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조선 기사

鄭淳台 기자의 역사현장 탐방 - 韓國불교의 로맨틱街道

太白산맥 줄기줄기에 새겨진 善妙와 義相·泗溟堂·韓龍雲의 사랑

글 정순태 기자  2006-0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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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월28일 오전 8시30분, 불교신도의 사회봉사단체인 「無量會(무량회)」 회장 朴允姬(박윤희)씨, 民族史學界를 지원해 온 한민족문화연구원 이사장 姜東敏(강동민)씨, 「불교신문」 前 편집국장 梁汎洙(양범수)씨 등 무량회 회원 5명과 필자는 중부고속도로의 들머리에 있는 「만남의 광장」에 모였다. 우리 일행은 영주 부석사→양양 낙산사→금강산 건봉사→설악산 백담사를 둘러보기로 했다. 「한반도의 척추」 태백산맥을 남북으로 종단하는 코스다.

이번 답사는 무량회 창립 10주년을 기념해 회원들이 作詩(작시)한 CD음반 「연꽃향기 바람결에」를 출반한 것이 모티브가 되었다. 이 음반에는 전국 12개 주요 사찰을 차례로 노래한 12곡이 담겨 있다. 12곡 중 3곡은 대중가요 작사가이며 무량회 회원인 半夜月(반야월), 尹益森(윤익삼), 金周明(김주명)씨가 한 곡씩 작시했다. 나머지 9곡을 작시한 분들도 무량회 회원들이다. 작곡가 李東勳(이동훈)씨가 가락을 붙였고, 「프로 가수 수준」의 朴允姬 회장이 音聲供養(음성공양)을 했다.

필자는 우연히 姜東敏 이사장이 손수 모는 승용차에 편승했다가 카스테레오를 통해 「연꽃향기 바람결에」 12곡을 모두 들었다. 무량회 회원들의 「태백산맥 명찰 순례」 일정에 필자의 답사 일정을 맞춰 동행하게 되었다.

우리 일행은 부석사부터 답사하기로 했다. 부석사를 찬미한 「화엄의 세계로」가 CD음반에 담긴 첫 곡이기 때문이다. 그 1절만 들어도 부석사의 創建緣起(창건연기)를 대충 알 수 있다.

〈님 향한 일편단심 龍이 되어 타국 땅에
날아온 善妙 낭자 義相 대사 지키시네
선비화 지팡이는 그 말씀을 따르고
서방정토 가는 길 지키시는 아미타불
가세 가세 모두 가세 화엄의 세계로〉

義相(의상) 대사는 海東華嚴宗(해동화엄종)의 開山祖(개산조)로서 부석사·낙산사를 창건한 신라의 고승이다. 善妙(선묘) 낭자는 의상 스님을 연모한 끝에 石龍(석룡)으로 변해 의상 스님의 곁에 머물면서 부석사 창건을 돕는 아름다운 꾸냥(중국 아가씨)이다.

禪扉花(선비화)는 의상 스님이 그의 지팡이를 부석사 祖師殿(조사전) 앞에 꺾꽂이처럼 심어 놓은 것인데, 스님의 예언대로 1300여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도 싱싱한 모습이다. 西方淨土(서방정토)는 아미타불이 계시는 極樂(극락), 즉 불교의 파라다이스다.
사회봉사단체「無量會」회원들이 제작한 CD음반「연꽃향기 바람결에」


『어머니, 지금 읽는 불경의 뜻을 아십니까』
無量壽殿 앞에 선 無量會 회장 朴允姬씨. 朴회장은 浮石寺를 찬미하는 가요「화엄의 세계로」를 作詩하고 노래했다.

「연꽃향기 바람결에」를 듣는 순간, 고향에 계시는 어머니가 생각났다. 필자의 어머니는 요즘도 매일 새벽 3시면 어김없이 일어나 앉은뱅이 탁상 위에 한글 「묘법연화경」을 펴놓고 난해한 내용의 經文(경문)을 30분쯤 소리내어 읽는다.

―어머니, 지금 읽으시는 經文의 뜻은 무엇입니까.

『난 몰라, 그래도 읽기만 하면 마음이 편해지거든』

금년 84세의 어머니가 이런 독경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은 오직 만트라 효과 정도뿐일 것이다. 가령, 대학 4년간 漢文을 배운 사람이라면 이런 불경을 보고 그 뜻을 파악할 수 있을까? 아마도 필자처럼 모르긴 매일반일 것이다.

불교가 이 땅에 들어온 지 1600여 년의 세월이 흘렀고, 그동안 많은 高僧大德(고승대덕)이 살다 가셨다. 그런데도 한국불교에 만연한 不立文字(불립문자)의 오랜 전통 탓일까. 아직도 우리 불교계에서는 알쏭달쏭한 禪問答(선문답)을 해야 큰스님으로 대접받는 풍토이다. 이런 형편에서 보면 이번 「연꽃향기 바람결에」 출반은 한국불교의 대중화에 작지만 옹골찬 供養(공양)인 셈이다.

이 땅에 천주교가 들어온 지 200여 년, 개신교가 들어온 지 100여 년-그런데도 천주교와 개신교는 우리말로 풀이된 「성경」을 이미 100년 전에 내놓았다. 기독교의 한글 성경은 한국 역사상 번역서의 걸작이라고 생각한다. 예컨대 서양의 「God」을 「하느님」 혹은 「하나님」으로 해석한 것 등은 참으로 절묘하다.

세종 25년(1443)에 창제·반포된 訓民正音(훈민정음). 그로부터 500여 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아직도 불경의 번역본은 대개 난해하다. 우리 선조들로부터 불경을 전수한 일본불교는 13세기 초반에 이미 일본어 불경·불교서적을 다수 저술해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으면서 그 시대정신을 이끌어 갔다.

元曉(원효) 스님과 義相(의상) 스님이 가신 이후 우리나라엔 아직도 두 분만큼 불교 대중화에 노력한 큰스님이 나오지 않았다. 원효·의상 스님이 활동하는 시절에는 吏讀(이두) 문자가 아직 일반화되어 있지 않았다(이두는 원효 스님과 요석 공주 사이의 외아들이며 「신라의 3대 문장」 중 한 분인 薛聰(설총)이 집대성했다). 두 스님은 비록 한문으로 된 저술을 남겼지만, 그 번역본을 읽으면 사무치는 감명을 받게 된다.

예컨대 의상 스님이 지은 「百花道場發願文(백화도량발원문)」이 그러하다. 스님은 東海의 포효하는 물결 속에 얼굴을 묻고 大慈大悲(대자대비)의 보살 觀音(관음)에게 親見을 간구했다. 다음은 「백화도량발원문」 중 하이라이트 부분이다.

<나의 全心全靈(전심전령)이 당신의 마음속에 살아 있고, 당신 또한 내 마음속에 항상 같이 계셔서 떠날 수 없게 하여이다. 이 몸이 가루가 되고 모진 業報(업보)가 이 몸으로 다하게 될 때 千手千眼(천수천안) 당신의 자비로운 손길이 이 몸을 건져내어 당신 곁으로 인도하여 주옵소서>


한국적 정서를 대변하는 「울고 넘는 박달재」

중앙고속도로가 개통된 이후 서울에서 영주 부석사까지는 넉넉하게 잡아 3시간이면 도착할 수 있다. 중부고속도로를 타고 南下하다가 호법IC에서 길을 바꿔 영동고속도로를 東進하면 만종분기점에 이른다. 만종분기점에서 중앙고속도로를 접어들어 南下하면 치악산국립공원과 월악산국립공원의 절경이 차례로 펼쳐진다.

「천둥산 박달재의 땅」 충북 제천을 지날 무렵, 우리 일행은 반야월 作詩의 「울고 넘는 박달재」(1948년 작)를 합창했다. 그것은 한국적 정서를 대변하는 우리 가요의 古典이다.

