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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庾信과 그의 시대(10)

글 정순태 기자  2005-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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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庾信과 그의 시대(10)

정순태


고구려가 납치하려 했던 제거 대상

제1세 풍월주 魏花郞(위화랑) 이후 15세 풍월주 金庾信까지의 면면을 보면 기라성을 방불케 한다. 그것이 바로 신라의 국가 경쟁력이었다.
5세 풍월주 斯多含(사다함)은 大伽倻(대가야) 병합에 제1 공을 세웠고, 6세 풍월주 世宗(세종)은 고구려와 백제의 침략군을 패퇴시키고 재상을 지낸 인물이었으며, 8세 풍월주 文努(문노)는 花郞徒의 기풍을 불굴의 戰士團(전사단)으로 전환시켰다. 또 12세 풍월주 菩利(보리)와 14세 풍월주 虎林(호림)은 花郞道와 호국 불교를 하나로 융화시켰고, 13세 풍월주 龍春(용춘)은 金春秋(김춘추=태종무열왕)의 미래를 열어 주었다.
필사본 <화랑세기>를 면밀하게 검토해 보면 金庾信은 615년까지 3년 동안 풍월주의 지위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金庾信의 후임인 16世 풍월주 寶宗(보종)과 17世 풍월주 廉長(염장)의 재임 기간 합계가 11년간이고, 金庾信보다 8세 연하인 김춘추가 그 나이 24세 때인 626년에 18세 풍월주에 올랐기 때문이다.
<삼국유사>는 15세 풍월주 재임 당시 金庾信의 행적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당시 白石(백석)이라는 자가 있었는데, 그가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없지만, 유신의 낭도에 소속된 지 여러 해가 되었다. 유신 랑이 고구려와 백제를 치려고 밤낮 깊이 궁리하고 있었는데, 백석이 그 계획을 알고 낭에게 말했다.
『제가 공과 함께 저쪽을 몰래 정탐한 뒤에 도모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낭이 기뻐하여 친히 백석을 데리고 밤중에 길을 떠났다.>
위의 인용문을 통해 삼국간에는 서로 치열한 첩보전을 벌이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金庾信은 白石의 건의에 따라 이렇다 할 사전 준비도 없이, 예컨대 고구려어를 습득하지 않은 채 선뜻 고구려 침투를 결단한다. 그렇다면 신라인과 고구려인 간에는 서로 말이 통했던 것일까?
진지왕(576~579) 때 상대등(귀족회의 의장)을 지낸 居柒夫(거칠부)도 젊은 시절에 『문득 고구려를 엿보고 싶어』 고구려에 잠입하여 승려 惠亮(혜량)의 불경 강의를 들었다. <삼국사기> 열전에 따르면 이때 혜량은 거칠부에게 가만히 『고구려에도 사람을 볼 줄 아는 이가 있으니 잡힐까 걱정되어 몰래 알려준다』면서 『빨리 신라로 돌아가라』고 하였다.
신라의 진골귀족이었던 거칠부가 썼던 말은 경주 중심의 신라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그가 고구려 사람 속에서 신라인이라는 점을 감추고 불경 강의까지 들었다는 것은 결국 고구려어와 신라어가 상당히 비슷했다는 얘기다.
의무교육을 통해 표준말을 강력하게 보급하고 있는 오늘날에도 지방 사투리 때문에 정확한 의사의 전달이 어려운 경우도 있음을 볼 때, 신라어와 고구려어가 물론 같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이를테면 집단 거주 지역을 나타내는 어휘의 경우 고구려어에서는 忽(홀), 신라어에서는 벌(伐) 또는 불(火)이 많이 사용되었다. 또 물(水)을 뜻하는 고구려어는 매(買)였지만, 신라어는 물(勿)이었다.
그러나 이런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삼국인 간의 의사 소통에는 큰 장애가 없었던 것은 확실하다. 왕위에 오르기 전 백제의 무왕은 신라의 왕경에 잠입하여 薯童謠(서동요)를 지어 전파시킴으로써 결국은 진평왕의 셋째 딸 선화공주를 품속에 안게 되었다는 사례도 전해지고 있다.
그야 어떻든 白石과 함께 길을 떠난 金庾信은 骨火川(골화천·경북 영천)에 이르러 세 낭자와 만나게 된다. 다음은 <삼국유사>의 이어지는 기록이다.
<낭자들이 맛있는 과일을 바쳤다. 낭이 받아 먹고 마음이 통하게 되자, 속마음을 이야기했다. 낭자들이 말했다.
『공께서 하신 말씀은 이미 잘 알겠습니다. 공께서 白石을 떼어두고 저희들과 함께 숲 속으로 들어가시면 다시 속마음을 여쭙겠습니다』
유신공이 그들과 함께 숲 속으로 들어가자, 낭자들이 문득 귀신의 모습을 나타내면서 말했다.
『우리들은 奈林(내림. 경주시 낭천), 穴禮(혈례. 청도), 骨火(골화. 영천 금강산)의 세 호국신이다. 지금 적국 사람이 낭을 유인해 가는데도 낭이 깨닫지 못하고 길을 떠나기에, 우리들이 낭을 만류하려고 여기까지 왔다』
세 호국신은 말을 마친 후 사라져버렸다. 공이 이 말을 듣고 놀라 엎드려 두 번 절하고, 骨火館(골화관)으로 돌아와 白石에게 말한다.
『지금 중요한 문서를 잊고 왔으니, 집으로 돌아가서 문서를 가져오자』
곧 함께 귀가한 뒤 白石을 묶어놓고 사실을 추궁했다.>
위의 인용문은 고구려의 첩자 白石에게 유인당하고 있는 金庾信을 구원하기 위해 신라의 호국신들까지 陰佑(음우)했다는 얘기다. 그만큼 金庾信이라는 존재가 중요했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한 기록으로 보이지만, 현대인의 정서엔 너무 神異(신이)하다.
이를 현대적으로 해석해 보면 어떨까? 그러니까 白石의 언동을 통해 고구려의 납치 공작을 뒤늦게 눈치챈 金庾信이 將計就計(장계취계), 즉 적의 계교를 역이용하는 계책으로 白石을 붙들어 고구려의 허실을 캐냈다고 하면 진실에 가까운 기록이 될지도 모르겠다.
白石은 그가 金庾信을 납치하기 위해 고구려에서 파견된 특수 요원임을 자백한 뒤 사형을 당했다. <삼국유사>에는 고구려의 첩보 기관이 金庾信을 납치하려 했던 이유도 장황하게 설명되고 있다. 金庾信은 그 前生(전생)이 점치는 선비로서 고구려 왕에게 바른 말을 했다가 목이 달아나고, 이에 대한 복수를 위해 신라에서 還生(환생)했는데, 이를 안 고구려가 암살 공작을 벌였다는 스토리다.
이것은 불교적 輪回說(윤회설)과 緣起說(연기설)에다 도교적 占卜術(점복술)까지 혼합된 설화임으로 자세한 풀이는 생략한다. 다만 위의 인용문을 통해 김유신은 풍월주 재임 시기에 이미 적국의 경계 또는 제거 대상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天官女와 조제핀의 차이점

