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조선 기사

鄭淳台 기자의 中國 大運河 1800km 답사 (下)
大運河와 揚子江, 그리고 中國史의 유토피아

中國은 운하 주변을 公園化하고 있다

글 정순태 기자  2008-0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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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0t급 페리는 鎭江(진강·진장) 부두를 출항한 지 불과 15분 만에 揚州(양주·양저우) 부두에 도착했다. 揚子江(양자강=長江)과 京杭(경항)대운하로 연결되고 물산이 풍부한 양주는 중국사의 여러 시기에 일종의 유토피아였다.

양주 하면 반사적으로 대운하가 연상되는 고을이다. 溝(한구)는 양주-楚州(초주) 간의 대운하, 즉 지금의 江蘇省(강소성)의 북부지역을 꿰뚫고 흐르는 대운하이다. 일찍이 양주 일대는 「(한)」이라고 불렸다. 내륙수로가 최상의 물류 통로였던 시대에 대운하와 양자강이 만나는 양주는 번영할 수밖에 없었다.

隋煬帝(수양제)는 대운하를 완성한 뒤 그 중심인 양주를 「江都(강도)」라고 명명했다. 隋의 수도는 長安(장안: 당시는 大興城이라 불림)이었지만, 양제는 長安이나 副都(부도)인 洛陽(낙양)보다 江都를 사랑했다.

양제는 백성들을 혹사시키기는 했지만, 그가 완성한 대운하는 秦始皇(진시황)이 축조한 만리장성과 함께 중국을 바꿔 놓은 대역사였다. 350여 년간의 분열시기를 끝낸 中國에 있어서 남과 북을 잇는 대운하는 경제적 측면뿐만 아니라 심리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대운하의 개통에 의해 중국의 실질적인 통일이 달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양주에는 일찍부터 製鹽業(제염업)이 번성, 製鹽使署(제염사서)라는 관청이 설치되어 많은 鹽商(염상)들이 거주했다. 소금은 생필품이어서 鹽商이란 富(부)의 상징적 존재였다. 그들의 돈이 양주의 문화를 꽃피우게 한 자양분이었다.

양주는 唐代 제1의 국제무역항이자 교통의 요지였다. 오늘날 중국 제1의 항구 上海는 1842년 아편전쟁 이후에 번영한 신흥도시이다. 양주는 8세기 「安史의 亂」 이후 중국에서 가장 부유한 도시로 번영했고, 신라·페르시아·아라비아 상인을 비롯한 많은 외국인이 거주했다.
「유토피아」揚州를 대표하는 瘦西湖(수서호). 正面으로 五亭橋와 왼쪽으로 白塔이 보인다.


일본 求法僧 엔닌의 日記에 기록된 新羅人들의 활약

그때, 양주에서 활약한 신라인들은 王請(왕청)·李少貞(이소정) 등이었다. 「入唐求法巡禮行記(입당구법순례행기)」, 즉 일본의 求法僧(구법승)인 엔닌(圓仁)의 일기에 따르면 일본어에 능숙한 신라 상인 王請이 839년 정월에 양주 開元寺(개원사)에 머무르고 있던 엔닌과 만났다. 그때 왕청이 819년 일본에 표류했던 경험을 털어놓자 엔닌은 그에게 표류하게 된 까닭을 물었다. 다음은 「엔닌의 일기」 839년 1월8일자에 기록된 왕청의 대답이다.

『여러 가지 물품을 교역하기 위해 양주를 떠나 바다를 항해하던 도중 모진 풍랑을 만나서 석 달간 떠내려가다가 出州國(출주국·데슈쿠니:혼슈의 북단)에 표착했다. (中略) 出州國 북쪽에서 北海를 향해 떠나니 순풍을 만나 15일 동안 항해하다 長門國(장문국)에 도착했다』

위의 長門國에 대해서 일본 학자들은 혼슈의 山口(야마구치)縣으로 보고 있으나 건국大 申福龍 교수는 지금의 중국 福建省 連江縣(복건성 연강현) 일대로 추정하고 있다. 그야 어떻든 해난사고가 난 지 20년이 지난 839년 왕청은 양주에서 역시 무역업에 종사하면서 엔닌을 만난 것으로 미루어 보아 그는 최소한 20년 이상 양주를 거점으로 활약했음을 알 수 있다.
京杭大運河 全圖(1939년에 출판된「中國之水利」중에서 운하와 강줄기).


엔닌과 新羅坊
古溝(고한구)의 표석. 대운하 溝(한구) 구간의 출발점이었다.

李少貞 역시 양주를 거점으로 활동한 바다상인이었다. 「日本紀略(일본기략)」에 의하면 820년 4월에 이소정 등 신라인 20여 명이 일본 혼슈 북단 出羽(출우·데와)에 표착했다. 이소정은 장보고가 韓·中·日의 黃海무역을 장악하던 시절에는 그의 휘하에 들어갔고, 장보고가 閻長(염장)에게 피살된 841년 이후에는 염장의 부하가 되었다.

여기서 엔닌에 대해 약간 설명해 둘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그는 838년 6월 일본의 遣唐使船(견당사선)을 타고 하카타(博多)港을 출항했으나 침몰 직전의 난파 상태로 양자강 하구에 표착해 양주-초주를 거쳐 장보고가 창건한 적산법화원(山東省 榮城市 소재)에서 장기 체류했다. 당초, 그는 筑紫(축자·지쿠첸) 태수가 淸海鎭(청해진)의 장보고 大使에게 보내는 소개장을 휴대했으나 黃海에서 표류 중 분실했다.

그는 840년 2월 장보고에게 도움을 청하는 간절한 편지를 보냈다. 在唐시기에 사찰 및 佛具(불구)를 파괴하고 승려의 통행까지 금지하는 會昌法亂(회창법란)이 일어나자 엔닌은 머리를 길러 신라인의 행세를 하는가 하면, 그동안 수집한 불교 성물들을 모두 新羅坊(신라방)에 맡겨 위기를 모면했다.

847년 10월, 엔닌은 신라 상선을 타고 9년4개월 만에 귀국했다. 귀국 후 그는 일본 조정에서 慈覺大師(자각대사)라는 존호를 받고, 일본 天台宗 山門派(천태종 산문파)의 開山祖(개산조)가 되었다. 그가 쓴 「입당구법순례행기」(이하 「엔닌의 일기」로 표기함)은 엔닌이 머물렀던 대운하변의 신라인 거주지인 新羅坊, 장보고가 지금의 산동성 영성시에 창건한 사찰 赤山법화원, 황해무역을 장악한 신라인의 활약상을 전하는 유일한 목격자의 문헌이다.


隋文帝의 고구려 침공
揚州故城.

안개가 몽롱한 양자강을 뒤로 하고 양주 페리부두에서 하선했다. 페리의 운항속도가 빠르긴 했지만, 불과 15분 걸린 長江의 渡江--아무래도 성에 차지는 않았다. 이때 문득, 중국대륙을 통일한 隋 文帝(수문제)가 589년 고구려의 平原王(평원왕)에게 보낸 國書(국서)의 한 구절이 생각났다.

『遼河(요하)의 폭이 長江과 비교하여 어떠한지, 고구려의 인구가 陳(진)과 비교하여 어떠한지, 王은 말하여 보라!』

隋문제는 한 해 전에 長江을 건너 南朝 최후의 왕조 陳을 멸망시킨 여세를 몰아 고구려의 복속을 강요했던 것이다. 필자가 관찰한 바로는 長江의 폭이 요하의 폭보다 그렇게 넓지는 않다. 다만, 長江의 수심은 요하보다 훨씬 깊은 것 같다.

드디어 隋문제는 수륙군 30만을 동원해 고구려를 공격했지만, 육군은 장마 때문에 군량 수송에 차질을 빚어 회군했고, 해군 함대는 황해에서 풍랑을 만나 거의 모두 침몰하고 말았다.

페리부두에서 30분 승차거리의 揚州인민정부(시청)에 도착해 金文經 교수가 소개한 외사과 부주임 鄧여사를 만났다. 鄧부주임은 江淮大(강회대) 한국어과 3학년인 蔣(장흠)양에게 필자의 길안내를 맡겼다.

우리는 시가지 동부에 위치한 瘦西湖(수서호)에 먼저 갔다. 원래 이름은 西湖였는데, 杭州의 西湖와 구별하기 위해 「날씬하다」는 의미의 「瘦(수)」를 앞에 붙여 瘦西湖라고 명명했다. 玉版橋(옥판교)를 건너 釣魚臺(조어대)에 올라 五亭橋(오정교)를 바라보는 눈맛이 상쾌하다. 이곳이 바로 양주를 상징하는 경관이다. 오정교 서쪽에는 淸의 乾隆帝(건륭제) 때 지은 라마敎의 白塔(백탑)이 오똑 서 있다.


崔致遠이 「討黃巢檄文」을 쓴 양주故城

수서호를 나서 시가지 북서쪽에 위치한 양주故城(고성)의 가파른 계단을 올라갔다. 필자의 양주 답사 1주일 전인 2007년 10월15일, 양주고성 안에 지은 「崔致遠기념관」이 개관되었다. 최치원기념관은 중국 중앙정부가 처음으로 허가한 외국인 기념관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최치원이라면 경주 육두품 家門 출신으로 12세에 唐에 自費(자비)로 유학하여 18세 때 賓貢科(빈공과)에 급제하고, 洛陽(낙양) 등지를 유력하며 詩作에 몰두했다. 874년, 20세의 나이로 水(율수: 南京 남쪽)의 縣尉(현위: 경찰서장에 상당함)가 되어 3년간 근무했다.

877년 율수현위직을 그만두고, 博學宏詞科(박학굉사과) 시험을 준비하다가 879년 「黃巢(황소)의 난」이 일어나자 당시 淮南道(회남도)의 治所(치소)인 양주에서 회남절도사 高騈(고병)의 從事官(종사관: 종5품 대우)으로 종군했다. 黃巢는 한때 양주를 점령해 이곳에 거주하던 아라비아人과 페르시아人 등 외국인을 대량 살육했다.

