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갑제닷컴 기사

열린당은 충무공을 모독하지 말라

글 鄭淳台 기자  2005-10-19

  • 페이스북
  • 트위터
  • 카카오톡
  • 글자 크게
  • 글자 작게
李충무공을 政爭에 끌어들이지 말라

鄭淳台 月刊朝鮮 편집위원

(이 글은 월간 '憲政' 10월호에 기고한 것입니다.)

아무나 ‘尙有十二’ 운운할 수 없는 까닭

집권당이 시도 때도 없이 ‘尙有十二(상유십이)’ 정신을 들먹거리며 李舜臣 장군을 모독하고 있다. ‘尙有十二’라면 “수군을 해체하여 육군에 편입하라”는 宣祖 임금의 엉뚱한 명령에 대해 李舜臣 장군의 “臣에게는 아직도 戰船 12척이 있으니 죽을 힘을 내어 항거해 싸우면…”이라는 내용의 狀啓(장계)에서 따온 말일 터이다.

열린당 지도부가 작년 언젠가 국가보안법 폐지를 위해 ‘충무공의 尙有十二’ 정신으로 똘똘 뭉치라고 외치더니만, 이번에는 李충무공의 戰勝유적지에다 소속 국회의원들을 집결시켜 놓고 ‘大聯政에 관한 대통령의 진정성’을 뒷받침하기 위해 ‘尙有十二’ 정신을 발휘하라고 독려했다.

2005년 정기국회를 앞두고 열린당 소속 의원들이 閑麗水道가 내려다보이는 통영의 무슨 호텔에서 ‘워크숍’이라는 이름의 단합대회를 한 것이야 누가 뭐라고 탓하겠는가. 단합대회의 뒷풀이로 소속 국회의원들이 임진왜란 최대 決戰의 해역을 건너 閑山島의 制勝堂과 忠武祠를 참배한 것은 오히려 잘한 일이었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인가. 그것은 李忠武公의 ‘尙有十二’ 정신을 ‘가슴에 새겨’ 추진하겠다는 그들의 이른바 ‘핵심과제’의 내용이다.
열린당 지도부는 아직도 대한민국의 적화를 포기한 바 없는 북한의 독재자 金正日에게 굴종하여 국가보안법을 폐지하려는 수단으로 李충무공의 ‘尙有十二’ 정신을 남용했다. 또한 民生문제 해결이 시급한 오늘의 상황에서 ‘지역구도 타파’라는 해묵은 名分을 내걸고 ‘大聯政’이란 미끼를 던진 盧武鉉 대통령의 정치적 도박을 정책과 입법으로 뒷받침하는 일에 ‘尙有十二’ 정신을 발휘하라고 독려했다.

열린당 의원 모임에선 ‘핵심과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지금이) 충무공의 지혜가 필요한 시점”이라고 하는가 하면 “145척(열린당 원내의석 145석을 뜻하는 듯)의 배가 일치단결해야 한다”는 등 기세를 올렸다. 이는 집권당 지도부가 정파적 이익을 위해 ‘尙有十二’의 정신을 훼손하는 일이다. ‘尙有十二’는 그 넉자에 內在된 이순신 장군의 絶對孤獨(절대고독)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운운할 수 없는 문자다.

必死的인 水軍 재건

이순신이 白衣從軍 중이던 1597년 7월16일의 칠천량해전에서 삼도수군통제사 元均이 지휘한 조선함대 180척이 왜군에게 궤멸당했다. 한산도의 통제사영도 왜군의 방화로 폐허화했다.

8월3일 통제사 再임명의 교지를 받은 이순신은 빠른 行步로 全南 일대 이곳저곳을 돌아 전라우수영에 도착한 데는 까닭이 있었다. 그것은 조선 수군을 재건하기 위한 必死的인 行步였다.

‘亂中日記’에 따르면 8월6일, 그는 玉果에 머물면서 일본군을 정탐하고 돌아온 휘하의 宋大立으로부터 敵情을 보고 받았다. 7일에는 順天으로 향하던 중 흩어져 후퇴하던 전라병사의 군사들로부터 말 세필과 활․ 화살 약간을 탈취했다. 8일에는 順天府로 들어가 버려져 있던 총통 등 중화기를 적에게 탈취당하지 않도록 일단 땅에 묻고 가벼운 長箭과 片箭은 수행 군관들에게 나누어 가지게 했다. 樂安을 거쳐 보성에 이르는 동안 순천부사 禹致績(우치적) 등이 합류했다. 이때 확보된 병력은 겨우 120명. 그래도 대부분 자원병이었다.

