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조선 기사

鄭淳台 기자의 역사현장 탐방 - 토박이 연구가와 同行한 母岳山에서 回文山까지

湖南의 꿈과 恨
그 뿌리를 찾아서

글 정순태 기자  2006-0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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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31일 낮 12시, 金山寺(금산사) 주차장 마을에 있는 김제식당에 들어가면서 院坪(원평: 김제시 금산면 원평리)에 사는 향토사연구가 崔洵植(최순식) 선생에게 휴대전화를 걸었다. 崔선생은 『마침 충청도 답사자들과 함께 玉井湖(옥정호: 전북 정읍시·순창군·임실군에 걸쳐 있는 저수지) 일대를 둘러보고 있다』면서 『오후 3시 母岳山(모악산) 금산사 미륵전 앞에서 만나자고 했다.

전라도에서 모악산은 「엄뫼」라고 불린다. 「어미(어머니)山」이라는 뜻이다. 필자는 眞表(진표), 甄萱(견훤), 鄭汝立(정여립), 全琫準(전봉준), 姜甑山(강증산)이란 역사인물의 자취를 통해 호남정서의 뿌리에 접근하기 위해 모악산을 찾아갔다.

이번 답사에선 향토사연구가인 최순식 선생과 동행하기로 했다. 금년 74세인 崔선생은 모악산 아랫동네인 원평의 부농 집안에서 태어나 전북大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금산중·고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았으며, 교직 퇴임 후에는 모악향토문화연구회 회장, 금산마을금고 이사장 등을 지낸 분이다.

특히 그는 1992년 8월, 한국사상사학회에 「百濟遺民(백제유민)의 저항운동과 미륵신앙의 변천 과정-모악산 금산사를 중심으로」라는 제목의 논문을 발표했다. 10여 년 전부터 필자는 전북지방으로 여행할 때마다 崔선생에게 많은 신세를 져 왔다.

주차장에서 금산사까지는 슬슬 걸어서 15분 거리다. 김제식당에서 느긋하게 산채비빔밥으로 요기를 하고 있는데, 이번에는 崔선생으로부터 휴대전화가 걸려 왔다. 그는 『다른 사람의 승용차에 편승해 泰仁(태인: 정읍시 태인면) 버스정류소를 향해 올라간다』면서 필자에게 『그리로 내려오라』고 했다. 태인이라면 원평과 옥정호의 중간지점이다.

금산사 주차장에서 4km를 내려와 원평우체국 앞에서 좌회전하면 바로 1번국도이다. 이곳 1번 국도를 따라 100여m의 길가와 안길에 지금도 5일장이 열리는 원평장터가 있다. 원평장터는 동학농민군 봉기의 진원지였다. 그 이유와 경과에 대해서는 뒤에서 상술할 것이다.

대한민국 1번 국도는 조선시대의 3大路(대로: 호남대로)이다. 3大路의 길목이었던 원평은 당시 주막집만 해도 60여 개소에 들어섰던 교통의 요지였다. 조선시대엔 국가기간도로인 1·2·3·4大路라 해도 노폭은 8자(약 2.5m) 정도에 불과했다.

지금의 1번 국도는 아직도 일제 강점기의 신작로 그대로여서 그 노폭이 겨우 10여m다. 현재, 원평 마을 중심가를 우회하는 1번 국도의 4차선 공사가 진행중에 있다. 원평장터를 지나 1번 국도를 300m쯤 남행하면 길 왼쪽 낮은 산에 무덤들이 산재해 있다. 1895년 동학군이 일본군의 대포 공격에 풍비박산했던 마지막 패전 장소다.

이곳을 지나면 김제시역이 끝나고, 정읍시 감곡면 龍湖里(용호리)이다. 감곡면이라면 동학농민군의 최고지도자 전봉준의 성장지다. 泰仁 출신인 전봉준은 소년기에서 청년기까지 감곡면에서 살며 서당에 다녔다. 따라서 원평은 이 농민혁명가의 인격과 인맥이 형성된 마을이다.

용호리에서 20여 리만 달리면 태인 버스정류소이다. 태인 버스정류소에서 기다리던 崔선생과 만났다. 崔선생은 수년전에 교통사고로 다리와 어깨를 다쳤다고 했지만, 배낭을 짊어지고 걷는 모습을 뵈니 백발만 좀 늘었을 뿐이지 여전히 젊은이처럼 강건하다.


풍요해서 되레 「서러운 땅」
한국 유일의 3층 법당인 금산사의 미륵전(국보 제62호).

먼저, 벽골제(사적 제111호)부터 둘러보기로 했다. 김제 만경평야는 우리나라에서 제일 넓은 들이다. 이 들에 물을 대주었던 저수지가 벽골제이다. 지금의 김제 만경평야의 농업용수는 섬진강 상류의 물을 막아 모은 玉井湖에서 공급된다.

벽골제(김제시 부량면 月昇里) 가기는 원평에서보다 태인에서가 더 가깝다. 백골제는 제천의 의림지, 밀양의 수산제와 더불어 三韓(삼한)시대에 이미 축조된 저수지로 전해 온다. 「三國史記(삼국사기)」에는 신라 흘해왕 21년(330)에 쌓은 것으로 되어 있지만, 당시에는 이 지역이 백제 혹은 마한 영토였을 것이니만큼 축조 연대를 백제 비류왕 27년이라 해야 더 자연스러울 것 같다.

태인에서 30번 국도를 따라 40리쯤 서진하면 禾湖里(화호리). 화호리 3거리에서 우회전해 10리쯤 북진하면 벽골제이다. 벽골제 가는 길 좌우로 펼쳐진 들이 만경평야에서도 가장 기름지고 넓은 곳이다. 崔선생이 평야가 끝나는 지평선에 봉긋 솟은 산 하나를 가리키며 우스갯소리 하나를 소개했다.

『저기 저 나지막한 산을 잣뫼라고 불러요. 옛날 옛적, 어느 父子가 나무를 하러 함께 저 잣뫼에 올라갔다가, 아들이 사방을 척 둘러본 뒤 「아버지, 우리나라가 이렇게 넓은지 몰랐당게요」라고 감격했다는 얘기가 전해져 오는 곳입니다』

벽골제에서는 매년 벼가 익을 무렵에 「김제 지평선 축제」가 열린다. 지평선 축제는 고대 한반도 最古·최대 수리시설이었던 벽골제를 배경으로 민속놀이·右道(우도)농악, 「지평선 쌀」 등 쌀농사를 체험할 수 있는 여러 행사가 열린다.

『만경평야는 「풍요로워서 오히려 서러운 땅」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소작농민과 지주 사이의 분배를 둘러싼 갈등과 모순, 그리고 일제강점기의 수탈로 농민들의 눈물방울이 밴 땅이기 때문이에요. 여긴 평야가 좁아 자작농이 많았던 경상도와는 달라요. 전라도에는 소수의 지주가 절대다수의 소작농을 부렸거든요. 일제강점기엔 아카키(赤木)란 이름의 일본인이 여기서 수백만 평에 달하는 대농장을 경영했습니다』

벽골은 김제의 백제 때 지명인 「볏골」을 한자로 표기한 것이라고 한다. 통일신라시대 원성왕 6년(790)에 증축되었고, 고려 현종 및 인종 때 개축되었다. 특히, 원성왕 때 반란을 일으킨 張保皐(장보고)의 淸海鎭(청해진: 전남 완도)이 패망하고, 그곳 유민들이 이곳으로 끌려와 「물잣놈」이라 불리며 벽골제 증축에 강제 동원되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벽골제는 조선 태종 15년(1415)에 다시 쌓았으나 세종 2년(1420)에 심한 폭우로 유실되었다. 이후 일제강점기인 1925년에 동진농지개량조합에 의해 이 제방을 모악산에서 발원하는 원평천의 물을 끌어들여 관개용 수로로 개조했다. 현재의 벽골제는 제2수문 장생거와 제4수문 경장거의 흔적이 남아 있다. 장생거 둑에 올라가 이제는 옛날의 모습을 잃어버린 샛강 정도의 벽골제를 잠시 둘러보았다.


대한민국과 人共의 경계선 구절치
김제시 부량면 월승리에 위치한 벽골제 水門의 흔적. 일제에 의해 벽골제가 헐리면서 水門 자리에 세워졌던 돌기둥만 남았다.

지금, 만경평야의 농업용수는 섬진강 상류를 막아 北流(북류)시키는 옥정호의 물이다. 그렇다면 김제 만경평야를 적시는 옥정호를 둘러볼 이유가 생겼다.

벽골제(김제시)를 뒤로 하고 태인을 거쳐 七寶面(칠보면: 정읍시)의 九節峙(구절치) 고개를 넘었다. 구절치 옆으로는 섬진강의 물을 역류·낙하시켜 전기를 생산하는 칠보발전소가 보인다. 6·25 당시, 칠보발전소는 빨치산의 공격으로부터 반드시 死守(사수)해야만 했던 1급 국가기간시설이었다.

