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조선 기사

鄭淳台 기자의 역사 현장 답사 -「明治維新의 진원지」시모노세키·하기(2)

요시다 쇼인(吉田松陰)의 征韓論
아베 신조(安倍 晋三)의 對韓觀

글 정순태 기자  2006-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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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3년 미국 東印度(동인도)함대사령장관 페리 제독의 砲艦外交(포함외교)는 일본 지식인에게 국가적 위기를 한층 절박한 것으로 인식시켰다. 특히, 히라다(平田)派 國學 및 後期 미도(水戶)學이란 國粹主義的(국수주의적) 尊王사상에 의해 배양된 攘夷(양이)의 바람이, 西洋 열강에 굴복한 幕府(막부)의 허약외교에 대한 비판을 한층 고조시켰다. 이런 상황에서 국가통합의 새로운 基軸(기축)으로서 天皇의 존재가 急부상해 가지만, 그것은 어이없게도 征韓論(정한론)의 대두를 동반하고 있었다.

히라다派 國學과 후기 미도學에 대해선 뒤에서 재론하겠지만, 여기서는 먼저 요시다 쇼인(吉田松陰)의 無知했던 역사의식부터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明治維新(명치유신)의 주체세력인 조슈 인맥이 쇼인으로부터 사상적 세례를 직접 받은 그의 제자들인데다 新任 일본 총리 아베 신조(安倍晉三)조차 『나 자신, 吉田松陰 선생님의 가르침과 사고방식에 공감하는 부분이 많이 있다』고 밝힌 바 있기 때문이다.
요시다 쇼인의 사상을 전파하는「月刊 松下村塾」창간호(2004)에 실린 아베 신조의「應援 메시지」.

페리의 공갈에 굴복해 幕府가 불평등조약을 체결하는 상황에서, 요시다 쇼인이 「敵情(적정)탐사」를 위해 에도(東京)灣 입구의 요충 시모다(下田)로부터 密航(밀항)을 기도하다 실패하고 罪囚(죄수)가 된 사실은 이미 지난 호에서 살폈다. 그때의 옥중에서 쇼인은 다음 내용의 편지를 그의 동지들에게 보냈다.

<魯(러시아)·墨(미국)과 강화를 했지만, 우리가 이를 결연히 파기함으로써 夷狄(이적)에게 信을 잃어서는 안 된다. 다만 章程(장정)을 嚴히 하고 信義를 두텁게 하면서, 그 사이에 國力을 배양해 取하기 쉬운 朝鮮·滿洲·支那를 복종시키고, 열강과의 교역에서 잃은 國富와 토지는 鮮·滿에서 보상받아야 한다>

『歐美 열강과의 조약은 지키고, 그 불평등조약으로 인한 경제적 손실은 조선 및 만주에서의 영토 확장으로 만회해야 한다』는 쇼인의 아시아 침략 구상은 후일 帝國日本의 국책으로 현실화된다. 다만 쇼인의 征韓論에는 약간의 전제 조건이 붙어 있기는 했다.

쇼인은 『朝鮮과 滿洲를 손에 넣으려면 艦(함)이 아니면 不可하다는 것이 나의 本志인데, 이는 天下萬歲(천하만세)를 이어 가야 할 業(업)이다』라고 했던 것이다. 즉, 조선·만주에의 침략구상을 견지하면서도 『지금은 아직 국력이 이에 미치지 못한 즉 巨艦을 보유해야 할 것』이므로 그 실시는 잠시 유보해야 할 것이라는 뜻이다.

쇼인은 일본의 사무라이가 페리의 위압에 대해 싸움 한번 벌여 보지 못하고 굴복하고 만 것은 그 마음(心)이 바르지 않고, 뜻(志)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이러한 情況(정황)에서 긴요한 과제는 대포 및 군함을 만들기에 앞서 志를 단련하고, 氣를 키우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 쇼인의 논점이었다.
요시다 쇼인像(京都대학 부속 도서관 소장). 그는 明治維新의 주체세력을 육성한 國粹主義 사상가였다(사진 왼쪽). 1854년 3월 시모다(下田) 감옥에 수감된 쇼인. 6개월 후 그는 하기(萩)의 野山獄으로 이감되었다(사진 오른쪽).


잘못된 역사의식의 출발점
明治維新의 주체세력이 육성된 요시다 쇼인의 松下村塾(쇼카손주쿠).

그는 특히 「敵을 알기」 이전에 「자기를 아는」 것이야말로 攘夷의 주체로서 자기를 천명·확립하는 것이며, 무엇보다 優先(우선)되지 않으면 안 될 과제라고 강조했다.

이어 그것은 『우리 國體가 외국과 다른 所以』를 명확히 하는 것에 의해 성취된다고 했다. 日本이 日本다운 까닭, 國體의 究明(구명)에 쇼인은 자기 나름으로는 골몰했다. 그리고 쇼인은 日本의 독자성을 中國과의 對比로 해명하려고 애썼다.

그 결과, 易姓革命(역성혁명)으로 왕조를 바꿔 온 中國에 대하여 萬歲一系(만세일계)의 천황이 중심이 되는 일본의 「우월성」을 강조하려 했다. 즉, 「天下는 天下의 天下」라는 중국에 대하여 「天下는 一人의 天下」인 일본이 비교우위에 있다는 발상이었다. 「人民이 있은 후에 天子가 있다」는 中國에 대하여 일본 本然의 모습은 「神聖(신성)이 있은 연후에 蒼生(창생)이 있다」, 즉 천황이 존재하고 나서 인민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中國에 있어서 신하는 자기를 인정해 주는 主君을 구해 거취를 정하는 「품팔이 奴婢(노비)」인 것에 비해 일본의 경우는 譜代(보대)의 家臣이고, 주인이 죽으라고 하면 흔쾌히 죽는, 절대적 君臣관계라고 했다. 이것은 앞서 萬歲一系의 천황이 영원불변으로 통치하고 있는 것으로부터 유래한다는 것이다.
쇼인이 野山獄에서 풀려나와 幽閉되었던 그의 生家.

쇼인은 古代 한반도와의 關係史에 관한 한 픽션에 불과한 「古事記」와 「日本書紀」의 맹신자였던 것 같다. 「古事記」와 「日本書紀」는 신라·백제·고구려의 先進性에 열등감을 가진 왜국의 官邊(관변)학자가 국수주의적 史觀(사관)에서 서술한 史書임은 오늘날 일본 사학계에서 상식화되어 있는 사실이다. 「古事記」 등을 편찬한 관변학자들은 신라의 삼국통일에 惡(악)감정과 亡國의 슬픔을 품은 백제의 亡命(망명) 지식인들이었다.

그러나 이런 소설적 史書를 비판적으로 읽을 만한 능력이 없었던 쇼인으로서는 國體가 顯現(현현)해 천황 親政(친정)이 시행되었던 일본의 古代에 있어서 조선의 諸國(가야·신라·백제·고구려)은 천황에게 朝貢(조공)을 했는데, 國體의 쇠퇴와 함께 「朝鮮 諸國」이 교만해지게 되었다고 믿었다.

쇼인은 國體가 손상된 武家政權期(도쿠가와 幕府 시절)에 있어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조선 정벌이 『神聖의 道에 부합하는 것을 알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이어 쇼인은 『神功皇后(신공황후)나 히데요시야말로 皇道(황도)를 밝게 하고 國威를 신장한 것으로서 「神州의 光輝(광휘)』라고 稱揚(칭양)했다. 征韓은 「神聖의 道」이고, 「皇道」를 명확하게 한 것, 「立國의 體(체: 본질)」에 合致(합치)되는 것으로서 이념화했던 것이다.
松下村塾의 내부.

오늘날 일본 사학계에서 「神功皇后가 三韓을 정벌했다」는 허구의 기록을 믿는 학자는 거의 없다. 히데요시는 아직도 일본에서 대중적 인기를 누리는 역사인물인 것은 사실이지만, 양심적인 학자의 판단으로는 「리얼리티가 없는 妄想家(망상가)」일 따름이다.

<疆域(강역)을 소중히 하고 조약을 嚴히 함으로써 二虜(2로: 미국과 러시아)를 羈?(기미: 制御함)하고, 그 틈을 타 蝦夷(하이: 北海道)를 개간하며 琉球(유구: 오키나와)를 손에 넣고, 朝鮮을 取하고, 滿洲를 꺾고, 支那를 누르고, 印度에 臨(임)함으로써 進取의 勢를 펴고, 이로써 退守(퇴수)의 기반을 굳히고, 神功과 豊國(풍국: 히데요시의 나라를 의미하는 듯함)이 아직 달성하지 못한 바를 이룩해야 한다>

이런 쇼인의 관점에서 朝鮮 침략은 단순히 歐美와의 관계에서 잃었던 부분을 만회하기 위해 取하기 쉬운 곳을 取하자는 것이 아니다. 쇼인에게 있어 조선을 복속시키는 것은 天皇 중심적 日本의 본 모습, 國體의 불가결한 일환이었다. 따라서 征韓은 日本人다운 것, 代를 이어서 추구해야 할 숭고한 사업이라고 했다. 國體論에 의해 이념화된 조선침략론, 그것이 바로 征韓論인 것이었다.


「감옥을 강의실로 만든」 吉田松陰

신임 일본 총리 아베 신조는 일찍이 『새로운 가치관의 창출이 필요한 지금의 시대야말로 吉田松陰 선생의 松下村塾이 신선하게 느껴진다』(2004년 10월27일 발행 「月刊 松下村塾」의 격려사 중에서)고 밝힌 바 있다. 그렇다면 松下村塾(송하촌숙·쇼카손주쿠)는 어떻게 개설·운영되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쇼인은 밀항미수罪로 野山獄(야산옥)에 수감되어 있을 때(1854년 10월)부터 동료 囚人(수인)들을 가르쳤다. 이런 면에서 보면 쇼인은 타고난 교육자라고 할 수 있다. 조슈번의 野山獄은 사무라이 신분의 감옥으로서, 오늘날의 교도소와는 달리 엄격하게 관리되지는 않았다.

囚人들은 그 가족이나 친척의 요청에 따라 수감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결국, 가족이나 친척이 집안 내부의 「말썽꾼」이나 「위험분자」를 세상에서 격리시키기 위해 수감을 요청한 것이다. 당시 일본은 엄혹한 連坐制(연좌제) 사회였다. 따라서 囚人들 스스로는 죄의식이 없었지만, 언제 출옥할지 알 수 없었던 만큼 절망적 상태였다.

쇼인은 囚人들을 위해 우선 하이쿠(俳句·배구: 일본의 短型詩)와 書道(서도) 공부 모임을 열었다. 이어 「孟子」의 강의를 시작했다. 이것이 후일 「講孟余話(강맹여화)」로 정리되었다. 출옥 후 松下村塾의 助敎授(조교수)가 되는 도미나가(富永有隣)도 여기서 만났다. 간수들도 쇼인의 강의를 들었다.

