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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라팔가는 알아도 기벌포는 모른다

우리 민족 최초의 통일국가를 출발시킨 기벌포 전투, 그 현장엔 표석 하나 설치되어 있지 않다.

글 鄭淳台 기자  2008-0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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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벌포가 어디에 있는지 아십니까. 혹시 영국의 넬슨 제독이 나폴레옹의 함대를 물리친 트라팔가 海戰(해전)은 알아도 기벌포 해전은 모르는 것 아닙니까.

기벌포는 羅唐(나당) 7년전쟁에서 신라가 唐나라에 최후의 승리를 쟁취한 현장입니다. 기벌포 전투의 역사적 의미는 李舜臣(이순신) 장군의 한산대첩을 웃도는 것입니다. 기벌포 전투의 승리로 우리 민족사 최초의 통일국가가 성립되었기 때문입니다.

660년 백제의 멸망과 668년 고구려 멸망으로 신라의 삼국통일이 이룩된 것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唐은 백제의 옛 땅에 웅진도독부, 고구려의 옛 땅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해 직할 식민지로 삼는가 하면 신라까지 먹으려고 했습니다. 이에 文武王(문무왕)은 신라국가의 존망을 걸고 세계제국 당과 7년전쟁을 감행해야 했던 것입니다.

‘三國史記’에 따르면 서기 676년 11월 唐나라 장수 薛仁貴(설인귀)의 함대는 錦江(금강) 하구로 침입해 사찬 施得(시득)이 지휘하는 신라의 함대와 격돌했습니다. 신라의 수군은 첫 전투에서는 패배했으나, 곧장 전열을 수습하고 우군의 기동에 유리한 해상으로 唐의 함대를 끌어냈습니다.

이어 신라 수군은 무려 22차례에 걸친 파상적인 공격을 감행해 唐의 함대에 치명적인 타격을 가하면서 唐軍 4000명의 머리를 베었습니다. 육상전투와 달리 해전에서는 참수를 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唐軍의 전사자는 수급의 수보다 훨씬 많았을 것입니다.

지난 1월23일, 필자는 금강운하 건설 구간을 답사하기 위해 전북 군산에서 금강을 건너 서천군으로 건너갔습니다. 금강운하의 출발점인 금강 하구 둑에서 만난 금강발전연구회 관계자들은 필자에게 금강운하 건설의 필요성과 백제 역사-문화권 복원 및 개발구상을 인상 깊게 설명했습니다. 익히 아시는 바와 같이 금강의 중류에는 백제의 古都(고도)인 부여와 공주가 있습니다. 백제의 古都 부여-공주 지역 등 금강권의 역사유적을 물길로 잇는 관광 인프라 구축은 매우 의미 있는 일입니다.

브리핑 자리에 마침 ‘기벌포 문화마당’을 운영하는 劉承光(유승광) 박사도 참석해 필자가 劉박사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劉박사님, 기벌포(지금의 서천군 장항읍)에 가면 기벌포 전투의 의미를 설명하는 표석이나 안내판이 세워져 있습니까.
“아직 없습니다. 기벌포 전투의 의미는 크지만, 백제 정서가 강한 지역이다 보니….”

당초 우리 일행은 금강 하구 둑에서 상류 쪽으로 올라가며 답사할 예정이었지만, 방향을 정반대로 바꿔 長項邑(장항읍)으로 내려갔습니다. 장항읍의 서쪽 끝 前望山(전망산) 정상에 우뚝 솟은 장항제련소의 굴뚝이 여전히 금강 하구 지역의 랜드마크가 되어 있습니다. 남한의 유일한 제련소였다가 1980년대에 온산 비철금속공업단지가 건설된 후 이전되고, 그 자리는 銅(동) 가공공장으로 바뀌어 이제 높은 굴뚝에서 연기가 나지 않게 되었습니다.

―제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 국가기간산업체인 ‘장항제련소’를 달달 외었는데, 여기에 오니 참 감명 깊습니다.
“1936년에 장항제련소가 건설되고, 1938년 읍으로 승격한 장항은 금속공업 이외에 비료·조선 등의 공업이 발달했습니다. 군산과의 사이에 나룻배가 시내버스처럼 자주 운항했는데, 금강 하구 둑이 건설되면서 교통은 좀 편리해졌지만, 장항은 먹고살기가 막막한 곳입니다.

―後望山(후반산) 동쪽에 논밭이 보이는데.
“장항의 강, 바다, 땅이 모두 오염되었어요. 이곳에서 생산되는 쌀은 전량 수매해 폐기하고 있습니다. 장항에는 토양 오염으로 각종 암 환자가 집단적으로 발생하고 있습니다. 공해를 일으키는 제련공정은 폐쇄되고, 지금은 압연과 같은 금속 가공업에만 주력하고 있지만…."

-‘三國史記’를 보면 기벌포 전투는 前後 23차례나 전개되었는데, 그 까닭을 무엇이라 보십니까.
“처음 몇 차례에는 신라 함대와 唐의 함대가 서로 편대를 이뤄 격돌 했고, 나머지는 패전 후에 도주하는 唐의 함대에 대해 추격전을 벌였기 때문에 전투회수가 늘어난 것으로 생각합니다.”

