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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엔군의 V자형 北進은 중공군을 부른 치명적 실책

서평(書評) 《프리마돈나의 추락―한국인은 모르는 맥아더의 두 얼굴》(2)맥아더가 인천상륙작전 성공 이후, 이해하기 어려운 첫 조치는 원산(元山)상륙작전, 그리고 미 8군과 제10군단의 분리 운용이었다.

글 鄭淳台(작가) 기자  2016-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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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격 발판 마련한 낙동강 교두보


7월20일, 김일성은 북한군에게 “8월15일까지는 반드시 부산을 점령하라”고 독촉했다. 북한군은 8월과 9월 두 차례의 총공세를 가해 왔다. 8월에는 왜관→다부동→대구 방면에 주공(主攻)을 지향시켰으나 我軍의 완강한 저항으로 돌파에 실패하자, 9월에는 모든 방면에서 돌파를 시도하여 국군과 유엔군은 한때 영산, 다부동, 영천, 포항이 동시에 돌파당하는 최악의 위기를 맞기도 했다.

전장에서는 거들먹거리며 잘 나갈 때가 실은 위기이다. 러시아 비밀문서에 의하면 모택동은 9월 초 다음과 같이 경고음을 발했다.

“인민군(북한군)이 낙동강선에서 8월 한 달이나 공세를 지속했음에도 불구하고 돌파하지 못했다는 것은 유엔군이 새로운 공세를 준비하고 있다는 증거이며, 유엔군의 새로운 공세는 상륙작전 형식이 될 것이고, 상륙지역은 인천 또는 남포(南浦)가 될 것이다. 이 시점에서&nbsp 인민군은 유엔군의 공세에 대비해 축차적인 저지 진지를 준비하고, 유엔군의 인천 또는 남포 상륙에 대비해 후방 예비대를 보유해야 한다.”

정확한 예측이었다. 그러나 승리의 신기루에 매달려 있었던 김일성 등 북한 수뇌부는 모택동의 조언에도 불구하고, 경인(京仁) 지역에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예비대까지 낙동강 전선으로 빼돌렸다.


한국전쟁에서 스탈린은 모택동과 김일성을 마치 부하처럼 다뤘다. 이는 공개된 3자 사이의 전문(電文)에서 잘 드러나 있다. 자존심이 강한 모택동도 스탈린을 스승처럼 받든다. '프리마돈나의 추락' 저자는, 그 까닭을 스탈린이 연출한 무대에 모택동이 ‘배우’로 등장한 때문이라고 보았다. 일단 전쟁 국면에 들어가면 무기 지원 능력을 독점한 스탈린에게 종속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6월25일 이후 공산 측의 지휘체계는 스탈린→모택동→김일성 순으로 서열화되었다.

1개 戰線에 2인의 지휘관과 폭 80km의 틈새


맥아더 유엔군사령관은 미군 수뇌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인천상륙작전을 추진했다. 그는 적의 늘어진 병참선(兵站線)을 차단하고 낙동강전선에 집중된 적을 남쪽과 북쪽에서 협공함으로써 단기간에 전쟁을 종결시킬 수 있다는 점을 강력히 설득해, 결국 미국 수뇌부의 승인을 얻어냈다.

약 7만5000명의 병력과 261척의 함대로 기습적인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한 맥아더는 북한군을 격파하고, 9월28일 서울을 수복했다.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후방 보급로가 차단된 낙동강 전선의 북한군은 급속히 와해되기 시작했다.