나중에 쇼인의 애인이 되는 다카스 히사코(高須久子)도 옥중에서 만났다. 사무라이였던 남편이 죽은 후 사미센(三味線: 일본 전통 현악기)에 취미를 붙여 사미센의 선생을 집에 불러들였는데, 이런 행실을 염려한 친척들의 요청에 의해 野山獄에 입옥된 여성이었다.

野山獄에 수감된 쇼인에 대해 「처벌 수준이 너무 엄하지 않느냐」 하는 의견이 藩內에 나돌게 되었다. 쇼인의 장래에 기대를 걸고 있던 藩主 모리 다카치카(毛利敬親) 역시 그러했기에, 조슈번은 『병에 걸려 自家(자가) 치료가 필요하다』는 이유로 쇼인을 출옥시켰다.

본가인 스기(杉)家의 「幽人室(유인실)」로 주거가 한정된 쇼인은 우선 친척들을 상대로 「孟子」 강의를 출옥 후 3일째(1855년 11월17일)부터 재개했다. 幽人室에서의 「孟子」 강의는 단순한 句文의 해설이 아니라 쇼인의 독자 해석으로 「재미있다」는 소문이 하기(萩) 城下로 번져나갔다.

그때 쇼인의 숙부 타마키 분노신(玉木文之進)이 열었던 松下村塾은 이웃에서 塾을 운영하던 구보(久保五郞左衛門)라는 사람이 그 간판을 승계하고 있었다. 그러나 쇼인의 강의를 구보가 청강함으로써 쇼인은 자연스럽게 塾主가 되었다.
쇼인이 동료 죄수들에게「孟子」를 강의했던 野山獄 터. 野山獄은 松下村塾의 前身이었다.

여기서 어린 시절의 쇼인에게 「조기교육」을 베풀었던 쇼인의 숙부 타마키 분노신(1810~1876)이란 인물을 좀 짚어볼 필요가 있다.

쇼인의 아버지 스기 유리노스케(杉三百合之助)의 첫째 동생인 다이스케(大助)는 藩의 兵學 사범 요시다(吉田)家의 養子로 들어갔다. 다이스케에게는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요시다家와 兵學을 잇기 위해 쇼인을 養子로 맞았다. 그러나 쇼인은 여섯 살 때 養父 다이스케가 사망했기 때문에 山鹿流(야마카류) 병학 師範(사범)의 가문을 잇게 되었다. 여기서 스기의 둘째 동생 타마키 분노신(玉木文之進)이 등장한다.

쇼인은 그때까지 親父로부터 「四書五經」 등을 배우고 있었다. 다이스케의 제자이기도 했던 文之進은 쇼인을 훌륭한 兵學者로 키우는 것이 형이자 스승인 다이스케에게 보답하는 도리라고 믿고 여섯 살짜리 조카 쇼인에게 스파르타式 교육을 강행했다. 그 스스로 개설했던 松下村塾에 쇼인을 기숙시키고 하루라도 빨리 요시다家의 堂主에 걸맞은 인물로 키우려고 면학을 독려했던 것이다.

그 결과, 쇼인은 10세 때(1839년) 조슈번의 교육기관 明倫館(명륜관)의 교단에 섰고, 11세 때는 藩主 다카치카와 많은 家臣들 앞에서 「武敎全書(무교전서)」 戰法編을 강의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날로부터 하기 城下에는 「마쓰모토(松本)村에 天才가 났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松下村塾의 교육기본과 敎授 방식

쇼인은 松下村塾에서 조슈번의 자제들을 교육하면서 「討幕(토막)사상」을 전파했다. 쇼인이 松下村塾에서 숙생들을 가르쳤던 기간은 1856년 8월부터 1858년 12월까지 불과 2년여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도 문하생에 대한 그의 영향력은 거의 절대적이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쇼인은 『이곳 마쓰모토村으로부터 많은 인재가 나올 것』이라고 예언한 바 있지만, 明倫館의 前 교수였던 쇼인의 밑에는 하기뿐만 아니라 조슈번 전체로부터 재능 있는 젊은이들이 모여들었다.

그는 여성스런 목소리로 『공부하세요』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하면서 철야 강의도 서슴지 않았다. 이렇게 열강을 하고 난 다음 날 아침엔 강의실 구석에 곯아떨어져 있는 그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고 한다.

쇼인의 교육기본은 「魂(혼)과 魂을 통한다」는 것이었던 만큼 村塾에 들어오면 신분의 차이가 없었다. 상급 사무라이도, 아시가루(足輕·족경: 졸병)도, 平民도 차별 없는 교육을 받았다.

「학문이라는 것은 출세를 위한 것이 아니라, 시대를 알고, 나라를 위해 도움이 되는 힘을 기른다」-이것이 쇼인의 교육방침이었다. 일방적으로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함께 문제를 생각해 간다는 모습이 젊은이들의 마음을 강렬하게 끌어당겼다. 쇼인은 塾生들과 함께 밭일을하는 등 몸과 마음의 兩面을 교육했다.

松下村塾에는 정해진 시간표가 없었다. 塾生이 오면 수업이 시작되어 일대일 교육을 하고, 숙생들이 모이면 강론을 했다. 강의 수업은 실내에서, 議論·역사·독서 등은 야외에서 지도하기도 했다.

숙생은 통학 가능한 하기 城下 거주 무사계급이 많았고, 松本村에 사는 숙생도 26명이나 되었다. 수는 적지만, 멀리서 오는 숙생도 있었다. 통학이 어려운 숙생은 城下에 하숙하든지, 村塾에서 기숙하기도 했다.

수업은 쇼인뿐만 아니라 助敎授들도 맡았다. 쇼인이 野山獄에 수감되어 있을 때 알게 된 도미나가(富永有隣), 쇼인의 4촌인 구보(久保淸太郞), 숙생 중 최고 우등생인 구사카 겐즈이(久坂玄瑞) 등이 助敎授의 역할을 했다.


정보의 중요성 강조

松下村塾의 기둥에는 「飛耳長目帳(비이장목장)」이라는 공책이 걸려 있었다. 쇼인이 교류하는 사람 및 오사카를 다녀오는 상인 등을 통해 수집한 정보를 기록해 두는 것이다. 이로 인해 쇼인은 현재 세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나 그 구체적 내용을 시골 구석인 하기에 있으면서도 파악하고 있었다. 숙생에게 정보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숙생들에게 정보수집을 명하기도 했다.

조슈번에서는 쇼인의 의견을 받아들여 松下村塾의 숙생 4명을 포함한 6명을 정보수집을 위해 京都에 파견했다. 쇼인이 추천한 젊은이가 藩의 업무로 교토(京都)·에도(江戶)에 파견근무 또는 출장을 가면, 쇼인의 정보망으로서 최신의 정보를 기록한 편지를 보내오기도 했다.

松下村塾은 간단한 구조이다. 나무로 기둥 두 개 위에 판자 지붕을 올려 만든 대문, 대나무로 대충 엮은 나지막한 담 안에 들어선 목조 건물이다. 처음에 강의실은 다다미 3개가 깔린 방 2개와, 다다미 4개 반이 깔린 방 1개 등 모두 3개였었다. 넓은 강의실이 필요할 때는 방 사이를 막고 있는 장지문을 떼내어 통방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숙생들이 늘어나자 옛 강의실에 잇대 다다미 8개짜리 방 하나를 증축했다(1858년 3월). 증축 강의실은 쇼인과 제자들이 몸소 지었다고 한다.


30세의 나이로 斬首당한 까닭

그러나 松下村塾은 곧 시대의 격랑에 휩쓸려 간다. 1858년 미국의 요구에 몰린 막부는 美日수호통상조약을 체결했다. 이에 따라 요코하마·나가사키·하코다데·니가타·효고(兵庫)의 개항과 에도·오사카의 무역 등을 결정했지만, 美國에만 유리한 불평등 조약이었다. 이어 막부는 영국·러시아·네덜란드·프랑스와도 불평등 조약을 체결했다.

이때 大老(대로: 비상시 막부 최고의 役職) 이이 나오스케(井伊直弼)는 천황의 칙허도 없이 조약에 비준했기 때문에 전국적인 비난이 거세게 일어났다. 1858년 11월, 京都에서 하기로 돌아온 松下村塾의 숙생으로부터 막부 老中(노중: 平時 막부 최고 역직이지만 비상시엔 大老를 보좌하는 副首相) 마나베(間部全勝)가 攘夷派를 엄혹하게 단속하고 있다는 정보를 들은 쇼인은 격노했다. 그는 마나베 암살 계획을 세웠다. 이 계획이 나중에 쇼인을 죽음으로 몰아넣는다.

쇼인은 조슈藩廳에 마나베 암살을 위한 무기·탄약의 제공을 요청하면서 하기에 남아 있던 숙생들로 요격대를 편성했다. 당시 에도에 있던 구사카 겐즈이 및 다카스기 신사쿠에게도 편지를 보내 계획에의 참가를 지시했다. 이에 대해 에도의 제자들로부터 「지금 움직이는 것은 時機尙早(시기상조)」라는 답장이 왔다. 쇼인은 격노했다.

더욱이 조슈번의 上役인 주후(周布政之助)도 쇼인을 방문하고 과격한 행동을 중지하라고 설득했다. 그러나 쇼인은 듣지 않았다.

쇼인의 위험한 행동에 조슈번은 松下村塾의 폐쇄를 명했다. 그리고 1858년 12월5일, 쇼인을 野山獄에 再수감했다. 쇼인이 1859년 1월1일의 궐기를 예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막부로부터 쇼인을 에도로 호송하라는 명령이 내려왔다. 쇼인이 에도로 보내지게 된 이유는 「안세이(安世)大獄」에서 옥사했던 「尊攘志士」 우메다 운빙(梅田雲湃)이 『하기에서 쇼인을 만났다』는 말을 남기고 처형되었기 때문이다. 1858년의 안세이大獄은 攘夷를 부르짖으며 막부를 흔드는 과격파를 막부의 大老 이이 나오스케가 피의 숙청을 감행한 사건이다. 오바마藩(지금의 福井縣)의 藩士 우메다는 尊王攘夷의 이데올로그 중 하나였다.

막부의 최고재판소인 評定所(평정소)가 쇼인에게 신문한 것은 1856년 겨울에 운빙과 만나 대화한 내용이 무엇인지, 그리고 京都의 皇居에 막부 타도를 선동한 편지를 투입한 사실이 있는지 하는 두 가지 질문이었다. 여기서 만약 쇼인이 발뺌을 했다면 무사할 뻔했다.