이때 그는 「討黃巢檄文(토황소격문)」을 써서 문장가로서 이름을 全중국에 떨쳤다. 그의 관직도 承務郞(승무랑) 殿中侍御史內供奉(전중시어사내공봉: 황제 직속의 감찰관) 都統巡官(도통순관)으로 올랐다.

그는 885년 귀국, 侍讀(시독) 겸 翰林學士(한림학사) 守兵部侍郞(수병부시랑) 瑞書監知事(서서감지사)로 부임했으나, 문란한 국정을 통탄하고, 894년 時務策(시무책) 10여조를 진성여왕에게 올리고 外職(외직)을 자청하여 大山 등지의 태수를 지낸 후 아찬(16관등 중 제6위)이 되었다. 그 후 6두품 출신의 한계를 느낀 탓인지, 관직을 버리고 가야산 해인사 등 전국을 유랑하면서 여생을 마쳤다. 그가 쓴 「鸞郞碑序文(난랑비서문)」은 花郞道(화랑도)의 사상적 연원과 형성과정을 서술한 귀중한 사료이다.

최치원은 양주에서 5년간 근무하면서 지은 글이 1만여 수에 이르렀는데, 귀국 후 그때 지은 글을 정선해 「桂苑筆耕(계원필경)」 20권을 완성했다. 이 때문에 그는 「韓中문화교류의 선구자」로 일컬어진다.
양주故城 안에 세워진 최치원기념관(왼쪽 사진)과 최치원의 像(오른쪽 사진).


「여성천하」 揚州의 紅樓夢 조찬
「삼국지연의」,「수호전」,「서유기」와 더불어 중국의 4大 고전 중 하나인「홍루몽」의 저자 曹雪芹의 像.

10월23일 오전 7시50분, 揚州영빈관 식당으로 갔더니 양주시 외사판공실 丁章華(정장화) 주임 등 양주시청 여성간부 4인이 먼저 와서 필자를 맞았다. 양주시는 시장이 여성(王燕文씨)이어서 그런지, 시청 직원들 중에 여성이 유별나게 많은 것 같다. 전날 저녁, 丁주임은 전화로 필자에게 「紅樓夢(홍루몽) 조찬」을 베풀겠다고 했는데, 필자는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제대로 알아듣지 못한 채 약속장소에 나갔다.

「홍루몽」이라면 淸代(청대)의 만주族 출신 작가 曹雪芹(조설근: 1715~1763)이 지은 연애소설인데, 중국문학사에서 봉건사회의 모순과 몰락을 묘사한 위대한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래서 『한담을 나눌 때 「홍루몽」에 대해 말하지 못하면 「詩經」과 「書經」을 다 읽어도 꿀릴 수밖에 없다』는 속담이 있다. 양주는 「홍루몽」의 무대이다.

둥근 식탁에 자리를 정하자 기자 출신인 丁주임은 필자에게 대뜸 사지선다형 문제를 냈다. 白酒(백주) 술잔 크기의 앙증스러운 잔에 담긴 네 가지 차를 한꺼번에 내놓고 『그중에서 입맛에 맞는 것 하나를 고르라』고 권하는 것이었다.

필자는 잠시 뜸을 들이다 좀 쌉쌀한 맛의 차를 골랐는데, 그녀는 『양주 특산의 「平山貢春(평산공춘)」을 선택해 주어 매우 기쁘다』면서 자신도 이 차를 선택했다. 조찬이어서 비교적 간단한 코스였지만, 전통중국 귀족사회의 음식문화 중 한 가닥을 음미할 수 있었다.

국내 중국요리집에서 흔히 접했던 餃子(교자), 蒸子(증자) 등이 여기선 저마다 「홍루몽」의 무슨무슨 장면과 연관되어 있다. 음식 하나하나가 정성을 쏟아 만든 것이어서 그냥 깨물어 넘기기 아까웠다. 예컨대 「홍루몽」의 남자 주인공 「賈寶玉(가보옥)」이라는 이름의 요리, 비련의 여주인공 「林黛玉(임대옥)」이라는 이름의 요리도 나왔다.

마지막에는 중국음식답지않게 아주 담백한 「양주 볶음밥」을 먹었다. 양주는 볶음밥의 발상지라고 한다. 식사가 끝날 무렵, 丁주임이 『홍루몽 조찬이 어떠냐』고 묻기에 『네 美人과 함께 중국 최고의 연애소설을 들으며 밥을 먹으니 황홀하다』고 답했다.

丁주임은 『한때의 부귀영화도 헛것이라는 의미의 故事인 「南柯一夢(남가일몽)」의 발상지가 揚州』라고 말했다. 즉, 唐나라 때 揚州에 살던 순우분이라는 사람이 술에 취해 홰나무 아래에서 깜빡 잠이 들었는데, 대괴안국이라는 理想鄕(이상향)의 영접을 받아 20년 동안 온갖 영화를 누리는 꿈을 꾸다가 깨어났다는 것이다.

丁주임에 따르면 양주에는 현재 한국의 90개 중소기업이 약 1억 달러를 투자해 운동용품, 낚시도구, 장난감 등을 제조하고 있다. 그녀는 『현재 한화, LG 등 대기업의 투자를 협의 중』이라고 했다.


水質이 깨끗한 揚州의 운하
운하를 통과하는 鹽商들에게 통과세를 징수했던 초관 터.

조식 후 양주시 운하관리처 부주임 徐才祥(서재상)씨의 안내로 양주의 운하 관련 시설을 둘러보기로 했다. 그는 필자를 시가지 동쪽의 古운하변으로 데려갔다. 馬庄橋(마장교) 옆에 「古溝(고한구)」라는 표석이 세워져 있다. 吳王 夫差 때, 한구를 처음 개착하면서 첫 삽을 뜬 곳이라 한다.

「古한구」 바로 북쪽 옛 운하변에는 漢高祖 劉邦(유방)의 조카인 吳王 劉(유비)를 모시는 大王廟(대왕묘)가 있다. 그는 한구를 개수하는 등 선정을 베풀었다고 한다. 이 주위에는 鹽商(염상)들에게 통과세를 받았던 「?關(초관)」이라는 옛 세관의 건물을 복원해 두고 있다. 옛 중국 왕조들에는 염상들로부터 징수하는 세금이 국가운영의 중요한 財源(재원)이 되었다.

양주市는 운하의 관광자원화에 매우 적극적이다. 특히 東關古渡(동관고도) 일대 古운하의 수질은 놀랄 만큼 깨끗했다. 徐부주임은 『양주市는 생활하수와 공장폐수를 100% 정화한 후에 운하로 흘려보낸다』고 자랑했다. 필자는 그의 말을 양주시가 水質(수질)개선과 生態(생태)복원을 위해 상당히 노력하고 있다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水邊(수변)공원으로 조성된 東關古渡의 벽면에는 京杭대운하를 완성한 隋양제가 백관들을 거느리고 龍船(용선)에 승선한 모습을 돋을새김(陽刻·양각)해 두고 있다.

우리는 東關古渡에서 다시 4~5km 東進해 시가지 동쪽 외곽을 종단하는 양주의 京杭대운하를 구경했다. 양주의 대운하는 長江의 지류인 壁虎河(벽호하)·寥家溝(요가구)·太平河(태평하) 등의 큰 물줄기와 서로 연결되어 수질이 좋다.

전날, 양주시청 관계자는 필자에게 양주는 1만t급 선박이 접안할 수 있는 부두를 건설했다고 브리핑한 바 있어 필자는 徐부주임에게 「그곳에 가고 싶다」고 안내를 요청했다. 그는 필자를 대운하와 양자강이 만나는 곳에 위치한 揚州港으로 데리고 갔다.

그러나 1만t급 선박의 접안시설장이 있다는 「揚州遠揚國際碼頭有限公司(양주원양국제마두유한공사)」의 정문에서는 출입을 허락하지 않았다(중국어의 碼頭는 「부두」를 뜻한다). 그곳이 보세구역인지, 아니면 아직 대외적으로 공개할 만한 형편이 아닌지, 출입금지의 이유를 알 수 없었다.


日本에 律學 전파한 鑒眞화상
양주의 옛 나루 東關古渡의 벽면에 隋煬帝와 百官과 宮人 등이 龍船에 승선한 모습을 돋을새김(陽刻)해 두고 있다. 왼쪽은 필자에게 양주의 대운하를 설명하고 있는 양주시 운하관리처 徐才祥 부주임.

徐부주임과 점심을 함께하고 헤어진 뒤 필자는 양주박물관으로 갔다. 양주의 역사와 문화를 엿볼 수 있는 약 3만 점의 유물을 주제별로 전시하고 있다. 淸代의 양주는 회화예술에 관한 한 江南 제1이었다. 「揚州八怪(양주팔괴)」라 불리는 뛰어난 화가가 등장했기 때문이다. 金農(김농), 黃愼(황신), 鄭燮(정섭), 이선, 汪士愼(왕사신), 高翔(고상), 李方膺(이방응), 羅聘(나빙) 등 양주팔괴의 작품을 이곳에서 감상할 수 있다. 8명 모두 文人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관직에 나가지 않고, 청빈한 삶을 살았다고 한다.

이어 시가지 북서쪽에 위치한 大明寺(대명사)로 올라갔다. 大明寺는 1000년이 넘는 고찰인데, 太平天國 전쟁과 문화혁명을 거치면서 황폐화했다가 일본 불교계의 지원으로 복원되었다. 이곳은 일본에 律學(율학)을 전파한 鑒眞(감진)화상이 주석했던 사찰이다.

