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조선 기사

[同行 취재] 韓中해저터널 船上 토론
375km 平澤-威海 해저터널 가능한가?

『韓中해저터널을 건설해 平澤港을 環황해경제권의 중심항으로』(金文洙 경기도지사)

『해저터널만 뚫으면 이익 날 것처럼 말해선 안 돼』(安秉直 여의도연구소이사장)

글 정순태 기자  2008-03-23

  • 페이스북
  • 트위터
  • 카카오톡
  • 글자 크게
  • 글자 작게
지난 2월16일(토요일) 오후 6시30분, 경기도청이 주최한 船上(선상)토론회를 취재하기 위해 平澤港(평택항)에서 중국 山東省(산둥성)의 웨이하이(威海·위해)市로 떠나는 1만6000t급 여객선 KC브릿지號(호)에 승선했다. 2박3일의 일정이었지만, 웨이하이市에서는 1박 도하지 않고 한나절만 상륙하며, 특히 항해 중(往航 14시간, 復航 16시간, 합계 30시간 소요)에는 잠자고 먹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토론회에 참석하도록 되어 있었다.

오후 7시, 아직 배가 출항하지 않았는데, 선내 올림피아홀에서는 토론회가 시작되었다. 참가자는 官界·學界·文化界 등 70명. 호스트인 金文洙(김문수) 경기도지사가 다음 요지의 인사말을 했다.

『해상에서 육지를 바라보니 평택항의 가치를 더욱 실감할 수 있습니다. 평택항 일대에는 西海대교, 가스기지, 포승산업단지, 기아자동차공장, 해군 제2함대사령부가 있으며, 앞으로 주한미군의 기지가 집결하게 됩니다.

평택항은 東아시아의 지리적 요충일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제1의 교역상대인 中國과의 교류에 있어 국내 어느 항만보다 유리한 입지인 만큼 정부의 아낌 없는 투자로 黃海(황해)경제권의 중심항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어 박승기 KC브릿지號 선장이 환영사에서 『평택항은 1986년 국제무역항으로 개항했지만, 중국을 잇는 정기항로를 본격 개발한 것은 5년여밖에 되지 않습니다. 평택항은 서해上으로 나가는 데 있어 섬이나 암초 등의 해상장애가 거의 없어 앞으로의 활용도가 서해안 항만 중 가장 높습니다』라고 말했다.

이에 金지사는 『평택은 우리 서해안에서 최적의 항구이며, 중국의 경제 중심인 상하이(上海)와 가장 가깝습니다. 하지만 그동안 투자가 너무 적어 평택항은 철도 등 인프라가 갖춰지지 않았습니다. 평택항 배후지 개발과 인프라 확충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라고 화답했다.

이어 「韓中 경제교류 사례발표」라는 제목으로 현대자동차 林哲虎(임철호) 상무와 LG전자 朴載圭(박재규) 상무가 각각 주제발표를 했다. 林哲虎 상무는 『중국 자동차 시장에서 고가 브랜드부문에서는 일본과 유럽 메이커가 독주하고, 소형차 부문에서는 중국 메이커가 약진하고 있어 중국시장에서 한국은 7%의 시장점유율로서 제5위에 머물고 있다』면서 『중국시장에서 한국차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일본 혼다·도요타와의 경쟁이 불가피하다』고 했다.

朴載圭 상무는 『LG전자의 물류 애로를 타개하기 위해서는 평택항 취항 노선의 확대와 평택항의 부두, 터미널, 보세창고 등 인프라의 확충이 시급하다』고 했다.
선상토론회에서 주제발표를 하는 임철호 현대자동차 상무.


『한 발 빨리 움직이면 호랑이 등에 올라탈 수 있다』

牙山灣(아산만)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는 평택항과 唐津港(당진항)은 최근 칭다오(靑島) 등 중국 동부해안 항만들로부터 『항로를 개설해 달라』는 요청을 잇달아 받고 있지만, 船席(선석) 부족으로 항로 증설을 못 하고 있는 실정이다.

경기도청 철도항만과 관계자에 따르면 평택항은 2006년 컨테이너 선석이 1개 불과했으나 2008년 현재 선석이 4개로 늘어났으며, 2009년에는 선석이 7개로 증설된다고 말했다. 또한 자동차운반선(RoRo) 전용부두는 현재 2개이나 금년과 2010년에 각각 1개씩 증설해 4개에 이르게 된다고 한다.

