莊(경교장)이 있었다. 일제시대 이름은 竹添莊(죽첨장)으로 금광부자로 소문난 친일파 최창학의 소유였다. 최창학은 친일 행위를 뉘우친다면서 이 건물을 金九의 거처로 「임시정부 환국 환영준비위원회」에 헌납했다.

1945년 12월27일, 모스크바 3相회의 소식이 국내로 날아들었다. 미·영·소의 세 外相 회의에서는 한반도의 신탁통치를 결정했다. 국내의 우익은 반탁 노선을 걷고, 좌익은 처음에는 반탁을 외쳤지만 곧 찬탁으로 돌았다.

12월30일, 서울운동장(현 동대문운동장)에서 託治(탁치) 반대 국민총동원위원회 주최로 국민대회가 열렸다. 1946년 1월3일에는 같은 장소인 서울운동장에서 조선공산당이 모스크바 3相회의를 지지하는 찬탁대회를 열었다. 이때부터 좌·우익은 날카롭게 대립했다.

12월30일 아침 6시경, 韓民黨 당수 宋鎭禹(송진우)가 자택에서 괴한 6명의 총격을 받고 암살되었다. 송진우는 12월29일 밤 8시부터 다음날 새벽 4시까지 계속되었던 경교장의 반탁회의에 참석하고 귀가하여 취침 중 참변을 당했다. 경교장 회의에서 臨政(임정) 강경파는 당장 국민투쟁을 전개하여 美 군정으로부터 정권을 인수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반면 송진우는 온건한 반탁론을 제시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송진우는 창덕궁 담 옆 원서동에서 살았다.

당시 서울운동장은 대중집회의 단골 장소였다. 1946년 5월1일 노동절 때 대한노총 등 우익측은 축구장에서, 全評(전평)등 좌익측은 야구장에서 따로 행사를 치렀다.

광복 당시 서울 인구는 90만 명, 면적은 136㎢였고, 자동차는 5000대에 불과했다. 그러나 미군 관련 공사 발주와 일제 비축 자재의 방출로 서울은 일시 때 아닌 건설 호황을 맞기도 했다. 광복과 함께 조선신궁과 황국신민서사탑이 소각, 철거되면서 서울 공간에 새겨진 식민지배의 상징물을 지우는 작업도 본격화했다.

광복이 되자 서울은 서울이라는 이름을 되찾았다. 식민지 시기의 京城府가 서울시로 바뀌고, 서울사람들도 京城府民(경성부민)에서 서울시민이 되었다. 이듬해 서울은 서울특별자유시라는 이름을 잠시 가졌다가 1949년 지금의 서울특별시라는 이름으로 확정되었다.

광복 직후부터 일제가 멋대로 정한 가로명과 동명을 개칭해야 된다는 의견도 제시되었으나 그 실행은 美 군정하 김명선 시장 때인 1946년 10월2일에 가서야 이뤄졌다. 이때 町(정)은 洞(동), 通(통)은 路(로), 丁目(정목)은 街(가)로 통일되어 서울의 각 지명은 고유명칭을 회복하거나 새로운 이름을 갖게 되었다.

특히 일본인의 거리였던 本町(본정)이 忠武路(충무로), 黃金町(황금정)이 乙支路(을지로)라고 개명되었다. 임진왜란의 영웅 忠武公 이순신과 살수대첩의 영웅 乙支文德(을지문덕)을 내세워 서울의 위엄을 북돋우려고 했던 것이다. 이밖에도 을사보호조약에 반대하며 자결한 忠正公 민영환을 추모, 신문로에서 신촌 쪽으로 연결되는 길의 이름을 그의 시호를 딴 忠正路(충정로)로 고쳤다.


李承晩의 사저 敦岩莊-麻浦莊-梨花莊

1947년 5월에서 8월까지 덕수궁 내 石造殿(석조전)에서 개최된 미소공동위원회가 아무런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폐회되자 그해 가을 한반도 문제는 유엔에 이관되었다. 유엔에서는 총선거 실시와 독립정부 건립을 결정했다. 이로써 신탁통치 문제는 백지화되었다. 1948년 초에 입국한 유엔 한국임시위원단은 한반도 총선 실시를 추진했다. 그러나 소련이 임시위원단의 입북을 반대하자 유엔은 남한지역만의 단독선거를 결정했다.

이때 남로당(조선공산당의 후신) 등 좌익과 한독당(위원장 金九)도 단독선거를 반대했다. 이런 가운데 이승만과 한민당은 單選(단선)을 적극 지지, 1948년 5·10 총선이 실시되었다.

1945년 10월에 귀국한 李承晩은 조선호텔에서 잠시 묵다가 성북구 동소문동에 위치한 敦岩莊(돈암장)으로 이사하여 여기서 1년6개월쯤 기거했다. 그런데 李承晩과 하지 장군 간의 불화설이 나돌자 집주인 장진영(당시 서울타이어주식회사 사장)이 집을 비워달라고 요구했다(당시 李承晩의 비서 윤치영의 증언). 부지 700여 평의 돈암장은 현재 동소문동 4가 103번지의 1호와 2호로 분할되어 있다.

李承晩은 잠시 麻浦莊(마포장)으로 거처를 옮겼다가 다시 종로구 이화동 1번지 梨花莊(이화장)으로 이사했다. 당시 실업가 권영일 등 30여 명이 모금하여 구입, 李承晩에게 헌납한 집이다.

서울사대부속여중 돌담길을 돌아 200m쯤 가면 파출소가 나오는데, 여기서 조금 위쪽 낙산 기슭에 이화장이 있다. 이화장은 「대한민국 건국 대통령 우남 리승만 박사 기념관」으로 보존되고 있다.

1948년 7월20일, 제헌의회에서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된 李承晩은 이화장에 組閣(조각)본부를 두고 국무총리와 12부 장관을 인선했다. 이화장 산책로 입구에 있는 이 한옥에 그후 「組閣堂(조각당)」이란 현판이 걸렸다.

1948년 8월15일, 옛 조선총독부 건물이었던 중앙청 광장에서 대한민국 정부 수립식이 거행되었다. 李承晩 대통령은 이화장에서 일제 때의 총독관저로 이사하고 景武臺(경무대)라고 명명했다. 靑瓦臺(청와대)라는 지금의 이름은 제2공화국의 尹潽善(윤보선) 대통령이 지었다.

정부 수립 후에도 친일파 처리 문제, 남북협상 문제 등을 둘러싸고 정국이 소란스러웠다. 金九는 李承晩 정부의 단정 노선에 반대하여 1948년 4월, 38선을 넘어 평양에서 열린 남북정당사회단체 연석회의에 참석하고 서울로 돌아왔다. 김구는 5·10 총선에 참여하지 않았다.

1949년 6월26일, 경교장 2층 침실에서 金九가 현역 포병 소위 安斗熙(안두희)에게 암살당했다. 안두희는 몇 해 전 金九를 존경하는 권중희라는 사람에게 맞아 죽었다. 경교장은 지금 삼성의료원 강북병원 건물의 일부로 사용되고 있다. 지금의 2층 의사 휴게실이 金九가 피살당한 현장인 침실이다. 1층에는 병원 원무과·약국 등이 있다.


