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조선 기사

[인물연구] 5000곡 作詞한 가요詩人 半夜月

『내 가슴에 눈물이 자라 노래가 되었습니다』

글 정순태 기자  2005-09-12

  • 페이스북
  • 트위터
  • 카카오톡
  • 글자 크게
  • 글자 작게
지난 8월1일 오후 1시 서울 중구 을지로 1가 프레지던트 호텔 31층 슈벨트홀. 무대 위에 걸린 플래카드에는 <반야월(진방남) 가요인생 67년―회고록 「不孝子는 웁니다」 출판기념회>라고 적혀 있다.

半夜月(반야월) 선생은 한국 가요사에서 노랫말을 가장 많이 작사한 歌謠詩人(가요시인)이다. 秦芳男(진방남)은 1939년에 가요 「사막의 애상곡」으로 데뷔하고 이듬해 「不孝子는 웁니다」를 히트시켜 정상의 인기를 누린 한국가요계의 제1세대 가수이다. 작사가로서는 半夜月, 가수로서 秦芳男이라는 藝名(예명)을 사용해 온 그의 본명은 朴昌吾이다. 이날은 그의 89회 생일이기도 하다.

잔치가 시작되기 30분 전부터 왕년의 멤버로 이뤄진 「송파구실버악단」은 그의 히트곡을 차례로 연주하며 분위기를 띄워 갔다. 「단장의 미아리 고개」, 「산장의 여인」, 「유정천리」, 「무너진 사랑탑」, 「아빠의 청춘」, 「남성 넘버원」, 「열아홉 순정」, 「잘했군 잘했어」 등의 선율이 계속 이어졌다.

그가 작사한 가요 및 영화·드라마 주제가는 무려 5000곡에 달한다. 작사 부문 세계 最多 기록의 보유자다. 그렇다면 그가 바로 國寶다. 그는 파란만장했던 우리 시대의 정서를 노랫말로 대변해 왔다.

예순 몇 살, 일흔 몇 살 할머니 대여섯 명이 우르르 몰려나와 무대 위로 올라갔다. 그때 그 시절에 곱디 고운 자태로 뭇 사내들의 가슴에 憧憬(동경)의 불씨를 지폈던 그녀들도 이제는 속일 수 없는 세월의 나이테로 陰影이 짙은 얼굴이었고, 다리를 절룩거리는 분도 눈에 띄었다. 그래도 그녀들은 소녀처럼 「소양강 처녀」를 합창했다.

해 저문 소양강에 황혼이 지면
외로운 갈대밭에 슬피 우는 두견새야
열여덟 딸기 같은 어린 내 순정
너마저 몰라 주면 나는 나는 어쩌나
아- 그리워서 애만 태우는 소양강 처녀

왕년의 가수들이 지난 8월1일 작사가 半夜月 선생(중앙) 회고록 출판기념회에서「소양강 처녀」를 부르고 있다.

생음악 연주 속에 4시간 동안 베풀어진 이 잔치에선 배꼽이 훤히 내보이는 「짧은 차림」의 新세대 가수들은 曾祖父母 뻘 되는 大선배 앞이라 오히려 얌전했고, 이제는 현역에서 물러난 옛날 가수들이 애들처럼 팔짝팔짝 뛰면서 귀여운 「재롱」을 부렸다.

아니, 그 연세에 「열여덟 딸기 같은 어린 내 순정」이라니…. 그러나 나이 不問, 프로는 역시 프로의 솜씨였다. 어느덧 하객 수백 명도 「소양강 처녀」의 2절·3절을 목놓아 불렀다.
춘천시 근화동 소양2교 공원에 서 있는「소양강 처녀」의 노래비.


『내 가슴에 눈물이 자라 노래가 되었다』

오리지널 「단장의 미아리 고개」의 1절과 2절 사이의 間奏(간주)엔 가수 李海燕(이해연)의 애절한 「대사」가 삽입된다. 미국에 이민을 간 후 소식이 끊긴 李海燕 대신에 왕년에 「미망인 엘레지」로 심금을 울린 黃順德씨가 무대 위에 올라 「단장의 미아리 고개」를 불렀다. 黃順德씨의 레시다티브도 사람의 애간장을 녹인다.

『여보! 당신은 지금 어디서 무얼 하고 계세요. 오늘도 어린 용구는 아빠를 그리다가 지금 막 잠이 들었어요. 동지섣달 기나긴 밤 북풍한설 몰아칠 때 당신은 감옥살이 그 얼마나 고생을 하고 계세요? 십년이 가도 백년이 가도 꼭 살아만 돌아오세요, 네, 여보! 여보!』

한국가요작가협회 金柄煥(김병환·작곡가) 이사장 등의 개회사에 이어 이날의 주인공 半夜月 선생이 다음 요지의 답사를 했다.

『저는 튀는 불가루 속을 헤치면서 피나는 노력을 기울여 여기까지 살아왔습니다. 고생바가지를 뒤집어쓰고 모래알을 씹으면서 살아남은 기적 같은 저의 인생이었습니다.

내 가슴에 눈물이 자라 노래가 되었고, 그 노래 속에 인생을 배워 왔습니다. 그러면 저의 인생이 가엾기만 한 것입니까? 아닙니다. 불편한 몸으로 지팡이를 끌고 전철역 계단을 오르내릴 때나 혹 길거리에서도 누군가가 나를 알아보고 손을 덥석 잡으면서 「옛날 가수 秦芳男, 아니 半夜月씨지요?」라고 인사합니다.

그때 나는 「내 인생이 그리 허무하게 살아온 것만은 아니구나」 하는 행복을 느낍니다. 하느님, 부처님, 일월성신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무더운 날씨인데도 저의 출판기념회에 참석해 축하해 주시는 여러분, 정말 감사합니다』

그의 답사가 끝나자 「송파구실버악단」은 대번에 「잘했군 잘했어」를 신나게 연주했다. 반야월 작사·고봉산 편곡의 「잘했군 잘했어」(1971)는 하춘화·고봉산이 불렀던 노래이다.

노랫말 중의 「쌍나팔」이 그때의 대중을 사로잡았다. 「쌍나팔」은 「스테레오」의 반야월式 표현이다.

(여)영감 (남) 왜 불러
(여)뒤뜰에 뛰어놀던 병아리 한 쌍을 보았소
(남)보았지 (여)어쨌소
(남)이 몸이 늙어서 몸보신하려고 먹었지
(여)잘했군 잘했어
(합)잘했군 잘했군 잘했어
(여)그러게 내 영감이라지
………
(여)영감 (남)왜 불러
(여)사랑채 비워 주고 십만원 전세를 받았소
(남)받았지 (여)어쨌소
(남)서양춤 추려고 쌍나팔 전축을 사왔지
(여)잘했군 잘했어
(합)잘했군 잘했군 잘했어
(여)그러게 내 영감이라지


이 노래는 「서양춤 추려고 쌍나팔 전축을 사왔지」라는 대목이 키워드다. 그러나 발표 당시 「時宜(시의)에 부적절하고 퇴폐적」이라는 논란이 일어 「방앗간 차리려고 은행에 적금을 부었지」로 수정되어 再취입되는 소동을 겪기도 했다.

이렇게 그의 노랫말은 우리 현대 정치사회사의 굴곡과도 동행했다. 그러나 그의 노랫말은 곱씹어 볼수록 감촉이 좋다. 그래서인지 전국에 세워진 그의 노래碑(비)만 해도 무려 9개다. 반야월은 그 누구보다 사연이 많은 사람이다. 「도서출판 화원」에서 간행한 그의 회고록은 무려 918페이지에 달한다. 모두 기록으로 남겨 놓아야 할 현대한국의 가요사다.


가수를 憧憬한 疾風怒濤의 시기
한국가요작가협회 사무실에서 인터뷰 중인 半夜月 선생(맨 오른쪽). 왼쪽부터 同 협회 金柄煥 이사장(작곡가), 가요작가 金周明씨, 시인이며 작사가 尹益森씨.

필자가 이름만 알아온 半夜月 선생을 처음 만난 것은 지난 7월28일 오후 2시 서울 을지로3가 明星빌딩 5층에 있는 한국가요작가협회 사무실이었다. 빌딩이라고 하지만 엘리베이터도 없는 골목 안쪽의 허름한 건물이다. 키 167cm의 아담한 체격이지만 악수를 하면서 느낀 握力(악력)은 여간 세지 않았다. 聽力(청력)에 약간의 문제가 있어 한국가요작가협회 김병환 이사장 등이 인터뷰에 배석했다. 그러나 배석자들의 도움이 필요없을 만큼 그의 기억력은 비상했다.

―저는 「半夜月」이라는 선생님의 藝名을 「예명의 王者」라고 느껴 왔습니다만, 왜 하필 半夜月입니까.

『나는 점수로 따져도 절반이라 50점에 머무는 반쪽짜리 인생입니다. 하기야 인생은 半의 岐路(기로)에 서있는 것 아닙니까? 죽느냐 사느냐, 행복하냐 불행하냐, 이 모두가 팔자소관, 半半이거든요』

半夜月의 인생역정은 장편 드라마다. 그는 1917년 8월1일 마산시 中城洞에서 朴一蒙과 李且海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密陽朴氏 杏山(행산)門中의 종손이었다. 젖먹이 때 이래 그가 성장한 곳은 鎭海였다.

