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조선 기사

鄭淳台 기자의 현장 답사 - 상암월드컵경기장 올림픽체조경기장 설계자 柳春秀

한국 美의 원형을 찾아서

글 정순태 기자  2006-08-27

  • 페이스북
  • 트위터
  • 카카오톡
  • 글자 크게
  • 글자 작게
궂은비가 부슬부슬 내리던 한밤중 해발 670m의 담도 없는 외딴 집에서 벌어진 實話(실화)이다. 요즘 한국에선 보기 드문 오지인 반야마을(경북 봉화군 石浦面)에서 깊은 산속으로 한참 더 들어가야만 하는 독립가옥―휴대폰 같은 건 아예 터지지도 않는 世俗(세속)의 바깥이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애절한 목소리였다. 집주인은 유리창 너머로 불청객의 형색부터 살펴보았다. 긴 머리가 비에 흠뻑 젖은 여성 둘이었다. 어디 홀린 것이나 아닐까―덜컥 겁부터 났다. 그러나 섬뜩한 素服(소복) 차림이 아닌 등산복 차림이었다.

『여우요, 사람이요?』

『우리 사람 맞아요』

『夜深(야심)한데 웬일이우』

『선생님, 하룻밤만 묵고 갈 수 없을까요』

집주인은 방문을 열고 마루로 나가 불청객들과 마주 섰다. 방 안의 불빛으로 얼굴이 드러났다. 아직 앳된 처녀들이었다.

『여긴 들어오는 것이야 쉽지만, 나가기는 어려운 집인데…』

이제는 처녀들도 명랑하게 반문했다.

『그럼, 우린 어찌하면 이 집에서 풀려날 수 있죠?』

『내일 아침에 청소하고 밥 먹고 나면 설거지도 해줘야지』

집주인은 현대한국의 대표적 건축가 柳春秀(류춘수)씨이고, 외딴 집은 그의 스튜디오이다. 그는 매주 금요일부터 월요일 아침까지 이곳에서 머물면서 작품을 구상하고 도면도 그린다.

처녀들은 『오지 탐방 신문기사를 읽고 산행에 나섰다가 길을 잃었다』고 했다. 멀리서 불빛을 보고 그의 스튜디오를 찾아온 것이었다.

奉化郡(봉화군)은 강원도 영월·태백·삼척의 남부와 붙은 경북 최북단 지방이다. 郡(군) 중에서 면적이 가장 넓고, 春陽木(춘양목) 혹은 金剛松(금강송)이라 불리는 우리 전통건축의 최고급 목재가 自生(자생)하는 곳이다.

盤野(반야)는 원래 화전민들이 살던 마을이었다. 요즘은 빈집이 대부분이다. 농부들은 이곳에 고랭지 채소나 옥수수를 심어 놓고 大處(대처)로 나가 있다가 농사철에나 찾아와 며칠씩 머물고 간다.
상암월드컵경기장 VIP실 베란다에서 인터뷰하는 柳春秀 회장.

柳회장의 집은 반야마을에서 3km쯤 떨어져 있다. 이 집은 柳회장의 별장이 아니라 그의 현주소지이다. 이곳에 주민등록을 한 지 이미 11년의 세월이 흘렀다.

柳春秀씨는 「(주)종합건축사사무소 異空(이공)」의 회장이다. 異空은 영어로 「Beyond Space」로 표기된다. 俗世(속세)의 울타리를 뛰어넘은 「彼岸(피안)의 空間(공간)」을 의미한다. 외딴 집은 「더 나은 공간」의 창출을 위한 그의 産室(산실)인 셈이다.


화려한 수상과 해외 실적
상암월드컵경기장의 야경.

앞에서 필자가 그를 「현대한국의 대표적 건축가」라고 좀 막연하게 표현했다. 그렇다면 그는 어떤 수준의 건축가일까. 이 방면의 문외한인 필자로서는 실적으로 그의 위상을 가늠할 수밖에 없다.

그가 설계한 「한계령휴게소」는 한국건축가협회상을 수상했고(1983년), 그의 「88올림픽선수촌」은 서울올림픽조직위원회 국제현상설계에서 당선되었다(1985년). 그의 「삼하리 주택」은 「京鄕하우징페어 주택공모전 대상(1987년)과 제4회 한국건축가협회 아천상(1990년)을 받았고, 그의 「리츠칼튼(호텔)서울」은 한국건축문화대상을 수상(1995년)했다.

이어 그는 월드컵 서울(상암)경기장을 설계했고(1998년), 월드컵 대회가 끝난 직후에는 그 공적에 의해 대한민국 체육훈장 백마장을 받았다(2002년).

그의 해외 실적도 화려하다. 1988년 호주 시드니 오페라하우스가 주최한 「콰터나리오」에서 그는 「서울올림픽 체조경기장」으로 국제건축상 금상을 수상했다. 중국 海南省(해남성)의 국제현상설계에서는 그의 작품 「868 TOWERS」(1992년)가, 北京市의 국제현상설계에서는 그의 「京門旅遊城(경문여유성)」이 1등으로 당선되었다(1994년).

요즘 그는 중국 海南省 海口市(해구시) 新阜島(신부도)를 신개념의 관광단지로 조성하는 프로젝트의 설계자로 활약하고 있다. 신부도 재개발계획안을 마련하기 위한 국제현상공모에서 그는 미국·영국·캐나다·스웨덴·독일·일본·중국 등 7개국의 경쟁자를 물리치고 1등으로 당선했다. 그는 중국뿐만 아니라 이란·말레이시아·일본·태국의 주거·체육시설 등을 설계했다.

그가 대표이사로 있는 (주)종합건축사사무소 異空의 소재지는 서울 관악구 봉천11동 異空빌딩이다. 그런 그가 편도에 5시간이나 걸리는 奉化郡의 깊은 산속에 스튜디오를 꾸미고 주말마다 그곳에 머무는 까닭은 도대체 무엇일까.

지난 7월18일, 필자는 서울 강남고속버스터미널과 붙어 있는 메리어트 호텔의 지하 중식당에서 柳春秀 회장과 만났다. 그는 주머니가 많이 달린 등산용 조끼와 작업복 차림에 배낭까지 둘러메고 나타났다.

그는 도회지와 인연이 먼 산골 냄새가 물씬해 필자의 향수를 자극했다. 그런 그는 『내 작품은 내 고향의 추억』이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그곳에」 가 보아야 할 이유가 생겼다. 그에게 『奉化 스튜디오에 한번 동행하고 싶다』고 청했다.
1987년「경향하우징페어」대상을 수상한 柳春秀 설계의 삼하리 주택.

지난 7월20일 오전 9시30분, 柳회장과 필자는 서울 지하철 5호선 방이역 2번 출구 앞에서 다시 만났다. 그가 손수 운전하는 지프를 함께 타고 중부고속도로·영동고속도로·중앙고속도로를 달려 西제천IC를 빠져나와 38번 국도를 타고 淸?浦(청령포)를 조금 지나 88번 지방도로 접어들었다.

東江과 西江이 만나는 청령포는 숙부(世祖)에게 왕위를 찬탈당한 端宗(단종)의 유배지이고, 가까이에 그의 원혼이 묻힌 莊陵(장릉)이 있지만, 다음 기회에 둘러보기로 했다. 영월 일대는 지난 장마로 큰 물난리를 겪었다.

―東江이 범람해 인근 주민들이 연례행사처럼 물난리를 겪는데,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東江의 생태계를 보존하려면 댐을 건설하지 않는 것이 좋죠. 그러려면 선진국에서처럼 강변 마을을 산 중턱으로 옮겨야 합니다』

―강변을 돈 버는 사업장으로 만들어 놓고 있는 우리의 현실에서 주민들이 과연 山으로 올라가려고 하겠습니까.

『그렇다면 댐을 축조하는 수밖에 없죠. 인명이 우선이니까. 지금처럼 댐 건설도 안 된다, 주거지도 옮기기 싫다면 물난리를 막을 방법이 없는 것 아닙니까. 주민들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물론 정부도 산지가 65%가 넘는 국토를 효율적으로 이용하는 대책을 마련해야 할 것입니다. 새마을사업 이후 우리나라에서는 농촌을 위한 정책이 없었습니다. 거의 매년 물난리가 나고, 정부 예산을 피해보상 등으로 쓰는 것은 국가재원의 낭비입니다』

88번 지방도로는 西江의 강변을 따라 축조된 폭 4~5m의 좁은 길이다. 도로변 낭떠러지 밑으로 西江의 흙탕물이 급류를 이루고 있었다. 천연기념물 제219호 「고씨동굴」 앞동네는 불과 이틀 전에만 해도 물속에 잠겨 있었다고 한다. 길가의 교통표지판은 죄다 땅바닥에 넘어졌고, 2층집의 아래층까지 물에 잠겼던 흔적이 드러나 있었다. 그렇다면 우리가 탄 지프는 「이틀 전의 물속」으로 달리는 셈이었다.

