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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庾信과 그의 시대(8)

글 정순태 기자  2005-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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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庾信과 그의 시대(8)

정순태


신분제 사회에서 계층간 갈등 해소

화랑 조직의 탁월성은 귀족과 서민의 자제를 한 울타리 안에 포용했다는 점에 있다. 그러면 낭도는 어떤 과정을 통해 조직화되었던 것일까?
필사본 <화랑세기>에 따르면 서민의 자제들 중 준수한 자로서 郎門(낭문)에 들어오면 郎徒(낭도)라 불렸다. 13~14세에 童徒(동도), 17~18세에 平徒(평도), 23~24세에 大徒(대도)가 되었다. 大徒 가운데 선발된 자가 望頭(망두)에 오르고, 다시 망두 가운데 공과 재주가 있으면 臣頭(신두)나 郎頭(낭두)로 뽑혔다.
大徒로서 望頭에 오르지 못하면 화랑 조직에서 나와 兵部(병부=국방부)에 소속되거나 향리로 돌아가 마을의 지도자가 되었다. 당시의 징집 연령이 15세로부터 60세까지이고, 일생을 통해 두세 번씩 징병되는 병역 제도와 築城(축성) 등에 자주 동원되던 부역 제도 아래, 서민의 자제로서 낭도에 입문한다는 것은 대단한 신분 상승이었다.
고향에 돌아간 낭도 출신들은 중앙과 지방의 연결고리 역할을 했다. 이것이 바로 통일 전쟁 기간을 통해 신라의 동원 체제가 삼국 중 가장 원활했던 까닭이다. 화랑 제도는 골품제 사회에서 발생하게 마련인 계층간의 긴장과 갈등을 조절하고 완화하는 데도 큰 역할을 했다는 얘기다.
화랑과 낭도 간의 깊은 유대 관계가 잘 나타나 있는 것이 鄕歌(향가) 慕竹旨郞歌(모죽지랑가)다. 이 향가는 젊은 시절에 낭도였던 得烏(득오)가 당시의 화랑 竹旨(죽지)를 그리워하며 지은 노래다. 竹旨라면 金庾信 휘하의 부수(副帥)로서 통일 전쟁의 1급 공신이다.
<지나간 봄 그리매/ 모든 것이 시름이로다/아담하신 모습에 주름살 지시니/(중략)/낭이여, 그리운 이 마음/다북쑥 우거진 곳에 잘 밤 있으리이까>
득오는 竹旨의 늙어감을 안타깝게 생각하며 竹旨와 얽힌 옛일을 회상하고 있다. 그러면 <삼국유사>의 기록을 통해 화랑 죽지와 낭도 득오의 인간 관계를 요약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득오는 낭도 시절에 갑자기 징집되어 화랑 竹旨에게 보고도 하지 못한 채 富山城(부산성·경북 건천)에서 병졸로 복무한다. 죽지는 득오의 행방을 수소문한 끝에 술과 떡을 장만하여 낭도 1백37명을 데리고 부산성으로 면회를 갔다. 부산성에서 득오가 밭일을 하고 있는 것을 목격한 죽지는 성주 益宣(익선)에게 말미를 청했다. 익선은 병사들에게 사사로운 노동을 시키고 있었음에도 죽지의 요청을 거절했다.
