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갑제닷컴 기사

金庾信과 그의 시대(18)

글 정순태 기자  2005-11-28

  • 페이스북
  • 트위터
  • 카카오톡
  • 글자 크게
  • 글자 작게
金庾信과 그의 시대(18)

정순태


반대파를 복종시킨 킹 메이커의 威嚴


654년 봄 3월, 진덕여왕이 재위 8년 만에 병몰했다. 그러나 뒤를 이을 聖骨(성골) 남자가 아무도 없었다. 和白(화백)회의에서는 여러 귀족들이 이찬 閼川(알천)에게 섭정의 지위에 오를 것을 요청했다. 이는 舊 귀족 세력의 컨센서스였다고 해도 좋다.

알천은 이미 선덕여왕 때부터 두각을 나타내 638년 10월에 여왕을 대신하여 민심을 안정시키기 위해 巡撫(순무)에 나서는 등 중요 국사를 수행했으며, 대외 항전에 자주 참전하여 전공을 세운 무장이었다. 더욱이 그는 진덕여왕이 즉위한 647년 이후 上大等(상대등:귀족회의 의장)에 올라 있었다.

이처럼 알천은 당대 귀족사회의 대표적 인물로서 김춘추·김유신 파가 비록 실권을 장악하고 있었다고는 하나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존재였다. 그런데도 김춘추가 왕위를 장악할 수 있었던 것은 김유신의 파워 때문이었다.

「삼국사기」에는 「진덕여왕이 돌아가고 後嗣(후사)가 없으니, 유신이 재상인 알천 이찬과 의논하여 춘추 이찬을 맞아 즉위케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은 후계 왕 추대 문제를 놓고 김유신·알천 사이에 막후 절충이 있었음을 의미한다.

「삼국유사」 진덕여왕 條에는 이 무렵 신라의 중요 국사는 閼川公, 林宗公(임종공), 述宗公(술종공), 虎林公(호림공), 廉長公(염장공), 庾信公이 남산 오지암에 회동하여 처리했는데, 왕위 계승자를 결정했던 회의에서 알천은 수석의 위치에 있었으나, 「諸公(제공)들은 유신의 위엄에 복종했다」고 쓰여 있다.

그러니까 신라의 귀족들은 맨손으로 호랑이를 때려잡은 괴력의 알천보다 김유신의 존재를 더 두려워했다는 얘기다. 알천공은 이미 새 시대를 개막시키는 힘의 진원지가 김춘추·김유신 동맹임을 깨닫고 태도를 명확히 했다.

『나는 이미 늙었고, 이렇다 할 만한 德行(덕행)도 없소. 지금 德望(덕망)이 높기로는 春秋公 만한 이가 없으니, 그는 실로 濟世(제세)의 영웅이라 할 수 있습니다』

드디어 群臣들이 춘추공을 추대하니, 춘추는 세 번 사양하다가 마지못해 수락하는 형식을 취하여 왕위에 올랐다. 김춘추가 바로 태종무열왕이다. 위의 기록들을 살펴보면 알천은 김유신의 힘에 눌려 왕권 경쟁을 포기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니까 김춘추는 알천을 추대한 군신들의 결의를 사실상 무시하고 왕권을 장악했던 것이다.

무열왕이 즉위하자 백제 의자왕은 군사적 이니셔티브를 쥔다. 무열왕 2년(655) 봄 정월에 백제는 고구려·말갈과 연합하여 신라의 북쪽 국경 33성을 공략하여 탈취했다. 이것은 아직 안정기에 들어가지 못한 무열왕 즉위 초기의 약점을 찌른 것이었다.

이렇게 신라는 麗濟의 협공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등 뒤로는 백제의 동맹국 왜의 위협을 받고 있었다. 三正面(삼정면) 방어의 위기에 빠진 신라로선 唐과의 동맹 강화가 불가피했다. 그런 상황에서 백제와 고구려는 羅唐(나당)의 통로인 黨項城(당항성:경기도 남양)을 탈취하기 위해 번갈아가며 공격한다. 당항성은 신라의 生命線(생명선)이었다.

무열왕은 당 고종에게 急使(급사)를 보내 구원을 요청했다. 당 고종은 즉각 營州(영주)도독 程名振(정명진)과 좌우위중랑장 蘇烈(소열=소정방)을 파견하여 요동을 공격했다. 이것은 고구려의 배후를 침으로써 신라에 대한 고구려의 압력을 완화시켜 준 것이었다. 동아시아 세계가 나·당의 동서 동맹과 여·제·왜의 남북 동맹으로 양분되어 국제전의 들머리에 돌입하고 있었던 것이다.