〈천둥산 박달재를 울고 넘는 우리 님아
물항라 저고리가 궂은 비에 젖는구려
왕거미 집을 짓는 고개마다 굽이마다
울었소 소리쳤소 이 가슴이 터지도록〉

충북 단양군과 경북 영주시 풍기읍을 이어 주는 「죽령터널」을 지났다. 우리나라에서 제일 긴 터널(길이 5.6km)이다. 2002년 중앙고속도로가 개통되기 전까지만 해도 서울에서 부석사로 가려면 험한 죽령을 넘어가야만 했다.

장수터널을 지나면 곧 풍기IC. 풍기IC를 빠져나와 소백산의 남쪽 자락과 나란히 뻗은 931번 지방도로를 타고 50여 리 달리면 부석사 들머리길로 들어선다.


義相 스님의 淨土사상이 집약된 浮石寺
부석사의 일주문.「太白山浮石寺」라 쓰인 편액이 걸려 있다.

부석사 일주문에는 두 개의 편액이 걸려 있다. 위쪽 편액에는 「海東華嚴宗刹」(해동화엄종찰), 아래쪽 편액에는 「太白山浮石寺(태백산부석사)」라고 쓰여 있다.

부석사의 가람배치는 비교적 가파른 터전에 이룩된 丘陵形(구릉형)이다. 층층의 석축을 쌓고, 여러 축대 위에 반듯한 터를 닦아 거기에 여러 건물들을 배치했다.

일주문을 지나 조금 오르면 天王門(천왕문)이다. 천왕문을 지나 종무소에 들렀다. 재무 담당 梵鍾(범종) 스님이 후원의 별실로 안내해 우리 일행에게 차를 대접했다.

『부석사는 의상 스님의 淨土(정토)사상이 잘 표현된 절입니다. 부석사는 3단으로 구획되었는데, 제일 높은 단 위에 無量壽殿(무량수전)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무량수전을 보면 龍船(용선)의 모습입니다. 아미타불은 우리 중생의 마지막 한 사람까지 용선에 태워 극락으로 인도하기 위해 언제나 깨어 있는 모습으로 무량수전에서 기다리고 계시는 것입니다』

범종 스님은 10년 경력의 문화재해설사 朴壬羲(박임희)씨가 우리 일행의 안내를 맡도록 부탁해 두었다. 박임희씨는 부석사의 사적에 해박하고, 특히 한문 해석에 능숙한 마흔 전후의 여성이다. 茶室에서 나오면 곧 梵鍾樓(범종루)이다. 방금 梵鍾 스님을 만나 감명 깊은 설법을 듣고 나왔는데, 또 「梵鍾」이란 이름의 누각과 마주치게 된 만큼 참으로 기묘한 인연이었다.

스님은 자신의 法名뿐만 아니라 俗名까지 「梵鍾」이라고 했었다. 범종루에는 「鳳凰山浮石寺(봉황산부석사)」라는 편액이 높직이 걸려 있다. 왜 일주문의 편액에는 「태백산부석사」, 범종루의 편액에는 「봉황산부석사」라 썼는지에 대해 박임희씨가 설명했다.

『부석사가 터를 잡은 봉황산은 태백산맥과 소백산맥의 분기지점이에요. 그러니 「태백산부석사」일 수 있는 거죠』

범종루 다락 밑 석축계단을 오르면 넓은 마당이 펼쳐져 있다. 여기서 시선을 북동쪽으로 30。 가량 돌리면 「安養樓(안양루)」와 마주 선다. 날아갈 듯한 현판의 글씨는 李承晩(이승만) 초대 대통령이 썼다. 불교에서 安養(안양)은 바로 극락이다. 안양루의 좌우를 큰 바윗돌로 쌓은 巨石臺가 끼고 있다.
安養樓 계단에서 바라본 無量壽殿.

안양루의 석축계단을 오름에 따라 허공이 점차 넓게 트이면서 石燈(석등) 하나가 점점 클로즈업된다. 바로 국보 제17호 「무량수전 앞 석등」이다. 신라시대 석등 중에서 가장 미려한 것으로 손꼽힌다. 火舍石(화사석) 4면에 火窓(화창)이 열려 있다. 화창을 통해 「無量壽殿」이라 쓰인 편액과 마주친다.

2002년 월드컵대회가 열린 상암구장은 바로 여기서 힌트를 얻어 설계되었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지하철역에서 높은 계단을 통해 축구장에 이르는 動線이 무량수전에 이르는 과정과 매우 유사하다.

무량수전은 아미타불을 모시는 불전이다. 無量壽(무량수)가 바로 아미타불의 한자 표기이다. 「無量壽殿」이라는 편액의 글씨는 우리 역사상 최고의 예술적 군주인 고려 恭愍王(공민왕)이 썼다.

국보 제18호 무량수전은 우리나라 목조건물 중 最高 걸작이다. 축대 정면 세 군데에 아담한 돌계단을 두었다. 정면 5칸, 측면 3칸, 건평 65.4평의 건물이다.

거의 다듬지 않은 주춧돌 위에 가운데가 볼록한 배흘림 기둥을 세웠다. 강릉 客舍門(국보 제51호)에 이어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배흘림이 심한 기둥이다.

무량수전은 소박한 柱心包(주심포) 건물이다. 주심포는 기둥머리 위에만 ?包(공포)를 설치하는 건축양식이다. 공포는 무거운 지붕의 荷重(하중)을 견디게 하는 장치다. 공포의 짜임새도 매우 간결하다.

무량수전 앞마당에서 李泰勳 사진기자가 우리 일행에 합류했다. 그는 이미 2시간 전에 도착해 사진취재를 하고 있었다.

무량수전의 내부에는 서방을 등지고 東向하고 있는, 흙으로 빚어 금을 두껍게 입힌 「塑造(소조) 아미타불」이 홀로 좌정해 있다. 고려 시대에 만든 높이 2.78m의 불상으로 국보 제45호이다.

내부는 배흘림 列柱(열주) 위에 항아리 모양의 대들보를 얹어 主공간을 구성하고, 主공간 주위 4면에 예불을 위한 副공간을 만들었다. 모든 架構材(가구재) 하나가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左右均齊(좌우균제)를 이루고 있다.


『모든 것은 마음먹기 나름』

아미타불을 배견하고 밖으로 나와 무량수전 뒤편으로 발길을 돌렸다. 이곳엔 浮石寺 창건 설화와 얽혀 있는 浮石(부석)과 마주치게 된다. 이 浮石을 얘기하려면 의상 스님의 入唐求法(입당구법) 행적을 먼저 더듬지 않을 수 없다. 다음은 「宋高僧傳(송고승전)」과 일본의 국보 「華嚴緣起繪卷(화엄연기회권)」에 담겨 있는 내용을 필자 나름으로 정리한 것이다.

서기 661년, 의상 스님은 8년 年上인 元曉 스님과 함께 화엄학을 배우기 위해 唐(당)나라 유학을 결심했다. 배를 타기 위해 서해안의 항구로 향하던 중 두 스님은 캄캄한 밤중에 만난 큰비를 피해 굴속으로 들어가 하룻밤을 묵게 되었다. 잠결에 목이 말랐던 원효 스님은 바가지에 담긴 물을 끌어당겨 벌컥벌컥 들이켰다. 물맛은 꿀맛, 바로 그것이었다.

다음날 아침, 기상과 동시에 원효 스님은 간밤에 마신 물의 정체를 접하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것은 해골에 고인 물이었고, 토굴은 해묵은 무덤이었다. 원효 스님은 대번에 심한 구토증을 느꼈다. 그러나 그 순간, 원효 스님은 퍼득 깨달았다. 해골 속에 담긴 물이나 간밤에 마신 「감로수」는 똑같은 물이로되 마음먹기에 따라 그처럼 다르게 느낀 것이었다. 그렇다면 一切唯心造(일체유심조), 즉 「모든 건 마음먹기 나름」이 아닌 것인가? 원효는 入唐유학을 포기하고 오연히 발길을 돌려 서라벌로 되돌아왔다.


