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갑제닷컴 기사

天眞庵은 韓國천주교와 西學의 子宮

글 정순태 기자  2003-04-23

  • 페이스북
  • 트위터
  • 카카오톡
  • 글자 크게
  • 글자 작게
「바바방 바바방 밤바밤」-베토벤의 교향곡 제5번 「運命」을 아시죠. 한국천주교의 창립은 運命 교향곡의 모티브처럼 전개되었다. 서기 1779년 겨울날 밤, 눈보라를 헤치고 李檗(이벽)이란 사람이 두물머리(兩水里) 밑 마재에서 漢江을 건넌 다음 앵자봉을 넘어 조그마한 불교의 암자 天眞庵에 등장한다. 이벽은 한국천주교에서 創立聖祖로 받드는 분이다. 그는 한국천주교회를 世界傳敎史上 유례없이 自生시킨 인물이다.
당시 천진암에는 權哲身, 權日身, 李承薰, 丁若銓, 丁若鍾, 丁若鏞 등 畿湖南人系의 쟁쟁한 엘리트들이 모여 講學會를 열고 있었다. 儒學의 經典을 공부하는 講學會의 講長은 당시 44세의 鹿菴 權哲身이었고, 후일 朝鮮實學을 집대성한 茶山 정약용은 그때 나이 불과 18세였다. 그들은 모두 실학자 星湖 李瀷(1681-1763)의 學統을 잇고 있었다.
한국천주교를 이해하려면 이벽이란 인물부터 살펴야 한다. 여러분들이 중부고속도로 톨게이트로 들기 전에 통과했던 터널이 바로 광암(광암)터널인데, 광암이 바로 이벽의 雅號다.
이벽의 6대조는 병자호란(1636-1637) 때 淸軍에 의해 볼모로 瀋陽에 붙잡혀간 昭顯世子를 수행했던 李慶相이다. 소현세자는 이경상을 시켜 독일인 선교사 아담 샬과 접촉토록 했다. 소현세자로서는 北京에다 南堂을 지어놓고 천문학·수학 등 선진학문으로 淸國 조정에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했던 아담 샬을 상대로 多邊外交를 시도했던 셈이다.
소현세자는 8년만에 볼모에서 풀려나 귀국하면서 중국인 가톨릭 신자
5명을 데리고 왔다. 다음 왕위를 계승할 世子가 천주교와 서학에 관심이 깊었다는 얘기다. 그러나 소현세자는 귀국 후 곧 죽어버렸다. 조선왕조실록에는 病死로 되어 있지만, 다수의 연구자들은 소현세자의 증세와 사체의 모습 등으로 미루어보아 毒殺이라는 심증을 굳히고 있는 것이다.
소현세자를 따라온 중국인 궁녀와 환관 등의 천주교도가 자기 손으로 실로 해괴한 짓을 하고(성호를 긋고) 십자가에 매단 半裸 남자(예수)의 像에 경배하고 있었다. 그런 모습을 본 당시 사람들은 西洋雜鬼가 붙었다고 기겁을 했다. 더욱이 의심이 유별나게 많았던 仁祖는 淸나라의 朝野에 인맥이 두터운 소현세자를 王權의 도전자로 간주, 부자지간이면서도 政敵으로 증오했다.
소현세자가 急死하자 이경상도 향리 포천으로 물러나 은거했다. 이경상은 淸國에서 가져온 궤짝을 개봉하면 滅門之禍를 당한다는 유언을 하고 사망했는데, 이벽이 판도라의 상자, 즉 그 家傳의 궤짝을 열고 말았다. 이벽은 궤짝 속에서 끄집어낸 西學·西敎 관련서적들을 자습했다.
이런 이벽이 천진암 강학회에 동참하여 천주교를 전교하기로 마음을 먹고 서울 수표동 자택을 출발하여 마재를 거치는 100리 길을 걸어 走魚寺(현재 여주군 금사면 하품리)까지 갔다가 강학회 장소가 산너머 천진암이란 말을 듣고 앵자봉을 넘어 천진암에 당도했다. 이벽이 주어사를 먼저 갔던 것은 권철신이 평소 머물었던 주어사에서 강학회가 열리고 있는 줄 잘못 알았기 때문이다.