『우리 집은 鎭海에서 정미소를 운영하면서 농토도 있고 납품업도 병행하여 굉장한 부호는 아니라 해도 노비를 거느리고 살 정도의 부자였어요』

그는 사립인 鎭海농산학교에 다녔다. 모범생이었다.

『내가 노래를 잘해 바이올린을 잘 켜시던 담임 정금만 선생님의 칭찬을 많이 들었어요. 선생님의 바이올린 연주에 맞춰 노래를 부르기도 했죠. 그때마다 선생님은 「야, 너는 가수 하고도 남겠다」면서 어린 가슴에 바람을 불어넣었어요』

―타고나기를 노래를 좋아하셨군요.

『야마다 고사쿠(山田耕)가 지은 「음악독본」을 직접 주문하여 일본 출판사로부터 우송으로 받아볼 정도로 음악에 심취했죠. 도서관에 가서 詩와 소설도 닥치는 대로 탐독했어요』

자신이 의식하지 못한 채 작사가로서의 수업에 매진한 셈이다. 그때 그가 읽은 책들은 李光洙의 「원효대사」 「이차돈의 死」「有情」, 方仁根의 「魔都(마도)의 향불」 「새벽길」, 나츠메 쇼세키의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에도가와 란포(江戶川亂步)의 추리소설들, 金素月과 하이네의 詩 등이었다.

『기쿠치 히로시(菊池寬)의 애정소설 「제2의 운명」이나 「眞珠夫人」 따위는 밤중에 전기가 나가면 플래시를 켜 그 불빛으로 읽을 만큼 나는 책벌레였습니다』


『昌吾가 代筆한 연애편지는 성공률 99%』

그러나 그는 「어느 날 아침 갑자기」 初年 고생의 길로 들어선다. 철석같이 믿었던 재산관리인이 집안의 재산을 슬금슬금 빼돌려 그의 아버지는 파산에 이르게 되었다. 鎭海농산학교 졸업 1년을 남겨두고 그는 중퇴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가족은 눈물을 흘려가며 馬山으로 귀향했다. 아직 열일곱 살 소년이었지만, 이제 그는 家長의 역할을 해야만 했다.

『내가 돈벌이로 나간 첫 일터는 일본 사람이 경영하는 철물상의 점원 자리였어요. 월급 15원을 받으며 무거운 철물을 나르고 정리하는 힘든 일이었죠』

그러나 15원으로 가족의 생계를 꾸려가기 어려웠다. 그는 다른 일거리를 찾아나섰다. 그때 고물상을 하는 동네 아저씨가 돈을 더 주겠다며 그를 「스카우트」했다.

『昌吾야, 넌 일본말을 잘하니 날 좀 도와줘. 난 말야, 일본말을 못해 장사가 영 신통찮아』

그는 통역 겸 잡부이자 書士 노릇까지 했다.

『대나무를 엮어 만든 큰 망태를 어깨에 메고, 한 손에는 달걀 꾸러미를 들고 新馬山 일본인들의 집을 찾아가 달걀도 팔고 묵은 신문이나 잡지 등을 저울로 달아 값을 치르고 매집하는 일이었어요. 저녁에는 장부도 정리해야 했습니다』

이 짓도 오래 할 일은 못 되었다. 이후 그는 잘 사는 친척집에서 執事(집사) 노릇도 했다. 말이 집사이지 머슴이나 다름 없었다.

『모 심을 때는 못줄 잡는 일, 피 뽑기, 벼 베기, 추수 때는 볏짐 지는 일과 타작하는 일까지 쉴 틈이 없었죠.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나는 노래를 흥얼거렸어요』

그때 이미 馬山 일각에서는 「노래 잘하는 총각」으로 소문이 돌아 「박창오」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친구들로부터는 연애편지를 대필해 달라는 요구가 쇄도했다.

『친구들 사이에 昌吾가 써주는 연애편지는 「가시내」의 애간장을 녹여 「성공률 99%」라는 말이 돌았거든요』


양복점 직공 거쳐 기성복 가게 경영

그러나 이런 「동네 가수」의 인기만으로 먹고 살 수도 없고 내일도 없었다. 馬山으로 귀향한 이후 아버지의 손에서는 술병이 떨어진 날이 없었다. 그는 결단했다. 淸州전화국의 기술부장으로 재직하던 숙부에게 의탁하기 위해 고향을 떠나기로 작심했다. 그의 회고록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비록 비는 오지만 먼 길을 떠난다고 애지중지 아끼던 열두 자 통의 고쿠라 양복을 꺼내 입고 농구화를 신었다. 연신 눈물을 찍어 내시는 어머니가 받쳐주는 우산을 쓰고 舊마산역으로 향했다.
淸州 가는 3등 차표 한 장 달랑. 싫다고 싫다고 해도 어머니가 막무가내로 쥐어주신 돈 몇 푼. 가방이 없어 책을 보자기에 꾸려 들고….
『어머니, 들어가세요. 내 성공해서 모시러 올게요』
『그래, 그래. 집 걱정은 말고 네 몸이나 성커라』
『예, 어머니. 염려 마세요. 제가 모시러 올 때까지 건강하셔야 됩니다』
『오냐, 오냐. 어여 올라타거라』


이것이 어머니와 마지막이었다. 이때가 1937년 늦은 봄, 그의 나이 스물한 살이었다. 淸州에 갈 때만 해도 그는 5년제 중학교에 편입, 못 다한 공부를 마칠 생각이었지만, 돈을 벌어 집에 보내야 하고, 그도 살아야 할 형편이어서 향학열은 접어야 했다.

숙부는 그에게 양복 재단사의 기술을 배울 것을 권했다. 그는 열여덟 살 된 해에 도장 새기는 칼도 아닌 보통 칼로 자기 도장을 새길 만큼 손재주가 뛰어났다. 70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도 그는 그때의 도장을 보물처럼 간직하고 있는데, 독특한 필체의 「昌吾」라는 새김이 결코 아마추어 솜씨는 아니다.

양복점에서 그는 실밥 뜯는 일, 다림질, 단추 다는 일을 거쳐 바지와 조끼의 재단그리고 재봉까지 배웠다. 그러나 왠지 「처량한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다시 숙부를 찾아가 도움을 청했다.

며칠 후 숙부는 그에게 기성복 장사를 권했다. 사업 경험도 없고 숙부가 대준 자본도 부족했다. 동업자를 찾았다.

『마침 청주 네거리 조철자동차부 건너편에 청주양복점이 있었어요. 주인이 최현묵이라고 나이가 나보다 아래인데, 그도 노래라면 사족을 못 쓰는 사람이었죠. 내가 개인적으로 지도해 주다가 그와 자연스레 친해졌어요. 그와 죽이 맞아 졸지에 기성복점 공동 사장이 됐죠』


전국노래자랑대회에서 1등

그와 최현묵 주위에는 청주에서 노래깨나 한다는 사람이 모여들었다. 이런 멤버들 중에 金乙濟라는 사람이 있었다.

『김을제는 나보다 두 살 연상이었지만, 친구로 가까이 지냈죠. 그는 집안 형편도 괜찮아 당시로는 흔치 않은 유성기를 갖추어 놓고 살 정도였어요. 그의 아들 김동환은 훗날 중앙大 음대 작곡과장을 역임하는데, 이런 음악적 분위기 속에서 성장한 때문일 거예요』

그들은 청주의 無心川 둔치에 가설극장을 짓고 악극과 노래자랑대회를 열었다. 대본은 金乙濟가 쓰고, 연출은 그가 했다. 반응이 좋았다.

1937년 초여름, 朝鮮日報社와 태평레코드사가 공동 주최하는 「전국가요음악콩쿠르대회」가 金泉극장에서 개최된다는 기사가 朝鮮日報에 보도되었다.

『나는 金泉 노래자랑대회에 가야 좋을지 안 가야 좋을지 망설이고 있는데, 김을제가 비용은 자기가 댈 테니까 가자고 조르는 거예요. 비용을 대준다니 놀이 삼아 가보자는 심산으로 김천행 기차를 탄 것입니다』

7월29일 대회장인 김천극장에는 전국 각지에서 수백 명의 가수 지망생이 모였다. 그는 참가비 3圓(원)을 내고 접수를 마쳤다. 대회는 이틀간에 걸쳐 예선과 결선을 치렀다. 金乙濟는 예선에서 탈락하고, 그는 결선에 올랐다.

결선 진출자는 자유곡과 지정곡, 두 곡을 불러야 했다. 지정곡은 李在鎬 작곡·蔡奎燁(채규엽)의 노래 「북국 오천키로」였다. 자유곡으로 그는 金牧隱(김목은) 작사, 김용환 작곡·노래인 「春夢(춘몽)」을 3절까지 불렀다.

