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조선 기사

[鄭淳台의 역사현장 답사] 李舜臣과 島津義弘(시마즈 요시히로)의 血鬪

泗川倭城 전투와 露粱해전

글 정순태 기자  2005-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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泗川倭城(사천왜성)은 해발 40m도 되지 않는 구릉 위에 달랑 올라앉은 바닷가의 孤城(고성)이지만, 그 위에 오르기만 하면 壬辰倭亂(임진왜란)에서 丁酉再亂(정유재란)으로 이어지는 7년전쟁(1592~1598)의 결정적 순간들이 떠오른다.

이곳은 明의 中路軍(중로군) 2만 명이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가 거느린 왜군에 의해 전멸당한 「사천왜성 전투」(1598년 10월2일)의 현장이다.

1598년 8월, 明의 제독 董一元(동일원)이 이끄는 中路軍은 漢城(한성)을 출발하여 경상우도 지역(낙동강 서쪽의 영남지방)으로 진격했다. 中路軍은 星州(성주)와 高靈(고령)을 거쳐 9월 상순 南江 북안의 晉州邑城(진주읍성)에 입성했다.

中路軍의 병력은 일본 측 기록에 의하면 3만6700여 명에 달했지만, 이는 다소 과장된 수로 보인다. 중국 측 기록에 따르면 中路軍의 實戰(실전) 兵力은 선봉대 7500명, 좌·우익대 각 4000명으로 1만5500명이었다. 여기에 경상우병사 鄭起龍(정기룡)이 거느린 조선군 2200명이 가세했던 만큼 中路軍의 總軍勢(총군세)는 2만 명 내외였던 것으로 보인다.

中路軍의 공세에 대항한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 軍의 병력은 8000~1만 명으로 추산된다. 사쓰마藩(지금의 가고시마縣)의 藩主(번주)인 시마즈는 漆川梁(칠천량) 해전 때(1597년 7월15일) 巨濟島와 加德島 등지의 연안에 복병을 깔아두고 있다가 해전에서 패해 뭍으로 올라온 조선 수군에 痛打(통타)를 가한 바 있는 왜군의 최정예 군단이었다.

이때 3도수군통제사 元均(원균) 역시 배를 버리고 秋元浦(추원포: 固城郡)에 상륙했다가 왜병의 칼을 맞아 전사했다.

사천왜성은 「明史」에 「泗川新寨(사천신채)」로 기록돼 있다. 사천왜성 북동쪽 6km 지점에 위치한 泗川邑城(사천읍성)도 왜군에게 점령돼 있었는데, 「明史」에서는 이를 「泗川舊寨(사천구채)」라고 했다.

사천왜성 전투는 위의 두 城(성)과 晉州邑城, 望晉倭城(망진왜성), 永春倭城(영춘왜성), 昆陽倭城(곤양왜성) 등 모두 6개 성에서 전개된 전투였다.


朝明 연합군의 무덤
고니시 유키나가는 노량에서 李舜臣 함대와 시마즈 함대가 임란 최후의 결전을 벌이는 틈을 타 順天倭城에서 탈출, 부산 방면으로 도주했다. 順天倭城에서 고니시의 도주로를 바라보는 필자.

남해고속도로에서 사천IC를 빠져나와 3번 국도로 접어들면 바로 사천공항이다. 공항 주변에 晉泗(진사)산업단지 및 항공우주박물관 등이 들어서 있다.

사천공항에서 남쪽으로 15리쯤 달리면 신복리 삼거리를 만나는데, 여기서 우회전하여 논밭 사이로 뚫린 좁은 포장길로 들어서면 사다리꼴의 큰 흙더미가 보인다.

이 흙더미가 사천왜성 전투에서 전몰한 장병들의 首級(수급)을 묻은 朝明軍塚(조명군총)이다. 무덤 앞에는 「朝明연합군 전몰위령비」가 세워져 있다. 위령비에는 다음 글귀가 새겨져 있다.

