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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庾信과 그의 시대(1)

글 정순태 기자  2005-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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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庾信과 그의 시대(1)

정순태

옷깃과 벼리가 되겠다

신라 진평왕 51년(서기 629) 가을 8월. 이찬(신라 17관등 중 제2위) 任永里(임영리), 소판(제3위의 관등) 舒玄(서현), 파진찬(제4위의 관등) 龍春(용춘) 등은 왕명을 받고 고구려의 娘臂城(낭비성:지금의 충북 청주)을 공략한다. 그러나 고구려는 전통의 군사강국. 신라군은 오히려 역공을 받고 全軍(전군) 궤멸의 위기에 몰린다. 전사자가 속출하자 신라군은 戰意(전의)마저 잃고 만다.
이때 金庾信(김유신)은 中幢(중당)의 幢主(당주:지휘관)로 출전하고 있다. 중당은 三國史記 職官志(삼국사기 직관지)에는 나오지 않는 부대명으로 그 편제나 기능은 알 수 없지만, 관련 記事(기사)의 전후 문맥으로 미루어 별동 기동부대로 보인다. 당시 그의 계급은 副將軍(부장군). 그러니까 오늘날의 연대급 부대의 지휘관인 것 같다. 김유신은 그의 부친 서현 장군에게 나아가 말한다.
『옷깃(領)을 들어야 갖옷()이 바르게 되고, 벼리(鋼)를 당겨야 그물(網)이 펴진다고 합니다. 제가 옷깃과 벼리가 되겠습니다』
金庾信은 분연히 말에 올라 장검을 뽑아 든다. 그리고는 單騎(단기)로 참호를 뛰어넘어 적진 돌격을 감행한다. 軍心(군심)에 영향을 주는 勇士(용사)의 좌충우돌은 그가 누구든 절대로 그냥 놔둘 수 없다. 그것이 바로 戰場(전장)의 생리다. 賊將(적장)도 말을 달려 김유신의 앞을 가로막는다. 그러나 적장은 김유신의 交鋒(교봉) 상대가 되지 못한다.
적장의 목을 치고 軍旗(군기)를 탈취한 김유신의 분전. 바로 이 순간 신라군의 士氣(사기)가 하늘을 찌른다. 승세를 탄 신라군은 돌격을 감행한다. 이 돌격전에서 신라군은 고구려군 5천여명의 목을 베고 1천명을 사로잡는다. 성 안의 고구려 軍民(군민)들은 엄청난 逆戰(역전)의 사태에 모두 전율한다. 그래서 다투어 성문을 열고 나와 김유신의 말 앞에 무릎을 꿇고 만다.
이것은 三國史記 卷(권) 41 김유신 傳(전)에 기록되어 있는 낭비성 싸움의 전투상보(戰鬪詳報)다. 김유신은 戰場의 심리, 그리고 승패의 갈림길인 戰機(전기)를 꿰뚫어 보는 승부사였다. 스포츠에 비교한다면 전투는 일진일퇴를 거듭하며 한 점씩 득점하다가 시합 종료 호루라기 소리와 함께 승부가 결정되는 축구가 아니라 한순간에 일발 대역전을 연출하는 야구 경기다.
야구는 0대 3으로 뒤지고 있다가도 9회 말 공격에서 만루 홈런 한 방으로 대세를 뒤집는다. 야구 경기로 치자면 김유신은 9회 말에 역전 그랜드 슬럼을 기록한 셈이다.
삼국사기 등 史書(사서)에서 낭비성 전투 이전에 김유신이 전장에 출전했던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낭비성 전투 당시에 그의 나이 35세. 名將(명장)의 데뷔戰으로는 상당히 늦은 편이다.
그렇다고 15세에 이미 花郞(화랑)의 반열에 올랐던 김유신이 그후 20년간이나 한번도 전장에 출전하지 않다가 어느 날 갑자기 연대장급 고급 장교가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동안 그는 하급, 중급 지휘관으로 복무하면서 산전수전을 다 겪어왔던 것으로 인정된다.
