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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숨에 읽은 '프리마돈나의 추락': 논쟁적 인물 맥아더의 역사적 공과(功過)

서평(書評) 《프리마돈나의 추락―한국인은 모르는 맥아더의 두 얼굴》(1)/"대한민국 현대사의 진실을 알고싶은 사람들의 필독서"

글 鄭淳台(작가) 기자  2016-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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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을 이해하려는 사람의 필독서

《프리마돈나의 추락―한국인은 모르는 맥아더의 두 얼굴》의 저자인 조갑제(趙甲濟) 기자에 따르면 이 책은 한국전쟁의 마지막 비밀인 소련의 안보리 불참과 맥아더의 무모한 북진을 해독함으로써 이 전쟁의 의미를 세계사적 관점에서 재인식하려는 뜻에서 써졌다.


‘냉혈(冷血)의 대전략가’ 스탈린은 김일성을 앞장세워 다목적(多目的)의 남침전쟁을 일으킨다. 한반도에서 미군과 중국이 싸우도록 만들어 모택동(毛澤東)의 중국을 소련에 종속시키고, 미국을 아시아에 붙들어 매어 둔 사이에 유럽에서 공세적 주도권을 잡는다는 것이 스탈린의 속셈이었다. 그는 이 책에서 소개된 체코 대통령 고트발트에게 보낸 메시지에서 “미국에 프리 핸드(Free hand)를 주기 위해 소련 대표가 유엔 안보리에 불참,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았다”는 놀라운 고백을 하기도 했다.


평자(評者)가 좋아하는 책은 핸디 사이즈(Handy size)의 문고본이다. 300 페이지가 넘으면서도 꼭 읽어야 할 양장판(洋裝版)의 책이 있으면 무조건 하드 커버(hard-cover)를 떼내고 두 동강, 세 동강으로 나누는 것이 평소 평자(評者)의 습관이다. 《프리마돈나의 추락》은 6·25전쟁을 둘러싼 미국·소련·중국 지도부의 전략·음모와 관련한 방대한 자료와 증언 등을 추적·취재·분석한 力作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 책은 군더더기 하나 없는 275페이지의 핸디 사이즈다.


평자의 독서 버릇 중 또 하나는 기억·인용·참고할 부분이 있으면 밑줄(Underline)을 좀 심하게 치는 것이다. 평자가 이번에 숙독한 《프리마돈나의 추락》엔 온통 밑줄 투성이의 모습이다. 원래, 조갑제 기자는 팩트에 강한 남자이다. 오늘의 대한민국을 이해하려는 사람이라면 하룻밤을 밝히며 독파할 만한 책이다. 재미도 있다.


프리마돈나(prima donna)의 추락―. 프리마돈나라면 오페라(歌劇&#8231가극)의 여자 주연인 소프라노 가수가 아닌 것인가? 저자는 이 책의 부제(副題)를 ‘한국인이 모르는 맥아더의 두 얼굴’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52년간 미국의 직업군인으로 복무했던 맥아더 원수(元帥)가 왜&nbsp年下의 포병대위 출신인 트루먼 대통령으로부터 ‘프리마돈나’라는 조롱을 받았던 것일까? 프리마돈나라면 으레 휘황한 푸트라이트(脚光&#8231 각광)를 받으며 무대에 오르고, 열광적인 관객의 박수 속에 퇴장하는 존재인 것이다. 하기야 맥아더는 “하나님 이외엔 上官(상관)이 없는 사람”이라는 평을 받았던 인물이기는 했다.


맥아더의 역사적 공과(功過)


6·25남침 직후 즉각적인 미군 투입을 이끈 두 주역은 트루먼(1884∼1972)과 맥아더(1880∼1964)였다. 당시 맥아더는 일본 도쿄에 주둔한 미국의 극동군사령관이었으며, 미 대통령 트루먼에 의해 곧 유엔군총사령관을 겸임한다. 모든 역사적 인물에겐 功過(공과)가 있게 마련이다. 우선, 저자가 지적한 맥아더의 최대 공로는 무엇일까? 그것은 ‘확률 5000분의 1’이라는 仁川상륙작전의 성공보다 6·25 발발 직후의 초기 대응이었다.


