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조선 기사

[인터뷰] 前 駐日대사 崔相龍 - 그가 본 日本 총리들의 맨얼굴과 歷史의식

年 450만 交流시대, 韓國과 日本의 미래

글 정순태 기자  2006-0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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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崔선생님은 일본 朝野(조야)에 걸쳐 교유의 폭이 넓으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고이즈미 총리는 어떤 인물입니까.

『10년 전, 그러니까 그분이 총리가 되기 전에 제가 고려大 교수로서 처음 만났습니다. 그때는 제가 「일본을 움직이는 5人」과 차례로 만나 인터뷰했는데, 그 가운데 한 분이 고이즈미 의원이었습니다. 개성이 강렬하고 직선적인 인물이라고 보았습니다』

― 고이즈미가 역대 일본 총리 가운데 제일 세다고 하더군요. 부시 미국 대통령처럼 친구가 별로 없고, 일찍 퇴근해 엘비스 프레슬리의 노래 같은 것을 혼자 듣기도 하고, 「겨울연가」의 주연 여배우 최지우씨를 총리관저로 초대하기도 했죠. 성격은 매우 깔끔하고 솔직하다던데요.

『제가 駐日대사 재임 중에 세 분의 일본 총리와 만났습니다. 처음이 오부치(小淵惠三·1998.7~2000.4) 총리입니다. 오부치 총리는 과거의 인연 때문에 제게 각별했던 분입니다. 제가 대사에 내정되자 현직 총리로서 제게 축하 전화를 했어요. 「축하합니다, 언제 부임합니까, 빨리 만납시다」라고 합디다. 제가 駐日대사로 부임한 지 2개월 후에 오부치 총리가 작고했습니다. 오부치 총리와 이런 사이로 가면 韓日 간의 문제가 잘 풀릴 것이라고 기대했는데…』


良質의 역사인식-무라야마 談話

― 오부치 총리와의 「각별한 인연」은 무엇입니까.

『1998년 金大中 대통령이 국빈으로 일본을 방문했어요. 저는 金守漢(김수한) 국회의장과 함께 특별수행원으로 동행했습니다. 그때 「1998년 韓日 파트너십 선언」을 했지요. 이 문서에 한국을 식민통치한 데 대한 일본의 「통렬한 반성」과 「사죄」가 明記(명기)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역사문제와 관련해 「과거를 직시하고 미래를 지향한다」는 문장이 적혀 있습니다. 말하자면 金大中 대통령과 오부치 총리가 미래지향적인 韓日관계를 약속한 문서입니다』

― 「1998년 韓日 파트너십 선언」이 나오게 된 배경은 무엇입니까.

『사회당 위원장 출신으로 총리가 된 무라야마(村山富市)씨가 있잖습니까. 무라야마씨가 일본 정치의 다이너미즘에 의해 사회당·사키가케·自民黨의 3당 연합정권의 총리(1994.6~1996.1)가 된 후 자신의 과거사 인식을 담은 「무라야마 총리 담화」를 발표했어요.

그 문면은 「과거 일본이 아시아 여러 나라에 대해 형언할 수 없는 고통을 주었고…」 등으로 되어 있습니다』

― 리버럴리스트 호소카와(細川護熙) 총리와 사회주의자 무라야마 총리의 「과거사 인식」이 일본 역대 총리 중 가장 솔직했죠.

『아시다시피 역사인식에 관한 한 우리의 동지는 일본의 리버럴과 左派(좌파)입니다. 어떻게 보면 우리가 일본사람에게 기대할 수 있는 良質(양질)의 역사관을 무라야마에게서 얻은 것입니다. 「韓日 파트너십 선언」은 무라야마의 총리 퇴임 후 「무라야마 총리 담화」의 골자를 「韓日 파트너십」 안에 넣어서 문장화·구체화한 것입니다. 이것을 金大中 대통령과 오부치 총리가 확인했습니다. 바로 그 점이 매우 중요합니다.

「무라야마 총리 담화」에서는 「일본이 여러 나라들에 끼친 해악…」이라고 되어 있을 뿐으로, 그 안에 「한국」이 明示되지 않았어요. 「아시아 여러 나라」라는 포괄적 대상을 「일본이 한국에 대해서 가한 고통」이라고 명기하고, 그에 대해 「통렬히 반성하고 사죄한다」는 것을 밝힌 것입니다』

― 金大中 정부가 「무라야마 총리 담화」를 기회로 잡았고, 崔선생님께서 「1998년 韓日 파트너십 선언」의 문안 작업에 참여하신 것이군요.

『저는 그것이 우리 모든 국민이 박수칠 만큼 만족스러운 것이 아니었다고 해도 일본 정부로부터 良質의 역사인식을 끌어낸 것이라고 판단했습니다.


『문화교류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잇는 끝없는 상호학습의 과정』

― 1998년의 「韓日 파트너십 선언」에는 양국 간의 대중문화 교류도 포함되지 않았습니까.

『日本 대중문화의 한국시장 개방에 저는 찬성하는 입장이었습니다. 당시 국내엔 반대 여론이 팽배했어요. 반대 이유는 그것이 단순한 문화교류의 문제가 아니라 산업의 문제이며, 경쟁력의 문제라는 것이었습니다.

「애니메이션·만화 등 세계적 경쟁력을 가진 일본의 대중문화가 한국에 들어오면 우린 어떻게 하느냐, 한국을 일본의 문화 식민지로 만드려는 것 아니냐」 하는 두려움까지 있었습니다.

그때 저는 단호하게 일본의 대중문화를 개방해야 한다고 주장했어요. 그때 문화개방을 하지 않았다면 지금과 같은 韓流(한류)를 맞이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 2003년 4월, 「겨울연가」(日本題名: 冬の 소나타)가 NHK 위성방송에 방영된 이래 일본에서 「韓流」의 열풍이 거세게 불고 있습니다만, 개방 초기에 반대자들을 어떻게 설득했습니까.

