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조선 기사

[인터뷰] 한국관광대학 노인전문병원 金周榮 이사장

『예순까지는 돈 모으는 재미로, 일흔까지는 일하는 재미로, 이제는 사회에 환원하겠다는 뜻으로 삽니다』

글 정순태 기자  2008-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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人生(인생) 육십에 서울의 캐피탈 호텔, 칠십에 한국관광대학, 팔십에 노인전문병원을 설립한 金周榮(김주영) 이사장을 만나러 갔다. 지난 2월4일 오전 9시 승용차를 타고 東서울IC에 중부고속도로를 진입해 25분쯤 달리니 「한국관광대학」이라고 쓰인 간판이 눈에 띈다. 그 바로 남쪽에서 西이천1C를 빠져나온 뒤 지방도로를 5분쯤 달려 한국관광대학 노인전문병원(경기도 이천시 신둔면 고척리)에 도착했다.

노인전문병원 1층 로비에서 金周榮 이사장을 만났다. 금년 80세. 170cm 정도의 키에 꼿꼿한 체격이다. 1층부터 6층 건물의 천장까지 중앙이 뚫려 채광창을 통해 햇빛이 밝게 들어오는 건물이다. 金이사장을 따라 건물 바깥이 훤히 보이는 누드 엘리베이터를 타고 「하늘 정원」이라고 명명된 건물의 옥상에 올라갔다.

400평 규모의 「하늘 정원」에 서면 전망이 좋다. 제1, 제2 중부고속도로 위로 달리는 자동차들이 장난감처럼 앙증맞다. 한겨울인데도 푸른 잔디가 깔려 있다. 잔디 위에는 소나무 등 정원수와 꽃나무 등이 심어져 있다.

「하늘 정원」에서 계단으로 내려오면서 물리치료실, 작업치료실, 한방치료실 등을 둘러보았다. 이 노인전문병원에서는 하루 2회 중풍치료, 치매치료, 통증치료, 전기치료, 작업치료, 한방치료 등 전문 재활치료 프로그램을 시행하고 있다고 한다. 2층 병원장실로 내려갔다. 金仁哲(김인철) 병원장이 합석해 차를 마셨다.

―환자 입원실이 호텔 수준이군요.

『지난 2년여 동안 하루도 거르지 않고 병원의 건축현장을 직접 지휘했어요. 언젠가는 저와 제 아내가 머물 곳으로 생각하고 정성을 다해 지었습니다』

金周榮 이사장은 100억원을 출연해 대지 3000평, 건평 2500평(6층) 건물에 240여 병실을 갖춘 노인전문병원을 최근 준공해 개원했다.

―남들이 은퇴하는 60세 이후에 10년 주기로 새로운 사업 분야에 도전해 오셨는데, 특별한 사연이 있으십니까.

『일을 하다 보니 그렇게 되었습니다』

金仁哲 노인전문병원 원장에게 질문했다. 金仁哲 박사는 가톨릭의대 성모병원장, 대한외과학회 회장을 역임한 의학계의 중진이다.

―병원장님, 병원시설이 호화스러운 만큼 입원비가 비싸겠군요.

『입원비가 5인 입원실 기준으로 月 150만원 내외여서 다른 노인병원에 비해 20만~30만원 저렴합니다. 대한민국 노인병원의 선도적 모델이 되고자 합니다』


한국관광大 학생들의 「서비스 프로페셔널 자원봉사팀」
노인전문병원의「하늘 정원」.

―노인전문병원의 기능은 무엇입니까.

『우리 사회는 인구의 고령화가 급속히 진전되고 있는 반면에 삶의 형태는 핵가족화, 맞벌이 가족으로 변하면서 노환으로 고통받는 노인들을 가정에서 직접 돌보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우리 노인전문병원은 한국관광大의 모든 교직원과 학생들의 참여를 기반으로 일반 종합병원이나 노인병원과 차별화된 새로운 기능을 갖추고 있습니다』

―어떤 내용의 차별화입니까.

