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조선 기사

中國의 大運河 1800km 답사 (上) 중국 경제의 새 動力-京杭大運河의 복원工程

대운하가 中國의 문화와 英傑을 낳았다!

글 정순태 기자  2007-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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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월17일 오전 6시, 필자 일행은 寧波(영파·닝보)市 중심가의 「開元(개원)호텔」을 출발해 지프로 1시간쯤 달려, 오전 7시 32km 거리의 다셰(大?·대사) 부두에 도착했다. 杭州灣(항주만)에 떠 있는 舟山群島(주산군도)의 1300여 개 섬 가운데 하나인 普陀島(보타도)로 가는 쾌속선은 오전 8시 출항 예정이었다.

필자는 이번 답사에서, 이미 세계 150여 개국을 여행한, 運河(운하)와 海路에 관해 식견을 가진 崔秉鈗(최병윤) 회장과 동행했다. 한국外大 대학원에서 중국어를 배우는 趙誠仁(조성인)군이 통역을 자청했다.

우리 셋은 다셰港 뱃머리의 매점에서 구입한 중국제 즉석 라면과 삶은 달걀로 아침식사를 했다. 오전 8시 정각, 쾌속선 威運(위운) 6호가 출항했다. 승객 정원 65명, 빈 자리가 하나도 없는 만석이었다. 뱃길에는 예상을 웃도는 심한 濁流(탁류)가 흐르고 있었다.
杭州운하를 운항하고 있는「운하버스」와 화물선.

오전 9시10분, 항해 70분 만에 보타도港에 입항했다. 그러나 보타도의 關門을 통과하려면 입장료 160위안(1위안=韓貨 약 130원)을 따로 지불해야만 했다. 왕복 배삯(편도 배삯 70위안×2) 140위안에 입장료 160위안을 합하면 무려 300위안(한화 약 3만9000원)이다. 중국인의 물가감각으로는 만만찮은 금액일 터인데도 불구하고 이 작은 섬에 중국인들이 몰려가는 까닭은 도대체 무엇일까.

浙江省(절강성)의 보타산은 산서성의 五臺山(오대산), 안휘성의 九華山(구화산), 사천성의 阿彌山(아미산)과 더불어 중국의 4大 불교성지 중 하나이며, 그 주변은 중국 최고의 청정해역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필자 일행은 불교성지를 순례하려고 보타산을 찾은 것이 아니었다. 보타도 해역은 통일신라 이래 한반도와 중국의 대운하가 이어지는 길목이었기 때문이다.
「江南 제1의 경관」저우좡의 운하.

「高麗圖經(고려도경)」에 의하면 보타산의 觀音道場(관음도량)은 新羅人(신라인)들에 의해 성립되었다. 「高麗圖經」의 저자 徐兢(서긍)은 고려로 가는 北宋 사신단의 일원으로서 北宋의 수도 開封(개봉)에서 대운하를 타고 남하하여 杭州(항주)-영파-보타산-黑山島를 거쳐 고려의 수도 開京(개경: 개성)에 도착했던 經路에 관해 생생한 기록을 남겼다. 다음은 「高麗圖經」의 보타산 觀音像(관음상)에 관한 기록(권 34, 海道 1, 梅岑 조)이다.

<石橋(석교) 위 산록에는 蕭梁(소량)이 세운 普陀院(보타원)이 있는데, 殿閣(전각)에는 신령스런 觀音(관음)이 모셔져 있다. 옛날에 신라 商人(상인)이 오대산에 갔다가 미륵상을 조각하여 싣고 본국으로 돌아가려 하였다. 바다로 나갔으나 암초에 좌초, 배가 나아가지 아니하여 觀音像을 암초 위에 내려 놓았다. 승려 宗岳(종악)이 그 불상을 전각 안으로 모셔 들였는데, 이후로 해상으로 왕래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나아가 기도함에 感應(감응)하지 않음이 없었다>
春秋시대 吳國의 수도이며 현대 중국 IT산업의 새로운 중심인 蘇州의 운하. 水質 개선은 당면한 숙제이다.

보타산은 당시 중국의 현관이었다. 蕭梁은 불교를 惑信(혹신)했던 南朝 梁 武帝(양무제: 502~549)를 뜻한다. 그 후, 「不肯去觀音像(불긍거관음상)」은 吳越(오월)의 국왕 錢(전)씨에 의해 國刹(국찰)인 영파의 開元寺(개원사)로 옮겨졌고, 그 자리엔 새로운 觀音像을 모셨으나 영험은 덜하지 않았다고 한다.

千手千眼(천수천안)을 지닌 觀音은 난파의 위기에 처한 사람이 「觀世音菩薩(관세음보살)」이라는 名號(명호)만 외쳐도 구원의 손길을 내민다는 大慈大悲(대자대비)의 보살이다. 관세음보살의 名號가 훗날 「觀音菩薩(관음보살)」로 바뀐 것은 唐태종 李世民의 이름자 중 「世」 자를 忌諱(기휘)했기 때문이다.

京杭대운하의 절강성·강소성 구간 답사 행로.


9세기 東아시아의 巨商 張友信
보타도 돌출부에서 바라본 新羅礁. 소형 선박 뒤로 보이는 작은 암초다.

그렇다면 불긍거관음상을 보타산에 안치시켜 불긍거관음원을 성립시켰던 신라 상인은 도대체 누구일까? 동국大 사학과 曺永祿(조영록) 교수는 그의 논문 「中國 보타산 관음도량과 한국」에서 『여러 자료와 당시의 상황으로 미루어볼 때 在唐(재당) 신라 무역상 張友信(장우신)이 틀림없다』고 단정했다.

9세기 이후 신라의 사신, 상인, 구법승, 유학생들은 보타도-영파 연안을 거쳐 항주의 錢塘江(전당강) 하구에서 대운하를 이용해 長安으로 들어갔다. 영파는 신라인뿐만 아니라 일본의 견당사와 구법승, 그리고 아라비아와 페르시아 상인들이 왕래하는 국제항이었다.

日本의 구법승 엔닌(圓仁)의 「入唐求法巡禮行記(입당구법순례행기)」를 비롯한 일본 측 기록에 따르면 張友信은 明州(명주: 지금의 寧波)항을 중심으로 韓·中·日 3각무역에 종사했던 大상인이었다. 그는 844년 7월부터 864년 8월에 이르기까지 20년 사이에 다섯 차례나 일본으로 건너갔다. 이같은 그의 海上 활동시기에 불긍거관음원이 개창되었다. 다시 조영록 교수의 견해이다.

<일본 자료 「入唐五家傳(입당오가전)」에 따르면 847년 일본의 구법승 혜악도 張友信의 배를 타고 귀국했으며, 861년에는 頭陀親王(두타친왕)을 위해 배를 만들어 僧俗(승속) 60인을 태우고 나가사키를 출발, 入唐할 정도로 張友信은 해상을 주름잡고 있었다>

張友信의 국적에 대해서는 우리나라 학자뿐만 아니라 많은 일본 학자들도 신라인으로 추정하고 있다. 당시 寧波 해안에는 외국인이 다수 거주하고 있었는데, 신라 상인들은 鎭明?(진명령) 일대에 新羅坊(신라방)을 설치했고, 아라비아人과 페르시아人은 東渡門(동도문) 안에 집중적으로 거주하고 있었다. 「高麗圖經」에 기록된 신라인은 모두 진명령 일대에 거주하던 在唐 신라인이며, 元代에 들어 그들은 스스로 「高麗張氏」라고 했다. 그런 만큼 불긍거관음원을 건립한 사람은 신라 무역상 張友信일 가능성이 높다.

우리는 해변길을 500m쯤 걸어서 南天門 안쪽 돌출부로 다가갔다. 거기에 서면 약 700m 거리의 해상에 관음상을 싣고 가던 「신라 상인」의 배가 좌초당했다는 작은 바위섬이 떠 있다. 이 바위섬은 현재의 중국 지도에 「新羅礁(신라초)」라고 표기되어 있다.

우리는 돌출부에서 내려와 다시 해변길을 1km쯤 걸어서 불긍거관음상을 모시는 불긍거관음원을 둘러보았다. 「不肯去觀音像」은 글자 그대로 풀이하면 「가기를 허락하지 않았던 관음상」이라는 뜻이다. 불긍거관음원 앞 바위 위에는 「澹澹亭(담담정)」이란 정자가 있는데, 여기서도 新羅礁가 잘 보인다.


韓·中 교류史의 접점-寧波港
불긍거관음원 앞 바위 위에 서 있는 담담亭.

불긍거관음원 옆 절벽에 「潮音洞」(조음동)이라고 글씨가 암각되어 있다. 그 아래 바위굴 안으로 바닷물이 끊임없이 밀려왔다가 암벽에 부딪히면서 하얗게 부숴져 물러난다. 한국 華嚴宗(화엄종)의 初祖인 義相(의상) 스님이 동해의 파도에 얼굴을 묻고 관음에게 간절히 기도했던, 낙산사(강원도 양양)의 홍련암 관음굴과 빼닮은 구도이다.

불교성지인 보타산에는 普濟寺·法雨寺 등 명찰이 많고, 그것이 또 우리나라 불교사와 만만찮은 인연을 갖고 있기는 하지만, 이번 답사에서 그것들을 일일이 둘러볼 시간은 없었다. 우리는 오전 11시20분 다시 쾌속선에 승선, 12시20분 다셰港으로 되돌아왔다.

