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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庾信과 그의 시대(9)

글 정순태 기자  2005-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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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庾信과 그의 시대(9)

정순태


麗-隋 대전의 승인과 패인

612년 2월, 隋 煬帝(수 양제)는 고구려가 국경으로 삼았던 遼河(요하) 서쪽에 진출했다. 隋軍(수군)의 병력은 총 1백13만3천8백명. 매일 1軍씩 40리 간격으로 진발시킨 수군의 군세가 1천리에 뻗혔다니까, 고대 세계의 戰史上(전사상) 최대의 병력 동원이었다. 후방에서 군량 수송을 맡은 인원을 합치면 총동원 규모는 그 2배에 달했다고 역사서는 기록하고 있다.
양제의 고구려 원정은 隋 文帝(수 문제)의 1차 원정 실패 이후 隋 제국의 숙원이었고, 중국 중심주의의 체면이 걸려 있던 문제였다. 당시 동아시아의 동맹 관계에서 고구려는 고립되어 있었다. 그런 만큼 수 양제로서는 절호의 기회였다.
북방 草原(초원)의 강자 돌궐은 이미 隋에 복속했고, 고구려에 시달림을 받아온 신라와 백제는 고구려 원정을 수 양제에게 간청하고 있었다. 특히 백제는 隋와 연합하여 고구려를 치겠다는 적극성을 보였다.
양제의 1차 원정의 緖戰(서전)은 遼河 도하 작전으로 전개되었다. 서전에서 隋軍은 대단한 병력 손실을 감수하면서도 기어이 요하를 건넜다. 이를 저지하려던 고구려 군도 1만의 전사자가 발생했다.
이어 수군은 고구려의 만주 영토의 핵심인 遼東城(요동성)을 포위 공격했다. 그러나 요동성이 좀처럼 함락되지 않자, 수 양제는 요동성 서쪽으로 수십리 떨어진 六合城(육합성)에 진을 치고, 宇仲文(우중문), 宇文述(우문술)에게 병력 30만5천명을 주어 육로로 평양성을 바로 찌르도록 했다.
한편 隋의 水軍은 山東半島(산동반도)에서 출항, 황해를 건너 곧장 貝水(패수=대동강) 하구로 진출했다. 水軍 지휘관 來護兒(내호아)는 우중문-우문술의 육군과 합동 작전으로 평양성을 공략하기로 되어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功(공)을 서둘렀다. 그는 정병 4만을 뽑아 평양으로 진격했다. 水軍의 단독 작전이었다.
고구려의 수도방위사령관이었던 영양왕의 이복동생 建武(건무·후일의 영류왕)는 空城之計(공성지계)를 구사하여 내호아 軍을 일단 평양 外城(외성)으로 끌어들였다. 외성에 진입한 내호아 軍은 재물 약탈에 몰두하여 隊伍(대오)가 흩어졌다. 이 순간, 외성 곳곳에 매복하고 있던 건무 軍이 대대적인 역습을 감행했다. 내호아 軍은 대동강 하구까지 60리나 물러나 겨우 전열을 수습했으나 사실상 전투력을 상실해버렸다.
한편 우중문-우문술의 육군은 兵站(병참)의 실패로 인해 고구려의 乙支文德(을지문덕)에게 철저히 농락당한다. 육군 30만5천은 압록강을 건너기 전에 각개 병사들이 한 달간 먹을 식량을 지급받아 휴대토록 했다. 무기와 군장까지 합치면 1인당 감당해야 할 짐의 무게가 3石(약 70kg)에 달했다. 병사들은 軍令(군령)을 어기고 야전 천막 안에서 땅을 파고 군량을 파묻어버렸다.
배고픈 적을 다루는 을지문덕의 용병술이 탁월했다. 압록강 도하 직후 우중문-우문술 軍은 을지문덕 軍의 작전상 후퇴에 따라 하루에 七戰七勝(칠전칠승)하며 평양성 30리 밖 근교까지 진출했다. 그러나 평양성은 견고한데, 우문술-우중문 軍의 식량이 떨어졌다. 바로 을지문덕의 堅壁淸野(견벽청야) 작전에 걸려들었던 것이다.
견벽청야는 우세한 병력의 침공에 대비하여 방어 거점에 미리 山城(산성)과 平地城(평지성)을 견고하게 쌓아 놓고, 開戰(개전)과 동시에 들판이나 가옥에 곡식 한 톨 남김없이 불태워버린 다음, 군관민이 모두 입성하여 守城(수성)하는 전술이다. 이런 전술을 쓰면 원정군은 군량과 말먹이의 현지 조달이 불가능하다.
진퇴양난에 빠진 우중문-우문술에게 을지문덕은 회군의 명분을 준다. 隋軍이 물러가면 영양왕이 入朝(입조)하겠다는 미끼를 던진 것이다. 우중문과 우문술로서도 그 말을 전적으로 믿지야 않았겠지만, 회군 후 수양제에게 복명할 구실은 찾았던 셈이다.
우중문-우문술 軍이 회군 길에 오르자 薩水(살수=청천강)에서 미리 포진하고 있던 을지문덕 軍의 일대 섬멸전이 전개된다. 이것이 고구려의 先守後攻(선수후공) 전략이다. 우중문-우문술 軍 30만5천명 중에서 살아서 돌아간 숫자는 2천7백명에 불과했다. 역사에서 말하는 薩水大捷(살수대첩)이 바로 이러했다.
불같이 화를 낸 수양제는 우문술 등의 목을 쇠사슬로 묶어 짐승처럼 끌고 長安(장안)으로 돌아갔다. 우문술 등은 압록강 도하 직전에 항복 교섭의 명목으로 수군 진영을 방문하여 수군의 허실을 살핀 을지문덕을 사로잡지 못하는 등 전술상의 실책을 저질렀다고 문책되었다.
수 양제와 우문술은 사돈 관계를 맺었을 만큼 가까운 사이였다. 우문술의 막내 아들 宇文士及(우문사급)이 수양제의 사위다. 6년 뒤(618)의 얘기지만, 우문술의 장남과 차남인 우문화급-우문지급 형제가 수 양제를 시해함으로써 수 제국은 37년 만에 멸망하고 만다.