『옷깃과 벼리가 되겠다』는 김유신의 말은 1898년 이집트 원정의 최대 고비였던 피라미드 전투에서 병사들을 격동시킨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名言(명언)과 좋은 대비가 된다.
나폴레옹은 저 멀리 보이는 기제의 피라미드를 가리키며 『4천년의 역사가 諸君(제군)들을 굽어보고 있다』고 외쳤다. 나폴레옹은 병사들의 명예심을 자극하는 선동 구호 한 마디로 이집트의 6만 대군을 격파했고, 김유신은 자기 한 몸을 死地(사지)로 던지는 언행일치로 절대절명의 敗勢(패세)를 勝勢(승세)로 뒤집어 놓았다.
나폴레옹의 레토릭은 그의 문학적 천재성을 과시라도 하려는 듯 화려하고, 김유신의 그것에는 인간적 고뇌와 성실성이 배어 있다. 나폴레옹이 「프랑스의 영광」 바로 그것이라면 김유신은 우리 역사에서 찾을 수 있는 한국적 자존심의 상징이다.
1796년 이탈리아 원정중의 아르콜레 會戰(회전)에서 나폴레옹은 奇策(기책)으로 전장의 교착 상태를 일거에 깨뜨려 버린다. 그는 해질 무렵, 오스트리아 軍 후방에 騎兵(기병) 50기(一說은 25기)를 가만히 우회시킨다. 그리고는 적 배후에서 돌격 나팔을 불도록 한다. 뜻밖의 나팔 소리에 오스트리아 軍 장병들은 일대 혼란에 빠져버린다.
그 순간 나폴레옹은 선두에서 말을 달려 정면 돌격을 감행했다. 아르콜레의 船橋(선교)가 오스트리아 軍의 포격에 명중되는 바람에 그는 추락하여 늪 속에 빠지면서 기절을 해버렸다.
그러나 사흘 동안 완강하게 버티던 오스트리아 軍 진지가 騎兵 50기의 배후 출현과 나폴레옹의 선두 돌격에 의한 프랑스 軍의 분발로 맥도 추지 못하고 붕괴했다. 이처럼 전장에서는 이론상 설명되기 어려운 상황이 전개된다. 김유신의 單騎(단기) 돌진도 바로 兵法(병법)에서 말하는 奇兵(기병)에 의한 戰場心理(전장심리)의 장악이었다.

金庾信 등장 직전의 삼국 쟁패전

낭비성 전투는 한반도의 중심부인 한강 유역의 헤게모니를 둘러싸고 격돌한 南進(남진) 세력과 北進 세력의 결전이었다. 또한 그 결과는 고구려군에 대한 신라군의 해묵은 열등감을 일거에 해소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김유신은 역사의 前面(전면)에 부상하게 되지만, 여기서 우리 역사상 최대의 전국시대로 돌입하는 과정을 잠시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4세기 말부터 6세기 초반에 이르기까지의 東아시아 세계에서 고구려가 군사 1류국이라면 신라는 3류국에 불과했다. 고구려는 심지어 신라의 왕위 계승 문제에 결정적 영향력을 행사할 만큼 정치적, 군사적 우위에 있었다. 예컨대 신라 21대 訥祗王(눌지왕:417~458)은 實聖王(실성왕)을 제거하고 왕위에 올랐는데, 그것은 고구려의 지원 때문이었다.
그러나 눌지왕 17년(433)에 이르면 신라는 백제와 우호 관계를 맺고, 차츰 고구려의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나기 시작한다. 475년 고구려 長壽王(장수왕)이 3만 병력을 투입하여 백제의 왕도 漢城(한성:서울 송파구 夢村土城 일대)을 포위했을 때 신라 慈悲王(자비왕)은 백제를 구원하기 위해 군사 1만을 급파했다. 신라의 구원군이 당도하기도 전에 한성이 함락되고 개로왕이 전사하기는 했지만, 이후 羅濟 군사동맹은 고구려의 남진을 저지하는 기본 틀이 되었다.