필자 일행이 2주간 고용했던 중국인 운전사 오君의 지프는 부두에 대기하고 있지 않았다. 우리는 부두 앞 잔디밭에 앉아 뱃머리 매점에서 사온 바나나와 삶은 달걀로 대충 점심을 때웠다. 통역 趙군의 휴대전화로 독촉을 받은 운전사 오君은 오후 1시쯤에야 지프를 몰고 만만디(漫漫的)의 얼굴로 나타났다. 어떻든 중국여행은 「그러려니」 하는 너른 마음가짐이 필수적이다.

우리 일행은 지프를 타고 영파市 鎭明路에 소재한 高麗使館址(고려사관지)를 향해 달렸다. 오후 2시10분, 약속시간보다 10분 늦게 현장에 도착해 여성 학예사 周虹(주홍)씨의 영접을 받았다. 고려사관지 현관의 대형 두루마리 벽화에는 고려의 사신이 영파港에 입항해 北宋 관리의 접대를 받는 등의 모습을 담은 대형 그림이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다.

안내판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北宋 시기에는 高麗왕조와 더욱 밀접한 관계를 맺어 쌍방은 공식 사절을 빈번히 파견했을 뿐만 아니라 민간의 무역거래가 매우 활발했다. 政和 7년(1117)에 宋나라 조정은 明州에 高麗司를 설치해 고려 관련 사무를 맡게 하고, 高麗使館을 설치하여 사절들에게 왕래의 편리를 제공했다. (中略) 고려사관은 중국 대외교류사의 꽃이며, 또한 영파 「해상 실크로드」의 중요한 문화유산이다>

北宋의 관리들은 고려 사절이 영파港에 입항하면 영빈관인 高麗使館에서 숙박토록 하면서 연회까지 베풀었다. 또한 대운하를 통해 수도 開封(개봉·카이펑)으로 가는 통행증서(官權)를 발급해 주었고, 연도의 각 府·州·縣에서는 규정대로 영접·전송했다. 지방 관리가 지역 명소, 유적을 관광시키고 토산품을 증정하기도 했다. 사절단에게는 무역이 허락되었다.

北宋은 북방의 기마민족국가 遼(요)와 金(금)의 압박을 高麗와의 군사동맹으로 풀어 보려고 외교적 노력을 기울였던 漢族국가였다. 그 결과, 고려와 北宋은 대체로 선린관계를 유지했지만, 고려가 遼의 침략을 받았던 결정적 시기에 北宋의 기회주의적 태도로 양국의 군사동맹은 끝내 성사되지 못했다.
不肯去觀音院 앞에서 필자.

고려사관지는 甬江(용강) 등 영파 시내를 흐르는 3개 강 줄기가 만나는 곳에 위치한 옛 寶奎港(보규항)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다. 고려사관지의 복원을 위해 영파에 진출한 한국기업 LG화학이 지원했다고 한다.

고려사관지 구내의 高麗廳, 明州廳, 交流廳 등을 둘러본 우리는 貴賓廳(귀빈청)에서 향기 높은 茶 대접을 받았다. 출국 전, 필자는 「張保皐(장보고)기념사업회」 회장 金文經(김문경) 교수로 부터 영파에서 「世明인더스트리」라는 기업을 경영하는 蔡鍾熙(채종희) 사장의 이름과 전화번호를 소개받았는데, 蔡사장이 고려사관지 담당자에게 필자의 방문을 미리 귀띔해 두었던 것 같다.

金文經 교수는 고려사관지를 원래의 新羅館 터로 추정했다. 통일신라 때인 9세기 이후 중국의 關門은 영파였다. 黃海를 통한 羅·唐의 교역활동이 활발해지면서 신라사람들은 한반도 서해안의 大津(대진: 당진), 鎭浦(진포: 금강 하구), 喜安(희안: 지금의 부안), 會津(회진: 영산강 하구)에서 영파 혹은 揚州(양주: 양자강과 대운하가 만나는 내륙港)로 직접 통하는 黃海남부斜斷(사단) 항로를 이용했다. 이로써 종래의 항로보다 항해거리를 크게 단축시키는 경제적 효과를 거두게 되었다.

당시 신라의 대표적인 수출품은 금·은, 인삼, 우황, 두발, 해표피 등이었다. 신라 경문왕 5년(865)에 중국으로 수출된 상품은 한층 高부가치화되어 금·은 제품과 비단 등 32종이었다. 영파港을 통해 중국이 신라와 일본에 수출한 물품은 서적을 비롯하여 불경·불화·佛具(불구), 향료, 약품, 도자기, 의복류 등이었다. 서적이 대량으로 유통되었기 때문에 중국-한반도-일본열도로 잇는 당시의 東아시아 교통로를 「실크로드」가 아닌 「북 로드(Book Road)」라고 부르기도 한다.

국제무역항으로서 영파의 번영은 宋, 元代까지 이어졌다. 기록에 따르면 남방항로를 통해 신라에 수입된 서역의 물품은 구슬, 수정, 유리, 양탄자, 산호, 玳瑁(대모), 琥珀(호박) 등이었다. 그런 교류의 흔적이 處容(처용)설화 등으로 나타났다.

元 세조 쿠빌라이 시대의 영파는 麗蒙(여몽)연합군의 제2차 日本 원정 때(1281), 江南軍의 출발항이었다. 10만 명의 강남군은 北규슈의 平戶島(히라도시마) 해안에서 태풍을 만나 궤멸적인 타격을 입었다.

우리는 이어 江東北路에 위치한 浙東海事民俗博物館(절동해사민속박물관)인 「慶安會館(경안회관)」으로 이동했다(입장료 10위안). 이곳에는 중국의 해외교류 관련 자료를 전시하고 있는데, 淸海鎭(청해진: 전남 완도)을 근거지로 삼아 중국의 대운하 지역에 진출해 韓·中·日 무역을 주도했던 「신라의 海上王」 장보고의 위업을 소개하는 구역이 따로 설치되어 있다.


王羲之와 魯迅의 고향 紹興
통일신라·고려시대에 中國의 최대 관문이었던 寧波市의 현재 모습.

10월18일, 오전 7시 우리 일행은 영파의 開元호텔을 출발해 오전 8시30분 奉化市의 봉화강변에 소재한 중화민국의 총통 蔣介石(장개석·장제스)의 고향집에 잠시 들렀다. 장개석의 조부 蔣斯千(장사천)은 ?商(염상)으로 거만의 富를 쌓은 인물이다.

소흥으로 직행하는 고속도로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일부러 奉化에 에둘러 가느라고 80여km를 더 달렸지만, 보람은 있었다. 중국은 돈이 될 만한 유적은 비록 敵(적)의 것이라도 말살하지 않고 보존한다는 사실을 절감했다. 따지고 보면 北伐(북벌)을 통해 군벌들을 일소하고, 작은 전투에서는 百戰百敗하면서도 中·日전쟁을 기어이 승리로 이끈 蔣介石의 위업은 지금 대륙을 차지한 중화인민공화국으로서도 결코 과소평가할 수 없을 것이다.

오전 11시, 우리 일행은 春秋시대 越의 수도였던 紹興(소흥·샤오싱)에 도착해 운하를 따라가며 시가지를 둘러보았다. 소흥 시내는 꾸불꾸불한 물길로 이어져 있어 「중국의 베니스」라고 불린다.

古都 소흥은 渤海(발해)의 상인 周光翰(주광한)과 言升則(언승칙) 등이 활동한 곳이다. 그들은 819년 浙東(절동)의 경제 중심지인 越州(월주·지금의 소흥市)에서 신라 상선을 타고 西일본 최대의 무역항인 하카타(博多)에 기착해 한동안 무역업무에 종사했다. 그런 다음 그들은 일본에서 외교 사명을 마치고 820년 2월13일 귀국길에 오른 발해 사신 李承英의 선편으로 東海를 종단하여 귀국했다(濱田耕策 저, 「渤海國興亡史」). 그들은 당시 신라인들이 장악했던 東아시아의 순환路를 이용했던 셈이다.
蔣介石 총통의 生家 앞에서 그의 모습으로 분장한 사람에게 중국돈 10위안을 주고 기념 촬영했다. 현관 왼쪽에 새겨진「玉泰?鋪原址」라는 글자는 蔣介石의 글씨이다.

동국大 李基東 교수는 『얼마 뒤 그들은 발해에서 육로로 압록강 하구 또는 요동반도에 당도하여 그곳에서 선편으로 山東반도의 登州(등주)에 도착한 뒤 사업장이 있는 소흥으로 복귀한 것 같다』고 말했다.

우리 일행은 소흥 시내에 있는 魯迅(노신·루쉰)의 故里로 찾아갔다. 이곳에는 중국 근대문학의 아버지 노신(1881~1936)을 기리는 박물관, 노신의 生家, 어린 시절에 공부하던 서당(三味書室)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노신은 日本에 유학해 의학을 공부하다가 『병든 中國을 고치려면 환자 하나 하나를 치료하는 의사로서는 불가능하다』며 문학의 길로 들어섰다. 노신의 본명은 周樹仁(주수인)으로, 어머니의 姓인 「魯」를 펜네임으로 썼다. 周씨의 本家에서 경영하는 음식점이며, 생전의 노신이 자주 들렀던 「咸亨大酒店(함형대주점)」에 들러 점심을 하면서 한 잔 마신 黃酒(황주)의 텁텁한 맛은 가히 일품이었다.

「함형대주점」은 노신의 소설 「孔乙己(공을기)」의 무대이다. 소설 속 주인공 孔乙己는 주견도 배알도 없는 굴종적인 캐릭터로서, 당시의 병든 중국과 중국인을 상징하는 존재이다.