『「일본의 만화·애니메이션이 우리보다 경쟁력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문화교류 문제는 어떤 특정 시점의 優劣(우열)을 놓고 다뤄서는 안 된다. 문화교류는 현재의 차원에서만 볼 것이 아니라 좀더 먼 안목으로 보아야 한다」. 문화는 왔다 갔다 하면서 서로 배우는 프로세스입니다. 즉,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잇는 끝없는 상호학습의 과정인 것 입니다』

― 韓日 관계사에서 나타났던 「상호학습 과정」은 어떤 것들입니까.

『예를 들면 도쿠가와(德川) 막부가 官學으로 삼은 朱子學의 수용과정에서도 李退溪(이퇴계)의 사상이 야마자키 안사이(山崎闇齋)에게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이렇게 에도時代 초기까지만 해도 일본이 우리에게 배웠지 않습니까. 그 후 우리들은 근대화·산업화 과정에서 일본으로부터 배웠습니다. 저는 「문화교류에는 열린 마음이 필요하다」고 대통령에게도 진언했습니다』

― 「1998년 韓日 파트너십 선언」이 1965년 韓日 국교정상화 이래 가장 획기적인 역사적 문건이라는 점에서 어느 학자는 그것을 「1998년 체제」라고 표현합디다. 崔선생께서 2000년 2월에 駐日대사로 기용된 배경도 거기에서 찾아야 하겠군요.

『지금 생각하니, 韓日 파트너십 구상에 참여했고 그것을 문장화하는 데 기여했으니까, 이제는 그것을 현장에서 실천하라고 저를 내보낸 것 같아요. 金大中 대통령이 저를 모르지는 않았지만, 중책을 맡길 만한 인간적 교류는 전혀 없었거든요』

― 1998년 선언에 합의했던 카운터파트가 오부치 총리였으니까 駐日대사로서의 입지가 그만큼 유리했겠네요.

『스타트가 매우 신선했어요. 그런데 부임 2개월 만에 오부치 총리가 갑자기 별세하고, 모리(森喜朗: 2000. 4~2001. 4)씨가 총리가 되었습니다』

― 모리라면 학창 시절에 럭비선수로 뛴 사람답게 시원시원한 성품이라 대화하기 좋은 인물 아닙니까. 그땐 교과서 문제가 대단히 어려운 현안으로 떠오르긴 했지만.

『모리 총리 시절에 문부대신은 최근 외무대신을 역임한 마치무라씨였습니다. 그때 중학교 역사교과서 검정문제가 터졌어요. 잘못된 역사인식에 바탕한 후쇼社의 역사교과서에 대한 우리 국민들의 분노가 굉장했어요. 국내에선 「당장에 駐日대사를 소환하라」는 목소리가 높았어요. 「업무협의차 귀국」하여 10일간 국내에 체재하면서 언론·국회 등에서 증언을 했습니다』

― 駐日대사로서 일본의 교과서 문제에 어떻게 대처했습니까.

『저는 일본 정부와 교섭하는 한편으로 40여 회에 걸쳐 강연을 하면서 우리가 왜 일본 교과서를 문제삼느냐는 점을 분명하게 천명했습니다. 적어도 일본의 지식사회에서는 저의 말을 받아들였습니다』


『일본에는 합리적 반론을 경청하는 지식 사회 있다』

― 설득의 논리는 어떤 것이었습니까.

『「1998년 韓日파트너십 선언에서 과거를 직시하고 미래를 지향한다고 했고, 역사인식을 공유한다고 약속했다. 역사인식이 무엇인지 따져 보자. 첫째는 역사적 팩트(사실)를 팩트로서 확인하는 것이고, 둘째는 확인된 역사에 대한 해석이다. 물론 後者의 역사해석을 하나로 강요할 수 없다. 한국사람과 일본사람의 시각이 다르고, 각자의 입장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만큼 역사 해석의 다양성은 인정한다.

그러나 이미 확인된 사실을 거부하고 왜곡하는 것은 안 된다. 그것은 1998년 韓日파트너십 선언을 휴지화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한때 종군위안부 문제에 국가가 개입하지 않았다고 일본 정부가 주장하지 않았느냐」

그러나 일본 역사가에 의해 국가 개입이 사실로 판명되었고, 그 후에 고노 外相(現 衆議院 의장)이 국가 개입을 인정해 사과했습니다』

― 문제의 후쇼社 역사교과서 檢定(검정) 신청본에서 나타난 역사 왜곡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제가 제일 중요시한 것은 「韓日합방을 받아들이는 소리도 있었다」는 대목과 「新羅(신라)가 倭(왜)의 服屬國(복속국)」이라는 대목이었습니다』

― 日本 측의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우선, 「韓日합방을 받아들이는 소리도 있었다」는 것에 대해 일본 측은 「史實」이라는 거예요. 日進會 등의 매국노 집단의 존재를 놓고 일본 측이 「史實을 기록했을 뿐」이라고 했어요. 그래서 나는 「여러분이 韓日우호를 바란다면 상대국 국민이 매국노라고 규정하고 있는 사람의 언행을 일본의 교과서에 꼭 넣어야 하느냐」고 따졌습니다. 나라가 망할 즈음에 매국노 집단이 등장하는 것은 세계사에서 너무나 흔한 일인데, 그것으로 國權强占(국권강점)의 논리로 삼는 것은 非지성적인 역사기술이죠』

― 그 대목은 어찌 되었습니까.

『확인해 보십시오. 그 문장은 빠졌습니다』

― 新羅가 倭의 服屬國이란 대목은요.