주제발표 후의 패널토론에서 金文洙 지사는 『중국, 러시아, 일본 등 강국 사이에 위치한 한국은 한발 빨리 움직이면 호랑이 등에 올라타지만, 자칫 시기를 놓치면 코끼리 발에 밟히는 형국이 될 것』이라며 『韓中해저터널과 韓日해저터널의 건설은 물론 두 곳을 연결해 우리나라가 東아시아의 허브 역할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金지사는 『韓中해저터널 출발지가 평택, 仁川(인천), 唐津(당진) 등 어느 곳이 될지 모르고, 남북통일이 되면 황해도 장산곶에서 山東省까지의 거리가 불과 190km라는 점도 주목할 점』이라면서 『터널 추진에 따라 양국 간 경제효과가 어떻게 나타날 것인지 전문가들의 검토가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李漢俊(이한준) 경기도 정책특별보좌관은 『열차로 韓中 간을 연결하면 항공운송은 물론 선박운송보다 훨씬 높은 경제적 효과를 볼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면서 『물류와 여객 수송은 물론 해저터널 양쪽 종착지 배후도시의 경제효과도 클 것인 만큼 적극적인 검토가 이뤄져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許在完(허재완) 중앙大 교수는 『韓日 해저터널의 건설은 20여년 전부터 본격 논의해 왔으나 양국의 입장 차 때문에 현실화되지 못하고 있다』면서 『오히려 일본보다는 중국과의 해저터널을 뚫는 것이 더 효율적이고 강한 추진력을 얻을 수 있다』고 말했다.

崔然惠(최연혜) 철도대학장은 『평택~威海 간 韓中해저터널의 길이는 375km인 만큼 아주 큰 사업으로서 이를 준공한다면 대한민국의 기술적 개가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선상토론회에 참석한 각계의 전문가들은 우리나라가 東아시아의 중심이 되기 위해서는 京畿灣(경기만) 등 서해안 일대의 투자와 개발이 시급하고, 역사·지리·경제적 측면에서 韓中해저터널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았다.


師弟 간의 격돌

그러나 한나라당의 「싱크탱크」인 여의도연구소의 安秉直(안병직) 이사장은 회의적이었다. 다음은 安이사장의 발언요지이다.

『첫째, 韓中해저터널은 중앙정부에서 검토해야 할 문제로 지방정부인 경기도가 추진할 일이 아닙니다.

둘째, 해저터널만 뚫으면 이익이 날 것처럼 쉽게 말하지만, 그렇게 속단할 수 없습니다. 프랑스와 영국을 잇는 해저터널의 경우 계획 당시 B/C레이쇼(비용 對 이익 비율)를 5로 잡았지만, 1994년 준공 후의 그것이 0 이하로 떨어졌습니다. 당연히 자본금은 잠식되고, 투자자는 손해를 보았어요. 결국 英佛(영불)해저터널의 철도 운임을 선박 운임보다 3배쯤 올려야 했는데, 그러면 선박과 경쟁을 할 수 없는 겁니다. 이제는 자본금에 대한 이자부담을 탕감시켜 경영비만을 비용으로 계상해 운영해 오고 있는 실정입니다.

셋째, 도버해저터널의 길이는 50km 이하이지만, 평택과 威海를 잇는 韓中 해저터널은 375km인 만큼 기술상의 문제도 치밀하게 검토해 보아야 합니다』

그의 신중론이 제기되자 토론장은 일순 정적이 감돌았다. 安秉直 이사장과 선상토론회의 호스트인 金文洙 경기도지사는 서울大 경영대의 師弟(사제)관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金지사는 安秉直 이사장의 회의론에 반론을 폈다.

『安선생님을 비롯한 (서울大 경영대) 은사들께서는 경부고속도로 건설 때 모두 반대하셨습니다. 그 말씀을 듣고 저도 데모에 나섰다가 진압경찰과 부닥쳐 끼고 있던 안경까지 박살났습니다. 그러나 그때 만약 선생님들의 주장에 따라 경부고속도로가 건설되지 않았더라면 대한민국의 오늘은 없었을 겁니다.

韓中해저터널은 급부상하는 韓中교류의 활성화를 겨냥한 것으로서, 그동안 전문가들 사이에 꾸준히 검토되어 온 것입니다. 이것은 세계 최대의 해저터널로서 공사기간 20년, 소요예산이 100조 원에 이르는 것으로 당연히 국가사업으로 추진되어야 하는 대형 프로젝트입니다. 다만, 대형사업인 만큼 끊임없는 검토를 통해 추진계획의 완성도를 높이겠습니다. 이번 선상토론회는 그런 차원에서 개최한 것입니다』


安秉直과 金文洙
지난 2월16일 평택에서 중국 威海로 출항하는 KC골든브릿지號에 승선하는 김문수 지사.