『대회 2일째 최종 결선에서 내가 1등으로 뽑히자 환호성이 터졌습니다. 그 순간 호루라기 소리가 납디다. 순사가 뚜벅뚜벅 다가오더니 나를 극장 사무실로 끌고가는 거예요. 「春夢」의 가사를 트집잡는 겁니다. 가사 중에 「내 마음은 언제 피나」가 「조선 독립을 기다리는 것 아니냐」고 다그쳐요. 「아니다, 유성기판에서 배운 거다」고 하니까 그제서야 「가라」는 거예요. 어처구니 없는 닦달을 당하고 나오면서 「인제 가수가 돼도 수난깨나 겪겠구나」 하고 느꼈어요』

다음날 그는 주최 측이 하자는 대로 大邱로 따라갔다. 콩쿠르대회 입선자들을 대중에게 알리는 방법으로 대구역 옆 대구공회당을 빌려 당선사례 공연을 한 것이었다.

그는 청주 생활을 정리하고 上京해 仁川의 昌榮洞에 하숙을 정했다. 트럭운전사를 하던 그의 고종사촌 동생이 하숙하던 집이었다. 서울보다 하숙비가 쌌다. 서울에 일이 있을 때는 京仁線 기차를 타고 갔다 오고, 일이 없는 날에는 仁川도서관에서 독서로 소일했다.


藝名 「꽃다운 남자」 秦芳男

1938년 태평레코드사의 전속가수로 입사했다. 2년 전속기간에 月 40원과 한 곡 취입당 40원의 수당을 별도로 받는 전속계약이었다. 사장은 昌寧 부자인 柳尙中이었고, 문예부장이 朴英鎬(박영호·작사가)였다. 가수로는 蔡奎燁·崔南鏞·白年雪(백년설) 등이었고, 기생 출신인 민요가수 金秋月도 있었다.

朴英鎬 문예부장의 소개로 柳사장과 상견례를 했다.

『내가 「金泉대회에서 1등을 한 馬山 출신 박창오입니다」라고 인사를 하니 柳사장은 「박창오? 그 이름으론 가수 안 되겠고…. 그 뭐, 벽창호로 하면 좋겠군. 어허허허, 이건 농담이고…. 朴부장님, 이 친구에게 좋은 이름 하나 지어 주소」라고 합디다』

그때 그의 예명을 짓기 위해 자리를 함께 한 사람이 박영호·조경환·백년설이었다. 조경환의 예명은 高麗星으로 「나그네 설움」 등의 노랫말을 지었고, 그의 동생이 작곡가 羅花郞(본명 曺廣煥)이다.

『이름 여러 개를 지어놓고 고르는데, 서로 이거 좋다 저거 좋다 티격태격하다가 결국 특이한 성씨로 하는 것이 좋겠다고 의견을 모아 조경환씨가 추천한 秦芳男으로 결정했어요. 「진나라의 꽃다운 사내」란 뜻이죠』

―작사가 朴英鎬는 어떤 인물이었습니까.

『朴英鎬 선생은 歌謠詩聖으로 불러야 마땅할 인물입니다. 동양극장의 대본을 집필하는 관계로 무척 바빠 노랫말은 우선 1절만 써주어 가수들은 1절만 연습해 가지고 일본으로 출발하는 예가 왕왕 있었습니다(당시 국내에 레코드 취입 시설이 없었다). 2절과 3절은 기차 또는 관부연락선을 타고 가면서 쓰곤 했죠. 작품 경향은 선이 굵었어요. 朴선생과 나의 끈끈한 관계는 그분이 1946년 12월 월북함으로써 끝났습니다. 日政(일정) 때는 朴선생의 좌익 성향을 통 모르다가 광복이 되고 나서 알게 되었어요』

그는 전속계약과 동시에 여덟 곡을 받았다. 그 시대엔 「녹음」이라는 말 대신에 「吹?(취입)」이라는 말을 썼다. 첫 취입 날짜가 잡혔다.

『이른 아침에 작사가 朴英鎬 선생·작곡가 李在鎬, 가수 백년설·申카나리아·羅星麗·鮮于一仙 등과 함께 기차를 타고 서울역을 출발하여 저녁 8시경에 부산역에 닿아 관부연락선을 탔습니다. 약 여덟 시간의 항해를 거쳐 시모노세키港에 상륙하면 7~8명의 사복순사가 승객 전원을 빈터에 모아 놓고 검문을 합니다. 까다로운 「상륙수속」을 마치고 다시 시모노세키역에서 오사카行 기차를 타고 니시노미야(西宮)에 도착했어요. 그곳에 태평레코드사의 본사인 대일본축음기주식회사의 취입실이 있었습니다』


孝道 못 해 후회하는 아들들의 名曲

첫 취입 여행 중에 그는 일본에서 어머니의 부음을 들었다. 「不孝子는 웁니다」를 취입하기 위해 스튜디오에서 대기하고 있을 때 「모친 별세」라는 전보를 받았다.

『순간 앞이 깜깜해지고 숨이 멎을 것 같았습니다. 지금 같으면 교통편이 좋아 한달음에 달려올 수 있는 거리지만, 그때는 며칠 길이어서 집에 간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고, 더욱이 이제 첫 취입을 온 가수라 행동 하나 마음대로 할 수 없을 때였습니다』

그의 목이 잠겨 취입은 다음날로 연기되었다. 먼저 숙소로 돌아와 벽에다 얼굴을 묻고 통곡했다.

『비 오는 날 舊마산역까지 배웅 나온 어머니에게 「어머니, 내 성공해서 모시러 올게요」라고 철석같이 맹세를 하고 떠났는데, 성공한 모습을 보여 드리지 못한 채 어머니를 저승으로 가시게 하다니 이런 불효가 어디 있는가… 내 기어이 성공하고야 말겠다는 결심이 더욱 굳어지더군요』

그는 노래 가사를 손질하기 시작했다.「엎드려서 한없이 웁니다」를 더욱 강렬하게 「엎푸러져 한없이 웁니다」 등으로 고쳤다. 취입 당일, 작사가·작곡가에게도 양해를 구했다.

불러봐도 울어봐도 못 오실 어머님을
원통해 불러보고 땅을 치며 통곡해도
다시 못 올 어머니여 불효한 이 자식은
생전에 지은 죄를 엎드려 빕니다.

손발이 터지도록 피땀을 흘리시며
못 믿을 이 자식의 금의환향 바라시고
고생하신 어머님의 한 많은 이 세상을
눈물로 가셨나요 그리운 어머니.

북망산 가시는 길 그리도 급하셔서
이국의 우는 자식 내 몰라라 가셨나요
그리워라 어머님을 끝끝내 못 뵈옵고
산소에 엎푸러져 한없이 웁니다.


이 노래는 공전의 大히트를 기록했다. 어머니의 종신도 못 하고 이국에서 울면서 취입한 노래였던 만큼 듣는 이의 심금을 울렸던 것이다. 훗날(1975년) 조총련계 동포 추석 성묘단이 조국을 방문했을 때 서울 국립극장 환영무대에서 영화배우 金喜甲씨가 그를 대신하여 이 노래를 불러 엄청난 눈물바다를 이루었다. 「不孝子는 웁니다」는 이제 우리 가요사에 영원히 기록될 名曲이다.


白年雪·秦芳男·李在鎬의 「太平 3인방」 시절
진방남(반야월) 히트앨범 NO1(아세아 레코드 AL8). 그는 「흘러간 옛노래」가 아니라 「흘러온 옛노래」라야 語法에 맞다고 강조했다.

그는 첫 취입 때 여덟 곡을 불러 거금 320원을 받았다. 당시엔 주머니에 100원짜리를 넣고 다니다 검문에 걸리면 형사가 의심할 정도의 큰돈이었다.

그 시절 태평레코드社에 전속된 백년설(1915년생)과 그(1917년생), 그리고 李在鎬(1919년생)는 두 살씩 차이가 나 呼兄呼弟하며 어울려 다녀 「太平 산바가라스(3인방)」라 불렸다. 셋이서 종로의 술집에 들르면 진을 치고 있던 팬들로부터 술대접 받기가 일쑤였다고 한다.

―「나그네 설움」을 부른 백년설과 「不孝子는 웁니다」를 부른 진방남, 누가 더 노래를 잘 불렀습니까.

『백년설씨는 발음이 좋은 데다 대중이 배우기 쉬운 나그네調 스타일만 부르고, 나는 민요·서정가요·블루스·탱고 등 휘뚜루마뚜루(이것저것) 다 섭렵하다 보니 대중에겐 까다로운 노래도 많이 불렀죠. 가야금이 「半의 半音」 소리를 내듯 백년설씨의 음정도 반음 비슷했어요. 이것을 미분음이라 하는데, 이 소리가 그의 매력이었죠. 나도 노래의 참맛을 아는 이들로부터 「이 노래 저 노래 전부 잘 부르는 진짜 가수다」라는 칭찬을 들었습니다』

―半夜月 선생께서는 작곡가 李在鎬 선생과 오랫동안 콤비를 이뤄 「단장의 미아리 고개」, 「산유화」, 「산장의 여인」 등 많은 걸작을 탄생시켰습니다. 「한국가요계의 슈베르트」로 불리는 작곡가 李在鎬는 어떤 캐릭터의 인물이었습니까.