9. 격동기의 서울

6·25 동란- 敵治下의 서울

1950년 6월25일 오전 4시~5시30분, 38선 전역에서 인민군이 일제히 기습공격을 개시했다. 인민군은 단시일 內 서울을 점령할 목적으로 議政府(의정부) 접근로에 主攻을 두고 인민군 제3사단·제4사단·제105기갑여단을 투입했다. 문산 지구에는 인민군 1사단과 6사단, 중동부지역의 춘천 방면에 인민군 제2사단과 7사단, 동부지구에 인민군 제5사단과 제766특수부대를 진격시켰다.

인민군 제3사단은 탱크 40대의 지원하에 금화-포천을 거쳐 의정부에 진입했다. 인민군 제4사단도 탱크 40대의 지원하에 연천-동두천을 거쳐 의정부로 진격했다. 국군 제7사단은 병력 및 장비의 열세로 많은 사상자를 내며 계속 밀리고 있었다. 병력을 逐次(축차)로 투입한 국군 제2사단 5연대도 병력만 소모했다. 의정부는 6월26일 저녁에 점령당하고 말았다.

의정부가 점령되었다는 것은 수도 서울을 방어하는 데 있어서 결정적인 타격이었다.

국군은 인민군의 남하를 저지하기 위해 倉洞(창동) 일대에다 방어진을 강화하는 한편 후속 병력을 흡수하는 데 노력했다. 의정부에서 합류한 인민군 제3사단과 제4사단은 전차를 앞세워 창동을 향해 전진했다. 6월27일 오전 8시경 국군 창동 主저항선에 도달한 인민군은 약 1시간 만에 방어진지를 돌파했다. 국군은 미아리 線까지 후퇴하여 최후방어선으로 삼았다. 그러나 미아리 線도 28일 0시경에 인민군 전차에 의해 돌파당했다.


스탈린과 金日成 초상화 나붙은 서울시청 청사

국군의 주력부대가 서울의 한강 이북에 남아 있는 가운데 28일 새벽 2시30분경 국군 공병에 의해 한강교가 폭파되고 말았다. 국군은 지리멸렬 상태에 빠지고 인민군은 서울에 입성했다. 국군은 다시 한강선 방어진지를 강화하고 여기서 인민군의 진격을 저지하려고 제7사단을 노량진에, 수도사단은 영등포에 각각 배치했다.

서울을 점령한 인민군은 사흘간 再편성의 시간을 보내고는 공격을 개시하여 7월3일 인민군 제3·제4사단은 영등포를, 인민군 제6사단은 인천을 점령했다. 이어 인민군의 주력부대는 계속 수원을 향해 진격했다.

이후 서울은 3개월간 적치하의 수난기를 맞았다. 경무대는 인민군의 전선사령관 金策(김책)이 차지하고, 서울시청엔 서울시인민위원회의 간판과 스탈린과 金日成의 초상화가 나붙었다. 서울시인민위원장은 남로당 출신의 李承燁(이승엽)이었다. 탑골공원에서는 인민군의 입성을 축하하는 이른바 문화예술인의 환영대회가 열리기도 했다. 이후 시내 곳곳에서 우익인사들을 숙청하기 위한 피의 인민재판이 열리는가 하면 청년들은 의용군이라는 이름 아래 전선으로 끌러갔다.


仁川상륙작전과 서울 收復

인민군은 낙동강 전선까지 밀고 내려갔다. 국군과 미군은 부산 교두보를 사수했다. 유엔군사령관 맥아더는 9월14일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했다. 유엔군이 인천에 상륙하자 金日成은 국방상 崔鏞健(최용건)을 서울방위사령관으로 임명하고 약 2개 사단의 병력으로 최후 저항을 시도했다. 9월24일 하룻밤 사이에 인민군은 서울시민을 총동원하여 시가지에 진지를 구축하게 했다.

그러나 김포 방면에서 한강을 도강한 국군 해병대와 美 해병대는 연세대학교 뒤쪽 鞍山(안산)을 점령하고 서울로 육박했다. 영등포에 돌입한 美 제1해병사단의 일부 병력은 마포 방면으로 도강하여 서울 중심부로 진격했다. 美 제7사단의 일부 병력은 영등포에서 동진하여 서빙고 방면과 뚝섬 방면으로 진출하여 강변 일대의 인민군을 밀어냈다. 국군 17연대는 관악산을 우회하여 美 7사단과 협동작전을 전개했다.

이로써 치열한 시가전이 벌어졌다. 美 해병1사단과 7사단은 인민군의 주력을 격파하면서 동북 방향으로 추격을 계속했다. 국군 17연대는 하왕십리로 진출하여 서울 동북방 요새 망우리를 점령하여 인민군의 후퇴로를 차단했다.


古宮의 폭격 모면한 사연

서울에 있던 인민군의 주력부대는 의정부 방면으로 후퇴했다. 9월28일 수도 서울은 완전히 수복되었다. 다음날 李承晩 대통령은 맥아더 장군과 함께 空路(공로)로 서울에 도착하여 지금은 헐린 중앙청 청사 앞에서 수도반환식을 거행했다. 서울은 초토화되었지만, 그나마 살아남은 것은 고궁과 옛 북촌 일대였다. 이는 서울 수복작전을 앞두고 주일대표부 金龍周(김용주) 공사가 東京의 맥아더사령부를 방문, 문화재 집중 지역에 대한 폭격의 자제를 적극 요청했기 때문이다.

10월1일 국군은 38선을 돌파, 북진했다. 국군의 선발부대는 압록강변까지 전진했다. 그러나 10월 중순부터 북한에 잠입하여 산악지대에 포진하고 있던 중공군이 10월 하순부터 국군과 미군에 대해 기습과 포위공격을 감행했다. 중공군은 12월25일 38선까지 남하했다. 1951년 1월1일 중공의 대공세가 시작되어 1월3일에는 의정부 방면의 전선 유지가 곤란해졌다. 1월4일 수도 서울은 다시 중공군에게 탈취당했다.

후퇴를 거듭하던 국군과 유엔군은 1월10일 오산-제천-단양-삼척을 잇는 선에서 반격작전에 들어갔다. 공산군은 수원 이북부터 한강에 이르는 지대에 강력한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있었다. 2월10일 김포에 유엔군 공수부대가 낙하했고, 美 제25사단과 영국 여단은 같은 날 인천과 영등포를 탈환했다. 그러나 비싼 대가를 지불해야 하는 한강 도하작전과 서울 정면 공격작전은 잠시 보류했다.

2월20일 맥아더 장군이 전선에 도착하여 유엔군에게 공세를 명했다. 유엔군의 방어선을 한강 선으로부터 임진강 선으로 북상시키자는 것이었다. 드디어 3월14일 국군 제1사단은 시가전 없이 서울을 再탈환했고, 3월23일 美 제187공정연대가 문산지구에 낙하하여 공산군의 퇴로를 차단했다. 서울을 포기한 중공군은 3월 중순부터 全전선에서 유엔군과의 접촉을 끊고 춘계공격의 준비에 들어갔다. 이후 1953년 7월 휴전협정 체결 때까지 현재의 군사분계선을 사이에 두고 밀고 밀리는 지리한 소모전이 계속되었다.


빈곤-독재-4·19 혁명

서울 再수복 후 한강철교 아래에 부교가 가설되어 시민들이 속속 귀환했다. 한강철교는 1951년 6월에 복구되었으나 한강인도교는 1958년 5월에 복구공사가 끝나 再개통되었다. 6·25 동란 이후 서울의 주택사정은 더욱 나빠졌다.