소흥은 東晋시대의 명필인 王羲之(왕희지)의 고향이다. 영파-소흥 간 고속도로변에 「왕희지 故居」로 가는 길을 표시한 안내판이 붙어 있지만, 바쁜 일정 때문에 들르지 못했다. 府山공원으로 가는 길에 蘭亭(난정)을 지났는데, 이곳은 왕희지가 當代의 문인들과 어울려 詩會(시회)를 가진 후 「蘭亭集序(난정집서)」를 썼던 곳이다. 후일, 唐태종은 왕희지의 글씨를 유별나게 사랑해 「난정집서」를 품에 꼭 껴안고 무덤에 묻혔다고 한다.


「漢民族 내셔널리즘의 꽃」 秋瑾의 옛집
魯迅의 生家 후원.

紹興 시내에는 노신뿐만 아니라 「혁명의 꽃」으로 사랑받는 秋瑾(추근·추진: 1875~1907)의 故居(고거)와 周恩來(주은래·저우언라이: 1898~1976)의 祖居(조거)가 있다. 노신은 소흥에서 태어났지만, 추근은 관료였던 조부의 부임지인 福建(복건·푸젠)에서 태어났다. 주은래도 소흥이 고향이지만, 조부 周雲門(주운문)이 강소성 淮安(회안)에서 知事로 근무할 때 그곳에서 태어났다.

우리 일행은 주은래 조부의 집 앞을 지나 추근의 故居로 직행했다(입장료 10위안). 일본 유학 시절, 추근은 시퍼런 비수를 힘차게 빼어 든 모습의 사진을 남겼다. 이 유명한 사진이 필자의 발길을 끌어당긴 셈이다.

뛰어난 미모의 그녀는 아버지 秋壽南(추수남)이 5品官이었을 당시, 20세의 나이로 湖南(호남) 大부호의 아들과 결혼해 1남1녀를 낳았다. 처녀 시절부터 女俠(여협)의 기질이 농후했던 그녀는, 돈으로 6품관의 벼슬을 산 남편이 北京의 妓樓(기루)에서 질펀하게 놀아난 데 대해 격렬하게 항의했다가 손찌검을 당하자 대번에 이혼하고,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그때 그녀의 나이 30세였다.

그녀는 일본 유학 중 孫文(손문·쑨원)이 이끄는 「中國同盟會(중국동맹회)」에 가입했다. 1905년 귀국한 추근은 滿洲族이 세운 淸國(청국)을 타도하기 위한 무장봉기의 핵심멤버로 활동했지만, 여러 차례 실패했다. 1907년 7월13일, 혁명군을 양성하던 소흥의 大通學堂(대통학당: 입장료 10위안)에서 그녀는 淸國 정부군의 포위공격을 받았다. 동지들은 그녀에게 탈출을 종용했지만, 이를 거부한 그녀는 스스로 나아가 포박을 받으며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혁명은 피를 흘려야 비로소 가능하다. 내가 단두대에 오르면 혁명이 5년은 빨라질 것이다』
魯迅이 살던 옛 동네의 잡화점 간판에「孔乙己」라고 쓰여 있다.「孔乙己」는 魯迅이 지은 소설의 이름이자 이 소설 주인공의 이름이다.

이틀 후인 7월15일, 그녀는 모진 고문을 받은 후 33세를 일기로 처형당했다. 그녀가 꿈꾸던 辛亥革命(신해혁명)이 성공하기 4년인 1907년의 일이었다. 그녀가 처형당한 소흥의 중심가 네거리에는 그녀를 추모하는 기념비와 石像이 세워져 있다.

추근의 옛집은 그녀의 아버지 추수남이 벼슬에서 물러난 후 거금을 들여 지은 저택이다. 秋家의 후원을 걷다가 「나홀로 여행객」인 아가씨를 만난 김에 「왜, 여기를 왔느냐」고 물었더니, 『추근은 중국 최초의 여성해방운동가여서 좋아한다』고 대답했다.

소흥에 와서 「臥薪嘗膽(와신상담)」의 현장을 지나칠 수 없다. 春秋(춘추)시대 越나라의 궁전이 있었던 府山공원 옆 越王臺(월왕대)에 올라갔다(입장료 8위안). 吳王 부차에게 패해 갖은 치욕을 겪은 월왕 勾踐(구천)이 쓰디쓴 곰의 쓸개를 씹으며 복수를 맹세했던 「嘗膽(상담)」의 현장이다. 越王殿(월왕전)에는 와신상담의 고사를 그린 그림으로 한쪽 벽을 가득 채우고 있다.

이곳에는 「越王 구천의 보검」이 전시되어 있지만, 복제품이다. 진품은 항주에 있는 절강성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야심가 隋煬帝의 대운하 완성
「혁명의 꽃」秋瑾. 날카로운 비수를 뽑아 오른손에 들고 있다.

우리 일행은 소흥을 뒤로 하고, 60km를 달려 錢塘江(전당강) 위에 걸린 復興大橋(부흥대교)를 건너 杭州(항주·항저우) 시내로 진입했다. 인구 730만 명의 항주는 浙江省(절강성)의 省都(성도)이다. 절강성은 그 면적(10만km2)과 인구(4470만 명) 모두 한국의 그것들과 비슷하다.

항주 도심으로 이어지는 부흥대교 위에서 내려다본 전당강의 폭은 3km쯤 될 듯했다. 전당강은 京杭(경항)대운하의 출발점이자 종점이다. 중국의 京杭대운하는 海河-黃河-淮河(회하)-長江(장강=양자강)-전당강의 5개 水系를 연결하는 물길이다.

중국이 대운하를 개통시킨 것은 隋(수)왕조 때다. 隋에 의해 남북이 통일되자 江南의 곡물과 물자를 정치적 중심지인 북방으로 올려야 할 필요성이 생겼다.

원래 中國의 지형은 서쪽이 높고 동쪽이 낮기 때문에 5大 大河 모두가 대체로 西에서 東으로 나란히 흐른다. 이 때문에 동서의 교통만 편리할 뿐, 남북의 교통은 불편했다. 그에 따라 隋왕조 이전에도 황하-회하-장강을 잇는 운하가 부분적으로 개착된 바 있었지만, 분열기에는 국방상의 이유 등으로 운하의 토사를 준설하지 않고 그냥 방치해 물길로서의 기능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秋瑾의 침실.

隋를 창업한 文帝(문제)는 남북을 연결하는 운하 개수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587년 江都(강도=揚州)와 淮安을 연결하는 山陽瀆(산양독)이 개통되었다. 그러나 文帝의 시대는 300여 년에 걸친 분열과 전란이 겨우 평정된 때이고, 또한 文帝의 정책이 백성들에게 휴식을 주는 데 있었기 때문에 천하를 소란케 하는 대공사는 가능한 한 미루어 두려고 했다. 그 결과 문제가 죽은 뒤 隋왕조는 흑자재정으로 인해 錢穀珍寶(전곡진보)가 창고마다 흘러넘치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文帝를 계승한 煬帝(양제)는 야심가였다. 양제는 즉위한 604년에 수도 長安에서 동쪽의 洛陽까지의 수로를 개수했다. 양제는 스케일이 커서 전국의 5大 강을 남북으로 연결시키는 대운하의 건설을 결단했다.

즉위 이듬해인 大業 원년(605), 양제는 본격적으로 운하 개착에 착수했다. 이 해에 黃河와 淮河를 연결하는 通濟渠(통제거), 회하와 장강(양자강)을 연결하는 溝(한구)를 개통시켰다. 이어 608년에는 琢郡(탁군: 지금의 北京)과 황하를 연결시키는 永濟渠(영제거), 610년에는 전당강과 장강(양자강)을 연결시키는 江南運河를 완성시켰다.


南중국과 北중국을 통합하는 대동맥

곳곳의 운하는 부분적으로는 이미 존재했던 것이지만, 그것을 한줄기의 대운하로 만들었기 때문에 장안에서 항주까지 선박이 왕래할 수 있게 되었다. 운하의 폭은 대체로 60m 정도였다. 운하와 병행하는 御道(어도)를 축조했는데, 도로변에 버드나무를 심어 햇빛을 가리게 했다.

대운하에 수만 척의 배를 띄웠는데, 최대 규모의 선박은 양제가 탔던 龍船(용선)이었다. 기록에 따르면 용선은 길이 600m, 높이 14m, 上갑판에는 황제가 거처하는 선실과 집회소가 있었다. 2중구조로 되어 있는 中갑판에는 백관과 후궁의 선실 120개, 최하층에는 환관의 공간과 요리실, 창고 등이 설치되었다.

장안-江都(강도: 지금의 양주) 구간 운하의 연변에는 약 40개소의 離宮(이궁)이 설치되었다. 副都인 東京(동경: 낙양) 인근의 顯仁宮(현인궁)과 長江에 인접한 강도의 이궁은 특히 장려했다. 이 운하가 개통되었을 때 양제는 수천 척의 유람선과 수천 척의 호위함을 이끌고 顯仁宮에서 강도까지 순유했다.

양제는 大業 원년(605)의 겨울을 따뜻한 강도에서 보내고 이듬해 副都인 東京으로 돌아왔다. 대운하는 그 기능을 발휘해 양자강구 삼각주 평야의 租稅米(조세미)를 운반했다. 이 쌀을 저장하기 위해 양제는 낙양 근처 운하변에 대형 창고를 세우고 洛口倉(낙구창), 回洛倉(회락창) 등이라고 이름지었다.

