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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庾信과 그의 시대(26)

글 정순태 기자  2005-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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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庾信과 그의 시대(26)

정순태


强首는 21세기에 내놓아도 초일류 인물


「답설인귀서」는 통일신라의 존재 가치를 후세에 명백하게 증명했다. 바로 이런 점에서 그 기초자는 우리 민족사에서 결코 가볍게 다룰 수 없는 인물이다. 다만 그가 누구인지에 대한 명시적 기록은 없다. 그러나 「삼국사기」 열전을 보면 그가 바로 强首(강수)란 이름의 대문장가임을 대번에 짐작할 수 있다.

〈문무왕이 말하기를 『강수가 문장 짓는 일을 스스로 맡아서, 편지로써 중국 및 고구려, 백제에 의사를 잘 전할 수 있었기 때문에 功業을 이룰 수 있었다. 우리 선왕(무열왕)이 당에 청병하여 고구려와 백제를 평정한 것이 비록 武功(무공)이기는 하지만, 문장의 도움이 있었으니 강수의 공을 어찌 소홀히 하겠는가?』라 하고, 그에게 沙(사찬)의 작위를 주고, 해마다 租(조) 3백 석의 봉록을 주었다〉

위의 기록을 보면 외교문서 작성에 관한 한 강수는 무열왕·문무왕 양대에 걸쳐 독보적 존재임을 알 수 있다. 다만 그의 공로에 비해 그의 관등이 제9위인 사찬에 머물렀다는 점이 다소 의외지만, 당시의 신라가 武人(무인) 귀족사회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해될 수 있는 대목이다.

더구나 강수는 그 출신 성분이 김유신처럼 신라에게 멸망당한 가야의 후예다. 그렇다면 삼국통일기의 신라에 있어 최고의 공훈을 세운 文臣도 武臣의 경우처럼 가야 출신이었다는 얘기다. 이것은 신라가 비록 엄격한 골품제 사회이긴 했으나, 고구려나 백제에 비해서는 인재를 널리 구해 국가 목적에 활용했다고 해석할 수밖에 없다. 이런 신라 사회의 인재 등용의 모습과 지식인의 행태를 엿보기 위해서라도 强首의 인생 행로는 거론할 가치가 있다.

강수는 中原京(중원경:충주)에서 奈麻(나마:관등 제11위) 昔諦(석체)의 아들로 태어났다. 중원경은 가야의 망국민을 대거 이주시킨 고을로 신라 5小京(소경) 중 하나였다. 강수의 아버지가 나마의 관등을 받았다는 것은 그의 가계가 옛 가야의 지식층이었음을 의미한다.

강수는 태어날 때부터 머리 뒷부분의 뼈가 크게 불거진 모습이었다니까, 시쳇말로 심한 짱구였다. 그런데 그는 성장하면서 스스로 글을 깨치고 문장에 통달하는 천재성을 보였다. 그의 아버지가 어린 아들을 시험해 보기 위해, 『너는 불도를 배우겠느냐, 儒道(유도)를 배우겠느냐』고 물었다. 이에 강수가 대답했다.

『불교는 세상 밖의 종교라고 합니다. 저는 세속에 사는 사람인데, 불도를 배워서 무엇 하겠습니까? 儒家(유가)의 도를 배우고 싶습니다』

강수는 스승에게 나아가 「孝經」(효경), 「曲禮」(곡례), 「爾雅」(이아), 「文選」(문선)을 읽었다. 배운 것이 비록 적었으나 깨달은 바는 高遠(고원)했다. 마침내 벼슬길에 나아가 당대의 걸출한 인재가 되었다. 강수는 21세기에 내놓아도 초일류 인물이다. 列傳(열전)의 다음 기록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강수가 일찍이 釜谷(부곡)의 대장장이 딸과 野合(야합)했다. 나이 20세가 되자 부모가 고을의 처녀들 가운데 예쁘고 행실 바른 규수를 중매하여 그의 아내로 맺어 주려고 했다. 그러나 강수는 딱 부러지게 사양했다. 아버지가 질책하기를, 『너는 세상에 이름이 나서 나라 사람들 중에 모르는 사람이 없는데, 미천한 여자를 배필로 삼는다면 또한 수치스러운 일이 아니냐?』라고 했다. 강수가 두 번 절하고 말하기를, 『가난하고 천한 것이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도를 배우고도 실행하지 않는 것이 정말 부끄러운 것입니다. 일찍이 듣건대 古人(고인)이 이르기를 『糟糠之妻(조강지처)는 쫓아내지 아니하고, 빈천할 때의 친구는 잊어서는 안된다고 했으니, 천한 아내라고 해서 차마 버릴 수 없습니다』라고 했다〉

무열왕의 즉위 초에 당의 사신이 와서 詔書(조서)를 전달했는데, 난해한 부분이 있어서 조정 전체가 난감해 했다. 한문 문장은 원래 典故(전고)에 해박하지 않으면 해독이 불가능한 것인데, 중국의 군주들은 흔히 난해한 글을 보내 주변국에게 골탕을 먹였다. 드디어 무열왕이 강수를 불러 물었는데, 그는 한 번 보고 물 흐르듯 풀이했다.