&lt1950년 6월25일 북한군의 남침 소식을 접한 맥아더는 전광석화(電光石火)처럼 움직였다. 그는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타이밍’이라고 믿는 사람이었다. 후일, 인천상륙작전이 집중 조명을 받지만, 한국을 구한 맥아더의 진면목은 초기 대응과 파병 결정의 유도였다.


6월25일 첫날, 그는 워싱턴의 승인이 나기도 전에 워커 미 제8군사령관에게 요코하마 항구에서 탄약, 박격포, 소총 등을 실은 배를 한국으로 출발시키도록 명령했다. 해군&#8231공군사령관에겐 이들 선박의 항해를 보호하도록 명령했다. 또 워싱턴엔 제7함대를 보내 줄 것을 요청했다.


6월26일 오후, (中略) 트루먼 대통령은 맥아더의 先制的(선제적) 대응을 추인했다. (中略) 6월27일 김포상공에서 공중전이 벌어져 미군기가 3대의 북한 야크 기를 격추시켰다. 이날 오후, 스트레이트마이어 공군사령관에게 적군 집결지와 장비 및 시설을 폭격하도록 지시, 8시간 안에 183회의 출격을 기록했다. 그리고 이틀 안에 적 공군기 26대를 격추시켰다.

6월27일, (中略) 맥아더는 처치 준장을 팀장으로 하는 15명의 현지 조사반을 한국에 급파했다. 미 극동군사령부의 전방지휘소였다. 6월28일 밤, 처치 준장은 맥아더에게 “미 지상군의 개입 없이는 북한군을 38도선 이북으로 몰아낼 수 없다”고 보고했다.


6월29일 새벽6시 맥아더는 전용기(바탄호)에 참모들을 태우고 폭우 속의 하네다 공항을 출발, 4시간 후에 수원비행장에 내렸다. 북한 전투기가 활주로를 공격한 직후였다.


수원의 한 학교 건물에서 맥아더는 현황보고를 들었다. 처치 준장은 9만8000명의 한국군 가운데 2만4000명만 소재가 파악된다고 말했다. (중략) 맥아더는 전투현장을 시찰했다. 영등포 쪽 강둑에 올라서서 불타는 서울을 바라보았다. 북한군이 쏘는 포탄이 주위에 떨어지고 있었다. 그는 이 자리에서 두 가지 결정을 마음 속에서 내렸다고 한다. 주일(駐日)미군을 신속하게 투입하고, 북한군의 배후에 상륙작전을 편다는 것이었다.&gt


미 육군의 공간사(公刊史)는 “육군을 파견하도록 하는 데 맥아더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고 기록했다. 그러나 맥아더는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에 도취, 필생의 꿈이던 중국 본토 수복을 노린다. 중공군 집결의 정보를 묵살하고 유엔군을 북진시켜 갑자기 폭 1000km로 늘어나는 압록강∼두만강 국경을 향해 크리스마스 공세를 편 것은 중공군의 개입을 유도, 이를 계기로 삼아 중국 본토로 확전하기 위한 대모략이었음이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에게 보낸 편지와 맥아더에 대한 미 정보기관의 감청기록에서 확인된다.


트루먼이 확전을 거부하자 맥아더는 “한국을 포기하고, 일본만 지키자”고 압박하고, 유엔은 我軍이 37도선까지 후퇴한 상황에서 “현 위치에서의 휴전”을 제의했다. 이런 한국 존망(存亡)의 위기에서 신임 8군사령관 리지웨이가 전선을 38도선으로 밀어 올렸다.&nbsp