『永劫을 함께 삽시다』
문화재해설사 박임희씨가 필자 일행에게 부석사 藏經閣에 보존 중인 「화엄일승법계도」의 글뜻을 풀이하고 있다. 「화엄일승법계도」는 방대한 「華嚴經」의 내용을 210자로 축약한 불교의 偈頌(게송)이다.

그러나 의상 스님은 初志一貫(초지일관)이었다. 당항포에서 배를 타고 서해를 건너 산동반도 登州(등주: 지금의 옌타이)에 닿은 후 신심이 깊은 그곳 유지의 집에 얼마간 유숙하면서 향후 배움의 행보를 구상했다. 그 집의 딸이 아름다운 꾸냥 善妙(선묘)였다.

선묘는 첫눈에 미남자인 의상에 반했다. 선묘는 의상 스님에게 사랑을 고백했다. 하지만 의상은 一切唯心造의 원효 스님이 요석 공주를 품은 것처럼 미인의 육탄공세에 허물어질 승려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의상은 여자의 애절한 프러포즈를 박절하게 거절하기보다는 불타는 여자의 가슴을 진정시킬 줄 아는 승려였다.

『선묘 아가씨, 우리 둘이서 肉慾(육욕)을 불태운들 그것이 얼마나 가겠습니까? 불법에 귀의하여, 往生極樂(왕생극락)해 永劫(영겁)을 함께 삽시다』

이렇게 우리의 의상 스님은 레토릭(修辭學)의 천재였다. 선묘 아가씨는 희망의 메시지 『영겁을 함께 살자』는 말에 솔깃해 다음처럼 화답했다.

『世世生生 스님에 歸命(귀명)하여 大乘(대승)을 익히고, 스님의 大事가 성취되도록 이 한 몸을 다 바치겠습니다』

선묘와 헤어진 의상은 唐의 수도 長安(장안: 지금의 西安) 남방에 위치한 중국 불교의 성지 終南山을 향해 먼길을 떠났다. 종남산 至相寺에서 중국화엄종의 2祖 智嚴(지엄)과 의상의 만남은 극적이었다. 꿈에서 계시를 받은 지엄은 제자를 맞을 때의 관례를 깨고 몸소 절문 앞에까지 나가 의상을 맞았다. 「삼국유사」가 전하는 지엄의 先夢(선몽)에서는 『海東에서 자란 무성한 나무 한 그루가 가지를 뻗어 중국땅을 덮었다』고 한다.

스승은 제자가 이미 화엄의 妙旨(묘지)에 통하고 있음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지엄은 화엄학의 체계를 세운 當代의 학승이었다. 지엄의 문하에서 7년간 공부한 의상은 졸업논문에 해당하는 「華嚴一乘法界圖(화엄일승법계도)」를 지어 스승에게 바쳤는데, 「宋高僧傳」에서는 그 수준을 「靑出於藍(청출어람)」이라고 표현했다. 「화엄일승법계도」는 방대한 「화엄경」을 불과 210자로 요약해 놓은 偈頌(게송: 佛家의 詩)이다.


義相 스님의 급거 귀국

지엄 스님은 668년 10월27일에 입적했다. 의상 스님은 스승의 입적 후에도 3년간 더 중국에서 머물다 671년에 귀국했다. 그렇다면 귀국 전 3년간 의상은 중국에서 무엇을 했을까. 불교철학 전공의 故 金知見(김지견) 박사는 『그 3년간 의상은 중국화엄의 3祖였다』는 연구결과를 韓·中 학계에 보고한 바 있다.

11년 전, 필자는 퇴락해 버린 至相寺(지상사)의 앞뜰에서 西安 西北大學 역사지리학과 李健超(이건초) 교수와 중국화엄의 3祖가 의상인지, 중국학계의 통설처럼 法藏(법장)인지에 대해 토론한 적이 있다. 그야 아무튼 의상 스님은 귀국 20년 후에 법장으로부터 「寄海東書(기해동서)」라는 편지를 받는다. 그때는 법장이 중국 역사상 최초의 女帝인 則天武后(측천무후)의 특별한 존숭을 받아 중국화엄을 크게 번창시키던 시기였다.

현재 일본 天理大가 소장하고 있는 이 「기해동서」에 따르면 법장은 의상을 선배로 깍듯이 表敬(표경)하면서 「華嚴五敎章(화엄오교장)」 등 자신의 저서 6권에 대한 교열을 간청하고 있다.

그렇다면 중국화엄의 3祖 혹은 그와 비슷한 지위에 있던 의상 스님이 왜 갑자기 귀국했던 것일까. 「송고승전」에는 의상의 귀국 목적을 「傳法(전법)」이라고 했지만, 「삼국유사」의 기록은 전혀 다르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의상 스님은 신라사신으로 入唐해 있던 金欽純(김흠순: 金庾信의 동생)으로부터 唐軍의 신라 침공 계획을 입수하고, 이를 본국에 알리기 위해 문무왕 11년(671)에 급거 귀국했다.

백제·고구려의 멸망 후 唐은 648년 비밀협정을 위반하고 백제와 고구려를 직할 식민지로 삼는 한편 신라까지 먹으려고 대군을 집결시켰는데, 그때의 신라 사신 김흠순·金良圖(김양도)는 唐나라 감옥에 갇혔고, 둘 중 김양도는 끝내 옥사하는 사태까지 빚어진 절박한 상황이었다. 이때 의상 스님이 내던진 것은 중국화엄의 3祖라는 직위였고, 당신의 뜨거운 품속에 껴안은 것은 바로 우리 조국이었다.


당신과 나 사이엔 「저 바다」도 없다

이런 상황에서 의상과 선묘의 기막힌 「끈」이 다시 이어진다. 그것은 10년 전의 前篇(전편)보다 훨씬 더 진한 러브스토리다.

조국이 위험한 급박한 상황 때문이었을 것이다. 의상 스님은 장안에서 육로로 등주에 가서 귀국선을 수배하면서도 선묘 아가씨를 만나지 않았다. 뒤늦게 의상 스님의 소식을 들은 선묘는 뱃머리로 달려갔다. 하지만 의상 스님이 탄 배는 이미 출항해 버렸다.

의상을 향한 선묘의 사랑은 『당신과 나 사이에 저 바다가 없었다면 날 두고 떠나지는 않았을 것을~~♬』이라는 체념으로 그치지 않았다. 드디어 선묘는 자신의 목숨까지 던지는 發願(발원)을 감행한다.

『이 몸이 龍이 되어 스님이 타신 배를 호위하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일찍이 제자들에게 「망망대해 큰 바다에서 표류하다가 온갖 어려움이 닥쳐도 관세음보살의 名號(명호)를 부르기만 하면 그 힘으로 험한 파도의 물결도 너희들을 빠뜨리지 못하리다」라고 하신 말씀에 의지해, 지금 小姐(소저)도 관세음보살에 歸命하려 하나이다』

선묘는 「관세음보살」을 부르며 검푸른 물결 속으로 몸을 날렸다. 悲願(비원)★은 이루어졌다. 용으로 변한 선묘는 임이 탄 배를 옹위하여 만경창파를 무사히 건너게 했다. 선묘의 역할은 여기서 끝나는 것은 아니지만, 먼저 급박한 얘기부터 이어 가야 할 것 같다.

귀국 후 의상은 문무왕을 만나 감옥에 갇힌 김흠순에게 들은 唐軍의 움직임을 알렸다. 역사의 기록에서는 누락되었지만, 문무왕은 이런 의상 스님을 왕실 가까이에 모시고 은공에 보답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의상 스님은 명예욕이나 물욕과는 인연이 멀어도 한참 먼 淸淨(청정)비구였다.

의상 스님은 번잡한 王京 서라벌을 등지고 멀리 북상해 강원도 양양 땅에 낙산사를 짓고 동해의 세찬 물결에 온몸을 적시며 관세음보살과의 親見을 간절히 기구했다.

