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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庾信과 그의 시대(1)

글 정순태 기자  2005-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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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깃과 벼리가 되겠다

신라 진평왕 51년(서기 629) 가을 8월. 이찬(신라 17관등 중 제2위) 任永里(임영리), 소판(제3위의 관등) 舒玄(서현), 파진찬(제4위의 관등) 龍春(용춘) 등은 왕명을 받고 고구려의 娘臂城(낭비성:지금의 충북 청주)을 공략한다. 그러나 고구려는 전통의 군사강국. 신라군은 오히려 역공을 받고 全軍(전군) 궤멸의 위기에 몰린다. 전사자가 속출하자 신라군은 戰意(전의)마저 잃고 만다.
이때 金庾信(김유신)은 中幢(중당)의 幢主(당주:지휘관)로 출전하고 있다. 중당은 三國史記 職官志(삼국사기 직관지)에는 나오지 않는 부대명으로 그 편제나 기능은 알 수 없지만, 관련 記事(기사)의 전후 문맥으로 미루어 별동 기동부대로 보인다. 당시 그의 계급은 副將軍(부장군). 그러니까 오늘날의 연대급 부대의 지휘관인 것 같다. 김유신은 그의 부친 서현 장군에게 나아가 말한다.
『옷깃(領)을 들어야 갖옷()이 바르게 되고, 벼리(鋼)를 당겨야 그물(網)이 펴진다고 합니다. 제가 옷깃과 벼리가 되겠습니다』
金庾信은 분연히 말에 올라 장검을 뽑아 든다. 그리고는 單騎(단기)로 참호를 뛰어넘어 적진 돌격을 감행한다. 軍心(군심)에 영향을 주는 勇士(용사)의 좌충우돌은 그가 누구든 절대로 그냥 놔둘 수 없다. 그것이 바로 戰場(전장)의 생리다. 賊將(적장)도 말을 달려 김유신의 앞을 가로막는다. 그러나 적장은 김유신의 交鋒(교봉) 상대가 되지 못한다.
적장의 목을 치고 軍旗(군기)를 탈취한 김유신의 분전. 바로 이 순간 신라군의 士氣(사기)가 하늘을 찌른다. 승세를 탄 신라군은 돌격을 감행한다. 이 돌격전에서 신라군은 고구려군 5천여명의 목을 베고 1천명을 사로잡는다. 성 안의 고구려 軍民(군민)들은 엄청난 逆戰(역전)의 사태에 모두 전율한다. 그래서 다투어 성문을 열고 나와 김유신의 말 앞에 무릎을 꿇고 만다.
이것은 三國史記 卷(권) 41 김유신 傳(전)에 기록되어 있는 낭비성 싸움의 전투상보(戰鬪詳報)다. 김유신은 戰場의 심리, 그리고 승패의 갈림길인 戰機(전기)를 꿰뚫어 보는 승부사였다. 스포츠에 비교한다면 전투는 일진일퇴를 거듭하며 한 점씩 득점하다가 시합 종료 호루라기 소리와 함께 승부가 결정되는 축구가 아니라 한순간에 일발 대역전을 연출하는 야구 경기다.
야구는 0대 3으로 뒤지고 있다가도 9회 말 공격에서 만루 홈런 한 방으로 대세를 뒤집는다. 야구 경기로 치자면 김유신은 9회 말에 역전 그랜드 슬럼을 기록한 셈이다.
삼국사기 등 史書(사서)에서 낭비성 전투 이전에 김유신이 전장에 출전했던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낭비성 전투 당시에 그의 나이 35세. 名將(명장)의 데뷔戰으로는 상당히 늦은 편이다.
그렇다고 15세에 이미 花郞(화랑)의 반열에 올랐던 김유신이 그후 20년간이나 한번도 전장에 출전하지 않다가 어느 날 갑자기 연대장급 고급 장교가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동안 그는 하급, 중급 지휘관으로 복무하면서 산전수전을 다 겪어왔던 것으로 인정된다.
『옷깃과 벼리가 되겠다』는 김유신의 말은 1898년 이집트 원정의 최대 고비였던 피라미드 전투에서 병사들을 격동시킨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名言(명언)과 좋은 대비가 된다.
나폴레옹은 저 멀리 보이는 기제의 피라미드를 가리키며 『4천년의 역사가 諸君(제군)들을 굽어보고 있다』고 외쳤다. 나폴레옹은 병사들의 명예심을 자극하는 선동 구호 한 마디로 이집트의 6만 대군을 격파했고, 김유신은 자기 한 몸을 死地(사지)로 던지는 언행일치로 절대절명의 敗勢(패세)를 勝勢(승세)로 뒤집어 놓았다.
나폴레옹의 레토릭은 그의 문학적 천재성을 과시라도 하려는 듯 화려하고, 김유신의 그것에는 인간적 고뇌와 성실성이 배어 있다. 나폴레옹이 「프랑스의 영광」 바로 그것이라면 김유신은 우리 역사에서 찾을 수 있는 한국적 자존심의 상징이다.
1796년 이탈리아 원정중의 아르콜레 會戰(회전)에서 나폴레옹은 奇策(기책)으로 전장의 교착 상태를 일거에 깨뜨려 버린다. 그는 해질 무렵, 오스트리아 軍 후방에 騎兵(기병) 50기(一說은 25기)를 가만히 우회시킨다. 그리고는 적 배후에서 돌격 나팔을 불도록 한다. 뜻밖의 나팔 소리에 오스트리아 軍 장병들은 일대 혼란에 빠져버린다.
그 순간 나폴레옹은 선두에서 말을 달려 정면 돌격을 감행했다. 아르콜레의 船橋(선교)가 오스트리아 軍의 포격에 명중되는 바람에 그는 추락하여 늪 속에 빠지면서 기절을 해버렸다.
그러나 사흘 동안 완강하게 버티던 오스트리아 軍 진지가 騎兵 50기의 배후 출현과 나폴레옹의 선두 돌격에 의한 프랑스 軍의 분발로 맥도 추지 못하고 붕괴했다. 이처럼 전장에서는 이론상 설명되기 어려운 상황이 전개된다. 김유신의 單騎(단기) 돌진도 바로 兵法(병법)에서 말하는 奇兵(기병)에 의한 戰場心理(전장심리)의 장악이었다.

金庾信 등장 직전의 삼국 쟁패전

낭비성 전투는 한반도의 중심부인 한강 유역의 헤게모니를 둘러싸고 격돌한 南進(남진) 세력과 北進 세력의 결전이었다. 또한 그 결과는 고구려군에 대한 신라군의 해묵은 열등감을 일거에 해소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김유신은 역사의 前面(전면)에 부상하게 되지만, 여기서 우리 역사상 최대의 전국시대로 돌입하는 과정을 잠시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4세기 말부터 6세기 초반에 이르기까지의 東아시아 세계에서 고구려가 군사 1류국이라면 신라는 3류국에 불과했다. 고구려는 심지어 신라의 왕위 계승 문제에 결정적 영향력을 행사할 만큼 정치적, 군사적 우위에 있었다. 예컨대 신라 21대 訥祗王(눌지왕:417~458)은 實聖王(실성왕)을 제거하고 왕위에 올랐는데, 그것은 고구려의 지원 때문이었다.
그러나 눌지왕 17년(433)에 이르면 신라는 백제와 우호 관계를 맺고, 차츰 고구려의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나기 시작한다. 475년 고구려 長壽王(장수왕)이 3만 병력을 투입하여 백제의 왕도 漢城(한성:서울 송파구 夢村土城 일대)을 포위했을 때 신라 慈悲王(자비왕)은 백제를 구원하기 위해 군사 1만을 급파했다. 신라의 구원군이 당도하기도 전에 한성이 함락되고 개로왕이 전사하기는 했지만, 이후 羅濟 군사동맹은 고구려의 남진을 저지하는 기본 틀이 되었다.
麗-濟 양국에 억눌려 오기만 했던 신라가 처음으로 攻勢(공세)로 전환했던 것은 진흥왕(540~576) 때였다. 진흥왕 11년(550)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가 일진일퇴의 전투를 벌이던 와중에 고구려의 金峴城(금현성:지금의 충북 진천)과 백제의 道薩城(도살성:지금의 충북 청주)을 탈취했다. 다음은 삼국사기 관련 기록의 요약.
「550년 봄 1월, 백제 聖王(성왕)이 장군 達己(달기)에게 兵 1만을 주어 고구려의 도살성을 공취했다. 그러자 고구려는 3월에 백제의 금현성을 攻陷(공함)했다. 제-려 양국 병이 사력을 다해 싸우매, 양편이 심히 피로해 있었다. 이를 틈탄 신라의 진흥왕이 장군 異斯夫(이사부)를 보내 도살, 금현 두 성내의 제-려 양군을 다 쫓아내고 성을 증축하여 甲士(갑사) 1천명씩을 배치하여 지키라 했다」
이같은 신라의 책략은 孫子兵法(손자병법)에서 말하는 以逸待勞(이일대로:충분한 휴식을 취한 병력으로써 피로한 적을 침), 바로 그것이다. 서기 208년 赤壁大戰(적벽대전)에서 孫權(손권) 軍이 사력을 다해 曹操(조조) 軍을 패퇴시키는 와중에서 쟁탈의 요충인 荊州(형주)를 劉備(유비) 軍의 모사 諸葛亮(제갈량)이 가로챈 것과 유사한 상황이다. 이후 魏(위), 蜀(촉), 吳(오)의 鼎立(정립)이라는 중국 역사상의 삼국시대가 전개되는 것이다.
신라의 경우 적국 고구려뿐만 아니라 동맹국 백제의 땅까지 횡탈했다. 그런데도 나-제 동맹 관계가 깨지지 않았던 것을 보면 신라의 외교적 승리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바로 다음해인 진흥왕 12년(551)에 신라는 백제와 연합하여 고구려의 10개 郡을 탈취했다. 백제의 聖王도 이때 왕조 발상지인 한강 하류 6개 郡을 탈환하여 蓋鹵王(개로왕)의 敗死(패사, 475년) 이래 처음으로 고구려에 설욕했다.
나-제 양군의 승리는 고구려의 내우외환을 효과적으로 이용한 결과였다. 551년 가을 7월 고구려는 新城(신성:오늘의 遼寧城 撫順) 쪽으로 침입해온 突厥(돌궐)을 방어하기 위해 한강 이남의 주력군을 남만주 지역으로 빼돌려놓은 상황이었다. 뿐만 아니라 陽原王(545~559) 代의 고구려는 왕위 계승 문제 등과 관련, 지배층 내부에 심각한 내분까지 빚어지고 있었다.
어떠한 군사 강국도 국내 정정이 불안한 가운데 二正面(2정면), 혹은 三正面 작전은 무리다. 이때의 고구려도 돌궐의 남침 상황에서 나-제 연합군의 협공을 받고 이렇다 할 방어전 한번 치르지 못하고 長壽王(413~491)代 이래 장악해 온 한반도 중부 지역에 대한 패권을 상실하고 만다.
고구려 勢가 물러난 한강 유역은 백제와 신라가 양분했다. 오늘날의 강원도를 포함한 한강 상류 지역은 신라가 차지하고, 하류 지역은 다시 백제의 영토가 된 것이다. 그러나 강 하나의 유역을 사이좋게 나눠 가진다는 것은 신라나 백제라는 두 고대국가가 지닌 속성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개념이었다. 더구나 백제가 탈환한 한강 하류 유역은 신라가 탈취한 상류 유역보다 전략적, 경제적 가치가 월등한 지역이었다.
원래 古代국가는 처음엔 사방 수십리도 되지 않는 城邑(성읍)국가에서 출발하여 주변의 고만고만한 성읍국가들을 하나하나 제압하면서 영토를 넓혀온 정복국가다. 고구려, 백제, 신라의 발전 과정이 모두 그러했다. 따라서 한강 유역의 헤게모니를 둘러싼 백제-신라의 격돌은 예정된 手順(수순)이었다. 이같은 대결을 예상한 聖王은 倭國(왜국)에 불교를 전하는 등의 외교적 노력으로 백제-왜의 동맹 관계를 심화시키고 있었다.

