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조선 기사

鄭淳台 기자의 현장 답사 -「明治維新의 진원지」시모노세키·하기와 安倍晉三(아베 신조) (1)

아베 신조(安倍晉三)의 뿌리는「국권 강탈의 원흉」조슈閥

글 정순태 기자  2006-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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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월30일 오전 8시, 필자는 釜關(부관)페리 「성희호」로부터 하선해 시모노세키港(항)에 상륙했다. 시모노세키(下關)는 對馬島(대마도)를 제외하면 한반도에서 가장 가까운 일본 땅이다. 시모노세키港 국제터미널에서 시모노세키驛(역)까지는 걸어서 10분 거리다. 뱃머리와 驛 사이에 위치한 호텔 「도큐(東急)인」에 짐을 맡겨놓고 걸어서 역시 5분 거리인 아베 신조(安倍晉三) 중의원 지역구(시모노세키 제4선거구) 사무실로 직행했다. 시모노세키驛 남쪽 약 700m 「야마구치(山口)신문」 사옥 건너편에 위치한 신조의 지역구 사무실은 아직 출근시간 전이어서 문이 닫혀 있었다. 이곳은 재차 방문할 예정이라 위치만 확인해 놓고 발걸음을 돌렸다.

시모노세키에서 가장 사랑받는 역사인물은 도쿠가와 바쿠후(德川幕府: 덕천막부)에 결정타를 가해 그 숨통을 사실상 끊어 버린 다카스기 신사쿠(高杉晉作)이다. 아베 신조의 이름 중 「晉」(한글 발음 진)은 「晉作」에서 한 字(자)를 따온 것이다. 총리대신이 될 뻔한 시기에 췌장암으로 사망한 晉三의 先親(선친)인 아베 신타로(安倍晉太郞·自民黨 간사장과 외무대신 역임)의 이름에도 역시 「晉」 자가 들어 있다.

우리나라 같으면 어른의 함자를 함부로 빌려 쓸 수 없다. 조선조 시대의 얘기지만, 할아버지 이름 字 중 한 字가 고을 이름 중 한 字와 같다고 해서 그 고을의 사또 赴任(부임)을 거부한 사례까지 있었다. 그러나 일본의 관습은 우리와 정반대다. 시모노세키에서는 심지어 「晉作 우동」, 「晉作 모치(떡)」라고 쓰인 간판까지 심심찮게 눈에 띈다.

아베 신조가 존경하는 역사 인물의 계보를 보면, 요시다 쇼인(吉田松陰)-다카스기 신사쿠-기시 노부스케(岸信介)로 이어지는 조슈(長州) 인맥이다. 조슈는 일본 혼슈 서쪽 끝의 藩(번: 한)으로, 지금의 야마구치현(山口縣)이다.

기시 노부스케는 아베 신조의 외조부이다. 신조의 어머니 요우코(洋子)가 기시의 큰딸이다. 젊은 시절의 기시는 日帝의 만주국 식민지 경영에 투신해 日帝 패망 후 「A급 전범 용의자」로 3년 3개월간 복역하다가 풀려나와 自民黨(자민당) 간사장과 외무대신 등을 거쳐 1957년 2월부터 1960년 7월까지 총리대신을 역임했다. 오뚝이처럼 부활한 그는 정적들로부터 「昭和(소화·쇼와)의 妖怪(요괴)」라고 불렸다.
아베 신조(오른쪽)와 그의 시모노세키 지구당 黨舍(왼쪽).


아베는 기시 총리의 정치 DNA 상속자

총리대신 재임時, 기시는 좌파의 극렬한 반대 데모에도 불구하고 美日 新안보조약의 체결을 소신대로 강행했다. 훗날의 얘기지만, 이것은 일본의 안보와 경제번영의 초석을 놓은 「기시의 결단」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아베 신조는 「기시의 정치 DNA 상속자」를 자처하고 있다.

기시 노부스케의 친동생은 1964년 11월부터 1972년 7월까지 총리대신을 역임한 사토 에이사쿠(佐藤榮作)다. 에이사쿠는 어릴 때 사토家의 養子(양자)가 되었다. 에이사쿠는 총리대신 재임시, 미국에 점령된 오키나와를 반환받았고, 韓日 국교 정상화에 성공했다.

요시다 쇼인은 다카스기 신사쿠의 스승이다. 쇼인이 훈장 노릇을 한 「松下村塾(송하촌숙: 쇼카손주쿠)」의 문하생들의 면면을 보면 신사쿠를 비롯해 구사카 겐즈이(久坂玄瑞), 요시다 토시마로, 이리에 스기조(入江杉藏),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야마카다 아리토모(山縣有朋) 등이다. 후일 明治정부의 실력자가 되는 기도 다카요시(木戶孝允)는 쇼카손주쿠가 개설되기 전 藩校(번교)인 明倫館(명륜관·메이린간)」에 다니면서 쇼인에게 배운 만큼 쇼카손주쿠의 塾生(숙생)들에게는 師兄(사형)의 위치에 있었다.

그래서 쇼인은 일본에서 「幕末志士(막말지사)의 스승」이라 불린다. 지금도 야마구치縣 사람들 앞에서 그를 「선생님」이라고 호칭하지 않으면 대번에 핀잔을 받을 정도이다. 그러나 한국사에서 쇼인은 잊지 못할 애물일 따름이다. 그는 일찍이 『西洋 열강에 침탈당한 일본의 국익을 朝鮮(조선)과 滿蒙(만몽)에서 벌충하자』고 부르짖은 征韓論(정한론)」의 元祖(원조)다. 요시다 쇼인에 대해서는 뒤에서 상술할 것이다.
伊藤博文 初代 1885.12~1888.4 5代 1892.8~1896.8 7代 1898.1~1898.6 10代 1900.10~1901.5
山縣有朋 3代 1889.12~1891.5 9代 1898.11~1900.10
桂太郞 11代 1901.6~1906.1 13代 1908.7~1911.8 15代 1912.12~1913.2
寺內正毅 18代 1916.10~1918.9
田中義一 26代 1927.4~1929.7
岸信介 56代 1957.2~1958.6 57代 1958.6~1960.7
佐藤榮作 61代 1964.11~1967.2 62代 1967.2~1970.1 63代 1970.1~1972.7


『動하면 우레 같고 發하면 風雨 같았다』

시모노세키에 찾아온 만큼 우선 이곳 「최고의 영웅」 다카스기 신사쿠의 행적부터 살펴야 할 것 같다. 아베 신조의 지역구 사무소를 뒤로 하고 걸어서 시모노세키 驛舍(역사)로 발길을 돌렸다. 「야마구치신문」 사옥 앞길을 거쳐 시모노세키 최대 할판점인 「씨몰下關」 옆으로 난 골목길을 빠져나오면 바로 기차역이다.

驛舍 안 교통정보센터로 찾아가 하루 동안 시내버스를 마음대로 탈 수 있는 「패스」를 일금 700엔에 구입했다. 기왕에 驛舍를 찾은 김에 다음날인 8월31일 「明治維新의 고향」 하기(萩)를 당일치기로 다녀오기 위해 시모노세키~東하기(萩) 간 왕복 기차표를 미리 구입해 두었다(편도 요금 1890엔).

시모노세키는 市街(시가) 전체가 역사의 현장이다. 시모노세키 시역 동북쪽 끝 지역 요시다(吉田)에 위치한 東行庵(동행암·도고안)부터 찾아가기로 했다. 東行은 다카스기 신사쿠의 雅號(아호)다. 그는 스물여덟 살의 젊은 나이로 요절했지만, 근대 일본사에서 가장 빛나는 足跡(족적)을 남겼다. 東行庵은 신사쿠의 애인 오우노가 삭발하고 「谷梅處尼(곡매처니)」란 법명의 여승이 되어 신사쿠의 명복을 빌었던 암자다.

시모노세키 역전에서 東行庵까지는 25km 거리다. 중심가를 벗어나 山陽道(산양도·산요도)로 접어들면 버스의 차창 밖으로 간몬해협(關門해협·시모노세키 해협)의 급류가 흐르는 바다가 펼쳐진다. 이곳과 對岸(대안)의 北규슈市 모지(門司)港 사이의 바다 폭은 가장 좁은 곳이 600여m이다. 그 위로 간몬大橋(대교)가 걸려 있다. 이 간몬해협이야말로 1864년 조슈번이 영국 등 4국 연합함대의 포격에 굴복한 패전의 현장인 동시에, 1866년 신사쿠가 조슈번을 공격해 온 막부군을 격파한 決戰의 현장이기도 하다.

모지港으로 건너가는 유람선의 선착장이 소재한 가라도(唐戶)의 가메야마(龜山) 포대, 간몬대교 바로 동쪽의 단노우라(壇之浦) 포대, 신사쿠가 조슈의 俗論派(속론파) 정권을 타도하기 위해 거병한 功山寺(공산사)가 소재한 조후(長府) 등이 차례로 전개된다. 필자는 가장 먼 거리의 東行庵을 먼저 답사한 후 귀로에 이들 일본 근대사의 유적지를 둘러볼 것이다.

여기서 잠깐 신사쿠의 짧은 생애를 살피면서 그것과 同行한 「明治維新의 前夜」인 幕末史(막말사)를 간략하게 정리해 놓을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신사쿠는 明治維新(명치유신·메이지이신)을 가능하게 했던 조슈 전쟁의 영웅이다. 신사쿠의 행적에 대해 그의 부하였던 이토 히로부미는 『動(동)하면 우레 같고 發(발)하면 풍우 같았다』고 표현했다.


吉田松陰을 만나 학문에 눈뜬 19세 청년
다카스기 신사쿠. 그는 도쿠가와 막부 타도의 영웅이었다.

신사쿠는 1839년 다카스기家의 1남3녀의 외아들로 조슈藩(번)의 성 밑거리(城下町·조카마치)인 하기의 菊屋橫丁(국옥횡정)에서 태어났다. 당시 다카스기家는 조슈번의 家臣團(가신단) 13등급 중 4등급인 大組(대조·오쿠미)에 속했다. 녹봉은 150石이다. 당시 쌀 1石은 지금의 18ℓ이다. 다소 여유가 있었던 中上級 무사집안이었다. 신사쿠는 12세 무렵부터 검술을 연마해 20세 전후에 柳生新陰流(유생신음류)의 免許(면허)를 皆傳(개전)한 검의 高手이다.

