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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庾信과 그의 시대(6)

글 정순태 기자  2005-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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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庾信과 그의 시대(6)

亂世, 花郞徒 입문, 지도자의 길

정순태



시대정신은 亂世의 평정

亂世(난세)의 백성들은 혼란을 빨리 끝장내 주는 영웅의 출현을 갈망한다. 金庾信(김유신)이 역사 무대에 등장하던 무렵의 시대정신은 피를 피로 씻는 세상을 평정하여 평화의 시대를 만들어 내는 것이었다.
삼국시대는 우리 역사상 최대의 戰國時代(전국시대)였다. 전국시대는 群雄(군웅)을 배태하는 자궁이다. 백제의 近肖古王(근초고왕·346~375), 고구려의 廣開土王(광개토왕·391~413), 신라의 眞興王(진흥왕·540~576)은 모두 富國强兵(부국강병)의 英主(영주)들이었다.
근초고왕 대의 백제는 평양을 공격하여 고구려의 故國原王(고국원왕)을 敗死(패사)시키고, 중국 遼西(요서) 지방을 經略(경략)했으며, 倭王(왜왕)을 侯王(후왕=제후왕)으로 삼았다. 백제의 전성시대와 본격적 전국시대를 동시에 개막시켰던 것이다.
광개토왕은 南征北伐(남정북벌)을 통해 백제의 阿莘王(아신왕)을 굴복시키고, 신라의 보호자로서 王京(왕경) 서라벌에 고구려군을 주둔시켰으며, 부여와 숙신 등을 공략하여 북방 영토를 확대했다. 고구려 중심의 동북아 질서를 창출했던 것이다.
진흥왕 대의 신라는 고구려의 南進勢(남진세)를 꺾은 다음 백제의 聖王(성왕)을 전사시키고, 대가야를 비롯한 가야연맹의 영토를 완전히 병합했다. 우리 역사상의 4국시대를 3국시대로 압축시키면서 한반도의 핵심부인 한강과 낙동강의 지배자로 등장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 누구도 삼국을 하나로 통합하는 압도적인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그것은 우리 민족사 발전 단계의 문제라기보다는 삼국의 국력이 팽팽한 互角之勢(호각지세)를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삼국의 쟁패전은 589년 중국 대륙에서 통일제국 隋(수)가 대두하면서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든다. 590년 隋 文帝(수 문제) 楊堅(양견)은 고구려 平原王(평원왕·559~590)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의 국서를 보낸다.
「遼水(요수=요하)의 넓이가 長江(장강=양자강)과 비교하여 어떠한지, 고구려의 인구가 陳(진)과 비교하여 어떠한지, 왕은 말하여 보라!」
외교 문서라기보다는 도전장이자 협박장이었다. 楊堅은 隋軍(수군)이 한해 전 양자강을 건너 南朝(남조) 최후의 왕조 陳을 멸망시키고 中原(중원)을 통일한 여세를 몰아 고구려 국왕의 복속을 강요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왕이 직접 와서 무릎을 꿇지 않으면 開戰(개전)하겠다는 통첩이었다.
고구려 평원왕은 군사 훈련, 군량 비축 등 국방 강화책을 서두르면서도 隋 文帝에게 朝貢使(조공사)를 보내는 和戰 兩面策(화전 양면책)을 구사했다. 그러나 평원왕은 이 해 겨울 10월 재위 32년 만에 죽고, 그의 맏아들 陽王(영양왕·590~618)이 왕위에 올랐다. 수 문제는 사신을 보내 영양왕에게 上開府儀同三司(상개부의동삼사)의 관위를 내리고 평원왕의 관직이었던 遼東郡公(요동군공)을 계승케 했다.
隋의 三品(3품) 관위와 郡公(군공)의 관직을 내린다는 것은 동북아의 강자 고구려 국왕의 체통을 여지없이 깎겠다는 얘기였다. 이처럼 중국 통일왕조의 군주들은 이웃 나라에 대해 으레 오만무례했다. 그래서 중국 주변국들은 中原(중원)의 분열을 좋아한다. 분열기의 中原 왕조들은 북방 스텝지역의 유목 강국들에 대해 비굴할 정도로 아부를 했다. 힘이 지배하는 국제정치 메커니즘의 실상은 예나 지금이나 바로 이러한 것이다.
예컨대 남북조 말기 北齊(북제)와 北周(북주)의 두 황제는 돌궐의 陀鉢可汗(타발가한)을 아버지로 섬기면서 막대한 조공품을 경쟁적으로 상납했다. 이때 돌궐의 타발가한은 절정의 짜릿함을 만끽하며 다음과 같은 호언을 한다.
『나에게 중국 황제라는 효성스런 아들이 둘이나 있으니까 가난의 걱정이 없노라!』