그의 전교활동은 불제자로서 모범적이었다. 742년 일본의 유학승 요에이(榮叡) 등의 간절한 초빙을 받은 이후 다섯 차례나 渡日(도일)을 시도했으나 번번이 난파의 위기를 당하는 등 거듭 실패했다. 11년 후인 여섯 번째에야 일본의 遣唐使船(견당사선)에 편승해 겨우 渡日에 성공했다. 그때 감진화상은 66세의 나이로 이미 失明한 상태였다. 754년 4월, 그는 교토의 東大寺(동대사·도다이지)에서 천황 이하 400여 명에게 授戒(수계)했다.

風光(풍광)이 수려한 양주도 소주와 항주에 뒤지지 않는 정원의 고을로 이름 높다. 그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이 平山堂(평산당)이다. 宋의 경력 8년(1048), 양주자사이며 唐宋八大家의 1인인 歐陽修(구양수)가 大明寺의 경내에 집을 짓고 살면서 「平山堂」이라는 편액을 써서 붙였다. 江南의 모든 山이 이곳을 향해 머리를 숙인다는 의미이다. 지금의 平山堂은 趙之壁(조지벽)의 「平山堂圖志」라는 저서에 의거해 복원된 것이다.

평산당의 동쪽 觀音山(관음산)에는 隋양제의 離宮(이궁)인 迷樓(미루)의 터가 있다. 「迷樓」라는 이름이 붙는 것은 隋양제가 스스로 「仙人이 놀러와서도 여기에서는 헤매고 만다」고 자만했기 때문에 그런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양주의 대운하.


麗隋전쟁의 兵站路
수서호의 북단에서 바라본 大明寺와 棲靈塔.

迷樓에 오르면 麗隋(여수)전쟁과 隋양제의 최후가 생각난다. 611년, 隋양제는 洛陽에서 탁군(지금의 北京)에 이르는 대운하인 永濟渠(영제거)가 개통되자 江南의 곡식과 물자를 ?郡(탁군)에 모으고 총동원령을 내렸다. 612년 정월, 원정군의 兵馬가 탁군에 집결했다. 2월, 양제도 양주에서 대운하를 타고 탁군으로 北上해 親征(친정)에 나섰다.

원정군의 병력수는 총 113만3800명, 이를 과장하여 號曰(호왈) 200만이라 했다. 그러나 隋의 육군과 水軍은 고구려군에게 세계전사상 유례가 없는 대패를 당했다. 제1차 원정의 전투경과는 너무 저명한 만큼 이 글에서는 생략한다.

이때 양제는 乙支文德(을지문덕)의 유인전술에 걸려 薩水(살수:청천강)전투에서 고구려군에 참패한 宇文述(우문술)의 목을 쇠사슬로 묶고 함거에 태워 長安으로 끌고 갔다. 그러나 宇文述은 처형되지 않고 일단 廢庶人(폐서인)이 되었다가, 다음해 제2차 원정의 총사령관으로 다시 출전했다.

원래 양제와 우문술은 사돈을 맺을 만큼 가까운 사이였다. 우문술의 막내아들 宇文士及(우문사급)이 양제의 딸인 南洋公主의 남편이었다. 후일의 일이지만, 양제는 우문술의 아들들에게 피살된다.

613년 4월, 양제는 제1차 원정의 실패에서 교훈을 얻지 못하고, 다시 遼河(요하)를 건너 제2차 고구려 친정에 나섰다. 제2차 원정의 결전장은 요동성이었다. 제1차 원정 때 兵站線(병참선)이 길어 참패했던 만큼 이번에는 고구려의 만주 영토부터 차근차근 먹어들어 가려 했다.


양현감의 반란
隋煬帝의 離宮인 迷樓 유적(관음산).

遼東城(요동성)의 고구려군은 隋軍의 20여 일간에 걸친 포위공격에도 불구하고 굳게 버텨냈다. 드디어 隋軍은 100만 개의 흙포대를 만들어 요동성보다 더 높게 쌓았다. 그 위에서 성 안을 내려다보고 공격해 요동성은 함락의 위기에 빠졌다.

바로 이때 隋의 본국에서 楊玄感(양현감)의 반란이 일어났다. 양현감은 현직 예부상서(교육부 장관)로서 황하와 대운하(永濟渠)의 교차지점인 黎陽(여양)과 종착지인 탁군을 오가며 江南의 곡물 등 군수물자를 전선으로 보내는 군수책임을 맡고 있었다.

양현감은 자신의 앞날이 불안했다. 양제의 제1차 원정이 양제와 야전지휘관의 과욕에 따른 패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때의 병참 책임자가 업무 태만이라는 누명을 뒤집어쓰고 사형을 당한 선례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자신이 숙청당할 차례라는 위기감에 빠진 양현감은 군수물자의 수송을 고의로 지연시키며 전선에 타격을 주더니 마침내 반란의 깃발을 든 것이다. 양현감의 반란군은 낙양 인근 대운하변의 거대한 곡물저장소 洛口倉(낙구창)을 점령한 데 이어 낙양성을 공격했다.

이런 상황에서 급거 정예 기병을 이끌고 회군한 宇文述과 來護兒(내호아) 부대에 의해 양현감의 반란군은 궤멸당했다. 양현감의 반란은 가볍게 진압되었지만, 그 여파는 컸다. 河北·河南·山東 등지에서 야심가와 비적들이 잇달아 봉기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제는 제3차 고구려 원정을 강행했지만, 농민 반란의 불길이 갈수록 거세진데다 병사들이 厭戰(염전) 기분에 휩싸여 고구려 원정을 중도에서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양제는 노이로제에 걸려 점차 증세가 심해졌다. 돌궐도 공순하던 啓民可汗(계민가한)이 죽고, 그 아들 始畢可汗(시필가한)이 후계하자 반기를 들고 순행 중의 양제를 기습하여 산서성의 雁門城(안문성)에 밀어넣고 맹공을 가했다. 돌궐군은 隋의 구원군이 당도하자 攻守의 처지가 뒤바뀔 것을 우려해 바람처럼 회군했으나 양제에 가한 심리적 타격은 컸다.


隋煬帝의 최후
新羅청자 파편이 다량 발굴된 양주 羅城址.

양제의 양주 이궁이었던 迷樓에 오르면 「南柯一夢(남가일몽)」이란 고사가 떠오른다. 中原에서 의욕을 잃은 양제는 근위군단인 驍果衛(효과위)를 거느리고 대운하를 타고 양주로 내려왔다. 여차하면 江南정권이라도 존속시켜 보겠다는 속셈이었을 것이다. 이때 양제는 손자인 代王 楊侑(양유)에게 수도 長安을 지키도록 하고, 역시 손자인 越王 양통을 낙양에 머물게 했다.

각지의 반란군 중 유력한 세력은 자결한 양현감의 모사였던 李密(이밀)의 河南세력, 群盜(군도) 출신의 竇建德(두건덕)이 거느린 河北세력 등이었다. 이런 상황이던 617년 山西省에서 돌궐의 남진을 막고 있던 양제의 이종사촌이며 太原留守(태원유수)이던 李淵(이연)이 반란을 일으켜 長安으로 진격했다.

이연은 수도방위군을 제압하고 入京한 다음, 양제의 손자 양유를 허수아비 황제로 앉히고, 양제에게는 太上皇帝(태상황제)의 존호를 올렸다. 물론, 양제가 인정하지 않은 쿠데타였다.

그럼에도 양제는 風光이 뛰어난 양주에서 미녀 1000명과 노니는 거대한 할렘을 만들어 놓고 3년 넘게 그곳에서 종일 취해 長安으로 돌아갈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근위군단의 장병들은 대부분 關中(관중: 長安 일대) 출신들로 귀향의 가능성이 사라지자 불온해지기 시작했다.

드디어 大業 14년(618) 3월15일 밤, 병란이 일어났다. 난병들이 이궁에 침입해 궁녀 하나를 잡아 앞세우고 양제의 침실로 뛰어들었다.

양제는 쿠데타의 주모자가 누구인지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주모자는 근위군단의 대장 宇文化及(우문화급)과 그 동생 宇文智及(우문지급)이었다. 우문화급·지급 형제는 고구려 원정군총사령관을 맡았고, 그때는 이미 故人이 된 宇文述의 아들이며, 이들 형제의 친동생이 바로 양제의 사위인 宇文士及(우문사급)이었다.

난병들은, 양제가 애지중지하던 열두살짜리 막내아들이 양제의 무릎에 매달려 울어대자 먼저 목을 쳤다. 사랑하는 막내아들의 피가 양제의 옷을 새빨갛게 물들였다. 이어 난병이 양제의 목을 치려하자 양제는 『天子에게는 天子의 죽는 방법이 있다. 독주를 가져오라』고 외쳤다.

그러나 양제의 독약을 관리하던 宮人이 일찌감치 도망쳐 버린 바람에 독약이 어디에 있는지 찾을 수 없었다. 난병들은 양제의 비단 손수건으로 양제의 목을 매었다.


淮河 지역 대운하의 중심지 楚州
양주 羅城 유적.

양제가 시해당한 소식이 전해진 618년 5월, 李淵은 이용가치가 사라진 양제의 손자 恭帝(공제)를 내려앉히고 스스로 天子가 되었다. 이 사람이 그 후 300년간 지속되는 唐의 高祖이다.

이어 필자는 근년에 新羅 청자의 파편이 다량 발견되었다는 양주 西門 밖 唐代의 羅城址(나성지) 자리에 들어선 양주사범학원을 찾아갔다. 양주 나성지에서 신라 청자의 파편이 발굴되었다는 사실은 揚州大 朱江(주강) 교수가 우리나라 학계에 처음 소개했지만, 그 장소를 명확히 밝히지 않았다.

현지를 답사했던 부산外大 사학과 권덕영 교수는 그 장소를 양주시 文化路 일대 혹은 양주大 사범학원 자리 등으로 추정했다. 이곳에 페르시아人 등 외국인 집단거주지가 있었던 것 등으로 미루어 신라방이 이곳에 위치했을 것으로 판단되었다.