백제 聖王을 敗死시킨 김유신의 祖父

서기 433년 이래 1백20년간 계속되어 오던 신라-백제의 동맹 관계를 먼저 결정적으로 파기한 쪽은 신라였다. 그 무렵 백제의 성왕은 守勢(수세)에 몰린 고구려에 결정타를 가할 심산으로 지속적인 연합전선 형성에 의한 北侵(북침)을 신라측에 제의하고 있었다. 그러나 신라의 생각은 달랐다. 다음은 三國遺事(삼국유사)의 관련 기록.
「백제는 신라와 合兵(합병)하여 고구려 정벌을 도모했다. 그러나 진흥왕이 말하기를, 『국가의 존망은 하늘에 달려 있다. 하늘이 고구려를 미워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어찌 그것을 바랄 수 있겠는가』라고 했다」
이같은 진흥왕의 발언은 매우 정략적인 레토릭이었다. 쉽게 말하면 고구려 변경의 실속 없는 땅을 얼마 더 탈취하기보다는 백제가 고구려로부터 탈환한 한강 하류 유역이 목구멍에서 손이 나올 만큼 탐났다는 얘기다.
「국제정치(외교)엔 영원한 친구도 없고, 영원한 적도 없으며, 오직 국가이익만 있을 따름이다」--전성기 大英(대영)제국의 재상 팔머스톤 卿(경)이 갈파한 명언이다.
진흥왕의 속셈이야 어떠했든 위기에 몰린 고구려로서는 감지덕지할 수밖에 없었다. 삼국유사에는 「고구려 사람들이 진흥왕의 말을 전해 듣고 감동해 화친을 맺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신라로서는 백제와의 대결에 대비, 고구려로부터 최소한 好意的(호의적) 중립을 확보해 놓은 것이다.
이런 가운데 진흥왕 14년(553) 가을 7월, 신라군은 백제로부터 한강 하류 6개 군을 횡탈하여 新州(신주)를 설치했다. 이때 新州의 軍主(군주;管區사령관을 겸한 지방장관)에 武力(무력)이 기용되었다.
여기서 역사 무대에 처음 등장하는 武力은 532년 신라에 병합된 금관가야(金官伽倻:경남 김해)의 마지막 왕 仇衡(구형)의 아들로서, 바로 김유신의 祖父다. 망국의 왕자 출신이면서도 전략적으로 예민한 새 점령지의 지휘권을 장악했다는 점으로 미루어 보아 武力은 한강 하류 지역의 공취에 상당한 전공을 세운 것으로 짐작된다.
힘들게 수복한 故土(고토)를 횡탈당한 백제로선 신라에 대해 깊은 원한을 품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묘하게도 聖王은 그해 10월 왕자 餘昌(여창)을 장수로 삼아 일단 고구려를 공격한다. 고구려 쪽에 허점이 있었던 듯하다. 이때 전투 규모는 컸지만, 승패는 무승부였다.
聖王이 신라부터 응징하지 않고 고구려 남쪽 변경을 먼저 공격한 이유는 확실하지 않다. 원래 충분한 대비책을 세우고 경계심을 늦추지 않고 있는 적에 대한 공격은 下之下策(하지하책)이기는 하다. 어떻든 진흥왕 代의 신라군은 백제군 단독으로선 승전을 기약할 수 없을 만한 戰力(전력)을 보유했던 것 같다.
백제 성왕의 책략도 녹록치 않았다. 삼국사기 聖王 31년(553) 10월 條를 보면 백제는 고구려 공격전과 거의 동시에 聖王의 딸을 진흥왕의 小妃(소비)로 시집을 보내고 있다. 이같은 정략 결혼은 비수를 감춘 성왕의 위장 평화 공세였다.
이러는 동안 백제를 지원하기 위한 倭國(왜국)의 원병과 전쟁 물자가 속속 내도했다. 신라에게 합병의 압박을 받고 있던 大伽倻(대가야:경북 고령) 중심의 後期(후기) 가야연맹 諸國(제국)도 백제 진영에 가담했다. 성왕은 백제-가야-왜 연합군이 결성되자 왕자 餘昌을 장수로 삼아 회심의 신라 정벌전을 개시한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진흥왕 15년(554) 9월 백제군은 신라의 서부 국경에 침입하여 남녀 3만9천명을 포로로 잡고, 말 8천필을 탈취했다. 서전의 승리라 할 만하다.
그러나 백제로서는 불운했다. 원정군 최고 지휘관인 왕자 餘昌이 陣中(진중)에서 병을 얻었던 것이다.
백제의 불행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성왕이 아들의 급작스런 병을 걱정하여 불과 50기만 거느리고 백제군의 전선사령부가 설치된 管山城(관산성:지금의 충북 옥천)으로 달려가던 중 오늘날의 大田 동쪽 식장산에서 신라의 복병에 걸려 전사하는 사태가 벌어지고 말았다. 식장산은 경부고속도로를 타고 가면 大田 터널 남쪽으로 빤히 보이는 높이 5백98m짜리 험산이다. 백제 중흥의 英主(영주)로서는 너무도 허망한 죽음이었다.
성왕의 목을 벤 인물은 신라의 三年山城(삼년산성:지금의 충북 보은)의 高干(고간:신라 지방관직 10등급 중 제3위)인 都刀(도도)였다. 都刀는 바로 新州 軍主인 武力 휘하의 裨將(비장)이었다. 이때의 상황은 日本書紀(일본서기) 欽明(흠명) 15년(554) 12월 條의 기사가 가장 실감 있다.
「(전략) 얼마 후 都刀가 明王(명왕=성왕)을 사로잡았다. 두 번 절하고 왕의 머리를 베려 하니 明王이 꾸짖어 가로되 『종놈이 감히 왕의 목을 베려 하느냐』고 했다. 都刀가 말하기를, 『우리나라 법은 맹서를 위배하면 왕이라도 종놈의 손에 죽습니다』고 했다. 明王이 탄식하여 가로되, 『과인은 매양 너희 나라의 배신이 골수에 사무쳐 왔다』 하고 마침내 斬(참)을 당했다」
이어 벌어진 管山城 전투에서 金庾信의 조부인 武力의 전공은 발군이었다. 武力 휘하 신주의 州兵을 주력으로 한 신라군은 佐平(좌평:백제의 16관등 중 제1위) 4인을 포함한 백제-가야-왜 연합군 2만9천6백명을 참살했다. 이때 백제군의 최고 지휘관인 왕자 餘昌은 한 가닥 血路(혈로)를 뚫고 겨우 전장에서 이탈할 수 있었다. 다음은 이어지는 일본서기의 기록.
「餘昌이 포위를 당하여 탈출할 도리가 없었다. 筑紫國造(축자국조)가 활을 쏘아 신라 騎兵 중 최강의 자를 떨어뜨리고, 이어 비오듯 連射(연사)하여 포위군을 물리쳤으매, 여창과 諸將(제장)이 間道(사잇길)로 빠져 도망쳐 나왔다」
筑紫國造는 일본 규슈(九州) 츠쿠시(筑紫) 지방의 「쿠니노미얏고(國造)」, 즉 豪族(호족)이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이때 참전한 왜병은 1천명 정도였다니까 大勢(대세)에 영향을 줄 만한 규모는 아니었다.

국가적 결단의 중심에 서다

管山城 전투에서 죽을 목숨을 건진 왕자 餘昌이 전사한 聖王을 승계하니 그가 바로 백제 25대 威德王(위덕왕)이다. 관산성 전투는 신라-백제의 國軍(국운)을 판가름한 분수령이었다. 여기서 승세를 탄 신라군은 다시 西進(서진)하여 지금의 금산, 무주, 전주까지 공취하여 完山州(완산주)를 설치했다. 562년(진흥왕 23)에 이르러 드디어 신라는 대가야를 멸망시키고, 가야연맹의 全 영토를 병합했다.
이같은 진흥왕 代의 잇단 戰勝으로 신라의 국력은 일단 비약적으로 신장된다. 신라는 한강 유역과 낙동강 서쪽 지역(지금의 경남)의 비옥한 토지를 판도에 넣어 경제력이 급성장했을 뿐만 아니라 당시 선진 문화의 중심지였던 중국 대륙과 직접 연결되는 서해 항로의 요충인 黨項城(당항성:지금 경기도 남양)을 장악했다. 이것이 바로 신라가 삼국 통일을 할 수 있었던 도약대가 된다.
그로 인해 신라가 치러야 했던 代價(대가)도 국가의 존립이 위협받을 만큼 혹독했다. 그 이후 1백년간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의 숙적이 되어 끊임없이 협공을 받아 일방적인 守勢에 몰리고 만다. 한강 유역의 확보로 전선이 확대되었고, 그에 따라 고구려와 백제에 대한 2正面 작전이 불가피해졌던 것이다.
신라의 전통적 외교-안보 정책은 2대 1 전략이었다. 백제가 공세적일 때는 고구려의 지원을 받아 백제에 대항했고, 고구려의 南進(남진)이 강력할 때는 백제와 동맹 관계를 유지하여 죽령과 조령의 국경선을 굳세게 지켰다. 그러니까 삼국간 힘의 균형은 의외로 신라를 중심축으로 하여 움직여 온 셈이다. 바로 이런 점에서 신라의 외교는 탁월했다.
그러나 신라의 한강 하류 유역 진출 이래 고구려, 백제는 신라를 「오드 맨 아웃(Odd Man Out:셋 중 하나를 따돌림)게임의 술레로 삼았다. 삼국간의 전선이 개이빨(犬牙)처럼 맞물린 상황 아래 신라가 1(신라)대 2(고구려+백제) 대결이나 2正面 전투를 장기적으로 감당할 만한 국력에 이르지 못했음은 물론이다.
그런 신라가 삼국 통일을 이룩할 수 있었던 것은 위기 극복을 위한 내부적 단결과 급변하는 東아시아 정세를 능동적으로 활용한 외교력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때 중국 대륙에서는 3백50년에 걸친 대분열의 시대에 종지부를 찍고 통일 제국 隋(수)와 唐(당)의 시대가 차례로 전개된다.
중국의 통일 제국들이 구사하는 전통적 對外(대외) 정책은 팽창 전략이다. 신라가 隋-唐의 對外 정책을 어떻게 국가 이익에 활용했는지에 관해서는 뒤에서 다시 상술할 것이다.
그러나 삼국시대 말기는 우리 역사상 가장 치열했던 大戰亂期(대전란기). 먹거나 먹히는 판이니까 외교적 줄타기만으로 살아남을 수 있던 시대는 결코 아니었다. 이때 신라는 전쟁을 겁내지 않았고, 국가적 위기를 되레 기회로 삼았다.
한번 공격을 당하면 반드시 보복적 공격을 감행하여 失地(실지)를 되찾았다. 불가피한 전쟁은 항상 정당한 것이다. 이런 국가적 결심을 끌어가고, 또 뒷받침했던 인물이 金庾信이었다. 그는 후세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치열한 노력의 흔적을 남기고 있다.

