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조선 기사

[인물연구]「소리 아리랑」을「그림 아리랑」으로 바꾼 金正 화백

한국인의 핏속에 흐르는 흥을 視覺化했다

글 정순태 기자  2006-0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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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소리 아리랑」을 「그림 아리랑」으로 바꾼 최초의 화가이다』 (朴敏一 강원大 명예교수·국문학)

『잔잔한 가락이 큰 울림으로 다가오는 「정선아리랑」처럼 단순하고 소박한 그의 화면이 큰 경험으로 증폭되는 것은 그만의 독자성이다』(李在彦 미술평론가)

『그의 색채 감정은 한국의 철학 정신을 서양화 기법으로 표현한 것이다』 (홀츠 바우어 獨逸 미술평론가)

위의 인용문은 「아리랑」의 繪畵化(회화화)에 30년의 정열을 불태워 온 金正 (김정·66·숭의女大 교수) 화백의 예술세계에 대한 국내외 전문가들의 평가다. 金화백의 「아리랑 30年, 김정展」이 조선일보사 주최로 지난 1월9일부터 15일까지 조선일보 미술관에서 열려 관람객들의 가슴에 짙은 감동의 파문을 새겼다. 그의 그림이 한국인의 핏속에 흐르는 흥을 視覺化(시각화)했기 때문이었다.

― 왜 지난 30년의 세월, 오방색 짙은 「아리랑」만을 그리려고 했습니까.

『1970년대부터 우리 뿌리에 관심을 갖고 「三國遺事 (삼국유사)」나 「退溪文集(퇴계문집)」 등을 탐독했어요.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연극 「아우라지」 공연을 본 뒤 곧장 여행가방과 스케치 도구를 챙겨 강원도 정선에 갔습니다. 「정선아리랑」이 탄생한 배경을 이해하기 위해 그후에도 정선에 자주 가 묵으면서 현지 사람들과 어울리며 막걸리잔을 기울이기도 했습니다.

어느덧 그들의 말·생각·음식·애환·풍경 등에 심취했어요. 아! 이런 감동을 회화로 표현할 수 없을까 ― 이것이 내 인생의 숙제가 됐습니다. 정선 근처의 영월·평창·임계와 삽당령을 넘어 강릉·삼척까지 스케치 여행을 거듭하다가 나도 모르게 내 발길이 「아리랑」을 찾아 진도에 이르기까지 전국 방방곡곡으로 뻗어 나간 겁니다』

― 지난 30년간 그린 「아리랑」 그림이 얼마나 됩니까.

『「아리랑」 그림만 600여 점, 정선·하진부 등의 소나무로 만든 입체 조형물이 150여 점 됩니다』

― 「아리랑」은 우리나라의 대표적 민요의 하나지만, 그 수는 무수히 많습니다. 우리 민족에게 「아리랑」은 무엇입니까.

『「아리랑 정신사」를 저술한 朴敏一 (박민일) 교수는 「아리랑 정신은 韓民族 정신의 원형이 반영된 정서와 사유의 세계」라고 합디다. 즉, 아리랑은 기쁘거나 슬플 때, 일할 때나 놀 때, 언제 어디서나 무엇이든지 담아서 부르는 백과사전 같은 내용과 기능과 효용을 지닌 열린 소리, 열린 장르라는 것입니다』
「만경창파에 둥둥 뜬 저 배야 거기 잠깐 닻 주어라 말 물어 보자」(진도아리랑ㆍ200호ㆍ2005)


『아리랑은 韓民族의 원형이 반영된 정서와 사유의 세계』

그렇다면 「아리랑」의 본디 뜻은 무엇일까. 다음은 필자의 질문에 대한 원로 언어학자 朴炳植(박병식)옹의 답변이다.

<「아리랑」이나 「아라리」는 같은 말이다. 아리랑의 「리」는 「라」가 모음교체에 의해 「리」로 된 것이다. 「아」는 「높다」이고, 「리(라)」는 「太陽神」이며, 「랑」은 태양신의 자손이다. 결국 「아리랑」은 「고귀한 태양신의 자손인 나」를 의미한다>

『「아리랑」 가사는 「정선아리랑」만도 무려 600수, 「진도아리랑」도 500수가 넘습니다. 이런 가사 수는 세계 어디에도 없습니다. 우리 민족의 대단한 예술성이에요』

―朴敏一 교수에 따르면 한국의 「아리랑」은 186종, 2277연이 조사되었다고 합디다. 그걸 그림으로 표현하는 일이야말로 미술사적으로 매우 뜻있는 작업이 아니겠습니까.