11일에는 임진왜란 초기부터 이순신을 수행했던 宋希立이 崔大晟과 함께 달려왔다. 12일엔 거제현령 安衛와 발포만호 蘇季男 등이 왔고, 13일에는 칠천량 패전 직후 가족과 함께 도망갔던 李夢龜도 나타났다. 15일엔 보성의 軍器를 검열했다. 16일엔 보성군수 등을 보내 피난갔던 관리들을 찾아오게 했다. 弓匠인 智伊와 太貴生도 이날 돌아왔다.

19일엔 會寧浦(회령포: 장흥군 회진리)에서 경상우수사 裵楔(배설)로부터 10여척의 軍船을 인수했다. 이 무렵, 海戰을 포기하고 陸戰을 도와도 좋다는 王命이 내려왔다. 바로 이런 결정적 위기에서 이순신은 ‘尙有十二’를 내세워 “臣이 죽지 않는 한 賊이 감히 우리를 업신여기지 못할 것”이라고 上奏했다.

그는 신념의 인간이었다. 조정에서는 이순신의 승전을 기대하지 않았다. 심지어 이순신에게 전선을 인계한 경상우수사 배설마저 이순신의 앞날엔 전혀 희망이 없다고 판단, 9월2일 야반도주를 해버렸다.
하지만 각처에 흩어져 있던 하급 장교나 병졸들은 속속 이순신의 휘하로 모여들었다. 피난민들도 이순신 휘하의 세력이 되었다. 특히 피난민 선단은 이순신의 함대에 군량을 지원하면서 이어 기술할 鳴梁海戰에서 ‘배후 함대세력’으로 위장, 왜군을 기만하는 역할을 감당한다.

이순신은 9월15일 휘하 지휘관들을 불러 모은 작전회의에서 빛나는 카리스마를 구사한다. 名將은 名言을 말한다.

“兵法에 ‘반드시 죽고자 하면 살고 살려고만 하면 죽는다(必死則生 必生則死)’고 했다. 또한 ‘한 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천 사람이라도 두렵게 한다’고 했다. 이런 말은 지금 우리를 두고 한 것이다. 너희 장수들이 살려는 생각은 하지 마라. 조금이라도 명령을 어기면 軍法으로 다스릴 것이다”

海南 우수영에서 진도대교를 건너 진도에 진입, 망금산 아래 ‘전주횟집’ 마당의 평상 위에 앉아서 관찰하면 세계 海戰史上 최대의 기적을 이룩한 명량해전의 현장이 일목요연하다.

명량수로의 길이는 약 2km, 가장 좁은 곳은 폭 300m, 최저 수심은 1.9m, 조류 속도는 11.5노트다. 마침 밀물 때라 東에서 西로 흐르는 조류가 거세다. 협수로 곳곳에서 거센 물살이 해저의 바윗돌에 부딪쳐 맥주거품처럼 부풀어 빠르게 흐르고 있다.

그렇다. 이곳이야 말로 서해 진출을 노리는 일본 함대를 막아야 했던 이순신에겐 오직 원 포인트(One Point)일 수밖에 없다. 軍事의 문외한이라도 이곳에 오기만 하면 이순신의 戰場 선택에 경의를 표할 수밖에 없다.

“安衛야, 네가 軍法에 죽고 싶으냐!”

명량해전 직전까지 이순신이 확보한 함대세력은 板屋船(판옥선) 13척과 哨探船(초탐선) 32척뿐이었다. 초탐선은 전력이 될 수 없다. 결전의 날인 9월16일. 이른 아침에 일본 함대 300여척이 명량 협수로에 접근했다.

일본 함대 지휘부는 대형 軍船인 아타케부네(安宅船)가 협수로를 통과하여 전투하기가 어렵다고 판단했다. 그들은 일단 中型 군선인 세키부네(關船) 133척으로 진형을 짜고 협수로를 통과, 이순신 함대의 一字陣을 향해 진격했다.