『옛날에 당신(관음보살)이 아미타불 앞에 무릎을 꿇었듯이 이 몸은 당신 앞에 무릎을 꿇고 生生世世의 歸命을 맹세하옵니다』

「生生世世의 歸命」은 어린 선묘가 10여 년 전에 이미 入唐 유학승 의상 앞에 무릎을 꿇고 고백한 사랑의 맹세였다. 그렇다면 관세음보살을 향한 의상 스님의 플라토닉 러브는 혹시 선묘 아가씨에게서 배운 것이 아닐는지 모르겠다. 어떻든 선묘는 의상을 사랑했고, 의상은 관음보살을 사랑했으니 7세기版(판) 삼각관계가 전개된 셈이다.

「삼국사기」 문무왕 16년(676) 봄 2월 條에는 『고승 의상이 왕의 뜻을 받들어 浮石寺를 창건했다』고 기록했다. 676년이라면 나당 7년전쟁에서 신라가 압승해 가던 시기였다. 675년 9월에는 買肖城(매소성: 경기도 연천군) 전투에서 李槿行(이근행)이 지휘한 20만 명의 당군이 신라군에게 참패했다. 676년 11월에는 신라 수군과 당의 수군이 금강 하구에서 최후의 결전을 벌여 신라군이 20전 20승 기록했다. 이로써 실질적인 통일신라시대가 개막되는 것이다.


海東華嚴宗이 浮石宗으로 불리는 까닭
無量壽殿 뒷마당에 있는 浮石. 부석사의 創建緣起와 깊게 얽혀 있다.

다시 말머리를 지금도 무량수전 서쪽에 놓여 있는 거대한 「浮石」으로 돌려야 할 것 같다. 왜냐하면 이 부석이야말로 부석사의 창건연기와 얽혀 있기 때문이다. 「송고승전」에 따르면 선묘는 의상이 부석사를 세울 때도 큰 역할을 했다.

의상 스님은 화엄의 진리를 설파할 터전을 찾아 강원도 양양 낙산사에서 태백산맥을 타고 남하했을 때 지금의 부석사 자리를 먼저 차지하고 있던 500여 명의 무리로부터 공격을 받았다. 공격자는 他종파의 신봉자들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위기일발의 순간, 선묘龍은 큰 바윗돌로 변한 다음 공중으로 치솟아 의상 스님을 엄호하며 공격자들을 위협했다. 공격자들은 줄행랑을 쳤다.

바로 이런 뜬돌(浮石)의 공덕에 의해 창건될 수 있다고 해서 절 이름이 부석사가 된 것이다. 또한 의상을 「부석존자」로 존칭하고, 해동화엄종을 「부석종」으로 호칭하는 것은 위와 같은 緣起(연기) 때문이었다.

지금은 보호 차원에서 어림도 없는 얘기지만, 학창 시절의 답사여행 때 필자는 30여 명의 친구들과 함께 사진을 박으러 한꺼번에 부석 위에 올라간 바 있다. 부석은 이 정도 크기이다. 부석에 대해 李重煥(이중환)은 「擇里志(택리지)」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일제 때 무량수전의 보수 과정에서 발견·촬영된「善妙의 化身」이라는「石龍」. 누군가의 도끼질로 허리가 잘린 石龍은 다시 땅속에 묻혔다고 한다.

<큰 바윗돌 위에 또 하나의 바위가 집처럼 덮여 있다. 언뜻 보면 아랫돌과 맞닿아 붙은 듯하나 자세히 살피면 아랫돌과 맞닿지 않고 약간의 틈이 있어 노끈을 집어넣어 당겼더니 걸림없이 드나들었다>

그렇다면 「뜬돌」이다. 그러나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 것인가. 문화재해설사 박임희씨에게 물었다.

―요즘에도 이중환처럼 부석 사이에 노끈을 집어넣는 방식으로 뜬돌임을 확인하는 분이 있습니까.

『아뇨』

―아무튼 이건 신심의 문제이겠군요.

『일제 때 무량수전을 수리하다가 무량수전 내 아미타불의 臺座(대좌) 밑으로부터 앞마당 석등까지의 땅 밑에 선묘의 化身(화신)인 거대한 石龍(석룡)이 묻혀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때 누군가가 도끼로 후려쳐 석룡의 허리를 끊은 다음에 다시 묻어놓았다고 합디다』

―그 증거를 댈 수 있습니까.

『그럼요』

그녀는 필자에게 그때 촬영된 사진의 복사판을 제시했다. 그것이 선묘의 化身인지 필자로선 확인할 도리가 없지만, 과연 그녀의 말대로 석룡의 허리는 도끼질로 두 동강이 난 모습이다.


義相의 일대기 그린 「華嚴緣起繪卷」은 일본 國寶
義相 스님을 짝사랑해 龍으로 변신해 부석사 창건을 돕는「아름다운 꾸냥」善妙의 초상화. 무량수전 뒤「善妙閣」에 모셔져 있다.

우리 일행은 무량수전 동쪽 뒤켠에 있는 한 칸짜리 전각 앞으로 발길을 돌렸다. 편액에 「선묘각」이라 쓰여 있다. 전각의 문을 열어 보니 선묘의 초상화가 걸려 있다.

우리 일행 중 누군가가 『에그, 2중턱이네, 다이어트 좀 했어야 의상 스님의 사랑을 받았을 것 아냐!』라면서 까르르 웃었다. 이때 필자가 제딴에는 제법 해설다운 해설을 했다.

『거 모르는 말씀입니다. 제가요, 의상 스님의 행적을 찾아 중국 西安에 간 김에 唐현종과 楊貴妃(양귀비)의 사랑이 무르녹았던 화정지를 찾아가 傾國之色(경국지색) 양귀비의 초상화를 봤더니 그녀는 3중턱이더군요. 미인의 기준은 시대에 따라 다른 겁니다. 요즘은 말라깽이가 미인 소리를 듣지만, 보릿고개가 있었던 1960년대까지만 해도 우리 사회에서 미인의 조건은 푸짐한 肉德이었습니다』

사실, 선묘각에 모신 선묘의 미모는 일본의 국보 「화엄연기회권」에 그려진 선묘의 미모에 훨씬 미치지 못한다. 회권은 두루마리 그림이다. 기왕에 「화엄연기회권」의 얘기가 나온 기회에 필자의 경험담 한 토막을 덧붙여야 할 것 같다.

1995년 5월 필자는 「화엄연기회권」을 취재하기 위해 일본 교토 高山寺를 찾아가 여성 주지를 만났다. 高山寺는 「화엄연기회권」을 교토국립박물관에 보관시켜 놓고, 그 사본만 지니고 있었다. 그 사본을 배견하고 싶다고 청했더니 주지의 명을 받은 여승 한 분이 비단으로 감싼 회권을 모시고 왔다.

두루마리 그림 두 개로 이뤄진 사본만 보고도 진본이 참으로 잘 그린 그림임을 느낄 수 있었다. 의상 스님의 유학 길로부터 부석사 창건까지 수십 장면의 그림이 일류 화원의 솜씨로 그려져 있다. 그렇다면 왜 일본 高山寺가 의상 스님의 일생을 이렇게 자상하게 올 컬러 두루마리 그림으로 표현했을까.

그것은 「일본 제1의 淸純無私(청순무사)한 불제자」로 손꼽히는 明惠(묘에: 1173~1232) 스님이 의상 스님의 열렬한 팬이었기 때문이다. 젊은 때의 明惠 스님은 시나브로 엄습하는 남자의 본능을 억제하기 어려워 자신의 귀를 조금씩 잘라 가면서 『소승의 淫慾(음욕)을 여의게 해 달라』고 관음보살께 간구했다. 그런 明惠였던 만큼 선묘 아씨의 육탄공세를 淸淨비구답게 물리치면서도 플라토닉 러브로 승화시킨 의상은 영원한 師表(사표)였던 것이다. 그래서 지금도 高山寺에서는 의상 스님을 「新羅明神(신라명신)」으로 숭봉하고 있다.

