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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庾信과 그의 시대(15)

글 정순태 기자  2005-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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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庾信과 그의 시대(15)

정순태


利敵행위와 誤判

그러나 당 태종은 고구려만은 어떻게든 정복하겠다는 속셈을 굳히고 있었다. 그것이 영양왕 24년(641)에 고구려를 방문한 사신 陳大德(진대덕)의 행각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우선 진대덕의 방문은 고구려 태자(桓權) 入唐에 대한 謝禮使(사례사)란 희한한 형식을 취했다.
<그는 우리나라(고구려) 경내에 들어오면서 이르는 성읍마다 수비 관리들에게 비단을 후하게 주면서 『내가 원래 산수 구경을 좋아하니, 여기에 경치가 아름다운 곳이 있으면 보고 싶다』고 말했다. 수비하는 자들이 기꺼이 안내하니, 그의 발걸음이 닿지 않는 곳이 없었다. 이로써 그는 우리나라 지리에 대해 상세하게 알 수 있었다>
진대덕은 영류왕 11년(627), 당에 올린 고구려의 封域圖를 일일이 확인하는 간첩이었다. 동시에 그는 고구려에 정착한 隋軍 출신 포로들의 망향심을 부추기는 아지테이터(선동선전꾼)였다.
「그는 중국인으로서 隋 말기에 군사를 따라왔다가 귀국하지 못하고 있던 자들을 만나 친척들의 안부를 전해 주니, 모두 눈물을 흘렸다. (중략) 大德은 사신으로 온 기회에 우리나라의 국력을 살폈으나 우리는 이를 알지 못했다」
진대덕은 본국으로 돌아가 당 태종에게 『고구려는 高昌國이 멸망했다는 소문을 듣고 크게 두려워하여, 우리 사신들의 숙소 접대 범절이 보통이 아니었습니다』라고 보고했다. 이때 당 태종은 크게 기뻐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고구려는 본래 중국의 4郡이었던 곳이다. 내가 수만의 군사를 움직여 요동을 공격하면, 그들은 반드시 온 국력을 기울여 요동을 구원하러 나올 것이다. 이때 별도로 水軍을 東萊(山東省)에서 출발시켜 바다로 평양을 향하게 하고 水陸軍이 합세하면 고구려를 점령하기가 어렵지 않을 것이다. 다만 山東의 州縣에 전쟁의 상처가 아직 회복되지 않았으니, 내가 그들을 수고롭게 하기를 원하지 않을 뿐이다」
이런 당 태종의 속셈을 꿰뚫어 본 사람이 바로 연개소문이었다. 따라서 642년 연개소문의 쿠데타는 일면의 정당성도 있었지만, 지도부 1백여명을 학살했다는 점에서 고구려의 국가적 손실이었다. 유혈 쿠데타 직후, 연개소문의 집권에 반대한 사람도 적지 않았다. 특히 安市城(안시성) 성주였던 楊萬春(양만춘)은 연개소문의 독주에 반발했다.
연개소문은 안시성을 공격했으나, 끝내 함락시키지 못했다. 결국 양자가 타협하여 양만춘은 연개소문을 새로운 집권자로 인정하고, 연개소문은 양만춘을 안시성 성주의 지위를 보장하는 선에서 절충점을 찾았다.
연개소문의 쿠데타에 정당성이 있었다고 할지라도 그가 취한 강경 외교가 국익에 부합되었던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 그는 당과의 대결을 무릅쓰고라도 동북아에서 고구려의 독자적 세력권을 유지하려고 했다. 그러나 이세민 집권 후의 당은 이미 중원 주변의 북방, 서방, 남방을 평정하고 중국 중심의 일원적 동아시아 질서를 구축하려 했다.
이런 唐의 대외 팽창 정책에 맞서려면 연개소문은 좀더 유연해야 할 필요성이 있었다. 그러니까 그의 쿠데타 직후, 그를 만나러 온 김춘추의 제의를 거절했던 그의 정책은 졸렬했다. 어쩌면 신라의 국력을 깔본 오만 때문이거나 정권 안보를 최우선에 두고 대외 강경책으로 국내 정치 세력의 반발을 눌러버리려는 독재자의 상용 수법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가 그런 품성의 인물이었음은 「舊唐書」(구당서) 東夷傳 고구려 條에 기록되어 있다.
「그는 수염과 얼굴이 매우 준수하고 걸출하였다. 몸에는 항상 다섯 자루의 칼을 차고 다녔는데, 주위 사람들이 감히 쳐다볼 수 없었다. 언제나 그의 官屬(관속)을 땅에 엎드리게 하여 이를 밟고 말을 탔으며, 말에서 내릴 때도 마찬가지였다. 외출할 때는 반드시 의장대를 앞세우고 선도자가 큰 소리로 행인들을 물리치는데, 백성들이 두려움 때문에 피해 모두 스스로 坑(갱) 속으로 숨어들었다」
이런 평가는 敗亡國(패망국)의 집권자에 대한 일방적인 폄하일 수도 있겠지만, 어떻든 이런 독재자에겐 백성들이 두려워할망정 심복하지는 않는다. 연개소문에 대한 평가는 麗-唐 전쟁 시기에 고구려 장병들 중 투항자가 대거 속출하는 상황으로 나타난다. 원래 고구려의 국법은 출정군 장수의 가족들은 반드시 王京에 거주하게 하고 투항자의 가족에 대해선 살갗을 벗겨 처형할 만큼 혹독했는데도 투항자가 유별나게 많았다는 것은 독재 권력의 후유증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협상 결렬