9월16일, 낙동강 전선에서 국군과 유엔군은 총반격을 개시했다. 유엔군은 마산→군산 및 대구→서울 방향으로, 국군은 영천→춘천 및 포항→강릉 방향으로 공격하여 북한군을 격멸하면서 38도선을 회복함으로써 전선을 전쟁 발발 이전으로 되돌려 놓았다.&nbsp&nbsp

암호명으로 ‘크로마이트’라고 일컬은 인천상륙작전의 대성공은 맥아더를 대번에 우상의 지위로 끌어올렸다. 맥아더는 ‘성공확률 5000대 1이라는 도박’(워싱턴 지도부의 견해)을 성공시켰던 것이다. 이후 유엔군과 국군은 서울을 회복했고 10월1일에는 국군이 먼저 38도선을 돌파했고, 유엔군도 破竹(파죽)의 기세로 북진한다.&nbsp

맥아더가 인천상륙작전 성공 이후, 이해하기 어려운 첫 조치는 원산(元山)상륙작전, 그리고 미 8군과 제10군단의 분리 운용이었다. 인천상륙작전의 주력인 미 제10군단 소속 해병1사단과 7사단을 원산으로 보내려면 서울-원산 간 철로나 도로를 이용하는 게 빠른데, 굳이 해상(해병1사단)과 경부선(제7사단)을 통해 부산으로 크게 우회시킨 다음 부산항에서 집결해 다시 해상이동으로 원산에 상륙시키는 잘못을 범했던 것이다. 이 바람에 부산항과 인천항은 체선(滯船) 사태를 빚어 아군 전체의 병참선을 스스로 막은 결과를 빚었다.

유엔군의 제8군은 약 18만 명의 병력으로 평양을 거쳐 압록강으로 향하고, 병력 약 7만의 미 10군단은 원산에 상륙, 동해안을 따라 먼저 북진 중인 국군 제1군단(2개 사단)을 예하에 거느리고, 한반도의 북동쪽으로 진격했다.

그런데 8군과 10군단 사이엔 산악지대(낭림산맥)가 있어 두 전선 사이가 연결되지 않았다. 이 낭림산맥은 2000m 전후의 봉우리들이 남북으로 뻗어 제8군과 제10군단을 격리시켰다. 나중에 중공군은 폭 80km나 되는 이 무방비 상태의 산악지대로 들어와 8군과 10군단의 측방을 공격했다. 유엔군의 V자형 북진이야말로&nbsp 중공군의 대공세를 성공시킨 치명적 실책이었다.

1950년 10월25일 중공군의 제1차 공세가 개시되었다. 서부전선에서 청천강을 넘어 북진하던 8군이 중공군의 공격을&nbsp 받았던 것이다. 중공군은 특히 무기와 장비가 열세인 한국군 3개 사단(제1&#8231 제6&#8231 제8사단)을 골라 집중 타격을 가했다. 그런 중공군은 11월5일&nbsp 全전선에서 갑자기 사라졌다. 맥아더는 보급을 위해 사라진 중공군의 실체를 파악하지 못 했다. 정보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분석과 판단을 잘못한 결과였다.

실은 그때 서부와 동부전선에서 많은 중공군 병사가 포획되었다. 그럼에도 맥아더 사령관, 워커 8군사령관, 알몬드 10군단장은 중공군의 대규모 참전을 사실로 받아들이지 않으려 했다. 11월2일, 유엔군사령관의 정보참모인 윌로비 소장은 참전 중공군의 규모를 1만6500명으로 추정했다. 실제로는 서부전선 18만 명, 동부전선에 12만 명 등 총 30만 명의 중공군이 이미 들어와 있었다. 엄청난 과소평가였다.


크리스마스 공세의 대재앙―중공군의 제2차 공세&nbsp&nbsp


11월24일, 맥아더는 또다시 총공세를 명령했다. 언론이 ‘크리스마스 공세’라고 이름 붙인 것은 맥아더가 “이 작전에 성공하면 크리스마스를 고향에서 보낼 수 있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유엔군은 11월24일 하루 별다른 저항 없이 15km를 진격했다. 그런데 바로 그 다음날인 11월25일, 36개 사단 규모로 증강된 중공군의 제2차 대공세가 시작되었다. 중공군은 중부의 산악지대에 새로운 부대를 집결시켜 그 정면으로부터 성난 파도와 같이 진격해 국군 제2군단 예하의 제7, 제8사단을 덮쳐버렸다.&nbsp&nbsp

중공군의 공격요령은 익측(翼側) 및 틈새로부터 잠입, 측배(側背)와 정면으로부터 공격을 계속하는 동시에 상대의 퇴로(退路)에 매복해 후퇴하는 상대에게 결정타를 가하는 것이었다. 유엔군은 화력에 의해 이를 분쇄하려고 했지만, 인해전술(人海戰術)의 파도에 휩쓸려 진지가 잇달아 붕괴되고 말았다.