<…明 中路軍 董一元과 우리 鄭起龍 장군이 사납게 쳐몰아 望晉·永春·昆陽寨(곤양채)를 차례로 빼앗고 사천邑城의 적도 크게 무찔렀다. 마침내 10월 첫날에 船津倭城(선진왜성: 사천왜성)을 다그쳤으나 背水陣(배수진)의 敵計(적계)에 역습을 당하여 憤死(분사)한 아군 1만 내외의 수급이 여기 이 무덤에 敵의 손으로 장사됐다…>

朝明軍塚에서 500m쯤 西進하면 사천 왜성의 정문과 마주한다. 主전장인 사천왜성은 도사藩(지금의 시고쿠 고치縣)의 藩主 조소가베 모토치카(長宗我部元親)와 시마즈 요시히로의 副將인 모리 요시나리(毛利吉成) 등이 1597년 10월 하순 축성에 착수, 두 달 만인 그해 12월26일에 준공되었다.

준공 이틀 뒤인 12월28일, 사천읍성에 주둔해 있던 시마즈 요시히로·타다츠네(忠恒) 父子가 이곳으로 옮겨 왔다.


시마즈 요시히로의 誘引 작전

진주읍성에 입성한 中路軍은 南江을 사이에 두고 南江 南岸(남안)에 위치한 망진왜성(守將 테라야마 히사가네)과 영춘왜성(守將 가와카미 히사토모)의 왜군과 대치했다. 시마즈 요시히로는 두 守將(수장)을 사천왜성으로 철수시켰다. 대병력의 中路軍을 여러 성에 분산되어 있는 병력으로는 대적하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주위의 모든 부대를 사천왜성으로 집결시킨 것이었다.

진주읍성에 입성한 董一元은 좀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일본 측 기록에 의하면 요시히로는 그의 陣中에서 복무하던 明나라 사람 郭國安(곽국안)이 董一元의 선봉장 茅國器(모국기)와 서로 아는 사이인 점을 이용, 詐降計(사항계)를 구사했다.

즉, 「곽국안이 망진왜성의 새 守將임을 자처하며 中路軍이 공격해 오면 內應(내응)하겠다」는 密書(밀서)를 모국기에게 보냈던 것이다.

9월21일, 남강 南岸의 망진왜성에서 불길이 타올랐다. 모국기는 곽국안이 내응하는 신호로 믿고 선봉부대를 이끌고 급히 南江을 건넜다. 뒤이어 中路軍의 全軍이 도하했다. 망진왜성을 쉽게 탈취한 中路軍은 그날 중에 영춘왜성도 점령하고, 다음날인 9월22일에는 곤양왜성을 불태웠다. 이것은 敵을 가까이로 끌어들여 결전을 벌이겠다는 요시히로의 誘引(유인)작전에 걸려든 셈이다.

9월29일, 勝勢를 탄 中路軍은 사천읍성으로 몰려갔다. 마침 요시히로의 철수명령에 따라 사천왜성을 향해 퇴각하던 왜병 300여 명이 中路軍에 포착되어 150여명이 전사했다.

10월1일, 시마즈 타다츠네가 진두에 서서 中路軍에 반격을 가하겠다고 나섰지만, 요시히로는 출격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때 明兵 1騎(기)가 달려와 성문 앞 300m 지점에다 표찰 하나를 세워 두고 돌아갔다. 표찰에는 「明日, 사천왜성을 공격하겠다」는 戰書(전서)였다.

10월2일, 董一元은 오전 6시30분경 사천왜성에 대한 총공격에 나섰다. 오전 9시경 中路軍은 목책까지 진군하여 화살과 총탄을 우박처럼 발사했다. 드디어 中路軍의 一隊가 성문을 깨고 담을 넘으려고 했다.

바로 그 순간, 공격군의 200m 후방에 거치돼 있던 城門 파괴용 대포가 과열에 의해 파열하면서 그 불꽃이 날아가 화약상자에 옮겨 붙음으로써 연쇄 폭발사고가 일어났다. 이에 놀란 明兵들이 공세를 멈추고 도주하려고 했다.

기회를 포착한 왜병들이 일본도를 휘두르면서 돌격했다. 백병전에서는 예리한 일본도가 위력을 발휘했다. 主將 요시히로가 본대를 이끌고 달려나와 도주하는 明軍을 추격했다.