천주교측은 강학회에서 이벽의 주도적 역할을 강조한다. 즉 이벽이 천문, 지리, 철학, 수학 등 實學을 강의하면서 天主學을 논증하고 함께 실천케 하여 신앙의 싹이 움트게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당시에는 曜日이 없던 때라 음력으로 매월 7, 14, 21, 28일을 휴일, 즉 主日로 정했으며, 天主恭敬歌, 십계명가, 聖敎要旨를 지어 불렀다고 한다.
이후 천진암 강학 멤버들을 중심으로 한 신앙공동체가 형성되고, 1784년에는 한국천주교회로 발전한다. 즉, 1783년 늦가을 이벽은 李承薰을 北京에 보내 세례를 받게 했다. 이듬해 봄, 이승훈은 북경의 北堂에서 프랑스 신부 그라몽으로부터 세례를 받고 천주교 서적과 聖物을 갖고 귀국했다. 이에 이벽은 자신의 수표동 집을 임시성당으로 정하고 傳敎활동에 나섰다.
한국천주교에서 정약용은 절대로 지워버릴 수 없는 특이한 존재다. 다산이 기록 또는 편집한 이벽, 李家煥, 이승훈, 권철신, 정약전의 묘지명, 유고집 등이 아니면 초기 한국천주교회사는 미궁에 빠질 수밖에 없다. 프랑스 신부 달레가 지은 「한국천주교회사」의 底本도 바로 다산의 기록이다. 특히 이벽은 다산의 큰  姉兄이기도 하다. 이승훈도 다산의 妹夫다. 그러면 다산의 행적을 추적해볼 필요가 있다.
다산은 영조 38년(1762)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에서 晉州牧使를 지낸 丁載遠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천진암에서 강학한 지 4년 뒤인 정조 7년(1783)에 정약용은 22세의 나이로 會試에 합격하여 생원이 되었다. 이듬해 正祖가 신료들에게 中庸의 해석에 관한 숙제를 냈는데, 정약용이 제출한 中庸講義가 조선조 최고의 君師로 손꼽히는 正祖의 마음에 쏙 들었다. 이 註解에 대해 후일 정약용은 『이것은 曠菴의 說』이라고 밝힌 바 있다. 처음 정약용은 李瀷의 遺稿를 보고 民生을 위한 經世의 학문에 뜻을 두고 西學을 받아들였다.
바로 그 무렵에 정약용은 이벽으로부터 받은 천주교책도 탐독했다. 그로부터 그는 「매우 열심히 마음을 기울여」 천주교를 믿었다. 그러던 정조 9년(1785) 을사년에 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시작된다. 秋曹(형조)의 禁吏(수사관)들이 이벽의 주재로 明禮坊(지금의 명동성당 자리)의 金範禹(譯官과 醫員을 겸업한 中人) 집에서 진행중이던 미사현장을 덮친 것이다. 참석자들은 정약용과 그의 형들인 약전·약종, 그리고 이승훈·권일신 등 한국천주교회 창립멤버들이었다.
이때 김범우는 혹심한 매를 맞고 密陽에 귀양가서 죽음으로써 한국천주교 순교자 제1호가 되었다. 형조에서는 이벽, 이승훈, 권일신, 정약용 등 명문 양반 출신에 대해선 공권력을 행사하지 않았다. 그 대신에 정약용의 아버지는 押海丁氏 종친회에, 그리고 이승훈의 아버지는 平昌이씨의 종친회에 불려나가 크게 추궁당했다.
이벽의 아버지 이부만은 경주이씨 문중회의에 여러번 호출되어 「오랑케의 법도를 가르치는 斯文亂賊」을 족보에서 삭제하겠다는 위협을 받았다. 족보에서 삭제되면 양반의 지위를 잃고 관직에서도 추방되던 시절이었다. 이벽의 부친은 황해도병마절도사를 지냈고, 이벽의 형과 아우도 무과에 급제하여 무관직에 올라 있었다.