중원 통일 제국 隋의 대두

이런 돌궐도 타발가한의 사후에 東西로 분열되고, 隋의 등장 이후에는 그 위세가 크게 꺾였다. 隋 文帝(문제)는 東돌궐의 啓民可汗(계민가한)을 후원하여 西돌궐을 멀리 내쫓고, 東돌궐을 朝貢國(조공국)으로 삼았다.
文帝 시절의 隋는 인구가 4천5백만명에 달했으며, 減稅(감세) 정책을 썼는데도 막대한 財政黑子(재정흑자)를 시현하여 「錢穀珍寶(전곡진보)가 國庫(국고)에 흘러 넘쳤다」고 기록되었을 만큼 국력의 피크타임이었다. 文帝는 여러 가지 개인적 약점이 있었긴 해도 3백50년에 걸친 혼란의 시대를 治世(치세)로 바꾼 중국 역사상의 名君(명군)임에는 틀림없다.
영양왕으로서도 수 문제의 눈치를 살필 수밖에 없었다. 일단 몸을 낮춘 영양왕은 591년 봄 정월에 사신을 보내 表文(표문)을 올리고 왕으로 책봉해 줄 것을 간곡히 요청했다. 그제서야 수 문제는 영양왕을 고구려 국왕으로 인정했다. 이후 영양왕은 수에 조공사를 자주 파견하여 친선 관계를 도모했다.
그러던 고구려의 자세가 돌변했다. 598년 영양왕은 몸소 군사 1만을 거느리고 요하를 건너 隋의 遼西(요서) 지방에 대한 선제 공격을 감행했다. 그 이유는 확실치 않으나, 隋의 침공 기미를 눈치채고 적의 전진기지를 먼저 때려 놓는다는 전략적 판단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군은 營州摠管(영주총관) 韋沖(위충) 軍이 반격에 나서자 이렇다 할 전투 없이 슬그머니 물러났지만, 수 문제는 격노했다. 隋의 패권에 의한 東아시아의 朝貢冊封(조공책봉) 체제에 정면으로 도전했던 것이다. 수 문제는 곧 그의 넷째 아들 楊諒(양량=漢王)과 王世績(왕세적)을 원수로 삼아 水陸軍(수륙군) 30만을 동원하여 고구려 정벌전에 나선다. 그러나 수군은 한 번 싸워보지도 못하고 자멸했다.
隋의 육군은 국경의 군사 거점인 임유관까지 진군했으나 장마 때문에 군량 수송에 차질을 빚은 데다 軍中에 전염병이 돌아 전력을 상실해 버렸다. 周羅(주라후)가 이끈 水軍 함대도 평양으로 항진중 황해상에서 풍랑을 만나 거의 모두가 침몰했다.
고구려로선 일단 수 문제의 분노를 누그러뜨려야 할 필요가 있었다. 영양왕은 『糞土(분토)에 사는 신하 某』라고 운운하는 사죄의 表文을 올렸다. 이런 립서비스라면 실질적으론 손해볼 것이 없으므로 오히려 현명한 외교라고 할 만하다.
이런 거래가 오가는 판에 백제가 끼어들었다. 백제의 威德王(위덕왕)은 고구려에 대한 재정벌을 요청하면서 隋軍의 嚮導(향도)가 될 것을 자청했다. 수 문제는 당장에 군사를 동원할 형편이 아니었으므로 말로는 『고구려가 이미 服罪(복죄)하여 용서했다』는 반응을 보이는 등 체면치레를 했지만, 내막적으로는 고구려 재침을 위해 백제 사신을 크게 환대했다. 이후 한동안 수-백제의 밀월 관계가 계속된다.
이번에는 고구려가 발끈했다. 고구려로선 자기 머리 위에서 전개되는 수-백제의 군사동맹 관계를 그냥 놔둘 수 없었다. 고구려 軍은 백제의 변경을 침공하여 한바탕 징벌전을 전개하여 남북에서 협공할 우려가 있는 수-백제의 군사동맹을 일단 견제했다.
삼국간에는 서로가 서로에게 풀지 못한 원한이 누적되어 왔다. 7세기의 개막과 더불어 삼국 중 가장 먼저 소강 상태를 깬 군주는 600년에 즉위한 백제의 武王(무왕)이었다. <삼국사기>에는 무왕이 「풍채가 훌륭하고, 뜻이 호방하며, 기상이 걸출했다」고 쓰여 있다.
武王은 554년 聖王(성왕)의 전사 이후 처음으로 벼르고 벼르던 복수전을 전개한다. 그의 상대는 신라의 진평왕이었다. <三國遺事>(삼국유사)에 기록된 서동의 로맨스가 사실이라면 무왕은 바로 진평왕의 사위다.
왕위에 오르기 전의 무왕은 진평왕의 셋째 딸이 美色(미색)이라는 소문을 듣고 신라에 잠입하여 지모로써 선화공주를 품 속에 넣은 薯童(서동=맛동), 바로 그다. 그러나 국가 이익의 추구에 있어서는 장인-사위의 관계라고 해서 달라질 것이 별로 없다.
진평왕 24년(602) 가을 8월에 백제군은 신라의 阿莫山城(아막산성:전북 남원시 운봉읍)을 포위 공격한다. 진평왕은 정예 기병 수천기를 급파, 전세를 역전시켰다. 승세를 탄 신라군은 백제 동쪽 변경에 진공하여, 泉山(천산: 전북 장수군) 등지에 4개 성을 쌓고 백제를 압박한다.