―柳회장은 1996년 3월11일자 조선일보에 「청계천을 살리자」는 칼럼을 쓰셨더군요.

『600년 古都(고도)인 서울의 중심은 사실 청계천이에요. 옥인동과 삼청동 계곡으로 흘러온 인왕산 지류를 시작으로 수표교를 지나 남산과 낙산의 여울들이 모여 멀리 중량천과 만나고, 다시 살곶이 다리 밑을 지나 뚝섬으로 굽이돌던 청계천 아닙니까.

이름조차 「맑은 여울」인 청계천을 우리는 먹고살기에 바빠 그동안 방치했었습니다. 청계천을 복원한 李明博(이명박) 전임 시장의 결단에 박수를 보내지만, 청계천에는 아직도 더 손볼 곳이 많습니다』


다섯 살 때부터 붓글씨 연습
고향 숫골(경북 봉화군 물야면 북지리)의 겨울풍경 스케치.

영월군 下東面을 지나면 강원도가 끝난다. 봉화군에 진입해 도래기재를 넘었다. 西碧(서벽)초등학교가 있는 삼거리에서 우회전해 梧田里(오전리)의 「먹고 자고 쉬는 곳」이라고 써놓은 박달장에 들렀다.

식탁에 내놓은 물은 철분이 함유된 梧田(오전) 탄산약수였다. 처음엔 사이다처럼 입안을 톡 쏘더니만 끝맛은 달콤했다. 늦은 점심 후 우리는 10여 리 떨어진 物野面(물야면) 北枝2里 숫골에 도착했다. 柳회장이 유·소년기를 살았던 고향집은 벌써 헐려 버리고, 그 터는 옥수수·고추밭으로 변해 있었다.

―선친은 어떤 분이셨습니까.

『아버지는 面서기로 일하셨습니다. 저는 다섯 살 무렵부터 아버지께 千字文(천자문)을 배웠어요. 그때 우리 집은 우리 마을에서 유일하게 신문을 구독했어요. 아버지는 제게 「신문지에 여백이 없도록 붓글씨를 써라」는 숙제를 내셨고, 매일 퇴근 후에는 「신문지를 가져오라」 하며 저의 진도를 확인하셨지요』

그렇다면 柳회장은 나이 다섯에 벌써 건축가가 되는 데 필요한 미술 공부를 시작한 셈이다. 한자를 붓으로 쓰는 것이야말로 제대로 된 그림 연습인 것이다.

―건축가 柳春秀의 힘은 習字(습자)에서 출발한 것이군요.

『아버지는 제게 붓을 바르게 잡는 법부터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래서 제 손에 筆力(필력)이 붙기 시작한 거예요. 지금도 누구와 대화할 때는 손에 붓을 쥐어야만 마음이 놓입니다. 그래서 저는 늘 휴대용 붓을 호주머니에 넣어 다닙니다. 외국인과 대화를 하다가도 주요 대목에 이르면 붓을 꺼내 筆談(필담)을 하면서 그림도 그립니다. 이런 모습이 그들에게 굉장히 좋게 보이나 봐요』

―柳회장을 중학 때부터 大處(대처)로 보내 공부시켰으니 가정형편이 괜찮았나 보죠(그는 안동사범병설中·대구高·한양大 건축과 출신이다).

『面서기 월급에다 농토도 조금 있었으니 시골에서는 「부잣집」이란 소리 들었죠. 그러나 우리 부모님은 평생 여름에 선풍기 한 대 사지 않을 정도로 절약하면서 우리를 공부시키셨어요.

제가 3修를 하는 바람에 여동생도 같은 해에 건국大에 입학했는데, 막내 여동생도 그해 진명女高에 진학하는 바람에 우리 3남매가 한꺼번에 서울 유학을 하게 된 겁니다. 방 두 칸을 얻어 자취를 했지만, 이건 「애들은 반드시 大處에서 공부시킨다」는 부모님의 결심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제가 안덕댁 아들입니더』
중국 海南省 海口市의 「868Towers」. 1992년 중국 최대의 국제초청현상설계에서 당선된 柳春秀의 투시도. 梅月堂 김시습의 시(異異同同…)에 힌트를 얻어 서양식 트윈 타워가 아닌 「陰陽의 건축」, 즉 모양과 高低가 다른 조형을 선보였다.

그의 고향집 터에서 좀 서성거리다가 할머니 한 분이 혼자 사는 바로 이웃집에 들어갔다. 50년의 세월을 건너뛰어 이웃 사람과의 대화가 시작되었다.

『혹시 安德띠기(댁)를 아십니까』

『그 어른을 알고 말고요. 옛날에 내가 그 댁에 늘 다녔구먼요』

『제가 안덕댁 아들입니더』

『아이구, 이를 어쩌나. 여기(마루에) 좀 올라와 앉으소. 서울 가서 텔레비에도 자주 나오고, 아주 큰 인물이 되었다 카는 소식은 듣고 있구먼요. 바로 그 사람인교』

柳회장은 작년 10월부터 금년 6월까지 맥심커피의 TV광고 모델로 나왔다. 10여 년 전 남광토건의 TV광고 「하우스 스토리」의 모델로도 출연했다고 한다.

할머니는 얼른 방 안으로 들어가더니오렌지 주스병을 들고 나와 마루에 걸터앉은 柳회장과 필자에게 한 잔씩 따라 주었다. 그리고는 사탕과 팥고물이 든 과자를 가지고 나와서 자꾸 『잡숴 보라』고 권했다.

할머니는 아들 다섯과 딸 다섯이 모두 大處로 나가 무슨무슨 일을 하면서 잘 살고 있다는 자랑을 한마당했다. 할머니는 돌아서는 필자의 호주머니에도 사탕과 과자를 한움큼 집어넣어 주었다.

―어머니는 어떤 분이셨습니까.

『어머니는 청송군 安德面에 集姓村(집성촌)을 이루고 있는 咸安 趙씨 집안의 따님으로서 열여섯에 산 넘고 물 건너 숫골로 시집오셨습니다. 班家(반가)에서 성장해서인지 우리 歌辭(가사)를 좋아하셨죠.

새색시가 가마 타고 이런 산골로 들어오셨으니 오죽 답답했겠어요. 드디어 새색시는 「앞산은 이마에 닿고, 뒷산은 뒤통수를 때리네…」라고 읊으셨대요』


어린 시절 놀이터였던 마애여래좌상 앞
경북 봉화군 물야면 북지리 마애불상(국보 제201호).

우리는 물야초등학교 北枝分校(북지분교) 앞에 이르렀다. 柳회장의 母校다. 북지분교 건너편에는 국보 제201호 「봉화 북지리 磨崖如來坐像(마애여래좌상)」이 있다. 야산 허리 바위에 새겨진 높이 4.3m의 石佛(석불)이다. 오랜 풍우에 시달려 석불 표면의 마멸이 심한 편이다.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으로 마애석불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우린 이 앞에서 연을 날리거나 새총을 쏘면서 놀았습니다. 그 시절엔 이 마애불이 국보라고 해서 특별히 보호받지도 않았습니다』

―이 마애불의 어디가 좋습니까.

『石佛의 저 두툼한 아랫입술이 좋습니다』

석불의 아랫입술은 도톰하면서도 약간 되바라져 매우 육감적이다.

―柳회장은 「내 작품은 내 고향의 추억」이라고 말했습니다. 그 「추억」은 어떤 것입니까.

『제가 북지국민학교 2학년 때 처음 30리 떨어진 영주 浮石寺(부석사)로 걸어서 소풍을 갔습니다. 철이 들어서도 부석사가 좋아 자주 찾았어요. 내게 있어서 부석사는 靈感(영감)의 원천입니다. 상암월드컵경기장의 설계는 부석사의 가람배치에서 힌트를 얻은 것입니다』


浮石寺를 본뜬 상암월드컵경기장의 動線
건축가 柳春秀씨가 3修 시절에 2년간 기거했던 축서사 보광전.

부석사의 가람배치는 가파른 터전에 이룩된 丘陵形(구릉형)이다. 층층에 大石壇(대석단)을 쌓고, 여러 축대 위에 반듯하게 터를 닦아 거기에 여러 건물을 배치했다. 제일 높은 대석단 위에는 중심 건물인 無量壽殿(무량수전)이 자리잡고 있다.

지하철역을 나와 높은 계단으로 상암월드컵경기장에 오르다 보면 무량수전을 향한 부석사의 動線(동선)과 매우 비슷함을 느끼게 된다. 더욱이 부석사는 우리 국보를 다섯 점이나 보유한 절이다. 건축가 柳春秀에 있어 부석사는 그의 눈높이를 釀成(양성)한 道場(도량)이었다.