『「일본사람은 服屬이 식민지배와 다르다고 하지만 服屬이란 일본어가 복종과 예속을 연상케 하는 용어다. 우리는 일본의 35년 식민지배만으로도 자존심이 상하는데, 우리 역사상 최초의 통일국가로 발전하는 新羅까지 일본의 식민지처럼 기술되어서는 안 된다」고 설득했습니다. 결국 服屬이란 용어 대신 「정치적 영향력」이란 표현으로 바뀌었습니다』


『역사는 모래 위에 쓰는 글이 아니다』

이어지는 崔교수의 말이다.

『저는 일본사람들에게 「역사는 모래 위에 쓰는 글이 아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모래 위에 쓴 글은 지워 버리면 되는 것이지만, 역사는 확인된 사실을 기술하는 것으로, 지우개로 지우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게 나의 캐치프레이즈였습니다』

― 그 캐치프레이즈가 먹혀 듭디까.

『당시 自民黨의 간사장 노나카씨도 저의 강연을 듣고 상당히 우호적인 말을 합디다. 결국 후쇼社의 역사교과서 채택률은 0.039%에 그쳤습니다. 132만 명의 중학생 가운데 겨우 521명만 후쇼社의 교과서를 선택했습니다』


『일본 大入에서 한국어 선택, 獨語와 비슷하다』

― 지금은 후쇼社 역사교과서의 채택률이 얼마나 됩니까.

『지금은 0.4%로 늘어났습니다』

― 채택률이 10배로 늘어난 셈이군요.

『채택률 0.039%라는 결과가 나오기 전에 저는 일본 총리와 문부대신을 만나 한 가지 작업을 추진했습니다. 제가 「교과서 문제로 우리 국민이 큰 상처받았다. 상처를 주었으니 선물을 달라」고 요구한 것입니다.

일본의 大入 외국어시험 과목에서 영·독·불어 중 하나를 택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십수 년 전에 아시아語의 대표로 중국어가 포함되었어요. 여기에 내가 뛰어들어 한국어도 넣자고 했습니다』

―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첫 반응은 「아니, 南美 諸國을 커버하는 스페인語, G7의 이탈리아語, 러시아語도 안 넣었는데, 거기에 조선어를 어찌 넣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아무튼 처음엔 손톱도 안 들어갔어요. 그래도 제가 집요하게 추진한 결과 「조선어를 검토해 보겠다」는 반응이 왔었어요. 그래서 제가 협상 상대를 다시 만나서 「참으로 답답하다. 조선어가 뭔가? 이왕 하려면 우리 국민이 좋아하는 한국어로 바꿔야 한다」라고 했죠』

― 하기야 「조선어」라고 하면 우리 국민들이 좋아할 리 있겠습니까.

『그랬더니 협상 상대가 「한국에 조선일보·조선대학이 있지 않느냐? 조선은 문화적 개념이다. 조선어라 해야 일본사람에게 친근하게 들린다」고 해요.

이에 제가 다음과 같이 반론을 폈어요.

「첫째, 우리 역사상 고조선이란 나라가 있지만, 나는 앞으로 한반도의 운명을 결정하는 國名은 대한민국이라고 본다. 둘째, 우리의 통일은 시간문제다. 우리가 보기엔 이미 통일은 우리 시야에 들어와 있다. 통일은 우리 한국 중심으로 통일될 것 아닌가?」

「그건 맞다」

「그렇다면 일본사람들이 좋아하는 말에 사키토리(先取: 남보다 먼저 취함)가 있지 않으냐. 한반도의 미래에 대한 의견을 같이 한다면 사키토리를 하라」

당시 일본에서는 우리 말에 대한 다섯 가지 표기가 있었습니다. 한글, 코리아어, 한국어, 조선어, 조선·한국어였어요』

― 결국 「한국어」가 공식적으로 외국어 선택과목 중 하나로 들어갔지요.

『지금은요, 일본 大入에서 한국어 선택률이 독일어와 비슷하다고 해요. 韓流효과 등 여러 가지 복합적인 요인 있는 것 같습니다』

― 아무튼 韓日 새 시대의 전개를 위해서 바람직한 일이 아니었습니까.

『모리 총리가 「日韓관계에서 나의 재임 중 최고의 업적」이라면서 「대통령에게 나의 뜻을 전해 달라」고 합디다. 저는 「정중히 대통령에게 말씀드리겠다」고 답했습니다』

― 모리 총리는 친구에게 전화할 때 직접 다이얼을 눌러 「모리입니다. ○○○○씨 바꿔 주십시오」라고 한답디다. 전화를 받아야 할 「친구」의 비서가 현직 총리인지 모르고 전화를 바꿔 주지 않자 그 비서와 다투기도 했다더군요. 그렇다면 상당히 소박한 성품으로 보아야겠죠.

『모리씨는 어떤 면에서 총리를 그만두고 나서 더 빛나는 사람입니다. 다음의 일본 정권을 만드는 데 큰 영향력을 발휘할 인물로 지목되기도 합니다』

― 고이즈미도 원래 모리系죠.

『아무튼 당시엔 「실업자 300만 명 돌파」 등의 경제악화로 모리 총리의 지지율이 형편없이 떨어지고, 그래서 등장한 것이 고이즈미 정권입니다』


고이즈미의 폭소

― 10년 전에 고려大 교수로서 「일본인 움직이는 5人」 중 1인으로 처음 고이즈미를 만났다고 하셨는데, 두 번째 만남은 어떻게 이뤄집니까.

『총리가 되기 20여 일 전에 駐日대사로서 1시간 동안 만났습니다. 自民黨 총재(다수당의 총재가 총리가 됨) 경선 운동을 하느라고 한창 바쁜 시기였는데, 시간을 내줘서 고마웠죠』

― 1시간 동안이나 무슨 얘기를 했습니까.

