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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庾信과 그의 시대(17)

글 정순태 기자  2005-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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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庾信과 그의 시대(17)

정순태


해골 2구와 裨將 8인의 맞교환


그에 비하면 韓民族의 역사는 1천년의 신라(삼국시대 포함), 5백년의 고려, 또 5백년의 조선왕조로 이어지면서 민족사적 정통성을 확보해 왔다. 섬나라로 뚝 떨어진 일본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중국 대륙과 북방 초원 지대의 정세 변화에 따라 강풍의 영향권에 휩싸여야 했던 韓民族이 이런 정도의 주체성과 민족 문화를 보전 발전시켰다는 것은 대단히 경이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중국과 陸接했던 민족들 가운데 오늘날 韓國만한 수준의 나라를 세운 민족은 하나도 없다.

그렇다면 중국의 군주가 황제였든 倭의 군주가 天皇으로 자처했든 오늘날의 우리가 상관할 까닭이 없다. 영국은 18세기 이래 2백년 동안 세계를 지배한 「해 지지 않는 나라」였지만, 영국 군주의 호칭은 왕(King) 또는 여왕(Queen)이었다. 반면 동시대에 영국과 해외 식민지 쟁탈 경쟁에서 번번이 패배한 프랑스 군주의 호칭은 황제(Emperor)였다. 더구나 오늘날에는 영토의 크기나 인구가 과거처럼 중요하지 않고, 국가원수의 호칭 같은 것은 상징적 의미조차 없다.

김춘추가 對倭(대외) 모험외교를 전개하는 동안 비담의 반란을 진압한 김유신은 다시 신라의 정권 교체기의 약점을 겨냥한 백제 의자왕의 대공세에 대처해야 했다. 진덕여왕 원년(647) 겨울 10월에 백제군은 신라의 茂山(무산:전북 茂州), 甘勿(감물:경북 고령군 知禮), 桐岑(동잠:충북 충주) 등 3개성을 포위 공격했다. 진덕여왕은 김유신에게 보병과 기병 1만을 주어 이를 방어하게 했다. 이 전투에서 김유신 軍은 백제군을 대파하고 3천여명의 머리를 베었다.

이어 진덕여왕 2년(648) 3월에는 백제 장군 義直(의직)이 서쪽 변경을 침범하여 腰車城(요거성:경북 문경 지방) 등 10여 성을 점령했다. 여왕이 이를 걱정하여 押督州(압독주:경북 경산) 도독 김유신을 급파했다. 김유신은 다섯 갈래의 길로 진격하여 의직의 군진을 대파했다. 바로 병법에서 말하는 分進合擊(분진합격)이었다.

648년 김유신의 전공은 혁혁했다. 특히 大梁城(대량성:경남 합천)의 백제군을 성 밖으로 유인해낸 김유신의 미끼작전은 탁월했다. 대량성은 6년 전인 642년 백제 장군 允忠(윤충)에게 함락된 전략적 요충지였다.

김유신은 술타령으로 군무를 태만히 하는 척하여 백제군의 경계심을 늦추면서 병사들에겐 강훈을 시켰다. 병법에서 말하는 虛虛實實(허허실실)의 계책이었다. 대량성으로 진군한 직후에는 신라군의 전력이 열세인 것처럼 가장하며 후퇴를 거듭했다. 백제군이 미끼 작전에 걸려들어 추격전을 벌이자, 김유신이 玉門谷(옥문곡)에다 미리 숨겨둔 복병을 일으켜 대승했던 사실은 이미 앞에서 거론한 바 있다. 이 때 김유신은 백제의 裨將(비장) 8명을 사로잡았는데, 「삼국사기」 열전이 전하는 그 뒤처리 또한 빈 틈이 없었다.

<유신은 사람을 시켜 백제의 장수와 교섭하기를, 『우리 軍主 品釋(품석)과 그 아내 김씨의 뼈가 그대 나라의 옥중에 묻혀 있다. 이제 그대의 비장 8명이 나에게 사로잡혀 목숨을 구걸하고 있다. 나는 여우나 표범이 죽을 때 머리를 제 고향으로 두는 뜻을 생각하여 그들을 차마 죽이지 않았다. 그러니 지금이라도 그대는 죽은 두 사람의 유골을 여덟 명의 산 사람과 바꾸는 것이 어떠한가?』라고 했다>

2인의 백골과 8인의 비장을 맞바꾸는 거래의 손익은 어떠할까? 우선 백제측의 반응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다.