서울은 일제 때부터 土幕民村(토막민촌)이 형성될 만큼 주택문제가 심각했다. 토막이란 국유지인 산비탈이나 개천을 무단 점거하고 지면을 파고 땅 위에 기둥을 세워 헌 양철이나 판자로 덮어 만든 불량주택이었다.

이런 판에 전쟁중 서울의 가옥 19만 채 가운데 3만5000채가 전소되고, 2만 채가 반파되어 전체 주택의 28.8%가 사용불능 상태였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일자리를 찾아 서울로 몰려들었다. 판잣집은 산비탈은 물론 청계천변, 동대문시장 등 도심지역까지 빼곡히 채웠다. 전쟁 후의 불경기로 먹고살기도 어려웠다.

李承晩 대통령의 10년 장기집권에 국민들은 점차 염증을 느끼고 있었다. 李承晩 정권에 대한 저항은 1960년 3·15 부정선거로 폭발했다. 집권 자유당과 경찰은 4할 사전투표, 유권자 3인조·9인조에 의한 공개투표 등의 불법을 저질렀다. 당시 제1야당이었던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였던 趙炳玉(조병옥)은 정부통령선거 직전 위암으로 별세했다. 그런데도 자유당 정권이 부정선거를 감행한 것은 대통령을 승계할 수 있는 부통령에 李起鵬(이기붕)을 당선시키기 위해서였다.


4·19 기념도서관이 된 李起鵬의 집

부정선거에 항거한 시위는 경남 馬山 등지에서 치열하게 벌어졌다. 4월11일 최루탄이 눈에 박힌 金朱烈(김주열:마산상고 1년)의 시체가 마산 앞바다에서 발견되자 국민들의 분노는 다시 폭발했다. 4월18일에는 시위를 마치고 돌아가던 고려대 학생들이 정치 깡패들에 의해 구타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4월19일, 분노한 서울의 학생·시민들은 광화문 일대로 집결, 경무대로 몰려가기 시작했다. 경찰은 시위대에게 총격을 가해 많은 사상자가 나왔다. 이후 시민·학생들은 李承晩 대통령 퇴진운동을 벌였다.

4월26일, 李承晩 대통령은 정권을 許政(허정) 과도정부에 넘기고 이화장으로 하야했다. 이로써 제1공화국은 무너졌다. 이기붕 일가는 시위대가 몰려오자 서대문 자택을 탈출하여 6군단사령부 등지로 전전하다가 경무대로 들어가 권총으로 자살했다.

「서대문 경무대」라 불리던 平洞(평동) 이기붕의 집은 서대문 적십자병원과 삼성의료원 강북병원 사이에 있었는데, 시위대에 의해 불탔다. 현재 그 집터에는 4·19기념도서관이 세워져 있다. 4·19 혁명에서 희생된 사람은 모두 185명이었다. 희생자들이 안장된 곳이 도봉구 수유동의 4·19혁명 국립묘지이다.


5·16 당시 朴正熙의 行路

1960년 7·29 총선거가 실시되어 민주당이 3분의 2가 훨씬 넘는 의석을 차지했다. 그러나 민주당은 新派(신파), 舊派(구파)로 나눠져 치열한 집권경쟁을 벌였다. 신파의 張勉(장면)이 내각책임제하의 총리로 국회 동의를 얻어 정권을 장악하자, 구파는 분당하여 新民黨(신민당)을 창당했다. 이후 양당 간의 정쟁, 좌익 대두, 경제난 등이 겹쳐 시국이 불안해졌다. 1961년 5·16 혁명 발생 직전의 모습이었다.

5월15일 밤 11시가 조금 지난 시각, 朴正熙(박정희:당시 2군부사령관·소장)는 新堂洞(신당동) 집을 나서 대기중인 지프차에 탔다. 뒷자리에는 韓雄震(한웅진:육군정보학교장·준장)과 金鍾泌(김종필:예비역 중령)이 올랐다. 또 한 대의 지프차에는 張坰淳(장경순:육본 교육처장·준장), 그리고 申東寬(신동관) 등 2명의 육군 소령이 탑승했다.

이때 한웅진은 『아차, 내 권총』이라고 했다. 권총을 그가 묵던 화신백화점 뒤 미화호텔에 두고 온 것이다. 朴正熙가 탄 차는 청진동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장경순의 차가 그 뒤를 따르는데, 검은색 지프차가 중간에 끼어들었다. 방첩대의 미행 차량이었다.


심야 도심 속의 추격

朴正熙가 탄 차는 미화호텔 앞 길가에 멈추었다. 한웅진이 호텔 객실이 두고 온 권총을 가지러 간 사이 장경순이 朴正熙에게 다가갔다.

『각하, 미행당하고 있습니다. 제가 처치하고 갈 테니까 빨리 가십시오』

한웅진은 소련제 권총 두 정을 들고 나왔다. 朴正熙는 차고 있던 45구경 권총을 소련제로 바꾸었다. 朴正熙가 탄 앞차가 다시 출발하여 안국동으로 달리자 어느 새 미행 차가 나타나 따라붙었다. 朴正熙가 탄 지프는 안국동-중앙청-시청-서울역을 거쳐 삼각지 방향으로 질주했다. 한강인도교를 눈앞에 두고 미행 차가 어디론가 사라졌다. 한강 인도교를 넘기 직전, 朴正熙와 동행했던 김종필이 하차했다. 김종필은 뒤따라온 자신의 지프차를 타고는 안국동 광명인쇄소로 달렸다.

노량진동 사육신묘를 지나 영등포와 김포 방향으로 갈라지는 곳에서 朴正熙의 차는 잠시 정차했다. 뒤따라오던 장경순의 차를 기다렸던 것이다. 朴正熙는 다시 차에 올라 영등포 6관구사령부로 향했다.

朴正熙가 탄 지프는 6관구사령부 정문을 통과했다. 장경순은 김포의 공수단으로 향했다. 朴正熙는 참모장실로 들어갔다. 전화통을 잡고 있던 6관구사령부 참모장 金在春(김재춘:대령)은 朴正熙에게 『수색(30사단)과 부평(33사단)이 연락이 되지 않습니다』라고 보고했다. 참모장실에는 20여 명의 혁명파 장교들이 모여 있었다. 이때가 5월16일 새벽 0시15분경이었다.


영등포 6관구사령부의 혼돈

거사의 지휘소인 6관구사령부는 혼란에 빠져 있었다. 朴正熙 일생일대의 위기였다. 그의 수중엔 일개 대대 규모의 병력도 없었다. 張都暎(장도영) 육군참모총장은 이미 쿠데타 저지에 나서고 있었다. 옆방에는 이광선 헌병차감이 혁명파 장교들을 조사하려고 헌병을 데리고 와 있었다.

朴正熙는 자신이 2년 전 사령관실로 썼던 부사령관실로 들어섰다. 朴正熙를 따라 혁명파, 非혁명파, 진압군측 장교까지 모여들었다. 여기서 朴正熙는 혁명의 불가피성에 대해 연설했다. 이어 朴正熙는 장도영 총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장도영은 거사의 중단을 요구했다. 朴正熙는 전화기를 거칠게 내려놓았다.