그는 藩校(번교)인 명륜관 등에 다녔지만, 구태의연한 학업에는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그러던 그가 19세(1857년)의 나이로 쇼카손주쿠(松下村塾)에 入塾(입숙)해 요시다 쇼인의 제자가 되고 부터는 救國(구국)의 實用학문에 눈을 뜨게 되었다. 요시다 쇼인의 독특한 교수법은 뒤에서 상술할 것이다.

신사쿠의 조부와 부친은 신사쿠가 쇼카손주쿠에 다니는 것에 반대했다. 훈장인 요시다 쇼인의 家格이 下級 사무라이인데다 그 정치노선이 과격한 尊王攘夷(존왕양이)였기 때문이다. 신사쿠는 집안 어른의 눈을 피해 밤중에 가만히 쇼카손주쿠에 다녔다.

1859년 10월, 쇼인은 막부의 최고위직인 老中(노중)으로서 열강의 위협에 굴복하여 開國노선을 추진하던 마나베 아키가쓰(間部詮勝)의 암살을 기도한 사실이 드러나 에도의 傳馬町(전마정) 감옥에서 참수당했다. 스승의 죽음을 전해 들은 신사쿠 등 쇼카손주쿠 문하생들은 복수를 맹세했다.

1860년 1월, 신사쿠는 양친의 권유로 「하기 城下의 최고 미인」으로 소문난, 藩士(번사) 이노우에 헤이우에몬의 차녀 마사(雅)와 결혼했다. 1861년 3월, 신사쿠는 번주의 世子 모리 사다히로(毛利定廣)의 小姓役(소성역: 측근 비서직)으로서 藩廳(번청)에 출사했다.

엘리트 藩士(번사)로서 순조로운 출발이었다. 그러한 신사쿠에게 轉機(전기)가 다가왔다. 1862년, 24세의 신사쿠는 藩의 추천으로 막부 파견단의 1人이 되어 淸朝 중국의 上海(상해·상하이)에 도항해 중국의 內戰과 열강의 동향을 3개월간 시찰하게 되었다.


『日本도 위험하다』
조슈번 攘夷激派의 리더 구사카 겐즈이. 겐즈이는 다카스기 신사쿠와 더불어「松下村塾의 雙璧」으로 일컬어졌으나「禁門의 變」때 敗戰하자 현장에서 자결했다.

막부가 이 시찰단을 보낸 이유는 上海에 무역의 거점을 설치하려는 계획 때문이었다. 이때 조슈번은 신사쿠에게 上海에서 「외국의 사정과 형세, 제도, 器械(기계)」를 견문하라는 특명을 내렸다.

당시, 중국에서는 「太平天國의 난(1851~1864년)」이 발발해 上海 교외까지 교전지역이 되어 총소리가 들려오던 시기였다. 아편전쟁(1842년) 후, 부패·무력한 淸朝를 타도하기 위해 봉기한 태평천국의 혁명군에는 많은 농민들이 가담하고 있었다.

상해港에 도착하면서 신사쿠 등을 놀라게 한 광경은 정박해 있는 유럽 열강의 상선·군함 수백 척과, 육상에 늘어서 있는 商館(상관)의 성곽과 같은 웅장함이었다. 20년 전 아편전쟁에서 영국에 패배한 중국은 南京條約을 조인할 수밖에 없었고, 이 조약에 따라 중국 측은上海·廣州(광주)·福州(복주)·廈門(하문)·寧波(영파) 등 5개 港을 개항했다. 열강은 이들 5개 港에 영사관을 설치해 治外法權(치외법권)을 누리면서 무역의 이익을 탐하고 있었다.

신사쿠는 上海 체재 중의 일기인 「遊淸五錄(유청오록)」에 『중국인은 외국인의 노예가 되었다. 우리 일본도 이와 같이 되지 않도록 힘써야 할 것』이라고 썼다. 이 일기에서 신사쿠는 『우리 일본도 막부의 虛弱외교로 인해 이미 (중국의) 전철을 밟고 있다』고 통탄했다.

특히, 신사쿠는 上海 체재중 사쓰마번(薩摩藩: 지금의 가고시마縣)이 上海 일대에서 세계를 상대로 密무역을 이미 개시했고, 장래에는 사쓰마로부터 歐美로 건너가는 항로를 개설할 계획이라는 정보를 입수했다.

신사쿠는 초조했다. 사쓰마번은 조슈번의 최대 라이벌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조슈번은 舊式 범선 군함을 2척밖에 보유하지 못했다. 이 정도의 軍備(군비)로는 만약 歐美 열강의 공격을 받는다면 한순간에 깨질 수밖에 없는 형편이었다.

上海로부터 규슈의 나가사키港에 도착한 신사쿠는 네덜란드의 무기상이 매도하려 했던 증기선을 매입하기 위한 계약을 독단으로 감행했다. 그러나 조슈번의 수뇌부는 그의 독단 구매계약을 추인하지 않았다. 번내에서 신사쿠의 독단에 대한 비난이 거세지자 네덜란드 측도 이 상담을 포기했다. 신사쿠는 번주 父子에게 귀국 보고를 한 후 에도(江戶·지금의 東京) 근무를 命(명) 받았다.

신사쿠의 에도 체재시, 조슈번에서는 「航海遠略策(항해원략책)」을 주장하던 나가이 우다(長井雅樂)가 실각하고, 藩論(번론)이 쇄국으로 방향전환을 해버렸다. 「항해원략책에 조정을 비방한 내용이 있다」고 구사카 겐즈이 등 攘夷派(양이파)가 京都(경도·교토) 조정 관계자와 통해 비난한 결과였다. 항해원략론은 쇄국을 포기하고, 서양열강처럼 해외로 진출해 국위를 떨치자는 구상이었다. 너무 앞서간 나가이는 결국 자기 배를 갈라 자결했다.

1862년 7월, 항해원략책을 파기한 조슈번은 藩論을 이번에는 코메이(孝明) 천황의 지론이기도 한 攘夷(양이·조이)로 돌아섰다. 조슈번의 건의를 받아들이는 형식으로 京都 조정도 「攘夷」 방침을 명확히 했다.

에도에서 신사쿠는 조슈번의 동지들에게 上海에서 느낀 「위기감」을 전달했다. 1862년 11월 신사쿠 등 10여 명은 가나가와(神奈川)에 있던 외국공사를 암살하려 했지만, 정보가 누설되어 중지했다. 이어 12월12일, 시나가와(品川)에 건설 중이던 영국공사관에 잠입해 방화했다.

여러 자료에 의하면 이 방화에 참여한 범인은 신사쿠 등 13명이었는데, 한국인에게도 잘 알려진 방화범의 이름은 다음과 같다.

구사카 겐즈이(쇼카손주쿠 修學 시절에 신사쿠와 더불어 「雙璧(쌍벽)」으로 불렸음), 이노우에 가오루(후일 외무대신과 駐조선공사 역임), 이토 히로부미(일본 수상 4회 역임).


게릴라 戰法의 민병조직「奇兵隊」창설
가메야마 포대 터. 1863년 5월10일 구사카 겐즈이의 지휘로 미국 상선을 포격했다가 며칠 후 美 군함 와이오밍號의 보격공격을 받아 궤멸했다.

「攘夷」를 슬로건으로 내세운 조슈번은 1863년 들어 절정기를 맞았다. 그해 3월4일 칙사로부터 攘夷를 독촉받은 쇼군(將軍) 도쿠가와 이에모치(德川家茂)는 上洛(상락: 천황이 있는 京都로 올라감)했다. 쇼군의 上洛은 3대 이에미쓰(家光) 이래 200년 만의 일이었다. 그 배경에는 이 기회에 조정의 권위를 확립시켜 막부를 궁지에 몰아넣으려는 조슈번의 속셈이 숨어 있었다.

당시의 流行사상은 非현실적인 攘夷였다. 1863년 4월20일, 이에모치는 불가능한 일인지 뻔히 알면서도 世論에 밀려 「5월10일까지 攘夷를 단행하겠다」고 코메이 天皇에게 약속했다. 이미 歐美 열강과의 사이에 개국의 조약을 체결한 상황이었던 만큼 막부로서는 벼랑가로 몰린 꼴이었다.

이 무렵 신사쿠는 실력이 없으면서 목소리만 큰 조슈번의 攘夷 방식에 회의했던 것 같다. 진짜 攘夷를 하려면 정치게임보다는 우선 군사력을 비축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그러나 그의 무력증강 건의는 조슈번 상층부에서 받아들이지 않았다. 25세의 신사쿠는 돌연 삭발을 하고, 그 다음날인 3월15일 藩廳에 10년의 휴가를 신청해 허락을 받았다. 그는 스승 요시다 쇼인의 生家 근처에 은거했다.

그러나 시대는 신사쿠에게 讀書三昧(독서삼매)를 허락하지 않았다. 바로 그해 5월10일, 攘夷의 「急선봉」이던 조슈번은 시모노세키 해협에서 攘夷戰을 감행했다. 5월10일은 조슈번이 앞장서 무리하게 막부를 몰아세워 攘夷期限(양이기한)으로 선포된 날이었다.

1863년 5월10일 새벽 2시, 조슈번은 구사카 겐즈이(久坂玄瑞)의 지휘로 외국 선박에 대해 무차별 포격을 감행했다. 이날 시모노세키 해협을 통과하려고 하다 포격을 받고 혼이 난 선박은 미국 국적의 상선 팬브로그號였다.

공격을 받은 미국 측이 가만있을 리 없었다. 다음날, 미국 군함 와이오밍號가 보복 공격을 가해 가메야마(龜山) 포대를 쑥대밭으로 만들어 버렸다. 이 전투에서 조슈번의 군함 庚申丸(경신환)과 壬戌丸(임술환)은 침몰하고, 癸亥丸(계해환)은 대파당했다.

나흘 후에는 프랑스 군함 2척이 역시 보복을 위해 시모노세키 해협에 진입해 맹렬한 포격을 가한 후 陸戰隊(육전대)를 상륙시켜 해안 포대들을 점거·파괴하고, 民家도 방화하고 철수했다.