『그는 외롭게 자라서인지 평소에는 말이 없고 우수에 차 있었어요. 술잔이 몇 순배 돌아야 말문을 열더군요. 술을 너무 좋아해 건강을 잃었지만, 늘 낭만에 넘쳤고, 번뜩이는 천재성을 유감없이 발휘한 예술가였습니다. 요절하지만 않았다면 한국가요가 크게 달라졌을 것입니다』

「불효자는 웁니다」에 이어 「꽃마차」가 大히트를 하자 월급이 70원으로 껑충 뛰었다.

『월급이 오르자 나는 李在鎬씨와 함께 종로5가에 있던 천일여관에다 각각 독방을 얻어 생활했어요. 하루는 상업은행 여직원들이 꽃을 잔뜩 사들고 떼를 지어 천일여관으로 李在鎬와 나를 찾아왔어요. 길 건너편 三光악기점에 음반을 사러 왔다가 천일여관에 가수 진방남과 작곡가 李在鎬가 산다는 말을 듣고 몰려온 겁니다. 그날 따라 李在鎬씨가 외출 중이라 나 혼자서 많은 여자들 틈에 끼어 진땀을 빼야 했습니다. 나중에는 혼자 가만히 찾아와서 묘한 눈흘림을 보내는 아가씨도 있었죠』

―그때도 팬레터라는 것이 있었습니까.

『물론이죠. 국내는 말할 것도 없고 봉천(지금의 심양)·목단강·북간도 등 만주에서도 팬레터가 답지했어요. 「서방님」, 「당신」이라는 호칭으로 시작하여 「답장을 보내주지 않으면 죽어 버리겠다」고 맺는 편지, 심지어 血書를 보내는 여성팬, 나를 두고 죽자 사자 하는 女가수도 있었죠』

―그 女가수가 누구였죠.

『그녀가 「五錢盞(5전 잔)에 千圓情(천원 정)」, 「나루의 이별」을 부른 孫惠聖씨였어요. 권번 출신 가수로 민요에 一家見이 있었는데, 무대에 서면 청아한 목소리로 청중을 사로잡는 마력이 있더라구요. 書藝에도 능해 한지에다 붓으로 쓴 연서를 자주 내게 보냈죠』

―(웃음) 그런 유혹은 받아들여야죠.

『그때 나의 꿈은 「일구월심 大가수가 되겠다」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녀의 연심을 몰라서가 아니라 나의 목표 때문에 한가롭게 연애질을 할 형편이 아니어서 그녀 모르게 효제동에 하숙집을 구해 이사했습니다』


아내 尹京粉과의 만남
지난 8월1일 회고록 출판기념회에서 半夜月 작사의「내고향 馬山港」을 합창하는 가족들. 전열 중앙은 부인 尹京粉 여사, 좌우는 손녀들. 뒷줄 오른쪽부터 장남 미호씨, 3녀 희라씨, 차남 인호씨.

그럭저럭 얼마의 시간이 흘렀다. 하루는 주인 아주머니가 그의 방을 찾아와 넌지시 한마디 했다.

『진방남씨, 상의드릴 게 있수』

『뭔지요?』

『으응, 다른 게 아니고 우리 京粉이가 노래를 좀 하는데, 한번 들어봐 주지 않겠수』

주인 아주머니는 尹京粉 처녀의 이모였다. 처녀는 이모를 무척 졸랐던 모양이다.

『그러지요. 누가 압니까, 노래 잘해 가수가 될지. 한번 들어보죠』

그러나 막상 그 앞에 나타난 尹京粉은 고개를 푹 수그린 채 혼잣말처럼 『여기선 부끄러워 하기가 어렵네…』라고 했다.

「조용한 곳에 가서 노래를 듣는다」는 것이 결국 장충단공원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이후 둘은 노래를 핑계로 함께 南山 길을 자주 산책했다고 한다.

1940년 金泉에 있는 京粉의 본가에 가서 구식 혼례를 올렸다. 그의 나이 스물넷, 신부 尹京粉의 나이 스물하나였다. 신혼살림은 忠信洞 셋방에 차렸다. 1년 후 첫애 美羅가 태어났다.

『공연을 다닌답시고 나는 거의 집을 비웠어요. 아내는 갓 태어난 딸과 코흘리개 시동생(春吉)의 뒷바라지를 하며 비가 새면 지붕에 올라가 고치고, 배급미를 타먹기 위해 큰 돌을 망치로 깨서 자갈 만드는 노역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선생님이 작사한 「꽃마차」는 중국 동북지방에서 「혁명가요」로 평가되던데요.

『1942년 내가 가수로서 滿洲 공연을 갔을 때 작사를 했고, 李在鎬씨가 곡을 붙여 내가 불렀죠. 1980년 9월 중국 연변대학에서 발행한 「조선현대가요집」에 「꽃마차」가 실렸어요. 가사에 혁명성이 있다고 해서 뽑았답디다. 黑龍江省新聞 등 3개 일간지에 보도되기도 했습니다』

노래하자 하루삔 춤추는 하루삔
아카시아 숲속으로 꽃마차는 달려간다
하늘은 오렌지색 꾸냥의 귀걸이는 한들한들
손풍금 소리 들려온다 방울소리 울린다


―어느 부분에 혁명성이 있다는 겁니까.

『하루삔(하얼빈)이라면 1909년 그 驛頭에서 安重根 의사가 국권을 강탈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육혈포(권총)로 사살한 곳 아닙니까. 그런 하얼빈에서 기뻐서 「춤추고」, 「내일의 희망 안고 웃어다오」 등의 노랫말이 들어갔다고 해서 그 혁명성을 평가했답디다』

―그걸 의식하고 작사를 하신 겁니까.

『아녜요. 공연하러 갔다가 異國의 풍경에 취해 그냥 한번 읊은 것입니다』

―그런데 광복 후 「꽃마차」의 가사가 다시 「노래하자 하루삔 춤추는 하루삔…」에서 「노래하자 꽃서울 춤추는 꽃서울…」로 바뀌었더군요. 그 까닭은 무엇입니까.

『6·25 이후 中國은 적성국가로 분류되었던 만큼 적성국 지명이 들어간 가요는 곤란했어요. 그래서 가사 중의 「노래하자 하루삔」, 「출렁출렁 송화강」을 「노래하자 꽃서울」, 「출렁출렁 한강물」로 개작하여 리바이벌시킨 겁니다』


광복과 더불어 「南大門악극단」 창단

광복 직전 그는 金道仁이 대표로 있던 금강악극단에 몸담고 있었다. 금강악극단은 開成 공연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와 제일극장 공연을 위해 종로1가 뒷골목에 있던 민흥여관에 여장을 풀었다. 바로 그 다음날 광복을 맞았다.

『누군가가 공연준비를 하고 있던 제일극장 안으로 뛰어들어와 북과 징을 끄집어내어 치면서 거리 행진을 인도합디다. 우리들도 거리로 뛰어나가 만세를 부르고 스코틀랜드 민요 「올드 랭 사인」에 맞춘 애국가를 불렀어요.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밤을 지새웠습니다』

광복의 흥분이 가라앉지 않을 무렵, 滿洲에서 왔다는 安慶善이라는 사람이 그를 찾아왔다.

『나는 만주로 北支로 돌아다니다가 해방이 돼 돌아왔습니다. 평소 노래와 연극에 관심이 많아요. 그래서 말인데, 악극단 하나 해보실 생각 없습니까? 자본은 제가 대겠습니다. 동업 한번 하시지요』

그는 며칠을 고민하다가 극단을 운영해 보기로 결심했다. 극단 이름은 「南大門악극단」으로 정했다. 광복과 함께 國寶 제1호 南大門도 활짝 열리게 되었다는 상징적 의미에서 단장인 그가 作名한 것이었다.

『나는 공연 레퍼토리 구성·의상·소도구·단원 확보·극장 잡는 先行일, 그리고 선전·음악·무용까지 맡았습니다. 아내는 아내대로 태어난 지 얼마 안 되는 장남 美虎를 들쳐업고, 큰딸 美羅는 걸리고 지방에서 혼자 올라와 사는 단원 여덟 명의 식사까지 책임져 고생의 가시덤불 속에 뛰어들었습니다』

그때 무대에 올린 악극이 「五里亭 사건」, 「흑감투」, 「살아 있는 洪吉童」, 「마도로스 朴」, 「산홍아 너만 가고」, 「피 흘린 黑진주」, 「여간첩 이향란」 등이었다. 그가 극본을 쓰고, 김무룡이 연출을 맡았다. 金振奎, 李民子, 李藝春, 朱曾女 등은 남대문악극단 출신으로 후일 영화배우로 大成한다.

『서울 공연은 주로 영등포 영보극장·남영동 성남극장·종로4가 제일극장·마포 도화극장·신당동 新富座에서 했고, 開城의 개성좌·인천 愛館·대전·청주·충주의 지방공연까지 열심히 뛰었습니다』

극단 단장이라는 자리는 단원들도 보살펴야 하지만, 극장마다 기생하는 주먹패에 잘 대처해야 했다. 그들에게 수익금을 뜯겨 흥행에는 성공했으면서도 적자를 보는 경우가 더러 있었다.

