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조선 기사

[鄭淳台 기자의 역사현장 탐방] 중국 廣西 壯族자치구

『百濟墟는 바다의 실크로드를 향한 百濟의 무역거점』

글 정순태 기자  2007-0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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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廣西(광서·광시)에 百濟(백제)가 살아 있다고 합니다. 이번에 그곳으로 百濟문화개발연구원의 답사단이 떠나는데, 함께 가지 않겠습니까』

필자에게 이런 권유를 했던 분은 상명大 사학과 申瀅植(신형식) 교수이다. 申교수가 함께 가자는 「廣西」는 壯族(장족·좡쭈) 1500만 명을 포함해 4800만 명이 거주하는 省級(성급) 自治區(자치구)다. 淸朝(청조)와 中華民國(중화민국) 시기에 이곳은 廣西省이었다. 동쪽으로 廣東省(광동성), 북쪽으로 湖南省(호남성)과 貴州省(귀주성), 서북쪽으로 雲南省(운남성), 남쪽으로는 南中國海(남중국해)와 베트남에 둘러싸인 지역이다.

중국에는 漢族(한족) 이외에 55개 소수민족이 있다. 이 소수민족들은 중국 전체 인구의 약 8%에 불과하지만, 이들의 거주지역은 全국토의 64%에 달한다. 인구면으로 볼 때 최대의 소수민족은 壯族이며, 제2위 滿洲族(만주족), 3위 回族(회족), 4위 苗族(묘족), 5위 ?族(이족)이다. 분리·독립을 요구해 중국 정부를 민감하게 만들고 있는 티베트종족은 藏族(장족)이다.

중국 최대의 소수민족인 壯族은 중국역사상의 越族(월족), 즉 베트남 종족이다. 광서壯族자치구라지만 종족별 인구를 보면 漢族이 壯族의 2배에 달하는 3000만 명으로 절대다수이다.

―百濟 사람들이 무슨 까닭으로 그렇게 먼 중국 남쪽 끝에까지 가서 살았다고 합디까.

『나도 잘 모르겠습니다. 원광大 蘇鎭轍(소진철) 교수가 1차 답사를 통해 廣西의 省都인 南寧(남녕·난닝)市 남쪽 50km 지역에 百濟鄕(백제향)과 百濟墟(백제허)가 있다는 사실을 확인·보고해 이번에 답사단이 조직된 겁니다』

소진철 교수는 현재 원광大에서 정치사상을 강의하고 있지만, 1960년부터 1985년까지 외무부에서 재직하면서 싱가포르·아프가니스탄·요르단 대사 등을 역임한 직업외교관이었다. 외무부에서 퇴직한 후에는 美 버클리大에서 연구교수를 지냈고, 저서로는 「한국전쟁의 기원」(1996), 「일본문화의 뿌리와 한국」(共著·2000), 「金石文으로 본 백제 武寧王(무녕왕)의 세계」(日語版·2000) 등이 있다. 신형식 교수에게 다시 물었다.
시골 시장으로는 의외로 규모가 큰 百濟鄕 시장. 부침개를 사려는 壯族 여인.

百濟鄕위원회 앞에서 기념촬영한 백제문화개발연구원 답사단. 뒷줄 오른쪽부터 尹亨燮 고문(前 건국大 총장), 신형식 상명大 교수, 黃奇科 百濟鄕 문화원장, 趙富英 연구원 원장(前 국회부의장), 百濟鄕 서기, 소진철 원광大 교수, 申柄淳 연구원 이사, 李容國 연구원감사. 앞줄 오른쪽으로부터 金起燮 교수(漢城百濟박물관건립추진위원), 崔秉植 박사(도서출판 주류성 사장), 徐程錫 公州大 교수.


백제의 해외 개척史
답사단을 안내한 원광大 소진철 교수.

―白濟鄕과 百濟墟라면 혹시 백제 멸망(서기 660년) 후 唐(당)나라로 끌려간 백제사람 1만2000명이 集團徙民(집단사민)을 당한 곳 아닙니까.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소진철 교수에 의하면 그곳은 百濟가 해외에 개척한 擔魯(담로) 중 하나라고 합디다. 자세한 것은 蘇교수에게 물어보세요』

百家濟海(백가제해: 수많은 집안이 바다를 건너왔다)로부터 나라의 이름이 유래되었다는 百濟는 과연 해외진출에 적극적이었던 왕조이다. 일부 백제 연구가에 의하면 백제는 해외에 22개 담로를 두고 왕자와 왕족을 보내 다스리게 했다. 耽羅(탐라: 지금의 제주도), 일본 오사카灣 입구에 떠있는 섬 淡路(담로·아와지) 등은 백제의 해외진출사를 반영하는 흔적이라는 것이다.

―이번 답사단에는 어떤 분들이 참여합니까.

『소진철 교수가 안내하고, 백제개발연구원장 趙富英 前 국회부의장, 尹亨燮 前 건국大 총장, 金起燮 박사(漢城백제박물관건립 전문위원), 徐程錫 교수(公州大 백제문화연구소장) 등 10여 명입니다. 저도 갑니다』

―그런 좋은 기회를 마다할 수 있겠습니까. 저도 따라가겠습니다. 백제향과 백제허 관련 자료를 미리 제게 좀 보내줄 수 있겠습니까.

『소진철 교수에게 부탁해 보겠습니다』

그로부터 며칠 후 同연구원에서 필자에게 「廣西 백제향 유적 답사 안내문」과 소진철 교수의 저서 「金石文으로 본 백제 武寧王의 세상」(원광大 출판국)과 논문 몇 편을 보내 주었다.


黑齒常之의 非常한 삶과 죽음
洛陽의 북망산에서 발견된 흑치상지 묘지명 탁본 일부.

지난 12월10일 오전 7시, 소진철 교수와 필자는 仁川국제공항 3층 H카운터 앞에서 처음 만났다. 중국 東方航空의 上海행 여객기에 탑승한 후 필자는 蘇교수의 옆자리에 앉아 이런저런 문답을 나누었다.

