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조선 기사

鄭淳台 기자의 역사현장 탐사
「京釜운하」의 뱃길 南漢江-새재-영강-洛東江

운하 논의로 들뜬 京釜水路를 가다!

글 정순태 기자  2008-0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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驪州의 梨浦나루와 朝浦나루, 忠州의 可興倉과 木溪나루, 京釜運河의 鳥嶺터널 구간, 聞慶의 고모산성과 토끼비리, 尙州의 영강과 洛東나루, 義城의 洛井나루의 과거 그리고 현재. 산업화의 대열에서 뒤진 내륙지역 사람들이 운하 건설에 거는 기대를 들어 보았다.


경부운하 남한강 水系


서울近郊 강변에 난립한 러브호텔과 음식점
갑문이 설치될 忠州 조정지댐. 조정지댐 갑문을 통과한 배는 남한강-달래강을 지나 충주리프트에서 대형 엘리베이터를 타고 조령 터널을 통과한다는 계획이다.

李明博(이명박) 당선자의 大選 공약인 한반도대운하 건설을 둘러싼 찬반의 논란이 뜨겁다. 한반도대운하의 핵심은 漢江(한강)과 洛東江(낙동강)의 물길을 잇는 京釜(경부)운하다. 경부운하는 한강 구간 200km, 낙동강 구간 300km, 그리고 한강과 낙동강 사이를 연결하는 조령 구간 40km 등 총연장 540km에 달한다. 경부운하계획의 길목으로 땅값이 40~50% 폭등한 여주-충주-문경-상주를 둘러보기로 했다.

43번 국도를 타고 남한산성(廣州市 中部面) 앞을 지나 樊川里(번천리) 네거리까지 내려와 45번 국도를 조금 北上한 후 馬道里(마도리)에서 우회전해 88번 지방도로로 東進(동진)하면 곧 수도권에 식수를 공급하는 八堂湖(팔당호)의 남단 부분이다.

팔당호의 남단 부분에 다리가 걸려 있는데, 이 다리 正北 6km 지점에 두물머리(兩水里)가 있다. 두물머리에서 北漢江과 南漢江이 합쳐져 漢江을 이루며 팔당댐 水門을 거쳐 서울로 흘러내린다. 두물머리 바로 옆 陵內里(능내리) 강변에는 500여 권의 저서를 남긴 大실학자 丁若鏞(정약용)의 生家가 있다.

한반도대운하연구회(이하 「대운하연구회」라고 표기)의 계획에 의하면 팔당댐에 閘門(갑문)을 설치해 선박이 드나들 수 있게 한다. 갑문은 높낮이가 큰 水面으로 선박을 오르내리게 하는 물문이다. 하류에서 팔당댐 갑문을 통과한 다음에 만나는 첫 內港이 兩水里터미널이다. 그 상류에는 河南터미널(하남시 신장동)이 건설된다. 터미널은 운하의 內港(내항)이다(「경부운하 漢江 구간 흐름도」 참조).

팔당호의 남단부에 걸린 다리를 건너면 退村(퇴촌)이다. 퇴촌을 거쳐 88번 지방도로를 따라 東進하면 남한강변(廣州市의 江下面과 江上面)을 따라 러브호텔과 음식점이 난립해 있다. 러브호텔들의 商號(상호)가 대부분 세계 유명도시나 유흥지의 이름을 딴 것들이어서 마치 세계여행을 하고 있는 듯하지만, 아무래도 우리 山河와는 어울리지 않아 낯이 좀 뜨겁다. 강변의 모텔이나 음식점을 단지화하고 그 下水를 철저히 정화해야 할 것 같다.

江上面에서 남한강 위에 걸린 양평대교를 건너면 양평터미널이 들어설 楊平邑(양평읍)이다. 대운하연구회의 試案(시안)에 따르면 양평대교 밑에 양평터미널이 건설된다. 주위에 스키장과 골프장이 있어 이와 연계된 관광개발이 기대되고 있다.

양평읍에서 37번 국도를 타고 남하했지만, 介軍面(개군면: 양평군)에 이르기까지는 남한강이 보이지 않는다. 「양평--맑은 물 사랑」 등의 캐치프레이즈를 내걸고 있지만, 그 물에 쉽게 다가갈 수 있는 길을 내지 못했다. 37번 국도는 여주군의 북단인 大神面(대신면)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강변에 바짝 다가간다.


남한강 물류의 요충 梨浦나루
파사산성. 남한강의 뱃길을 지키는 요새이다.

대운하연구회의 시안에 의하면 대신면 강변에 여주터미널이 설치된다. 여주터미널에는 여객터미널과 화물터미널을 함께 둔다. 농산물 집하지로서 여주의 명성을 되찾게 하고, 12km 서쪽 利川市에 소재한 하이닉스, OB맥주, 진로 등 생산공장의 제품을 운송한다는 구상이다. 여주터미널 상류에는 여주갑문이 축조된다.

대신면에 들어서면 婆娑山(파사산·해발 230m)의 정상부에 축조된 파사산성이 보인다. 파사산성에 대한 문헌 기록은 「조선왕조실록」 선조 28년(1595) 조에 처음 보이고, 金正浩(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도 나타나 있다.

파사산성은 남한강의 물길을 지키는 요충이었다. 파사산성에 오르면 주위에 산봉우리가 없어 사방이 트여 있고, 성곽의 일부가 남한강 연안까지 돌출되어 있어 남한강의 상·하류를 한눈에 감시할 수 있다.

임진왜란 때의 名재상 柳成龍(류성룡)은 『京畿水營(경기수영)에 소속된 여주·지평(지금의 양평군) 출신의 水軍은 除番(제번)하여 파사성에 소속시켜 상류 쪽을 방비해야 할 것』이라고 상주했다(「조선왕조실록」 宣祖 30년 3월9일 條). 宣祖(선조)도 『한강을 지키지 않다가 적이 都城(도성) 아래까지 이르러 포위당한 뒤에야 도성을 지키려 한다면 그 계책은 잘못된 것』이라고 가납했다. 이에 승려인 도총섭 義嚴(의엄)이 파사산성을 수축하고, 여주·이천·양주·광주의 田稅(전세) 중 일부(3000여 석)를 군량으로 비축하는 한편 屯田(둔전)을 개척했다.

오전 10시, 대신면 천서리 막국수村 앞에서 梨浦大橋(이포대교)를 건너 金沙面(금사면) 쪽 음식점 앞 빈 터에 주차시켰다. 이곳 토박이 김태훈씨(두림건설 대표이사)와 만나기로 한 약속시간보다 30분 먼저 도착했다.

팔당댐이 축조되기 전까지만 해도 이곳에 이포나루가 있었다. 이포나루는 漢江 5大 나루 중 하나였다. 「驪州郡史(여주군사)」에 의하면 이포나루에는 장시가 들어섰다. 여기서 거래된 품목은 漢江 하류에서 올라오는 소금·새우젓·어염·건어 등과, 상류에서 내려오는 미곡·콩·참깨·담배·옹기·임산물 등이었다.

조선시대에는 한강 연안 7개소에 水站轉運別監(수참전운별감)을 두었다. 그중 여주지역에는 2개 水站(이포수참·여강수참)이 있었다. 이포수참은 站船(참선) 15척과 나룻배(渡船)를 보유했다.
이포대교 위에서 내려다본 南漢江. 오른쪽 산 위에 남한강의 물길을 지켰던 파사산성이 있다.

이포대교 위에서 청둥오리 등의 철새떼를 촬영하고 있는데, 김태훈 대표가 다가왔다. 다음은 金대표와의 문답이다.

『팔당댐을 막기 전인 1960년대만 해도 이포나루 일대엔 달팽이, 조개, 민물홍합, 모래무지, 장어, 자라가 엄청 많이 잡혔어요』

―달팽이라니요, 여기선 달팽이도 먹나요.

『이곳에선 올갱이를 달팽이라고 해요』

―겨울철이지만 강물이 많고, 깨끗하게 보이는군요.

