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조선 기사

[현장답사] 李明博 정부의「나들섬 프로젝트」

『나들섬을 건설하면 流頭·百中 사리 때 漢江·臨津江·禮成江 하구 유역에 홍수 난다』

글 정순태 기자  2008-0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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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明博(이명박) 대통령이 大選 때 南北경제협력사업으로 공약한 「나들섬 프로젝트」에 대해 「졸속」이라는 비판이 대두되고 있다. 좁은 해역에 나들섬을 건설할 경우 연중 水位(수위)가 가장 높아지는 流頭(유두)·百中(백중) 사리 때는 남한의 坡州市(파주시)·高陽市(고양시)·金浦市(김포시)·江華郡(강화군)의 저지대와 북한의 곡창인 延白郡(연백군)·開豊郡(개풍군)의 평야지대에 大홍수가 발생할 위험성이 있다는 것이다.

나들섬 프로젝트는 「강화도 북쪽 중립해역에 면적 30km2 인공섬을 만들어 통신·통행·통관 등의 애로가 없는 인구 20만 명의 남북경협 모델로 발전시킨다」는 구상이다. 언론보도에 따르면 금년에 南北 공동으로 한강 河口(하구)와 주변 해역의 모래 채취에 따른 환경영향평가를 끝낸다면 2013년까지는 나들섬을 준공할 수 있다는 것이 정부의 예상이다.

그렇다면 「한국의 맨해튼이 될 것」이라는 나들섬 건설 예정지의 모습은 어떠하며, 과연 인공섬 건설에 적합한 지형적 조건일까? 필자는 나들섬의 갯벌이 바다 위로 드러나는 사리 때에 맞춰 2월21일(음력 1월15일)과 3월9일(음력 2월2일)의 두 차례에 걸쳐서 나들섬 예정지와 1.5km 떨어진 龜登串(구등곶) 등 강화도 북단을 답사했다.

1차 답사에는 해군사관학교 교장을 역임한 정용근 예비역 해군중장과 한국관광大 金周榮(김주영) 이사장, 2차 답사에는 해병대사령관을 역임한 趙基燁(조기엽) 예비역 중장과 金周榮 이사장이 동행했다.

세 분의 공통점은 황해도 延白郡 출신의 실향민이라는 점이다. 특히 金周榮 이사장의 고향집은 나들섬 예정지와 1.5km 상거한 연백군 海月面 龍鳳里(해월면 용봉리)의 姑美洞(고미동)에 있었다고 한다.


나들섬 예정지에 돌출해 있던 바위섬 청주礁
구등곶 돈대 옆 해안에 나들섬 예정지의 갯벌이 흘러들어 퇴적되고 있다.

『밀물 때 바닷물이 저의 고향집 마당 1m 앞 절벽 아래에까지 들어왔어요. 어릴 적에 저는 그 바위 끝에 앉아 나들섬 예정지 쪽을 바라보며 망둥이 낚시를 했습니다』

─나들섬 예정지는 당시 어떤 모습이었습니까.

『당시, 우리 고향마을 사람들은 지금의 나들섬 예정지에 돌출해 있던 작은 바위섬을 「청주礁(초)」라고 불렀습니다(礁는 물속에 숨어 있는 바위를 말함). 밀물 때는 바닷물로 덮여 있지만, 썰물 때는 갯벌(모래톱)이 드러나는 해역입니다. 30여 년 전에 우연히 「전설의 고향」이라는 TV극을 보니 「청주초」의 전설이 방영됩디다』

─어떤 스토리입니까.

『오래되어 기억이 희미하지만, 청주초에 살던 부부가 홍수 때 슬하의 딸을 파도에 잃어버리고, 연백군의 姑美洞에 이주해 와 당집을 짓고 살면서 어찌어찌 했다는 스토리입디다. 姑美洞이라면 바로 제 고향마을이거든요. 그 당집이 바로 저의 고향집 뒤편에 있었어요. 어떻든 나들섬 예정지와 그 후에도 깊은 인연이 있습니다』

─인연이라니요.

『6·25 동란 때 우리 집 식구 12명은 1t도 안 되는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 예성강 河口 앞바다에서 9·28 서울수복 때까지 약 3개월간 船上(선상)생활을 했거든요. 그곳이 바로 「나들섬」이 건설된다는 해역입니다』
장어가 우글거렸다는 구등곶 돈대 앞 갯벌.