<나폴레옹은 조제핀과 연애하면서 유럽 정복 전쟁을 벌였다. 영웅 호색의 낭만이 있다. 그런데 金庾信은 어떠한가. 한 여자도 사랑하지 못하는 주제에 어떻게 통일의 대업을 꿈꾸는 대장군이라고 할 수 있으며, 게다가 그는 자신의 맹세를 지키지 못한 허물을 영특한 말에게 뒤집어씌워 그 말의 목을 벴다. 얼마나 졸렬한가>
문화부 장관을 지낸 李御寧(이어령)씨는 사랑과 관련한 글에서 프랑스의 영웅 나폴레옹에 빚대어 신라의 영웅 金庾信을 위와 같이 내리 깎은 적이 있다. 바로 청년 시절의 金庾信에게 버림받은 天官女(천관녀)의 悲戀(비련)을 두고 하는 비난이다. 그러면 「東國與地勝覽」(동국여지승람), 「東京雜記」(동경잡기), 「破閑集」(파한집)에서 전하고 있는 비련의 스토리를 다시 끄집어내 볼 필요가 있다.
<유신이 어렸을 때부터 어머니 만명부인은 날마다 엄격하게 가르치며 함부로 사귀어 놀지 못하도록 했다. 그러던 어느날 유신이 娼妓(창기) 천관의 집에서 자고 왔다. 만명부인은, 『나는 네가 성장해서 功名(공명)을 세워 인군과 어버이를 영화롭게 해주기를 바랐는데, 천한 계집과 음란한 방에서 술을 마시고 회롱하여 논단 말이냐!』라고 하며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 유신이 만명부인 앞에서 스스로 맹세한다.
『다시는 그 문 앞을 지나다니지 않겠습니다』>
金庾信은 원초적으로 立身揚名(입신양명)에 한계가 있는 망국의 후예였다. 더욱이 그의 부모 서현-만명 부부는 野合(야합)과 掠奪婚(약탈혼) 때문에 신라 귀족 사회에서 오랫동안 따돌림을 받아 왔다. 이런 가운데 아들에게 기대를 걸고 엄격한 가정교육을 했던 만명부인으로선 그가 하이틴의 나이로 벌써 기생 오입을 했으니까 설움이 복받쳐 울음이 나오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다음은 이어지는 천관녀의 스토리다.
<하루는 유신이 술에 취해 귀가하는데, 말이 잘못하여 창기 천관의 집에 이르렀다. 천관은 반색하고 한편으로 원망하며, 눈물을 흘리면서 그를 맞았다. 술에서 깬 유신은 타고 온 말을 칼로 베고 그 길로 집으로 돌아왔다>
그렇다면 金庾信은 과연 李御寧씨의 지적대로 졸렬한 사람이었던가? 필자는 李御寧씨가 金庾信과 나폴레옹의 처지가 전혀 다른데도 무리하게 비판을 했다고 생각한다.
나폴레옹에게 6세 연상의 조제핀은 육체적 쾌락을 일깨워준 첫 여인이었을 뿐만 아니라 출세를 위한 징검다리였다. 혁명 장군의 미망인이었던 조제핀은 파리 사교계의 꽃으로 總裁政府(총재정부)에 대한 능란한 로비 활동을 통해 나폴레옹이 이탈리아 원정군 사령관으로 임명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후 승승장구한 나폴레옹은 숱한 情婦(정부)를 거느렸고, 황제로 등극한 후에는 조제핀을 차버리고 유럽 최고의 명문 합스부르그家(오스트리아 皇家)의 어린 公主 마리 루이즈와 재혼했다. 그러면 金庾信은 어떤가?
경주 시가지 남쪽, 都堂山(도당산)과 五陵(오릉) 사이에 천원이라는 자연부락이 있다. 지금도 이 마을 동쪽 논둑에 불상의 지대석, 석탑재, 초석들이 박혀 있다. 이곳이 인간 金庾信을 느낄 수 있는 사적 제340호, 天官寺(천관사) 터(경주시 교동 244번지 외 11필지)다.
천관사는 천관녀가 죽은 후 그녀의 집 자리에 세워진 절이다. 金庾信이 功業(공업)을 이루고 난 뒤에 천관녀의 명복을 빌기 위해 그녀가 살던 집을 절로 바꾸었다고 전해진다. 그렇다면 金庾信은 결코 비정한 인물이 아님을 알 수 있다.
한 가지 흥미로는 것은 천관녀의 신분에 관한 논란이다. 최근 들어 천관이 창기가 아니라 여성 神官(신관)이라는 견해가 상당한 설득력을 갖고 대두되고 있다. 즉, 비천한 창기였다면 天官이란 이름이 가당치도 않고, 천관녀의 집이었던 천관사 터가 신라의 聖域(성역)과 너무 가깝다는 논거에서다.
그러고 보면 그렇다. 천관사 터의 이웃에는 신라의 시조 왕 赫居世(혁거세)와 왕비 閼英(알영)의 탄생지로 전해져 오는 蘿井(나정)과 閼英井(알영정), 그리고 신라 초기의 왕들이 묻힌 五陵(오릉)이 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시조 왕에게 제사지냈던 廟堂(묘당)과 神宮(신궁)도 이곳에 세워져 있었다고 한다. 천관사 터 남쪽의 도당산(높이 95m)은 신라의 重臣(중신)들이 모여 국사를 논의했던 南堂(남당)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이길 수 있을 때만 싸우는 전략가