―廣西지역에 백제향과 백제허라는 곳이 있다는 얘기는 얼핏 듣기는 했습니만, 그곳이 百濟부흥전쟁 시기의 장수 黑齒常之(흑치상지)의 출신지라는 사실은 몰랐습니다. 4년 전(2002년) 蘇교수께서 그곳을 답사해 확인하셨다는데, 어떤 정보에 의지해 그런 오지를 답사하셨습니까.

『北京의 中央民族大學 黃有福(황유복) 교수가 제게 몇 권의 책을 소개해 줍디다. 黃교수가 소개한 鄭福田 主編의 「中國將帥全集(중국장수전집)」을 펼쳤더니 「黑齒常之(?~689년), 唐 高宗 李治, 武則天(무측천=측천무후)時 名將, 百濟(今 廣東 欽縣(흠현) 西北) 西部人」이란 문구가 눈에 띕디다』

우선, 여기서 흑치상지가 누구인가를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다. 흑치상지는 백제 부흥군의 깃발을 제일 먼저 올린 인물이다. 키는 7척, 용맹하고 지략이 있어 달솔(백제 16관등 중 제2위)이 되어 風達將軍(풍달장군)을 겸했다.

660년 7월 羅唐연합군이 백제의 수도 사비성을 함락시킨 직후 흑치상지는 義慈王(의자왕)을 따라 唐將 蘇定方(소정방)에게 항복했다. 그러나 蘇定方이 전승축하연에서 의자왕에게 술을 치게 하는 등 수모를 주면서 백제유민들을 약탈하자 흑치상지는 분개했다.

그는 패잔병들을 수습해 그의 근거지로 보이는 任存城(임존성)에 들어가 백제의 부흥을 꾀했다. 蘇定方은 임존성을 공격했으나 이기지 못하고, 唐軍 1만 명을 잔류시키고 9월 초 귀국했다. 흑치상지는 의자왕의 4촌동생 福信(복신), 僧將 道琛(도침)과 합세해 200여 城을 수복했다. 이들은 日本에서 귀국한 의자왕의 장남 扶餘豊(부여풍)을 왕으로 받들고 기세를 올렸다.

그러나 복신이 도침을 죽이고, 부여풍이 복신을 죽이는 지도부 내부의 유혈 권력투쟁이 빚어지고 말았다. 그 직후인 663년 8월 白村江전투에서 백제-왜국 연합군이 나당연합군에게 대패하고 부흥군의 최대 근거지 周留城(주류성)이 함락됨으로써 대세가 기울고 말았다.

이런 상황에서 흑치상지는 唐將 劉仁軌(유인궤)에게 항복했다. 唐軍에 종군하던 의자왕의 태자 扶餘隆(부여융)의 설득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이어 흑치상지는 唐軍을 이끌고 遲受信(지수신)이 지키던 백제부흥군의 최후 근거지 任存城을 함락시켰다.

이후 흑치상지는 左領軍將軍 겸 웅진도독부 司馬로 재직하다가 백제 고토가 신라의 지배하로 편입되자 唐에 들어가 678년 吐藩(토번)을 정벌하고, 681년 토번의 잔당인 贊婆(찬파)를 토벌하고, 그밖에 突厥(돌궐)을 정벌하는 등 혁혁한 공을 세우는 동안 左武威衛大將軍上柱國燕國公(좌무위위대장군상주국연국공)」, 燕然道大摠管 등의 요직을 역임했다.

58세 때인 687년 흑치상지는 懷遠軍經略大使가 되었다. 이때 좌감문위중랑장 찬보벽과 연합작전으로 돌궐 토벌에 나섰다. 그러나 찬보벽이 戰功을 탐내어 흑치상지와 함께 계획을 세우라는 조칙이 내려왔음에도 불구하고 독단으로 무리한 진격을 감행하다가 전군이 패몰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찬보벽은 참수형을 받았으며, 흑치상지도 공을 세우지 못했으므로 문책을 받게 되었다.

그런 가운데 흑치상지는 「酷吏(혹리)」로 알려진 周興(주흥)의 무고로 우응양장군 趙懷節(조회절)의 반란에 관련했다는 누명을 쓰고 옥사했다. 조회절 모반사건은 현재까지 그 진상이 알려진 바 없다. 唐제국은 국초의 府兵制(부병제: 일종의 국민개병제)가 붕괴한 후 職業兵(직업병) 및 傭兵(용병)부대에 국방을 맡겼지만, 그 지휘관에 대한 감시는 철저했다.

그 대표적인 것이 「告密」이라는 비밀경찰제도였다. 이 제도는 밀고자에게 후한 상과 관직을 부여함으로써 무고한 투서를 조장하는 결과를 빚었다.

억울하게 죽은 흑치상지는 그의 장남인 黑齒俊(흑치준)의 노력으로 698년 신원되었고, 左玉鈐衛大將軍(좌옥검위대장군)으로 추증되었다.

그가 죽은 지 10년째 되는 해인 699년 1월22일 측천무후가 흑치상지의 죽음을 위로하는 制書와 改葬(개장)을 허락하는 조칙을 내렸다. 이에 따라 그의 무덤은 당시 王侯將相(왕후장상)의 묘역인 낙양 북망산으로 이장되었다. 바로 그러한 흑치상지의 묘지명이 1929년 중국 洛陽(낙양)의 北邙山(북망산)에서 한 도굴꾼에 의해 발견되었지만, 세상에 알려지지는 않았다. 그로부터 반세기가 지난 1986년 중국의 金石銘文 수집가 李希泌(리시비)에 의해 그 銘文(명문)이 공개되었다.

『그 墓誌銘(묘지명)은 「新唐書(신당서)」·「舊唐書(구당서)」·「三國史記(삼국사기)」에 「百濟 西部人」이라는 글귀를 남기고 역사의 뒤안으로 사라진 흑치상지의 出自뿐만 아니라 黑齒國의 비밀을 푸는 데 결정적 열쇠가 되었습니다』


黑齒國의 비밀을 푸는 결정적 열쇠
百濟鄕 거리의 잡화점 내부.

