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조선 기사

鄭淳台 기자의 역사현장 탐사
榮山江·錦江·萬頃江 물길을 따라가다

『정치 좋아하는 사람들, 江 썩는 줄 모르더라』

글 정순태 기자  2008-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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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영산강·만경강 하류의 물은 농사도 지을 수 없는 5급수 또는 그 이하로 악화되어 水質개선 문제는 이미 논쟁의 대상이 될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다.

『30년 동안 강바닥에 쌓인 쓰레기와 모래를 걷어내야 합니다. 예전의 뱃길을 회복시켜야죠』 (영산포 홍어횟집 주인 안국현씨)


榮山江

한겨울에도 악취 심한 榮山江 하구

지난 1월21일 오전 10시34분, 호남선의 종점인 木浦驛(목포역)에 내려 한반도대운하연구회의 湖南(호남)운하추진위원장인 이병담 남원大 교수를 만났다.

李교수가 손수 모는 지프를 타고 무안군 삼향면 南岳里(남악리) 소재 전남도청 청사로 직행했다. 건설재난관리국 金東華(김동화) 국장을 만나 「榮山江(영산강) 프로젝트」에 관한 설명을 들었다.

영산강 프로젝트의 기본 방향은 『영산강의 뱃길 복원과 영산강 주변의 관광자원을 연계해 산업을 활성화하고, 親(친)환경 도시로 정비함으로써 새로운 영산강 시대를 펼쳐 나간다』는 것이다.

전남도청 방문 후 李교수와 필자는 영산강 하굿둑에 위치한 나불도 선착장에서 배를 타고 중류의 사포 나루까지 올라가기로 작정했지만, 안개가 짙은데다 바람이 세게 불어 당초의 계획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지프를 타고 강변의 둑길을 따라 북상했다.

1981년 영산강 하굿둑의 건조로 생긴 영산호는 2억5320만t의 물을 저장하여 농업용수로 사용해 오고 있다.

영산강 하류는 한겨울날인데도 악취가 심했다. 현재, 영산강 하류의 수질은 농업용수로 부적합한 「5급수 이하」이다. 영산강의 수질개선의 시급성을 가장 심도 있게 거론한 인물은 李明博 대통령(당시는 유력한 차기 대통령 후보)이었다.

작년 4월18일 영산강 하굿둑에서 사포 나루까지 탐사선을 타고 답사한 李明博 대통령은 그날 오후 5시 光州의 金大中컨벤션센터에서 「영산강 운하와 지역경제」라는 주제의 연설을 했다. 그러나 그 연설은 때마침 미국에서 발생한 한 재미동포의 총기난사 학살사건에 파묻힌 탓인지, 당시 언론에 전혀 보도되지 않았다. 다음은 그 연설의 한 대목이다.

『탐사선에서 (강바닥의) 흙을 퍼냈을 때 저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시커먼 강바닥을 팠습니다만, 팔수록 더 썩은 강바닥을 볼 수 있었습니다. 상류는 냄새가 좀 적게 났습니다만, 영산강 하류 둑 어귀에서는 냄새가 지독했습니다.

오랜 역사와 문화, 그리고 대한민국 민주화의 중심인 이 光州(광주)·전남의 분들이 어떻게 이런 영산강을 오랫동안 품고 있었는지 저는 참 놀라웠습니다』


『우선 강물부터 살려 놓아야…』
영산강 하류의 청호 나루. 보성으로 가는 고속도로의 다리 공사는 겨울철 강바람 때문에 일시 중단된 듯하다.

이어 李明博 대통령은 美辭麗句(미사여구)로 포장되었을 뿐 일의 우선순위가 잘못된 지방행정을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이 상태로 배가 다니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우선, 물을 살려놓고 뱃길로 다녀야 합니다. 수자원이 어디서 나옵니까. J프로젝트? 맑은 물을 공급하지 않고 J프로젝트가 성공할 수 있습니까? 여기에 기업이 들어오려면 썩은 공업용수를 가지고는 할 수 없습니다. 제가 기업에 있을 때 여기에 제철소를 세우려고 했던 사람이 이 물을 가지고는 공업용수로 쓸 수 없다고 해서 다른 곳으로 옮긴 사실이 있습니다』

J프로젝트는 해남·영암을 「서남해안 관광레저형 기업도시」로 만들겠다는 전남도의 역점사업이다. 전남도는 이밖에 무안·목포·신안 지역의 S프로젝트, 南岳신도시 프로젝트, 영산강 유역 古代 문화권 특정지역 프로젝트 등 경제·문화·관광 벨트 형성을 추진하고 있다. 李明博 대통령은 그런 사업보다 수질개선을 먼저 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영산강에는 197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목포로부터 榮山浦(영산포)까지 조숫물이 올라오고 배가 왕래했다. 水路(수로)에는 5~10리마다 포구가 있어 그 수가 약 40개에 달했다. 그러나 현재 나루터의 기능을 유지하고 있는 곳은 단 한 군데도 없다.


인적 없는 나루
무안군 일로읍 강변에 무단 투기된 쓰레기. 비만 내리면 강물에 휩쓸려 들어갈 참이다.

李교수와 필자는 둑길을 따라가다 청호 나루를 만났다. 선창에는 작은 어선 서너 척만 매달려 있을 뿐 인적이 없었다. 강바람이 드세어 그런지, 보성으로 가는 고속도로의 다리 건설공사는 중단상태였다. 강물 위로는 아직 상판이 깔리지 않아 썰렁한 橋脚(교각)만 몇 개 드러나 있었다.

청호 나루에서 바로 위쪽이 영산강 본류와 영암천의 합수지점이고, 거기에 소맹이 나루가 있지만, 청호 나루와 소맹이 나루가 이어지는 강변도로는 없다. 우리는 49번 지방도로를 타고 좀 북상하다 다시 둑길로 접근했다.

소맹이 나루에서는 강 건너편으로 영암의 月出山(월출산)이 잘 보인다. 영암천의 상대 포구는 백제 근초고왕(346~375) 때의 박사 王仁(왕인)이 「論語(논어)」와 「千字文(천자문)」을 갖고 왜국으로 떠났던 출발항이라고 전해진다. 王仁은 古代일본의 開明(개명)에 결정적 역할을 했던 학자이다.

10여 년 전 필자는 상대 포구를 답사한 바 있는데, 영암천은 강바닥이 드러날 만큼 메말라 있었다. 그때 이 마을 70代 노인은 『내가 어릴 적만 해도 상대포의 水門 위에 올라가 강물 속으로 다이빙했다』고 증언했다. 물론, 강바닥이 마른 지금 다이빙을 하면 맨땅에 헤딩을 하게 된다.

무안군 一老邑(일로읍) 인의산 아래 강변에는 「경고」 팻말이 설치되어 있는데도 불구하고 쓰레기가 어지럽게 쌓여 있었다. 비만 내리면 강으로 휩쓸려 들어갈 참이다. 이래선 제 아무리 「수질개선」을 외친들 공염불에 그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영산강의 하천부지는 거의 농토로 경작되고 있다. 하천부지에 뿌려진 농약과 비료는 바로 강물로 스며든다. 수질개선은 강변의 불법 경작지를 없애고 「비점오염원」을 차단하는 사업부터 진행해야 할 것으로 보였다.


왕건과 견훤이 자웅을 겨룬 夢灘
몽탄대교가 걸린 옛 몽탄 나루 자리. 태봉국의 해군장군 왕건과 후백제왕 견훤이 水戰을 벌인 곳이다.

이병담 교수는 『강변의 공간에 갈대숲을 조성하면 수로변에 오염된 흙이나 토사가 수로로 유입되는 것을 막을 수 있다』고 했다. 그는 『강변에 생태습지를 조성하여 오염된 물을 자연 스스로 치유하게 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덧붙였다.

