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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庾信과 그의 시대(12)

글 정순태 기자  2005-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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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庾信과 그의 시대(12)

정순태


龍春과 舒玄의 同病相憐

진평왕 44년(622)에 이찬(제2위의 관등) 龍樹가 內城 私臣(내성 사신)으로 임명되었다. 내성 사신이라면 왕실에 대한 제반 업무를 관장하는 궁내부 대신과 같은 지위다. 진평왕 7년(585) 이래 신라 왕실에선 大宮(대궁), 梁宮(양궁), 沙梁宮(사량궁)의 3궁에 각각 私臣 1인씩을 두었는데, 이때 龍樹는 혼자서 3궁의 업무를 총괄하는 중책을 맡았던 것이다.
龍樹라면 國人(국인=귀족)들에 의해 재위 4년 만인 579년에 「정사가 어지럽고 음란하다」(政亂荒淫)는 이유로 폐위당한 眞智王(진지왕)의 장남이다. 그런 용수가 어떤 과정을 거쳐 신라 왕실의 핵심 요직에 오를 수 있었는지, 또한 그것이 김서현-유신 부자의 향후 행로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진지왕은 진흥왕의 차남인 舍輪(사륜=金輪)이다. 그는 태자였던 銅輪(동륜)이 요절했기 때문에 왕위를 계승했다. 신라 中古期의 왕위 계승은 장자 상속 원리에 따르도록 되어 있었다. 따라서 진흥왕 이후의 왕위는 당연히 동륜의 嫡子(적자)인 白淨(백정=진평왕)에 의해 계승되어야 했다.
그런데도 왕위는 백정을 배제하고 사륜에게 넘어갔다. 그럴 수 있었던 것은 백정의 나이가 어렸던데다 당시 정계의 실력자 居柒夫(거칠부)가 사륜을 지원했기 때문이다.
진지왕 대를 전후한 시기에 신라의 귀족 사회는 대략 양대 세력으로 나눠져 대립하고 있었던 것으로 분석된다. 하나는 법흥왕(514~540) 이후의 왕권 중심 중앙집권체제를 깅화하려던 세력이었고, 다른 하나는 지증왕(500~514) 이전의 귀족 중심 연합정치체제로 복귀하려는 세력이었다.
진지왕을 즉위시킨 세력은 후자이며 그 대표적 인물이 거칠부였다. 거칠부는 진지왕을 옹립함으로써 행정권은 물론 군사권을 장악하는 등 軍國事務(군국사무)를 自任(자임)하는 上大等(상대등·귀족회의 의장)의 지위에 올랐다.
진지왕은 왕위 계승 원칙에서 벗어나 즉위했던 만큼 정통성이 취약했다. 따라서 진지왕은 왕권 강화를 위한 조치를 취하기 어려웠던데다 주색에 빠져 왕실 내부에서 신망을 잃었다.
이에 思道太后(사도태후·진지왕의 모후)는 美室(미실)과 함께 진지왕의 폐위를 모의했다.
폐위를 단행한 궁중 쿠데타의 중심 인물은 사도태후의 오빠 弩里夫(노리부)와 美室의 남편 世宗이었다. 노리부는 진평왕이 즉위하자 상대등의 지위에 올랐다. 궁중 쿠데타를 만나 실각한 거칠부는 정치권에서 추방되어 집에서 칩거하며 일생을 마쳤다. 이런 정황에서 진지왕과 그 아들들인 용수-용춘의 행로가 주목된다. 다음은 필사본 「화랑세기」의 관련 기록이다.
「진지왕은 폐위되어 幽宮(유궁)에 유폐된 지 3년 만에 죽었다. 이때 용춘은 아직 어려서 父王(부왕·진지왕)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했다. 용춘의 어머니인 知道太后(지도태후)가 太上太后(태상태후·思道)의 명령으로 다시 새 임금(眞平王)을 모시니 용춘공이 새 임금을 아버지라고 불렀다. 이 때문에 임금이 불쌍히 여겨 사랑과 대우가 특별했다」