柳春秀는 4학년 때까지만 북지국민학교를 다녔다. 그의 어머니가 「어쩌든지 내 아들은 큰 데서 공부시켜야 한다」고 소망해 10여 리 밖에 있는 읍내의 봉화국민학교로 전학했다. 그 후에도 그는 계속 더 큰 외지의 상급학교로 진학하게 된다.

『安東사범병설중학교에 다닐 때 미술부에 들어 그림 많이 그렸죠. 그때 한 해 선배로 미술반원이었던 분이 지금 月刊朝鮮의 경제만평을 연재하고 있는 만화가 조주청씨입니다』
부석사 안양루의 樓下道 계단에서 바라본 국보 제18호 무량수전과 국보 제17호 석등. 상암월드컵경기장의 動線은 여기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고교 시절은 어떻게 보냈습니까.

『대구高 2학년 때 영남일보 주최 경북학생사생대회에 수채화를 출품해 대상을 받았어요. 그때 친구가 토속적인 필치의 만화가 이두호입니다. 당시 대구 영남高 2년생이었던 그가 먼저 「우리 서로 알고 지내자」고 하더군요. 그때 대구의 고교 미술부원들 사이에선 「갑자기 나타나 대상을 받은 柳春秀가 도대체 누구냐」고 설왕설래했답디다. 당시 저는 수채화를 열심히 그렸습니다』

―화가가 되려고 했었군요.

『처음 저는 美大에 진학하려고 上京(상경)했습니다만, 입시에서 떨어졌습니다. 다음해에는 진로를 바꿔 건축과를 지망했지만, 또 떨어졌어요. 결국 3修를 해서 한양大 건축과에 들어갔어요』

―대학 시절은 어떻게 보내셨습니까.

『저는 설계도면을 기하학적 도면으로 가시화하는 투시도를 잘 그린다는 칭찬을 받았습니다. 요즘은 컴퓨터 작업으로 투시도를 그리지만, 그때는 손으로 그렸죠. 투시도는 건물주에게 프리젠테이션(제안설명)을 할 때 제시하는 그림이에요. 제가 「투시도꾼」으로 소문나 여러 곳에서 투시도를 그려 달라는 주문을 많이 받았거든요. 투시도 그리기가 저의 학창 시절 아르바이트였죠』


보물 제995호 石佛과 2년간 同居
보광전 내부에 모신 보물 제995호 石造 비로자나불. 柳春秀는 이 石佛과 2년간 동거했다.

대학 졸업(1970년) 직전에 그는 불교미술공모전 건축부문 최우수상을 받았다. 그때의 수상작은 「불교조계종대본산계획안」이었다.

우리는 봉화의 명찰 鷲棲寺(축서사)를 둘러보기로 했다. 문수산(1206m) 중턱에 있는 축서사는 柳회장이 3修를 하면서 2년 동안 살았던 절이다. 축서사는 「독수리(鷲)가 사는(棲)는 절(寺)」이라는 뜻이다. 불가에서 독수리는 「보살」이다.

『부모님은 내 위로 2남1녀를 두었는데, 홍역으로 모두 잃고 축서사에서 치성을 드려 저와 여동생 둘을 잇달아 얻으셨습니다』

915번 지방도로변 「밖황해」 마을에서 좌회전해 7.5km 거리의 축서사로 올라갔다. 2년 전에 산불로 불탄 축서사는 중창공사가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축서사는 義相(의상) 대사가 부석사를 창건하기 3년 전(673년)에 지었던 유서 깊은 절입니다. 제가 2년간 기거했던 곳은 보물 제995호 「石造 비로자나불」이 좌정해 계시는 普光殿(보광전)이었습니다』

먼저 그는 대웅전을 참배한 뒤 40여년 전 그의 숙소였던 보광전에 들어가 石造 비로자나불께 3拜(배)를 올렸다. 이 석불은 온몸에 白粉(백분)을 입히고 머리와 눈·수염에만 검은 칠을 한 모습이다.

『이 석불은 국보로 승격되었다고 신문에 보도되기까지 했다가 웬일인지 곧 바로 취소된 기막힌 사연을 지니고 있습니다. 아마, 후세 사람이 석불의 몸 전체에 어설프게 石粉(석분)을 입혀 국보로 승격되지 못한 것 같습니다』

―柳회장은 보물 제995호와 2년간이나 동거를 하셨군요.

『40여 년 전의 보광전은 지금처럼 번듯한 전각이 아니었고 바람에 날려갈 듯이 허술했죠. 그때 저는 새벽에 일어나면 비로자나불에게 절하는 것으로부터 하루 일과를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이 석불 앞에 서기만 하면 그동안의 외지생활 40여 년은 다 잊어버리고 여기서 석불과 계속 살아온 것처럼 착각하기도 해요』


禪僧과의 초대면

石造 비로자나불을 배견한 柳회장은 축서사 주지 無汝(무여) 스님을 만나러 주지 거처로 갔다. 마침 무여 스님은 출타 중이었다. 柳회장은 10여 년 전 축서사에 주지로 갓 부임한 무여 스님과의 초대면을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눈보라가 몰아치던 날 한밤중이었다. 그는 20리 산길을 걸어서 축서사에 도착해 「禪僧(선승)」으로 이름난 주지스님을 만났다. 무여 스님이 말했다.

―눈보라 치는 이 야밤에 무슨 인연으로 여기에 오셨소.

『저의 어머니는 축서사에서 기도를 드려 저를 회임하셨고, 저는 여기서 3修 시절을 보내 제 집처럼 생각하고 시도때도 없이 찾아옵니다』

―무얼하는 분이신데요.

『건축 설계를 합니다』

―서울에서 제일 높은 건물이 6·3빌딩이죠. 건축학적으로 6·3빌딩은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서울의 랜드마크입니다』

―참, 좋은 표현이네요. 그런데 그런 높은 건물이 이웃을 불편하게 하는 일은 없을까요.

『스님께선 중요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높은 건물은 이웃집에 들어오는 햇빛을 막거나 도심의 교통장애를 유발하기도 하죠. 山寺에 계시면서 어떻게 도시문제의 핵심을 꿰뚫고 계십니까』

『중은 뿌리만 봅니다. 가지는 대충 짐작할 뿐이지요』

柳회장은 축서사 중창불사에 건축가로서 자문도 하고, 성심껏 헌금도 한 것 같다.

『무여 스님은 禪僧인데도 이렇게 큰 불사를 그분 자신의 요량으로 주관하고 계셔서 저는 그 눈높이에 놀랄 따름입니다. 가람배치가 부석사처럼 눈맛이 좋아요. 대웅전 앞에 세운 10층탑도 매우 훌륭하잖아요. 하지만 大석축에 잇대어 이렇게 큰 부속건물을 지은 건 아무래도 스님의 욕심 같아요. 스님께 「이 자리엔 아무것도 짓지 말고 대석축을 다 드러내야 한다」고 거듭 말씀드렸는데…』

우리는 20리 산길을 내려와 다시 915번 지방도로를 10여 리 달려 봉화 읍내로 진입했다. 그는 봉화시장 단골 정육점에 들러 쇠고기 몇 근, 채소가게에선 양파·파·마늘·상치·깻잎, 그리고 수박 한 덩이를 샀다. 시장 아주머니들 중에는 柳회장에게 『서울에 다녀오시는 길입니꺼』라고 인사를 차리는 사람도 있었다.

서울에 다녀오십니까―이것은 柳회장을 「봉화주민」으로 인정한다는 투의 인사법이다. 柳회장은 『수요일에 실시된 5·31 지방선거 때도 주민등록지인 봉화에서 투표를 했다』고 말했다. 각종 선거 때마다 봉화에서 투표해야 봉화사람들에게 「진짜 봉화주민」으로 인정받게 된다는 것이다.

봉화읍에서 36번 국도로 들어서 2km쯤 달리면 왼쪽으로 솟을대문과 고색찬연한 기와집이 즐비한 닭실(酉谷)마을이 눈길을 끈다. 닭실마을은 安東 權씨의 동족마을이다. 李重煥(이중환)은 그의 「擇里志(택리지)」에서 닭실마을을 경주의 양동, 안동의 내앞, 풍산의 하회와 더불어 「三南의 4대 吉地(길지)」로 꼽았다. 이곳에는 조선중기의 士林派(사림파) 문신으로 이름 높은 ?齋(충재) 권벌의 宗家(종가)가 있다. 권벌의 유적들은 사적 및 명승 제3호로 지정되어 있다.


스승 金壽根에의 추억
1986년 56세로 별세한 건축가 金壽根. 柳春秀는 1974~1986년, 12년 동안 金壽根의「空間」에서 배우고 일했다.

