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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庾信과 그의 시대(11)

글 정순태 기자  2005-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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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庾信과 그의 시대(11)

- 金春秋-金庾信 血盟, 新羅 정권의 實勢로 떠오르다

정순태


고구려의 위기 해소한 楊玄感의 반란

金庾信(김유신)이 화랑 최고의 리더 國仙(국선=풍월주)의 지위에 올라 一統三韓(일통삼한)의 야망을 키우고 있던 무렵, 東(동)아시아의 정치 지형은 다시 한번 지각 변동을 일으킨다. 隋 양제는 그의 제1차 고구려 원정(612)의 참패에도 불구하고 제2차 원정을 기도한다. 613년 2월에 양제는 조서를 내려 전국의 군사들을 郡(탁군·지금의 北京)에 집결시키고, 동북 국경 일대에 군량을 저장토록 했다. 煬帝(양제)는 측근들에게 호언한다.
『오늘날 우리의 국력이 바닷물과 산을 뽑을 수 있거늘 하물며 저런 따위의 적이야 무엇이 문제이겠는가?』
613년 4월에 煬帝는 친히 遼河(요하)를 건넜다. 제2차 원정의 결전장은 遼東城(요동성)이었다. 제1차 원정 때 隋軍(수군)은 고구려의 수도 평양성 외곽까지 깊숙이 진출했다가 兵站線(병참선)이 너무 길어 참패했던 만큼 이번에는 고구려의 만주 영토부터 먹어들어가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고구려 軍은 만주 영토의 핵심 요동성을 20여일간 밤낮에 걸친 포위 공격에도 불구하고 선방했다. 드디어 隋軍은 1백만개의 흙 포대를 만들어 요동성보다 더 높게 쌓았다. 그 위에서 성 안을 내려다보고 공격하려는 물량 작전이었다.
요동성이 낙성의 위기에 빠졌다. 바로 이때 隋의 본국에서 楊玄感(양현감)의 반란이 일어났다. 양현감은 황하와 대운하 永濟渠(영제거)의 교차지점인 黎陽(여양)에서 漕運(조운)을 총지휘하며 남방의 전쟁물자를 전선으로 보내던 군수사령관이었다.