『그래서 日政 때부터 유명짜한 주먹 舊馬賊(구마적: 본명 고희경)을 찾아가 술 대접을 하면서 「형님으로 모시겠다」고 제의했습니다. 그는 대번에 「으하하하! 형님이라 좋지! 덕분에 나두 가수 동생 하나 두게 됐구먼. 좋아! 좋아!」라고 받습디다. 舊馬賊을 「형님」으로 부르는데, 어떤 왈짜가 감히 우리 극단에 패악질을 하겠어요』
세계노래올림픽 격인 ISAC 2004년 대회에서 金메달 수상자들. 왼쪽부터 바우티스타 집행위원회 회장, 김지하(시인), 김동진(작곡가), 반야월(작사가), 출라본 마하돌 泰國 공주(작곡가), 크리스티안 부룬(독일 작사·작곡가), 이사오 토미타(일본 작곡가), 임권택(영화감독), 자오우키(중국 화가).


한국적 정서 대변하는 「울고 넘는 박달재」

극단 단장 시절인 1948년 그는 「울고 넘는 박달재」를 썼다. 「울고 넘는 박달재」는 요즘도 노래방에서 애창되는 노래다. 한국적 정서를 대변하는 노래인 것이다.

천등산 박달재를 울고 넘는 우리 님아
물항라 저고리가 궂은 비에 젖는구려
왕거미 집을 짓는 고개마다 구비마다
울었소 소리쳤소 이 가슴이 터지도록

부엉이 우는 산골 나를 두고 가는 님아
돌아올 기약이나 성황님께 빌고 가소
도토리 묵을 싸서 허리춤에 달아 주며
한사코 우는구나 박달재의 금봉이야

박달재 하늘 고개 울고 넘는 눈물 고개
돌부리 걷어차며 돌아서는 이별 길아
도라지 꽃이 피는 고개마다 구비마다
금봉아 불러보나 산울림만 외롭구나


―어떤 연유로 천등산 박달재를 넘었습니까.

『제천극장 주인이 극장 대관료를 받지 않을 테니 꼭 하루만이라도 공연해 달라고 간청을 해요. 忠州 공연을 마치고 박달재를 넘다가 그날의 정경을 잊지 못해 작사 한 편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날따라 부슬비가 내렸다. 무대 장치를 실은 트럭 한 대와 단원들이 탄 버스 한 대가 고개를 넘다가 그만 버스의 타이어가 펑크 났다. 일행은 타이어를 바꿔 끼기까지 무료한 시간을 보내야 했다.

『이때 내 시야에 성황당 앞에서 이별을 하는 서러운 남녀의 모습이 들어왔어요. 그때의 정경을 메모해 두었다가 上京한 후에 노랫말을 만들고 金敎聲 선생에게 건네 줬죠. 얼마 후 金敎聲 선생의 고운 선율에 朴載弘씨의 구슬픈 창법으로 세상에 알려지게 된 거예요』


건달에게 얻어맞고 「카츄사」에 출연
회고록「不孝子는 웁니다」의 집필 경위를 설명하는 半夜月 선생. 그의 회고록이 바로 恨 많은 한국의 가요사이다.

―한사코 우는 여자 이름이 왜 하필 「금봉이」죠.

『李光洙의 소설 「여자의 일생」에 나오는 주인공 이름이 「금봉이」아닙니까』

재미있는 사실은 요즘도 박달재 휴게소 식당의 주요 메뉴는 묵이라는 것이다. 또 아침에 문을 열면서부터 저녁에 문을 닫을 때까지 온종일 「울고 넘는 박달재」를 틀어놓는다. 박재홍의 오리지널 버전에서 李美子·周炫美뿐만 아니라 신세대 가수들이 부른 것, 메들리로 발표된 것 등 「울고 넘는 박달재」는 무려 30여 종류나 된다. 1988년 11월23일 현장에 「울고 넘는 박달재」 노래비가 건립되었다.

잘 나가던 南大門악극단이 安慶善 사장의 트럭회사 화재로 운영에 차질을 빚기 시작했다. 安사장은 더는 운영이 벅찼던지 극단에서 손을 뗐다.

『그때 나는 안 해야 할 짓을 하고 말았어요. 내 깐에는 극단을 살려보겠다는 일념으로 東大門 쪽 건달패의 고리채를 쓴 겁니다. 처음에는 錢主(전주)로 만족하던 그들이 이제는 아예 가는 곳마다 따라다니며 단장 행세를 하며 단원의 채용과 퇴출까지 마음대로 해요. 결국 그들과 틈이 벌어져 극단을 떠났어요』

그런데도 건달들은 그에게 계속 출연도 하고 대본도 써줄 것을 강요했다. 말을 잘 듣지 않는다고 그를 술집으로 불러내 면상에 주먹질까지 했다. 깡패집단의 제의라 피하고 싶었지만, 후환이 두려워 어쩔 수 없이 수락했다.

세계명작을 극화하여 서울 明洞 국제극장에서 막을 올리기로 했다. 공연 레퍼토리는 조명암 구성에 朴是春 음악으로 되어 있는 4편이었다.

『「춘향전」을 남인수와 이난영 주연으로, 「카추샤」를 나와 윤연희 주연으로, 「로미오와 줄리엣」을 백년설과 왕숙랑 주연으로 공연하고 「칼멘」에는 장세정만 기억나고 남자 주인공의 이름은 떠오르지 않아요』

반야월 선생은 참으로 다재다능한 인물이다. 그는 방송극작가로도 활동했다.

―1948년 KBS 방송희곡 공모에서 선생님의 「許生員」이 입선되었더군요.

『공모작에 응모하기 위해 「許生員」을 집필할 때 우리 가족은 미아리에 살았는데, 지금의 길음시장 뒷골목으로 집 뒤편에는 공동묘지가 있어 밤이면 무서워서 밖에 나갈 엄두도 못 내는 그런 동네였습니다. 칭얼대는 愛羅(차녀)를 「상금 타면 제일 비싼 포대기를 사주겠다」고 달래며 집필했어요. 그때 나와 같이 입선한 분이 金熙昌·趙南史씨였습니다. 나는 입선을 계기로 방송극 집필에도 자신감을 갖게 되었습니다』


體驗의 노랫말 「단장의 미아리 고개」

1950년 6월 들어 그는 糊口之策(호구지책)으로 친구 몇몇과 함께 가요콩쿠르대회를 기획했다. 6·25 발발 하루 전 오후에도 그는 동양극장(現 문화일보 건물 자리)에 나가 이것저것 챙기고 날이 저물어서야 미아리 고개를 넘어 귀가했다.

―6·25 남침 당일은 어떻습디까.

『새벽녘부터 멀리서 포성 같은 것이 들렸어요. 우리 가족은 공포에 떨며 온종일 집에서 꼼짝하지 않았죠』

콩쿠르대회가 열려 수입이 있었더라면 집에서 때거리 걱정을 안 했을 터이지만, 이제는 전쟁이라 굶는 일이 다반사가 되었다.

『먹고살기 위해서는 아무 일이나 닥치는 대로 해야 할 판이었어요. 나는 매일같이 종로통에 나가 분위기를 알아보고 다녔죠』

7월 들어 서울시청 건너편 「金門都」라는 중국음식점 2층에 「歌劇同盟」 사무실이 생겼고, 연예인들이 들락거리기 시작했다. 위원장은 박상진, 서기장은 가수 桂壽男이었다. 가수들과 악극계 연기자들이 모여 北에서 부르는 노래를 배우는 것이 일과였다.

『그때까지 그곳에 참여하지 않은 연예인들은 삼삼오오 만나기만 하면 앞날을 걱정했는데, 자발적으로 참여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보복을 당할 거라는 말도 들리고, 「金日成 노래」를 배워야 한다는 등 점차 공포 분위기가 조성되었어요. 며칠을 버티다 도대체 어떤 사람들이 모여 있는지 궁금하기도 해서 歌劇同盟 사무실로 가보았죠』

―어떻든가요.

『제일 먼저 눈에 띈 사람이 훗날 영화배우로 大成한 金振奎씨였어요. 거기서 書記 일을 보는 듯 바쁘게 펜대를 돌리고 있더군요. 백난아씨는 나를 보자마자 눈물을 글썽이더니 잠시 후 뭔가 담겨진 누런 봉투 하나를 주머니에 슬쩍 넣어 주더군요. 나는 감촉으로 쌀인가 했는데, 집에 와 꺼내 보니 보리쌀이었어요』

敵 치하에서 그의 아내는 행상을 시작했다. 종로5가 길거리에 함지박을 펴놓고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팔았다. 그때 젊은이들은 「의용군」이란 이름으로 전쟁터로 내몰렸다.