천관사 터에서 南川을 사이에 두고 5백m 상거한 곳에는 「삼국유사」와 필사본 「화랑세기」에 각각 金入宅(금입택) 또는 水望宅(수망택)이라고 기록되어 있는 金庾信의 집 터가 있다. 금입택이나 수망택이란 말은 재물이 물같이 밀려드는 큰 부자의 집이란 뜻이다.
신라 때 유물로는 냇돌과 다듬은 돌로 멋있게 쌓은 우물 財買井(재매정)과 주변에서 수습된 석재 등이 눈에 띄는데, 그 모양새로 보아 대단한 호화 저택이었음을 짐작케 한다. 이곳의 발굴 조사는 1991~1993년의 3년에 걸쳐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에 의해 이루어졌다.
이 조사에서 석축 담장, 석축 基壇 遺構(기단 유구)와 여덟 곳의 건물지 유구가 드러났고 와전류, 토기, 자기류, 금속류도 출토되었다. 우물은 깊이 5백70cm, 최대 직경 1백80cm, 바닥 직경 1백20cm다. 金庾信의 先公後私(선공후사) 정신을 말해 주는 재매정(1회 연재 참조)의 우물돌(井口石)은 ㄱ자와 ㄴ자로 가공되어 짜맞추어져 있는데, 우물 안에는 지금도 물이 고여 있다.
천관사터는 이렇게 신라의 성역과 금입택 등이 몰려 있던 동네 가까이에 있다. 이런 곳에서 방음 시설도 없었던 그 시절, 창기가 가무음곡의 판을 질펀하게 벌이며 영업을 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천관녀의 신분이 神官(신관=무녀)이었을 것이라는 주장이 그럴 듯해진다. 천관을 창기 또는 賤隸(천예)라고 한 것은 천관녀의 설화를 기록한 후세 유교 사가들의 오해 때문인지도 모른다. 귀신을 불신하는 유교 신봉자들의 가치 판단으로는 무녀나 창기, 두 직종 모두가 굳이 구별할 필요성도 없는 천한 계집이다. 어떻든 金庾信과 나폴레옹, 두 인물의 옛 情人(정인)에 대한 상반된 태도는 서로의 문화적 풍토의 차이에서 기인되었던 것인지 모르겠다.
金庾信이 자신의 말을 벤 데 대한 李御寧씨의 비난에 대해서는 소설 「金庾信, 무덤에서 뛰쳐나오다」를 쓴 崔普植(최보식·조선일보 기자)씨가 매우 재미있는 반론을 피력했다.
<유신이 죽인 말은 영특하지 못했다. 그 말이 영특했다면 주인의 심중을 헤아렸을 것이다. 그런데 그 말은 주인이 취하자 천관녀의 집에 다시 갔다. (중략) 만약 전쟁터였다고 가정해 보라. 그 말은 의식을 잃은 주인을 태우고 주인이 가기를 원치 않은 곳으로 태우고 갔을 것이다. 말을 처단할 사유가 충분하지 않는가>
金庾信과 나폴레옹은 時空(시공)을 달리하지만, 비교해 볼만한 대조적 인물임에 틀림없다.
나폴레옹은 17세(만 16세)에 포병 소위로 임관된 후 프랑스 대혁명 직후의 혼란기인 25세 때 대위에서 영관급을 거치지 않고 바로 장군으로 승진했다. 프랑스군 장교들의 다수가 해외 망명하거나 혁명정부에 비협조적이었던 데 반해 나폴레옹은 反(반)혁명 민중봉기를 진압한 공으로 여단장으로 임명되었던 것이다.
그는 31세의 나이로 쿠데타를 일으켜 제1 통령으로서 정권을 장악하고, 36세 때(1804) 프랑스 황제로 즉위했다. 그러나 그는 45세 때(1813) 라이프치히 전투의 패배로 폐위당해 엘바 섬으로 쫓겨갔다. 이어 그는 47세 때(1815) 再起(재기)했으나 워털루 전투의 패전으로 다시 대서양의 절해고도 세인트헬레나로 추방되어 그곳에서 53세(1821)의 나이로 암에 걸려 병사하고 만다.