구절치 너머의 山內面은 빨치산이 지배하는 이른바 「인민공화국」이었고, 구절치 이쪽 칠보면은 우리 공권력이 통하던 「대한민국」이었다.

『그때 빨치산의 보투(보급투쟁: 생필품 약탈)에 견디다 못해 구절치를 넘다가 빨치산에게 붙잡혀 날창으로 학살당한 山內面 주민이 많았습니다. 머슴이 완장을 차고 어제 주인의 배에다 죽창을 찌르는 아수라장이었거든요』

지금 구절치는 포장도로지만, 그때는 장작을 실어 나르는 트럭 한 대가 간신히 지나다닐 만한 험한 산길이었다. 구절치를 넘어 산내면에 이르고 보니 필자의 마음이 변했다. 기왕에 여기까지 왔으니, 먼저 빨치산 전북도당사령부가 소재했던 淳昌郡(순창군) 回文山(회문산)을 답사하고, 내려오는 길에 옥정호를 둘러보기로 했다. 이 일대 골짜기와 산기슭엔 우리 토벌대와 빨치산의 피어린 교전지역이 산재해 있다.

715호 지방도로를 타고 정읍시 산내면을 지나 순창군 경계 안으로 들어섰다. 「오봉휴게소」라는 간판이 붙은 시골 가게가 있고, 그 앞 빈 터에 널찍한 평상 하나를 놓고 촌로들이 앉아 정담을 나누는 모습이 보였다. 崔선생과 필자는 길가에 승용차를 세워 놓고, 노인들 사이에 끼어들었다. 수인사를 차린 뒤 81세의 노인에게 물었다.

―여기가 1951년 봄에 주민들이 경찰대에게 학살당한 삼밭마을입니까.

『그렇소만』

―왜 그런 끔직한 일이 벌어졌습니까.

『전투경찰 10여 명이 이곳 민가에서 밥을 시켜 먹다가 빨치산의 급습을 받아 전멸한 사태가 발생했소. 나중에 전투대가 이곳 빨치산 하나를 생포했는데, 이 마을의 통비분자가 전투경찰대의 위치를 알려 주어 기습했다고 자백했당게요. 그 보복으로 경찰대가 몰려와 우리 마을 사람들을 39명이나 죽여 부렀소. 눈치빠른 통비분자들은 경찰대가 넘어오기 전에 죄다 산으로 튀었으니께 억울한 양민들만 그렇게 당한 거라오』


虛妄에의 열정
정읍시 칠보면에 위치한 七寶발전소. 섬진강의 물을 산 위로 역류시켜 발전한 다음에 농업용수 등으로 사용하는 다목적 댐이다.

마을 할머니 한 분이 『저런 얘기를 하는 저 영감도 실은 빨치산 동조자였다』고 崔선생에게 살짝 귀띔해 주었다. 그때는 공산주의의 實相(실상)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목청을 높이던 이념 과잉의 시대였다. 경찰과 대치해 진지를 굳힌 빨치산은 「赤旗歌(적기가)」를 소리 높여 부르기도 했다.

<민중의 기, 붉은 깃발은/ 전사의 시체로 쌓았노라/ 시체가 가시고 굳기 전에/ 우리들은 붉은 기를 지킨다/(中略) 비겁한 놈아, 갈려면 가라/ 우리들은 붉은 기를 지킨다>

광복~6·25 시기의 빨치산이나 좌익의 다수는 그들 나름으로는 공평하게 나눠 먹는 「사회주의 조국 건설」이라는 虛妄(허망)에의 열정을 불태웠다. 그들이 「역사의 줄」을 잘못 섰다고 해서 오늘의 잣대로 그들의 사람됨을 비난할 생각은 털끝만큼도 없다.

그러나 그들이 憧憬(동경)한 「사회주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지금은 김일성-김정일 父子를 신격화시키는 소수의 사회주의 귀족들만 특권을 누리고, 절대다수의 민초는 밥을 굶고 있다. 나쁜 것은 「사회주의 조국 건설」이 이제는 虛妄인 것을 알면서도, 아직도 金父子의 주체사상이란 유령을 퍼뜨리는 지금 우리 사회의 左派(좌파)들이다.

빨치산 대원들의 「赤旗歌」에 우리 경찰대대원들은 「경찰의 노래」로 응수했다. 누구 인생에서든 한창 총기 있게 마련인 국민(초등)학교에 다니던 무렵에 따라 배웠던 노래여서 필자는 지금도 그 가사를 기억하고 있다. 멜로디도 자못 장엄하다.

<무궁화 아름다운 삼천리 강산/ 고귀한 우리 겨레 살고 있는 곳/ 영광과 임무를 어깨에 메고/ 이 땅에 굳게 섰다, 민주경찰>

삼밭마을에서 승용차로 2, 3분 달리면 「피노리」라는 마을이 나온다. 원평전투에서 최후의 패전을 했던 전봉준이 이곳 민가에 피신하다 배신자의 밀고로 관헌에게 체포된 곳이다. 이곳 「전봉준 장군 被逮地(피체지)」는 현재 성역화작업이 진행 중이었다. 사당 앞뜰에는 전봉준의 行狀(행장)을 적은 안내판이 세워져 있는데, 「정읍 고부 출신 김경천의 밀고로 체포되어」라는 글귀 중에 「정읍」 부분이 쇠뭉치 같은 것으로 강타되어 구멍이 뻥 뚫려 있다.

崔선생은 『어떻든 전봉준 등 동학농민군의 5大將(대장) 모두가 싸움터에서 전사하지 않고, 은신 중에 관헌에게 체포되어 처형되었다』면서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호호탕탕, 3만 명의 농민병을 거느리고 결전의 고개 우금치(충남 公州의 요충지)를 넘으려던 장수의 末路(말로)로선 너무나 「쪼잔했다」는 것이다. 또한 어제까지 「형아」, 「아우야」 하던 사람이 다음날 아침에는 제 한 목숨 살기 위해 동지를 팔아넘기는 인간이란 동물의 사악함-이런 역사의 비극에 대한 짙은 허무감을 崔선생의 표정에서 읽어 낼 수 있었다.


回文山의 빨치산 사령부

전라도는 서쪽이 평야지대, 동쪽은 산악지대여서 東高西低(동고서저)의 지형이라고 한다. 「순창고추장」으로 이름난 순창군은 전라도의 동부지역으로 그 지세가 상당히 험하다. 雙置(쌍치)를 거쳐 783번 지방도로 타고 龜林(구림)을 이르러 郡道로 길을 바꿔 安亭里(안정리) 삼거리에서 좌회전해 회문산으로 올라갔다. 「회문산자연휴양림」이라 하여 입장료(어른 1000원, 주차료 3000원)를 받는다.

매표소를 지나 700m쯤 달리면 삼거리가 나온다. 여기서 꾸불꾸불하고 돌부리가 박힌 산길을 2km 남짓 오르면 헬기장이 있고, 여기서 차도가 끊긴다. 헬기장에서 북쪽을 바라보면 회문산의 최고봉인 큰지붕(837m)이 보이고, 그 뒤로는 장군봉(780m)과 깃대봉(775m)이 좌우에서 侍立(시립)해 있다. 헬기장에서 다시 삼거리로 내려와 「6·25 양민희생자 위령탑」을 참배했다. 이 지방에서 모악산은 「엄뫼」, 회문산은 「아버지山」이라고 한다.

위령탑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새겨져 있다.

<어쩌다가 이 산하가 동강났는가/ 겨레 사이 총 목숨 앗아간/ 동족상잔, 오욕의 역사여/ 후미진 어느 계곡, 이름도 지워진/ 외로운 혼백, 아직도 구천을 떠도는/ 흘러간 반백 년의 피맺힌 세월이여/ 봄이면 하얀 철쭉으로 피어나고/ 소쩍새 울음은 밤을 지새워도/ 돌아올 수 없는 幽冥(유명)의 길이여/ 피울음에 지친 그대들 영혼을 달래고자/ 여기 回文山에 큰 돌탑을 세우니/ 고이 잠드소서>

이 위령탑은 왜 그런지, 누가, 언제, 어떤 돈으로 세웠는지에 대해서는 밝혀 놓지 않고 있다. 위령탑을 참관한 뒤 「빨치산 전북도당 사령부」로 올라갔다. 빨치산의 유적지를 복원해 둔 곳이다.