洛陽의 북망산에서 발견된 흑치상지의 묘지명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諱(휘: 이름) 常之 子 恒元(환원) 百濟人也, 其先 出自 扶餘氏 封於 黑齒, 其家世承爲達率… 曾祖 諱 文大, 祖 諱 德顯, 考 諱 沙次 ?官至達率>(이름은 상지, 자는 환원, 그 조상의 출자는 扶餘씨(백제의 國姓)로서 흑치에 봉해졌다. 그 집안은 세세로 이어가며 달솔이 되었다. 달솔의 직책은 지금 병부상서와 같은데, 본국의 2품관이다. 증조부의 이름은 문대, 조부의 이름은 덕현, 부친의 이름은 사차로서 모두 관등이 달솔에 이르렀다)

『위의 銘文에 의하면 백제 王은 흑치상지의 증조부 文大를 처음으로 흑치국의 侯王(후왕) 또는 총독과 같은 벼슬에 봉한 것 같은데, 그 시기가 언제인지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흑치상지의 출생연도가 630년경으로 추정되기 때문에 그 증조부 文大는 550년경에 흑치국에 봉해진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흑치국도 백제의 담로국 중 하나라는 말씀이십니까(南朝의 梁 元帝가 쓰고 그린 「梁職貢圖(양직공도)」에 의하면 백제 武寧王(무녕왕)은 당시 22개 담로국과 9개 旁小國(방소국)을 두고 다스리고 있었다).

『백제는 무녕왕 시기에 왜국을 비롯한 여러 담로 지역에 대왕의 子弟宗親(자제종친)을 侯王으로 봉한 사실은 제가 여러 고증을 통해 밝힌 바 있습니다. 흑치국도 그러한 담로의 하나로 보입니다』

―흑치국의 위치에 대해 학계의 견해는 엇갈리고 있습니다. 흑치국을 필리핀, 심지어는 中美의 에콰도르로 比定(비정)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중국의 역대 史書에 黑齒·黑齒族·黑齒國에 관한 기사가 있는 것으로 보아 黑齒國은 중국의 주변국으로서 그 역사가 꽤 오래된 것으로 보입니다. 특히 중국 양자강 이남 지역에서는 주로 越族들이 檳?(빈랑)이라는 나무 열매를 常時로 씹기 때문에 이와 입술이 벌겋게 되었다가 차츰 검게 착색되어 黑齒人이 된다고 합니다』

―일본 天皇 즉위 때의 중요 의식 중 하나인 大嘗祭(대상제)에서 천황은 아직도 이에 검은 물을 들인다고 합니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 보면 黑齒의 풍습은 東아시아의 아열대 또는 열대 지역에 비교적 광범위하게 분포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흑치족의 거주지는 중국 동남부로부터 서남부로 이르는 지역과 동남아시아 지역에 이르게 되는데, 그중 일부가 비교적 잘 조직된 권력집단을 만들어 이른바 흑치국이 존재하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山海經」, 「呂氏春秋(여씨춘추)」, 「管子(관자)」, 「博物志(박물지)」, 「史記(사기)」에 중국의 동쪽과 남쪽에 흑치국이 존재하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南朝 시기의 역사를 기록한 중국의 正史 「宋書(송서)」와 「梁書(양서)」에는 백제가 遼西(요서)와 晉平(진평)을 경영했던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흑치국의 위치를 어디로 보십니까.

『「宋書」에는 「廣州 鬱林郡(울림군) 소속 晉平縣이 있는데, 吳나라 때 長平縣을 晉 武帝 太康 원년(서기 280년)에 晉平縣으로 改名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1995년판 「中國地圖集」에는 「宋나라(南朝 시기의)가 설치했던 晉平郡 경내에 지금까지 百濟라는 지명이 남아 있는데, 현 廣西壯族자치구 欽寧縣(지금의 欽州市) 소속 白濟鄕이 그것」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백제향을 흑치국의 治所(치소: 통치기구의 소재지)라고 봅니다』


太平天國의 진원지였던 廣西
필자와 인터뷰하는 百濟鄕 문화원 黃奇科 원장. 오른쪽은 소진철 교수.

百濟鄕 유적 답사단은 지난 12월10일 오전 10시5분 上海의 浦東(포동·푸둥)국제공항에 도착했다. 上海에서 1박하면서 上海박물관 등을 둘러본 답사단은 11일 오후 虹橋(홍교·훙차오) 공항으로 이동했다. 갯벌과 황무지였던 浦東에 국제공항과 신도시가 건설되기 10여 년 전만 해도 훙차오 공항은 중국 제1의 국제공항이었지만, 이제는 上海의 국내선 공항으로 쓰이고 있다.

훙차오 공항에서 中國南方航空 여객기에 탑승하여 3시간여 만인 오후 5시 南寧(남녕·난닝) 공항에 착륙했다. 현재 廣西壯族자치구의 정치 중심지인 南寧市는 漢代의 鬱林郡(울림군), 唐代의 邕州縣(옹주현)이었다. 南寧이란 지명은 元代로부터 사용된 것이라 한다.

이곳은 교통의 요충으로서, 특히 베트남으로 가는 철도가 지나고 있다. 베트남과의 국경선 상에 위치한 憑祥(빙상·핑샹)市의 友誼關(우의관)까지는 약 180km. 友誼關에서 베트남의 수도 하노이까지는 135km에 불과하다. 1979년 中越전쟁 때 중국軍은 「교훈을 주기 위해」 友誼關 일대를 공격했지만, 베트남軍의 철저한 방어전에 고전한 끝에 먼저 화의를 제의하고 병력을 철수시켰다. 교훈을 주려다 오히려 교훈을 받았던 셈이다.

남녕 시가지를 남북으로 가르는 邕江(옹강)을 건너 숙소인 명도신원호텔에 도착했다. 시가의 가로수로 열대 과일인 망고와 파초가 많아 남쪽 나라의 느낌이 물씬하다. 평균 기온이 20℃ 안팎이고 연중 가장 춥다는 1월에도 5℃ 이상으로 사시사철 푸르름을 유지해 「녹색의 도시」라 불린다. 연평균 강우량은 약 2000mm. 연중에 비 오는 날, 흐린 날, 햇빛 비치는 날이 각각 3분의 1이라 한다.
百濟墟를 안내해 준 74세의 壯族 羅能承(오른쪽)씨와 필자.