양제의 凡庸함

전황이 좀처럼 호전되지 않자, 양현감은 불안했다. 양제의 1차 원정이 야전 지휘관들의 과욕에 따른 패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병참 책임자가 업무 태만이란 죄목을 뒤집어쓰고 사형을 당한 전례가 있었다. 더욱이 양현감은 양제의 숙청 대상 리스트에 올랐던 원로 대신 楊素(양소)의 아들이었다. 楊素가 처형을 면한 것은 양제의 예상보다 빨리 병사했기 때문이었다.
楊素라면 南朝(남조) 최후의 왕조 陳(진)을 멸망시킬 때 水軍을 이끌고 陳軍의 집결을 저지한 大功(대공)을 세웠으며, 황태자 楊勇(양용)을 제거하고 제2 황자였던 楊廣(양광=양제)을 文帝의 후계자로 만드는 음모에도 깊숙이 가담했다. 그런데 양제 역시 父皇(부황)인 文帝를 닮아, 공신으로서 벼슬이 높으면 온갖 수단을 다해 때려잡는 비정한 군주였다. 그것이 隋 왕조를 길이 보존하는 계책이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이번에는 내가 숙청당할 차례」라는 위기감에 빠진 양현감은 서둘러 반기를 들고, 隋의 副都(부도)로서 주변에 洛口倉(낙구창) 등 거대한 곡물 저장소가 집중되어 있던 洛陽(낙양)을 공략하여 반란군의 거점으로 삼으려 했다. 그러나 양현감의 반란군은 기병 부대를 갖지 못해 원거리 기동에 차질을 빚고 있던 가운데 급히 회군한 양제의 정예 기병 군단에 의해 궤멸당했다.
양현감의 반란은 가볍게 진압되었지만, 그 여파는 컸다. 농민, 비적, 야심가들이 잇달아 봉기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양제는 제3차 고구려 원정을 강행한다. 실패하면 실패할수록 만회하려고 애태우는 것이 양제의 凡庸(범용)한 점이었다.
614년 7월, 양제는 넌덜머리도 내지 않고 다시 군사를 일으켜 요하 서쪽 懷遠鎭(회원진)으로 진출했다. 來護兒(내호아)가 지휘한 水軍은 요동반도 남단의 요충 卑奢城(비사성:오늘의 大連)을 함락시키고, 水路(수로)로 평양을 향해 진발하려던 참이었다.
이때 고구려의 영양왕이 항복을 청하는 글을 올리고, 양현감의 반란 때 麗-隋 전선에서 고구려로 도망쳐 온 隋의 병부시랑(국방차관) 斛斯政(곡사정)을 묶어 보냈다. 곡사정은 양현감과 가까운 인물로서 양제의 처벌이 두려워 망명했던 것이다.
이 무렵에 이르면 천하의 야심가 양제로서도 고구려 원정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반란의 불길이 중원 곳곳으로 번지고 있었는데다 군사들이 厭戰(염전) 기분에 휩싸여 어찌해 볼 도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영양왕이 보낸 국서는 전쟁을 포기할 명분을 제공해 주는 것이었다.
양제는 영양왕의 詐降計(사항계·거짓 항복의 계책)를 뻔히 알면서도 長安으로 돌아가 太廟(태묘)에 참배하고 『고구려가 항복했다』고 고함으로써 체면치레를 했다. 그 직후 양제가 영양왕의 入朝(입조)를 요구했지만, 영양왕이 불응했음은 물론이다.

『누가 내 가느다란 목을 베러 올 것인가』

수 양제는 노이로제에 걸려 점차 증세가 심해졌다. 돌궐도 공순하던 啓民可汗(계민가한)이 죽고 그 아들 始畢可汗(시필가한)이 즉위하자마자, 반기를 들고 순행중의 수 양제를 기습하여 山西省(산서성)의 雁門城(안문성)에 밀어 넣고 맹공을 가했다. 돌궐군은 隋의 원군이 당도하자 공수의 처지가 뒤바뀔 것을 우려하여 바람처럼 회군했으나, 수 양제에게 가한 심리적 타격은 컸다.
의욕을 잃은 양제는 近衛軍團(근위군단)인 驍果衛(효과위)를 거느리고 대운하를 통해 멀리 江都(강도·지금의 揚州)로 南行해버렸다. 여차하면 江南 정권이라도 존속시켜 보겠다는 현실 도피였다.
이때(617) 山西省에서 북방 돌궐족의 남진을 막고 있던 양제의 이종사촌이며 太原 留守(태원 유수)였던 李淵(이연)이 봉기하여 長安(장안)으로 진격했다. 李淵은 수도방위군을 제압하고 長安에 입성한 다음, 양제의 손자 楊侑(양유)를 허수아비 황제로 앉히고, 江都에 머물고 있던 양제에게는 太上皇帝(태상황제)의 칭호를 올리면서 실권을 장악했다. 물론 양제가 인정하지 않았던 쿠데타 정권이었다.
그럼에도 양제는 풍광 좋은 江都에서 미녀 1천명과 호유하는 거대한 할렘을 만들어 놓고 3년 넘게 그 속에서 종일 취해 장안으로 돌아가 사태를 수습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근위군단 효과위의 장병들은 대부분 長安 부근 출신들로서 귀향 가능성이 사라지자 불온한 움직임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양제는 어느 날, 거울에 자기 얼굴을 비추고 있다가 문득 옆에 있던 蕭(소)황후에게 『이 내 가느다란 목을 누가 자르러 올 것인가?』고 한탄했다. 형언할 수 없는 공허감이 마음속에 밀려들었던 듯하다.
과연 大業(대업·양제의 연호) 14년 3월15일 兵亂(병란)이 일어났다. 경호부대 효과위의 대장 宇文化及(우문화급)-智及(지급) 형제가 쿠데타의 주모자였다. 이들 형제의 막내동생이 바로 수양제의 사위인 宇文士及(우문사급)이다. 쿠데타 軍이 궁 안에 들이닥쳐 양제를 죽이려 하자, 그래도 그는 『천자에게는 천자의 죽는 방법이 있다』면서 『毒酒(독주)를 가져오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수 양제의 자살용 독약을 관리하던 宮人(궁인)이 제일 먼저 도망쳐버린 바람에 그는 결국 자신의 손수건으로 목이 매여 죽임을 당했다. 양제를 따라 江都에 와 있던 근친들도 모두 처형되었다. 양제를 시해한 쿠데타 軍은 장안으로 귀향하기 위해 북상했으나 도중에 군벌들의 요격을 받고 궤멸했다.
양제의 시해 소식이 전해진 618년 5월, 李淵은 이제 이용가치가 사라진 허수아비 황제 恭帝(공제=楊侑)를 폐위시키고 스스로 천자가 되었다. 이 사람이 바로 3백년 가까이 계속된 唐(당) 왕조의 창업자 高祖(고조)다. 그러나 그때까지는 군벌들의 난립으로 中原(중원)의 覇者(패자)가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이후 李淵은 李密(이밀), 竇建德(두건덕), 王世充(왕세충) 등 군벌들과 어지러운 쟁패전을 벌인다. 중국 사람들은 이런 상황을 『중원의 사슴을 쫓는다』고 표현한다.