『처음 40분 동안엔 그가 오페라 얘기만 하더군요. 저의 처가 오페라 가수인 것을 그분이 잘 알아요. 제가 「어떻게 총재 선거를 눈앞에 두고 이렇게 여유가 있습니까. 내가 보기엔 고이즈미 시대가 등장할 겁니다」라고 했습니다』

崔相龍 교수의 부인 金淑垠(김숙은)씨는 최근 오페라 「라보엠」과 「아이다」에 프리마돈나로 출연했으며, 성신女大 성악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 총리가 되고 난 후에 뭐랍디까.

『저를 만나자마자 「하하!」 웃는 것이 우리 국내 TV에도 나왔습니다만. 그때 고이즈미 총리가 「하하」 웃으면서 던진 말이 「崔대사, 先見之明(선견지명) 있소」라는 것이었습니다』

― 외교에선 주재국 총리와의 인간적 유대가 도움이 되는 것 아닙니까.

『고이즈미 총리가 우리 공관을 방문해 공식만찬을 했어요. 이런 前例는 없어요. 東京에 150개가 넘는 외국공관이 있는데, 거기서 서로 오라면 어떻게 갈 거요. 그런데 제가 고이즈미 총리에게 정중한 초청의 편지를 썼어요.

그때의 관방장관이 후쿠다(福田)씨였습니다. 지금 아베 신조(安倍晉三: 現 관방장관)씨와 차기 총리를 놓고 경쟁하는 바로 그분입니다. 일본의 관방장관은 우리나라의 청와대 비서실장·국정원장·국정홍보처장의 역할을 다 하는 실력자입니다. 아베씨가 어찌 했는지는 모르지만, 고이즈미 총리가 덜컥 저녁 초청을 수락했습니다』


소탈한 성품의 고이즈미 총리를

― 그거 대단한 일이군요. 그러면 다른 나라 대사들이 샘내는 것 아닙니까.

『제가 초청일 3일 전에 영국·프랑스·중국·러시아·인도 등 주요 국가 대사에게 전화를 걸어 「내일모레 저녁에 재미있는 오케이젼(사건)이 있는데, 내가 아무 말 안 하면 당신에게 야단맞을 것 같아 미리 연락하오」라며 초청했어요. 주요국 대사들이 전부 선약을 취소하고 동석했습니다』

― 미국 대통령이 방문하는 곳 같으면 부엌까지 점검하는 등 사전 경호 활동이 엄청난데, 일본 총리는 어떻습디까.

『개인적 성품의 일단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지만, 고이즈미 총리는 소탈했습니다. 예컨대 식단에 대해서는 「崔대사가 평소 먹는 대로 하세요」 였어요』

― 재미있는 자리였겠네요.

『먼저, 이 얘기부터 해야 스토리 전개가 부드러울 것 같습니다. 당시, 일본에 광우병이 번져 굉장히 시끄러웠거든요.

그래서 제가 일본 TV에 나가서 「와규(和牛: 일본 쇠고기)는 먹을 수 있습니다」라는 얘기를 했습니다. 당시 농림대신이 지금의 自民黨 간사장인 아케베씨였는데, 「농림대신이 아무리 설득해도 안 되는데, 崔대사가 말해 줘 큰 도움이 되었다」고 인사를 합디다.

제가 그런 발언을 하게 된 것은 실은 야키니쿠(燒肉)점, 즉 일본의 불고기점 2만 개 중에서 절반 이상을 조총련계도 포함한 在日동포들이 운영하고 있잖아요. 그렇다고 제가 일본 TV에 나가서 「우리 동포 불고기집에 와 달라」고 말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이어지는 회고담이다.

『고이즈미 총리가 오고, 주요국 駐日대사들이 한자리에 모인 만큼 외교효과가 크죠. 관례에 따라 호스트인 제가 3분 정도의 스피치를 했습니다만, 그때 재미있는 조크를 한마디 했습니다.

「저는 거의 매일 와규(和牛)를 먹는데, 총리 각하를 모신 오늘 저녁만은 수천만 분의 1 확률을 생각해서 미국 쇠고기로 음식을 마련했습니다」』

― 외교적 유머를 구사하셨군요.

『하나는 일본의 광우병 만연에 대한 경고 또는 우려를 은근히 표현한 겁니다. 그러나 「제가 거의 매일 믿고 먹고 있다」고 했으니까 일본 쇠고기를 폄하한 것은 아니거든요.

그러면서도 일본 총리, 당신은 대단한 귀빈이기 때문에 수천만 분의 1 정도의 위험을 막기 위해 미국 쇠고기를 재료로 사용한 것이라 하여 외교적 의례를 행간에 깔고 할말을 했던 겁니다. 마침내 고이즈미 총리도 폭소를 하는 재미있는 자리가 되었습니다』


盧武鉉 대통령이 불쾌한 까닭

― 고이즈미 총리는 사무라이 같은 캐릭터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러니 盧武鉉 대통령과 야스쿠니 神社 참배문제로 부딪히는 것 아닙니까.

『야스쿠니(靖國) 신사 참배와 관련해서 먼저 말해 두어야 할 것은 金大中 대통령과 고이즈미 총리 사이에 약속이 하나 있었던 것입니다. 제3의 추도시설 건립 문제를 검토하기로 했죠. 그러면 일본을 방문한 외국원수도 참배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후쿠다 당시 관방장관이 私的(사적)으로 주도한 간친회에서 각계의 의견을 듣기도 했어요. 후쿠다씨는 본인이 「참배해선 안 된다」는 분이어서 일을 추진하기가 비교적 쉬웠을 겁니다. 간친회는 고이즈미 총리도 하라고 했는데, 그것이 결국 일본 국내 사정에 의해 有耶無耶(유야무야)되어 버렸어요』

― 그것이 정식 외교문서의 합의사항은 아니지오.