이때 은거 중이던 신사쿠는 藩廳에 게릴라 전법의 民兵조직인 「奇兵隊(기병대·키헤이타이)」의 창설을 건의했다. 그가 창설한 奇兵隊는 신분을 가리지 않고 전투력 위주로 대원을 선발·편성한 부대였다. 신사쿠는 기병대의 총독에 취임했다. 기병대에 이어 遊擊隊(유격대)·御盾隊(어순대)·集義隊(집의대)·力士隊(역사대) 등 민병대가 조직되었다. 이들 諸隊(제대)의 총병력은 2000여 명에 이르렀다.

藩廳은 농민·상인 등 일반 백성이 무장을 하고 武技(무기)를 배우는 것을 허락했다. 이것은 사무라이 계급만 무기를 소유하고 군사훈련을 받을 수 있도록 했던 막부 祖宗의 방침을 정면으로 무시하는 조치였다.


「8·18 政變」으로 추방된 조슈藩

이 무렵 조슈번의 「攘夷激派(양이격파)」는 조정의 급진적 公卿(공경)과 짜고 천황의 攘夷親征(양이친정)과 到幕(도막·막부타도)의 강행을 기도했다. 그러나 코메이 천황은 열렬한 攘夷論者이기는 하되, 攘夷는 어디까지나 막부를 중심으로 한 公武合體(공무합체)로 결행해야 한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公武合體에서 「公」은 朝廷, 「武」는 막부를 의미한다. 이것은 코메이 천황이 「막부의 타도」라는 현실정치의 변혁까지는 바라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그런데도 조슈의 攘夷激派는 산조 사네토미(三條實美) 등 自派 公卿들을 통해 천황에게 압력을 가했다. 그 결과, 8월13일 「攘夷를 위한 천황의 親征을 결행하겠다」는 詔勅(조칙)이 나왔지만, 力量上(역량상)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이에 조슈번의 라이벌인 사쓰마번과 京都守護職(경도수호직)을 맡고 있던 아이즈(會津)번이 조슈번의 攘夷激派를 京都로부터 추방하기로 합의해 비밀리에 동맹을 맺었다.

8월18일 새벽, 아이즈·사쓰마·요도(淀)의 세 藩에 皇居守衛(황거수위)의 명령이 떨어졌다. 3藩의 병력은 완전무장하고, 宮城의 9개 문을 엄중히 폐쇄하고, 召命(소명)이 없는 자는 예컨대 그가 關白(관백: 천황을 대리해 정무를 처리하는 최고위직)이라도 입문시키지 않았다.

朝議(조의)에서는 攘夷派(양이파) 公卿의 參內·외출·면회의 금지, 조슈번의 사카이마치門 경위 임무 免除 등이 결정되었다. 이 친위 쿠데타가 「8·18의 變(변)」이다.

조슈번 병사들은 사카이마치門까지 달려왔지만, 사쓰마번 병사들이 앞을 가로막았다. 사쓰마 번병들은 대포의 포구를 열어 놓고 발사할 태세였다. 兩軍의 대치상태에서 조슈번에 대해 「퇴거하라」는 칙명이 전해졌다.

상황은 조슈번에 절대 불리해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하루아침에 조정에서 쫓겨난 公卿 7명 및 攘夷派 사무라이를 포함한 2600명이 京都 북쪽 大佛妙法院(대불묘법원)에 모여 협의한 끝에 일단 조슈로 내려가 재거를 도모하기로 했다.


「禁門의 變」과 幕府의「제1차 조슈征討」

이러한 비상사태에 대처하기 위해 조슈번은 10월1일 신사쿠를 奧番頭(오번두)로 삼았다. 오번두는 번주의 측근 중 측근으로 사실상 번을 운영하는 役職(역직)이다. 당시 신사쿠의 나이 25세.

公武合體派에 의한 8·18정변으로 京都에서 쫓겨난 조슈번의 존양파는 1864년에 들어 上京 복수전을 감행할 움직임을 보였다. 조슈번 유격대 총독 키지마 마타베(來島又兵衛), 구사카 겐즈이 등이 강경하게 京都 진발을 주장했다. 신사쿠는 『편협한 視野(시야)에 의한 小攘夷를 버리고, 진정한 부국강병에의 길을 모색해야 한다』면서 進發派(진발파)를 설득했지만, 실패했다.

이때 신사쿠는 同門修學한 구사카 겐즈이 등 진발파를 설득하기 위해 藩命(번명)을 받지도 않고 2개월간 上京한 사실이 밝혀져 귀번한 후 즉각 城下의 野山獄(야산옥)에 수감되었다. 당시 「脫藩(탈번)의 죄」가 가볍지 않기는 했지만, 스피드 출세를 한 신사쿠에 대한 주위의 질투가 만만치 않았던 것 같다. 평소 신사쿠는 「直言直行 傍若無人(직언직행 방약무인)한 성격」이라는 인물평을 받고 있었다.

조슈 양이격파는 기어이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 조슈번은, 병력 3000여 명은 4隊로 나눠 京都로 진격했다. 1864년 7월19일 未明, 조슈번의 家老 후쿠하라 에치고(福原越後)의 부대가 京都 진입을 노리며 伏見(후시미) 街道를 북상하다 오가키·히코네藩 부대와 조우해 전단이 열렸다.

家老 쿠니시 시나노와 유격대 총독 키지마 부대는 2대로 分進해 하마구리門을 향해 쇄도했다. 백병전을 벌여 일시는 아이즈 藩兵의 수비선을 뚫고 궁궐 내부로 침입했지만, 새로 투입된 사쓰마·구아나(桑名) 번병에 의해 격퇴되었다.

구사카 겐즈이의 부대는 사카이마치門에 육박했지만, 포격전 끝에 패주했다. 겐즈이는 패전 현장에서 자결했다. 조슈의 4路軍은 모두 패전했고, 키지마 등은 전사했다. 이로써 조슈번 존양파는 거의 궤멸적 타격을 입었다. 이것을 궁궐에 대포를 쏘았다고 해서 「禁門(금문·킨몬)의 變」, 또는 최대 격전지의 이름을 따 「하마구리門의 變」이라고 부른다.

코메이 천황은 조슈번 追討(추토)의 칙령을 발했다. 궁궐을 향해 대포를 발사한 조슈번의 죄가 결코 가볍지 않다고 격노한 것이다. 막부의 조슈정벌軍(총독 德川慶勝)은 히로시마에 大本營(대본영)을 설치하고, 조슈번을 사방에서 포위했다. 15만 대군이었다.

그러나 열강 함대와의 「제1차 시모노세키 전쟁」에서 혼찌검이 나고 군사력도 피폐해진 조슈번은 항전을 포기했다. 조슈번의 俗論派 정권은 막부군에 恭順(공순)의 자세로 和平를 요청했다. 막부군은 「禁門의 變」 현장 책임자인 마쓰다(益田右衛門介) 등 세 家老(번의 최고위직)의 首級(수급)을 요구했다. 조슈번으로서는 삼키지 않을 수 없는 제안이었다.

조슈번은 세 家老를 셋부쿠(切腹: 자기 배를 갈라 자결함)시키고, 나카무라(中村九郞) 등 참모 4명은 참수했다. 세 家老의 수급은 즉각 히로시마의 막부 大本營에 전달되었다. 이로써 謝罪(사죄)의 세리머니는 끝나고, 강화 조건을 정하는 실질적인 담판이 시작되었다.

막부 측은 조슈 번주 父子를 감시하에 두기 위해 에도로 보낼 것을 요구했다. 조슈번으로서는 수락하기 어려운 조건이었다. 그러나 막부로서도 15만의 征長軍을 계속 유지하기 어려웠다. 대다수의 다이묘들이 유혈 사태를 회피하려 했다. 무엇보다 거액의 파병비용을 더 이상 지출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1864년 2월 막부군과 조슈번 사이에 毛利 부자가 사죄·근신하는 등 막부의 체면을 세워 주는 선에서 협상이 타결되었다.

제1차 조슈정벌戰은 전투를 치러 보지도 못한 채 막부군의 승리로 끝났다. 하지만 막부 내부의 강경파는 화평조건에 불만이었다. 이럴 때 조슈번에서는 「討幕(토막)」을 주장하는, 자칭 「正義派(정의파)」가 쿠데타를 일으켜 항복노선의 俗論派를 숙청하고 정권을 장악했다.

討幕을 주장하는 강경파가 조슈번의 정권을 장악하고 있는 사태를 방관하고서는 막부의 위신이 설 수 없었다. 1865년 3월2일 쇼군 도쿠가와 이에모치(德川家茂)는 조슈 정벌을 위한 勅許(칙허)를 얻기 위해 上洛했다.

막부의 힘이 강한 때였다면 쇼군이 그런 勅許 따위는 애당초 받으려고 생각지 않았을 터이다. 그러나 이제 존왕양이파에 의해 잔뜩 고무된 천황은 종전처럼 고분고분하지 않았다. 코메이 천황은 막부의 제2차 조슈정벌에 딴지를 걸었다. 먼저 조슈번과 협상해 보고 그래도 정 말을 듣지 않으면 그때 정토하라는 따위의 간섭이었다.

이렇게 막부의 征長戰(정장전)이 자꾸 천연되는 상황에서 4개국 연합함대의 조슈번 공격이 더 빠르게 전개되었다. 1863년 5월10일부터 6회에 걸쳐 외국선에 대해 포격을 감행한 조슈번에 대해 4개국이 응징을 결의했던 것이다.

당시 藩命(번명)으로 영국에 유학 중이던 이토 히로부미와 이노우에 가오루는 급거 귀번해 「열국과 강화하라」고 藩廳(번청)을 설득했지만, 헛수고에 그쳤다. 「禁門의 變」이 발발해 궤멸적 타격을 받은 조슈번은 혼란상태에 빠져 있었기 때문에 전쟁회피를 위한 교섭대표를 파견할 여유가 없었다.


제2차 시모노세키 전쟁에서 4개국 연합함대에 굴복

1864년 8월4일, 4개국 함대가 시모노세키의 조후(長府) 앞바다에 결집했다. 영국 9척, 네덜란드 4척, 프랑스 3척, 미국 1척, 합계 17척으로 대포 290문, 병력 5000여 명의 대함대였다. 이에 대한 시모노세키의 수비대는 포 120문, 병력 2000명 정도였다. 더욱이 수비대의 포는 구식으로 사정거리가 짧고, 포탄의 파괴력이 미약했다.

