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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庾信과 그의 시대(5)

글 정순태 기자  2005-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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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庾信과 그의 시대(5)

정순태


『金庾信이 충청도 출신인 건 잘 모를 거야』

東서울 톨게이트를 통과, 중부고속도로를 따라 꼭 80㎞를 달리면 鎭川(진천) 인터체인지와 만난다. 진천 인터체인지의 들머리에는 「生居鎭川」(생거진천)이란 네 글자를 새긴 바윗덩이가 눈에 띈다. 그런 충북 진천이 바로 김유신의 출생지다.
예로부터 우리 민간에서는 「生居鎭川」 「死去龍仁(사거용인)」이란 8글자의 秘機(비기)가 나돌았다. 무슨 말이냐 하면 생시엔 충청도 진천에서 살고, 죽어서는 경기도 용인으로 간다는 얘기다. 「전설 따라 3천리」 식의 믿거나 말거나 한 얘기지만, 그야 어떻든 대통령선거에서 세 번이나 낙선했던 DJ가 조상의 묘를 용인에 이장하고 난 후에야 대통령에 당선되기는 했다.
진천 인터체인지를 빠져나와 진천읍 중심가를 통과하는 21번 국도를 따라 天安(천안) 방면으로 20리쯤 달리다가 오른쪽으로 꺾어 9번 郡道(군도)에 접어들어 2㎞를 더 가면 진천읍의 오지인 계양 마을. 여기에 김유신의 生家(생가) 터가 있다. 1천4백여년 전 계양 마을은 신라 萬弩郡(만노군)의 治所(치소:관아 소재지)였다.
신라 진평왕 16년(594)을 전후한 시기에 만노군 태수로 부임한 인물이 金舒玄(김서현). 만노는 진흥왕代(540~576)에 신라가 고구려로부터 공취한 변경 지대로 이곳 태수는 상당 규모에 달하는 수비대의 지휘관을 겸했다.
김서현은 이곳 萬賴山(만뢰산, 612m) 자락에 관아를 짓고 그 주위에 보루를 쌓아 요새화했다. 그래서 그런지 그후 계양 마을은 「담밭안」으로 불려 왔다.
진평왕 17년, 그러니까 서기 595년 「담밭안」에서 등에 七星(칠성) 무늬가 새겨진 아이가 태어났다. 아버지는 만노군 태수 김서현, 어머니는 萬明夫人(만명부인). 부부는 아이의 이름은 태몽에 따라 庾信이라고 지었다.
서현은 화성과 토성이 자기에게 내려오는 꿈을 꾸었고, 만명은 金 갑옷을 입은 동자가 구름을 타고 집안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었다니까 굉장한 태몽이었다. 부부가 함께 이런 길몽을 꾼 날이 庚辰日(경진일)이어서 처음엔 庚辰으로 이름을 삼으려 했다.
그러나 당시엔 日月星辰(일월성신)으로 이름을 짓지 않는 것이 예법이어서 庚과 글꼴이 닮은 庾, 그리고 辰과 발음이 같은 信을 이름자로 삼았다는 것이다. 「삼국사기」 김유신 열전에 나오는 얘기다.
필자가 계양 마을의 김유신 生家 터를 답사했던 날은 추적추적 내리는 봄비 탓인지 주위가 적막강산이었다. 만뢰산 줄기가 양쪽으로 뻗어 내린 골짜기 사이로 펼쳐진 외가닥 옛길 옆의 생가 터. 여기다 보루를 쌓았다니까 고구려 勢(세)의 南進을 막을 수 있었겠구나 하는 등의 생각에 잠겨 있는데, 갑자기 등 뒤에서 명랑한 여성의 소리가 들려 왔다.
『김유신 장군이 충청도 출신이란 건 다른 지방 사람들은 잘 모를 거야』
꽤 자랑스러워하는 목소리였다. 퍼뜩 뒤돌아보니 이십대 아베크 참배객이었다.