後世人 감동시킨 자기 희생의 悲壯美

김유신은 押梁州(압량주:경북 경산)의 軍主로 있던 선덕여왕 13년(644)에 蘇判(소판:17관등 중 제3위)에 올랐다. 軍主라면 군관구사령관을 겸한 지방장관이다. 그때 그의 나이가 50세였으니까 급행열차를 탄 승진은 아니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그해 9월 왕은 그를 上將軍으로 임명하고, 군사를 주어 백제의 加兮城(가혜성), 省熱城(성열성), 同火城(동화성) 등의 일곱 성을 공략토록 했다. 가혜성 등의 위치는 알 수 없으나 당시 백제군이 전략적 요충 大耶城(대야성:지금의 경남 합천)을 공취하여 신라의 急所(급소)를 누르고 있었던 점 등으로 미루어 보아 낙동강 西岸(서안) 방면의 군사적 거점들이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故土(고토) 수복전에서 김유신은 대승을 거두고 가혜에 나루를 개설했다. 신라의 핵심 생산 기반은 낙동강 유역. 낙동강의 水路 개통은 신라 경제를 회생시킨 데 기여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때 신라가 낙동강 유역의 곡창을 확보하지 못했다면 이후 장기 동원전에서 군량을 확보할 수 없었을 것이다.
김유신은 이듬해(645) 정월에 개선했다. 그러나 미처 여왕을 알현하기도 전에 백제의 대군이 買利浦城(매리포성)을 공략한다는 급보가 날아들었다. 낙동강 상류 지역이 위험해진 것이었다.
왕은 다시 김유신에게 上州(상주:경북 尙州) 장군을 제수하고 방어전에 나서도록 했다. 王命(왕명)을 받은 김유신은 처자도 만나지 않고 즉각 전장으로 달려갔다. 그는 매리포 전선에서 백제군을 역습하여 패주시키고, 斬首(참수) 2천급의 전과를 거두었다.
유신은 3월에 개선하여 왕궁에 복명하고 아직 집으로 돌아가지도 못하던 참이었다. 백제의 대군이 다시 서부 국경 일대에 집결하여 신라를 공격하려 했다. 여왕은 다시 김유신에게 말한다.
『공은 수고를 마다하지 말고, 급히 나아가 적이 국경을 넘지 못하도록 대비하오』
이에 김유신은 역시 집에 들르지도 않고, 서부 전선으로 출정한다. 이때 그의 모습을 삼국사기는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庾信의 가족들은 모두 문 밖에 나와 그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유신은 집 앞을 지나면서도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그러다 집에서 50보 가량 떨어진 곳에 이르러서야 말을 멈추고 자기 집 우물 물을 떠오게 했다. 그는 그 물을 마시면서 말한다. 『우리 집의 물 맛이 아직도 옛 맛 그대로구나』 그때 병사들은 모두 말하기를, 『대장군이 저러한데 우리가 어찌 가족과 헤어지는 것을 한탄할 것이냐』고 했다」
이런 장수의 지휘를 받는 군단은 사기가 높을 수밖에 없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軍 복무규율에서도 「사기는 전투의 승패를 결정한다」고 적시하고 있다. 과연 김유신 軍이 국경에 이르자 백제군은 그 위용에 눌려 감히 접전을 벌여보지도 못하고 퇴각했다.
김유신은 자기 자신에게 매우 엄격했던 장수였다. 그렇다고 생사가 걸린 전쟁터로 나가면서 가족들의 마중까지 외면한 그의 태도가 반드시 盡善盡美(진선진미)한 것은 아니다.
김유신의 동생 欽純(흠순) 역시 出將入相(출장입상:나가서도 장수가 되고 들어와서는 재상이 됨)의 인물이었지만, 세 살 위의 형 유신과는 사뭇 대조적이다. 다음은 筆寫本(필사본) 花郞世記(화랑세기)의 기록.
「欽純公은 항상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국가에 공을 세울 수 있었던 것은 아내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유신공은 큰일이 있으면 대문 앞을 지나치면서도 들어가지 않았는데, 흠순공은 큰일이 있으면 반드시 먼저 집에 들러 寶丹娘主(보단낭주:흠순의 부인)와 더불어 얘기를 한 후 다시 나왔다」
흠순은 당대 최고의 애처가였다. 다음은 필사본 화랑세기에 기록된 일화.
「欽純公은 젊어서부터 술을 좋아하여 낭주가 직접 술을 빚어 다락 위에 두고 公이 술을 찾으면 내오곤 했다. 하루는 흠순공이 술을 마시고자 하여 보단낭주가 술을 가지러 다락 위에 올라갔다. 그러나 한참 지나도록 내려오지 않자 흠순공이 이상하게 생각하고 다락 위에 올라가 보니, 큰 뱀이 술 항아리에 들어가 취해 있는 것이었다. 보단낭주는 이를 보고 놀라 쓰러져 일어날 줄 몰랐고, 이에 흠순공이 보단낭주를 업고 내려왔다. 그 일이 있은 후로는 흠순공이 다시는 술을 마시지 않았다」
흠순의 아내 사랑은 현대적 감각으로도 백점 만점을 받을 만하다. 김유신에겐 이런 가정적인 아기자기함이 없었다. 그렇지만 이러한 김유신의 先公後私(선공후사)가 결코 가볍게 평가될 수는 없다.
김유신은 楚漢戰(초한전)의 영웅 韓信(한신)을 웃도는 戰必勝 功必取(전필승 공필취:한신의 功業에 대한 史記의 표현), 즉 싸우면 반드시 이기고 반드시 공을 세우는 常勝將軍(상승장군)이었다. 세계의 戰史上(전사상) 장장 50년간의 세월에 걸쳐 대소 수십 번의 전투를 치르면서 무패를 기록한 장수는 김유신을 제외하면 발견할 수 없다.
김유신의 언행 하나하나를 음미해 보면 자기 희생의 悲壯美(비장미)를 느낄 수 있다. 그는 국가적 위기를 온 몸을 던져 타개했던 인물이다.
우리 민족은 신라 통일 이래 하나로 융합되었다. 삼국 통일 최고의 元勳(원훈)은 김유신이다. 그렇다면 김유신은 우리 민족사에서 최고의 인물 중 하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유신에 대한 그 후예들의 평가는 엇갈리고 있다. 때로는 모욕적이기까지 하다.

興武大王으로 추존된 까닭

「대개 김유신은 智勇(지용)이 있는 名將(명장)이 아니오, 陰險鷲悍(음험취한:음흉하고 독살스러움)한 정치가이며, 그 평생의 大功(대공)이 전장에 있지 않고 음모로 隣國(인국:이웃나라)을 亂(난:어지럽힘)한 자이다」
김유신에 대한 丹齋(단재) 신채호(1880~1936)의 평가는 이처럼 혹독하다. 왜일까? 삼국 통일에 대한 단재의 시각에서 그 배경이 드러난다.
「異種(이종:당나라)을 招(초:불러들임)하여 동족(고구려, 백제)을 멸함은 寇賊(구적:도둑)을 引(인:끌어들임)하여 형제를 殺(살)함과 無異(무이:다름없음)하다」
이같은 단재의 인식은 후학들에게도 심대한 영향을 주었다. 예컨대 사학자 孫晉泰(손진태)는 그의 國史講話(국사강화, 1950)에서 신라의 삼국 통일을 다음과 같이 논죄했다.
「신라로 하여금 외민족의 병력을 빌려서 동족의 국가를 망하게 한 것은 貴族國家(귀족국가)가 가진 본질적 죄악이요, 그로 말미암아 민족의 무대가 좁아졌다」
북한의 사회과학출판사에서 편찬한 「고구려 역사」도 다음의 구절로 결론을 삼고 있다.
「만일 삼국시기에 고구려, 신라, 백제, 세 나라가 단합하여 외래 침략자들과 맞서 싸웠더라면 외래 침략자들은 우리 조국 강토에 한 걸음도 기어들지 못하였을 것이며, 세 나라는 통합되어 우리 조국은 더욱 발전하였을 것이다」
북한은 우리 민족사의 흐름을 단군조선-삼국시대-남북국시대(신라, 발해)-고려-조선-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삼고 있다. 따라서 그들은 신라의 삼국 통일을 부인하고 「국토의 남부 통합」이란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북한의 「조선전사」를 보면 그들은 민족사의 정통성을 단군조선-고구려-발해에서 찾고 있다. 이 책에선 민족사의 주요 대목 대목마다 김일성 나름의 해석이나 교시를 본문의 書體(서체)보다 크고 굵은 고딕체로 특필하고 있는데, 특히 고구려 중심주의에 대한 강조가 두드러지게 많다.
「조선전사」에는 辛未洋擾(신미양요) 때 김일성의 조부가 義兵將(의병장)으로 출전, 불배(火船) 공격으로 대동강을 침범한 제너럴 셔먼호를 침몰시켰다는 둥 허구의 사실도 기록되어 있다. 북한의 이데올로그(理論家)들은 민족사를 북한 주도의 통일전선에 복무할 수 있도록 변조해 왔다. 따라서 북한의 史觀(사관)은 원천적으로 설득력을 확보하기 어렵다.
오늘날 우리가 극복해야 할 것은 오히려 丹齋의 시각이다. 그것은 一刀兩斷(일도양단)의 裁斷(재단)인 만큼 단순논리의 일반 정서에 영합하는 측면이 강하기 때문이다. 이런 오늘의 문제를 풀어가려면 우선은 김유신, 나아가 그가 주도한 삼국 통일에 대한 先人(선인)들의 인식부터 꼼꼼하게 되짚어 볼 필요가 있다.
「삼국사기」 神文王(신문왕) 12년(692) 條 기사는 그와 관련, 우리에게 중대한 시사를 던져 주고 있다. 그 시점의 羅-唐 관계는 국교 단절의 상태였다. 羅-唐 양국은 백제, 고구려의 패망 후 점령지 분할 문제로 충돌, 8년 전쟁을 벌였다.
8년 전쟁에서 신라군에 패한 唐軍은 遼東(요동) 방면으로 물러났으나 대동강 이남의 점령지에 대한 신라의 통치권을 인정하지 않고 있었다. 이런 국제 정세 속에서 唐의 中宗은 사신을 보내 신라 조정에 시비를 건다.
「우리 太宗 文皇帝(태종 문황제=李世民)는 功德(공덕)이 千古에 뛰어났으니, 붕어하던 날 廟號(묘호)를 太宗이라고 했다. 그런데 신라의 先王(선왕=김춘추)에게도 동일한 廟號를 쓴 것은 매우 참람한 일이니, 조속히 고쳐야 할 것이다」
이에 신문왕이 응수한다.
「생각건대 우리 先王도 자못 어진 덕이 있었으며, 생전에 良臣(어진 신하) 金庾信을 얻어 同心爲政(동심위정:한 마음으로 정치를 함)으로 一統三韓(일통삼한)을 이루었으니, 그 功業이 크지 않다고 할 수 없다」
신라는 끝내 김춘추의 묘호인 太宗을 포기하지 않았다. 신문왕 이후 孝昭王(효소왕) 代에 이르러 羅-唐 관계가 개선되고, 다시 聖德王 대에 이르러 완전한 관계 정상화가 이뤄지지만, 당은 신라에 대해 더 이상 廟號 시비를 걸지 못한다.
묘호란 한 왕조의 시조와 조상을 모시는 祖廟(조묘)의 제사 절차에 맞추어 先代 임금에 대해 그 후계자가 붙여 주는 尊號(존호)다. 그런데 太宗이라면 創業(창업)의 君主인 太祖(혹은 高祖) 이후 治積(치적)이 가장 뛰어난 임금에게 올리는 묘호다.
예컨대 唐 태종(李世民), 宋 태종(趙匡義), 淸 태종(洪太始)의 경우가 모두 그렇다. 그들은 그 왕조의 가장 유능했던 守成(수성)의 군주였을 뿐만 아니라 그 왕조의 創業에도 太祖 이상의 결정적 역할을 했던 인물들이다.
이런 典範(전범)을 처음으로 확립한 唐 왕조에서 太宗의 의미는 각별했고, 그 독창성을 독점하려는 욕망이 대단했다. 그런 당의 대국주의적 발상이야 어떻든 廟號 시비에 당면한 신라 조정의 태도는 당당함 그대로다.
여기서 주목되는 또 한 가지는 「良臣 김유신을 얻어 同心爲政으로 一統三韓을 이룩했다」는 대목이다. 즉 신라의 삼국 통일은 김춘추-김유신의 同業(동업)에 의한 것이라는 대내외적 선언이다. 김유신이 人臣(인신)의 몸으로 우리 민족사상 前無後無(전무후무)하게 興武大王(흥무대왕)으로 추존된 것은 다 그만한 까닭이 있었기 때문이다.

