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조선 기사

鄭淳台 기자의 역사 현장 탐방 ⑤「加耶의 빅3」阿羅加耶(함안)

韓國 역사상 최초의 民族統一을 견인하고, 일본의 天皇氏를 배출한 加耶의 맨파워

글 정순태 기자  2006-0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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阿羅加耶(아라가야)는 한국 古代史(고대사)의 「잃어버린 고리(Missing Link)」이다. 아라가야의 옛터 咸安(함안)은 필자에게 아스라한 추억의 고을이다. 45년 전, 高2 겨울방학 때였다. 『咸安에 가서 「趙대목이 누구냐」고 물으면 다 안다』는 귀띔 한 토막에 의지해 그분 댁을 찾아갔던 일이 있다.

1961년이 저물어 가던 그날, 釜山에서 털털거리는 완행버스를 타고 저녁 무렵에야 함안군 伽耶面(가야면) 車埠(차부: 버스정류소)에서 내렸다. 『趙대목씨 댁이 어디냐』고 물었지만 아는 사람이 나서지 않았다. 당시 가야면엔 여관 같은 것도 없었다. 난감한 순간이었는데, 누군가 뒤에서 필자의 어깨를 툭 쳤다. 부산의 같은 학교에 다니는 동급생 李某였다.

함안군의 군청 소재지는 그때도 伽耶面(1979년에 가야읍으로 승격함) 末山里였다. 伽耶面은 일제 때 慶全線(경전선)이 통과한 이래 교통의 요지가 되었다. 1980년대 이후엔 가야읍 중심가의 바로 북쪽으로 남해고속도로까지 지나가고 있다.

함안군의 군청은 원래 咸安面에 있다가 1954년 驛前(역전) 취락으로 성장한 가야면으로 옮겨졌다. 이런 과거사 때문에 咸安郡은 郡名(군명)과 군청 소재지의 地名(지명)이 일치하지 않는 매우 희귀한 郡이 되고 말았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가야읍 주민들은 함안면에 가면서 『읍내에 간다』고 말한다. 외지 사람들로선 헷갈리게 마련이다.

그날, 李某는 咸安面으로 곧장 넘어 가려는 필자를 굳이 그의 집으로 끌고 갔다. 당시 李某의 집은 함안군청 건너편 국도변에 있었다. 국도라 해봐야 먼지를 풀풀 날리는 10여m짜리 非포장도로였다.

지금의 함안군청 바로 뒷산이 가야 諸國(제국)의 고분군들 중 최대 규모의 末伊山(말이산) 고분군이다. 말이산은 「마리산」의 音借(음차)이다. 「마리(首)」는 音韻變化(음운변화)에 의해 오늘날엔 「머리」로 변해 있다. 아라가야의 王級(왕급) 무덤이 즐비한 곳인 만큼 「머리山」이라 일컬을 만하다.

하지만, 그때는 末伊山이 아라가야의 중심 유적지인지 몰랐다. 1960년대만 해도 모두들 먹고살기에 바빠 『문화유적이 밥 먹여 주냐?』는 말이 「原論(원론)」에 가깝던 시절이었다. 末伊山 고분군에 대한 본격적인 발굴조사는 1990년대 이후에야 이루어진다.

그때 필자는 趙대목이 「성은 趙요, 이름은 대목」인 것으로 잘못 알고 있었다. 나는 李군에게 「趙대목씨가 어떤 분인지 알아봐 달라」고 부탁했다. 이곳의 大姓인 咸安 趙氏의 門中人을 찾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카펜터(大木: 큰 건물을 짓는 목수) 趙란 분인데, 함안면의 地主라더군』


45년 만의 방문
아라가야 최대의 왕릉 末伊山 4호분. 封土의 지름 39.3m, 높이 9.7m.

冬至(동지) 무렵의 해는 토끼 꼬리처럼 짧아 加耶面 거리엔 이미 어둠이 내리고 있었다. 필자는 그날 밤을 李군 집에서 묵고, 다음날 아침 일찍 李군 집의 자전거를 빌려 타고 10리 길을 달려 趙大木 댁을 찾아갔다.

그로부터 45년의 세월이 흘렀다. 함안이라면 언젠가 꼭 한 번은 다시 가고 싶었다.

지난 3월21일 「꿈★은 이루어졌다」. 서울을 출발해 가야읍 도항리 748번지 함안박물관으로 직행했다. 남해고속도로 함안IC를 빠져나와 신호등 사거리에서 좌회전해 가야동에 접어드는 지점에 이르니 벌써 아라가야를 상징하는 「불꽃(火焰)무늬 土器」의 대형 모형물로 장식된 함안박물관이 눈에 들어온다.

높이 60m의 末伊山을 사이에 두고 북쪽 기슭엔 함안박물관이 호젓하게 들어서 있고, 남쪽 기슭을 따라 가야읍의 중심가(末山里)가 형성되어 있다. 오후 3시30분, 함안박물관 학예연구사인 白承玉(백승옥) 박사의 연구실 문을 두드렸다. 최근, 왕성하게 가야사 관련 학술논문을 발표해 온 젊은 그와 3시간 동안 인터뷰했다.


前·後期 가야연맹의 兩强
불꽃무늬 토기(중앙)를 상징물로 세운 함안박물관.

―우리는 흔히 아라가야라고 합니다만, 「三國史記(삼국사기)」 地理志(지리지)에는 阿尸良國(아시량국)과 阿那加耶(아나가야), 그 列傳(열전)에 阿羅國(아라국), 「삼국유사」에 阿羅伽耶, 「일본서기」에 安羅와 阿羅로 기록되어 있더군요. 어떤 국명이 맞습니까.

『金官가야, 아라가야 등의 ○○가야라는 것은 가야연맹 존재 당시의 이름이 아니라 羅末麗初(나말여초)에 생겨난 이름으로 추정됩니다. 阿尸良에서의 「尸(시)」는 古語에서 사이시옷(ㅅ)으로서 阿尸良은 「아ㅅ라」이고, 이것이 阿那 또는 阿羅로 표기된 것으로 보입니다. 따라서 阿尸良, 阿羅, 阿那, 安羅 등은 모두 「아ㅅ라」를 음차한 것으로 볼 수 있어요. 사이시옷(ㅅ)은 「ㄹ」 받침의 音價(음가)를 나타내는 것이므로 「아ㅅ라」는 「알라」로 읽혀집니다. 「알라」의 音借字(음차자)로 가장 가까운 것이 「安羅」입니다. 그런 만큼 安羅國이라고 표기하는 것이 가장 정확한 것으로 봅니다』

함안군의 지형은 남쪽이 높고 북쪽이 낮은 분지형이다. 함안의 남동쪽에는 해발 600~700m의 산들이 둘러싸 창원·마산·진주와 경계를 이루며, 북쪽에는 南江이 東進하여 낙동강과 합류하고 있다. 남쪽 山地에서 발원한 크고 작은 溪谷流水(계곡유수)를 이용한 谷間(곡간)평야와 남강·낙동강의 배후 저습지를 이용한 농경이 안라국 경제의 기반이 되었다. 낙동강·남강을 이용한 교통로도 안라의 주요 성장 기반이 되었을 것이다.