『나는 참 운이 좋은 사내입니다. 일제 강점기의 징용도 「技藝證」으로 면했고, 敵 치하에서도 「歌劇同盟員證」을 지녀 낙동강전선으로 끌려가지 않았거든요』

「훗날을 기약」하려면 결단이 필요했다. 일단 그가 먼저 단독으로 金泉 처갓집 쪽으로 피신하고, 때를 보아 아내가 애들과 뒤따라 내려와 합류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동이 틀 무렵 도착한 뚝섬에서 용케도 나룻배를 얻어 탈 수 있었고, 한강을 건너자마자 奉恩寺 뒷산으로 내달렸어요. 낮에는 숨어 지내고 밤에 산길을 걸어 南으로 南으로 내려갔어요. 그러나 혼자만 피란한 처지라 처가 식구들에게 머리를 들지 못했습니다』


피란살이―「반달酒店」의 시절

戰勢는 역전되었다. 9·28 서울 수복의 소식이 날아들었다. 그는 서둘러 上京하여 미아리집으로 달려갔다.

『허기에 지쳐 얼굴이 반쪽이 된 아내가 美羅·美虎·愛羅를 품에 안고 나를 반겼습니다. 아, 그런데 네 살배기 壽羅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거예요. 9·28 수복이 거의 가까웠을 무렵, 壽羅가 허기를 견디지 못하고 숨을 헐떡이다 애처롭게 명줄을 놓았다는 겁니다.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는 세월이 흘러도 壽羅를 잊지 못해 한 편의 가사를 썼다. 이것이 바로 「단장의 미아리 고개」이다. 처음엔 작곡도 그가 했다. 그 습작을 친구 李在鎬에 보였더니 『좋은 가사를 멜로디가 망쳐 놨군. 半형, 내가 곡을 붙여 줄 테니 두고 보소』라더니 즉석에서 曲을 붙였다고 한다. 李在鎬는 鬼才였다.

미아리 눈물 고개 님이 넘던 이별 고개
화약 연기 앞을 가려 눈 못 뜨고 헤매일 때
당신은 철사줄로 두 손 꼭꼭 묶인 채로
뒤돌아보고 또 돌아보고 맨발로 절며 절며
끌려가신 이 고개여 한 많은 미아리 고개

아빠를 그리다가 어린것은 잠이 들고
동지섣달 기나긴 밤 북풍한설 몰아칠 때
당신은 감옥살이 그 얼마나 고생하오
십년이 가도 백년이 가도 살아만 돌아오소
울고 넘던 이 고개여 한 많은 미아리 고개


『왜 제게 이토록 쓸쓸한 노랫말을 주셨나요』

9·28 수복으로 이제 서울생활을 하나 싶었는데, 이내 中共軍의 개입에 의한 1·4 후퇴로 또다시 피란길에 오를 수밖에 없었다. 이번에는 가족 모두가 함께 고향 馬山으로 내려갔다.

戰時였던 당시 대중에게 유일한 오락거리라면 단연 노래자랑대회였다. 그는 馬山·昌原에서 열린 몇 차례 노래자랑대회의 심사위원으로 불려다녔다. 현역 톱가수이자 인기 작사가인 그의 귀향에 따라 馬山음악동호회가 그를 중심으로 재편되었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정식 직원은 아니지만 馬山방송국 문예부장의 직함이 주어졌다.

그는 라디오 드라마를 집필하여 「가요풍경」이란 코너 이름으로 방송을 했는데, 연출은 물론 출연도 했다. 가요 「馬山엘레지」, 「비 내리는 三浪津」 등의 작사도 했다. 馬山음악동호회 회원들로 위문단을 조직하여 당시 馬山에 옮겨와 있던 수도육군병원과 철도병원에 위문공연 다니는 것도 일과 중 하나였다.

『나는 방송국의 정식 직원이 아닌 관계로 일은 휘뚜루마뚜루 하면서 월급은 받지 못하고 약간의 사례금만 받았어요. 馬山 동생(박창근)이 뒷받침해 주어 그럭저럭 입에 풀칠은 했지만 제수씨 보기가 민망했고 무작정 신세를 질 수 없더군요』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부업으로 술집을 경영하기로 했다. 주방장 경험이 있는 사돈 孫씨와 동업했다. 상호는 半夜月이라는 그의 예명을 상징하는 「반달주점」으로 정했다.

『왕골 자리로 벽면을 둘러쳐 초막집 분위기를 냈죠. 술집에서 제일 중요한 메뉴는 안주 아닙니까. 술은 정종 대포만 팔고, 안주로는 불갈비와 주물럭 석쇠구이, 이 두 가지만 했어요. 당시로는 보기 드문 고급 주점이었죠』

반달주점에서 으레껏 불리는 노래는 「마산엘레지」와 「비 내리는 삼랑진」이었고, 결국은 반달주점의 주제가가 되어 버렸다. 훗날의 얘기지만, 1993년 월포동 마산여객선터미널 광장에 그의 노래비 「내 고향 馬山港」이 세워졌다.

이때 건립위원회에서는 「내 고향 馬山港」을, 시민들은 「馬山 엘레지」, 그는 「山莊(산장)의 여인」을 세우자고 했다. 다 그가 지은 노랫말이지만, 「산장의 여인」에 애착을 가진 데는 까닭이 있었다.

1957년 가을, 그는 馬山국립결핵요양소로 위문공연을 갔다. 요양소는 지금은 폐쇄된 架浦(가포)해수욕장 근처 산자락에 있었다.

『노래를 부르다가 우연히 눈길이 객석 맨 뒤쪽에 닿았어요. 그때 섬뜩하도록 고운 얼굴에 창백한 그림자를 드리운 소복의 여인이 내 노래를 들으며 계속 흐느끼는 것을 보고 가슴에 저미는 무엇을 느꼈습니다. 공연이 끝난 뒤 직원 한 사람에게 물어보았죠』

사연인즉 그 젊은 여인이 결핵이라는 몹쓸 병 때문에 사랑에 큰 상처를 입고 소나무 숲 우거진 산장 병동에 요양 중이라는 것이었다.

아무도 날 찾는 이 없는 외로운 이 산장에
단풍잎만 차곡차곡 떨어져 쌓여 있네
세상에 버림받고 사랑마저 물리친 몸
병들어 쓰라린 가슴을 부여안고
나 홀로 재생의 길 찾으며 외로이 살아가네

아무도 날 찾는 이 없는 외로운 이 산장에
풀벌레만 애처로이 밤새워 울고 있네
행운의 별을 보고 속삭이던 지난날의
추억을 더듬어 적막한 이 한밤에
임 뵈올 그날을 생각하며 쓸쓸이 살아가네


그는 노랫말 「산장의 여인」의 작곡을「마음의 벗」 李在鎬에게 의뢰했다. 李在鎬도 폐병을 앓고 있었다. 이재호는 同病相憐의 심경으로 심혈을 기울여 아름다운 선율의 곡을 완성하고, 은행원으로 일하던 權惠卿을 설득·교육을 거쳐 노래를 부르게 하여 오아시스레코드를 통해 SP음반으로 출반했다.

『권혜경씨는 「산장의 여인」이 한창 히트할 무렵에 이룰 수 없는 사랑으로 고통을 받았어요. 그 남자가 기혼자였거든요. 첫사랑에 쓴잔을 마신 그녀는 1960년 심장판막증이라는 낯선 이름의 병을 주체하지 못한 채 글자 그대로 「산장의 여인」이 되었습니다』

―권혜경씨는 1967년 조선통신사 부사장으로 재직하다 北에서 망명해 온 李穗根(이수근)씨와 혼담이 오고가 화제를 뿌렸죠. 李穗根씨는 망명 후 당시 중앙정보부장 金炯旭으로부터 「위장망명」의 의심을 받고 시달린 끝에 제3국으로 탈출하려다 사이공에서 붙들려와 사형을 당한 기구한 팔자의 인물이었습니다.

『세월이 흐른 후 권혜경씨가 내게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선생님, 왜 제게 이토록 쓸쓸한 노랫말을 주셨어요? 제가 꼭 산장의 여인처럼 고독하잖아요」라고 합디다』


영화주제가 獨食하던 시절

1953년 馬山 생활을 접을 무렵이었다.

『잊을 만하면 大邱에 있던 白年雪씨가 날 불렀어요. 마산에서 비포장도로를 달려 大邱 못 미처 達城郡 花園에 가면 백년설씨의 집이 있었죠. 거기서 그는 목재소와 고아원 靑童園(청동원)을 운영했어요. 그와 수차례 만나면서 자연스레 레코드社 설립 얘기가 나왔죠』

大邱에서 악기점을 하던 김영준이라는 사람이 자본을 대고 백년설씨가 운영책임을 맡는다는 것이었다. 태평레코드社 시절부터 「3인방」이었던 이재호와 그가 힘을 보태기로 했다. 그때 이미 李在鎬는 한쪽 폐를 잘라낸 중환자의 상태였다.

『서라벌레코드社를 설립한 후 우리는 공연단을 구성하여 마산·진해·진주 등지로 콩쿠르대회를 겸한 순회공연의 길에 올랐어요. 멤버로는 탭댄스의 金完律씨와 朴福男씨, 여가수 박단마씨, 뮤지컬 가수 심연옥씨가 참가했으며, 악단 지휘는 훗날 「빨간 마후라」로 유명해진 황문평씨가 맡았어요. 나는 서라벌레코드를 통해 「방랑의 처녀」 등을 취입하기도 했지만, 주로 작사를 했습니다』

그러나 레코드 판매실적이 부진했다. 결국 회사 설립 1년여 만에 경영주의 자금난으로 문을 닫고 말았다.