『예를 들면 우리 대학 교직자들과 학생들이 「서비스 프로페셔널 자원봉사팀」을 조직해 환자들과 다양한 교류 활동을 합니다. 호텔경영과는 미술놀이, 디지털관광과는 환자 가족에게 이메일 쓰기, 항공서비스과는 산책, 관광영어과는 책읽기, 관광일본어과는 말벗하기, 관광중국어과는 차 마시기를 환자와 함께 합니다.

12개 학과 학생들이 적극 참여하고 있어요. 치유효과를 높이고 삶의 활력을 부여하게 되죠. 뿐만 아니라 우리 대학 호텔조리과 교수진이 환자들에게 올바른 영양식단을 제공합니다』

金周榮 이사장과 필자는 노인전문병원 바로 위에 위치한 한국관광대학 이사장실로 올라갔다. 60세 이후 10년마다 새로운 분야에 도전하고 있는 그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궁금했다.


6·25 때 유격부대원으로 參戰

―조선닷컴 인물정보에 들어가 보니 金이사장님의 고향은 황해도 연백인 걸로 되어 있습니다. 6·25 때 월남하셨습니까.

『저의 고향 황해도 연백군 고미동은 38선 남쪽으로 6·25 전에는 남한 땅이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저는 失鄕民(실향민)이죠. 지금 강화도 북단에 가서 망원경을 들이대면 바다 너머로 우리 집이 빤히 보여요. 직선거리로 7.5km밖에 안 됩니다』

―1950년 6·25 발발 때는 무엇을 하셨습니까.

『그때 제 나이가 스물셋인데, 서울에서 홍익大 전문부에 다녔어요. 6월28일 한강다리가 폭파되고 인민군이 서울로 들어와 피란을 갔죠. 고향 친구와 둘이서 일산을 거쳐 능곡을 지나는데, 유엔군의 비행기에서 뭔가 번쩍 하고 떨어지는데, 그 폭탄의 파편에 맞았어요. 중상은 아니었지만, 아직도 내 몸 여기저기에 파편으로 인해 상처가 남아 있습니다』

―남쪽이 아니라 북쪽으로 피란을 가다 유엔군 비행기의 오폭을 당하신 것이군요.

『고향에 가서 며칠 쉬다가 그해 7월 초순 온 가족 10여 명이 1t이 안 되는 배 한 척을 타고 바다로 나왔어요. 그리고는 9·28 수복 때까지 약 3개월간 예성강 하구 밑 해상에서 船上(선상)생활을 했습니다. 그곳이 바로 「나들섬」이 건설된다는 해역입니다』

―이사장님의 약력을 보니 1951년 8240 유격부대에 입대한 것으로 되어 있던데, 어떤 활동을 하셨습니까.

『유엔군의 물자지원을 받아 강화도·교동도 등의 해안을 경비했습니다. 이때 고향집에 혼자 남아 계시던 어머니를 강화도로 모셔 왔어요』

―그때는 쉽게 남북을 왔다 갔다 할 수 있었습니까.

『1968년 휴전선에 철책이 설치되기 전에는 간혹 왕복하는 사람이 있었죠. 당시 57세였던 어머니는 집을 지키고 계시다 주재소로 붙잡혀 가셨습니다. 가족의 월남 경위 등을 추궁받다가 기절을 해서 주재소 인근 민간인 집에 누워 계신다고 피란 나온 고향 사람이 전해 주었습니다. 동료들과 함께 밤에 연백에 상륙해 어머니를 업고 왔죠. 어머니는 1980년 87세를 일기로 서울에서 별세하셨습니다』


「手打 구공탄」 만드는 일꾼으로 일해

―1953년의 휴전 후에는 무슨 일을 하셨습니까.

『6·25가 끝나고 軍에서 제대하고 나니 공부는커녕 생계가 막막했습니다. 7남매의 막내인 제가 부양해야 할 가족이 17명이었어요. 휴전 다음 해인 1954년에 강화도에서 서울로 올라와 닥치는 대로 온갖 일을 했습니다. 당시는 떡메 같은 방망이로 쳐서 「手打(수타) 구공탄」을 만들었는데, 그런 막일도 했습니다』

―힘든 시기였군요.