그러나 쇼인은 『막부 타도를 촉구하기 위해 公卿에게 편지를 보냈으며, 막부의 老中 마나베를 암살하려고 계획했다』고 자백했다. 評定所의 관리들은 예상도 하지 못했던 老中 암살계획에 깜짝 놀랐다. 評定所의 판결은 「死罪」였다. 판결 당일(1859년 10월27일)에 그는 참수되었다. 그때 쇼인의 나이 불과 30세였다.

쇼인은 에도로 호송되기 직전 野山獄에 갇혀 있을 때 숙생들에게 편지를 보낸 바 있는데, 그 내용을 현대문으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幕府 및 諸藩 무사들은 믿을 것이 못된다. 신분에 관계없이 풀숲과 같은 곳에 사는 민초를 일으켜 세워 체제를 바꾸어야 할 것이다>

이것이 이른바 「草莽?起(초망굴기)」이다. 쇼인의 「초망굴기」는 훗날 다카스기 신사쿠 등 숙생들에 의해 실현된다.


이토 히로부미의 행운과 出世
「周旋家」다운 정치감각으로 準사무라이도 못 되는 신분에서 幕末의 격랑을 뚫고 나와「維新 3傑」등 일류 인물들이 쓰러진 후 明治정부의 초대 수상으로 출세한 이토 히로부미.

松下村塾 주변에는 吉田松陰역사관, 松陰유묵전시관, 松陰幽囚舊宅, 그리고 松陰神社가 모여 있다. 필자는 쇼인의 삼촌이며 스승인 「玉木文之進의 옛집」 앞을 지나 요시다 쇼인(吉田松陰) 출생지로 향했다. 지금은 건물의 초석과 우물만 남아 있다. 옛집 동쪽 편에 칼 두 자루를 허리에 찬 쇼인의 동상이 서 있다. 쇼인의 출생지에서 서쪽 500m 거리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1841~1909)의 옛집이 있다. 농가의 초가집이다.

이토 히로부미는 이웃을 잘 만난 사람이다. 원래 히로부미는 최하급 사무라이인 아시가루(足輕: 졸병) 바로 아래 신분이었지만, 나이 17세 때 松下村塾의 숙생이 됨으로써 팔자를 고쳤다. 松下村塾과 그의 집은 불과 300m 거리다. 설사 그렇다할지라도 히로부미는 쇼인이 신분차별 없이 숙생을 받지 않았다면 학업은 꿈도 꿀 수 없는 처지였다.

히로부미는 쇼인의 문하생이 됨으로써 「維新3傑 중의 1人」인 기도 다카요시(木戶孝允), 「막부 타도의 최고 영웅」 다키스기 신사쿠(高杉晉作)의 부하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제자의 長處(장처)를 지적해 격려하는 교육방식을 구사했던 스승 쇼인으로부터는 『周旋家(주선가)가 될 것이다』라는 정도의 평가 밖에 받지 못했다. 후일 히로부미를 높게 평가하는 사람들은 周旋家를 「정치가」로 그럴듯하게 포장하기도 하지만, 그것의 현대적 의미는 「브로커」에 더 가깝다.

요시다 쇼인은 뛰어난 교육자였으나 숙생들을 편애하는 단점이 있었다. 그가 사랑한 제자는 구사카 겐즈이와 다카스기 신사쿠, 요시다 도시마로였다. 그들에 비해 이토 히로부미와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주목받지 못했다.
「이토 公爵 자료관」(야마구치縣 熊毛郡 大和町 소재). 여기서 幕末로부터 明治시대를 살았던 이토 히로부미의 생애를 각종 자료와 映像으로 소개하고 있다.

1862년 히로부미는 다카스기 신사쿠, 구사카 겐즈이,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 등과 함께 에도 시나가와(品川) 소재 영국공사관 방화에 참가했고, 1863년엔 『當代에만 사무라이의 자격을 허락한다」는 은전을 받았다. 그해 5월에는 井上馨, 井上勝, 山尾庸造, 遠藤謹助와 함께 영국으로 유학했다.

그러나 다음해인 1864년 4개국 함대가 시모노세키를 공격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井上馨과 급히 귀국해, 「괴상한 英語」로 열국과 강화회담時 통역 등으로 나섰다. 1865년 다카스기 신사쿠의 功山寺 거병 때 이토는 부하 30명(力士隊 소속)을 이끌고 신사쿠를 도왔다.

明治維新(1868) 이후에는 효고(兵庫)縣知事, 工部大輔(차관)으로 출세했다. 특히 歐美 제국을 시찰하는 이와쿠라 도모미(岩倉具視)사절단에 副使로 참여했고, 귀국 후에는 參議 겸 工部卿(장관)으로 急부상했다. 이후 최고의 改革實勢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 사쓰마번 출신)를 도와 근대화 정책에 적극 협조했다.
하기市의 쇼인 기념관에 세워져 있는 요시다 쇼인(가운데), 구사카 겐즈이(왼편), 다카스기 신사쿠(오른쪽) 師弟의 동상.

이토 히로부미의 시대는 의외로 빨리 다가왔다. 불과 1년 사이에 사이고 다카모리는 반란(西南전쟁)을 일으켰다가 패전해 자결하고, 오쿠보는 테러로 찔려 죽고, 기도 다카요시는 병사했다. 維新3傑이 갑자기 사라지자 이토는 어느덧 메이지 정부의 중심적 인물이 되었다.

1885년 12월, 이토는 초대 총리대신에 취임했고, 제4차 내각까지 조각하는가 하면, 明治憲法 제정을 주도했다.

1905년에는 조선에 을사보호조약을 강요해 외교권을 박탈했고, 동년 12월에는 초대 朝鮮統監(조선통감)에 부임했다. 그러나 그는 1909년 만주 하얼빈 역두에서 安重根 의사가 발사한 권총 세 발을 가슴에 맞고 절명했다. 청년 시절에 攘夷派였던 히로부미는 검술의 下手였음에도 불구하고 佐幕派 1人을 밤길에 급습해 베어 죽인 일이 있었다.

이토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인물은 다카스기 신사쿠와 오쿠보 도시미치였다. 다카스기는 분방했고, 직감적으로 행동하는 사나이였으며 시인이었다. 오쿠보는 냉철했고 논리적이며 현실 정치가였다. 이토는 자신이 극단적으로 대조적인 둘 중 어떤 유형을 택해야 할지를 놓고 평생 고민했다고 한다.
1863년 조슈번 청년 엘리트 5명이 英國에서 유학했다. 앞줄 맨 왼쪽은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 뒷줄 맨 오른쪽 이토 히로부미.

히로부미의 옛집에서 나와 대절택시를 타고 「松陰大橋」를 건너 松本川 옆 소로를 1km 남짓 달리면 阿武川·橋本川이 합수되는 지점의 천변에 가쓰라 다로(桂太郞·1849~1913)의 옛집이 있다. 가쓰라는 淸日전쟁 때 일본군 제3사단장으로 최전선에서 싸웠고, 臺灣 총독을 거쳐 세 번 총리대신을 역임했다.

그는 제국일본이 감행한 침략정책의 원흉이다. 총리대신 재임 시절에 英日동맹을 맺고 러日전쟁을 감행했다. 러日전쟁 직후인 1905년 미국 T. 루스벨트 대통령의 특사와 가쓰라-태프트 密約을 맺었다. 이 密約에서 미국이 일본의 조선 지배를 묵인하는 대신에 일본은 미국의 필리핀 지배를 인정했다. 1910년의 韓日합방은 그의 제3차 내각총리 시절의 일이었다.

가쓰라는 조슈군벌의 제2인자였다. 그는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系이긴 했지만, 이토 히로부미에게도 접근했던 재주꾼이었다. 가쓰라의 옛집에서는 입장료를 받는 대신에 성금함을 설치해 놓고 있었다. 필자는 저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한국인으로서 韓日합방 당시의 일본제국 총리대신의 현창사업에 성금을 낼 수 없는 것이다.


「일본 육군의 敎皇」 야마가타 아리토모

가쓰라의 옛집에서 橋本川을 따라 1km쯤 올라가면 야마가타 아리토모(1838~1922)의 옛집이 있다. 야마가타는 「일본 육군의 敎皇(교황)」이라 불리었다. 그는 明治시대를 통틀어 일본제국의 軍과 정부에 최대의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는 조슈번의 나카마(中間: 足輕보다 하위 계급)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소년기에 槍術(창술)을 연마해 「창의 小造(소조: 아리토모의 舊名)」이라 불렸다. 松下村塾에서 배우고 쇼인의 「飛耳長目(비이장목: 정보수집꾼)」으로서 京都 정세를 살피면서 尊攘派 인물들과 안면을 넓혔다. 1863년에는 다카스기 신사쿠가 조직한 奇兵隊에 입대해 軍監(군감: 제2인자)이 되었다.

民兵조직인 奇兵隊와 조슈번의 정규군인 先鋒隊 사이에 벌어진 무력충돌에 책임을 지고 신사쿠가 奇兵隊 총독에서 물러난 후의 일이다. 신사쿠가 조슈번 막부의 압력에 굴복한 恭順派 정권을 타도하기 위해 궐기를 호소했지만, 야마가타는 호응하지 않았다. 이에 낙담한 신사쿠는 후쿠오카로 망명해 한동안 잠복했음은 앞에서 썼다.

신사쿠가 후쿠오카로부터 시모노세키로 되돌아와 功山寺에서 불과 80명을 이끌고 거병할 때도 야마가타는 눈치를 살폈다. 이토 히로부미가 力士隊의 부하 30명을 이끌고 신사쿠의 진영에 가장 먼저 가담한 것과는 대조적이다. 그러나 야마가타는 신사쿠가 거병 후 연전연승을 하자 奇兵隊를 이끌고 신사쿠의 진영에 참여했다.

1866년의 四境전쟁(長州전쟁)의 小倉口전투에서는 신사쿠의 휘하에서 싸웠고, 막부군을 追討하는 戊辰(무진)전쟁 때(1868년)는 北越 방면에서 戰功을 세웠다.


야마가타의 부패, 이토의 好色
日本帝國의 한국 병합 당시의 총리대신이며 육군대장인 가쓰라 다로(桂太郞)의 옛집 앞에선 필자.

1868년에는 유럽 각국을 시찰하고, 귀국 후에는 兵部大輔(「국방차관」)가 되어 軍制개혁에 착수했다. 1873년에는 초대 陸軍卿(육군경)에 취임해 徵兵令(징병령)을 실시했다. 그 후의 西南전쟁 때(1876년) 징병령에 의해 육성된 군대가 사이고 다카모리의 사무라이軍을 격파했다. 그 후 그는 어떤 직책을 맡든 현역 元帥와 조슈군벌의 首長으로서 일본 육군을 지배했다.