『두 頂上이 말을 주거니 받거니 하는 과정에서 형성된 구두합의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頂上 간의 구두합의가 안 지켜졌습니다. 당연히 盧武鉉 대통령의 입장에서 보면 불쾌한 일이에요. 그 문제를 진지하게 검토했다면 양국 頂上의 관계가 이렇게까지 나쁘게 되지 않았을 겁니다. 제3의 추도시설 건립의 구두합의는 안 지키고 총리 본인이 매년 야스쿠니 신사에 가니까 우리 대통령으로선 韓日 정상회담을 거부한 거죠』

― 그것은 고이즈미 총리의 성격 탓입니까, 아니면 그의 역사인식이 그런 겁니까.

『반반일 거예요. 그는 自民黨 총재선거 때 「8월15일 당일에 참배하겠다, 누가 뭐라고 해도 나는 가겠다」라고 공약했습니다. 그 약속이 자신의 융통성을 스스로 꽁꽁 묶었다고 봅니다. 지금까지 행태를 보면 그가 오는 9월에 총리를 그만두기 전에 또다시 갈 가능성이 높습니다. 따라서 현 시점에서 韓日 정상 레벨의 신뢰는 붕괴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고이즈미 총리 스스로는 「두 번 다시 전쟁을 하지 않고 평화를 기원하면서 참배했다」고 말해요. 이런 말을 중국이나 한국이 받아들이겠어요? 중국은 냉소하고, 우리는 진정성을 의심합니다. 야스쿠니 신사참배 문제가 고이즈미 재임기간 중에는 풀릴 가능성이 거의 없습니다』


야스쿠니 神社 문제

― 일본은 야스쿠니 神社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려 합니까.

『이미 해답이 나와 있어요. 우선, 일본의 요미우리(讀賣)신문이 반대해요. 그것이 어떤 신문입니까. 보수적이고 가장 판매부수가 많은 일본의 主流 신문이죠. 그 회장 겸 주필이며 일본 정계에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와타나베(渡邊)씨가 「뉴욕 타임스」 등과의 인터뷰에서 단호히 「가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또하나, 일본 역대 총리들 중 처음으로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한 나카소네씨는 주변국이 반발하자 그 후엔 참배하지 않았어요. 나카소네라면 일본 보수의 최고 원로이거든요. 그런 나카소네씨가 「分社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하든지, 제3의 추도시설을 건립해야 한다」고 충고하고 있어요. 그 밖에 「아사히(朝日)신문」은 말할 것도 없고, 최근 여론조사를 보면 일본 국민의 53%가 총리가 야스쿠니 신사에 참배하는 것을 반대했습니다』

― 그쯤 되면 고이즈미 총리가 고집을 꺾을 만도 한데요.

『저는 이 문제에 대한 일본 측의 답이 나올 것을 기대합니다. 그것이 한국과 중국을 만족시키는 수준일지는 몰라도. 그러나 현 시점에서 分社도 어렵고, 야스쿠니 神社를 대신하는 제3의 추도시설 건립도 유족회의 반대 때문에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 중국은 어느 수준이면 야스쿠니 神社 문제를 양해할 것 같습니까.

『중국은 대단히 구체적으로 얘기합니다. 총리, 관방장관, 외무대신은 가지 말라는 겁니다. 셋만 안 가겠다면 中·日 정상회담도 할 수 있는 것으로 봅니다. 제가 지난 1월에 후진타오·우방궈 등 중국 지도자를 만났어요. 단호하던데요』

― 오자와씨가 이번에 제1야당인 民主黨 당수로 뽑혔지요.

『오자와씨는 「중국과 한국을 중시하자」고 말합니다. 그는 일본의 국가목표와 관련하여 「보통국가」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한 정치인입니다. 보수 성향이라는 점에서 오자와는 고이즈미 총리와 크게 다르지 않지만, 야당 당수로서 A級 전범의 分社를 강력히 요구하고 있어요.

이렇게 제1야당 당수와 보수적인 정계원로 나카소네씨, 그리고 일본 정계를 움직이는 와타나베 주필이 압력을 가하는 분위기 속에서 오는 9월에 등장할 다음 총리는 어떤 스탠스를 가져야 하는지, 어느 정도 답은 나와 있는 것입니다』


「次期」 경쟁에 나선 아베와 후쿠다의 역사인식

― 다음 총리는 누가 유력합니까.

『현재의 국민적 인기로는 아베가 앞섭니다. 그러나 아직은 몰라요. 어느 순간에 국면전환이 될는지』

― 후쿠다는 1970년대에 다나카 가쿠에이(田中角榮: 1972~1974년 총리 역임)와 당권과 정권을 다툰 보수 本流의 후쿠다 다케오(1976~1978년 총리 역임)의 아들입니다. 그의 역사인식은 어떠합니까.

『후쿠다씨가 총리가 되는 경우 그는 야스쿠니 神社 참배를 하지 않을 것입니다』

― 아베는 어떻습니까.

『사실은 아베씨가 나서 역사문제를 풀어 가면 좋지요. 왜냐, 그 사람의 보수성에 관해 누구도 의심하지 않는 만큼 일본 국민들을 설득하기가 오히려 쉬울 것입니다. 일본에게 한국과 중국은 중요한 나라인 만큼 그의 현명한 선택이 기대됩니다』

― 그런데도 아베는 역사인식에서 고이즈미와 궤도를 함께하고 있어요. 총리가 되려고 고이즈미의 눈치를 보는 것 아닙니까.