양주에서 이색적인 장소로 「普哈丁墓園(브하딘 묘원)」이라 불리는 이슬람 묘지가 있다. 墓誌(묘지)에 의하면 브하딘은 마호메트의 16代 孫으로 南宋 말에 전교를 위해 양주에 와서 살았다. 그와 일족의 이슬람風의 묘, 그리고 소규모의 모스크(예배당)가 보존되어 있다.

10월24일 오전 7시 필자는 양주영빈관을 출발해 高郵湖(고우호)를 끼고 北上해 오전 10시경에 淮安市 楚州區(회안시 초주구)의 들머리에 진입했다. 唐나라 때 淮河(회하) 유역의 큰 도시로는 楚州·泗州(사주)·濠州(호주) 등이 손꼽혔다. 그 가운데 정치적·경제적으로 가장 중요한 도시는 楚州였다.

지금도 楚州의 대운하는 운항선박들로 상당히 붐비고 있었다. 北上하는 대운하와 東流(동류)하는 淮河와 만나는 초주의 들머리에서 지프를 세워 두고 사진을 찍었다.

강소성은 省 전체가 강과 운하로 연결되는 평야와 저지대로 이루어져 있다. 강줄기가 隋·唐 시기와 거의 대동소이해 지질·지형의 변화가 거의 없다. 隋·唐의 수도 長安은 關中이라는 옥토를 갖고 있으나, 그 땅이 좁고 자원도 부족해 江淮(강회) 유역의 풍부한 물자에 기대지 않을 수 없었다.


楚州의 신라방
중국에서 가장 긴 양자강(5600km). 좌측은 南京 건너편 鎭浦다.

이곳의 대운하는 항주에서 소주를 거쳐 潤州(지금의 鎭江市)까지의 江南운하를 지난 후 양주에서 초주까지의 운하인 溝(한구)를 이용한 것이었다. 이 초주에서 회하를 따라 西北進해 泗州(사주: 현재의 안휘성 泗縣)에 이른 후, 여기서 通濟渠(통제거)를 통해 副都인 洛陽에 이르고, 이어 漕渠(조거)를 통해 長安에 도달했다.

「엔닌의 일기」에 따르면 楚州城 안에는 신라인의 집단거주지인 新羅坊(신라방)이 있었다. 그 시절, 초주에서는 薛詮(설전)·劉愼言(유신언)·張從彦(장종언) 등이 新羅坊을 근거지로 하여 활약했다. 하버드大 에드윈 라이샤워 교수는 「엔닌의 일기」를 일컬어 「極東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기행문」이라고 평가했다.

唐代의 楚州城은 현재의 淮安市 楚州區에 위치해 있었다고 하지만, 시가지의 도시화로 그 흔적은 찾기 어렵다. 신형식 교수는 楚州區의 新安醫院 일대에 신라방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필자는 초주 대운하변에서 지프로 시가지 쪽으로 15분쯤 달리다 도로 왼쪽편에 위치한 新安醫院(신안의원)을 발견했다.

新安醫院 옆 「梁紅玉祠(양홍옥사)」라는 사당의 마당 한쪽 구석에 3~4년 전까지 「古末口(고말구)」라고 쓰인 표석이 세워져 있었다고 하는데, 필자는 발견하지 못했다. 300평 정도의 공터에는 쓰레기로 가득 차 있었다. 사당 정면으로 楚州 대운하 쪽으로 개착된 물길이 있지만, 폭도 좁고 물도 얕아 水路로서의 기능은 잃은 지 이미 오래인 것 같다.

古末口는 옛 운하 山陽瀆(산양독)과 회하가 만나는 지점이라고 한다. 권덕영 교수의 논문에 따르면 초주구 문물관리국 직원들은 唐代의 淮河는 古末口 앞으로 축조된 큰 도로를 따라 흘렀고, 신라방은 그 근처에 있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엔닌의 일기」는 당시 唐나라의 불교뿐만 아니라 신라·唐·일본의 정치적·경제적 관계, 특히 신라인의 해외활동상 연구에 제1차 史料(사료)가 되고 있다.

「엔닌의 일기」에 따르면, 그의 在唐 10년간 만난 사람의 60%는 신라인이었고, 회창법란의 회오리 속에서 그를 보호한 사람들 역시 在唐 신라인이었다. 이것은 신라인들이 「팍스 시니카」 시기에 黃海항로와 대운하의 요충에 진출해 세계 일류 문명권과의 활발한 교류를 통해 우리 민족의 문화·경제를 글로벌 1류로 격상시켰음을 의미한다.

이같은 우리 민족의 해양지향성은 高麗王朝 이후 급격히 약화되어 황해무역의 주도권은 宋나라 海商들이 장악했다. 고려 태조 王建은 일찍이 海商 출신이었지만, 그가 고려를 창업한 후 그를 추종하던 많은 海上세력들이 고려의 귀족으로 편입되어 바다를 떠났기 때문이다.

특히 明·淸 시기의 중국은 中華主義(중화주의)와 쇄국주의로 일관했고, 조선왕조 역시 事大主義와 쇄국주의에 빠져 韓民族의 후진화를 자초했다. 韓民族의 해양지향성은 1960년대 이후 대한민국에서 기적적으로 되살아나지만, 우리 민족사에서 그것을 처음으로 시현한 것은 통일신라시대였다.
淸의 康熙帝 일행이 南京에서 龍船(좌단)을 타고 양자강을 내려가려는 모습.「康熙南巡圖」에서 인용.


新羅 선박으로 귀국한 엔닌

초주의 신라방에서 엔닌이 신라인 설전을 처음 만난 것은 845년 7월3일이었다. 당시 설전은 초주의 신라방을 총괄하는 摠管(총관)으로서 楚州同十將(초주동십장)을 겸하고 있었다. 그러나 엔닌은 그의 846년 6월5일자 일기에서 유신언을 초주 신라방 총관이라고 기록했다. 이것은 신라방의 총관이 설전에서 유신언으로 교체되었음을 알 수 있다.

유신언은 초주에 거주하면서 唐을 왕래하던 신라인뿐만 아니라 일본인에게 여러 가지 편의와 정보를 제공하고, 唐 관청과의 교섭을 대행해 주던 譯語(역어: 통역)였다. 엔닌뿐만 아니라 다수의 일본 구법승들도 유신언에게서 많은 도움을 받았다.

초주에는 신라인인 登州押衙(등주압아) 張詠(장영)의 아우 장종언이 그의 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었다. 「엔닌의 일기」에 의하면 그는 847년 6월에 일본으로 가는 선박을 찾아 초주로 갔다가 마침 일본으로 항해할 예정인 신라인 金珍(김진)의 배가 萊州(내주: 山東省)에 머물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초주를 떠났는데, 이때 유신언과 설전, 등주 張대사의 아우 장종언과 그의 어머니가 엔닌을 배웅해 주었다. 여기서 말하는 등주 張대사는 평로군절도동십장 겸 登州제군사압아 겸 勾當新羅所(구당신라소)압아 장영을 지칭한다.

초주 동쪽 連水縣(연수현)에는 鄭年(정년)과 崔暈(최훈) 등 신라사람들이 많이 살았다. 정년은 장보고와 함께 徐州의 武寧軍(무령군)에 입대해 小將으로 승진한 인물로서 同계급의 장보고와 라이벌 관계였다. 그러나 820년 무렵 唐 조정이 절도사들의 병력을 대폭 삭감하던 과정에서 정년은 제대를 당해 연수현에서 「춥고 배고픈」 형편으로 전락했다.

반면 장보고는 제대 후 해상활동을 통해 막대한 富를 쌓고 신라로 귀국해 당시 唐나라 해적이 황해에 횡행하면서 신라사람들을 잡아다 노예로 매매하는 사실을 왕에게 보고하고, 군사 1만을 거느리는 淸海鎭 大使(청해진 대사)가 되었다. 이어 그는 해적들을 일소하고, 신라·당·일본 사이의 3각무역을 관장하여 큰 세력을 이루었다.

이런 장보고의 성공을 부러워한 정년도 귀국해 과거 라이벌이었던 장보고 휘하의 장군이 되었다. 장보고의 명령을 받은 정년은 군사를 이끌고 王都 서라벌로 진군해 민애왕을 폐위하고 金祐徵(김우징: 神文王)을 즉위케 했다.

최훈은 청해진 병마사로서 장보고 선단을 이끌고 중국 황해연안에서 무역업과 운수업에 종사했던 인물이다. 그는 840년 赤山법화원에 들러 엔닌을 만났는데, 그때 그는 엔닌을 淮南(회남) 지방까지 그의 배로 데려다 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상황이 급변했다.

841년 11월에 장보고가 암살되고 청해진이 염장에게 장악되자, 최훈은 唐에 망명해 연수현에 머물게 되었다. 왜 하필 그의 망명지가 연수현이었는지에 대해 권덕영 교수는 『청해진이 건재할 당시 장보고 선단의 무역기지가 연수현에 있었던 인연 때문이 아니었을까 한다』고 추측했다.

어떻든 845년 唐 武宗의 外國 승려 추방령에 의해 귀국이 불가피해진 엔닌이 연수현을 찾아가서 최훈을 만났는데, 그는 엔닌의 귀국을 위해 여러 가지로 노력했지만, 도움을 주지는 못했다. 엔닌의 귀국은 초주 신라방의 총관 劉愼言의 주선으로 金珍 등 신라 선원 44명이 운항한 신라 선박에 승선함으로써 가능했다.


중국 역사상 10개국의 수도 南京
南京夫子廟 인근 江南 貢院(古代 중국 최대의 科擧시험 장소)에 위치한 林則徐의 像. 淸國의 欽差大臣 임칙서가 英國 상인의 아편 密무역을 금지하자 영국은 아편전쟁을 도발했고, 아편전쟁은 1842년의 불평등조약(南京조약)으로 일단락되었다.

