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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庾信과 그의 시대(25)

글 정순태 기자  2005-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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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庾信과 그의 시대(25)

정순태


고구려 부흥군과 연합, 唐과 대결

당은 668년 12월 고구려 고토를 나누어 9도독부, 42주, 1백 현으로 만들고, 평양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했다. 안동도호에는 薛仁貴(설인귀)가 임명되었다. 설인귀는 군사 2만을 거느리고 평양성에 진주했다.

669년부터 신라는 唐에 대한 적대 행위를 서슴지 않았다. 보장왕의 서자 安勝(안승)이 669년 2월 4천여 호를 이끌고 신라에 투항했다. 이 무렵 고구려 부흥운동의 핵심적 인물은 대형 劒牟岑(검모잠)이었다. 670년 그는 水臨城(수림성)에서 궐기했는데, 한때 평양성을 점령했던 듯하다. 그러나 차츰 당군에 밀려 그 유민들을 거느리고 대동강을 건너 漢城(황해도 재령)으로 남하했다. 그는 서해상의 史冶島(사야도)에서 安勝을 만나 새 임금으로 받들고 문무왕에게 사자를 보내 아뢰었다.

『우리의 먼젓번 임금(보장왕)은 잘못이 많아서 멸망했으므로 이제 저희들은 고구려의 귀족 안승을 새 임금으로 삼았으니, 원컨대 大國(신라)의 藩屛(번병:울타리)이 되어 길이 충성을 다하게 해 주십시오』

문무왕은 안승과 검모잠 등을 金馬渚(금마저:전북 익산)로 옮기게 한 뒤 報德國(보덕국)이란 국호를 내렸다. 보덕국은 백제의 고토를 차지한 웅진도독부를 견제할 목적에서 급조된 신라의 부용국이었다.

그러면서도 신라는 평화 공세를 병행했다. 669년 문무왕은 欽純(흠순)과 良圖를 사신으로 보내 당 고종에게 사죄했다. 사죄사 파견의 이유는 문무왕이 백제의 토지와 유민을 취해 당 고종이 격노했기 때문이었다. 당 고종은 陳謝使節(진사사절)인 흠순과 양도를 감옥에 감금했다.

그러나 당초의 영토분할 약정에 의거하면 신라가 백제 고토의 전부를 차지하도록 되어 있었던 만큼 잘못은 당측에 있었다. 그럼에도 일단 굽히고 들어온 신라측의 평화 공세에 당 고종은 감금 중이던 김흠순을 석방했다. 그러나 김양도는 계속 억류되어 결국 옥사하고 말았다.

문무왕 10년(670) 長安(장안) 남쪽 終南山 至相寺(종남산 지상사)에서 10년 수도중이던 승려 義相(의상)이 김흠순의 傳言(전언)을 갖고 급거 귀국했다. 전언의 내용은 당군의 신라 원정이 임박했다는 정보였다. 이런 義相에 대해 국내 연구자들 중에는 전제왕권 혹은 전체주의에 복무한 어용 승려로 평가절하하는 사람들까지 있다.

그런 사람들은 일본 京都(교토)의 불교 성지 梅尾山(매미산)에 있는 명찰 高山寺(고산사)를 한번 찾아가 스스로 시각 교정을 시도해 볼 필요가 있다. 고산사에는 승려로서 의상의 모범적 행적을 묘사한 두루마리 그림 華嚴緣起繪卷(화엄연기회권)을 일본의 국보로 소장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곳에선 義相과 元曉(원효)의 영정을 모셔 놓고 名神(명신), 즉 석가모니에 버금가는 신으로 받들어 왔다.

의상 대사는 海東華嚴(해동화엄)의 初祖(초조), 중국 화엄의 3祖, 일본 화엄의 淵源(연원)으로 추앙되는 우리 민족사상 최초의 세계적 사상가이며 가장 모범적인 實踐行者(실천행자)였다. 이런 義相까지도 종교의 본원적 求道(구도)보다 국난 극복을 위한 제1선에서 복무했다는 점에서 신라 호국불교의 성격과 신라 국가체제의 秀越性(수월성)을 느끼게 한다.

良圖의 옥사 후 신라는 對唐 전쟁 노선을 더욱 강화한다. 670년 3~4월에 신라의 사찬 薛烏儒(설오유)와 고구려의 태대형 高延武(고연무)는 각각 精兵(정병) 1만명을 거느리고 압록강을 건너 皆敦壤(개돈양:지금의 遼寧省 鳳凰城 방면)에서 당의 부용집단 말갈군을 대파했다. 그러나 唐兵이 공격해오자 나·려 연합군은 작전상 슬그머니 물러나 근거지를 지켰다.