한반도를 美&#8231中 대결장으로 만들려 기도했던 스탈린


이 책에서는 “스탈린이 김일성을 괴뢰로 삼아 전쟁을 일으킨 뒤 미군을 불러들이고, 중국을 끌어들여 한반도를 美&#8231中 대결장으로 만들려고 했다”는 조지워싱턴 대학의 소턴 교수의 설(說)을 비중 있게 소개했다. 소턴 교수가 쓴 《왕따(Odd Man Out)―트루먼, 스탈린, 모택동(毛澤東), 그리고 한국전의 기원》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lt중국과 미국이 싸우도록 하려면 북한이 남한을 패배시키는 데 실패해야 했다. 소련이 만들어준 침공계획, 전쟁의 수행, 제공된 무기와 주지 않은 무기, 그리고 이들 무기의 제공 시점 등에 관한 새로운 자료를 분석하면 스탈린은 북한군의 승리를 막으려 했음이 명백하게 드러난다. 북한군이 승리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그 성공 가능성은 떨어졌다.


장기전은 북한군엔 재앙이었다. 스탈린은 북한군의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공군력을 제공하지 않았고, 방공(防空) 무기나 신무기, 그리고 도하(渡河)장비를 주지 않았다. 전쟁이 시작되자마자 스탈린은 모택동(毛澤東)에게 파병 준비를 압박한다. 이는 스탈린이 김일성의 실패를 예견하였음을 보여준다. 스탈린은 북한군이 부산교두보 공격에만 집중케 하고, 미군의 후방 공격에는 대비하지 못하도록 유도했다. (맥아더의) 인천상륙 이후에도 스탈린은 북한군을 지원하지 않고 모택동에게 파병을 요구했다.&gt


저자는 북한의 ‘김조실록(金朝實錄)’ 편찬에 참여했던 문필가 장진성 씨, 그리고 소위 ‘주체사상의 원작자’로서 한국에 망명한 황장엽(黃長燁:작고) 前 김일성대학 총장 등의 증언을 통해 소턴 교수의 ‘스탈린 음모설’을 뒷받침했다. 스탈린의 속셈은 한반도를 미&#8231중의 대결장으로 만들어놓고, 자신은 유럽을 호령하려고 했던 것이다. 장진성 씨는 북한 통전부 산하 ‘김조실록’ 필진 8인 중 1인으로 참여해 1976년경 북한 외무성에서 기록 정리한 김일성 교시를 읽은 바 있었다. 다음은 그가 기억하는 김일성의 발언 내용이다.


&lt (前略) 스탈린은 조국통일을 방해하고 가장 치명적 상처를 남긴 제일 나쁜 놈이다. 내가 늘 남조선을 해방시킬 수 있었는데 하고 가슴 치며 통탄하는 것이 바로 서울 점령 후 3일간이었다. 그때 우리가 서울에서 3일 동안 쉬지 않고 그 기세로 죽 밀고 나갔다면 미국 놈들의 생각도 바꿔놓을 수 있었다.


그런데 소련이 주겠다던 무기와 장비를 주지 않았다. 그때 가진 것으로 밑에까지 쭉 내려가기엔 타산이 맞지 않았다. 소련 놈들은 서울이 그렇게 빨리 점령당할지 몰랐다고 후에 변명했지만, 그것도 새빨간 거짓말이다. 애당초 스탈린은 미국이 무서워 (추가로 무기와 장비를) 줄 생각을 안했다. 그 무기를 기다리며 3일 동안 서울에서 엎어져 있는데, 피가 마르는 것 같았다. (下略) &gt


장진성 씨에 따르면 그때 김일성의 발언은 스탈린에 대한 분노로 가득 차 있었다. 저자에 따르면 황장엽씨도 저자에게 비슷한 비화를 들려주었다고 한다. “스탈린이 도하 장비 등 추가적인 군수지원을 해주지 않았다”는 내용이다.