필자는 양자강을 渡江해 양주를 거쳐 楚州까지 올라왔지만, 江南의 首府인 南京를 들르지 않은 것이 아무래도 찜찜했다. 대운하를 따라 계속 北上할 것인지, 아니면 南京에 들르기 위해 南下할 것인지 고심했다.

결국, 南京을 제쳐 놓을 수 없다고 판단했다. 南京은 중국 역사상 10개 왕조가 도읍한 역사도시인 동시에 長江 水運(수운)의 요충이다. 南京은 京杭대운하의 중요 거점인 揚州市와는 불과 100km, 鎭江市와는 70km 거리이다.

1842년, 아편전쟁 당시 英國 함대는 長江을 거슬러 올라와 長江 남안의 요충 鎭江市를 공격했다. 아편전쟁에서 가장 치열했던 전투가 鎭江에서 벌어졌다. 이 전투에서 鎭江의 수비군은 전원 장렬하게 전사했다. 鎭江을 점령한 영국군은 여자만 보면 욕을 보인 후 살해했기 때문에 능욕을 당하기보다는 정절을 지키기 위해 자살을 택한 여성이 많았다고 한다.

鎭江의 함락은 南京 공략이 임박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영국군이 南京을 위협하자 淸國 조정은 굴복했다. 1842년 8월29일, 南京의 양자강 위에 정박 중인 영국 군함 콘월리스號에서 양국 대표가 강화조약에 조인함으로써 아편전쟁은 청국의 일방적인 패배로 막을 내렸다. 이것이 바로 南京條約(남경조약)이었다.

남경조약의 골자는 홍콩 割讓(할양), 5港 開港, 실질적인 治外法權(치외법권) 부여, 아편 賠償金(배상금) 지급 등 영국의 일방적인 요구를 모두 삼킨 것으로서 이후 잇달아 열강들과 체결된 불평등조약의 제1호였다. 어떻든 남경조약에 의해 중국은 非현실적인 中華主義(중화주의)의 自尊妄大(자존망대)에서 깨어나 고통스러운 현대사로 진입한다.

우리 일행은 楚州에서 서쪽 洪澤湖(홍택호)와 동쪽 高郵湖(고우호) 사이로 난 고속도로를 타고 200km쯤 南下해 長江 북안에 이르렀다. 長江 위에 걸린 「南京長江2橋」를 건너 長江 남안의 南京市로 진입했다.


三國시대 이후 성장
南京 여성과 자전거. 쇼핑을 끝낸 주부가 아이를 태우고 출발하고 있다.

남경시 변두리는 낡은 건물을 뜯고 새 건물을 짓는 현장이 많아 먼지가 풀풀 날렸다. 도약을 앞둔 혼돈인가, 3년 후에 오면 南京은 달라져 있을 것이다. 두 자릿수 경제성장을 거듭하고 있는 현재 중국에서는 「세계의 10년은 중국의 1년」이란 구호가 나돌고 있다.

南京이 하나의 정치적 중심지로 된 것은 後漢(후한) 말부터 삼국시대에 이르는 시기였다. 그 무렵, 中原의 난리를 피해 내려온 사람들에 의해 이 지방의 인구도 비약적으로 증가했다.

삼국시대에는 魏(위)의 洛陽, 蜀(촉)의 成都와 함께 吳의 建業(건업: 지금의 南京)은 「天下三分」의 중심 중 하나가 되었다. 그런 吳도 280년 魏를 찬탈한 司馬(사마)씨의 晋(진)에 의해 멸망당했다. 晋도 정치의 부패와 북방민족의 南進에 의해 316년 멸망했다.

晋의 황족인 司馬睿(사마예)가 이 建業에 정권을 세운 것은 다음해인 317년의 일이었다. 洛陽을 수도로 하던 시대를 西晉, 建業으로 옮기고부터는 「東晋(동진)」이라고 부른다.

西晉 최후의 황제 이름이 司馬?(사마업)이었다. 옛날엔 황제의 이름과 같은 字 또는 거의 비슷한 字의 이름은 인명은 물론 지명을 고치는 풍습이 있었다. 그 때문에 건업도 東晋시대 이후 「建康(건강)」이라고 고쳐 부르게 되었다.
太平天國의 天王 洪秀全의 立像. 1853년 南京에 天王府를 설치한 홍수전은「滅滿興漢」을 외치며 양자강 유역을 장악했으나, 漢族 관료 曾國藩·李鴻章 등이 거느린 농민병과 美國·英國 용병에 의해 1864년 패망했다.

西晉의 멸망 후 중국은 南北 대분열시대로 들어갔다. 북방에서는 기마민족국가 16개가 병립 또는 교체되어 五胡十六國시대라 부른다. 江南에서는 5개의 漢族 왕조가 흥망했다. 이를 孫씨의 吳와 합쳐 六朝시대라고 한다. 이 6개 왕조 모두가 현재의 南京市인 建業(개명해서 建康)에 도읍했다.

왕조가 바뀌면 인심쇄신을 위해 흔히 천도했지만, 南京은 六朝의 붙박이 수도가 되었다. 이는 南京의 지리적 조건이 워낙 뛰어났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삼국시대로부터 隋가 육조의 마지막 정권 陳을 멸하고 중국의 남북을 통일할 때까지 약 370년 사이에 南京은 거기서 부침했던 6개 왕조를 지켜본 셈이다.

六朝는 100여 년 계속된 東晋을 제외하면 모두 短命(단명)왕조였다. 나이 어린 非行天子(비행천자)가 자주 등장해 해괴한 亂政(난정)을 자행했고, 귀족사회는 文弱(문약)에 흘러 국위를 떨치지 못했다.

隋에서 唐에 걸쳐 수도는 長安, 北宋의 수도는 변경(지금의 開封市), 南宋의 수도는 臨安(임안: 지금의 항주시), 그리고 元은 大都(지금의 北京)에 도읍했다. 明 태조 朱元璋(주원장)이 元을 漠北(막북)으로 쫓아내고, 수도를 南京으로 정했던 것은 1368년의 일이었다. 南京은 陳의 멸망 후 약 680년 만에 수도가 되었다.

오후 6시, 南京 중심가에 위치한 J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호텔 건너편의 新상가인 「1912거리」로 나가 오랜만에 한국식 음식점에서 저녁밥을 먹었다. 1912년이라면 孫文(손문)이 이끄는 국민정부가 南京에서 성립된 해이다.


南京의 總統府
태평천국의 수도 南京을 함락시킨 湘軍의 지도자 曾國藩.

하룻밤을 묵은 J호텔은 겉보기엔 멀쩡한데, 시설의 관리가 허술해 욕조의 물이 빠지지 않는데다 방 안의 조명이 어두워 자료를 읽을 수 없었다. 그런데도 중국 대도시의 밤은 빌딩 외부를 장식하는 야간 조명으로 휘황찬란하다.

10월25일, 오전 7시30분, J호텔에서 체크아웃하고, 객실 조명이 밝은 山水호텔을 숙소로 정했다. 당초, 이날 南京을 조감할 수 있는 紫金山(자금산)에 오를 계획이었지만, 전날 밤부터 내리는 비가 그치지 않고 안개도 자욱해 산행을 포기하고, 대신 南京 최대의 호수인 玄武湖(현무호)를 찾았다.

玄武湖는 옛적에 ?陵湖(말릉호) 또는 後湖(후호)로 불렸다. 현무호 안에는 작은 섬 5개가 둑길로 이어져 있다. 京?線(경호선: 북경-상해)의 철도는 현무호의 북방을 달리는데, 남경역이 이 부근에 있다.

하천을 막아 조성된 현무호는 일찍이 南朝 황제들의 정원이었고, 明代에는 倭寇(왜구) 방어를 위한 해군의 훈련장으로 사용했다.

현무호공원을 빠져나와 城內 도심으로 들어오니 마침 러시아워여서 교통지옥이었다. 長江을 끼고 있는 남경은 원래 「짙은 안개의 도시」인데다 온 시가지를 뒤집는 건설공사장에서 날아오는 먼지, 그리고 자동차의 배기가스로 러시아워에는 숨쉬기조차 힘들었다.
國·共 모두 國父로 모시는 孫文. 그는 南京에 중화민국 臨時總統府를 설치했다.

현무호 남쪽 中山東路에 위치한 중화민국 시절의 總統府(총통부)로 찾아갔다. 「南京중국근대사遺址(유지)박물관」이 발간한 자료 「총통부」를 보면, 총통부야말로 파란만장했던 근현대 중국사의 축소판이라는 느낌이 든다.

총통부 자리에는 1665년(淸 康熙 4년) 이래 「兩江總督署(양강총독서)」가 설치되어 있었다. 1853년 3월19일, 太平天國軍이 남경을 점령하고, 洪秀全(홍수전)이 스스로 「天王」을 칭하면서 남경은 天京이 되고, 淸의 양강총독서는 홍수전의 天王府가 되었다.

1864년 7월19일, 태평천국 수도 천경이 浙江巡撫 曾國全(증국전: 曾國藩의 동생)이 이끄는 湘軍(상군)에 의해 함락되고, 7월27일 양강총독 曾國藩(증국번)이 부임해 다시 兩江총독서가 되었다.

1911년 12월2일, 反淸 혁명군 江浙聯軍(강절연군)이 남경을 함락시켜 江浙聯軍총사령부를 설치했고, 12월13일에는 江蘇도독부로 개칭했다.

1912년 1월1일, 孫文(손문·쑨원)이 中華民國(중화민국) 임시대총통에 취임하면서 이곳을 中華民國 임시대총통부로 삼았다. 그러나 손문을 비롯한 혁명파는 국정을 담당할 태세도 무력도 돈도 부족했다.
총통부內 孫文의 집무실.