師弟 간의 논쟁은 참으로 뜨거웠다. 두 사람이 보통의 師弟관계를 넘어 「조직적 동지」였던 만큼 더욱 흥미진진했다. 다음은 작년에 발간된 안병직·이영훈 서울大 교수의 대담집인 「대한민국, 역사의 기로에 서다」에서 인용한 대목이다(괄호 안은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한 편집자의 보충설명).

<이영훈: 제자이자 조직적 동지였던 金文洙군은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안병직: (제가) 1987년 (일본에서) 귀국하여 노동운동을 하고 있던 金文洙를 만나 달라진 내 생각을 이야기했습니다. 잠자코 끝까지 듣고 있던 金文洙가 딱 한마디 하더군요. 『선생님, 너무 변했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는 자네가 노조에 필요했지만, 이제부터는 노조가 자네 도움이 필요 없는 시대가 되었다』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한동안 모습을 볼 수 없었는데, 일년 쯤 지난 어느 날 나를 다시 찾아왔어요. 『선생님, 큰일 났습니다. 선생님 말씀대로 노조가 기금도 생기고 의식도 높아져서 제가 해줄 것이 없어졌습니다』라고 말하더군요.

그 후 소련을 중심으로 한 사회주의 국제체제가 마침내 붕괴되었습니다. 金文洙는 그야말로 껍질을 벗는 고통을 겪으면서 변신에 성공하였습니다. 그 과정에서 나도 많이 설득했습니다. 그 결과, 제도 정치권에 성공적으로 입문해 한나라당 국회의원이 되었지요. 그가 정치가가 될 훌륭한 자질이 있기 때문에 꼭 성공할 것으로 봅니다>


통일신라인의 해상활동은 오늘의 한국에 純度 높은 모델
윤명철 동국大 교수.

20시20분경 참가자들은 「逆發想(역발상) 선상토론회--바다에서 육지를 보자!」는 캐치프레이즈에 걸맞게 갑판 위로 올라가 바다 쪽에서 육지 쪽을 바라보았다. 이날의 일몰시간은 18시12분, 여객부두를 제외하면 항만의 배후지는 이미 캄캄했다. 20시30분 KC브릿지號가 뱃고동을 길게 울리며 출항했다.

21시30분, 다시 선상토론회가 속개되었다. 이번에는 동국大 尹明喆(윤명철) 교수가 「황해를 통한 韓中교류사」라는 제목의 주제발표를 통해 『경기만 지역이 東아시아 地中海(지중해)의 정치·문화·물류의 중심역할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尹교수는 1997년 7월 중국 杭州灣(항주만)의 寧波(닝보)에서 대나무로 엮은 뗏목을 타고 黑山島(흑산도)를 거쳐 인천항에 입항함으로써 「黃海의 地中海적 성격」을 입증한 행동파 학자이다.

『東아시아의 중심부는 내부에 바다를 담고 있는 지중해적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 이러한 東亞지중해가 그 성격과 기능을 제일 완벽하게 발휘한 시기가 통일신라시대였습니다. 東아시아는 이 바다를 중심으로 이어지고 협력하면서 공동의 역사발전을 추구했어요. 그리고 정치나 군사의 대결이 아니라 문화와 경제의 「만남과 아우름」의 질서였습니다.

특히 在唐(재당) 신라인들은 신라인 인식의 지평을 확대시켰고, 東亞지중해에서 문화와 경제의 還流(환류) 시스템을 정착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했죠. 21세기에 들어 세계 각국이 지구라는 거대한 공동체에서 세계화를 추진하고 있습니다. 한국이 의미 있고, 비교적 실수가 적은 미래를 구현하려면 통일신라인들의 활동과 정신은 순도 높은 모델이 될 수 있습니다』

10분 휴식시간에 종이컵 커피를 마시기 위해 자판기가 설치된 휴게실로 올라가다가 TV 앞에서 「심각한 모습」의 중국인 승객들과 조우했다. 한국對중국의 축구 게임이 역전, 再역전 끝에 한국이 3대 2로 승리하는 중계방송을 시청했던 것이다. 요즘 중국인의 내셔널리즘은 좀 유별난 편이다.


『평택-威海는 KTX로 2시간 거리』
山東반도의 끝 成山頭.