『안라국은 「三國志(삼국지)」 韓條의 安邪國(안야국)이 모체였던 것으로 봅니다. 안야국 단계의 인구는 4000~ 5000家, 2만~2만5000명, 전성기인 안라국 시대엔 1만家, 5만 명 정도로 추정됩니다. 안야국의 형성 시기를 한반도 南部에 철기 보급이 일반화되는 기원전 2세기, 혹은 그보다 약간 소급해 기원전 3세기로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로부터 안야국·안라국은 함안 지역을 중심으로 약 800년간 번영했습니다』

―가야 사회에서 안라국의 위상은 어느 정도였다고 보십니까.

『서기 400년까지는 김해의 가락국이 가야의 最强(최강)이었고, 안라국은 랭킹 2위였습니다, 5세기 중엽 이후는 가락국의 高靈(고령)의 대가야와 함안의 안라국이 각각 가야 북부와 남부의 맹주였습니다』

―「三國志」 魏書(위서) 東夷傳(동이전)에 따르면 弁辰安邪國(변진안야국)은 三韓시기부터 서서히 두각을 나타냈습니다. 안야국·안라국이 南部 가야의 리더로 도약하는 계기는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함안 지역의 유적 분포를 보면 함안분지권, 郡北圈, 柒原圈(칠원권)으로 대별됩니다. 이 중 柒原(칠원)은 안야국의 범위에 넣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안라국은 浦上八國(포상8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해 칠원권 등을 편입시켰고, 이후 南部 가야의 맹주국으로 떠오르게 됩니다』
뒤편 山 아래가 아라가야 王宮 터로 전해 오는 伽耶邑 가야동 일대.


도약의 轉機-浦上8國과의 전쟁
아라가야의 기마무사. 함안 지역에서 출토된 갑주와 말갑옷을 모델로 재현시켰다.

그렇다면 浦上8國 전쟁이란 무엇일까. 다음은 「三國史記」의 관련 기록이다(괄호 안은 필자 注).

<勿稽子(물계자)는 奈解 尼師今(나해 이사금) 때의 사람이다. (중략) 이때 浦上八國이 모의해 阿羅國을 쳤다. 아라국의 使者가 (신라에) 와서 도움을 청했다. 이사금이 王孫인 捺音(날음)으로 하여금 인근의 郡 및 六部의 군사를 이끌고 가서 구하게 해 8國의 병사를 패퇴시켰다. (중략) 3년 뒤 骨浦(골포: 지금의 창원·마산), 柒浦(칠포: 지금의 함안군 칠원면), 古史浦(고사포=古自國: 지금의 固城)의 3국 군대가 竭火城(갈화성: 지금의 울산)을 공격했다. 왕이 군사를 이끌고 가서 구했다. 3국의 군대가 크게 패했다>(삼국사기 列傳 8 勿稽子傳)

浦上八國이 함안의 안라국을 공격했던 신라 나해왕 17년의 실제연대는 3세기 말엽~4세기 초엽으로 추정된다. 浦上8國은 그 명칭으로부터 짐작할 수 있듯이 浦口(포구)나 해양을 그 존립 기반으로 삼는 小國들이었다. 그렇다면 포상8국이 동맹을 결성해 침략전쟁을 감행했던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安羅國史」의 저자 南在祐씨(창원대 강사)의 주장이 많은 시사를 던지고 있습니다. 南씨는 포상8국이 안라국을 공격한 이유를 「농경지의 확보와 내륙지방으로의 진출 모색에 있다」고 했습니다』

포상8국은 1~2세기에 걸쳐 樂浪(낙랑)·대방 등 중국 郡縣(군현)과의 교역관계를 통해 선진적인 문화를 받아들일 수 있었고, 그에 따라 일층 발전된 사회 만들기에 대한 욕구를 가지게 되었을 터이다. 그러나 포상8국은 그들이 처한 입지조건상 지속적인 발전을 이룰 수 있는 객관적인 조건을 갖추고 있지는 못했다.

『해안지역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교역에는 好조건을 구비하고 있었지만, 반면에 해상으로부터의 外勢 침입에 대비하기 어려운 불리한 조건도 동시에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惡조건을 극복하기 위해 好조건을 구비한 안라국을 노렸을 것입니다』

함안군의 남쪽은 여항산(770m)·광려산(720m) 등 600~700m급의 산지가 철옹성처럼 버티고 있고, 북쪽은 南江과 낙동강이 자연방벽을 이루고 있다. 함안군은 경지율이 32.4%로 경남에서 제일 높고, 면적에 비해 논도 많다(權赫在 고려大 교수의 「韓國地理」, 法文社, 1999). 남쪽의 여항산 등에서 발원해 남강으로 흘러드는 함안천·석교천, 낙동강으로 흘러드는 광노천 유역에 충적평야가 넓게 발달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古代의 안라국은 농업 생산량이 풍부하고 남강과 낙동강을 이용하는 水運(수운)도 편리했을 것이다.

3세기 말엽 또는 4세기 초엽의 일로 추정되는 포상8국 동맹의 전쟁도발은 한반도 남부의 세력판도에 상당한 충격을 가했다. 포상8국은 안라국을 공격하기 3년 전에도 김해의 駕洛國(가락국)을 침략했다가 신라 원군의 개입으로 6000명의 포로가 발생하는 등 참패한 바 있었다(「三國史記」 나해왕 14년 條).

신라군의 개입으로 가락국과 안라국 공략에 실패한 포상8국은 이어 보복전을 전개한다. 포상8국의 主力인 古自國(고자국: 지금의 경남 고성) 등 3國은 나해왕 20년 신라의 對外 교역항이자 남해안 진출 기지인 竭火(갈화: 지금의 울산)를 공격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결과는 포상8국의 패전이었다.

9년간 세 차례에 걸친 전쟁에서 실패한 포상8국의 지역연맹체는 퇴조하고, 전승국인 가락국·안라국·신라의 약진이 실현되었다. 이후 안라국의 영역은 남쪽으로는 여항산을 넘어 鎭東灣(진동만), 동쪽으로는 마산·창원, 서쪽으로는 진주 일부, 북쪽으로는 남강 北岸인 의령의 남부지역에 달하게 된다.

5세기가 개막되는 서기 400년, 고구려의 광개토왕은 步騎(보기) 5만 명을 보내 가락국과 倭에 점령당한 신라를 구원하고, 가락국의 본거지인 낙동강 하구 김해 지역까지 진출했다. 이같은 고구려軍의 원정은 백제-가락국-倭의 동맹을 분쇄해 한반도의 패권을 확보하기 위한 일대 캠페인이었다. 만약 이때 慕容氏(모용씨)의 後燕(후연)이 고구려의 西北境(서북경)을 위협하지 않았다면 신라·가야뿐만 아니라 백제도 고구려에 병합될 뻔했다.