규모가 가장 큰 낙구창은 황하와 洛水(낙수)의 교차점에 설치하여 둘레 약 10km의 성벽으로 에워쌌으며, 내부에 穴倉(혈창: 구덩이 창고)을 3000개 만들었는데, 1개 혈창에 쌀 8000석을 저장했다.

대운하의 길이는 무려 1500km에 달했다. 후에 元-明代에 수로의 일부가 동쪽으로 변경되었을 뿐, 그 골격은 현재까지 존속하고 있는데, 그것이 중국의 정치·경제에 지니는 의미는 실로 중대했다. 300년간의 大분열기를 종식시킨 隋왕조가 대운하를 완성시켰지만, 隋양제가 아니더라도 누군가가 건설하지 않으면 안 될 국가적 사업이었다. 그것은 생산의 기지인 南중국과 정치의 중심지인 北중국을 통합하는 대동맥이었다.

그러나 대운하 건설에는 엄청난 백성의 희생을 불러왔다. 大業 원년에 東京(동경=낙양)을 재건하기 위해 연인원 200만 명을, 같은 해 통제거와 영제거를 개착하는 데에는 각각 연 100여만 명을 동원했다. 남자만으로는 부족해서 역사상 처음으로 여자들까지 강제노역에 징발했다.

많은 백성들을 모아 부리면서 급식이 부족했고, 마구 혹사한 끝에 전염병까지 창궐했다. 시체를 실은 수레가 도로에 끊이지 않았다. 징발이 곧 죽음의 길이 되어, 두 사람 중 하나는 돌아오지 않았다는 기록이 있다.
「中國 최초의 여성해방운동가」秋瑾의 옛집 후원에서「나홀로 여행 중」인 아가씨와 만났다. 맨 오른쪽은 필자와 동행한 여행가 최병윤 회장.


大시인 白居易와 蘇東坡가 牧民官이 되어 쌓은 西湖의 제방

우선, 우리는 잠자리를 구하기 위해 호텔이 몰려 있는 西湖(서호) 쪽으로 직행했다. 오후 5시, 西湖의 10景 중 하나로 손꼽히는 석양이 막바지 정열을 불태우고 있었다. 자칫하면 절정의 순간을 놓칠세라, 최병윤 회장과 필자는 호텔의 체크인을 통역 趙군에게 맡겨 놓고 얼른 하차하여 서호변으로 달려갔다.

서호변 저쪽 雷峰塔(뇌봉탑) 언저리에 걸려 있던 석양이 꼴깍 넘어간 뒤에도 한동안 서호는 벌겋게 물들어 있었다. 호수 주변은 한동안 어둡지 않았다. 호수변 곳곳에서 미술학도들이 석양의 서호를 스케치하고 있었다.

우리는 서호변을 한 바퀴 도는 관광용 電池車(전지차)를 타려고 했지만, 일몰 후에는 운행하지 않았다. 西?橋(서령교)를 건너 호수 속의 섬인 中山공원에 들었다. 들머리에 「혁명의 연인」 秋瑾의 묘소가 있다. 섬을 가로질러 걸어 西湖미술관에 닿았다. 여기서 둑길 「白堤(백제)」를 걸어 섬 바깥 쪽으로 나오면 蔣介石의 장남으로서 중화민국 총통을 후계한 蔣經國(장경국)의 저택과 만나게 된다.

白堤는 唐의 大시인 白居易(백거이)가 항주의 지방장관을 지내면서 쌓은 길이 1.3km의 제방이다. 그의 「白氏文集」은 통일신라시대 이후 우리 선조들에게 필독의 교양서였다. 특히 唐현종과 楊貴妃(양귀비)의 사랑과 死別(사별)을 묘사한 그의 「長恨歌(장한가)」는 아직도 우리 名唱(명창)들의 애창곡이다.

백거이가 항주 刺史(자사)의 벼슬을 떠난 지 265년 후인 北宋의 元祐 4년(1085), 「赤壁賦(적벽부)」를 지은 大시인 蘇東坡(소동파)가 항주의 知事로 부임했다. 소동파도 재임 중에 白堤의 남쪽에 길이 2.8km의 제방을 쌓았는데, 사람들은 이를 「蘇堤(소제)」라고 부른다.

「唐宋八大家(당송8대가)」로 손꼽히는 백거이와 소동파가 항주의 牧民官(목민관)이 되어 모두 임기 3년 중에 농민을 위해 제방을 쌓은 것은 奇緣(기연)이라고 할 수 있다.

唐이 멸망하고 五代十國의 시대가 되면 전료라는 군벌이 浙江지방을 중심으로 吳越(오월)이라는 나라를 세웠다. 吳越국왕은 한반도의 패권을 다투던 후백제 국왕 견훤과 고려 태조 王建(왕건)에게 國書를 보내 서로 和好할 것을 권했지만, 安東전투 이후 힘의 우위를 장악한 왕건에게 묵살되었다.


北方 기마민족국가의 「밥」이었던 北宋과 南宋
중국의 5大 大河를 연결시켜 대운하를 완성한 隋양제.「경항대운하박물관」에 전시된 조각이다.

吳越은 北宋의 태조 趙光胤(조광윤)에게 병탄되었다. 北宋은 경제적으로는 미증유의 번영을 구가했지만, 국방정책의 실패로 허약해져 거란족의 가마민족국가 遼(요)에 막대한 歲幣(세폐)를 바쳤다. 宋은 쿠데타를 방지하기 위해 황제 친위부대를 강화하는 반면에 지방군을 약화시켰다.

그럼에도 遼軍(요군)이 北宋의 수도 ?京(변경: 지금의 開封)을 압박하자 北宋은 滿洲(만주)에서 새로 흥기한 여진족의 기마민족국가 金(금)과 군사동맹을 맺어 遼를 멸망시켰다. 그러나 北宋의 허약한 군사력을 얕본 金은 1126년 北宋의 수도를 함락시키고, 徽宗(휘종)과 欽宗(흠종) 부자를 붙잡아 북으로 끌고 갔다. 중국사에서는 이를 「靖康之變(정강지변)」이라고 부른다. 이로써 北宋은 멸망했다.

亡國의 황제 휘종은 중국 역사상 최고의 예술적 재능을 지닌 군주였지만, 그만큼 플레이보이였다. 그는 자주 미복 차림으로 변장하고 가만히 왕궁을 빠져나와 당시 開封(개봉)의 운하변에서 불야성을 이루던 北宋판 「호화 룸살롱」에서 밤샘 향락을 즐기는가 하면, 남쪽 太湖의 거대한 花石(화석)들을 채취해 개봉으로 운반하느라고 중도의 성문과 민가를 허물기 일쑤여서 백성들의 원성을 샀다.

「정강지변」에서 목숨을 건진 휘종의 아들 하나가 江南으로 도망쳐, 다음해에 臨安(임안: 지금의 항주)에 왕조를 재흥하니 그가 南宋의 高宗이다. 南宋 정권 내부에서는 「주전파」와 「주화파」로 나뉘어 격렬하게 다투었다. 주전파의 맹장 岳飛(악비)만은 對金戰에서 연전연승을 거두었다.

그러나 주화파의 재상 秦檜(진회)는 岳飛를 소환해 모반의 누명을 뒤집어씌워 투옥시킨 뒤 독살해 버렸다. 진회는 金나라를 伯父(백부)로 모신다는 굴욕적 강화를 맺었고, 南宋은 매년 銀 25만 냥과 비단 25만 필을 金에 歲幣(세폐)로 바쳤다.

억울하게 죽은 악비는 이후 漢族(한족) 내셔널리즘의 영웅이 되었고, 그를 죽인 진회는 매국노의 대명사가 되었다. 秋瑾의 묘와 白堤를 사이에 두고 마주 보는 「岳王廟」는 1221년 악비를 기리기 위해 세운 사당이다. 악비를 죽인 진회와 그의 아내는 결박된 모습의 鐵像(철상)으로 만들어져 악비의 무덤 앞에서 오랜 세월 비바람을 맞으며 무릎을 꿇고 있다. 중국판 역사 바로 세우기이다.
「동방견문록」에서 항주를「세계 제1의 도시」라고 표현한 마르코 폴로의 동상.

南宋은 중국 땅의 절반만 차지했지만, 경제는 北宋의 시기보다 더욱 흥청거렸다. 南宋은 北宋의 패망사에서 교훈을 얻지 못했다. 이번에는 金 배후의 초원에서 흥기한 몽골족의 元과 군사동맹을 맺고 金을 공략했다. 막대한 세폐를 먹인 몽골군의 힘으로 金을 멸망시키기는 했지만, 南宋은 北宋과 똑같은 패턴으로 패망했다.

몽골군은 1276년 1월 南宋의 수도 항주를 간단하게 점령·접수했다. 멸망 당시 南宋의 저항이 미약했던 만큼 항주는 戰禍(전화)를 거의 입지 않았다. 南宋의 멸망은 돈으로 평화를 살 수 없다는 역사의 교훈을 또 한 번 남겼다. 오늘의 우리가 가슴에 새겨야 할 역사의 현장이다. 南宋 멸망 후 元제국 체제下에서 漢族은 제4의 신분으로 추락했다.

元 지배기에 들어서도 항주의 거리는 여전히 번영했다. 元제국은 1293년 京杭대운하를 대대적으로 개수했다. 경항대운하는 북경에서 항주까지 연결하는 水路를 말한다.