이어진 패널토론에서 崔然惠(최연혜) 철도대학장이 먼저 발언했다.

『우리나라 물동량의 절반 이상이 수도권에서 나오는데, 거꾸로 부산까지 내려가 해외로의 물류이동이 일어납니다. 부산항의 처리물량은 연간 1300만TEU(TEU는 20피트짜리 컨테이너)로서 세계 제5위로 떨어져 있는데, 세계 4위까지는 2000만TEU 이상을 처리해 격차가 났습니다.

인천항은 입항과 接岸(접안) 비용이 부산항의 3배 이상이어서 한계가 있는 만큼 앞으로 평택항의 역할이 기대됩니다』

다음은 李漢俊(이한준) 정책특별보좌관의 발언요지이다.

『평택에서 威海까지는 서울로 부산 간 거리보다 다소 짧은 거리로서 KTX로 2시간 거리예요. 시간이 곧 돈이고 경제입니다. 시간의 효율성에 초점을 두었을 때 해저터널은 검토해야 할 단계입니다. 그렇다면 기술적으로 가능할까요? 전문가의 견해는 이렇습니다. 즉, 육지 양쪽에 8km짜리 인공섬을 만들어 현수교로 연결시키고, 그 사이 350km의 바다 지하구간은 TBM(터널공법)으로 뚫는 방식입니다. 탑승객의 안전을 고려해 해저터널 구간엔 25km 마다 환기구를 해면 위로 뽑아 올릴 수 있도록 인공섬을 만든다는 것입니다』

밤 11시30분까지로 예정된 선상토론회는 자정을 넘겨 0시30분까지 계속되었다. 이날의 토론회 후 필자는 여의도연구소 安秉直 이사장과 잠시 만났다.

─사제 간의 논쟁을 보니 사뭇 날카롭습디다.

『내가 보기에 선상토론회가 될 일 안될 일 가려서 얘기하지 않고, 韓中해저터널만 하면 이익 난다는 분위기여서 한마디 한 겁니다』


『기술적·경제적 타당성 좀더 검토해야』
安秉直 여의도연구소 이사장.

─韓中해저터널 건설에 반대하십니까.

『韓中해저터널은 교통수단을 국제화·다양화하는 것인 만큼 그 자체를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기술적·경제적 타당성을 좀더 검토해야 할 것으로 봅니다』

─1960년대 말 우리나라의 야당은 물론 이름난 경제학자들은 모두 경부고속도로 건설에 반대했습니다. 그 까닭은 무엇입니까.

『그때는 「자립경제」 풍조가 세계적으로 확산되고 있었어요. 예컨대 일본에서 東京~나고야 고속도로를 건설할 때 東京大 교수들 가운데 교통학 전공의 교수 1인을 제외하고 전부 반대했습니다. 왜냐하면 도메이(東名) 고속도로를 건설하면 해외의존적이 되고 일본경제가 미국에 종속된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경부고속도로 건설에 서울大에서도 반대여론이 지배적이었습니다. 그렇게 그 시대는 「자립경제」의 우상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지금은 글로벌리즘에 따른 「對外협력경제」가 중시되는 시대인 만큼 해외와의 편리한 교통수단 개발은 찬성으로 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李明博(이명박)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한반도대운하는 어떻게 보십니까.

『세계적으로 내륙수운의 물동량은 줄어들고 있습니다. 물류 중심의 운하는 성공하기가 어렵다고 봅니다』

─한국의 강들은 이미 썩어 버려 그대로 보호·보존할 것도 없는 상황입니다. 수질개선은 시급한 문제가 아니겠습니까.

『수자원 보호, 자연보호, 국토의 균형개발, 관광진흥이 중시되는 운하라면 건설해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4인1실의 객실. 새벽 2시, 파도가 거칠어 아무래도 그냥 잠들기가 어려울 것 같았다. 일부러 위스키 두어 잔을 스트레이트로 마시고 포근하게 잠들었다.


山東반도의 동쪽 끝 成山頭
成山頭에 세워진 3人像. 가운데 秦始皇, 왼쪽은 재상 李斯, 오른쪽은 불사약을 구하러 成山頭에서 출항한 徐福.

2월17일(일요일) 오전 6시30분 기상. KC브릿지號 수석사무장의 안내로 갑판에 올라가 해맞이를 했다. 일출시각은 오전 6시39분이었다.