『아베는 고이즈미보다 더 信念(신념) 보수주의자입니다. 그에 비하면 고이즈미가 오히려 脫이념적이에요. 고이즈미 총리의 경제보좌관 중에는 左派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아베가 고이즈미보다 더 이념적으로 더 보수죠. 어떻든 지금, 와타나베 주필은 고이즈미 총리에게 대놓고 「무식하다, 역사 공부를 하라」고 야단치는 데도 고이즈미는 그래도 끄떡도 안 해요』

― 야스쿠니 神社 참배와 관련한 우리 정부의 입장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중국처럼 총리·관방장관·외무대신의 3人만 안 가면 된다고 하지 않습니다. 야스쿠니 神社 참배 자체를 반대해요』

―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곳엔 도조 히데키(東條英機) 등 14명의 A급 전범이 합사되어 있거든요. 14명 중 도조를 포함한 7명은 사형을 받았고, 나머지 7명은 복역 중 또는 복역 후에 사망했습니다. 야스쿠니 신사에 A급 전범이 합사되어 있는 만큼 총리나 각료들의 참배를 반대하는 것입니다』


『역사연구는 깊고, 역사의식은 결여』

― 일본 지식인 사회의 생각은 어떠합니까.

『일본만큼 역사연구가 量的으로 많고 質的으로 깊은 나라가 이 지구상에서 드뭅니다. 그런데 이렇게 역사에 대한 연구가 많고 깊은 나라에서 어떻게 이처럼 역사의식이 결여되어 있나, 저는 일본인들에게 이것이 의문이라고 말합니다』

― 왜, 정치지도자는 역사의식이 결여되어 있다고 보십니까.

『일본인은 기억하고 싶지 않은 역사에 대해 망각의 방식을 너무 안이하게 선택해요. 그건 일본인의 心性과도 관련된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忘年會(망년회)」는 우리나라 사람도 따라하지만, 원래 일본말입니다.

역사 연구는 많은데 역사의식은 결여되어 있다 -- 정치지도자는 더욱 심합니다. 이것은 아마도 대중적 인기를 의식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 일본은 어떤 나라라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일본을 「보수적인 너무나 보수적인 국가」라고 생각합니다. 왜냐, 全지구상에 지금 200개가 넘는 나라가 있는데, 적어도 지난 1500년 동안 왕조가 단 한 번도 안 바뀐 나라라면 일본뿐입니다. 물론 사무라이와 다이묘(大名)의 흥망성쇠는 있었지만, 「萬歲一系(만세일계)」의 神通(신통)한 나라인 것입니다』

― 일본의 明治維新(명치유신)을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명치유신의 公式 영어명칭은 「메이지 Revolution(혁명)」이 아니라 「메이지 Restoration(復元)」입니다. 명치유신은 天皇에게 권력과 권위를 부여해서 天皇을 중심으로 근대국가를 만들었던 것입니다. 중앙집권적 네이션 빌딩은 큰 발전이긴 하지만, 근대적 시민혁명과는 전혀 다르지요. 따라서 明治維新의 이념도 보수입니다. 1868년 明治維新을 선언한 이래 지금까지 140년간 일본에서는 단 한 번도 보수 基調(기조)가 바뀐 적이 없습니다』

― 패전 후 美軍 점령기 7년은 어떻습니까.

『美 점령기에는 兩面을 지녔습니다. 맥아더 장군에 의해 군국주의의 뿌리가 뽑힌 것은 엄청난 민주화 개혁이었습니다. 한편, 철저한 反共(반공)이란 점에서 보수입니다. 맥아더는 천황을 전범재판에 기소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천황에겐 20개 사단의 힘이 있다」고 했습니다. 천황을 反共의 방벽으로 판단한 거죠』

― 맥아더의 反共 민주주의를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맥아더가 1946년 1월에 일본의 농지를 개혁했어요. 맥아더는 농지개혁을 「가장 효과적인 反共정책」이라고 말했습니다. 그 점에서 맥아더는 탁월한 군인정치가입니다. 의회민주주의의 정착을 위해 자작농을 창출하는 농지개혁이 필요했던 겁니다』

― 미군 점령기에 일본 사회당의 카다야마 테즈(片山哲) 총리가 최초의 연립내각을 조각해 10개월간 운영한 것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미군 점령下였던 만큼 맥아더의 영향력에서 벗어날 수 없었지요. 카다야마의 사회당 내각도 보수 기조엔 아무런 변화를 가져올 수 없었습니다.

그 후 자민당의 요시다(吉田茂: 1948~1954년 총리 역임) 내각이 들어선 이래 일본에서는 단 한 번도 수평적인 정권교체가 없었습니다. 1994년 6월 사회당의 무라야마(村山富市) 당수가 총리가 되었지만. 그때도 自民黨이 원내 과반수를 차지하지 못했다뿐이지 원내 제1당이었습니다.

무라야마는 「敵이 없는 無慾(무욕)의 사람」이라 自民黨·사회당·사키가케의 3당 연립정권의 총리가 된 거예요. 사회당 당수 시절의 무라야마는 「관료정치」를 비판했지만, 총리 재임시에는 정책의 관료 의존도가 오히려 더 높았습니다』

― 아득한 古代에 성립된 왕조도 천황의 힘이 있느냐 아니냐의 차이는 있지만, 단 한 번도 교체된 적도 없잖아요.

『그러니까 일본을 「보수적인 너무나 보수적인 나라」라 해도 지나친 평가가 아닙니다. 全세계에 이런 사례는 없습니다. 국민소득 3만5000달러가 넘는 선진국에서 이거 놀라운 일 아닙니까. 바로 이런 일본을 잘 보아야 해요. 이건 우리가 좋든 싫든 현실이에요. 이런 보수 일본과 교섭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데 우리들의 어려움이 있는 겁니다』


현대 한국인이 지닌 두 가지 不可思議

― 한국인에겐 두 가지 不可思議(불가사의)한 面이 있다고 합디다. 하나는 광복 이후 自己成就(자기성취)를 과소평가한다는 겁니다. 다른 하나는 세계에서 일본을 우습게 아는 유일한 나라라고 합디다. 일본의 실력은 어느 정도로 보십니까.