「빨치산 사령부」 입구엔 그 시절의 참상을 돋을새김한 銅版(동판)이 나붙어 있다. 빨치산 대원이 우리 군경을 향해 정조준을 하고, 그 아래엔 난리통에 떠도는 민초들의 피란 행렬과 학살당한 양민들의 시체가 무더기로 쓰러져 있는 모습이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도대체 무슨 목적으로 이런 것을 만들어 두었는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안내판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본 시설은 이곳 회문산에 있던 빨치산 전북도당 사령부를 재현한 것으로서, ○○을 어지럽히고, 양민을 ○○하는 등 비인도적인 ○○을 자행하였던 바, 국군의 토벌작전으로 ○○하여 지리산 남부군과 합쳐지기 전에 처절한 생활상을 표현하였다.

2000년 6월25일 회문산자연휴양림>

○○부분은 누군가에 의해 뾰족한 쇠뭉치로 찍혀 글꼴이 완전히 사라져 버린 부분이다. ○○부분의 글자는 「치안」, 「학살」, 「만행」, 「도주」란 낱말을 차례로 넣으면 될 것으로 생각된다. 30평 남짓한 「빨치산 전북도당 사령부」의 아지트 내부로 들어갔다.

입구에는 밀랍인형의 빨치산 보초가 바깥을 향해 총부리를 겨냥하고 있다. 사령관실에는 빨치산 두목이 책상에 앉아 부하에게 뭔가 지시하는 장면이 표현되어 있다. 빨치산 대원들이 기거하는 아지트에는 부상자가 여성 간호대원에게 치료를 받는 모습, 총기를 정비하는 대원, 책을 읽는 대원 등의 모습이 實物大(실물대)로 재현되어 있다.


南部軍의 최정예 부대
李泰의 체험수기「南部軍」의 표지.「南部軍」상권의 主무대는 전북도당 유격대사령부가 위치했던 回文山이었다.

문득, 수년 전에 별세한 「南部軍」(1988년·두레)의 저자 李泰(이태)씨가 생각났다. 李泰씨는 「조선중앙통신」의 기자로서 全州(전주)에서 활동하다가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퇴로를 차단당해 바로 이 전북도당 빨치산 부대에 편입되었던 사람이다.

「남부군」은 최초로 공개된 빨치산 체험 수기로서, 발행 당시 空前(공전)의 베스트셀러였다. 그 상권에 등장하는 무대는 필자 李泰씨 자신이 소속된 전북도당 빨치산의 활동지역이었다. 그곳이 바로 회문산을 중심으로 한 雙置(쌍치)·德峙(덕치)·七寶(칠보)·雲岩(운암)·江津(강진)·靑雄(청웅) 등지다. 다음은 전북도당 빨치산 사령관에 대한 「남부군」의 기록 중 일부다.

<전북도당 위원장이며 전북도 유격대 사령관인 方準杓(방준표)는 그때 마흔살이 좀 못 돼 보이는 얼굴이 희고 해사한 중년의 사나이였다. 그는 원래 경북 태생의 철도 노동자였는데, 대구사건에 관련되어 월북한 후 특히 발탁되어 모스크바에 유학까지 갔다 온 말하자면 엘리트 당원이라는 대원들의 얘기였다. 몸집은 가냘퍼 보이는 편이었으나 차갑고 날카로운 인상을 주었다>

필자와 「남부군」의 저자 李泰씨는 좀 유별난 인연이 있다. 1988년 7월에 초판이 발간된 「남부군」 상·하권을 밤새워 읽은 필자는 다음날 아침, 출판사에 연락해 작가 李泰씨와의 인터뷰를 주선해 줄 것을 요청했다. 곧 이태씨로부터 연락이 왔다. 그가 인터뷰를 응락하면서 내놓은 요구조건은 그의 본명과 사진을 공개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는 전화 통화를 통해 『오후 3시 지하철 2호선 성내역 입구의 세 번째 기둥 밑에서 만나자』고 했다. 그의 말을 듣고, 필자는 이건 선요원과 빨치산 대원의 접선과 비슷하다고 느꼈다. 필자는 그를 만나자마자 미리 대기시켜 둔 택시에 태워 함께 필자의 집으로 직행했다.

당시, 그는 「李愚泰(이우태)」라는 본명을 세상에 드러내기가 매우 난감한 상황이었다. 이우태씨는 윤보선 후보의 대선 캠프에 文士로 참여한 代價(대가)로 제1야당의 전국구 국회의원을 한 번 역임한 데다 1980년 이후에는 金泳三(김영삼) 캠프를 지원하는 「민주산악회」의 주요 맴버로 활동하고 있었다.

약 네 시간에 걸친 인터뷰를 끝낸 후 필자는 그를 성내역까지 택시로 바래다 주면서 숨겨 간 카메라로 그의 모습을 찍었다. 그는 화급하게 운전기사에게 정차를 명한 다음 재빨리 하차해 도망쳤다. 필자는 그를 뒤쫓아가며 계속 셔터를 눌렀다.

그러나 필자는 그와의 인터뷰 기사에 그의 사진을 싣지는 않았다. 3년 후엔가, 이태씨와 필자는 함께 「실록작가회」라는 작은 모임의 멤버가 되었는데, 두어 달 만에 한 번쯤 그 모임으로 합석할 때마다 그는 필자를 「소 닭 보듯」 하다가 수년 전에 이승을 떠났다.

동행했던 崔선생에게 6·25 때 敵치하에서 어떻게 살았는지 물었다(당시 그는 18세였다).

『나는 지주집 아들이라 살아남기 위해 인민군이 시키는 대로 했습니다. 우리 집안은 좌익들에 의해 결단났거든요. 그들이 「김일성 장군의 노래」를 부르라면 남보다 더 크게 불러야 했습니다』

<장백산 줄기 줄기 피어린 자국/ 압록강 굽이굽이 피어린 자국/ 만고의 빨치산이 누구인가를/ 절세의 애국자가 누구인가를/ 아아, 그 이름도 빛나는 우리의 장군/아아, 그 이름도 빛나는 김일성 장군>

―敵 치하에선 저희 또래의 꼬마들도 선동꾼에게 불려 나가 「김일성 장군의 노래」를 배워야 했죠. 필자의 어릴 적 친구 하나는 적 치하에서 그렇게 배운 「김일성 장군 노래」를 수복 후 교실에서 흥얼거리다가 담임선생에게 들켜 매를 맞기도 했습니다.

『그 노래를 작사한 사람이 林和(임화)라는 월북시인이에요. 바로 그 林和는 6·25 직후, 김일성의 남로당 숙청 때 처형되었어요. 독재자에게 讚歌(찬가)를 지어 바친 시인의 末路(말로)-참 얄궂잖아요?』

崔선생과 필자는 「빨치산 사령부」 옆쪽의 계곡으로 내려가 아직도 차가운 물에 발을 담그고 마주 앉았다. 필자가 국군의 北進(북진) 때 유행한 군가 1절을 불렀다.

<아버지 어머니 안녕히 계셔요/ 까마귀 우는 곳에 저는 갑니다/ 38선을 돌파하여 태극기를 날릴 때/ 죽어서 백골로 돌아오리라>

崔선생이 필자가 모르는 2절로 응수했다.

<고향을 떠나온 지 2, 3년 되도록/ 부모님께 편지 못 해 가슴 쓰라려/ 피묻은 허리띠에 一字上書하오니/ 이 자식 보신 듯이 받아 주소서>


朴正熙 시대에 만든 대규모 관개시설

회문산에서 내려와 717번 지방도로를 타고 임실군 江津面을 거쳐 雲岩面으로 들어서 玉井湖 위에 걸린 운암교를 건넜다. 순창군·임실군·정읍시의 깊은 계곡에 길죽하게 조성되어 있는 옥정호는 절경을 이룬다. 옥정호는 수년 전에 준공된 진안군의 용담댐에 이어 전북 제2위의 담수량을 자랑하는 대단위 저수지다.

27번 국도를 따라 山外面(산외면: 정읍시)으로 진입하다가 「괄~괄~괄」 하는 소리에 놀랐다. 옥정호의 水門을 통해 농수로로 빠져나가는 물소리였다. 폭 10여m의 농수로를 따라 물이 쏜 화살처럼 세차게 흐른다. 이 물이 우리나라 최대의 들인 김제·부안 평야를 적시는 농업용수이다.

―물소리가 굉장한데요. 저것은 언제 만든 겁니까.

『일제 때 소규모 농수로가 개축되었는데, 그걸 5·16(1961년)이 나고 3년만에 몇 배 확장해 지금 규모가 된 겁니다』

산외면 쇠고기 단지에 들어가 정육점에서 쇠고기 한 근 반(2만1000원)을 샀다. 이걸 이웃 식당에 가지고 가면 양념값(5000원)만 지불하고 구워 먹을 수 있다. 崔선생과 필자, 그리고 필자의 답사 때면 운전기사로 자원봉사하는 朴군이 다 먹지 못할 만큼 푸짐한 양이었다.