鳳城面(봉성면) 창바다마을(昌坪里)를 지나면서 그는 『창바다가 스승님의 고향』이라고 말했다. 그의 스승은 우리 현대건축의 거대한 봉우리를 이뤘던 故 金壽根(김수근)이다.

柳春秀는 1970년 대학 졸업 후 「제너럴건축」과 「종합건축」에서 근무하다가 1974년 金壽根의 「공간연구소」에 입사해 12년간 근무했다. 수필집 「류근수의 건축문화이야기」에서는 金壽根과의 만남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1974년 여름, 우연히 자그마한 공간사옥을 처음 방문했던 때의 충격을 잊을 수 없다. (중략) 저 보석 같은 창이며, 전돌의 정교한 상세, 거친 내벽에 대비되는 예리한 조명과 가구, 너무 낮은가 하면 높아지는 층고의 다양한 변화…. 이것은 1970년 대학 졸업 후 제너럴건축과 종합건축을 2, 3년씩 거치며 비교적 안정된 생활과 나름대로의 자신감에 차 있던 나를 강타하는 전혀 새로운 공간적 충격이었으며, 혼란이었다. 그날 밤 비장한 각오로 일기를 썼다.

『저 空間을 거치지 않고 어찌 한국에서 건축을 한다고 할 수 있겠는가!』>

그해 9월9일, 드디어 그는 당시 건축학도들에게 「교장선생님」 또는 「王」이라고 불렸던 「KSG(김수근)」 앞에서 신입인사를 했다. 당시 金壽根의 문하생들은 「王黨(왕당)」이라고 불렸다.

―空間 수업 시절은 어떠했습니까.

『입사하는 날부터 야근과 철야의 연속이었어요. 서울大 환경예술관이 첫 작업이었고, 광복 30주년 박람회장 설계 작업에 이어 그해 말 테헤란의 하우징 프로젝트 「EXBATAN 75」가 터졌습니다』

―金壽根 선생은 제자들을 어떻게 다뤘습니까.

『제가 테헤란 프로젝트로 이란에서 6개월간 혼자 죽어라고 일한 후 귀국하면서 회사에 알리지도 않고 한 달간 도망 여행을 감행한 일이 있습니다.

그때만 해도 외국여행이 그렇게 쉽지 않던 시절이었거든요. 비행기표 있겠다, 이건 천재일우의 기회다 싶어 유럽·미국·일본을 돌아다니며 보고 싶었던 건축물을 답사해 스케치했어요. 귀사 직후, 징계위에 회부시킨다 어쩐다 하며 야단났는데, 선생님은 「멍텅구리들은 그런 기회가 와도 못 하는 짓을 했다」면서 용서해 주십디다』

―과연 「王」다운 카리스마군요.

『철야작업 중인 한밤에 불현듯 얼큰한 목소리로 나타나신 선생님의 무심한 한마디가 제겐 祖師(조사)의 일갈이었어요. 지방도시는 물론 이란·일본·미국을 함께 여행하며 그때마다 저의 촌스런 몸짓을 바로잡아 주시며, 유창한 영어와 고도의 매너와 유머로 모든 협상이나 대화를 선생님의 뜻대로 진전시키던 모습이 제게는 새로운 세계로의 開眼(개안)이었습니다』

귀국 후 그는 동숭동 샘터社와 대우 아케이드의 인테리어 설계에 이어, 1978년부터 2년간 서울 지하철 내부 인테리어 설계에 몰두했다. 1979년엔 10년 경력이 필요한 건축사 시험에 합격했고, 1980년 초엔 한계령휴게소 설계 작업을 끝냈다.

―金壽根 선생의 건축철학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제가 생전의 선생님을 마지막 뵈온 것은 1986년 5월27일이었습니다. 말레이시아로 출장을 떠나기 위해 병실에 들렀을 때 떨리는 손으로 「현대건축=Richiness=맛=멋」이라고 쓰시며, 「멋없는 설계를 業(업)으로 해선 안 된다」고 준엄히 이르셨습니다. 저는 선생님으로부터 훈계를 받을 때마다 高僧(고승)의 지팡이로 정수리를 얻어맞은 듯한 새로운 충격에 휩싸였었습니다』

金壽根의 별세 후인 1986년 10월, 그는 空間연구소를 떠나 「종합건축사사무소 異空」을 설립했다.

『異空은 「다른 공간」, 「또 하나의 공간」이라고 해도 좋습니다. 이 이름은 내가 좋아하는 般若心經(반야심경)의 구절 「色不異空(색불이공) 空不異色(공불이색)」에서 따온 것입니다. 물질과 정신, 감정과 이성, 혹은 예술과 철학이 다르지 않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겠죠』

창바다에서 10여 리를 달리면 柳회장의 부인 姜錫順(강석순)씨의 고향 버저이(法田)마을이다. 1974년에 결혼한 柳春秀-姜錫順 부부는 슬하에 2남2녀를 두었다. 법전에서 다시 10여 리를 東進하면 春陽木(춘양목)으로 이름난 春陽이다. 춘양목은 金剛松(금강송)·黃腸木(황장목)·赤松(적송)이라고도 불리는 목재의 至尊(지존)이다.


「억지 春陽」
1976년 테헤란의「Alborz 하우징」의 당선작. 45。 엘리베이터를 세계 최초로 도입한 테라스型 고층아파트.

춘양목은 궁궐이나 대찰의 기둥으로 쓰여 왔다. 나이테 사이의 폭이 다른 소나무에 비해 3분의 1인 1mm에 불과하다. 단단하기가 다이아몬드와 같다고 해서 金剛松이라는 이름도 얻었다.

춘양목은 일제 강점기 이전까지만 해도 봉화 일대의 해발 500m 이상 산지에 가득했다고 한다. 마을 주민들은 춘양목을 베어다가 집을 짓기도 했지만, 그런 정도로는 여전히 울창했다.

그러나 도로와 철도가 깔리면서 춘양목은 도벌과 남벌로 시련을 겪게 된다. 특히 1950년대 초에 영주-춘양-석포-철암을 잇는 영암선 철도가 개통되면서 춘양목의 남벌은 더욱 가속화되었다. 柳회장은 필자에게 「억지 春陽을 아느냐」고 물었다.

―「억지 春香(춘향)」은 알아도 「억지 春陽」은 금시초문인데요.

『원래 「억지 춘향」이란 말은 없었고, 「억지 춘양」에서 와전된 것입니다. 「억지 춘양」은 춘양목을 베어 가기 위해 춘양역을 만들 때 생긴 말입니다. 주민들이 「班村(반촌)에 鐵馬(철마)가 지나갈 수 없다」고 반대했지만, 결국 주거지역으로부터 2km 떨어진 곳에 춘양역이 들어서게 되었거든요. 이 때문에 「억지 춘양」이라는 속담이 생긴 거예요. 이후 춘양역은 춘양목을 외지로 반출하는 출구가 되었어요』

춘양에서 15리쯤 달려 鹿洞(녹동)에서 36번 국도를 버리고 35번 국도로 북진하면 바로 노루재이다. 지금은 노루재 밑으로 터널 길이 뚫려 있다. 봉화군의 鎭山인 靑玉山(청옥산·1277m)을 끼고 50여 리를 북상하여 六松亭(육송정)을 지나갔다. 靑玉山 서북방 8km에는 강원도 태백산(1573m)이 위치해 있다.

『육송정은 여기서 자라던 수백 년 된 춘양목 여섯 그루가 대원군의 景福宮(경복궁) 중건 때 큰 기둥으로 사용되었다고 해서 붙은 이름입니다』

柳회장과 필자는 태백산 黃池(황지)에서 발원하는 낙동강 상류와 병행하는 郡道(군도)를 따라 10여 리쯤 남하해 石浦(석포)에 이르렀다. 석포는 파출소·음식점·잡화점에다 노래방까지 있는 面 소재지다.

석포를 벗어나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는 고갯마루에서 잠시 지프차를 정차시켰다. 그는 이 고갯마루에 서서 그 안쪽을 彼岸(피안), 바깥쪽을 俗世라고 구분했다. 깊은 골짜기 아래는 옥 같은 맑은 물이 산자락을 휘감고 흘러내린다. 이 맑은 계곡은 지구상에서 시베리아 熱目魚(열목어)가 서식하는 최남단이라고 한다.


俗世에서 彼岸으로 들어가는 솔고개

―이 솔고갯길이 仙境(선경)으로 들어가는 山門인 셈이군요.