『어릴 적 제가 여기에 헤엄치러 올 때에 비하면 지금은 물이 더럽고, 얕아졌죠. 이제, 강바닥에 汚泥(오니)가 쌓이고 쌓여 밟으면 미끌미끌합니다』

―여기 특산물은 무엇입니까.

『저쪽 대신면의 땅콩과 고구마, 이쪽 금사리의 「벌꿀 수정 참외」는 전국적으로 유명하죠. 중국산 땅콩이 들어오면서 천서리(대신면) 강변 땅콩밭의 경기는 예전만 못해요』


『여주쌀밥은 고추장하고만 비벼 먹어도』
安東金氏 세도가 좌근·병기 父子의 別墅(이천시 백사면).

―그럼 여주 사람들은 무얼 먹고 삽니까.

『여주·이천은 쌀농사를 많이 짓잖아요. 여주·이천 쌀밥은 기름이 자르르 흘러 고추장하고만 비벼 먹어도 맛있어요』

―여주 땅은 매우 비옥하게 보입니다.

『조선 말기 勢道政治(세도정치)를 했던 安東김씨의 世居地(세거지)로서 그들의 田莊(전장)이 금사면·대신면(여주군)과 栢沙面(백사면·이천시)에 넓게 퍼져 있었다고 합디다. 그때는 남한강 뱃길이 열려 있었으니 물류가 원활했겠죠. 세도가 金左根(김좌근)·金炳冀(김병기) 父子(부자)의 시골집과 무덤은 백사면에 아직 남아 있습니다』

김좌근이라면 純祖(순조) 때 安東김씨의 세도정치를 개막시킨 金祖淳(김조순)의 아들로서 벼슬이 영의정에 이르렀고, 김병기는 총융사·훈련대장·금영대장 등을 역임하여 병권을 장악하고 그 뒤 이조판서·좌찬성에 올랐던 인물이다. 김좌근·김병기 父子는 흥선대원군의 집권으로 실각했다. 安東김씨의 세도정치 60년은 이로써 종말을 고했다.

필자는 김태훈 대표가 운전하는 지프를 타고 금사면의 바로 이웃에 위치한 백사면 내존리로 가서 김좌근·김병기의 99칸 古家를 둘러보았다. 빈 집이지만 세도가의 別墅(별서)답게 번듯한 모습이다. 뒷산에 있었던 김좌근-김병기 父子의 무덤을 찾아갔지만, 어디론가 移葬(이장)해 버려 그 흔적만 남아 있다.

금사면에는 거란족의 침입을 외교담판으로 물리치고 압록강 남안 江東6주의 땅을 회복한 徐熙(서희), 동학 제2대 교주 崔時亨(최시형), 金玉均(김옥균)·朴泳孝(박영효)와 함께 甲申政變(갑신정변)을 주도했던 洪英植(홍영식) 등 역사인물의 묘소가 많다.

홍영식은 1884년 12월, 郵政局(우정국) 창설을 주도해 그 總辦(총판)이 되고, 事大黨(사대당) 정권의 6조 판서와 대관들이 초청된 開局 연회장에서 쿠데타를 일으켰다. 이때 開化黨(개화당)의 자객이 閔妃(민비)의 친정 조카이며 右營使로서 병권을 장악하고 있던 閔泳翊(민영익)에게 치명상을 입혔다.

홍영식은 閔妃 등 事大黨의 요청으로 開化黨 정권을 깨기 위해 창덕궁에 침입한 淸軍의 창칼을 맞고 죽었다. 그때 그의 동지들은 모두 일본공사관으로 피신한 뒤 일본으로 망명했지만, 그는 끝까지 高宗 곁을 떠나지 않았다. 이로써 開化黨 정권은 「3일天下」로 끝났지만, 홍영식과 민비-민영익이 모두 여주 출신으로 고향사람들끼리 피의 정권투쟁을 벌였던 것이다.
모터보트에서 바라본 여주대교. 다리 밑에 옛 朝浦가 있었다.


『뱃길이 트여야 여주가 벌떡 선다』
세종대왕.

낮 12시, 이포나루를 건너가 대신면 천서리 막국수집에서 임창선 前 군수를 만났다. 林 前 군수는 여주노인회장을 지낸 吉善均(길선균)옹과 郡의원을 지낸 李容達옹, 여주뱃길회장 길병호씨와 함께 왔다. 여주군의 원로들은 이포나루의 한창 때를 회고했다.

『이 막국수촌에는 기생집들이 번성했어요. 漢陽(한양)에서 기생들을 배치할 때 여주읍에는 2류, 이포나루에는 1류를 보냈죠』

『여주의 옛집들을 보면 모두 번듯합니다. 왜냐고요? 홍수가 나면 상류에서 뗏목이 흘러내려 강변에서 끄집어 올렸으니까 좋은 재목을 돈 안 들이고 장만할 수 있었거든요』

『여주는 남한강 水運의 길목인데다 비옥한 농토가 있고, 砂金(사금)까지 나와 소득이 높았습니다. 뱃길이 끊긴 이후에 여주는 낙후지역이 되어 버렸어요. 뱃길이 트이면 여주가 벌떡 섭니다』

점심 후 필자는 世宗大王(세종대왕)의 무덤인 英陵(영릉)으로 가는 길에 길선균옹과 길병호씨의 안내로 능서면 왕대리에 있는 吉秀翼(길수익) 효자비각에 잠시 들렀다. 길수익이란 소년이 남한강에서 낚시를 하다 강물에 빠진 아버지를 구하려고 물속에 뛰어들었다가 父子가 함께 익사했는데, 효성에 감동한 현종 임금이 정문을 내렸다고 한다.

길선균옹은 굳이 필자를 왕대리 노인회관으로 데려갔다. 왕대리 노인회관은 후보 시절의 李明博 당선자가 남한강 답사에 나섰다가 하룻밤을 묵은 곳이라 한다. 실내에는 李明博 후보와 마을노인들이 함께 찍은 사진과 「청계 李明博」의 휘호가 액자에 담겨 걸려 있다. 淸溪(청계)는 청계천 복원 이후 사용해 온 李明博 당선자의 아호이다.

吉옹은 그가 사는 왕대리를 「왕터마을」이며 풍수지리상 최고의 明堂이라고 자랑했다. 왕대리 앞산에 世宗의 무덤 英陵, 孝宗(효종)의 무덤 寧陵(영릉)이 있는데다 고려 공민왕도 홍건적의 침입 때 이 마을을 거쳐 安東으로 피란했다고 한다.
驪州 신륵사의 東臺. 신륵사는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강변 사찰이다. 강 위에 황포돛배가 지나가고 있다.

英陵에 잠시 들렀다. 英陵의 정자각은 지붕 수리공사 중이었다. 世宗大王 탄신일인 양력 5월15일(유네스코 지정 세계문맹퇴치의 날) 숭모제전이 개최되는데, 이때 전통 다례제와 여민락(궁중아악)이 베풀어진다. 매년 10월9일 한글날에는 「세종문화 큰 잔치」가 열린다.

英陵 옆에는 孝宗이 묻힌 寧陵이 있다. 바쁜 일정이라 들르지 못했다. 孝宗은 병자호란(1636~1637) 때 심양으로 끌려가 8년간 볼모가 되었던 치욕을 씻기 위해 여주 출신 李浣(이완)을 기용해 신무기를 개발하고 소총부대를 양성하며 성지를 개수하는 등 北伐(북벌)을 기도했으나 재위 10년에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었다.

이완은 원래 文官이었으나 병법에 밝아 병자호란 때 황해도 정방산성에서 전공을 세웠고, 호란 후 仁祖(인조)의 어영대장이 되었으며, 孝宗 즉위 후에는 훈련대장으로 기용되어 군사력 증강에 힘썼다. 후일 벼슬이 우의정에 이르렀다. 이완의 묘는 영동고속도로 여주IC 서쪽에 있다.