거나해진 기분으로 원평으로 되돌아가 崔선생을 댁에다 모셔드리고, 필자와 朴군은 원평(김제시)과 정읍시의 경계선상에 위치한 청원모텔에 들었다. 다행히 청원모텔 208호실은 비어 있었다. 필자가 굳이 208호실을 찾는 까닭이 있다. 수년 전에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던 「신출귀몰의 大盜(대도)」 신창원이 이 방에 은신해 있다가 피검되었기 때문이다.

그날, 5월31일은 지방선거의 날이었다. 밤 9시20분에 청원모텔 208호에 들어가, KBS-TV, MBC-TV를 켜 보았지만, 화면 밑쪽에 호남지역의 개표상황만 알리는 작은 자막만 흘러나와 전국적인 개표상황은 파악할 수 없었다. 兩大 공영방송은 「그들만의 희망사항」과는 정반대의 선거 결과에 풀이 죽은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개표상황의 중계는 오히려 케이블 방송이 훨씬 적극적이고 상세했다. 전북과 전남에서만 열린당과 민주당이 「호남盟主(맹주)」 다툼을 벌였을 뿐, 전국적으로는 한나라당의 「싹쓸이」였다. 사실, 투표가 끝난 직후 출구조사의 결과가 나오고부터 전라도는 정적에 휩싸여 있었다.
김제-부안 평야에 농업용수를 공급하는 옥정호. 옥정호는 섬진강 상류의 물을 막아 역류시키고 있다.


「엄뫼」의 정수리에 박아 놓은 KBS의 송신시설
임진왜란 때의 승병장으로서 나라를 구한 雷默대사 處英(금산사 소장).

6월1일, 오전 8시 원평장터의 거북식당에서 崔선생과 만나 아침을 함께 했다. 3000원짜리 해장국이지만, 맛깔스런 산나물과 젓갈 등을 밥상에 수북이 올려놓았다. 이런 「대접」은 이곳 有志인 崔선생의 얼굴 때문이었을 것이다. 거북식당의 벽에는 가톨릭교의 큼직한 聖畵(성화)가 여러 장 붙어 있어 주인아주머니(그녀의 세례명은 金아네스였다)에게 그 까닭을 물어보았다. 온화한 얼굴의 金아네스씨가 답했다.

『우리(시댁) 증조부님이 대원군 집권시절에 박해를 받아 순교하셨어요. 10여 년 전, 바오로 2세 교황께서 來韓(내한)했을 때 저의 증조부 孫베드로님이 聖者로 諡聖(시성)되셨습니다』

해장국을 먹고 바로 금산사에 올라가 미륵전의 부처님을 배견할 터인데, 가톨릭 聖者의 후손 집에서 따뜻한 「아침 공양」을 받은 셈이었다.

이태훈 사진기자에게서 전화가 왔다. 그는 이날 새벽 2시까지 서울에서 개표현장을 취재하고, 귀가하지도 않은 채 금산사로 내려와 아침 6시부터 사진취재를 하고 있다고 했다. 금산사로 올라가면서 崔선생에게 물었다.

―서울시 25개 구청장과 경기도 108명 도의원 당선자 전원이 한나라당 소속일 만큼 한나라당 싹쓸이 현상이 나타났습니다. 누가 누군지 잘 모르면서 무조건 2번만 찍은 결과가 아니겠습니까.

『그거야 과거 전라도에서 「묻지 마 투표」를 했던 業報(업보) 아니겠습니까. 어떻든 이번 선거로 전라도 사람들의 소외감이 더욱 내면화할 것으로 보입니다. 전국의 유권자들이 집권당의 失政을 심판했는데, 전북과 전남에서만 집권당과 그 宗家(민주당)가 盟主(맹주) 자리를 놓고 티격태격한 꼴입니다. 전북도지사에는 열린당 후보가 당선되었지만, 민주당 쪽에서 선거운동 기간이 며칠만 더 있었으면 결과가 뒤집어졌을 것이라고 말합디다』

금산사에 왔으니 먼저 이 절에 주석하고 있는 宋月珠(송월주) 스님에게 인사를 드리는 것이 순서다. 1935년 정읍시 山外面에서 태어난 月珠 스님은 21세에 속리산 법주사로 출가한 이래 여러 승직을 거쳐 조계종 총무원장을 두 번(제17대와 제28대) 역임했다. 특히 1961년 금산사 주지가 되어 금산사의 중창불사에 심혈을 기울였다. 月珠 스님은 출타 중이었다.

국보 제62호 금산사 미륵전 뒤로 모악산의 정상이 배경을 이루고 있다. 아, 그런데 바로 그 정상에 KBS의 거대한 통신소가 들어서 있다. 금산사 측에 따르면 KBS가 전북의 난시청 지역 해소라는 명분으로 송신탑을 세우고 싶다고 해서 땅 임자인 금산사 측은 「모악산 정상 부근」에 송신탑 세우는 것을 허락했다.

『그러나 KBS 측은 「정상 부근」이 아니라 바로 「정상」에다 1만 평에 달하는 송신시설을 세워 놓고, 그 옆에는 임대료를 받고 MBC와 SBS의 송신시설을 따로 설치하게 했습니다. 더욱이 지난 20여 년간 땅 임자(금산사)에 대해 KBS 측은 임대료를 한 푼도 내지 않고 그냥 사용하고 있어요. 금산사 측에서 철거를 요구해도 「5년간만」 또는 「3년간만」 연장해 달라고 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는 겁니다』
금산사 미륵전에 모셔진 미륵삼존대불. 미륵불은 고통받는 백성들이 待望해 온 불교적 메시아다. 미륵전의 외부는 3층이나 내부는 通層이다.


百濟 유민의 저항기지였던 모악산 금산사

금산사는 서기 599년(백제 법왕 원년) 또는 600년(백제 무왕 원년)에 창건된 고찰이다. 창건 당시는 소규모의 사찰이었다. 금산사는 통일신라시대인 경덕왕 21년(762)에 대가람으로 중창되어 미륵신앙의 본거지로 격상되었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서기 660년 백제가 나당연합군에 의해 패망한 뒤 백제 유민들은 왜국과 연합해 백제부흥전쟁을 전개했지만, 663년 백촌강전투에서 패전함으로써 「백제의 꿈」은 허망하게 무너졌다. 다음은 금산사 현장에서 필자와 崔洵植 선생의 대화다.

―그때 백제부흥군의 패잔병이나 유민들은 어디로 갔을까요.

『백제는 당시 정치·경제·문화·종교의 중심지역은 물론 공주·부여·익산을 잇는 수도권이었습니다. 수도권 지역의 백제 유민들은 신라의 강압적인 점령정책에 순종하거나 아니면 舊수도권을 탈출할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탈출한 저항세력의 再집결지가 부여-익산 지역에서 도보로 하루 만에 닿을 수 있는 모악산 금산사였을 가능성이 높은 것입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첫째는 無名의 사찰이었던 모악산 금산사에 신라의 고승인 崇濟法師(숭제법사)가 출현한 점이고, 둘째는 숭제법사가 김제만경 출신의 眞表(진표)를 발탁하고, 바로 이 진표律師를 앞세워 法相宗(법상종)을 開宗시킨 것입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숭제법사는 『唐나라에 유학해 善道三藏(선도삼장)에게 수업한 후 五臺山(오대산)에 들어가 文殊菩薩(문수보살)로부터 現受五戒(현수오계)한』 이름난 승려다.

―금산사를, 불교적 메시아를 待望(대망)하는 미륵신앙의 근본도량으로 삼아 法相宗을 開宗시킨 이유를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백제 유민들의 저항운동이 의외로 심각했기 때문에 신라 정부가 法(법) 높은 숭제법사를 파견해 백제 유민들을 신앙적으로 회유하려는 정책의 소산이었다고 봅니다』

―그 회유정책의 실행 프로그램이 무엇이었다고 보십니까.

『신라 정부는 백제 유민 중에서 미륵신앙의 지도자를 발굴·육성해서 그를 원격조종해 신라의 정책 의지대로 이끌어 가려 했을 것입니다.

이를 위해 12세의 동자승 眞表를 숭제법사의 門下에 입교시켜 강도 높은 수련과 함께 신격화시킴으로써 진표율사를 開宗祖(개종조)로 한 신라의 종교체제를 확립시킨 것으로 판단됩니다』

진표율사의 신화적인 구도과정은 「삼국유사」에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다.

<12세의 어린 나이로 입문하여 11년만에 부안 仙溪山 不思議庵(선계산 부사의암)에서 三業을 닦고, 亡身懺(망신참)으로써 戒(계)를 얻고, 지장보살로부터 淨戒(정계)를 받았다. (中略)

수도를 마치고 금산사를 세우려고 산에서 내려와 大淵津(대연진)에 이르매 갑자기 龍王(용왕)이 나와 玉袈裟(옥가사)를 바치고 8만 권속을 거느리고 그를 호위해 금산사로 갔다.