邊境 농촌은 큰 인물 성장에 좋은 土壞

김유신은 그 출생부터 드라마틱하다. 우선 그 부모의 결혼에 이르는 과정이 신라 骨品制(골품제)의 벽을 뛰어넘은 센세이셔널한 사건이었다.
그의 아버지 서현은 532년 신라에게 병합된 金官伽倻(금관가야:지금의 경남 김해)의 마지막 왕 仇衡(구형)의 손자다. 亡國(망국)의 왕손인 만큼 신라에서 크게 출세할 가능성은 별로 없는 신분이다.
다만 서현의 아버지인 武力이 554년 관산성 전투에서 백제 성왕을 전사시키는 등의 대공을 세웠고, 그의 어머니가 법흥왕의 딸 阿陽公主(아양공주)였던 것을 배경으로 화랑도의 上級(상급) 간부인 前方花郞(전방화랑)의 지위에 오른 경력을 가졌던 정도였다. 필사본 「화랑세기」에 따르면 서현은 大元神統(대원신통)의 신분이다. 大元神統도 귀족계급이기는 하지만, 眞骨正統(진골정통)에 버금가는 위치다(月刊朝鮮 1999년 4월호의 기사, 「필사본 화랑세기의 정체」 참조).
이런 신분과 배경의 서현이 肅訖宗(숙흘종)의 딸 萬明을 우연히 만나 첫눈에 반해버림으로써 복잡한 문제가 빚어지기 시작했다. 숙흘종이라면 법흥왕의 동생인 立宗 葛文王(갈문왕:왕의 동생 등에게 붙여준 尊號)의 아들이다. 그런 숙흘종이 진흥왕 死後 과부가 된 진흥왕의 妃였던 萬呼太后(만호태후:진평왕의 母后)와 결혼하여 낳은 딸이 만명이다. 그러니까 만명은 진골정통 중에서도 최상의 혈통이다.
서현과 만명의 野合(야합)과 결혼 과정은 「삼국사기」와 「화랑세기」에 비교적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서현이 처음 길에서 만명을 보았을 때 내심으로 기뻐하여 그녀에게 눈짓하여 중매도 없이 야합했다(삼국사기). 만명이 임신을 하자 만호태후는 서현이 진골정통이 아닌 대원신통이라 하여 이들의 야합을 허락하지 않았다(필사본 화랑세기). 숙흘종은 딸 만명을 별채에 가두고 사람을 두어 지키도록 했다(삼국사기).
이에 서현은 掠奪婚(약탈혼)을 결심한다.
「그러던 중 갑자기 대문에 벼락이 쳐서 지키던 사람이 놀라 정신을 차리지 못했을 때, 만명이 창문으로 나와 마침내 서현과 함께 만노군으로 도망쳤다」(삼국사기)
그러니까 위의 기사는 서현이 대문을 박차고 숙흘종의 집에 뛰어들어가 별채에 갇혀 있던 만명을 탈취한 약탈혼을 점잖게 표현한 것이다. 「삼국사기」에서는 약탈혼 당시 서현이 만노군 태수로 임명되어 부임 직전의 상황이었던 것으로 되어 있으나, 필사본 「화랑세기」에는 좀 다르게 기록되어 있다.
「서현과 만명이 만노군으로 함께 도망친 후 유신을 낳았다. (중략) 자신의 여동생 만명이 괴로움을 당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진평대왕은 서현을 만노군 태수로 봉하였다」
진평왕과 만명은 아버지는 다르나 어머니(만호태후)가 같은 오누이 관계다. 그러니까 진평왕은 사랑의 도피행각을 벌인 同腹(동복)의 여동생 만명이 고생하고 있다는 얘기를 전해 듣고 妹夫(매부) 서현에게 만노태수의 벼슬을 내린 것이다.
그러나 서현과 만명은 오랫동안 王京 서라벌로 돌아올 수 없었던 것 같다. 야합과 약탈혼 때문에 둘에 대한 신라 귀족 사회의 평판이 나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김유신은 소년기를 변경의 벽지에서 보낼 수밖에 없었을 터이다. 바로 이런 성장 환경이 김유신의 품격 형성에는 오히려 바람직한 작용을 하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원래 질박한 시골이야말로 큰 인물을 만들어내는 좋은 토양이다. 화려한 도회지에서 성장하는 것은 상류사회의 세련미를 갖추는 데 유리할지 모르나 인간적 그릇을 키우는 데는 불리하다. 그래서 한 시대를 진동시킨 영웅들은 거의 변경 시골 출신이다.
예컨대 亂世(난세)의 중국 대륙을 평정하고 통일제국을 창업한 뒤 고구려, 백제, 신라의 3국 쟁패전에도 대단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는 楊堅(양견=수문제)이나 李淵(이연=당고조) 같은 인물도 中原(중원) 북방 오르도스 방면의 흉노를 방어하기 위한 변경 요새인 武鎭川(무진천:지금의 武川縣)에서 성장했다. 무진천 수비대의 중-하급 장교들과 그 자제들은 엄혹한 생존환경을 거치면서 동지적 유대 관계가 심화되고, 결국 中原 최강의 무진천 軍閥(군벌)을 형성하여 수와 당을 창업하는 데 있어 결정적인 도약대로 삼았던 것이다.
武鎭川 군벌 조직의 활용에 가장 주목했던 인물이 바로 李淵의 차남인 李世民(이세민)으로, 그가 바로 중국 역사상 최고의 名君으로 손꼽히는 당태종이다. 훨씬 나중의 일이지만, 당태종은 그에 비해 6세 연상인 김유신의 존재를 유별나게 의식한다. 그와 관련한 얘기는 일단 뒤로 미룬다.