이어 林 前 군수 댁에 들러 여주군청 관광담당 추성칠씨를 소개받았다. 추성칠씨와 함께 여주읍 강변에 있는 迎月樓(영월루)에 올라 남한강을 굽어 보았다. 영월루는 원래 여주군청 정문이었으나, 1925년 郡청사를 신축하면서 馬巖(마암) 위로 옮겨졌다.

영월루에서 여주대교 건너면 朝浦(조포)나루다. 1963년 무렵, 신륵사에 수학여행 왔던 학생 30여 명이 나룻배 전복 사고로 익사한 현장이다.

조포나루 바로 동쪽의 신륵사는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강가에 위치한 사찰이다. 또 신륵사 조사당(보물 제180호), 다층전탑(보물 제226호), 보제존자 石鐘(보물 제228호) 등 보물 7점을 보유하고 있다.

신륵사 옆에는 도자기엑스포가 열렸던 전시장이 있다. 여주는 이천·광주와 더불어 도자기의 고을이다. 매년 5월에는 「흙과 혼과 불의 조화」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여주도자기박람회를 개최한다.
홍수 때 여주읍을 지키는 馬巖. 馬巖 위에 迎月樓가 있다.

이곳으로부터 북쪽 8km에는 신라 때(764년)에 창건했다는 기록만 전할 뿐 지금은 절터만 남아 있는 高達寺址(고달사지: 사적 제382호)가 있다. 이곳에는 국보 제4호 고달사지 부도가 있다.

여주대교를 건너 영동고속도로 여주IC 들머리에 위치한 明成皇后(명성황후: 閔妃의 追贈名)의 생가에 들렀다. 肅宗(숙종) 13년에 축조된 古家인데, 1995년 원형대로 복원했다고 한다. 閔妃는 10년간 집권한 시아버지 흥선대원군을 하야시킨 후 「사실상의 주권자(영국의 지리학자 비숍의 표현)」가 되었고, 친정 쪽 驪興(여흥)민씨는 安東김씨 못지않게 권력을 독점했다. 민비는 궁중 내부 파워게임에 능숙했으나 국가를 경영할 만한 경륜이 없었다. 이것이 조선왕조의 비극이었다.

민비 생가 옆에는 「明成皇后誕降舊里」(명성황후탄강구리)라고 새겨진 碑(비)가 서 있다. 純宗(순종)이 황태자로 있을 때(1904) 非命에 죽은 모후를 기리며 쓴 글씨라고 한다. 민비는 1895년 경복궁을 습격한 미우라(三浦梧樓) 일본公使 등 무뢰배들에 의해 시해당했다(乙未事變).

읍내 중심가로 돌아와 남한강변에 있는 大老祠(대로사)에 들렀다. 老論의 거두 宋時烈을 모시는 사당이다. 朱子學(주자학)의 대가로서 효종의 北伐論을 뒷받침했던 송시열은 그를 중용했던 孝宗의 능이 보이는 이곳에서 밤늦도록 맨바닥에 앉아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孝宗 사후에 그는 南人과 격렬한 禮訟(예송)논쟁을 벌였다. 결국 南人 측의 3년 服喪說(복상설)을 물리치고, 孝宗을 「庶子(서자)」로 본 그의 주장인 1년 복상설을 관철시켰다. 그러나 肅宗 때 왕세자(후일의 景宗·경종) 책봉에 반대한 그의 상소문이 임금의 비위에 거슬려 귀양갔다가 사약을 받고 죽었다(1689).
명성황후.

귀양살이 중에도 학문과 저술에 힘쓰고 제자를 육성한 그에 대해 老論 계열에서는 「宋子」로 추앙받았지만, 南人 계열에서는 그를 마당의 강아지처럼 「워리」라고 불렀다. 사실 尊明주의에 바탕한 그의 北伐論은 淸나라가 전성시대를 구가하고 있었던 만큼 非현실적이었다. 그러나 그를 추앙하는 老論은 이후 正祖(정조) 후기의 南人 등용 시절을 제외하면 대원군 집권 직전까지 정권을 독점했다. 농토가 비옥하고 水運이 편리했던 여주는 老論系의 田莊(전장)이 많았다.

황포돛배를 타러 강변유원지로 내려갔다. 100人승 황포돛배는 한겨울엔 운항하지 않아 대신에 모터보트를 타고 「東臺」(동대)라 새겨진 신륵사 밑 절벽과 「馬巖」이라 새겨진 영월루 밑 절벽 등지를 둘러보았다. 추성칠 관광담당은 『여주읍내가 水害를 입지 않는 것은 홍수 때의 강물이 먼저 돌출한 東臺의 石壁을 때린 다음에 한결 약화된 기세로 馬巖에 부딪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겨울철이라 해가 짧다. 저녁에 강변에 있는 쌀밥집에서 임창선 前 군수, 여주의 원로들과 함께 저녁식사를 했다.

『화물을 나르는 배 안에 가마솥을 걸어 놓고 밥을 해먹었어요. 특히 고깃배들은 가마솥에 잡은 물고기를 바로 훈제할 수 있도록 불을 피웠습니다. 그래서 돛배도 연기를 내며 다녔죠』

『개구쟁이 시절 우리는 여울목에 나가 「돼지집 지어라」고 고함쳐 사공들의 화를 돋웠습니다. 무슨 뜻이냐. 배가 뒤집어지면 마치 돼지우리 같은 모습이 되잖아요. 그러면 강물에서 건질 게 많아지는 것 아닙니까』

신륵사 옆 남한강변 여관을 하룻밤 숙소로 정한 것은 탁월한 선택이었다. 달빛을 받은 驪江(여강)이 참 좋다.


「물의 고을」 여주와 忠州를 잇는 강변도로가 없다
충주시 城內洞 관아공원에 복원한 「忠淸監營門」. 충주는 충청도의 首府였다.

2007년 12월27일 오전 8시, 여주읍에서 忠州(충주)를 향해 출발했다. 대운하연구회의 시안에 따르면 경부운하는 여주갑문-原州터미널(강원도 원주시 문막읍 후용리)-忠州터미널(충주시 가금면 장천리)-살미터미널(충주시 살미면 土界里)로 들어온다. 달래강변의 살미터미널은 경부운하 鳥嶺(조령)연결 구간의 진입부이다.

뛰어난 水鄕(수향)들인 여주와 충주 사이를 잇는 강변도로가 없다는 것은 몹시 아쉬운 일이다. 37번 국도를 타고 長湖院(장호원)으로 내려왔다. 여기서 38번 국도로 길을 바꿔 남한강의 지류 청미천 위에 걸린 다리를 건너면 충북(음성군 감곡)이다. 장호원은 옛 영남대로 上의 여관마을이었다.

1980년까지만 해도 밤 12시부터 새벽 4시까지 「통금」이 전국적으로 실시되었는데, 해안선을 끼지 않은 충북만은 유일하게 통금이 없는 지방이었다. 필자도 목격한 바이지만, 당시 술꾼들은 조치원읍에서 술을 마시다가 자정 직전에 다리를 건너가 감곡에서 술판을 새로 벌였다. 그래서인지 감곡은 「충청도 장호원」이라 불렸다.

오전 10시, 충주시내 제1로터리 부근의 충주문화회관에서 충주시문화관광해설사 원정인씨를 만났다. 당초엔 長湖院에서 38번 국도를 달려 옛날 남한강 水運의 핵심지인 可興倉(가흥창) 터를 둘러보고, 다시 599번 지방도로를 타고 南下하면서 中原고구려비와 中央塔을 답사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원정인씨와의 약속시간에 맞추기 위해 충주시내로 먼저 진입했다.

그녀는 필자에게 줄 자료를 한 보따리 들고 나왔다. 그녀의 명함에는 「맑은바람」이라는 아호가 쓰여 있었다. 한글아호가 멋있다고 추어올렸더니, 『얼마 전에는 「공부하는 주부」라는 뜻으로 「공주」라고 했는데, 주위에서 자꾸 놀려 「맑은바람」으로 바꿨다』고 서글서글하게 받았다. 우리는 만나자마자 한바탕 크게 웃었다.