强首, 역사상 가장 청렴한 道 세운 인물


왕이 놀라고 기뻐하며 서로 만남이 늦은 것을 한탄하고 그의 성명을 물었다. 그가 대답하기를 『신은 본래 任那加良(임나가량:김해) 사람이며, 이름은 字頭(자두)입니다』고 했다. 왕이 말하기를 『경의 頭骨(두골)을 보니 强首 선생이라고 부를 만하다』라고 했다.

무열왕이 당 고종의 조서에 답하는 表(표)를 짓게 했는데, 그 문장이 세련되고 뜻이 깊었다. 이후 왕은 그의 이름을 부르지 않고 任生(임생)이라고 존중했다.

강수는 진정한 선비였다. 그가 일찍이 생계를 도모하지 않아 가난했지만, 태연했다. 문무왕이 有司(유사:관계기관)에 명하여 新城(신성)의 租 1백 섬씩을 매년 지급하도록 했다. 신성에는 관리들에게 녹봉을 지급하는 창고가 있었다.

신문왕 즉위 초에 강수가 죽어 장사를 지낼 때 관청에서 크게 부의를 했는데, 강수의 아내는 모두 佛事(불사)에 쓰도록 헌납했다. 강수의 아내가 낙향하려 하므로 신문왕이 租 1백 석을 하사했다. 그녀가 사양하여 말하기를, 『첩은 천한 몸으로 衣食(의식)을 남편에게 의지하여 國恩(국은)을 이미 많이 입었습니다. 지금은 홀몸이 되었는데, 어찌 감히 더 이상 나라의 후한 하사를 받겠습니까?』라고 했다. 그녀는 끝내 받지 않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신라의 통일 대업이 외교의 승리에서 상당 부분 힘입었던 만큼 强首의 공로는 矢石(시석)을 무릅쓰고 전장을 달린 무장들에 비해 결코 가볍지 않다. 더욱이 그는 우리 역사상 가장 청렴한 吏道(이도)를 세운 인물이었다. 신라가 삼국 통일을 이룩하는 데 있어 김유신과 강수를 필두로 한 가야계 인물의 공헌도는 절대적이었다. 그런 인물로는 가야금의 명인 于勒(우륵)도 결코 빼놓을 수 없다.

于勒도 강수처럼 가야 출신이며 역시 중원경에서 살았다. 우륵은 진흥왕 때 신라에 귀순하여 제자들에게 가야금, 노래, 춤을 가르쳐 신라의 예술 수준을 한 단계 올렸다. 고대사회의 전투 준비 행위에 있어서 가무음곡의 거행은 병사들의 충성심과 용기 북돋우는 데 필수적인 의식(Ritual)이었다.


『守成 또한 어렵다고 생각하소서』


문무왕 12년(672) 8월 신라군과 고구려 부흥군은 합세하여 韓始城(한시성)과 馬邑城(마읍성)에서 대승하고 白水城(백수성)까지 진격했다. 이때 평양에는 唐將 高侃(고간)의 당병 1만, 李謹行(이근행)의 말갈병 3만이 8개 영채에 둔을 치고 있다가 나·려 연합군을 역공하기 위해 남하했다.

양군이 격돌한 백수성 전투의 서전에서 신라군은 급공을 가해 당군 수천명의 목을 벴다. 당군이 퇴각하자 승세를 탄 신라군이 추격했다. 그러나 신라의 추격군은 石門(석문)에서 복병에 걸려들어 대아찬 曉川(효천) 등 장수 7인이 전사했다. 대패한 신라군은 물러나 한산주에 晝長城(주장성:지금의 남한산성)을 쌓았다.

石門의 패전엔 김유신의 차남 元述(원술)이 裨將(비장)으로 참전했다. 敗軍(패군)의 와중에서 원술이 적진에 뛰어들어 전사하려 하자, 그의 보좌 淡凌(담릉)이 막아서며 말하기를, 『대장부는 죽기가 어려운 것이 아니라 죽을 경우를 택하는 것이 어려운 것이오. 죽어서 성과를 얻지 못할 바에는 차라리 살아서 뒷날의 공적을 도모하느니만 못하오』라고 했다.