가야 金씨, 진지왕系에 접근

「三國遺事」에는 진지왕이 폐위 후 곧 사망한 것으로 되어 있지만, 필사본 「화랑세기」는 유폐된 지 3년 만에 죽었던 것으로 명기되어 있다. 자신의 차남을 폐하고 장손을 세운 태상태후 思道가 둘째 며느리 知道태후에게 「새 임금을 모시라」고 명한 대목에서는 신라 왕실 및 귀족 사회의 性 풍습이 어떠했는지를 드러내고 있다.
「장성함에 이르러 용춘공은 文弩(문노)의 문하로 들어가 秘寶郞(비보랑)을 섬겨 형으로 삼았고, 서동생인 鼻荊郞(비형랑)과 함께 낭도들에게 희사하기를 힘쓰니, 이 때문에 대중들이 귀의하여 3파가 추대하기를 원했다. 이런 연유로 舒玄郞(서현랑)이 자리를 양보하여 풍월주가 되었다」
위의 인용문에서는 용춘이 성장한 후 부왕의 폐위 사실을 알고 크게 분발했음을 알 수 있다. 비형랑은 사량부의 미녀 과부 桃花女(도화녀)가 폐위당해 유폐중이던 진지왕과의 사통 관계로 낳은 아들이라는 사실은 拙稿(졸고) 「화랑세기의 정체」에서 이미 상세하게 설명한 바 있다.
특히 주목되는 부분은 김유신의 아버지 서현이 용춘에게 13세 풍월주의 자리를 양보했다는 대목이다. 이는 신라 귀족 사회에서 소외당했던 가야 김씨가 왕권 계승에서 배제된 진지왕 系에 접근했음을 의미한다. 서현은 이보다 앞선 시기에 이미 풍월주 경쟁에 나선 용춘을 적극 지원한 바 있었다.
9세 풍월주 비보랑이 그의 후임 풍월주로 용춘을 천거했으나, 당시 궁중의 어른이었던 만호태후(진평왕의 모후)가 적극 반대하던 무렵이었다. 이때 가야파의 대표로서 그 자신도 경쟁자들 중 한 사람이었던 서현은 『용춘은 돌아가신 대왕의 아들이니 내가 어찌 그와 대적하리오?』라며 경쟁을 포기했다. 서현과 용춘은 망국의 王孫(왕손)과 廢王(폐왕)의 아들로서 同病相憐(동병상련)의 관계였던 것 같다.
용춘은 결국 10세 풍월주에 오르지 못했지만, 이후 낭도들, 특히 가야파로부터 큰 인망을 모았다. 그리고 그는 11세 夏宗(하종)과 12세 菩里(보리)에 이어 기어이 13세 풍월주의 지위에 오르는 저력을 발휘했던 것이다.
「이에 용춘공은 낭도들의 묵은 습성을 혁파하여 한결같이 인재로서 발탁하고 골품에 구애되지 않으면서 말하기를, 『골품이라는 것은 왕위와 臣位(신위)의 구별이니 어찌 골품으로 쓰겠는가? 공적이 있는 사람에게 상을 주는 것은 떳떳한 법인데, 어찌 파벌로써 하겠는가』라고 했다. 무리들이 말하기를 『文弩(문노)의 다스림이 다시 밝아질 수 있겠다』고 했다」

진평왕의 사위가 된 廢王의 아들들

폐왕의 아들 용수-용춘 형제는 그 골품이 聖骨(성골)에서 大元神通(대원신통)으로 격하되었던 처지였다. 용수-용춘 형제의 어머니 지도태후의 골품이 원래 대원신통인데, 신라의 골품은 母系(모계)에 의해 결정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처지의 용수-용춘 형제에게 유리한 정세가 도래한다.
「그때 대왕(진평왕)이 嫡子(적자)가 없어 公(용춘)의 형 용수 殿君(전군)을 사위로 삼아 位(위)를 전하려고 하므로 전군이 公에게 물으니 公이 말하기를, 『대왕의 춘추가 바야흐로 젊으신데, 혹시 후사가 생기면 아마 불행해질 것입니다』라고 했다. 이에 殿君(전군·용수)이 사양했으나, 摩耶王后(마야왕후·진평왕비)가 들어주지 않고, 마침내 전군을 사위로 삼으니 곧 天明公主(천명공주)의 남편이다. 이후 용춘공은 풍월주의 지위를 虎林公(호림공)에게 물려 주고 조정의 요직을 맡게 되니 낭도 가운데 등용되는 사람이 많았다.」
진평왕이 폐왕 진지왕의 장남 용수를 맏사위로 맞았던 것은 진흥왕 系의 단결을 겨냥했다는 얘기다. 그것은 汎(범)내물왕계의 귀족 중심의 연합정치 체제를 피하고, 왕권 중심의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려는 포석의 일환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같은 움직임은 진평왕 代에 官制(관제) 정비를 적극 추진했던 사실로도 짐작할 수 있다. 귀족 세력의 권력을 재분산시키는 관제 정비야말로 국왕에게 충성하게 마련인 관료 집단을 키우는 지름길이었기 때문이다. 진평왕은 즉위 초부터 인사권을 관장하는 位和府(위화부)를 설치하고 국왕 경호의 강화를 위해 侍衛府(시위부)의 大監(대감) 6인을 임명하는 등의 조치로 귀족회의 의장인 상대등, 국방부 장관 격인 兵部令(병부령) 등의 권한을 계속 삭감하는 정책을 추진했다.
특히 진평왕 44년(622)에 용수를 內省(내성) 私臣(사신)으로 기용했다는 것은 진흥왕계의 家系內的(가계내적) 통합을 이룸으로써 왕실을 보호하려는 데 그 목적이 있었던 것으로 풀이되고 있다. 그러나 진평왕의 후계 구도는 다시 한번 변덕을 부린다. 다음은 필사본 「화랑세기」의 관련 기록이다.
「선덕공주가 점차 장성하매 龍鳳(용봉)같은 자질과 天日之表(천일지표·제왕의 相)가 가히 왕위를 이을 만하여 대왕이 뜻을 두었고, 천명공주도 효성과 순종으로 사양하니 대왕이 용춘공에게 명하여 선덕공주를 모시게 하였다. 公이 굳이 사양하였으나 어쩔 수 없어 선덕공주를 받들었다. 그러나 後嗣(후사)가 없어 물러나기를 청하니 대왕이 이내 용수 전군에게 명하여 선덕공주를 받들게 하였지만 역시 後嗣가 없었다」