麗-濟 양국에 억눌려 오기만 했던 신라가 처음으로 攻勢(공세)로 전환했던 것은 진흥왕(540~576) 때였다. 진흥왕 11년(550)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가 일진일퇴의 전투를 벌이던 와중에 고구려의 金峴城(금현성:지금의 충북 진천)과 백제의 道薩城(도살성:지금의 충북 청주)을 탈취했다. 다음은 삼국사기 관련 기록의 요약.
「550년 봄 1월, 백제 聖王(성왕)이 장군 達己(달기)에게 兵 1만을 주어 고구려의 도살성을 공취했다. 그러자 고구려는 3월에 백제의 금현성을 攻陷(공함)했다. 제-려 양국 병이 사력을 다해 싸우매, 양편이 심히 피로해 있었다. 이를 틈탄 신라의 진흥왕이 장군 異斯夫(이사부)를 보내 도살, 금현 두 성내의 제-려 양군을 다 쫓아내고 성을 증축하여 甲士(갑사) 1천명씩을 배치하여 지키라 했다」
이같은 신라의 책략은 孫子兵法(손자병법)에서 말하는 以逸待勞(이일대로:충분한 휴식을 취한 병력으로써 피로한 적을 침), 바로 그것이다. 서기 208년 赤壁大戰(적벽대전)에서 孫權(손권) 軍이 사력을 다해 曹操(조조) 軍을 패퇴시키는 와중에서 쟁탈의 요충인 荊州(형주)를 劉備(유비) 軍의 모사 諸葛亮(제갈량)이 가로챈 것과 유사한 상황이다. 이후 魏(위), 蜀(촉), 吳(오)의 鼎立(정립)이라는 중국 역사상의 삼국시대가 전개되는 것이다.
신라의 경우 적국 고구려뿐만 아니라 동맹국 백제의 땅까지 횡탈했다. 그런데도 나-제 동맹 관계가 깨지지 않았던 것을 보면 신라의 외교적 승리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바로 다음해인 진흥왕 12년(551)에 신라는 백제와 연합하여 고구려의 10개 郡을 탈취했다. 백제의 聖王도 이때 왕조 발상지인 한강 하류 6개 郡을 탈환하여 蓋鹵王(개로왕)의 敗死(패사, 475년) 이래 처음으로 고구려에 설욕했다.
나-제 양군의 승리는 고구려의 내우외환을 효과적으로 이용한 결과였다. 551년 가을 7월 고구려는 新城(신성:오늘의 遼寧城 撫順) 쪽으로 침입해온 突厥(돌궐)을 방어하기 위해 한강 이남의 주력군을 남만주 지역으로 빼돌려놓은 상황이었다. 뿐만 아니라 陽原王(545~559) 代의 고구려는 왕위 계승 문제 등과 관련, 지배층 내부에 심각한 내분까지 빚어지고 있었다.
어떠한 군사 강국도 국내 정정이 불안한 가운데 二正面(2정면), 혹은 三正面 작전은 무리다. 이때의 고구려도 돌궐의 남침 상황에서 나-제 연합군의 협공을 받고 이렇다 할 방어전 한번 치르지 못하고 長壽王(413~491)代 이래 장악해 온 한반도 중부 지역에 대한 패권을 상실하고 만다.
고구려 勢가 물러난 한강 유역은 백제와 신라가 양분했다. 오늘날의 강원도를 포함한 한강 상류 지역은 신라가 차지하고, 하류 지역은 다시 백제의 영토가 된 것이다. 그러나 강 하나의 유역을 사이좋게 나눠 가진다는 것은 신라나 백제라는 두 고대국가가 지닌 속성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개념이었다. 더구나 백제가 탈환한 한강 하류 유역은 신라가 탈취한 상류 유역보다 전략적, 경제적 가치가 월등한 지역이었다.