元제국 당시, 大都라고 불렸던 北京이 정치적 수도였다면 항주는 경제적 수도였다. 쿠빌라이 시대에 이탈리아의 베니스로부터 중국에 들어와 항주를 둘러본 마르코 폴로는 그의 「東方見聞錄(동방견문록)」에서 「호화스럽고 부유한 세계 제1의 도시」라고 표현했다. 현재, 西湖의 동쪽 접근로에는 마르코 폴로의 동상이 서 있다.


京杭대운하의 출발점 拱宸橋 나루

10월19일 오전 7시부터 우리는 지도를 펴들고 경항대운하의 출발점이자 종점인 拱宸橋(공신교·궁천차오)를 찾아나섰다. 영파가 거주지인 운전사는 항주 지리에 어두워 공신교를 찾지 못하고 거의 2시간을 헤매다 겨우 「경항대운하박물관」 앞에 지프를 세웠다.

우리는 공신교가 박물관 바로 옆쪽에 위치한 다리인지 모르고, 우선 박물관에 입장했다. 금년에 개관한 박물관에서는 경항대운하의 역사와 역할, 정치·경제·군사적인 영향, 생태환경·수질환경 문제 등을 개관할 수 있다.
경항대운하의 출발점에 세워진 拱宸橋.

중국은 경항대운하를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시키려는 준비를 서두르고 있었다. 2006년 3월, 중국의 全國政協 10기 4차 회의에서는 경항대운하의 「긴급 보호공작」을 전략적으로 추진할 것을 결의했다.

<대운하는 깊은 역사 문화의 內涵(내함)을 갖고 있기에 「古代문화長廊(장랑)」, 「古代과학기술저장고」, 「명승박물관」, 「민속진열실」로 불리며, 그것은 중국의 정치·경제·문화·사회 등을 연구하는 데 매우 좋은 實物(실물)자료이며, 중국의 유구한 역사운명의 제일 좋은 증거로 볼 수 있다>

경항대운하는 2500년의 역사를 지닌 세계 최대의 人工 물길이다. 기원전 486년에 吳王 부차는 처음으로 운하를 건설해 「溝(한구)」라고 명명했다. 「」은 양자강 북안의 揚州 일대, 「溝」는 도랑이 아니라 「通한다」는 의미이다. 그러니까 부차는 長江과 淮河를 연결하는 운하를 개착했던 것이다.

隋문제는 중국의 南北朝를 통일한 후 기존의 溝를 토대로 강도-淮安 간 운하의 수로를 넓히고 직선화한 山陽瀆(산양독)을 만들었다. 隋문제를 이은 隋양제는 605년 洛陽(낙양)과 회안을 연결하는 通濟渠(통제거), 608년 북경과 황하를 연결하는 永濟渠(영제거), 610년 鎭江(진강)과 항주를 연결하는 江南運河(강남운하)를 건설했다.

당시, 隋양제는 15세 이상 남자 등 360만 명에 이르는 사람들을 건설현장에 동원했다. 심한 형벌과 가혹한 노동으로 1년도 안 돼 110만 명이 죽었다.
수년 전까지 항주-소주 간 운하의 출발 부두였던 武林門 나루에서 부두 관리원과 함께. 필자는 이 나루에서 拱宸橋 나루까지 소형선「운하버스」를 타고 이동했다.

경항대운하박물관을 견학한 후 절강大의 한국연구소로 찾아가 이화女大 申瀅植(신형식) 교수가 소개한 白承鎬(백승호) 박사를 만났다. 때마침 浙江工商大 日本연구소의 李美子 박사가 합석해 9~12세기 韓·中·日 교류와 대운하를 주제로 토론했다. 白박사는 『경항대운하가 물류 면에서 철도 노선 대여섯 개의 몫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필자는 항주-소주 간 대운하를 통해 北上하는 배편을 알아봐 달라고 白박사에게 부탁했다. 점심 후 白박사는 우리를 항주 중심가에 소재한 武林門(무림문) 부두로 안내했다. 자료에 따르면 이곳은 蘇州로 가는 여객선의 뱃머리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무림문 부두의 매표소에 문의해 보니, 소주行 여객선은 수년 전에 이미 운항을 중단했다고 한다. 고속도로가 뚫려 차량으로 두어 시간이면 갈 수 있는 거리를 밤새도록 모기에 물어 뜯기며 배를 타는 승객이 급감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白박사와 함께 武林門 부두에서 소형여객선 「운하버스」를 타고 경항대운하의 출발점인 공신교를 향해 내려갔다. 운하 주변에는 고층아파트 등이 즐비하다. 白박사는 『항주시가 운하의 수질을 개선하고 주변 환경을 정화하자, 2~3년 전에 1m2에 5만 위안이던 아파트 값이 최근에는 15만~20만 위안으로 폭등했다』고 말했다.

승선 후 25분 만에 「운하버스」는 공신교 부두에 도착했다. 공신교에 오르니 때마침 예인선 하나가 10여 척의 無동력선을 끌고 운항하는 모습이 보였다. 1000t급 선박들이 석탄 또는 목재 등 대형화물을 가득 싣고 공신교 아래를 지나 北上하기도 했다. 동행한 최병윤 회장은 『물류 면에서 유럽의 운하보다 중국의 운하가 더 실제적 역할을 하는 것 같다』고 했다.

특히, 현재의 항주는 경항대운하의 기착점이라는 조건을 살려 소주, 진강, 양주, 회안으로 통하는 내륙운하와 양자강변의 대도시 남경·중경 등과 연결해 강남 물류중심의 역할을 하고 있다.
경항대운하의 출발점인 拱宸橋 위에서 절강大 한국연구소 白承鎬 박사(오른쪽), 여행가 최병윤 회장(왼쪽).


杭州 운하의 水質개선
고려의 大覺國師 의천이 화엄을 공부했던 西湖 북쪽의 慧因高麗寺.

필자는 白박사와 함께 다시 경항대운하박물관에 들어가 오전에 학습한 「대운하의 개론」을 복습했다. 전시자료에 따르면 항주 구간의 운하를 이용하는 화물선의 규모는 대개 300~1000t급, 하루 700여 척에 이른다. 운하를 통해 남쪽에서 북쪽으로 운송되는 화물은 모래·벽돌·시멘트·철강이며, 南行하는 화물은 석탄·철강이 대부분이다.

항주는 1980년대 초까지만 해도 운하 주변에 건설된 공장의 폐수와 정화되지 않은 생활하수가 마구 유입되어 운하의 수질오염은 최악의 상태였다. 더구나 토사로 인해 수로가 통하지 않고 고인 물이 되자 운하는 완전히 검은색이 되었다. 물고기가 사라지고 악취가 진동했으며, 그 물은 공업용수나 농업용수로도 사용하기 어려웠다.

항주市는 1983~1988년에 걸쳐 운하정비와 환경·수질오염 개선에 착수했다. 운하 주변의 대기업들이 하루에 쏟아내는 폐수는 80만t에 이르렀는데, 항주市는 총 9억6300만 위안을 투자해 60km에 이르는 오수처리 배관을 설치하고, 하수관을 따로 매설해 오폐수처리장에서 처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오폐수처리시설은 하루 70만t밖에 처리하지 못해 아직도 10만t이 강이나 운하에 버려지고 있는 실정이라고 한다.
경항대운하 박물관.

항주市는 2001년 6월, 운하 주변 오염원인 공장들을 이전시켰다. 또한 운하 바닥에 퇴적되어 있는 오염된 진흙인 汚泥(오니)를 준설하고, 깨끗한 전당강의 강물을 하루 80만t씩 유입시켰다. 운하에 쓰레기나 폐기물 투척을 엄금했다. 10여 년간의 지속적인 노력으로 운하의 수질을 4~5급 수준으로 개선했다. 3급수로 만드는 데는 앞으로 5년이 더 걸릴 것이라 한다.

이러한 운하 지역의 정비로 2002년 이래 拱墅區(공서구)와 江干區(강간구)에 120만m2의 아파트촌이 들어섰고, 운하 주변 집값이 3~4배 올랐다. 항주市는 운하 주변 공장 이전으로 생긴 부지를 조각관, 화랑 등 문화 콘텐츠 장소로 활용하고 있다.

항주市는 제1차 수질개선 공정으로 생태환경이 변화하자, 항주운하 종합보호의 제2기 공정(2007~2010) 사업으로 水體(수체) 처리공정, 문화관광 공정, 녹화경관 공정, 도로완성 공정, 토지정리 공정 등을 실시하기로 하고 219억 위안의 사업비를 투자하기 시작했다.

항주의 운하변에는 현재 6개 水邊(수변)공원이 설치되어 있는데, 6개 더 설치할 것이라 한다. 그 효과가 나타나고 있다. 항주의 관광객 수는 연간 3000만 명에 이르고 있는데, 이들 중 15%가 운하를 찾고 있는 것으로 집계되었다.

우리는 현재 내부 수리 중인 항주의 임시정부 청사를 잠시 둘러보고, 서호 남쪽에 위치한 慧因高麗寺(혜인고려사)로 갔다. 오후 5시30분, 혜인고려사는 문 닫을 시각이었지만, 白박사의 주선으로 필자 일행에게 특별히 개방했다. 고려 天台宗(천태종)의 중흥조이며 文宗의 넷째 아들인 大覺國師(대각국사) 義天(의천·1055~1101)이 머물렀던 사찰이다. 慧因은 義天에게 華嚴의 진수를 전수했다고 한다.


嘉興의 거미줄 운하를 이용해 白凡을 살린 朱愛寶 여사
「金九의 피난처」嘉興 梅灣街에 소재한 楮鳳章의 옛집. 집 뒤에 만일의 경우 운하로 피신하기 위해 항상 정크船을 계류시켜 놓았다고 한다.