朴正熙는 미리 준비한 편지를 장도영 총장에게 전달하라고 김재춘에게 건네주었다. 편지는 장도영의 신의주 東중학교 후배인 6관구 작전처 宋正澤(송정택) 중위를 통해 서울방첩대장 李熙永(이희영) 대령을 거쳐 장도영에게 전달되었다. 장도영은 이희영에게 『朴正熙가 아직도 6관구에 있는지 알아보고, 있으면 전화를 바꾸라』고 지시했다. 朴正熙가 전화를 받자 장도영은 언성을 높였다.

『당신 편지 보았는데, 그것은 범행이고 반동이오. 어서 정신 차려 돌아가시오. 그렇지 않으면 당장 체포하겠소』


염창교 앞에서 해병여단과 합류

5월16일 새벽 2시, 朴正熙는 공수단 출동을 독려하기 위해 6관구사령부를 나와 한웅진과 함께 지프에 올랐다. 한편 공수단의 출동 부대 지휘자인 金悌民(김재민) 대대장은 5월15일 밤 11시부터 대대 연병장 옆에 트럭 10대를 대기시켜 놓고 요인 체포 임무를 맡은 장교들이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들 장교팀은 공수단이 서울로 들어가면 총리, 장관들을 체포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朴鐘圭(박종규) 소령만 나타났다. 김재민 대대장은 박치옥 단장에게 전화를 걸어 『단장님, 출동준비가 다 되었습니다』라고 보고했다. 朴致玉(박치옥) 단장은 『기다려 봐』라고 답했다.

그 시점에 朴正熙가 공수단 정문에 도착했다. 朴正熙는 『빨리 출동하라』라고 독려했고, 박치옥은 『왜 안내 장교가 오지 않습니까』라고 따졌다고 한다. 이때 朴正熙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朴正熙는 지프에 몸을 실으면서 『해병대로 가자』라고 말했다. 朴正熙는 김포 해병여단으로 달리는 차중에서 뒷자리에 탄 한웅진에게 이렇게 말했다.

『해병대가 이 길을 진격하고 있을 때인데, 도로가 캄캄하니 이상하지 않소』

지프가 길가의 파출소에 멎었다. 지서에 나와 있던 해병대 헌병에게 여단 본부로 전화해 보도록 했다.

『이미 30분 전에 떠났다고 합니다』

朴正熙는 염창교 앞에서 트럭 60여 대에 분승하고 출동한 해병여단과 만났다. 해병여단장 金潤根(김윤근) 준장은 朴正熙에게 거수경례를 붙이면서 『해병대, 이상 없이 출동했습니다』라고 보고했다. 朴正熙는 김윤근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金장군, 거사 계획이 탄로 났소. 그래서 30사단, 33사단, 공수단 다 나올 수 없게 되었소. 이제는 해병여단만 가지고 강행하는 길밖에 없게 되었소. 金장군만 믿소』

『그렇게 되었습니까. 하는 수 없지요. 해병여단만 가지고 강행해 봅시다』

朴正熙에게 해병대는 구세주였다. 염창교에는 6관구사령부에 모였던 육군장교 10여 명이 와서 기다리고 있다가 朴正熙와 해병대를 만났다. 朴正熙는 이들 장교에게 『부평 33사단으로 가서 출동을 독려하라』고 지시했다. 朴正熙 차는 해병대를 뒤따라갔다. 해병대 뒤에는 출동이 늦었던 공수단 트럭이 따라붙었다.

해병대와 공수단은 새벽 3시30분경 한강인도교 남단인 노량진 쪽에 도착했다. 바로 이 시각 文在駿(문재준) 대령이 지휘하는 6군단 포병단의 병력이 삼각지에 있던 육군본부에 진입했다. 장교 68명, 사병 1283명. 이들은 의정부-미아리를 거쳐 서울에 들어왔다.


혜화동 카르멜 수녀원으로 피신한 張勉 총리

장도영 총장은 육군본부가 아닌 조선호텔 건너편 서울지구방첩대에서 진압군을 지휘했다. 그는 헌병 50명을 한강인도교로 급파했다. 해병여단과 공수단이 접근했을 때 헌병들은 GMC트럭 8대를 동원하여 한강다리를 봉쇄하고 있었다. 쿠데타군은 총격전을 벌이며 트럭 바리케이드를 밀치고 전진했다. 총격전에서 저지군의 헌병 3명과 쿠데타軍의 해병 6명이 부상했다.

朴正熙 일행도 걸어서 한강다리를 건넜다. 쿠데타軍은 새벽 4시15분에 한강저지선을 돌파했다. 이 무렵에야 비로소 장도영 총장은 張勉 총리와 尹潽善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어 피신을 권했다. 이때 국방장관 玄錫虎(현석호)는 서울방첩부대에서 장도영을 지켜보았으나 영 못 미더웠다고 한다. 현석호는 소공동 서울방첩대를 나와서 건너편 반도호텔로 갔다. 장면 총리의 숙소인 반도호텔 809호실에는 李太熙(이태희) 검찰총장, 경호대장 趙仁元(조인원) 경감 등 몇 사람이 서성거리고 있었다.

현석호는 張勉 총리에게 피신을 건의했다. 한강 쪽에서는 총성이 들려오고 있었다. 이때 망을 보던 경호원이 『군인들이 온다』고 소리쳤다. 총리 부부는 서둘러 전용차에 몸을 실었다. 이때 총리의 안경이 떨어져 깨어졌다. 차는 청진동 뒷골목을 거쳐 한국일보 건너편 송현동 미국대사관 직원 사택 앞에 정차했다. 張勉 총리는 문을 두드렸으나 열리지 않았다. 이곳에 있는 미국 CIA 서울지부장 피어드 드 실버를 만나러 갔는데, 실버는 마침 쿠데타 발생 정보를 접하고 출타중이었다.

총리 전용차는 혜화동 로터리 동성고교 뒤편에 있는 카르멜 수녀원으로 향했다. 총리 부처는 그후 사흘간 카르멜 수녀원 바깥으로 나오지 않는다.


南山 KBS의 혁명 방송

한강을 건넌 朴正熙는 해병대와 공수단과 떨어져 남산 KBS(숭의여자대학 건너편)로 직행하여 4시30분에 도착했다. 원래 KBS는 33사단 병력이 점령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정보 누설로 이 부대의 출동이 늦어졌다. 김종필이 혁명공약 등 방송원고를 가져오기로 사전약속이 되어 있었지만,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4시40분, 朴正熙는 한웅진 준장에게 KBS의 점령을 맡기고, 안국동 광명인쇄소로 향했다. 김종필은 李洛善(이낙선:소령), 金龍泰(김용태:후에 공화당 원내총무 역임) 등과 함께 전날 밤 12시경 광명인쇄소에 도착하여 李學洙(이학수) 사장이 대기시켜 놓은 문선공과 인쇄공에게 혁명공약을 제작하도록 했다. 새벽 5시 직전, 朴正熙는 尹泰日(윤태일:준장) 등과 함께 광명인쇄소에 도착했다. 朴正熙는 김종필을 만나 함께 방송국으로 돌아왔다. 새벽 5시, 당직 아나운서였던 朴鍾世(박종세)가 공수단 장교에게 끌려나와 「혁명의 성공」을 알리는 문안을 읽기 시작했다.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隱忍自重(은인자중)하던 군부는 드디어 今朝未明(금조미명)을 기해서 일제히 행동을 개시하여 국가의 행정, 입법, 사법의 3권을 장악하고 이어 군사혁명위원회를 조직하였습니다』

이런 서두로 시작한 「혁명방송」은 혁명공약 6개조 낭독에 이어 「대한민국 만세! 궐기군 만세!」로 끝을 맺었다. 명의는 「군사혁명위원회 의장 육군 중장 장도영」이 도용되었다.