『그 가사 내용들이 하나하나 모두 구체적입니다. 예컨대 「정선아리랑」에서 「우리 영감 소금 사러 삼척 가서 안 돌아오네, 짐승에 잡혀 먹었나, 눈보라에 길 잃었나」 등 매우 세밀한 정황이 전개됩니다. 따라서 회화작업도 얼렁뚱땅해선 안 되죠. 특정 장소, 감정 표현, 비유, 독백, 기쁨, 비애, 소망, 환희 등이 화면에 추상 또는 半추상, 구상 등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그래야만 한국인의 심성을 담아내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이런 방대한 구조를 두고 나는 오랜 시간 고민해 왔습니다』


『「정선아리랑」과 「진도아리랑」엔 쭌득 쭌득한 맛이 있다』
「청천 하늘엔 잔별도 많고 우리네 가슴엔 희망도 많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리도 못 가서 발병난다」<서울ㆍ경기 아리랑ㆍ100호ㆍ2004)

金正 화백의 畵題(화제) 중엔 유별나게 「정선아리랑」과 「진도아리랑」이 많다. 그 까닭은 무엇일까.

『정선과 진도아리랑은 좀 쭌득쭌득한 맛이 있습니다. 나는 거기서 뭔가 가슴 찡하는 감동을 느낍니다』

― 경상도 아리랑은 어떻습니까.

『「날 좀 보소오 날 좀 보소오/동지섣달 꽃 본 듯이 날 좀 보소…」 이렇게 경상도의 「밀양아리랑」은 경쾌하죠. 민중의 힘줄기가 느껴져요』

― 충청도 아리랑은 어떻습니까.

『「담장 밑에 집 짓고 살아도/그리워 살기는 매일반이로다/가마채 잡고서 힐난질 말고/나 시집간 데로 멈살이(머슴살이) 오소…」 충청도 「서산아리랑」은 들으니 어때요? 매우 발랄하죠』

「서산아리랑」은 충청도 양반 동네의 아리랑 타령인데, 뜻밖에도 섹스 어필하다.

― 金교수께서 그린 「서산아리랑」의 소나무가 참 잘생겼습디다.

『서산ㆍ당진의 소나무는 누런 황소가 제 코를 훌쩍 훑어 마시듯이 소금기 머금은 海風(해풍)을 듬뿍 먹으면서 쑥쑥 자랍니다. 특히 태안반도의 海松(해송)은 최고 재질의 黃腸木(황장목)이 됩니다. 이 속살이 노란 소나무로 배를 만들어 띄우면 바닷물이 스며들지 않고 단단하대요』
「담장 밑에 집 짓고 살아도 그리워 살기는 매일반이로다 가마채 잡고서 힐난질 말고 나 시집간 데로 멈살이 오소」(서산아리랑)


초등학교 2학년 담임의 칭찬

그는 매우 열정적인 화가이며 미술교수이다. 국내외 개인전을 13회나 열었고, 국내외 단체전에 150여 회 출품했다. 그가 학술지에 발표한 논문 편수만 42편, 저서도 「미술교육총론」, 「세계미술교육」, 「한국미술교육 定立을 위한 기초적 연구」 등 18권에 달한다.

그런 그는 어떤 과정을 거쳐 오늘의 匠人(장인)에 이르게 되었을까. 세계사상 유례가 드믄 격동의 20세기에 한국에서 태어나 살았던 만큼 그 역시 파란만장한 삶의 나이테를 그려 왔다.

金正은 1940년 서울 성북구 삼선동에서 日帝(일제)의 전매청 공무원이었던 아버지 金炳駿(김병준)과 대가족의 살림을 알뜰하게 꾸려 간 어머니 元喜禮(원희례) 사이에서 8남매의 넷째로 태어났다. 호적상의 이름은 金淸正(김청정). 1945년 광복 당시, 다섯 살이었다. 미술에 대한 그의 소질은 일찍 눈에 띄었던 것 같다.

『초등학교 2학년 때 반공 포스터를 그렸는데, 담임선생님이 「참 잘 그린다」고 칭찬해 주시데요』

1950년 6?5 때 그도 그 시대의 소년들처럼 험난한 경험을 했다.

『아버지가 솔가해 피란길에 올랐어요. 한강을 건너 부천까지 내려갔는데 발이 부르터 더 이상 못 걷겠더라구요. 가족이 두 패로 나눠졌어요. 인민군에 끌려갈 만한 나이의 여중생 두 누나와 초등학교 6학년이던 형은 아버지를 따라 대구-부산으로 내려가고, 나와 내 밑 동생 넷은 어머니를 따라 서울집으로 되돌아왔어요』

― 敵(적) 치하에서는 어떻게 지냈습니까.

