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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庾信과 그의 시대(14)

글 정순태 기자  2005-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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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庾信과 그의 시대(14)

정순태


金庾信의 결사대 3천

선도해는 별관에 억류중이던 김춘추를 찾아가 오늘날엔 중등학교 국어 교과서에도 나올 만큼 유명해진 「토끼와 거북」의 얘기를 함으로써 김춘추의 活路(활로)를 귀띔해 주었던 것이다. 이에 김춘추는 곧 보장왕에게 다음 내용의 글을 보낸다.
「마목령과 죽령은 본래 大國의 땅입니다. 신이 귀국하여 우리 왕에게 이를 돌려 보내도록 말씀드리겠습니다」
육지로 도로 데려다 주기만 하면 용왕의 병을 낫게 하는 토끼의 肝(간)을 내놓겠다는 얘기와 다름 아니다. 한편 미리 약정된 60일이 지나도록 김춘추가 귀국하지 않자, 김유신은 신라의 용사 3천명을 모아 놓고 말한다.
『위기를 당하면 목숨을 내놓고, 어려움을 당하면 한 몸을 돌보지 않는 것이 열사의 뜻이라고 들었다. 한 명이 목숨을 바쳐서 백 명을 대적하고, 백 명이 목숨을 바쳐서 천 명을 대적하고, 천 명이 목숨을 바쳐서 만 명을 대적한다면 천하를 마음대로 할 수 있다. 지금 이 나라의 어진 재상이 타국에 구금되어 있는데, 어찌 두렵다 하여 일을 도모하지 않겠는가?』
김유신이 김춘추 구출을 위해 동원한 부대의 병력수는 「삼국사기」 김유신 傳에선 「3천명」으로, 「삼국사기」 선덕여왕 11년 條에는 「1만명」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상호 모순되는 기록이 아니라 列傳(열전)에선 선발 특공대의 병력수를 말하는 것이고, 本紀(본기)에선 후속부대의 병력수를 합친 것으로 짐작된다. 후속 부대가 없는 日帝 가미가제(神風)류의 특공대 투입은 兵法(병법)의 일반 원칙에 부합되지 않기 때문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명장의 연설은 용사들의 피를 끓게 만든다. 출정 직전 김유신의 연설도 그러했다. 이에 부하 장병들은 일제히 소리쳐서 답한다.
『비록 만 번 죽고 한 번 사는 일에 나아갈지라도, 어찌 감히 장군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겠습니까?』
김유신은 여왕에게 출정 날짜를 정해 주기를 청했다. 역사의 행간을 읽으면 군사 기밀인 김유신의 출정 사실이 고구려 쪽에 전해질 수 있도록 신라 쪽에서 은근히 흘린 느낌도 든다. 병력 3천이나 1만쯤으로 평양까지 진격해서 김춘추를 구출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이때 고구려의 첩자인 승려 德昌(덕창)이 고구려에 從者(종자)를 급파하여 신라의 동향을 보장왕에게 알렸다.
마침내 김유신은 특공대를 이끌고 한강을 건너 고구려 남쪽 변경으로 진출했다. 보장왕은 전날에 이미 김춘추의 맹세를 들었던데다가 사신을 인질로 붙잡는 행위로 전단이 열리면 명분상으로도 이롭지 못하다고 판단했던 듯 김춘추를 석방하고 다시 두터운 예로 대우한 뒤 귀국케 했다. 고구려 국경을 벗어나자, 김춘추는 전송하러 나온 고구려 관리에게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내가 백제에 원수를 갚기 위해 고구려에 가서 군사를 요청했으나, 대왕은 이를 허락하지 않고, 도리어 땅을 요구했소. 그러나 이것은 신하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오. 이전에 대왕에게 보낸 글은 죽음을 모면하려는 것이었을 뿐이오』
아무튼 642년의 김춘추-연개소문의 협상은 연개소문의 강경 방침으로 결렬되었다. 물론 절충의 전망이나 전제조건이 성숙되지 않은 상황에서 고구려行을 감행한 김춘추의 나이브함도 외교관으로서 높은 평점을 받긴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약 그때 연개소문이 김춘추의 제의를 수락했다면, 그후 우리 민족사가 전혀 다른 방향으로 진전되었을지 모른다. 그야 어떻든 결과론적으로 고구려로선 치명적인 실책이 되고 만 연개소문의 판단 배경은 무엇일까? 우선 그의 출신 배경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다.
중국 洛陽(낙양) 교외 北邙山(북망산)에서 발견된 男生(남생·연개소문의 장남) 묘지명에 따르면 연개소문의 집안은 고구려 말기 누대에 걸쳐 유력한 지위를 누린 귀족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증조부인 子遊(자유)와 조부 太祚(태조)는 모두 막리지를 역임했고, 아버지 盖金(개금=연개소문)은 태대대로였다.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쇠를 잘 다루고 활을 잘 만들어(良冶良弓), 모두 병권을 잡고, 國權(국권)을 오로지했다」