─金이사장님만큼 나들섬을 잘 아는 분도 없겠습니다.

『船上 피란 시절, 물이 써는 밤에는 청주초 근방에 배를 대놓고 나들섬 갯벌에 내렸어요. 그때 거기서 숭어 낚시를 많이 했죠. 숭어의 배(복부)에 갯벌이 잔뜩 묻어 있데요. 때로는 다른 피란선에서 내린 청년들과 만나 장난을 치며 놀다가 날이 새면 흩어져 각자의 피란선으로 돌아갔죠. 그때 제 나이가 스물셋이었어요』

─피란이라기보다는 여름철 海洋(해양) 캠핑의 기분이었겠군요.

『9·28 서울수복 후에는 강화도로 들어와 있다가 유엔군의 지원을 받는 8240유격대에 입대해 江華島(강화도)·喬洞島(교동도)·西檢島(서검도)·席毛島(석모도) 등의 해안방어 근무를 했습니다. 1953년 휴전 후에는 강화군의 북단 兩寺面(양사면)에서 면서기로 잠시 재직하다가 그 이듬해 上京(상경)했죠』

동행한 정용근 제독은 『광복 후 연백군의 38선 이북은 북한에, 38선 이남은 남한에 속했는데, 연백군 전체가 북한의 관할에 들어간 6·25 동란 이후 延安郡과 白川郡으로 분할되어 있다』고 말했다.

鄭제독의 고향은 연안 쪽이라고 한다. 남한에서 「白川」을 「배천」이라고 발음하고 있는데, 현재 북한의 지도에는 한글로 「백천」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서울 이태원동 캐피탈호텔에서 출발한 우리는 50km를 달려 김포시 月串面(월곶면) 文殊山城(문수산성) 앞을 지나 江華大橋(강화대교)를 건넜다. 강화대교에서 48번 국도를 타고 강화읍 시가지를 통과해 강화도의 북단인 兩寺面에 이르는 거리는 약 20km이다.


넓은 갯벌 드러난 나들섬 예정지
구등곶 앞바다의 변화를 설명하고 있는 兩寺面 주민 주남제씨.

양사면 北省1里 마을회관 앞에서 71세의 이곳 주민 주남제씨를 만났다. 우리 일행은 기러기떼가 떠다니는 저수지 옆을 달려 고산천 水門 앞까지 왔다. 수문 앞에는 철책이 설치되어 있고, 그 앞 바다는 통행할 수 없는 중립지역(DMZ)이다.

우리는 승용차를 수문 앞에 세워 두고 가파른 오르막길 100여m를 걸어서 龜登串(구등곶) 돈대에 도착했다. 바다로 돌출해 있어 나들섬 예정지를 가장 가까이에서 관찰할 수 있는 포인트다.

墩臺(돈대)는 적의 침입이나 척후활동에 대비할 목적으로 접경지역 또는 해안지역에 흙이나 돌로 쌓은 소규모 진지이다. 조선 肅宗(숙종) 때 설치한 구등곶 돈대는 이름에서 짐작하듯 거북이가 기어오르는 듯한 형상의 작은 구릉 위에 위치해 있다. 전면과 좌우 측면으로 갯벌이 발달되어 있어 외적 경계와 방어에 매우 유리한 지형이다.

현재, 구등곶 돈대에는 해병대의 小哨(소초)가 설치되어 있다. 우리는 해병부대의 허락을 얻어 구등곶 돈대의 망대에 올라가 정면의 나들섬 예정지를 관찰했다. 이날의 날씨는 청명한 편이었으나 봄철의 일교차 때문인지 海霧(해무)가 짙게 끼어 視界(시계)는 불량했다. 그래도 1.5 km 북쪽으로는 나들섬 예정지의 갯벌이 海上에 뚜렷하게 드러나 있었다.

구등곶 돈대의 正北 방향에 위치한 연백군 姑美洞은 바다안개 때문에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연백군과 예성강을 사이에 둔 개풍군의 山河(산하)는 비교적 또렷했다. 구등곶 돈대의 서쪽 교동도도 잘 보였다. 金周榮 이사장은 『맑은 날에 오면 망원경으로 우리 집 마당까지 볼 수 있는데…』라며 몹시 아쉬워했다.