손문은 당시 北洋군벌을 배경으로 실권을 장악하고 있던 漢族 출신 袁世凱(원세개·위안스카이)와 협상했다. 1911년 10월의 신해혁명 직후 淸朝의 총리대신으로 기용되었던 원세개는 손문과의 화의가 성립되자 宣統帝(선통제)를 협박해 퇴위시키고, 1912년 3월10일 中華民國 초대 大總統(대총통)이 되었다.

손문이 임시대총통을 사임한 후 이곳은 南京留守府(남경유수부)로 격하되었다. 4월1일, 대총통 원세개는 혁명파인 黃興(황흥)을 남경유수로 임명했다. 원세개의 독주가 거듭되자 황흥은 남경유수직을 버렸다. 6월1일, 北洋군벌정부는 南京유수부를 江蘇도독부로 개칭했다.
南京 총통부內 蔣介石 대총통 집무실.

1913년 봄에 실시된 중·참의원 선거에서 국민당이 제1당이 되자 원세개는 3월20일 의회주의 노선을 이끌던 宋敎仁(송교인)을 上海에서 암살했다. 원세개는 황제가 되려는 야심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같은 해 7월5일, 황흥이 南京으로 진격해 江蘇의 독립을 선언하고, 江蘇도독부를 江蘇討袁총사령부로 개칭했다.

1914년 6월30일, 원세개의 직계 군벌 豊國璋(풍국장)이 南京에 진주하자 이곳은 將軍行署(장군행서)로 개칭되었다. 1925년 풍국장이 부총통이 되자 장군행서는 副總統府(부총통부)가 되었다.

원세개는 1915년 12월 황제로 즉위했으나 反帝討袁(반제토원)의 기세가 높아지자 1916년 3월 帝制를 스스로 취소하고, 같은해 6월 울분 속에 죽었다. 원세개가 사망하자 그의 휘하 군벌들이 분열하여 패권을 다투었다.
孔子를 모시는 南京夫子廟.

1927년 4월18일, 蔣介石(장개석)의 북벌군이 南京을 공격 함락시켜 수도로 삼고, 國民政府를 수립했다. 국민혁명군 총사령 蔣介石은 이곳에 국민정부군사위원회를 설치했다. 장개석은 1927~1928년 계속 북벌에 나서 군벌들을 일소했다.

1937년 12월1일, 국민정부는 일본군의 침략으로 重慶(중경·충칭)으로 천도했다. 1945년 8월15일 군국주의 日本이 항복했다. 1946년 5월5일, 국민정부는 南京으로 환도했다. 1948년 5월20일, 장개석이 대총통에 취임하면서 이곳을 「中華民國總統府」로 개칭했다.

1949년 4월23일, 劉伯承(유백승), 鄧小平(등소평), 陳毅(진의) 등이 지휘한 중국인민해방군(중공군)이 양자강을 건너 南京의 중화민국 총통부를 점령했다.

이같이 파란만장한 근현대사를 반영하려는 뜻인지, 총통부에는 국민정부·중화민국 시기의 자료뿐만 아니라 太平天國(1853`~1864), 태평천국을 패망시킨 曾國藩(증국번)의 湘軍, 中共軍의 南京 함락 등의 관련자료가 함께 전시되고 있다.
南京의 도심을 흐르는 秦淮河.


중국의 儒敎와 내셔널리즘

총통부에 이어 「南京 夫子廟(부자묘)」에 들렀다. 이곳은 儒學(유학)의 시조인 孔子(공자)의 사당이 있는 곳이다. 여기서 필자는 유학과 太平天國 사이의 惡緣(악연)을 생각했다.

태평천국은 「滅滿興漢(멸만흥한)」을 구호로 삼아 ?髮(변발)을 폐지하고, 漢族의 민족주의를 고취하여 민심을 얻으려고 했다. 또한 그 지도자 홍수전은 예수의 동생으로 자처하면서 노예매매와 여성의 纏足(전족)을 금지해 歐美人(구미인)의 동정을 얻으려고 했다.
정조를 지킨 여인 莫愁의 이름을 딴 莫愁湖.

어떻든 淸朝는 150만 명 미만의 滿洲族이 3억5000만 명의 漢族 위에 군림했던 만큼 불합리한 체제인 것만은 틀림없다. 이런 앙시앵 레짐(舊體制)을 타도하겠다는 것이 태평천국의 명분이었다.

그런데도 농민의용군(鄕勇)을 일으켜 태평천국을 패망시킨 인물들은 漢族 출신의 儒學관료들이었다. 湘軍(상군)의 曾國藩과 淮軍(회군)의 李鴻章(이홍장)이 바로 그들이다. 증국번과 이홍장은 유학을 열심히 공부해 進士科에 합격해 출세가도를 달렸다. 중국사를 보면 한번 進士가 된 者가 그를 進士로 출세시켜 준 왕조에 충성했던 것은 비단 증국번·이홍장의 사례뿐만이 아니다.

古典儒學의 대가 王國維(왕국유)도 「淸朝의 遺民(유민)」임을 자임하면서 최후에는 ?髮의 모습으로 호수에 몸을 던져 청조와 운명을 함께했다. 몽골족의 元이 망할 때도 역시 漢族 출신의 進士 등이 자살한 사례가 있다. 그렇다면 不事二君 등 유교의 가치체계는 내셔널리즘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雨花臺에 있는 烈士陵. 국민당 정부가 南京에 소재하던 시절 약 10만 명의 공산당원 및 反국민당 인사가 처형된 곳이다.

夫子廟 주변은 전통 가옥과 상점이 밀집한 거리로 이름 높다. 이곳의 작은 하천 秦淮河(진회하)에는 놀잇배들이 다니는 등 운치는 있지만, 綠藻(녹조)현상이 뚜렷했다.

점심 후 필자는 시가지 서남쪽에 위치한 예쁜 莫愁湖(막수호)에 들러 제 손으로 핸들을 잡는 작은 통통배를 탔다(30분간 용선료 20위안). 막수호는 莫愁라는 여성의 정절을 기리기 위해 명명된 것이다. 莫愁의 남편은 징집되어 전쟁터로 나갔는데, 지방관리의 아들이 그녀를 기어이 첩으로 삼으려 하자 그녀는 이 호수에 몸을 던져 자결했다고 한다. 莫愁라는 이름 그대로 그녀는 더 이상 걱정을 하지 않게 되었다.

이어 필자는 南京城 밖 남쪽에 위치한 雨花臺(우화대)를 찾아갔다. 6세기 전반 梁武帝(양무제)의 시대, 雲光法師(운광법사)라는 승려가 이 언덕에서 경전을 講(강)할 때 하늘에서 꽃이 비와 함께 떨어져 「雨花臺」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이 산에서만 생산되는 독특한 줄무늬의 돌은 雨花石이라고 불려서 관광상품이 되고 있다.
주춧돌 따위만 남아 있는 明의 南京 故宮.

우화대는 복잡한 시가지와는 달리 사방이 확 트인 너른 臺地(대지)이다. 중화민국의 南京 수도 시절, 이곳은 처형장으로 쓰였다. 1927년 제1차 國共合作(국공합작)이 결렬되면서 공산당원 및 反국민당 세력에 대한 숙청의 바람이 불었다. 이후 이곳에서 처형된 사람은 1949년 국민당 정부가 대륙에서 대만으로 철수할 때까지 약 10만 명에 달했다고 한다.

지금 이곳은 「우화대烈士陵園(열사릉원)」으로 불리고 있다. 묘 앞 기념비에는 「死難烈士萬歲」이라는 毛澤東의 글씨가 새겨 있다.

남경 도심지로 北上하는 길에 瑞金路(서금로)에 위치한 明의 故宮에 들렀다. 남경은 長安 및 北京처럼 평지에 건설된 수도가 아니어서 궁궐도 성내의 동남쪽에 세워졌다. 明의 고궁은 燕雀湖(연작호)라는 호수를 매립해 그 위에 세운 것이다. 남경은 그럴 만큼 호수가 많은 곳이다.

홍무 6년(1373)에 준공했던 明의 고궁은 준공 30년 후에 明 태조를 후계한 그의 손자 建文帝(건문제)가 스스로 궁전에 불을 질러 폐허화했다. 숙부인 연왕 朱?(주체=永樂帝)가 거느린 쿠데타군의 공격을 받은 建文帝는 스스로 불속에 뛰어들어 그의 시체조차 발견되지 않았다.

조선왕조의 端宗哀史(단종애사)보다 더욱 非情한 찬탈의 현장에서는 시민들이 형형색색의 연을 날리고 있었다. 건물이 모두 소실되어 주춧돌 정도만 남아 있는 만큼 연줄이 걸릴 염려가 별로 없는 곳이다.


「중앙에서 높은 사람 온다」고 公路 막아
국민정부 총사령 蔣介石의 北伐 때 전몰한 장병들을 추모하는 탑을 세운 靈谷寺 입구. 지붕 밑에 國民黨旗가 새겨 있다.

10월26일, 쾌청하지는 않았지만, 사진촬영을 할 수 있을 만한 날씨였다. 자금산은 표고 480m로 鍾山(종산)이라고도 부른다. 남경을 조망하기에는 가장 알맞은 곳이다. 자금산 정상에 오르는 것이 순서겠지만, 아직 안개가 자욱했다. 점심 후에 오르기로 했다.

「鍾山風景名勝區(종산풍경명승구)」의 맨 동쪽에 위치한 靈谷寺(영곡사)부터 찾아갔다. 영곡사 입구 매표소에서 중산릉·명효릉 등 종산풍경명승구의 유적을 모두 관람하고, 그 명승지 사이를 운항하는 관광용 무개차에 승차할 수 있는 130위안짜리 입장권을 샀다.

영곡사는 梁무제가 세웠던 수백 개 절 가운데 하나로서 처음엔 開善寺(개선사)로 불리던 것이 明代에 영곡사로 개칭되었다. 병란이 잦았던 南京인 만큼 그것이 성외에 세워졌다고 해도 그대로 남아 있지 않다.