고구려가 멸망할 당시 요동에는 안시성을 비롯한 11개 성이 항복하지 않고 계속 저항했다. 문무왕은 이런 고구려 부흥군을 도와 신라군을 압록강 너머 깊숙이 투입하여 당병과 싸우게 하는 한편 백제의 고토를 노리는 일대 캠페인을 걸기 시작했다.

670년 겨울 10월 문무왕은 장군 品日(품일)과 文忠(문충)에게 군사를 주어 백제 고토로 진격시켰다. 백제의 잔당이 명을 거역하고 반란을 일으킬 기회만 엿보고 있다는 이유를 내걸었다. 품일·문충 부대는 단번에 63개 성을 빼앗고, 여기서 살던 백제 유민들을 신라땅으로 이주시켰다. 또한 신라의 천존·죽지 부대는 7개 성을, 군관·문영 부대는 12개 성을 각각 빼앗았다. 한 달간에 전남·전북 일대의 82개 성을 전격적으로 석권한 눈부신 전과였다.

671년 여름 신라의 장군 竹旨(죽지)가 군사를 이끌고 부여 서쪽 加林城(가림성)의 벼를 짓밟았다. 이것은 웅진도독부의 병참원인 屯田(둔전)을 폐허화한 것이다. 이에 당군과 백제군이 연합하여 신라군을 반격했다. 드디어 부여 동쪽 石城(석성)에서 전투가 벌어져 竹旨 부대가 적 지휘관 6명을 사로잡고 5천3백명의 머리를 벴다. 신라군은 웅진성을 압박하면서 백제의 古都 사비성 일대에 蘇夫里州(소부리주)를 설치했다.


문무왕의 「答薛仁貴書」

당 고종은 薛仁貴(설인귀)에게 신라 정벌의 책임을 맡겼다. 671년 가을 7월26일 설인귀는 문무왕에게 反唐(반당)행위를 힐책하는 서한을 보냈다. 그 내용은 신라가 軍備(군비)를 강화하고 安勝을 보호하는 데 불만을 표하면서 은혜를 저버리고 배신하려 한다는 비난과 당군의 압도적 軍勢를 들먹이며 신라의 복종을 요구하는 협박이었다.

이에 대해 문무왕은 즉각 당의 과욕을 비판하고 신라의 정당성을 천명하는 답장을 보냈다. 이것이 역사적 문건으로 회자되는 「答薛仁貴書」(답설인귀서)로서 이미 앞의 여러 곳에서 부분적으로 인용했지만, 그 골격을 재검토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왜냐하면 그것이 당시의 나·당 분쟁의 핵심을 집약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골자는 다음과 같다.

1) 여·제를 멸망시킨 다음에 시행키로 했던 영토분할 약정, 즉 당 태종이 648년 입조한 父王(김춘추)에게 평양 이남의 고구려 토지와 백제 전역을 신라에게 주기로 한 약속을 당측이 지키지 않았다.

2)660년 백제 평정 때 당의 水軍이 겨우 백강 어귀에 들어올 즈음 신라의 김유신 軍은 이미 백제의 대부대를 격파했다.

3)사비성의 당군이 백제부흥군에게 포위당하여 위급한 상황에 빠졌을 때 문무왕 자신이 군사를 거느리고 달려가서 사면의 적을 한꺼번에 격파하고 군량을 수송해 주었다. 웅진도호 劉仁願(유인원) 이하 1만의 당병이 4년 동안 신라의 것으로 衣食(의식)하였으니, 가죽과 살은 비록 중국에서 났지만 피와 살은 모두 신라의 것이다.

4)662년 정월 兩河道(양하도) 총관 김유신이 평양성을 공략하던 唐軍에 군량을 공급하여 궤멸의 위기에서 구원해 주었다.

5)663년 왜선 1천 척이 백강구에 머물러 있었으며, 백제 부흥군의 기병이 강가에서 倭船을 수비하고 있었는데, 신라의 정예 기병부대가 선봉이 되어 먼저 강가의 진지를 격파하니, 주류성은 힘을 잃고 마침내 항복했다.

6)668년 평양성 공위전에서 신라의 김문영 부대가 선봉이 되어 淵男建(연남건)의 大陣(대진)을 격파하니, 평양 성중의 기세가 꺾였다. 이어 평양성 공격 때 신라의 정예 기병 5백이 먼저 성문으로 들어가 마침내 격파하는 大功(대공)을 세웠다. 그런데도 이적은 『신라엔 아무런 공이 없다』고 했다.

7)卑列城(비열성:함남 안변)은 본래(진흥왕 이후) 신라의 땅이었는데, 당은 이 땅을 다시 고구려(안동도호부)에 돌려 주었다.