『어느 겨울날, 전차에서 내려 청계천 6가 古서점가를 지나다 성에가 낀 古서점의 유리창 안을 들여다보니 서점 주인이 난롯가에서 한가로이 책을 읽고 있었습니다. 책을 마음껏 읽으면서도 먹고 살 걱정이 없는 그분이 얼마나 부럽던지…』

1961년, 그는 부산에 내려가 모직을 제조하는 「화랑염직」의 사원으로 입사했다.

『부산 범일동 화랑염직 본사에서 일하다가 5·16 혁명이 나고 얼마 후 서울지사에서 근무하게 되었어요. 그런데 서울지사에서 함께 일하던 화랑염직 사장의 조카와 뜻이 안 맞아 사표를 내고 미약하지만 저 나름의 일을 시작하게 되었죠』

―어떤 사업입니까.

『모직과 연관된 거예요. 군용 폐품이 많이 나돌던 시절입니다. 제기동 시장에 가보니 군용 수통피가 산더미같이 쌓여 있더라고요. 수통피 안쪽에는 수통의 보온을 위해 모직이 붙어 있습니다. 처음에는 수통피 2만5000원어치를 사서 동네 아주머니들에게 내피를 뜯게 해 그것을 모직회사에 팔았습니다. 모직회사는 그것을 재생해서 오버 원단을 만드는 겁니다. 수통에 붙은 놋쇠 고리만 분해해 팔아도 인건비를 포함한 원가가 빠졌죠』


집장사에서 관광호텔사업 시작

―전쟁이 끝난 지 10년쯤 되어가니 수통피 폐품 구하기가 갈수록 어려웠을 것 아닙니까.

『곧 한계가 오더군요. 그래서 그동안 적금 부은 돈으로 홍은동에 13만원짜리 집을 사서 직접 수리해 파니 좀 남았습니다. 1969년에 신개발지 화곡동으로 이사해 10년을 살면서 까치산 기슭에 집 열 채를 지어 팔고, 1980년에는 중곡동으로 옮겨 집장사를 했습니다』

―관광호텔사업은 언제 시작하셨나요.

『1984년 4월, 안양에 있는 120실 규모의 뉴코리아 호텔을 인수한 것이 첫걸음이었습니다. 오랫동안 적자로 운영되던 안양 뉴코리아호텔을 인수한 지 3개월 만에 흑자로 전환했습니다』

1988년 8월, 그는 서울올림픽 개최에 맞추어 이태원동에 호텔캐피탈을 건립해 개점했다. 캐피탈 호텔은 無차입으로 운영되는 특급 관광호텔로 소문나 있다.

『제가 예순 때인데, 골조공사만 쌍용건설에 맡기고 나머지는 내 손으로 마감했습니다』

―1997년 학교법인 巨榮(거영)학원을 설립하고, 2001년 한국관광大를 개교했습니다. 어떻게 대학 설립비용을 마련하셨습니까.

『제가 호주에서 돈을 좀 벌었습니다』

―호주에 가서 무슨 사업을 하셨습니까.

『1991년, 우리 아이(차남)가 시드니大에 유학해 제가 처음으로 호주에 갔습니다. 시드니市에는 일본인 소유의 호텔은 많은데, 한국인이 경영하는 호텔은 없었어요. 호텔 관련 정보를 얻기 위해 직원 500여 명이 근무하는 큰 부동산 회사에 찾아갔다가 한국인 직원 吳씨를 만났어요.

마침 부동산을 입찰 경매한다고 해서 吳씨와 함께 경매장에 갔죠. 입찰장에서는 경매대상 건물의 영상을 모니터로 죽 보여 줍니다. 해안가 4층 건물 하나를 놓고 싱가포르인 두 명이 경쟁을 하고 있었는데, 제가 끼어들어 162만 달러를 써 넣어 낙찰을 받았어요. 영어를 못 하는 제가 현장을 둘러보지도 않고 집을 산 겁니다.