金春秋-文姬의 정략 결혼

이런 정황 속에서 김유신은 그의 누이동생 文姬(문희)를 용수의 아들인 김춘추와 결혼시키기 위해 실로 치밀한 계획을 추진한다. 다음은 「삼국사기」 김유신 傳에 기록된 이 정략 결혼의 진행 상황을 요약한 것이다.
「김유신이 김춘추와 더불어 자기 집 앞에서 축구를 하다 일부러 김춘추의 옷자락을 밟아 찢어 놓은 뒤 이를 꿰매어 준다는 구실로 자기 집으로 끌어들인 뒤에 문희와 은밀히 만나도록 했다. 그로 인해 문희가 임신을 하자, 김유신은 문희를 불태워 죽이겠다고 자기 집 마당에 장작을 쌓아 놓고 불을 지르고, 이것이 남산에 놀러간 선덕여왕의 눈에 뜨이도록 하여 왕명으로 김춘추와 문희가 결혼을 하게 했다」
위의 기사에 따르면 정략 결혼을 추진했던 시기가 선덕여왕(632~647) 때인 것으로 표현되어 있는데, 둘 사이의 첫 소생인 金法敏(김법민·후일의 문무왕)의 출생 연도가 626년(진평왕 48)이어서 상호 모순적이다. 그런데 필사본 「화랑세기」에선 그 시점의 善德의 지위는 여왕에 오르기 전의 공주였음이 명기되어 있다. 그러니까 둘의 결혼 시기는 김춘추가 24세였던 626년(진평왕 48)으로 추산된다.
김유신이 이런 연극을 벌이면서까지 정략 결혼을 추진했던 이유는 망국의 후예인 가야 김씨의 신분 상승을 겨냥한 것이었다. 김유신은 이미 15세 풍월주 당시부터 8세 연하의 김춘추가 대성할 인물로 내다보고 풍월주의 지위를 물려주려고 기도했다. 그러나 당시엔 寶宗(보종·16세 풍월주)과 廉長(염장·17세 풍월주)이 건재했고, 김춘추 역시 12세 연상의 선배이며 美室의 아들인 보종을 따돌리는 일을 꺼려 스스로 사양한 적이 있다.
이런 사실들에서 알 수 있듯 김유신은 처음부터 김춘추와의 동맹에 적극적이었다. 그런데도 김춘추는 선덕공주의 명을 받은 후에야 문희를 아내로 맞아들였으니까 결혼에 상당히 소극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필사본 「화랑세기」에 기록된 그 까닭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김춘추가 문희와 1년 남짓 사통 관계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결혼을 머뭇거린 것은 그에게 寶羅(보라) 宮主(궁주)라는 정식 부인이 있었기 때문이다. 보라 궁주는 16세 풍월주 보종의 딸로 미색이었다. 김춘추는 보라를 너무나 총애한 나머지 감히 문희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그 사실마저 숨기고 말았다. 춘추와 보라 궁주 사이에는 이미 古陀炤(고타소)라는 이름의 딸까지 있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고타소는 642년 대야성이 백제 장군 允忠(윤충)에게 함락당할 때 성주인 그녀의 남편 품석과 함께 참살되었다. 필사본 「화랑세기」가 발견되기 전까지는 고타소의 존재가 아리송했다. 그녀의 生母가 문희이기에는 연령상으로 거의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러면 필사본 「화랑세기」의 관련 기록을 통해 김춘추와 문희의 결합 과정을 좀 더 살펴볼 필요가 있다.
「좌우 신하들에게 까닭을 알게 된 선덕공주는 춘추를 나무란다.
『당신이 상관된 일인데, 왜 가서 구하지 않소?』
춘추공은 곧장 南山에서 내려와 문희를 구해 주고 사당에 고했다. 얼마 뒤 보라 궁주가 해산하다 죽고, 문희가 뒤를 이어 정실 부인이 되었다. 곧 김춘추가 풍월주에 오르자, 문희는 花君(화군=花主·풍월주의 아내)이 되었으며 곧 첫아들(法敏·후일의 문무왕)을 낳았다」