中原의 역사·문화 알리는 기록화 14폭

「맑은바람」은 필자를 우선 충주문화회관 2층으로 데리고 갔다. 이곳에는 「中原문화역사인물기록화」 14폭이 전시되어 있다. 원스톱으로 忠州의 역사·문화·인물을 꿰뚫어 볼 수 있는 곳이다. 국비 4억원을 포함해 모두 5억원의 사업비를 들인 것이지만, 해야 할 사업을 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제1화는 中原高句麗碑(중원고구려비). 한반도內에서 유일한 고구려 석비이다. 고구려 장수왕은 백제 개로왕을 죽이고(475년) 南下하여 충주를 國原城(국원성)으로 명명하고 신라를 복속시키기 위한 기지로 삼았다.

제2화는 악성 于勒(우륵)과 彈琴臺(탄금대). 신라 진흥왕이 娘城(낭성: 지금의 충주)에 巡狩(순수)하면서 우륵의 가야금 연주를 듣는 모습이 담겨 있다.

제3화는 신라의 삼국통일 시기에 외교문서 작성으로 큰 공을 세운 强首(강수)의 일생. 그가 작성한 것으로 보이는 「答薛仁貴書(답설인귀서)」는 羅唐 7년전쟁을 감행한 문무왕이 항복을 권유하는 적장 설인귀의 서한에 답한 「開戰文書(개전문서)」로서, 韓國史에 빛나는 實用主義(실용주의) 문장이다.

제4화는 金生과 金生寺. 승려였던 金生은 신라 최고의 명필이며, 김생사는 그가 불법과 서도를 닦았던 사찰이다.

제5화는 통일신라 때 「나라의 중심 고을」의 상징물로서 세운 中央塔(중앙탑)이다.

제6화는 고려 건국의 배경이 된 忠州 세력과 光宗의 崇善寺(숭선사) 창건. 태조 王建(왕건)은 918년 고려 창업과 더불어 결혼동맹정책에 의해 忠州의 호족 劉兢達(유긍달)의 딸을 제3비로 맞이했는데, 그녀가 神明順成(신명순성) 왕후이다. 신명순성 왕후는 29명(왕후 6명, 夫人 23명)에 달했던 后妃(후비) 중 1인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고려의 3대 왕 定宗과 4대 왕 光宗의 생모이며, 그녀의 첫딸 樂浪公主(낙랑공주)는 신라의 마지막 임금 敬順王(경순왕=金溥)과 결혼했다.

특히, 光宗은 왕위에 오르면서 외가인 충주 劉씨와의 관계를 깊게 하고 어머니 신성순명 왕후의 명복을 빌기 위해 충주에 崇善寺를 세웠다. 또한 왕권 확립을 위해 호족들을 대거 숙청하고 연호(光德-峻豊)를 제정했으며, 奴婢按檢法(노비안검법)과 과거제도를 시행하는 등 혁신정책을 시행했다.

제7화는 몽골 침입과 金允侯(김윤후)의 항전. 승려 출신인 김윤후는 몽골의 5차 침입 때(1253) 노비잡군을 지휘한 別將(별장)으로서 충주산성의 守城戰(수성전)에서 也窟(야굴)이 끈 몽골군과 70여 일간 싸워 승리했다.

그때 그는 휘하 노비잡군의 사기를 올리기 위해 노비문서를 불태웠다. 충주산성의 싸움은 30년 對蒙항쟁 중 가장 큰 전승이었다. 이 戰功(전공)으로 고려 조정은 참전 관노는 물론 백정에 이르기까지 벼슬을 주었으며, 김윤후는 상장군에 올랐고, 충주는 國原京으로 승격되었다.
기록화 「고려의 건국과 忠州의 지방세력」(화가 박철환·290×182cm) 중의 일부. 충주의 호족 劉兢達과 그의 딸(神明順成 왕후)과 태조 王建의 만남, 그리고 결혼. 오른쪽은 신명순성 왕후의 아들 光宗이 어머니를 기리며 창건한 충주 崇善寺다.


한반도 최대의 鐵 산지였던 忠州

제8화는 古代 충주에서의 鐵(철) 생산. 충주는 우리나라 3大 鐵 산지 중 하나였다. 「東國與地勝覽(동국여지승람)」에는 충주에 83개소 鐵 산지가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충주지역에서 제철업이 시작된 것은 삼국시대였던 것으로 보인다. 「삼국사기」 열전 江首 조에 儒學(유학)을 공부하던 그가 대장간 딸과 연애했고, 태종무열왕의 부름을 받아 출세한 후에 그녀를 아내로 맞았다는 기록이 보이기 때문이다.

제9화는 忠州史庫(충주사고). 충주사고에 보관 중인 서책을 꺼내어 점검하고, 그늘에서 말려 다시 원래의 위치에 넣는 모습 등이 담겨 있다. 충주사고는 충주시 성내동 예성별관 맞은편에 위치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제10화는 임진왜란과 탄금대 전투. 남한강변에 배수진을 친 도순변사 申砬(신립)과 8000 용사가 분전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제11화는 병자호란과 林慶業(임경업). 충주 출신의 임경업은 병자호란의 원수를 갚기 위해 망해 가는 明나라에 망명하여 벼슬을 받았는데, 南京이 함락될 때 淸軍의 포로가 되어 서울로 송환되어 처형되었다.

제12화는 물류경제의 중심지였던 可興倉(가흥창)의 전성기를 묘사했는데, 세곡선, 뗏목, 보부상, 나루의 장시와 상인 그리고 잔뜩 멋을 낸 「기생」 둘의 모습을 그려 넣었다.

제13화는 乙未義兵과 충주성 전투. 충주성에 입성해 「8道격문」을 발표하고 있는 의병장 柳麟錫(유인석) 등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제14화는 6·25전쟁과 同樂전투. 충주시 신니면에서 벌어진 전투는 6·25전쟁 중 처음으로 국군이 승리한 전투이다. 전투에서 소련제 중무기가 다수 노획되었고, 이로써 소련의 개입이 확인되어 유엔군의 참전을 이끌어 내는 데 큰 역할을 했다.

1950년 7월, 동락초등학교 김재옥 교사가 국군 제7연대 제2대대(대대장 김종수 소령)에 동락초등학교를 점령한 敵 15사단의 동정을 소상하게 제보했다. 이에 제7연대는 방심하고 있던 敵을 기습했다. 국군은 이 전투에서 북한군 2186명을 사살하고, 122mm 곡사포 6문, 76mm 박격포 18문, 장갑차 4대, 트럭 60대, 지프차 15대, 말 24필과 다수의 기관총·소총·탄약 등을 노획했다. 승전 보고를 받은 李承晩(이승만) 대통령은 제7연대(연대장 임부택 중령)의 全장병에게 최초의 1계급 특진의 영예와 격려금 50만 환을 주었다.


于勒이 가야금을 연주한 彈琴臺가 아비규환의 전쟁터로
임진왜란 初戰에서 패배한 도순변사 申砬이 자결한 탄금대의 절벽. 신립은 남한강을 등지고 탄금대에서 背水陣을 쳤다.

충주문화회관 바로 옆 城內洞(성내동)에 충청감영 터가 있다. 충주는 일찍이 충청관찰사의 관아가 있던 충청도의 首府였다. 충청감영 터를 나서 남한강변의 彈琴臺(탄금대)에 올랐다.

탄금대는 신라 진흥왕 때(551) 가야 출신 于勒(우륵)이 이곳에서 가야금을 탄주했다고 해서 붙은 이름인데, 임진왜란 때(1592) 도순변사 申砬(신립)이 탄금대 그 前面에 배수진을 치고 방어하다가 패전한 곳이다.