소련의 유엔 안보리 불참 미스터리


한국전쟁을 둘러싼 또 하나의 미스터리는 앞에서 잠간 언급한 바 있는, 1950년 6월27일 소련대표의 유엔 안보리 불참이다. 소련 대표의 불참으로 미국이 주도한 안보리 결의안이 통과되어 유엔군의 한국 파병이 실현될 수 있었다. 만약 소련이 참석하여 거부권을 행사했더라면 미국은 “유엔과 국제사회가 북한군의 남침을 반대한다”는 명분을 살릴 수 없었다. 이 안보리 결의안 통과는 트루먼 대통령이 그 사흘 뒤 (해·공군에 이어) 육군까지 파병을 결정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소련의 불참은 미국의 파병을 도운 셈이다. 왜 그랬을까? 그 동안의 중론(衆論)은 “소련의 실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


소련의 유엔대사 말리크는 1950년 초부터 안보리 회의를 보이콧하기는 했다. 대만(臺灣)이 중국의 정통정부로 인정받아 안보리 상임이사국 자리에 앉아 있는 것에 항의하기 위함이었는데, 그 연장선상에서 말리크가 불참하였을 것이라고 추측되었다. 그러나 이런 속설은 소련이 붕괴된 후 비밀문서가 공개되기 시작하면서 부정되어 간다. 저자가 인용한 2005년 정 창 및 존 헬리데이의 공저(共著) 《모택동의 비화》는 이렇게 설명했다.


&lt말리크도 상부에 “안보리로 들어가고 싶다”면서 허가를 요청하였다. 스탈린은 그를 전화로 불러내 ‘불참’을 지시하였다. 그는 서방군대를 (한반도로) 불러들이려 했던 것이다.&gt


조갑제 저자는 2005년 러시아의 국립문서보관소에서 러시아 학자에 의해 발견된 스탈린의 1950년 8월27일자 편지를 인용했다. 이 편지는 스탈린이 프라하 주재 소련 대사에게 보낸 것으로서, 체코의 고트발트 대통령에게 구두로 전달하거나, 그가 요구한다면 필사(筆寫)하여 줄 것을 지시한 것이다. 그 결론 부분의 골자는 다음과 같다.


&lt (前略) 우리는 안보리에 네 가지 이유로 불참하였다. (중략) 넷째, 미국 정부가 안보리 다수결을 악용, ‘프리 핸드’를 갖고 어리석은 짓을 마음대로 저지르도록 함으로써 여론이 미국 정부의 실상을 알도록 그렇게 하였다. (중략) 우리가 안보리에 불참한 이후 미국은 한국에 대한 군사적 개입에 엮이어 들어가 군사적 명성과 도덕적 권위를 망치고 있다. (중략) 더구나 미국이 극동(極東)에 묶여 현재 유럽에 신경을 쓸 여유가 없다는 사실도 명백하다. 이 같은 사실은 세계의 세력 균형에 있어서 우리의 득(得)이 되지 않겠는가? 의심할 바 없이 그렇다. &gt


저자 조갑제 대표에 따르면 스탈린의 편지는 이때 이미 중공군의 개입을 기정사실로 전제하고 있음을 알게 한다. 스탈린이 이 편지를 썼던 1950년 8월 하순은, 낙동강 전선에서 북한군의 총공세가 절정에 달했고, 맥아더 유엔군사령관은 인천상륙작전을 준비 중일 때였다. 즉, 스탈린은 북한군의 8월 공세의 실패를 예견하였고, 또 그렇게 바랐던 것이 아닌가 의심이 들 정도라는 것이다.&nbsp


중국-소련-미국의 삼각관계


한국전 발발 직전 국제정세는 매우 유동적이었다. 1950년 1월12일 워싱턴의 내셔널 프레스 클럽에서 애치슨 미 국무장관의 연설은 그 의도가 무엇인지 많은 논란을 빚었다. 이 연설에서 애치슨은 한국이 미국의 방어선에서 제외된다고 밝혀 김일성의 남침을 불렀다는 평판을 듣기 때문이다. 저자는 애치슨의 연설이 역사적 의미를 갖게 된 것은 그 타이밍 때문이라고 보았다.