이런 장면을 목격한 侃珍(간진)이란 아전이 의분을 느끼고 익선에게 곡식 30섬을 주면서 득오의 휴가를 간청했다. 그래도 허락하지 않자, 舍知(사지·제13위의 관등) 珍節(진절)이 타고 간 말과 안장을 익선에게 내주었다. 그제서야 익선은 득오의 휴가를 허락했다>
화랑도 성원들 간의 의리가 이처럼 대단했다. 얘기는 다시 클라이막스로 향한다.
<이런 소문을 듣고 花主(화주·풍월주의 아내)가 발끈했다. 조정에서는 곧 익선에 대한 체포 명령을 내렸다. 익선이 달아나 숨어버리자, 그 아들을 대신 붙들었다. 그때가 2월의 추운 날이었는데, 그 아들을 성 안의 연못에 목욕시켜 얼어 죽게 했다. 익선의 더러운 때를 씻어 낸다는 뜻이었다>
대단히 가혹한 連坐制(연좌제)에 의한 처벌임엔 틀림없다. 그로부터 익선의 출신지인 牟梁里(모량리) 사람들 중 벼슬하는 사람은 모두 쫓아내고, 僧服(승복)도 입지 못하게 했다. 반면 곡식 30섬을 의로운 일에 던진 侃珍에게는 두텁게 상을 내리고, 그 자손은 坪定戶孫(평정호손=촌장)으로 삼았다. 이처럼 신라의 상과 벌은 뚜렷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신라 조정에서 화랑도의 氣(기)를 한껏 북돋았다는 점이다. 이같은 정책적 배려 가운데 화랑도는 생사를 같이 할 인너그룹(Inner Group= 內的 結社)을 형성할 수 있었다. 이런 인너그룹은 일단 유사시에 강력한 단결력과 추진력을 발휘하게 마련이다.
얘기가 조금 앞질러 가지만, 화랑과 낭도의 평생 동지 관계가 實戰(실전)에서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 대표적 사례는 <삼국사기> 裂起(열기) 傳에서 발견할 수 있다.
열기는 662년 1월에 대장군 金庾信이 唐軍(당군)을 구원하기 위해 輜重(치중)부대를 이끌고 평양성 외곽에 접근했을 당시, 步騎監(보기감)의 직책에 있었다. 이때 金庾信에겐 목숨을 걸고 적진을 돌파하여 唐將(당장) 蘇烈(소열=소정방)과의 연락 임무를 수행할 만한 용사가 필요했다.
<그때 당군은 식량이 떨어져 절박한 처지에 있었다. 金庾信은 열기를 불러 말한다.
『나는 젊어서부터 그대와 교유하여 그대의 지조와 절개를 안다. 이제 蘇 장군에게 내 뜻을 전달하려 하나 사람을 구하기 어렵다. 그대가 갈 수 있겠는가?』
열기가 답한다.
『제가 불초한데도 中軍職(중군직)에 있는 것이 외람된 일인데, 어찌 장군의 명령을 욕되게 하겠습니까? 제가 죽는 날이 바로 새롭게 태어나는 날이 될 것입니다』>
위의 기사에서 직접적 언급은 없지만, 金庾信과 열기는 화랑-낭도의 관계로부터 출발하여 평생 동지가 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열기는 불과 15명의 특공조를 조직하여 목숨을 걸고 적진을 돌파했다. 이렇듯 金庾信 휘하에서는 열세나 궁지에 빠질 때마다 전성기 로마 軍團의 핵심 전사 百夫長(백부장=백인 대장)과 같은 용사들이 나서 임무를 완수하고 있다.