무열왕은 內政(내정)의 개혁과 친위세력의 전면 배치로 왕권을 강화하며 향후의 결전에 대비한다. 理方府格(이방부격:시행령) 60여 조를 고쳐 律令國家(율령국가)의 체제를 강화하고, 큰아들 법민을 태자로 세웠으며, 문왕과 인태 등 아들 넷의 관등을 한 계단씩 올렸다. 이런 조치와 동일한 시기에 「왕녀 智炤(지소)가 대각찬 유신에게 시집갔다」는 사실이 「삼국사기」 무열왕 2년(655) 10월 條에 기록되어 있다.


고구려군의 機動을 묶어두고 백제를 급습


무열왕의 제3녀 지소를 아내로 맞았을 때 김유신의 나이는 61세였다. 김유신의 큰아들 三光의 출생 연도는 알 수 없지만, 그 행적 등으로 미루어 보아 지소가 김유신의 첫 부인일 수는 없다. 그러나 三光 등의 생모가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역사의 기록이 전해지지 않고 있다.

지소가 김유신의 여동생인 문명왕후의 소생인지의 여부도 확실하지 않다. 김춘추는 일찍이 寶羅(보라) 궁주라는 첫부인이 있었으나 요절했다는 사실은 앞에서 쓴 바 있다. 그야 어떻든 김유신은 무열왕의 손위 처남인 동시에 사위가 되는 2중의 혼맥으로 신라 왕실과 엮이게 되었다.

무열왕 7년(660) 봄 정월 상대등 金剛(금강)이 죽자, 이찬 김유신이 上大等에 올랐다. 상대등이라면 귀족회의 의장인 동시에 오늘의 국무총리에 해당하는 직책이다. 바로 이 무렵 동아시아의 정세는 숨가쁘게 진전되고 있었다.

「삼국사기」에는 「(660년) 3월에 당 고종이 좌무위대장군 소정방을 신구도행군대총관, 김인문(무열왕의 차남)을 부대총관으로 삼아 좌효위장군 劉伯英(유백영) 등 수륙군 13명을 거느리고 백제를 치게 하는 동시에 칙명을 내려 무열왕을 우이도행군총관으로 삼아 장병을 거느리고 당군을 지원하도록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무열왕이 蘇烈의 절제를 받는 羅唐 연합군의 형성이었다. 請兵(청병)을 했던 신라로선 어쩔 수 없던 일면도 있었다.

무열왕은 5월26일 태자 法敏, 대장군 金庾信, 장군 眞珠(진주), 天存(천존) 등을 거느리고 경주를 출발하여 6월18일 南川停(남천정)에 도착했다. 이어 법민은 6월21일 김유신과 함께 대형 병선 1백 척을 거느리고 德勿島(덕물도: 경기도 남양만의 덕적도)로 건너가 蘇烈의 唐軍을 接應(접응)했다.

南川停은 오늘날의 경기도 남부 지역인 利川(이천)이다. 여기엔 신라의 6개 停(정=군관구) 가운데 서북방 영토를 관할하던 군관구 사령부가 설치되어 있었다. 그렇다면 신라군이 굳이 이천까지 북상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이것은 백제와 고구려 모두를 혼란에 빠뜨리려 했던 계략이었던 것 같다. 실제론 백제를 치려고 하면서도 겉으론 고구려를 공격하는 체하는 교란전술이었던 것이다. 이런 신라군의 병력 전개는 우선 고구려의 수뇌부로 하여금 羅唐 양군이 자국을 남북에서 협공하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품게 했을 터이다. 그러니까 고구려로서는 설사 백제를 위해 구원군을 보내고 싶더라도 가볍게 動兵(동병)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이때 백제 수뇌부가 신라군의 의도를 어느 정도 파악했는지에 대해서는 역사 기록의 부실 때문에 확인할 수 없다. 다만 당군의 수송선들이 금강 하구로 침입하기에 앞서 덕적도에 기항했다는 점에서 백제측에서도 뒤늦게나마 羅唐 양군의 속셈을 간파했을 것이다. 고구려를 치려고 했다면 당군의 수송선들이 대동강 하구 방면으로 항진하지 않고 덕적도까지 남하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用兵에선 원래 속임수가 많은 것을 자랑으로 삼는다. 羅唐 양군은 고구려군의 기동을 묶어 놓고, 백제에 대해선 그 주력군을 公州(공주) 계선에 집결토록 강요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니까 羅唐 양군은 戰場(전장)을 주도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공격군으로서의 이점을 최대한 활용했던 셈이다.