우리는 10월20일 오전 8시 항주를 떠나 오전 9시30분께 소주-항주 운하의 중간 지점인 嘉興(가흥·자싱)에 도착했다. 가흥 시가지 중심으로 운하가 사방을 향해 방사선처럼 뻗어 있고, 특히 시가지 바로 북쪽 嘉善縣(가선현) 일대는 호수와 운하가 거미줄처럼 얽혀 땅半 물半이다.

가흥 지역의 운하는 중국사 최초의 통일제국을 창업한 秦始皇(진시황)이 건설했다고 한다. 「越絶書(월절서)」에 따르면 『진시황은 가흥에서 물길을 개척하고 전당강을 거쳐 절강성까지 통과하였다』고 한다. 경항대운하 중 江南운하의 기초를 닦았던 셈이다.

1932년 4월29일, 일본제국의 육군대장 시라카와 요시노리(白川義則) 등을 폭살한 尹奉吉(윤봉길) 의사의 上海 홍구공원(지금의 魯迅공원) 의거 이후 日帝는 거액의 현상금을 걸고 윤봉길의 의거를 지도한 金九를 추격하기 시작했다. 당시 중국인은 4억의 인구가 못 한 일을 한국인 한 사람이 해치운 데 대해 대단히 깊은 감명을 받았지만, 그런 만큼 上海의 우리 임시정부는 위험해졌다.

이때 上海의 「抗日구원회」 회장 楮輔成(저보성)은 자신과 가족의 위험을 무릅쓰고 白凡 金九(백범 김구)를 비롯한 임시정부 요인과 그 가족들을 자신의 고향인 가흥으로 피신시켰다. 백범은 가흥에서 피신하는 동안 저보성 一家의 적극적인 도움으로 여러 차례 거주지를 옮기며 피살의 위기를 넘겼다.

「金九 피난처」는 저보성의 장남 楮鳳章(저봉장: 1896~1953)의 집(梅灣街 76호)이었다. 저봉장은 중국의 해군학교를 졸업한 뒤 미국에 유학한 후 귀국, 가흥과 항주에서 종이공장을 경영한 인물이었다. 저봉장 집은 가흥의 운하와 바로 연결되어 있는데, 여기에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집 뒤에 항상 정크船을 계류시켜 두었다고 한다.
日帝의 관헌에서 쫓기던 白凡 金九를 5년 동안 뒷바라지 했던 朱愛寶 여사.

1932년 여름, 가흥역에 일제 밀정들의 탐문이 시작되자 저보성은 백범의 안전을 위해 피신처를 며느리 주가예의 친정 별장으로 옮기게 했다. 「白凡逸志(백범일지)」에 따르면 이때 주가예는 하이힐을 신고 산 넘고 물 건너 백범을 직접 친정의 별장까지 안내했다.

1933년 여름 梅灣街(매만가)로 돌아온 무렵 백범의 신분이 외부에 알려지자 저봉장은 「여자 뱃사공」인 朱愛寶(주애보)에게 이미 喪妻(상처)한 백범을 뒷바라지하게 했다. 김구는 「백범일지」에서 당시의 생활에 대해 『오늘은 南門 밖 호숫가에서 자고, 내일은 北門 밖 운하에서 잤다』고 기술했다. 백범은 1936년 南京에서 5년 가까이 事實婚(사실혼) 관계에 있었던 주애보와 헤어졌다.

「백범일지」에서 김구는 『나에 대한 공로가 작지 않은데, 내가 뒷날을 기약할 수 있을 줄 알고 돈으로 넉넉히 돕지 못한 것이 유감이다』라고 회고했다. 현지 중국인들은 그때 백범이 주애보 여사에게 준 돈은 100위안이었는데, 당시 황소 1마리의 가격이 3위안 정도였다고 한다.

전시된 주애보 여사의 사진을 보면 그냥 「여자 뱃사공」으로 치부해도 될 만만 분이 결코 아니다. 백범의 고매한 품성을 드높이기 위해 「여자 뱃사공」으로 폄하한다면 백범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의 체면까지 구기는 일이다. 李退溪(이퇴계)의 후손은, 퇴계가 丹陽(단양) 군수 재임 시절에 사랑했던 기생첩의 무덤이 1970년대 수몰지구로 들어가게 되자 그녀의 무덤을 산꼭대기로 옮기고 찾아가 제사를 올렸다는 미담이 수년 전 국내 언론에 보도된 바 있다.
杭州운하를 운항하는「운하버스」.


「臥薪嘗膽」의 유래
자신과 가족의 위험을 무릅쓰고, 日帝에 쫓기는 白凡 金九의 피신을 도운 國民黨 원로 楮輔成 선생.

嘉興(가흥·자싱)은 春秋시대 吳國과 越國의 국경이었다. 「吳越同舟」(오월동주: 원수 간에 한 배에 탄다)라는 四字成語가 있을 만큼 양국은 서로 으르렁거렸다.

기원전 496년, 오왕 闔閭(합려)는 가흥에서 월국과 전투를 하다 흐르는 화살을 발가락에 맞아 회군 도중에 사망했다. 상처는 대수롭지 않았다는데, 상처가 갑자기 덧나 죽음에 이른 것을 보면 急性(급성) 파상풍에 걸린 듯하다. 吳王을 승계한 합려의 아들 夫差(부차)는 바닥에 딱딱한 장작을 깔아 놓고 항상 그 위에 잠자면서 시나브로 『부차여, 너는 아비의 원수를 잊었느냐』고 복창했다. 이것이 바로 「누울 臥 장작 薪」, 臥薪이다.

부차는 名참모 오자서의 계책을 따라 부국정책의 하나로 수로를 개착했다. 그것이 바로 장강과 회하를 잇는 운하 溝(한구)이다.

「南船北馬(남선북마)」라는 말이 있지만, 지금도 江南 지역은 숱한 샛강이 실핏줄같이 흐르고 있다. 여기에 人工수로를 개착하여 물길을 四通八達(사통팔달)로 텄던 것이다. 원래 물산이 풍부한데다 물류까지 원활해진 吳는 더욱 부국이 되었다. 이제 경제력을 바탕으로 부차는 군비증강에 박차를 가했다.

한편 월왕 勾踐(구천)은 오왕 부차의 富國强兵(부국강병)을 방관할 수 없었다. 그는 기선을 제압하기 위해 吳나라로 침공했지만, 太湖 안의 섬 夫椒(부초)에서 완패, 본국으로 도주했다. 吳軍은 추격전을 전개하여 월왕 구천을 소흥의 會稽山(회계산)으로 몰아넣고 물샐틈없이 포위했다.

吳軍의 포위 속에 빠진 월왕 구천은 名참모 范?(범려)의 계책에 따라 오왕 부차에게 항복해 臣從(신종)을 맹세했다. 구천은 보물을 헌상한다든지 하여 부차의 심기를 맞추기 위해 전전긍긍했다. 부차가 가벼운 병에 걸리자 구천은 『평소 의술을 공부했다』고 자처하면서 부차의 항문에 난 치질을 빨기도 했다.

이런 아부로 겨우 귀국했던 구천은 복수심이 흐트러지지 않게 매일 쓰디쓴 곰의 쓸개를 씹으며 복수의 그날을 고대했다. 그로부터 20년 후에 전개되는 吳王부차와 越王 구천의 리턴매치는 뒤에서 거론할 것이다.

가흥의 경계를 넘으면 바로 江蘇(강소·장쑤)省이다. 강소성은 최북단(連雲港)이 우리나라의 木浦(목포)와 위도가 같고 기후는 온대와 아열대의 중간이다. 면적(10만2000km2)은 남한과 비슷하고, 상주인구 7810만 명인데 유동인구가 많아 남한 인구의 거의 2배이다. 강소성은 성 전체가 강과 운하로 연결되는 충적평야로 이루어져 중국의 대표적 농산물 집산지이다.


蘇州의 교통난과 악취
저우좡 운하의 여자 뱃사공.

吳江을 건넜다. 여기서 吳의 옛 수도 소주로 직행하지 않고 五江鎭 (오강진) 톨게이트를 빠져나와 대운하 연변을 따라 「江南 제1의 경관」 周庄(주장·저우좡)으로 달렸다. 周庄 대교를 건너면서 바라본 吳江은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강폭이 넓다. 운하에는 예인선 하나가 20척의 無動力船(무동력선)을 길게 엮어 끌고 가는 중국 운하 특유의 장관이 자주 펼쳐지고 있었다. 필자는 지프에서 내려 강변을 뛰어다니며 사진을 찍었다.

오후 1시, 우리는 저우좡 古鎭에 도착했다(입장료 100위안). 100여 채에 달하는 明淸 시대의 고택과 운하를 가로지르는 돌다리 24개는 뛰어난 건축사적 의미를 지닌다. 우리는 늦은 점심을 먹은 후 여자 뱃사공이 삿대를 젓는 배를 타고 古鎭을 한 바퀴 돌았다. 운하변 곳곳에서 미술학도들이 이젤을 세워 놓고 운하의 풍경을 스케치하고 있었다.

오후 6시 무렵, 우리 일행은 저우좡에서 40km를 북상해 蘇州(소주·쑤저우) 중심가에 위치한 「100Happy 大酒店」, 즉 100번 행복한 호텔에 들었다. 40km를 이동하는 데 무려 2시간이나 걸린 것은 순전히 소주 도심부의 심각한 교통체증 때문이었다. 예로부터 「하늘에 天堂이 있고, 땅에는 소주와 항주가 있다」는 말이 있기는 하지만, 소주는 水質과 자동차 배기가스 문제가 개선될 때까지는 제외되어야 할 것 같다.
姑蘇城의 水門을 여닫는 도르래 장치. 盤門의 성벽 위에 설치되어 있다.