당초 신립이 군사 8000명으로 배수진을 치려 하자 종사관 金汝(김여물) 등은 『적은 군사로 많은 敵軍을 막기 위해서는 자연의 요새인 조령을 지키는 것이 옳다』고 진언했다. 그러나 신립은 『敵은 보병인 데 비해 우리는 기병이니 유리하지 않소. 더구나 敵은 먼 길에 피로했고, 기병에 약하므로 이길 수 있을 것이오』라며 김여물 등의 진언을 듣지 않았다.

신립은 북방 여진족과의 싸움에서 용맹을 떨친 장수이긴 했지만, 일본이 임진왜란 도발 50년 전에 이미 포르투갈 상인에게서 鳥銃(조총)을 도입하고, 戰國시대의 일본이 그것을 개량·양산해 實戰에 유효하게 사용해 왔는지는 몰랐다.

임진왜란 발발 20년 전(1572)의 일이지만, 일본의 패권을 결정한 나가시노의 싸움에서 당시 일본 최강을 자랑하던 다케다 가쓰요리(武田勝賴)의 기마부대는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와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의 연합부대에 완패했다. 이때 노부나가의 소총부대는 단발 화승총을 보유했지만, 3交代 사격으로 연속사격의 효과를 거두었다. 왜군은 실전을 통해 이미 기동과 사격의 전술에 능숙해 있었다.

임진년 4월28일 새벽, 丹月驛(단월역)에서 왜군의 선봉장 유키나가는 휘하의 병력 1만8000명을 두 갈래로 나누었다. 하나는 자신이 지휘해 산을 끼고 동쪽으로, 또 하나는 소오 요시토모(宗義智) 등이 지휘해 달래강을 따라 서쪽으로 공격해 왔다.

신립은 기마대로 敵의 보병을 짓밟을 작정이었다. 그러나 간밤에 내린 비로 탄금대 앞 벌판은 수렁처럼 질퍽거리고 푹푹 빠져 기마대에 의한 기동타격에 실패했다. 장병들은 용감하게 싸웠으나 敵의 위세에 압도되어 모두 전사했다. 신립은 남한강에 뛰어들어 자결했다.

이때 尙州(상주)의 北川전투에서 패전하고 도주해 신립의 부대에 합류해 있던 순변사 李鎰(이일)은 또다시 도망쳤다. 충주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이 서울에 날아든 4월29일 저녁이었는데, 宣祖 조정은 다음날 새벽 서울을 떠나 피란길에 올랐다.

10여 년 전만 해도 옛 격전지 탄금대 앞은 논밭이었는데, 이번에 와서 보니 주택가로 변해 있었다. 탄금대도 공원으로 다듬어 놓았다. 이곳에는 탄금대 전투에서 전사한 8000용사의 위령탑, 신립의 자결 장소를 알리는 표석, 「감자꽃노래비」, 야외음악당 등이 있다. 탄금정에 오르면 남한강-달래강의 합수지점과 신라의 명필 金生이 서예를 연마했던 金生寺 터가 보인다.
기록화「漢江 물류의 중심이었던 충주 可興倉」(화가 박성열·330×172cm). 세곡선과 황포돛배, 상인, 관원, 기녀 등이 묘사되어 있다.


「나라의 중심」에 세운 中央塔
「나라의 중심」충주 남한강변에 우뚝 솟아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중앙탑(국보 제6호).

야외음악당 앞에서 달래강 위로 걸린 다리를 건너 달래강과 남한강의 합수지점인 옛 金遷(금천)나루를 지나 「中央塔(중앙탑)사적공원」(충주시 가금면)에 이르렀다. 이곳엔 국보 제6호 「中原 탑평리 7층 석탑」이 솟아 있다. 높이 12.5m로 통일신라 석탑으로는 규모가 가장 크고 높다. 국토의 중앙부에 위치한다고 해서 「중앙탑」이라고 불린다. 중앙탑은 남한강의 흐름과 썩 잘 어울린다. 신라는 고구려의 國原城을 점령한 후 귀족자제와 6부의 호족을 이주시켜 小京으로 삼았고, 경덕왕 때 中原京이라 고쳤다. 충주는 통일신라의 사실상 副都(부도)였다.

공원 안 강변에 있는 음식점에서 민물새우와 여러 나물을 넣어 끓인 「새뱅이찌개」로 점심을 먹었다. 뒷맛이 시원한 향토음식이다. 점심 후 공원 안에 있는 충주박물관에 들렀다. 전시실 입구에 옛 충주읍성 南門의 모습을 재현해 놓아 인상적이었다.

중앙탑에서 1.5km 떨어진 立石마을에 국보 제205호 中原고구려비가 있다. 입석마을에서 삼국 간 쟁탈의 요충이었다는 장미산성 앞을 지나면 조정지댐이 보인다. 조정지댐은 우리나라에서 담수량이 가장 큰 충주댐의 보조댐이다. 대운하연구회의 시안에 의하면 조정지댐에 갑문을 설치해 선박이 드나들게 한다.

충주댐은 국내 최대 규모의 콘크리트 중력식 댐이다. 유역면적은 6648m3이며, 저수용량은 27억t이다. 수자원 확보, 홍수 조절, 무공해 수력에너지 생산 등을 위한 다목적댐이다. 충주에서 단양까지의 물길 52km를 따라 관광선을 탈 수 있는 선착장이 있다.

충주 조정지 갑문을 통과한 배는 달래강(達川)을 통해 忠州리프트 앞(해발65.1m)까지 가서 리프트(대형 엘리베이터)를 타고 45m를 수직상승해 조령산에 뚫릴 조령터널(해발 110m)에 진입하게 된다(조령터널 단면도 참조).

「택리지」의 충주 관련 기록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충주는 漢陽 동남 300리에 있다. 衣冠(의관)을 착용한 사람들이 모이고, 배와 수레가 많이 출입한다. 이 邑의 과거 합격자 수는 八路의 여러 邑 중에서 가장 많다. 名都로 칭하기에 족한 곳이다.

(2)더욱이 경상좌도로는 죽령으로 통하고, 우도로는 조령으로 통한다. 2嶺의 길은 모두 이 읍의 治所에서 만나고, 수로와 육로가 처음으로 한양에 통하고 있다. 더욱이 一國의 중앙에 위치해 있어서 중국의 荊州(형주)와 같다. 임진왜란 때 신립이 패전한 곳이 이곳이다. 항상 殺氣(살기)가 하늘을 찌른다.

(3)토지는 오곡과 목면 재배에 적당하다. 땅이 매우 비옥해서 산과 골짜기에 村들이 혼재하고 있지만, 부유한 사람이 많다. 그중에서도 금천·가흥은 가장 번영하고 있다. 금천에서는 2江이 村(촌) 앞에서 합류해 村의 북쪽을 둘러 흘러가는 바람에 동남쪽에서는 嶺南의 화물을 받아들이고, 서북쪽에서는 한양의 물고기와 소금이 유통되고 있다. 촌락은 빈틈없이 즐비하여 한양 강변의 여러 촌과 흡사하다. 많은 배가 念珠(염주) 엮이 듯하여 一大 도회를 형성하고 있다.

(4)가흥은 금천의 서쪽 10여 리에 있다. 강은 동남으로부터 서북으로 흐르고 있고, 村은 그 남안에 있다. 부용산의 一 지맥인 薔薇山(장미산)이 가흥의 主山이다. 조정에서는 창고를 이곳에 설치해 嶺南 경상도의 7邑 및 嶺外 충청도 7邑 田賦(전부)를 저장, 水運判官에게 배로 서울에 운반시키고 있다.

(5)주민은 접대역으로 되어 쌀이 출입할 때 돈을 벌려고 해서 큰 이익을 올리고 있다. 2村 모두 과거에 합격한다든지 高官에 오른 人士의 집안이 많다.