이부만은 드디어 대들보에 노끈을 걸어 목을 매달았다. 이벽은 아버지의 죽음을 건지기 위해 『그럼 안 나가겠습니다』라고 한발 물러섰다. 그리고는 식음을 전폐하고 자신의 방안에서 15일간 기도와 명상을 하다가 탈진해 죽었다. 1785년 음력 6월14일의 일로 향년 32세였다.
乙巳迫害의 회오리가 불긴 했지만 정약용 일가에는 별다른 타격이 없었다. 정조 13년(1789) 정약용은 文科에 2등으로 급제하고 그후 엘리트 관료로 한강 舟橋역사의 규제를 만들어 올림으로써 「正祖스쿨의 최우등생」이 되었다.
正祖 15년(1791) 珍山사건으로 進士 尹持忠(바오로)이 효수되고 권일신이 모진 고문을 받고 귀양가서 병사하는 辛亥迫害가 있었지만, 정조의 사랑을 받은 정약용은 출세의 길을 달렸다. 진산사건으로 순교한 윤지충은 정약용의 외사촌형이었다. 신해박해 이후 정약용은 천주교와의 관계를 청산했다. 정조 16년(1792) 정약용은 왕명을 받들어 華城城制를 지어올렸다. 수년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水原城의 설계도를 완성한 것이다.
1796년 화성이 준공되었는데, 거중기·녹로기 등의 이용으로 국고금 4만량이 節用된 것으로 평가받았다. 그는 36세 때 좌부승지가 되었으나 또다시 西敎문제로 攻西派의 탄핵을 받았다. 그래서 그는 천주교와의 관계를 해명하는 辨謗疏를 올리고 사직했다.
그런 그를 바로 몇 개월 뒤 谷山府使로 기용했다. 목민관으로 뛰어난 자질을 보인 그는 때마침 전국적으로 천연두가 창궐하자 「麻科會通」 12권을 지어 우리 역사상 처음으로 종두법을 소개했다. 천연두에 대해선 개인적인 회한도 있었다. 그는 슬하에 9남매를 두었으나 6명이 천연두를 앓다 죽었다. 정조 23년(1799) 그는 또다시 內職으로 돌아와 형조참의를 제수받았으나 반대파의 공세로 곧 물러나고 만다.
1800년 6월, 정약용을 「미래의 재상」으로 지목했던 正祖가 급사했다. 노론 벽派를 견제하기 위해 南人 時派를 옹호했던 正祖의 死因에 대해선 毒殺說이 끊임없이 거론되어 왔다. 어떻든 정조의 急死로 英祖의 繼妃이며 골수 노론벽派 가문 출신인 대왕대비 경주김씨 貞純王后가 12세의 純祖를 섭정하면서 垂簾聽政을 폈다.
이런 판에 정약용의 셋째형 若鍾이 신유년(1801) 1월19일 敎理書·聖具 등을 담은 책롱을 안전한 곳으로 운반하려다가 漢城府의 捕校에게 적발되었다. 2월9일, 이가환(前 공조판서), 이승훈(前 천안현감), 정약용을 국문하라는 司憲府의 臺啓(공소장)가 올라갔다.
<오호, 애통하옵니다. 이가환, 이승훈, 정약용의 죄악은 죽이기만하고 말겠습니까. …정약용은 본래 두 醜物(이가환·이승훈)과 한 뱃속이 되어 협력했습니다. 그의 자취가 이미 탄로되었을 때는 상소하여 다시는 믿지 않겠다고 입이 닳도록 맹세하였습니다. 그러나 몰래 요물을 맞아들이며 예전보다 더 심해졌으니 임금을 속였고…>
숙질간인 이가환과 이승훈은 죽임을 당했다. 정약용과 그의 둘째형 약전은 천주교와 관계를 청산한 정황이 있어 각각 멀리 귀양을 갔다. 정약용은 경상도 장기와 전라도 강진에서 18년간 귀양을 살면서 대작 「牧民心書」 등을 완성했다. 정약전은 유배지에서 玆山魚譜를 저술하고 귀양 17년째에 不歸의 客이 되었다. 세째형 정약종은 그의 장남 鐵相과 함께 西小門 밖에서 처형되었다. 淸國人 신부 周文模도 이때 자수하여 사형을 받았다. 이른바 辛酉迫害이다.