꼴 베는 아이나 소 먹이는 아이도 안다

그렇다면 김유신에 대한 고려 시대 사람들의 인식은 어떠했던가? 「삼국사기」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庾信 같은 사람은 온 나라 사람들의 칭송이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사대부가 그를 아는 것은 그럴 수 있는 일이거니와 꼴 베는 아이나 소 먹이는 아이에 이르기까지 그를 알고 있으니, 그 사람됨이 틀림없이 보통사람과 다른 점이 있었을 것이다」
이런 김유신에 대해 단재는 왜 筆誅(필주)를 가한 것일까? 신라의 삼국 통일을 민족사적 죄악으로 매도한 단재의 인식은 정당한 것인가? 이에 대한 명쾌한 부정이 없는 한 우리의 민족적 전통성은 여지없이 훼손당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단재의 史觀은 그 자신이 지닌 인간적 카리스마로 인해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기 때문이다.
단재는 필봉 하나로 일본 제국주의와 앞장서 싸운 우리 초창기 언론계의 巨木이며, 우리의 民族史觀(민족사관)을 세운 우리 민족사학계의 선구자다. 國權(국권) 상실 후 그는 중국에 망명하여 상해와 북경 등지에서 독립운동을 벌이다가 일본 관헌에게 체포되어 旅順(여순)감옥에서 복역중 순국한 대표적 애국지사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재의 도덕적 秀越性(수월성) 때문에 그의 역사 인식까지 無誤謬(무오류)의 聖域(성역)으로 받들 수는 없다. 신라의 삼국 통일에 관한 단재의 인식은 국권상실기에 외세 배격의 차원에서 이해될 수 있는 일면이 없었다고 할 수 없지만, 오늘의 한국인이 수용하기에는 自虐的(자학적)이며 自己否定的(자기부정적)이다.
역사를 我(나)와 非我(남)의 투쟁으로 판단한 단재의 인식 역시 인류사를 꿰뚫어 본 예리함은 인정되지만, 그것을 오늘의 우리가 외골수로 추종할 경우 민족의 생존을 기약하기 어려운 측면도 없지 않다. 단재는 세수를 할 때 항상 고개를 빳빳하게 들고 했다는 일화를 남긴 인물이다. 세수하면서 잠시 머리를 숙이는 것조차 굴종으로 생각했던 선비였다. 그 때문에 그의 옷섶은 항상 세숫물로 홍건히 젖었지만, 전혀 개의치 않았다고 한다.
역사는 과거 사실에 대한 오늘의 해석이다. 이제 우리는 儒學的(유학적) 가치관을 지닌 金富軾(김부식)도, 국권 상실기의 志士(지사) 신채호도 아닌, 21세기 로 접어든 한국인의 입장에서 김유신과 그의 시대를 재해석해야 할 과제를 갖고 있다.

신라의 삼국 통일은 민족의 재통일 아닌 민족사 최초의 통일

신라의 삼국 통일은 과연 외세에 의존하여 동족의 국가를 망하게 한 것인가? 근대적 정치이념인 민족주의의 잣대로 羅-唐 연합군의 백제, 고구려 정복을 재단할 수 있는가? 신라의 삼국 통일로 민족의 무대가 좁아졌고, 그것이 민족의 약체화를 초래하여 마침내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가 되었다는 논리는 정당한 것인가?
결론부터 말하면 신라는 외세에 의존한 것이 아니라 외세를 활용하여 삼국 통일을 달성했고, 그것은 우리 민족 형성의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신라는 민족의 재통일이 아니라 민족사 최초의 통일을 달성했던 것이다.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 사람들은 알타이語를 사용했으니까 서로 親緣性(친연성)은 느꼈겠지만, 동족 의식은 아직 형성되지 않았다.
고구려는 외교력의 미숙으로 東아시아의 슈퍼 파워로 등장한 唐과의 관계 설정에 실패했을 뿐만 아니라 내부 분열로 자멸을 길을 걷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고구려는 羅-唐 연합군에 의해 수도 평양이 함락되기 2년 전(666년)에 이미 만주 영토의 지배권을 사실상 상실했다. 따라서 「만약 고구려가 삼국을 통일했다면」이라는 발상은 당시의 국제 정치 상황을 무시한 가상 시나리오에 불과하다.
백제, 고구려의 멸망 후 신라가 對唐 전쟁에서 승리하지 못했다면 한반도엔 漢四郡(한4군)이 아닌 唐三郡(고구려군, 백제군, 신라군)이 들어섰을 것이다. 예컨대 우리와 地政學的(지정학적) 유사성을 지닌 베트남의 경우 漢 武帝(한 무제)의 침략 이래 1천년간 중국의 직할 통치를 받았다.
베트남이 직할 통치를 받았다는 것은 식민지가 되었다는 얘기지만, 신라가 중국의 朝貢冊封(조공책봉) 체제에 들어갔다는 것은 당시의 東아시아 질서 속에서 국가 이익을 확보하는 수단이었다. 그것은 팍스 아메리카(Pax Americana) 시대에 영국이나 일본이 미국의 식민지가 아닌 것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
민족의 흥망성쇠는 순환 법칙이라도 있는 듯 돌고 돈다. 로마제국은 세계사에 빛나지만, 그 후예들의 역사는 실로 오랜 세월에 걸쳐 굴욕적이었다. 西로마제국이 475년 게르만族 용병대장 오도아케르에게 멸망당한 이후 이탈리아인들은 1천4백년 동안 한번도 민족의 재통일을 이룩하지 못하고 外勢(외세)에 의해 이탈리아 반도의 운명이 좌지우지되었던 것이다.
그런 이탈리아인들이 1860년에 피에몽트 왕국의 주도로 리소르지멘토(Risorgimento=再生, 즉 이탈리아의 재통일)를 완성하면서 사보아와 니스 지방을 프랑스에 할양했다. 사보아와 니스라면 바로 리소르지멘토의 주체 세력인 피에몽트 王家(왕가)의 발상지다.
피에몽트는 이탈리아 북부와 중부 지방을 지배하던 오스트리아의 점령군을 격퇴하기 위해 나폴레옹 3세의 외교적 지원을 받았다. 영토 할양은 바로 그에 대한 代價였다. 이같은 영토 할양을 주도한 피에몽트의 수상 카부르는 리소르지멘토의 3傑(걸) 중에서도 첫째 인물로 손꼽히고 있다.

국제 관계에선 공짜가 없다

이렇듯 국제 관계에선 공짜가 없다. 신라도 唐과 연합하여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켰으니까 대가를 唐에게 지불해야 했다. 그러나 唐이 요구하는 대가가 너무 비쌌기 때문에 신라는 唐을 상대로 8년 전쟁을 감행했다. 그 결과 신라가 백제 영토의 전부와 대동강 이남 고구려의 땅을 차지했다. 그것은 당시의 국제적 힘 관계로 미루어 신라의 승리라고 해도 전혀 어색하지 않다.
고구려가 멸망된 지 30년 만인 698년에 고구려의 만주 故土(고토)에 건국되어 고구려의 후계국임을 선언한 渤海(발해)의 존재는 통일신라의 민족사적 자리매김에 영향을 주는 역사적 실체다. 발해는 고구려의 舊將(구장) 大祚榮(대조영)이 건국, 거란족 국가 遼(요)에 멸망당하기까지 2백여년간 번영한 국가인 만큼 민족사의 영역으로 끌어들이는 것은 당연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라-발해를 묶어 南北國(남북국)시대라고 하기엔 떨떠름하다. 왜냐하면 발해의 민족 구성 때문이다. 현재까지의 연구로는 발해를 구성했던 다수 민족은 靺鞨(말갈)이다. 대조영까지도 말갈 출신이라고 보는 연구자들도 적지 않다.
말갈이라면 고구려의 附庸(부용) 종족이었다. 「삼국사기」를 보면 고구려의 멸망 직전까지 말갈 軍은 고구려의 동맹 세력으로서 신라의 변경을 침입하거나 唐軍과 싸우고 있다. 원래 말갈은 肅愼(숙신), 勿吉(물길)로 불리던 족속이다. 이런 말갈은 고려 이후엔 女眞(여진)이라고 불리게 되었으며, 그런 여진족이 세운 金과 淸은 중국 대륙의 절반 또는 전부를 차지한 정복국가가 되었다.
중국에서 「金史」는 그들의 正史(정사)인 24史 중 하나이며, 특히 淸의 경우 중국 역사상 그 영토가 가장 광대했던 정통 왕조로 평가되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지금 중국의 역사학계는 발해를 唐 제국 시기의 지방정권으로 취급하고 있다.
어떻든 통일신라를 부정하고 신라-발해의 남북국시대를 설정하려면 발해국 구성에 있어 다수 종족이던 말갈과 親緣性이 깊은 여진족의 정복왕조 金과 淸을 우리 민족사에서 어떻게 다룰 것인가 하는 문제도 아울러 검토되어야 할 것이다.
발해는 고려 시대의 官撰 史書(관찬 사서)인 「삼국사기」에서 우리 민족사의 정통 국가로 인정받지 못했다. 그것은 고려의 국력이 약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도 있다. 말갈의 後身(후신)인 여진족이 세운 金이 한창 흥기하여 遼를 멸망시키고 중국 대륙 절반을 정복한 정세 속에서 말갈이 다수 종족이었던 발해를 우리 민족사의 영역에 끌어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삼국 통일의 민족사적 의의에 대해서는 앞으로 이 글에서 더욱 심도있게 거론될 것이다. 다만 여기서 간단하게나마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는 대목 하나가 있다. 신라의 삼국 통일로 백성들의 삶이 과연 나아졌느냐 하는 점이다. 그렇지 못했다면 삼국 통일은 민족사의 발전에 아무런 의미가 없다.
신라의 삼국 통일은 죽은 자의 해골이 山河(산하)를 뒤덮었던 3백년 전쟁에 마침표를 찍고, 그후 2백년간 대평화의 시대를 창출했다. 이것 하나만으로도 삼국 통일은 우리 민족사 최대의 역사 발전이었다. 對唐 전쟁의 승리로 삼국 통일을 완수한 文武王(문무왕) 金法敏(김법민)은 681년 가을 7월1일 임종의 자리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兵器(병기)를 녹여 農器(농기)를 만들게 해서 백성들로 하여금 天壽(천수)를 다하도록 했으며, 납세와 부역을 줄여 집집마다 넉넉하고 사람마다 풍족하여 백성들은 제 집을 편안히 여기고, 나라에는 근심이 없어졌다」
이같은 문무왕의 自負(자부)는 단순한 修辭(수사)가 아니다. 통일신라에서는 하층 계급인 1, 2두품의 신분이 철폐되었다. 이는 下戶(하호)의 사회경제적 위치가 격상되었다는 얘기다. 그리고 분명한 것은 고구려, 백제 귀족의 몰락으로 坐食者(좌식자), 즉 일하지 않고 놀고 먹는 계층의 수가 줄어들었다는 점이다. 「三國志」(삼국지) 卷 30 東夷(동이) 고구려 傳에 따르면 고구려의 경우 그런 坐食者가 인구의 3분의 1에 달했다.
특히 중국대륙의 唐, 한반도의 통일신라, 일본열도의 나라(奈良)-헤이안(平安) 시대로 대표되는 이 시기의 東아시아는 역사상 유례가 없는 밀접한 상호 교류를 통해 공동 번영의 시대를 구가했다. 唐은 중국대륙에서 명멸한 숱한 왕조들 중 가장 개방적인 세계국가였다. 통일신라는 「팍스 唐」의 국제질서를 활용, 우리 민족 문화를 한 단계 끌어올린 역사적 공적을 남겼다.
백성들이 누리는 삶의 질은 영토의 크기나 인구수에 비례하지 않는다. 오늘날 중화인민공화국은 대한민국(남한)에 비해 인구가 29배, 영토가 1백 배에 달한다. 그럼에도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오늘의 중국에 대해 열등감을 가지거나 부러워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따라서 신라의 삼국 통일이 민족의 약체화를 초래했다는 발상법은 출발점부터 빗나간 인식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오늘날 서울의 하늘 밑에서 김유신을 논죄하는 일이 마치 지성적인 것처럼 誤導(오도)되고 있다. 이제는 이런 돌림병에 대한 우리의 입장을 정리할 차례다.