인간을 움직이는 것은 名譽

김유신의 소년기에 관한 사료는 거의 없다. 그러나 그의 행적을 보면 그는 시골의 정서를 대단히 유효하게 활용하고 있다. 예컨대 신라 최고 사령관이 되기 전까지 그가 지휘했던 부대를 보면 王京 출신들로 구성된 大幢(대당) 등의 중앙군단이 아니라 모두 지방 농민들의 자제들로 구성된 州兵(주병) 군단들이었다.
원래 정예 군단을 만드는 데 있어 출발점은 농촌에서 募兵(모병)하는 것이다. 도회지 출신 병사는 성장 환경으로 인해 野戰性(야전성)에 취약하고 겉멋에 쉽게 물들어 단결력도 약하다. 변경에서 소년기를 보낸 김유신은 王京 귀족 출신 武將(무장)들과는 달리 농촌 정서를 체득하고 있었던 만큼 농민병을 능숙하게 다룰 수 있었을 것이다.
실제 전장에 나선 김유신은 중-하급 장교나 병사들의 마음을 격동시켜 절대 불리한 국면을 결정적으로 역전시키고 있다. 「삼국사기」 권 47에 보이는 丕寧子(비령자)의 분투가 바로 그러한 사례 중 하나다.
<진덕왕 원년(647) 백제가 대군을 거느리고 茂山(무산:전북 무주) , 甘勿(감물:경북 고령군 지례), 桐岑(동잠:충북 충주) 등의 성을 공격하므로 庾信이 보병과 기병 1만을 이끌고 대항했다. 그러나 백제군이 정예군이었기 때문에 고전을 면치 못하고 사기는 꺾이고 힘도 빠졌다. (중략) 유신이 비령자를 불러 말한다.
『추운 겨울이 된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푸르다는 사실을 아는 법. 오늘의 사태가 위급하니 누가 용감히 싸우며 기묘한 계책을 내어 여러 사람의 마음을 격려하겠는가?』
유신이 이어 그와 술을 마시면서 은근한 마음을 표하니 비령자가 두 번 절하고 말한다.
『지금 많은 사람들 가운데 유독 저에게 일을 부탁하시니 가히 知己(지기:자기를 알아줌)라고 할 만합니다. 진실로 죽음으로써 보답하여야 마땅하겠습니다』
(중략) 말이 끝나자 그는 곧 말에 채찍질을 하며 창을 비껴 들고 적진으로 돌입하여 적병 여럿을 죽이고 자기도 전사했다>
「삼국사기」에 「비령자는 고향과 집안의 성씨도 알 수 없다」고 기록되어 있다. 지방 농민 출신 초급 장교였던 듯하다. 그가 전사하자 그의 아들 擧眞(거진)이 달려나가 싸우다 죽고, 擧眞이 쓰러지자 이번에는 비령자의 머슴인 合節(합절)까지 뛰어나가 장렬하게 전사했다.
이런 군단은 강할 수밖에 없다. 인간을 움직이게 하는 것은 명예다. 백제군은 3천명의 전사자를 남기고 퇴각했다.
김유신의 성장 배경을 설명하다 보니 얘기가 너무 앞으로 나가 버리기는 했지만, 아무튼 만노군에서 소년기를 보냈다는 것이야말로 武將의 길을 선택한 그에게는 대단한 행운이었다. 바로 삼국간 쟁패전의 중심 무대가 되는 한반도 중부지역에 대한 풍토와 지리, 그리고 민심을 체득할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랑의 도피 행각을 감행한 서현-만명 부부가 서라벌로 불려 올라간 것은 순전히 장남 김유신 때문이었다. 필사본 「화랑세기」에 그 배경이 기록되어 있다.
「유신이 점차 장성하면서 제왕의 풍모를 보였다. 이런 소식을 들은 萬呼太后는 유신을 만나 보기 위해 서현과 만명이 돌아올 것을 허락하였다. 태후는 유신을 만나 보고 크게 기뻐하여 진실로 내 손자라고 했다」
앞에서도 얘기했지만 만호태후라면 今上(금상)인 진평왕의 모후로서 그 시점엔 신라 왕실의 최고 어른. 더욱이 그녀는 진흥왕의 모후 只召太后(지소태후)의 사후에 진골정통의 대표적 존재가 되어 궁정 정치에서 강렬한 女權(여권)을 발휘하고 있었다. 그런 만호태후가 김유신을 「진실로 내 손자」라고 했다는 것은 그의 앞날에 대한 청신호였다.
그것은 우선 망국의 후예 김유신의 신분이 어머니 만명부인의 혈통에 따라 진골전통으로 격상되었음을 의미한다. 김유신의 조모, 즉 서현의 어머니가 비록 법흥왕의 딸 阿陽公主였다고는 하지만, 궁중정치에서 발언권이 미약한 존재였다. 유별나게 호색했던 법흥왕은 수많은 후궁들을 거느려 자녀들이 많았는데, 아양공주 역시 그런 후궁의 소생들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만호태후의 인정을 받은 김유신은 곧 신라 청년들의 엘리트 코스인 화랑 조직의 上級(상급) 리더로 도약한다. 그때 그의 나이 15세. 필사본 「화랑세기」에는 「이로부터 伽倻派(가야파)들이 마침내 金庾信을 받들게 되었다」고 쓰여 있다.● <6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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