나는 이런 이유에서 연개소문에 대해 단재 신채호나 북한 이데올로그들이 상용하는 「千古英傑」이나 「애국 명장」이란 찬양 문구에 동의할 수 없다. 일찍이 중국 춘추전국시대 楚(초)의 명장 吳起는 부하들의 몸에 난 종기를 입으로 빨아 주었고, 연개소문의 맞상대 당 태종은 그의 부하가 고구려 군과의 전투중 발에 상처를 입었다고 손수 침을 놓아주기까지 했다.
당 태종의 쇼맨십은 대단했다. 貞觀(태종의 연호) 초에 메뚜기떼가 창궐하여 내리 흉년이 들자, 그는 들판에 나가 메뚜기를 잡아 얼른 집어 삼키면서 『차라리 나의 창자를 갉아 먹어라』고 부르짖었다. 집권자나 將帥(장수)의 언행이 이 정도라면 백성이나 장졸들은 뻔히 알면서도 속아넘어가 주는 것이 人之常情(인지상정)이다.
그러나 연개소문이 對唐 강경파라고 해서 대결 노선만을 취할 만큼 저돌적인 인물은 결코 아니었다. 그는 開戰(개전)만은 피하고 싶었다. 그것은 그가 보장왕에게 다음과 같이 진언한 대목을 보면 확연하다.
『유교, 불교, 도교의 3교는 솥의 다리에 비유되나니, 어느 하나도 없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 유교와 불교는 함께 흥하고 있으나, 도교가 성하지 않으니 천하의 도술을 전부 갖추었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唐에 사신을 보내 도교를 구하여 백성들에게 가르치소서』
허수아비 군주인 보장왕은 곧장 당 태종에게 표문을 올려 이 뜻을 알렸다. 당 태종은 즉각 도사 叔達(숙달) 등 8명을 파견하고, 도교의 경전 道德經(도덕경)을 함께 보내 주었다. 보장왕은 기뻐하며, 사찰에 그들의 숙소를 정해 주었다.
이같은 연개소문의 화해 제스처에도 불구하고 고구려를 정벌하려는 당 태종의 속셈은 불변이었다. 그 명분은 「개소문이 임금을 시해하고 政事(정사)를 제 마음대로 하니 참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런 가운데 신라가 사신을 보내 백제가 신라의 40여城을 빼앗고 고구려와 連和(연화=연합)하여 신라의 조공 길을 끊고 있다고 보고하면서 구원을 요청했다. 644년 당 태종은 고구려에 司農丞(사농승) 相里玄奬(상리현장)을 파견하여 보장왕에게 다음과 같은 문서를 전달했다.
『신라는 우리를 잘 섬기고 조공도 빠지지 않으니 그대는 백제와 함께 마땅히 군사를 거두라. 만약 다시 공격한다면 명년에 군사를 보내어 그대 나라를 칠 것이다』
이에 연개소문이 분연히 말한다.
『지난날 수가 우리 나라를 침략했을 때 신라는 그 틈을 타서 우리 땅 5백리를 빼앗았소. 우리에게 빼앗은 땅을 돌려주지 않는다면 싸움을 그만둘 수 없소』
상리현장이 말을 받는다.
『이미 지난 일을 따져 무엇하겠소? 요동의 여러 성도 본래 중국의 군현인데 중국은 언급하지 않았소. 고구려는 어찌 옛 땅을 꼭 찾으려 하오?』
이런 설전을 교환한 끝에 麗-唐 양국의 협상은 결렬되었다. 상리현장은 다시 백제로 넘어가 신라와의 화평을 종용했다. 이에 의자왕은 사죄하고 화평안을 받아들였다.
唐 太宗은 다시 고구려에 蔣儼(장엄)을 사신으로 보냈다. 연개소문은 장엄을 간첩으로 지목하여 굴 속에 가둬버렸다. 그러면서도 유화책을 병행시켰다.
고구려는 사신을 보내 당 태종에게 백금을 바쳤다. 당 태종은 이를 물리쳤다. 또 고구려 사신이 『우리 막리지가 벼슬아치 50명을 보내 황제를 숙위하려 합니다』고 전하자, 태종은 불같이 화를 내고 그를 감옥에 가둬버렸다. 전쟁은 불가피해졌다.