안라국 主導의 高堂국제회의
아라가야의 單甲과 투구. 함안박물관 소장.

낙동강 하구의 김해 지역까지 휩쓴 고구려軍은 배후의 불안 때문에 곧 회군했지만, 가야 사회에 던진 충격파는 심대했다. 김해의 가락국은 가야 사회의 지도적 위치에서 추락하고, 고령의 대가야와 함안의 아라가야가 각각 남북 가야사회의 盟主的(맹주적)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원로 언어학자 朴炳植(박병식)옹은 『그로부터 고령 지역을 「우(上)가야」, 함안 지역을 「아래(下)가야·아라가야」로 부르게 되었다』고 말한다.

「日本書紀(일본서기)」에 의하면 서기 529년, 지금의 함안에 있는 안라국에서 신라에 의해 궤멸적 타격을 받아 사실상 멸망한 南加羅(남가라=가락국), 卓淳國(탁순국: 그 위치를 놓고 大邱說과 昌原說이 양립해 있음) 등 南部 가야를 재건하는 국제회의가 개최되었다. 가락국의 멸망 연도는 서기 532년으로 「三國史記」 등에 기록되어 있지만, 사실상 신라에 귀속된 시기를 서기 524년 前後로 보는 것이 학계의 다수설이다.

안라국은 이 국제회의를 위해 「高堂(고당: 높은 건물)」을 세웠다. 학계에서는 이를 「高堂회의」 또는 「安羅회의」라 불러 왔다. 참가국은 안라국·백제·신라·倭 등 5개국이었다.

―高堂회의 참석자 9명의 면면을 보면 안라국에서는 安羅國主 이외에 「國內大人」 2명이 더 참석하고 있습니다. 「국내대인」은 어떤 존재라고 보십니까.

『國內大人은 안라국 예속의 지방세력으로 봅니다. 안라지역연맹체 단계에서 연맹체에 속하는 小國의 首長層(수장층)이었다가 안라국이 체제를 정비하는 과정에서 중앙관료로 편입되었거나 자치권을 인정받으면서 안라 국왕의 통제를 받았던 인물들일 것입니다』


홀대받은 백제 사신

―신라는 가락국과 탁순국을 병합한 나라이어서인지 처음엔 안라 高堂회의 참가를 주저하다가 참가하게 됩니다만, 그 이유는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신라와 大加耶의 결혼동맹이 파탄 직후인 529년에 안라 高堂회의가 개최되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할 것입니다. 신라는 그동안 對가야 교섭 파트너였던 大加耶와 결별했던 만큼 새로운 파트너를 모색하기 위해 이 회의에 참석한 것으로 보입니다. 즉, 南部 가야 일부를 잠식한 후 그 以西 지역으로의 진출을 위해 6세기代 南部 가야 諸國의 맹주였던 안라국의 의중 모색, 이것이 신라 측의 高堂회의 참석 목적이었던 것으로 판단됩니다』

신라와 大加耶의 2국 간 동맹은 「삼국사기」 法興王 9년(522)條의 『3월에 가야 국왕(이뇌왕)이 사신을 보내 (신라 왕녀와의) 혼인을 청하매 왕이 이찬 比助夫(비조부)의 여동생을 보냈다』는 기사로 보아 522년에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대가야와 신라의 결혼동맹은 신라 왕녀를 따라온 시녀 100명의 간첩행위 때문에 파탄이 나는 529년 초까지 지속되었고, 그 직후에 안라 高堂회의가 개최되었던 것이다.

―「日本書紀」에 따르면 高堂회의에서 백제 사신은 회의장인 高堂에 올라가지 못해 한스러워하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백제 사신이 홀대를 당한 이유를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백제는 513년 帶沙(대사: 지금의 경남 하동) 등지를 장악했습니다. 특히 帶沙는 대가야의 바다로 향한 유일한 출구, 즉 對外 진출기지였습니다. 이후 백제는 대가야와 결별하고 남부 가야 지역으로의 진출을 노리고 있던 상황이었습니다』

―그러한 각국의 상황이 안라 高堂회의를 성립시킨 배경이었군요.

『안라국은 백제의 가야지역 잠식 의도를 직접적으로 목격한 후 백제를 견제할 새로운 후원자가 필요했을 것입니다. 高堂회의 직후 백제의 가야 남부 침략의도가 그대로 드러납니다. 531년, 백제는 안라국의 관할권 내인 乞城(걸탁성)에 군대를 주둔시켰습니다. 高堂회의 실질적 당사자인 안라와 신라는 이후 540년대 후반 安羅가 다시 親백제 노선으로 돌아설 때까지 우호관계를 지속시키는 것으로 보입니다』


가야 諸國의 生存外交

서기 540년대에 이르면 花郞(화랑)제도에 의해 臨戰無退(임전무퇴)의 엘리트 戰士團(전사단)을 보유한 신라가 주변국에 대한 침략 의도를 노골화한다. 가야 諸國으로선 생존을 위해 백제에 기댈 수밖에 없는 정세가 도래했다.

541년, 안라국과 대가야를 비롯한 가야 諸國의 대표가 백제에 모여 이미 신라에 복속된 가야 諸國 일부의 재건을 위한 대책을 협의했다. 백제의 聖王(성왕)이 이 국제회의를 주도하고 있지만, 백제와 가야 諸國의 속셈은 서로 달랐던 것 같다.

『이때 백제가 진정으로 南部 가야 諸國의 재건을 희망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사비(지금의 충남 부여)회의 한 달 전, 신라에 사신을 보내 화친을 맺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백제의 이율배반적 행동은 북쪽의 고구려 때문이었을 것으로 봅니다. 백제로서는 앞으로 전개해야 할 對고구려 복수전을 위해 신라와의 동맹관계가 필수적이었던 것입니다』

475년, 백제는 장수왕의 고구려軍의 침략을 받아 개로왕이 사로잡혀 참수당하고, 왕도 漢城(한성: 지금의 서울 송파구·강동구)이 함락되는 수모를 겪었다. 따라서 신라의 가야 지역 진출에 대해 백제가 앞장서 저지할 수 있는 정세가 아니었다. 이를 눈치 챈 안라국 등 가야 諸國은 신라와의 관계를 회복시키려 했다. 아마 백제와 연합해서는 존속을 보장받을 수 없다는 불안감 때문이었던 듯하다.

『이에 백제 聖王은 544년에 제2차 사비회의를 개최했습니다. 그러나 이때 백제는 對신라 戰線에 加耶와 倭만 내세우고 그 자신은 뒤에서 물자만 대겠다는 소극적인 것이었습니다. 동시에 백제軍의 가야 지역 주둔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안라에서 활약하고 있는 親신라계 인물의 축출을 요구했을 뿐이었습니다』

「일본서기」 欽明(흠명) 9년 4월 條를 보면 生存(생존)을 위한 안라국의 외교정책이 매우 인상적이다. 549년, 고구려가 백제의 馬津城(마진성)을 공격했을 때 붙잡힌 고구려軍 포로의 자백에 의해 「안라가 고구려에게 백제를 징벌하기를 권했다」는 사실이 뒤늦게 밝혀진다.