좁은 둑길과 지방도로를 번갈아 가며 夢灘(몽탄) 나루에 이르렀다. 몽탄은 「꿈의 여울」이란 뜻으로, 泰封(태봉)의 해군장군 王建(왕건)과 후백제왕 甄萱(견훤)이 영산강과 羅州(나주)평야의 헤게모니를 놓고 접전을 벌였던 현장이다.

몽탄에서 영산강은 S자형의 심한 曲江(곡강)을 그린다. 이곳 여울에서 견훤의 함대로부터 요격을 받고 방향을 잃은 왕건의 함대는 전날 밤 왕건의 꿈에서 계시받은 물길을 따라 북상해 위기에서 벗어났다고 한다.

왕건은 견훤의 해상세력을 꺾고, 후백제의 배후를 견제한다는 전략하에 泰封 국왕 弓裔(궁예)의 명령을 받아 수군을 이끌고 南下해 錦城(금성: 지금의 羅州) 등 10여 郡을 공략했다. 이로부터 후백제와 태봉 사이에는 서남해안 일대에서 자주 접전을 벌였다.
영산강이 S자형의 曲江을 이루는 수역. 물길에 다가선 조그만 야산(사진의 돌출부분) 위에「息影亭」이란 이름의 정자가 있다.

당시 왕건이 거느린 수군의 군용은 다음의 「高麗史」 기록으로 짐작할 수 있다.

예컨대 政開(정계: 궁예의 연호) 2년(915), 후백제가 나주를 공격하자 왕건은 재래의 병선에 다시 함선 100여 척과 대선 10여 척을 지어 3000여 병력으로써 나주 방면에 출동했다. 그 대선의 규모가 方 16步(보: 1보는 약 2m)로서 서로 갑판을 잇대면 그 위로 말도 달릴 수 있었다고 한다.

왕건은 羅州를 근거지로 하여 光州, 德津浦(덕진포: 영암), 皐夷島(고이도: 목포 앞바다의 섬) 등을 경략했다. 그가 이같이 강력한 해군을 동원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집안이 禮成江(예성강)을 근거지로 한 바다 상인이었기 때문이다.

오후 1시30분, 사포 나루(함평군 학교면 곡창리)에 있는 「강변장어집」에서 늦은 점심을 먹었다. 강변장어집 주인 이계석씨는 금년 68세로 영산강에서 40여 년간 어장을 경영해 온 분이다. 다음은 이계석씨와의 문답이다.


『영산강의 「子宮」이 썩어 어패류의 씨가 마른다』
배를 타고 바라본 사포 나루.

―영산강의 수질이 어떻습니까.

『썩어 버렸습니다. 여름철엔 일주일만 비가 오지 않으면 강물이 막걸리처럼 부글부글 끓어올라요. 비가 하루에 50mm만 오면 강물 속의 물고기가 죄다 죽어 버립니다. 하천부지나 둑방 옆 논밭으로부터 잔류 농약 등이 강물로 흘러들어오기 때문입니다』

―1981년 영산강 하굿둑이 축조된 후 어떤 변화가 일어났습니까.

『하굿둑으로 막기 전에는 15t짜리 배가 영산포까지 올라갔어요. 지금은 1t짜리 배도 구진포까지 올라가기 어려워요. 여기 사포 나루 위로는 강바닥에 모래와 자갈이 쌓여 수심이 2~3m가 되지 않아요』

―고기잡이는 어떻습니까.

『25년 전만 해도 영산강에는 사철 노는(조업하지 않는) 배가 없었어요. 요즘엔 그물을 쳐도 하루에 붕어 20kg을 건지지 못합니다. 붕어 kg당 시가가 대략 4000~5000원. 그러니 조업해도 기름값이 나오지 않아요』

―물고기가 왜 줄어들었을까요.

『원래 영산강 하구는 바닷물고기가 올라와 물고기가 번식하는 「子宮」이었어요. 하굿둑이 축조된 이후에는 물고기가 산란을 해도 부화를 못 합니다. 폐수 때문이에요. 하구가 막혀 호수로 변한 후에는 불법 어망을 치는 사람이 있어요. 삼각망을 치면 3cm짜리 치어도 빠져나가지 못합니다. 그러니 물고기의 씨가 말라 가는 것입니다. 강의 흐름이 빨라지면 삼각망은 칠 수 없어요』

―하굿둑 축조 전에 어떤 어종이 잡혔습니까.

『숭어, 장어, 메기, 농어, 참복어가 잡혔어요. 농어는 팔뚝만 했고, 이곳 참복어는 명물이었습니다. 예전에는 한 물때(6시간)에 1kg짜리를 최고 250마리까지 잡았어요』

―어찌하면 영산강 어업이 되살아날까요.

『지금은 영산강 하굿둑 수문을 하루 한 번 여는데, 그걸 두 번만 열어 주면 좀 나을 것 같습니다』

이병담 교수에 따르면 현재 영산강 하굿둑은 8개 배수갑문과 1개 수갑문(통선문)으로 축조되어 있다. 수갑문은 폭 6m로서 작은 배는 통과가 가능하지만, 거의 이용되지 않고 있다. 하굿둑의 木浦 쪽에 새로운 배수갑문과 수갑문을 설치해 유량의 흐름을 조절하면 2000t급 선박의 통행이 가능하고, 영산강의 수질이 크게 개선된다.


30년간 미뤄 온 강바닥 준설
여름 장마 후의 구진포. 〈구진포 김재석씨 사진〉

점심 후 이병담 교수는 한반도대운하 TF팀 전남추진본부장 김갑렬씨를 필자에게 소개한 후 다른 약속 때문에 서둘러 光州로 떠났다. 김갑렬 본부장과 필자는 「강변장어집」 주인 이계석씨가 모는 모터보트를 타고 대굴포를 거쳐 사암 나루 가까이까지 북상했다가 되돌아왔다. 강바람은 매우 찼다.

「世宗실록」 지리지 務安縣(무안현) 조에 따르면 대굴포는 조선 초기 水軍處置使營(수군처치사영)이 있었고, 군함 24척과 수군 1895명이 배치되었다. 전라좌수영·우수영으로 분리되기 이전의 대굴포는 전라도에 설치된 단 하나의 수군 지휘본부였다.

필자는 김갑렬 본부장이 모는 지프를 타고 구진포를 향해 출발했다. 다음은 이동 중에 나눈 문답이다.

―죽어 있는 영산강을 살리는 가장 급한 일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30년간 미뤄 왔던 강바닥의 준설입니다. 퇴적 汚泥(오니)로 말미암아 어패류의 서식이 불가능하고, 물고기가 알을 부화할 수 없는 강바닥이 되어 버렸습니다』

―영산강의 主오염원은 무엇입니까.

『생활하수, 공장폐수, 축산과 분뇨처리장의 방류수, 未처리 오폐수, 비점오염원 등으로 보고된 바 있습니다. 근본적인 수질개선은 오염된 유입수를 차단하는 겁니다』

―영산강운하의 기본구상은 무엇입니까.

『영산강 뱃길의 기본구상은 환경·생태 운하 개념을 도입하는 것입니다. 통행선박이 연료로 LNG를 사용하면 좀더 좋은 수질을 보전하게 되며, 생태계에 좋은 영향을 줄 겁니다. 관광유람선의 경우 전기 배터리를 이용하는 親환경적 방안이 검토되고 있습니다』

―비점오염원인 강변의 논밭을 그냥 놔두고는 수질개선이 어려울 것 같은데요.

『국유지인 하천부지의 논밭은 앞으로 농민에게 대여하지 않으면 되고, 둑방에 인접한 농토는 정부가 매입해 생태공원을 조성함으로써 비점오염원을 차단해야 합니다』

會津(회진)을 지났다. 회진이라면 鄭道傳(정도전)이 고려 우왕 원년(1375)에 反元을 주장해 귀양을 왔던 곳이다. 고려 귀족과 사찰의 토지겸병을 반대한 정도전은 당시 왜구 격퇴로 급부상하고 있던 함경도 출신 무장 李成桂(이성계)에게 易姓革命(역성혁명)을 처음 권유한 인물이다. 정도전은 조선왕조의 설계자였다.