전투는 오전 11시경에 시작되었다. 세키부네 수십 척이 이순신이 좌승한 大將船을 여러 겹으로 둘러싸고 공격을 퍼부었다. 大將船만 각종 포와 화살을 난사하며 응전했다. 휘하의 나머지 판옥선들은 적의 척수와 기세에 눌려 뒤로 물러났다.

대장선은 일본 함대에 포위당한 채 상당시간 고군분투했다. 대장선이 위험에 빠지자 거제 현령 安衛의 판옥선이 다가왔다. 그 순간, 이순신은 다시 名言을 구사했다.

“安衛야, 네가 군법에 죽고 싶으냐? 도망간다고 해서 어디 가서 살 것 같으냐!”

安衛의 판옥선이 황급하게 일본 함대 속으로 돌진했다. 中軍將인 미조항 첨사 김응함의 판옥선도 가까이 왔다. 이순신은 김응함을 불러 이렇게 독전했다.

“네가 中軍으로서 멀리 피하여 대장을 구하지 않은 죄, 마땅히 참형에 처할 것이나 戰勢가 급하니 立功을 기다린다”

김응함과 安衛의 판옥선이 좌충우돌하자 나머지 판옥선 10척도 돌진하여 본격전인 접전이 벌어졌다. 판옥선은 일본의 戰船에 비해 구조가 튼튼한 데다 화력도 월등하다. 그러나 일본 함대는 數的으로 10배였던 만큼 먼저 돌격한 安衛의 전선이 적선의 포위공격으로 위기에 몰렸다.

그 순간, 高潮에서 잠시 멈췄던 조류가 돌연 정반대로 바뀌었다. 이번에는 이순신 함대에 유리한 南東流였다. 대장선을 비롯한 13척을 판옥선이 安衛의 전선을 구출하면서 잠깐 사이에 일본 군선 31척을 격파했다.

이 해전에서 유명짜한 해적 출신 장수로서 왜군의 선봉에 섰던 구루시마 미치후사(來島通總)을 사살하고, 그 시체를 바다에서 갈고리로 낚아 올려 토막을 내버렸다. 이에 일본군의 기세가 꺾여 버렸다. 이순신 함대 뒤편에는 수백 척의 배가 엄호하고 있지 않았는가(실은 피난민을 실은 피난선들이지만).

사무치도록 고독한 인간의 말 ‘必死則生’

이순신 함대의 강력한 반격으로 31척의 군선을 상실한 일본 함대는 일단 해전을 중지하고 퇴각했다. 이순신은 1597년 9월16일 일기 끝부분에 담담하게 ‘此實天幸’(이는 참으로 천행이다)이라고 썼다.

그러나 그것이 어찌 天幸만이겠는가? 미리 고뇌하지 않은 장수, 목숨을 걸지 않은 장수라면 어떻게 이같은 天幸을 바랄 수 있었겠는가. 명량해전의 패전으로 왜군은 南海에서 西海를 연결하는 보급로 확보에 실패했다. 적의 兵站線(병참선)을 거부한 이 한번의 싸움이야말로 朝明 연합군이 丁酉再亂에서 수도 漢城을 사수할 수 있었던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이순신 장군은 7년 전쟁 동안 중앙정부의 도움이 全無한 가운데 募兵, 屯田, 함선 건조, 무기개발, 함대 훈련, 피난민 구호를 도맡아 처리해야 했던 고독한 장수였다. 몸서리치도록 고독한 인간이 벼랑에 몰려 혼신의 힘을 모으면서 부르짖은 言表가 바로 ‘必死則生’이었다. 그는 자신의 한 목숨과 임진왜란 최후의 승리(1598년 11월19일 노량해전)를 맞바꾼 誠實無比(성실무비)의 提督(제독)이었다.

열린당은 145석을 확보한 원내 제1당이며, 항상 권력에 복무하는 지상파 방송과 언제든 홍위병처럼 동원 가능한 좌파 조직의 지원까지 누리는 집권당이다. 그런 열린당이 무엇이 부족해 ‘尙有十二’ 운운하는 것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는 열린당이 대한민국의 민족사적 정통성을 인정하고 북한 동포 구출을 위해 독재자 金正日에 당당히 맞서겠다는 의지를 보이기만 한다면 “열린당은 李舜臣 장군을 모독하지 말라”는 말을 즉각 취소할 용의가 있다.●
Copyright ⓒ 정순태의 역사산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