『그것은 고구려와 안라의 密約(밀약)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안라가 기대했던 고구려는 그보다 1년 전인 548년에 이미 獨山城(독산성) 전투에서 안라의 기대와는 달리 羅濟 동맹군에 대패했습니다. 이후 안라는 다시 백제 편으로 서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그러나 554년, 백제-가야-倭 연합군이 신라와의 管山城(관산성: 충북 옥천군) 전투에서 대패하고, 聖王도 사로잡혀 참수당함으로써 백제는 더 이상 안라를 비롯한 가야 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게 된다.

―안라국은 결국 신라에 병합되고 맙니다만, 안라국의 정확한 패망 연도는 失傳(실전)되었습니다.

『「일본서기」 欽明 22년(561)條에 따르면 신라는 이때 安羅 지역(阿羅 波斯山)에 왜군에 대비해 城을 쌓았습니다. 바로 이 561년 무렵에 안라국이 신라에 병합되었다고 봅니다』

안라국의 병합 직후인 562년에는 고령의 대가야도 신라에 의해 멸망당했다. 이로써 한국 역사상의 4國시대가 종말을 고하고, 멸실상부한 삼국시대가 전개된다.


「任那日本府」의 날조

가야사의 복원에서 「日本書紀」의 비판적 이용은 필요하다. 「일본서기」 開體條·欽明條 등은 한반도, 특히 가야 관련 기사로 채워져 있다. 서기 720년에 편찬된 「일본서기」가 왜 남의 나라 역사에 이다지도 관심이 많은 것일까. 그 목적은 倭가 4~6세기의 200년 동안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는 소위 「任那日本府」를 뒷받침하려는 불순한 의도 때문이다.

『가야사의 올바른 복원은 「日本書紀」를 얼마나 제대로 읽었는가, 즉 日本書紀 기사 중 天皇主義 史觀(천황주의 사관)에 의해 날조한 부분을 가려내는 능력에 의해 좌우되는 것입니다. 이와 더불어 가야의 유물·유적에 대한 안목도 필수적입니다』

일본의 4세기는 「수수께끼의 世紀(세기)」라고 한다. 그것은 「日本書紀」 및 「古事記」의 기사로부터는 일본열도의 역사를 전혀 알 수 없는 데로부터 유래한다. 그런데도 일본학계에서는 30년 전까지만 해도 야마토(大和) 정권이 4세기 후반에 한반도 南部에 출병해 2세기에 걸쳐 지배했던 것은 「움직일 수 없는 史實」로 강변했다.

일본학계가 그렇게 주장한 것은 廣開土王陵碑文(광개토왕릉비문)의 辛卯年(391)條 및 庚子年(400)條 기사 등을 근거로 삼은 것이었다. 이에 따라 일본 고교의 「일본사」 교과서에서도 「出兵과 支配(지배)」가 단정적으로 기술되었다.

「出兵과 支配」라는 일본학계의 通說(통설)이 성립되려면 그 목적과 결과에 대한 나름의 설명이 필요했다. 일본 학계는 「선진기술을 지닌 가야인들과 농·공구 및 무기의 소재인 鐵鋌(철정: 덩이쇠)을 약탈해 가는 것이 목적이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야마토 정권이 鐵鋌의 독점에 의해 다른 豪族(호족)들보다도 무력을 강화했을 뿐만 아니라 풍부한 鐵鋌으로 농·공구를 만들고, 선진 기술자(渡來人)의 투입으로 가와치(河內) 지방을 개척해 생산력을 결정적으로 높였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廣開土王陵碑文이 日帝 軍部의 의한 石灰(석회) 칠 등으로 조작되었다는 在日 사학자 李進熙(이진희)씨의 비판이 제기되고, 1985년 中·日 학계의 공동조사에서 碑面에 아직 석회가 광범위하게 남아 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이로써 『倭가 辛卯年(신묘년)에 바다를 건너와서 백제와 신라를 屬民(속민)으로 삼았다』는 따위의 일본 측 해석은 근거를 잃게 되었다.

다음은 李進熙씨의 「日本文化와 朝鮮」(NHKbooks·1999)에서 발췌한 반박 요지이다.

1) 야마토 정권이 鐵鋌(철정)을 탐해 出兵, 그것의 독점에 의해 강대한 군사력을 보유했다는데, 이른바 「헐벗은(裸) 군대」가 鐵製 무기와 甲胄(갑주)로 무장한 加耶의 군대를 어떻게 제압할 수 있겠는가?

2) 여러 종류의 가야 기술자를 납치했다는데, 그렇다면 왜 製鐵(제철) 기술자는 붙잡아 가지 않았는가. 일본의 주고쿠(中國) 지방은 가야 지역과 같은 화강암 地質帶(지질대)로서 砂鐵(사철)의 産地인 만큼 그것을 채취해 석탄을 섞어 가열하면 철의 量産(양산)이 가능한데, 그러하지 않고 굳이 철정을 운반해 왔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모순이다.

3) 철정의 수송 능력의 문제이다. 당시의 배는 20인승 정도의 보트에 불과해 그것에 적재할 수 있는 양은 미미할 것이다. 야마토 정권의 군사력·생산력에 혁명적 전환을 가져오려면 대량의 철을 소모해야 했는데, 당시 倭는 그만한 철정을 수송할 해운력을 보유하지 못했다.

4) 「任那日本府」를 2세기에 걸쳐서 유지했다고 한다면 가야와 신라의 반격이 있게 마련인데, 4세기 말엽의 야마토 정권에겐 戰況(전황)에 따라 대군을 파견할 능력이 없었다. 일본열도에서 통일정권이 등장한 것은 6세기 후반의 일이다.


연중 6개월간 항해가 불가능했던 당시의 大韓海峽

對馬島로부터 대한해협을 건너려면 北流하는 「恒流(항류·완류)」와 潮水(조수)의 干滿(간만)에 의한 「潮流(조류)」 그리고 「풍향」, 이 세 가지를 능숙하게 이용해야 비로소 가능하다. 恒流는 끊임없이 北東流하지만, 조류는 하루에 두 번 北東流(썰물)와 南西流(밀물)로 바뀐다.

日本 해상보안청이 8월부터 11월에 걸쳐 관측한 자료에 의하면 바닷물이 북동류하는 썰물 때가 아니면 古代 선박은 對岸(한반도 남해안)으로 도달할 수 없다. 즉, 이때 대마도 西岸의 북동류하는 조류의 속도는 2.7노트(5km/時)인데 부산 앞바다에 가면 3.8노트(7km/時)로 빨라진다. 따라서 북동류의 시작 때 대마도 西岸으로부터 배를 저어 南西流로 변하기 전까지 항해해야 對岸에 도착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한다.

한편 南西流하는 밀물 때 노를 저어 건너가는 것은 불가능하고, 또 늦가을에 들어 북서계절풍이 불기 시작하면 삼각파도가 치는 날이 많아져 다음해 봄까지 渡海(도해)할 수 없다.