廣西는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지만, 그 지리적 조건으로 인해 중국 역사의 前面에 등장한 일이 별로 없는 지역이다. 그러나 19세기 후반, 이곳이 중국을 뒤흔든 大동란의 진원지가 되었다. 그것이 「滅滿興漢(멸만흥한)」의 기치를 높이든 太平天國(태평천국)의 봉기였다.

태평천국의 天王이 된 洪秀全은 인근 광동성 花縣(화현) 출신이지만, 포교활동과 혁명운동을 시작한 것은 광서의 桂平縣(계평현)에 있는 金田村(금전촌)이었다. 홍수전을 보좌한 5人의 최고간부 중 南王인 馮運山(풍운산)을 제외한 4人(東王 楊秀淸, 西王 蕭朝貴, 北王 韋昌輝, 翼王 石達開)은 모두 廣西 사람이었다.

남녕시로부터 桂平縣까지는 자동차로 약 5시간, 계평현에서 金田村까지는 약 30분 걸린다고 한다.

洪秀全이 지도한 태평천국이 금전촌에서 거병한 것은 1851년 1월11일. 태평천국軍은 1853년 南京을 점령, 이곳을 「天京」으로 改名하고 1864년 패망할 때까지 10여 년에 걸쳐서 淸朝와 중국 천하를 兩分했다. 內訌(내홍)과 열강의 간섭에 의해 10여 년 만에 패망했지만, 滿洲族(만주족) 정권에 대한 漢族(한족)의 저항이라는 점에서 그 후 孫文(손문)과 毛澤東(모택동)의 혁명에 큰 영향을 주었다.


壯族은 아직도 百濟墟를 「대백제」라 發音
百濟墟 百濟家 소재 壯族들의 가옥에서 목격된 맷돌(사진 위)과 외다리방아(사진 아래). 오늘날 전라도 오지에서도 발견되는 형태이다.

12월12일 오전 8시30분, 답사단 일행은 南寧市 新園호텔에서 백제향 백제허를 향해 출발했다. 전세버스에 승차한 후 옆자리에 앉은 소진철 교수에게 물었다.

―「梁書」에는 「百濟가 스스로 晉平郡에 百濟郡을 두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만, 蘇선생께서 지금의 百濟鄕 百濟墟를 옛 百濟郡의 治所로 판단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우선, 百濟墟라는 이름 자체를 주목해야 합니다. 「墟(허)」의 뜻은 성터(城跡·성적) 또는 遺跡地(유적지)이고, 百濟는 東아시아 史上 저명한 고유명사입니다. 따라서 그것은 百濟郡의 옛 治所가 아니고서는 붙일 수 없는 지명인 것입니다』

남녕시 중심가에서 백제향까지의 거리는 약 50km. 남녕 시가지를 벗어나면 도로의 연변이 온통 사탕수수 밭이다. 흙 색깔은 우리나라 전라도 땅처럼 붉다. 광서壯族자치구에서는 중국 설탕 생산량의 3분의 2를 차지하고 있다고 한다. 샛강에서 헤엄치는 검은색의 물소와 흑갈색의 물오리가 자주 눈에 띈다. 약 두 시간 만에 백제향에 도착했다.

地名은 종전의 邕寧縣(옹녕현) 백제향에서 최근에 남녕시 邕寧區(옹녕구) 백제향으로 바뀌어 있었다. 「百濟세무소」, 「百濟鄕 인민정부」, 「百濟중학교」, 「百濟중심유아원」 등 百濟 간판 일색이다.

「百濟鄕 宣傳文化站(선전문화참)」을 방문해 黃奇科(황기과) 원장을 만났다. 선전문화참은 향토사를 연구하는 업무 이외에 향 단위의 스포츠·연극·문예 행사 등을 주관하는 행정기관이다. 黃원장은 자신을 壯族이라고 했다.

―黃원장의 선조들은 언제 어디로부터 와서 백제향에 정착했다고 합디까.

『우리 선조는 山東省 白馬江 유역에 살았는데, 언제인지 정확히 모르지만 오랜 옛적에 이곳으로 집단이주했다는 얘기를 어릴 적부터 나는 집안 어른들에게서 듣고 자랐습니다』

―山東省이면 까마득히 먼 곳인데, 왜 이곳까지 내려왔다고 합디까.

『華北은 원래 난리가 많은 곳이라 살기에 불안했답니다. 이곳은 땅이 비옥해 농사도 잘 되고(3모작 지대임), 水運·海運을 이용한 상업활동에도 유리했다고 합니다』

―이곳 주민수는 얼마나 됩니까.

『백제향은 4만3000명, 백제허는 7000명 정도입니다』

―백제를 이곳에서는 어떻게 발음합니까.

『중국어로 百濟는 「바이지」이지만, 壯族들은 百濟墟를 「DaeBakcae(대백제)」라고 읽습니다』

이에 대해 소진철 교수는 일본인들이 百濟를 「쿠다라」라고 부르는 현상과 같은 것이라고 보충설명했다. 흔히, 「쿠다라」는 「큰나라」의 우리 古代語에서 유래된 것이라고 한다.
百濟鄕 입구에 百濟中學(한국의 고교과정) 학생 3명이 2006년 大入학력평가에서 전국 최고등급에 오른 것 등을 열렬하게 환영한다는 내용의 플래카드가 걸려 있다.


壯族 아이들의 궁둥이에도 몽골반점이
百濟鄕 시장의 과일전.

壯族 羅能承(74)씨의 안내로 백제허의 중심거리인 百濟街로 찾아갔다. 백제가는 약간 높은 구릉 위에 형성되어 있었다. 羅노인은 『壯族 아이들에겐 몽골반점이 있다』고 말했다. 마침 마을 들머리에서 서너 살 먹어 보이는 아이가 엉덩이를 드러내 놓고 있었다. 과연 몽골 반점이 또렷했다.

폭 5~6m 거리의 양쪽에는 제법 번듯한 흙벽돌집이 나란히 줄지어 서 있었다. 집마다 대문에 「百濟街 ○○(일련번호)」라고 쓰인 문패를 달았다. 중국의 일반 농가들보다 생활수준이 좀 높게 보였다.