王을 죽여 시신을 토막내 개천에 버리다

위의 묘지명에서 「良冶良弓」(양야양궁)했다는 표현은 私兵(사병)을 잘 길렀다는 뜻이다. 6세기 후반 이후 고구려에서는 각기 私兵을 거느린 귀족들이 모여 최고 실력자의 직책인 大對盧(대대로·수상)를 선임했다.
「대대로의 임기는 3년으로 하되, 직무를 잘 수행하면 연한에 구애되지 않았다. 교체하는 날에 혹 서로 승복하지 않으면, 귀족들간에 휘하의 私兵을 동원한 무력 대결이 벌어져 승자가 대대로의 자리를 차지했다. 이때 국왕은 다만 궁문을 닫아 걸고 스스로 지킬 뿐 제어하지 못했다」
「舊唐書」(구당서) 東夷傳(동이전) 고구려 條의 기록이다. 이런 판이니까 귀족들은 평시에도 私兵 양성에 적극적이었다.
「삼국사기」 열전에 따르면 연개소문은 스스로 자신이 「물 속에서 났다」고 신비화함으로써 다른 사람들로부터 관심과 존경을 받으려고 했다. 소싯적부터 그의 야망이 남달랐다는 얘기다. 그는 그의 아버지가 죽은 후 그 직을 승계하려 했지만, 다른 귀족들로부터 심한 견제를 받았다.
귀족들이 『연개소문의 성격이 잔인하고 포악하다』하여 그의 莫離支(막리지=대대로) 계승을 허락하지 않았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실은 강력한 그의 집안 세력을 삭감하려고 그랬는지 모른다. 이에 연개소문은 일단 머리를 조아리며 사죄하고 그 직위를 攝職(섭직=서리)할 것을 간청하면서, 『만약 옳지 않은 행위를 하면 폐하여도 후회하지 않겠다』고 했다. 여러 사람들이 그럴 듯하게 여겨 막리지의 승계를 허락했다.
연개소문이 막리지의 지위에 오른 뒤 더욱 독재체제를 강화하자, 국내성파를 중심으로 한 온건파는 영류왕과 짜고 그를 제거하려 했다. 이에 연개소문은 선수를 썼다.
영류왕 25년(642) 10월에 그는 部兵(부병)을 소집하여 열병을 하면서 대신들을 초대하여 주연을 베풀었다. 연회 도중 대신들을 모조리 죽였는데, 사망자가 무려 1백명에 이르렀다. 고구려를 이끌던 정책입안자나 良將(양장)들이 한꺼번에 도륙을 당했던 셈이다.
내친 김에 그는 궁중으로 달려가 榮留王(영류왕)을 시해하고 그 시신을 토막으로 잘라 개천에 내버렸다. 영류왕(618~642)이라면 영양왕 23년(612) 대동강 하구에 침입한 隋의 水軍 4만을 평양 外城으로 유인하여 끌어들인 뒤 복병으로 대승을 거두었던 영양왕의 이복 동생이며 수도방위사령관이었던 建武(건무)다. 유혈 쿠데타에 성공한 연개소문은 영류왕의 조카를 세웠으니, 이가 곧 보장왕이다.
북한에서 발간된 「조선통사」는 연개소문이라는 이름 앞에 반드시 「애국 명장」이라는 수식어구를 붙이고 있다. 丹齋(단재) 申采浩(신채호)는 연개소문의 쿠데타를 「혁명」이라고 보고, 연개소문을 「千古英傑」(천고영걸)이라고 찬양했다. 과연 그러할까?
연개소문은 일찍이 630년 무렵, 북으로는 부여성에서 남으로는 발해만에 이르는 국경선에 천리장성을 축조하는 책임을 맡은 바 있다. 천리장성의 축조는 중원의 통일 제국 唐의 팽창 압력을 저지하려는 고구려의 국가적 대사업이었다. 당시 隋의 천하를 대신한 唐은 몽골 지역의 돌궐을 복속시킨 다음, 지금의 투르판 분지 일대에서 웅거하던 高昌國(고창국) 정벌에 주력하고 있었던 만큼 천리장성 축조에 직접적인 시비를 걸지는 않았다.
그러나 연개소문의 집안은 평양 천도 이후 중앙정계에 두각을 나타낸 신흥 귀족 가문으로서 對唐 강경파였다. 특히 그의 아버지 太祚는 영류왕 14년 당의 요청에 따라 隋軍의 전사자를 한 곳에 묻어 쌓은 고구려의 전승 기념물 京觀(경관)을 헐어버리는 데 분개하여 천리장성의 축성을 주도적으로 추진했던 인물이다.
여기서 중원의 패권을 겨루던 군웅들 가운데 당의 李淵(이연)이 최종 승자가 되는 과정, 그리고 당과 동방 3국 간의 관계를 짚어둘 필요가 있다.