신라 화랑 貴山의 臨戰無退

백제의 영토는 東高西低(동고서저)다. 동쪽 산악지대를 점령하여 서쪽 평야지대를 내려다보는 신라군을 그냥 놔둘 무왕이 결코 아니었다. 격노한 무왕은 좌평(제1위의 관등) 解(해수)에게 步騎(보기) 4만을 주어 4개 성의 탈환전을 벌인다. 해수의 군단에는 倭兵(왜병)도 끼어 있었다. 이번에는 신라군이 궤멸의 위기에 빠진다. 이때 화랑 출신 貴山(귀산)과 추항이 소리높여 외친다.
『내 일찍이 스승에게 들으니, 군사는 적군을 만나 물러서지 않는다고 했다. 어찌 감히 패해 달아날 수 있으랴?』
귀산과 추항의 스승이라면 2년 전(600) 중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圓光 法師(원광 법사)다. 원광은 그의 수도처 加悉寺(가실사·경북 경산)로 찾아온 두 젊은이에게 저 유명한 世俗五戒(세속오계)를 가르친 신라 호국 불교의 祖宗(조종)이다.
세속오계는 事君以忠(사군이충), 事親以孝(사친이효), 交友以信(교우이신), 臨戰無退(임전무퇴), 殺生有擇(살생유택)이다. 귀산과 추항은 온몸에 창칼에 찔리는 전상을 입고 전투 직후에 죽었으나, 세속오계의 제4항 臨戰無退가 과연 무엇인지를 처음으로 實戰(실전)에서 시범을 보였다.
귀산 등의 임전무퇴로 사기가 오른 신라군은 백제군을 철저하게 격파했다. <삼국사기> 열전에 따르면 쓰러진 백제군의 시체가 들판을 메우고 말 한 필, 수레 한 채도 돌아가지 못했다. 다만 백제군의 장수 해수만은 단신 도주했다.
한강 유역을 집어삼킨 신라는 백제, 고구려 공동의 적이었다. 바로 다음 해(603) 가을 8월에는 고구려가 高勝(고승)을 장수로 삼아 북한산성(서울 江北지역)을 침공했다. 진평왕은 몸소 1만병을 이끌고 출전하여 고구려군을 간신히 격퇴했으나, 二正面(2정면) 작전에 따른 國家疲勞度(국가피로도)는 가중되었다.
604년 수 문제가 고구려 정벌의 소원을 이루지 못한 채 죽고, 그의 차남 楊廣(양광)이 즉위했다. 그가 바로 수의 煬帝(양제)다. 煬帝라면 원래 色(색)을 밝히고 백성을 착취했던 군주가 죽은 뒤 부여받는 諡號(시호)다. 楊廣은 제2 황자 시절에 총사령관이 되어 멸망시킨 陳의 後主(후주)에게 煬帝라는 시호를 부여했는데, 그 역시 死後에 양제란 시호를 받았으니까 기막힌 인과응보라고 할 만하다.
<隋書>(수서) 열전에는 양광이 文帝의 애희 陳夫人(진부인)을 농락한 사실이 폭로되어 황태자의 지위를 잃을 위기에 봉착하자, 병든 문제를 시해하고 그날 밤 陳부인을 품었다고 쓰여 있다. 그러나 文帝 本紀(본기)의 기록은 전혀 달라 양광에 의한 文帝 피살설은 史家(사가)들에 의해 대체로 부인되고 있다.