<백제의 좌평(관등 제1위) 忠常(충상)이 의자왕에게 말하기를, 『신라인의 해골을 남겨 두어 유익할 것이 없으니 보내는 것이 좋겠습니다. 만일 신라인이 신의를 버리고 우리 여덟 사람을 돌려 보내지 않는다면, 저들이 잘못한 것이요, 우리가 옳은 것이니, 무엇을 걱정하겠습니까?』라고 했다. 곧 품석 부처의 유골을 파서 관에 넣어 (신라측에) 보냈다>

그러면 이에 대한 김유신의 손익계산은 어떠했을까?

『잎사귀 하나가 떨어진다고 해서 무성한 숲이 상하지 않으며, 티끌 하나가 더 쌓인다 하여 큰 산이 더 높아지는 것이 아니다』

얼핏 보면 시체 2구와 비장 8명의 교환은 백제측에 유리했던 흥정으로 판단되기 쉽다. 그러나 실제론 신라의 이익이 오히려 더 컸다고 할 수 있다. 전사자에 대해선 그 시체라도 되찾아 온다는 신라 국가의 의지가 관철되었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슈퍼파워 미국은 50년 전 한국전쟁 기간 중 북한 지역에서 전사한 미군 장병의 유해를 찾아 오기 위해 지금도 북한측과 집요한 협상을 벌여 판문점을 통해 미군의 유해를 인도받아 오는 성과를 종종 거두고 있다. 국가 목적을 위해 싸우다가 죽은 사람들을 챙기지 않는 나라는 그 구성원에 대해 애국심을 요구할 자격이 없는 3류국가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해골과 裨將의 맞교환 직후, 김유신 軍의 사기는 더욱 떨쳤다.

<마침내 승세를 타고 백제 경내로 들어가 嶽城(악성) 등 12개 성을 함락시키고, 2만여명의 머리를 베었으며 9천명을 사로잡았다. (중략) 유신은 다시 진격하여 進禮(진례:충남 금산 지방) 등 9개 성을 공격하여 9천여명을 참수했다>


김유신의 명성 샘내는 唐 태종


이 무렵 김유신의 위명은 東아시아를 진동시켰던 것 같다. 바로 이해(648년) 겨울에 김춘추는 셋째아들 文汪(문왕)과 함께 長安(장안)으로 들어가 당 태종에게 원병을 요청했다. 唐 태종은 김춘추에게 실로 묘한 질문을 던진다.

『그대 나라의 김유신에 대한 명성을 들었는데, 그 사람됨이 어떠하오?』

김유신이라는 명장이 있다는데 신라가 굳이 원병을 청할 이유가 무엇이냐는 뉘앙스를 깔고 있는 물음이었다. 김춘추는 역시 상대방의 속셈을 읽는 외교관이었다.

『유신이 비록 재능과 지혜가 조금 있다고 하나 황제의 위력을 빌리지 않는다면 어떻게 주변의 우환을 제거할 수 있겠습니까?』

당 태종은 매우 흡족했다.

『참으로 군자의 나라로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당 태종과 김춘추는 백제와 고구려 침략을 위한 羅唐(나당) 군사동맹을 확정했다. 여기선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킨 다음에 있을 전후 처리 문제의 원칙에도 합의했다. 그 내용은 문무왕의 대당 선전포고문에 해당하는 671년의 答薛仁貴書(답설인귀서)의 문면을 보면 명확하다. 이때 당태종은 다음과 같은 영토분할안을 제시했다.