4개국 함대의 공격은 8월5일 오후 4시10분에 개시되었다. 담배 두어 개비피울 만한 사이에 수백 발의 포탄이 날아왔다. 공격 개시 1시간 만에 시모노세키의 주요 포대들은 궤멸상태에 빠졌다. 열국은 육전대를 상륙시켜 砲門을 파괴하고 탄약을 폐기하면서 掃討(소토)작전을 계속해 그 일부는 시모노세키 거리까지 침공했다.

3일간 전개된 시모노세키 전쟁의 결과는 조슈 측의 참패였다. 조슈번으로서는 강화를 요청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講和使節(강화사절)로 누구를 내세울 것인가, 조슈번의 상층부는 난상토론을 했다. 국제감각을 지니면서 패전 상황의 협상 테이블에서 버틸 만한 기백의 인물이 필요했다. 결론은 다카스기 신사쿠였다. 당시 신사쿠는 脫藩의 죄로 野山獄에 수감되었다가 1등 감형되어 자택근신 처분을 받고 있던 처지였다.

신사쿠는 고위 사무라이의 禮裝(예장)에 烏帽子(에보시: 귀족이나 神官이 쓰는 높은 巾)를 쓰고 연합함대의 旗艦 유리아라스號에 승선했다. 26세의 청년에게 조슈번의 운명이 걸리게 되었다.

3회에 걸쳐 진행된 담판 결과, 조슈번은 외국 선박의 시모노세키 해협 통과를 인정하고, 포대를 신축하지 않으며, 물·식량·연료 등의 보급을 허가했다. 그러나 4개국이 요구한 배상금 300만 달러의 지불은 단호히 거부했다. 당시 300만 달러는 1개 번이 감당할 만한 금액이 아니었다. 조슈번은 막부가 결정한 攘夷期限(양이기한)을 실행에 옮겼을 뿐이라는 논리를 내세웠다. 책임을 막부로 떠넘긴 것이다.

이에 4개국은 막부에 대해 300만 달러의 배상금 지급을 요구했다. 그러나 4개국의 속셈은 거액의 배상금을 받아내는 것보다는 그 대신에 시모노세키港 또는 효고(兵庫)港 중 하나를 개항시키는 데 있었다. 그러나 막부는 거액의 배상금 지급 쪽을 선택함으로써 시모노세키 전투의 전후처리 문제는 일단락되었다.
4개국 연합함대의 육전대에게 점령된 시모노세키 前田포대.


高衫晉作의「시모노세키 擧兵」

코메이 천황이 「禁門의 變」을 일으켜 궁궐을 범한 조슈번을 追討하도록 막부에 명했다는 사실은 앞에서 썼다. 사태가 여기에 이르자 조슈번內에서는 대대적인 정권교체가 단행되었다. 이때까지 攘夷의 슬로건 아래 反막부노선으로 돌진하던 자칭 「正義派」가 실각하고, 俗論派(속론파)가 대두했다.

정의파의 리더였던 주후 마사노스케는 자결했다(1864년 9월26일). 이날 밤, 번주 임석下 회의에서 「武備恭順」(무비공순: 겉으로는 막부에 납작 엎드면서 내부적으로는 군사력을 증강해 유사시에 대비함)을 제의한 이노우에 가오루는 퇴청해 귀가하던 중 자객의 습격을 받아 중상을 입었다. 俗論派는 신사쿠의 목숨도 노렸다.

11월, 俗論派의 암살 위협을 피해 신사쿠는 하기를 탈출해 시모노세키 북부 산간지대에서 숨을 죽이고 있던 奇兵隊의 캠프로 찾아갔다. 이미 속론파의 藩정부는 기병대를 비롯한 諸隊(제대)에 해산명령을 내려놓았다.

신사쿠는 기병대의 軍監(제2인자)인 야마카다 아리토모를 만나 속론파 타도를 위한 궐기를 촉구했다. 그러나 愼重派(신중파)인 아리토모는 응하지 않았다. 옛 부하에게 거절당해 실의에 빠진 신사쿠는 규슈(九州)의 후쿠오카로 망명했다. 그는 후쿠오카 교외 平尾山莊(평미산장)에 은거하고 있는 歌人(가인)이며 「志士의 어머니」라 불리던 女僧 노무라 보도(野村望東)의 거처에 잠복했다.

起死回生의 기회를 엿보던 신사쿠는 무력으로 번의 俗論派를 타도하기로 결심하고 후쿠오카로부터 시모노세키로 잠입했다. 그는 시모노세키 근교의 조후(長府)에 할거하고 있던 기병대를 비롯한 諸隊에 궐기를 촉구했다. 그러나 諸隊는 쉽사리 응하지 않았다.

이에 신사쿠는 諸隊의 대원들을 상대로 궐기를 위한 유세를 벌였다. 드디어 소수이지만 신사쿠의 궐기 호소에 찬동하는 자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유격대 군감 다카하시(高橋熊太郞)와 力士隊 총독 이토 히로부미 등 약 80명이었다. 이것이 이른바 「시모노세키 擧兵(거병)」이다.

신사쿠의 작전은 電光石火(전광석화)를 방불케 했다. 시모노세키 중심부에 있던 조슈번의 奉行所(봉행소)를 습격해 군량과 군자금을 입수했다. 이어 숨돌릴 새도 없이 小船(소선)을 타고 미타시리(현재의 防府市)를 급습해 조슈번의 군함 3척을 강탈했다.

이같은 신사쿠의 활약은 순식간에 기병대 등 諸隊에 전해졌다. 당시 기병대의 총독대리가 나중에 「조슈 軍閥(군벌)을 키워 40여 년간 일본육군을 지배하는 야마카다 아리토모(山縣有朋)이다.

신사쿠의 반란군과 조슈 정규군의 싸움은 1865년 1월 오다에도(大田繪堂) 전투로부터 개시되었다. 이 전투에서 반란군은 정규군을 일거에 대파한 데 이어 계속 정규군을 패퇴시켜, 2월에는 신사쿠를 중심으로 하는 討幕派(토막파)가 조슈번의 정권을 장악했다.

그러나 신사쿠의 파란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그해(1865년) 4월, 신사쿠는 여러 외국과의 무역에 의해 돈을 벌 수 있도록 시모노세키를 開港(개항)하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당시의 유행사상은 攘夷였던 만큼 신사쿠는 자신을 따르던 기병대 등 諸隊의 강경파들로부터 피살당할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그는 게이샤 출신 애인 「오우노」를 데리고 시고쿠(四國)로 달아나 또다시 잠복했다.

1865년, 다지마(但馬: 현재의 兵庫縣)에 잠복해 있던 기도 다카요시가 돌아와 조슈번의 지도자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이로써 신사쿠의 歸藩(귀번)의 길이 열리게 된다.
① 영국의 프리머츠港에 전시되어 있는 시모노세키 전쟁 당시의 영국 군함과 艦載砲.
② 시모노세키 전쟁에서 사용된 영국 측 포탄(오른쪽)과 조슈번의 포탄(왼쪽). 조슈의 球形 포탄은 時限信管으로서 명중해도 일정 시간 후에 폭발하는 데 비해, 영국의 尖塔形 포탄은 닿기만 하면 폭발하는 着發信管이 붙어 있었다.
③ 시모노세키 전쟁의 전리품으로 파리의 앵발리드에 보관되고 있는 조슈번의 18파운드 포.


사쓰마-조슈 비밀동맹
조슈번의 기도 다카요시와 삿초동맹을 성립시킨 사이고 다카모리.

4대 열강과의 제2차 시모노세키 전쟁의 위기에서 벗어난 조슈는 이제는 武備恭順(무비공순)의 정책을 견지해 간다. 이를 面從腹背(면종복배)로 판단한 막부는 제2차 조슈 정벌전을 위한 사전준비에 돌입했다.

「외톨이」 조슈로서는 동맹세력이 절실하게 필요했다. 1866년 1월, 기도 다카요시는 비밀리에 京都로 올라가 그때까지 원수처럼 지내던 사쓰마의 藩士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와 회담을 거듭해 소위 「삿초(薩長)동맹」을 체결했다. 이것은 중앙의 정국에 실력을 가진 사쓰마번이 「朝敵」 조슈번의 復權(복권)을 위해 진력하고 유사시의 助兵(조병)을 서약하는 비밀동맹이었다. 막부 측은 삿초동맹을 눈치채지 못했다.

사실, 두 「雄藩」은 막부의 독재에 강한 불만을 품고 있으면서도 서로 라이벌 의식 때문에 이때까지 대립을 계속해왔다. 그러나 여러 다이묘(大名)에 의한 共和체제를 기도했던 사쓰마번은 막부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조슈번과의 동맹이 필요했다.

사쓰마 번내에서는 조슈번을 탈락시켜서는 막부 타도의 추동력이 부족하다는 계산서가 이미 나와 있었다. 거기에다 중앙 진출에 강한 야심을 품고 있는 사쓰마번에 있어 간몬해협(關門해협·시모노세키 해협)을 보유하고 있는 조슈번과 대립한다는 것은 해상교통로 확보의 차원에서 得策(득책)이 아니었다.

사실, 조슈번과 사쓰마번의 접근은 전년부터 본격화되고 있었다. 프랑스의 제안에 의해 영국·프랑스·미국·네덜란드 등 열강은 일본과의 密무역을 금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朝敵」 조슈번은 무기 구입이 불가능해져 對막부 전쟁준비가 곤란해졌다. 이런 상황에서 사쓰마번이 가만히 무기도입의 名儀(명의)를 빌려 주어 조슈번에 도움을 준 것이다.

이런 삿초동맹을 주선한 인물이 도사(土佐) 浪士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였다. 그 덕택으로 조슈번은 영국 상인으로부터 소총 7000정 등을 구입해 軍備를 일신하게 되었다.