李淵의 唐 창업

隋 왕조의 말기적 내란이 한창이던 617년, 太原(태원·지금의 晉陽)에서 돌궐을 막고 있던 李淵이 그의 둘째 아들 世民(세민) 등과 더불어 거병하여 長安을 점령하고, 618년 江都(강도)에서 수 양제가 경호부대의 반란으로 시해당하자, 당 제국의 창업을 선언하고 스스로 天子(천자)가 되었음은 앞에서 쓴 바 있다. 당은 건국 초 각지에 할거한 군웅들을 차례로 평정하고 중원 통일을 이룩했다. 여기에 이르기까지 최대의 공로자는 李世民이었다.
이세민은 일찍이 태원에서 돌궐과 대치하면서 북방 유목민족의 기마전술의 묘리를 습득했는데, 이것이 군웅 쟁패전에서 대단한 위력을 발휘했다. 李淵이 太原에서 기병하여 악전고투를 거듭하면서도 곧장 수도 장안을 진군했던 전략의 발안자도 이세민이었다. 長安의 점령은 중국 남북조 시대 말기 이후 최고 명문의 武家(무가) 집단으로 떠오른 武川鎭(무천진) 군벌 가문들의 지원을 확보하는 지름길이 되기도 했다. 수와 당의 황실 모두가 그 뿌리는 원래 武川鎭 군벌이었다.
고구려는 영류왕 2년(619) 2월, 당 고조 李淵에게 처음으로 사신을 보내 조공했다. 백제와 신라가 당에 조공했던 621년보다 2년 앞선 시점이었다. 고구려는 영류왕 4년 이후 매년 당에 조공사를 파견했다. 집권자로서 영류왕은 對唐 온건론을 주장하던 國內城派(국내성파)를 지지했다.
唐 高祖도 영류왕 5년(622)에 화해의 국서를 보냈다.
「(전략) 지금은 바야흐로 천지사방이 편안하며 사해가 무사하니, 예물이 내왕하되 길에 막힘이 없으며, 서로 화목하고 우호의 정이 굳건히 하면서 각각 자기의 영역을 보호하고 있으니, 어찌 성대하고 아름다운 일이 아니겠소?」
비록 외교적 언사이긴 하지만, 역대 중국 통일 왕조의 군주로서는 매우 이례적으로 정중한 자세였다. 아직 당으로선 해결해야 할 국내외 문제가 산적했던 시기였던 만큼 동북아의 전통적 강자 고구려에게 위세를 뽐낼 형편은 아니었다. 더구나 당 고조로서는 창업 군주로서 국내의 안정을 위해 對隋戰(대수전)의 영웅 영류왕에게 간곡한 청탁을 해야 할 입장이었다.