1954년, 그는 약 4년간의 馬山 생활을 청산하고 서울로 올라와 처가살이를 했다. 그는 서라벌레코드社의 문예부 일을 보는 것으로 하루하루를 지냈다.

『아내는 지금의 서울 충정로 동아일보 사옥에서 아현동으로 넘어가는 고개에 있는 식당을 전세로 얻고 처제와 함께 식당을 꾸려 나갔어요』

1955년부터 서서히 한국영화 붐이 일기 시작했다. 영화가 활성화되면서 덩달아 가요 붐이 일었다.

『내게도 작사 의뢰가 제법 밀려들어 옵디다. 잔돈푼이나마 만질 수 있는 여유가 생긴 거죠. 아내에게 「당장 식당을 걷어치워라」라고 호통을 쳤습니다』

1957년 그가 처음 가사를 쓴 영화주제가는 「찔레꽃(정순의 노래)」과 「운명의 여인」이었다. 영화 「찔레꽃」의 원작 소설은 金末峰의 「찔레꽃」인데, 노래는 여주인공 李璟姬씨가 부르고 朴是春씨가 작곡했다.

이때부터 그는 작사가로서 전성기를 만났다. 특히 영화주제가 작사는 그가 독식하다시피 했다.

『주제가 한 편을 쓰기 위해서는 최소한 일주일이 걸립니다. 일단 시나리오를 읽어 내용을 완전히 소화해야 하고, 감독이나 제작자가 의도하는 내용의 작품이 나와야 하기 때문이죠. 이런 고충도 모르고 동료들은 씹어대더군요. 이런 사연이 있어 나는 남들보다 많은 펜 네임을 가져야 했어요』

그는 秋美林·朴南浦·南宮麗·琴桐線·許久·高香草·玉丹春·白驅夢 등의 펜네임을 쓰기도 했다. 그래도 그 시절 그는 가난했다. 아내가 한시도 손놀림을 멈추지 않고 한푼 두푼 모아 서울고등학교(지금의 경희궁 터) 정문 옆 2층집에 세를 들게 되었다.

『처음 집을 보러 갔을 때 주인 할머니가 아내와 나를 보고 제일 먼저 묻는 말이 「애는 몇이나 되느냐」였어요. 주인 할머니의 본새로 보아 애가 많다면 세를 주지 않을 것으로 생각한 아내가 얼른 수를 절반으로 줄여 「셋」이라고 하더군요. 그러자 주인 할머니는 「셋도 많다」고 합디다. 가슴이 철렁 내려 앉았죠』

―이사를 든 뒤 주인 할머니가 뭐라 합디까.

『2층을 독채로 쓰기로 하고 이사하던 날 「속았다」며 펄펄 뜁디다. 아내는 주인집 할머니를 속인 죄 때문에 그 집 가정부처럼 온 집안 청소와 온갖 허드렛 일을 도맡아 했죠. 그것도 부족해 기를 펴지 못하고 눈치만 살피는 나날을 보냈어요. 아내와 나는 이를 악물고 열심히 돈을 모으기 시작했습니다. 애들이 좀더 편히 살 수 있는 집을 마련하기 위해서였죠』

이 집에서 살면서 그는 참으로 많은 작품을 썼다. 이 무렵 그의 작품이 「가는 봄 오는 봄」(朴是春 곡, 백설희·최숙자 노래), 「낙엽의 탱고」(羅花郞 곡, 남일해 노래), 「남성 남버원」, 「유정천리」(김부해 곡, 박재홍 노래) 등이었다.

작사가 반야월과 작곡가 박시춘은 자주 콤비를 이루었다. 1958년의 영화 「딸 7형제」의 삽입곡인 「남성 남버원」은 반야월-박시춘 콤비의 대표작 중 하나이다.

유학을 하고 영어를 하고
박사호를 붙여야만 남자인가요
나라에 충성하고 정의에 살고
친구 간 의리 있고 인정 베풀고
남에겐 친절하고 겸손을 하는
이러한 남자래야 남성 남버원

다방을 가고 영화를 보고
사교춤을 추어야만 여자인가요
가난한 집안 살림 나라의 살림
알뜰히 살뜰히 두루 살피며
때묻은 행주치마 정성이 어린
이러한 여자래야 여성 남버원

대학을 나와 벼슬을 하고
공명을 떨쳐야만 대장분가요
부모님 효도하고 공경을 하고
아내를 사랑하고 남편 위하고
귀여운 자녀 교육을 하는
이러한 남녀래야 한국 남녀요



4·19혁명의 기폭제 「유정천리」

대한민국 사람 치고 기쁠 때나 슬플 때나 半夜月 선생에게 「신세」를 지지 않은 사람은 없다. 그는 시대의 애환을 노랫말로 붙들었다.

가련다 떠나련다 어린 아들 손을 잡고
감자 심고 수수 심는 두메산골 내 고향에
못살아도 나는 좋아 외로워도 나는 좋아
눈물어린 보따리에 황혼 빛이 젖어드네

세상을 원망하랴 내 아내를 원망하랴
누이동생 혜숙이야 행복하게 살아다오
가도가도 끝이 없는 인생길은 몇 구비냐
유정천리 꽃이 피네 무정천리 눈이 오네


남일홍 감독, 이민자·김진규 주연으로 수도극장에서 개봉된 영화 「유정천리」의 주제가로 만들어진 이 노래는 레코드판이 시중에 나오기가 무섭게 마구 팔렸다. 바로 이럴 무렵, 「유정천리」는 대구의 중고등학교 학생이 노랫말을 바꾸어 불러 더욱 유행에 박차를 가했다.

「가련다 떠나련다 해공 선생 뒤를 따라/장면 박사 홀로 두고 조박사도 떠나갔네/가도가도 끝이 없는 당선 길은 몇 구비냐/자유당의 탄압으로 민주당이 폐쇠했네

세상을 원망하랴 자유당을 원망하랴/춘삼월 십오일 조기선거 웬말이냐/천리만리 타국 땅에 박사 죽음 웬말이냐/눈물어린 신문 들고 백성들이 울고 섰네」

1960년 3·15 조기선거를 앞두고 민주당 대통령 후보였던 조병옥 박사가 신병치료차 미국 월터리드 육군병원에서 가료 중 돌연 서거했다. 4년 前, 1956년 大選에서도 민주당 신익희 후보가 유세 중 심장마비로 급사했다. 3·15 부정선거로 4·19 혁명이 일어나 자유당 정권이 무너졌다. 「유정천리」가 4·19혁명의 기폭제가 된 셈이었다.

반야월 작사, 이재호 작곡의 「산유화」는 『가수 南仁樹가 취입하면서 감정 격앙 때문에 울었다』는 가요다. 노랫말 「산유화야 너를 잡고 내가 운다」는 대목에서 한동안 목이 메어 도저히 노래를 부를 수 없었던 것이다.

산에 산에 꽃이 피네 들에 들에 꽃이 피네
봄이 오면 새가 울면 님이 잠든 무덤가에
너는 다시 피련만은 님은 어이 못 오시는가
산유화야 산유화야 너를 잡고 내가 운다

산에 산에 꽃이 지네 들에 들에 꽃이 지네
꽃이 지면 피련만은 내 마음은 언제 피나
가는 봄이 무심하냐 지는 꽃이 무심하러냐
산유화야 산유화야 너를 잡고 내가 운다

꽃이 피네 꽃이 지네 산에 들에 피고 지네
봄이 가면 꽃이 지면 내 마음도 따라지네
지는 꽃이 설움이냐 가는 봄이 눈물이러냐
산유화야 산유화야 너를 잡고 내가 운다



『이래도 대중가요를 얕볼 것인가』

―이 노래가 발표되자 대중가요를 「유행가」라고 얕잡아보던 당시 클래식 음악가들도 입을 다물었습니다.

『남인수씨가 유일하게 세미클래식 풍으로 부른 노래죠. 첫 마디에 최고음을 쓰고 있어서 시원하면서도 격정적인 분위기를 자아냈거든요. 가요의 명곡 중 하납니다. 3박자 멜로디에 4박자 변박을 썼을 만큼 작곡자 李在鎬의 고집스런 성격이 스며들어 있기도 합니다』

눈감아 드리오리 눈감아 드리오리
아무도 다 모르게 눈감아 드리오리
세상에 버림받은 그대라 해도
마리아의 종이 울 때 그 잘못 뉘우치리
눈감아 드리오리


―반야월 선생께서 1961년 「눈감아 드리오리」라는 노랫말을 쓰게 된 배경에는 남인수씨와 이난영씨의 사랑 얘기가 깔려 있다면서요.