10. 개발연대의 서울

불도저 시장 金玄玉…근대화의 상징, 3·1고가도로와 3·1빌딩

1966년 4월1일 서울시장으로 임명된 金玄玉(김현옥)은 定都 이래 서울의 모습을 제일 많이 바꿔놓은 사람이다. 金시장이 추진한 시정은 첫째 교통문제 해결, 둘째 도심 정비와 서민주택 공급, 셋째 한강 개발이었다.

교통문제 해결을 위해 세종로와 명동의 지하도를 비롯, 수없이 많은 지하도로, 보도육교, 자동차 전용 입체고가도로 등이 건설되었다. 독립문-무악재-갈현동, 돈암동-미아리-수유리 간 도로 등이 크게 확장되었고, 새로운 도로도 개설되었다. 주요 간선도로의 로터리들이 사라져 가고 지하도로, 육교, 고가도로들이 세워지면서 서울의 도로 경관은 크게 변화했다.

특히 청계천 복개가 완료된 후 건설된 3·1고가도로는 인접한 3·1빌딩과 함께 개발연대의 상징이 되었다.

광복 이후 누적된 현안이었던 주택문제에 있어서도 괄목할 만한 변화가 있었다. 1967년 말 현재 13만7000여 동의 무허가 건물을 3년 안에 모두 철거하기로 하고, 그 정리방법으로 대단지 조성에 의한 집단이주, 시민아파트 건설, 불량건물 개량 및 양성화 방안을 채택했다. 이 정책은 철거이주가 용이하다는 점 때문에 선호되었으나 무계획적인 도시형성으로 시가지가 방만하게 확대되는 문제를 낳았다.

철거된 무허가 건물 입주자들에게는 시 외곽의 대규모 국·공유지에 각각 8평씩을 정착지로 나눠주고 새로 무허가 건물을 지어 살도록 한 것이다. 전혀 개발이 안 된 땅에 도로선만 긋고 가구별 점유 토지의 위치를 지정해 주면 그곳에 판잣집이나 움막집을 짓고 거주하되 도로·하수도 등의 기반시설은 입주민 스스로 해결하라는 것이었다. 이로 인해 사당동·도봉동·염창동·거여동·하일동·시흥동·봉천동·신림동·창동·쌍문동·상계동·중계동 등지에 대단위 정착지가 조성되었다.

이들 지역은 이른바 「달동네」라는 이름으로 뒷날 큰 사회문제를 양성하는 불씨가 되었다. 서울은 더욱 팽창하고 변두리 집단이주지의 땅까지 필요하게 된다. 여기에 새로운 주택단지 건설계획이 세워지고 불도저가 밀고 들어왔다. 철거민이 다시 철거민이 되는 악순환은 행정당국으로서도 고민거리였다.


「나비작전」으로 「鍾三」 소탕

김현옥 시장 시대에 도시환경정비사업의 하나로 진행된 것은 이른바 「鍾三(종삼)」 소탕이었다. 종로3가 뒷골목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던 사창가가 6·25 동란을 겪으면서 종로 3·4가, 낙원동, 봉익동, 훈정동, 인의동, 와룡동, 묘동, 권농동, 원남동 등으로 번져 종삼은 사창가의 대명사가 되었다.

이 일대 사창가는 이른바 나비작전이라는 이름 아래 1968년 9월26일부터 10월5일까지 완전히 철거되었다. 철거에 이어 새로운 건설이 시작되었다. 종묘-대한극장에 이르는 무허거 건물을 철거하고 민간자본을 끌어들여 대규모 상가아파트인 세운상가를 지은 것이었다. 지금은 동서를 양분시키고 자신은 슬럼화되어 도심정비의 장애물로 남게 되었지만, 건설 당시의 세운상가는 청계천의 복개, 3·1고가도로와 함께 도시구조를 입체적으로 바꾼 획기적인 프로젝트로 인식되었다.

이 시대에 주목할 만한 주택정책은 시민아파트의 건설이었다. 봉천동·신림동 등지의 정착지나 廣州(광주)대단지로 보내기보다는 차라리 再개발지구 內에 값싼 프레임 아파트를 세워 집단 이주시키면 기존의 생활근거지도 바꾸지 않게 되고 철거 이주에서 생기는 저항도 없어질 것이라고 판단하고 도심에 4~5층짜리 아파트를 짓기로 한 것이었다. 시민아파트는 1969년 말까지 400여 동 건립되었다.

그러나 1970년 4월8일 새벽 6시30분 와우아파트가 붕괴되는 大참사가 발생하여 33명이 사망하고 40명이 부상했다. 이로 인하여 김현옥 시장은 경질되었고, 시민아파트는 더 이상 지어지지 못했다.


江南 바람

와우아파트 붕괴사건으로 물러난 김현옥 시장의 뒤를 이은 梁鐸植(양택식) 시장은 여의도 개발과 강남개발 등을 지속적으로 추진했다. 영동지구는 총 782만 평에 달하는 엄청난 넓이의 땅에 폭 70m, 50m, 40m, 30m 등의 간선도로를 건설하는 등 거의 완전에 가까운 격자형 도시계획을 시도한 것이었다.

영동지구개발의 가속화는 강남북을 연결하는 도로망 정비를 불가피하게 했다. 잠실대교와 영동대교를 비롯, 본격적인 교량건설이 시작되었다. 잠실대교, 영동대교, 천호대교, 잠수교, 행주대교, 원효대교, 성수대교 등이 이 시기에 건설된 다리들이다.

양택식 시장 때 변화 중 주목할 만한 것은 도시기능의 현대화 및 도심지 재개발, 인구분산을 위한 신시가지 건설이었다. 그런데 강남개발이 한창이던 시기에 도심재개발을 촉진하는 사건이 의외의 곳에서 발생했다. 1966년 미국 대통령 존슨의 방한과 1972년의 남북대화가 그것이다.

서울시청 앞에서 개최된 존슨 대통령 환영행사가 전파를 타고 세계 전역에 방송되었다. 이때 시청 앞 소공동 지역의 지저분한 중국인촌과 남산 기슭, 회현동·남산동 등에 산재했던 식민지 시기의 낡은 건물, 판자촌의 모습 등이 생생하게 전해져 국제적 망신을 당했다.

1972년 8월 평양의 제1차 남북적십자회담에 이은 제2차 회담이 서울에서 개최되었다. 당시 분위기에서는 서울과 평양을 오가는 이런 회담이 빈번하게 열릴 것으로 예측되었다. 서울은 세계를 향해, 북한 동포들을 향해 단장된 모습을 과시할 필요가 있었다. 이 때문에 소공지구를 비롯한 도심 12개 구역이 재개발지구로 지정되었고, 재개발된 곳에는 예외 없이 고층사무실건물이나 호텔 등이 잇따라 들어섰다.


『朴正熙의 목을 따러 왔다』

그때는 구호 그대로 「싸우면서 건설」하던 시절이었다.

1968년 1월21일 밤 10시경 , 청와대를 습격하기 위해 서울에 침투한 무장공비 31명이 세검정 고개에서 저지되었다. 이들은 북한의 특수부대인 124군 소속으로 朴正熙 대통령 등 정부 요인 암살 지령을 받고, 우리 국군의 복장과 수류탄 및 기관단총으로 무장하고, 휴전선을 넘어 서울에 진입했다.