그 무렵, 신변의 위험에서 벗어난 신사쿠는 시모노세키로 돌아왔다. 조슈번은 그의 신청에 따라 해외유학을 허가했다. 그는 유학비 1500량을 지참하고 나가사키로 출발했다. 이때 막부는 조슈번주에 대해 호출명령을 내리면서 거부하면 제2차 조슈 정벌전을 결행하겠다고 위협했다.

이런 정보를 접한 신사쿠는 해외유학을 포기했다. 그는 藩命에 따라 영국의 무기상인 글라버를 만나 군함 오덴트號(증기선)의 구입계약을 하고, 이 군함을 타고 시모노세키로 돌아왔다. 이것이 뒷날 막부와의 전쟁에서 크게 활약하는 丙寅丸(병인환·헤이인마루)이다.


제2차 조슈 征討戰에서 되레 패전한 幕府軍
「삿초同盟」을 주선한 도사 藩士 사카모토 료마.

히로시마(廣島)까지 정벌의 대군을 추진시킨 막부는 조슈 번주 父子를 에도로 호송할 것과, 조슈번 石高 36만 石 중 10만 石의 삭감 등을 강화조건으로 제시했다.

그러나 막부는 開戰 준비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우선, 믿고 있던 사쓰마번이 출병을 거부했고, 다수의 다이묘(大名) 및 公卿들이 조슈 再征에 비판적이었다. 그것은 1차 정벌전에서 이미 항복한 조슈번을 다시 공격한다면 大義名分(대의명분)이 확실하지 않고, 막대한 戰費부담으로 고통을 겪어야 했기 때문이다. 막부로서도 內心으로는 가능한 한 평화적 수단으로 조슈번을 굴복시켜 막부의 위신을 유지하고 싶었다.

하지만 조슈번 측은 이미 제1차 조슈정벌전의 강화로 처분이 종료되었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私怨(사원) 때문에 조정의 권위를 이용해 再공격하려는 막부야말로 「賊」이라는 것이었다.

조슈번이 막부가 제시한 조건을 최종적으로 거부한 것은 1866년 5월29일의 일이었다. 이제는 開戰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막부는 諸藩(제번)의 병력 15만 명을 호령해 조슈의 영토를 사방으로부터 포위했다. 조슈군의 병력은 4000명에 불과했다. 드디어 6월8일부터 막부군의 진격이 개시되었다. 전투는 大島口(대도구), 藝州口(예주구), 石州口(석주구), 小倉口(소창구) 등 4방면의 국경에서 전개되었기 때문에 조슈번에서는 이를 「四境(4경)전쟁」이라고 불렀다.

歸藩 후 신사쿠는 小倉口의 해군 총독으로 임명되었고, 곧 육군참모를 겸임했다. 北규슈의 小倉(소창·고쿠라)城에 집결해 간몬해협을 건너 시모노세키를 공격해 들어오려는 막부군과의 전투를 지휘하는 직책이었다. 조슈번은 이 방면에 기병대·보국대 등 약 1000명을 配備(배비)했다. 반면 막부군은 고쿠라·구마모토(熊本)·가라쓰(唐津)번 등 6개 번병 2만 명을 투입했다.

6월17일, 조슈번 군함 5척이 해협을 건너 北규슈 연안을 공격해 막부군의 요충을 공략했다. 1000명 對 2만 명의 격돌이었다. 병력수에서는 도저히 승산이 없는 싸움에서 신사쿠는 기습공격으로 막부군을 압도했다. 막부군은 수만 많았을 뿐 諸藩으로부터 동원된 烏合之衆(오합지중)이었다.

나머지 3개구에서도 조슈군은 병력수에서는 열세였지만, 무기와 장비는 월등했다. 조슈군은 사기가 높았다. 여기서 패하면 자기들 고향이 멸망하고 말 것이라는 위기감에서 배수의 진을 치고 필사적으로 싸웠다. 4개 국경 전투에서 막부군의 「征討軍」이 오히려 敗勢를 보였다.

7월20일, 쇼군 이에모치가 오사카城에서 병사했다. 8월1일, 고쿠라城의 막부군은 城에 불을 지르고 퇴각했다. 大島口·藝州口·石州口에서 조슈군의 승리가 거듭되었다. 막부는 칙명을 받아 휴전을 제의했다. 그 使者로서 막부의 해군총독 가쓰 가이슈(勝海舟)가 히로시마로 내려왔다.

9월2일 아키(安藝)에서 막부의 사절 가쓰 가이슈와 조슈번 측의 히로자와 사네오미(廣澤眞臣)·이노우에 가오루가 회담, 兩者 사이에 휴전협약이 체결되었다.


신사쿠 死後 6개월 만에 단행된 王政復古 선언

이제는 신사쿠의 죽음에 대해 약간의 설명해 둬야 할 것 같다. 1866년 6월, 조슈군이 北규슈의 고쿠라城을 점령할 무렵에 이 방면의 총지휘관 신사쿠가 각혈을 하기 시작했다. 당시엔 不治였던 결핵에 걸린 것이었다. 東奔西走(동분서주)했던 그에겐 쉴 틈이 없었고, 더욱이 젊었던 만큼 병의 진행속도가 빨랐다. 그는 1866년 10월 위독한 상황에서 현직에서 물러났다.

1867년 4월14일, 신사쿠는 시모노세키의 병상에서 사망했다. 27년 7개월의 짧은 일생이었다. 근대일본의 새벽인 明治維新의 최대 추진력은 조슈번이었고, 그 조슈번을 그렇게 추동시킨 것은 바로 그였다.

1866년 12월25일, 완고한 攘夷論者로서 公武合體를 추진해 오던 코메이 천황이 급사했다. 토막파의 公卿 이와쿠라 도모미(岩倉具視)에 의한 독살설이 유력하지만, 그에 대한 설명은 지면관계상 생략한다. 어떻든 막부는 이것을 기회로 삼아 조슈 再征軍의 解兵(해병)을 공식 발령했다.

「휴전」·「解兵」이란 말은 그럴듯하지만, 결과는 막부의 참패였다. 번주로부터 농민들까지 한 덩어리가 된 조슈번에 격퇴당한 것이었다. 막부의 약점이 전국에 폭로된 가운데 조슈번과 사쓰마번은 어린 천황 메이지(明治)를 옆구리에 끼고 막부에 대해 大政奉還(대정봉환)의 압력을 가중시킨다.

1867년 10월, 15대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德川慶喜)는 대정봉환을 상주해 칙허를 받는다. 12월에는 이른바 「王政復古의 大號令」이 선언되었다. 신사쿠가 병사한 지 6개월 후의 일이었다. 조슈 번주 父子에게 씌어졌던 「朝敵」의 오명도 벗겨졌다. 조정의 小御所회의에서는 요시노부의 쇼군職을 떼고 막부의 땅도 일부 몰수하기로 결정되었다.

1868년 1월, 이에 반발한 요시노부는 막부군을 이끌고 오사카城을 나와 京都로 진격했다. 하지만 그 중도인 도바(鳥羽)·후시미(伏見)에서 조슈·사쓰마 번병을 주력으로 하는 「官軍」과 싸웠으나 패퇴했다. 戊辰(무진)전쟁의 시작이었다. 추격전을 벌인 新정부군(관군)에 대해 요시노부가 항복했다. 新정부군은 1868년 4월 에도에 입성했다. 이로써 도쿠가와 막부는 265년 만에 멸망했다.

막부의 잔당들은 이후 홋카이도(北海道)까지 후퇴해 저항을 계속했지만, 1869년 5월 마지막 거점인 하코다테의 五稜郭(오능곽) 전투에서 패해 항복함으로써 戊辰전쟁은 新정부군의 승리로 종결되었다.


신사쿠의 무덤 東行庵

필자는 시내버스의 종점인 오게쓰(小月)驛에서 하차했다. 오게쓰驛에서 10여 분 기다리니 東行庵으로 가는 버스가 왔다. 승차 10분 후에 東行庵 입구 驛에서 하차했다(요금 280엔).

동행교를 건너 5분쯤 걸어가니 찻집을 겸한 식당이 보여 조금 이른 요기를 했다. 찻집 길 건너편에 「奇兵隊의 墓 입구」라는 안내판이 보인다. 「입구」로부터 여러 가족묘를 거쳐 가파른 산길 400m 쯤을 올랐다. 여기에 기병대원 10여 명이 묻혀 있었던 「터」라고 적혀 있는 안내판 하나만 있을 뿐 무덤이나 비석 같은 것은 없었다.

下山해 개울을 따라 반대편 길을 2~3분 걸으니 東行庵이 보인다. 신사쿠의 애인 오우노가 출세한 신사쿠의 옛 부하 야마카다 도모유키 및 이노우에 가오루 등의 도움으로 지은 암자다. 암자를 품은 淸水山(청수산)의 경관이 뛰어나다. 1867년 신사쿠의 장례식 때 시모노세키 주민 3000명이 이곳까지 25km를 관솔불을 들고 상여의 뒤를 따라 걸어온 곳이다.

東行庵을 끼고 東行기념관부터 들렀다(입장료 200엔). 신사쿠의 일대기에 관련 자료 사진 및 소지품 등이 1·2층에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다. 기념관에서 나와 東行庵을 둘러보니까 오우노의 러브스토리가 생각났다.

오우노는 1863년 신사쿠가 기병대를 창설할 무렵에 게이샤(藝妓)로서 처음 신사쿠를 처음 만났다. 두 번째로 만난 것은 1864년 藩命에 의해 4국 연합함대와 강화 회담을 위해 신사쿠가 시모노세키에 온 때였다. 이후 신사쿠는 집을 빌려 오우노에게 첩살림을 시켰다.

오우노는 신사쿠가 조슈 번사에게 암살 위협을 받았을 때 신사쿠와 함께 오사카를 거쳐 시고쿠로 도망친 일도 있다. 신사쿠가 병상에 눕자 간호를 계속했고, 신사쿠가 죽은 후에는 이곳에 암자를 짓고 42년간 묘지기를 했다. 그녀는 1909년 8월7일에 67세로 생애를 마쳤다. 그녀의 묘는 신사쿠의 묘 옆에 자리잡고 있다.