검술 수련하고 國仙에 올라

612년의 여-수 대전 중 백제, 신라의 대응이 흥미롭다.
<隋書>(수서) 百濟 傳(백제 전)에는 「(隋의) 6軍이 요하를 건너자, 백제 무왕이 국경에 병력을 엄중히 배치하고, 말로는 隋軍을 돕는다고 하면서(聲言助隋), 실제로는 양단책을 썼다(實持兩端)」고 기록되어 있다.
<삼국사기> 영양왕 23년(612) 조에 따르면 백제 무왕은 수 양제에게 사신 國知牟(국지모)를 파견, 隋-百濟 양군이 합류할 기일까지 사전에 합의해놓고도 비밀리에 고구려와 내통하여 隋軍의 기밀을 전달했다고 한다. 국가 이익 확보를 위한 철저한 2중 외교였다.
신라도 마찬가지였다. 진평왕은 바로 한 해 전인 611년에 사신을 보내 請兵(청병)의 국서를 올려 수 양제의 허락을 받은 바 있었지만, 여-수 대전이 벌어진 612년 신라군은 움직이지 않았다. <삼국사기>에는 진평왕 34년(612)의 기록이 누락되어 있어 정확한 사정은 알 수 없다.
그러나 불과 수개월 전에 백제군에게 가잠성을 탈취당한 신라로서는 백제군의 재침에 대비하여, 비상 경계 태세에 돌입해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만약 隋軍이 승세를 보이기만 했다면 신라군도 호응하여 북진했을지도 모른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金庾信은 다시 홀로 보검을 차고 咽薄山(열박산)으로 들어가 병서를 읽고 무예를 단련하고 있다. 그의 나이 18세 때다. 열박산은 지금의 경북-경남 도계에 위치한 영남 알프스 연봉 중 하나일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삼국사기> 열전은 당시 金庾信의 수련 모습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金庾信이 향불을 피우고 축원하니 그 때 하늘에서 靈光(영광)을 내려 보검에 실리고, 3일째 되는 날 밤에 虛宿(허수=화성)와 角宿(각수=목성) 두 별의 빛이 아득히 내려오자 보검이 스스로 움직이는 것 같았다>
위의 인용문은 워낙 神異(신이)한 얘기여서 이해하기가 까다롭다. 예로부터 인도, 페르시아, 중국 등지에서는 별자리를 동서남북의 四宮(4궁)으로 나누고, 다시 각 宮을 일곱으로 나누어 28宿(수)라고 했는데, 허수는 그 열한 번째 별, 각수는 그 첫 번째 별이다. 그런 별들이 金庾信의 칼에 氣(기)를 실어 주었다는 얘기다. 하늘의 신령스런 빛에 대해선 잘 모르겠지만, 氣는 실재한다.
지난 5월 초에 한 무술 수련자가 1km가 넘는 한강을 사이에 두고 강남 쪽에서 강북 쪽으로 손바닥 바람(掌風)을 날려 10여명을 뒤로 쓰러뜨리려고 했던 시범이 중인환시리에 성공한 사례가 공영 텔레비전 방송을 통해 보도되었다. 그러니까 金庾信이 보검에 精氣(정기)를 실었다는 기록을 허황한 얘기로 돌릴 수 없다.
미시나 아키히데는 그의 <신라 화랑 연구>에서 「金庾信의 刀劍(도검) 전설 중에는 道敎(도교) 계통 전설과의 습합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주장했다. 즉, 七星劍(칠성검) 풍습에 관한 사상의 개재를 암시하는 것으로, 이같은 칼에 대한 신앙은 일찍부터 중국, 한국, 일본에 성행했다는 것이다. 미시나의 주장은 신라의 花郞道를 중국 고유 道敎의 아류 쯤으로 오해할 수 있는 여지를 남기고 있다.