군인에게 聖職者의 덕목을 요구

앞에서도 썼지만, 丹齋는 김유신을 「음험하고 표독한 정치가」라고 매도했다. 그런데 現傳(현전)하는 史料(사료) 어디에도 김유신이 그런 혐의를 뒤집어쓸 만한 대목은 한 군데도 없다. 단재는 국가의 의지를 전쟁을 통해 관철해야 했던 군인 김유신에게 宗敎家(종교가)에게 필요한 덕목을 요구했다.
국가의 命運(명운)을 한 손에 거머쥔 將帥(장수)는 적을 속여야 싸움에서 이길 수 있다. 그래서 兵不厭詐(병불염사:兵家에선 계교로써 적을 속이기를 주저하지 아니함)는 將의 상식이다. 오늘날 소총소대의 분대장에게도 企圖秘匿(기도비익), 즉 적에게 아군의 의도를 감추는 것은 기본적인 心得(심득) 사항에 속한다.
1805년 12월 비엔나 북방 아우스터리츠 전투를 앞두고 나폴레옹은 적측인 러시아-오스트리아 연합군을 철저하게 기만한다. 심지어 두 제국 황제가 보낸 항복 권유 사절에게 대해 나폴레옹은 프랑스 軍의 弱勢(약세)를 인정하는 고뇌의 演技(연기)까지 구사했다. 김유신은 국가 목표 달성을 위해 적군뿐만 아니라 아군까지 속였던 병법가였다. 다음은 「삼국사기」 관련 기사.
「이때 유신은 押梁州(압량주:경북 경산) 軍主로 있었다. 그는 軍務(군무)에는 아무런 뜻이 없는 것처럼 술을 마시고 풍악을 울리며 수개월을 지냈다. 고을 사람들은 유신을 용렬한 장수라고 여기면서 『백성들이 편하게 생활한 지가 오래되었으므로 힘의 여유가 있어 한바탕 싸울 만한데, 장군이 저렇게 나태하니 이 일을 어찌할까?』라고 비방했다」
진덕여왕 2년(648)에 김유신은 6년 전 백제에게 빼앗긴 전략적 요충 大耶城(대야성:지금의 경남 합천)을 탈환하라는 왕명을 받고도 짐짓 군무를 태만히 했다. 적을 방심시키려면 아군부터 속여야 하는 것이 병법의 요체. 왜냐하면 적군도 아군이 속지 않는 일에 속아넘어가는 바보가 아니기 때문이다. 백제군의 경계가 소홀해졌다. 그제서야 김유신은 진덕여왕에게 나아가 말한다.
『민심을 살펴보니 이제 일을 할 만합니다. 청컨대 백제를 쳐서 大梁州(대량주=대야성)의 원수를 갚으십시오』
여왕이 걱정한다.
『작은 것으로 큰 것을 건드리면 그 위태로움은 어찌할 것인가?』
유신이 대답한다.
『전쟁의 승부는 세력의 크고 작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민심에 좌우되는 것입니다. 紂(주=殷의 마지막 임금)에게는 억조의 백성이 있었으나, 인심이 떠나고 德을 잃어 周(주)의 열 명의 신하가 한 마음 한 뜻을 가진 것만 못하였습니다. 지금 우리는 한 뜻이 되어 생사를 같이 할 수 있으니 저 백제쯤은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이에 진덕여왕은 출정을 허락한다. 김유신은 각 주의 병사(지방군)를 선발하여 조련시켰다. 그는 王京 출신 병사보다 시골 출신의 순박한 병사야말로 정예병으로 다듬기 쉽다는 묘리를 이미 터득한 장수였다.
드디어 김유신 군은 대야성을 향해 진군한다. 대야성의 백제군도 성 밖에 진을 치고 역공을 감행한다. 김유신은 짐짓 파탄을 보이며 패주한다. 백제군은 大兵(대병)을 휘몰아 신라군을 추격했다.
輕敵必敗(경적필패), 즉 적을 얕잡아보면 반드시 패하게 마련이다. 추격하던 백제군이 玉門谷(옥문곡)에서 신라의 伏兵(복병)에 걸려 대패하고 만다. 이때 김유신 軍은 백제군 장군 8명을 사로잡고, 군사 1천명의 목을 베었다.
승세를 탄 김유신 軍은 다시 백제 경내로 진격하여 嶽城(악성) 등 12개 성을 함락시키고, 백제군 2만명을 베고 9천명을 사로잡는 대승을 거뒀다. 이같은 전공을 세운 김유신에 대해 진덕여왕은 이찬(제2위의 관등)의 작위를 내리고, 上州行軍大摠管(상주행군대총관)으로 삼았다. 이에 다시 김유신은 백제의 進禮(진례) 등 9성을 공취하고 9천명의 머리를 베었다.
전쟁은 인간을 삼키는 악마다. 적의 주력을 섬멸하지 않는 한 승리는 없다. 나폴레옹은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 러시아-오스트리아 동맹군을 死地(사지)로 유인하여 측면공격으로 2만명을 죽이고 3만명을 생포했다. 그리고는 실로 현란한 연설을 했다.
『병사들이여, 나는 그대들에게 만족하노라. 아우스터리츠의 하루 동안 그대들은 내가 기대한 대로 대담한 용맹을 발휘했다. (중략) 병사들이여, 나의 민중들은 그대들을 기쁘게 맞을 것이다. 그대들이 「나는 아우스터리츠 전투에 참전했다」고 말하기만 하면 프랑스 민중들은 「여기 용감한 인간이 있다」고 대답하리라』
대야성 탈환 전투에서 김유신도 백제군 장군 8명을 포함한 포로 9천명, 참수 3만명이라는 대전과를 기록했다. 이같은 그의 전적만 보더라도 「김유신은 智勇이 있는 명장이 아니다」라는 단재의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다만 승전 후 김유신의 연설문만 역사에서 失傳(실전)되었을 따름이다.

유능한 장수는 謀略과 用間으로 이긴다

김유신에 대해 「평생의 大功이 전장에 있지 않고 음모로써 隣國을 亂한 者」라는 단재의 평가 역시 장수의 德目(덕목)이 무엇인지를 고려하지 않은 속단이다.
孫子兵法(손자병법)에서는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을 上之上策(상지상책)으로 규정하고 있다. 유능한 장수의 전투 행위는 이미 이겨놓은 상황을 확인하는 절차에 다름 아닌 것이다. 따라서 장수는 적국에 간첩을 심어 내부 분열 또는 혼란을 유도한다. 이것이 단재가 말하는 「음모」라면 그런 「음모」에 능숙하면 능숙할수록 名將이라고 해야 한다. 다음은 「삼국사기」 김유신 傳 중 관련 기사의 요약.
급찬(신라의 관등 제9위) 租未押(조미압)이 夫山(부산) 현령으로 있다가 백제로 잡혀가서 좌평(백제의 관등 제1위) 任子(임자)의 종이 되었다. 그는 정성을 다해 任子를 모셔 신임을 얻은 다음 신라로 탈출하여 백제의 정세를 김유신에게 보고했다. 김유신이 조미압에게 가만히 이른다.
『나는 任子가 백제의 국사를 전담한다고 듣고 있다. 내가 그와 의논하려 했으나 기회를 얻지 못하고 있다. 그대는 나를 위해 다시 백제로 들어가서 任子에게 내 말을 전하라』
조미압은 대답한다.
『公께서 저를 불초하다고 여기지 않고 기밀을 맡기시니 비록 죽더라도 후회가 없습니다』
조미압은 다시 백제로 들어갔다. 그리고 任子 앞에 엎드려 말한다.
『제가 기왕에 백제의 백성이 되었으니 이 나라의 풍습을 알아야 하겠기에 수십일 동안 나다니면서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任子는 그 말을 믿고 조미압을 책망하지 않았다. 조미압은 기회를 타서 다시 任子에게 다가가 말한다.
『전번에는 죄를 받을까 두려워서 감히 바른 말을 하지 못했습니다. 실은 제가 신라에 갔다가 돌아왔습니다. 김유신이 좌평께 「나라의 흥망은 예측할 수 없으니 만일 백제가 망하면 좌평이 신라에 의탁하고, 신라가 망하면 내가 백제에 의탁하기로 합시다」라는 말씀을 전하라 했습니다』
任子는 이런 말을 듣고도 못 들은 척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여러 달이 지난 후 任子는 주위를 물리치고 조미압을 가만히 불러 묻는다.
『네가 지난번에 전하겠다고 한 김유신의 말은 어떤 것인가?』
조미압은 두려워하면서도 김유신의 말을 반복하여 전달한다. 드디어 任子는 김유신과의 내통을 결심하고 만다.
『네가 전한 말은 내가 이미 잘 알았으니 돌아가 김유신 장군께 내 뜻을 알려드려라』
위의 기록에서 알 수 있듯 백제의 핵심부를 겨냥한 김유신의 用間之計(용간지계)는 한치의 오차 없이 적중하고 있다. 조미압은 다시 신라로 돌아와 김유신에게 任子의 말을 전하고 백제의 안팎 사정을 속속들이 보고한다.
『백제는 임금과 신하가 사치하고 음란하여 국사를 돌보지 않는다. 백성들은 이를 원망하고, 신령이 노하여 재앙과 괴변이 잇달아 일어난다는 流言(유언)이 번지고 있다』
上大等(상대등=수상) 김유신은 서둘러 백제 병합의 전략을 수립하고 태종무열왕에게 나아가 아뢴다.
『백제가 무도하여 죄악이 桀(걸=夏의 마지막 임금), 紂(주=殷의 마지막 임금)보다 심하니 이제는 실로 하늘의 뜻에 따라 불쌍한 백성들을 구원하고 그 죄를 다스릴 때입니다』