「續日本紀」에 의하면 702년 遣新羅使(견신라사)는 늦가을에 대마도의 아소완(淺茅灣)까지 와서 703년 봄까지 그곳에 머물고 있다. 결국 겨울철을 포함한 그 전후 반 년 가까이는 渡海(도해)가 거의 불가능했다. 이렇듯 兵站(병참)이 연중 절반 가까이 중단되는 상황에서 소위 「任那日本府」를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반면에 당시 한반도에서 일본열도로 건너갈 경우엔 겨울철 항해가 안전했다. 이런 조건 속에서도 기원전 3세기로부터 기원후 7세기까지의 1000년 동안 100만 명의 이주민이 일본열도로 건너갔다(月刊朝鮮 2006년 4월호 참조).

그 이주민(渡來人)들의 原籍(원적)이 어디이든 그들의 출발항은 김해·마산·진동·하동 등 가야의 항만이었다. 신라 출신 이주민들의 출발항은 「삼국유사」의 「연오랑과 세오녀」 설화에서 나타나 있듯 포항으로 보이지만, 赫居世(혁거세) 시절부터 신라는 倭와 宿敵(숙적)관계였던 만큼 신라 출신 이민은 가야 출신보다 훨씬 적었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古代 일본 건국사는 가야 출신 이주민의 일본열도 개척사에 다름아니다. 현대 일본인의 80%가 古代 한국인의 피가 흐르고 있다는 사실은 필자의 「月刊朝鮮」 前月號 기사에서 거론했다. 어떻든, 아득한 古代에 벼농사가 더 잘 되는 땅을 찾아 대한해협을 건넜다는 것은 모험심 강한 족속들이었고, 그 후손들이 오늘날 세계적 경제대국을 건설했다는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은 아닐 것 같다.

白承玉 박사의 안내로 함안박물관 2층 전시실에 입장했다. 전문가에게 박물관에 관한 설명을 듣는 것은 행운이다. 함안박물관은 그리 크지 않지만, 매우 알뜰한 학습장이다. 1세기代의 주머니 단지, 2~4세기代의 굽다리 접시, 5세기代 손잡이 있는 잔과 그릇받침 등 토기들이 요령 있게 전시되어 있다.


일본으로 건너간 「불꽃무늬 土器」
일본 최대의 前方後圓墳인 오사카 소재 大仙陵(仁德왕릉으로 전해짐). 左上은 日本 랭킹 3위 규모인 陵山고분.

아라가야의 대표적 유물은 뭐니뭐니 해도 5세기에 제조된 불꽃무늬(火焰文) 토기다. 불꽃무늬는 동그라미 위에 길쭉한 이등변 삼각형이 이어진 모습으로, 필자의 눈에는 타오르는 「불꽃」이라기보다 처마 끝에서 숙담으로 떨어지는 「물방울」로 보인다.

불꽃무늬 土器가 다량 출토된 지역은 함안과 그 주변 지역인 창원·마산·의령·진주의 일부 지역이며, 멀리는 김천·거창·경주·부산, 일본의 긴키(近畿) 지역 등이다. 긴키 지역, 즉 일본의 옛 수도권 지역에서 이 5세기 咸安의 불꽃무늬 토기가 발견되고 있는 곳은 로쿠다이(六代) 유적, 후루(布留) 유적, 큐보지(久寶寺) 유적, 스즈노미야(鈴の宮) 유적 등이다.

지금까지 발굴조사를 통해 학계에 보고된 불꽃무늬 토기는 약 150점이다. 이 가운데 함안 지역에서 100여 점이 출토되었다.

『이같은 지역 가운데 토기의 출토 양상으로 보아 지금의 함안과 그 주변 지역인 창원·마산·의령·진주 일부 지역은 안라국의 영역으로, 그 밖의 지역은 안라국과 교류했던 곳으로 볼 수 있습니다. 바다 건너 倭와는 鎭東이나 馬山港을 통해 교류했던 것입니다』

아라가야의 유물과 아라가야인의 유적은 北규슈와 긴키 지역을 이어 주는 뱃길인 세토(瀨戶) 內海 연안인 주고쿠(中國)·시고쿠(四國)에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다. 그곳에서는 아라가야式 토기와 山城이 발견되었고, 심지어 가야神을 祭神(제신)으로 모시는 神社(신사)까지 있다.


「가라」는 新기술과 新제품의 대명사
5세기 일본에서 혁신적 기술 진보로 제작된 土器인 스에키.

필자는 20여 년 前, 在日(재일)동포 사회를 취재하기 위해 오사카(大阪)에 간 김에 닌도쿠(仁德)릉을 들른 적이 있다. 그 분묘의 길이만 400m가 넘어 그 묘역 양쪽에 지하철역이 설치돼 있는 초대형 前方後圓墳(전방후원분)이다. 교과서에 싣는 등 일본인들이 국민적 프라이드로 삼는 유적이다.

실제로 4세기 말부터 5세기 전반에 걸쳐 일본의 긴키(近畿) 지방에는 특이한 형식의 거대 무덤들이 축조되었고, 그 주위는 물이 흐르는 周濠(주호)가 감싸고 있다. 그러나 매장시설은 墳口(분구) 상부 바로 밑에 竪穴式(수혈식) 石室을 설치하는 비교적 간단한 구조이다.

또한 副葬品(부장품)도 同시대 가야의 왕급 무덤에 비해 빈약한 편이다. 예컨대 대량의 청동기와 玉類(옥류), 石製 팔찌 등 샤머니즘과 관련된 寶器的(보기적)·呪術的(주술적) 성격이 짙은 유물뿐이고 야마토 정권의 강대한 군사력 및 정치권력을 의미하는 것은 발견되지 않았다. 이에 대해 在日 사학자 李進熙씨는 그의 「일본문화와 朝鮮」에서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부장품으로 말한다면 히미코(卑彌呼: 그녀는 北규슈 소재 야마다이國의 샤먼的 女王으로 「三國志」 東夷傳에 표현되어 있음)가 군림했던 3세기 중엽의 일본사회와 질적으로 크게 변하지 않은 것이다. 古墳(고분)이 거대화한 것은 강대한 정치·군사력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샤먼的 권위의 肥大化(비대화)를 상징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5세기에 들어오면 일본열도에는 새로운 문물이 등장한다. 그 대표적인 것이 「스에키(須惠器)」라고 불리는, 단단하게 구운 토기이다. 스에키는 흙(胎土)을 손으로 반죽해 700~800℃로 구운 종래의 토기(土師器: 하지키)에 비하면 혁명적인 新제품이었다. 우선, 녹로(회전판: 물레)의 遠心力(원심력)을 이용해 대량 생산될 뿐만 아니라 規格品(규격품)도 제조 가능했다.