그야 어떻든 개인적 자질로 본 양광은 詩文(시문)에 능통하고 나름의 지략도 있었다. 그의 병통은 허영심과 자존망대였다.
양제가 천하를 호령하자, 백제 무왕은 607년 率(한솔·제5위의 관등) 燕文進(연문진)을 파견하여 수 양제에게 조공을 했다. 이어 佐平(좌평·제1위의 관등) 王孝隣(왕효린)을 보내 고구려를 남북에서 함께 치자고 부추겼다.
이에 고구려의 영양왕이 울컥했다. 607년 여름 5월 고구려군은 백제의 松山城(송산성)을 공격하다가 함락시키지 못하자, 다시 石頭城(석두성)을 기습하여 남녀 3천명을 사로잡아 회군했다.
바로 이해에 수 양제는 노골적으로 영양왕의 入朝(입조)를 강요했다. 이것은 항복하러 오라는 얘기에 다름 아니다. 사단은 엉뚱한 데서 빚어졌다.
수 양제는 30만 대군의 옹위를 받으며 북쪽 변경을 순시하면서 돌궐의 군주 啓民可汗(계민가한)의 幕府(막부)에 들렀다. 이에 앞서 계민가한은 몸소 보검을 뽑아 들고 수 양제가 묵을 초대형 빠오(천막) 주변의 풀을 베는 등 草原(초원)의 王者(왕자)로선 체신머리 없는 언동을 서슴지 않았다. 「隋書」에 따르면 계민가한의 가상한 행동에 크게 만족한 수 양제는 除草(제초) 작업의 품삯도 포함하여 무려 20만필의 비단을 하사했다. 수 양제는 이처럼 손이 큰 기분파였다.
하필이면 이때 공교롭게도 계민가한의 幕府(막부)에는 고구려의 사신이 방문하고 있었다. 고구려로선 수의 압력을 완화하려면 돌궐과의 연대가 필요했다. 그런데 중국의 통일 왕조는 전통적으로 境外之交(경외지교), 즉 중국이 모르는 주변국들 간의 외교를 금지했다. 계민가한은 고구려 사신의 방문을 비밀로 하다가 들통날 것을 우려하여 수 양제에게 以實直告(이실직고)를 하고 만다. 이에 수 양제는 기고만장하여 고구려 사신을 불러 꾸짖는다.
『너희 왕이 入朝하지 않으면 계민가한을 앞세워 너희 나라를 징벌하려 한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영양왕은 「풍채가 준수하고 쾌활한」인물이었다. 이런 품성의 군주들은 좀처럼 주눅이 들지 않는다. 수와의 한판 승부가 불가피하다면 우선 배후의 적부터 강타해둘 필요가 있었다. 영양왕의 고구려군은 진평왕 30년(608)년 봄 2월에 신라 북쪽 변경을 습격하여 8천명을 포로로 잡아 간다. 이어 여름 4월에는 다시 신라의 牛鳴山城(우명산성)을 탈취했다.