&lt1949년 9월에 소련이 핵실험에 성공하여 미국의 핵 독점시대는 끝났다. 그 직후 모택동(毛澤東)이 중국의 공산통일에 성공했다. 장차 소련과 미국의 군사적 대결이 불가피하다고 생각하던 스탈린으로선 유리해진 셈이지만, 모택동의 통일 중국은 두통거리이기도 했다. 모택동은 스탈린의 지도노선과는 다른 방법으로 공산화 통일에 성공했고, 유고의 티토 式으로 독자노선을 걷게 될 가능성이 있었다. 스탈린은 상당 기간 중국이 장개석(蔣介石)과 모택동 세력으로 분열되어 있기를 바랐다.&gt


저자에 따르면 1950년대 무렵, 스탈린의 최대 관심사는, 중국이 미국과 친해지는 것을 막고, 소련 진영에 붙들어 둘 방도의 탐색이었다. 미국의 트루먼 행정부도 비슷한 고민에 빠진다. 중국을 적대시하면 소련과 붙어버릴 것이란 판단을 내리고 유화(宥和) 제스처를 쓰기로 했다는 것이다. 저자는 중공을 소련으로부터 떼어 놓으려는 미국의 속셈이 ‘애치슨 라인’으로 나타났다고 판단했다.


&lt당시 모택동은 모스크바에 머물면서 스탈린을 상대로 ‘중소동맹조약’ 체결을 위한 협상을 하고 있을 때였다. 이에 맞추어 미국은 중국에 추파를 던진다. 1950년 1월5일, 트루먼 대통령은 기자회견에서 “대만으로 철수한 장개석의 국부군에 군사적 지원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 사실상 대만 방어를 포기한다. 애치슨 장관의 1월12일 내셔널 프레스 클럽 연설은 트루먼의 이 발언에 이어서 더 구체적으로 대중(對中) 메시지를 던진 것이었다. 연설은 중국을 소련으로부터 떼놓으려는 의도를 적나라하게 드러냈다.&gt


애치슨 라인이란 알류산열도-일본-오키나와-필리핀으로 연결하는 선을 미국의 극동방위선으로 삼는다는 것이었다. 그 결과로 한국, 대만, 인도차이나반도가 미국의 방위선에서 사실상 제외되었다. 한국의 경우 당시만 해도 미국에게 전략적으로 중요하지 않다는 인식이 지배적이었기 때문에 미국의 극동방위선에서 제외된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그것은 대한민국으로서는 사활(死活)이 걸린 문제였다. 임병직 외무장관은 즉시 주한(駐韓) 미 대사 무초를 초치해 “애치슨 선언의 진의를 해명해 달라”고 요구했다. 또 주미대사 장면(張勉)에게 훈령을 보내 “애치슨 발언의 경위를 조사해 신속히 보고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애치슨 국무장관은 한국이 미국의 극동방위선에서 제외된 이유에 대해 한마디 회답도 보내 주지 않았다.


나중에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당연히 애치슨선언에 책임이 있다는 비난을 받았다. 우선, 북한의 김일성이 애치슨 선언에 한껏 고무되었다. 그래서 소련과 미국이 중국을 사이에 두고 줄다리기를 하는 무대에 김일성이 뭣도 모르고 끼어든 것이다.


&lt1950년 1월17일 평양에서 열린 이주연(李周淵) 주중대사를 위한 송별 연회장에서 김일성은 술에 취한 말투로 소련대사관 참사관 이그나체프와 페리센코에게 말을 걸었다.


“나는 통일문제를 어떻게 하면 해결할 수 있을까 하여 잠을 자지 못 한다. 만약 남조선 인민의 해방과 조국통일 사업을 미룬다면 나는 조선 인민의 신뢰를 잃게 될 것이다. (1949년에) 모스크바를 방문했을 때 스탈린 동지는 ”남쪽을 공격해서는 안 된다, 이승만 군대가 북한을 공격한 경우에만 남조선을 반격해도 좋다“고 나에게 이야기 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지금까지도 공격해 오지 않기 때문에 남조선 인민 해방과 국가 통일이 미뤄지고 있다. 이제, 나는 다시 한 번 모스크바를 방문하여 남조선 인민을 해방하기 위한 인민군의 공격계획에 관해 허가를 얻고 싶다. 만약 스탈린 동지와 만나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모택동(注: 그는 모스크바를 방문중이었다) 동지가 모스크바로부터 귀국한 후 그와 만날 것이다. 모택동 동지는 중국의 내전이 끝난 뒤 원조해 주겠다고 약속한 바 있다.&gt