구등곶 돈대에서 고미동까지는 직선거리로 약 7.5km이다. 그 사이에 면적 30km2의 인공섬을 만든다면 이 해역의 지형으로 보아 南北으로 4.5km, 東西로 7km의 형태(4×7.5km=30km2)로 되게 마련이다. 그렇다면 물이 나고 드는 폭은 현재의 7.5km에서 3.5km 정도로 급격히 줄어들게 된다.

金周榮 이사장이 말했다.

『이곳 간만의 차는 약 12m에 달하기 때문에 나들섬을 만들려면 10m 이상 盛土(성토)해야 할 것입니다. 이런 정도의 성토작업은 우리 토목기술이 이미 세계적 수준인 만큼 충분히 가능하다고 봅니다. 다만 이런 규모로 바다를 막아 놓으면 홍수 때 바닷물이 어디로 흘러갑니까. 주변 육지나 섬의 저지대는 침수하지 않겠습니까. 그것이 걱정입니다』

兩寺面 주민 주남제씨는 『20여 년 전부터 썰물 때 천둥처럼 「쾅쾅」 소리를 내며 떨어져 나간 나들섬 예정지의 갯벌이 조류를 타고 흐르다가 구등곶 돈대 옆쪽 해안에 퇴적되고 있다』고 말했다.

과연 구등곶 돈대로부터 교동도行 뱃머리가 있는 寅火里(인화리)까지의 연안 해역 10여 리에는 나들섬 예정지에서 떨어져 흘러 들어온 갯벌이 수북이 쌓여 있다. 현 상태로도 이곳은 流路(유로)의 변화가 극심한 해역이어서 나들섬을 만든다면 그 유지·관리가 만만찮을 듯하다.


『팔뚝만 한 숭어가 뛴다』

바닷물과 민물이 격렬하게 교차하는 구등곶 앞 바다는 낚시가 잘될 같은 포인트이다. 다음은 주남제씨와의 문답.

─구등곶 돈대 앞바다에는 어떤 어종이 서식하고 있습니까.

『팔뚝만 한 숭어가 뛰고, 민어·농어가 지천입니다. 해안에 널린 돌덩이만 들치면 그 밑에 장어가 우글거립니다. 그러나 철책에 막혀 지금은 바다로 나가 어로를 할 수 없으니 그림의 떡이죠』

─검문소를 통과해 北省里(북성리)로 들어오다 낚시꾼 두 사람을 보았는데요.

『그분들은 바다가 아니라 마을 저수지에 낚시하러 온 겁니다. 우리 마을 사람들은 바다를 지척에 두고 있지만, 철책에 막혀 바다로 나가지 못하고 농사만 짓고 삽니다』

낮 12시, 우리는 구등곶 돈대 10여 리 동쪽 해안에 위치한 양사면 鐵山里(철산리) 北長串(북장곶) 돈대로 이동했다. 해병 758OP의 위병소를 통과해 오는 4월 준공 예정인 「북장곶 전망대」 공사 현장에 도착했다. 현장에서 만난 경상도 사투리의 해병 중사가 지형을 설명했다.


『개성·개풍은 6·25 전에는 우리 땅』
북장곶 돈대에서 바라본 북의 開豊郡.

『폭 2.3km의 한강 하구를 사이에 두고 이곳과 마주 보고 있는 곳이 북한의 開豊郡 영정동입니다. 바로 저 아래 우리 측의 철산리와 북측의 닭다리浦 사이의 거리는 더 가까워 1.8km입니다.

날씨가 맑은 날에는 여기서 25km 북방 開城市의 송악산이 잘 보입니다. 개성과 개풍은 6·25 동란 전에는 우리 땅이었습니다』

연백군·강화도·교동도로 둘러싸여 있는 해역에 나들섬이 들어서면 한강·임진강·예성강 하구로 내려오는 강물과 서해안에서 3개의 강 하류로 역류하는 바닷물의 흐름을 막아 생태계에 매우 나쁜 영향이 나타날 것으로 예상되었다.

「전망대」에서 내려와 우리는 한강 河口를 북향하고 있는 철산리 마을 앞 해안도로를 지났다. 金周榮 이사장은 『철산리 나루는 어선 400여 척의 船籍港(선적항)으로 번영했는데, 6·25 때 북한군의 해안포 사격으로 마을이 쑥대밭이 되었다』고 회고했다.