中路軍의 선봉장 모국기는 敵의 主將 요시히로까지 출성하자 성 안의 수비가 엷을 것으로 판단, 一枝軍(일지군)을 이끌고 바로 성문을 향해 찔러 들어갔다. 이것을 본 시마즈 타다나가(島津忠長)가 100騎를 이끌고 사천왜성과 明兵 사이로 뛰어들었다. 가바야마 히사다카(樺山久高) 부대도 가세했다.

이때 데라야마 히사가네(寺山久兼) 부대는 中路軍의 후미에 있던 輜重(치중)부대를 향해 화살과 철포를 발사했다. 後陣의 대소동에 놀란 모국기 부대는 사천읍성 방면으로 도주했다.

한편 董一元 직속의 4500騎는 영춘왜성과 사천읍성 사이의 石橋(석교) 前面에 최후 방어선을 치고 전세의 逆戰(역전)을 꾀했다. 그러나 가와카미 히사토모(川上久智)의 부대가 달려들자 中路軍은 총붕괴되어 무수한 사상자를 남기며 합천 삼가까지 도주했다.


泗川倭城의 내부 모습

사천왜성은 지금의 사천시 용현면 선진리의 船津港(선진항) 바로 위쪽 야산에 위치해 있다. 혼마루(本丸: 倭城의 중심부를 이루는 건물)가 위치했던 최고 지점의 표고는 38m에 불과하다. 혼마루가 서 있던 자리에는 현재 수십여 개의 礎石(초석)만 박혀 있다.

船津港 축조 때 혼마루의 석물들이 뽑혀 나가 석재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현재의 사천왜성은 남해안의 다른 왜성에 비해 파손상태가 비교적 심한 편이다.

일본 측 기록에 따르면 사천왜성은 사방에 돌로 쌓은 성벽을 두르고, 그 성문은 敵의 火攻에 버틸 수 있도록 흙을 두껍게 발랐다. 남문과 북문 사이의 언덕 위에 3층의 天守閣(천수각: 倭城의 중심 건물인 혼마루에서 가장 높게 만든 망루)을 세우고 그 옆구리는 2층의 長屋(장옥)으로 이어져 있었다. 중국 측의 기록에 의하면 시마즈軍의 퇴각 후에 董一元이 직접 사천왜성을 둘러보았다.

<大寨(대채)를 보니 대략 4층. 倭房(왜방) 수천 칸. 石城 바깥에 3층 木造의 城이 있다. 堅牢緻密(견뇌치밀)하고, 寨內(채내)의 器用·걸상·병풍은 금빛 一色으로 매우 정교하다. 또 금실로 장식한 鸞駕(난가: 가마)와 금실로 만든 부채가 눈부시다. 董一元은 이것들을 모두 불태웠다>

사천시 문화유산 해설사 박재산씨는 『泗川邑誌에 따르면 당시의 사천왜성은 2중의 해자로 둘러싸여 있었다』고 말한다. 지금은 해자가 모두 매립되었고 들판에는 몇 가닥의 좁은 농수로만 흐르고 있다. 사천왜성에 올라 前方을 바라보면 동남방 10km 지점에 솟은 와룡산까지 서부 경남에서 제일 넓고 기름진 사천평야가 펼쳐져 있다. 성 뒤쪽(서쪽)은 절벽이다. 절벽 아래는 泗川灣(사천만)의 최북단이다.

요시히로가 사천왜성에 장기간 주둔한 것은 이곳이 사천평야의 곡식을 먹고, 전세가 불리하면 곧장 해로를 통해 철수할 수 있는 포구를 낀 地利(지리: 지리적 이점)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요시히로는 그 생애를 통해 52번 合戰에 임해 승패가 어떻든 그때마다 강렬한 인상을 남긴 歷戰의 武將(무장)이었다.

그렇다면 中路軍의 董一元은 어떤 수준의 武將이었을까. 董一元의 생몰연대는 失傳(실전)되었다. 패전 후 뒤도 돌아보지 않고 100여 리나 말을 달려 합천 삼가까지 도주했다가 그래도 겁나 다시 星州까지 물러난 행적으로 판단하면 결코 勇將이나 智將의 모습은 아니다.