『서울 리츠칼튼호텔은 이 솔개고갯길에서 힌트를 얻어 설계되었어요. 그 호텔의 진입로는 곡선화되어 구불구불합니다. 그런 관계로 그 호텔에서 큰 행사가 열려 참석자들의 승용차가 한꺼번에 많이 들어가도 내부 진입로가 길어 도심교통에 전혀 영향을 주지 않습니다』

고갯길 옆 절벽에 뿌리를 박은 수령 500년짜리 춘양목은 彼岸의 神木(신목)처럼 보였다. 올곧은 줄기는 굵기가 두 아름은 넘을 것 같고, 껍질은 불그스레한 색깔이다. 무성한 가지들은 용틀임을 하듯 꼬여서 지면을 향해 팔을 벌린 모습이다. 마치 경복궁 근정전 옥좌 뒤에 놓인 병풍 「日月五嶽圖(일월오악도)」에 표현된 소나무의 모습, 그대로이다.

석포를 벗어나 6km쯤 東行하면 반야 마을이고, 반야마을에서 다시 3km를 더 가면 개울가에 조그마한 외딴집이 보인다. 오후 7시30분, 부슬비가 내리는 가운데 그의 집에 도착했다. 서울에서 여기까지 오는 데 10시간이 걸렸지만, 바로 오면 4~5시간이 소요된다고 한다.


『집이란 자연 위에 얹는 것』
奉化郡 石浦面 반야마을에서 3km 떨어진 이 외딴집은 건축가 柳春秀의 스튜디오이며 현주소지이다.

그의 집은 석축 위에 나지막하게 올라앉은 모습이다. 석축에 기대어 정자 하나가 세워져 있다. 부석사 安養樓(안양루)의 축소판이다. 불교에서 安養은 「극락」을 의미한다. 정자 前面(전면)을 받치는 기둥 2개는 마당에 파놓은 6평짜리 연못 속에 다리를 내리고 있는 모습이다.

4년 전에 지은 이 집은 500평 부지에 건평 23평 규모이다. 토지 매입에 2000만원(500평×4만원), 건축비 1억2000만원, 합계 1억4000만원이 들었다고 했다.

그러나 그는 수백만 평의 국유림을 借景(차경)하고, 깊은 계곡으로 흘러내리는 玉水(옥수)를 공짜로 마시고 있다. 그의 집은 눈에 보이는 構造材(구조재)가 바로 인테리어의 마감재였다. 물론 벽지 같은 것은 바르지 않았다. 화장 안 한 여인의 얼굴처럼 소박했다.

그는 『집이란 깎고 짓고 세우는 것이 아니라 자연 위에 얹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의 스튜디오가 바로 그러하다.

『아랫동네의 주민들이 「건축가의 집」이 궁금해서 그런지 우리 집에 가끔 놀러와요. 집을 둘러본 뒤 마루에 척 걸터 앉아 「뭐 별것 아니네」라는 농담을 던지기도 합니다』

그의 집은 졸부의 호화 별장과는 格(격)을 달리한다. 그가 대학 졸업 후 10년째 되던 해에 설계한 한계령휴게소처럼 겸허하다. 한계령휴게소는 대자연의 일부이다. 그 내부를 보면 구조재가 곧 인테리어 마감재이다. 필자는 그것을 볼 때마다 소박한 여인의 벗은 몸을 연상해 왔다.

柳회장은 저녁 봉화시장에서 사온 쇠고기와 채소로 저녁 준비를 했다. 도회지에서는 맛보기 어려운 韓牛(한우) 불고기에 「徐花潭(서화담)」이란 이름의 약주를 곁들이고, 라면 하나를 반반 나눠 穀氣(곡기)로 삼은 만찬이었다.

식사 후 우리는 마루에서 한걸음만으로 건널 수 있도록 되어 있는 정자에 앉아 얘기를 계속했다. 이 정자는 그가 1990년에 설계한 春川(춘천) 교외의 「江村(강촌)휴게소」의 축소판이다. 춘천 시가지에 진입하기 직전의 4차선 국도 오른편으로 보이는 강촌휴게소의 모습은 사람의 마음을 설레게 한다.

―저는 천막의 깃발이 바람에 펄펄 휘날리고 있는 강촌휴게소 앞 京春街道(경춘가도)를 지날 때마다 다리 건너 「그곳에 가고 싶다」는 유혹을 느낍니다.

『강촌휴게소는 국내 최초의 멤브레인(Membrane) 건축입니다. 멤브레인은 실리콘이나 테플론을 코팅한 유리섬유로 된 텐트예요. 한국의 장터나 잔칫집 遮日(차일)과 건축적·구조적 개념은 동일한 것입니다.

건축주로부터 강촌휴게소 설계를 의뢰받은 후 고심 끝에 길손을 유도하기 위해서는 차일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차일이 쳐진 곳에는 사당패놀이의 흥겨움이 있거나 잔칫집의 푸짐함이 있거든요』


『요즘 여성지에서 소개하는 집은 대개 나쁜 집』

―한계령휴게소와 강촌휴게소는 상업적으로 성공한 건물로 손꼽히던데요.

『지형과 주변경관에 합목적으로 놓인 건물입니다. 성수기와 비수기에 따른 판매·관리의 변화기능을 수용하고, 구조방식과 재료의 사용에서 보편성 이상의 혁신을 시도하고, 동시에 그 풍토에 가장 적당한 건축이 되도록 노력했습니다』

초여름이었지만 표고 670m의 깊은 산중이라 한기가 들 정도였다. 정자에서 물러나 그의 작업실 겸 침실로 자리를 옮겼다.

前面과 측면에 유리를 붙인 작업실이다. 실내에는 긴 자(尺)가 달린 「ㄷ」 자형 책상 위에 노트북, 몇 권의 책 등이 놓여 있었다. 작업대 옆에는 팩스·전화기 따위가 비치되어 있고, 안쪽 벽면에는 침대가 놓이고 머리맡에는 오디오를, 발치에는 TV세트를 두었다. 벽면에는 시골 농가를 그린 수채화 한 폭이 걸려 있다. 이젤 등 畵具(화구)도 눈에 띄었다.

―좋은 집은 어떤 것입니까.

『쓸모 있고 튼튼하며 아름다워야 좋은 집이죠. 대리석 바닥에 양탄자, 등나무 가구와 화려한 조명등, 금붕어가 노니는 어항, 화사한 커튼 너머로 보이는 향나무 숲과 잔디 정원―이런 장식들을 더덕더덕 붙인 집은 낭비예요. 요즘 여성지에서 다투어 「좋은 집」이라고 소개하는 집들을 보면 대부분 나쁜 집입니다. 비싼 재료를 필요 이상으로 많이 사용한 집은 집주인의 과시욕만 드러날 뿐이지 오히려 천박해요』

―어떤 집이 아름답습니까.

『간결함과 소박함, 그리고 깨끗함이 규모에 관계없이 그 집을 아름다운 집으로 만들어 줍니다. 우리 전통 한옥이 왜 아름답습니까. 여기에는 군더더기의 가식적 장식이 없고, 간결하고 합목적적인 구조이며, 재료와 색상의 소박한 사용이 있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간결함과 소박함이 중요하다지만, 현대인에겐 매우 어려운 주문이군요.

『실내 소품과 사람이 돋보이기 위해선 벽과 바닥과 천장 자체가 될 수 있으면 없는 듯 간결·소박해야 해요. 좋은 집은 결국 건축가의 손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 사는 이의 안목에 따라 결정되는 것입니다. 제 물건이 제 자리에 있어야 한다는 가장 평범한 조건이 결국 좋은 집을 위한 필요충분조건이에요』


그의 집에서 하룻밤 묵은 駐韓 영국대사

―이런 깊은 산골 집에 손님들이 찾아옵니까.

『이 집을 오픈하던 날, 당시 찰스 험프리 大使(대사) 내외를 비롯한 駐韓(주한) 영국대사관 직원 20명과 제 친구 10명이 여기서 하루를 묵고 갔습니다. 그날은 바로 한국과 터키 간의 월드컵경기 3·4위전이 벌어진 날(2002년 6월29일)이었어요. TV를 마루에 옮겨다 놓고 30여 명이 모두 붉은 셔츠를 입은 「붉은 악마」가 되어 한국팀을 응원했죠』

―30여 명이 23평짜리 집에서 어떻게 자고 갈 수 있었습니까.

『부엌 벽에 붙어 있는 접는 사다리를 펴서 타고 위로 올라가면 8평짜리 다락이 있습니다. 여기 찾아오는 학생들을 위해 강의실로 마련해 놓은 것입니다. 다락에서만 20명이 잘 수 있어요』

―駐韓 영국대사와 특별한 인연이 있습니까.