『저의 정성을 불쌍히 여겨 방도를 가르쳐 주십시오』

金庾信이 화랑도의 리더로 떠올랐던 무렵의 東아시아 정세는 천하 판갈이의 大戰(대전)을 향해 시한 폭탄의 초침처럼 돌아가고 있었다. 신라로서는 백제와 고구려의 협공에 견딜 수 없을 만큼 급박했다. 진평왕은 611년 隋 煬帝에게 고구려를 쳐줄 것을 요청하는 乞師表(걸사표)를 보낸다. 고구려의 남침을 막으려는 정책이었다.
걸사표는 원광 법사가 지은 외교 문서다. 이때 원광의 말이 매우 인상적이다.
<자기가 살기 위해 남을 멸하려 하는 것은 沙門(사문=불교)에서 행할 바가 아니지만, 貧道(빈도)가 대왕의 땅에서 살고 대왕의 땅에서 나는 물과 곡식을 먹고 있으니, 어찌 감히 명을 좇지 않겠습니까?>
원광은 그가 說(설)한 세속오계에서 이미 호국 불교의 깃발을 높이 들었다. 臨戰無退(임전무퇴)와 殺生有擇(살생유택)은 적을 죽이지 않고는 달성할 수 없는 목표다. 그는 佛國土(불국토=신라)의 안보를 위해서는 殺生도 護法(호법)의 방법이라는 논리를 폈던 것이다.
611년 봄 2월에 수양제는 고구려 정벌을 위한 詔書(조서)를 발표한다. 그 내용은 「고구려가 중국의 반역자들을 유혹하고, 척후를 놓아 변경을 괴롭혔다」는 것이었다. 이런 선전포고의 구실이야말로 賊反荷杖(적반하장)의 극치다.
수 양제는 5백만의 백성들을 동원하여 양자강과 황하를 연결하는 대운하를 건설하고, 萬里長城(만리장성)을 대대적으로 보수했는데, 이때 2백만명이 죽거나 도주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니까 『중국의 반역자를 유혹했다』는 말은 중국의 도망자들 중 일부를 고구려에서 받아들였다는 얘기다.
611년은 수 양제의 大業(대업) 7년이다. 바로 이 해에 오랫동안 중국에 복속하지 않던 西돌궐의 處羅可汗(처라가한)도 수양제의 부름을 받고 入朝(입조)하여 무릎을 꿇는다. 기고만장한 수 양제는 文帝의 소극책을 버리고 더욱 적극적인 대외 정책을 구사한다. 그것이 커다란 파문이 되어 사방으로 뻗쳐나가기 시작했다.
611년이면 金庾信의 나이 17세다. 그는 고구려와 백제가 잇달아 신라 땅을 침범하는 것에 비분강개하여 적들을 토벌할 뜻을 품고, 홀로 中嶽(중악)의 石窟(석굴)로 들어가 몸을 깨끗이 씻고 하늘에 誓願(서원)한다.
<『적국이 무도하여 승냥이나 범처럼 우리 영토를 침범하여 소란을 일으키므로 해마다 평안한 날이 없습니다. 저는 한갓 보잘 것 없는 신하로서 재주와 용력이 없사오나 재앙과 난리를 없앨 뜻을 갖고 있사오니, 오직 이를 살피시어 저의 손에 힘을 빌려 주소서』
4일 후 한 노인이 칡 베옷을 입고 나타나 묻는다.
『이곳에는 독한 벌레와 사나운 짐승들이 많은 곳인데, 귀한 소년이 어찌 혼자 이런 곳에 왔는가?』
범상치 않는 노인의 모습을 보고 유신이 말한다.
『어르신께서는 어디서 오셨는지, 존함을 알고자 하나이다』
노인이 대답한다.
『나는 일정한 주거가 없고, 인연이 닿는 대로 가고 머무나니, 이름은 難勝(난승)이다』
유신이 두 번 절하며 간청한다.
『저는 신라 사람으로 나라의 원수를 보니 가슴이 아파 여기 왔는데, 어르신을 뵙게 되었습니다. 엎드려 비옵건대 어르신께서는 저의 정성을 불쌍하게 여기시어 방도를 가르쳐 주십시오』
노인은 묵묵히 말이 없다. 유신이 눈물을 흘리며 예닐곱 번이나 간청하니 노인이 그때서야 다시 입을 연다.
『그대가 어린 나이로 삼국을 병합하려는 뜻을 품고 있으니, 이 또한 장하지 않은가!』
노인은 말을 마치고, 곧 비법을 가르쳐 주면서 당부한다.
『부디 함부로 전하지 말라! 만약에 이를 의롭게 사용하지 않으면 도리어 재앙을 받으리라』
노인은 말을 마치고 떠났다. 유신이 2리쯤 뒤따라가 보았으나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고, 다만 산 위에 오색 빛이 찬란했다>