이곳 집집의 방앗간에는 외다리방아가 있고, 부엌엔 주둥이에 홈이 팬 맷돌이 놓여 있었다. 소진철 교수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이런 것들은 모두 옛날 백제인들이 사용했던 양식 그대로인 것 같아요. 오늘날 전라도나 일본의 오지 농촌에서나 볼 수 있는 거예요. 부엌도 중국의 立式이 아니고 우리처럼 坐式입니다』

百濟街는 바로 아래에 鄕 단위로는 의외로 큰 시장이 형성되어 있으며, 사방으로 교통로가 이어져 있다. 百濟街에서 그리 멀지 않는 곳에 團城(단성)이라는 곳에 성터와 같은 유적이 있다고 한다.

백제향에서 남중국해(北部灣)에 접한 주요 항만인 欽州(흠주)까지는 약 40km. 이 일대에는 샛강들이 실핏줄처럼 이어져 바다로 흐르고 있다. 예로부터 중국의 물류는 「南船北馬(남선북마)에 의존해 왔다. 교통수단의 大宗이 華北에서는 말(馬), 華南에서는 배(船)이었다는 뜻이다.
百濟墟의 들머리길.

백제허를 뒤로 하고 서북쪽으로 1시간쯤 달려 「大王灘(대왕탄)」이라는 마을로 찾아갔다. 백제인들은 어디를 가나 곧잘 「大王川」, 「大王浦」, 「大王宮」 같은 이름을 여기저기에 표시했다고 한다. 소진철 교수는 대왕탄 마을 앞을 흐르는 지금의 尺江을 옛날에는 「大王川」이라고 불렀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尺江은 欽州로 흘러내린다. 古代엔 바다에 접해 자연재해에 노출된 항구보다 水路로 연결되는 內陸港이 더욱 번영했다. 예컨대 세계제국 唐시기에 가장 번영한 항구는 양자강과 淮河(회하)를 연결하는 대운하의 연변에 위치한 내륙항 揚州(양주)였다.

백제허에서 동쪽으로 1시간쯤 가면 「那樓墟(나루허)」라는 마을이 있는데, 장족들은 이것도 「(DaeNaleu(대나루·大那樓)」라고 발음한다고 한다.

우리 답사단은 대왕탄에서 尺江이 내려다보이는 음식점에서 점심을 먹고 南寧市로 돌아와 바로 桂海(계해)고속도로로 진입해 400km 길인 桂林으로 북상했다. 「桂海」는 廣西의 별명이다. 중간지점인 柳州(유주)에서 桂海고속도로를 빠져나와 약 200m 東進하면 태평천국의 본거지인 桂平縣 金田村이지만, 이곳 답사는 다음 기회로 미룰 수밖에 없었다. 전세버스로 6시간을 달려 밤 11시쯤 桂林大宇(구이린따위)호텔에 도착했다.


바다의 실크로드와 강줄기로 연결되는 땅
百濟家 壯族의 벽돌집 앞에서. 오른쪽으로부터 신형식 교수, 소진철 교수, 필자.

『桂林의 산수는 천하의 甲(제1)이다』

계림의 풍광을 거론할 때 반드시 인용되는 구절이다. 이 지방은 아득한 옛날(약 3억 년 전)에는 海底(해저)였다고 한다. 오랜 세월에 걸쳐 바닷물의 침식에 의해 조성된 石灰岩(석회암)의 봉우리가 여기저기에 펼쳐져 있는데, 그 모습은 참으로 기괴하다. 계림에 오면 동양화의 奇峰(기봉)이 상상화가 아닌 사실화란 느낌을 받게 된다.

계림의 가로수는 계수나무가 많다. 특히 계수나무 꽃이 피는 10월에는 꽃향기가 온 시가지에 그득하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 桂(계)라고 하면 장미를 의미하지만, 중국에서는 바로 계수나무다.

지도를 보면 계림은 내륙부에 위치한 것으로 보이지만, 중국 남방지역엔 바다로 향한 水路가 거미줄처럼 얽혀 있는 만큼 내륙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계림 교외에서 남진하는 ?江(이강·이장)은 梧州(오주) 부근에서 南寧 시가지를 꿰뚫고 東進하는 邕江-?江(심강: 남녕시를 벗어난 이후의 江 이름)과 합류하면 珠江(주강)이 되어 廣州에 도달해 남중국해로 빠져 나간다. 廣西의 남녕과 계림이 南海貿易의 중심지인 廣東省의 廣州와 水路로 바로 연결되는 것이다.

그뿐만 아니다. 이강의 북쪽에 靈渠(영거)라는 수로에 의해 湘江(상강)과 연결되고, 그것이 양자강의 수로와 다시 이어진다. 이것은 廣西가 남북 모두 水路에 의해 문명의 중심지와 연결되었음을 의미한다.

5세기 초엽 중국인 求法僧(구법승)인 法顯(법현)은 西域(서역)으로부터 天竺(천축·인도)에 갔다가 그곳에서 해로로 귀국했다. 그 반대의 길을 선택한 구법승이 신라의 慧超(혜초: 704~?)였다. 혜초는 8세기 초엽 해로로 廣州-베트남-캄보디아-말레이반도-태국-버마-실론 등을 거쳐 印度대륙 동해안에 상륙해 거기서 다섯 天竺國(천축국)을 순례한 다음 西域 여러 나라를 거쳐 長安으로 돌아왔다. 그때 그가 저술한 세기적 기행문인 「往五天竺國傳(왕오천축국전)」 3권 중 2권은 1908년 프랑스의 동양학자 페리오 교수가 감숙성의 燉煌窟(돈황굴)에서 발견, 현재 파리 국립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다.

혜초의 大여행 루트에 의해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한반도-중국-서방과는 육상의 실크로드(비단길) 이외에 바다의 실크로드에 의해서도 연결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廣東과 廣西 지역은 北으로부터 中原 문명이 전해지고, 南과 西로부터 이역의 문화가 전달되던 南海大路(一名 「바다의 실크로드」)의 중계지였다.


人海戰術-소수민족 1000명 출연시킨 매머드 民俗 쇼
壯族의 祠堂. 집안에 조상을 모시는 제단을 차려 놓고 있다.