11월29일, 유엔군은 북한 지역에서 東西의 폭이 가장 좁은 숙천∼순천(順川)∼성천∼양덕∼원산 선(평양방위선: 180km)에서 중공군의 진격을 저지하려 했다. 그런데 12월3일, 이 평양 방위선의 중앙부에 위치한 성천(成川:평양 동북동 16km)이 중공군에게 탈취되어, 이 돌파구로부터 중공의 대군이 쏟아져 나왔다.

공중정찰에 의하면 중공군 병력의 파도는 끝없이 이어져 산야는 중공군으로 뒤덮혀 있는 듯했다. 이때 중공군은 기도비익(企圖秘匿)보다도 속도를 중시해 오로지 남진을 서두르고 있었다. 이대로 남진이 계속되어 대동강 남안에 진출하면 제8군은 포위된다. 유엔군은 위기에 빠졌다.

왜 이런 사태가 빚어진 것일까? 그것은 맥아더가 중공군을 너무 얕본 결과였다. 만주전쟁과 중일전쟁 때의 얘기이지만, 일본군 소부대가 전술적 실수를 범해 중국군 대부대의 한복판으로 진입해도 ‘적진 돌파’, 병력수가 월등한 중국군 대부대와의 충돌을 피해 우회해도 ‘포위’가 되어, 그 결과는 항상 중공군의 패배였던 것이다.

맥아더라면 그런 일본군으로부터 미주리호 함상에서 항복을 받아낸 일본 점령군사령관으로 군림했다. 이것을 상징하는 이 책에서도 소개되는 사진 한 장이 있다. 1945년 9월27일 도쿄의 미 대사관에서 맥아더 원수와 히로히토 日王이 처음 만난 장면을 촬영한 것이다.

항복 직전까지 현인신(現人神)이었던 일왕 히로히토는 일본의 ‘鹿鳴館(녹명관) 시대’에서처럼 턱시도의 정장 차림에 점령군사령관 앞에서 차렷 자세이다. 녹명관은 메이지(明治&#8231명치) 정부가 幕末(막말)에 열강과 맺은 불평등조약을 개정하기 위해 주일(駐日) 외교관들을 초대해 호화판 댄스파티를 베풀었던 장소이다. 그때 열강의 외교관들은 턱시도 차림의 일본 고관들을 ‘원숭이’라고 흉을 보았다. 이런 굴욕의 시절을 일본사에서는 ‘녹명관 시대’라고 부른다.&nbsp

반면 맥아더는 약식(略式) 근무복 차림에 뒷짐을 진 모습이다. 1950년 10월 하순 이후, 중공군이 한국전쟁에 본격 개입하자, 맥아더는 아마 이런 생각을 했을 것이다.

일본군은 중국군과의 전투에서 항상 이겼다, 나는 그런 일본군을 이겼다, 고(故)로 나는 중국군을 이길 것이다&#8212이런 3단논법(三段論法)은 병가(兵家)에서는 금물(禁物)이다. 경적필패(輕敵必敗)가 병법(兵法)의 상식이기 때문이다. 맥아더는 ‘알지도 못하는 나라’에 들어와 싸우는 미군 병사들의 사기를 간과했던 것이다.&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

중공군의 제2차 대공세에 밀린 맥아더 원수는 38선으로의 총퇴각을 결단했다. 그리고 흥남에서 해상으로 철수한 제10군단을 육로로 북상시켜 38도선으로 후퇴하는 제8군을 증원(增援)토록 하라는 지령을 발했다. 이로써 전쟁은 또다시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된다.