경덕왕이 소문을 듣고 궁중으로 맞이하여 보살계를 받고, 租(조) 7만7000석을 주었으며, 왕의 외척도 함께 계품을 받고 비단 500端(단)과 황금 50량을 시주하니, 모두 받아 여러 山寺에 나누어 주어 널리 佛事(불사)를 하였다>

『삼십 전후의 젊은 나이에 신라 왕실에 드나들며 엄청난 시주를 받았다는 것은 그가 통일신라의 종교정책에 복무한 정책승려였음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만약 진표율사가 백제 유민들의 저항적인 미륵신앙에 동조하는 승려였다면 그의 포교 활동은 신라 당국에 의해 철저하게 견제당했을 거예요』


견훤王의 幽閉로 스러진 후백제의 꿈
금산사 입구에 있는「견훤石城」의 홍례문.

진표율사를 개종조로 한 법상종의 발상지인 모악산 금산사의 미륵신앙은 외형상 통일신라의 종교정책에 순응해 五敎九山 중 하나인 법상종의 근본도량으로 평온을 찾은 듯했다. 그러나 금산사가 신라체제의 대찰로 중창된 지 134년째 되던 900년 견훤이란 변경의 장수가 完山(완산: 지금의 전주)에 출현해 후백제를 세움으로써 그 이웃인 금산사도 역사의 회오리 속에 진입하게 된다.

견훤은 지역감정을 이용한 한국사 최초의 정치인이라 할 수 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경상도 상주 출신인 견훤은 다음과 같은 연설로써 백제 유민들을 선동했다.

<백제가 개국한 지 600여 년 만에 당나라 고종이 신라의 청을 받고 장군 소정방에게 수군 13만 명을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게 했으며, 신라의 김유신이 군사를 몰아 황산을 거쳐 당나라 군사와 합쳐 백제를 쳐서 멸망시켰다. 내 이제 어찌 도읍을 세워 묵은 울분을 씻지 않으랴!>

견훤은 금산사의 미륵을 이데올로기화했다. 금산사의 寺誌(사지)에는 「寺는 견훤王의 崇奉(숭봉)한 바 되어 一新 重創(일신 중창)을 得(득)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견훤의 후백제軍은 열화와 같은 백제 유민의 國系(국계) 의식을 업고 후삼국 통일전쟁의 초기에는 라이벌인 王建(왕건)의 고려軍을 압도해 갔다. 그러나 안동전투와 홍성전투에서 고려軍에게 패전한 후 그는 넷째 아들을 후계자로 삼으려다가 이에 반발한 장남 神劒(신검) 이하 세 아들에 의한 쿠데타로 왕위에서 쫓겨나 금산사에 유폐당하고 말았다(935년).

견훤은 3개월 만에 금산사를 탈출해 고려 태조 王建에게 귀순했다. 견훤은 다음해인 936년 왕건의 후백제 정벌전에 종군했다. 후백제軍은 一利川(일리천: 경북 구미) 전투에서 고려軍에게 궤멸당했고, 신검은 논산벌로 추격해 온 왕건에게 항복했다. 이로써 고려의 후삼국 통일이 완성되었다. 왕건은 전승한 고려軍을 이끌고 개경으로 개선했지만, 견훤은 등어리에 돋아난 종기가 갑자기 악화되어 논산벌에서 급사했다. 그의 나이 칠십이었다.


고려 태조 王建의 「訓要十條」

고려 태조 王建은 백제 유민들의 저항을 의식했음인지 그가 후대 왕들의 유훈으로 남긴 「訓要十條(훈요십조)」에서 車峴(차현) 이남에서의 人材 등용을 막았다. 차현 以南이라면 백제의 故土(고토)인 동시에 후백제의 통치권역이었다.

―후백제 지역에 대한 고려의 종교정책은 어떠했다고 보십니까.

『통일신라는 백제 유민 출신인 진표율사를 정책승려로 내세워 모악산 금산사를 신라체제의 미륵도량으로 바꿔 놓았는데, 고려는 그보다 더 적극적인 대책을 강구했습니다. 문종 33년(1078) 왕의 친처남인 慧德王師(혜덕왕사)가 금산사의 주지로 임명되어 가람을 중창했는데, 그 규모가 전국 최대일 정도로 어마어마했습니다』

금산사 寺誌에 따르면 금산사의 大寺區가 62棟(동) 538칸이었고, 奉天院區가 13동 84칸, 廣敎院區가 11동 83칸으로 도합 86동에 705칸이었다.

―훈요십조로써 차령산맥 이남의 人材 등용을 막아 놓고, 후백제 유민의 본거지라고 할 수 있는 모악산 금산사의 규모를 엄청나게 확장시킨 속셈은 무엇일까요.

『문종은 혜덕왕사에 이어 여섯째 왕자인 道生僧統(도생승통)을 금산사의 주지로 내려보냈습니다. 금산사를 중심으로 한 후백제 유민들의 저항운동이 의외로 심각했거나, 아니면 그럴 우려가 있었기 때문에 親衛實勢(친위실세)를 연이어 주지로 임명하고 사찰을 대규모로 확장해 고려 왕실의 권위를 과시하면서 후백제 유민들의 저항적 미륵신앙을 고려 체제의 미륵신앙으로 바꾸어 놓으려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금평저수지 둑 위에서 바라본 鄭汝立의 세거지 帝妃山(중앙). 제비산 왼쪽은 강증산이 天地公事를 했다는 증산교의 聖地 구릿골이고, 제비산 뒤쪽은 미륵신앙의 本山인 모악산 금산사이다.


金山寺의 수난

금산사는 호남의 수난사와 동행했다. 1597년 정유재란 때 전라도를 석권했던 왜군은 금산사를 깡그리 불태웠다. 1592년 임진왜란이 터지자 西山대사의 제자인 處英(처영)이 僧兵將(승병장)으로서 금산사 경내에서 승병들을 훈련시켜 온 데 대한 왜군의 보복이었다. 특히 처영은 1593년 2월의 행주대첩 때 승병 1000명을 이끌고 光州목사 權慄(권율)의 부대를 지원했는데, 승병부대의 담당 방어구역은 행주산성에서 가장 취약했던 동쪽 방벽이었다. 행주대첩 직후 권율은 都元帥(도원수)로 승진했다.

금산사의 미륵전은 인조 13년(1635)에 守文대사가 재건했다. 미륵전은 밖에서 보면 우리나라 유일의 3층이지만, 법당 내부는 층을 구분하지 않은 通層(통층)이다.

1950년 6·25 때는 인민군 중장(별 두 개)이 금산사를 점거해 이른바 「의용군」의 훈련장으로 삼았다.

『그때 인민군에게 강제로 모병되어 금산사에서 훈련을 받은 호남 청년들은 낙동강 전선으로 내려가 대부분 전사했고, 살아남은 자들은 포로가 되거나 산으로 도망쳐 남부군에 가담한 끝에 맞아 죽거나, 얼어 죽거나, 굶어 죽었습니다』

금산사는 파란의 현장이었다. 1902년 1월2일, 금산사 주지였던 龍溟(용명)선사는 「金(금)쟁이」들에게 금산사 미륵전 앞 마당에서 맞아 죽었다. 금쟁이들이 砂金(사금)을 채취하기 위해 땅굴을 팠는데, 그것이 금산사 殿閣(전각)의 밑에까지 이르러 용명주지가 이를 맨손으로 막아섰다가 테러를 당한 것이었다.

『그때 官을 낀 금쟁이들의 횡포가 대단했던 것 같습니다. 우리 고장에는 「용머리장터에서는 양반 걸려 못 살고, 태인장터에서는 아전 걸려 못 살고, 원평장터에서는 금쟁이 걸려 못 산다」는 말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금산사를 품고 있는 모악산은 「金山」이라 불릴 만큼 砂金(사금)이 많이 나왔다. 그래서 現 행정구역의 명칭이 金山面이다. 金山에 있는 금은 비가 오면 金川을 통해 씻겨 아래로 내려간다. 그래서 금천 아랫동네의 이름이 金溝(금구), 즉 금이 나는 똘(도랑)이다. 또 이런 사금 산지를 아우르는 큰 고을의 이름이 금이 나는 언덕이라는 뜻의 金堤인 것이다. 일제강점 시대엔 미쓰비시 재벌이 김제에 支社를 차려 놓고 대대적으로 사금을 채취해 갔다.

금산사가 새로 지은 거대한 일주문을 빠져나오면 곧 「견훤石城」과 만난다. 문루와 문짝은 모두 없어졌지만, 무지개門의 형태는 온전하다. 전해지는 얘기로는 후백제왕 견훤이 쌓았다고도 하고, 후대에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해 금산사가 쌓았다고도 한다.