폐허화한 조선조 최대의 漕運倉 가흥

조정지댐에서 599번 지방도로를 따라 북진하면 곧 가흥창이다. 조선왕조 시대의 가흥은 전국의 稅米(세미) 중 3분의 1을 취급하는 조선조 최대의 漕運倉(조운창)이었다. 서울시립大 崔完基(최완기) 교수의 논문 「朝鮮前期 漕運試考(조선전기 조운시고)」에서는 전국 9개 조운창고에서 수납하는 총세미가 26만5840섬이었는데, 가흥창은 8만4670섬을 수납했다고 추정했다.

농협 가흥지소 앞에 승용차를 세워 두고, 뒤를 돌아 가흥창에 접근했지만 선창 자리는 채소밭으로 변해 버렸다. 가을걷이가 끝난 황량한 밭에서는 옛적의 번영을 증명하려는 듯 기와조각들이 나뒹굴고 있다.

지금의 충주시 가금면 가흥리 262번지가 옛 창고 터로 주민들은 「창말」이라고 불러왔다. 창고 터에는 주춧돌 3개가 남아 있으나 교란이 심해 정확한 규모는 알 수 없다. 그중 한 창고 터 주춧돌로 미루어 보아 긴 면이 50여m에 달하고, 창고 터 전체 면적은 약 7300평으로 추정된다.

고려 때는 가금면 창동리 소일부락에 德興倉(덕흥창)이 있었는데, 경상도와 충청도의 세곡을 개성으로 수송하여 국가재정의 중추적 조창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했다. 조선 태종 3년(1403), 경상도 19만5000결의 세곡이 덕흥창에 모이자 덕흥창은 이를 감당할 수 없었다.

태종 4년 金遷(금천: 충주시 가금면 창동리)에 慶原倉(경원창)을 설치해 경상도 세곡을 관장했다. 세조 7년(1461) 경원창에서 화재가 발생했고, 목계와 가흥 사이의 남한강에 막흐레기(莫喜樂灘)라는 세찬 여울이 있어 선박 왕래가 위험해 세조 11년(1465) 그보다 하류에 위치한 가흥에 조창을 옮겨 가흥창이라 했다.

「經國大典(경국대전)」에는 가흥창이 충청도·경상도의 田稅(전세)를 수납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충청도 牙山(아산)에 있는 공세곶창에서도 충청도의 전세를 수납했으므로 가흥창은 충주·음성·괴산 등 18개 고을(지금 충북지역)의 전세를 수납했던 것으로 보인다.

가흥에는 본디 창고가 없어 곡식을 나루터 기슭에 노적했다. 중종 11년(1521) 충청도 관찰사 李世應과 경상도 관찰사 金安國이 공동으로 강변의 폐사를 헐어 70칸의 창고를 마련했다. 그 후 현종 10년(1669) 가흥에 새 창고 49칸을 더 지어 합계 119칸이 되었고, 이 규모는 가흥창이 폐지될 때까지 유지되었다.


목계나루

가흥고개 삼거리에 「水運判官 柳○○의 송덕비」 등이 줄지어 서 있다. 수운판관은 稅米(세미)를 서울로 실어들이는 일을 감독하는 종5품 벼슬이었다. 가흥삼거리에서 조금 東進하면 남한강에 木溪橋(목계교)가 걸려 있고, 강변에 목계솔밭이 있다. 목계솔밭에는 충주시가 보호수로 지정한 100~200년 묵은 소나무 80여 그루가 자라고 있다. 목계교를 건너자마자 우회전해 몇백m쯤 가면 옛 목계나루(충주시 엄정면 목계리)가 있다.

뱃길이 끊긴 이후 목계나루에는 충주 출신 신경림의 「詩碑(시비)」 하나만 오도카니 서 있다. 원정인씨는 『옛적에 「가흥에는 담장치레, 목계는 계집치레」라는 말이 있었다』고 했다. 가흥에는 부정한 방법으로 횡재한 세곡을 감추기 위해 담을 높였고, 목계에서는 영남의 화물과 西海의 생선배·소금배가 몰려들어 기생집이 흥청거렸다는 것이다.

그러나 충주는, 임진왜란 이후 영남대로의 主통로가 조령으로부터 추풍령으로 옮겨지고, 특히 일제가 1905년에 건설한 철도(경부선)가 멀리 비켜감으로써 번영의 동력을 잃었다. 1909년에는 충북의 도청마저 청주로 옮겨 갔다.

현재 충주시의 인구는 21만 명. 원정인씨는 『그래도 충주의 면적은 서울의 1.6배』라고 으스댔다. 단월동 丹湖寺(단호사)에 들러 대웅전에 안치된 보물 제512호 단호사 철불좌상을 보았다. 충주에는 고려 때 제조한 철불좌상 3구가 보존되어 있다.

단호사에서 수안보 쪽으로 조금 더 가면 나오는 林慶業 장군의 사당인 忠烈祠(충렬사)에 잠시 들렀다. 날이 어두워 원정인씨와 저녁을 함께 하고 헤어졌다. 필자는 鳥嶺(조령=새재) 아래 온천마을 水安保(수안보)로 가서 하룻밤을 묵었다.
남한강과 달래강의 합수지점에 충주의 외곽도로를 잇는 교각이 건설되고 있다. 충주 조정지댐 갑문을 통과한 선박은 이 다리 밑을 지나 충주리프트를 거쳐 조령터널로 진입한다.


경부운하의 낙동강 水系


조령터널 빠져나온 선박, 리프트 타고 聞慶 水路로 下降
丹湖寺 대웅전의 철불좌상(보물 제512호). 3대 鐵 산지 중 하나였던 충주에는 현재까지 전국에서 발견된 高麗 철불 50구 가운데 문화재급 철불 3구를 보존하고 있다.

2007년 12월28일 오전 8시에 수안보를 출발해 3번 국도를 타고 내려오다가 「小조령」 마을에서 이름도 없는 「기타도로」로 좌회전해 鳥嶺(새재)의 3關門(관문)에 도착했다. 3관문 북쪽은 충북, 그 남쪽은 경북이다.

새재는 자동차 통행이 금지되어 있다. 여기서 타고 온 승용차는 1관문(경북 문경)에서 만나기로 하고, 필자는 새재를 걸어서 내려갈 작정이었지만, 아직 안개가 걷히지 않아 사진 취재가 어려울 듯해 걷기를 포기했다. 다시 승차해 「기타도로」를 되돌아나가 3번 국도로 접어들었다.

이제는 3번 국도는 이화령터널이 뚫려 굽이굽이 이화령을 넘지 않아도 된다. 이화령터널을 지나면 곧 聞慶邑(문경읍)이다. 1관문 바로 앞 문경새재관리소에서 문경새재박물관 학예연구사 안태현씨를 만났다.

그와 함께 새재와 경부운하가 통과할 후보지를 답사하기로 했다. 조령터널의 길이는 24km이다. 대운하연구회 시안에 따르면, 조령터널(해발 110m)을 빠져나온 선박은 대형 리프트를 타고 해발 53m의 문경으로 내려와 영강과 회상갑문을 거쳐 낙동강 본류로 들어서게 된다(p.352 「경부운하 낙동강 구간 흐름도」 참조).

소백산맥의 조령산을 넘는 문경새재는 예로부터 낙동강과 남한강을 잇는 영남대로上의 가장 험한 고개였다. 새도 날아서 넘기 힘든 고개라고 하여 「새재(鳥嶺·조령)」이 되었다고 한다.

또 이미 문경에서 충주로 넘어가는 鷄立嶺(계립령·하늘재)이 있는데, 「새로 만든 고개」라 하여 새재가 되었다는 說도 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계립령은 신라 아달라왕 때 개설된 고개이다. 고구려의 장수 溫達(온달)이 『계립령-竹嶺(죽령) 以西를 수복하지 못하면 죽어서도…』 운운했을 때의 계립령이 바로 이 고개이다.