당시 일본 사회는 의상 스님을 본받아야 할 필요충분조건이 형성되어 있었다. 13세기 초 일본은 교토의 天皇軍과 가마쿠라 幕府軍이 정면 충돌해 수천 수만 명의 사무라이가 몰죽음하는 등 피로써 피를 씻는 난세였다. 이런 난세에서는 당연히 전쟁 미망인이 양산되게 마련이다. 이렇게 남녀의 性比(성비)가 갑자기 무너지면 淫風(음풍)이 사회에 만연하게 된다. 당시 일본 불교계는 음풍의 사회를 바로잡기 위해 淸淨비구 의상 스님의 행실을 따라 배우도록 계도할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義相의 一代記를 채색 두루마리 그림으로 표현한 日本의 國寶 「華嚴綠起繪卷」. 위에서부터 중국 山東반도 登州에 상륙하여 환대를 받고 있는 義相 스님, 義相과 善妙의 만남, 龍으로 化한 善妙가 義相 스님이 탄 歸國船을 보호하고 있다.


大華嚴의 세계가 펼쳐진 현장
무량수전 동쪽 3층석탑 앞에서 내려다본 부석사와 소백산맥의 연봉.

무량수전에서 벗어나 국보 제19호 祖師堂(조사당)으로 올라가다가 보물 제249호 3층석탑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고 뒤돌아섰다. 발아래로 小白의 연봉이 重重無碍(중중무애)로 펼쳐져 눈속으로 빨려든다.

의상 스님은 부석사의 터전을 잡으면서 바로 이곳에다 화엄의 세계를 펼칠 생각이었던 듯하다. 화엄의 세계는 自我(자아)의 울타리를 훨씬 뛰어넘은 경지이다. 「華嚴經(화엄경)」은 자기가 자기를 아는 것을 넘어 세계를 알게 하고, 더 나아가 세계가 세계를 알게 하는 大乘(대승)의 가르침을 說하고 있다.

그래서 화엄의 세계에서는 하나가 곧 전체이고, 전체가 하나인 圓融(원융)의 세계이다. 따라서 화엄의 스케일은 무한대인 동시에 티끌 하나 속에 모든 것을 품고 있을 만큼 能小能大(능소능대)하다.

박윤희 회장은 『무량수전에서 난생 처음으로 아미타불에게 3000배를 드리고 지친 몸으로 밖으로 나오다 바로 이 3층석탑 앞에서 쓰러졌는데, 그 순간 눈앞에 물결치는 바다가 어른거리더라』고 필자에게 말했다. 필자도 여기에 서서 중중첩첩의 실루엣을 연출하는 소백의 연봉을 바라볼 때마다 이것은 산맥이 아니라 海潮音(해조음) 가득한 바다를 연상해 왔다.

朴회장은 『이곳에서 화엄의 세계에 한걸음 다가선 이후 바로 無量會를 결성해 사회봉사활동을 벌이게 되었다』고 털어놓았다. 無量會라는 이름도 無量壽殿에서 따온 것이라 한다. 1996년 창립 당시엔 회원수가 7명에 불과했지만, 이제는 무려 500여 명으로 불어났다. 이미 여러 언론에 보도된 바이지만, 그동안 무량회는 사할린 귀환동포 노인들의 생활을 얼마간 돕고, IMF 경제위기 때는 탑골공원에서 노숙자들 수백 명에게 매일 점심 공양을 했으며, 조계종 총무원과 합동으로 연말에 전국의 소년·소녀 가장에게 선물꾸러미 하나씩을 보냈다. 그것은 화엄의 利他行(이타행)을 체현하려는 무량회 회원들의 보리심이었다.

『이번 무량회 회원들의 적극 참여로 출반한 「연꽃향기 바람결에」의 판매수익도 전액 무량회의 사회봉사활동에 사용할 것입니다』
국보 제19호 부석사 祖師堂.

10분 정도 가파른 오르막길을 올라 국보 제19호 조사당 앞에 섰다. 조사당 건물은 더 이상 생략할 것도 보탤 것도 없는 간결미의 극치다. 부석사에는 국보가 많다(모두 다섯 점). 조사당 내부에 고려 말에 그려진 국보 제46호 「祖師堂 벽화」가 있었는데, 마모가 심해 지금은 경판각으로 옮겨 보존 중이다.

우리 일행은 부석사 답사를 마치고 강원도 양양 낙산사를 향해 먼 길을 떠났다. 처음엔 36번 국도로 진입해 꾸불꾸불한 佛影(불영)계곡을 거쳐 蔚珍邑(울진읍) 어간에서 동해안과 나란히 뻗은 7번 국도를 타고 바닷바람을 쐬면서 일로 북상할 작정이었지만, 그러기엔 2박3일의 일정으로는 역시 무리일 것 같았다.

가장 빠른 길은 역시 豊基로 나가서 중앙고속도로를 타고 북상하다가 萬鐘분기점에서 영동고속도로로 접어들어서는 강릉 방면으로 東進하는 코스이다. 중앙고속도로를 달리면 기기묘묘한 山勢를 마음껏 완상할 수 있다. 죽령터널을 지나면 우리나라 山河 중 「최고 글래머」라고 할 만한 丹陽을 스쳐가게 된다.

우리 일행은 江陵IC를 빠져나와 7번 국도를 통해 계속 북진했다. 7번 국도는 注文津을 지나면 東海바다와 바짝 붙게 되어 파도 소리를 들으며 짭조름한 바다냄새를 맡게 된다. 우리 일행은 양양군 현남면 南涯(남애)포구에 있는 「해오름을 보는」 모텔에서 답사 첫날의 여독을 풀기로 했다.


태양은 내일 또다시 떠오른다

다음날 일출의 장관을 보기 위해 일찍 눈을 떴다. 새벽의 정적을 깨고 첫닭이 울었다. 시계를 보니 3시28분이었다. 바닷가 언덕 위에 있는 모텔이라 일출을 보는 장소로는 절묘했다. 커튼을 활짝 열어 젖히고 동해의 수평선을 응시했다. 간밤에 별을 보긴 했지만, 새벽 하늘은 명쾌하지 못하고 좀 흐릿했다. 2번 장닭, 3번 장닭이 울었다. 4시28분 날이 밝았다. 동쪽 바다가 약간 불그스레했을 뿐 끝내 해오름의 장관은 보지 못했다. 4시45분, 뻐꾸기 소리가 들려왔다. 개 짖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시끄럽게 들려왔다. 게으른 닭도 울었다.

그러나 실망하지는 않았다. 모든 것은 一切唯心造(일체유심조), 즉 마음먹기 나름인 것이다. 肉眼으로 보지 못했을 뿐이지, 저 구름 한꺼풀 속에서는 동해의 태양이 이미 불끈 치솟아 올랐던 것 아닌가. 내일도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 그때는 신새벽의 동해바다를 벌겋게 장엄하는 일출을 마주 서게 될 것이다.

가파른 내리막길을 먼저 내려가 남애港 경북식당 앞길에서 뒤에 올 일행을 기다리고 있는데, 주인 아저씨가 싱싱한 성게 알을 안주 삼아 해장술을 마시고 있었다. 저 정도면 「삶의 質(질)」이 아주 높은 사람이라고 혼자서 감탄하고 있는데, 그런 필자의 모습이 그에게 어떻게 비쳤는지 모르겠다. 대번에 그는 소주잔을 필자에게 건네면서 성게 하나를 까더니만, 그 샛노란 알을 필자의 입 안에 쑥 집어넣어 준다.

경북식당에서는 오징어덮밥으로 아침식사를 했다. 오징어는 성깔이 급해 수족관에 넣어 놓아도 하루를 살지 못한다. 필자는 언덕 위의 모텔 객실에서 이날 아침 7시쯤 오징어배가 남애항에 입항한 것을 목격했기 때문에 잔뜩 기대하고 오징어덮밥을 주문했던 것이다. 기대한 대로 황홀한 아침식사였다.

부처님 찾아가는 날 아침에 육식을 해서 미안한 일이긴 하지만, 두고두고 추억거리가 될 것 같다. 우리 일행은 남애항을 출발, 다시 7번 국도를 타고 100리쯤 北上해 양양군 降峴面 前津里에 있는 낙산사에 도착했다.