문화재를 취재하다 보면 간혹 염치없는 사람의 소행과 만나게 된다. 이 「견훤석성」의 홍예문에다 「준공 1969년 12월 김제군수 ○○○」이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그거는요, 그때의 김제군수가 문이 좁아서 자기 차 통행에 불편하다고 성문을 헐어 확장공사를 준공한 다음, 그 기념으로 이렇게 그 자신의 이름 석 자를 새겨 넣은 겁니다』


클리토스처럼 민감한 혁명기지

일주문에서 내려와 4차선 도로를 버리고 2차선 옛 금산사 길로 2km 내려와 帝妃山(제비산)에 다가섰다. 높이 300m의 제비산은 「호남의 클리토스(陰核)」이다. 이곳이 바로 조선왕조를 뒤집어엎으려고 기도했던 鄭汝立(정여립)의 世居地(세거지)이자 반란모의 현장이었다. 이로 인해 임진왜란 발란 3년 전에 호남 사람들이 대거 피의 숙청을 당했던 己丑逆獄(기축역옥)이 벌어졌다.

정여립은 전주 남문 밖에서 중종~인종 연간인 1544년경에 태어났다. 「연려실기술」에는 여립의 아버지 希曾(희증)이 익산현감으로 재임하던 시기인 15세 무렵의 여립에 관한 일화가 기록되어 있다. 그에 따르면 그때 아전들은 현감보다 여립을 더 두려워했다고 한다. 이렇게 소시적부터 여립은 결기가 드셌다. 그는 통솔력이 있고, 두뇌가 명석해 經史뿐만 아니라 諸子百家(제자백가)에도 두루 통달했다고 한다.

24세에 대과에 급제하여 임금에게 주청할 때 고개를 치켜든 채 두 눈을 부릅뜨고 是와 非를 가릴 만큼 대가 세고 입심도 좋았다. 그는 선조 16년(1583) 栗谷 李珥(율곡 이이)의 천거로 소장 관료의 엘리트 코스인 홍문관 수찬(정6품)으로 발탁되었지만, 율곡의 死後에는 東人으로 돌아서 율곡을 비판했다. 이에 西人 측은 그를 배신자로 보고 공격의 타깃으로 삼았고, 끝내 임금의 미움을 받자 정여립은 미련 없이 벼슬을 내던졌다(선조 20년·1587년).

모악산 기슭으로 낙향한 그는 『不事二君(불사이군: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은 틀린 말이고, 천하는 누구든 유능력자가 다스려야 한다』고 주장함으로써 朱子學的 國是를 정면으로 부정했다. 그의 문하에 전주·금구·원평· 태인 등 인읍의 선비들뿐만 아니라 무사·승려·천예 등 소외계급의 인물이 운집하자 그는 1586년 무렵 무력단체인 大同契(대동계)를 조직했다.


『천하는 公物이니 어찌 일정한 주인이 있으리오』
기축옥사 때 정여립과 친교가 있다고 해서 이발·이길 형제가 杖殺을 당하는 등 멸문지화를 입은 光山李氏는 자구책으로 密陽李氏로 變姓하고 숨어 살았다. 사진은 이발의 장조카 이원정이 가문의 내력과 참화를 기록한 피맺힌 遺書다.

당시 항간에는 「木子亡奠邑興(목자망전읍흥)」이란 유언비어가 떠돌았다. 木子는 李의 破字이며, 奠邑은 鄭의 파자다. 결국 李씨왕조가 멸망하고 鄭씨왕조가 일어난다는 말이다. 정여립은 문하인들에게 이렇게 말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司馬光(사마광)이 「資治通鑑(자치통감)」에서 劉備(유비)의 蜀(촉)을 정통으로 보지 않고, 魏(위)를 정통으로 삼아 紀年(기년)한 것은 참으로 직필이다. 천하는 公物이니 어찌 일정한 주인이 있으리오』

대동계원들은 매월 15일 제비산 등 한곳에 모여 鄕射會(향사회)를 열고, 술·밥을 마련해 즐기면서 단합을 도모했다. 그는 『활쏘기는 六藝(육예)의 하나로서 남자가 마땅히 배워야 할 일』이라고 강조했다. 그의 문인들은 『우리나라의 先儒들은 단지 禮學(예학)을 아는데, 궁술을 가르치는 것은 우리 스승뿐』이라고 그를 찬양했다.

정여립은 인읍의 수령들에게 편지를 보내 단합대회(향사회)의 비용을 거두었다. 그는 비록 조정에서 물러나 있었지만, 당시 집권당인 東人 내부에서 「第一流(제일류)의 인물」로 지목받고 있었는 데다 西人과의 당파싸움에서 「猛將(맹장)」으로 이름을 날리고 있었다. 그런 만큼 일찌감치 그와 좋은 관계를 맺어 두려는 수령·방백들도 적지 않았다.

대동계의 파워를 테스트할 기회는 의외로 빨리 왔다. 1587년, 왜선 18척이 전라도의 손죽도를 침범했다. 당시 전주부윤 南彦經(남경언)은 兵務(병무)에 어두워 정여립에게 협력을 요청했다. 당시 정여립이 거주했던 제비산 일대, 동래정씨 집안의 사당과 그의 처가가 있었던 금구현은 전주부에 속해 있었다.

전주부윤의 협력 요청을 받은 정여립은 대동계의 「親密무사」를 동원해 왜군을 물리쳤다. 그의 호령 한 마디로 토벌군이 동원·편성·출동함으로써 그 파워가 입증된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정적들에게 경계대상 제1호가 되었다.

정여립은 선조 22년(1589) 황해도 都事(종5품으로 관찰사 다음 가는 벼슬)직에 앉으려고 東人 인맥을 움직였다. 정적들은 이를 「역모의 준비」로 의심했다. 즉, 대동계 세력을 황해도에까지 확대함으로써 서울을 남북에서 협공해 두려빼려는 전략이라는 것이었다.


「逆鄕」으로 지목돼 호남인의 정계 진출 봉쇄당해
강증산이 병든 사람을 구제했던 銅谷 藥房.

선조 22년(1589) 10월2일, 정여립의 역모를 고변하는 황해감사 韓準의 비밀 장궤가 조정에 당도했다. 그날 밤 선조의 임석하에 3정승·6승지·의금부 堂上 등이 참석한 중신회의가 열렸다. 즉각, 황해도와 전라도에 금부도사가 급파되었다. 10월7일, 금부도사로부터 여립이 도주했다는 급보가 조정에 당도했다. 정여립은 邊崇福·鄭玉男(여립의 아들)·朴春龍(朴延齡의 아들)과 함께 진안의 죽도로 도주했다.

10월18일, 진안현감 閔仁伯(민인백)이 군졸을 거느리고 죽도로 달려가 여립의 은신처를 포위했다. 여립은 변숭복을 찔러 죽이고, 옥남과 춘룡을 죽이려다 상처만 내고, 그 피묻은 칼로 자결했다고 한다.

이때 鄭澈(정철)이 委官(위관: 최고위 조사관)을 맡아 여립과 친교가 있거나 西人의 미움을 받았던 이발·이길·김우옹·정언신·최경영 등 조정 名官을 비롯한 동인들을 대거 숙청했다. 억울하게 杖殺(장살)·斬首(참수)·獄死(옥사)당한 사람도 많았다. 이로 인해 우리 歌辭(가사)문학의 최고봉인 송강 정철은 「東人백정」이라는 또 다른 별호를 얻게 되었다.

기축역옥에 연루되어 죽임을 당한 사람 수가 1000명을 웃돌았다. 이때 여립의 집에서 여립에게 보낸 李舜臣(이순신)의 편지가 적발되어 이순신도 처형당할 뻔했다. 여립의 집을 수색한 의금부 도사가 이순신에게 동정적이어서 『그 문안 편지를 태워 버리는 것이 어떻겠느냐』며 의향을 묻자 이순신은 『죄가 된다면 벌을 받겠다』고 말하며 혐의사실의 물증이 될 수도 있는 편지의 소각을 끝내 거부했다.

그때는 마구 목이 달아나던 시절이었다. 愛妓(애기)와 헤어지는 것이 섭섭해 잠깐 눈물을 흘렸던 전라都事 曺大仲(조대중)은 여립의 죽음을 슬퍼했다는 무고를 당해 대번에 매 맞아 죽는, 그야말로 살벌한 판이었다. 그러나, 이순신은 그의 당당함이 오히려 조사관들을 감동시켜 목숨이 보존되었다.