소주는 이제 인구 650만의 거대도시로 급성장했지만, 도로 등 인프라는 태부족이었다. 특히 주요 볼거리가 몰려 있는 人民路(런민루)에서 觀前街(관첸제) 일대는 자동차 배기가스와 먼지로 눈을 뜨기 어려웠다. 자전거나 오토바이를 타고 가는 여성들의 다수가 마스크를 착용하고 있었다. 특히 觀前街 앞 수로에는 악취가 코를 찔렀다. 수로에는 정화처리되지 않은 생활하수가 그대로 흘러들고 있었다.

10월21일 오전 7시, 우리는 별로 행복할 것도 없었던 하룻밤을 묵은 「100Happy 大酒店」에서 체크아웃한 뒤 吳의 都城이었던 姑蘇城(고소성)의 盤門(반문)을 찾아갔다. 반문은 고소성에 남아 있는 유일한 성문이다. 현재의 반문은 1351년 元나라 때 재건한 것이다.

「소주 반문 景區(경구)」(입장료 25위안)에 입장하면 날아갈 듯한 瑞光塔(서광탑: 입장료 6위안을 따로 징수함)과 마주 서게 되고, 탑 뒤로 10분쯤 걸어가면 「水陸?廻」(수륙영회)라는 현판이 쓰인 누각 하나가 우뚝 서 있다. 필자가 3년 전에 이곳을 방문했을 때는 없었던 누각이다. 이 누각 아래쪽에 고소성의 南門에 해당하는 반문이 있다. 반문은 운하를 타고 들어온 선박이 고소성 안으로 진입할 때의 水門이다. 水門을 여닫을 때 쓰이는 도르래 시설물 2개가 아직도 성벽 위에 남아 있다.


吳의 재상 伍子胥의 恨
「人生의 네 박자」를 성취한 越王 구천의 名참모 범려.

水門을 나서면 「伍相祀」(오상사)라는 현판이 붙은 작은 전각 하나가 있다. 바로 吳나라의 재상 伍子胥(오자서)를 모시는 사당인데, 3년 전에는 없었던 건물이다. 이렇게 중국은 역사 현장을 복원 또는 보강하고 있었다.

고소성의 축조는 闔閭(합려) 원년(기원전 514년)의 일이었다. 축성 공사를 지휘한 인물이 바로 오자서이다. 이때 姑蘇山(고소산) 기슭에 大궁전을 지었는데, 자재를 모으는 데 3년, 완공하는 데 5년이 걸렸다고 한다.

오자서의 도움으로 前王인 僚(요)를 격살하고 왕위에 오른 합려의 시대로부터 吳는 春秋시대의 패권 쟁탈전에 참가했다. 이때가 孔子의 생존시기와 대체로 일치한다. 합려는 이웃나라 越과 격렬하게 싸우다가 戰傷(전상) 때문에 죽었고, 그의 아들 부차가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 매일 장작 더미 위에서 잠자며 각오를 다졌음을 앞에서 썼다.

부차는 富國策(부국책)의 일환으로 운하를 개착했는데, 그것이 바로 溝(한구)로서 長江과 淮河를 연결해 糧道(양도)를 통하게 했던 것이다. 기원전 486년의 일이었다.

원래 자연적 水運이 양호했던데다 이같은 人工 운하까지 파서 物流(물류)가 더욱 원활해진 吳는 점점 강국이 되어 춘추시대의 4번째 覇者(패자)가 되었다. 그러나 吳王 부차는 中原에서의 패권전에 골몰해 점차 국력을 소모시켰다.
吳王 부차를 멸망시킨 越의 간첩 西施. 그녀는 中國 역사상 4大 미녀의 하나로 손꼽힌다.

숙적 越을 항복시킨 것까지는 좋았지만, 오자서의 충언을 듣지 않고 越王 구천의 목숨을 살려 준 것은 吳王 부차의 뼈아픈 실책이었다. 越王 구천의 목을 베라는 오자서의 말을 들었다면 부차는 결코 나라를 망치지 않았을 것이다. 吳의 멸망은 많은 교훈을 남겼다.

본국 귀환 후 구천은 매일 쓰디쓴 쓸개를 씹으면서(嘗膽) 『너는 會稽(회계)의 수치를 잊었는가』라고 자신을 질책하면서 은밀하게 전쟁준비를 했다. 內政을 정비하고, 군비를 증강해 자신을 얻은 구천은 吳를 치려고 했지만, 名참모 범려는 그때마다 『아직은 이르다』고 만류했다. 복수전은 구천이 20년간 쓸개를 씹은 후에야 이뤄진다.

한편 吳王 부차는 강국이 되면서 교만해졌고, 越王 구천이 바친 西施(서시)를 사랑해 姑蘇臺(고소대)에서 사치스러운 밤샘 파티를 열며 백성들의 고통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色香(색향) 짙은 西施는 越의 재상 범려가 기른 첩자였는데, 중국 역사상 4大 미녀 중 하나로 손꼽힌다.

오자서는 吳王 부차에게 국정쇄신을 직언했지만, 부차는 오자서를 멀리했다. 이때 越의 대부 文鍾(문종)은 吳의 간신 백비에 거액의 뇌물을 주어 오자서가 모반할 것이라는 모략전을 전개했다. 이에 넘어간 吳王 부차는 오자서에게 보검을 보내 자결을 강요했다. 국내에서도 유행한 바 있는 「狡兎死 走狗烹(교토사 주구팽)」, 즉 사냥감인 토끼가 죽으면 사냥개가 푹 삶긴다는 유명한 속담은 오자서의 한탄에서 비롯되었다.

오자서는 자결 직전에 吳의 망국을 예견했다. 『나의 무덤에 가시나무를 심어 吳王의 棺(관)을 짜도록 하라. 또 내 눈을 도려내어 고소성의 동문에 걸어 두고 월군이 진공해 吳를 멸망시키는 것을 보게 하라』고 유언했던 것이다. 과연 오자서가 말한 대로 고소성은 월군의 공격을 받아 함락되는 가운데 부차는 『저승에 가서 오자서를 볼 낯이 없다』면서 눈을 가리고 자결했다.


1200여 년 전의 詩 한 편을 관광자원으로 활용

고소성에서 내려와 지프를 타고 소주 시가지 서북쪽에 위치한 寒山寺(한산사)로 올라갔다(입장료 20위안). 때마침 일요일이어서 한산사는 관광객들로 붐비고 있었다. 이 절은 순전히 張繼(장계)의 七言律詩(칠언율시) 하나로 유명해진 사찰이다. 장계는 唐현종 때(713~756)의 인물로서 네 번 과거를 본 끝에 進士에 올라, 그 후 감찰관과 지방관을 지낸 인물이다. 다음의 「楓橋夜泊(풍교야박)」은 세 번째의 進士試(진사시)에 낙방하고 귀향하면서 지은 詩인데 리듬(운율)이 절묘해 漢字문화권 나라들의 한문 교과서에 실렸다.

〈月落烏啼霜滿天(월낙조제상만천)
江楓漁火對愁眠(강풍어화대수면)
姑蘇城外寒山寺(고소성외한산사)
夜半鐘聲到客船(야반종성도객선)

달이 지고 까마귀 우니 서리가 하늘에 가득하고/강변의 단풍과 고기잡이 불로 잠 못 이루는데/고소성 밖 한산사에서/야반의 종소리가 객선에 와닿는다〉

당시 객선은 야간에 水門을 통해 入城할 수 없었다. 일몰시간 이후 楓橋(풍교) 나루에 닿은 객선의 승객들은 일단 하선하여 인근 객잔에서 유명한 蘇州 미녀들의 권주가를 들은 뒤 하룻밤을 묵고 다시 승선했을 터이다. 그러나 과거에 낙방한 장계는 여비가 빠듯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객선에 남아 몸을 뒤척이다가 새벽 3시쯤 첫 예불시간을 알리는 한산사의 종소리를 들었던 것 같다.


시장바닥이 된 한산사
伍相祀에 안치된 伍子胥의 像.

3년 전 필자는 한산사를 「고뇌하는 인간의 메카」라고 표현했지만, 요즘의 한산사는 시장바닥이 되었다. 한산사를 빠져나와 「장계의 길」을 따라가기 위해 江春橋(강춘교) 나루에서 護城河(호성하)를 운항하는 유람선을 타려고 했는데,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나루는 없어졌다. 운하 수질 개선을 위해 운항을 금지한 듯하다.

호성하는 고소성의 垓字(해자)인 동시에 고소성의 水門으로 연결되는 운하이다. 호성하의 수질은 개선되었다고 하지만, 녹조현상은 여전했다. 강춘교에 올라 풍교 쪽을 바라보니 풍교 주위에 울타리를 치고 별도의 입장료를 받고 있었다.

소주市는 강소성에서 인구가 제일 많은 도시이며, 중국 IT산업의 심장부이다. 市 동남부의 蘇州工業園區(소주공업원구)에는 세계 첨단기업이 대부분 들어와 조업하고 있다. 한국기업으로는 三星그룹의 반도체, LCD(액정표시장치) 등 4개 생산법인 등이 입주해 있다.

소주에 와서 온갖 전설로 채색된 虎丘(호구)를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한산사 주차장으로 내려오니 차량들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어, 우리가 대절한 지프는 쉽게 도로로 빠져나오기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었다. 운전기사 오君에게 우리를 뒤따라 오되 호구 가까이엔 오지 말고 좀 한적한 길가에 주차시켜 두라고 이르고, 우리는 버스정류장까지 걸어나와 호구 가는 버스(요금 2위안)를 탔다.