신라 왕가의 풍습 兄死娶嫂

김춘추가 18세 풍월주의 지위에 오른 것은 그의 나이 24세 때인 626년의 일이다. 이렇게 김서현과 김용춘, 그리고 김유신과 김춘추가 대를 이어 동맹 관계를 굳혀가자, 舊귀족세력의 견제 대상이 되고 만다.
특히 僧滿王后(승만왕후·진평왕의 後妃인 듯함)가 용수-용춘 형제를 시기했다. 필사본 「화랑세기」에 따르면 이때 승만왕후는 아들을 낳아 선덕공주의 지위를 대신하려고 했으나, 그 소생이 일찍 죽어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런 복잡한 왕실 내부의 권력 다툼에서 신명을 보전하기 위해 용춘은 출전을 자원했다.
「용춘공은 고구려에 출정하여 큰 공을 세워 각간으로 승진하였으며, 용수 전군이 임종 때 그 부인 및 아들, 곧 우리의 태종대왕을 부탁했다」
파진찬(제4위의 관등) 용춘과 소판(제3위의 관등) 서현이 대장군으로 출전했던 이때의 전투가 바로 629년(진평왕 51)의 娘臂城(낭비성) 공격전이다. 낭비성 전투는 이 연재 1회분의 앞머리에서 이미 자세하게 쓴 것처럼 副將軍(부장군)으로 출전한 김유신의 뛰어난 무공으로 신라군이 고구려군에 대승을 거두었다. 이것이야말로 眞智王系와 가야계의 결합에 의한 신흥 귀족세력이 舊귀족세력의 기득권에 대항할 수 있는 轉機(전기)가 되었다.
이같은 신흥 귀족세력의 대두에 대한 일부 舊귀족세력의 반발이 진평왕 53년(631) 5월에 이찬(제2위의 관등) 柒宿(칠숙)과 아찬(제6위의 관등) 石品(석품)의 모반 사건으로 나타났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진평왕은 칠숙과 그의 9족을 붙잡아 東市(동시)에서 참수했으며, 일단 달아났다가 자기 집으로 잠입한 석품도 체포하여 처형했다.
진평왕은 재위 54년 만인 632년에 죽었다. 드디어 선덕공주가 우리 민족사 최초의 여왕으로 등극했다. 다음은 선덕여왕 즉위 초에 관한 필사본 「화랑세기」의 기록이다.
「선덕공주가 왕위에 올라 용춘공을 남편으로 삼았으나, 公은 후사가 없다는 이유로 자퇴하니 여러 신하들이 세 번 남편을 맞는 제도를 논의했다. 용춘공은 이에 천명공주를 아내로 맞고, 太宗(김춘추)으로 아들을 삼았다. 이보다 앞서 公은 왕명으로 昊明宮(호명궁)에 거처하면서 다섯 딸만 낳고 적자가 없었으므로 太宗을 아들로 삼았던 것이다」
선덕여왕의 품성에 대해서는 「총명하고 지혜가 있었으나 색정을 좋아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지금도 경주 狼山(낭산)에 있는 선덕여왕의 능에 가 보면 새끼 무덤 하나가 곁에 붙어 있는데, 이를 선덕여왕이 생전에 총애하던 신하의 무덤일 것이라고 추측하는 연구자들이 적지 않다.
위의 인용문에서 주목되는 것은 용춘이 형 용수의 유언에 따라 형수 천명공주를 아내로 맞이하고, 조카 김춘추를 아들로 삼았다는 대목이다. 이것은 전형적인 북방 유목민족의 풍습이었던 兄死娶嫂(형사취수·형이 죽으면 형수를 아내로 취함)의 형태다.
신라의 김씨 왕가에는 흉노 왕자 金日 (김일제)의 피가 흐르고 있음은 拙稿 「화랑세기의 정체」에서 文武王陵(문무왕릉)의 碑文(비문) 내용을 들어 이미 거론한 바 있으므로 여기서는 재론을 생략한다. 다만 「삼국사기」에서 용수와 용춘을 동일 인물로 기록한 것(龍樹 一云 龍春)은 저자 김부식의 착각이라기보다는 유교적 관점에 의한 고의적인 왜곡으로 짐작된다. 그러니까 김춘추에게 용수는 生父이고 용춘은 義父인 것이다.
문화인류학적으로 남녀 관계는 정형이 없으며 사회경제적 조건에 따르는 경우가 허다하다. 예컨대 티베트에서는 지금도 여러 형제가 한 사람의 아내를 공유하는 풍속이 남아 있다. 티베트라면 중국인들이 말하는 西戎(서융), 즉 서쪽 오랑캐다.
<13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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