신사쿠의 묘를 찾아 淸水山 중턱으로 올라갔다. 大小刀를 허리에 찬 사무라이 모습의 신사쿠 陶像(도상)이 보이고, 그 조금 위쪽에 東行墓가 있다. 기병대에 의해 조성된 장방형의 묘역은 비교적 넓지만, 묘석은 높이 61cm, 폭 24cm 로서 보통 사람의 묘보다 오히려 작다. 東行墓는 1934년 일본사적으로 지정되었다.

東行墓에서 내려와 오게쓰驛으로 되돌아가는 버스를 탔다. 오게쓰驛에서 시내버스로 환승해 전형적인 조카마치(城下町: 사무라이 마을)가 보존되고 있는 조후(長府)에서 하차했다. 조후 관광회관에서 1일 사용료 300엔인 대여 자전거를 타고 개울 옆으로 난 小路(소로)를 따라 500m 거리의 功山寺 앞까지 달렸다. 이곳은 신사쿠가 俗論派 정권을 타도하기 위해 1864년 11월에 民兵조직인 역사대·유격대의 80명을 이끌고 거병했던 곳이다.

절 앞에 자전거를 세워 두고 계단을 올라 산문 안으로 들어갔다. 가마쿠라 막부 시절에 창건된 佛殿(불전)은 일본 最古의 禪寺(선사) 양식으로 일본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불전 옆에는 1863년 8·18 정변 때 조슈의 존양격파를 따라 京都에서 조슈번으로 망명한 公卿 7명이 은거하던 건물이 남아 있다. 그 아래엔 「다카스기 신사쿠 回天義擧銅像」이 세워져 있다. 당시 신사쿠는 산조 사네토미 등 5卿(7卿 중 1명은 사망, 1명은 다른 번으로 망명)에게 출진의 인사를 하기 위해 이곳을 방문했다.

신사쿠는 『입으로 成敗를 말하는 것은 이미 無用의 일, 이제부터 조슈 남아의 솜씨를 보라』며 말에 올랐다. 동상은 그때 馬上의 신사쿠를 표현했다.

功山寺는 역사의 무대이다. 조슈번의 元祖 모리 모토나리(毛利元就)의 추격을 받은 오우치(大內義長)가 자결한 곳으로, 그 묘가 남아 있다. 功山寺에서 내려와 조슈번 支藩(지번)의 번주(長府毛利)의 저택에 들렀다(입장료 200엔). 대문으로 들어서면 적의 直攻에 대비하기 위한 높은 담이 正面(정면)을 가로막는 전형적인 사무라이 가옥이다. 메이지 천황의 行在所로 사용되기도 했다.

長府毛利 저택 바로 위에는 노기(乃木希典) 신사가 있다. 노기 大將은 1905년 러일전쟁 때 요동반도 끝에 위치한 러시아 요새 旅順(여순)을 함락시킨 육군대장이다. 旅順공략전에서 노기는 휘하 장병 3만 명을 戰死시키는 전략상의 오류를 범해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메이지 천황은 그런 그가 자신의 배를 가를 것을 우려해 미리 「자결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뜻을 전했다. 노기 부부는 1912년 메이지 천황이 사망한 후에야 자결했다. 성밑거리의 서부엔 家老 이상의 상급 家臣의 집이 줄지어 있다.
東行庵. 다카스기 신사쿠의 애인「오우노」가 신사쿠 死後 여승이 되어 40여 년간 신사쿠의 명복을 빌며 거처했던 곳이다. 가운데 사진 오우노. 오른쪽 사진은 시모노세키市 요시다町 淸水山에 위치한 東行(신사쿠의 아호)묘.


단노우라 砲隊의 현장

조후에서 다시 시내버스를 타고 가다 「미모수소川공원」 정류소에 하차했다. 이 공원엔 간몬해협을 향해 대여섯 개의 대형 포가 방열되어 있다. 바로 시모노세키 전쟁 때 4국 연합함대에 박살이 난 단노우라(壇之浦) 포대다. 그때 단노우라의 대포는 연합군이 전리품으로 가져 갔다. 현재 전시된 포대는 모조품이다.

이곳은 源(미나모토)씨와 平(다이라)씨가 일본천하를 놓고 사투를 벌이던 源平(원평·겐페이) 전쟁의 최후 전투였던 단노우라 해전(1185년)의 현장이기도 하다. 여기서 平씨는 멸망하고, 源씨는 일본 최초의 武家정권인 가마쿠라 막부를 개설했다.

간몬해협은 가마쿠라 막부 말기의 南北朝 전란시대에 패망한 南朝의 어린 천황 안도쿠(安德)가 母后의 품에 안겨 투신자살한 바다이기도 하다. 이로써 남조는 멸망해 북조로 통일되었다(1392년).

현재, 단노우라와 北규슈의 모지港 사이에 간몬대교가 놓여 있다. 다시 시내버스를 타고 가다가 차창 밖으로 세키간宮을 목격했다. 세키간宮은 동화책 속의 궁전처럼 아기자기한 모습이다. 처마 끝엔 金도금으로 장식해 번쩍거린다.

그럴 만한 슬픈 사연이 있다. 6세의 어린 천황이 모후와 함께 투신자살할 때 『바다 속에도 궁전이 있느냐』고 물었다. 모후는 『거기에도 용궁이 있다』며 어린 천황을 안심시켰다. 500년 후 明治정부가 남조를 정통왕조로 자리매김함으로써 세키간宮을 짓고, 그 모습을 동화 속의 용궁처럼 꾸민 것이라고 한다. 경내에 안도쿠 천황의 능도 조성되어 있지만, 그의 시신을 인양하지 못했던 만큼 假墓(가묘)일 수밖에 없다.

세키간宮 앞을 지나 바로 다음 정류소인 가라도(唐戶)에서 하차했다. 가라도에는 둘러볼 곳이 많다. 가메야마(龜山) 포대, 가메야마 神社, 舊영국영사관 등이 모여 있다, 가라도 시장 옆 쪽 음식점 2층 창가에 앉아 저녁식사를 하며 간몬해협의 빠른 물살과 대안의 北규슈 모지港을 관찰했다. 가라도 뱃머리를 출항한 쾌속선이 모지港으로 달리고 있다. 항해시간은 5분이다.

벌써 날이 어두워 미리 정해 둔 호텔 「도큐인」으로 돌아갔다. 아직도 답사하지 못한 시모노세키의 「維新回廊(유신회랑」의 주요 포인트는 하기市 답사 다음날인 9월1일로 미루었다.


아베 신조의 조부 安倍寬의 정치노선

8월31일 오전 8시16분 시모노세키驛에서 山陰本線(산음본선) 기차를 타고 하기市를 향해 출발했다. 거리는 105.3km에 불과한데 소요시간이 무려 3시간31분이 걸린다고 한다. 경유하는 모든 역에서 정차할 뿐만 아니라 코구고驛과 나가도(長門)市驛에서 기차를 바꿔 타야 하기 때문이다.

기차는 서쪽의 響灘(향탄·히비나다)을 끼고 북상한다. 響灘이라면 「울부짖는 거친 바다」라는 뜻이다. 27km쯤 달려 코구고驛에 하차했다. 이 역에서 21분을 기다려 다른 기차에 환승한 후 50여km를 달려 「나가도 市驛」에 내렸다. 나가도市역에서 무려 43분간 기다려야 하기行 기차를 탈 수 있다.

驛舍 바깥으로 나가 나가도市의 평범한 역전 동네를 잠시 둘러보았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나가도市는 신임 일본 수상으로 유력한 아베 신조의 고향이다. 이력서上 아베 신조의 본적지는 「大津郡 日置村」으로 되어 있다. 大津郡은 현재의 나가도市다. 그렇다면 이제 신조의 뿌리를 살펴볼 차례다.

신조의 아버지 신타로(晉太郞)의 비서를 지냈던 屋田齊씨에 의하면, 신조는 외조부인 기시 노부스케의 정치 DNA를 계승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祖父 아베 칸(安倍寬)의 정치 DNA도 계승하고 있다(大木英治 著 「安倍家-3代 아베 신조」에서).

칸은 1921년 東京帝大를 졸업하고 자영사업을 시작하려고 했다. 아베家는 素封家(소봉가: 벼슬은 없으나 재산가)였다. 원래 大庄屋(대장옥: 창고업)과 술·醬油(장유)의 양조업을 겸했다. 논밭 18정보와 산림 100여 정보도 보유했다. 하지만 칸의 사업자금을 염출할 만한 형편은 아니었다.

칸은 그의 처가를 찾아가 사업자금을 확보했다. 그의 처 시즈코(靜子)는 하기 출신의 육군대장 오시마(大島義昌)의 외손녀이다. 칸은 東京으로 올라가 긴자(銀座)에다 三平商會를 열었다. 업종은 外製 자전거의 수입·판매였다. 요즘의 고급 외제 승용차 수입·판매업에 상당한 것이다.

값비싼 외제 자전거는 잘 팔리지 않았다. 경영은 금세 악화되었다. 칸은 또다시 처가인 오시마家에다 사업자금을 차용했다. 칸은 차금을 갚으려고 안간힘을 썼으나 1921년 東京대지진 이후의 불경기로 결국 도산하고 말았다.

얼마 후 시즈코의 친정인 오시마家에서 차금을 갚으라는 연락이 왔다. 이것이 뜻밖에 파문을 일으켰다. 早失父母(조실부모)한 칸을 양육했던 伯母(백모) 「요시」가 발끈한 것이다.

『아베家의 사람이 돈을 빌리고도 갚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말인가? 남편의 일을 의심하는 집안의 딸은 믿을 수 없다』

이렇게 백모 「요시」는 시즈코에게 이혼을 강요했다. 그때 시즈코는 아들 신타로를 회임하고 있었다. 신타로는 1924년 4월 東京 신주쿠(新宿) 日赤병원에서 태어났다. 백모 요시는 上京해 병원에서 신타로를 품에 안고 日置村으로 데려갔다. 시즈코는 이혼을 당한 후 친정으로 돌아갔다.

그 후 시즈코는 금융인인 니시무라 겐조(西村謙三)와 재혼해 아들 마사오(正雄)를 낳았다. 니시무라 마사오는 일본흥업은행 頭取(두취: 행장)를 역임한 재계의 거물로서, 지난 8월1일 심부전증으로 급서했다(향년 73세).


