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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 터지는 전쟁을 거듭하는 고구려·백제·신라

연재/ 정순태의 백제 부흥전쟁(5)

글 鄭淳台 기자  2019-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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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자왕과 연개소문의 對신라 강경정책

한편, 당시 동방 3국의 정세는 고구려와 백제에 對신라 강경파 정권이 들어섬으로써 피 터지는 전쟁을 거듭하던 모습이었다.

백제 武王(무왕)을 계승한 의자왕은 642년 7월 신라의 서부 국경을 親征(친정)해 40여 성을 점령했다. 8월에는 백제와 고구려 연합군이 신라의 對唐 航路(대당 항로)의 시발점인 黨項城(당항성·唐城)을 공략하여 함락 직전으로까지 몰아갔다. 거의 동시에 백제 장군 允忠(윤충)은 병력 1만을 이끌고 신라 서부 국경의 요충 大倻城(대야성, 현재의 경남 합천)을 점령한 뒤 성주 品釋(품석) 부부를 죽이고, 주민 1천여 명을 포로로 획득한 뒤 철수했다. 품석 부부의 시신은 백제의 감옥 바닥에 묻혔다. 품석의 처가 바로 신라의 실력자 金春秋(김춘추)의 딸인 古陀炤(고타소)였다.

642년 10월, 고구려에서는 東部大人 淵蓋蘇文(동부대인 연개소문)이 당나라에 宥和(유화)정책을 펴던 영류왕과 대신 등 180여 명을 살해한 뒤 영류왕의 조카(寶藏王, 보장왕)를 즉위시켰다. 그해 11월, 신라의 善德女王(선덕여왕)은 金春秋를 고구려에 파견해 원병을 요청했으나, 淵蓋蘇文은 진흥왕 때 신라가 점거한 竹嶺(죽령)-계립령 이북의 땅 500리를 먼저 내놓으라는 등 거부 반응을 보였다.

그런데 643년 3월, 연개소문은 보장왕에게 道敎(도교) 진흥책을 건의했다. 道敎라면 바로 唐(당)의 國敎(국교)다. 연개소문의 의도는 확실하지 않지만, 唐과의 관계 개선을 위한 외교적 제스처로 해석된다. 당 태종은 고구려 침공의 야욕을 측근들에게 드러내면서도 643년 윤6월에 보장왕에게 ‘上柱國(상주국) 遼東郡公(요동군공) 고구려왕’으로 책봉했다. 上柱國은 공로가 있는 신하에게만 주는 정2품 벼슬이다.

이보다 2년 전인 641년, 당태종은 사신을 파견, 즉위 직후의 의자왕을 柱國 帶方郡公 百濟王(주국 대방군공 백제왕)으로 책봉했었다. 의자왕은 642·643· 644년 잇달아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했다. 의자왕은 고구려와도 화친을 맺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의자왕 3년(643) 條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643년 겨울 11월, (의자)왕이 고구려와 화친을 맺었다. 그 목적은 신라의 黨項城(당항성)을 빼앗아 그들이 朝貢(조공)하러 가는 길을 막는 것이었다. (의자)왕은 마침내 군사를 출동시켜 신라를 공격하였다. 신라 왕 德曼(덕만, 善德女王)이 唐에 사신을 보내 구원을 요청하니 (의자)왕이 이 사실을 듣고 군사를 철수시켰다.>

644년 당 태종은 사농승 相里玄獎(상리현장)을 고구려와 백제에 차례로 보내 신라에 대한 침공을 자제하도록 요구했다. 그와 동시에 당 태종은 고구려 침략을 위한 최종 작업을 서둘렀다. 이런 상황을 직시한 淵蓋蘇文은 644년 7월 당 태종에게 白金(백금)과 美女(미녀) 2명을 바치고, 宿衛(숙위, 황제 경호원)를 파견하고 싶다는 뜻을 피력했다. 당 태종은 모두 거절했다.

644년 12월14일, 당 태종은 당의 원정군 全부대와 백제·신라·奚(해)·거란에 고구려 공격을 명령했다. 제1차 여-당전쟁에 동원된 당의 병력은 15만이었다.