계림 지역은 漢代에는 零溪郡(영계군)이었다. 後漢 말 劉備(유비)와 孫權(손권)은 廣西 지역의 영유를 놓고 맹렬하게 싸웠다. 처음에는 劉備 휘하의 諸葛亮(제갈량)이 계림 지방의 행정을 담당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魏(위)·蜀(촉)·吳(오)의 중국 3國시대가 성립되면 계림과 남녕 등 廣西 지역은 손권의 吳가 차지했다.

계림의 산은 대부분 제주도의 오름처럼 나지막하지만(100m 미만), 堯山(요산·야오산)은 높이 1000m에 달한다. 20분쯤 리프트를 타고 7부 능선에 올라가 계림 시가지를 내려다보았다. 올망졸망한 山으로 둘러싸이거나, 山을 등지고 있는 시가지가 동양화를 연상케 한다.

계림을 찾는 관광객은 거의 대부분 3시간쯤 소요되는 이강 船遊(선유)를 빼놓지 않는다. 계림 시가지 동쪽 선착장에서 배를 타고 陽朔(양삭)까지 내려가는 것이다. 계림의 산수는 천하 제1이라고 이미 말했지만, 양삭의 풍광은 百聞이 不如一見이다. 가이드가 괴상한 산과 바위의 이름을 일일이 가르쳐 주었지만 너무 많아 기억할 수 없다.

이강의 명물은 가마우지를 이용한 고기잡이다. 이곳 어민들은 긴 노끈으로 발목이 묶인 가마우지를 날려 보낸다. 일정 시간 동안 밥을 굶겨 배가 고픈 가마우지는 맹렬하게 날아가 부리로 물고기를 포획하지만, 정작 자신은 배를 채울 수 없다. 목에 노끈이 묶여 있어 잔고기가 아니면 목구멍으로 넘길 수 없기 때문이다.

양삭에 도착한 후 1600년 묵은 나무 大榕樹(대용수)를 구경했다. 본래의 뿌리 이외에 가지에서도 30개 정도의 뿌리가 거꾸로 내려 뻗어 땅속에 활착하고 있는 괴상한 모습이다.

오후 8시, 양삭의 書童山 부근 2km의 이강 수역과 산봉우리를 무대로 펼쳐지는 소수민족의 민속 쇼 「印象·劉三姐(인상·유삼저)」를 1시간 동안 관람했다. 중국의 고전적 영화 「劉三姐」를 소재로 했다고 한다. 출연자는 무려 1000명. 모두 이 부근 마을에 사는 소수민족들이다. 제법 쌀쌀한 밤이었는데도 관람객이 어림짐작으로 6000명은 웃돌았다.

연출은 중국 제1의 흥행사 張藝謨(장예모) 영화감독이 맡았다. 고요한 밤에 이강과 작은 산들을 휘영하게 조명하는 가운데 펼쳐지는 민속 쇼는 환상적이다. 수백 척의 작은 배를 동원한 壯族의 가마우지 고기잡이, 평생 한 번밖에 머리를 깎지 않는 풍습 때문에 머리칼이 발끝까지 내려오는 ?族(이족) 여성의 춤, 남성의 발등을 밟아 사랑을 고백하는 苗族 여성의 몸짓 등이 인상적이었다.

장예모 감독은 「인상·유삼저」를 제작하기 위해 6000만 위안(한화 78억원 상당)을 투입해 소수민족 2000명을 2년간 지도한 다음에 1년 전부터 공연해 왔다고 한다(자금 출처는 확인하지 못함).

다음날 아침, 가이드의 주선으로 23세의 壯族 아가씨 샤오디에(小蝶·호텔 종업원)孃과 호텔 로비에서 잠시 만났다. 이름 그대로 「작은 나비」와 같이 갸녀린 아가씨다. 아오자이만 입었다면 사이공(지금의 호찌민市)의 변화가에서 만날 수 있는 꽁까이(처녀)의 모습 그대로이다. 검은 눈동자가 별빛처럼 초롱초롱하다. 우리 둘은 중국어와 영어, 그리고 만국 공통어인 몸짓·손짓을 섞어 가며 인터뷰를 했다.

―壯族語를 할 수 있습니까.

『배우지 않아 몰라요. 집에서도 中國語로 얘기하고, 英語는 학교에서 조금 배웠어요』

―壯族의 풍속 중에 재미있는 것 얘기해 보세요.

『남자가 결혼하면 신부집에 가서 3년간 일해 주어야 한대요』

―샤오디에孃의 아버지도 그러셨답디까.

『우리 아버지·어머니는 도회지(계림시)에서 거주해 왔기 때문에 그러지 않았다고 하더군요』

―샤오디에孃의 형제자매는 있습니까.

『위로 언니 하나, 아래로 남동생 하나 있습니다』

―그러면 샤오디에孃은 黑兒(흑아)입니까(漢族 부부는 자녀 1명, 소수민족 부부는 자녀 2명까지 낳을 수 있도록 되어 있어 딸을 낳으면 호적에 올리지 않는 사례가 많다).

『작년부터 漢族 부부는 자녀 2인까지 낳아도 되고, 소수민족에 대한 산아제한은 없어졌습니다』

―漢族과 소수민족 간에 결혼을 많이 합니까.

『아뇨. 민족이 다르면 서로 생각과 풍습이 달라 결혼생활이 불행해지기 쉽대요』
「천하제일」을 자랑하는 계림의 山河.


象鼻山에서 만난 楚나라 虞美人의 후예들

계림시 중심가 남쪽 이강의 강변에는 象鼻山(상비산)이라는 작은 암산이 있다. 코끼리가 강물 속에 코를 박은 모습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었다. 코와 몸 사이는 물론 뻥 뚫려 있다.

이곳에서 화려한 민족의상 차림의 苗族 아가씨들 다섯 명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었다. 처음에 苗族 아가씨 한 명이 다가와 한국어로 「천원」이라고 해서 둘이서 포즈를 취했는데, 갑자기 苗族 아가씨 네 명이 더 끼어드는 바람에 우리 돈 5000원을 모델료로 지불하게 되었다. 모델들이 楚覇王(초패왕) 항우가 사랑했던 虞美人(후미인)의 후예들인 만큼 그리 비싼 값은 아니었다.