「觀音도량」 洛山寺의 잔인했던 4월
2005년 4월8일, 낙산사의 화재에도 불을 맞지 않은 義相臺. 현판에는「羲湘臺」라고 오기되어 있다.

<그날 바람은 불었다. 온 산이 바람에 울었다. 그 울음소리는 잔인했다. (중략) 그날 바람은 양양과 高城 일대를 태우고 낙산사마저 태웠다. 몇십 년 세월이 한줌 재가 되어 바람에 떠돌고 있었다. 수많은 정성과 기도와 사찰의 역사를 불길들은 바람 부는 대로 춤을 추다가 화마가 되어 한줌의 재로 뱉어 내었다>

위의 인용문은 2005년 4월8일 낙산사 화재 현장을 취재한 「불교신문」 논설위원 성전 스님의 글이다. 봄철에 잦은 산불이 바람을 타고 건너뛰어 관음도량 낙산사를 덮친 것이었다.

낙산사는 신라 문무왕 11년(671)에 의상 스님이 창건했다. 헌안왕 2년(858)에 梵日(범일) 스님이 중건했으나 6·25전쟁 때 불탔다. 작년 봄의 화재로 소실된 전각들은 1953년에 지은 것이다.

낙산사는 또다시 짓고 있었다. 곳곳에 건재가 쌓여 있다. 홍예문을 지나 조금 내려가니 寶陀殿(보타전)은 화재를 면한 채 제 모습을 지키고 있었다. 바로 이웃한 원통보전은 불을 먹었는데, 신기한 일이었다. 동행한 「불교신문」 前 편집국장 양범수씨에게 그 까닭을 물어보았다.

『전문가들이 말하기를, 背山臨水(배산임수)한 터전의 덕을 본 것이라 하더군요. 보타전은 저 능선 바로 아래에 자리를 잡았잖아요. 능선 위에 불이 뜨거우니 골짜기의 찬바람이 휩쓸려 올라왔을 것이고, 그 치미는 힘에 눌려 불길이 밑으로 내려오지 못한 겁니다』

紅蓮庵(홍련암)으로 가는 길에 세워진 가건물에 들어가면 누구나 무료로 국수공양을 받을 수 있게 되어 있다.

봄바람을 탄 불길은 참으로 기세등등했던 모양이다. 의상대 옆 벼랑가의 나무들도 불을 맞았다. 그래도 소생 가능한 나무들만은 마대로 피복하고 비닐을 감싸 놓고 있었다. 그러나 의상 스님이 「백화도량발원문」을 지어 바치며 관음보살에게 기도했던 홍련암과 義相臺는 무사했다. 홍련암 뒷산 꼭대기에서 바다를 향해 서 있는 「해수관세음보살」도 불을 맞지 않았다. 필자와 동행한 양범수씨가 바로 홍련암을 노래한 「관세음보살이시여」의 작시자이다.

〈붉은 빛 홍련이 동해에 떠오르사
눈부신 아침햇살 의상대를 쓸어안고
들리는 파도소리 염원실어 번뇌거두신
거룩한 사바의 보살 海水관음이시여
옴 ~~나무 관세음보살(2절 생략)〉

8각정 모습의 義相臺(의상대)의 현판에는 「羲湘臺」(희상대)라 잘못 쓰여 있다. 옳을 「義」 자를 글꼴이 비슷한 「羲」로 오기한 것 같다. 의상의 「相」은 「湘」으로 표기하기도 한다. 「삼국유사」와 「송고승전」에는 「義湘」이라 쓰여 있다. 그러나 「삼국사기」와 均如(균여)가 지은 「一乘法界圖圓通記」에는 「義相」으로 되어 있다. 더욱이 의상의 직계 제자 道身(도신)이 지은 「道身章」에도 「相」으로 되어 있다. 제자가 스승의 이름을 틀리게 적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필자는 義相臺로 건너오면서 낙산사 경내의 한 건물에 「義相思想硏究所」(의상사상연구소)라고 쓴 간판이 걸려 있는 것을 목격한 바 있다. 이번에 낙산사를 재건하는 기회에 義相臺의 편액도 바로잡아 한 가지로 통일했으면 좋겠다. 바닷바람이 시원한 의상대에 앉아 양범수씨에게 물었다.

―관음보살은 불교신도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보살입니다. 그 까닭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부처님은 제자들에게 「한량없는 백천만억 중생이 갖가지 괴로움을 받을 때 한마음으로 관세음보살을 부르기만 하면 관세음보살은 그 음성을 듣고 중생이 괴로움에서 벗어나게 하느니라」고 說하셨습니다』


고통받는 중생의 영원한 해결사

―관음보살은 고통받는 중생들의 영원한 해결사인 셈이군요. 특히 바닷가 주민이나 뱃사람들 사이에 관음신앙이 번성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제가 옮겨 엮은 「한글 관세음보살普門品(보문품)」을 한 권 드릴 테니 읽어 보세요. 거기엔 「큰 폭풍이 일어 그 배가 악귀들의 땅으로 떠내려가게 되었더라도 그 가운데 한 사람이라도 소리내어 관세음보살을 부른다면 다른 모든 사람들도 모두 악귀의 재난을 벗어나게 될 것이니라」라고 쓰여 있습니다』

―위기에 처했을 때 「관세음보살」을 부르는 불교도 옆에 있기만 하면 저 같은 사람도 구원을 받게 되겠네요.

『大乘불교는 남과 더불어 다 함께 이로움을 얻기를 지향합니다. 나만을 위해 「관세음보살」을 부르는 것이 아닌 만큼 당연히 곁에서 듣는 사람도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저기 홍련암 밑 관음굴을 때리는 파도 소리가 참으로 듣기 좋습니다.

『불가에서는 파도 소리를 「관세음보살의 목소리」라고 하죠. 의상 대사는 저기 관음굴에서 무릎을 꿇고 관세음보살에게 親見을 간구했습니다. 그래서 낙산사를 관음도량이라고 부르게 된 것입니다』

양범수씨는 일찍이 學僧(학승)으로 알려졌던 분인데, 환속하여 「불교신문」에 재직했고, 퇴직 후에는 譯經사업에 정진해 지난 5월에 이해하기 쉬운 우리말로 번역된 「불설아미타경」(일흥미디어 刊) 등 佛書 5권을 세상에 내놓았다. 불교의 문외한인 필자로서는 좋은 길잡이와 동행하게 되었던 셈이다.

낙산사 종무실로부터 양범수씨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 낙산사 식당에 점심을 준비해 놓았으니 빨리 넘어오라는 전갈이었다. 그러고 보니 점심 때가 벌써 지났다.

우리 일행은 식당에 가서 산채비빔밥 공양을 받았다. 맛있게 한 그릇씩 챙기고 식당 바람벽을 흘긋 보니 다음 내용의 「공양게」가 나붙어 있었다.

「이 음식이 어디서 왔는가? 내 덕행으로 받기 부끄럽네. 마음의 온갖 욕심 버리고 몸을 치료하는 약으로 공양을 받습니다(後略)」

덕행이 없는 필자로서는 뒤늦게나마 부끄러워 공연히 옷깃만 여몄다. 불난 절집에 찾아와 염치 불구하고 점심공양을 받았던 것이다.

화마가 할퀴고 간 낙산사는 금강송 등 한국산 목재로 복원되리라고 한다. 산불피해지에는 전통가람 기법을 적용해 「천년 숲」으로 조성된다. 종무실 스님에 따르면 홍련암·의상대·해수관음상 등 낙산사 진입로변에는 경관효과를 높이기 위해 향토 낙엽활엽수인 층층나무·피나무·배룡나무와 침엽수인 소나무를 이식해 混淆林(혼효림)을 조성할 계획이다. 복원공사의 준공은 「앞으로 3년 후」라고 한다(필자의 답사 후인 7월11일 태풍 「에위니아」가 북상하며 동해안을 강타한 폭우로 해수관음상 앞 관음전을 받친 축대가 크게 무너져내려 전각이 붕괴될 위기를 맞았다고 한다).