녹음 짙은 숲에 둘러싸인 경내는 방문자의 기분을 상쾌하게 한다. 다른 전각들은 태평천국 전쟁 때 모두 불타고, 명대에 건축한 無梁殿(무량전)만 남아 있다. 대들보(梁)가 없는(無) 전각이라는 뜻이다.

경내를 걸으면 인도의 선승 達磨大師(달마대사)와 好佛의 황제 梁武帝(양무제: 在位 502~549) 사이에 오간 문답이 생각난다.

梁무제 시대는 중국 불교의 절정기였다. 당시 남경에 있던 사찰의 수는 무려 700개를 넘어섰다. 梁무제가 자신이 건설한 사찰의 수를 자랑했더니 달마대사는 『쓸데없는 일을 했다』고 말하고, 표연히 그 자리를 떠났다고 한다.

영곡사 후원에는 1926~1928년 국민혁명군 총사령 蔣介石의 北伐(북벌) 때 전몰한 장병들을 추모하는 기념탑 2개가 우뚝 서 있다.

영곡사 가까이에는 옻나무만을 심어 놓은 漆園(칠원)이 있다. 明 초기에, 중국의 연해지역에 침범해 약탈하던 倭寇(왜구)에 대비해 많은 木造의 兵船을 건조했는데, 이곳에서 생산된 옻은 兵船의 防水劑(방수제)로 사용되었다.

오전 9시50분, 영곡사 앞에서 관광용 무개버스를 타고 중산릉 앞을 지나 明孝陵으로 향하는 길에 경찰 순찰차 한 대가 중앙선에 정차해 놓고 차량의 통행을 막고 있었다. 경찰관과 뭔가 얘기를 하고 돌아온 무개버스 운전사에게 『무슨 일인가』하고 물었더니 『중앙당 간부가 온다』고 대답했다. 운전사는 무개버스를 되돌려 영곡사 쪽으로 원위치했다.

당초, 필자는 영곡사에 이어 명효릉을 들르고 나서 자금산의 서쪽 입구로 가서 케이블카를 타고 자금산 정상에 올라 南京의 지형을 살핀 다음 등산로를 따라 내려오면서 中山書院-孫中山기념관 등을 거쳐 中山陵(중산릉)을 돌아볼 작정이었다. 「중앙당의 높은 사람」 하나가 온다고 해서 公路를 막고 여러 관광객의 일정을 망치는 일쯤은 共産黨 일당체제에서는 茶飯事(다반사)인 듯하다.


孫文의 무덤 中山陵과 明 태조의 孝陵

필자는 모르는 산비탈길 1km를 더 내려가기보다 200m쯤 떨어진 中山陵 입구로 올라갔다. 자금산 기슭에는 많은 유적이 있지만, 그중에서 가장 인기 있는 곳은 孫文의 묘소인 中山陵이다. 손문은 國·共 양측이 모두 받드는 「중국 근대화 혁명의 아버지」이다.

손문은 1925년 3월12일, 군벌정권 段祺瑞(단기서)의 협조요청을 받고 그들과 협상하기 위해 北京에 갔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사망했는데, 그의 유해는 4년 후에 南京으로 돌아왔다.

중산릉은 참으로 거대하다. 그 모습은 중국 전통 황제의 무덤 양식에 서양식을 가미했다. 긴 돌계단을 오르면서 다사다난했던 혁명가의 일생을 회고한다지만, 생전에 民族·民權·民生의 三民主義(삼민주의)를 제창한 손문의 무덤으로서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특히 마지막 구간의 계단 경사가 무려 40。가량 되어 누구든지 이곳을 참배하려면 下人처럼 허리와 고개를 잔뜩 숙이고 오를 수밖에 없다.
「中國 근대혁명의 아버지」孫文의 무덤「中山陵」. 참배도의 막바지 계단이 매우 가파르다.

중산릉에서 내려오면서 필자는 연방 사진기자들의 카메라 세례를 받으며 중산릉으로 오르는 VIP의 행렬과 마주쳤다. 양복 차림의 VIP는 매우 엄숙한 얼굴이었다. 필자의 중국어가 짧았는지, 한 수행원에게 그가 누구인지 물었지만, 끝내 대답을 얻지 못했다. 다음날인 10월27일 「南京晨報(남경신보)」에는 『梁保華(양보화) 동지를 江蘇省委 書記(강소성위 서기)로 임명했다』는 中共中央(중공중앙)의 결정이 보도되었다.

중산릉을 둘러본 필자는 1km 서쪽에 있는 明孝陵(명효릉)으로 이동했다. 명효릉은 1398년 71세로 사망한 明의 태조 朱元璋(주원장)의 무덤이다. 필자와 통역 趙군은 입구 매점에서 라면으로 점심을 때우고 효릉으로 올라갔다.

주원장은 흉년에 그의 부모가 굶어 죽었던 最빈곤층에서 성장했으며, 그 후 탁발승을 거쳐 반란조직인 紅巾軍(홍건군)에 들어가 곧 두각을 나타냈고, 드디어 황제가 된 인물이다. 그러나 제3대 황제 永樂帝(영락제)가 北京으로 천도해 그 이후 황제의 능묘는 모두 北京 근교에 있는데, 「明 13陵」이 바로 그것이다. 제2대 황제 建文帝는 明代에서는 정통황제로 인정되지 않고, 또한 난리 중에 유해가 발견되지 않고 능묘도 만들어지지 않아 南京에 있는 明 황제의 무덤은 孝陵 하나뿐이다.

明효릉에는 장려한 전각들이 세워졌지만, 19세기 중반 太平天國(태평천국) 전쟁 때 파괴되어 지금은 參道(참도)에 6將軍, 4文官의 石人像 이외에 말·사자·낙타·해태·코끼리·기린 6쌍의 石獸(석수)만 남아 있을 뿐이다.


南京의 지리적 조건
明代 南京城의 성벽.

필자는 통역 趙군과 함께 자금산 서쪽 입구 쪽에서 케이블카를 타고(요금 60위안)을 타고 자금산의 8부능선에 올랐다. 자금산의 정상에서 南京시가지를 내려다보니 자욱한 안개와 먼지에 휩싸여 시계가 불량했지만, 윤곽은 잡혔다.

중국 최대의 하천인 양자강이 ?陽湖(파양호) 부근에서 북동으로 흘러서 안휘성을 가로지르고, 강소성에 들어와서 동쪽으로 꺾어지는 지점의 남동쪽에 南京市가 있다. 서쪽과 북쪽은 長江이 감싸고 동쪽과 남쪽은 구릉으로 둘러싸여 있다. 군사지리에 관한 지식이 없는 사람이라도 자금산에 오르기만 하면 왜 남경이 要害(요해)의 땅인지 알 수 있다. 이곳이 江南의 중심지가 된 까닭이기도 하다.

춘추시대에 이곳은 吳의 영토였지만, 기원전 473년 吳는 越에 멸망당했다. 吳를 멸망시킨 越王 勾踐(월왕 구천)의 名참모 范?(범려)가 이 땅에 처음으로 성을 쌓았다고 한다.

이런 越도 서쪽의 강국 楚에 멸망당했다. 楚의 威王(재위 BC 339~319)의 시대라고 전해진다. 楚는 이 땅에 王氣(왕기)가 서려 있다고 해서 황금을 묻어 왕기를 눌렀다고 한다. 요즘도 漢字문화권 국가에서는 건축을 시작하기 전에 地鎭祭(지진제)를 지내는 풍습이 있다.
삼국시대 孫權의 근거지였던 南京의 石頭城.

楚나라는 이곳에 金陵邑(금릉읍)이라는 이름을 붙였는데, 이는 바로 地鎭祭에서 유래한다. 지금도 금릉은 남경의 별명으로 사용된다. 秦의 시황제는 중국을 통일한 후 이곳을 ?陵(말릉)이라고 改名했다. 이 땅에 王氣가 있다는 속설을 꺼려 했기 때문이다.

진시황은 王氣를 끊기 위해 구릉을 절단했다. ?(말)은 「말을 먹이는 馬草」라는 뜻이다. 마초처럼 구릉을 잘게 썰었다고 해서 ?陵이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明의 건국 후 지금의 南京은 應天府(응천부)로 개명되었다. 明 태조 주원장은 넷째 아들 朱?(주체)를 燕王(연왕)으로 封해 지금의 北京 일대를 鎭守(진수)시켰다. 明 태조가 사망할 때 황태자는 먼저 죽은 관계로 황태손인 朱允(주윤문)이 즉위해 建文帝가 되었다. 그런데 燕王 주체가 반란을 일으켜 조카인 建문제를 공격해 죽이고, 스스로 제위에 올랐다. 이 사람이 永樂帝(영락제)이다.

영락 19년(1421), 영락제는 자기의 근거지였던 北京으로 천도하고, 이때까지 수도였던 應天府를 南京으로 개칭했다. 明의 건국 후 50여 년 만의 일이었다. 현재 남경 곳곳에 남아 있는 우람한 성벽은 明代에 쌓은 것이다.

자금산에서 내려와 南京박물관으로 향했다. 국민당 정부가 대만으로 철수할 때 국보급 등의 유물을 모두 가져가 진작에 「2급 박물관」이라는 소문이 있어 크게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내부 수리로 휴관 중이었다.


劉備가 孫權에게 南京으로 근거를 옮기라고 권유
南京의 中山부두. 1938년 일본군의 남경 공략 때 학살된 南京시민과 중국군의 피로 물들었던 곳이다.

10월27일 아침 시가지 서북쪽 淸凉山(청량산) 기슭에 위치한 石頭城(석두성)을 찾아갔다. 석두성은 삼국시대 吳의 창업주 孫權(손권)의 도읍지다.