그러나 이들은 紫霞門(자하문:창의문) 앞 고갯길을 통과하려다 비상근무 중이던 우리 경찰의 불심검문을 받고 정체가 탄로 나자, 검문 경찰관들에게 수류탄을 던지고 기관총을 난사했다. 또한 그곳을 지나던 시내버스에도 수류탄을 던져 많은 시민들이 살상당했다. 당시는 자하문터널이 없었기 때문에 자하문 고갯길은 세검정 방면에서 청와대로 진입할 수 있는 유일한 도로였다.

우리 군·경은 즉시 비상경계태세에 들어가는 한편 현장으로 출동, 추격전 끝에 28명을 사살하고, 1명을 생포했다. 나머지 2명은 다시 월북했다. 이날 밤 현장에서 비상근무를 지휘하던 종로경찰서장 崔圭植(최규식) 총경은 무장공비의 총탄을 맞아 순직했다. 자하문 아래엔 최규식 총경의 동상과 정종수 경사의 순직비가 세워져 있다. 생포된 무장공비 金新朝(김신조)는 TV방송 기자가 마이크를 들이대자 『朴正熙의 목을 따러 왔다』라고 말했다.


陸英修 여사의 피살 현장, 국립극장

1974년 8월15일 제29회 광복절 기념식장이었던 중구 장충동 국립극장에서 朴正熙 대통령의 부인 陸英修(육영수) 여사가 재일 교포 테러리스트 文世光(문세광:당시 23세)이 쏜 권총탄을 맞고 사망했다. 범인 문세광은 8시40분경 실탄 5발이 장전된 38구경 권총을 허리춤에 감춘 채 조선호텔 정문 앞에서 대형 포드 M-20 렌터카에 승차했다. 렌터카는 국립극장을 향해 달렸다. 차내에서 그는 운전사에게 미리 요금 1만원(당시 쌀 한 가마 가격 7440원)을 주면서 『하차 때 먼저 내려 밖에서 문을 열어달라』라고 부탁했다.

8시59분경 문세광이 탄 승용차는 「승차입장카드」가 부착되어 있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아무런 검색을 받지 않고 국립극장 정문을 통과했다. 오전 9시경 국립극장 건물 계단 앞에 승용차가 정차했다. 운전사가 부탁받은 대로 먼저 내려 뒷좌석의 문을 열어주자 문세광은 고위층 행세를 하며 하차했다.

문세광은 계단을 비스듬히 올라가 남문 입구를 통해 로비로 입장했다. 남문 입구에는 청와대 경호실 요원 1명과 경찰관 4명, 행사 안내 요원 3명이 근무했지만, 비표를 달지 않은 문세광을 체크하지 않았다. 문세광은 로비에서 50분 가까이 서성거리거나 긴 의자에 앉아 있었지만 로비 근무자 그 누구도 주목하지 않았다.

10시경 문세광은 대통령 일행이 붉은 카펫을 따라 극장 내부로 입장하는 모습을 목격했다. 10시10분경 문세광은 곁에 있던 경호계장에게 일본말로 『안에 들어가서 대통령의 얼굴을 보고 싶다』라고 말했다. 문세광이 극장 문으로 들어가려 하자 좌측 문 근무 경찰관이 『비표가 없다』고 출입을 막았다. 문세광은 경호계장을 가리키며 『저 사람이 들어가라 했다』고 말했다. 경찰관이 문을 열어주었다.


행사장 단상을 향해 권총 발사

문세광은 경찰관의 안내를 받으며 공석으로 있던 B좌석군 맨 뒷열에 앉았다. 문세광은 10여 분간 좌석에 앉아 있었다. 朴正熙 대통령의 연설이 『통일은 평화적인 방법으로 이루어져야 하며』라는 대목에 이르고 있었다. 그 순간, 허리춤을 더듬던 문세광의 손가락이 예민한 방아쇠에 잘못 걸렸다.

『퍽!』 소리와 함께 총알이 문세광의 허벅지를 관통했다. 경축 연설의 마이크 소음 때문에 관심을 보인 사람은 없었다.

제1탄 오발. 문세광은 권총을 빼들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단상을 향해 달려갔다. 제2탄은 방탄 연설대의 상단부에 총구멍을 내고 들어박혔다. 이제 朴대통령과의 거리는 18m로 좁혀졌다. 문세광은 방아쇠를 당겼다. 그러나 3탄은 불발탄이었다. 순간 朴대통령은 단상 밑으로 몸을 낮추었다. 표적을 잃은 문세광은 단상에 앉아 있던 陸英修 여사를 조준, 발사했다. 제4탄은 陸여사의 오른쪽 머리에 명중했다. 이제 남은 실탄은 한 발. 문세광은 연단 위로 뛰어오르려고 했다. 그러나 그의 앞에는 극장 1층 바닥보다 1m쯤 낮은 교향악단 연주석이 버티고 있었다. 흠칫하던 순간, 문세광에게 전열 근무 경찰관들이 덮쳤다.

陸여사가 병원으로 후송된 후 朴대통령은 보리차 한 잔을 마신 다음, 중단됐던 경축사를 끝까지 낭독했다. 陸여사는 그날 저녁 7시 서울대학병원에서 서거했다.

검찰 기소장에 따르면 1974년 2월 초순 문세광은 조총련 간부 김호룡으로부터 朴대통령을 암살하라는 지령을 받은 다음 조총련계가 운영하는 東京 아카후도 병원에 1개월간 위장 입원하여 사격훈련을 했다. 이어 5월4일에는 오사카에 정박중인 북한 공작선 만경봉호에 승선하여 세뇌교육을 받았다. 문세광이 소지한 여권은 일본인 요시이 유키오(吉井行雄) 명의의 일본 여권이었으며 권총과 실탄은 오사카 西南高津(서남고진) 파출소에서 훔친 것이었다.

문세광은 8월6일 스미스웨건 권총 1정과 실탄 5발을 일제 트랜지스터 라디오 속에 감춰 휴대하고 대한항공편으로 오사카공항을 출발, 오후 1시 김포공항에 도착했다. 김포공항에서 X레이기를 통과했지만, 아무런 제지를 받지 않았다. 그는 조선호텔 1030호 객실에 요시이 유키오 명의로 체크인 하여 여기에서 묵으며 범행을 준비해 왔다.


지하철 시대의 개막

육영수 여사가 피살된 1974년 8월15일은 서울지하철 1호선이 개통된 날이었다. 이것은 서울시 교통에 있어서는 혁명적인 날이었다. 급격히 팽창하는 도시 교통인구를 대량·고속으로 처리하고 종래의 路上(노상) 교통 일변도의 소통체계를 지양, 지하철시대의 막이 열리게 된 것이다. 현재 서울에는 지하철 8호선까지 완공 개통되었다.

지하철과 함께 서울의 모습을 결정적으로 변화시킨 것은 한강다리 건설이었다. 196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한강다리는 한강인도교와 광진교 둘뿐이었다. 1970년대 이후 매년 한 개씩 건설되어 이제 한강다리는 22개(인도교 17개+철교 5개)에 달하게 되었다. 서울의 절반인 강남의 개발은 한강의 다리 건설로 가능해졌다.