『깨끗한 江 만드는 데 누가 반대하겠나』
장마철 영산대교와 영산강. 〈구진포 김재석씨 사진〉

구진포(나주시 다시면 가운리)에 이르자 김갑렬 본부장은 다른 볼일로 먼저 光州로 떠나면서 필자에게 음식점 「구진포 나룻터 장어」를 경영하는 김재석씨를 소개했다. 김재석씨는 울산 현대중공업에 재직하다가 귀향해 가업을 경영하는 분이다. 다음은 김재석씨와의 문답이다.

―어민들은 영산강 하굿둑의 水門을 하루 두 번 열어 달라고 하던데, 金선생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현재 영산강 하굿둑 水門의 폭은 6m인데, 영산강운하 수갑문의 폭은 30m로 계획되고 있습니다. 영산강운하가 건설되면 바닷물 유입이 원활해져 수질이 크게 개선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운하 건설에 대한 영산강 유역 주민들의 여론은 어떻습니까.

『깨끗한 강을 만들어 준다는 데 누가 반대하겠습니까. 환경단체 같은 데서 발목을 잡고 있는데, 이건 환경운동이 아니라 정치운동이라고 생각합니다. 산을 뚫고 도로를 낼 때는 가만히 있던 사람들이 물길을 복원하는 데 반대한다면 그 진정성을 의심할 수밖에 없어요. 영산강은 전남의 「內臟(내장)」인데, 정치하는 사람들은 이념적인 거대담론에 몰입해 자기 고향의 내장이 썩는지 몰랐습니다』

―영산강 유역은 홍수가 자주 나는 지역 아닙니까.

『4년 전에 홍수가 나서 저기 저 높은 천장까지 물이 찼어요. 강바닥에 토사가 쌓여 있어 길을 잃은 강물이 강변에서 좀 떨어진 이 동네까지 휩쓸었어요. 강바닥을 파서 물길을 깊게 만드는 일은 우리 동네의 숙원입니다. 홍수 피해를 당하지 않은 사람들은 우리의 고통을 모릅니다』
영산교 위에서 내려다본 영산포. 담벼락 앞에 지금은 사용되지 않는 등대(원안)가 보인다.


『해방 직후엔 영산포 땅값이 光州 충장로보다 비쌌어요』
나주 영산강변에 날아든 백로 떼.〈구진포 김재석씨 사진〉

오후 8시쯤, 필자는 김재석씨가 모는 승용차를 타고 20여분 만에 영산포에 도착했다. 영산교(나주시 영산동) 일대는 「홍어거리」이다. 우리는 음식점 「홍어1번지」에 들러 늦은 저녁을 먹었다. 그는 「홍어1번지」 주인 안국현씨를 합석시켰다. 다음은 안국현씨와의 문답이다.

―영산포의 경기가 어떻습니까.

『지금 뭐 경기랄 것이 있습니까. 영산포는 물길이 트여야 삽니다. 해방 직후 영산포의 땅값은 光州의 번화가 忠壯路(충장로)보다 비쌌습니다. 1970년대만 해도 5~10t 배와 모래를 실어 나르는 바지선이 영산포로 들어왔어요. 사람들이 바로 여기 영산교 밑 강에서 재첩을 잡다가 익사하기도 했습니다』

―榮山浦와 榮山江, 어느 쪽이 먼저 생긴 地名입니까.

『영산포가 먼저죠. 왜냐하면 원래 홍어는 大흑산도 북쪽 外榮山島(외영산도)와 內榮山島 근해에서 많이 잡혔는데, 700여 년 전 왜구의 약탈을 피해 그곳 어민들이 배를 타고 강을 거슬러 올라와 지금의 영산포에 새로 자리를 잡았거든요. 그래서 새 터전을 영산포라 하고, 영산포를 꿰뚫고 흐르는 강을 영산강이라 부르게 된 겁니다』

―홍어회는 어떻게 삭힙니까.

『항아리 속에 짚을 깔고 홍어를 담고, 그 위에 또 짚을 깔고 홍어를 담습니다. 이렇게 차곡차곡 홍어를 쌓고, 10일간 온도 11℃를 유지해 숙성하면 톡 쏘는 홍어회가 되죠』

―영산강운하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예전의 뱃길을 회복시키는 것 아닙니까. 강바닥에 쌓인 쓰레기와 모래만 걷어 내면 되는 겁니다. 5급수 이하의 강물로 짓는 나주평야 쌀의 명예를 회복하려면 우선 강물부터 살려야 합니다』

홍어회+돼지고기+묵은김치의 조합인 「삼합」은 전라도 요리의 진수이다. 「홍어1번지」를 나와 홍어거리를 걸었더니 홍어회 도매점이 몰려 있다. 홍어거리 뒷길은 아직도 일본식 옛 2층집이 많다. 김재석씨는 『이곳에서 간판만 바꿔 달고 영화 「장군의 아들」을 찍었다』고 말했다.

필자가 「영산강 답사 기간 중 날씨가 계속 흐려 사진이 흐리게 나오겠다」고 걱정하자, 김재석씨는 여름철 장마 후의 맑은 날에 자신이 찍은 사진 몇 장을 이메일로 전송해 주겠다고 했다.

1월22일 아침에 부영모텔 6층 객실에서 창문을 열고 영산교를 바라보았다. 영산포를 조망하는 데는 참으로 절묘한 위치이다. 약속장소인 영산교를 향해 슬슬 걸어나갔다. 지금은 작동하지 않는 등대가 담벼락에 바짝 붙어 있다. 다리 위에서 등대를 향해 사진을 찍고 있는데, 김갑렬 본부장이 다가와 그가 운전하는 지프에 편승했다.


王建과 견훤이 혈전을 벌인 錦城山城
영산강운하 종점 부근 야산에 있는 風詠亭.

영산포읍과 나주시의 접경에 나주驛舍(역사)가 새로 들어섰다. 서울-목포 간 KTX 열차의 개통에 맞춰 영산포驛舍와 나주驛舍를 한 군데로 모은 것이라고 한다.

『지금의 나주驛舍 자리가 궁구 나루터였습니다. 수백 년 전에는 궁구 나루터를 「木浦(목포)」라고 불렀다고 해요. 나주驛舍 바로 위쪽이 금성산입니다. 저 부근이 후백제와 고려의 싸움터였다고 합디다』

나주시의 鎭山(진산)인 금성산은 서남지역의 요새였다. 금성산성은 처음엔 후백제 견훤의 본거지였는데, 후백제가 전주로 도읍을 옮긴 후 왕건에게 빼앗겼다. 그 후 양군의 공방전이 되풀이되었다. 현재, 이곳엔 미사일 기지가 설치되어 있다.

다시 북상하여 羅州 시내를 스쳐지나갔다. 나주시청 부근에는 태봉 국왕 궁예 휘하의 羅州장군 왕건과 나주지역의 호족 오다련의 딸(후일의 莊和왕후)이 처음 만났던 빨래터(浣紗川·완사천)가 복원되어 있다. 장화왕후는 고려 2代 왕 惠宗(혜종)의 생모이다.

우리는 광주공항에 이르렀다. 여기서 영산강은 두 가닥으로 갈라져 동쪽은 極樂江(극락강), 서쪽은 黃龍江(황룡강)이라 불린다. 담양의 용추에서 발원하는 극락강을 영산강의 본류로 보고 있지만, 장성군 갈재에서 발원하는 황룡강이 극락강보다 수량이 많다.

현재 추진 중인 호남운하는 황룡강 등을 거쳐 금강운하와 이어질 계획이다. 光州광역시는 이 일대를 생태보존지역으로 조성할 계획이라 한다.

극락강변을 타고 조금 올라가면 극락강과 光州川(광주천)의 합수지점이다. 광주천을 따라가면 하수종말처리장이 보인다. 처리능력이 하루 72만t. 인구 141만 명인 광주광역시의 하수처리장으로서는 턱없이 작은 규모이다. 광주천을 한참 따라가다 비닐하우스 등이 들어선 천변에서 김갑렬 본부장은 잠시 지프를 세웠다.