이 밖에 억새풀이 우거진 고개여서 처음엔 「草嶺(초령)」이라고 했는데, 그것이 鳥嶺으로 轉寫(전사)되었다고도 한다. 1관문 일대가 上草里, 그 아랫마을이 下草里인 것을 보면 그럴듯하다.

새재 제1관문의 이름은 主屹關(주흘관)이다. 조선 숙종 34년(1708)에 축성한 새재 입구의 성문으로, 원형을 가장 잘 보존하고 있다.

1관문 동쪽 성벽 끝에 큰 水口 하나가 새로 지어져 그 아래로 鳥嶺川(조령천)이 흐르고 있다. 水口는 1900년에 촬영된 사진이 발견되어 그것을 근거로 새로 축조된 것이라고 한다.

水口 바로 위에는 KBS의 사극 「태조 王建」의 촬영장이 있다. 최근엔 사극 「大王 世宗」의 무대로 바뀌었다고 한다.

「東國與地勝覽(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조령천은 태백산의 황지, 영주의 죽계천과 함께 낙동강의 발원지이다. 경부운하는 조령터널을 통해 조령천 밑을 지나 영강으로 이어진다.

옛 영남대로의 길목인 문경새재를 걸으면 땅을 밟는 맛이 좋다. 옛길에 마사토를 깔았기 때문이다. 길 자체가 사적 제132호이다. 연간 이 옛길을 보존하기 위해 까는 마사토를 금액으로 치면 약 1억원에 달한다고 한다. 춥지 않을 때는 맨발로 새재를 걷는 사람들이 많다.

곧 조령원 터가 보인다. 고려·조선 시대에 여행객에게 숙식을 제공하던 국영 여관이다.

조령원 터에서 조금 올라가면 「交龜亭」이라고 쓰인 건물이 보인다. 10년 전에 재건했다고 한다. 필자가 대뜸 「교구정」이라고 읽었더니 안태현 학예연구사는 「교귀정」이라고 읽어야 옳다고 했다. 거북 구(龜)는 인명과 지명에서만 「구」라고 읽는다는 것이다. 新·舊 경상도관찰사가 관인을 교환하던 누각이다.


『홍두깨 방망이 팔자 좋아 큰아기 손길에 놀아난다』
문경새재의 물박달나무와 조령산(해발 1025m). 조령산에는 경부운하의 조령터널(해발 110m) 24km가 뚫릴 계획이다.

다시 조금 오르면 「산불됴심」이라고 새겨진 표석이 보인다. 조선 후기에 세운 한글 산림보호비다. 필자가 『심조불산이로다!』라고 읊은 다음에 『무슨 뜻인지 아느냐』고 물었지만, 동행자들 중에 아무도 눈치채는 이가 없었다. 「산불조심」을 거꾸로 읽었다고 했더니 모두 웃었다.

이윽고 개울 위에 걸린 다리를 건너 제2관문(鳥谷關·조곡관)에 도착했다. 영봉(1106m)과 주흘산(1075m)에서 발원한 물이 개울을 이뤄 제2관문의 自然垓字(자연해자)가 되고 있다. 조곡관은 문경새재의 관문 3개 중 가장 먼저 축조(宣祖 27년=1594)되었다.

조곡관을 조금 지나면 길가에 「문경새재 일원의 조류분포」라는 안내판이 보였다. 안내판에 따르면 새재에 서식하고 있는 조류는 꾀꼬리, 어치, 꿩, 맷새, 곤줄박이, 오목눈이, 박새, 동고비, 직박구리, 방울새, 오색딱따구리 등 19종이다. 그 위에는 길가 큰 바위에 「문경새재아리랑」이 새겨져 있다.

〈문경 새재 물박달 나무/ 홍두깨 방망이로 다 나간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홍두깨 방망이 팔자 좋아/ 큰아기 손질에 놀아난다/ 아리랑 아리랑 아리리요(後略)〉

노래비 위쪽에 「장원급제길」이란 푯말이 세워져 있다. 옛 선비들이 한양으로 과거 보러 가던 청운의 길이라 한다. 3년에 한 번씩 치르던 조선왕조 文科 식년시의 합격자는 33명이었다. 그 중간에 가끔 別試(별시)를 통해 文科 합격자를 뽑기도 했지만, 어떻든 문과 합격은 하늘의 별 따기였다. 문과 합격자를 비교적 많이 배출했다는 영남 출신자는 전체 합격자의 13%(서울 출신자는 35%)에 불과했다. 그렇다면 낙방자에게는 「장원급제의 길」이 아니라 「눈물고개」였을 것이다.

길가 동쪽으로 동화원 터가 보인다. 동화원은 조령원과 같이 길손들에게 숙식을 제공하던 곳이다. 동화원 터에서 계속 동쪽으로 올라가면 부봉-영봉-주흘산에 이르는 등산로이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새재에는 호랑이가 가끔 출몰했다. 전남 구례에 99칸의 집(운조루)을 지은 유이주(甲山 현감 역임)는 새재를 넘다가 호랑이를 잡아 그 뼈를 운조루에 걸어 두었는데, 그 후 누군가가 호랑이뼈를 훔쳐 갔다고 한다.

드디어 제3관문(조령관) 앞에 이르렀다. 우선 조령약수터에 가서 약수물을 한 바가지 떠서 꿀꺽꿀꺽 마셨다. 표고 650m의 3관문은 경상도와 충청도의 分水嶺(분수령)이다. 3관문 북쪽에 떨어진 빗물은 한강 水系의 강물이 되고, 남쪽에 떨어진 빗물은 낙동강 水系의 강물이 된다.

제1관문으로 도로 내려와 인근 두부전골집에서 늦은 점심을 먹었다. KBS의 사극 「태조 왕건」 이래 새재가 「세계 최대의 사극 촬영장」이 되고, 출연진들이 이 토속음식점을 이용함에 따라 손님이 부쩍 늘어났다고 한다.

필자는 안태현 학예연구사가 운전하는 지프를 타고 조령천을 따라 남진하다 문경읍 온천단지 부근에서 잠깐 정차한 뒤 주흘산을 바라보았다. 문경의 鎭山(진산)인 주흘산은 운무로 흐릿했지만, 날씨만 맑으면 위엄 있는 程子冠(정자관)의 모습을 드러낸다.

주흘산 동쪽 하늘재(계립령)에서 내려오는 신북천이 문경읍 마원리에서 조령천에 합류한다. 조령천은 東流하는 加恩川(가은천)과 합류해 영강을 이룬다.


조령터널 출구와 조령리프트 사이에 고모성터미널 설치
고모산성 위에서 내려다본 犬灘. 이곳에는 경부운하의 고모성터미널과 견탄갑문이 설치될 계획이다.

조령천과 가은천의 合水지점에 고모산성이 있다. 고모산성은 소백산맥 북쪽에 위치한 報恩(보은)의 三年山城(삼년산성)보다 50~100년 앞서 축조된 신라의 요새다. 고모산의 중턱에 지프를 정차시켜 두고 돌고개 마루에 오르니 처녀귀신의 畵像(화상)을 모신 성황당이 있다. 그 사연은 이렇다.

옛날에 한 처녀가 과거 보러 上京하는 선비에 홀딱 반해 몸도 마음도 허락했는데, 서울에 간 선비는 과거에 합격한 후 출세해 처녀와의 약속을 저버렸고, 恨을 품은 처녀는 자결하여 寃鬼(원귀)가 되어 길손들을 해쳤다. 뒤늦게 이런 사실을 알게 된 선비가 찾아와 『내 탓이오』를 외쳤다고 하는 전설이다.

성황당 바로 아래 「꿀떡고개」는 넘어가면 숨이 꼴딱거린다 해서 처음엔 「꼴딱고개」라고 했다. 그후 이 고개의 주막에서 길손들에게 꿀떡을 팔았기 때문에 「꿀떡고개」로 이름이 변했다고 한다. 지금은 이 고개를 넘어가는 길손이 없기 때문에 주막집에는 사람이 살지 않는다.