신유박해는 이 정도로 끝나지 않았다. 그 해 가을에 黃嗣永의 帛書사건이 일어났다. 백서사건이란 도피중이던 황사영이 중국에 있던 프랑스 선교사에게 흰 비단에 써서 보내려던 密書가 적발되어 빚어진 사건이다. 편지의 내용은 청국황제가 조선국왕에게 천주교도 박해 중지의 압력을 가하도록 선교사들이 개입해 달라는 청원이었다. 황사영은 즉각 체포되어 능지처참을 당했다. 황사영이라면 16세에 진사시에 장원급제한 秀才로서 정약용의 조카사위다.
광주-천진암 인터체인지를 빠져나가 45번 국도를 따라 3km쯤 가다 「윗도마치」 삼거리에서 308번 지방도로로 접어들면 팔당호의 남쪽 호면 위에 걸려 있는 그림같은 광동교를 만나게 된다. 광동교를 건너면 퇴촌우체국이며 여기서 광주산맥 앵자봉의 품속으로 파고드는 외가닥길을 25리쯤 달리면 천진암이다. 천진암 입구에서 성지안내소로 이르는 길의 이름이 俟菴路(사암로)이다. 사암이라면 바로 丁若鏞의 아호다.
천진암은 조그마한 암자가 있던 자리라고 하지만, 한국천주교에서 성지로 잡아놓은 면적은 약 30만평에 달한다. 한국천주교 창립 300주년인 2079년에 맞춰 준공 예정인 천진암 大聖堂은 일시에 3만명을 수용할 수 있는 기념비적인 건물이 되리라고 한다. 대성당 부지 위쪽으로 난 講學路로 접어들면 한국천주교 200주년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기념비 뒷면에는 「鹿菴權哲身墓地銘 巽菴丁若銓墓地銘抄」로 시작되어 「茶山丁若鏞作」으로 끝나는 205자의 한문이 새겨져 있다. 즉 다산이 지은 권철신과 정약전의 묘지명을 발췌·인용하여 한국천주교의 창립을 설명한 것이다.
여기서 산길소로를 20분쯤 오르면 옛 천진암 터가 있다. 천진암 터 주변은 현재 이벽, 이승훈, 권철신, 권일신, 정약종 등 「한국천주교의 창립선조」 5人의 묘역이 되어 있다. 옛 천진암 터 아래로는 1789년 강학회 멤버들이 아침마다 세수를 했다는 氷泉이 있다. 다산의 기록 그대로의 모습이다.
대성당 부지 동쪽 앵자봉 기슭에는 「조선교구 설립자 묘역」이 있는데, 정약용 집안의 가족묘지를 방불케 한다. 그곳에는 조선교구의 설립자이자 다산의 조카인 丁夏祥(1795-1839)의 묘가 있다. 정하상은 서소문에서 참수당한 정약종의 둘째아들로서 그 역시 38년 후 같은 장소에서 순교했다. 정하상 묘 바로 밑에는 정약용의 조부모·부모·정약전의 묘 그리고 이벽의 부모·동생부부·누이의 묘가 있다. 이런 의미에서 한국 초기 교회사는 정약용 가문의 가족사라고 해도 좋다.
茶山은 18년의 유배생활에서 풀려 마재로 돌아와서도 17년을 살고 憲宗 2년(1836) 75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당시의 내로다 하던 사람들은 그의 집 앞을 지나면서도 茶山을 외면했다. 그는 외로웠다. 그는 고독속에서 「欽欽新書」 30권, 「雅言覺非」 3권 등의 대작을 완성했다. 흔히 정치범에게 감옥은 대학원이라고 하지만, 다산 유배지 康津과 고향 마재야 말로 우리 역사상 최대의 학자이며 最多作 저술가를 위한 天賦的인 産室이었다.
Copyright ⓒ 정순태의 역사산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