현재 해안에는 철책이 설치되어 한강과 주민을 격리시켜, 주민들은 1km 남쪽 산 밑에 작은 취락을 형성하고 있다. 우리는 視界(시계)가 양호한 날에 兩寺面 일대를 再답사하기로 하고 歸京(귀경)했다.


『서해안 지도를 바꾼다더라』
조기엽 前 해병대 사령관과 김주영 한국관광大 이사장(뒤쪽)이 구등곶 돈대 위에서 바다 건너 연백군 등의 주변 지형을 살피고 있다.

제1차 답사를 한 지 보름 만인 3월9일, 필자는 金周榮 한국관광大 이사장과 해병대사령관을 역임한 趙基燁 예비역 중장과 함께 구등곶 돈대를 향해 서울 캐피탈호텔 앞에서 출발했다. 80세의 연세에도 불구하고 두 번이나 답사에 동행한 金이사장에게 감사의 말씀을 드렸더니 그는 이렇게 말했다.

『그렇잖아도 1년에 네댓 번은 찾아가 望鄕祭(망향제)를 올리는 곳입니다. 정 부담을 느낀다면 가다가 맛있는 차 한잔 사소』

3월9일(일요일)은 음력 2월 초이틀로서 음력 보름과 함께 물때가 맞는 날이다. 날씨는 비교적 맑았지만, 일기예보로는 『주말에 중국에서 발생한 황사가 점차 한반도로 몰려오고 있다』고 해서 걱정스러웠다.

역시 황사가 문제였다. 시계가 흐릿한 조건에서 사진 촬영을 한 후 강화도를 벗어나 낮 12시30분 김포시 월곶면에 위치한 「청룡회관」에서 해병 ○사단의 사단장으로부터 오찬을 대접받았다. 해병○사단장은 전직 해병대사령관에 대해 정중하게 예우했다. 그래서 『한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이라고 하는지 모르겠다.

해병○사단장은 『강화군청 관계자가 「나들섬과 江華조력발전소가 건설되어 서해안 지도를 바꾼다는 얘기가 나돌자 강화군 일대의 땅값이 크게 오르는데, 매물은 없다」고 하더라』고 현지 사정을 전했다.

江華조력발전소는 강화도-교동도-서검도-석모도 등 강화군 4개 섬 6.5km를 방조제로 연결하고 25.4 MW급 수차 발전기 32기를 설치하는 대규모 사업이다. 2014년까지 民官(민관) 합작으로 2조1300억원을 투입, 팔당댐 발전소의 4.2배에 이르는 153만kW의 전력을 인천광역시 전체 가구의 43%에 40만 가구에 공급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우리는 해병○사단장과 헤어져 愛妓峰(애기봉)으로 올라갔다. 다음은 애기봉의 유래이다.


애기봉의 유래
愛妓峰. 박정희 대통령의 휘호이다.

<1636년 淸太宗(청태종) 홍타이지가 10만 대군을 이끌고 침략하자 평양감사는 애첩 「愛妓」를 데리고 漢陽(한양)으로 피란해 오다 바로 개풍군에서 청군의 포로가 되어 북으로 끌려가고, 愛妓만 김포반도의 祖江浦(조강포) 마을로 건너와 머물게 되었다.

愛妓는 매일 조강포 동쪽 봉우리에 올라가 일편단심 북녘을 바라보며 감사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다가 죽으면서 이 봉우리에 묻어 달라는 유언을 했다.

1966년 순시 때 이런 전설을 들은 朴正熙(박정희) 대통령은 『愛妓의 恨(한)은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오가지도 못하는 우리 1000만 이산가족의 恨과 같다면서 「愛妓峰」이라는 친필휘호를 남겼다>

전망대에서 前方의 북한지역을 바라보면서 관측장교의 브리핑을 들었다. 강폭은 불과 1.3km, 수심은 3~10m라고 한다.

애기봉 전면에 북한의 선전마을인 「해물마을」이 보인다. 3~4층짜리 아파트가 10여 동 줄지어 있다. 그 앞 북한 측 철책에는 고압전류가 흐른다고 한다.

애기봉의 左前方으로는 적의 땅굴 진지인 쌍마·도고개가 관측된다. 右前方으로는 임진강이 漢江 본류로 흘러드는 북측의 관산포가 있다.