기축옥사 때 정여립의 세거지 제비산은 철저히 파괴되었다. 이곳은 「역모의 땅」이라 하여 마구 파헤쳐져 벌겋게 달군 숯불로 지지고 쩔쩔 끓는 쇳물을 부어 넣어 지맥을 끊었다. 제비산에는 조선조가 망할 때까지 집짓기가 금지된 땅이었다. 정여립의 집터는 현재 月明庵(월명암)이라는 절집이 차지하고 있다.

정여립은 백제 멸망의 恨을 풀고, 견훤의 이루지 못한 꿈을 되살리고, 금산사를 중심으로 하는 미륵사상이 농축되는 新왕조 건설을 구상했다. 정여립의 좌절은 정치사상적으로는 공화주의의 좌절을 의미한다. 정치사적 의미로는 이때부터 호남은 「逆鄕(역향)」으로 지목되어 호남인의 중앙정계 진출이 거부당했다.
1905년에 창설된 「금산교회」의 내부. 「男女칠세부동석」이란 당시 풍습에 따라 남자석과 여자석을 구분하기 위해 특이한 「기역(ㄱ)자」 구조로 되어 있다.


강증산의 「解寃相生」 철학

현세에서 풀리지 못한 호남의 恨은 모악산을 바라보며 새로운 메시아의 출현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새로운 이데올로기를 들고 등장해 한 시대를 진동시키는 신흥종교운동이었다. 東學의 人乃天(인내천) 사상을 슬로건으로 내건 갑오농민군의 봉기(1894)와 「解寃相生(해원상생)」을 내건 甑山敎(증산교)의 발원지가 모두 모악산 기슭이었다는 것은 결코 역사의 우연일 수 없다.

제비산 바로 옆쪽의 저수지인 金坪堤의 귀퉁이 위에 걸린 다리 하나만 건너면 작고 조용하면서 큰 기와집이 들어선 마을이 있다. 이곳이 증산교의 성지인 「구릿골(銅谷)」이다. 姜一淳(강일순)은 이곳 초가집 방 한 칸에 「동곡약방」을 차려 놓고 병든 사람들을 구제했다. 증산교의 창시자인 姜一淳은 이곳에서 9년간 「天地公事(천지공사)」를 하고 「歸天(귀천)」했다. 甑山(증산)은 강일순의 아호이다.

강일순은 1871년 정읍시(옛 古阜郡) 덕천면 신기리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神童(신동)으로 소문이 자자했다.

『강증산은 생전에 斗酒를 不辭했고 世人들이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많이 해 그를 狂人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었으며, 항상 삿갓을 쓰고 다녀 院坪 근방에서는 그를 「姜삿갓」이라고 부르기도 했답디다』

그는 24세 때 고향에서 발생했던 고부민란의 참상을 목격했다. 탐관오리의 횡포, 죽창을 든 농민들의 봉기, 원한과 살육을 보고 고뇌했다.

『동학농민전쟁 前後, 그는 도탄에 빠진 백성과 세상을 구해 보겠다는 뜻을 품고 儒·佛·仙과 음양·讖緯(참위)에 이르기까지 많은 글을 읽었다고 해요. 이어 1897년까지 4년간 전국을 유력해 견식을 넓히고, 모악산 大願寺에 들어가 구도하다가 1901년 7월에 「得道(득도)」했다고 합니다』

득도 후 그는 모악산 구릿골을 중심으로 전북 일대를 돌아다니며 9년간 천지공사를 하면서 수많은 「異蹟(이적)」과 예언을 남겼다. 그렇다면 천지공사는 무엇일까. 증산교의 경전에는 다음같이 강증산의 말이 기록되어 있다.

『先天에는 相剋之理(상극지리)가 人間事物을 맡았으므로 모든 人事가 도의에 어그러져서 寃恨(원한)이 맺히고 쌓여 三界에 넘침에 마침내 殺氣가 터져나와 세상에 모든 참혹한 재앙을 일으키나니, 그러므로 이제 天地度數(천지도수)를 뜯어 고치어 神道를 바로잡아 萬古의 寃(원)을 풀고 相生의 道로써 仙境을 열고 造化정부를 세워 하염없는 다스림과 말 없는 가르침으로 백성을 化하여 세상을 고치리라』

그가 39세의 나이(1909)로 세상을 떠난 후에도 그를 믿고 따르는 신도수가 수백만에 이른 때도 있었으며, 오늘날에도 증산교는 대순진리회 등 수많은 종파를 이루면서 민족종교의 大宗을 이루고 있다. 강증산의 철학 解寃相生(해원상생)은 오늘의 정가에서도 회자되는 용어이다.


全北은 기독교가 가장 번성한 지방
1889년에 설립된 금산사 밑 水流聖堂. 예나 지금이나 신도수는 500명에 불과하지만, 이곳 신도 중에서 신부·수녀 등 무려 40여 명의 가톨릭 성직자를 배출했다.

구릿골을 뒤로 하고 금산면 금산리에 자리 잡은 「기역(ㄱ)자 교회당」으로 이름난 「금산교회」에 들렀다. 1905년에 건립된 「ㄱ자 교회당」은 男女七歲不同席(남녀칠세부동석)이란 당시 풍습에 따라 남자석과 여자석을 구분하기 위해 지은 특이한 구조다.

한쪽 날개는 남자석, 다른 한쪽 날개는 여자석이다. 두 날개의 모서리에 강대상이 있다. 그 강대상에서 예배를 인도하는 목사는 남자석·여자석을 번갈아 보면서 설교를 한다. 李仁秀 담임목사의 부인을 만나 흥미진진한 금산교회의 설립사를 들은 얘기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904년 무렵, 미국의 젊은 선교사 테이트 목사는 전도를 위해 전주-정읍 간을 말을 타고 왕래하다 중간지점인 금산리에 머물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이 고장의 馬房(마방) 주인인 趙德三을 만났다. 그런 인연으로 만난 테이트 목사의 언행을 자주 접하게 된 조덕삼은 기독교인이 될 것을 결심하고 「선교사님, 앞으로는 저희 집 사랑채에서 예배를 드리도록 하십시다」고 제의했다.


마부 출신의 이자익 목사

금산교회가 시작되는 데에는 또 한 명,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있었다. 그가 후일 조선예수교 장로회 총회장을 세 번 역임하는 경상도 南海 출신의 李自益(이자익)이다. 이자익 청년은 조실부모하고, 배 고픈 몸으로 곡창이라고 하는 전라도까지 흘러들어왔다.

그는 전주를 거쳐 청도리 고개를 넘어 금산리에 들어왔을 때 삼거리 길에서 잠시 머뭇거렸다. 이리 갈까, 저리 갈까. 그가 만약 금산사 가는 왼편 길로 갔다면 승려가 되었을 것이다. 운명일까, 그는 오른편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10여분 뒤 그는 배가 고파 조덕삼 집의 문을 두드렸다.

그는 無學者(무학자)였지만, 매우 총명했다. 조덕삼 집에 마부로 있으면서 틈틈이 책을 읽고, 또 주인을 따라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다.

1904년 10월11일 금산교회의 예배가 시작되었다. 시골 구석 교회인 데도 신도가 곧 100명 가까이 불어났다. 이제는 장로 1人을 뽑아야 했다. 장로 뽑는 선거에는 조덕삼·이자익, 2人이 후보로 나섰다. 개표 결과는 놀랍게도 주인 조덕삼이 떨어지고, 머슴 이자익이 당선되었다.

조덕삼은 깨끗이 승복하고 이자익 장로를 도왔다. 조덕삼도 후일 장로가 되었지만, 그는 선배 장로인 이자익을 평양신학교로 유학하도록 후원했다. 이자익 청년은 평양신학교 졸업 후 되돌아와 금산교회의 목사가 되었다. 이자익 목사는 후년에 장로회 총회에서 세 번이나 총회장에 뽑혔으며, 「장로회 헌법」을 기초하기도 했다』

최순식 선생에게 물었다.

―어떤 통계를 보니까 전국에서 기독교가 가장 번성한 곳이 전북이고, 불교가 가장 번성한 곳은 경상도입디다. 왜 그리 되었다고 보십니까.

『글쎄요, 기다리고 또 기다려도 미륵이 오지 않았기 때문이 아닐까요. 전북에서 각종 선거에 나서는 사람들을 보면 원래는 불교도였는데, 기독교도로 改宗하는 일이 비일비재합니다』

이렇게 말하는 崔선생은 불교도이다. 말이 나온 김에 금산교회를 어떻게 평가하는지 물어보았다.

『일제 강점기의 금산교회는 유광학교를 지어 청소년들에게 민족교육을 시켰습니다. 한국사를 배우게 하고, 태극기도 그리게 했어요. 3·1 운동 때는 교인들이 이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외쳤어요. 일제 말엽에 금산교회와 유광학교는 모두 폐쇄당했습니다.