또한 登窯(등요: 오름가마)의 출입구를 일정 시간 동안 막아 1200℃ 이상의 還元焰(환원염)으로 스에키를 제작했다. 그 결과, 물을 부으면 튀길 만큼 탄력적이고 쉽게 깨지지 않는 튼튼한 그릇이 되었다.

―스에키와 불꽃무늬 토기를 비교하면 어떻습니까.

『스에키는 가야 토기의 亞流(아류)이며 모방품입니다. 스에키는 「가야系 陶質土器(도질토기)」라고 불러야 마땅하다고 봅니다』

스에키는 登窯와 耐水粘土(내수점토), 회전판, 還元焰燒(환원염소)라고 하는 네 개의 新기술의 등장을 의미한다. 「일본서기」 雄略 7년(463) 條를 보면 新漢陶部高貴, 鞍部賢貴, 畵部因斯羅我, 錦部定安那錦, 譯語卯安那 등 가야·백제·신라 등 한반도로부터 건너간 기술자들의 이름이 다수 기록되어 있다.

또 하나의 혁명적 사건은 5세기 중엽에 일어났다. U字形 가래와 호미, 칼날이 彎曲(만곡)한 낫, 대형 톱 등 새로운 철제 농구의 등장이다. 새로운 가래와 호미는 深耕(심경)을 가능하게 했고, 철제 낫과 톱은 풀베기 및 나무의 가지치기에 위력을 발휘했다.

또 대형 톱 및 가래, 호미는 原野의 개간에 없어서는 안 되는 도구였다. 이것들이 한반도에서 유래했던 것임은 물론이다. 일본의 古문헌에 보이는 「韓鋤(한서: 가라사히)」라든가 「韓鍛冶(한단야: 가라카누치)」 등이 그것들이다. 이렇듯 「가라」는 新기술과 新제품의 대명사였다.


수레바퀴 모양의 특이한 土器
수레바퀴 모양 토기. 함안읍 도항리 4호분에서 출토.

함안박물관엔 角杯(각배)가 수레바퀴에 실린 특이한 모습의 土器가 진열되어 있다. 원래, 角杯는 북방 유목민족이 말을 달리며 휴대했던 뿔잔인데, 한반도에선 옛 가야·신라 지역에서만 출토되고 있다. 이것과 관련해 고려문화재연구원 원장 金秉模(김병모) 교수는 신라·가야 지배층을 북방기마민족인 흉노 계열로 보고 있다.

이 수레바퀴 모양 토기는 실용품이 아니라 儀器(의기)로 제작된 것 같다. 古代人이 자신의 능력만으로 감당할 수 없는 문제에 부딪혔을 때,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초월적인 힘에 의지하거나 그 힘에 대한 공포를 떨치기 위해 일련의 儀禮(의례)를 행하는데, 그때 사용되는 도구를 儀器라 한다.

함안박물관에는 함안지역 3세기 木槨墓(목곽묘: 덧널무덤)에서 출토된 儀器性 철기인 미늘쇠(有刺利器)가 진열되어 있다. 미늘이 동그랗게 휘감긴 고사리 모양과 새(鳥) 모양이 장식되어 있다. 儀器性 투겁창(鐵矛)과 더불어 首長層(수장층)의 대형 무덤에서 발굴되는 유물이다.

손잡이가 정교한 문양과 金象嵌(금상감)으로 아로새긴 環頭大刀(환두대도: 고리자루칼), 아라가야 지배층의 부녀자의 것으로 보이는 玉製 목걸이도 눈길을 끈다. 4~5세기 아라가야 匠人(장인)들의 뛰어난 세공기술을 나타내고 있다.
등잔 모양 토기. 함안읍 도항리 (문)39호에서 출토.

白承玉 박사와 저녁을 함께 하려 했지만, 先約(선약)이 있다며 사양했다. 날씨가 서늘해 얼큰한 국밥이 그리웠다. 白박사는 함안면 우체국 앞 「대구집」을 추천했다. 79번 국도를 10여 리 달려 「咸邑(함읍)우체국」 앞 「대구집」을 찾아갔다. 45년 전엔 깬 돌이 마구 깔린 우둘투둘한 길을 자전거를 타고 갔지만, 이번에는 포장도로를 승용차로 달렸다.

「대구집」에 앉았다. 사골과 등뼈를 우려 낸 국물에 양지머리와 등심 고기, 그리고 고구마 줄기를 넣어 다시 푹 끓인 장국밥은 입맛에 맞았다. 칠순 전후의 주인 할머니를 모시고 소주잔을 기울이며 이제는 故人이 되었을 「趙大木의 그 후」를 물어보았다.

『버얼써, 별세하셨습니더』

물론 그럴 것이다. 45년 전 필자가 그 댁을 빙문했을 때 趙大木은 벌써 칠순이었다. 그 날, 趙大木의 부인은 까까머리 필자 앞에 식혜·강정·곶감 등이 차려진 소반을 내려 놓으며 『곶감 하나 드소, 이거 옛날 같으면 임금님의 수라상에 오르는 거요』라고 말했었다.


進上品 「파수 곶감」의 추억
고리방울. 함안읍 도항리 (문)54호에서 출토.

함안면의 「파수곶감」은 조선왕조 때엔 進上品(진상품)이었다. 파수 마을은 趙大木 댁에서 작은 고개 하나만 넘으면 만나는 마을이다.

―趙大木 어른은 지주였다면서요.

『그 어른 살아 계실 때만 해도 우린 이런 우스개를 했지요. 밥 한 그릇 잘 먹고 배가 부르면 「趙대목 안 불다(부럽다)」고 했거든요. 그 정도의 지주였십니더』

―趙大木의 자녀들이 지금도 함안에 삽니까.

『장남은 이민 가고… 모두 外地로 나갔지요. 막내아들의 농토만 여기 조금 남아 있답디더』

소주 한 병에 알맞게 붉어진 얼굴로 필자는 咸安鄕校(함안향교) 앞에 있는 옛 趙大木 집을 찾아갔다. 45년의 세월은 지형을 바꾸어 놓았다. 향교와 趙大木 집 사이엔 턱없이 큰 「함안읍내교회」가 들어서 십자가가 하늘을 찌르고 있다. 趙大木 댁의 기와를 올린 솟을대문은 이제는 슬레이트 지붕으로 바뀌어 있었다. 밤길을 도와 가야면으로 되돌아와 함안군청 앞 장미모텔 5층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한반도 최대의 古墳群
미늘쇠(有刺利器). 함안읍 도항리 (경)13호에서 출토.

지난 3월22일 오전 9시, 함안박물관 주차장에서 李泰勳 사진기자와 만났다. 하루 전날, 그는 전남 보성에서 차밭을 취재하다 달려와 필자와 합류했다. 둘은 박물관 뒤편으로 나 있는 완만한 오르막길을 따라 높이 60m의 末伊山에 올랐다. 말이산의 능선에 사적 제84·85호 「咸安 道項里·末山里 고분군」이 펼쳐져 있다.