아베家 3代의 직업은 政治

아베 칸-신타로 父子는 日置村에서 살았다. 칸은 1919년 日置村의 촌장이 되었다. 「農村塾(농촌숙)」을 개설해 마을 청년들을 가르쳐 「지금의 쇼인(松陰) 선생님」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1935년에는 야마구치 縣의회의원으로, 2년 후인 1937년에는 무소속 후보로 출마해 중의원의원으로 당선되었다.

1941년 12월8일, 일본 해군의 하와이 진주만 기습에 의해 태평양전쟁이 발발했다. 1942년 4월, 소위 「翼贊(익찬)선거」가 시행되었다. 모든 정당이 해산되고, 大政翼贊會(대정익찬회)로 통일되었다. 그러나 칸은 도조 히데키(東條英機) 등 군벌에 대한 비판의 표현으로서 무소속·非추천으로 입후보해 중의원의원으로 재선되었다.

1945년 8월15일, 日帝가 패망했다. 군벌주의를 비판해 온 아베 칸으로선 得意의 시대가 도래하는 듯했다. 그는 동지들과 함께 日本進步黨을 결성했다. 그러나 1946년 1월 아베 칸은 심장마비로 급사했다.

아베 신타로는 고향 日置村의 이시하라(石原)소학교-야마구치中-오카야마(岡山) 소재 6高를 거쳐 東京帝大에 합격했다. 그러나 바로 그 직후인 1944년 10월, 신타로는 학도동원으로 해군 사가(滋賀)항공대(제15기 예비학생)에 입대했다. 少尉(소위) 후보생 신타로는 특공대에 지원했다.

1945년 8월15일 정오, 신타로는 항복을 고하는 이른바 「천황의 玉音방송」을 나고야(名古屋)의 東海해군항공대 明治基地에서 청취했다. 신타로는 日置村으로 귀향했다. 1946년의 戰後 첫 총선거에 출마한 부친 칸의 선거운동을 하고, 東京大 법학부에 복학했다.

1949년 4월, 신타로는 마이니치(每日)신문사에 기자로 입사했다. 1년 후 정치부 기자로 근무하면서 기시 노부스케의 장녀 요우코(洋子)를 만났다. 신타로와 요우코는 1951년 5월 결혼했다. 1년 후인 1952년 「A급 전범 용의자」 기시 노부스케는 「공직추방」에서 풀려 정계에 복귀하게 되었다. 요우코와 신타로는 기시의 선거구인 야마구치縣의 이와쿠니(岩國)市로 내려가 선거운동을 지원했다. 기시는 1953년 중의원 총선에서 당선했다. 1955년 「보수합동」의 성립으로 自民黨이 결성되었다. 하토야마(鳩山) 수상의 퇴진으로 自民黨 총재 선출 전당대회가 열렸다.

총재경선에서 기시는 불과 7표 차로 이시바시 단잔(石橋湛山)에게 석패했다. 신타로는 마이니치신문사에서 퇴사해 이시바시 내각의 외무대신으로 입각한 기시의 비서관이 되었다.

이시바시 수상은 지병으로 재임 겨우 65일 만에 쓰러졌다. 1957년 2월25일 기시 내각이 성립되었다. 기시 총리는 1958년 정초부터 정권 안정을 위한 「解散(해산)총선거)」를 기도했다. 그해 5·22총선에서 신타로는 自民黨 공천으로 시모노세키 선거구에서 중의원에 당선되었다.

신타로와 요우코의 차남 신조는 1954년 東京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부터 기시 수상의 사택에 자주 놀러 다녔다.

기시 노부스케는 기시家를 이을 親손자를 두지 못했다. 1959년 4월 아베 신타로의 셋째 아들 노부오(信夫)가 태어났다. 노부오는 노부스케의 소원에 따라 기시家의 양자로 들어갔다. 훗날의 얘기지만 노부오는 2004년 참의원 선거 自民黨 공천으로 출마해 당선했다.
아베 신조(위 맨왼쪽)에게「정치 DNA」를 물려준 3人. 오른쪽부터 신조의 조부 安倍寬, 외조부 岸信介, 부친 安倍晉太郞. 아래쪽 사진은「뉴스위크」誌 표지인물로 등장했던 아베 신조. 신조의 지구당 사무실 벽에 붙어 있다.


아베 신조의 교육적 배경과 政治入門

아베 신조는 1961년 4월 私立 세이케이(成蹊·성혜)소학교에 입학했다. 이후 신조는 세이케이中-세이케이高를 거쳐 역시 同系인 세이케이大에 진학했다. 당시 세이케이에 대한 세간의 평가는 소학교 A급, 중학교 B급, 고교 C급, 대학 B급이었다.

소학교부터 대학까지 같은 부지에 있는 세이케이 학원은 학생 한 사람 한 사람의 개성을 살리고, 인격을 연마시킨다는 교육방침을 내걸고 있다. 체험 및 실적을 중시하는 校風(교풍)이다.

고교 시절 여름방학 때 신조는 친구 6명과 함께 야마구치縣을 여행했다. 신조 일행은 야마구치의 명소와 공장을 둘러보았지만, 친구들은 큰 감명을 받지 못했던 것 같다. 그러자 신조는 『좋다, 그렇다면 이제는 다카스기 신사쿠의 墓다』라며 친구들을 이끌고 자동차 편으로 시모노세키市 요시다町에 위치한 淸水山 東行庵을 향해 달렸다고 한다.

1977년 세이케이大 법학부 정치학과를 졸업한 신조는 어학연수를 위해 도미해 캘리포니아大 헤이워드校와 롱비치校에 다녔다. 합계 9개월의 어학연수 후 신조는 南캘리포니아大 정치학과에 입학했다. 그러나 애당초 학위를 취득할 계획은 아니었다고 한다.

신조는 1979년 2년간의 유학생활을 마치고 귀국했다. 신조는 부친 신타로의 권유와 추천에 의해 고베(神戶)제강 산하 조후(長府)제조소에 입사했다.

신조는 아버지 신타로가 왜 시모노세키市 조후에 소재한 고베철강 長府제조소에 입사시켰는지, 그 의도를 잘 알고 있었다. 아버지의 선거에 플러스가 되고, 훗날 신조가 부친의 뒤를 이을 때 고베製鋼 사원들의 지지를 받기 위한 布石이었다.

1982년 11월27일, 아베 신타로는 나카소네(中曾根) 내각의 외무대신에 취임했다. 그 무렵엔 아베家에서는 이미 신조를 후계자로 결정하고 있었다. 신조는 그해 12월 외무대신 비서관이 되었다. 그것은 신조의 정계 진출을 위해 마련된 디딤돌이었다.

1987년, 「포스트 나카소네」를 놓고 다케시타 노보루(竹下登)와 아베 신조가 경쟁했다. 이때 총재 경합자 3인을 만나 擇一의 전권을 위임받은 나카소네 수상은 다케시타를 지명했다. 이로써 다케시타 내각 탄생하게 되었다. 신타로는 黨3役 인사에서 간사장에 취임했고, 신조는 간사장 비서가 되었다. 아베 신타로는 1991년 5월 정차자금 스캔들인 「리쿠르트 사건」에 연루되어 정치적 궁지로 몰린 가운데 肝(간)부전증으로 사망했다(향년 67세).

부친의 선거구를 물려받은 아베 신조는 1993년 7월 중의원 선거에서 처음 당선되었다. 그 후 그는 빠른 속도로 출세했다. 2000년 7월, 모리 요시로(森喜郞)내각의 관방 副장관에 취임, 2002년 9월에는 日·北 정상회담을 위해 고이즈미 수상을 수행해 평양에 들어가 치밀한 사전준비와 임기응변으로 金正日로부터 북한의 일본인 납치에 대한 사과를 받고 납북자를 일본으로 귀환시키는 데 결정적인 공을 세웠다.

이후 아베 신조의 인기는 수직상승했다. 2003년, 自民黨은 다음해 중의원 선거의 승리를 위해 신조를 간사장으로 내세웠다. 2005년 10월에는 제3차 고이즈미(小泉)내각의 관방장관에 취임했다. 지난 9월1일, 아베 신조는 자민당 총재선거에 후보로 공식출마선언을 했다. 그 전날인 8월31일 현재의 여론조사에서 아베 신조는 50% 안팎의 지지율을 얻어 경쟁 후보들을 압도하고 있었다.


『조슈 남자는 강하다』
安倍晉太郞(오른쪽) 외무대신 비서관 시절의 晉三.

아베家의 고향 「나가도市역」에서 환승 기차를 기다리면서 40대 남자에게 물어보았다.

―아베 신조를 지지하십니까.

『물론입니다』

―왜, 아베 신조씨가 국민적 인기를 얻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는 일본을 자존심 있는 나라로 만들 것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아베 신조가 수상이 되면 야마구치는 8명의 수상을 배출하는 縣이 됩니다(공동 2위는 東京都와 이와테(岩手)현의 4명이다). 그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조슈(야마구치의 옛 이름) 남자는 원래 강합니다』

기다리는 마쓰다(益田: 시마네縣 소재)행 기차가 들어왔다. 이 기차를 타고 가다 중도인 東하기驛에서 내리면 된다. 28km를 36분 만에 달려 다섯 번째 역인 東하기에서 내렸다. 조그마한 역사에는 「잘 오셨습니다, 明治維新의 고향 하기(萩)」라 쓰인 홍보간판이 큼직하게 붙어 있다. 역전의 플라자 빌딩 1층에 소재한 관광안내소에 들러 유적지가 표시된 지도 한 장을 얻었다.
아베 신조와 부인 아키에.

하기 시가를 순환 운행하는 버스를 마음대로 승차할 수 있는 승차권(하루 요금 500엔)이 판매되고 있었지만, 당일치기 답사로는 예정된 유적지를 모두 둘러보기가 무리일 것 같았다. 역전에 대기 중인 택시에 승차했다(소형택시 2시간30분 대절 요금 1만1200엔).

하기市는 마쓰모토가와(松本川)와 하시모토가와(橋本川)에 둘러싸인 인구 5만의 작은 도시다. 요시다 쇼인이 태어난 집과 쇼카손주쿠(松下村塾)는 松本川의 외곽에 위치해 있다. 택시를 타면 松下村塾까지는 5분도 걸리지 않는다. 여기서 조슈번의 뿌리와 역사를 조금 짚어 볼 필요가 있다.