한강은 김포시 陽村面(양촌면)에서 北流(북류)하다가 霞城面(하성면)에 이르러 크게 좌회전해 애기봉 앞으로 흘러간다.

북한의 산은 벌거벗은 민둥산이다. 이른 봄이지만 남쪽의 산하는 푸르다.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남쪽 사람은 살을 뺀다고 야단들인데, 북쪽 동포는 밥을 굶는다는 현실은 참혹한 일이다.

나들섬을 만든다는 것은 卓上空論(탁상공론)에 불과하다는 반대론이 일어나고 있는 만큼 세심한 연구·검토가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좁은 해역에 여의도 면적 10배의 인공섬을 건설하면 북한의 곡창인 延白평야를 물바다로 만들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남북경제협력을 위한 단지가 필요하다면 오히려 喬洞島를 활용하고, 지난 60년간 방치한 황금어장 나들섬 예정 해역은 南北 공동어로구역으로 삼는 방안에 대한 연구·검토가 필요할 것 같다.

17代 대통령인수委에서 「나들섬 계획」에 참여한 김영우씨(경기도 연천·포천 선거구의 한나라당 공천 취득)와 전화로 문답했다.
애기봉에서 바라본 북한의 선전마을「해물」.


『남북경제 교류의 교두보』

─나들섬 계획에 참여, 큰 활약을 했다고 듣고 있습니다.

『저는 「나들섬」이라는 이름만 지었을 정도이고, 프로젝트의 골간을 만든 것은 張錫孝(장석효) 한반도운하연구회 회장과 류우익 대통령비서실장입니다』

─나들섬을 구상하게 된 기본적인 동기는 무엇입니까.

『북한을 개혁·개방으로 이끌기 위해 남북 경제교류의 교두보와 시험장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나들섬은 남북의 자본·기술·인력이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도록 중립지대에 설치됩니다. 이로써 북한은 체제 위협을 받지 않고 자유시장경제를 경험할 수 있는 겁니다』

─북한의 반응은 어떠합니까.

『공식 반응은 없습니다만,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말을 전해 들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 말을 전하는 통로가 있습니까.

『밝힐 수 없습니다』

─좁은 해역에 여의도 10배 면적의 인공섬을 만들면 남북 양측의 저지대가 물에 잠기지 않겠습니까.

『범람하지 않을 겁니다. 나들섬 위아래와 하천을 준설하고 성토작업을 하면 그런 위험은 없다고 봅니다. 기술적인 문제는 張錫孝 한반도대운하연구회 회장께 문의해 보십시오』
애기봉 전망대에서 본 임진강 河口의 관산포(오른쪽 끝 부분). 관산포에서 한강 본류와 합수한다.


『나들섬 주변 해역 단면적은 비슷』

張錫孝 한반도대운하연구회 회장은 서울부시장 재직시 청계천 복원사업을 실무적으로 지휘한 李明博 대통령의 제1급 참모이다. 다음은 張錫孝 前 서울부시장과의 전화문답이다.

─나들섬 예정지의 자연적 조건은 어떻습니까.

『밀물 때는 수심 4m, 썰물 때는 갯벌이 드러나는 해역이죠』

─나들섬 구상은 어디서 출발한 것입니까.

『(한강) 운하를 건설함에 있어 물이 빠졌을 때도 배가 다닐 수 있도록 수심 10m의 뱃길을 파야 합니다. 海路(해로)를 내면 그 준설토를 버릴 데가 없잖아요. 그래서 10m 정도 盛土하는 나들섬을 구상하게 된 겁니다.

나들섬에는 3만t급 선박 6척이 동시 접안할 수 있도록 船席(선석) 항만 6개를 건설할 것입니다』

─어떻든 북한을 도와주려고 나들섬을 건설했다가 오히려 북한의 평야지대를 물바다로 만들어 버린다면 그야말로 「긁어 부스럼」 아닙니까.

『세부설계는 아직 하지 않았지만, 그럴 염려는 없습니다. 나들섬으로 드나드는 항로의 준설로 수심이 깊어지기 때문에 나들섬 주변 해역의 斷面積(단면적)은 건설 前과 건설 後 비슷해집니다. 나들섬 주위에는 방조제를 쌓을 것입니다』

李明博 대통령의 공약인 나들섬 건설은 현장의 지형조건으로 미루어 「졸속」이란 비판이 있는 만큼 좀더 치밀한 사전 검토가 필요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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