원래 古代국가는 처음엔 사방 수십리도 되지 않는 城邑(성읍)국가에서 출발하여 주변의 고만고만한 성읍국가들을 하나하나 제압하면서 영토를 넓혀온 정복국가다. 고구려, 백제, 신라의 발전 과정이 모두 그러했다. 따라서 한강 유역의 헤게모니를 둘러싼 백제-신라의 격돌은 예정된 手順(수순)이었다. 이같은 대결을 예상한 聖王은 倭國(왜국)에 불교를 전하는 등의 외교적 노력으로 백제-왜의 동맹 관계를 심화시키고 있었다.

백제 聖王을 敗死시킨 김유신의 祖父

서기 433년 이래 1백20년간 계속되어 오던 신라-백제의 동맹 관계를 먼저 결정적으로 파기한 쪽은 신라였다. 그 무렵 백제의 성왕은 守勢(수세)에 몰린 고구려에 결정타를 가할 심산으로 지속적인 연합전선 형성에 의한 北侵(북침)을 신라측에 제의하고 있었다. 그러나 신라의 생각은 달랐다. 다음은 三國遺事(삼국유사)의 관련 기록.
「백제는 신라와 合兵(합병)하여 고구려 정벌을 도모했다. 그러나 진흥왕이 말하기를, 『국가의 존망은 하늘에 달려 있다. 하늘이 고구려를 미워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어찌 그것을 바랄 수 있겠는가』라고 했다」
이같은 진흥왕의 발언은 매우 정략적인 레토릭이었다. 쉽게 말하면 고구려 변경의 실속 없는 땅을 얼마 더 탈취하기보다는 백제가 고구려로부터 탈환한 한강 하류 유역이 목구멍에서 손이 나올 만큼 탐났다는 얘기다.
「국제정치(외교)엔 영원한 친구도 없고, 영원한 적도 없으며, 오직 국가이익만 있을 따름이다」--전성기 大英(대영)제국의 재상 팔머스톤 卿(경)이 갈파한 명언이다.
진흥왕의 속셈이야 어떠했든 위기에 몰린 고구려로서는 감지덕지할 수밖에 없었다. 삼국유사에는 「고구려 사람들이 진흥왕의 말을 전해 듣고 감동해 화친을 맺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신라로서는 백제와의 대결에 대비, 고구려로부터 최소한 好意的(호의적) 중립을 확보해 놓은 것이다.
이런 가운데 진흥왕 14년(553) 가을 7월, 신라군은 백제로부터 한강 하류 6개 군을 횡탈하여 新州(신주)를 설치했다. 이때 新州의 軍主(군주;管區사령관을 겸한 지방장관)에 武力(무력)이 기용되었다.
여기서 역사 무대에 처음 등장하는 武力은 532년 신라에 병합된 금관가야(金官伽倻:경남 김해)의 마지막 왕 仇衡(구형)의 아들로서, 바로 김유신의 祖父다. 망국의 왕자 출신이면서도 전략적으로 예민한 새 점령지의 지휘권을 장악했다는 점으로 미루어 보아 武力은 한강 하류 지역의 공취에 상당한 전공을 세운 것으로 짐작된다.
힘들게 수복한 故土(고토)를 횡탈당한 백제로선 신라에 대해 깊은 원한을 품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묘하게도 聖王은 그해 10월 왕자 餘昌(여창)을 장수로 삼아 일단 고구려를 공격한다. 고구려 쪽에 허점이 있었던 듯하다. 이때 전투 규모는 컸지만, 승패는 무승부였다.
聖王이 신라부터 응징하지 않고 고구려 남쪽 변경을 먼저 공격한 이유는 확실하지 않다. 원래 충분한 대비책을 세우고 경계심을 늦추지 않고 있는 적에 대한 공격은 下之下策(하지하책)이기는 하다. 어떻든 진흥왕 代의 신라군은 백제군 단독으로선 승전을 기약할 수 없을 만한 戰力(전력)을 보유했던 것 같다.