제갈공명 兵法書

위의 인용문은 <삼국사기> 金庾信 傳의 기사를 옮긴 것인데, 漢 高祖(한 고조) 劉邦(유방) 막하 제1의 謀士(모사)였던 張良(장량)이 異人(이인) 黃石 公(황석 공)과 만나는 장면과 유사점이 많다. 장량은 원래 중국 전국 7雄(웅)의 하나인 韓(한)의 公子(공자)로서 조국을 멸망시킨 秦始皇(진시황)에게 복수하기 위해 滄海(창해:지금의 天津)의 力士(역사)와 공모하여 암살 작전을 결행했다가 실패하고 떠돌이 신세가 되어 있었다.
이런 청년 망명객 張良 앞에 홀연히 나타나 병법을 가르친 노인이 黃石 公이다. 황석 공은 그 자신이 지은 병법서 <三略>(삼략)을 장량에게 전수했다. <삼략>은 周 武王(주 무왕)의 名 재상 姜 太公(강 태공)이 지은 <六韜>(육도)와 더불어 병법의 古典(고전)으로 회자되어 왔다.
그렇다면 金庾信이 難勝에게 전수받은 병법서는 무엇일까? 군사학 연구자들 중에는 그후 金庾信의 행적과 전략 전술, 그리고 그가 임종을 앞두고 문무왕에게 했던 유언 등으로 미루어 보아 「諸葛亮心書」(제갈량심서)일 것이라고 추정하는 분도 있다. 특히 <삼국사기> 문무왕 14년 條에 신라군이 六陣兵法(육진병법)을 훈련했던 기사가 보이는데, 이 陣法(진법)은 諸葛亮의 八陣法(팔진법)을 개량한 것이었다고 한다.
金庾信의 기도처인 中嶽(중악)은 경주시 건천읍에 있는 斷石山(단석산·827m)으로 比定(비정)되고 있다. 현재 삼국시대 五嶽(5악) 가운데 하나인 중악의 위치에 관해서는 연구자들의 견해가 엇갈리고 있지만, <삼국사기>에 기록된 石窟이 단석산 神仙寺(신선사) 경내의 石窟(석굴)의 모습과 일치한다는 등의 이유로 「중악=단석산」이 다수설이다.
단석산 석굴은 칼로 내리친 듯한 바위가 외가닥 통로와 하늘 面만 남기고 사면을 둘러싸고 있는 모습이다. 석굴 안쪽 벽면에는 10여구의 불상과 부처에게 공양하는 인물상이 陰刻(음각)되어 있다.
이것은 古신라 최대의 佛像群(불상군)이라는 점에서 미술사학계의 주목을 받아 왔는데, 특히 삼국 시대의 服飾(복식) 연구에 귀중한 사료가 되고 있다. 불상의 조성 연대는 6세기 말~7세기 초로 추정되고 있다. 그러니까 金庾信이 중악의 석굴에서 수도했던 시기(611년)를 벗어나지 않는다.
필자는 작년 늦가을에 단석산 석굴을 답사하다가 1천4백년의 풍우를 견뎌온 磨崖佛像(마애불상)의 관찰에 정신을 팔았던 나머지 하산 시간을 놓치고, 달빛도 없는 어둠속에서 길을 더듬느라 꽤 고생한 일이 있다. 2km에 달하는 하산 길 곳곳이 여름 폭우로 사람 키보다 깊게 패여 있었지만, 두어달 동안이나 방치한 바람에 추락할 뻔했다. 순례객들이 줄을 잇는 역사의 현장을 그렇게 방치해도 되는 것인지, 요즘 세월이 그런 것인지 묻고 싶었다.
단석산에는 斷石寺(단석사) 터, 화랑바위 등 화랑과 관련한 유적이 많고, 그것에 얽힌 전설도 적지 않다. 단석산에 오르면 언양 석남사 배후의 가지산(1,240m), 운문산(1,181m) 등 「영남 알프스」 연봉의 실루엣과 雲海(운해)가 절경을 이루고 있다.
또한 단석산은 신라가 낙동강 서쪽 지역으로 진출하는 데 있어 교두보로 삼았던 淸道(청도)로 가는 주요 교통로 변에 위치해 있다. 따라서 신라 화랑의 순례지가 되었을 것임도 의심할 여지가 없다.
金庾信의 석굴 수행을 전후한 시기는 신라가 백제군의 공세에 고전을 거듭하던 때다. 麗-隋 대전의 개전을 눈 앞에 둔 611년 겨울 10월, 백제군은 假岑城(가잠성·충북 괴산)을 포위 공격했다. 가잠성이 무너지면 신라의 생명선인 鳥嶺(조령)이 위험해진다.
신라의 守城軍(수성군)은 양식과 물이 떨어지자, 시체를 뜯어 먹고 오줌을 받아 마시며 1백여일 간 농성했다.
그러나 가잠성의 포위를 풀기 위해 달려온 신라 上州(상주), 下州(하주), 新州(신주)의 구원 軍이 백제군에 패해 후퇴해버렸다. 612년 정월에 성이 무너지는 가운데 守城將(수성장)인 현령 讚德(찬덕)은 홰나무에 머리를 부딪쳐 자살하고 만다. <9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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