泗溟대사의 겨레사랑의 聖地-乾鳳寺
대한민국 최북단의 사찰인 금강산 건봉사의 不二門. 6·25 전쟁의 전화 속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건물이다.

낙산사를 나와 7번 국도를 타고 다시 북상했다. 우리나라 제일 북쪽에 있는 사찰인 고성군 거진읍 냉천리 乾鳳寺(건봉사)를 답사하기 위해서였다. 건봉사는 수년 전까지만 해도 민간인들이 출입할 수 없었다. 민통선이 북상함에 따라 1999년 이후에야 건봉사 참배가 가능해진 것이다. 7번 국도를 달리다 간성읍 3거리 헌병초소에서 좌회전해 46번 국도와 郡道를 타는 25리 길이 끝나는 곳에 「金剛山乾鳳寺」가 위치해 있다. 금강산과는 100여 리 떨어져 있지만, 그 지맥의 남쪽 기슭이라 이런 이름이 붙었다.

건봉사는 신라 법흥왕 7년(520)에 阿道(아도) 화상에 의해 창건되고, 고려 공민왕 7년(1358) 懶翁(나옹) 선사에 의해 중수되었다. 조선 世祖 10년(1464) 세조가 御室閣(어실각)을 짓게 하고 역대 임금의 願堂(원당)으로 삼았다. 6·25 전쟁 전까지는 31본산의 하나였다. 필자가 건봉사를 굳이 찾은 까닭은 이런 사적 때문이 아니었다.

건봉사는 사명대사 惟政(유정)의 호국정신이 깃들어 있는 곳이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유정 스님은 구국의 선봉에 섰다. 스승 西山대사 休靜(휴정)의 편지를 받은 유정 스님은 건봉사 僧義軍 700여 명을 이끌고 1000리 길을 달려가 묘향산에 있던 휴정과 합류했다. 당시 나이 이미 칠순이었던 휴정 스님은 義僧都大將의 지위를 제자 유정에게 넘겼다. 1593년 1월, 승병 2000명을 이끈 유정 스님은 朝明연합군의 평양성 탈환작전에 참전해 큰 전공을 세웠다.

그 뒤 유정 스님은 네 차례에 걸쳐 적진에 들어가 敵將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와 회담을 하고 돌아와 그 전말과 적정을 알리는 「討賊保民事疏(토적보민사소)」를 선조에게 올렸다. 여러 山城 수축과 軍器 제조에도 온 힘을 기울였다. 합천 海印寺 부근에서 화살촉 등 무기를 제조했고, 투항한 왜군의 조총병들을 비변사에 넘겨 조총과 화약 제조법·사격법을 가르치도록 했다.

사명대사의 역할은 전쟁 후에도 빛났다. 1604년 8월에 정1품 품계의 강화사신으로 일본에 건너가서 8개월간 도쿠가와 막부 측과 협상을 벌인 끝에 포로로 잡혀 간 3000여 명의 동포를 데리고 이듬해 4월에 귀국했다.

이때 왜군이 탈취해 간 불사리도 되찾아와 通度寺(통도사) 금강계단에 모시고, 그중 齒牙(치아)사리 12과는 건봉사에 따로 봉안했다. 부처님의 眞身사리는 신라 때 慈藏(자장) 법사가 唐나라에서 모시고 돌아와 通度寺 금강계단에 봉안해 온 것이었다.

이후 조선왕조와 도쿠가와 막부 치하의 일본은 260년간에 걸친 장기 평화관계를 유지했다. 이런 對日외교의 초석을 놓은 분이 유정 스님인 것이다. 조선왕조는 개국 이래 200여 년간 排佛崇儒(배불숭유)를 國是로 삼고 선비관료를 양성하고, 승려들을 괄시해 都城 출입조차 못 하게 했다.
사명대사 진영.

그러나 막상 국난을 당하고, 그 戰後 처리를 위해 적지에 협상대표를 파견해야 했을 때 나라 안에 승려 惟政만 한 적임자가 없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렇게 대의명분을 중시하며 큰소리쳤던 선비관료들은 다 어디로 갔던 것일까.

부처님의 치아사리를 봉안한 건봉사는 일약 전국 4대 사찰의 하나로 도약했다. 그러나 6·25 전쟁으로 건봉사의 전각들은 깡그리 불타 버렸다. 휴전과 때를 같이해서는 민통선 북방에 위치한 관계로 40여 년간 폐허화했다.

山門에 「不二門」이라 쓰인 편액이 걸려 있다. 6·25 전쟁 때 폐허가 된 절터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건축물이다. 편액의 글씨는 조선왕조 마지막 황태자인 영친왕의 스승인 海岡 金圭鎭(해강 김규진)이 썼다.

6·25 전쟁 시기의 상처가 남아 있는 폐허를 지나 적멸보궁으로 올라갔다. 적멸보궁 내부엔 따로 불상을 모시지 않았다. 적멸보궁 바로 뒤쪽에 부처님의 치아사리 7과가 봉안된 사리탑이 있기 때문이다. 나머지 치아사리 5과는 종무소에서 전시해 친견할 수 있다는 안내문이 나붙어 있었다.

맑은 시냇물 위로 걸린 능파교를 건너 종무소로 갔다. 부처님 치아사리 5과를 친견한 후 「乾鳳寺史蹟」이라는 이름의 책 한 권을 구입했다. 1928년 만해 韓龍雲(한용운) 스님이 편찬한 「건봉사及건봉사말사사적」에 의거해 2003년에 편찬된 것이다.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불교사상가·시인이었던 만해 스님은 1920년대 후반 건봉사에 주석하면서 건봉사의 역사를 정리하고, 건봉사가 1906년에 설립한 관동지방 최초의 신학문 교육기관 인 鳳鳴(봉명)학교에서 불교사상과 독립정신을 고취시켰다. 만해를 지도자로 모신 항일비밀결사인 卍黨(만당)의 활동도 건봉사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6·25 전쟁 전의 乾鳳寺 전경.

건봉사 적멸보궁 뒤 불사리탑. 이 불사리탑에는 부처님의 齒牙사리 7과가 봉안되어 있다. 부처님의 齒牙사리는 임진왜란 때 일본군의 약탈해 갔으나 1605년 강화사절로 渡日했던 사명대사가 되찾아온 것이다.


卍海 스님의 정신적 고향-百潭寺
만해 한용운 스님

이제는 卍海(만해) 스님이 출가·수도했던 백담사를 찾아갈 차례다. 46번 국도를 타고 陳富嶺을 넘어 인제군 북면 용대리에서 內설악 쪽으로 길을 바꿔 1km 거리의 백담사 매표소에 이르렀다. 백담사 종무실에 미리 양해를 얻어둔 덕에 승차 입장이 가능했다. 백담계곡을 낀 백담사 진입로 6km 주변은 아직도 仙境(선경)이다.

백담사는 신라 진덕여왕 원년(647)에 자장율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백담사는 화재로 전각이 소실되어 이사를 자주 했던 절이다. 전설에 따르면 수차례의 화재로 걱정하던 주지의 꿈에 백발노인이 나타나 대청봉에서 潭(담: 못)이 100개 되는 터에 절을 지으면 三災(삼재: 水·火·風)를 면하리라고 해서 현 위치에 자리 잡게 되었으며, 절 이름도 百潭寺가 되었다고 한다.

백담사라면 만해 한용운 선사가 출가·수도했던 절이다. 만해는 백담사의 산내암자 五歲庵(오세암)에서 「悟道頌(오도송)」을 읊었고, 1925년 8월29일 밤 백담사 화엄실에서 「님의 침묵」을 썼다.

〈(前略)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습니다. (中略) 아아 님은 갔지만은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만해의 「님」을 두고 조국·민족·중생·부처·친구·애인·자연·진리 등 다양한 해석이 있지만, 어떻든 그것이 한국적 로맨티시즘의 뜨거운 鎔巖(용암)이었던 것만은 틀림없다. 「님」은 침묵했지만, 만해는 죽을 때까지 침묵하지 않았다.