―전투해역의 범위를 어떻게 판단하고 계십니까.
“전투해역은 장항 서쪽 해안에서 20~25km 북쪽 庇仁灣(비인만: 서천군 서면 마량리)에 이르는 해역이었다고 봅니다.

비인만의 馬梁(마량)은 작은 어촌이며, 이곳의 서천화력발전소(40만kW)는 충남탄전의 저질탄을 소비하기 위해 1983년에 완공된 것입니다. 비인만에는 바지락과 김이 많이 생산됩니다.

―기벌포 전투의 역사적 비중에 상당하는 전적지 조성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금강유역이 백제문화권임은 저명한 사실이지만, ‘기벌포 전투’의 현장으로 널리 알려져야 관광지도 될 것 같습니다.
“10여 년 전부터 ‘기벌포’라는 지명을 사용하며 청소년 답사 등을 추진했지만 부진하며 ‘기벌포 전투’가 널리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2003년부터 조립식 건물에 ‘기벌포 문화마당’이라는 간판을 붙여 놓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신라 수군의 승리는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그것은 해상 기동전술의 능숙한 구사 때문입니다. 종래의 수전은 接舷戰(접현전), 즉 갑판을 서로 맞대 놓고 피아가 칼과 창으로 승부를 가르는 방식 위주로 전개되었습니다. 따라서 접현전 위주의 해전은 한두 차례, 많아야 서너 차례의 접전으로 끝나게 마련입니다.

기벌포 전투에서 23차례의 격전을 벌였다는 것은 신라의 수군에 의해 기동전과 접현전을 배합한 전투형식이 구사되었음을 말해 줍니다. 즉, 전투과정에서 변화되는 상황에 따라서 신속한 함대 기동으로 유리한 대형을 짓고, 연속적인 공격을 가해 唐의 함대를 궤멸시킨 것입니다.

당시 신라나 唐의 무기체계는 서로 비슷했다고 봅니다. 그런데도 신라 수군이 압승했다는 것은 신라의 造船(조선) 기술과 해군 전술이 우위에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주목되는 대목은 당시 신라가 ‘千步弩(천보노)’라는 신예 공격무기를 보유했다는 점입니다. 오늘날 다연발 로켓의 시원적 형태입니다. 당시의 1步는 1.4m이니까 천보노는 목표물을 향해 1400m를 날아간 것입니다. 천보노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적의 함대를 제압할 수 있는 신예무기입니다.

천보노의 존재는 ‘三國史記’ 문무왕 9년(669) 겨울 조에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는 만큼 여기서는 생략하겠습니다. 다만, 다음 대목은 잠시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겠습니다.

唐 고종은 천보노의 제작기술을 탐내 신라의 기술자 구진천을 唐나라로 불렀습니다. 그 무렵만 해도 신라는 唐에 대한 직접적인 도전은 삼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구진천은 국가이익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걸고 그 제조기술을 가르쳐 주지 않았습니다.

기벌포 전투 이후 신라가 황해의 제해권을 장악, 唐의 수군은 압록강 남쪽으로 진출하지 못했습니다. 제해권을 상실한 唐은 兵站線(병참선)을 유지할 수 없어 한반도에 대군을 파견할 수 없었습니다.

당시, 唐은 吐藩(토번: 지금의 서장자치구)과 실크로드의 헤게모니를 놓고 피 터지는 전쟁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제 아무리 강대국이라도 2正面 전쟁의 수행은 무리입니다. 드디어 唐은 한반도에 대한 원정군 파견을 포기했습니다. 그 결과, 압록강 이남으로부터 대동강 이북까지의 땅은 羅·唐 양국의 완충 지대가 되었습니다.

唐의 최대 약점은 수군이 허약하다는 점이었습니다. 전통적으로 中原의 패권이 육상전에 의해서 결정되어 왔기 때문입니다. 신라는 그 약점을 꿰뚫어 보았습니다.

羅唐 7년전쟁 중에도 唐의 함대는 한반도 중부 예성강, 임진강, 한강 방면으로 수송선을 진입시키는 수륙병진 전략을 구사했습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황해 연안을 지키던 신라의 함대는 唐의 수송선을 요격해 그들의 병참선을 끊었습니다. 그 결과, 唐의 육군은 임진강 계선을 돌파하지 못했습니다. 군량과 무기를 보급받지 못한 唐將(당장) 이근행이 이끈 육군 20만은 기벌포 전투 1년 전인 675년 가을 買肖城(매소성: 경기도 연천군 청산면 대전리)에서 신라의 육군에 패퇴하고 압록강 이북으로 철수했습니다. 이것이 육상전의 최후 결전이었습니다.

기벌포 전승 2년 후인 678년 문무왕은 그때까지 兵部에 예속되어 있던 船府署(선부서)를 兵部와 동격인 船府로 독립시킵니다. 이것이 바로 해상 세력의 우위를 통해 나라의 안보와 발전을 누리겠다는 문무왕의 大구상이었습니다.

필자의 금강 물길 답사는 강경-부여-공주를 거쳐 대청호까지 이어졌지만, 만약 676년 기벌포 전투에서 신라군이 唐軍에 졌다면 현재 거론되고 있는 백제 역사와 문화의 복원 같은 사업이 가능한 것인지 확신이 서지 않았습니다. 기벌포에 전승기념비 하나 세우는 일이야말로 우리 역사를 바로 세우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鄭淳台(월간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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