『무청에다 쌀 한 움큼만 넣어 죽을 끓여 먹으면서 여섯 식구가 연명했어요. 「학교에 나오라」 해서 등교했더니 반쯤만 출석했어요. 인민군이 교실에 들어와 군가를 가르칩디다. 처음엔 동요인 줄 알았는데, 영 재미없더군요 . 「장백산 굽이굽이 피 어린 자국」 어쩌구 하는 노래 따위였습니다』

― 둘로 갈라진 가족은 언제 재회했습니까.

『(1950년) 9·28 서울 수복으로 다시 만났는데, (1951년) 1·4 후퇴로 또다시 갈라졌습니다. 이번에는 두 누나와 형만 부산으로 피란했습니다. 다시 敵 치하에서 3개월쯤 살았는데, 그때 아버지가 왕십리 외할머니댁에 잡곡을 얻으러 갔다가 北으로 후퇴하는 인민군들에게 붙들렸어요. 포천까지 끌려갔다가 미군기의 폭격을 틈타 도망해 닷새 만에 귀가하셨는데, 얼굴이 해골과 다름없으셨어요』
金正 화백의 그림 색깔은 짙고 파격적이다.


멀리 멀리 둘러서 온 화가의 길
「아우라지 뱃사공아 배 좀 건너 주게 싸릿골 올동박이가 다 떨어진다 뗏목을 타고서 하강을 하니 광나루 건달들이 날 반겨한다」(정선아리랑ㆍ530×550ㆍ혼합재료ㆍ2002)

전쟁의 후유증으로 먹고살기조차 어려운 시절이었다. 다행히 그는 그의 아버지가 전매청 공무원으로 재직했던 탓에 큰 어려움 없이 중학교에 진학하게 되었다.

『중학교에 입학해 미술반에 들어갔습니다. 중·고교 미술반에서는 東京의 태평양미술대학을 나온 수채화가 李哲伊(이철이) 선생님이 지도해 주셨어요. 그때 우리들은 미군 부대에서 나오는 달력의 뒷장에다 스케치를 하곤 했습니다. 이것, 제가 高3 때(1958년) 미술대학 진학을 준비하면서 데생(素描)한 것입니다』

대학입시 실기시험을 앞두고 그는 데생과 수채화 그리기에 열중했다. 그러나 그의 미술대학 진학의 꿈은 꺾이고 말았다.

『아버지가 「환쟁이가 되면 밥 굶는다」면서 한사코 「영문과로 가라」고 하시는 거예요. 그땐 화가로서 살아가기가 어려웠던 시절이었거든요. 아버지의 엄명인데 어떡합니까, 성균관大 영문학과에 입학했죠. 그렇다고 영문학 책이 눈에 들어옵니까. 2학년을 마치고, 軍에 입대해서 만 3년간 복무한 후에 복학해 2년을 더 다녀 영문과를 졸업했지만, 그림에 대한 그리움은 더욱 간절해지더군요. 연세大 대학원 미술사학과에 들어갔어요』

― 대학원에 진학할 만큼 집안 형편이 괜찮았던 모양이죠.

『웬걸요. 그땐 아버지가 이미 정년퇴임해 집안 형편이 쪼들렸어요. 누나들은 내게 「대학 나와 제 앞가림도 못 한다」고 지청구를 하고…. 앞이 캄캄한 판인데, 마침 조선일보사가 미술기자를 공채한다고 해요. 운 좋게 합격해 1969년부터 1978년까지 만 10년간 미술기자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1969년 9월, 조선일보 미술기자 김정君은 「새벗」 편집기자 최자영孃과 결혼했다. 그는 대학 시절부터 이미 프리랜서로 「새벗」 등의 표지를 그려 편집기자인 최자영씨와 알고 지내던 사이였다. 두 사람은 응봉동 8평짜리 시민아파트에 새 살림을 차렸다.

― 연세大 대학원 미술사학과는 마쳤습니까.

『아니에요. 대학원엔 3학기만 다니고, 1972년 경희大 미술과 3학년으로 학사편입을 했습니다. 학부과정의 교실에 들어가니 처음엔 나를 「강사」로 오해하더군요』

― 그렇다면 미술대학 학생과 미술기자를 겸했던 셈이군요. 미술기자로서 어떤 일을 하셨습니까.