우리들은 선내 식당으로 내려와 황태해장국으로 아침을 먹고, 오전 10시에 다시 갑판으로 나가 다가오는 山東반도를 바라보았다. 이것 역시 「바다에서 육지를 보자!」는 역발상 선상토론회의 이수과정이었다.

오전 10시30분, KC브릿지號가 榮成市(영성시)의 龍眼港(용안항)에 상륙했다. 龍眼이라면 「용의 눈」이라는 뜻 아닌가! 이날 최저 온도가 영하 3℃라고 예보되었지만, 봄 날씨처럼 포근했다. 榮成市는 上級(상급)인 威海市에 소속된 下級市이다. 면적 6만7000km2, 인구 250만 명인 威海市 산하에는 중심가를 이루는 環翠區(환취구)와 榮成市, 文登市(문등시), 乳山市(유산시) 등이 소속되어 있다. 우리 일행은 용안항에 상륙해 버스를 타고 山東반도의 동쪽 끝인 成山頭(성산두)로 이동했다. 뿔처럼 돌출한 모습 때문에 「成山角」이라고도 불린다. 용안항에서 버스로 10분 거리이다.

成山頭의 들머리에는 3인의 立像(입상)이 세워져 있다. 가운데가 秦始皇(진시황), 왼쪽이 재상 李斯(이사), 오른쪽이 徐福(서복)이다. 徐福이라면 진시황의 명으로 不死藥(불사약)을 구하기 위해 童男童女(동남동녀) 3000명을 데리고 성산두에서 출항했다는 道士(도사)이다. 불사약이란 원래가 허황한 약초였든지, 徐福은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그가 제주도에 왔다느니 일본 규슈 어느 곳에 갔다느니 하는 전설은 있다.

동행한 동국大 尹明喆 교수는 『5년 전에 성산두에 왔을 때는 이런 입상이 없었다』고 말했다. 요즘 중국은 자신의 역사를 열심히 다듬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바다 쪽으로 돌출한 좁은 통로와 다리를 건너 성산두에 이르렀다. 날씨는 쾌청했지만, 바람이 거세게 불어 매우 추웠다.

성산두는 중국 땅에서 가장 먼저 해돋이를 볼 수 있는 곳인데, 황해도 장산곶과의 직선거리는 94해리(190km)이다. 그래서 중국인의 과장법이긴 하지만, 『성산두에서는 한반도의 닭 울음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우스개도 있다.

기원전 219년 진시황은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동쪽으로 순시하던 중 성산두에 이르러 여기가 秦(진)나라의 동쪽 끝이라고 판단하고 재상 李斯에게 「天盡頭秦東門」(천진두진동문)이라고 새겨진 기념비를 세우게 했다고 한다.


『한반도의 닭 울음소리를 들을 수 있다』
威海市 龍眼港 부두.

성산두는 韓中관계사에서도 무시할 수 없는 곳이다. 기원전 108년 漢武帝가 파견한 장군 순체의 함대가 이곳에서 출항해 위만조선을 멸망시켰고, 660년에는 13만 병력을 실은 唐(당)의 함대가 登州(등주: 지금의 蓬萊市)에서 출항, 성산두에 일단 기항해 再정비를 끝낸 다음에 황해를 횡단, 기벌포(지금의 서천군 장항읍)에 상륙해 백제의 수도 사비성(지금의 부여군)을 공략했다.

성산두 남쪽에는 영성市 石島鎭(석도진) 뒷산 기슭에는 淸海鎭(청해진: 전남 완도)대사 張保皐(장보고)가 세운 사찰 赤山法華院(적산법화원)이 있다. 15년 전, 필자는 성신女大 崔敏子(최민자) 교수의 주도로 적산법화원에 세운 「장보고 장군 기념탑」 준공식에 참석하면서 威海市를 답사했지만, 그때 威海와 지금의 威海는 너무 변해 버렸다.

전세버스는 성산두에서 西進해 威海市의 중심가인 환취區를 향해 달렸다. 성산두에서 남쪽으로 1시간만 달리면 적산법화원이 있다. 하지만, 단체여행이기 때문에 적산법화원이 지금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살필 수 없었다.


淸日전쟁의 현장 劉公島
威海市 허칭호텔 앞 해안에 수백 척의 어선이 정박해 있다.