1885년에는 내무대신으로서 관료인맥을 심어 두었고, 1887년에는 총리대신이 되어 제1차 내각, 1898년에는 제2차 내각을 조각했다. 1894년 淸日전쟁에서는 제1군 사령관, 1904~1905년의 러日전쟁에서는 군부의 제1인자로서 參劃(참획)했다. 그 후 정치의 표면에는 나서지 않았지만, 야마가타系의 가쓰라(桂太郞) 내각과 데라우치(寺內正毅) 내각을 성립시킴으로써 정계·군부에 절대적 행사를 계속했다.

야마가타는 淸日전쟁 당시 만주에서 현지군을 지휘한 경험이 있었지만, 그의 군사지식은 戊辰전쟁·西南전쟁 이후 조금도 발전되지 않았다. 직계인 가쓰라조차 그를 본국으로 불러오기 위해 소환공작을 했을 정도였다. 그 후 10년간이나 정쟁 속에서 지내 군인으로서의 공부는 전혀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전쟁이 벌어지기만 하면 元帥(원수)의 지위를 이용해 사사건건 개입했다.
조슈閥을 형성해 獨斷·獨走를 감행한 「帝國 육군의 敎皇」으로 군림한 야마가타 아리토모. 그는 미쓰비시 재벌과 야합하는 등 부패했지만, 군부와 정부에 조슈 人脈을 심어 이토 히로부미를 능가하는 영향력을 행사했다.

야마가타는 특히 이토가 하얼빈 역두에서 피살된 이후에는 조슈系를 대표하는 元老(원로·겐로)로서 죽을 때(1922년)까지 국정의 中樞(중추)를 장악했다. 야마가타는 매우 부패했다. 반면 히로부미는 여자문제가 복잡해 明治천황에게 內密한 경고를 받기까지 했다.

조슈번은 막부 시대 이후 다른 번에 비해 公私 구분이 애매했다. 이른바 「幕末 志士」 활동 중 개인적으로 허비한 유흥비도 공금으로 처리하는 경우가 많았다. 明治維新의 또 다른 기둥인 사쓰마번은 금전에 관한 윤리관이 확립되어 있었다. 조슈의 다카스기 신사쿠, 이토 히로부미, 야마가타 아리토모처럼 공금을 질탕하게 쓰는 사람은 없었다.

아마가타의 옛집을 뒤로 하고 1.5km쯤 북상해 하기市 한복판에 위치한 明倫(명륜·메이린)소학교 앞에 내렸다. 이 학교 자리에 藩校인 明倫館이 있었다. 지금은 조슈번 당시의 「有備館」만 남아 있다.

다카스기 신사쿠는 14세 무렵에 「에도 3大 道場」의 하나인 練兵館(연병관) 館主의 아들이 有備館에 찾아와 연습시합을 하면서 조슈 번사들을 모두 쓰러뜨리는 것을 보고, 그것을 憧憬(동경)해 검술에 정진한 끝에 柳生新陰流의 면허를 皆傳한 高手가 되었다.


明治 시기 高官大爵의 옛집들이 몰려 있는 성밑거리
조슈번의 藩校인 明倫館의 道場인 有備館.

明倫소학교 동쪽 500m 지점에는 다카스기 신사쿠가 태어나 자란 집이 있다. 신사쿠의 옛집이 소재한 키쿠야요코초(菊屋橫丁) 주변은 에도시대 사무라이 집들이 남아 있어 「하기城 城下町(조카마치·성밑거리)」라고 불린다. 「다카스기 신사쿠 옛집은 마침 「휴관일」이어서 입장할 수 없었다. 바로 이웃집이 아오키 슈사쿠(靑木周弼)·겐조(硏) 형제의 옛집이다. 아오키 형제는 조슈번의 藩醫이며 蘭學者(난학자: 네덜란드 중심의 서양 학문을 배운 학자)이다. 슈스케와 겐조는 나가사키(長崎)에서 시볼트로부터 종두법을 비롯한 蘭의학을 배워 귀번했다.

슈스케는 藩主 모리 다카치카의 주치의, 겐조는 藩세자 사다히로(定廣)의 주치의로 재직하다 후일 明治 天皇의 주치의가 되었다. 역시 의사인 겐조의 아들 슈조(周)는 야마가타 도모유키 내각과 마쓰카다(松方正義) 내각에서 외무대신으로 기용되었다.

당시 일본인들은 천연두에 걸려 죽거나 목숨을 건져도 곰보가 되는 사람이 많았다. 예컨대 요시다 쇼인과 다카스기 신사쿠도 홍역을 앓아 「살짝 곰보」였다. 신사쿠는 10세 때 천연두에 걸려 위독상태에 빠졌으나 옆집에 사는 「일본을 대표하는 名醫」 슈스케·겐조 형제의 치료로 목숨을 건졌다.
하기의 성밑거리(城下町). 이 작은 동네에서 明治정부의 수상·大臣·육군대장을 무더기로 배출했다.

藩醫였던 아오키家가 이렇게 성밑거리에 살 수 있었던 것은 번주 이하 上級 家臣들의 급한 부름을 대기해야 하는 직업상의 특성 때문으로 보인다. 어떻든 사방 1km도 되지 않는 면적인 하기의 성밑거리에는 明治 시기의 대신과 육군대장 등의 옛집이 지천이다.

신임 일본 총리인 아베 신조의 조모인 시즈코(靜子)의 친정은 필자가 대절한 관광택시 운전수가 관광안내소 등 여러 곳에 문의했지만, 끝내 찾아내지 못했다. 시즈코의 조부는 하기 출신 육군대장 오시마 요시마사(大島義昌)이다. 淸日전쟁 당시 오시마 小將은 전시편제 混成여단의 여단장으로서 7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淸軍과의 牙山전투·平壤전투등지에서 싸웠다.
藩醫 아오키의 옛집. 네덜란드 의사 시볼트에게 종두법을 배운 아오키 형제는「일본 제1의 의사」로서 조슈 藩主와 明治 천황의 주치의가 되었다.


「維新3傑」의 1人 기도 다카요시
道服 차림의 다카스기 신사쿠. 그는 柳生新陰流의 면허를 皆傳한 검술의 達人이었다.

藩醫 아오키家로부터 바로 몇 집 건너 가면 기도 다카요시(木戶孝允·1833~1877)의 옛집이다. 기도는 「과격파와는 一線을 그은 냉정한 혁명가」로 평가되는 인물이다.

그가 역사의 앞무대에 등장한 것은 에도의 검객 齊藤彌九郞(사이토 야구로)의 도장에 입문해 塾頭(숙두)에 오르고 부터이다. 기도는 검술뿐만 아니라 造船術·蘭學도 배웠다.

1860년 8월, 에도灣에 정박 중이던 조슈번의 군함 丙辰丸(병진환)의 선상에서 水戶(미토)藩의 니시마루 타테와키(西丸帶刀) 등과 「丙辰丸 맹약」을 맺었다. 이 맹약은 櫻田(사쿠라다)門 사변 이후의 정국을 둘러싼 미토藩 중심의 운동에 조슈번도 海防(해방)을 통해 참획한다는 내용이었다. 1860년의 「사쿠라다門 사변」이란 천황의 재가도 받지 않고 서양 5개국과의 조약을 인준한 막부의 大老(首相) 이이 나오스케(井伊直弼)를 미토藩 번사 일당이 궁문 앞에서 난도질해 암살했던 大사건이다.

1861년, 조슈번의 藩是는 나가이 우다(長井雅樂)가 제창했던 「航海遠略策」에 바탕한 公武合體策으로 결정되어 조정과 막부를 단합시키는 것이었다. 기도는 구사카 겐즈이·다카스기 신사쿠 등 요시다 쇼인 門下와 결연해 반대운동을 전개했다.

그러나 구사카 겐즈이 등 존양과격파와는 전면적으로 동조하지 않았던 기도는 동년 5월 京都에서 公家 및 他藩(타번)과의 절충에 나섰다.
「維新3傑」의 1人으로 불리는 기도 다카요시의 옛집. 그는 尊攘과격파와는 一線을 그은 현실정치인이었다.

1862년, 「8·18 정변」으로서 조슈번은 京都에서 쫓겨났지만, 기도는 京都에 잠복해 있으면서 雪(설원)에 노력했다. 훗날 기도의 夫人이 되는 게이샤 이쿠마쓰(幾松)가 新選組(신선조: 막부에 고용되었던 암살집단)에 쫓기는 기도를 위기에서 구했다는 것은 일본에서는 꽤 알려진 얘기다.

1864년 4월, 기도는 藩의 京都留守居役이 되었다. 이때 키시마(來島又兵衛)·구사카 겐즈이 등 존양과격파가 전년의 「8·18 쿠데타」에 대한 복수를 계획하는 것을 알고 만류했지만, 실패했다. 동년 7월19일 「禁門의 變」을 일으켰다가 패전한 조슈번의 존양과격파가 京都로부터 도주하자 그도 막부의 追討를 피하기 위해 다지마(但馬)에서 잠복했다.

1865년 4월26일, 기도는 다카스기 신사쿠·이토 히로부미 등의 권유로 귀번, 對막부 전쟁에 대비해 여러 개혁을 실시하는 등 藩政의 중추에 위치하게 되었다.
기도 다카요시 옛집의 내부.

1866년 1월21일, 도사(土佐)의 浪人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의 주선에 의해 기도는 京都의 사쓰마 藩邸(번저)에서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와 만나 삿초(薩長) 비밀동맹을 맺었다. 동년 6월7일, 막부군의 先攻으로 시작된 四境전쟁(막부 측은 조슈征討戰이라 부름)에서 조슈번은 승리했다.

막부 붕괴 후, 기도는 新정부의 參議(참의)에 올라 조슈번을 대표하는 실력자가 되었다. 版籍奉還(판적봉환: 각 藩이 보유해 오던 토지와 호적을 천황에게 바침)의 실현에 있어 중심적 역할을 하고, 이와쿠라(岩倉) 사절단의 副使로서 歐美를 시찰했다. 기도는 스승 요시다 쇼인의 영향으로 원래 征韓論者였으나 歐美를 시찰한 후에는 內治優先論者인 오쿠보 도시미치(사쓰마번 출신)와 힘을 합쳐 사이고 다카모리를 고립시켰다. 그는 1877년(明治 10년) 5월26일에 病死했다.

다카스기 신사쿠의 옛집에서 남쪽으로 500m 쯤 떨어진 곳에는 구사카 겐즈이(1840~1864)의 옛집이 있다. 겐즈이는 조슈번의 藩醫인 久坂良迪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조슈 제1의 俊才로서 신사쿠와 함께 「쇼인 門下의 雙璧」으로 불렸지만 1864년 「禁門의 變」 당시 패전 현장에서 자결했다. 그때 그의 나이 25세.