중공군이 서울로 접근하고 있을 때(1950년 12월23일) 워커 8군사령관은 그를 태운 지프가 서울 북방에서 국군 제6사단의 트럭과 충돌해 즉사했다. 후임 8군사령관으로는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영웅’ 이었던 육군 참모차장 리지웨이 중장이 임명되었다. 신임 리지웨이 8군사령관은 종래 맥아더 유엔군사령관의 직속이던 미 10군단까지 휘하에 두게 됨으로써 ‘1개 전선(戰線) 2인 지휘관’의 잘못이 시정되었다.


을(乙)의 자세로 휴전모색


1950년 12월 미국은 한국에서 벌어진 중공군의 제2차 공세로 공황상태에 빠졌다. 영국은, 미국이 중국 본토를 공격, 확전의 길로 감으로써 유럽이 소련의 위협에 노출되는 것을 방치하지 않을까 걱정하였다. 애틀리 영국 총리는 워싱턴으로 달려가 트루먼 대통령을 압박, 한국에서 철수할 것을 권하고, 원자폭탄을 쓰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nbsp

유엔총회는 12월14일 아시아 13개국이 제안한 휴전결의안을 채택했다. 이에 앞서 12월 초 유엔은 뉴욕에 있던 중국대표에게 중국의 휴전조건을 타진했다. 중국 총리 주은래(周恩來)는 스탈린에게 어떻게 대답했으면 좋겠는지, 지침을 요청했다. 스탈린은 12월7일 중국정부에 이런 조언을 했다.

&lt우리는 한국에서의 휴전 조건에 관한 중국의 입장을 지지함. 이런 조건들이 충족되지 않는 한 군사활동을 중지할 수 없다고 생각함. 동시에 너무 솔직하게 미국의 대리인 역할을 하는 3개국(이란&#8231캐나다&#8231인도) 대표에게 중국의 카드를 보여선 안 될 것임.&gt

유엔의 휴전 제의를 받은 중국은 12월22일 주은래를 통해 유엔 측의 제의를 거부했다. 인도 수상 네루가 초안한 유엔의 휴전안의 골자는 38도선에서 휴전하고, 비무장지대를 만들며, 휴전 후 한국과 대만문제를 협의한다는 것이었다. 중국의 휴전조건은 한국과 대만 및 대만해협으로부터 미군이 철수하고 대만 대신에 중국을 유엔에 가입시켜 주어야 협상에 응하겠다는 것이었다.&nbsp&nbsp

약 40만 명의 중공군이 38도선을 향해 물밀 듯이 내려오고, 유엔군은 싸워 보지도 않고 총퇴각을 하던 중이었다. 이런 승세를 업은 중국이었다. 그들로선 자신감 넘친 거부였다.


중공군의 3차 공세와 1·4후퇴


중공군은 1950년 12월31일에 제3차 공세를 감행했다. 문산(汶山) 우측의 국군 제1사단과 동두천의 제6사단 등 국군 부대가 중공군의 主 타격목표였다. 해가 바뀌어 51년 1월1일, 제8군사령관 리지웨이는 국군 제1, 제6사단 지역에 커다란 돌파구가 형성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는 유엔군이 현 위치에서 더 이상 지체할 경우 주력이 중공군에게 포위될 가능성이 클 것으로 판단했다.

그는 全 부대를 한강∼양평∼홍천을 연하는 선으로 철수시켰다. 이어 1월3일 오후에는 평택∼안성을 연결하는 37도선으로 철수했다. 이른바 1·4후퇴였다.&nbsp&nbsp

국군과 유엔군이 철수하자 그 뒤를 따라 중공군이 서울을 점령했다. 리지웨이 장군이 한강선 방어를 포기하고 조기 철수를 명령한 것은 한강이 두꺼운 얼음으로 뒤덮혀 있어 중공군의 도하를 막는 데 도움이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공군 역시 그동안의 전투력 손실과 보급의 제한으로 인해 더 이상 남하하지 못했다. 이 기간 중 전국적으로 약 764만 명의 피란민이 엄동설한 속에서 방황하게 되었다.&nbsp
&nbsp
한편 東京의 맥아더는 워싱턴에 대해 새로운 전쟁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정치적 결정이 필요하다고 전제하고, 공&#8231 해군으로 중국본토를 공격하는 권리와 대만군의 한국 파견을 요청했다. 그러나 워싱턴은 이를 거부했다. 이리하여 워싱턴과 동경(東京) 간에는 격렬한&nbsp 응수가 계속되었다. 저자는 다음의 응수를 소개했다.