645년 4월1일, 先陣(선진)으로 나선 李世勣(이세적)의 군단은 요하를 건너 新城(신역, 撫順)을 격파한 뒤 南下(남하)해서 蓋牟城(개모성)을 함락시키고 요동성으로 남하했다. 이때 당 태종의 本陣(본진)도 요동성으로 진격해 합류했다. 5월17일, 隋 煬帝(수 양제)가 공략에 실패했던 요동성이 떨어졌다.
한편 당의 水軍(수군)은 大連(대련) 방면에 상륙해 卑沙城(비사성: 지금의 旅順)을 함락시킨 후 그곳으로부터 북상해서 建安城(건안성)을 攻取(공취)했다. 수륙 兩面(양면)으로부터의 공격으로 당군은 10개 성을 攻破(공파)했다. 승세를 탄 당군은 安市城(안시성)으로 진격했다. 안시성은 고립되었으나 고구려군은 선전했다. 음력 9월 말에 첫눈이 내리고, 점차 눈보라가 몰아치는 가운데 당군에 軍糧(군량)이 바닥나고 동사자가 속출했다. 철수가 불가피했다. 이렇게 당 태종의 제1차 고구려 침략전쟁은 패전으로 끝났다.

당 태종은 647년과 648년에도 고구려를 공략했지만, 승리하지 못했다. 당에 의해 消耗戰(소모전)을 강요당한 고구려도 심각한 데미지를 입었다. 이때 신라와 백제는 서로 다른 길을 선택했다. 645년 5월, 신라는 고구려 남쪽 국경에 지상군 3만을 파병해 당군을 응원했다. 이 기회에 백제는 신라의 옆구리(서부 국경지역)를 급습해 일곱 성을 빼앗았다.
 
金春秋의 全方位 외교와 648년 密約
    
신라의 실력자였던 김춘추는 647년의 왜국 방문에 이어 648년에는 入唐(입당)해 당 태종 李世民(이세민)과 만났다. 이 자리에서 당 태종은 고구려와 백제를 멸한 후 평양 以南(이남) 고구려 땅과 백제의 全土(전토)를 신라에 줄 것을 약속했다. 이것이 소위 ‘648년의 密約(밀약)’인데, 훗날 나당전쟁 때(671년) 문무왕의 <答薛仁貴書(답설인귀서)>를 통해 滿天下(만천하)에 처음으로 공개되었다.

그러나 649년 5월, 당 태종 李世民의 사망으로 고구려 침공 준비는 전면 중단되었다. 이세민의 제9子 李治(이치)가 22살의 나이로 즉위했다. 그가 당 고종이다.

650년 6월, 신라의 眞德女王(진덕여왕)은 ‘阿附(아부)의 극치’인 五言詩(오언시, 太平頌)를 비단에 수놓아 당 고종에게 바쳤다. 이를 전달한 신라 사신 24살의 金法敏(김법민)이었다. 金法敏이라면 11년 후의 文武王(문무왕)이다. 당시 김법민은 당 고종으로부터 大府卿(대부경)이라는 차관급 벼슬을 받았는데, 그가 당에서 어떤 활동을 했는지는, 다음 해 당 고종이 의자왕에게 보낸 詔書(조서)에 잘 나타나 있다. 다음은 『三國史記』 백제본기 의자왕 11년(651) 條의 기록이다.

<11년(651), (의자왕이)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사신이 귀국할 때 (당) 고종이 璽書(새서)를 보내 (의자)왕에게 說諭(설유)했다.

“해동의 세 나라는 開國(개국)의 역사가 오래되고, 국토가 개 이빨처럼 얽혀 있다. 근대 이래로 마침내 사이가 벌어져 전쟁이 계속 일어나니 거의 편안한 해가 없었다. (中略) 지난해 고구려와 신라 사신 등이 入朝(입조)해 나는 이와 같은 원한을 풀고 다시 화목하게 지내기를 명하였다. 신라 사신 金法敏이 말하기를,

‘고구려와 백제는 긴밀히 의지하면서 군사를 일으켜 번갈아 우리를 침범하니, 우리의 大城重鎭(대성중진)을 백제에 빼앗겨서 국토는 날로 줄어들고 나라의 위엄조차 사라져 갑니다. 원컨대 백제에 詔勅(조칙)을 내려 빼앗아간 성을 돌려주게 하소서. 만일, 명을 받들지 않는다면, 즉시 우리(신라) 스스로가 군사를 동원하여 잃었던 옛 땅만을 되찾고 즉시 화친을 맺겠습니다’
라고 하였다. 그(김법민)의 말이 순리에 맞았기 때문에 나(당 고종)는 승낙하지 않을 수 없었다. (中略) 왕이 만일 命(명)에 따르지 않는다면, 나는 法敏의 요청대로 신라가 왕과 결전하도록 할 것이며, 또한 고구려로 하여금 신라와 약속하여 백제를 구원하지 못하게 할 것이다. …(後略)”>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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