성산각에서 환취區에 이르는 해변도로는 중국 제1의 海洋景觀(해양경관)이라고 할 만하다. 이곳 黃海의 물빛은 누렇지 않고 푸른 빛깔에 가깝다. 해변의 모래가 바람에 휘날려 바다로 들어가지 않도록 나지막이 비닐담을 3중, 4중으로 쳐놓고 있다. 해변을 따라 제법 촘촘히 심어놓은 어린 海松(해송)들의 바람막이가 될 것 같다. 해변의 야산 위에는 풍력발전용 하얀 풍차가 신나게 돌고 있었다.

환취區로 접어드는 지점에서 威海港 앞에 떠 있는 섬 하나가 보여 옆 자리에 앉은 가이드 「주핑」 양에게 물었다. 주핑 양은 中國傳媒大學(중국전매대학: 傳媒는 통역) 일본어과 출신이라고 했다.

─저 섬 이름이 무엇입니까.

『劉公島(유공도)입니다. 淸나라 北洋艦隊(북양함대) 사령부가 있었던 섬이죠』

─북양함대 사령관 丁汝昌(정여창)을 아십니까.

『북양함대의 부사령관으로서 장렬하게 전사한 鄧世昌(등세창) 장군은 알지만, 丁汝昌은 모르겠습니다』

丁汝昌은 청일전쟁(1894~1895) 때 북양함대가 일본의 연합함대에 전멸당한 뒤 투항을 권유받자 劉公島의 함대사령부에서 음독자살한 비운의 제독이었다. 그는 우리나라 근대사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1882년 壬午軍亂(임오군란)이 일어나자 군함 威遠(위원)·揚威(양위) 등 3척에 淸兵 4500명을 거느리고 인천에 상륙해 大院君을 天津으로 납치해 갔다.

1884년 金玉均(김옥균) 등 개화파가 甲申政變(갑신정병)을 일으키자 군함을 이끌고 들어와 일본과 淸이 동시 철병할 것을 제의했다. 1885년 英國 함대가 거문도를 점령했을 때도 超勇(초용) 등 군함 2척을 이끌고 영국군의 永住(영주)를 허락하지 말 것을 高宗에게 주청했다. 특히 1984년 동학농민군이 봉기하자 濟遠(제원) 등 군함 2척을 이끌고 들어와 진압에 협력했다.

우리 일행은 威海의 어항 위쪽 언덕에 위치한 허칭호텔에 도착했다. 어항에는 수백 척의 어선들이 새카맣게 정박해 있었다. 중국은 數量(수량)으로 이웃나라를 압도하는 느낌이 들었다.


「워터프런트」 威海공원의 월드스케일
威海市 경제기술개발구에 입주한 한국공장에서 제품을 살펴보고 있는 김문수 지사.

허칭호텔에는 왕페이팅 威海시장이 베푸는 오찬이 마련되어 있었다. 일요일인데도 불구하고 威海시장을 비롯한 시청 간부가 20여 명이나 참석해 환영했다. 중국식 오찬장에는 으레 환영사가 지리할 만큼 길다. 오찬인데도 『간빠이(乾杯)!』라고 외치고 白酒 술잔의 바닥을 보이는 중국 전래의 음주 풍속은 여전했다. 「간빠이!」를 수십 차례나 「당한」 金文洙 지사의 얼굴이 불콰해질 정도였다.

점심 후 우리 일행은 「위해 高技術(고기술)산업개발구」에 입주한 한국기업체 두 곳을 둘러보았다. 威海市에는 삼성전자, 삼성중공업, 현대자동차 등 3000여개의 한국기업 입주해 있고, 한국인 거주자는 2만5000명에 달한다.

한국의 조선업체 SSI에 들렀더니 10만t급 도크를 건설하고 있었다. 현재는 지상에서 블록을 생산해 대우중공업, STX 등 국내 대형 조선소에 바지선으로 실어나르고(납품하고) 있다고 한다. SSI의 현장 직원은 『중국의 고졸 임금이 한국의 2분의 1 수준인데, 그들의 기술습득 속도가 매우 빠르다』고 했다. 造船(조선) 수주에 관한 한 세계 제1위인 한국은 중국에 비해 기술면에서 약 15년 앞선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威海는 천지개벽을 했다. 15년 전에 필자가 하룻밤을 묵었던 威海호텔은 어디에 있는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그때만 해도 威海市에는 威海호텔 하나만 우뚝해 랜드마크가 되었는데, 이제는 개성적인 모습의 고층 빌딩이 즐비하다. 1987년 이후 威海市는 연평균 18%의 경제성장을 이루어 현재 시민 1인당 GDP가 5000달러에 달한다.