고모산성의 성벽 위에서 벼랑 아래로 내려다보면 옛적의 영남대로, 일제시대에 축조한 폭 10m의 신작로, 2차선인 옛 3번 국도, 4차선인 現 3번 국도, 경북선 철로, 중부내륙고속도로 등 6개 도로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그래서 고모산성 앞 협곡은 「길 박물관」이라 불린다.

대운하연구회의 시안에 따르면 경부운하 조령 구간에는 조령갑문에서 회상갑문까지 모두 7개 갑문이 촘촘히 건설된다. 조령갑문(문경시 마성면) 남쪽으로 조령터널 출구와 犬灘(견탄)갑문이다. 견탄갑문 남쪽의 조령터널 출구와 문경리프트 사이에 고모성터미널(마성면 신곡리)이 들어선다. 3번 국도와 문경선이 연계되는 여객터미널로서 주변 관광지와 연결된다.


후백제군에 쫓긴 王建의 도주로--「토끼비리」
幽谷驛道史蹟碑. 그 위로 3번국도(4차선)가 지나가고 있다.

고모산성 바로 남쪽 「토끼비리」(兎遷·토천)는 고려 태조 王建이 大邱 팔공산 전투에서 견훤이 이끈 후백제군에게 참패한 후 도주하다 길을 잃고 헤매었는데, 마침 토끼가 달리는 길을 보고 뒤따라갔다고 해서 명명된 것이다. 토끼비리는 영남대로 중에서 가장 험한 길로서 엣날에 나귀를 타고 가던 사람이 추락사하는 사고가 잦았다.

조선시대의 영남대로의 노폭은 대개 8자(약 2.5m)였는데, 토끼비리는 더욱 좁았다. 인적에 새가 갑자기 푸드덕 날아오르면 나귀가 놀라 발을 헛디뎠던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토끼비리 아래로 흐르는 영강을 「개여울」(犬灘·견탄)이라 낮춰 불렀던 것 같다.

안태현씨는 옛 나루엔 다리가 놓이고, 험한 고개는 터널로 변했지만, 길의 원리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똑같다고 말했다. 고모산성에서 내려와 영강의 강폭은 점점 넓어져 100여m에 달했다.

10여 년 전 영남대로 답사 때 들렀던 佛井(불정)마을을 찾아갔지만, 길도 바뀌고는 그때 들렀던 농가도 사라져 버렸다. 「불정주유소」 앞에서 사진 한 장을 찍고 幽谷(유곡)으로 향했다.

店村북초등학교(문경시 점촌4동) 앞에는 유곡察訪 李明源의 愛民善政碑(애민선정비) 등 송덕비들이 횡대를 이루고 있다. 찰방은 역참에서 역마를 관장하던 종6품의 벼슬이다. 녹봉을 받지 못한 無祿官(무록관)이었지만, 나라의 간선도로(영남대로)의 핵심구간을 장악했던 만큼 같은 품계인 현감보다 서열상 上位였다. 역사에 저명한 유곡찰방은 郭再祐(곽재우)였다.

임진왜란 때 제일 먼저 의병을 일으켜 경상우도를 지킨 곽재우는 그 공로로 처음 유곡찰방에 임명되었다. 그 후 그는 영남절도사·수군통제사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하다가 함경도감사를 잠시 지내고 또다시 벼슬을 버리고 은거했다.
필자에게 경부운하 건설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는 申鉉國 문경시장.

문경시내로 들어와 문경시청에 들러 申鉉國(신현국) 시장을 잠시 만나 이번 답사에 도움을 준 데 대해 감사의 말씀을 드렸다. 환경부 공보관 출신인 申시장은 경부운하 건설에 가장 먼저 찬성한 지방자치단체장으로서 市자체의 경부운하 테스크포스(TF)를 조직하고 있다. 문경시 흥덕동 영강 강변에는 점촌터미널이 설치된다.

여기서 문경시의 변천을 조금 설명해 둬야 할 것 같다. 원래 문경군 점촌읍은 1985년 점촌시로 승격했다. 그러다 1996년 都農(도농)통합 때 점촌시 대신에 유서깊은 지명인 문경시로 이름이 바뀌었다.

안태현 학예연구사에게 저녁을 함께 하자고 청했더니 망년회 약속이 있다며 사양했다. 그가 『오늘 밤 어디서 묵을 것이냐』고 물어서 『문경새재 입구에 숙소를 정하고 새재의 雪景(설경)을 보고 싶다』고 했다. 그때 마침 눈비가 잠시 휘날려 밤에는 눈이 내릴 것 같았다.

그는 휴대전화로 문경관광호텔에 전화를 넣어 객실을 50% 할인요금(4만5000원)으로 예약해 주었다. 필자는 안태현 학예사와 헤어져 운전자 朴군과 함께 문경새재로 되돌아와 하룻밤을 묵었다. 예상과는 달리 눈이 내리지 않았다.

12월29일 아침, 3번 국도를 타고 내려와 상주시 咸昌邑(함창읍)에 진입했다. 利安川은 함창읍에서 문경으로 내려오는 영강에 합류된다. 영강은 沙伐面(사벌면)을 종단해 「경천대」의 경승지를 만들면서 다시 남하, 洛東나루 부근에서 낙동강 본류에 합류된다.

함창읍에서 3번 국도를 조금 더 내려오면 恭儉面(공검면)이고, 길가에 공갈못이 위치해 있다. 대운하연구회의 시안에 의하면 함창읍 하갈리-금곡리 영강변에 尙州터미널이 들어선다.


낙동강의 洛東나루와 洛井나루
의성군 단밀면 낙정리 낙동강 南岸에 솟아 있는 觀水樓.

상주시 북부 武陽洞(무양동)에서 길을 바꿔 25번 국도로 타고 내려오면 北川과 만난다. 북천변은 임진왜란 때(1592) 순변사 李鎰(이일)이 고니시 유니키나(小西行長)가 지휘한 왜군의 선봉부대에 패전한 현장이다.

필자는 북천변에서 계속 25번 국도를 타고 내려와 新낙단대교를 건너 승용차를 길가에 세워 두고 잠시 낙동나루 쪽의 지형을 살폈지만, 아무래도 거리가 좀 멀다. 다시 차를 몰고 구미시 북단에서 U턴하여 義城郡 丹密面 洛井(낙정)으로 들어가 강변 벼랑 위에 있는 누각 觀水亭(관수정)에 올랐다.

관수정에서는 영강과 낙동강 본류가 합수되는 조선시대의 포구 회상리(상주시 中東面)가 보인다. 대운하연구회의 시안에 따르면 여기에 회상갑문과 회상터미널이 들어선다. 회상나루 하류엔 洛東터미널(상주시 낙동면 물량리)과 그 對岸에 洛丹간이터미널(의성군 단밀면 낙정리), 그리고 낙단갑문이 설치된다. 낙동나루 부근에서는 동쪽에서 서쪽으로 비스듬히 흐르는 낙동강은 新낙단대교를 건넌 후에는 급하게 꺾여 남쪽으로 흐른다.

낙정에서 걸어서 舊낙단대교를 건넜다. 舊낙단대교가 놓이기 전인 1970년대만 해도 洛東나루와 洛井나루 사이엔 군용 LST를 개조한 페리가 차량과 길손을 함께 실어 날랐다. 수년 전에는 新낙단대교까지 가설되어 상주-의성군 또는 구미시의 교통이 훨씬 빨라졌다.

경부운하 낙동강 구간은 낙동에서 구미-대구-의령-창녕-밀양 등을 거쳐 을숙도터미널(부산 사하구)까지 이어지지만 여기서 발걸음을 돌렸다. 필자는 미심쩍은 포인트들을 재확인하면서 上京했다.●
옛 나루터인 洛井마을(의성군 단밀면)과 洛東마을(상주군 낙동면) 사이의 낙동강 위에 걸린 舊낙단대교(2차선). 경부운하 계획에 따르면 낙동터미널과 낙단간이터미널이 설치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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