고분의 대부분은 남북으로 길게 뻗은 600m의 주능선과 서쪽으로 뻗은 여덟 갈래의 능선에 분포하고 있다. 유역면적은 14만 평에 달한다. 白承玉 박사에 의하면 안라국의 王級 무덤 등으로 추정되는 100여 基의 대형 고분들은 높은 곳에 열을 지어 위치하고, 그 아래로 1000여 基나 되는 중소형 고분들이 산재해 있다.

함안 지역에 대한 고고학적 연구는 20세기 초 일제 강점기로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간헐적으로 진행되어 왔다.

제1기(1917~1945)는 구로이다(黑板勝美)와 이마니시(今西龍) 등 일제 관학파들에 의해 10여 차례에 걸쳐 고분과 山城에 대한 분포조사와 약간의 발굴조사가 이뤄진 시기였다.

白承玉 박사는 이를 「약탈에 가까운 발굴조사」라고 표현했다. 다수의 출토 유물들이 천지사방으로 흩어져 버렸기 때문이다. 慶全線을 놓으면서 말이산의 동쪽 능선도 잘려 나가 시가지화했다.

제2기(1945~1989)는 광복 이후 末伊山 고분군에 대한 부분적인 지표조사와 행정적인 현황파악 조사, 그리고 수습 발굴조사 정도에 그쳤던 시기였다. 가야사에 대한 인식이 부족했을 뿐만 아니라 먹고살기조차 어려운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아라가야의 역사에 대한 再해석을 위한 학술적인 목적 아래 체계적 조사가 진행된 시기를 제3기(1990년~현재)라 할 수 있다. 제3기 이후, 篁沙里(황사리) 고분군과 禮屯里(예둔리) 고분군에 대한 발굴을 시작으로 함안 지역의 4세기代 고분군에 대한 자료의 축적을 이루었고, 古式 도질토기에 대한 새로운 연구의 발판이 마련되었다.

특히 아라가야의 중심고분인 말이산(도항리·말산리) 고분군에 대해서는 1992년부터 지속적인 학술발굴조사가 지속되고 있다. 조사결과, 아라가야의 성장과 발전 및 소멸에 관한 역사적 추이를 확인할 수 있는 고고자료들이 다양하게 확인되었다.

4호분 앞에 섰다. 봉토의 지름이 39.3m, 높이가 9.7m나 되는 가야 최대 규모의 왕릉이다. 墓制는 1917년 10월 이마니시 교수에 의해 竪穴式 石室(수혈식 석실)로 확인되었다.


말갑옷이 처음 출토된 馬甲塚
함안박물관에 진열된 아라가야의 環頭大刀.

말이산 고분군 북쪽 끝자락에 있는 馬甲塚(마갑총)으로 다가갔다. 이곳에서는 고구려의 고분벽화에 그려진 것과 똑같은 말갑옷이 출토되었다.

말갑옷의 출토는 드라마틱했다. 1992년, 아파트 건설 공사장에서 포크레인 작업 중 피장자의 머리 부분을 찍어 버렸다. 피장자 주위에서 토기 등 副葬品(부장품)도 발견되었다. 창원문화연구소의 조사 결과, 4~5세기 首長層(수장층)의 목관묘로 밝혀졌다. 특히 아라가야 기마무사의 말갑옷은 원형에 가깝게 출토되어 아라가야의 武具(무구) 연구에 결정적인 자료가 되었다.

2005년 5월에 조사발굴된 6호분으로 발길을 돌렸다. 6호분은 말이산 주능선에서 서쪽으로 뻗은 능선의 사면에 위치해 있다. 주인공 주위에 순장자 5인이 함께 매장된 무덤이다. 이곳에서는 불꽃무늬 토기, 손잡이 달린 잔, 그릇받침(器臺) 등 많은 토기가 발견되었다.

말이산 주능선 위에 서서 보면 서쪽으로 「오차등」이라 불리는 낮은 구릉 하나가 오똑하게 솟아 있다. 그 능선의 上部에 직경 25m 내외의 대형 봉토분 24기가 줄지어 조성되어 있다. 이곳이 바로 南門外(남문외) 고분군이다. 南門外 고분군에서는 5세기 후반대의 함안에서 크게 유행했던 뚜껑 있는 굽다리접시(高杯)와 사발 모양 그릇받침이 출토되었다.

南門外 고분 일대의 지명은 가야동이며 그 옆동네는 先王洞, 그 뒷동네는 궁뒤마을이다. 또 오차등의 남문외와 더불어 南門, 大門川 등 큰 門과 관련한 지명이 적잖다. 학계에서는 가야동 일대를 아라가야의 왕궁지로 추정하고 있다. 가야동 일대엔 宮城(궁성) 방위를 위한 목적 때문인 듯 3개의 山城이 버티고 있다.
말이산은 아라가야의 고분이 1000여 基 분포한 한반도 최대의 고분군이다.

함안읍 도항리 6호분에서 출토된 아라가야의 여러 가지 토기.


천제산 기슭의 가마터와 질날늪
함안군 법수면 장명부락 金基萬씨 집 뒤편 대나무밭에서 발견된 아라가야 시대의 가마터(陶窯址).

함안박물관 전시실을 다시 들러 복습했다. 이어 함안군 법수면 묘사리 장명부락 金基萬(김기만)씨 집을 찾아나섰다. 金基萬씨 집 뒤 대나무밭에는 4세기 가야토기를 굽던 도요지(가마터)가 남아 있다고 한다.

남해고속도로 위로 가설된 오버브리지를 넘어 1km쯤 가면 수박과 참외를 재배하는 비닐하우스가 빽빽하게 들어서 있고, 그 사이로 승용차 한 대가 지날 만한 농로가 나 있다. 함안은 전국 수박 생산량의 20%를 차지하는 「수박의 고을」이기도 하다.

농로가 끝나는 곳이 「웃장명마을」이다. 김기만씨 집은 「웃장명마을」에서 마을 안길이 끝나는 천제산 기슭에 있다. 대문 옆에 매화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마침 매화가 滿開(만개)해 있다. 68세의 김기만씨는 『조상 대대로 살아온 집』이라고 말했다.

그의 안내로 집 뒤편 대나무밭에 가서 가마터를 살펴보았다. 가마터에는 토기의 파편이 무수하게 박혀 있었다. 김씨는 이곳 마을회관 뒤에도 옛 가마터가 있다고 말했다.

아라가야 시대의 가마터는 천제산 기슭을 빙 돌아가며 분포되어 있다. 천제산 기슭은 古代의 가마터로서의 입지조건을 두루 갖추었다. 가마에 땔 나무는 천제산에서 베어 오고, 粘土(점토)는 남강의 범람으로 형성된 저습지 또는 늪의 갈대밭 밑에서 채취했고, 남강과 낙동강의 水路를 수송로를 삼았던 것이다. 白承玉 박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함안 일대 가마터 수와 규모를 보면 안라국의 자체 수요를 넘습니다. 전성기 안라국의 인구는 5만 명을 조금 웃돌 정도로 추산되거든요. 안라국의 토기는 가야 諸國과 일본열도에 수출하기 위해 대량 생산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함안군에는 背後濕地(배후습지)로 형성된 늪이 많다. 지금도 유전늪·대평늪·모시벌·질날늪 등이 남아 있다. 김기만씨 집을 나와 법수면사무소 동북쪽 300m에 위치한 질날늪으로 찾아갔다.