한국사의 그리스, 伽倻의 맨파워

중국 대륙에서 군웅들이 「사슴」(中原의 패권)을 쫓느라고 동쪽을 넘볼 틈이 없었던 가운데 동방 삼국의 쟁패전은 새로운 양상을 띠게 된다. 고구려는 對隋戰(대수전)에서 빛나는 승리를 거두기는 했으나, 엄청난 피해를 입어 국가 재정비 기간이 필요했던 만큼 한동안 군사 활동을 자제했다. 먼저 공세로 나온 것은 백제였다.
백제 무왕 17년(616) 10월, 달솔(제2위의 관등) 奇(백기)가 지휘하는 백제군 8천은 신라의 母山城(모산성·전북 남원시 운봉읍)을 공략하여 함락시켰다. 신라 진평왕 40년(618), 漢山州 軍主(한산주 군주) 邊品(변품)은 6년 전 백제에게 빼앗겼던 假岑城(가잠성·충북 괴산)을 탈환했다.
이같은 백제-신라의 공방전 속에서도 김서현-유신 부자가 출전한 역사의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이는 이들 부자가 아직 주요 지휘관의 위치를 차지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얘기에 다름 아니다.
진골 귀족만 오를 수 있던 신라의 將軍은 관구사령관 격인 軍主를 제외하면 평소 王京(왕경)에서 머물고 있다가 유사시 왕명에 의거하여 私兵 혹은 屬官(속관)을 거느리고 전장에 출전하게 되어 있었는데, 김유신 家는 아직 私兵을 양성할 만한 충분한 경제력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금관가야 멸망(532) 직후 그 마지막 왕이며 김유신의 증조부인 仇衡(구형)이 金海(김해)를 食邑(식읍)으로 받긴 했지만, 신라의 식읍은 당대에 한정되어 상속되지 않았다.
서현은 화랑 조직 내부에서 가야파의 존재를 처음으로 부각시킨 인물이었고, 金庾信은 가야파의 희망이었다. 그러나 출전하지 못하면 전공을 세울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전리품도 획득할 수 없다. 그러면 권력 내부에서 발언권도 갖기 어렵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가야파는 신라 귀족 사회에서 원천적으로 견제를 당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면 가야파가 과연 신라 귀족사회로부터 견제당할 만한 존재였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가야가 신라에게 멸망당했다고 해서 군사적 약체였다고 생각한다면 큰 잘못이다. 가야는 뛰어난 철기 문화를 보유한 국가였다. 부산 福泉洞(복천동)과 金海에 있는 가야 박물관에 가 보면 가야의 힘을 대번에 느낄 수 있다.
가야의 고분에서는 신라, 백제, 고구려의 그것에서보다 철제 갑옷과 철제 무기가 유별나게 많이 출토되었다. 부산 복천동, 김해, 함안, 고령 등지의 4~5세기 가야 古墳(고분)에서는 철제 갑옷과 투구뿐만 아니라 철제 말 얼굴 가리개까지 발굴되었는데, 이런 가야의 전쟁 도구는 같은 시기의 신라나 백제의 것보다 선진적인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미국의 동양미술사학자 존 코벨(1910-1996)은 그녀의 저서 「한국문화의 뿌리를 찾아서」(김유경 편역)에서 한국의 철기시대는 삼국시대가 아니라 5백년간 번영했던 가야를 포함한 4국시대로 고쳐져야 한다고 지적했다. 50여년간 일본 고대 미술을 연구했던 코벨 박사는 「쇠의 바다」, 즉 金海에서 건너간 기마민족의 일본 정벌을 고고학적 관점으로 강하게 주장했다. 역사책에는 왜곡이 있지만, 고분에서 출토되는 유물은 거짓이 없다. 그녀가 보는 가야는 당시 東아시아 세계에서 쇠의 생산과 유통 부문을 지배한 선진 해상 무역 국가였다.