호구는 吳王 합려의 무덤 옆에 있는 언덕이다. 원래 이름은 海通山(해통산)인데, 합려의 장례식 3일째에 白虎(백호)가 나타나 무덤가에 꿇어 앉았기 때문에 虎丘, 즉 「호랑이 언덕」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매표소를 지나면(입장료 60위안) 곧 試劒石(시검석)이라는 바위를 만난다. 믿거나 말거나, 2500여 년 전에 합려가 장인이 만든 보검을 시험 삼아 내려쳤다는 곳이다. 바위 윗면이 상당한 깊이로 女根처럼 쭉 찢어진 모습이다.

호구 앞 공터에는 인파가 몹시 붐볐다. 일요일이어서 야외공연이 벌어지고 있었다. 호구 바로 옆에 「劒池(검지)」가 있는데, 吳王 합려의 무덤 자리이다. 3년 전과는 달리 담쟁이 넝쿨을 심고 못 속에 물을 담아 운치를 냈다. 「검지」라는 이름이 붙은 내력도 흥미롭다.

합려는 명검의 산지로 유명한 吳國의 군주여서 그런지, 대단한 칼 수집광이어서 3000자루의 칼을 그의 무덤에 껴묻게 했다고 한다. 기원전 3세기 중국을 처음 통일한 秦始皇(진시황)이 합려의 칼을 찾기 위해 무덤을 파헤친 까닭으로 무덤에 물이 고여 연못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진시황은 합려의 칼을 끝내 하나도 찾지 못했다고 한다.


人生의 4박자를 성취한 범려
中小型 선박들로 붐비는 無錫市 구간의 경항대운하.

호구에서 내려온 우리는 택시를 잡아 타고 1km쯤 달려 길가에 주차 중이던 오君의 지프를 휴대폰으로 수배해 바꿔탔다. 휴대폰은 여행자에게 도깨비 방망이다. 호구에서 곧장 북상해 1시간 만인 오후 2시 무렵 太湖(태호)의 호변에 위치한 無錫(무석·우시)의 「?頭渚(원두저) 공원」 부근 호텔에 도착했다. 태호는 17세기까지만 해도 중국에서 가장 큰 호수였지만, 강줄기 등 지형의 변화로 이제는 세 번째로 큰 담수호가 되었다.

太湖는 이름 그대로 對岸(대안)이 보이지 않는 바다 규모의 호수로서 江南 水運의 중심이다. 절강성·안휘성 등지의 내륙항에서 출항한 선박이 태호를 거쳐 無錫의 중심부를 통과하는 대운하와 연결된다.

「無錫」이라는 지명의 유래도 재미있다. 春秋전국시대까지 無錫은 중국 제1의 주석 산지였다고 한다. 吳나라의 銅劍(동검)이 명품으로 날린 것도 銅과 주석의 합금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석의 주석은 기원전 200년경에 고갈되었다. 「無錫」이라는 지명도 「나, 이제 주석이 없소」라는 뜻으로 作名되었다고 한다.

큰 자라 ?(원), 머리 頭(두), 물가 渚(저)로 이뤄진 「원두저」라는 이름도 재미있다. 즉, 큰 자라의 대가리를 닮은 물가인데, 실제로는 곧추선 男根(남근)의 모습 그대로이다.

?頭渚의 「?」이라는 글자도 어렵지만, 접근로상의 위치한 태호의 한 구석 부분인 ?湖(려호)의 「?」도 흔히 쓰는 글자가 아니다. 그 까닭은 이곳에 越國의 재상 范?(범려)가 만년에 천하절색 西施와 함께 太湖에 배를 띄우고 노닐었던 곳이라 하여 이런 이름이 붙은 것이라 한다.

그렇다면 吳越전쟁을 승리로 이끈 범려의 후일담을 處世學(처세학) 차원에서 음미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越王 구천의 謀臣(모신)이었던 범려는 승전 후 곧장 정계에서 물러나면서 친구 文種(문종)에게 동반은퇴를 종용하면서 다음과 같은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越王 구천의 相을 보건대 입이 새의 주둥이처럼 뾰죽해 고난은 함께 하여도 부귀영화는 더불어 할 수 있는 인물이 아니다』

범려는 사랑하는 西施를 데리고 국외로 망명하여 여러 나라의 물자를 서로 유통시키는 상업으로 當代 최대의 부호가 되었고, 그 후엔 도자기를 굽는 일에 몰두해 중국 도자업의 元祖인 陶朱公(도주공)이 되었다. 지금도 범려의 생일인 음력 4월7일이면 江南 각지의 도공들은 요업 발전에 공헌한 그의 위업을 기리며 祭(제)를 올리고 있다.

그렇다면 범려는 정치·경영·예술의 세계에서 모두 성공했을 뿐만 아니라 사랑까지 성취한 「4박자의 인물」이었다. 반면 大夫라는 벼슬살이에 연연해 친구 범려의 은퇴 권유를 뿌리친 문종은 끝내 의심 많고 교만해진 越王 구천에 의해 誅殺(주살)되었다.


『이곳보다 더 붐비는 운하는 없다』
鎭江 부두를 떠난 페리가 揚州를 향해 양자강을 건너가고 있다.

우리는 태호변의 호텔 「水秀飯店」에 짐을 푼 뒤 곧장 寶界橋(보계교)를 건너 無錫 중심가를 종단하는 대운하를 답사했다. 金城대교, 金櫃(금언)대교, 梁溪(양계)대교, 錫山(석산)대교 옆 도로를 따라 북상하다가 지프를 세워 놓고, 蓉湖(용호)대교 위에 올라가 1시간쯤 운하를 관찰했지만, 지루하지 않았다. 중국 대운하의 속살을 본 느낌이었다.

용호대교 아래 대운하의 폭은 100m 정도다. 원목·석탄·강철·자갈 등 무거운 짐을 실은 선박들이 끊임없이 오가고 있었다. 아주 작은 선박도 다녔지만, 1000~2000t급 선박이 많았다. 예인선 하나가 無동력선 10~20척을 묶어서 종대대형으로 끌고 가는 모습은 참으로 장관이었다. 유럽·북미 등 세계의 운하를 두루 답사한 바 있는 최병윤 회장은 『지구상에서 이곳보다 더 붐비는 운하를 본 적이 없다』고 감탄했다.

운하의 물은 매우 더러웠다. 다리 아래로 돼지 시체 하나가 퉁퉁 불은 모습으로 떠다녔다. 아마 병든 돼지를 투기한 것 같았다. 옛날 태호와 그 주변 운하는 詩人 묵객의 사랑을 받은 경승지였지만, 이제는 기형 물고기가 잡힐 만큼 오염이 심각하다. 필자는 대운하 주변을 다니면서 여기서 잡은 물고기의 온갖 요리를 한 번도 먹지 않았다.

이곳은 우리가 운하를 건설한다면 反面敎師(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현장이다. 한반도운하의 건설은 이제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필수적인 국가의 인프라 확충인 동시에 국토의 활용이다. 세계에서 가장 값싸고 실적이 높은 경부고속도로 건설 때(1968)도 치열하게 반대했던 세력은 있었다.

우리나라의 운하 건설은 오히려 시기가 늦었다. 남한의 3大 강인 낙동강·남한강·금강은 물길 30~40km씩만 트면 서로 연결된다. 우리의 선진 토목기술로 보아 경부고속도로 건설 당시처럼 국력을 기울일 만한 대형 사업도 아니다. 2000만 인구의 수도권의 식수원인 우리의 漢江은 겉보기엔 깨끗한 강이다. 하지만 八堂댐 밑바닥에는 높이 1m 이상 汚泥(오니)가 쌓여 이것을 긁어 내지 않으면 수도권의 식수원이 不遠(불원)부패할 상황에 처해 있다. 앞으로의 논쟁 초점은 이제 「어떻게 하면 우리도 西유럽국가들처럼 자연친화적인 江과 운하를 보유할 수 있느냐」는 것으로 모아져야 할 것이다. 이것이 無錫의 운하를 답사한 후 필자의 솔직한 느낌이다.


長江의 흐름을 타다

10월22일 오전 5시, 최병윤 회장이 혼자 귀국하기 위해 리무진버스를 타고 上海의 국제공항 浦東(포동·푸둥)으로 떠났다. 오전 8시, 필자는 경항대운하의 물길을 따라 다시 북상했다.

오전 10시30분, 우리는 인구 290만의 도시 鎭江(진강·전장)市에 닿았다. 경항대운하 중 江南河 구간의 종점에 도착한 것이다.

여기서 揚州(양주·양저우)로 가려면 長江을 건너야 한다. 필자는 진강-양주 사이의 長江을 잇는 潤揚(윤양)대교 가까이까지 다가갔다. 진강의 옛 이름은 潤州(윤주)와 京口(경구)였다.

그러나 마음이 바뀌어 長江의 흐름을 타고 싶었다. 윤양대교 동쪽에 위치한 나루(鎭揚汽渡)로 이동해 대절 지프와 함께 페리에 승선했다.

長江은 짙은 안개 속에서도 호호탕탕하게 흐르고 있었다. 長江을 건너면 바로 대운하를 완성했던 隋양제가 유별나게 사랑했던 양주이다. 로맨틱한 양주는 唐제국이 성취한 「팍스 시니카」 시기에 세계 제1의 국제도시였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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