利를 보면 大義를 생각하는 인물

김유신은 민족의 자존심을 지킨 걸출한 將(장)이었다.
백제 공략에 앞둔 660년 6월 羅唐 양군의 수뇌부는 서해상의 德勿島(덕물도:경기도 남양만의 덕적도)에 모여 전략회의를 갖는다. 이 회의의 결정 사항은 羅唐 양군이 7월10일 泗泌城(사비성:지금의 충남 부여) 외곽에서 집결하여 연합 병력으로 백제 王都(왕도)를 공략한다는 것이었다.
당군은 海路(해로)를 따라 병력을 이동시켰던 만큼 백제군과 조우하지 않고 伎伐浦(기벌포;금강 하류의 장항)에 상륙했다. 반면 김유신의 신라군은 육로로 진군하였기 때문에 黃山伐(황산벌:지금의 논산시 연산면)에서 백제의 용장 階伯(계백)이 이끄는 5천 결사대의 강력한 저항을 받았다. 황산벌의 격전에 따라 신라군은 軍期(군기)보다 하루 늦은 7월11일 사비성 외곽에 진출할 수 있었다.
羅唐 연합군의 총사령관 蘇烈(소열)은 신라군이 軍期를 어겼다는 이유로 督軍(독군:軍紀 장교) 金文潁(김문영)의 목을 베어 軍門(군문)에 내걸려 했다. 우리 역사에서는 蘇定方으로 알려지고 있지만, 定方은 蘇烈의 字(자)다. 어른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못하도록 짓는 별칭이 字인데, 우리가 구태여 蘇烈의 字를 써야 할 까닭은 없다.
羅唐 양군의 자존심이 걸린 이 한판의 기세 싸움에서 김유신은 한 발자국도 물러나지 않았다. 다음은 「삼국사기」 태종무열왕 7년(660) 7월 條의 기록.
「대장군은 황산의 전투를 보지도 않고, 늦게 왔다고 죄 주려 하는구려. 나는 죄 없이 치욕을 당할 수 없으니, 반드시 먼저 당군과 결전을 한 후에 백제를 쳐부수겠소」
定方의 면전에서 일갈한 김유신은 곧 軍門에서 도끼를 집어드니, 노기 어린 머리털이 곧추서고 허리에 찼던 보검이 저절로 튀어 나왔다. 定方의 右將(우장) 董寶亮(동보량)이 발을 구르며 「신라 兵將(병장)이 變을 일으킬 것이다」고 말하니, 定方이 文潁의 죄를 불문에 부쳤다」
당시 김유신의 나이 66세. 백제 원정 직전 티베트(吐藩)를 정복한 蘇烈은 김유신보다 세 살 위인 69세. 두 역전의 老將(노장) 사이에 전개된 이 한판의 기세 싸움은 앞으로 羅唐 양국간에 벌어진 戰後(전후) 처리와 관련한 시비의 향방에도 심대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蘇烈은 노회한 장수다. 사비성이 떨어지고 의자왕이 항복하자 그는 신라 君臣(군신) 사이를 이간하려는 反間之計(반간지계)를 구사한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蘇烈은 庾信, 仁問(인문), 良圖(양도) 등 3인에게 은근하게 말한다.
『내가 便宜從事(편의종사)하라는 황제의 명을 받았소. 이제 빼앗은 백제의 땅을 공들에게 食邑(식읍)으로 나눠 줌으로써 諸公(제공)의 공에 보답하고자 하는데 어떠오?』
便宜從事라면 현지 상황에 따라 일을 처리할 수 있도록 君主로부터 위임받은 재량권 행사를 말한다. 食邑은 租稅(조세)를 거둬 사용할 수 있도록 功臣(공신) 등에게 부여하는 고을이다. 그러면 김유신과 더불어 蘇烈로부터 회유를 받은 仁問은 누구인가.
仁問은 태종무열왕의 차남으로 對唐 宿衛(숙위:황제 경호 업무) 외교를 벌이던 중 唐 高宗(고종)의 命(명)에 의해 원정군의 副大摠管(부대총관)으로 참전했다. 그는 文武(문무)를 兼全(겸전)한 당대 제일류의 인물로서 唐으로선 이용가치가 충분했다.
이로부터 11년 후인 羅唐 전쟁 시기의 일이지만, 仁問은 당 고종에 의해 억지로 일시 신라국왕으로 봉해졌다. 그러나 그는 兄王(형왕)인 文武王(문무왕)에게 의리를 지키기 위해 눈물로써 固辭(고사)하는 등 매우 현명하게 처신한다.
쉽게 납득이 가지 않는 대목은 소정방에 의해 良圖가 논공행상의 대상자로 떠올랐다는 점이다. 蘇烈은 왜 良圖와 같은 30세 안팎의 젊은 무장을 포섭 대상으로 삼았던 것일까? 이때(660년 7월) 良圖의 관등은 아찬(제6위의 관등) 정도였을 것이다. 왜냐하면 「삼국사기」 태종무열왕 8년(661) 봄 3월 條 기사를 보면 양도가 대아찬(제5위)의 관등을 달고 백제부흥군을 토벌하기 위해 출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의문은 필사본 花郞世記를 보면 어느 정도 해소된다. 필사본 「화랑세기」의 존재와 信認度(신인도)에 관해서는 月刊朝鮮 1999년 4월호의 拙稿(졸고)에서 설명한 바 있으므로 여기서는 생략한다.
필사본 「화랑세기」에 따르면 良圖는 제22대 風月主(풍월주:신라 화랑도의 최고 지도자) 출신으로 특히 중국어에 능통했던 인물이다. 이런 양도였기에 羅唐 연합 작전에서 능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로부터 11년 후인 671년 羅唐 전쟁 시기의 일이지만, 양도는 신라 사신으로 唐京(당경;지금의 西安)에 들어갔다가 그곳 감옥에 억류중 순국했다. 이런 인물들이었던 만큼 蘇烈의 이간책에 놀아날 리가 없다. 김유신은 蘇烈에게 차갑게 거절한다.
『유독 우리만 땅을 받아 자신을 이롭게 한다면 이것이 어찌 의로운 일이겠소?』

蘇烈이 서둘러 철군했던 배경

羅唐 연합군이 백제를 멸망시킨 직후 양군은 일촉즉발의 긴장 관계에 돌입한다. 蘇烈의 唐軍은 泗泌(사비) 언덕 위에 진영을 설치하고 신라 침공을 기도했다. 태종무열왕이 신하들을 급히 불러 대책을 물었다. 多美公(다미공)이 나서서 말한다.
『우리 군병들에게 백제 군복을 입혀 적대 행위를 하게 하면 唐軍은 반드시 이를 공격할 것입니다. 이때 그들을 반격하면 이길 수 있습니다』
김유신은 다미공의 계책을 채택토록 태종무열왕에게 촉구한다. 왕이 反問(반문)한다.
『당군이 우리를 위해 적을 멸했는데, 도리어 그들과 싸운다면 하늘이 우리를 도와 주겠는가?』
이때 당군의 병력은 13만. 이것은 병력 수송 船團(선단)의 水軍과 보급부대의 병력 등도 포함된 숫자다. 한편 김유신이 이끈 신라군은 야전군 위주의 精兵(정병) 5만. 승전 직후에 사비성에 당도한 태종무열왕의 친위부대도 정예 군단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이때 신라군의 야전 능력과 병력은 결코 唐軍에 비해 열세가 아니었을 것이다.
김유신이 다시 진언한다.
『개가 주인을 두려워하기는 하지만, 주인이 제 다리를 밟으면 무는 법입니다. 국난을 당하여 어찌 자구책을 취하지 않겠습니까? 대왕께서는 결단하소서』
전쟁도 불사한다는 신라군 수뇌부의 결심은 즉각 細作(세작=스파이)에 의해 당군 진영에 전해지게 마련이다. 다급해진 蘇烈은 郎將(낭장) 劉仁願(유인원)에게 병력 1만을 주어 잔류시킨 다음, 義慈王(의자왕)과 신료 93명 등 백제군 포로 2만명을 끌고 서둘러 귀국길에 오른다. 그 시점엔 백제부흥군이 일어나 기세를 떨치고 있었다. 불과 1주일 전(8월26일) 백제부흥군의 본거지 任存城(임존성:충남 예산군 대흥면)은 신라군의 대대적인 공격을 받았으나 難攻不落(난공불락)이었다.
그때 蘇烈이 얼마나 황급했던지는 夫餘(부여)에 가서 定林寺(정림사)의 5층 석탑을 보면 대번에 짐작할 수 있다. 정림사 탑의 1층 屋身(옥신)에는 「大唐平百濟國碑銘」(대당평백제국비명)이라는 제목 아래 당군의 과장된 공적 사항이 새겨져 있다. 그렇게 자랑스런 戰勝(전승) 장군이라면 기념탑 하나쯤 따로 세울 만했지만, 그럴 여유조차 없어 남의 佛塔(불탑)에다 낙서를 한 셈이다.
그렇다면 蘇烈의 속셈이나 심리 상태가 궁금해진다. 그는 漢武帝(한무제) 때의 해외 원정군 사령관 荀(순체)의 비극적 최후를 他山之石(타산지석)으로 삼았는지 모른다. 순체는 베트남에 원정하여 찌우(趙)왕조를 정복한 다음 곧바로 북상하여 기원 전 108년 고전 끝에 마침내 衛滿朝鮮(위만조선)을 멸망시켰으나 귀국 후 한무제의 標的司正(표적사정)에 걸려 피의 숙청을 당하고 만다.
蘇烈로서는 의자왕의 생포만으로 이미 戰功(전공)이 높은 판에 더 이상의 모험은 회피하고 싶었을 터이다. 그는 신라군과 결전을 벌여 다행히 이기더라도 엄청난 병력 손실이 불가피할 것이고, 패전하면 문책을 모면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던 듯하다.
개선 장군 蘇烈의 귀국 후의 처신이 볼 만하다. 승전 보고를 받은 당 고종이 蘇烈에게 묻는다.
『어찌하여 뒤이어 신라를 치지 않았는가?』
蘇烈이 아뢴다.
『신라 왕이 어질어 백성을 사랑하며, 신하들은 충성스럽고, 아랫사람은 윗사람을 부형과 같이 섬기고 있더이다. 신라가 비록 소국이기는 하나 가볍게 도모할 수 없었습니다』
「삼국사기」에 기록된 위의 기사를 보면 唐은 백제를 멸한 후 가능하면 신라까지 먹는다는 시나리오를 사전에 갖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또한 신라의 수뇌부는 그러한 唐의 속셈을 간파하고 一戰不辭(일전불사)의 대책을 세우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羅唐 양국 모두 고구려라는 공동의 적을 눈 앞에 두고 있었던 만큼 서로 가볍게 전단을 열지 못했다.
후일의 얘기지만, 蘇烈은 臥席終身(와석종신), 즉 명대로 살다가 죽었다. 唐書(당서)엔 「乾封(건봉) 2년(667) 그가 죽자 황제가 슬퍼하여 左驍騎大將軍(좌효기대장군) 幽州都督(유주도독)의 벼슬을 내리고, 시호를 莊(장)이라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흥미로운 것은 당 조정이 백제 멸망 후 김유신에 대해 특별 관리를 했다는 점이다. 문무왕 5년(665)에 당 고종은 사신 梁冬碧(양동벽)과 任智高(임지고)를 신라에 파견하여 김유신을 奉常正卿(봉상정경) 平壤郡開國公(평양군개국공) 식읍 2천호로 책봉했다. 平壤郡開國公 운운의 관작과 식읍은 고구려가 존속하고 있었던 시점이었으니까, 지불이 불확실한 약속어음에 불과한 것이었지만, 복선을 깔고 있는 교묘한 미끼였다.
이어 문무왕 6년(666)에는 김유신의 장남 대아찬(제5위의 관등) 三光이 당 고종의 命으로 당에 불려가 左武衛翊府 中郞將(좌무위익부 중랑장)이란 벼슬에 오르고 황제를 경호하는 宿衛(숙위)의 임무를 부여받았다. 宿衛라면 태종무열왕의 아들들인 김법민(문무왕), 仁問, 文旺이 거쳐간 직책이었다.
김유신에 대한 唐 조정의 이같은 특별 대우는 자칫하면 신라의 君臣간에 틈이 벌어질 꼬투리가 될 만했다. 당측으로서는 바로 그것을 겨냥했을 것이다. 병법에서 말하는 二虎競食計(이호경식계), 즉 두 마리 호랑이가 먹이를 놓고 서로 싸우게 하여 중간에서 利(이)를 챙기는 계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유신은 處世學(처세학)의 교과서 같은 인물이었다. 그에 대한 태종무열왕과 문무왕의 신임이 절대적이었다.
668년 고구려를 멸한 후 문무왕은 서라벌로 귀환하던 길에 南漢州(남한주:지금의 경기도 광주)에 이르러 김유신과 그 부친, 조부의 3대에 걸친 공적을 찬양하면서 좌우 신하들에게 行賞(행상)의 방법을 묻는다.
『(전략) 김유신은 조부와 부친의 유업을 계승하여 社稷之臣(사직지신)이 되었다. 그는 나가면 장수가 되고 들어오면 정승이 되었으니 그 공적이 매우 크다. 만일 公의 한 가문에 의지하지 않았더라면 나라의 흥망은 알 수 없었다. 그에게 어떤 직위와 상을 주어야 하는가?』
신하들도 입을 모아 『저희들의 생각도 대왕의 뜻과 같습니다』라고 김유신을 찬양했다. 이에 문무왕은 김유신에게 太大舒發翰(태대서발한)을 제수하고, 식읍을 5백호로 했다.
서발한은 角干(각간)과 동격인 신라 17관등 가운데 제1위. 그런데 그것도 미흡하다고 하여 서발한 위에다 크고 또 크다는 太大를 올렸다. 김유신은 백제 멸망 직후 角干에서 신라 초유의 大角干으로 승차해 있었는데, 또다시 爲人設官(위인설관:특정인을 위해 관직을 만듦)의 영예를 누린 것이다.