신사참배, 東方遙拜(동방요배)를 거부하고, 反日(반일)교육을 시킨다는 이유로 탄압을 받은 거죠. 금산교회는 전주 西門교회에 이어 전북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교회이기도 한 데다 역사 앞에 떳떳하게 자랑할 수 있는 조건을 구비하고 있습니다』


진흙수렁으로 변한 水流川

崔선생과 필자는 금산사를 나와 水流川(수류천)을 따라 10여 리 올라가 水流聖堂(수류성당: 금산면 화율리 215)을 방문해 「범 라우렌시오」 주임신부를 만나 약 1시간 동안 많은 일화를 들었지만, 지면관계상 모두 옮길 수 없어 한 가지만 적고 넘어간다.

1889년에 설립된 수류성당은 그때나 지금이나 신도수가 500명 정도인데, 이곳 신도 중에서 배출된 신부·수녀 등 성직자의 수가 무려 40명이나 된다고 한다.

수류천은 금모래가 깔린 사이로 맑은 물이 흐르던 절경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건재 채취업자가 마구잡이로 산을 파헤친 바람에 토사가 흘러내려 水流川이 제 이름답지 않게 진흙수렁으로 변해 있다. 崔선생은 거듭 혀를 차면서 말했다.

『건재 채취업자가 김제시장에게 광산채굴허가를 얻어 산을 마구 훼손시키면서 원상복구도 제대로 하지 않아 이꼴이 되었습니다. 아랫마을에는 비만 오면 물난리가 나고, 논바닥은 누런 황토가 쌓여 수렁이 되어 가고 있습니다.

이런 데도 주민들은 건재 채취업자가 휘두르는 「주먹」과 금력이 무서워 말을 못 하고 있어요. 牧民官(목민관)이 백성을 무시하면 결국 민란이 일어나는 것이 역사의 교훈입니다. 모악산을 지켜야 하는 나는 겁나지 않아요. 그들과 끝까지 싸우렵니다』
모악산 水流川 주위의 자연경관을 파괴한 건재 채취업자의 횡포가 자행되고 있는 현장. 산을 마구 파헤쳐 아랫마을엔 비만 오면 물난리가 나고, 논바닥에는 황토가 쌓여 가고 있다.


원한 맺힌 창칼로 호남벌을 피로 물들여

우리 일행은 동학농민혁명의 진원지 院坪으로 내려왔다. 갑오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기 꼭 1년 전, 충청도 보은에서 수만 명의 동학교도들이 모여 교조신원운동을 하고 있을 때 원평장터에서는 1만 명의 동학농민들이 고부접주 전봉준과 금구접주 김덕명의 지휘下에 봉건왕조의 무능부패와 斥洋倭(척양외)를 주창하는 정치집회를 벌이고 있었다.

『원평은 예나 지금이나 300여 호의 상가와 농가가 함께 어울려 있는 장터 마을입니다. 조선왕조 때에는 전남 일대와 전북의 고창·무장·고부·정읍 등지에서 육로로 서울로 가려면 원평장터를 거쳐야 했어요. 1930년대까지만 해도 원평장터에는 60여 개의 주막이 성황을 이루었다고 해요』

동학 南接(남접: 호남파)의 중심적인 활동은 언제나 원평장터였다. 원평에서 개최된 都會는 다음해 동학농민봉기의 서곡이었다.

『원평집회는 보은의 교조신원운동 집회와는 다른 성격의 정치적 집회였습니다. 한양大 정창렬 교수에 따르면 원평 집회의 지도자는 「金鳳集」 또는 「金鳳均」이라는 가명을 쓴 전봉준이었습니다. 전봉준은 원평집회에서 정치역량을 키워 동학농민전쟁을 이끌어 갔습니다』

동학농민봉기는 원통한 민초들이 생존을 위한 최후 집단행동이었다. 고부군수 趙秉甲(조병갑)의 苛斂誅求(가렴주구)는 고부군민을 억울한 피해자로 만들었고, 이에 항거하던 민초의 狀頭(장두)들은 끌려가 刑杖(형장) 아래 목숨을 잃었다. 그 대표적인 희생자가 전봉준의 아버지 全彰赫(전창혁)이었다.

『아버지를 잃은 전봉준의 원한은 다음해(1894) 1, 2월 고부 농민의 항쟁과 동학농민군의 3월 봉기로 이어져 원한에 맺힌 복수의 창칼이 호남벌을 피로 물들였습니다』

원평은 金溝(금주) 대접주 金德明(김덕명)의 관할지역이었다. 김덕명과 전봉준은 혁명동지로서 원평과는 인연이 많았다. 김덕명은 원평에서 약 1km 떨어진 쌍룡리 용계마을에서 금구의 4대 土班(토반)인 彦陽 김씨 문중 출신이었다.

청소년 시절의 전봉준은 원평에서 약 1km 떨어진 정읍시 감곡면 계양리 황새뫼 마을에서 살았고, 그곳에서 2km 떨어진 김제시 봉남면 從政(종정)마을에서 서당공부를 했다.
1894년 11월25일 동학농민군이 일본군에 대해 최후의 항전을 벌였던 구미란. 구미란은 김제시 금산면과 정읍시 감곡면의 경계지역에 위치해 있다.


실패로 끝난 전봉준의 무력항전

『전봉준의 혁명적 투쟁과정을 원평과 관련해 살펴보면 全州 입성 하루 전날(1894년 3월26일) 장성 황룡촌과 원평에서 생포한 조정의 宣傳官 등 5명을 원평장터에서 참수했습니다. 자신의 성장지인 원평에서 결연한 혁명의지를 만인 앞에 밝힌 것입니다.

외세의 간섭을 배제하기 위해 조선 정부와 전주화약을 맺은 후 원평에 와서 집강소를 설치하고 전라우도를 호령했던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특히 9월의 再봉기 때 공주 우금치 싸움에서 일본군의 신무기 앞에 참패한 그는 원평으로 물러나 구미란 고개에서 최후의 결전을 하게 되며, 여기서 다시 패전해 그의 혁명투쟁의 막을 내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전봉준의 무력항전은 실패로 끝났다. 그렇다면 그의 혁명투쟁을 시종 가까이서 목격한 강증산의 평가는 어떤가.

『강증산이 남긴 어록에 「全明淑(전명숙: 明淑은 전봉준의 字)은 거사할 때 상놈을 양반으로 만들어 주려는 마음을 두었으므로 죽어서 잘 되어 朝鮮冥府(조선명부)가 되었느니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심정적으로는 전봉준을 이해하고 동조했던 것입니다. 다만, 강증산은 非폭력 인도주의자였기 때문에 「동학농민군의 과격한 행동에 망동치 말라」고 경계했다고 합니다』

―저희들은 학창 시절에 「동학란」이라고 배웠는데, 1970년대 이후에는 「동학농민혁명」으로 격상되었습니다. 崔선생께서는 동학농민군의 봉기를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동학농민혁명은 억울하고 원통한 피해자들이 들고 일어난 폭력적 집단행동이었습니다. 그런 관계로 탐관오리뿐만 아니라 지주·양반도 증오의 대상이 되어 닥치는 대로 쳐부수고 빼앗는 복수의 칼날이 곳곳에서 번득였지요.

1970년대 이래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역사적 의미를 크게 부여하고 찬양하는 풍토에서 당시 동학농민군의 횡포는 가려져 버렸습니다』

―특히 원평에서는 피가 많이 흘렀죠.

『가진 자들은 동학농민군에게 全재산을 바치고도 죽창에 찔려 죽었습니다. 일본군에 의해 동학농민군이 진압된 후에는 애매한 농민들까지 관헌의 오랏줄에 묶인 채 끌려가 어디서 어떻게 죽었는지도 모르게 지워졌습니다.

오늘날 원평에서 동학의 후신인 천도교 신자가 한 사람도 찾을 수 없다는 것은 서로가 서로를 죽인 원한의 복수싸움이 불러온 현상인 것입니다. 동족 간의 참혹한 살육전에서 위력을 발휘한 것은 일본군의 新무기뿐이었습니다』


『盧武鉉 정권에 배신당했다』

모악산은 1300여년의 세월에 걸쳐 쌓이고 맺힌 이 땅의 갈등과 증오, 그리고 호남인의 저항정신과 동행해 왔다. 백제의 멸망, 견훤·정여립·전봉준의 좌절, 훈요십조와 기축옥사 이후 계속된 호남 푸대접에 대한 지역적 분노는 지금도 내연하고 있다.

이번 지방선거에 나붙은 민주당 전북도지사 후보의 벽보에는 「노무현 정권은 경상도 정권」이라고 문구가 크게 쓰여 있었다. 지난 大選에서 호남표를 몰아 주어 당선시켰더니 그의 집권 이후 배신당했다는 뜻으로 비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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