중국인 전사(戰史)학자로서 《모택동의 조선전쟁》을 쓴 주지안롱(朱建榮·주건영) 일본 동양학원대학 교수는 김일성이 “모택동 동지와 만날 것” 운운한 것은 스탈린을 자극하려는 목적에서였다고 분석했다. 저자는 駐평양 소련대사 스티코프로부터 이런 김일성의 발언과 관한 전문을 받은 스탈린은 처음엔 “애송이가 많이 컸군!”이라면서 기분 나빠하다가 “이거야말로 굴러온 호박이다”라며 좋아했을 것이라고 추측하였다.


김일성을 역이용한 스탈린


1950년 4월 모스크바를 재차 방문한 김일성에게 스탈린은 남침 허가를 해주면서 “소련의 핵무장, 중소동맹조약 덕분에 (남침해도) 미국이 개입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했다고 한다. 그러나 저자에 따르면 스탈린이 진심으로 미국이 개입하지 않을 것으로 믿은 것 같지는 않다. 스탈린은 김일성에게 소련이 무기는 지원하겠지만, 병력을 보낼 순 없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당신 이빨이 부러져도 나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다른 데 신경을 쓸 데가 많다. 그럴 때는 모택동의 지원을 요청하라.”


스탈린은 김일성에게 조건을 단다. 중국을 끌어들이기 위한 함정이었다. 스탈린이 “모택동을 찾아가 전쟁계획을 설명하고 동의를 받아라. 그가 반대하면 남침은 안 된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김일성은 스탈린의 지시대로 모택동을 만나, 남침전쟁에 대한 동의를 얻었다.


모택동은 國共內戰에 참전한 조선족 출신 중공군 4만 명을 김일성에게 넘겼다. 1949년 하반기부터 남침전쟁 발발 직전까지 무기와 장비를 휴대한 채 압록강을 건너온 조선족 출신 중공군 4만 명은 군복만 북한군의 것으로 갈아입고 6.25 남침의 제1파(병력 10만 명)에 가담했다.


중국인이 입버릇처럼 말하는 항미원조(抗美援朝), 즉 북조선을 침략한 미국에 대항하여 조선(북한)을 도왔다는 구호는 처음부터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더욱이 모택동은 유엔군의 북진 이후 연(延) 300만의 중공군을 투입해 대한한국 주도의 통일을 막았다.


1971년 미·중 화해를 주도했던 미 국무장관 헨리 키신저는 그의 저서 &lt&lt중국에 대하여&gt&gt에서 당시 스탈린의 의도를 다음과 같이 분석했다.


&lt 만약 미국이 개입하면 중국은 위협을 받고, 따라서 소련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진다. 중국이 미국과 대결하면 소련으로부터 대규모 원조를 받아야하기 때문이다. 만약 중국이 북한을 돕지 않으면 중국에 실망한 북한에 대한 소련의 영향력이 커진다.&gt


소련군 작전전문가들이 작성한 북한군 3단계 작전계획


최근,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가 러시아 자료 등을 통해 명백하게 밝혀낸 북한군의 3단계 남침공격계획”은 소련군 작전전문가가 작성한 것이다. 이 계획은 제2차 세계대전시 독·소전쟁의 영웅이자 작전전문가로 전투 경험이 풍부한 바실리예프 중장을 비롯한 소련군 대령급 작전전문가 10여 명이 북한에 들어가 작성했음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이때 작성된 남침공격계획은 총 3단계로서, 공격개시 일자는 정보 누설의 위험과 7월 장마로 인한 부대기동의 어려움을 고려하여 김일성이 6월25일(일요일)로 결정했고, 스탈린도 이에 동의했다. 특히 일요일을 공격개시일로 정한 것은 기습효과를 극대화하려는 의도에서였다.