낙찰받은 후 관광지 「맨리 해안」의 현장에 가서 보니 사람이 살지 않고 관리인 한 사람만 지키는 낡은 건물이었습니다. 吳씨가 대단히 미안한 표정을 짓기에 제가 「吳형, 걱정 마소. 나도 다 생각이 있어 매입한 거요」 하고 안심시켰지요』


『시드니에서 돈을 벌었는데, 市의회로부터 공로상을 받았죠』

―어떤 구상으로 헌집을 매입하신 겁니까.

『제가 건물 수리 전공 아닙니까(웃음). 자재를 직접 구입해 수리하고 대리석까지 붙여 460만 달러를 받고 매도했습니다. 수리비가 100만 달러 정도 들었으니 200만 달러를 번 것입니다. 이것이 호주의 첫 사업이었어요. 시드니 의회에서는 리노베이션을 통해 관광지 경관을 발전시켰다고 제게 공로상을 주었습니다』

―다음 사업은 무엇이었습니까.

『시드니 시내에서 15km 떨어진 공업지역인 파이브독은 주거용지로 변경이 가능하지만, 폐기물 매립구역이 중앙에 있어 향후의 주택 건설 시 예상되는 높은 환경처리 비용 때문에 여러 번 유찰된 8200평짜리 공장부지였습니다.

저는 그 폐기물 매립지에 親환경적인 수영장과 테니스코트를 먼저 설치했습니다. 주변 대지의 가치를 상승시켜 성공적인 아파트 단지를 조성하게 했습니다. 호주의 일간지들은 제가 큰돈을 벌었다고 보도했습니다. 사실은 땅값 350만 달러와 설계비 40만 달러를 투입하여 920만 달러에 매각했습니다』

―1993년엔 「호텔캐피탈 시드니」를 운영하셨지요.

『시드니 호텔을 2400만 달러에 매입해 1000만 달러쯤 들여 수리했습니다. 국내 호텔 중 최초로 해외에 진출한 「호텔캐피탈 시드니」는 한국産 보일러를 공수해 사우나를 설치, 호주 상류층에 한국식 목욕문화를 크게 「어필」했습니다』

―시드니 호텔을 매각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한국관광大를 짓기 위해 「호텔캐피탈 시드니」를 4200만 달러를 받고 팔아 대략 1000만 달러를 벌었습니다』

―한국관광大의 설립 비용이 얼마나 들었습니까.

『270억원쯤 투입했습니다. 학교 건물은 골조만 건축사업자가 시공하고, 나머지 공사는 제가 자재를 직접 구입하고 단종업자들과 협의해서 마무리했습니다. 건축비용을 50~60% 절감할 수 있었습니다』


졸업생 취업률 97%, 입시경쟁률 8년 연속 10대 1 이상

―하필이면 관광대학을 세우셨습니까.

『미래산업인 동시에 굴뚝 없이 외화를 획득하는 관광산업 발전에 필요한 전문인재를 양성해 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 뜻은 이루어지셨습니까.

『우리 대학 졸업생이 연간 1000명씩 배출되는데, 매년 1만 건의 취업요청이 옵니다. 취업률은 97%에 달하는데, 나머지 3%는 「초특급호텔 같은 데 가겠다」고 직장을 고르기 때문입니다.

전국 148개 전문대학 중에 졸업생 취업률 최상위권을 차지하고, 신입생 입학 경쟁률이 개교 이래 8년 연속해서 10대 1 이상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노인전문병원의 모습이 자연과 잘 어울리군요.

『그것도 골조만 건축회사가 세우고, 이후 제가 마무리 공사까지 했습니다. 소홀하게 지은 건물이 아닙니다. 제가 청계천·을지로의 자재 도매상, 논현동의 타일 수입상, 곤지암의 고철상에 가서 구입할 물건을 찍어 놓으면 즉각 신용으로 그 물건을 보내 줍니다.

저는 평생 남에게 폐를 끼친 일이 없어 대외적 신용을 쌓게 되었습니다. 노인전문병원 건물에 직접 투자한 금액은 70억원인데, 누가 평가하든 150억원 이하로는 안 봅니다. 노인전문병원의 기계와 장비는 대학재단의 돈으로 설치한 것입니다』

―개인 재산과 수입은 어느 정도입니까.