『여기가 광주 내륙항 터미널 예정지입니다. 저기 보이는 저 다리가 광신대교인데, 영산강운하의 종점입니다. 영산강 하굿둑으로부터 광신대교까지 물길의 길이는 84.6km입니다. 수심 6.1m를 유지하기 위해 강바닥을 준설하고, 수위차를 극복하기 위해 나주지역에 2개 수중보와 광주지역에 1개 수중보를 설치할 계획입니다. 2500t 선박의 운항이 가능하도록 하굿둑의 목포 방향에 신규 갑문을 설치합니다』

광신대교를 지나면 야산 위에 風詠亭(풍영정)이란 정자가 있다. 풍영정의 근동마을에는 이곳에 살던 張씨 처녀와 강원도 소금장수 총각 사이의 애절한 러브 스토리가 전해져 오고 있다.

그 줄거리를 보면 이루지 못한 사랑을 비관한 처녀가 광주천에 투신자살함으로써 비극의 막을 내리지만, 어떻든 여기에 소금배가 들어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黃龍江의 옛 포구「원등들」에 운하터미널 설치해야』
長城댐 위에서 내려다본 장성호. 농업 저수지로서 국내 최대이다.

풍영정을 둘러보고 황룡강 쪽으로 넘어와 원등마을 앞 강변에 섰다. 강 건너편에는 금호타이어 공장이 들어서 있다. 이곳은 조선 중기까지 무역선이 기항한 포구로서 통항 선박에 불을 밝혀 주었다 해서 「遠燈(원등)」이란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송정리역 앞을 지났다. 필자가 40년 전 전투병과사령부(상무대)의 보병학교에 입교할 때는 한적한 기차역이었지만, 지금은 도심지를 이루고 있어 잠시 방향감각을 잃었다. 그때 송정리 역전에 집결한 입교생들은 더플백을 어깨에 둘러멘 채로 20여 리 길을 구보해 보병학교에 닿았다. 지금은 상무대가 長城(장성)으로 옮겨 가고, 그 자리엔 광주광역시청 청사 등이 들어서 있다.

송정리역 건너편에 있는 광산구청에 들러 전갑길 구청장, 朴楊洙(박양수) 기획재정본부장을 만나 「영산강운하 건설--광산구 프로젝트」에 관한 설명을 들었다.

전갑길 구청장은 『영산강(극락강)과 황룡강의 合水 지점 바로 아래에 水位 유지를 위한 갑문을 축조하고, 황룡강변의 「원등들」에도 운하터미널을 설치하는 것은 光山區의 발전을 좌우하는 결정적 과제』라고 강조했다. 한반도대운하연구회의 試案(시안)에는 수위 유지 갑문을 극락강 쪽에 축조하고, 광주지역 운하 터미널을 극락강 쪽의 「운남들」에만 설치하는 것으로 계획돼 있다.

전갑길 구청장은 『광산구에는 500만 평의 국가공단이 조성될 계획이어서 앞으로 수송수요가 급증할 것 같다』고 예상했다.

박양수 본부장은 『예컨대 광산구의 황룡강변에 위치한 금호타이어의 경우 하루 20회에 걸쳐 11t 트럭과 컨테이너 차량으로 光陽港(광양항)에 제품 등을 陸送(육송)하여 연간 물류비용이 100억원에 육박하고 있는데, 「원등들」에 운하터미널이 설치되면 물류비용이 크게 절감될 것』이라고 말했다.

광산구청은 호남권의 일반적 정서와는 달리 운하 건설에 적극적이다. 광산구의 한복판으로 황룡강이 흐르고, 동쪽 끝으로는 극락강이 스쳐 지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광산구는 광주광역시의 전체 면적 중 45%를 차지하고, 관할구역 내에 4개의 산업단지를 안고 있다.


光州·羅州·鶴橋 평야의 젖줄 長城댐

필자는 광산구청의 영산강운하건설 TF팀 직원이 손수 운전하는 지프에 편승, 30여km 북쪽 장성댐을 향해 북상했다. 장성은 갈재 너머 전남땅의 첫머리이다. 노령산맥의 갈재는 전남과 전북을 갈라 놓는 분수령이다. 장성의 황룡강변은 1894년에 봉기한 동학농민군이 황토현전투에 이어 관군을 두 번째로 격파한 전투현장이다.

영산강의 발원지 중 하나인 노령산맥의 갈재 일대에 축조된 장성댐의 저수량은 8900만t으로 농업 저수지로서는 국내 최대이다. 한반도운하연구회의 시안에 의하면 영산강운하는 장성댐과 갈재를 넘어 전북 구간에 진입하게 되어 있다. 전북의 운하는 정읍-동진강-만경강-익산을 거쳐 금강운하와 연결된다.

영산강은 우리나라 4大강 중의 하나다. 그 유역면적은 전남과 광주의 전체면적 중 23%를 차지하고, 이 지역의 3大 평야인 나주평야·송정평야·학교평야의 젖줄이다.

장성댐을 둘러본 후 갈재를 넘어 정읍에서 다음 답사지인 群山으로 북상할 예정이었지만, 수소문해 보니 정읍發(발) 군산行(행) 고속버스가 없다고 한다. 광주로 되돌아와 고속버스터미널에서 오후 4시 군산行 고속버스(요금 9700원)를 탔다.

오후 6시쯤, 군산버스터미널에서 내려 택시를 타고 금강 하굿둑 가까이에 있다는 용궁모텔(군산시 성산면 성덕리)로 직행했다. 용궁모텔에서 다음날(1월23일) 아침에 금강권발전연구회 상임대표 尹喆浩(윤철호·한국원자력안전기술연구원 책임연구원) 박사와 만나기로 사전 약속이 되어 있었다.


錦江

『금강 하굿둑의 강물도 5급수』

1월23일 오전 8시, 눈발이 휘날려 길이 미끄러운데도 불구하고 윤철호 박사가 한밭大 도시환경연구소장 유병로 교수와 함께 용궁모텔로 왔다.

금강은 백제 때 왜국과의 중요한 교통로였다. 고려시대에 들어와서는 漕運(조운)제도에 의해 수납된 세곡을 운반하는 데 이용되었으며, 한때는 왜구의 내륙지방 침입의 통로가 되었다. 조선 초기에는 礪山倉(여산창), 群山倉(군산창), 聖塘倉(성당창: 전북 익산시 성당면)의 稅米(세미)를 서울로 운반하는 데 이용된 뱃길이었다.

조수간만의 영향은 부여까지 미치며, 풍향은 서풍 계통이 탁월하여 군산-강경 간의 遡船(소선) 시간이 크게 단축될 수 있었다. 겨울철 결빙기간이 비교적 짧아 내륙수로로서의 입지조건은 한강보다 유리했다.

우리는 하굿둑의 魚道(어도) 앞에 차를 세웠다. 윤철호 박사가 『수문을 열면 어도를 타고 물고기가 상류로 뛰어 올라가는 장관이 펼쳐지는 곳』이라 했지만, 물때가 맞지 않아 그런 광경을 목격하지 못했다. 금강은 물은 비교적 깨끗하다는 평가를 받는 곳이지만, 하굿둑 부근의 강물은 탁했다. 환경공학 전공인 유병로 교수에게 물었다.

―유교수님, 여기 강물의 수질이 어떻습니까.

『하굿둑 부근의 강물은 5급수예요. 상류로 올라갈수록 조금씩 나아져 가지만…』

우리는 하굿둑 위로 난 차도를 지나 충청도 서천 땅에 닿았다. 충남도청과 서천군청의 관계자들을 금강 하굿둑 관광지사업소에서 만났다. 금강운하 건설사업의 요지는 『국민소득 4만 달러 시대에 대비해 중부권을 環(환)황해권의 중심거점으로 육성하고, 백제 역사문화를 복원해 중부권을 역사·문화·생태·과학 복합 관광 중심지로 개발한다』는 것이었다.