질날늪에는 늪지식물이 자생하고, 두루미 등의 새들이 날아들어 먹이를 찾고 있었다. 법수면 늪지식물은 천연기념물 제346호를 지정되어 있다. 밟으면 푹 빠져 버릴 것 같은 늪지에서 갈대 밑 흙을 한움큼 쥐어 보니 쫀득쫀득하다. 白承玉 박사의 하루 전 날 강의가 생각났다.

『늪지 갈대밭 밑 점토로 만든 안라국의 토기는 손가락으로 치면 「땡땡」 소리가 나요』


아라가야의 中心港-旅港山 너머의 鎭東灣
함안박물관 앞 뜰에 再現해 놓은 아라가야의 덧널무덤(木槨墓). 창원문화재연구소의 조사로 확인된 이 5세기 전반 덧널무덤에서는 대형 철정 10매와 많은 양의 토기가 묻혀 있었다.

이제는 아라가야의 外港(외항)이었던 鎭東灣(진동만)을 찾을 차례다. 다시 가야읍의 중심가를 지나 함안면으로 접어들었다. 함안면으로 넘어가는 길 옆으로 조선 명종 22년(1567)에 건립된 「무진정」의 정자와 돌다리가 보이는데, 그림처럼 아름답다. 함안면 중촌리에서는 간밤에 위치만 확인한 옛 「趙大木」 집에 잠시 들러 45년 전에 필자가 「까까머리 손님」이 되었던 사랑방을 가만히 살펴보았다.

咸安鄕校 앞을 지나면 79번 국도의 4차선화 공사가 진행 중이다. 여기서 보이는 여항산은 봉우리가 평평한 사다리꼴을 이루어 더욱 우람하게 다가선다. 「갈 旅, 항구 港, 매 山」의 여항산, 바로 항구로 가는 산이 아니겠는가. 가야읍에서 鎭東까지의 지도상 직선거리는 8km 정도다. 그러나 여항산은 산이 깊어 그 계곡으로 이어진 鎭東 가는 길은 22km에 달했다.

남해의 바닷물은 쪽빛처럼 싱싱했다. 진동만 앞에는 작은 섬들이 문지기처럼 점재해 古代的 良港의 입지조건을 두루 갖추고 있다. 진동수협 냉동·냉장창고와 활선어 위판장 건물 앞 부두에는 소형 어선들이 한가롭게 정박하고 있었다. 봄의 바닷가에 서기만 하면 가슴이 넓어진다.

이어 남해고속도로를 달려 사천에 들어가 하룻밤을 묵었다. 사천이라면 浦上8國전쟁 때 아라가야를 공격한 史勿國의 옛 땅이다. 다음날 아침엔 국립진주박물관에 들렀다. 남강변 晉州城 안에 있는 이 박물관은 임진왜란 전문 박물관이지만, 단 한 점의 아라가야 유물을 전시하고 있다. 보물 제637호 「수레바퀴 달린 뿔잔」(土器)이다.

함안박물관에도 同種(동종)의 「수레바퀴 모양 토기」가 전시되어 있지만, 진주박물관의 「수레바퀴 달린 뿔잔」은 뿔잔(角杯)의 윗면에 고사리 나무 장식 하나를 살짝 덧붙여 멋을 부렸다. 수레바퀴는 죽은 자의 영혼을 하늘나라로 인도한다는 의미를 지녔겠지만, 고사리나무는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혹시 伯夷(백이)·叔齊(숙제)처럼 깨끗하게 나물 먹고 물 마시며 살다가 하늘나라로 가라는 뜻인지도 모르겠다.

함안의 바로 북쪽 의령군에서 출토된 5세기 아라가야의 유물이다. 고사리나무 장식을 덧붙여 더욱 세련미를 갖춘 이 絶頂(절정)의 예술품을 국립진주박물관에 기증한 분은 「최규진씨」라고 적혀 있다.

진주성의 矗石樓(촉석루)에 올라 南江에 몸을 던진 論介(논개)를 잠시 생각했다. 인제, 옛 대가야의 外港이었던 河東포구 80리를 거쳐 上京하기로 작정했다. 하동읍에 이르러 섬진강 건너편 광양 쪽을 보니 매화가 흐드러지게 피어 있다.
함안군 법수면 질날늪. 등지의 갈대밭 밑에서 채취한 粘土는 아라토기 제작의 胎土로 사용되었다.


한국 최대 姓氏와 일본 皇家의 先祖

光陽도 가야의 故土(고토)다. 최근, 光楊 서쪽의 順天에서도 가야 토기가 출토된 바 있다. 우리 역사에서 失傳된 가야의 영역 또는 판도는 우리에게 이미 알려진 것보다 훨씬 광범위할 것이다.

원로 언어학자 朴炳植옹은 필자에게 『가라후도(樺太: 사할린)까지도 南下 이전 가야인의 활동무대였다』고 말한다. 가라후도는 「가야 사람이 사는 땅」이라는 뜻이라 한다. 「日本地名辭典」을 보면 일본 전국에 加耶, 賀夜(가야), 阿野(아야), 加悅(가야), 韓國岳(가라구니다케), 唐津(가라쓰) 등 가야 관련 지명이 약 2500개나 실려 있다. 이는 백제·신라·고구려 관련 地名보다 훨씬 많은 것이다.

하동읍~광양시 다압면 사이에 걸린 다리를 통해 다압면으로 건너갔다. 매화가 만개한 백운산 기슭과 섬진강 사이로 난 길을 따라 20리쯤 北上했다가 다시 下行하여 「청매실 농원」에 들렀다. 매화동산 아래 비탈에는 매실을 담은 옹기독 2500여 개가 놓여 있다.

매실제품 전시장에서는 매실주, 매실초콜릿, 매실아이스크림, 매실김밥, 매실강정, 매실장아찌 등을 판매하고 있다. 「청매실농원」의 주인 홍쌍리씨는 매화나무의 상업화에 성공한 입지전적 여성이다. 매화동산에서 홍매화·청매화·백매화의 향기를 듬뿍 묻혔다. 그것도 가야의 향기인지 모르겠다.

이제는 정계에서 물러난 가야 김씨 유명 정치인은 일본에 가면 일본 황족들로부터 家禮(가례)에 따른 환대를 받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가야인의 후예는 나라가 망한 후에도 끈질긴 생명력을 과시해 왔다. 가야의 王孫(왕손)인 金庾信(김유신)은 삼국통일의 元勳(원훈)이 되어 신라 왕실에 의해 興武大王(흥무대왕)으로 추존되었고, 오늘날 가야 김씨는 한국에서 최대의 姓氏를 이루었다. 그러나 가야는 아직도 우리에게 未知의 영역이다. 가야사 연구는 이제부터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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