「다만 隋 말년에 연이어 전쟁을 하였으니, 전쟁의 땅에는 어디에나 유랑민이 있을 것이오. 이리하여 마침내 골육이 헤어지고 남편과 아내가 서로 갈라져 긴 세월이 지나도록 짝 잃은 원한을 풀지 못하고 있는 바이오. 이제 우리 두 나라가 화친을 맺으니 우리의 情義(정의)는 다를 바 없소. 이곳에 있는 고구려인을 이미 전부 조사하여 즉시 돌려 보내기로 하였으니, 그곳에 있는 우리 나라 사람도 돌려 보내어, 백성들을 편하게 하는 정책에 힘을 다하여, 인자하고 너그러운 도리를 서로 넓혀 나가기로 합시다」
정상적인 외교에는 일방적인 시혜는 없다. 영류왕도 중국인 포로 1만여명을 돌려 보냈다. 이후 麗-唐의 밀월 시대가 잠시 전개된다. 영양왕은 재위 7년(624)엔 당에 사신을 보내 冊曆(책력)을 반포하여 줄 것을 요청했다. 唐의 책력을 구한다는 것은 당의 朝貢冊封(조공책봉) 체제에 들어가겠다는 의사 표시다.
唐은 형부상서(법무장관) 沈叔安(심숙안)을 파견하여 영류왕을 上柱國遼東郡公高句麗王(상주국요동군공고구려왕)으로 책봉하고, 道士에 명하여 天尊(천존=옥황상제)의 화상과 道敎(도교) 경전을 갖고 고구려에 가서 老子(노자·道德經)를 강의하게 했다. 영류왕과 백성들이 도교 강의를 들었다.
당 고조 李淵은 도교에서 교조로 받드는 李耳(이이·老子)가 同姓(동성)의 성인이라 하여 도교를 크게 우대했다. 그러니까 영류왕은 당 고조의 비위를 맞춰 준 셈이다. 이런 판에 신라와 백제가 끼어들어 고구려를 견제한다.
626년 신라와 백제는 당에 사신을 보내 『고구려가 길을 막고 예방하지 못하게 하며, 또한 자주 침략한다』고 호소했다. 당시 고구려가 한반도와 중국을 잇는 전통적 연안 항로인 老鐵山水路(노철산수로)의 장악은 물론 3국 모두가 이용했던 황해 횡단 직선항로(백령도-산동반도)에서까지 고구려의 우위가 확립되어 있었다는 얘기다.
드디어 당 고조는 동방 3국의 분쟁 조정자를 자임한다. 그는 散騎侍郞(산기시랑·문하성의 정4품) 朱子奢(주자사)에게 황제의 신임표를 지참시켜 영류왕에게 파견하여 세 나라가 화친하기를 권했다. 이에 영류왕은 당 고조에게 표문을 올려 사죄하고 신라, 백제와 화친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李世民의 쿠데타