15세에 화랑 조직의 제2인자로 발탁돼

만노군(충북 진천)에서 출생하여 거기서 소년기를 보낸 청년 金庾信이 王京 서라벌에 첫발을 디딘 것은 바로 이런 격동의 시기였다. 필사본 <화랑세기>에 따르면 만호 태후(진평왕의 母后)에게 불려가 외손자로 인정받은 金庾信은 그로부터 화랑도 내부 伽倻派(가야파)의 희망이 되었고, <삼국사기> 金庾信 傳에는 『公의 나이 15세 때 화랑이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런 사실 등으로 미루어 보면 金庾信의 上京(상경)은 608년이나 빨라도 그 한 해 전쯤의 일로 짐작된다.
그러니까 金庾信의 부모 서현-만명 부부는 오랫동안 변경 생활을 하다가 만호 태후의 배려로 그야말로 겨우 入京(입경)할 수 있었다. 서현-만명 부부는 슬하에 2남2녀를 두었다. 후일 삼국 통일의 원훈 중 하나가 되는 차남 欽純(흠순)은 金庾信의 세 살 밑 동생이니까, 그 역시 만노군에서 태어나 12세쯤의 나이로 이때 처음 상경했던 것으로 보인다.
金庾信이 신라 왕실의 최고 어른 萬呼太后로부터 그녀의 外孫(외손)으로 인정을 받았던 경과는 이미 앞에서 썼다. 그는 열다섯의 나이로 대번에 14세 風月主(풍월주·신라 화랑의 최고 리더) 虎林公(호림공)의 副弟(부제)로 발탁되었다. 부제라면 화랑 조직의 넘버 투 맨이다. 변두리 태수를 지낸 일개 武將(무장)의 아들로서는 눈부신 출세였다.
이것은 신라의 위기 상황에서만 가능했던 발탁이라고 할 수 있다. 국가적 위기를 타개해 나갈 인물은 王京에서 곱게 성장한 귀공자가 아니라 변경에서 야생마처럼 씩씩하게 자란 청년들 중에서 배출될 것이라는 신라 왕실의 기대감 때문이었다고 해도 좋을 것 같다. 그렇다면 청년 金庾信의 자질이 뛰어났다는 얘기다.
金庾信이 主兄(주형: 풍월주에 대한 호칭)으로 받든 호림 公은 진평왕의 장인인 福勝(복승) 葛文王(갈문왕: 왕의 장인 등에 대한 존칭)의 아들이었다. 진평왕의 妃(비) 摩耶夫人(마야부인)이 바로 호림 公의 맏누이다. 훗날 선덕여왕 때 신라 불교의 최고 지도자인 大國統(대국통)에 오른 慈藏 律師(자장 율사)는 호림의 아들이다.
호림은 심지가 맑고 곧을 뿐만 아니라 재물을 아낌없이 나눠 주었으므로 당시 사람들로부터 脫衣地藏(탈의지장)이란 칭송을 받았다. 지장이라면 불교의 메시아인 미륵불이 출현할 때까지 裟婆世界(사바세계)에 남아서 중생을 교화하는 大悲(대비)의 보살인데, 거기에다 중생 구제를 위해 입고 있던 옷까지 벗었다니(脫衣) 대단한 利他行(이타행)인 셈이다.
호림은 『仙道(선도=화랑도)와 불도는 하나의 도이니 화랑 또한 부처님을 모를 수 없다』면서 菩利 公(보리 공. 원광 법사의 아우로서 12대 풍월주 역임)에게 나아가 계율을 받았다. 이후 화랑도와 불교가 하나로 융합되기 시작한다.
화합의 인물 호림 공의 바로 밑에서 차기 풍월주를 향한 제1순위의 포스트를 차지할 수 있었다는 것은 망국 가야의 후예 金庾信에겐 대단한 행운이었다. <삼국사기> 金庾信 傳(전)에는 「당시 사람들은 그를 기꺼이 따르며 그 무리를 龍華香徒(용화향도)라 불렀다」 기록되어 있다.
용화라면 불교의 메시아(救世主)인 미륵불을 가리키며, 향도는 禮佛 結社(예불 결사)다. 불교 경전에 따르면 미륵불은 裟婆(사바)세계에 내려와 용화수 밑에서 대법회를 베풀어 중생을 구제하는 미래의 부처다. 그러니까 金庾信은 장차 佛國土(불국토) 신라를 구원할 미륵불과 같은 존재로 비유되었던 셈이다. 물론 유독 金庾信에게만 그런 신라 사회의 기대가 모아졌던 것은 아니다. <7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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