-1951년 1월9일, 합참은 맥아더의 12월30일자 건의를 조목조목 반박하는 電文을 보냈다.
&nbsp&lt중국에 대한 해안봉쇄는 유엔의 동의를 받아야 하므로 시간이 걸린다. 봉쇄는 홍콩에 큰 영향을 주므로 영국과 협의하여야 한다. 중국 본토에 대한 포격은 중공군이 한국 바깥에 있는 미군이나 유엔군을 공격할 때만 허가될 것이다. 대만 군대는 결정적 역할을 할 수 없으므로 한국 전선에 투입시킬 수 없다. 한반도에서 철수하는 것이 병력과 물자의 심각한 손실을 막기 위하여 꼭 필요하다고 판단하면 일본으로 철수해도 좋다.&gt


-1월10일자 電文에서 맥아더는 합참을 또다시 물고 늘어진다.
&lt내가 지휘하는 병력으로는 한국과 일본을 동시에 방어하기에는 불충분한데, 한국 철수를 결심하는 기준으로 ‘심각한 손실’이란 매우 주관적이므로 자의적으로 해석될 수 있으니 그 기준을 명시해 달라.&gt


맥아더는 이렇게 한국 철수의 책임을 워싱턴 쪽으로 돌려 놓으려 했다. 그는 한국을 지킬 것인가, 포기할 것인가는 지역사령관의 능력을 넘어서는 가장 높은 수준의 국가 대사(大事)라고 규정했다. 맥아더는 절묘한 문장으로 전문을 마감했다.

&lt내가 앞서 지적한 대로 나의 지휘부에 가해진 비상한 제한과 조건 하에서 한국에서 군사적 위치를 고수하기란 불가능하지만, 더 중요한 정치적 고려가 그렇게 요구한다면 유엔군은 완전히 파멸될 때까지 시간의 구애 없이 버티어낼 수도 있다.&gt

著者에 따르면 맥아더는 다시 한 번 “내 요구를 받아주든지, 아니면 전멸이냐 철수냐를 결정하라”고 들이댄 것이다. 중국으로의 전쟁을 확대하지 않으면 한국에서 철수가 불가피하다면서도 철수 결정의 책임을 워싱턴에 떠넘겼던 것이다.

마셜 국방장관은 이 전문을 읽고 고민에 빠졌다. 그는 나중에 “그때가 최악의 순간이었다”고 회고했다. 애치슨 국무장관은 “맥아더는 최고사령관(대통령)에게 불충한 사람이고 구제불능이었다”라고 평했다. 양측의 공방은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유엔의 굴욕적 휴전안―“37도선에서 휴전하자”


한국과 미국이 최악의 상황에 빠진 1951년 1월 유엔에선 심상찮은 움직임이 일고 있었다. 미국이 유엔에서 중국을 ‘침략자’로 규탄하려고 하자 英연방 국가들이 반대하고 나선 것이다. 이들은 ‘침략자’ 규탄이 휴전협상을 불가능하게 만들 것이라 주장, 미국에 휴전안을 만들 시간을 줄 것을 요청했다. 휴전위원회 소속 인도(印度) 및 캐나다 대표가 휴전안을 만들었다. 미국으로서는 이 휴전안에 굴욕감을 느꼈지만 동의했다. 휴전안은 1951년 1월13일 유엔총회 제1위원회에서 통과되어 중국에 제시되었다. 5개 항이었다.
&nbsp
1. 현 위치에서 휴전.&nbsp
2. 평화를 회복하기 위한 정치회담 개최.
3. 단계적으로 한반도에서 모든 외국군 철수.
4. 한반도 전체를 관리하기 위한 준비 절차에 착수.
5. 휴전 성립 후 미국, 영국, 소련, 중국이 참여하는 회담을 개최, 대만 및 중국의 유엔 가입 등 극동 문제들을 논의한다.


