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조선 기사

唐軍의 南侵을 저지한 新羅 전선사령부 晝長城(남한산성)의 유물들

글 정순태 기자  2008-01-03

  • 페이스북
  • 트위터
  • 카카오톡
  • 글자 크게
  • 글자 작게
南漢山城에서 新羅(신라)시대의 큰 기와 350여 장이 발견되었다. 한국토지공사 토지박물관(관장 조유전)에 의하면 암키와 중 무거운 것은 19kg, 수키와 중 무거운 것은 14kg에 달한다.

이 기와들이 文武王 12년(672)에 건설된 晝長城(주장성: 지금의 남한산성) 건물터 바로 옆에서 나왔다. 군사창고로 추정되는 건물 유적의 규모는 정면 14칸(53.5m), 측면 4칸(17.5m)이다.
「村主」라는 글이 새겨진 기와.

그렇다면 신라가 晝長城을 쌓고 성내에 대규모 군사시설을 세운 까닭은 무엇일까? 「三國史記」 文武王 12년(672) 조에는 『漢山州에 晝長城을 쌓으니 둘레가 4360步였다』라고 기록돼 있다. 서기 672년은 羅唐 7년전쟁 때 신라가 최악의 군사적 위기에 몰렸던 해다. 羅唐전쟁은 백제와 고구려 멸망 후 唐이 백제와 고구려 故土에 熊津도독부와 安東도호부를 설치해 직할식민지로 삼고, 신라까지 먹으려 했기 때문에 전개된 조국전쟁이었다.

672년 8월, 唐將 高侃(고간)과 李謹行(이근행)은 신라의 동맹 고구려부흥군이 지키던 평양성과 馬邑城(마읍성: 평양 서쪽)을 함락시킨 데 이어, 黃州-帶方(대방)을 거쳐 예성강 하구까지 남진해 白水城(백수성: 황해도 배천)을 포위했다.

이때 신라군은 唐軍의 후방을 급습했고, 고구려부흥군은 백수성에서 뛰어나와 唐軍을 쳤다. 羅麗 동맹군은 이 전투에서 唐軍 수천 명을 살상하고, 수많은 전리품을 획득했다.
제1南옹성 오르막에서 내려다본 남한산성 남문. 남한산성은 신라 文武王 12년에 쌓은 土城인 주장성을 조선왕조 仁祖 때 石城으로 개조한 것이다.

백수성에서 패배한 唐軍은 石門山(석문산: 황해도 서흥)으로 후퇴, 山勢를 의지해 진지를 굳히고 전열을 再정비했다. 승세를 타고 추격에 나선 신라군은 石門山에서 唐軍의 통렬한 반격을 받고 대아찬 曉川 등 일곱 장수가 전사했고, 신라의 主力軍이 궤멸했다. 전선은 임진강 계선으로 밀리게 되었다.

이때 78세의 태대각간 金庾信(김유신)은 문무왕에게 결전을 피하고 山城戰(산성전)을 전개하는 持久戰略(지구전략)을 건의했다. 이에 문무왕은 江南에 晝長城을 축조해 江北의 北漢山城과 함께 漢江계선의 중요 방어진지로 삼았다.
신라 주장성의 군사창고로 보이는 대규모 건물지.
뒤에 보이는 行宮이 왜소하게 보일 지경이다.

이후 신라는 唐軍의 서해안 兵站線을 차단하고, 西域 실크로드의 주도권을 둘러싼 唐-吐藩(토번) 전쟁의 타이밍을 이용해 한반도의 전세를 역전시켰다. 드디어 신라군은 675년의 買肖城(매소성)전투와 676년의 伎伐浦(기벌포)해전에서 압승을 거둬 7년전쟁을 종결시켰다. 이로써 신라는 민족사에서 가장 빛나는 삼국통일의 위업을 완성했다. 晝長城은 羅唐전쟁 중 漢江계선을 지킨 前線司令部였다.●
북문에서 약 1km 거리에 위치한 수구.

장경사 터 부근의 옹성.

남한산성의 챙성암문.

唐나라 기병.
Copyright ⓒ 정순태의 역사산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