毛利家가 邊境 하기(萩)로 쫓겨간 사연
1864년「禁門의 變」에서 幕府軍에게 패전하자 현장에서 자결한 熱血 風雲兒 구사카 겐즈이의 옛집 터.

성밑거리를 둘러본 毛利씨의 200년 居城인 하기城으로 올라갔다. 진입로 삼거리에 큼직한 동상 하나가 보인다. 동상의 주인공은 육군대장 정장 차림의 다나카 기이치(田中義一)이다. 다나카 기이치는 야마카다 아리토모-가쓰라 다로-테라우치 마사다케로 이어지는 조슈 軍閥의 후계자로서 1927년 4월 총리대신이 되었지만, 조슈벌의 독점·독주에 대한 軍·政界의 광범위한 반발과 그 자신의 무능·부패에 의해 1929년 7월 퇴임했다.

그 후 일본 육군에서는 유럽 유학파 영관급 장교들을 주력으로 하는 「昭和(쇼와)군벌이 대두해 조슈군벌은 퇴조했다. 정계에서도 패전 후인 1957년 기시 노부스케(岸信介)가 총리대신에 오를 때까지 조슈 출신 총리대신은 나오지 않았다.

垓字(해자) 앞에 대절 택시에서 내려 높이 143m인 시츠키(指月)山 기슭에 하기城과 마주 섰다. 하기城은 살찐 오리의 머리 부분처럼 東海(동해: 일본에선 日本海라고 부름)를 향해 돌출해 있다. 지금은 「시츠키 공원」이라 불린다. 1604년 모리 테루모토(毛利輝元)가 防·長 2州 36만 석의 영주로서 축성한 것이다. 현재는 돌담과 해자의 일부가 남아 있다.

하기(萩)라는 땅에 毛利씨의 居城과 城下町이 형성된 것은 세키가하라 싸움 후였다. 이 전투에서 모리 테루모토는 도요토미家를 받드는 이시다 미스나리(石田三成)의 권유에 의해 西軍의 총대장으로서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맞섰다가 패전 후 領地와 石高(세키다카)가 80% 삭감되었음은 지난 호에서 이미 밝힌 바 있다.

히로시마(廣島)에 居城을 두고 120만석을 지배했던 모리家는 혼슈의 서쪽 끝으로 오그라들어야 했다. 이에 테루모토는 防·長 2州의 중심인 야마구치(山口), 또는 山陽道와 연결되고 세토內海의 요충지이기도 한 防府에다 새로운 성지를 건설하려 했다.

그러나 막부는 굳이 교통이 불편한 하기에다 새 성지를 건설하도록 강요했다. 山陰 지역에 가만히 처박혀 있으면서 다시는 중앙에 진출하려는 꿈은 꾸지도 말라는 속셈이었다.


東·西 일본의 지역감정
指月山에 자리 잡은 조슈 藩主 모리氏의 하기城. 조슈藩은 도쿠가와 幕府 타도의 주체였다.

다리를 건너 하기城에 入城해 天守閣(천수각)이 있었을 나지막한 指月山에 올랐다. 이제는 주춧돌 따위만 나뒹굴고 있다. 일본의 중심에서 보면 조슈번은 변두리 중의 변두리다. 그런데도 조슈번은 왜 明治維新의 진원지가 되었을까? 여기서 일본사에 있어서 東西문제를 짚어 보지 않을 수 없다.

잔잔한 세토內海를 교통로로 삼는 西일본과 태평양이라는 大海에 접해 있는 東일본은 古代로부터 다른 성격을 나타내고 있었다. 대체로 西일본은 개화·선진 지역이었고, 東일본은 후진·미개 지역이었다.

히데요시의 죽음 후, 東·西 일본의 충돌은 이에야스와 미쓰나리의 內戰으로 나타났다. 일본 천하의 주인을 결정하는 전투는 나고야(名古屋) 평야의 끝인 세키가하라(關ケ原)에서 벌어졌다. 미쓰나리의 패인은 결국 도요토미家의 여러 다이묘(大名)로부터 일치된 후원을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100여 년간에 걸친 센고쿠(戰國)시대의 난투를 경험한데다 두 번에 걸친 朝鮮 출병에 의해 피로했던 여러 다이묘들은 그냥 이대로 평화를 유지해 기득권의 안정을 꾀했다. 따라서 미쓰나리의 거병은 새로운 분란으로 비쳐 西일본의 다이묘들에게서조차 전폭적인 지지를 얻지 못했다.
하기城의 天守閣(하기市 향토박물관 소장). 1869년 기도 다카요시의 주도로 版籍奉還(다이묘의 領地와 人民을 천황에게 바침)이 시행된 직후 이 天守閣은 他藩에 본보기가 되기 위해 자진 철거되었다.

세키가하라 전투 후인 1603년에는 東일본을 대표하는 이에야스가 패권을 장악해 에도에 도쿠가와 막부를 세웠다. 일본 전체로 보아 당시의 에도는 東으로 너무 치우쳐 있었다. 도쿠가와는 그 근거지 에도를 수호하기 위해 譜代의 다이묘들을 東海道에 배치하고, 西일본을 누르기 위해 오사카(大坂)라는 大상업도시를 직할지로 삼았다.

그러나 도쿠가와 막부는 西일본의 대두가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유럽 해상세력이 뻗어와 규슈를 무대로 활약, 유럽과의 교류에 의해 西일본의 富力이 증대될 위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막부는 키리시탄(切支丹: 기독교) 禁令을 방패로 삼아 전국에 쇄국을 명령하고, 오직 직할지인 나가사키(長崎) 1개 항만을 열어 네덜란드와의 통상만은 허락했다. 그 이외의 유럽 선박은 연안 접근조차 금지했다.

막부는 參勤交代(참근교대·산킨고다이)도 강행했다. 참근교대라는 것은 전국 다이묘의 가족들은 에도에서 살게 하고, 다이묘 자신은 1년은 領地(영지)에서, 1년은 에도에서 교대로 근무토록 강제하는 것이었다. 참근교대로 국력을 피폐시키면 西일본의 外樣(도자마)다이묘는 영구히 대두하지 못할 것이라고 막부는 판단했다.

그러나 오판이었다. 막부의 쇄국령은 西일본의 다이묘들을 해외와 단절시키려는 의도였지만, 되레 쇄국령을 무시하는 다이묘들의 富强을 초래하는 결과를 빚고 말았다. 쇄국령을 무시하는 대표적인 다이묘가 모리氏와 시마즈氏였다.

조슈번의 모리氏는 혼슈의 西端에 위치하고 있는 절호의 조건을 이용해 한반도와의 密무역을 감행했다. 모리氏와 함께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西軍에 가담해 패전했던 사쓰마藩의 시마즈(島津)氏도 유구를 정벌해 그 보호국으로 삼는 한편, 유구를 앞세워 거의 공공연하게 中國과의 무역으로 이익을 획득했다. 규슈의 최남단에 위치한 사쓰마번에 대해선 거리상의 이유 등으로 막부의 감시가 느슨했다.

이같은 密무역은 막부의 쇄국령이 강화되면 될수록 위험부담이 큰 만큼 그 이익도 커지게 되었다. 모리氏나 시마즈氏는 戰國시대 이래의 다이묘였던 만큼 藩內에 대한 장악력이 강렬해 그 비밀의 누설을 막을 수 있었다.


黃金을 둘러싼 利害관계의 相剋

密무역은 기록상으로 흔적을 별로 남기지 않았지만, 그 동향만은 짐작 가능하다. 東일본과 西일본은 金·銀의 화폐적 용도에 특색이 있었다. 東일본은 주로 금을 사용하고, 西일본은 은을 사용했다.

이것은 東일본에 금 産地, 西일본에 은 産地가 편재된 조건도 무시할 수 없는 요인이지만, 西일본에서는 中國·유럽과의 교통에 의해 銀 사용이 유행했다.

원래 유럽에서는 금의 은에 대한 교환비율이 높았는데, 특히 新대륙에서 대규모 은광이 발굴된 이래 은값은 폭락하고 금값은 騰貴(등귀)했다. 中國에서는 원래 금은 은에 비해 5, 6배의 高價(고가)를 유지했는데, 그것이 유럽과의 교역에 점차 등귀하는 경향에 있었다.

그런데 일본에서는 금에 대한 상대적 가치가 상당히 낮아 은의 3배 정도에 불과했다. 만일 일본이 황금을 수출해 은으로 바꿔 온다면 유럽에 대해서는 물론 중국도 일본 수출업자와 함께 거액의 이익을 올릴 수 있었다. 이 때문에 西일본은 이미 戰國시대로부터 은을 사용하는 풍습이 확립되었고, 이에 반해 경제적 후진지역인 東일본은 幕末까지 주로 금을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런 관계로 東·西 일본 사이의 교역에는 금·은 換錢(환전)이 행해졌다. 東·西 일본의 대표지는 물론 에도와 오사카였고, 오사카에 근거를 둔 환전상은 금융자본가로 세력을 떨치게 되었다. 환전상은 환전수수료만 먹는 것이 아니고, 금·은 시세의 변동에 의한 투기적 이익도 누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뿐 아니었다.

일본에서 보유하는 금·은의 在庫(재고)는 갈수록 감소했다. 그러나 그것은 나가사키에서 행해지던 官許무역에 의해 외래품을 구입하기 위해서만 유출되는 것이 아니었다.

금·은의 보유고 감소를 보완하기 위해 막부는 질이 나쁜 금·은을 자주 제조, 화폐 改惡을 단행했다. 하지만 改惡 전의 良貨는 충분히 회수되지 않았다. 이것들은 여러 루트에 의해 국외로 유출되었던 것이다. 그것은 오사카에 집중되었다가 변경의 다이묘 領地인 나가도(長門: 조슈번 항구)와 사쓰마를 경유해 외국으로 뻐져나갔다.

모리氏와 시마즈氏가 변경에 붙어 있으면서 직령 600만 석의 막부에 대항 가능한 실력을 보유하게 된 것은 그들의 密무역의 규모를 감안해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攘夷論의 實相

近世 유럽은 아직 르네상스 단계에 머물러 있었다. 그 문화가 東아시아에 비해 높은 정도에 달하고는 있었지만, 거리가 먼 만큼 그 실력이 東아시아에 도달하면 미약할 수밖에 없었다.

도쿠가와 막부는 네덜란드人들에게 나가사키港 앞바다의 섬인 데지마(出島) 거주를 허용하면서, 그 대표자를 여러 다이묘처럼 에도의 쇼군에게 參勤시켰다. 네덜란드人들은 다소의 굴욕을 감수하는 대가로 對日무역을 독점하는 이익을 누리고 있었다.

그러나 西歐의 산업혁명은 이런 형세를 일변시켰다. 風力을 이용하던 범선에 대신해 등장한 증기선은 근거지를 출항해 만리의 파도를 건너 東아시아 해역에 진출했다. 일본 근해에는 歐美의 증기선이 출몰해 네덜란드는 이제 對日무역의 독점이 불가능해졌다.