『짐이 고구려를 치는 것은 다른 까닭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대 신라가 양국에 핍박되어 매양 그 침해를 입어 편안한 날이 없음을 애달피 여김이니, 山川土地(산천토지)는 나의 탐하는 바가 아니며, 玉帛(옥백)과 子女도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이다. 내가 양국을 평정하면 평양 이남과 백제 토지는 다 그대 신라에게 주어 길이 편안하게 하려 한다』

이것은 麗濟(여제)를 멸망시키는 경우의 영토 분할 약정이며, 신라에 대한 持分(지분) 보장이었다. 후세 사람은 김춘추가 왜 더 많은 지분을 요구하지 못했느냐고 할지 모르지만, 당시의 힘 관계에서 신라의 이익이 결코 작다고는 할 수 없다.

麗濟 멸망 후 唐이 영토 분할 약정을 위배하는 바람에 羅唐 간에 7년 전쟁이 벌어지기는 했다. 이에 문무왕의 신라가 냉정하게 당을 응징하지만, 그야 어떻든 이 때 김춘추의 對唐(대당) 외교는 신라의 입장으로선 대단한 성공작임에 틀림없다. 김춘추는 당 태종에게 사의를 표한다.

『저의 자식이 일곱이오니 원컨대 그중 하나인 文汪(문왕)으로 하여금 성상의 곁을 떠나지 않는 宿衛(숙위)가 되게 하여 주소서』

文汪에게 이미 좌무위장군의 벼슬을 내렸던 당 태종은 다시 그에게 宿衛를 겸하게 했다. 숙위라면 황제의 경호를 위해 주변국에서 파견한 왕족 혹은 귀족의 자제로서 인질적 성격도 띠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황궁에 머물며 자국의 이익을 대변하는 외교관 역할을 했다. 이로써 김춘추는 당 태종과 핫 라인을 개설했던 셈이다.

이후 김춘추는 정상을 향한 길을 밟아 간다. 그러나 그는 海路(해로)를 통해 귀국하다가 고구려의 해상 순라대를 만나 목숨을 잃을 뻔한 위기를 겪기도 한다. 이때 김춘추의 목숨을 구했던 사람이 그의 시종 溫君解(온군해)였다.

위기의 순간, 온군해는 김춘추의 옷과 모자를 착용하고 김춘추인 것처럼 가장했다. 갑판으로 뛰어든 고구려의 순라병은 김춘추로 잘못 알고 온군해를 난도질했다. 그런 소란 속에서 김춘추는 작은 배로 바꿔 타고 신라로 복귀했다.

「삼국사기」 열전에 따르면 이때 對唐 청병 외교를 마치고 귀국한 김춘추에게 김유신은 다음과 같이 보고한다.

『제가 나라의 힘에 의지하고 영령의 위세를 빌어, 다시 백제와 크게 싸워서 20개 성을 빼앗고 3만여명의 머리를 베었으며, 또한 품석공과 부인의 유골을 향리로 돌아올 수 있게 했습니다. 이 모두 天幸(천행)의 소치이지, 제가 무슨 힘이 있었겠습니까?』


逆정보 흘려 敵將 흔들어버린 智謀


진덕여왕 3년(649) 가을 8월에 백제 장군 殷相(은상)이 신라의 石吐(석토:충북 괴산 지방) 등 7개 성을 공격하여 점령했다. 진덕여왕은 대장군 김유신과 장군 陳春(진춘), 竹旨(죽지), 天存(천존) 등을 출전시켜 대항토록 했다.

羅濟 양군은 싸움터를 옮겨 가며 10여일 동안 교전했으나 좀처럼 승패가 나지 않았다. 「삼국사기」에는 「쓰러진 시체는 들판에 가득하고, 절구공이가 뜰 정도로 피가 흐르는 상항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에 김유신은 道薩城(도살성:충북 청주) 아래에 진을 치고, 다음 전투를 위해 병사들을 배불리 먹이고 말을 쉬게 했다.

이때 물새 한 마리가 동쪽으로 날아가다가 김유신의 軍幕(군막)을 스쳐 지나갔다. 물새가 출현한 데 대해 막하 지휘관과 참모들은 상서롭지 못한 조짐이라고 수군거렸다. 이처럼 작은 변화 하나에도 무심할 수 없을 만큼 戰場(전장)의 심리는 미묘하다. 김유신은 참모들을 불러 가만히 이른다.