『李蘭影씨는 남편 김해송씨가 납북당하고 허전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술에 의지하다가 마약에 손을 대기 시작했어요. 이를 옆에서 지켜보던 남인수씨가 자신도 폐를 앓으면서 스승의 아내가 폐인이 되는 것을 차마 볼 수 없어 지극 정성으로 그녀를 간호하다 보니 그만 정이 들어 넘지 못할 선을 넘고야 말았습니다. 주변에서는 이를 두고 「불륜」 운운했지만 내 시선은 달랐어요.

이복룡씨가 곡을 쓰고 남인수씨가 앉아서 취입할 만큼 몸이 상해 있었어요. 결국 이 노래는 남인수씨의 마지막 노래가 되었습니다』

오후 5시. 반야월 선생과 「그 一黨」은 대개 이 시간부터 초걸이(1차)가 시작된다. 가요작가협회를 나서는 그를 뒤따라 계단을 내려가며 본 바지만, 그의 걸음걸이는 그 연세답지 않게 반듯했다. 2004년 4월29일, 그는 국민건강보험공단의 弘報大使로 추대되기도 했다

―어떤 운동을 하십니까.

『매일 그저 전철역 계단과 협회 계단을 올라가고 내려갈 뿐이오. 그리고 小食하고 화 안 내고 일부러라도 크게, 그것도 자주 「하하하」 웃어요. 이게 내 비결이라면 비결이오』

―약주는 많이 하십니까.

『비 안 오는 날은 있어도 술 안 하는 날은 없습니다. 젊어서부터 담배는 피우지 않았지만, 술은 좋아했어요』

詩人이며 작사가인 尹益森씨, 회고록 「不孝子는 웁니다」의 집필을 도운 가요작가 金周明씨, 한민족문화연구원 이사장 姜東敏씨와 그의 부인 朴允姬씨(한국가요예술작가동지회 특별회원), 회고록을 펴낸 출판사의 대표 甘茂植씨와 편집자 방화원씨가 동행했다. 그는 명성빌딩 옆 막다른 골목 안에 있는 「엄마손 식당」에 자리를 잡았다. 술은 소주, 안주라야 한 접시에 일금 5000원의 실비집이다.

반야월 선생은 걸음걸이만 반듯한 것이 아니라 성격도 반듯했다. 식당 아줌마가 우리 일행을 함께 앉히기 위해 앉은뱅이 술상 3개를 합쳐 주었는데, 그는 그 줄을 다시 반듯하게 맞추었다.

반야월 선생 一黨의 酒法은 좀 색달랐다. 술잔을 박치기할 때 「건배」 또는 「위하여」 따위가 아니라 「사랑합시다」라고 외쳤다. 왕년에 이들은 1차를 「초걸이」, 2차를 「소걸이」, 3차를 「중걸이」… 6차를 「망걸이」라고 했다고 한다.


「스카라 계곡」의 대폿집들

半夜月 선생은 을지로 3가 거리를 지난 50년간 거의 개근할 만큼 사랑해 왔다.

『1950년대 중반 이후 가요작가들이 주로 모이는 곳이 스카라극장(당시는 수도극장) 주변 다방이었죠. 카나리아다방, 국제다방, 임다방, 무지개다방, 영산다방, 폭포수다방 등지에 작사가·작곡가·편곡가·가수들이 진을 쳤습니다.

유랑극장 단장에게 뽑혀 가기 위해 서성대는 無名 연예인들에게는 신천지다방·대림다방이 대합실 같은 곳이었어요. 어떤 연예인은 가까스로 찻값을 마련해 가지고 아침 9시 다방으로 출근해 점심도 꼬박 굶고 저녁 6시까지 죽치기를 수없이 반복했죠』

―대폿집 순례는 그때부터였군요.

『작사료·작곡료라고 받아봤자 손에 묻은 밥풀 정도였지만, 저녁 때가 되면 아리랑집·두꺼비집·초막집·울산집·경상도집·청주할머니집·고모네집·향원집·고령집 등 대폿집에 들렀고, 간혹 방석집에 가기도 했죠. 비록 가난한 가요인생이지만 꿈과 희망이 있었어요』

―半선생께서 최근 「스카라 계곡」이라는 노래를 작사하여 「뜨거운 안녕」의 옛 가수 「쟈니 리」가 부르게 했다면서요. 왜 「스카라 계곡」입니까.

『「스카라 계곡」이라는 말은 내가 처음 지어낸 말이에요. 비가 많이 내리면 남산에서 흘러내리는 물이 수도극장 앞 계곡(지금은 복개되어 있음)을 타고 청계천으로 흘러 들어가는 길목이어서 그런 이름을 붙인 거예요. 나의 소원은 「스카라 계곡」을 「가요인의 거리」로 복원하는 일입니다』


한국 최고의 가수 蔡奎燁

―한국가요사에서 노래를 제일 잘 부른 가수로 기록될 인물은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우리나라 직업가수 제1호인 蔡奎燁(채규엽) 선생이라고 생각합니다. 높은 소리라도 그다지 높지 않고 얕은 소리라도 그다지 얕지 않은 중음이고, 발음도 똑똑해 편하게 들을 수 있고 배우기도 쉽습니다. 100년에 한 사람 나올까 말까 한 美聲이었어요』

―여자 가수는요.

『단연 백향림이죠. 함경도 朱乙 출신인데, 높은 소리·낮은 소리·중간 소리가 자유자재일 만큼 기교가 좋았어요. 이난영·이화자·선우일선·황금심·황정자·李美子도 가요사에 기록되어야 할 가수입니다. 李美子의 데뷔곡 「열아홉 순정」은 내가 작사한 겁니다』

―선생님이 작사한 노래 「아빠의 청춘」, 「단장의 미아리 고개」, 「소양강 처녀」 등은 19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 노동가요 또는 운동권 노래로 가사가 바꿔치기 되었습니다. 왜 그렇다고 생각하십니까.

『내 노랫말이 서민적이어서 대중의 기호에 맞았고 또 가사 바꾸기가 용이했던가 봅니다』

―노래를 히트시키는 것은 가사입니까, 곡입니까.

『작사·작곡·편곡·가수가 조화를 이루는 것이 중요하죠』

(이 대목에서 한국가요작가협회 이사장이자 작곡가인 김병환씨가 德談을 했다)

『작사가 先行되고 작곡이 뒤따른 것이 원칙이죠. 히트하는 가요를 보면 우선 가사가 시대의 정서에 꼭 맞아떨어져요. 작곡가로서도 좋은 가사가 있어야 좋은 樂想이 떠오르거든요』

―옛날 가요가 빠른 템포로 편곡되어 리바이벌되고 있는 요즘 세태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런 편곡은 시대의 흐름에 따른 어쩔 수 없는 변화라는 측면도 있겠지만, 뭐니뭐니 해도 옛 가요는 당시의 편곡 악보에 의해 연주되어야만 그때의 맛이 살아나는 것입니다. 멜로디를 침범하여 가수의 노래를 죽이는 편곡은 절대 안 됩니다』


『방송사는 10代 위주로 장사해선 안 돼』

―요즘은 가창력 있는 가수의 시대가 아니라 비주얼 가수의 「벗는 시대」가 아닙니까.

『무대공연의 조명을 보더라도 옛날에는 가수 위주로 센터의 핀 조명과 함께 양옆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비춰 가수의 자태를 최대한으로 살려 주었는데 요즘은 번개 치듯 요란한 조명으로 보는 이를 어지럽게 만들어 버리죠』

―요즘 중년층이나 장년층은 TV를 보다 신세대 가수가 나와 가사 전달도 되지 않는 빠른 노래를 부르면 채널을 후딱 돌려 버립니다.

『방송사나 음반사들은 10代 위주로만 장사를 하려고 들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면 장년층과 중년층도 틀림없이 되돌아올 겁니다. 나는 앞으로 복고풍의 가요가 다시 풍미할 것이라고 굳게 믿습니다. 옷깃과 바지도 폭이 좁아졌다 넓어졌다를 반복하잖아요』

그는 지금도 작사를 계속하고 있다.

『예술인은 죽음과 더불어 은퇴하는 거니까 살아 있는 한은 작품을 써야 합니다. 나는 죽는 그날까지 여전히 현역으로 남을 겁니다』

半夜月 선생은 老後가 편안하다. 그는 올해 여든여섯의 부인 윤경분 여사와 함께 서울 등촌동 성원아파트에서 산다. 2남4녀가 모두 결혼하여 제몫을 하고 있다. 특히 막내 인호씨는 뉴욕 매니스 음대 출신으로 귀국 후 「音天地뮤직시스템」을 설립하고 음반 기획 및 녹음 일을 하고 있다.

그의 현직은 한국가요작가협회 元老院 의장이며, 한국음악저작권협회 고문이다. 지금도 노래방에서 그가 작사한 노래가 워낙 애창되고 있는 만큼 저작권 수입이 상당한 액수에 달한다고 한다.

그는 원래 베풀기를 좋아하는 성품이다. 1977년에 이미 「반야월가요작가상」을 제정, 후배들을 격려해 왔다. 賞福도 있다. 그는 1991년 10월에 대한민국 문화훈장 화관장을 받았고, 2004년에는 세계노래올림픽 격인 CISAC의 금매달을 수상했다.●
Copyright ⓒ 정순태의 역사산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