『제가 영국 왕실의 초청으로 2000년 3월부터 3개월간 케임브리지大 처칠 칼리지에 체재하면서 「더 듀크 어브 에딘버러(필립公의 정식 칭호) 펠로」의 자격으로 강의했는데, 그때 저의 카운터파트 역할을 한 분이 당시 영국 외무부 본부에서 근무했던 험프리씨였습니다. 그런 험프리씨가 駐韓 영국대사로 부임해 왔던 것입니다』

柳회장이 영국 왕실의 초청을 받게 된 것은 영국여왕 엘리자베스 2세 夫妻(부처)의 한국 방문이 인연이 되었다. 그때 엘리자베스 여왕이 安東 하회마을을 방문하는 사이에 夫君(부군)인 필립公은 상암월드컵경기장을 둘러보았다. 柳회장은 상암월드컵경기장의 설계자로서 2시간 동안 필립公을 수행하며 경기장의 시설에 관해 브리핑했다.

『그런데 말입니다. 엘리자베스 여왕이 하회마을에서 우리 전통한식으로 점심을 드실 때 그 큰상을 차린 분이 인간문화재이며 申師任堂賞(신사임당상)을 받은 趙玉花(조옥화) 여사입니다.

제가 安東중학교에 다닐 때 趙여사 댁에서 하숙을 하면서 그분의 아들이며 저의 동기생인 김연백(현재 안동소주 사장)과 한 그릇밥을 나눠 먹었거든요. 그때 이후 저는 趙여사를 「어머니」라고 부르고 있습니다만, 그런 인연들로 얽혀 영국 왕실의 초청을 받게 된 거죠』
강촌휴게소(1990년 작품). 국내 최초의 멤브레인 건축은 하이테크 遮日로 잔칫집 분위기를 내고 있다.


선진사회의 프로토콜

―영국에 가서도 필립公을 만났습니까.

『영국 체재가 끝나갈 무렵 필립公이 제게 초청장을 보냈는데, 초청장에는 접견 가능 날짜와 시간을 제시하며, 그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쓰여 있습디다. 우리나라 청와대 같으면 일방적으로 접견시간을 지정하거든요. 그때 저는 「세 개」 중 하나인 5월16일 오후 3시에 방문하겠다고 버킹검宮에 통고했습니다』

―필립公과의 회견에서 무슨 얘기가 오갔습니까.

『필립公이 제게 「그동안 무엇을 했느냐」고 묻습디다. 「2개월간은 영국의 6개 대학에서 강의하고, 1개월간은 혼자서 아일랜드로 스케치 여행을 갔다」고 답했습니다. 접견 시간이 20분이었는데, 시간이 빡빡할 것 같아 미리 제가 아일랜드 여행 중에 그린 스케치북을 지참해 가서 보여 드렸습니다. 필립公은 원래 화가입니다. 「좋은 그림」이라며 매우 즐거워하더군요』

―영국 왕실의 프로토콜(儀典)은 배울 만하네요.

『YS 집권 시절, 제게 대통령賞을 준다고 해서 시상식장에 갔더니 사회자가 대통령의 입장 전에 시상자들과 참석자들에게 앉으라 서라 하면서 20분간 예행연습을 시킵디다. 그런 자리는 상 주는 사람이 아니라 상 받는 사람이 기분좋도록 꾸며야 하는 것 아닙니까』

―柳회장께선 시드니 오페라하우스에서 콰터나리오 국제건축賞 금상을 수상하셨는데, 거긴 어떻습디까.

『저를 포함한 대상후보 건축가 5명이 무대의 중앙에 앉고, 상을 주는 사람인 호주 총독은 무대 가장자리에 앉았습니다. 총독은 제게 큰 금상 트로피를 수여하고 난 뒤 상금 봉투를 주었습니다.

제가 좀 흥분해 봉투를 바닥에 떨어뜨리자 총독은 대번에 저의 구두 앞에 무릎을 꿇고 봉투를 주워 일어나 다시 제게 건넵디다. 그 모습이 재미있었던지 모든 참석자들이 박수를 치고 환호합디다. 완전히 축제 분위기였어요. 이것이 우리가 배워야 할 선진사회의 프로토콜이 아니겠습니까』
호주 시드니 오페라하우스가 주최한「1988 콰터나리오 국제건축상」금상을 받은 柳春秀씨(중앙). 은상을 받은 영국의 노만 포스터卿(柳春秀씨의 오른쪽)과 호주의 필립 콕스씨(柳春秀씨의 왼쪽) 등의 얼굴이 보인다.


「꿈꾸는 소년」의 妙技대행진

지난 7월21일 아침, 장맛비가 그쳤다. 필자는 혼자 柳회장 집 주위를 살폈다. 담장이 있어도 좋을 만한 위치엔 복숭아나무가 심어져 있었다. 급류를 이루고 있는 계곡으로 내려가 세수를 한 뒤에 다리 건너편 농가로 다가가 기색을 살폈지만, 빈집이었다.

柳회장 집에 되돌아왔다. 마당에서 웃자란 풀을 뽑던 그는 『어제 깜빡 잊었다』면서 『石浦로 쌀 사러 가자』고 제의했다. 필자가 『아침은 라면으로 때우자』고 했다. 방 안으로 올라온 그는 필자가 간밤에 사용한 재떨이에 버려진 꽁초들의 필터를 하나하나씩 떼냈다. 웬일인가 했더니 그의 長技(장기)자랑을 위한 준비였다.

그는 필터 6개를 작업대 위에 일렬 횡대로 세운 후 3m 거리에서 고무줄로 맨왼쪽 필터부터 겨냥했다. 고무줄이 날아갈 때마다 필터가 사격장의 표적처럼 하나씩 쓰러졌다. 6發6中이었다. 필자의 박수에 그는 『저는요, 어릴 적부터 새총의 명수였답니다』라며 의기양양했다. 이번에는 필터 2개를 나란히 세워 놓고 새로운 묘기를 선보였다.

『이번에는 필터가 鄭위원을 향해 날아오도록 쏠 거요』

그렇게 하려면 고무줄이 필터의 정면이 아닌 背面(배면)을 살짝 가격해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射手(사수)인 그와 구경꾼인 필자가 나란히 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첫발은 필터가 쓰러지기만 했을 뿐 필자를 향해 날아오지는 않았다. 그는 그렇게 자책할 일이 아닌 데도 불구하고 『이제는 솜씨가 좀 무뎌졌다』면서 몹시 무안해했다.

그는 빨개진 얼굴로 다시 고무줄을 당겼다. 순간, 오른쪽 필터가 필자를 향해 튕기듯 날아왔다.

필자는 『神技(신기)다!』라면서 기립박수를 보냈다. 그는 엄청 신이 났다. 다시 작업대 위에 필터 여러 개를 세우더니만 왼쪽으로 쓰러지거나 오른쪽으로 주저 앉으면서 쏘는 등 온갖 묘기를 다 부렸다. 누가 이런 모습의 柳회장을 1946년생, 올해 나이 61세의 남자라고 하겠는가? 그는 꿈꾸는 소년이었다.

이런 묘기백출에 취해 우리들은 부엌일을 깜빡했다. 가스레인지에 올려놓은 라면이 너무 끓어 국물이 졸아 버렸다. 결국 우리는 소태 같은 라면을 물로 씻어 먹어야 했다.

식사 후 집 뒤안으로 돌아가는 그를 뒤따라갔다. 거기엔 산딸기가 지천으로 열려 있었다. 따로 심은 것이 아닌데, 작년부터 확 번졌다고 한다. 우리는 산딸기를 한움큼씩 따 조찬의 디저트로 삼았다. 그는 「진짜 武陵桃源(무릉도원)으로 가자」며 앞장섰다. 솔숲 속으로 난 오솔길을 따라 100여m를 걸었다. 찔레꽃나무·산포도나무·머루나무도 눈에 띄었다.

큰 바위들 사이로 흘러내리는 물이 굽어지는 곳에서 沼(소)를 이루고 있다. 수심이 사람 한 길을 넘는다고 한다. 이쪽 소나무와 저쪽 소나무 사이엔 해먹이 달려 있다. 해먹 위에 올라 앉아 나무 줄기에 달린 줄을 잡아당기니 신나게 흔들렸다.

그는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나의 정원』이라고 했지만, 필자의 눈에는 「그의 「놀이터」로 비쳤다. 그의 놀이터 위로 林道가 나 있지만, 숲으로 가려져 있어 깨벗고 놀아도 남들의 눈에 띄지 않는 곳이다.

계곡의 물은 찼다. 물속에는 피라미·버들치·산천어가 많았다. 한여름엔 물안경을 끼고 잠수해 들어가 피라미를 바늘만 한 작살을 쏘아 잡는다고 한다.


『盤野에 작은 건축학교 세우고 싶다』
柳春秀(왼쪽) 회장의 중국 天津 사무실을 방문한 臺灣의 IOC위원 吳經國 박사. 吳박사는 IOC 위원 중 유일한 건축가로서, 중국의 厦門 올림픽공원內 테니스경기장 설계(2005년) 등 柳회장의 해외 진출을 지원했다.