『「소년조선」에 「재미있는 미술 이야기」를 6~7년간 연재했습니다. 조선일보의 삽화도 그리고, 회사가 주최한 렘브란트, 피카소 등의 印象派展(인상파전)을 여는 데 실무자로 참여하기도 했어요. 아무튼 조선일보사는 나에게 직업과 학업을 병행할 수 있도록 큰 은혜를 베풀어 주었습니다』

그는 조선일보사 재직時 선곂캣?기자 191명의 얼굴을 알게 모르게 스케치 했다. 인물뿐만 아니라 이제는 고인이 된 언론계 원로들의 구술 증언을 토대로 그가 살지 않은 1920년대 조선일보의 창간 당시의 韓屋 사옥(관철동 249번지), 편집국 모습, 社旗(사기), 심벌 마크 등을 그려 개인적으로 보존해 왔다. 그런 지 36년의 세월이 흐른 뒤의 일이지만, 작년 2월에 이것들이 「화첩에 담긴 조선일보 풍경」이라는 제목의 책으로 묶여 출판되었다.

이에 대해 언론학자 鄭晉錫(정진석) 교수는 『金正 화백의 그림들은 한국 언론사상 유례없는 미술적 기록으로 남을 것』이라며 『화가의 치밀한 손길과 고증의 조화에 의해 역사화의 가치를 지니게 되었다』라고 평가했다. 서울市 시사편찬위원회에서도 『신문사 韓屋 사옥, 주변의 풍경과 취재 차량 등은 서울의 근곀測六?복원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고 반겨했다고 한다.


『내 인생의 스승 다섯 분』
25년 전 金正 화백 부부를 그 아들이 그렸다.

경희大 대학원을 마친 후 그는 조선일보사에서 퇴사, 숭의女大 미술과 전임강사로 교단에 섰다. 그러나 배움에 대한 그의 열정은 좀처럼 채워지지 않았던 것 같다. 나이 마흔을 두서너 해 남겼던 1970년대 말, 그는 독일 아우스부르크 대학원으로 유학해 H.잔트너 교수에게서 서양화를 배웠다. 이어 독일의 공방 작업실 세 곳에서 차례로 연수하며 작가로서 수련을 쌓았다.

― 그렇게 공부만 하면 가족은 뭘 먹고 삽니까.

『나의 독일 유학 3년 동안에 집사람이 출판사의 편집·교정 일을 하면서 어렵게 가계를 책임졌습니다. 무지개만 좇아다닌 나 때문에 고생 좀 했죠』

필자가 이번 「김정展」 기간(1주일)에 여러 번 목격한 바이지만, 부인 최자영 여사는 전시장 안팎에서 그림자처럼 조용하게 金교수를 돕고 있었다.

― 崔여사의 내조로 「金正 화백의 오늘」이 있는 것이구먼요.

『나는 스승을 잘 만난 사람입니다. 중·고교 시절의 李哲伊 선생님(수채화), 대학겢淪極?시절 朴古石(박고석)·金基邦(김기방)괅喀入?최덕휴) 선생님(데생·서양화), 그리고 독일 유학 시절의 잔트너 선생님(서양화), 이렇게 다섯 분의 스승 밑에서 배웠습니다』


報恩의 전시회
30代 시절 서울 강남구 역삼동 작업실에서의 金화백.

그는 구레나룻과 텃수염을 기르고 있다.

― 美髥公(미염공)이십니다.

『독일에 가서 공부할 때 바빠서 면도를 며칠 안 했더니 수북해지더군요. 애라, 나도 독일 친구들처럼 길러 볼까, 그러다 보니 수염 기른 지가 이제 26년이 되었습니다』

― 원래, 수염은 귀족들이 길렀던 것 아닙니까. 러시아의 계몽군주 표트르 大帝는 수염 기른 귀족들에게 「수염세」까지 징수했거든요.
2002년 겨울 손자 김현진이 미국에서 귀국했을 때 金화백과 함께.

『나는 가위 두세 개 가지고 거울을 보면서 수염을 대충 자릅니다. 멋과는 거리가 멀어요. 매일 면도하는 게 귀찮아서 그냥 놓아 두는 수준이죠』

金正 화백은 1980년대 초에 강남구 역삼동에 화실 겸 집을 마련해 25년 넘게 이곳에서 붙박이로 산다. 슬하의 1남1녀도 성년이 되었다. 장남은 외국계 은행에 들어가 현재 미국 시카고에서 근무하고 있다.

이 글을 쓰는 무렵, 그의 제자 100명이 報恩(보은)의 「스승겵╂?합동전시회」를 곧 열 것이라는 소문이 필자에게 들려 왔다. 전언에 따르면 『오랫동안 金교수는 가정형편이 어려운 제자들에게 학비의 일부를 남몰래 도와주었다』고 한다. 그는 「매우 수줍어하는 성격」이며, 휴대폰도 가지고 다니지 않는 自由人이어서 그 사실을 확인하기 어려웠다. 그는 이런 사실이 밖으로 알려지기를 원하지 않는 것 같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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