이런 威海市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威海공원이었다. 威海공원은 황해를 바라보는 해안에 펼쳐진 威海市의 워터프런트로서 그 규모가 세계적이다. 워터프런트가 없는 도시는 숨이 막힐 듯 답답하다. 威海는 이제 중국의 黨政(당정) 고위인사들이 선호하는 휴양지로서 명성을 날리고 있다.

오후 7시, 威海港에서 威東(위동)페리에 승선해 저녁을 먹고, 오후 8시에 출항하는 위동페리의 갑판에 올라가 멀어져 가는 산둥반도를 조망했다. 山東省에는 한국 인구의 2배가 넘는 인구 1억이 산다.


『東北亞경제권은 「BESETO 하이웨이」로 연결해야』

오후 8시40분, 위동페리 회의실에서 선상토론회가 재개되었다. 국민大 殷鍾鶴(은종학) 교수는 주제 발표(「중국의 발전과 한국의 대응」)에서 『중국의 고도성장은 풍부한 노동력과 토지가 해외의 자본과 기술을 만나 폭발적 생산과 수출을 이뤄냄으로써 가능했다. 한국은 하이테크 분야에서 기술적 우위를 점하는 동시에 모든 산업에서 중국의 취약점을 파악해 앞서가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면서 경쟁우위 전략을 강조했다. 殷교수는 이어 『우리 제조업의 근간을 유지·발전시키기 위해서는 중국을 포함한 외국자본의 유치, 중국을 포함한 외국인 노동자의 수용과 다민족공동체의 성공적 모델의 구축이 필요하다』고 했다.

朴臣煥(박신환) 경기도 비전경영기획관은 『중국의 폭발적 고도성장에 대응하려면 서해안권의 각종 개발계획을 통합하여 광역벨트화해야 하고, 경기만 고속도로와 서해안철도를 건설하고, 서해안의 넓고 저렴한 간척지를 산업적 용도로 적극 활용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朴寅星(박인성) 중국 浙江大(절강대) 교수는 『현지에서 느끼는 것은 중국의 발전속도가 빠르고 추진력이 강하다는 것인데, 시행착오를 거듭하는 한국을 보면 답답하고 걱정스럽다』고 했다.

중앙大 許在完 교수는 韓日터널과 韓中터널의 건설과 연결로 東北亞 경제권의 중심축을 先占(선점)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韓日해저터널은 단순히 한국과 일본의 교류를 위한 수단이 아니라 東北亞 네트워크와 유라시아 네트워크를 완결하는 수단이 되어야 합니다. 향후 상하이-베이징-서울-오사카-도쿄를 잇는 이른바 「BESETO 하이웨이」는 동북아경제권의 중심축으로 작동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럴 경우 경제활동이 취약한 북한과 만주로 돌아가는 노선은 비효율적이기 때문에 韓日해저터널 및 韓中해저터널 건설로 인구 1000만 이상의 대도시들을 최단시간에 직접 연결할 수 있는 초고속철도망의 형성이 필요한 것입니다』

2일차 선상토론회에서는 崔永根 화성시장, 鄭興在 안산부시장, 朴命遠 시흥부시장, 李芝憲 김포부시장 등이 해당 市의 중점사업 등을 설명하고, 李海文 의원 등 경기도의회 의원 10인은 경기도에 대한 정부의 행정규제 완화 등 현안에 대해 발언했다. 회의는 자정을 넘겨 새벽 1시에 끝났다.


『거꾸로 보니 새로운 것이 보이더라』
선상토론회의 참가자들을 실은 威東 페리號가 인천港 갑문에 진입한 모습.

金文洙 지사는 선상토론을 끝내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2박3일의 짧은 기간이었지만 육지에서 볼 수 없는 평택항과 山東반도를 거꾸로 바라보니 새로운 것이 많이 보였습니다. 특히 바다에서 느낀 평택항의 잠재력은 무한한 것 같았습니다. 선박 회의실에서는 시간에 구애를 받지 않아 새벽까지 토론이 가능했고, 갑판에 오르면 바다와 육지가 펼쳐져 그야말로 현장방문의 기회였습니다.