마침, 「伎伐浦(기벌포)문화마당」을 운영하는 劉承光(유승광) 박사가 이 자리에 동석해 있어서 그에게 질문했다.


기벌포 대첩의 현장에 표석 하나 없다
금강 하구의 랜드마크가 되고 있는 옛 長項제련소의 굴뚝.

―劉박사님, 서천군 長項邑(장항읍)은 기벌포 대첩의 현장인데, 표석이 세워져 있습니까.

『아직 없습니다. 기벌포 전투의 역사적 의미는 크지만 이곳은 百濟(백제) 정서가 워낙 강한 곳이라…』

장항은 676년 기벌포 해전의 현장일 뿐만 아니라, 660년 7월 唐(당)나라 장수 蘇定方(소정방)이 병력 13만을 이끌고 백제의 王都(왕도) 사비(지금의 부여)로 진격할 때 상륙한 지점이다. 「百濟 정서」로서는 기벌포가 잊고 싶은 땅이름일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의 백제 故土(고토)는 眞(진)·解(해)·沙(사)·燕(연)·(백)씨 등 백제 8姓(성)이 사는 데가 아니다.

신라의 삼국통일은 660년 백제의 패망, 668년 고구려의 패망으로 이룩된 것은 아니었다. 唐은 백제의 옛 땅에 熊津(웅진)도독부, 고구려의 옛 땅에 安東(안동)도호부를 설치해 직할 식민지로 삼고, 동맹국이었던 신라까지 먹으려 했다. 이에 신라는 나라의 존망을 걸고 당시의 세계제국 唐과 7년에 걸친 전쟁을 감행했는데, 그 최후의 결전이 기벌포 전투였다.

「三國史記」에 따르면 서기 676년 11월, 薛仁貴(설인귀)가 지휘하는 唐의 함대가 금강 하구로 침입하자 施得(시득)이 지휘한 신라 함대가 迎擊(영격)했다. 신라의 수군은 첫 교전에서는 패했으나, 바로 전열을 수습해 이후 22차례에 걸친 파상공격으로 唐의 함대에 치명적인 타격을 가했다.

기벌포 전투의 승리로 우리 민족사 최초의 통일국가가 성립되었다. 만약 기벌포 전투에서 신라가 패전했다면 우리 민족사가 성립했을지는 미지수이다. 중국은 주변 50개 민족들을 그의 판도에 집어넣은 먹성 좋은 나라이다. 중국과 접경해서 살던 민족들 가운데 오늘날 自尊(자존)의 민족사를 성립시킨 나라는 한국과 베트남 정도이다.


『토양오염으로 각종 암환자가 집단적으로 발생』
「신성리 갈대밭」에서 바라본 금강.

우리 일행은 금강 하굿둑에서 상류 쪽으로 올라갈 예정이었지만, 필자의 제의로 방향을 정반대로 바꿔 장항읍으로 내려갔다. 장항읍의 前望山(전망산)에는 장항제련소의 굴뚝이 아직 우뚝 솟아 있어 금강 하구 일대의 랜드마크가 되고 있다. 국내 유일의 장항제련소는 1980년대에 울산광역시의 溫山(온산) 비철금속단지로 이전하고, 그 자리는 銅(동) 가공공장으로 바뀌어 이제 높은 굴뚝에서 연기가 나지 않게 되었다.

―제가 초등학교 4학년 때 「장항제련소」, 「장항선」 하며 달달 외웠는데, 여기에 오니 참으로 감개가 무량합니다.

『1936년 장항제련소가 건설되고, 1938년 읍으로 승격한 장항은 금속공업 이외에 비료·조선 등의 공업이 발달했습니다만, 이제는 경제가 어려운 곳입니다』

―後望山(후망산) 동쪽으로 농지가 보이는데요.

『이곳은 강, 바다, 땅이 모두 오염되었어요. 토양오염으로 인해 각종 암환자가 집단적으로 발생하고 있는 마을이 있습니다. 일부 농경지에서 수확되는 쌀은 정부가 전량 수매해서 폐기하고 있습니다』

―羅唐의 수군이 기벌포에서 23차례 접전했는데, 전투해역의 범위를 어떻게 판단하고 계십니까.

『장항읍 앞바다로부터 庇仁灣(비인만: 서천군 西面)까지 25km에 이르는 해역이 싸움터였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29번 국도를 타고 「韓山모시타운」 앞을 지났다. 그 앞쪽 韓山李氏 集成村(집성촌)에 고려 말의 성리학자 李穀(이곡)·李穡(이색) 父子를 모시는 文獻書院(문헌서원)이 있다. 牧隱(목은) 이색은 고려왕조에 충절을 지킨 「三隱(삼은)」의 1인으로서 문하에 權近(권근), 金宗直(김종직), 卞季良(변계량) 등을 배출해 조선 성리학의 주류를 이루게 했다. 문헌서원 동쪽에는 고려시대에 금강의 방어를 위해 축조된 乾芝山城(건지산성)이 있다.

한산초등학교 앞에서 613번 지방도로를 타고 내려가 금강변에 바짝 접근하면 「신성리 갈대밭」이 펼쳐져 있다. 서천군청 직원들은 『로맨틱한 30, 40代 여성들이 유별나게 많이 찾아와 그때 그 시절을 「은밀하게」 회상하는 곳으로 소문났다』면서 『요즘 방영 중인 TV 드라마 「이산」의 촬영현장』이라고 소개했다.

갈대는 습지나 갯가, 강변의 모래땅에 군락을 이루며 자라는 여러해살이 식물이다. 이삭은 빗자루를 만들고, 이삭의 털은 솜 대용으로 사용되며, 성숙한 줄기는 갈대발·갈삿갓·삿자리 등을 엮는 데 쓰이고, 펄프 원료로도 이용된다. 특히 갈대밭은 삽이 들어가지 않을 만큼 단단해 강변의 흙이 강물에 씻겨 나가지 않도록 한다. 시멘트를 바르지 않는 生態(생태) 운하를 건설하는 데 있어 가장 요긴한 식물이다.


『뱃길만 열어 주소』
선박을 흉내 낸 江景젓갈전시관 건물.

우리 일행은 부여군 세도면 황산대교를 건너 江景邑(강경읍)에 이르렀다. 천혜의 내륙항이었던 강경포구에는 일찍이 서해에서 각종 해산물과 교역품이 들어와 이곳에서 전국 각지로 팔려 나갔다. 조기·소금·새우젓은 강경 場市(장시)의 3大 거래품목이었다. 특히 조선 중기에는 中國의 무역선이 들어왔고, 말기에는 대구-개성과 함께 전국 3大 시장을 이루어 1972년 금강 하굿둑이 축조되어 뱃길이 막힐 때까지 번영했다.

200여 년 전에 벌써 시가를 형성하고 수운을 크게 열어 충남·전북지방 물류의 중심이었다. 강경은 전라도 사투리로 「강갱이」 또는 「갱갱이」라고 불린다. 여기서 「갱이」는 「邊(가)」를 뜻하는 말로서, 강경은 「강가」를 의미한다.

조선시대의 실학자 朴趾源(박지원)이 쓴 소설 「許生傳(허생전)」에 강경포구가 등장한다. 許생원은 한양의 어느 부호에게 빌린 1만 냥을 밑천으로 삼아 강경에서 소금 등을 매매해 100만 냥이나 벌었다. 이처럼 商(상)행위를 통해 조선조의 낙후된 경제체제를 타파해야 한다는 그의 주장은 우리나라 經濟史(경제사)에서 큰 의의를 지닌다.

이곳의 강경商高는 전국에서 손꼽히는 명문이었다. 현재 강경읍에는 논산시와 부여군을 관할하는 지방법원 및 지방검찰청, 논산시를 관할하는 경찰서가 소재하고 있다. 「강경맛젓갈협의회」의 전시관에 들러 박종률 회장 등 강경 유지들과 만났다.