원술은 『남아는 구차하게 살지 않는 법이거늘 장차 무슨 면목으로 우리 아버지를 뵙겠느냐?』고 하며 말을 채찍질하여 돌격하려 했다. 그러나 담릉이 말고삐를 붙잡고 놓지 않는 바람에 원술은 전사하지 못했다.

문무왕이 敗報(패보)를 듣고 김유신에게 先後策(선후책)을 물었다. 유신이 아뢰기를, 『唐人들의 모략은 예측할 수 없으니 장졸들로 하여금 제각기 요충을 지키게 해야 합니다. 다만 원술은 왕명을 욕되게 했을 뿐만 아니라 家訓(가훈)을 저버렸으니 목을 베야 합니다』라고 아뢰었다. 숱한 남의 자제들을 死地(사지)에 뛰어들게 했던 김유신에겐 다른 선택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문무왕은 『하급 장교(비장) 원술에게만 중형을 처할 수 없다』며 원술의 죄를 용서했다. 원술은 부끄럽고 두려워서 감히 김유신을 만나지 못하고 시골로 몸을 숨겨 세상에 얼굴을 드러내지 못했다.

당군이 총공세로 나와 전황이 급박하게 돌아가자, 문무왕은 『저는 죽을 죄를 지어 삼가 말씀드립니다』로 시작되는 表文(표문)을 지어 올리며 몸을 잔뜩 낮추었다. 그리고 그동안 억류중이던 병선낭장 鉗耳大侯(겸이대후) 등 포로 1백70명을 당나라에 돌려보냈다. 뿐만 아니라 은 3만3천5백 푼, 구리쇠 3만3천 푼, 바늘 4백 개, 우황 1백20푼, 금 1백20푼 등을 진상했다.

이런 저자세 외교로써 나·당 관계는 일단 소강상태를 이루었다. 신라 외교는 이렇듯 能小能大(능소능대)했다. 「비가 오려고 하면 우산을 준비해야 한다」는 속담은 이럴 때 써먹어야 제격이다. 이후 唐이 土蕃(토번:티베트)의 공세와 거란, 말갈 등의 반란으로 곤경에 빠짐으로써 신라에게 유리한 국제정세가 조정된다.

신라가 전략적 우위에 있던 673년 7월1일 삼국통일의 원훈 김유신은 79세를 일기로 병사했다. 임종 직전의 김유신이 병문안하러 온 문무왕에게 당부하는 유언의 마지막 부분은 음미하면 할수록 老臣(노신)의 충정이 느껴진다.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공을 이루는 것이 쉽지 않음을 아시며, 守成(수성)하는 것 또한 어렵다는 것을 생각하시고, 소인배를 멀리하며 군자를 가까이 하시어, 위로는 조정이 화목하고 아래로는 백성과 만물이 편안하여 화란이 일어나지 않고 나라의 기틀이 무궁하게 된다면 저는 죽어도 여한이 없겠습니다』

문무왕은 김유신의 부음을 듣고 매우 애통해 하며 채색 비단 2천 필과 벼 2천 섬을 부의로 보내 喪事(상사)에 쓰게 하고, 군악대 1백명을 보내 장례를 엄숙히 거행토록 했다. 김유신의 시신은 金山原(금산원)에 묻혔으며, 왕명으로 비를 세워 그의 功名(공명)을 기록하고, 民戶(민호)를 정하여 그 무덤을 지키게 했다. 금산원은 경주 고속버스 터미널에서 西川橋(서천교)를 넘어 오른쪽 포장도로로 1km 정도 가면 만날 수 있는 야산이다. 바로 이곳에 정교한 12支像(지상)의 護石(호석)으로 둘러쳐진 김유신의 무덤이 있다.


김유신 家門의 法度와 蓄財


김유신의 부인은 무열왕의 3녀인 智炤(지소)이며, 嫡出(적출) 자녀로는 5남4녀를 두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장남은 숙위로서 對唐 외교의 일선에서 활약했고, 평양성 공위전에 참전하여 전공을 세움으로써 후일 이찬(관등 제2위)의 지위에 오른 三光(삼광)이다.