앞으로 對중국, 對北 관계에서 서해안, 특히 경기만은 매우 중요한 지정학적 위치에 있습니다. 흔들리는 선박에서 새벽까지 회의하느라고 피곤하겠지만, 같은 배 안에서 난상토론을 한다는 것 자체가 매우 값진 일이었습니다. 이제, 우리 함께 뜁시다. 감사합니다』

2월18일 오전 6시30분, 1인1실의 넓은 침대에서 취침 중 모닝콜을 받았다. 문득 「金文洙스쿨의 학생」이 된 듯한 느낌이 들었다. 서둘러 기상해 간판 위에 올라가 해맞이를 하다 최근 논문 「英佛해저터널의 사례와 韓日해저터널의 필요성 및 기대효과」를 발표한 중앙大 許在完 교수를 만났다. 식당에서 許교수와 아침을 함께 하며 문답을 나누었다.

─韓日해저터널은 사업성이 있겠습니까.

『일본 측(日韓터널연구회)은 B/C 1.16, 한국 측(교통개발연구원)은 B/C 0.56으로서 상이한 연구결과가 나왔습니다』

B/C는 비용對수익으로서 그 값이 1 이상이면 사업성이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韓日해저터널 건설에 대한 국민적 공감대를 형성하기 위해서는 우선 수익성을 높여야 할 것 아닙니까.

『수익성을 높이기 위해 건설 및 관리비용을 최소화하고 부대사업, 즉 산업단지·리조트·역세권 개발 등의 허용에 의한 수입원의 다양화, 해저터널과 고속철도와의 접근성 확보 등이 필요합니다』

─韓日해저터널의 노선은 어떤 것입니까.

『3개의 노선안이 있습니다. A안은 가라쓰(사가縣)-이키島-대마도 남부-거제도 중부, B안은 가라쓰-이키島-대마도 중부-거제도 남부, C안은 가라쓰-이키島-대마도 북부-부산입니다. 고속교통수단과 연결이 유리하다는 점에서 C안이 바람직하다고 봅니다』

─韓日해저터널 건설의 효과는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물류비용의 감소에 따라 한국기업의 일본시장에서의 경쟁력이 높아지고, 부산지역 등의 성장잠재력이 높아져 국토의 다핵구조화를 촉진할 것입니다. 韓日해저터널 건설에 따른 지역별 성장잠재력 증가율은 부산권 33.7%, 광주권 23.6%, 대구권 21.6%, 대전권 10%, 수도권 6.2%로 예측됩니다』

─韓日해저터널 건설로 누가 더 혜택을 볼 것이라고 판단하십니까.

『韓日해저터널은 일본을 아시아-유럽 횡단철도의 기·종점으로 만들기 때문에 일본에 유리한 반면 한국에는 불리하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그러나 英佛 해저터널의 경우 기·종점인 영국보다 프랑스의 혜택이 더 높은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중국 및 러시아의 주요 도시들과 얼마나 효율적인 교통네트워크를 갖추는지에 따라 우리는 동북아 중심이라는 지리적 이점을 국가자산화할 수 있는 것입니다』


『대한민국 미래 여는 데 경기도 나선다』

오전 9시30분부터 30분간은 金지사의 기자회견 시간이었다. 경기도청 출입기자들은 金지사에게 韓中해저터널과 道政에 대한 다양한 질문을 했다. 金지사는 특히 「韓中해저터널은 국가가 해야 할 사업이 아닙니까」라는 한 기자의 질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답변했다.

『국가가 모든 문제를 먼저 구상해야 한다고 보지는 않습니다. 때론 엉뚱한 사람이, 때론 평범한 사람이 좋은 아이디어를 낼 수 있는 만큼 왜 「경기도가 나랏일에 먼저 나서는가」라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경기도가 대한민국의 미래를 열 것입니다. 韓中·韓日해저터널보다 더 큰일일지라도 나라를 발전시키고 차세대의 먹거리를 창출하는 일이라면 누구든 제안·연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기자회견이 끝난 뒤 필자는 金지사에게 『일본 후쿠오카 縣지사 아소 와타루(麻生渡)씨가 수년 전 月刊朝鮮과의 회견에서 韓日해저터널을 「이상주의자의 몽상」이라고 말한 바 있는데, 이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라고 물었다.

金지사는 『일본에서도 지역에 따라 韓日해저터널에 대해 이해관계를 달리합니다』면서 『일본 쪽 기점인 가라쓰(唐津)는 사가縣으로서 해저터널이 건설되면 후쿠오카縣 하카타港의 해운업자들의 수입이 30%쯤 감소될 것이 예상되어 후쿠오카 縣지사로서는 반대입장이 아니겠습니까』라고 답했다.

위동페리는 갑문을 통해 인천항 국제여객부두에 도착했다. 오전 10시40분, 위동페리에서 하선했다.●
Copyright ⓒ 정순태의 역사산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