量的 열세로 신라에 병합돼

「가야에서 풍부하게 생산되던 철로 만든 전쟁 도구는 가야와 낙랑 간의 무역에서 주요 품목으로 거래되었다. 가야의 배는 철의 원료인 鐵(철정)을 싣고 對馬(쓰시마) 해협을 건너 일본으로까지 다녔다. 가야연맹체는 고대 도시국가 아테네, 혹은 르네상스 시대의 제노바처럼 해운 연맹을 맺고 있었다」
철제 갑옷과 투구를 착용한데다 말에다 철제 갑옷까지 입힌 가야의 鎧馬武士(개마무사)는 당시 무서운 전사들이었다. 미국 컬럼비아 대학 개리 레저드 교수의 학설에 따르면, 가야는 바다를 건너 일본을 정벌하고 369년부터 505년까지의 기간에 1백년 이상 일본의 왕위를 계승했다. 「일본서기」에 기록된 소위 「神功皇后(신공황후)의 三韓 정복설」은 가야 출신 神功의 近畿(긴키)지방 정벌을 정반대로 왜곡했다는 얘기다.
철을 지배하는 자가 권력을 잡는다. 전성기 가야연맹의 판도는 오늘날 한국 제2의 도시 부산과 제3의 도시 대구를 아우르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야는 왜 신라에 병합당했던 것일까?
가야의 城邑國家(성읍국가)들은 해양 무역 국가가 지닌 개방성으로 인해 고대 그리스의 폴리스나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 반도의 도시국가들처럼 영토국가를 이룩하지 못했다. 가야연맹국은 초기엔 금관가야(김해)가, 후기엔 대가야(고령)가 맹주의 위치에 있었지만, 모두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할 수 없었다. 연맹을 구성하는 도시국가들의 국력이 서로 비슷비슷했기 때문이었다.
특히 가야연맹의 本家(본가)인 금관가야의 지배 세력 중 상당수가 왜국의 발상지 九州(규슈)로 집단 이주했던 것이 강력한 영토국가를 이룰 수 없었던 중요한 이유로 지적되고 있다. 이런 가운데 강력한 영토국가를 형성한 백제와 신라에게 협공을 당하다가, 결국엔 백제를 제압한 진흥왕 대의 신라에게 가야의 諸國(제국)이 하나하나 각개격파를 당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가야는 군대의 質的(질적) 열세가 아니라 量的(양적) 열세에 의해 신라에 병합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가야 武人(무인)의 질적 우수성은 554년 관산성 전투에서 백제 聖王(성왕)을 전사시킨 김유신의 조부이며 금관가야 마지막 임금 仇衡(구형)의 아들인 武力(무력)에 의해 이미 입증된 바 있다. 신라는 가야를 병합함으로써 삼국 통일에 다가갈 수 있었다.
가야의 병합은 남한 지역에서 가장 중요한 지역인 낙동강의 경제력을 장악했다는 사실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그것은 가야계 인재의 흡수였다. 신라의 삼국 통일에서 文武(문무) 양면에 걸친 가야계 인재의 역할은 결정적이었다. 김유신이 신라 사회의 소수파인 가야계를 主流(주류)의 위치로 끌어올려 가는 과정은 앞으로 다시 거론될 것이다.