―강경젓갈이 전국적인 명성을 얻게 된 까닭은 무엇입니까.

『1972년 무렵까지 강경포구에 어선이 들어왔어요. 그때 시장에서 팔다 남은 생선은 소금을 쳐 토굴에서 갈무리했거든요. 이제 배는 들어오지 않지만, 풍부한 영양분을 그대로 발효·숙성시키는 기술이 어디로 가겠습니까. 요즘은 전국 어항에서 생선을 구입해 와서 염장을 하지만, 200년 전통의 강경젓갈의 감칠맛은 여전합니다』
전국 3大 場市의 하나였던 江景邑의 현재 모습.

―요즘도 재래식 토굴에서 발효시킵니까.

『아니죠. 온도 10~15℃를 유지하는 저온창고에서 약 3개월간 발효시킵니다. 우리 선조들이 땅에 묻거나 서늘한 곳에서 100일 동안 담궜던 지혜를 과학적으로 계승하고 있는 겁니다』

―거래량은 얼마나 됩니까.

『맛과 품질이 전국적으로 알려져 성수기에는 하루 평균 250~ 300드럼씩 거래되고 있습니다』

―강경읍 인구가 많이 줄어들었습니다.

『전성기에는 상주인구 2만5000명에다 유동인구 10만 명이었지만, 지금은 1만3000명 정도입니다』
백마강에서 바라본 百濟大橋. 철새들이 몰려오고 있다.


『우리의 소원은 뱃길이 열리는 것』
百濟의 국제항이었던 부여의「구드래」. 지금은 白馬江을 오르내리는 유람선의 선착장으로 사용되고 있다.

―금강운하 건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금강은 새로 개발할 게 없습니다. 옛날처럼 배가 다니게 해주면 됩니다. 우리의 소원은 뱃길이 열리는 것입니다』

강경맛젓갈협의회 건물은 뱃길 열리기를 기다리는 주민들의 소망을 담았는지, 선박의 모습을 흉내내고 있다. 건물 내부의 전시관은 새우젓·어리굴젓·창란젓·황석어젓·오징어젓·낙지젓·명란젓·조개젓·아가미젓·꼴뚜기젓·개불젓·성게알젓 등이 진열된 「젓갈 백화점」으로 활용되고 있다.

건물의 옥상에 오르면 「금강의 보석」 강경읍내를 조망할 수 있다. 강경포구의 랜드마크인 옥녀봉 정상(해발 80m)에는 등대를 흉내 낸 탑형 건물 하나가 높이 솟아 있다. 이것 역시 뱃길을 기다리는 강경읍 주민들의 소망을 담은 것으로 느껴졌다.

젓갈 상점들이 즐비한 강경읍을 뒤로 하고 백제의 都城(도성) 사비의 국제항이었던 「구드래」로 들어갔다. 현재의 구드래는 백마강(금강의 부여 구간)을 오르내리는 유람선의 선착장이 되어 있다. 구드래 인근 토속음식점에서 충남발전연구원 원장 金容雄(김용웅) 박사를 만났다.


백제의 古都 부여와 공주, 그리고 世宗市
公州의 고마 나루. 고마 나루는 백제의 두 번째 수도 熊津의 내륙항이었다.

우리는 구드래 나루에서 배를 타고 약 30분간 落花巖(낙화암), 釣龍臺(조룡대) 등 경승지를 둘러보았다. 백마강을 내려다보듯 우뚝 서 있는 낙화암은, 660년 羅唐연합군의 침공으로 나라가 망할 때 백제 여성들이 백마강에 몸을 던져 절개를 지키는 모습이 落花(낙화)와 같다고 하여, 조룡대는 唐나라 장수 蘇定方이 백마를 미끼로 삼아 龍을 낚았다는 곳이라 하여 각각 그런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두 곳 절벽에 刻字(각자)된 「落花巖」과 「釣龍臺」는 조선조의 성리학자 宋時烈(송시열)의 글씨다.

우리는 「백제큰길」을 달려 공주의 「고마 나루」에 이르렀다. 공주는 백제의 두 번째 수도 熊津(웅진)이며, 고마 나루는 웅진의 국제항이었다. 고마 나루는 국민관광지로 조성되고 있다.

공주에서 금강을 따라 40번 지방도로를 달리다 다리 하나를 건너 금강 南岸(남안)의 「행정중심복합도시」에 이르렀다. 「행복시」를 홍보하는 건물의 전망대에 올라 보니 아직은 허허벌판이다. 다음은 충남발전연구원 원장 김용웅 박사와 가진 문답이다.

―행정중심복합도시의 명칭을 「世宗市」로, 법적 지위는 「특별자치시」로 하고, 관할구역은 행정도시 건설예정지와 주변지역으로 한정하는 「세종특별자치시」 설치법안이 국회 처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 법안은 국회에서 통과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세종특별시 법안은 우리나라 지방행정 체계와 법질서를 파괴하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우리나라 도시지역이 광역자치단체로 되기 위해서는 최소 100만 명 이상의 행정수요를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20~30년 후에 50만 명의 인구를 지니게 될 도시개발지역(世宗市)을 미리부터 특별자치시로 지정하는 것은 기존의 법체계를 파괴하는 행위입니다』
금강의 南岸 행정중심복합도시로 진입하는 다리.


『행정비용의 낭비를 자초하는 법안』

이어지는 김용웅 박사의 말이다.

『행정중심복합도시에 광역자치단체 수준의 법적 지위를 부여한다면 지방행정 공무원 규모는 물론 중앙정부의 지역단위 기관과 조직이 크게 증대될 수밖에 없습니다. 인구 50만 명의 기초자치시의 경우 약 1만5000명의 지방공무원을 유지하고 있는 반면, 유사 규모의 광역자치단체는 약 3배의 지방공무원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광역자치단체 관할 구역에는 기초자치단체 관할구역에 없는 많은 정부기관이 설치됩니다. 연간 행정비용의 낭비가 수백억 내지 수천억원에 이르게 됩니다』

―인구 50만 명이 되려면 앞으로 20~30년 걸릴 것이라는데, 그렇게 국가자원이 낭비된다면 그 돈을 행정도시의 기능 강화와 경쟁력 증진에 쓰는 것이 더 효율적이겠군요.

『선진국에서는 인위적으로 분할된 행정구역을 통합해 규모의 경제와 경쟁력을 갖춘 지역경제권 형성에 힘쓰고 있습니다. 세계적 추세를 거스르고서는 국가경쟁력을 갖추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사회적 여론의 사각지대 속에서 국가적 손실이 예견되는 세종특별자치시 법안이 통과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세종특별자치시 법안을 지지하는 가장 대표적인 주장이 행정도시를 정부 직할의 특별자치시로 지정해야 도시 건설이 안정적으로 추진될 수 있다는 것인데요.

『그런 주장은 근거 없는 궤변이고, 행정도시 건설 제도에 대한 오해의 산물에 불과합니다. 왜냐하면 행정도시의 건설은 「세종특별자치시」 법안과 관계없이 「행정중심복합도시건설을 위한 특별법」에 의거해 현재 정부 직할로 추진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일행은 「행복시」를 나서 大田川이 금강으로 흘러드는 어귀에서 대전광역시 양홍규 정무부시장과 만났다. 충남, 충북, 대전의 경계지역이다. 양홍규 부시장은 『km당 건설비용이 경부운하 277억원, 호남운하 165억원이 드는 데 비해 금강운하는 85억7000만원』이라면서 『금강운하의 건설은 황해시대의 중심인 대전과 충남북의 물류에 크게 기여할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 일행은 금강운하의 芙蓉(부용)터미널 예정지(충북 청원군 부용면)와 신탄진을 거쳐 대전의 동쪽에 위치한 금강운하의 수량 공급처가 될 대청호에 이르렀다. 날은 이미 저물었다. 금강권발전연구회 상임대표 尹喆浩 박사와 함께 대전시내로 들어왔다. 다음은 尹박사와의 문답이다.