『현재, 일본의 1인당 국민소득이 3만5000달러가 넘습니다. 1만 달러가 떨어져도 독일의 국민소득과 비슷하죠. 그만큼 요지부동한 세계 2위의 경제대국이 되었습니다. 또한 軍事費大國(군사비대국)이고, 잠재적인 군사대국입니다. 핵무기도 언제든 만들 수 있어요』

― 한국인과 일본인의 특성을 대비해 보면 어떻습니까.

『일본인의 행동양식을 보면 상황 의존성이 강해요. 언제나 당시의 대세에 따르지요. 너무나 현실적이에요. 우린 좀 달라요. 원칙과 명분을 중시하는데, 그 때문에 우리는 얼마나 많은 것을 잃었습니까. 조선왕조와 明治維新 이전의 일본이 다같이 쇄국을 했다지만, 일본은 서양의 정신만 거부하고 테크놀로지는 받아들인 반면에, 우리는 둘 다 거부했습니다. 이건 큰 차이예요.

우리는 약 200년간 완벽한 쇄국으로 이념과 명분의 도그마에 빠졌지만, 일본인에게는 그런 도그마가 없어요. 일본인은 自己變身(자기변신)을 빠르게 하죠. 1945년 8월14일까지 「英美鬼畜(영미귀축)」을 외치던 일본인들이 불과 며칠 사이에 점령군사령관 맥아더를 영웅 취급했잖아요. 이것이 일본인입니다』

― 우리 사회 일각에서 나돌고 있는 말 「일본은 없다」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일본은 세로 사회이지, 가로 사회가 아닙니다. 위·아래의 질서, 오야붕(親分)·꼬붕(子分)이 뚜렷한 수직적 규범사회예요. 그러니까 진정한 의미의 데모크라시를 하기 어렵다는 비판을 듣기도 합니다. 일본은 明治維新 이후 140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민주주의를 학습하고, 우리는 정부 수립 이후 40년 만에 민주주의를 쟁취한 아시아 최초의 나라가 되었습니다.

이런 문제에도 불구하고 왜 일본을 배워야 하는가. 그것은 일본이 아시아에서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가장 선진적으로 성취한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민주적 규범의 내면화, 즉 시민의식의 성숙도에서 일본은 앞서 가는 나라입니다』


韓日 양국 지식인이 연대해 發信할 수 있는 메시지

― 그러면 한국과 일본은 앞으로 어떻게 가야 합니까.

『全세계를 둘러봐도 국민의 평균적인 교양수준이, 이것은 서양적 교양과 동양적 교양을 겸비한 균형잡힌 지식을 말하는 것입니다만, 일본인과 한국인만 한 국민은 드뭅니다. 한국과 일본에서는 초·중·고등학교, 대학과 대학원에서 쉴 새 없이 서양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서양에는 소수의 탁월한 동양 전문가가 있으나 평균적인 서양 지식인의 동양에 대한 이해는 한심할 정도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에서 헤겔, 마르크스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현대의 평균적 서구 지성들의 동양에 대한 무시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이런 무시는 일차적으로 無知(무지)에서 출발하는 겁니다. 그에 비하면 일본과 한국 지식인의 서양에 대한 지식은 우리 스스로가 냉소하고 있는 수준에 비해 크다고 하지 않을 수 없어요.

이런 상황에서 한국과 일본의 지식인이 동·서양을 아우른 지식과 교양에 바탕해 제3의 정신·사상·문화에 대한 전망을 내놓을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고 있습니다. 양국의 지식인이 연대해 發信(발신)할 수 있는 메시지는 상당히 클 것으로 봅니다』

― 훈련되지 않는 국가지도자가 등장하면 국익을 망치기 쉽습니다. 盧武鉉 대통령과 고이즈미 총리는 서로 너무 개성이 강해 부딪히는 것 아닌가요. 역사문제에 대한 盧武鉉 대통령의 對日 강경책을 국내 정치용·선거용이라는 일본 정부의 내부문서가 언론에 공개되어 물의가 빚어지기도 했습니다.

『그건 과한 것 같습니다. 盧武鉉 대통령의 역사인식은 일관되고 진지해요. 일본 측에서 야스쿠니 神社에 대신하는 제3의 추도시설 건립을 진지하게 논의했다면 韓日 정상회담을 재개했을 거예요. 盧武鉉 대통령은 야스쿠니 神社참배 문제에서 조금도 양보할 생각은 없을 것입니다』


『한국의 힘이 실린 통일엔 반대하지 않을 것』

― 일본이 남북통일을 바라지 않는다는 견해도 있는데요.

『1970년대만 해도 일본 지도자들은 남북통일을 바라지 않았을 겁니다. 한반도가 통일되면 공산화로 간다고 보았거든요. 그런 관성과 타성이 지금도 일부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통일된다면 그것은 한국의 힘이 실린 통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일본으로서는 반대할 이유가 없는 겁니다』

― 韓日관계에서 오는 9월이 중요하고, 그때까지 그 추이를 주시해야 한다고 하셨는데,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일본 국민의 53%가 야스쿠니 神社 참배를 반대하고 있다는 것은 앞에서 얘기하지 않았습니까. 야스쿠니에 관한 저의 論說을 일본의 미야기 여자대학의 논술시험에서 예문으로 출제한 바 있습니다. 저의 칼럼이 일본 명문대학의 논술시험 문제였으니 개인적으로는 영광입니다.

저의 논지는 자기 나라에 대한 애국심과 이웃 나라에 대한 배려를 공존시킬 수 있는 리더십에 관한 것입니다.평균적인 일본인은 저의 논지를 받아들인다는 얘기 아닙니까』

― 한국인과 일본인의 역사인식을 공존시킬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인 것이군요.