大器晩成

金庾信은 풍월주의 지위에서 물러난 22세 이후 34세까지 12년간 역사의 무대에서 전혀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다. 나폴레옹이 이탈리아 원정군 사령관으로서 아르콜레 전투와 마렝고 전투에서 공전의 대승을 거두었던 당시, 그의 나이는 불과 28세였다. 이에 비해 金庾信은 35세 때 副장군으로서 낭비성 전투에 출전하여 비로소 역사에 기록된 첫 전공을 세웠다.
이렇게 두 영웅을 비교해 볼 때 나폴레옹은 초특급 스피드로 정상에 올라 급전직하의 몰락을 했던 반면, 金庾信은 大器晩成(대기만성)의 인생을 살았다. 나폴레옹은 用兵(용병)의 천재였지만, 모스크바 원정, 라이프치히 전투, 워털루 전투에서 패배하여 유럽 정복의 야망을 이루지 못했다. 반면 金庾信은 삼국 통일에 성공한 영웅이다.
나폴레옹 전쟁 기간에 프랑스군 전사자 수가 2백만을 웃돌았지만, 그것에 비하면 金庾信 휘하 장병들의 희생은 거의 없었다고 해도 좋을 정도였다. 나폴레옹은 모스크바 원정에서 병참에 실패하여 50만 대군의 궤멸을 자초했고, 라이프치히 전투와 워털루 전투에서는 친위 군단의 투입 시기를 놓치는 등 전략 전술에서 허점을 드러냈다. 그러나 金庾信의 用兵은 화려하지는 않았으나 실패가 없었다.
나폴레옹은 국가의 운명을 걸어 놓고 승패를 예상할 수 없는 전투를 수없이 치렀지만, 金庾信은 이길 수 있는 정황을 먼저 만들어 놓고 이긴다는 확신을 가질 때만 전투를 했다. 바로 이 점이 金庾信의 전략가다운 면모다. 뛰어난 장수는 승패가 불확실한 전투는 회피하며, 유리한 국면이 도래할 때까지 끈질기게 참는 것을 장기로 삼는다.
이런 金庾信에 대해 「졸렬」 운운하는 李御寧 씨의 평가는 전혀 논리적이지 못하다. 얘기가 너무 앞으로 나가버렸는데, 말머리를 다시 613년 전후의 東아시아 무대로 되돌릴 것이다.<계속>● <11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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