君臣水魚之交의 모델

김유신은 문무왕 13년(673) 7월1일 7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임종을 앞두고 문무왕이 김유신의 私家(사가)로 행차하여 병 문안을 했다. 이때 君臣간의 대화는 國家大計(국가대계)를 거론하는 가운데 저 유명한 君臣水魚之交(군신수어지교:고기와 물과 같은 임금과 신하의 관계)가 들먹여지고 있다.
『臣이 온 힘을 다하여 元首(원수)를 모시려 하였으나 犬馬(견마)의 몸에 병이 들어 오늘 이후로 다시 용안을 뵈옵지 못하겠습니다』
대왕이 울면서 말한다.
『과인에게 卿(경)이 있음은 마치 물고기에 물이 있는 것과 같소. 만일 피치 못할 일이 생긴다면 백성은 어떻게 하며 社稷(사직)은 또 어떻게 하리오?』
유신이 대답한다.
『신이 우둔하고 못났으니 어찌 나라에 도움이 되었겠습니까? 오직 다행스럽게도 현명한 임금께서 의심없이 등용하셨고, 의심없이 일을 맡기셨기에, 대왕의 밝은 덕에 힘입어 마디만한 공을 이룬 것입니다. 지금 三韓이 一家가 되고 백성들이 두 마음을 가지지 아니하니 비록 太平에는 이르지 못했으나, 小康(소강:다소 안온함)이라고 할 만합니다.
臣이 보건대 예로부터 대통을 잇는 임금들이 처음에는 잘못하는 일이 없지만, 유종의 미를 거두는 경우는 드물었습니다. 그래서 여러 대의 공적이 하루 아침에 무너져 없어지니 심히 통탄할 일입니다.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공을 이루는 것이 쉽지 않음을 아시며, 守成(수성)하는 것 또한 어렵다는 것을 염두에 두시고, 소인배를 멀리하며 君子를 가까이 하시어, 위로는 조정이 화목하고 아래로는 백성과 만물이 편안하여 禍亂(화란)이 일어나지 않고 나라의 기틀이 무궁하게 된다면 臣은 죽어도 여한이 없겠습니다』
「삼국사기」 金庾信 傳은 이때 문무왕의 반응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왕은 흐느끼면서 그 말을 받아들였다』
역사를 되돌아보면 전장에서 높은 공훈을 세운 신하일수록 그의 최후는 비참했다. 楚覇王(초패왕) 項羽(항우)를 패망시키고 중원의 통일제국 漢(한)을 창업한 劉邦(유방)의 공신들이 그러했다.
野戰(야전) 최고의 명장 韓信(한신)은 실로 억울한 모반죄를 뒤집어 쓰고 형장에서 참수되면서 오늘날에도 회자되는 狡兎死 走狗烹(교토사 주구팽)이라는 유언을 남겼다. 꾀 많은 토끼가 죽으면 그 뒤를 쫓던 사냥개가 솥 안에서 개장국으로 푹 삶기게 된다는 얘기다.
유방이 항우에게 몰릴 때 항우 軍의 배후에서 게릴라 戰을 전개하여 楚漢戰(초한전)의 흐름을 역전시켰던 彭越(팽월)의 최후도 韓信과 다를 바 없었다. 공신들이 하나하나 제거되던 가운데 전전긍긍하던 그도 끝내 유방의 아내 呂后(여후)의 덫에 걸려 죽임을 당했다. 漢 조정은 팽월의 사체로 젓을 담가 여러 제후들에게 돌려 맛보게 했으니까 문자 그대로 烹(팽)을 당했던 것이다.
권력의 세계에서는 竹馬故友(죽마고우)도 없었다. 유방과 盧(노관)은 한 마을에서 한날 한시에 태어나 같이 글을 배우며 형제보다 가까운 사이로 성장했다. 유방의 천하통일 후 노관은 燕王(연왕)에 봉해졌으나 참소 때문에 얼마 견디지도 못하고 도주하여 흉노족에게 몸을 의탁하고 있다가 죽고 만다.
그래도 현명했던 공신은 유방 막하 제1의 軍師(군사)였던 張良(장량)이었다. 그는 功臣田(공신전)의 3분의 2를 국가에 반납하는 등 몸을 잔뜩 낮추다가 끝내는 神仙術(신선술)을 배운다며 세상을 등져버렸다.
대공을 세운 뒤 미련 없이 종적을 감춘 대표적 인물로는 越王 句踐(구천)을 도와 吳王 夫差(부차)를 敗死(패사)시킨 데 이어 구천을 전국시대의 覇者(패자)로 끌어올린 越의 명재상 范`(범려)가 손꼽힌다. 그는 『월왕은 患亂(환란)은 함께 해도 榮華(영화)는 같이 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명언을 남기고 야반도주, 이름을 감추고 변신하여 천하의 巨商(거상)으로 성공했다.
천하를 잡은 군주들은 으레 공신들에게 피의 숙청을 감행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삼국 통일의 元勳(원훈) 김유신은 살아서는 太大角干으로 부귀와 권세를 누리다 臥席終身(와석종신)했고, 죽어서는 人臣의 몸으로 우리 역사상 전무후무하게 興武大王(흥무대왕)에 추존되었다.
전두환의 5·17 쿠데타니, YS의 문민정부니,IMF 사태니, 또는 DJP의 공동 집권이니 하는 정치적 변환기의 굽이굽이에서 표적 사정을 당하거나 제 밥그릇 하나 챙기지 못하고 쫓겨난 요즘 사람들의 눈에 비치는 김유신은 「시대의 옷을 잘 입은 경이적 인물」일 것이다. 이제는 김유신의 다이내믹한 일생을 출생부터 추적할 차례다.

『金庾信이 충청도 출신인 건 잘 모를 거야』

東서울 톨게이트를 통과, 중부고속도로를 따라 꼭 80㎞를 달리면 鎭川(진천) 인터체인지와 만난다. 진천 인터체인지의 들머리에는 「生居鎭川」(생거진천)이란 네 글자를 새긴 바윗덩이가 눈에 띈다. 그런 충북 진천이 바로 김유신의 출생지다.
예로부터 우리 민간에서는 「生居鎭川」 「死去龍仁(사거용인)」이란 8글자의 秘機(비기)가 나돌았다. 무슨 말이냐 하면 생시엔 충청도 진천에서 살고, 죽어서는 경기도 용인으로 간다는 얘기다. 「전설 따라 3천리」 식의 믿거나 말거나 한 얘기지만, 그야 어떻든 대통령선거에서 세 번이나 낙선했던 DJ가 조상의 묘를 용인에 이장하고 난 후에야 대통령에 당선되기는 했다.
진천 인터체인지를 빠져나와 진천읍 중심가를 통과하는 21번 국도를 따라 天安(천안) 방면으로 20리쯤 달리다가 오른쪽으로 꺾어 9번 郡道(군도)에 접어들어 2㎞를 더 가면 진천읍의 오지인 계양 마을. 여기에 김유신의 生家(생가) 터가 있다. 1천4백여년 전 계양 마을은 신라 萬弩郡(만노군)의 治所(치소:관아 소재지)였다.
신라 진평왕 16년(594)을 전후한 시기에 만노군 태수로 부임한 인물이 金舒玄(김서현). 만노는 진흥왕代(540~576)에 신라가 고구려로부터 공취한 변경 지대로 이곳 태수는 상당 규모에 달하는 수비대의 지휘관을 겸했다.
김서현은 이곳 萬賴山(만뢰산, 612m) 자락에 관아를 짓고 그 주위에 보루를 쌓아 요새화했다. 그래서 그런지 그후 계양 마을은 「담밭안」으로 불려 왔다.
진평왕 17년, 그러니까 서기 595년 「담밭안」에서 등에 七星(칠성) 무늬가 새겨진 아이가 태어났다. 아버지는 만노군 태수 김서현, 어머니는 萬明夫人(만명부인). 부부는 아이의 이름은 태몽에 따라 庾信이라고 지었다.
서현은 화성과 토성이 자기에게 내려오는 꿈을 꾸었고, 만명은 金 갑옷을 입은 동자가 구름을 타고 집안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었다니까 굉장한 태몽이었다. 부부가 함께 이런 길몽을 꾼 날이 庚辰日(경진일)이어서 처음엔 庚辰으로 이름을 삼으려 했다.
그러나 당시엔 日月星辰(일월성신)으로 이름을 짓지 않는 것이 예법이어서 庚과 글꼴이 닮은 庾, 그리고 辰과 발음이 같은 信을 이름자로 삼았다는 것이다. 「삼국사기」 김유신 열전에 나오는 얘기다.
필자가 계양 마을의 김유신 生家 터를 답사했던 날은 추적추적 내리는 봄비 탓인지 주위가 적막강산이었다. 만뢰산 줄기가 양쪽으로 뻗어 내린 골짜기 사이로 펼쳐진 외가닥 옛길 옆의 생가 터. 여기다 보루를 쌓았다니까 고구려 勢(세)의 南進을 막을 수 있었겠구나 하는 등의 생각에 잠겨 있는데, 갑자기 등 뒤에서 명랑한 여성의 소리가 들려 왔다.
『김유신 장군이 충청도 출신이란 건 다른 지방 사람들은 잘 모를 거야』
꽤 자랑스러워하는 목소리였다. 퍼뜩 뒤돌아보니 이십대 아베크 참배객이었다.