‘현 위치에서의 휴전’이라면 남한의 면적 중 서울을 포함한 3분의 1이 빼앗긴 북위 37도선의 휴전을 의미한다. 애치슨 국무장관은 회고록(Present at Creation)에서 이렇게 고백했다.
&nbsp
&lt이 휴전안을 지지할 것인가, 반대할 것인가의 결정은 살인적 고민이었다. 한국을 상실하고, 의회와 언론의 분노를 뒤집어쓸 것인가, 혹은 유엔에서 다수의 지지를 잃을 것인가? 국무부는 심사숙고를 거듭한 끝에 대통령에게 휴전안을 지지할 것을 건의, 허락을 받았다.&nbsp
물론 이는 최선의 선택이 아니었다. 우리는 중국이 이 휴전안을 거부해 주기를 열렬하게 바라면서, 또 그렇게 확신하면서 동의를 해 주었다. 중국이 거절하고 난 후에는 우리의 친구들이 제 정신으로 돌아와 중국을 침략자로 규탄하는 데 협조해 줄 것이라고 판단했다.&gt


1월13일자 유엔의 휴전안에 대한 중국의 공식적인 반응은 1월17일에 나왔다. 주은래 총리는 그들의 대외(對外) 창구로 활용하던 베이징 주재 인도 대사 파니카르를 통해 유엔의 휴전제의를 거부했다. 그 요지는 이러했다.


&lt휴전은 미군에 숨 돌릴 시간을 줄 뿐이다. 휴전 후의 협상도 언제 끝날지 모른다. 우리는, 한반도에서 모든 외국 군대의 철수, 한국인에 의한 한국 문제 결정, 대만 및 대만해협으로부터 미군 철수, 그리고 미국·소련·영국· 중국에 프랑스·이집트·인도를 포함시킨 7대국 회의를 중국 영토에서 개최할 것을 요구한다. 중국의 유엔 가입은 회의 시작과 더불어 기정사실화한다.&gt&nbsp&nbsp


교만해진 중국이 예상대로 유엔의 휴전안을 거부하자 ‘5일간의 악몽’에서 벗어난 애치슨 미 국무장관은 보류했던 중국 규탄 결의안 통과를 본격적으로 추진하기 시작했다. 미국의 유엔 주재 대사 오스틴은 “유엔이 평화적 해결 방법을 모색했으나, 중국이 거부했으므로 정의로운 행동에 나서지 않으면 파멸적인 결과를 부를 것”이라고 호소했다. 2월1일, 유엔총회는 찬성 44, 기권 9, 반대 7표로 중공을 ‘침략자’로 규정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반대한 나라는 미얀마, 인도, 그리고 소련 블록의 5개국이었다.


리지웨이의 구원 등판


중국이 유엔의 휴전안을 걷어차고, 맥아더와 워싱턴이 한국 포기 문제를 놓고 한 달간 치열한 응수를 벌이는 사이에 리지웨이 8군사령관이 국면을 바꾸었다.

그렇다면 이 무렵의 戰況은 어떠했을까? 37도선까지 후퇴하던 중 전선에서 중공군의 모습이 갑자기 전선에서 사라졌다. 이에 제8군은 사라진 중공군을 찾기 위해 위력정찰(威力偵察)을 전개했다.&nbsp

서부지역의 아군은 1951년 1월25일 위력수색 작전(썬더볼트 작전)을 개시했으나 한강 이남에서 대규모 병력이 관측되지 않자, 적극적인 공격작전으로 전환하여 한강 남안까지 진출했다. 이에 호응해 동부전선에서도 공격작전(라운드업 작전)을 실시하여 강릉 일대까지 진출했다.