특히 태평양 항로의 개설은 종래의 교역환경을 역전시켜 東일본이 新대륙의 창구로 대두하게 되었다. 이때 네덜란드가 어떤 태도로 나왔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네덜란드와 영국 간 데지마(出島)에서의 피 터지는 쟁투를 계기로 인해서 일본에 攘夷論이 출현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攘夷論이 사쓰마와 조슈, 두 雄藩에 의해 강력하게 支持되었다는 것은 특별한 이유가 있었다. 쇄국에 의해 가장 큰 이익을 획득한 것은 사쓰마번과 조슈번이었음은 앞에서 이미 거론했다. 開國할 경우 두 雄藩은 密무역의 독점적 이익을 상실할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막부가 200여 년간 실행해 온 쇄국령을 세계대세에 순응해 스스로 철회하겠다는 데 대해 幕藩(막번)체제의 下位조직인 藩으로서는 異議를 제기할 근거가 별로 없었다. 따라서 두 雄藩이 開國에 대해 항거하는 데엔 무슨 명분을 내걸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 결과, 攘夷論은 뜬금없이 勤王論과 결합된다. 洋夷는 곧 勤王(근왕)이며, 幕府는 幕府보다 더 권위가 있는 天皇의 명령에 복종해 끝까지 攘夷를 수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논리였다.

막부의 開國은 열강에 의해 강제되었다고는 하지만, 그 결과는 미국과 가까운 東일본에 유리했다. 범선 시대엔 세토內海를 낀 西일본이 유리했지만, 증기선 시대엔 大洋과 직결되는 東일본의 항만이 優位에 서게 마련이었다. 이로 인해 에도 막부의 지위가 강화될 것이라는 것을 가장 잘 파악했던 것은 해외무역의 맛을 누구보다도 잘 알았던 사쓰마번과 조슈번이었다.

두 雄藩은 어떠한 수단을 구사해서라도 막부 主導의 開國을 저지하려고 했다. 이런 利害관계 속에서 開國論者들은 잇달아 암살되어 쓰러지고, 勤王攘夷論이 時流를 얻게 되었던 것이다.

막부가 근왕양이론자와 열강의 사이에 끼어 자멸하고, 1867년의 大政奉還 후 사쓰마·조슈번을 중심으로 하는 明治維新 정부가 성립되면 일본의 國是는 갑자기 開國進取로 180도 전환했다.

그러나 이같은 태도 표변은 예상된 행동이었다. 막부의 손에 의한 開國은 거부하지만, 자기들이 책임자가 되는 開國은 실현한다-이는 「내가 하면 로맨스이고 남이 하면 不倫」이라는 사고방식과 별반 다를 바 없는 것이다.

明治維新의 소위 元勳들은 일본과 외국의 접경지대 출신이었다. 이들은 開國의 이익을 누구보다 잘 숙지했던 만큼 그들이 정권을 장악하자마자 開國의 國是가 결정된 것은 그렇게 불가사의한 일이 아니었다.

하기城에서 내려와 잠시 橋本川邊의 「가이미가리(鍵谷) 골목」을 걸었다. 좌우를 높은 토담으로 둘러싸고 길을 자물쇠 모양처럼 구부려서 만든 迷路(미로)의 골목이다. 이것은 외적의 침입에 대비한 사무라이 주택 거리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조슈 武士의 후예들

대절택시로 東海와 접하는 하기市 북쪽 해변을 달려 조슈번 사무라이 계급의 감옥인 野山獄 터를 거쳐 송본천 위에 걸린 하기橋를 건너면 바로 東하기驛이다. 오후 4시19분에 발차하는 기차를 타려면 아직 한 시간쯤 여유가 있어 역전 카페에 들러 목을 축였다.

발차 시간에 맞춰 역두가 제법 붐볐다. 중·고교생의 하교시간이었던 것이다. 필자는 「조슈(야마구치) 청소년」들의 행동거지가 좀 궁금했던 터다. 남녀 학생들이 섞인 기차 안인 만큼 핑크빛 눈길이 마주치는 모습이나 공연히 으스대는 남학생들의 몸짓도 목격될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아니었다. 여학생들은 조신했고, 남학생들은 어금니를 지그시 깨문 「사무라이 얼굴」들이었다. 東京의 高官家의 도련님으로 태어나 자란 아베 신조의 귀족적 풍모와는 사뭇 다른 야성미가 엿보였다.

「남아」들은 1866년의 四境전쟁 당시 4000명의 병력으로 15만 명의 막부군을 패배시킨 조슈 사무라이의 후예들을 연상시켰다. 당시 조슈번의 인구는 50만에 불과했다는 기록을 본 적이 있는데, 그때 일본 전체의 인구는 적어도 3000만 명 이상이었을 것이다.

귀로에도 「나가도(長門)市驛」과 코구시驛에서 다른 기차에 환승해야 했지만, 환승 시간은 각각 12분과 1분으로 往路 때보다 훨씬 짧았다. 어떻든 편도 105.3km의 거리를 가면서 기차를 세 번 갈아타야 한다는 것은 분명히 불편한 일이다. 만약 우리나라에서 이런 일이 빚어졌다면 「지역차별」이라는 아우성이 터졌을지 모른다.

현재 東海 쪽의 일본은 태평양 쪽의 일본에 비해 시골이다. 山陰線 연변의 사회적 인프라는 우리나라 강원도의 그것보다 별반 나을 것이 없다. 거리를 달리는 승용차는 거의가 소형차였다. 요즘 우리나라에서는 흙투성이의 농기구를 넣고 다니는 3000cc 이상의 승용차도 심심잖게 발견되고 있다.


日本을 「아름답지 못한 나라로」 끌고 갈 것인가(?)
아베 신조의 유일한 단독 저서「아름다운 나라로」(文藝春秋·2006.7)의 표지. 그는 일본의 自存을 위해「싸우는 정치가」를 自任했다.

오후 7시2분, 시모노세키驛에 도착해 저녁밥을 먹은 뒤 「씨몰」 빌딩 4층에 있는 도쿠마 서점 시모노세키店에 들렀다. 눈짐작으론 서울 광화문 교보문고에 버금갈 만한 규모이다. 점두의 판매대에는 아베 신조의 저서 「아름다운 나라로」를 비롯한 아베 신조 관련 신간서적이 무려 7종이나 진열되어 있었다.

그 책 제목은 「도큐멘트 安倍晉三」 「安倍晉三, 이 나라를 지키는 결의」, 「安倍晉三 이야기」, 「安倍晉三와 宰相의 자격」, 「安倍晉三 토론집」, 「安倍晉三―아베家 3代」 등이었다. 과연, 아베 신조의 정치적 홈그라운드다운 모습이다.

필자는 「아름다운 나라로」(安倍晉三 지음·文藝春秋 발행), 「松陰과 晉作의 志」(一坂太郞 지음), 「長州전쟁」(野口武彦 지음), 靖國問題」(高橋哲哉 지음), 「竹島(獨島의 일본 측 표기)는 日韓 어느 쪽의 것인가」(下條正男 지음)」 등을 구입해 숙소로 돌아왔다.

필자는 아베 신조의 유일한 단독저서인 「아름다운 나라로」를 一讀하면서 그의 安保觀 등에 공감하는 부분도 적지 않았지만, 「싸우는 정치가」를 거듭 自任(자임)하는 그가 과거사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깨닫지 못하고 신념화한다면 결국은 일본을 「아름답지 못한 나라」로 끌고 갈 우려가 있다고 느꼈다.

<야스쿠니(靖國) 참배에 대해 『일본은 군국주의의 길을 걷고 있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戰後 일본의 지도자들, 예컨대 고이즈미 총리가 이웃 나라들을 침략하도록 지시했던 일이 있었는가. 他國을 공격하기 위한 장거리 미사일을 발사하려고 했던가. 핵무장을 하려고 했던가. 인권을 억압하려 했던가. 자유를 제한하려 했던가. 민주주의를 파괴하려 했던가. 답은 모두 노(NO)이다. 지금 일본은 어디로부터 보아도 군국주의와는 無緣한 민주국가이다>

아베 신조는 지난 4월15일 사람 그림자도 비치지 않는 오전 7시 직전, 도쿄 九段에 위치한 야스쿠니 神社를 은밀히 참배했다. 방명록에 「官房長官 安倍晉三」이라고 기록했음에도 그의 수행비서관은 神社 측에 비밀 유지를 요청했다.

아베 측은 근 4개월 후인 지난 8월3일 심야, 「아베 參拜」의 사실을 産經(산케이)신문과 NHK에 슬쩍 흘렸다. 다음날인 8월4일 새벽 1시 NHK 뉴스를 시작으로 通信社 및 民放 그리고 각 신문사가 일제히 보도했다.

그런 가운데 아베는 4일 오전 기자회견에서 『이 문제가 외교문제화·정치문제화하고 있는 가운데 갔는가, 가지 않았는가, 혹은 참배했는가, 아닌가에 대해서 밝힐 뜻은 없다』며 관계사실의 확인을 거부했다.

한국과 중국에 대한 자극을 최소화하면서 自民黨 총재 경선에서 票心을 모아 총리대신이 되겠다는 작전이었다. 이때 駐日 한국대사관 관계자는 『아베氏를 비롯, 일본의 역사와 전통을 중시하는 분들이 대단히 좋아하는 武士道에 反하는 것은 아닌가』라고 반응하는 것으로 그쳤다고 한다. 아베는 「A級戰犯을 둘러싼 오해」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

<「A級戰犯」에 대해서도 오해가 있다. 「A급전범」라는 것은 極東국제군사재판=東京재판에서 「평화에 대한 죄」 및 「人道에 대한 죄」라는, 전쟁 종결 후에 만들어진 개념에 의해 재단된 사람들을 말한다. 국제법상 事後法에 의해 판가름된 재판은 無效라는 議論이 있지만, 그것은 별도로 하고, 지도적 입장에 있었기 때문에 A급이라고 편의적으로 부른 만큼 죄의 輕重에는 관계가 없다>

위의 인용문을 보면 아베 신조가 外祖父 기시 노부스케 前 총리대신을 의식한 것을 느끼게 한다. 아베 신조에게 「정치적 DNA」를 물려주었다는 기시 노부스케는 「A급전범 용의자」로서 3년 3개월간 투옥된 경력을 지닌 인물이었다.

아베 신조는 동료 의원과 함께 옛 滿洲國의 수도였던 長春의 한 기념관을 방문했던 때의 해프닝이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그때 기념관 측 안내인은 일본어로 기시 노부스케의 사진을 가리키며 『이 者가 제일 악질이다』고 브리핑했다고 한다(大下英治 저 「安倍家 3代」에서).