우리는 외출 준비를 하고 9km 떨어진 石浦로 쌀 사러 집을 나섰다. 그의 집에서 3km쯤 내려와 이제는 폐교가 된 석포초등학교 반야분교 앞에서 그는 잠시 지프차를 세웠다. 폐교된 분교의 교문에는 「異空建築硏究所」라는 작은 문패가 붙어 있다.

『이 분교가 폐교된 11년 전에 敎師(교사) 사택을 수리해 스튜디오를 만들어 4년간 살면서 이 분교를 불하받으려고 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저는 이 폐교에다 대학원 수준의 건축학교를 만들고 싶습니다』

―이런 외진 곳에다 「건축학교」를 만들어 놓으면 제자들이 모이겠습니까.

『이곳이야말로 한국건축의 배움터가 들어설 만한 장소입니다. 운동장 한쪽에 기숙사를 지어 놓기만 하면 이곳에 와서 배우겠다는 건축학도는 얼마든지 모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폐교의 인수가 쉽지 않더군요』

―왜요.

『이 분교는 40여 년 전에 화전민들이 자녀 교육을 위해 자기 땅을 기증해 세운 학교입니다. 따라서 이 폐교의 인수에 있어 우선권은 그들에게 있는 것입니다. 저는 이 폐교의 인수에 실패한 후 그 바로 이웃 빈 농가를 빌려 3년간 더 살다가 4년 전에 현재의 집을 새로 지어 옮겨온 것입니다. 그러나 언젠가는 이 폐교의 땅에다 건축학교를 세우겠다는 꿈은 버리지 않고 있습니다』

반야에서 6km를 더 내려와 전날엔 그냥 지나친 석포마을에 도착했다. 그의 단골집인 강원식당에 들러 「안동국시」로 점심을 먹었다. 그는 식육점에 들러 돼지고기 두 근, 쌀집에서는 쌀 몇 되를 샀다.

오후에는 봉화·울진(경북)·삼척(강원도)의 경계지점에 솟아 있는 삿갓재(1119m)에 올랐다. 해발 1100m 지점에서 세 가닥의 林道가 서로 만난다. 삿갓재 아래 솔고갯길에는 召光里(소광리) 방향, 대광천 방향, 석포 방향이라고 적힌 이정표가 세워져 있다.

맑은 날 밤에 이 솔고갯길에 올라 울진 쪽을 보면 오징어잡이 배의 불빛이 보인다고 한다. 잔뜩 흐렸던 하늘이 점차 밝아지더니 오후 4시20분경에는 구름 사이로 푸른 하늘이 드러났다.

그날 저녁, 그는 낮에 석포에서 사온 돼지고기로 김치찌개를 만들고, 쌀밥도 지었다. 우리는 토속주 「黃眞伊(황진이)」를 마시며 새벽 3시 무렵까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었다. 그는 술도 몇 잔 마시지 않았다. 대화가 길어진 것은 순전히 그의 별나라 얘기 때문이었다.


太白驛에서의 약속

7월22일 아침, 柳회장은 늦잠을 잤다. 그 바람에 우리는 아침밥을 거르게 되었다. 배고프지는 않았지만 「돈이 있어도 해장국 한 그릇 사먹을 수 없다」는 사실 때문에 어쩐지 허전했다. 그의 스튜디오 작업대 위에 놓여 있던 「보리건빵」 몇 알을 씹었더니 입은 심심하지 않았다.

필자는 柳회장과의 2박3일을 보내고 이날 오후에, 柳회장은 이틀 후인 월요일 아침에 상경할 예정이었다. 그가 일본 NHK TV와 회견한 30분짜리 녹화 테이프를 틀어 주었다. 내용은 柳회장의 건축철학과 상암월드컵경기장 설계에 관한 전문가와의 대담이었다.

오전 11시15분, 그가 모는 지프를 타고 太白驛(태백역)으로 달렸다. 태백시로 들어가는 터널의 일부가 장마로 붕괴돼 길을 둘러가는 바람에 태백역에 도착한 시각은 12시50분경이었다. 오후 1시5분에 출발하는 기차시간에 맞추려면 점심을 생략해야 할 판인데도 그는 역전 식당으로 필자를 끌고 가 해장국을 먹였다.

우리는 서울에서 한 번 더 만나기로 했다. 그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올림픽체조경기장과 상암월드컵경기장을 그와 함께 답사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는 8월 초에 시간을 내겠다고 약속했다.

이날 오후 3시에 柳회장의 부인이 청량리發 기차를 타고 이 역에서 내리게 되어 있었다. 2시간쯤 역전 주변에서 부인을 기다려야 하는 그와 헤어져 혼자 청량리行 무궁화호 기차를 탔다. 필자로선 1970년대 중반 무연탄 파동을 취재하기 위해 탄 이후 30년 만에 다시 타는 중앙선 기차였다.

8월2일 오전 9시30분, 柳회장과 필자는 서울 송파구 방이동 올림픽공원內 체조경기장(제1체육관) 주차장에서 만났다. 올림픽체조경기장은 88올림픽이 끝난 이후에도 연간 300일간이나 사용되는 바쁜 시설이다.

―자신이 설계한 건물 앞에 서면 어떤 느낌이 듭니까.

『시집간 딸을 만나는 것처럼 애틋해요. 딸에게 흠이 있으면 친정에서 잘못 키웠다고 욕먹고, 잘 살면 시집(건축주)의 가풍이 좋아서 그런 줄 알잖아요』

올림픽체조경기장은 「1988 콰터나리오 국제건축상 금상」을 받은 건물이다. 이 상은 이탈리아의 PERMASTEE-ISA社와 호주의 「시드니 오페라하우스」가 공동주최하는 세계적 건축상이다. 柳회장은 이 대상을 1986년에 타계한 스승 金壽根씨와 공동수상했다.

이때 은상 수상자들의 화려한 면모가 금상 수상의 영광을 드높였다. 은상 수상자는 세계 하이테크 건축을 대표하는 영국의 노만 포스터卿(경)과 2000년 시드니올림픽 主경기장을 설계한 호주의 필립 콕스였다.

지붕 직경 약 150m, 1만5000석의 국내 최대 실내경기장이지만 5000석 규모의 장충체육관보다 훨씬 낮게 보인다. 최고표고 45m인 올림픽공원內 몽촌토성이나 올망졸망한 구릉들과 조화를 이룬다.

올림픽체조경기장은 미국의 데이비드 가이거 박사가 개발한 「케이블 돔(Cable Dome) 공법」으로 세워진 세계 최초의 건축이며, 서울올림픽 하이테크 건축의 상징이다. 기본설계와 실시설계, 그리고 감리까지 柳회장의 책임으로 완성한 작품이다.

「딸네집」 앞에 선 柳회장의 표정은 밝았다. 지은 지 꼭 20년이 지난 이 체조경기장은 아직도 새 집처럼 잘 관리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계단 구석에 붙어 있는 파이프오르간 모습의 작은 장식을 가리키며 말했다.
올림픽공원內 체조경기장.


『暗幕을 걷어치워야 올림픽체조경기장이 산다』

『큰 건물이지만 구석 공간에 이런 작은 조형물로 꾸며 놓으면 보는 이에게 친밀한 느낌을 줍니다. 건축학에서는 이런 꾸밈을 「휴먼 스케일(Human Scale)」이라고 하죠』

그는 앞장서 체조경기장 내부로 들어갔다. 투명한 멤브레인 천장의 건물인데, 웬일일까. 전등을 몇 군데 켜 놓았지만 실내는 어두웠다. 대번에 그의 얼굴이 흐려지더니 화난 목소리로 말했다.

『세계의 멤브레인 건축물 치고 여기처럼 천장을 暗幕(암막)으로 덮은 건물은 하나도 없어요!』

그에 따르면 체조경기장의 멤브레인 건축은 테플론을 코팅한 유리섬유의 텐트形 지붕이어서 暗幕만 덮어씌우지 않았다면 낮엔 6000룩스의 햇빛을 투과시켜 인공조명이 전혀 필요없는 건물이다. 야구장 라이터도 2000룩스 정도이다.

―그런데 왜 여긴 暗幕을 씌워 놓았습니까.

『일본의 어떤 TV 방송에서 경기를 중계하면서 암막을 씌워 달라고 요청했대요. 그래야 화면이 좋아진다나요. 그런 요청을 수락한 경기장 측이 한심한 거예요』
올림픽체조경기장과 설계자 柳春秀씨.

柳회장과 필자는 상암월드컵경기장을 향해 강북 강변도로를 달렸다. 이동 간에 그는 서울특별시 월드컵경기장사업단의 실무자에게 휴대전화를 넣어 「설계자」임을 밝히고 경기장內 디테일을 돌아볼 수 있도록 몇 군데의 방문을 열어 주면 좋겠다고 부탁했다.