한강 남안∼강릉 선까지 진출한 유엔군을 저지하기 위해 중공군은 1951년 2월11일 국군이 배치된 횡성을 먼저 공격하여 국군 3개 사단(제3&#8231제5&#8231제8사단)을 격파한 후 원주 북방으로 진출했다. 미 제23연대가 배치된 지평리(경기도 양평군 지평면)를 완전히 포위한 중공군은 3일 동안 파상공격을 퍼부었으나 결국 실패했고, 이후 아군의 추가전력이 증원되자 공격을 중지하고 철수했다. 중공군이 6·25전쟁에 참전한 이후 최초의 패배였다.


중공군의 공격을 저지한 아군은 적에게 재편성할 여유를 주지 않기 위해 서울을 목표로 再반격작전을 실시했다. 제8군은 적을 격멸하기 위한 공격작전으로 한강 남안∼횡성∼강릉까지 진출했다. 적을 차단 및 분리하는 데 성공한 제8군은 1·4후퇴 이후 70일 만인 3월15일 서울을 재탈환하고 문산∼화천∼양양 선까지 진출했다. 51년 4월에는 38도선을 이북의 철원 일대까지 진출한다.&nbsp


루비콘 강을 건너다가 溺死(익사)


맥아더 해임에 대한 비난이 쏟아졌다. 여론조사에서 트루먼의 지지율은 26%까지 떨어졌으며 맥아더 지지율은 69%로 치솟았다. “승리 이외엔 대안이 없다”고 외치는 인기 절정의 장군을 전쟁 중에 무례한 방법으로 해임했다는 것이었다.

맥아더의 의회 연설은 텔레비전으로 생중계되었다. 한 의원은 “오늘 여기서 하느님의 소리를 들었다. 육신(肉身)을 가진 하느님이었다”고 흥분했다. 한 상원의원은 “연설이 더 계속되었더라면 시민들이 백악관을 향해 몰려갔을 것이다”고 했다. 뉴욕에선 맥아더를 환영하는 700만 인파가 거리를 덮었다. 줄리어스 시저가 로마로 개선한 듯했다.

열기가 가라앉자 이성(理性)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상원이 한국전쟁의 지도(指導) 문제를 놓고 청문회를 열었다. 저자는 이렇게 평가했다.


&lt프로들의 세계에서 ‘프리마돈나’는 추락했다. 애치슨, 마셜, 브래들리, 그리고 민주당 의원들이 맥아더를 맹공했다. 측근들로부터 ‘강력한 심장을 가진 보스’로 존경받던 트루먼 대통령을 국가, 특히 군 지휘부가 일치단결로 지지하는 모습이었다. 유순한 브래들리 합참의장은 중국으로의 확전을 반대하는 논리를 이렇게 정리했다.
&nbsp“잘못된 적을 상대로 잘못된 장소에서 잘못된 시간에 잘못된 전쟁을 하는 것이다.”&nbsp 맥아더는 웅변은 잘했지만, 민주당 의원들의 집요한 질문에 논리적 설명이나 반박을 하지 못하고 억지를 부리기도 했다. 아시아적 시각에 사로잡혀 한국전을 세계정세 속에서 볼 수 없는 사람이란 인상이 굳어졌다.&gt


1951년 5월 말, 맥아더의 지지율은 30%로 떨어져 반토막이 났다. 그를 공화당 대통령 후보로 추대하려는 움직임도 죽었다. 그의 순회강연도 점점 사람 모으기가 어려워졌다. 하버드대학 교수 니엘 퍼거슨는 이렇게 말했다.

“맥아더는 (시저처럼) 루비콘 강을 건너려다가 (시저와는 달리) 대안(對岸)에 닿기 전에 익사한 것이다.&nbsp 애치슨은 회고록에서 맥아더의 해임을 기록하면서 그리스의 비극작가 유리피데스의 말을 인용했다.
“신(神)들은 누군가를 파멸시키려 할 때는 먼저 그를 미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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