麗-唐 전쟁의 開戰

645년 4월, 당 태종의 고구려 침략이 시작된다. 요동도행군대총관 李世勣(이세적)과 부총관 道宗(도종)은 기병 6만과 降胡(항호)를 거느리고 通定津(통정진)에서 요하를 건넜다. 고구려의 성읍들은 모두 성문을 닫아 걸고 수비 태세에 돌입했다.
營州(영주) 도독 張儉(장검)은 선봉부대인 胡兵(호병)을 거느리고 建安城(건안성)을 공격하여 고구려 군사 수천명을 전사시켰다. 이세적과 道宗은 蓋牟城(개모성)을 쳐서 함락시키고, 1만명을 생포하였으며, 양곡 10만석을 탈취했다.
평양도행군대총관 張亮(장량)은 水軍 4만3천을 전함 5백 척에 태우고 산동성의 東萊(동래)로부터 요동반도의 남단 卑沙城(비사성)을 공략했다. 비사성은 5월에 함락되고 남녀 8천명이 죽었다.
이세적의 주력군이 요동성 아래까지 진출했다. 요동성은 수 양제의 침입 때 難攻不落(난공불락)의 요새이며 결전장이었던 만큼 연개소문은 신성, 국내성의 步騎 4만을 구원병으로 급파했다. 구원병은 처음에 당의 장군애 軍을 격파하여 기세를 올렸으나, 이세적-도종 군에게 무너졌다.
이세적은 12일간에 걸쳐 주야로 요동성을 공격했다. 당 태종도 정예 부대를 이끌고 와서 요동성을 겹겹이 포위했다. 당의 특공대는 요동성의 서남루에 불을 질러 성안에 火光(화광)이 충천했다. 드디어 고구려 군사 1만여명이 전사하고, 남녀 주민 4만명이 생포되었으며, 50만석의 양곡을 탈취당했다.
이세적 軍은 이어 白巖城(백암성)을 공격했다. 백암성 성주 孫大音(손대음)은 수성전을 벌여보지도 않고 항복했다. 드디어 당 태종은 여-당 전쟁 최대의 격전지 안시성의 공격에 나섰다.
이에 북부 褥薩(욕살) 高延壽(고연수)와 남부 욕살 高惠眞(고혜진)은 고구려-말갈 연합군 15만명을 거느리고 안시성을 구원하러 달려 왔다. 욕살이라면 전국 5部의 장관들 중 1인이다. 이때 나이 많고 경험 풍부한 對盧(대로·제4위의 관등) 高正義(고정의)가 고연수에게 계책을 올린다.
『秦王(진왕·당 태종)은 안으로는 군웅들을 베고, 밖으로는 戎狄(융적·서방과 북방의 오랑캐)을 굴복시켜 스스로 황제가 되었으니, 천명을 받은 인재라 할 만하오. 지금 그가 海內의 무리를 이끌고 왔으므로 대적하기 어렵소. 나의 계책은 군사를 정비하되 싸우지 않고, 여러 날을 두고 지구전을 펴면서 奇兵(기병)을 보내 그들의 군량 수송로를 차단하는 것이오. 저들은 군량이 떨어지면 싸우려 해도 싸울 수 없고, 돌아가려 해도 갈 길이 없소. 이때 들이치면 戰勝(전승)을 기할 수 있을 것이오』
그러나 고연수는 이 헌책을 듣지 않았다. 그는 대군을 휘몰아 안시성 밖 40리 지점까지 진군하여 영채를 세웠다. 당 태종이 측근 長孫無忌(장손무기·장손황후의 오빠)와 경호 기병 수백기를 데리고 고지에 올라 고구려군의 영채를 관찰했다. 영채의 길이가 40리에 뻗쳐 있는 고구려군의 군세에 두려움을 느낀 당 태종은 고연수의 진영에 軍使(군사)를 보내 짐짓 유화책을 구사한다.
『나는 그대 나라의 强臣(강신·연개소문)이 임금을 시해한 죄를 물으러 온 것이니, 우리가 서로 싸우는 것은 나의 본심이 아니다. 그대 나라 경내에 들어오니 말먹이와 양식이 충분치 않아 몇 개 성을 빼앗기는 했으나, 그대 나라가 신하의 예를 지킨다면 잃었던 城을 반드시 되돌려 줄 것이다』
고연수는 이 말에 넘어가 경계 태세를 늦추었다. 당 태종은 이세적에게 보병과 기병 1만5천을 주어 서쪽 고개에 진을 치게 하고, 장손무기와 牛進達(우진달)에게 정병 1만1천을 주어 奇兵(기병)으로 삼았다. 당 태종 자신도 직접 보병과 기병 4천을 이끌고 고지에 올랐다.