원래 道敎는 중국에서 外來(외래) 종교인 불교에 대항하기 위해 老子(노자)의 道德經(도덕경)을 경전으로 받들고 神仙說(신선설)을 골간으로 삼는 중국의 민족주의적 종교다.
도교의 신선설이란 인간의 몸으로 불로장생의 신선이 된다는 것인데, 신선이 되기 위한 方術(방술)이 바로 養生術(양생술)이다. 중국의 진 시황이나 당 태종은 모두 불로장생을 위한 丹藥(단약)을 제조해 주겠다는 사기꾼 道士(도사)에게 속아 넘어가 엉터리 약을 먹고 오히려 생명을 단축시키고 말았다.
도교의 운둔 사상 역시 名利(명리)와 권세의 지위를 버림으로써 그 지위에 따르는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보신술이다. 특히 도교의 無爲自然(무위자연)은 아무 하는 것 없이 제대로 내버려 둔다는 사상인데, 이런 사상에 젖어 있는 백성이 많으면 많을수록 군주는 편안한 법이니까, 군주의 통치술로 이용되기도 했다. 실제로 왕조 시대의 중국에서 백성들이 가장 많이 신봉했던 종교는 도교였다.
일본의 역사학자 쓰다 소키치(津田左右吉·1873-1961)는 그의 명저 <중국 사상과 일본 사상>에서 「도교 사상은 보신하는 법, 성공하는 법, 백성을 다스리는 통치술이므로 결국은 처세술」이라고 규정하면서 다음과 같은 논리를 전개했다.
「신선설은 육체적 생명을 무한히 연장시키는 것으로, 인생의 쾌락을 무한정 향수하고픈 욕구로부터 출발하고 있다. 그런데 이런 욕구와 향수는 모두 자기와 관련된 것이기 때문에 신선설과 양생설은 물론, 은둔 사상, 道家에 있어서의 保身(보신)의 道도 결국 자기 본위의 사고이며, 일종의 利己主義(이기주의)다」
신라의 花郞道는 세속오계의 5개 항 중 하나인 臨戰無退에서 알 수 있듯이 保身이나 養生과는 전혀 인연이 없다. 화랑은 우리 고유의 仙道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것은 필사본 <화랑세기>의 서문을 보면 명확하다.
<화랑은 仙徒(선도)이다. 우리 나라에서는 옛날부터 神宮(신궁)을 받들어 하늘에 큰 제사를 지냈다>
우리 고유의 샤머니즘은 중국의 것과 사뭇 다르다. 예컨대 우리의 三韓(삼한)시대에는 祭天(제천) 의식을 올리던 蘇塗(소도)가 있었다. 오늘날에도 「솟대」라 하여 그 옛 모습을 찾아볼 수 있는 소도는 神聖(신성) 지역으로서, 설사 죄지은 사람이 이곳에 도피해 와도 붙들어 갈 수 없는 곳이었다. 이런 소도는 중국인과는 전혀 무관한 것으로 오히려 서양의 아실럼(Asylum=遁避所)과 유사하다.
그러니까 우리의 문자가 없었던 시대에 우리 고유의 종교가 仙이나 道 등의 한자로 표기되었다고 해서 그것이 중국의 민족 종교인 道敎로 혼동해서는 안된다는 얘기다. 따라서 미시나(三品彰英)의 견해는 신라 화랑 또는 金庾信의 종교적, 사상적 배경을 이해하는 데 혼돈을 줄 가능성이 있다.
어떻든 이때쯤 金庾信의 병법과 무술이 상당한 경지에 이르렀던 것 같다. <삼국사기>에는 金庾信이 18세에 검술을 닦아 國仙(국선)에 오른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국선이라면 바로 화랑 최고의 리더인 風月主다.
<10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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