만해 韓龍雲은 1879년 8월29일 충남 홍성의 몰락한 양반가에서 韓應俊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다섯 살 무렵부터 시골 서당에서 漢學을 공부해 「神童(신동)」으로 소문났다. 18세에 서당 훈장이 되었으나 번민과 유랑 끝에 19세에 백담사로 찾아가 머리를 깎았다. 1905년, 백담사에 주석하던 蓮谷(연곡) 스님을 은사로 받들고 정진해 득도했다.

1919년 3·1운동 때 33인 대표의 1인으로 독립선언문의 공약삼장을 썼고, 일제에 의해 3년간 옥고를 치렀다. 그 후 많은 인사들이 훼절해 친일파로 전락했으나 만해는 끝까지 지조를 지키며 독립운동과 불교개혁운동에 몸바쳤다.
1990년대 이전의 백담사.


전두환 前 대통령 귀양살이 중의 秘話

백담사는 全斗煥(전두환) 前 대통령이 「귀양살이」를 했던 곳이기도 하다. 전두환씨 부부는 1988년 11월23일부터 2년 동안 백담사 극락보전 앞 화엄실에서 기거했다. 필자와 동행한 「불교신문」 前 편집국장 양범수씨는 전두환씨의 「귀양살이」 2년간 백담사에 상주하며 「풀 기자」로 활약했다.

―권력을 놓은 전두환씨의 「귀양지」가 왜 하필 백담사가 되었습니까.

『처음 후보지는 오대산 月精寺(월정사)였어요. 許文道(허문도)씨가 가깝게 지내는 오대산 월정사 주지 道明(도명) 스님에게 「어른을 월정사에서 모시면 좋겠다」고 제의했답디다(許씨는 전두환 집권 시절에 통일부 장관 등을 역임했다). 도명 스님도 「좋다」고 하고, 연희동도 내락한 상태였어요. 그런 가운데 연희동에서 당시 조계종 총무원장 徐義玄(서의현) 스님에게 전화를 넣어 「빨리 뵙고 싶다」고 했답니다. 그때 마침 의현 스님은 그의 本家인 대구 동화사에 내려가 있었어요. 의현 총무원장은 택시를 타고 급거 상경하면서 조는 듯 참선하듯 눈을 감고 있더니만 갑자기 「월정사, 거긴 안 좋아」라고 하더랍니다』

―왜요.

『월정사는 접근하기가 너무 쉬운 절이었기 때문입니다. 의현 스님은 전두환씨의 相好가 거북과 닮은 것으로 생각했답니다. 그러면 거북이가 세상과 멀리 떨어져 조용하게 세월을 낚는 데로는 어디가 좋을까-서현 스님은 불현듯 백담사를 생각한 겁니다. 백담사는 100개의 못이 있는 곳이니까 거북이는 거기에 가기만 하면 어디든 숨어 살 수 있다는 거지요. 그때까지 백담사는 참선하는 스님들이나 찾아가는 궁벽한 절이었거든요. 진입로는 오직 백담계곡의 외길 하나, 누구 한 사람만 길목을 지키면 그 누구도 카메라를 들이댈 수 없는 곳이거든요』

―그때 사진기자들은 백담사 주변 산꼭대기에 올라가 망원렌즈를 당기긴 했지만, 접근은 불가능했지요.

『나는 의현 스님의 智略(지략)이 대단했다고 봐요. 그때 전두환 前 대통령이 다른 절에 갔다면 몇 달도 견디지 못하고 하산해야 했을 겁니다』

―곁에서 지켜본 전두환은 어떤 사람입디까.

『大人 기질이 있는 인물로 보았습니다』

―보스 기질은 대단하다던데요.

『어떻든 대단해요. 「어른 고생하신다」며 술과 안주를 장만해 산 넘고 물 건너 찾아오는 옛 부하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주량은 어떻습디까.

『양주를 말술로 마시는 분입니다. 그런데도 꿈쩍 하지 않더군요』

―안주는 어떤 것들입디까.

『된장독에 5년쯤 푹 박아 두었던 굴비, 곰삭은 전라도 젓갈 같은 것들이었어요. 전두환 前 대통령의 단골집인 「송죽헌」에서 가져온 음식이었습니다. 송죽헌은 원래 光州에 있었는데, 전두환씨의 집권 후 上京한 요리집입니다』

―왜 하필이면 전두환씨의 집권 후 서울로 옮겨 왔습니까.

『光州사태 때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광주에 내려왔다가 송죽헌의 요리를 유별나게 좋아하게 됐답디다. 그러니 따라온 것이겠죠』

―전두환씨는 스님들과 잘 어울립디까.

『설악산 신흥사 會主 오현 스님, 월정사 주지 도명 스님 등과 만나면 밤을 새우며 환담할 만큼 가까워지더군요. 총무원장 의현 스님도 자주 다녀갔어요』

전두환 前 대통령이 떠난 후 백담사는 모습을 일신했다. 제3교구 신흥사 오현 스님의 「원력」으로 30여 동의 건물이 들어선 웅장한 대사찰이 되었다.
백담사를 나서는 필자 일행. 왼쪽으로부터 양범수·박윤희·강동민씨와 필자. 전두환 前 대통령의「귀양살이」후 백담사는 30여 동의 건물이 들어선 대가람이 되었다.


「사랑」을 찾아다닌 답사

백담사 사무국 朴吉壤 국장에게 차대접을 받고 있는 중에 무량회 부회장 金鐘先씨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그녀는 『백담사에서 오세암을 거쳐 봉정암에 와 있다』면서 우리 일행에게 뒤따라올 것을 권유했지만, 필자는 사양했다. 백담사에서 출발해도 봉정암까지는 험한 산길을 6시간쯤 올라가야 도달할 수 있는 우리나라 최고봉의 기도처다. 김종선씨는 「연꽃향기 바람결에」 중 봉정암을 찬미한 「봉황의 인도」를 작시한 분이다.

우리 일행은 백담사에서 내려와 寺下村(사하촌)의 펜션에서 하룻밤을 묵고 다음날 아침 인근 용대리 「만해마을」을 찾아갔다. 만해마을은 제3교구 會主 오현 스님의 발원으로 1만5000평의 땅에 건립되어 있다. 매년 8월 중순 이곳에서 개최되는 「만해축전」에는 국내외 문인 3000명이 초청된다. 기념관에 새겨진 다음 글귀가 인상적이었다.

<만해는 중이냐? 중이 아니다. 만해는 시인이냐? 시인도 아니다. 만해는 한국사람이다. 뚜렷한 배달민족이다. 독립투사다. 항일투사다. 강철 같은 의지로, 불덩이 같은 정열로, 대쪽 같은 절조로, 고고한 자세로, 서릿발 같은 기상으로 최후의 일각까지 몸둥이로 부딪쳤다>

필자 일행은 인제·원통·양구를 거쳐 烏鳳山을 넘어 소양호 북쪽 호반에 있는 淸平寺(청평사)에 들렀다. 굳이 청평사를 찾은 이유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高麗 정원」을 둘러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고려 정원」은 청평사 진입로변에 위치한 九聲(구성)폭포로부터 청평사의 산내 암자 息巖(식암)까지 3km의 계곡 좌우에 펼쳐 있다.

이 대규모 정원을 만든 인물은 고려 예종 때의 학자인 李資憲(이자헌: 1061~1125)이다. 그는 愛妻(애처)가 요절하자 벼슬을 버리고 이곳 山寺에 들어와 죽을 때까지 37년간 머물면서 禪學(선학)을 닦고 대자연과 어울리는 정원을 축조했다. 청평사가 등진 芙蓉山(부용산) 정상과 일직선상에 축조된 인공연못 靈池(영지)에서는 고려청자와 조선백자의 파편 등이 발굴되었다.

「고려 정원」의 모티브는 아내 사랑이었다. 결국 이번 답사는 사랑으로 출발해 사랑으로 끝났다. 경춘가도를 달려 서울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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