『環황해시대의 중심거점으로 발전』
금강 하류의 3大 포구로 번영했던 聖塘浦(익산시 성당면 성당리). 뱃길이 끊긴 옛 포구에는 모형선 한 척이 정박해 그때 시절을 그리워하고 있다.

―금강운하의 사업구상은 어떤 내용입니까.

『금강 하굿둑에서 대전까지 126km, 미호천 합류지점에서 오송까지 14km로서 모두 140km가 될 것입니다. 수위유지보 및 갑문 3개소, 저수갑문 1개소, 내항 및 배후 산업단지 5개소 등으로 사업비는 3년간 모두 1조2000억원을 투입하는 것입니다』

―식수오염은 없겠습니까.

『공주·부여 취수원 등은 대청댐 광역상수도사업으로 모두 대청댐으로 이전될 것입니다. 현재 공사 중인데, 2008년 12월 준공 예정으로 식수원 오염은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금강운하의 수량은 어떻습니까.

『대청댐 기준 갈수량은 초당 21m3로 주운유량은 충분합니다』

―기대효과는 무엇입니까.

『중부광역경제권을 環(환)황해권의 중심거점으로 발전시킨다는 것입니다』

다음 답사지는 호남운하가 금강운하와 연결되는 전북 益山市(익산시)였다. 익산시청 관계자와 사전 약속된 취재일자는 1월25일이었다. 금강운하 예정지를 이틀간 답사할 예정이었지만, 尹박사의 강행군으로 금강 답사를 단 하루 만에 끝내 버렸다.

1월24일 오전 10시, 대전고속버스터미널에서 東서울行 고속버스를 탔다. 운행시간은 불과 1시간40분. 東서울터미널에 내려 진흙투성이의 구두를 닦으려고 구둣방에 들렀는데, 마침 익산시청의 운하TF팀 양경진씨에게서 전화가 와서 1월25일 오전 8시50분 익산역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

양경진씨와 통화를 하던 중에 구두를 닦던 구둣방 주인이 대뜸 『운하는 미친 짓』이라고 외쳤다. 「왜냐」고 물으니 『내가 바로 長城 사람인데, 배가 어떻게 산을 넘어가느냐』고 화를 냈다. 그의 견해가 거칠기는 하지만 분명히 「비용 對 효율」 면에서 운하 건설을 반대하는 우리 사회의 일정 부분을 대변하고 있었다. 어떻든 「운하 건설에 대한 우리 사회의 컨센서스는 쉽게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물길 없으면 역사도 문화도 없다』
「백제문화권의 큰어른」金三龍 前 원광大 총장(왼쪽)과 미륵사지석탑의 해체·복원공사를 현장에서 지휘하는 김태준 박사.

1월25일 오전 8시50분, 益山(익산)역에서 익산시청 기획행정본부 양경진씨와 정책개발팀장 김태준 공학박사를 만났다. 우리는 양경진씨가 모는 지프를 타고 5km 정도 南下해 목천동 만경강변에 닿았다. 만경강 위에 걸린 목천대교를 건너면 金堤市(김제시)이다. 김태준 박사는 만경강·동진강의 수질개선과 운하의 필요성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만경강과 동진강은 완주·익산·전주·정읍 공업단지에서 유입된 폐수로 인해 강바닥 하층부에 썩은 퇴적물이 쌓여 죽은 강으로 변하고 있으며, 이미 전주 8景(경) 중 東浦歸帆(동포귀범), 飛飛落雁(비비락안)의 2景이 만경강의 폐수 속에 묻혀 있습니다.

수질의 개선, 그리고 공단의 물동량 감당, 중국과의 교역에 필요한 상선이 직접 현지에서 선적할 수 있으려면 뱃길의 복원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다리를 건너지 않고 둑길을 6km쯤 달려 만경강의 지류인 탑천에 이르렀다. 탑천은 익산시와 군산시의 경계를 이루고 있다.

다시 북상해 군산시 대야면-임피면을 거쳐 입점리 고분군이 있는 익산시 웅포면에 닿았다. 금강의 옛 나루 웅포에는 익산과 부여를 잇는 웅포대교가 놓여 있다. 웅포대교 일대에는 백로 떼가 몰려와 한겨울의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聖塘浦, 뱃길마저 끊긴 옛 포구

웅포에서 706번 지방도로를 北上하여 강경·군산과 더불어 금강 하류의 3大 포구로 번영했던 聖塘浦(성당포)에 도착했다. 성당포는 현종 3년(1662) 성당창이 설치되면서 조운선 출입이 빈번했지만, 금강 하굿둑이 축조된 이래 뱃길마저 끊긴 옛 포구이다.

성당포구 앞에는 수령 400~500년 정도로 추정되는 잘생긴 은행나무 한 그루가 있다. 이 은행나무 앞에서 「조운선의 무사 항행, 포구의 안녕과 풍어를 기원하는 당산제가 행해졌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고 한다.

우리는 성당면에서 남하해 황등면에 이르렀다. 유형원의 「반계수록」에 따르면 이곳에는 김제의 碧骨堤(벽골제), 고부의 訥堤(눌제)와 더불어 나라 안 3大堤(제) 중 하나였던 黃登大堤(황등대제)가 있었다. 현재는 제방이 폐지되어 농경지로 경지 정리된 상태이다.

익산시청의 「世宗-새만금 네트워크 조성 관련 자료」에 의하면 만경강 74km, 동진강 44km를 준설하고, 금강과 만경강을 연결하는 수로를 건설하고, 동진강-만경강-금강의 뱃길 연결로 발생하는 토사를 새만금 토지 성토로 사용한다.


「百濟문화권의 큰어른」 金三龍 선생
해체 중인 미륵사지석탑. 불이 켜져 있는 부분이 석탑의 중심을 잡는 심초석이다.

김태준 박사는 『서해안 지역의 공장들은 비싼 육로 수송비용을 감수하며 제품을 釜山으로 수송해 왔으나 금강을 통해 물류 이동을 하게 되면 물류 비용을 크게 절감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양경진씨는 『물길이 없으면 역사가 없고 역사가 없으면 문화도 없다』고 말했다.

1월25일 오전은 호남운하와 금강운하가 만나는 익산 서부지역을 답사했다. 오후에는 백제 문화유적이 집중되어 있는 익산 동부지역을 돌아보기로 했다. 익산시청 기획행정본부에서 익산시유적전시관 관리사업소 학예연구담당 李信孝(이신효)씨를 만나 그의 안내로 金三龍(김삼룡) 명예교수를 그의 숙소로 방문했다. 김삼룡 선생은 원광大 총장과 30년간 마한·백제문화연구소 소장을 역임한 「익산의 큰 어른」이다. 올해 84세인 金선생은 『현장에서 설명하겠다』며 필자의 답사에 동행했다.

―익산은 어떤 곳입니까.

『익산은 우리 민족문화의 형성기에 대동강 유역이나 경주지역과 더불어 청동기 문화의 중심지였습니다. 이러한 청동기 문화를 기반으로 마한시대에 들어와서도 문화적 중심지였던 유서 깊은 고을입니다. BC 198년 위만의 반란으로 나라를 잃은 고조선의 俊王이 宮人을 데리고 바다를 건너 남하했던 지역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익산지역을 백제의 네 번째 도읍지로 보고 계십니다만, 그 근거는 무엇입니까.

『김정호의 「대동지지」에는 익산지역이 백제 무왕대의 別都(별도)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일본 靑蓮院(청련원)에서 발견된 「觀世音應驗記(관세음응험기)」에서는 백제 武王代에 이 지역으로 천도하였음이 기록되는 등 백제시대와 관련된 중요한 사실을 전해 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기록들은 이 지역에 대한 현장조사 과정에서 밝혀지고 있는 청동기 시대의 유물, 그리고 입점리와 웅포리 고분군과 미륵사지 등 백제시대의 유물과 유적 등 많은 고고학적 자료를 통해 확증을 더해 주고 있습니다』

―익산의 지리교통상 특징은 무엇입니까.