안시성의 영웅 楊萬春

다음날 아침, 고연수는 이세적 軍의 병력이 적은 것만 보고 군사를 휘몰아 공격하려 했다. 이때 唐軍이 앞 뒤에서 일제히 일어나 고구려군을 협격했다. 고연수는 공격 대형에서 방어 대형으로 전환시켰지만, 고구려 진영은 일대 혼란에 빠지고 만다. 이 틈에 薛仁貴(설인귀)가 고구려 진영 깊숙이 돌진하여 좌충우돌하며 무용을 뽐냈다. 이 전투에서 고구려 軍 3만여명이 전사하고 다수 병력이 흩어졌다.
가까스로 패군을 수습한 고연수는 산을 의지하여 영채를 꾸리고 수비를 강화했다. 당 태종은 휘하 全 부대를 동원하여 고연수 軍을 포위하고, 장손무기에게는 교량을 전부 철거케 하여 귀로를 차단했다.
이에 고연수와 고혜진은 군사 3만6천8백명을 이끌고 항복을 청하면서, 唐의 군문에 들어가 목숨을 구걸했다. 唐 太宗은 褥薩(욕살) 이하 官長(관장) 3천5백명을 제외한 나머지 병졸들은 모두 석방했다. 그러나 말갈인 3천3백명은 모두 생매장했다. 麗-唐 양국의 전쟁에서 고구려측에 협조하던 주변 이민족에게는 본때를 보인다는 속셈이었을 것이다.
드디어 唐軍은 안시성 공략에 나선다. 그러나 안시성은 요지부동이었다. 부총관 道宗이 군사들을 독려하여 성의 동남쪽에 土山을 쌓아 성벽 쪽으로 점점 접근해 왔다. 당군은 衝車(충거)와 포석 등 攻城(공성) 무기로 성루와 성첩을 허물었으나, 守城軍은 그때마다 목책을 세워 부서진 곳을 틀어막았다.
60일 동안 연인원 50만을 동원하여 쌓은 土山(토산)이 기어이 완성되었다. 토산의 꼭대기가 城보다 두어 길이나 높았기 때문에 당군은 내려다보고 공격할 수 있었다. 그러던 중 산이 허물어지면서 성벽의 일부가 무너졌다. 고구려의 결사대 수백명이 나가 싸워 기어이 토산을 탈취하여 참호를 파고 수비를 굳혔다. 당 태종은 격노하여 토산을 빼앗긴 지휘관 傅伏愛(부복애)의 목을 베고, 장수들의 공성전을 독려했다. 그러나 다시 사흘이 지났지만, 안시성은 떨어지지 않았다.
요동지방은 일찍 추워져 풀이 마르고 물이 언다. 당 태종은 야전에서 대군을 오래 머물게 할 수 없으며 군량 또한 떨어질 것이라고 판단하여 철수를 명했다. 당 태종 자신이 눈에 독화살을 맞아 전의를 상실했다는 얘기도 전해져 오고 있다.
唐 太宗은 성주가 성을 굳게 지킨 것을 장하게 여겨 겹실로 짠 비단 1백필을 주어 자기 임금을 섬기는 자세를 격려했다. 역시 그다운 쇼맨십이었다. 그러나 그의 회군길은 엄혹했다. 진흙길을 메우는 데 당 태종이 직접 말채찍으로 나무를 묶는 일을 거들기도 했을 정도였다.
그해 10월, 당군이 겨우 渤錯水(발착수)를 건너 당의 경내로 회군했는데, 바람과 눈보라가 휘몰아쳐 군사들 중에 동사자가 많이 생겼다. 당 태종은 고구려 원정을 깊이 후회하며 탄식했다.
『만일 魏徵(위징)이 있었다면, 나로 하여금 이번 원정을 못하게 했을 것이다』
위징이라면 생전에 당 태종에게 직언을 잘했던 名臣이다. 당 태종은 645년 고구려 원정에 실패하고 647년부터 장기전략을 수립한다. 그것은 소수의 병력을 요동에 보내 자주 고구려를 침략케 함으로써 고구려를 피로케 한 다음 일거에 大軍(대군)을 일으켜 멸망시킨다는 전략인데, 唐 太宗은 649년 4월 패전의 회한 속에 병사하고 만다. 그러나 이같은 장기전략은 그의 후계자 唐 高宗(고종)에 의해 계속된다.●
<16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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