『이건 괴이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 오늘 반드시 백제의 첩자들이 우리 진영에 정탐하러 올 것이다. 너희들은 모르는 체하며 누구냐고 묻지도 마라!』

그런 다음에 그는 즉각 각 진영에 명령을 내리기를, 『성채를 굳게 지키고 움직이지 마라. 내일 원군이 도착하면 결전을 벌인다』라고 역정보를 흘렸다. 군사가 대치하면 그 사이엔 으레 細作(세작)이 오가며 첩보를 수집한다. 백제의 세작은 「신라군이 내일 결전을 하려 한다」는 첩보를 물고 가서 殷相에게 직보했다. 은상은 援兵(원병)에 의한 신라군의 증강을 두려워하여 진퇴의 문제를 놓고 심적 갈등을 일으킨다. 장수가 흔들리면 휘하 장졸들의 사기가 꺾이게 마련이다. 將은 바위처럼 무거워야 하는 법이다.

백제군의 동요를 감지한 김유신은 그날 밤 바로 기습적인 대공세를 감행했다. 백제의 장수가 흔들렸으니까 신라의 승전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김유신 軍은 좌평(관등 제1위) 殷相과 달솔(관등 제2위) 自堅(자견) 등 백제의 장군 10명, 그리고 군사 8천9백80명의 목을 베었고, 말 1만 필과 갑옷 1천8백 벌을 노획했다. 또한 달솔 正仲(정중)과 군사 1백명은 포로가 되었고, 좌평 正福(정복)은 군사 1천명을 이끌고 항복했다.

개선군이 서라벌로 돌아오자, 진덕여왕은 왕궁 문 앞까지 나가 김유신을 맞이했다. 진덕여왕으로서는 즉위 이후 계속된 백제 의자왕의 공세를 기어이 차단했던 셈이다. 여왕은 650년 여름 4월, 백제를 꺾은 사실을 唐 고종에게 보고했다. 그리고 비단에 손수 五言詩(5언시)를 써서 김춘추의 맏아들 法敏(법민)으로 하여금 당 고종에게 바치게 했는데, 이것이 이른바 太平頌(태평송)이다.

「위대한 당 나라 왕업을 열었으니/높고 높은 황제의 앞 길 번창하여라/전쟁을 끝내 천하를 평정하고/학문을 닦아 백대에 이어지리라/(중략) 어질음 깊고 깊어 일월과 어울리고/시운도 따라오니 언제나 태평하네/큰 깃발 작은 깃발 저리도 빛나며/징소리 북소리 어찌 저리 쟁쟁한가/외방의 오랑캐 황제 명령 거역하면/하늘의 재앙으로 멸망하리라」

위의 태평송은 사대주의의 극치라고 매도되어 왔다. 어떻든 당 고종 李治(이치)의 입이 딱 벌어질 만했다. 「삼국사기」에는 「고종이 이 글을 아름답게 여기고 法敏(법민)에게 大府卿(대부경)을 제수하여 돌려 보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해(650년)에 신라는 법흥왕 이래의 自國(자국) 연호 제도를 폐지하고 처음으로 중국의 연호인 永徽(영휘)를 시행했다. 당은 태종 때부터 이미 신라에 대해 중국의 연호를 사용하도록 요구해 왔다.

중국 연호의 사용은 신라가 중국의 周邊部(주변부)임을 자인하는 상징적 사건임에 틀림없다. 그것이 물론 명예스러운 일이 될 수야 없지만, 나라와 백성의 생존권이 걸려 있는 국가대사를 도모하면서 명분만을 좇기 어려운 것이다.

진덕여왕의 巧言令色(교언영색)은 實利를 추구한 原價(원가) 제로(0)의 외교적 립서비스로 해석해야 한다. 따라서 이것은 고구려 영류왕이 당 태종에게 국가의 1급 비밀인 封域圖(봉역도)를 바친 일이나 淵蓋蘇文(연개소문)이 중국의 민족종교인 道敎(도교)를 자청하여 받아들인 일 따위의 이적행위와는 분명하게 구별되어야 할 것 같다.
<18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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