백제 성왕의 책략도 녹록치 않았다. 삼국사기 聖王 31년(553) 10월 條를 보면 백제는 고구려 공격전과 거의 동시에 聖王의 딸을 진흥왕의 小妃(소비)로 시집을 보내고 있다. 이같은 정략 결혼은 비수를 감춘 성왕의 위장 평화 공세였다.
이러는 동안 백제를 지원하기 위한 倭國(왜국)의 원병과 전쟁 물자가 속속 내도했다. 신라에게 합병의 압박을 받고 있던 大伽倻(대가야:경북 고령) 중심의 後期(후기) 가야연맹 諸國(제국)도 백제 진영에 가담했다. 성왕은 백제-가야-왜 연합군이 결성되자 왕자 餘昌을 장수로 삼아 회심의 신라 정벌전을 개시한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진흥왕 15년(554) 9월 백제군은 신라의 서부 국경에 침입하여 남녀 3만9천명을 포로로 잡고, 말 8천필을 탈취했다. 서전의 승리라 할 만하다.
그러나 백제로서는 불운했다. 원정군 최고 지휘관인 왕자 餘昌이 陣中(진중)에서 병을 얻었던 것이다.
백제의 불행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성왕이 아들의 급작스런 병을 걱정하여 불과 50기만 거느리고 백제군의 전선사령부가 설치된 管山城(관산성:지금의 충북 옥천)으로 달려가던 중 오늘날의 大田 동쪽 식장산에서 신라의 복병에 걸려 전사하는 사태가 벌어지고 말았다. 식장산은 경부고속도로를 타고 가면 大田 터널 남쪽으로 빤히 보이는 높이 5백98m짜리 험산이다. 백제 중흥의 英主(영주)로서는 너무도 허망한 죽음이었다.
성왕의 목을 벤 인물은 신라의 三年山城(삼년산성:지금의 충북 보은)의 高干(고간:신라 지방관직 10등급 중 제3위)인 都刀(도도)였다. 都刀는 바로 新州 軍主인 武力 휘하의 裨將(비장)이었다. 이때의 상황은 日本書紀(일본서기) 欽明(흠명) 15년(554) 12월 條의 기사가 가장 실감 있다.
「(전략) 얼마 후 都刀가 明王(명왕=성왕)을 사로잡았다. 두 번 절하고 왕의 머리를 베려 하니 明王이 꾸짖어 가로되 『종놈이 감히 왕의 목을 베려 하느냐』고 했다. 都刀가 말하기를, 『우리나라 법은 맹서를 위배하면 왕이라도 종놈의 손에 죽습니다』고 했다. 明王이 탄식하여 가로되, 『과인은 매양 너희 나라의 배신이 골수에 사무쳐 왔다』 하고 마침내 斬(참)을 당했다」
이어 벌어진 管山城 전투에서 金庾信의 조부인 武力의 전공은 발군이었다. 武力 휘하 신주의 州兵을 주력으로 한 신라군은 佐平(좌평:백제의 16관등 중 제1위) 4인을 포함한 백제-가야-왜 연합군 2만9천6백명을 참살했다. 이때 백제군의 최고 지휘관인 왕자 餘昌은 한 가닥 血路(혈로)를 뚫고 겨우 전장에서 이탈할 수 있었다. 다음은 이어지는 일본서기의 기록.
「餘昌이 포위를 당하여 탈출할 도리가 없었다. 筑紫國造(축자국조)가 활을 쏘아 신라 騎兵 중 최강의 자를 떨어뜨리고, 이어 비오듯 連射(연사)하여 포위군을 물리쳤으매, 여창과 諸將(제장)이 間道(사잇길)로 빠져 도망쳐 나왔다」
筑紫國造는 일본 규슈(九州) 츠쿠시(筑紫) 지방의 「쿠니노미얏고(國造)」, 즉 豪族(호족)이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이때 참전한 왜병은 1천명 정도였다니까 大勢(대세)에 영향을 줄 만한 규모는 아니었다.<2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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