苗族이라면 春秋戰國 시대의 강국이었으나 秦始皇(진시황)에게 패망한 楚나라의 다수 종족이다. 秦의 패망 후 楚覇王 항우는 漢王 劉邦(유방)에게 패전, 우미인과 함께 자결했다.

상비산의 정상에는 明代(명대)에 세워진 보탑 하나가 오똑 서 있다. 정상이라 해봐야 올라가는 데 10분이 걸리지 않는다. 이 보탑에는 보현보살의 線刻(선각)이 베풀어져 있다. 상비산 위에 서면 계림의 시가지가 잘 보인다. 아파트는 최고 7층, 호텔은 최고 10층의 높이로 제한되어 있어 시내 곳곳에 위치한 작은 산들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

상비산과 이강의 지류를 사이에 두고 호텔 「?江飯店(이강판덴)」이 보인다. 이 호텔의 안쪽이 「巡撫街(순무가)」라고 불리는 곳으로, 옛날에 巡撫公署(순무공서)가 있었다. 巡撫는 省의 長官이었다. 현재 광서장족자치주의 省廳 소재지는 남녕시이지만, 옛적엔 계림시였다.

洪秀全이 이끈 태평천국軍이 상비산 정상에 대포를 거치해 놓고 순무공서에 포격을 가한 것은 불과 150년 전의 일이다. 계림은 지키기 쉬운 땅이었다. 이강과 그 水系는 자연적 垓字(해자)가 되었다.

당시의 대포는 위력이 별로 없었고, 포탄의 양도 부족했다. 포격만으로 계림성을 함락시킬 수 없었다. 태평천국軍에는 광산노동자가 많았다. 계림성을 향해 지하에 갱도를 팠지만, 파기만 하면 곧 땅굴이 침수되어, 그것도 실패했다.

攻城(공성) 중에 軍糧(군량) 조달이 원활하지 않았다. 천하를 노렸던 태평천국軍으로선 1개 城市에 불과한 계림성에 연연할 수 없었다. 드디어 태평천국군은 계림성의 포위를 풀고 北上했다.

태평천국軍과 淸軍 사이에 地上의 조우전도 전개되었다. 主전장은 상비산 남방 10여 리에 위치한 「將軍橋」라 불리는 곳이었다. 1852년 4월19일 淸軍의 副都統 烏蘭泰(우란타이)는 상비산의 태평천국軍을 향해 將軍橋 일대에서 공세를 걸었다. 이 전투에서 우란타이는 중상을 입고 陽朔으로 후퇴했는데, 20일 후 부상이 악화되어 사망했다. 현재 이곳엔 南溪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남계공원에서 가장 높은 곳에 오르면 南溪山병원이 내려다보인다. 왜 이 병원을 들먹이느냐 하면 베트남 전쟁 때 베트남 부상 장병들을 치료해 주기 위해 건립한 병원이기 때문이다. 病床(병상) 800개, 당시 중국 최고의 병원이었다.


배후에 성공한 국민국가를 가지고 있는 소수민족
이강에서 가마우지를 날려 물고기를 잡는 여인.

越南戰 당시, 중국은 베트남(越盟)의 주요 맹방이었다. 그러나 현재, 중국-월남 관계는 적대적이지는 않지만 우호적이지도 않다. 1990년대 이후 베트남 정부는 과거의 적국이었던 韓·美·日과의 경제 관계를 심화시키고 있는 반면 과거의 맹방 중국과 華商의 경제 진출을 막고 있다.

필자가 이런 중국-베트남 관계를 끄집어 낸 것은 『나라와 나라 사이엔 영원한 친구도 영원한 적도 없으며 오직 국가이익만 있을 뿐』이라는 차원의 얘기를 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베트남과 중국은 아득한 옛날부터 犬猿(견원) 관계였다는 역사를 짚어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1975년 4월30일, 베트남 전쟁은 남측의 수도 사이공이 함락됨으로써 북측의 승리로 끝났다. 한국도 베트남 전쟁이 본격화된 1965년 이후 4만의 병력을 파견해 사이공 정부를 도왔다.

1977년 가을부터 캄보디아·베트남의 국경분쟁이 악화되기 시작했다. 1979년 1월, 베트남軍의 지원을 받은 캄보디아 반란군이 全국토를 제압하기에 이르자 캄보디아 정부와 우호관계를 맺어 오던 중국은 무력 응징을 결정하고, 2월17일 베트남에 대해 선전포고도 없이 「교훈을 주겠다」며 대규모 침략을 감행했다.

베트남은 철저히 항전, 쌍방 간에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3월6일, 중국의 제의로 전쟁은 끝났다. 「교훈을 주겠다」고 開戰한 중국이 오히려 베트남으로부터 교훈을 받았다는 얘기는 앞에서 썼다. 어떻든 베트남은 20세기 후반에 프랑스(1954년 5월 디엔디엔푸 決戰)·미국·중국 등 세계 3强과 차례로 싸워 모두 승리했다.
陽朔의 山河를 무대로 소수민족 1000명이 출연하는 매머드 민족쇼「印象·劉三姐」.

「越族」의 선조는 중국의 華南(화남) 지방에 거주했던 駱越(낙월)이다. 기원전부터 중국 남방 연해지방에는 「百越」이라는 말이 있을 만큼 「越」이라 불리는 많은 종족이 흩어져 살았다. 그중 가장 유력했던 집단이 春秋시대 5覇(패)의 하나였던 越이었다. 당시, 越王 구천은 周(주)의 國姓이었던 「姬(희)」였지만, 그 주민들은 越族이 다수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吳王 부차를 망국의 길로 유도한 西施(서시)도 越族이었을 것이다.

춘추시대의 마지막 覇者로 군림했던 越은 楚에게 멸망했다. 越의 유민들은 해안을 따라 복건성·광동성·광서성 방면으로 남하했다.

越族은 한국인처럼 궁둥이에 몽골반점이 있다. 이것은 越族이 북방 초원지대에서 중국 동해안을 따라 南下해 왔음을 의미한다. 그들은 점차 지금 중국의 광동성·광서성과 북부 베트남 하노이(河內) 지역으로 이동해 왔다. 기원전 3세기 초에는 戰國7雄을 통일한 진시황의 정복에 저항해 「伏屍流血數十萬(복시유혈수십만)」을 강요할 만큼 강한 집단을 형성했다.