백제 武王의 대공세

삼국 항쟁기를 통해 가장 많은 횟수의 공격전을 감행했던 군주는 백제 武王(무왕)이며, 그의 맞수는 신라 眞平王(진평왕)이었다. 무왕 24년(623)에 백제군은 신라의 勒弩縣(늑노현·전북 여산)에 침공했다. 바로 다음해인 624년, 백제군은 신라의 速含(속함·경남 함양), 영잠, 岐岑(기잠), 烽岑(봉잠), 旗縣(기현), 穴柵(혈책) 등 6개 성을 빼앗았다. 오늘날의 雲峰(운봉)~함양 일대의 군사 거점들로 추정되고 있다.
이어 626년 백제군은 신라의 主在城(주재성)을 공격하여 성주 東所(동소)를 전사시켰다. 627년 7월에는 백제 장군 沙乞(사걸)이 신라 서쪽 변경 2개 성을 함락시키고, 3백여명을 포로로 잡아갔다. 무왕은 다시 신라를 공격하기 위해 국중의 병력을 熊津城(웅진성)에 집결시켰다. 신라 진평왕이 唐에게 急使(급사)를 보내 구원을 요청했다.
무왕은 이런 사실을 알고 일단 兵을 거둔 다음, 조카 夫餘福信(부여복신)을 당에 보내 조공했다. 이때 당 태종은 일방적으로 신라 편을 드는 조서를 무왕에게 보냈다.
「신라왕 金眞平은 나의 藩臣(번신)이요, 왕의 이웃인데 매번 군사를 보내 征討(정토)를 그치지 않는다고 들었다. 군대의 힘만 믿고 잔인한 행위를 마음대로 하는 것은 나의 기대와 어긋난다. 내가 이미 왕의 조카 福信과 고구려, 신라 사신들에게 서로 화친하도록 타이르고 모두 화목하게 지내게 했다. 왕은 반드시 전날의 원한을 잊고 나의 본뜻을 헤아려 모두 이웃의 정을 두터이 하여 전쟁을 중지하라」
무왕은 곧 표문을 바쳐 사죄하는 형식을 취했다. 그러나 속셈은 달랐다. 628년(무왕 29년) 백제군은 또다시 신라의 가잠성을 포위 공략했으나 함락시키지는 못했다.
백제 무왕과 신라 진평왕의 대결에선 대체로 신라 쪽의 守勢(수세) 또는 고전으로 기록되어 있다. 장기 동원 전쟁에서 살아남으려면 경제력의 뒷받침이 필수적인데, 신라에는 대단한 흉년까지 들이닥쳤다. 「삼국사기」 진평왕 50년(628) 條(조)에는 「여름에 큰 가뭄이 들자 (중략) 가을과 겨울에 백성들이 굶주림에 지쳐 자녀들을 파는 일이 많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런 신라의 위기 상황 속에서 김서현-유신 부자에게 일생 일대의 기회가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 그것은 龍樹(용수)-龍春(용춘) 형제의 浮上(부상)이었다.
<12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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