경제의 고도성장은 인구의 도시집중, 그중에서도 서울의 폭발적인 인구 팽창을 불러왔다. 1966년 379만명이던 서울인구는 1978년 말 782만명으로 12년 동안 403만명이 증가했다. 1년간 평균 33만6000명이 늘어난 셈이다. 인구 폭증에 따라 주택수요도 엄청나게 늘어났다. 서울은 하루가 다르게 확장되고 발전했다. 서울의 땅값도 덩달아 춤을 추었다. 복부인들의 치맛바람이 반포, 영동, 강동, 송파, 개포 등 강남지역을 차례로 휩쓸었다.

1978년의 신문에 따르면 서울지역의 땅값이 15년 사이에 60배나 뛰었고, 강남지역은 무려 176배가 뛰었다. 아파트 분양에 당첨되기만 하면 그 자리에서 몇백만원을 챙길 수 있는 풍토는 순식간에 가진 자들을 배금주의의 아수라장으로 몰고 갔다.

이렇게 축적된 부는 새로운 소비문화를 형성하기 시작했다. 이른바 사회지도층의 자제들이 벌인 엽색행각이나 100여 명의 연예인을 상대로 스캔들을 일으킨 박동명의 사건에서 나타났듯이 서울은 한탕과 환락에 젖어드는 일면을 지니게 되었다.

체제에 대한 반항의 기운도 싹트기 시작했다. 민주화, 언론자유 등을 요구하는 운동이 각계에서 일어났다. 1970년 평화시장 노동자 전태일의 분신자살은 이후 노동운동의 본격적 출발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1977년 유신반대 데모와 청계천 피복상가 노동자들의 유혈시위가 터졌다.

1978년 말에는 제2차 오일쇼크가 일어나 기업들의 채산성이 악화된 가운데 도산하는 기업이 속출했다. 1979년에는 YH여공이 신민당 당사 점거농성사건이 발발하면서 여야가 격돌하고 제1야당 총재 金泳三의 의원직이 박탈됨으로써 부산·마산에서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민들의 데모가 격렬하게 일어났다. 朴正熙의 18년 통치도 서서히 그 종착역을 향하고 있었다.


10·26 사태 宮井洞 安家

1979년 10월26일 저녁 청와대 인근 궁정동 安家(안가)에서 朴正熙 대통령이 중앙정보부장 金載圭(김재규)가 쏜 총을 맞고 사망했다. 安家 현장에 인접한 별실에는 육군참모총장 鄭昇和(정승화)가 김재규의 범행 음모를 모르고 초청되어 대기중에 있었다.

범행 후 김재규는 정승화를 자기 차에 태워 중앙정보부 남산 청사로 향해 가다가 정승화의 주장에 따라 당시 삼각지에 있었던 육군본부로 방향을 바꾸었다. 김재규는 육군본부에서 체포되었다.

김재규 사건의 수사를 둘러싼 계엄사령관(육군참모총장) 정승화와 합수부장(보안사령관) 全斗煥(전두환) 사이의 갈등으로 그해 12월12일 저녁 정승화가 한남동 총장공관에서 보안사 서빙고분실로 납치되고, 全斗煥을 지지하는 공수1여단 등이 육군본부를 점령하는 하극상이 일어났다. 그런데도 1980년 「서울의 봄」이 전개되어 3김이 차기정권을 다투었다. 이때 金泳三(김영삼)의 上道洞(상도동) 자택, 金大中(김대중)의 東橋洞(동교동) 자택, 金鍾泌(김종필)의 靑丘洞(청구동) 자택은 정치의 중심무대가 되는 듯했다. 상도동, 동교동, 청구동은 3金 파벌의 호칭이 되었다.

그러나 全斗煥이 하나회를 중심으로 한 新軍部(신군부)를 업고 국보위의 상임위원장으로서 실권을 장악했다. 5월17일, 김대중과 김종필은 투옥되고, 金泳三은 가택연금 되었다. 최규하 대통령은 하야하고, 全斗煥은 「체육관 선거」에 의해 대통령에 올랐다.


암사동 先史시대 주거지 복원

1980년대는 대규모 국가적 이벤트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시대였다. 1981년에 올림픽게임 유치가 발표된 이후 서울은 바빠졌다. 도시구조 재편과 도시미관 개선사업이 필수적이었다. 올림픽 主경기장인 서울종합운동장을 중심으로 한 가로망 정리, 올림픽대로와 몽촌토성의 보전을 위한 간선도로의 우회, 인접 대지들의 개발도 이루어졌다.

선진국 도시와 같은 면모를 갖추기 위한 노력은 고층화에 집중되었다. 여의도의 63빌딩이 이를 선도했다. 회색과 직육면체 건물의 도시경관에 색깔이 입혀져 표정이 살아났다. 이런 현상은 강남에서 두드러졌다. 청계천을 중심으로 남촌과 북촌이 대비되던 시절이 지나가고, 이제 한강을 사이에 둔 강북과 강남이 비교되기 시작했다.

한강의 종합개발은 1980년대 서울 경관을 바꾸어 놓은 획기적인 사업이었다. 행주대교로부터 암사동에 이르는 구간을 대상으로 저수로 정비, 둔치 조성 및 공원화, 한강 청정화 사업 등이 실시되었다. 그러나 급조된 한강 둔치와 한강변의 콘크리트 호안블록은 생태환경의 파괴라는 문제점을 던져놓았다.

이런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암사동 先史(선사)주거지, 풍납토성, 몽촌토성, 석촌동 고분, 방이동 고분 등의 유적이 복원되면서 수천 년 문화민족의 중심 터전인 서울의 역사지층을 한층 풍요롭게 했다.

암사동 先史주거지 유적은 지금으로부터 약 6000년 전에 우리의 조상인 신석기시대의 사람들이 살았던 집터로 우리나라에서 밝혀진 신석기시대의 최대 집단취락지이다. 석촌동 고분에서는 각종 토기 등이 쏟아져 나왔고, 풍납토성에는 同시대 중국의 동전과 도자기 등까지 출토되어 漢城백제의 높은 문화수준과 다이내믹한 해양성을 입증해 주었다.

1986년 9~10월, 88올림픽을 2년 앞두고 서울에서 아시안게임과 IMF(세계통화기금)·IBRD(세계은행) 연차총회가 잇따라 개최되었다. 이것은 광복 후 40년간의 남북 체제대결에서 南의 승리를 확인하는 동시에 서울의 세계성을 과시했던 행사였다.


유월사태의 진원지 貞洞 聖公會

끊임없는 국가적 행사와 3低 호황에 힘입은 경제의 가파른 상승곡선 속에서도 민주화 투쟁의 불길은 수그러들 줄 몰랐다. 진압 경찰이 쏘아대는 최루탄과 페퍼포그의 연기가 도심과 대학가를 뒤덮어 시민들의 코와 눈이 수난을 당했다. 손에 피를 묻히고 출범한 정권의 태생적 한계, 그리고 잇따른 부정부패와 강압정책으로 1980년대 중반 이후 드디어 서울의 중산층 민심까지 全斗煥 정부에 대해 등을 돌렸다. 『탁 치니 억하고 죽었다』는 남영동 대공분실 수사관의 말이 거짓으로 들통난 서울대생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최루탄에 맞은 연세대생 이한열의 죽음을 계기로 서울의 민주화운동은 더욱 거세졌다.