기원전 207년, 중국 지방관 출신의 趙陀(조타)에 의해 「南越」이 건국되었다. 이 남월의 武王은 중국에 대해 겉으론 「王」을 칭하며 臣屬(신속)했지만, 안으로는 중국의 「北帝」와 대등한 「南帝」를 칭했다. 이것이 베트남의 역대 정권이 印支半島의 여러 나라, 즉 캄보디아·라오스 등에 대해 宗主權을 주장하게 되는 출발점이었다.

베트남은 기원전 111년 前漢의 武帝에게 정벌되어 그 후 약 1000년간 중국의 지배를 받았다. 베트남史는 中國과의 관계에서 韓國史와 비슷한 일면이 있다. 南越을 멸망시킨 「순체」라는 이름의 장수가 그로부터 3년 후인 기원전 108년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漢4郡을 설치했기 때문이다. 한4군 중 최후까지 존속한 樂浪郡(낙랑군)과 帶方郡(대방군)은 서기 313년과 314년 고구려 美川王에 의해 멸망당했다.
桂林의 象鼻山. 코끼리가 코를 물속에 박고 있는 모습이다.

668년 고구려를 멸망시킨 唐은 평양에 安東都護府를 설치했지만, 7년에 걸친 羅唐전쟁에서 신라에 패배해 요동으로 쫓겨 갔다. 그러나 唐의 남방 경략은 성공적이어서 679년 하노이에 安南都護府를 설치, 베트남을 직접 통치했다. 베트남이 중국의 직접 통치에서 벗어난 것은 10세기 초엽 唐이 멸망하고 전개된 五代의 혼란시대였다. 939년, 宋의 원정군을 대패시킨 吳權이 스스로 왕위에 올라 吳朝를 개창했다. 그 후 베트남에는 丁朝-黎朝-李朝-陳朝가 차례로 성립되었다.

1225년에 성립된 陳朝는 수차에 걸쳐 북방 몽골의 침략을 받았지만, 이를 과감하게 물리쳤을 뿐만 아니라 서쪽의 愛牢(라오스), 남쪽의 참파(지금의 남부 베트남)을 쳐서 두 나라로부터 조공을 받았다. 베트남과 참파를 갈라 놓았던 天險(천험)의 海雲關(해운관)은 이 무렵 베트남領으로 귀속되었다.

1407년 베트남은 明軍에 의해 정복되어 20년간 明의 직할 통치를 받았지만, 1427년 後黎朝가 성립되어 明軍을 축출했다. 그로부터 19세기 중엽, 프랑스가 침입하기까지 베트남에는 여러 왕조가 명멸했다. 그러나 형식적으로는 중국이 종주국 행세를 해 베트남을 安南國, 베트남 국왕을 안남국왕으로 책봉했다.

18세기 말에는 타이손(西山)黨의 반란이 일어나 阮朝를 궁지에 몰아넣었다. 阮朝의 嘉隆帝는 프랑스 선교사의 도움을 얻어 타이손黨을 격파했다. 그러나 2대 황제 聖祖明命帝가 선교사를 박해하자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는 그것을 구실삼아 1858년 다낭을 공격하고, 이듬해엔 사이공을 점령했다. 그 후 베트남 북부 및 중부를 공략해 1884년 베트남의 全국토가 프랑스의 식민지가 되었다.

이런 여러 민족사적 위기를 극복한 베트남은 오늘날 지구촌의 개도국 중에서 가장 자존심 높은 나라가 되었다. 따지고 보면 베트남人은 中國과 陸接한 숱한 민족들 가운데 韓民族을 제외하면 유일하게 성공한 국민국가를 형성한 것이다. 따라서 중국에 사는 壯族이나 朝鮮族은 배후에 성공한 민족국가를 갖고 있는 소수민족이다.
화려한 민속의상 차림의 苗族 아가씨들과 필자.


百濟郡은 해상 실크로드의 근거지

이번 廣西 답사에서 黑齒國 당시 지도부를 이룬 百濟人과 越族의 관계를 명쾌하게 밝혀 줄 만한 확실한 단서는 발견하지 못했다. 「百濟家」에서 목격한 「외다리방아」와 「주둥이에 홈이 파인 맷돌」 등은 전라도 지방의 옛 양식과 유사하다지만, 그것을 옛 백제의 侯國인 흑치국에서 유래된 양식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려웠다.

百濟墟에 사는 壯族들은 지금도 때가 되면 마을 입구에 서 있는 큰 느티나무에 祭壇(제단)을 차려 놓고 祭(제)를 올린다고 한다. 집안에 조상을 모시는 제단을 차려 놓은 현장을 목격하기도 했다. 『이런 모습에서 옛 백제인들의 생활양식을 느낀다』는 견해도 있지만, 洞祭나 조상숭배의 제단이 백제인만의 유습이라고 한정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러나 백제가 「舫(방)」이란 쌍돛배를 부리며 大洋진출을 기록한 사료는 비교적 풍부하다. 백제가 扶南國(지금의 캄보디아)과 교역한 사실이 「日本書紀」에 기록되어 있다. 그뿐 아니라 北인도 지역에서 페르시아 직물인 탑등(카펫)을 수입해 왜국에 선물하기도 했다.

백제는 왜국과 直교류를 시도하던 崑崙(곤륜: 지금의 미얀마로 비정됨)의 사신을 水葬시켰는데, 이는 對倭 교역의 독점을 시도한 것으로 해석된다. 「미륵불광사적기」에 의하면 백제 聖王(성왕) 때의 구법승인 謙益(겸익)은 해상 실크로드를 이용해 中印度에 가서 불경을 가져오기도 했다.

이런 기록들을 종합하면 南중국해에 인접한 廣西에 百濟郡을 설치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신형식 교수는 『그것이 근대적 의미의 식민지는 아닐지라도 대양을 누볐던 백제인이 건설한 무역 거점이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百濟鄕과 百濟墟에 대한 본격적인 학술조사가 필요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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