2남은 소판(관등 제3위)의 지위에까지 오른 元述(원술)이다. 원술은 672년의 석문전투 때 臨戰無退(임전무퇴)를 실행하지 못한 자신의 행동 때문에 아버지 김유신에게 용납되지 못하고 벽지에서 1년간 숨어 지내다가 아버지가 죽은 뒤에야 어머니를 만나려고 했다. 그러나 지소 부인도 『원술은 이미 先君(선군:김유신)에게 자식 노릇을 못하였으니 내가 어찌 그의 어미 노릇을 하겠는가』라고 말하며 끝내 자식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원술은 통곡을 하며 태백산으로 들어가 그로부터 세상을 등졌다. 김유신 집안의 法度(법도)는 이렇게 엄정했다. 원술의 밑으로는 3남 해간(관등 제4위) 元貞(원정), 4남 대아찬(제5위) 長耳(장이), 5남 대아찬 元望(원망)이 있었다. 軍勝(군승)이란 이름의 서자까지 관등 제6위인 아찬의 지위에 올랐다.

이렇듯 부귀의 절정에 이른 김유신 家에도 다소 묘한 일이 일어난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지소 부인은 김유신의 별세 후 머리를 깎고 베옷을 입고 비구니가 되었다. 이때 문무왕은 지소 부인에게 다음과 같이 위로한다.

『지금 나라 안팎이 편안하고 근심이 없는 것은 바로 태대각간의 선물이니, 부인이 집안을 잘 다스려 태대각간을 성심으로 내조한 공로가 많았소. 과인은 이런 덕에 보답하려는 생각을 하루도 잊어본 적이 없소. 南城(남성)에서 받은 租를 매년 1천 석씩 주겠소』

확실하지는 않지만, 김유신의 별세 당시 지소 부인의 나이는 40세 안팎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녀가 왜 비구니가 되었는지 그 이유에 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신라에선 법흥왕과 진흥왕이 袈裟(가사)를 입고 승려가 된 이래 불법에 귀의했던 귀족들이 적지 않았던 만큼 지소 부인이 갑자기 비구니가 되었다고 해서 반드시 人生無常(인생무상)을 느꼈다거나 厭世(염세)의 사상을 품었기 때문인 것으로 볼 필요는 없다.

어쩌면 지소 부인은 당시 신라 귀족사회의 관습처럼 되어버린 재혼을 피해 비구니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신라에선 후궁은 물론 왕비까지도 왕의 사망 후 재혼했던 사례가 수두룩했다. 예컨대 진지왕의 왕비는 그녀의 장조카인 진평왕을 섬겼고, 진흥왕의 모후는 계부와 정부들과의 사이에 많은 자녀를 두었다. 이런 풍조는 성의 문란이란 차원에서 볼 것이 아니라 지배계급의 인적 자원을 양산해야 한다는 戰國(전국)시대의 국가 목적에 부응한 것으로 풀이된다.

신라시대엔 美의 기준도 오늘날과는 전혀 달랐다. 실제로 삼국시대 무덤 벽화에 발견되는 귀족 여성의 모습은 비쩍 마른 날씬한 몸매가 아니라 이중턱을 가진 중년의 풍성한 몸매다. 어떻든 나이 40 전후에 과부가 된 지소 부인이 지아비 김유신의 명복을 빌기 위해, 비구니가 되었다는 것은 하나의 純愛譜(순애보)라고 할 수 있다.

생전의 김유신은 財富(재부)를 쌓는 일에도 남달랐던 것 같다. 필사본 「화랑세기」 제17세 풍월주 廉長(염장) 條에는 세인들이 잠저시의 김춘추와 더불어 김유신의 집을 가리켜 水望宅(수망택)이라 했고, 『그 집으로 금화가 들어가는 것이 마치 홍수처럼 보였음을 이르는 말이다』고 쓰여 있다.

「삼국유사」에도 김유신의 집이 신라 35개 「金入宅」(금입택) 중의 하나로 기록되어 있다. 수망택이나 금입택 모두가 김유신 家의 엄청난 財富를 전해주는 표현이다. 그러면 김유신 家의 財富는 어떻게 축적된 것일까? 필사본 「화랑세기」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보인다.

「유신공이 은밀히 선덕공주를 도와서 오랜 환란을 평정한 공으로 인해 발탁되었다. 선덕공주는 제왕의 자리에 오르자, 유신공과 춘추공에게 많은 곡물을 주었다. 그리고 (유신공과 춘추공은) 사사로이 재물을 취하기도 하여…」

삼국을 주도하던 귀족층의 전투 행위 자체가 전쟁을 통한 財富의 확대를 추구하는 것이었다. 전쟁을 통해 획득되는 포로와 토지가 귀족들에게 분배되고, 그것이 귀족층의 물적 토대가 되었다. 武人사회에서 세력 기반 확대의 전제조건은 私兵(사병)의 확보였다. 「삼국사기」 문무왕 9년(669) 조에 따르면 김유신은 말을 기르는 목장을 6개소나 소유했다. 신라 최대의 군단을 거느렸던 김유신에게는 막대한 재물이 필요했을 것이다.
<27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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