『대학과 병원은 재단 소유이고, 개인재산은 500억원 정도입니다. 대학과 병원 이사장으로서 봉급과 판공비는 한 푼도 받지 않습니다. 임직원들의 경조사에도 저 개인 돈으로 부조합니다』

―이사장의 삶에서 남다른 모습을 느꼈습니다.

『예순까지는 돈을 모으는 재미로, 일흔까지는 일하는 재미로 살았습니다. 팔순에 든 지금은 사회에 환원하는 의미의 삶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더 하고 싶은 일이 있으십니까.

『노인전문병원 옆 빈 터 3500평에 실버타운을 지으려 합니다. 2년 후에 준공 예정입니다』

―고향에 가고 싶지 않으십니까.

『2003년, 북한에서 「민족화합협의회」 명의로 「편리한 시기에 평양을 방문하도록 초청하면서 체류기간 신변안전과 모든 편의를 보장해 줄 것을 담보합니다」라는 내용의 초청장이 왔지만, 가지 못했습니다』

―왜요.

『그때 마침 척추가 아파 움직이기 어려웠습니다』

―지금은 매우 건강해 보이시는데요.

『노인병원을 지으면서 하루도 빠짐없이 현장에서 일했습니다. 소학교 다닐 때 집에서 학교까지 20리 길을 책보따리를 어깨나 허리에 매고 왕복했습니다. 그게 저를 건강하게 만든 것 같아요. 요즘 저의 건강관리는 산책과 小食(소식)입니다. 저는 겨울에도 내복을 입지 않습니다. 골프를 치러 필드에 나간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金이사장은 시력도 매우 좋다. 인터뷰 중 필자가 녹음기의 테이프가 돌아가고 있는지 확인하려고 눈을 가늘게 뜨자, 그는 『테이프가 돌아가네요』 했다.


건강비결은 산책과 小食

―부인께서도 건강하시죠.

『저보다 한 살 아래인데 건강해요』

―어떻게 만났습니까.

『아내는 평양에 살다가 6·25 때 월남했습니다. 강화도에서 피란생활 중 처음 만났는데, 나중에 중매로 결혼하게 되었습니다. 아들 둘, 딸 둘을 뒀는데 모두 결혼하고, 저와 집사람만 강북 한강변 빌라에서 삽니다』

―앞으로 무슨 일을 하고 싶습니까.

『1군사령관을 지낸 오영우 대장, 해병대사령관을 지낸 조기엽 중장, 해군사관학교 교장을 지낸 정용근 중장 등 이북 출신 예비역 장군들과 함께 저의 고향 앞 바다에 남북협력사업으로 고기 잡는 사업을 하기로 했습니다. 이를 정부에 건의하려고 계획서까지 만들었지만, 「나들섬」을 만들겠다는 인수위의 발표로 포기했습니다』

필자는 인터뷰를 끝내고 이사장실을 나오면서 맹상원 교수(전자계산소 소장)에게 말을 건넸다.

―중부고속도로를 지날 때마다 저는 「한국관광대학」이라고 쓰인 간판의 색감이 좋다고 느꼈습니다.

『그 간판은 이사장님이 손수 만드신 겁니다. 이사장님이 나무를 잘라서 글꼴을 만들고 광고판에 일일이 붙이셨어요』

―글씨체가 좋은데요.

『이사장님의 여비서가 컴퓨터에서 採字(채자)해 확대한 겁니다. 그 간판을 붙인 지 벌써 7년 넘었는데 다크 블루 바탕과 흰 글씨가 잘 어울리지 않습니까. 이사장님은 열심히 일하십니다.

노인전문병원을 지을 때 보니 이사장님은 오전 7시에 자택에서 출발해 7시30분에는 공사현장에 도착하십니다. 이사장님이 그러시니 공사관계자는 물론 교직원들이 「농땡이」를 피울 수 없습니다. 이사장님의 삶은 젊은 우리들에게 생동하는 교과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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