그러나 반응은 영 신통치 않았다. 柳회장과 안면이 있는 실무과장은 이미 전출을 가고, 새로 왔다는 실무자는 방문 목적 등을 캐물으면서 끝내는 「윗사람에게 보고해야겠다」며 꽁무니를 빼고 있었다.

―친정아버지가 딸네집에 「한번 다녀가고 싶다」니까 그 집 하인이 「뭣 때문에 오느냐」고 묻는 격 아닙니까. 파리 생드리경기장에서는 설계자가 평생 앉을 수 있는 좌석을 따로 마련해 둘 만큼 예우하고, 기념관을 그의 기본설계·실시설계의 도면으로 절반쯤 채워 놓고 있다는데요.

『(柳회장은 얼굴이 벌개졌다) 우리 공직자들은 「설계와 시공이 무엇인지도 구별하지 못해요. 서울시에서 영구보존하겠다던 저의 설계도는 현재 실종상태입니다』

柳회장은 이어 기막힌 경험담을 털어놓았다.

『상암월드컵경기장 준공식에서 당시 대통령 DJ가 축사를 했습니다. DJ는 서울시장과 施工者(시공자)인 삼성엔지니어링 대표의 노고를 극구 치하하면서도 설계자인 저에 대해서 일언반구도 없었어요. 그거요, 詩集(시집) 출판기념회에 참석해 축하를 하는 분이 詩人에겐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고 출판사 사장만 극찬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상암월드컵경기장.

설계자 柳春秀의 상암월드컵경기장 투시도.


우리 전통 美를 현대적 기법으로 再現

상암경기장 서문 앞 네거리에 이르면 상암경기장의 멤브레인 지붕이 잔칫집의 천막처럼 높이 치솟아 있다. 西門 주차장에 지프차를 세운 柳회장은 경기장 바깥 모퉁이로 끌고 가서 필자에게 물었다.

『저 모퉁이의 구조를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지 않습니까』

『아! 그렇군요. 바로 경복궁의 연회장 慶會樓(경회루)의 모습이군요』

시원한 처마의 곡선, 건물을 떠받치고 있는 장쾌한 列柱(열주)―柳회장은 한국건축의 모습을 상암경기장에서 현대적 기법으로 재현해 놓은 것이다.

우리는 상암경기장 앞 조경을 둘러보았다. 동서양의 「水景(수경)」에 정통한 그의 작품답게 「물」의 이미지를 알뜰하게 살린 정원이었다. 연못 건너편에는 「서울월드컵 스타디움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기념비 背面(배면)에는 서울월드컵스타디움 건립에 노력한 분들의 명단이 새겨져 있다. 서울시장을 비롯한 공무원 100여 명의 이름이 나열된 뒤에 「설계 및 시공자」의 명단이 쓰여 있다. 품격 있는 나라라면 기념비 명단의 순서는 설계자를 앞세워야 한다.

우리는 상암월드컵경기장의 리셉션홀에 진입했다. 바닥과 벽면에는 강원도 정선군에서 생산되는 대리석으로 마감했다. 소나무의 느낌을 주는 한국 대리석은 리셉션 홀의 기품을 드높이고 있다.

『제가 정선 대리석을 꼭 써야 한다니까 처음에는 모두 반대했어요. 논란을 거듭하다가 당시 高建 서울시장이 「정선 대리석이 내 마음에도 들지 않지만, 전문가의 견해를 非전문가가 꺾을 수 없다」면서 저의 손을 들어 줍디다. 준공 후 리셉션 홀의 정선 대리석은 국내외의 격찬을 받았어요. 高建 시장도 얼마나 좋아했는지, 시장 이임식도 여기서 열었습니다』

리셉션 홀의 천장도 전통 한옥을 느끼게 한다. 우물반자 천장에 이어 서까래를 단 모습이다.

VIP실을 잠시 둘러보고 우리는 베란다 쪽으로 나갔다. 베란다의 철제 창살도 전통 한옥의 나무 창살 모습을 흉내내고 있었다. 상암월드컵경기장은 한국 古건축의 수준을 세계에 과시한 기념비적 건물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서울월드컵 스타디움 기념비 앞에 선 설계자 柳春秀 회장. 기념비에는 이 경기장 건립 유공자들의 명단이 새겨져 있는데, 서울시 공무원 100여 명의 이름 뒤에 설계자와 시공자의 이름이 쓰여 있다.


연간 100억원의 흑자를 기록하는 수익성 세계 제1의 축구장

상암경기장은 세계에서 가장 수익성이 높은 월드컵 개최 축구경기장이다. 우리 일행을 안내한 서울시시설관리공단 월드컵경기장사업단의 류성진 경영관리과장은 『상암경기장의 연간 수입이 180억원, 순수익이 100억원에 달한다』고 말했다.

국내 리그의 매경기 관객수가 5000명도 되지 않은 축구장이 세계에서 제일 돈을 잘 버는 곳이라니,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 것인가. 우리는 상암경기장의 부대시설을 둘러보기로 했다.

필자는 상암경기장에 가서 두 번 축구경기를 관전한 바 있지만, 그곳이 엄청난 생활문화공간인지는 여태 몰랐다. 경기가 없는 날에도 3만~4만 명의 인파가 몰리는 새로운 명소였다.

대형 할인매장 까르푸, 의류점, 은행, 우체국, 예식장, 세탁소, 치과, 한의원, 동물병원, 서점, 커피점, 미장원, 이발소, 네일숍 등이 성업 중이었다. 특히 식당가는 붐볐다. 柳회장과 이태훈 사진기자는 쇠고기덮밥(6500원), 필자는 콩나물국밥(4800원)으로 점심을 먹었다. 방학 때여서 아이들을 데리고 피서 온 가족들, 팔짱을 낀 젊은 연인들, 쇼핑 나온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국내에 진출한 외국계 대형 할판점이 모두 경영부진으로 철수하려 하고 있지만, 까르푸만은 이곳에서 흑자를 올려 철수하지 않을 것이라고 합디다』

상암경기장에 있는 영화관만 10개다. 요즘 대박을 터뜨리고 있는 영화 「괴물」의 입장권 두 장을 샀다. 우리는 「괴물」의 3회 상영시간(오후 2시40분)까지 지하철역에서 경기장까지의 動線(동선)을 확인하고, 보조경기장을 둘러보았다.

「괴물」을 관람한 후 필자는 柳회장을 따라 봉천11동 「異空」의 사옥에 갔다. 異空 사옥은 건축가가 지은 집답게 눈을 즐겁게 한다. 언덕 위에 올린 바닥면적 50여 평짜리 6층 건물이다. 건물 입구에는 휘영청 구부러진 느티나무 한 그루만 서 있고, 벽면엔 담쟁이덩굴이 싱싱하게 자라고 있다.

『이 사옥은 12년 전 IMF 외환위기 때 다른 사람의 소유로 넘어가고, 지금 異空은 세를 살고 있습니다. 異空이 빚 보증을 서 주었던 두 회사가 부도를 내는 바람에 사옥이 경매에 붙여져 넘어간 겁니다』

―柳회장은 굵직굵직한 현상설계에 많이 당선되셨으니 이보다 더 근사한 사옥을 지을 만하지 않습니까.

『그저 현상유지를 하고 있습니다. 세계 어느 나라의 건축가도 돈벌이와는 인연이 멉니다』
상암월드컵경기장內 리셉션홀.


초등학교 2학년 때 받은 우등상 걸어둔 사무실

필자는 柳회장의 뒤를 따라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 그의 6층 방에서 함께 커피를 마셨다. 유리창 너머로는 관악산 연주암의 바위 끝에 절집의 처마가 살짝 걸려 있다. 사무실 벽면에는 그가 초등학교 2학년 때 받은 우등상 하나가 걸려 있다.

―왜 하필이면 초등학교 2학년 때 받은 우등상을 걸어 두셨어요.

『상장의 문장과 붓글씨가 제 맘에 꼭 듭니다』

상장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右者는 一年間 學業優秀하고 品行方正하므로 에 此를 表彰함>

요즘 같으면 웬만한 대학생도 해독하기 어려운 내용의 상장이다. 깔끔한 正字의 붓글씨에서 알뜰한 시골교사의 정성을 읽었다. 이런 상장을 수여하는 학교라면 좋은 학교이다. 그는 좋은 초등교육을 받았다.

회사 정문까지 내려온 그의 배웅을 받으며 건축가 柳春秀와 인터뷰를 끝냈다. 그는 우리 건축사에 「한국 전통 건축의 르네상스(再生)와 세계화를 꿈꾸어 온 求道者(구도자)」로서 기록될 만한 인물이다.●
Copyright ⓒ 정순태의 역사산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