서기 208년, 孫權과 劉備(유비)의 동맹군은 남진하던 曹操(조조)의 대군을 揚子江(양자강=長江) 중류 赤壁(적벽)에서 크게 무찔렀다. 赤壁大戰은 기마전에 강했던 조조가 「南船北馬」를 무시하고 말을 버리고 배를 타고 江南을 먹으려고 했다가 水戰에 익숙했던 손권·유비에게 참패한 역사상의 대결전이었다.

적벽대전의 다음해인 209년, 조조의 복수전을 대비해 손권의 여동생과 유비가 결혼해 동맹을 강화했다. 이어 210년, 유비는 스스로 처형인 손권을 방문했다. 그 무렵, 손권은 京口(경구)라는 곳을 본거지로 삼고 있었다. 경구는 지금의 鎭江市다. 鎭江은 말릉(지금의 남경) 동쪽 70km에 위치해 있다. 양자강의 물길을 타고 내려왔던 만큼 유비는 당연히 말릉을 지나왔을 것이다. 유비는 손권에게 京口보다 말릉 쪽이 근거지로 좋을 것 같다는 견해를 피력했다.
운무에 싸인 양자강.

이에 앞서 손권은 그의 참모 張紘(장굉) 등으로부터 말릉으로 본거를 옮겨야 한다는 건의를 받고 있었다. 後漢 獻帝(헌제)의 재위시기인 建安 17년(212), 손권은 이곳에 석두성을 쌓고, 본거를 옮겼다. 동시에 말릉이란 이름을 「建業(건업)」으로 바꾸었다. 業을 세우겠다는 야심적인 命名이었다.

남경성 서북쪽 ?江門(읍강문)을 나서면 下關(하관)이고 여기에 中山부두가 있다. 이 일대가 1937년 12월 일본군에 의해 자행된 남경학살의 현장 중에서도 가장 처참했던 곳이다. 남경시민과 패잔병이 中山부두에서 피란선을 타려고 몰려나왔기 때문이다. 그때 중산부두 앞 양자강은 남경시민의 피로 시뻘겋게 물들었다고 한다. 남경대학살은 뒤에서 재론할 것이다.

양자강 남안 中山부두에서 페리를 타고 양자강 북안의 浦口나루로 건너갔다(배삯 2위안). 南京長江大橋(남경장강대교)를 도보로 건너면서 양자강을 관찰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浦口나루에서 오토바이를 3륜차로 개조한 「馬自達(마자달·마츠타)」을 타고 장강대교가 위치한 浦鎭(포진)까지 갔다(요금 7위안). 여기서 엘리베이터를 타고(요금 1위안) 장강대교 위로 올라갔다.


도보로 長江대교를 건너면서…
양자강 북안의 浦口 부두.

南京長江대교는 1층이 철도교, 2층이 4차선의 公路橋(공로교)로서 2중복합교의 모습이다. 철도교는 6700여m, 공로교는 4500m이다.

公路橋 양쪽의 人道(인도)는 각각 폭 3m 정도였다. 人道라고 하지만, 오토바이와 자전거가 보행자와 섞여 다니는 길이다. 자동차 배기가스와 소음으로 눈·코·귀가 괴로울 지경이었다. 하염없이 걷고 있는 필자의 옆구리를 오토바이와 자전거 운전자들은 팔꿈치로 툭툭 치면서 지나가기 일쑤였다.

그래도 양자강을 건너는 일은 감동적이었다. 양자강은 중국사의 결정적 현장이기 때문이다. 蘇東坡(소동파)는 그의 「赤壁懷古(적벽회고)」에서 『長江이 東으로 흘러 거친 물결에 千古의 영웅들을 모두 쓸어냈고』 라고 읊었다. 뒷 강물이 앞 강물을 쳤다는 얘기일까?

특히 辛亥(신해)의 해인 1911년, 혁명군은 양자강의 요충인 武昌, 南京, 上海를 함락시키고 南京에 임시정부를 수립했다. 이후에도 우여곡절을 겪긴 했지만, 혁명의 열기는 점차 중국 각지로 파급되었다.
이륜차를 개조한 삼륜택시「馬自達」.

南京장강대교의 건설은 毛澤東이 내건 自力更生(자력갱생) 노선의 샘플과 같은 공사였다. 소련의 기술에 의해 건설된 武漢(무한·우한), 重慶(중경·충칭)의 장강대교와는 달리 100%로 중국의 기술로 지어졌기 때문이다. 문화대혁명 시기인 1968년 소련 기술자가 철수한 상황에서 特殊鋼(특수강)의 조달이 어려웠지만, 기술자·노동자의 창의로써 특수강 생산에 성공해 준공했다고 한다.

장강대교의 人道를 4km쯤 걸으니 지상으로 내려가는 엘리베이터가 있었다. 그런데 요금은 15위안(한화 약 2000원)이었다. 다리 위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요금(1위안)의 무려 15배였다. 그 이유를 물으니 다리 밑에 수변공원이 있는데, 그 입장료와 합친 요금이라 했다.

필자는 엘리베이터를 타지 않고, 다시 지독한 자동차 배기가스를 맡으며 1km쯤 걸어서 南京장강대교 구역을 빠져나왔다.

바로 그곳에는 「劉伯承(유백승) 동지의 像」이 세워져 있다. 유백승이라면 인민해방군(중공군)의 銃前委員長(총전위원장)으로서 鄧小平, 陳毅(진의) 등과 함께 1949년 4월23일 양자강을 渡江(도강)하여 남경을 함락시킨 인물이다.
차량으로 붐비는 南京長江大橋와 自力更生의 상징물.

양자강 남안의 조선소.


남경대학살의 현장
1938년 12월 중화민국의 수도 南京城을 함락시킨 일본군이「만세」를 부르고 있다.

여기서 필자는 지프에 올라 막수호와 양자강 사이에 위치한 「南京大屠殺記念館(남경대도살기념관)」으로 갔지만, 확장 공사 중이었다. 1937년 12월13일 南京을 점령한 일본군에 의해 자행한 南京시민학살은 일본인의 심성을 의심할 만한 만행이었다. 학살된 중국인 수에 대해 중국 측은 30만~40만 명이라고 말하고, 일본 측은 3만~5만 명 정도였다고 추정하고 있다.

기념관 소재지는 양민의 유골이 대량으로 발견된 萬人坑(만인갱)이라는 구덩이가 있던 자리이다. 일본군은 항복한 중국군 병사뿐만 아니라 남경시민까지 총살·참수·생매장·화형 등의 방식으로 「屠殺(도살)」했다.

당시 일본군에게 南京 공략의 목적은 남경을 점령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중국군의 전력을 소멸시키는 것이었다. 일본군은 포로가 대량 발생할 경우에 대비한 수용소, 식량과 의류, 의료단 등의 준비를 전혀 하지 않았다.

그 이유에 대해 필자 나름으로는 20세기 일본군이 13세기 몽골군의 흉내를 낸 것이 아닌가 추측한다. 칭기즈칸의 몽골군은 항복하지 않았던 城市(성시)를 함락시키면 그 城民(성민)들을 모조리 죽여 그들의 흉폭함을 천리만리로 전파시켰다.

그 결과, 몽골군의 진격로 상에 소재한 다른 城市들은 공포에 휩싸여 칭기즈칸 군대가 당도하기만 하면 별다른 저항 없이 城門을 열고 항복하기 일쑤였다. 1937년의 南京도 일본군이 자행한 흉폭한 심리전의 희생물이었던 셈이다.

역사 속의 양자강은 때로는 사람의 핏물이 흘렀던 非情(비정)한 물길이었고, 때로는 江南의 곡창을 外侵(외침)으로부터 지켜낸 天惠의 要害(요해)였다. 양자장의 도도한 물길을 보면 우리 漢江의 아늑한 물길이 생각난다.
南京城의 中華門.


추억 속의 漢江

필자는 꼭 30년 전에 八堂(팔당)에서 광나루까지 소형 발동선을 타고 漢江을 내려와 서울로 진입한 적이 있다. 낙동강 등 우리나라의 강들은 대개 물길 양쪽에 모래밭이 넓게 형성되어 있지만, 서울 동쪽의 한강변은 모래밭 대신에 아기자기한 산들이 바짝 다가선 모습이다. 필자는 아직 한강처럼 아름다운 강을 본 적이 없다.

한강 상류에 많은 댐을 건설해 한강의 물길을 차단한 것은 5·16 혁명 이후 개발연대의 일이었다. 필자는 5·16혁명 4년 전인 1957년 처음 上京해서 우연히 마포나루의 한강을 관찰한 바 있다. 덕수궁 앞에서 孝子洞(효자동) 종점으로 가는 시내버스를 탄다는 것이 그 반대편인 麻浦(마포) 종점으로 가는 버스를 타고 가서 하차했던 것이다.

그때 마포나루에는 범선이 많이 다니고 있었다. 1960년대 말에 유행한 가요의 노랫말에서처럼 「황포돛대」는 없었고 검은색 돛대를 단 범선들만 보였다. 강변의 둑 바로 아래까지 강물이 찰랑찰랑거렸다.

西유럽 국가들은 그들의 운하를 문화·관광자원으로 삼고 계속 가꾸고 있다. 운하를 이용한 「느림의 水路」는 한국의 아름다운 山河(산하)를 그만큼 돋보이게 하는 효과가 있을 것이다.

한강·낙동강·금강을 잇고, 여기에 다시 영산강을 잇는 운하 건설은 우리나라 낙후지역의 발전에 임펙트를 가하는 일이 될 것 같다. 운하건설로 환경을 파괴할 것이라는 우리 사회 일부의 걱정은 하천의 수질·생태 개선은 관리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현실을 무시하고, 또한 한국의 토목기술을 얕잡아 보는 것이다.

우리는 中國 정부가 현재 진행하고 있는 京杭대운하와 양자강의 공원화 및 수질개선 작업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강들을 그냥 놀리는 것은 귀중한 자원을 방치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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