<일본은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서 極東국제군사재판을 수락하고 있기 때문에 총리가 A급전범이 合祀된 靖國神社에 참배하는 것은 조약 위반이라는 비판이 있다. …패전 직후 GHQ(연합군총사령부)가 靖國神社를 어떻게 할 것인가를 검토했을 때 맥아더 원수의 副官이 駐日 바티칸 공사대리였던 브르노 비타 神父에게 의견을 구한 바 있다. 신부는 동료들과 협의해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어떠한 국민도 국가를 위해 죽은 사람에 대해 경의를 표할 권리와 의무가 있다. 만약 靖國神社를 불태운다면 그 행위는 美軍의 역사에 대단히 불명예스러운 汚點으로 남을 것이다. 역사는 그와 같은 행위를 이해하지 않을 것이 틀림없다』>

「아름다운 나라로」는 서문과 7장, 232페이지로 구성되어 있다. 제1장 나의 原點, 제2장 自立하는 국가, 제3장 내셔널리즘은 무엇인가, 제4장 日美同盟의 구도, 제5장 日本과 아시아 그리고 中國, 제6장 少子국가의 미래, 제7장 교육의 再生이다.

책의 目次는 책의 전체 내용을 집약한다. 필자는 「아름다운 나라로」의 目次를 통해 아베 신조가 韓國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를 짐작할 수 있었다. 총 99개의 小제목 중 「韓國」이란 글자가 들어간 것은 하나도 없다. 印度·濠洲 등의 국명이 들어간 小제목은 있다. 본문 중에서도 그는 韓國을 中國의 종속적 위치로 설정하고 있다.


아베 신조의 대외정책에서 강조된 美日동맹

<自國의 안전을 위해 최대한의 自助노력, 「자기 나라는 자기가 지킨다는 氣槪가 필요한 것은 말할 것도 없지만, 核억지력과 極東지역의 안정을 고려하면 美國과의 동맹은 불가피하다. 美國의 국제사회에 대한 영향력·경제력, 그리고 최강의 군사력을 고려한다면 日美동맹은 베스트의 선택인 것이다>

<예컨대 他國이 日本에 미사일을 발사할 때 2발째의 飛來를 피하고, 또는 저지하기 위해서는 日本이 아니라 美國의 전투기가 그 미사일 基地를 공격하게 된다. 바꿔 말하면 美國의 젊은이가 日本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거는 것이다. 다만 조약에 그렇게 규정되어 있다고 해서, 우리들은 자동적으로 그러할 것이라는 태도를 보여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목숨을 거는 병사, 병사의 가족, 병사를 보내는 美國 국민이 무엇보다 그것을 납득하지 않으면 안 된다. 키신저 前 국무장관은 『동맹은 「종이」가 아니라 「連帶感」이다』라고 말했다. 신뢰로 뒷받침되는 연대감, 그것이 없는 조약은 휴지에 지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군사동맹이라는 것은 한마디로 말하면 필요 최소한의 무력으로써 自國의 안전을 확보하려는 지혜이다. 집단적 自衛權의 행사를 담보해 두는 것은 그것에 의해 합리적인 日本의 방위가 가능해질 뿐만 아니라 아시아의 안정에 기여하게 된다. 또 그것의 결과로서 일본이 무력행사를 하지 않고 살 수 있는 것으로 연결되는 것이다>


『兩國의 문제는 상호 컨트롤해야』

<일본과 중국의 관계는 금후도 계속되어 갈 것은 틀림없고, 이 互惠의 관계를 정치문제에 의해 훼손당하는 것은 양국의 마이너스로서 결코 플러스가 되지 않는다. 이제부터 日中관계를 안정시키기 위해서는 가능한 한 빨리 양국 간에 政經分離의 원칙을 만들 필요가 있을 것이다>

다음은 이 책의 「兩國의 문제는 상호 컨트롤해야」라는 小제목 下의 본문 중 일부이다.

<나라가 다르면 역사 및 문화도 다르다. 양국 간에 문제가 있다고 해서 그것들을 모두에 파급시켜서 되는 것일까. 서로 다름을 다른 것으로서 존중하는 것도 필요하지 않을까. 우리들은 서로 문제를 컨트롤하기 위해 頂上이 직접 만나서 대화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다>

다음은 小제목 「양국의 문제는 상호 컨트롤해야」에 기록된 韓國 관련 全文이다.

<이러한 상황은 韓國과도 마찬가지다. 日韓 양국은 하루 1만 명 이상이 왕래하는 중요한 관계다. 일본은 오랜 기간 한국으로부터 문화를 흡수해 온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 의미에서 韓流붐은 결코 일시적 현상이 아니다.

나는 日韓관계에 대해서는 낙관주의자다. 韓國과 日本은 자유와 민주주의, 기본적 인권과 법의 지배라 하는 가치를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참으로 日韓관계의 기반이 아닐까. 우리들이 과거에 대해 겸허하고, 예의 바르게 미래지향으로 가는 한 반드시 양국 관계는 좀더 좋게 발전해 가리라 생각한다. 양국의 기반을 강화하기 위해서도 EPA(경제연휴협정)의 체결을 진행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아베 신조의 아시아 정책은 중국의 대두를 의식한 印度·濠洲와의 유대강화인 것 같다.

<과거 나의 조부 岸信介가 印度를 방문했을 때 네루 수상이 환영 군중을 향해 『우리는 宗主國인 英國에 대적할 수 없다고 생각했지만, 일본은 日露전쟁에서 러시아에 이겼다. 당시 나도 印度의 독립에 일생을 걸 결심을 했다』고 연설한 일도 있지만, 印度의 여론조사에서 친밀감을 느끼는 국가의 넘버 원은 항상 日本이다>

<다만 유감스럽게도 日本과의 교류가 미미하고, 경제관계도 희박했다. 이제까지는 「외짝사랑」의 관계에 있었음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10년 전, 홍콩을 포함한 日中 무역량이 日美를 상회하게 된 것을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것처럼 10년 후에 日印관계가 日美, 日中을 상회한다고 해서 결코 이상하지 않다>

아베는 한국을 제외한 「아시아 데모크라틱 G3+미국」의 동맹을 추구하고 있다. 그것의 목적은 自明하다.

<親日的인 민주주의 국가 인도와 2006년에 日·美·豪 각료급 전략대화를 개최해 성공시킨 濠洲는 자유, 민주주의, 기본적 인권, 법의 지배라고 하는 보편적 가치를 日本과 공유하고 있다. …日·美·印·濠 4개국(아시아·대양주 데모크라틱 G3 + 美國)의 頂上 또는 外相 레벨의 회합을 개최해 아시아에 있어서 이러한 보편적 가치관을 다른 나라들과 共有하기 위해 공헌하고, 협력할 것인가에 대해 전략적 개념으로부터 협의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그것은 훌륭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日本은 그것을 위해 리더십을 발휘할 필요가 있다.

…또 중앙아시아와의 관계 구축은 에너지 전략상 대단히 중요하다. 나아가 서양과 동양의 接點에 위치하는 親日國 터키와의 전략적 대화를 視野에 넣는 것에 의해 日本 외교에 새로운 地平이 열리게 될 것이다>


『北朝鮮의 일본인 납치는 국가안보가 걸린 중대 문제』

아베 신조는 제3장 「自立하는 국가」에서 북한의 일본인 납치문제, 북한의 미사일 발사에 대한 경제제재 조치 등을 비중 있게 다루고 있다.

<나를 (북한이 저지른) 납치문제의 해결로 내몬 것은 무엇보다도 日本의 주권이 침해되어 일본 국민의 인생이 빼앗겼다고 하는 사실의 중대성 때문이었다. 공작원이 우리나라에 침입해 우리나라 국민을 납치해 그들의 對南공작에 사용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안전보장이 걸린 중대 문제이다>

<고이즈미 총리와 金正日 국방위원장에 의한 첫 日朝 정상회담으로부터 1개월이 지난 2002년 10월15일 蓮池薰씨 등 5명의 납치피해자가 全日空機로부터 내렸다. 24년 만에 밟는 고국의 땅이었다(이들은 2주 정도의 귀국이었기 때문에 돌아가지 않으면 북한에 남겨 놓은 가족들이 보복을 당할까 걱정해 영구귀국의 의사를 밝힐 수 없는 형편이었다)>

<나는 『그들의 意志를 표출시켜서는 안 된다. 국가의 意志로써 5명은 보내지 않는다고 표명해야 할 것이다. 자유로운 意志 결정이 가능한 환경을 만드는 것은 정부의 책임이다』라고 생각했다. …최종적으로 나의 판단으로 「국가의 意志로서 5명은 보내지 않는다」고 방침을 정했다. 나는 고이즈미 총리의 승낙을 얻어 그것은 정부 방침으로 결정했다>

<기업의 주재원을 비롯 해외에서 활동하고 있는 일본인은 많다. 범죄자 및 테러리스트에 대해 「일본인에게 손을 대도 日本 국가가 침묵하지 않는다」고 하는 자세를 보이는 것이 해외에 있는 일본인의 경제활동을 지키는 것에 연결된다.

美國은 한국전쟁에서 5만여의 전사자를 냈지만, 반세기 이상 지난 지금도 당시의 유골을 최후의 1구까지 수집한다는 자세로 일관하고 있다. 또 해외에서 自國의 인권이 침해당한다면 軍을 전개하는 것도 불사한다>

<2006년 7월5일, 북조선은 잇달아 미사일을 발사했다. 사실, 우리 정부는 상당히 오래 전부터 이 사태가 일어날 것을 상정하고 있었다. 그래서 신속한 대응이 가능했다고 생각한다. …예컨대 시퍼 대사가 당일 이른 아침에 (총리)관저를 방문해 나(관방장관―편집자 注)와 방위청장관, 외무대신과 회담을 가졌던 것도 그 일환이다. 또 나를 중심으로 대책팀을 만들어 정보 수집·분석 및 대응책에 대해 협의하고 있다>

<협의는 관방장관실에서 거듭되어 검토항목은 여러 부문에 걸친 것이었다. 복수의 마사일이 발사될 가능성, 着彈지점의 想定, 制裁를 포함한 대응책과 그 효과만 아니라 국민에의 周知 방법, 안보회의 및 閣議의 진행방식, 나아가 북조선의 의도 등에 대해서였다. 납치문제에 대해서도 당연히 검토했다.

그리고 미사일 발사 前日인 7월4일에는 검토항목이 늘어나 9항목의 제재조치안이 정리되었던 것이다. 이번 미사일 발사에 대한 일련의 대응을 통해 日美동맹이 얼마나 중요하고 유효하게 기능하고 있는지 日本 국민도 잘 이해할 수 있지 않았나 생각한다.