『일본 지식인은 합리적인 논리를 받아들입니다. 자칫 일본의 내셔널리즘을 자극하면 더 우경화될 우려가 있습니다. 사실, 한국과 중국이 반대하면 일본 외교는 딜레마에 빠집니다. 문제를 풀어야 하는 쪽은 일본입니다.

「1998년 韓日 파트너십 선언」을 우리 정부가 어긴 일이 없습니다. 원인 제공은 일본이 했습니다. 韓國이 원칙을 버리고 너무 기술적으로 타협할 필요가 없는 겁니다. 그러니까 일본의 답을 기다려야 합니다』

― 韓日관계는 좀 잠잠하다 싶으면 으레 일본 지도층의 망언이 튀어나오고 우리의 응전으로 온 나라가 불끈하다가 일본 측의 어물쩡한 사과로 미봉되어 왔습니다.

『일본 총리·관방장관·외무대신·문부대신 등 역사문제와 직접 관련돼 있거나 일본을 대표하는 인물의 망언이나 부적절한 발언은 단호히 비판해야 합니다. 이건 「1998년 韓日 파트너십 선언」의 위반입니다. 그러나 모든 일본 정치인의 역사발언에 一喜一悲(일희일비)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나라가 그런 작은 나라가 아닙니다. 아니, 왜 일본사람 자기들 나름의 역사 얘기를 우리 정부가 일일이 반응해요? 예컨대 東京都知事 이시하라씨의 망언은 예측 가능한 것인데, 그가 일본을 대표하는 사람도 아니고, 당국자도 아닌 만큼 「당신은 원래 그런 사람」이라며 무시하는 것이 잘하는 대응이라고 봐요』


『민족주의 대결을 몰아가는 것은 현명치 못해』

― 외교전략상 그렇다는 것입니까.

『우리 정부든 언론이든 쟁점이 있다고 해도 너무 2분법적으로 접근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우리가 합리적으로 설명하면 들어 줄 일본 국민이 꽤 많습니다. 후쇼社 교과서 채택률 0.039%가 그것을 말해 주지 않습니까.

다시 강조하지만, 한국과 일본의 민족주의 대결로 몰고 가는 것은 현명치 못합니다. 야스쿠니 神社에는 자기 나라를 위해 죽은 수백만 영령이 봉안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그중 A급 전범 14명만 문제삼는 것입니다. 일본 국민 전체를 몰아붙이면 안 됩니다. 소수 정치인의 역사의식 결여에 초점을 모아야 합니다』

― 고이즈미는 郵政(우정) 민영화에 대한 반대 세력을 꺾기 위해 중의원(下院)을 해산한 뒤 총선을 해서 압승했습니다. 오는 7월의 참의원(上院) 선거 결과를 어떻게 예상하십니까.

『현재 중의원 의석은 自民黨과 公明黨을 합치면 3분의 2가 넘습니다. 그러나 이번 참의원 선거에서는 지난번 중의원 선거처럼 압승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일본에서는 상·하원 의석 각각 3분의 2 이상이 되어야 헌법개정이 가능합니다.고이즈미는 內政에서 성공적으로 돌파했지만, 외교 과제 셋 모두 실패했습니다.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 진출과 북방영토 회복에 실패했고, 北·日 관계 정상화도 눈에 안 보입니다』


韓·中·日 문화교류를 조정하는 수단

― 日·中의 사이에 낀 우리의 역할은 어떻게 해야 바람직하다고 보십니까.

『일본 지도자들을 만나 보면 중국에 대해선 노골적으로 또 강하게 비판해요. 중국 지도자들의 일본에 대한 태도도 너무 경직되어 있는 것 같아요. 이렇게 주어진 여건 속에서 한국은 어떻게 할 것이냐. 저는 머지않은 장래에 야스쿠니 神社 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되면 3국 頂上회담을 정례화하면 좋다고 봅니다. 2개국 사이에 끼어 있는 한국으로선 3국의 평화공존을 위한 역할로 韓·中·日 문화교류를 주선하는 것도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저의 오래된 복안입니다만, 韓·中·日 동북아 문화센터를 한국에 두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 센터를 중국에 두면 중국 주도라고 일본이 반대하고, 일본에 둬도 중국이 반대하겠지만, 한국에 둔다면 두 나라가 반대하지 않을 겁니다. 여기서 우리는 두 巨人을 조정하는 역할을 찾을 수 있습니다』

― 崔선생님은 야스쿠니 神社 문제에 대해 오는 9월의 「변화」를 기다리면서 우리의 주장을 견지하는 것이 좋다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독도가 자기 땅이라면서 일본 교과서에 올리려는 것에 대해선 어떻게 대처해야 좋겠습니까.

『우리로선 무엇보다 독도를 實效的(실효적)으로 점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내실화하면 됩니다. 일본의 도전적 발언에 대해서는 적절한 사람이 적절한 타임에 적절하게 반박하는 겁니다. 어떻게 보면 일본의 일부 지도자들은 우리 국민들의 분기탱천을 노릴지 모릅니다. 그래야 독도가 국제분쟁 지역으로 부각되거든요』

崔교수의 좌우명은 「求同存異(구동존이)」이다. 求同存異는 『서로 공통점을 구하고, 다른 점에 대해서는 유보해 두고, 대화를 계속하여 공통점을 넓혀 나가는 것』이라고 한다.

『저의 좌우명 求同存異는 학자였던 조부께서 물려주신 가훈이기도 합니다만, 그것을 철학사상으로 말하면 中庸(중용)이 되는 것입니다』

崔相龍 교수에게 中庸은 그의 인생철학인 동시에 정치철학이며, 求同存異는 그것을 실천하려는 마음가짐으로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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