이한열 영결식이 개최된 시청 앞 광장과 그 주변엔 백만 인파가 몰려들어 차도를 완전히 막아버렸다. 6월 시민항쟁의 절정이었다. 체육관선거, 아니면 내각제 개헌을 통한 간접선거로 군부의 계속 집권을 기도하던 全斗煥은 시민들의 요구에 굴복, 대통령 직선제를 수락했다. 이른바 6·29 선언과 그것의 수락이었다. 이듬해로 다가온 서울올림픽을 예정대로 치르려면 시민들과 타협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6월 대시위 당시 재야인사와 대학생 대표들은 중구 정동 3번지 聖公會(성공회) 서울대성당에 모여 항쟁의 방향과 전략 등을 논의했다. 추상적인 「민주화 요구」보다 좀더 현실적인 구호 「직선제 쟁취」를 앞세우기로 했다. 지금 성공회 마당 한켠에는 「유월항쟁 진원지」라는 조그마한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당시 많은 시민들은 직선제만 쟁취하면 선거를 통해 민간정부가 들어서 민주화를 이룩할 것이라고 낙관했다. 그러나 야권은 「후보단일화」의 金泳三 노선과 「4자필승론」의 金大中 노선으로 분열했다. 그해 12월 여의도광장 유세에서 선두권 세 후보 진영은 각각 「백만 청중」을 전세버스 등으로 동원하는 원색적인 勢(세)경쟁을 벌였다. 12·17 대통령선거의 결과는 집권당 盧泰愚(노태우) 후보의 당선이었다.


가장 자랑스러운 것은 서울올림픽

1988년 가을, 서울에서 올림픽이 개최되었다. 서울올림픽은 서울시민들뿐만 아니라 全국민을 열광케 하면서 한민족의 자존심을 한껏 높여주었다. 우리 역사에서 이만큼 자랑스러운 적은 없었다. 서울올림픽은 그때까지의 올림픽 역사상 가장 많은 국가가 참여한 대회였고, 가장 짜임새 있는 인류의 축제였다.

전쟁의 잿더미 위에서 일어난 지 불과 35년. 「세계는 서울로, 서울은 세계로」라는 구호가 별로 어색하게 들리지 않았다. 일찍이 三田渡(삼전도) 국치의 현장이었던 송파벌은 한국 역사상 국위를 피크에 올린 主무대가 되었다.

조선왕조 초기 10만명이었던 서울의 인구는 약 600년 만인 1999년 말 현재 약 103배인 1032만1449명(이 가운데 외국인 5만7189명)으로 집계되었다. 면적도 16㎢(도성 내부의 사방 10리)에서 약 38배인 605.52㎢로 확대되었다. 한 해에 10조6000억원의 예산(2000년)을 사용하는 오늘의 서울은 「생활비 비싼 도시 순위」로 세계 제7위에 올라 있다. 한편 정보화사회 이행 지수의 하나인 도메인 등록건수(자료:네트워크 솔루션)에서 서울은 2000년 현재 세계 제1위(미국 도시 제외)를 기록하고 있다.

수치로 보는 서울의 하루는 매우 역동적이다. 하루 평균 363명이 출생하고, 103명이 사망하며, 202쌍이 결혼하고, 61쌍이 이혼하고 있다. 하루 교통인구(1999년 현재)는 2720만3000명인데, 지하철 이용객이 전체의 33.8%인 877만명으로 가장 많으며, 버스 28.8%, 자가용 19.6%, 택시 9.2%의 순이다. 서울시에 등록된 자동차 수는 시민 4.3명 당 한 대꼴인 240만 대에 이르고 있다.

서울시민의 주택 형태도 1970년대 중반 이후 엄청난 변화를 나타내 왔는데, 1999년 현재 아파트가 71만6251호로 제일 많다. 그 다음으로 단독주택 56만1947호, 연립주택 21만8403호, 다세대주택 13만4923호, 기타 5만6587호의 순이다.

서울시에는 한국의 많은 부문이 집중되어 있다. 2000년 서울시 환경백서에 따르면 서울은 全國對比(전국대비) 인구의 21.7%, 국내총생산의 21.6%, 은행예금의 50.2%, 은행 대출의 45.9%, 내국세의 46.4%, 소득세의 58.3% 등을 점하고 있다.

그렇다면 엄청난 변화를 경험한 시민들이 느끼는 서울의 기념비적 사건은 무엇일까. 1999년 서울시 인터넷 홈페이지 방문 네티즌 조사에 따르면 「서울시 100년 기념비적 사건 베스트 10」은 다음과 같다.


1. 서울올림픽(1988)

2. 8·15 광복(1945)

3. 아시안게임 개최(1986)

4. 월드컵 축구 개최(2002) 결정

5. 3·1 운동(1919)

6. 조선총독부 건물 해체(1995)

7. 金大中 정부 출범(1998)

8. 6·25 전쟁(1950)

9. 서울수복(1950)

10. 지하철 개통(1974)


서울코리아의 과제

서울올림픽은 우리나라가 한 단계 더 도약할 수 있었던 우리 민족사상 최대의 기회였다. 그러나 그 감격은 나라의 지속적인 발전으로 연결되지 못했다. 물질만능의 풍조 속에서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사이에 사회 경제적 갈등의 골은 더욱 깊어졌다. 임금의 급등으로 한국 상품은 세계시장에서 차츰 가격경쟁력을 잃기 시작했다. 불과 몇 해 전, 「한국(상품)이 (몰려)온다」는 특집기사를 실었던 外誌(외지)는 이 무렵 「한국인이 샴페인을 너무 일찍 터뜨렸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1993년 金泳三의 「문민정부」가 출범했지만, 아침저녁으로 변하는 여론조사의 인기도에 연연하여 「깜짝 쇼」 정치를 연출함으로써 국가관리행정은 다음 순위로 밀려나 버렸다. 그 결과 1994년 聖水大橋(성수대교)의 붕괴에 이은 1995년의 삼풍백화점 붕괴 참사는 서울을 한순간에 부끄러운 도시로 만들고 말았다. 더욱이 임기 말에 이르러 야당의 극한투쟁 등에 의해 개혁입법에 실패함으로써 금융위기에 봉착, 한국 경제를 IMF(세계통화기금)의 관리체제로 추락시키고 말았다.

뒤이어 등장한 金大中의 「국민의 정부」는 집권 1년6개월 만에 「IMF 졸업」을 선언했지만, 말과 행동의 불일치에 따른 정책의 신뢰성 상실로 경제가 다시 추락하는 위기를 맞고 있다. 그러나 6·25 전쟁의 폐허를 딛고 「한강의 기적」을 이룩한 서울 코리아가 이런 정도의 시련에 꺾이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다시 일어서겠다는 의욕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정직하고 감동적인 리더십이다.●


참고서적:
서울六百年史(서울특별시)·三國史記·조선왕조실록 CD-ROM(서울시스템)·練藜室記述·東國與地勝覽·梅泉野錄·서울이야기(이건영 저)·서울근현대사 기행(서울시립대학교 부설 서울학연구소)·한민족전쟁사총론(교학연구사)·한국전쟁사부도(육군사관학교)·내 손안의 작은 도서관(조선일보사)·서울의 궁궐(조선일보사)·조선왕조사(이성무)·한국사-조선초기의 경제구조(국사편찬위원회)·서울, 20세기(서울시정개발연구원)·서울지도대사전(성지문화사)·서울, 20세기(서울시정개발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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