…그 결과 정부는 당면의 대응으로서 만경봉호의 입항 금지 등의 제재조치를 결정하고, 더욱 엄격한 경제제재 조치의 검토에 들어갔다. 북조선에 대한 경제제재의 목적 중 하나로 정권 中樞의 주변 및 黨·軍에 들어가는 자금을 막는다는 것이다. 정권을 붕괴시키는 결정타는 아니더라도 化學변화를 일으킬 가능성이 충분하기 때문이다>

<북조선에서는 軍 및 黨, 특수기관 등이 海産物 채취 해안을 관리하고, 일반인들이 수확한 모시조개·성게·바지락 등을 일본에 수출해 외화를 벌어들인다고 한다. 벌어들인 외화는 인민에게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軍을 기름지게 하는 것이다.

경제제재를 시행하면 지배계급이 곤궁하기 전에 서민이 굶주린다는 비판이 있지만, 모시조개의 수출을 막으면 군 및 당의 외화벌이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오히려 그 모시조개가 서민의 입에 들어갈 가능성이 높게 된다. 경제제재와 동시에 WFP(유엔세계식량계획)을 통한 人道的 식량지원을 한다는 방법도 고려되고 있다. 다만, 진짜 서민의 입에 들어가는 것인지 끝까지 지켜보는 조건을 붙이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독립 지키지 않으면 열강의 식민지로 되고 만다』

<당시(19세기 중엽―편집자 注) 日本 지식인이 느낀 위기감의 배경에 있었던 것은 아편전쟁이었다. 1842년의 제1차, 1850년의 제2차 아편전쟁의 패배에 의해 中國이 배상금 지불에 더하여 홍콩을 할양해야 했기 때문이다.

日本도 그렇게 되지 않을까 라고 걱정했던 사람들 중에 개명적인 사람―佐久間象山(사구마 쇼잔)을 비롯한 吉田松陰, 勝海舟(가쓰 가이슈), 坂本龍馬(사카모토 료마) 등은 海防의 중요성을 일찌감치 지적했다>

<1858년, 日本은 日美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한 후 英國·러시아·네덜란드·프랑스와 같은 모양의 조약을 체결했지만, 그것들은 가혹한 내용이었다. 來日하는 외국인은 모두 治外法權과 같은 특권을 누린 것에 비해 일본에는 關稅 자주권도 없었다. 또 각국에 대해 최혜국 대우를 부여하는 한편, 일본은 최혜국 대우가 주어지지 않는다고 하는 실로 불평등한 조약이었다.

…明治의 일본인은 이 불평등 조약을 개정하기 위해 대단히 苦勞했다. 일본이 관세 자주권을 회복해 美國과 진짜로 대등하게 된 것은 日露전쟁에서 승리했던 후인 1911년(明治 44년)의 일이었다>

<明治 이후의 日本은 西歐 열강이 아프리카 및 아시아의 식민지 분할을 시작하고 있던 중이어서, 통치하는 쪽으로 전환할 것인가, 통치되는 쪽이 될 것인가, 양자택일을 강요당했다. 자유와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美國조차 필리핀, 하와이에의 진출을 개시하려 하였다. 明治의 국민은 어쨌든 독립을 지키지 않으면 열강의 식민지로 되고 만다는 위기감을 공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吉田松陰의 말을 인용한 아베의 出馬선언
「월간 松下村塾」창간호(2004. 10). 표지의 캐리커처는「幕末志士의 스승」요시다 쇼인.

지난 9월1일 오전 8시40분, 필자는 아베 신조의 지역구(시모노세키) 사무실을 방문했다. 여자 사무원 둘만 출근해 있었다. 아베는 지난 8월12일, 시모노세키에서 사실상의 自民黨 총재 출마 선언을 했다.

『사무라이 된 者, 그 志를 세워야 그 뜻한 바, 氣 또한 좇는다』

아베는 사실상 출마 표명의 자리에서 幕末의 사상가 요시다 쇼인의 말을 인용했다. 어린 시절의 아베는 잠자리에서 그의 外祖父 기시 노부스케로부터 요시다 쇼인과 다카스기 신사쿠의 이야기를 자장가처럼 들으며 성장했다고 한다.

오전 9시30분이 지났지만, 아베의 지구당 사무실에는 여직원 둘 이외엔 출근하지 않았다. 공교롭게도 9월1일은 아베가 東京에서 공식 출마 선언을 하는 날이어서 그런 것 같았다. 夫君 아베를 대신해 지구당 사무실을 지킨다는 아키에(昭惠) 여사도 東京에 올라갔다고 한다.

차 한 잔을 대접받은 후 사무실을 둘러보았다. 벽면에 부착된 축소형 神社가 유달리 필자의 눈길을 끌었다. 지구당 사무실에 그런 神社를 설치했다면 아베는 신토(神道)의 신자이거나 그 동조자인 것이다. 필자는 앞으로 신토를 이용한 역사왜곡이나 인국에 대한 멸시 등 부작용만 발생하지 않는다면, 남의 나라 고유종교에 대해 왈가왈부하고 싶지 않다.


「幕末志士의 物主」 白石正一郞
시모노세키의 가메야마 神社를 경건한 자세로 참배하는 일본의 新世代 여성. 신토(神道)는 일본 고유의 종교로서 日本 國粹主義의 子宮이 되었다.

시모노세키에는 아직도 답사해 볼 곳이 남아 있었다. 아베의 지역구 사무실에서 나와 택시를 잡아 타고 운전사에게 「다카스기 신사쿠가 終焉(종언)한 곳」으로 가자고 청했다. 택시는 시모노세키驛에서 북쪽으로 뻗은 국도 191호를 700m쯤 올라간 다음 우회전해 골목 안으로 들어가 웬 사찰 앞에 정차했다. 그 사찰 정문 앞 빈터가 28세의 신사쿠가 폐결핵으로 요절한 곳인 林山九郞의 집이 있었다고 한다.

林山九郞의 집터에서 나와 신사쿠의 최대 후원자였던 豪商 시라이시 쇼이치로(白石正一郞·1812~1880)의 옛집 터를 찾아나섰다. 시모노세키驛을 향해 내려오면서 40代 남자 행인에게 위치를 물으니 친절하게 현장까지 동행해 준 후 되돌아갔다.

시모노세키驛으로부터 걸어서 5분 거리인 「中國전력 시모노세키 영업소」 건물 바로 옆에 쇼이치의 옛집터임을 알리는 작은 표석 하나가 세워져 있다.

쇼이치로는 시모노세키港을 근거지로 한 운송선 업자로서 사카모토 료마 등 志士들에게 사재를 털어 원조한 인물이다. 시모노세키에 들른 사이고 다카모리 등 400명 이상의 「志士」가 그의 집에서 숙박했다. 막말 시모노세키는 일본 상선의 기항지로서 海陸산물이 집산한 「西의 浪華(오사카)」로서 번영해 志士들이 빈번하게 왕래했다.

그는 특히 신사쿠와의 교분이 두터워 奇兵隊는 하쿠세키의 집에서 결성되었다. 동생과 함께 스스로 奇兵隊에 입대해 사무라이 지위를 얻었다. 그의 재산은 奇兵隊 후원 등으로 탕진되었지만, 신사쿠의 요절로 報答을 받지 못했다. 明治維新 후에는 어느 神社의 宮司가 되었다.

시모노세키驛에서 버스를 타고 10분 거리의 가라도(唐戶)에서 하차했다. 가라도에는 답사 첫날 날이 저물어 둘러보지 못한 가메야마(龜山) 포대로 올라갔다. 1863년 시모노세키 해협을 통과하던 미국 상선에 제1탄을 날렸던 곳이다.

가메야마 포대는 가메야마 神社 경내에 있다. 호젓한 신전 앞에서 청바지 차림의 처녀가 신전 앞에서 손뼉을 두 번 「탁탁」 치고 난 뒤에 두 손 모아 기도하는 모습을 목격했다. 티셔츠가 말려 올라가 등허리가 보일 정도였지만, 매우 진지해 보였다. 무슨 패션인지 도무지 알 수 없었지만, 그녀 허리띠 가방(벨트 색)에는 큰 가위가 비수처럼 꽂혀 있었다.

신사 경내엔 「이토 히로부미 公爵 부처 史蹟(사적)」이란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안내판엔 「1865년 초여름, 刺客에게 쫓기던 이토 히로부미가 가메야마 神社 경내에서 찻집 아가씨였던 기타 우메코(木田梅子)에게 도움을 받은 것이 인연이 되어 그 1년 후에 부부가 되었다」는 내용 등이 적혀 있었다.

一見하면 매우 로맨틱하게 들리는 일화이지만, 그때 이토에겐 하기(萩)에서 그를 기다리는 糟糠之妻(조강지처)가 있었다. 이토는 우메코와 재혼하면서 조강지처를 버린 인물이었다.

明治정부의 고관대작으로 출세한 이토의 여성 편력을 보면 그가 매우 주도면밀한 인물임을 알 수 있다. 당시 日本에서는 高官이 지방 출장을 가면 으레 지방장관이 베푼 연회석상에서 마음에 드는 美女를 골라 侍寢(시침)을 받게 되어 있었다.

이때 이토는 굳이 제1의 미녀를 사양하고 次上級 미녀를 선택했다. 그 이유는 제1의 미녀는 거의 대부분 지방장관의 情人이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런 까닭일까, 이토는 지방장관들에게 인기가 높았다. 필자는 한번 크게 웃으면서 안내판의 다음 문구를 보았다.


韓日 關係史에 대한 양국 국민의 정서

「이토 히로부미는 明治 신정부를 수립해 초대 내각 총리대신으로서 身命을 다하던 중 明治 42년(1909) 兇彈(흉탄)에 쓰러졌다. 우메코는 大正 13년에 77세로 죽었다」

兇彈이라면 하얼빈 역두에서 安重根이 쏜 正義의 총탄을 말한다. 韓日관계사 인식에 있어서 韓·日 양국민의 정서는 「正義의 총탄」과 「兇彈」의 차이만큼 크다.

일본으로선 이토의 죽음이 손해가 아니었다. 이미 결정된 일이긴 하지만, 韓日합병 일정을 앞당기는 구실을 얻었기 때문이다. 韓國人에게 있어 安重根은 民族史에 빛나는 인물이다. 國權 강탈의 치욕을 강박한 이토를 韓國人 중 아무도 쏘아 꺼꾸러트리지 않았다면 韓國史는 너무 쓸쓸할 뻔했다.

필자는 1895년 4월17일 淸·日 양국의 전권대표였던 李鴻章과 이토 히로부미가 시모노세키 조약을 체결했던 요정 春帆樓, 시모노세키 영국영사관 터 등지를 둘러보고 오후 6시 귀국선을 타기 위해 시모노세키 국제터미널에 도착했다.●

<다음 호는 「朝鮮의 開港과 江華島條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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