8)668년 백제(웅진도독부)는 앞서 모여 맹약한 곳(취리산)에서 경계를 옮기고, 경계 표시를 바꾸어 田地(전지)를 침탈했으며, 우리의 노비를 달래고 백성들을 유혹하여 데려가 숨겨 놓고는 우리가 여러 번 찾아도 끝까지 돌려 보내지 않았다.

9)『당나라가 배를 수리하면서 밖으로는 왜국을 정벌한다고 하지만, 사실은 신라를 공격하려는 것이다』라는 소문이 들려오니, 백성들은 놀라고 두려워하면서 불안하게 지냈다.

10)웅진도독부가 백제 여자를 漢城(한성)도독 朴都儒(박도유)에게 시집 보내고, 그와 음모하여 신라의 兵器(병기)를 훔쳐서 한 州(주)의 땅을 습격하려 했으나, 다행히 발각되어 즉시 박도유를 참수하였기에 음모가 성공하지 못했다.

11)670년 7월에 당에 갔던 使臣 김흠순이 귀국하여 말하기를, 『장차 경계를 확정할 것인데, 지도에 의해 백제의 옛 땅을 조사하여, 웅진도독부에 돌려 줄 것』이라고 전했다. 黃河(황하)가 마르지 않았고, 泰山(태산)이 아직 닳지 않았거늘 3, 4년 사이에 주었다가 다시 빼앗으니, 신라 백성들이 『지금 백제의 정황을 보면 스스로 별도의 한 국가를 세우고 있는 것이니, 백년 후에는 우리 자손들이 반드시 그들에 의해 멸망될 것』이라고 실망하고 있다.

12)백제(웅진도독부)는 거짓으로 『신라가 반역한다』고 상주했다. 신라는 당 조정의 후원을 잃고 백제의 참소를 당해 질책만 당했으므로 황제에게 충성을 보일 기회가 없었다. 사정이 이러함에도 당은 사신을 보내어 근본적인 사유를 물은 적이 없다.

13)고구려와 백제가 평정되기 전에는 사냥개처럼 부리더니, 野獸(야수)가 사라진 지금에 이르러서는 도리어 삶겨 먹히는 박해를 당하고 있다. 잔악한 백제는 雍齒(옹치)의 상을 받고, 당에 희생당한 신라는 丁公(정공)의 죽음을 당하게 되었다(옹치는 한고조 劉邦으로부터 가장 미움을 받은 신하였으나, 천하 통일 후의 논공행상 때, 群臣에 대한 불만의 무마책으로 중용되었으며, 공을 세운 정공은 오히려 처형당함).


신라의 삼국통일에 대한 폄하는 植民史觀

「答설인귀書」는 開戰(개전) 외교문서의 白眉(백미)다. 여기서 신라는 당군을 공격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조목조목 당당하게 밝히고 있다. 특히 문무왕은 설인귀에게 백제와 고구려의 평정에서 신라가 首功(수공)을 세운 구체적 사례까지 들이댔는데, 이는 공정한 전후처리(점령지 분할)를 이행하지 않겠다면 전쟁뿐이라는 입장을 대내외에 선언한 것이었다.

설인귀라면 고구려 정벌전에 계속 참전했던 장수였던 만큼 그를 상대로 문무왕이 사실과 다른 말은 할 수 없었을 터이다. 그렇다면 이 문서는 삼국통일 전쟁에서 신라의 실질적인 역할을 가감 없이 파악할 수 있는 역사적 문건이다.

나는 신라가 외세에 기대어 삼국통일을 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나 나·당 7년전쟁의 개전 원인을 신라의 배신적 행위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일부 일본인 학자들에게 「답설인귀서」를 다시 한번 음미해 보라고 권하고 싶다.

신라는 영토 분쟁과 자주권의 침해를 근원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對唐전쟁을 결단했던 것이다. 신라의 삼국통일을 폄하하는 것은 또 하나의 植民史觀(식민사관)이다. 아니면 식민사관의 음흉한 毒手(독수)에 넘어간 바보 짓이다.

「답설인귀서」는 당시의 슈퍼파워를 상대로 한 문서였던 만큼 그 언사가 부드럽기는 하지만, 事實 규명과 국가이익에 관해서는 한 치의 양보도 찾아볼 수 없다. 나는 방대한 이 문서의 全文(전문)을 「삼국사기」에 전재한 것에 관한 한 金富軾(김부식)의 안목을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만약 이 문서가 失傳(실전)되었다면 통일신라의 역사적 평가는 크게 훼손당할 뻔했다. 「舊唐書」(구당서), 「新唐書」(신당서), 資治通鑑(자치통감) 등 중국측의 史書는 삼국통일에 있어 신라의 역할을 무시하는 中華(중화) 이데올로그들(理論陣)의 기록이기 때문이다.
<26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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