邊境 농촌은 큰 인물 성장에 좋은 土壞

김유신은 그 출생부터 드라마틱하다. 우선 그 부모의 결혼에 이르는 과정이 신라 骨品制(골품제)의 벽을 뛰어넘은 센세이셔널한 사건이었다.
그의 아버지 서현은 532년 신라에게 병합된 金官伽倻(금관가야:지금의 경남 김해)의 마지막 왕 仇衡(구형)의 손자다. 亡國(망국)의 왕손인 만큼 신라에서 크게 출세할 가능성은 별로 없는 신분이다.
다만 서현의 아버지인 武力이 554년 관산성 전투에서 백제 성왕을 전사시키는 등의 대공을 세웠고, 그의 어머니가 법흥왕의 딸 阿陽公主(아양공주)였던 것을 배경으로 화랑도의 上級(상급) 간부인 前方花郞(전방화랑)의 지위에 오른 경력을 가졌던 정도였다. 필사본 「화랑세기」에 따르면 서현은 大元神統(대원신통)의 신분이다. 大元神統도 귀족계급이기는 하지만, 眞骨正統(진골정통)에 버금가는 위치다(月刊朝鮮 1999년 4월호의 기사, 「필사본 화랑세기의 정체」 참조).
이런 신분과 배경의 서현이 肅訖宗(숙흘종)의 딸 萬明을 우연히 만나 첫눈에 반해버림으로써 복잡한 문제가 빚어지기 시작했다. 숙흘종이라면 법흥왕의 동생인 立宗 葛文王(갈문왕:왕의 동생 등에게 붙여준 尊號)의 아들이다. 그런 숙흘종이 진흥왕 死後 과부가 된 진흥왕의 妃였던 萬呼太后(만호태후:진평왕의 母后)와 결혼하여 낳은 딸이 만명이다. 그러니까 만명은 진골정통 중에서도 최상의 혈통이다.
서현과 만명의 野合(야합)과 결혼 과정은 「삼국사기」와 「화랑세기」에 비교적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서현이 처음 길에서 만명을 보았을 때 내심으로 기뻐하여 그녀에게 눈짓하여 중매도 없이 야합했다(삼국사기). 만명이 임신을 하자 만호태후는 서현이 진골정통이 아닌 대원신통이라 하여 이들의 야합을 허락하지 않았다(필사본 화랑세기). 숙흘종은 딸 만명을 별채에 가두고 사람을 두어 지키도록 했다(삼국사기).
이에 서현은 掠奪婚(약탈혼)을 결심한다.
「그러던 중 갑자기 대문에 벼락이 쳐서 지키던 사람이 놀라 정신을 차리지 못했을 때, 만명이 창문으로 나와 마침내 서현과 함께 만노군으로 도망쳤다」(삼국사기)
그러니까 위의 기사는 서현이 대문을 박차고 숙흘종의 집에 뛰어들어가 별채에 갇혀 있던 만명을 탈취한 약탈혼을 점잖게 표현한 것이다. 「삼국사기」에서는 약탈혼 당시 서현이 만노군 태수로 임명되어 부임 직전의 상황이었던 것으로 되어 있으나, 필사본 「화랑세기」에는 좀 다르게 기록되어 있다.
「서현과 만명이 만노군으로 함께 도망친 후 유신을 낳았다. (중략) 자신의 여동생 만명이 괴로움을 당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진평대왕은 서현을 만노군 태수로 봉하였다」
진평왕과 만명은 아버지는 다르나 어머니(만호태후)가 같은 오누이 관계다. 그러니까 진평왕은 사랑의 도피행각을 벌인 同腹(동복)의 여동생 만명이 고생하고 있다는 얘기를 전해 듣고 妹夫(매부) 서현에게 만노태수의 벼슬을 내린 것이다.
그러나 서현과 만명은 오랫동안 王京 서라벌로 돌아올 수 없었던 것 같다. 야합과 약탈혼 때문에 둘에 대한 신라 귀족 사회의 평판이 나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김유신은 소년기를 변경의 벽지에서 보낼 수밖에 없었을 터이다. 바로 이런 성장 환경이 김유신의 품격 형성에는 오히려 바람직한 작용을 하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원래 질박한 시골이야말로 큰 인물을 만들어내는 좋은 토양이다. 화려한 도회지에서 성장하는 것은 상류사회의 세련미를 갖추는 데 유리할지 모르나 인간적 그릇을 키우는 데는 불리하다. 그래서 한 시대를 진동시킨 영웅들은 거의 변경 시골 출신이다.
예컨대 亂世(난세)의 중국 대륙을 평정하고 통일제국을 창업한 뒤 고구려, 백제, 신라의 3국 쟁패전에도 대단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는 楊堅(양견=수문제)이나 李淵(이연=당고조) 같은 인물도 中原(중원) 북방 오르도스 방면의 흉노를 방어하기 위한 변경 요새인 武鎭川(무진천:지금의 武川縣)에서 성장했다. 무진천 수비대의 중-하급 장교들과 그 자제들은 엄혹한 생존환경을 거치면서 동지적 유대 관계가 심화되고, 결국 中原 최강의 무진천 軍閥(군벌)을 형성하여 수와 당을 창업하는 데 있어 결정적인 도약대로 삼았던 것이다.
武鎭川 군벌 조직의 활용에 가장 주목했던 인물이 바로 李淵의 차남인 李世民(이세민)으로, 그가 바로 중국 역사상 최고의 名君으로 손꼽히는 당태종이다. 훨씬 나중의 일이지만, 당태종은 그에 비해 6세 연상인 김유신의 존재를 유별나게 의식한다. 그와 관련한 얘기는 일단 뒤로 미룬다.

인간을 움직이는 것은 名譽

김유신의 소년기에 관한 사료는 거의 없다. 그러나 그의 행적을 보면 그는 시골의 정서를 대단히 유효하게 활용하고 있다. 예컨대 신라 최고 사령관이 되기 전까지 그가 지휘했던 부대를 보면 王京 출신들로 구성된 大幢(대당) 등의 중앙군단이 아니라 모두 지방 농민들의 자제들로 구성된 州兵(주병) 군단들이었다.
원래 정예 군단을 만드는 데 있어 출발점은 농촌에서 募兵(모병)하는 것이다. 도회지 출신 병사는 성장 환경으로 인해 野戰性(야전성)에 취약하고 겉멋에 쉽게 물들어 단결력도 약하다. 변경에서 소년기를 보낸 김유신은 王京 귀족 출신 武將(무장)들과는 달리 농촌 정서를 체득하고 있었던 만큼 농민병을 능숙하게 다룰 수 있었을 것이다.
실제 전장에 나선 김유신은 중-하급 장교나 병사들의 마음을 격동시켜 절대 불리한 국면을 결정적으로 역전시키고 있다. 「삼국사기」 권 47에 보이는 丕寧子(비령자)의 분투가 바로 그러한 사례 중 하나다.
<진덕왕 원년(647) 백제가 대군을 거느리고 茂山(무산:전북 무주) , 甘勿(감물:경북 고령군 지례), 桐岑(동잠:충북 충주) 등의 성을 공격하므로 庾信이 보병과 기병 1만을 이끌고 대항했다. 그러나 백제군이 정예군이었기 때문에 고전을 면치 못하고 사기는 꺾이고 힘도 빠졌다. (중략) 유신이 비령자를 불러 말한다.
『추운 겨울이 된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푸르다는 사실을 아는 법. 오늘의 사태가 위급하니 누가 용감히 싸우며 기묘한 계책을 내어 여러 사람의 마음을 격려하겠는가?』
유신이 이어 그와 술을 마시면서 은근한 마음을 표하니 비령자가 두 번 절하고 말한다.
『지금 많은 사람들 가운데 유독 저에게 일을 부탁하시니 가히 知己(지기:자기를 알아줌)라고 할 만합니다. 진실로 죽음으로써 보답하여야 마땅하겠습니다』
(중략) 말이 끝나자 그는 곧 말에 채찍질을 하며 창을 비껴 들고 적진으로 돌입하여 적병 여럿을 죽이고 자기도 전사했다>
「삼국사기」에 「비령자는 고향과 집안의 성씨도 알 수 없다」고 기록되어 있다. 지방 농민 출신 초급 장교였던 듯하다. 그가 전사하자 그의 아들 擧眞(거진)이 달려나가 싸우다 죽고, 擧眞이 쓰러지자 이번에는 비령자의 머슴인 合節(합절)까지 뛰어나가 장렬하게 전사했다.
이런 군단은 강할 수밖에 없다. 인간을 움직이게 하는 것은 명예다. 백제군은 3천명의 전사자를 남기고 퇴각했다.
김유신의 성장 배경을 설명하다 보니 얘기가 너무 앞으로 나가 버리기는 했지만, 아무튼 만노군에서 소년기를 보냈다는 것이야말로 武將의 길을 선택한 그에게는 대단한 행운이었다. 바로 삼국간 쟁패전의 중심 무대가 되는 한반도 중부지역에 대한 풍토와 지리, 그리고 민심을 체득할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랑의 도피 행각을 감행한 서현-만명 부부가 서라벌로 불려 올라간 것은 순전히 장남 김유신 때문이었다. 필사본 「화랑세기」에 그 배경이 기록되어 있다.
「유신이 점차 장성하면서 제왕의 풍모를 보였다. 이런 소식을 들은 萬呼太后는 유신을 만나 보기 위해 서현과 만명이 돌아올 것을 허락하였다. 태후는 유신을 만나 보고 크게 기뻐하여 진실로 내 손자라고 했다」
앞에서도 얘기했지만 만호태후라면 今上(금상)인 진평왕의 모후로서 그 시점엔 신라 왕실의 최고 어른. 더욱이 그녀는 진흥왕의 모후 只召太后(지소태후)의 사후에 진골정통의 대표적 존재가 되어 궁정 정치에서 강렬한 女權(여권)을 발휘하고 있었다. 그런 만호태후가 김유신을 「진실로 내 손자」라고 했다는 것은 그의 앞날에 대한 청신호였다.
그것은 우선 망국의 후예 김유신의 신분이 어머니 만명부인의 혈통에 따라 진골전통으로 격상되었음을 의미한다. 김유신의 조모, 즉 서현의 어머니가 비록 법흥왕의 딸 阿陽公主였다고는 하지만, 궁중정치에서 발언권이 미약한 존재였다. 유별나게 호색했던 법흥왕은 수많은 후궁들을 거느려 자녀들이 많았는데, 아양공주 역시 그런 후궁의 소생들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만호태후의 인정을 받은 김유신은 곧 신라 청년들의 엘리트 코스인 화랑 조직의 上級(상급) 리더로 도약한다. 그때 그의 나이 15세. 필사본 「화랑세기」에는 「이로부터 伽倻派(가야파)들이 마침내 金庾信을 받들게 되었다」고 쓰여 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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