조슈번의 번주는 모리家이다. 戰國시대 초기에 毛利元就(모리 모토나리)란 무장이 戰國大名(전국대명: 센고쿠다이묘)으로서 두각을 나타냈다. 戰國大名은 자신의 능력으로 大名(다이묘)의 지위에 오른 인물을 의미한다. 모토나리는 中國지방(히로시마 일대)로부터 北규슈에 걸친 지역을 세력범위로 삼은 守護大名 大內(오우치)家의 部將이었다. 守護大名은 막부가 임명한 大名이다.

1551년 오우치家의 重臣 스에 하루다카(陶晴賢)가 主君 오우치 요시다카(大內義隆)를 쳐서 멸망시키는 하극상이 일어났다. 모토나리는 1555년 10월 安藝의 이츠쿠시마(嚴島) 전투에서 하루다카를 멸망시키고, 戰國大名으로 대두했다.


조슈번이 도쿠가와 幕府를 증오한 까닭
모리家가 200여 년간 조슈번 36만 石을 지배했던 하기城 터.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의 시대에 모리家는 모토나리의 손자 테루모토(輝元)가 藩主였다. 테루모토의 두 숙부인 키쓰가와 모토하루(吉川元春)와 고바야카와 다카가게(小早川隆景)는 名將으로서 「毛利의 兩川」이라고 불렸다.

처음에 모리家는 오다 노부나가를 적대시했지만, 오다의 死後에 도요토미 히데요시와는 화해해 히데요시 정권 아래 安藝·備後·周防·長門·出雲·石見·오키 등 7개國과 伯耆(호키)의 3개 郡 및 備中의 절반 등 120石을 지배하는 西일본 최대의 다이묘가 되었다.

1592년 4월, 히데요시가 15만 대군으로 조선을 침략(임진왜란)할 때 모리 테루모토는 제3군의 대장으로서 3만명의 병력을 동원했다. 조슈번은 최대 병력을 파견한 藩이었다. 특히 모리 테루모토의 叔父 고바야카와 다카가게는 1593년 1월 벽제관 전투에서 李如松이 거느린 明지원군을 대파했다.

히데요시 시대에 잘 나가던 모리家는 히데요시 死後에는 기세가 꺾였다. 일본사상 최대 규모였던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테루모토는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의 적인 西軍의 총대장이 되었기 때문에 패전 후 이에야스로부터 엄청난 불이익 처분을 받았다. 모리家의 영지는「7개국+α」로부터 「防長 2개국」으로, 石高는 120만 석으로부터 36만 석으로 대폭 삭감되었다.
조슈번 開府(1604년) 400주년을 맞았던 2004년의 하기市 모습. 숲으로 둘러싸인 사진 상단 돌출부에 조슈 번주의 居城 터가 있다.

세키가하라 전투가 벌어진 것은 1600년 9월15일. 아직 벼베기를 시작하기 전이었다. 그때 「防長 2개국」으로의 이주를 명받았다는 것은 120만 석 마이너스 36만 석, 즉 84만 석의 예정 수확의 급격한 감소를 의미한다. 이사 비용도 마련할 수 없게 되어 모리家는 대대로 충성을 바친 家臣團에 대해 구조조정을 할 수밖에 없었다. 남은 가신단의 祿高(녹고)는 평균 80% 삭감되었다.

녹고 100석이었던 家臣은 이로부터 20석으로 살아가야만 했기 때문에 도쿠가와 막부를 증오하는 藩風은 당연한 일이었다. 다음은 傳說이긴 하지만, 조슈번의 분위기를 짐작케 하는 일화이다.

조슈의 번주와 그 家臣들은 1월1일 新正 의식 때 반드시 家臣 대표와 번주 사이에 이런 문답을 나누었다.

『금년에는 도쿠가와를 치실 것입니까?』

『아니, 금년엔 보류해 두지』

「언젠가는 친다」는 뉘앙스가 묻어 있는 主從(주종) 간의 수작이다. 이럴 만큼 모리家에 있어 反도쿠가와 감정은 뿌리가 깊었다. 그러나 조슈번의 反幕은 막부의 힘이 강할 때는 표면화할 수 없었다. 그러나 幕末의 변혁기에 접어들자 조슈의 反幕 감정이 화산의 마그마처럼 폭발했던 것이다.

필자가 대절한 택시는 「幕末志士의 스승」이란 요시다 쇼인이 설립했던 松下村塾 앞에 정차했다. 그렇다면 도막의 이론을 정립한 쇼인의 출신성분부터 알아볼 필요가 있다.


「幕末志士의 스승」요시다 쇼인의 到幕 논리
吉田松陰이 제자들을 가르쳤던「松下村塾」.

쇼인은 1830년 8월4일, 조슈藩 하급 사무라이인 스기 유리노스케(衫百合之助)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런데 숙부인 요시다 다이스케(吉田大助)의 양자가 되는 바람에 「요시다 도라노지로(吉田寅次郞)」라는 성명을 얻었다. 쇼인(松陰)은 그의 아호이다. 스기家는 녹봉 26石, 요시다家는 57石6斗였다. 요시다家는 야마카(山鹿)流의 兵學을 가르치는 집안으로서, 조숙한 수재였던 쇼인은 나이 10세에 벌써 藩校 명륜관에 출강했고, 11세 때는 번주 모리 다카치카(毛利敬親) 앞에서 「武敎全書」라는 이름의 병학서를 강의했다.

1849년, 20세 때 藩命에 의해 조슈藩領의 해안방어의 실상을 조사하고부터 쇼인은 조슈번이 기대하는 인재가 되었다. 쇼인의 특징 중 하나는 적극적으로 선배 학자들을 만나러 가서 견문을 넓히는 점이었다. 학자들의 저서가 요즘처럼 쉽게 입수되지 않았고, 더구나 藩 밖으로 나가기가 용이하지 않은 시대였다.

그의 지식욕은 대단했다. 점차 그는 조슈라는 좁은 울타리 속에 가둬 둘 수 없는 사람으로 변모해 갔다. 쇼인은 1851년 4월부터 6개월간 에도에서 유학했지만, 같은해 12월에는 번의 허가도 없이 도후쿠(東北) 지방을 여행했다.

東北 나들이는 단순한 병학자로부터 尊王攘夷 사상가로 거듭 태어나는 계기가 되었지만 그것은 脫藩, 즉 망명행위였다. 쇼인은 사무라이籍(적)이 삭제되어 祿(녹)이 몰수되는 처벌을 받았다.

그러나 藩主 모리 다카치카는 쇼인의 직선적인 성격과 배움에의 열정을 기특하게 보았다. 1853년 1월, 쇼인은 10년간 전국 遊歷(유력)을 허가받고 재차 에도로 올라갔다. 그 5개월 후에 발생한 사건이 미국의 東인도함대 사령관 페리의 우라가(浦賀) 내항이었다.

쇼인은 「黑船(흑선)」을 관찰하기 위해 우라가로 달려갔지만,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6월12일, 페리는 지참했던 미국 대통령의 국서에 대한 회답을 다음해에 받겠다고 막부에 통고한 후 오카나와로 출항해 버렸던 것이다.

우라가로 달려온 쇼인은 충격을 받았다. 막부의 경비병이 사기가 낮은 弱兵이란 사실 때문이었다. 쇼인은 내년에 페리가 다시 오면 막부는 궤멸한다고 판단했다.

그러면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쇼인은 절박한 심경으로 「將及私言(장급사언)」이란 제목의 보고서를 써서 藩主 다카치카에게 제출했다. 그는 이 보고서에서 인재등용, 병력충실 등의 구체적 대책을 제시했다. 이 보고서 중 다음 구절은 그의 존왕양이 사상이 잘 드러나 있다.

「天下는 天朝의 天下이다. 天下는 天下의 天下이지 막부의 私有가 아니다」

이것은 幕藩체제의 전면적 부정이었다. 조슈번은 국가존망의 위기에 독자적 대책을 수립해 그것에 의해 日本이라는 국가를 지도하는 입장으로 도약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外夷를 제압하려면 먼저 外夷를 알아야 한다』
「幕末志士의 스승」요시다 쇼인(吉田松陰).

그러나 조슈 藩廳은 이 의견을 채용하지 않았다. 쇼인은 크게 실망했다. 페리함대는 1854년 1월 재차 에도灣(지금의 東京灣)의 시모다(下田) 앞바다에 침입해 대포를 펑펑 쏘면서 막부의 「회답」을 요구했다. 이른바 砲艦外交(포함외교)였다. 그해 3월, 쇼인은 동지 가네코(金子重之輔)와 함께 소형 나룻배를 저어 가 페리 함대의 미시시피號 갑판에 올라갔다.

『무릇 外夷(외이)를 제압하려는 者는 먼저 夷情(이정)을 살펴야 한다』라는 말을 신봉한 그는 적을 알기 위해 해외로 밀항하려고 작심을 한 것이다.

그러나 쇼인은 현실을 몰랐다. 일본과의 수교를 요구하는 페리함대가 일본정부의 허가 없이 떠돌이 사무라이를 승선시킬 리 만무했다. 이런 면으로 보면 쇼인은 리얼리스트가 아니라 로맨티스트였다.

미국 함대에서 쫓겨나 美 해군 보트를 타고 시모다로 돌아온 쇼인과 가네코는 막부의 官憲에 자수했다. 4월15일 에도의 傳馬町 감옥에 수감된 둘의 신병은 그 후(10월24일) 조슈번에 인계되었다.

해가 바뀌어 1855년 1월, 가네코는 결핵을 앓아 25세의 나이로 사망했지만, 쇼인은 그해 12월 그의 본가인 스기家로 돌아가 근신하도록 조치되었다.

幕藩체제에 회의적이었던 쇼인은 막부는 쇄국을 관철할 능력이 없다고 판단했다. 그는 「講孟餘話(강맹여화)」라는 저술을 통해 막부의 무능을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

「征夷大將軍(정이대장군: 쇼군의 정식명칭)이라는 것은 오랑캐를 정벌하라고 조정으로부터 임명을 받은 직책이기 때문에 無力한 쇼군과 막부는 즉각 폐지돼야 한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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