그러면 김법민이 덕적도에 상륙한 당군을 접응하면서 김유신과 동행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당시 34세의 법민은 병부령(국방장관)을 겸하고 있었고, 66세의 김유신은 상대등에다 대장군의 지위에 있었다. 김법민이 일찍이 25세의 젊은 나이로 진덕여왕의 太平頌을 당 고종에게 올리는 등 對唐 외교의 일선에 활약했던 경험을 지녔다고는 하지만, 군사전문가가 아니었던 만큼 69세의 백전노장 蘇烈의 전략 협의 상대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소열과의 전략회의에서 用兵과 관련하여 실질적으로 신라를 대표한 인물은 김유신이었다고 할 수 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덕적도에서 羅唐 연합군의 수뇌부는 백제 공략을 위한 구체적 전략을 수립했다. 羅唐 양군은 7월10일 금강 하류 伎伐浦(기벌포:충남 장항)에서 합류하여 백제의 도성 泗城(사비성=부여)을 공략하기로 약속했던 것이다. 당군은 海路로 이동했던 만큼 백제군의 저항에 걸릴 염려가 별로 없었던 반면 백제의 영토를 가로질러 진격해야 하는 신라군은 그만큼 위험을 감수할 수밖에 없는 전략이었다.

이같은 전략에 따라 무열왕은 태자 법민, 대장군 김유신, 좌장군 品日(품일), 우장군 欽純(흠순) 등에게 精兵(정병) 5만을 주어 사비성을 향해 진격토록 했다. 무열왕 자신은 今突城(금돌성: 지금의 경북 상주시 모동면 수곡리 백화산)에 거가를 머물렀다. 7월9일 김유신 軍은 황산벌(지금의 논산시 연산면·부적면)에 이르렀다.


김유신의 行軍路를 둘러싼 비밀


신라군의 행군로를 보면 경주-경기도 이천-충북 옥천-충남 논산으로 되어 있다. 이같이 병력의 운용에 대해 연구자들 사이엔 상당한 논란을 빚어 왔다. 왜 신라의 대병력이 그렇게 1천 리에 달하는 먼 거리를 우회했는지, 그 이유가 불투명하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다수의 연구자들은 무열왕, 김법민, 김유신 등 신라 수뇌부가 백제 공격에 동원될 대병력을 보은·옥천 지구에 남겨둔 채 호위부대 정도의 병력만 데리고 남천정으로 가지 않았겠느냐고 추측한다.

그러나 신라의 수뇌부가 소수 병력만 데리고 남천정으로 북상했다면 백제나 고구려를 교란시키려 했던 당초의 전략 목적은 달성될 수 없었을 터이다. 왜냐하면 백제와 고구려의 수뇌부도 첩보망을 활용하고 있었을 터이니까 그런 정도의 속임수에 넘어갈 만큼 무능했다고 판단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정확한 역사의 기록은 없지만, 신라는 백제 공략을 앞두고 적어도 10만 이상의 병력을 동원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경주를 출발한 무열왕은 병력을 둘로 나누어 절반 정도의 병력을 거느리고 남천정으로 북상했다가 다시 남하하여 보은·옥천에서 全軍을 합류시킨 것으로 보인다.

무열왕을 따라 남천정으로 갔다가 다시 보은-옥천 지구로 남하한 김유신은 여기서 대기중이던 5만 규모의 精兵(정병)을 攻擊梯隊(공격제대)로 삼아 백제로 진격했고, 무열왕은 남천정까지 데리고 갔던 병력을 豫備梯隊(예비제대)로 삼아 옥천에서 60리 떨어진 상주의 백화산에다 진을 치고 공격제대의 뒤를 받치고 있었던 것 같다.

이런 추측에는 상당한 근거를 제시할 수 있다. 왜냐하면 남천정으로 북진했다가 다시 남하하여 금돌성으로 들어갔던 병력의 장수들과 백제 공략에 나선 좌우익 장수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그런 단서가 발견되기 때문이다.

「삼국사기」에는 남천정까지 북상했던 병력의 주요 지휘관이 金庾信, 眞珠, 天存인데, 김유신 휘하 공격제대의 좌·우익 장수는 欽純(흠순)과 品日(품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니까 상주 백화산에 진을 치고 예비제대로 대기한 부대의 實兵(실병) 지휘관은 眞珠와 天存이었고, 김유신이 거느린 공격제대의 주력은 品日(품일)과 欽純(흠순)의 부대였다고 판단하는 것이 합리적일 것 같다.

신라의 입장에서 멀리 있는 唐과 연합하여 가까운 백제를 치는 것은 병법에서 말하는 遠交近攻(원교근공)이다. 「孫子兵法」에서는 遠交近攻의 전략을 채택할 경우 자국보다 강한 나라와 동맹을 맺는 것은 위험하다고 지적하고 있다. 동맹국에게 자국까지 먹혀버릴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신라의 수뇌부가 이런 兵家(병가)의 상식을 간과했을 리는 없다. 백제를 공략한 당군의 병력 규모가 13만이었으니까 신라 수뇌부도 백제 멸망 후에 전개될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蘇烈의 당군에 맞설 만한 병력을 동원했을 것이다. 8년 후(668) 고구려를 멸망시킬 때 신라가 동원했던 병력의 총 규모가 20만이었던 점과 관련시켜 보면 660년에 동원된 병력의 수가 10만~15만 수준이었다고 판단해도 전혀 무리할 것은 없다.
<19편에 계속>


Copyright ⓒ 정순태의 역사산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