이럴 무렵인 고조 9년(626) 6월4일, 唐에서는 제2 황자 李世民이 황태자 建成(건성)과 제3 황자 元吉(원길)을 죽이고, 두 형제의 아들 10명까지 도륙해버리는 쿠데타가 일어났다. 역사에서는 건성과 원길의 피습 장소인 長安城 북문의 이름을 따 玄武門(현무문)의 變(변)이라고 부른다. 이 쿠데타가 일어나자, 당 고조는 신변의 불안을 느끼고 차남 世民에게 황제의 위를 넘겨 주고 장안 교외에 있는 泰安宮(태안궁)으로 은거해버렸다.
이세민이 이해 가을 8월8일에 즉위하니, 그가 바로 唐 太宗(태종)이다. 태종은 唐 창업을 주도했을 만큼 결단력과 야심을 겸비한데다 대단한 음모가인 동시에 전략적 사고를 지닌 인물이었다. 중국에선 「貞觀(정관)의 治(치)」를 이룩한 최고의 명군으로 꼽고 있지만, 지금 북한의 역사책에서는 그를 반드시 「당 태종 놈」이라고 호칭하고 있다.
이세민은 처음 반란군을 일으켜 장안을 공략할 때, 돌궐에 臣稱(신칭)하고 可汗(가한)으로부터 원병으로 기병 3천기를 얻었다. 당 고조는 長安을 차지하자, 돌궐에 다량의 보물로 조공했다. 돌궐은 이같이 실리를 챙기면서 북방으로 판도를 넓혀 그 세력이 당을 웃돌고 있었다.
唐軍은 돌궐군과 625년 山西省(산서성) 大谷(대곡)에서 싸우다 대패하여 中書令(중서령) 溫彦博(온언박)이 전사했다. 이때 당 고조는 國都를 江南으로 옮기려고 했으나, 차남 世敏(세민·후의 태종)의 강경한 반대로 결심을 번복한 일까지 있을 정도였다.
태종은 이런 돌궐을 잔뜩 노리고 대비하고 있다가 조공품의 증액 교섭을 유리하게 진행시키기 위해 북방을 다시 침략한 돌궐을 대파하고 추격전을 전개하여, 그 군주 利可汗(힐리가한)과 돌궐병 5만을 사로잡았다. 이로써 당과 돌궐의 위상이 일거에 역전되었다.
영류왕은 재위 11년(628) 9월에 사신을 보내 힐리가한의 포획을 축하하고, 고구려의 封域圖(봉역도)를 바쳤다. 이것은 고구려가 더 이상 국토를 확장할 의도가 없고 평화 지향적이라는 사실을 당에 알리려는 의도였겠지만, 국가의 1급 비밀을 스스로 공개한 이적행위임엔 틀림없다.
당 태종은 다시 서역으로 눈을 돌렸다. 그는 漢 武帝(한 무제) 때 개척된 서방을 향한 무역로인 실크 로드(Silk Road)의 舊路(구로)를 다시 개통시키려고 했다. 당시 新路(신로)는 서역의 강자 高昌國(고창국)이 장악하고 있었는데, 舊路를 다시 트면 자국의 영역을 비켜가는 만큼 당연히 舊路 재개통을 방해했다. 당 태종은 639년 원정군을 파견하여 高昌國을 멸망시키고 식민지로 만들었다. 남쪽의 閔(민·지금의 복건성 일대) 지역도 일찌감치 복속했다.
당의 위세가 갈수록 높아가자, 영류왕으로서는 당과의 친선 관계를 더욱 서두를 필요가 있었다. 영류왕 23년(640) 2월에 태자 桓權(환권)이 入唐하여 조공했다. 환권을 통해 영류왕은 당에 자제들을 보낼 터이니 國學(국학)에 입학시켜 줄 것을 요청했다.
자제들을 당의 국학에 입학시켜 달라고 했던 것은 고구려뿐만 아니라 신라, 백제, 돌궐, 고창국, 왜국 등 주변국 모두의 요망 사항이었다. 그 결과, 세계 제2차 대전 후의 팍스 아메리카나 체제 하에서 미국이 각종 장학제도로 세계의 유학생들을 운집시켰던 사례와 같이 唐 제국도 國學을 운영했다.
<15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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