『익산은 남으로 만경강, 북으로는 금강을 통해 서해로 나가는 수로가 있어서 다른 어떤 지역에 못지않게 교통중심지로서의 여건을 갖추고 있습니다. 백제가 수준 높은 문화를 창출할 수 있었던 것은 중국 南朝와의 교역을 통한 선진문물의 유입이 한몫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교역이 해로를 통해 이루어졌다는 것은 잘 알려진 역사적 사실입니다』
백제 29대 무왕이 태어난 곳으로 전해지는「못가마을」. 마룡지는 매립되어 농토가 되어 있다. 대나무 숲 아래에 무왕의 생모가 살았던 집터가 있다.


가장 오래된 석탑, 미륵사지석탑
국보 제11호 미륵사지석탑의 해체 공사 전의 모습.

우리는 미륵사지(익산시 금마면 기양리)에 도착했다. 미륵사는 백제 무왕(600~641) 때 창건되었으며, 고려 때까지는 성황을 이루었으나, 조선 중기 이후에 폐사된 것으로 추정된다. 김삼룡 선생은 미륵사의 특징을 명쾌하게 설명했다.

『첫째 절터가 7만 평으로 세계 제1의 규모이고, 둘째 가람배치가 3塔 3金堂(금당)으로서 세계에서 유일하고, 셋째 金堂에는 석가모니가 아니라 미륵삼존불을 모셨으며, 넷째 미륵사지석탑(西석탑)은 木塔에서 石塔으로 전환하는 시기의 始原塔(시원탑)입니다』

국보 제11호 미륵사지석탑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석탑으로서 현재는 익산의 상징물이다. 1915년에 시멘트로 그 뒷면이 수리되었는데, 10여 년 전부터 서쪽으로 기울어져 도괴 우려 때문에 해체·수리 작업이 진행되고 있었다. 현재, 기단부만 남아 있다.


해체작업 중인 미륵사지석탑
국보 제289호 왕궁리 5층석탑.

―10년 전부터 해체·수리 작업을 한다고 했는데, 아직 해체작업도 끝나지 않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석탑의 안전성 연구가 끝나지 않아 마음놓고 뜯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KAIST와 서울大에서 지반조사를 했고, 어제(1월24일) 밤 늦게 전문가 회의에서 결론이 났습니다. 그것은 기초 지반을 보강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기반을 다진다면 앞으로 1400년 후에야 현재의 강도에 이르게 된다고 합니다. 도괴 원인이 밝혀진 만큼 해체·복원에 대한 근심을 덜었어요. 2009년 말까지 해체를 끝내고 2014년까지 복원할 예정입니다』

―미륵사지 석탑이 기울어진 이유가 무엇입니까

『석탑의 부재 가운데 일부가 파손되거나 빠져나갔기 때문이었습니다』

―석탑의 부재 가운데 再사용 가능한 것이 얼마나 됩니까.

『전체 부재 중 95%는 다시 써도 문제가 없고, 5%만 파손이 심하거나 멸실되어 새 부재로 교체할 것입니다』


『益山은 백제 武王의 王都였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미륵사는 백제 무왕이 왕비인 선화공주의 권유로 창건한 절이다. 武王의 이름은 「璋(장)」인데, 그의 어머니가 홀로 京師(경사) 남쪽 못가에 집을 짓고 살면서 못의 교룡과 野合하여 그를 낳았다. 이는 백제 29대 법왕과 지금의 마룡지 근처에 살던 여인이 혼외정사를 하여 璋을 낳은 것으로 해석된다.

璋은 마를 캐다 파는 것으로 생업을 삼았으므로 사람들이 그를 「맛동」(薯童·서동)이라 불렀다. 맛동은 신라 진평왕의 셋째 딸 선화공주가 예쁘다는 소문을 듣고 경주에 가서 아이들에게 마를 나누어 주며 『선화공주가 맛동을 남몰래 숨겨 두고 밤마다 안고 논다』는 가사의 노래를 부르게 했다. 우리 역사상 가장 유명한 「섹스 루머」이다. 우여곡절을 거쳐 선화공주와 맛동은 결혼하게 되었고, 법왕의 서자인 맛동은 그 후 인심을 얻어 백제의 30代 왕에 오르게 된다.

김삼룡 선생과 필자는 맛동의 생모가 살았다는 집터와 마룡지(금마면 서고도리), 그리고 신라 문무왕이 報德國王(보덕국왕)으로 책봉한 安勝(안승: 고구려 보장왕의 서자)의 근거지 報德城(보덕성)을 둘러본 후 王宮面 「王宮里 5층석탑」(국보 제289호)을 찾아갔다.

이곳은 馬韓의 도읍지, 백제 武王의 천도지, 報德國(보덕국)의 도읍지 등으로 추정되어 왔다. 김삼룡 선생은 「왕궁리 5층석탑」 일대를 武王 때의 백제의 왕궁터로 확신하고 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1976년 이 탑 주변의 발굴조사에서 「官宮寺」라고 새겨진 기와가 나왔습니다. 이 銘文 기와는 백제의 세 번째 수도인 부여에서도 발굴된 바 있습니다. 이것은 이곳이 백제의 네 번째 수도였음을 나타내는 증거의 하나로 봅니다』

―그렇다면 백제의 수도가 다시 부여로 되돌아간 시기를 언제라 보십니까.

『무왕의 別世로 의자왕이 승계한 641년 무렵이라고 생각합니다. 효심이 깊었던 의자왕은 父王의 王宮에 5층석탑을 세워 아버지를 추모한 것입니다』

왕궁리 5층석탑은 1965년 해체 복원작업 중에 1층 옥개석과 기단에서 많은 舍利莊嚴具(사리장엄구) 등이 발견되어 국보 제123호로 일괄 지정되었다. 그중에서도 「金剛經(금강경)」을 새긴 19장의 순금경판은 세계에서 유일한 것이다.

『일본에서 발견된 「觀世音應驗記」에는 왕궁리 5층석탑에서 나온 사리장엄구는 원래 제석사의 석탑에 소장한 것이었는데, 제석사의 화재 때 불에 타지 않는 기적이 일어나 인근에 있는 왕궁리 5층석탑으로 옮겼다고 쓰여 있습니다. 바로 저 앞에 제석사 터가 있습니다』

김삼룡 선생과 필자는 현재 마무리 공정에 들어간 왕궁리 박물관 내부를 잠시 둘러보고 제석사 터로 갔다. 제석사 터에는 탑돌 2개만 남아 있었다.

김삼룡 선생은 이 탑돌에 파인 홈을 가리키면서 『왕궁리 5층석탑에서 발굴된 금제 사리함과 크기가 똑같은데, 이는 왕궁리 5층석탑의 순금제 금강경판과 사리장엄구가 제석사에서 옮겨 온 것이라는 「관세음응험기」의 정확함을 말해 주는 것』이라고 했다.
왕궁리 5층석탑 보수공사 중에 발견된 사리장엄구와 순금제 금강경판. 국보 제123호로 일괄 지정되었다.


옛 물길 복원, 환경파괴인가?

필자는 백제 무왕과 선화공주의 무덤이라고 전해지는 「쌍릉」(익산시 석왕동)을 둘러본 후 김삼룡 선생과 헤어져 익산역에서 기차를 타고 상경했다.

필자는 5박6일간 영산강·만경강·금강 등 옛 백제문화권을 走馬看山(주마간산)의 답사를 했다. 한반도대운하의 건설에 대한 「백제문화권」에 사는 주민들의 반응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우호적이지 않았다.

다만 영산강·만경강·금강의 수질이 개선되어야 한다는 데 대해서는 반대가 없었다. 이제는 옛 물길의 복원이 과연 환경을 파괴하는 것인지, 운하 건설의 비용이 효율을 웃도는 것인지에 대한 전문가 수준의 토론이 필요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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