남침공격계획의 제1단계는 최초 국군방어선을 돌파한 후 서울 지역에서 국군 주력을 이중 약익(二重 兩翼) 포위로 격멸하는 단계로서 전쟁 개시 2일차에 서울을 점령하는 것이었다. 이때 작전종심(作戰縱深)은 38도선으로부터 수원∼원주∼삼척까지의 90km를 5일 만에 수행하는 것이었다.


제2단계는 국군 증원 병력을 격멸하고 전과(戰果)를 확대하는 단계이다. 이 단계에서 북한군은 군산∼대구∼포항까지의 작전종심 180km를 14일 만에 돌파하는 것이었다.


제3단계는 국군 잔류 병력을 소탕한 후 신속히 남해안으로 진출하여 주요 항구를 점령하는 단계이다. 이 단계는 부산∼여수∼목포까지의 작전종심 80km를 10여일 만에 점령하는 것으로, 북한군은 미군이 증원하지 못하도록 남해안의 주요 항구를 신속히 장악하는 것이었다.&nbsp


1950년 6월25일 일요일 새벽 4시를 전후하여 全 전선에 걸쳐 북한군의 포격이 실시되었다. 야포와 박격포의 공격준비사격과 더불어 T34전차를 앞세우고 38도선 전 지역에 걸쳐 일제히 북한군의 기습남침이 시작된 것이다.


6월28일 북한군은 서울을 점령했다. 7월1일, 스탈린은 평양 주재 스티코프 대사를 통해 김일성에게 질책성 전문을 보냈다. “서울을 점령한 지 사흘이 지났는데, 뭘 하고 있느냐?”고 따진 것이었다. 스탈린은 김일성에게 “진격은 어떤 일이 있더라도 계속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남조선 해방이 빠르면 빠를수록 (미국의) 개입 기회가 줄어든다”고 지시했다.


김일성은 스탈린이 무기와 장비를 충분히 대주지 않으면서 진격을 계속하라는 명령을 내리는 데 불만이 많았지만, 항의할 처지가 아니었다. 이튿날 스티코프 대사는 스탈린에게 북한 지휘부의 동향을 보고했는데, “김두봉과 홍명희 등은 조선군의 전력상 대미(對美)전쟁을 감행하는 것은 곤란하다는 입장이다”라고 전했다.


스탈린은 점령한 서울을 지키면서 한강 남쪽으로 내려가기를 머뭇거리는 김일성의 등을 떠민 것이었다. 그는 유엔 주재 소련대사를 안보리에 불참시켜 유엔군 파병 결의를 막지 않음으로써 미군이 개입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었지만, 김일성이 미군과 싸워서 져야 중공군을 끌어들일 수 있었다. 스탈린의 압박을 받은 북한군은 한강을 넘어 7월3일부터 남진작전을 재개했다.


유엔의 신속한 참전 결의에 따라 미 24사단 예하 스미스부대가 지상전투에 처음 투입되었으나 7월5일의 오산전투에서 패했다. 미군의 초전 패배 이후 평택∼제천∼울진을 연하는 선에서 경부국도를 중심으로 미군은 서부를, 국군은 동부를 맡아 지구전을 전개했다. 그러나 아군은&nbsp금강방어선과 대전전투에서 패배하는 등 T34 전차를 앞세운 북한군의 공세에 밀려 7월 말 낙동강전선까지 후퇴해야만 했다.북한군의 주력 전차 T34는 독소전쟁에서 위력이 증명된 명품이었다. 6.25 남침전쟁의 초전에서 전차를 보유하지 못한 국군뿐만 아니라 경(輕)전차를 보유한 미군에까지 압도적인 힘을 과시했던 것이다. 미군이 낙동강 방어선 전투에서 최신예 전차 M26 퍼싱과 M46 패튼을 투입하기 전까지 T34는 사실상 전장(戰場)을 지배했다.(계속)











프리마돈나의 추락
한국인은 모르는 맥아더의 두 얼굴

趙甲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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