필자의 억측으로는, 그는 名門의 자제로서 출전 경험도 별로 없으면서 출세만 빨랐던 젊은 武將이었던 것 같다.

임진왜란에 참전한 뒤 귀국한 다른 明將들과는 달리 董一元의 그 후 행적은 역사기록에서 누락되었다. 이로 미루어 그는 귀국 후 사천왜성 전투의 패전에 대한 문책을 받아 더 이상 관직에 기용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朝明연합군의 四路竝進 작전

사천왜성 전투는 明軍에 의해 구사된 「四路竝進(4로병진)」 작전의 일환으로 전개된 것이었다. 4로병진 작전을 살펴보아야 임진왜란 최후의 전투인 露粱海戰(노량해전)의 의의도 이해할 수 있다. 노량해전이야말로 4로병진 작전의 최종 전투이며, 나아가 7년전쟁의 승패를 결정했던 최후의 大회전이었다.

4로병진 작전은 1597년 연말의 울산성 공략 작전이 실패로 끝난 뒤 明軍의 경리 楊鎬(양호)가 제안한 일대 캠페인이었다. 그 내용은 『조선의 지세가 각 지역으로 서로 나눠져 있고 山水도 險阻(험조)하여 군사를 한 곳에 모으면 작전에 성공하기 어려운 만큼 諸將이 각 지역의 戰守를 책임지도록 분담한다』는 것이었다.

당초, 4路의 대장은 中路에 李如梅(이여매), 東路에 麻貴(마귀), 西路에 劉綎(유정), 水路에 陳璘(진린)이 각각 맡기로 했다. 다만 中路의 李如梅는 그의 형 李如松이 1598년 4월 초 여진족과의 전투에서 전사함에 따라 董一元으로 교체되었던 것이다.

4路의 대장들이 漢城을 출발한 것은 1598년 8월18일이었다. 제독 麻貴가 지휘한 東路軍은 선봉장 解生(해생), 유격 頗貴(파귀) 등과 경상우병사 金應瑞(김응서) 軍을 동원해 9월 중순 울산의 島山城(도산성)을 포위하고, 9월 하순부터 본격적인 공격을 가했다.

도산성의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는 東路軍의 유인작전에도 불구하고 성곽을 의지해 필사적인 守城戰만 벌일 뿐이었다. 가토 軍은 흙을 파 먹고 가죽을 씹으며 피로 오염된 못물을 마시면서도 필사적으로 버텼다.

이런 대치상태가 계속되는 가운데 海路로 부산포를 출발한 일본의 구원군이 도착할 것이라는 소문이 나돌자 東路軍은 공성전을 포기하고 慶州 방면으로 퇴각했다.

中路軍의 패전은 앞에서 거론했다. 中路軍을 궤멸시킨 시마즈 요시히로의 勇名은 이후 明의 조정에까지 알려져 「石曼子(시만즈)」로 불리며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다.

劉綎의 西路軍은 임실과 남원을 거쳐 9월 중순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주둔해 있던 順天倭城(순천왜성)에 대한 포위작전에 들어갔다. 西路軍과 水路軍은 9월20일부터 22일까지 수륙 양면에서 순천왜성을 공격했다. 그러나 西路軍의 대장 劉綎은 처음부터 戰意가 없었던 만큼 적극 공세를 벌이지 않았다.

이때 陳璘의 水路軍은 해상으로부터 순천왜성에 접근하여 포격을 가하면서 고니시 軍과 접전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유격 季金(계금)이 총상을 입었고, 10여 명이 전사했다. 李舜臣(이순신) 함대도 陳璘의 함대와 합동작전을 벌였는데, 옥포만호 등이 총상을 입었다.

西路軍의 순천왜성 공격은 10월1일에 다시 시작되었지만, 이번에도 劉綎의 소극적인 지휘 태도에 의해 고니시 軍의 역공을 허용해 패퇴했다.

陳璘과 李舜臣의 연합함대는 바다로부터 순천왜성을 공격했는데, 육상에서 西路軍이 호응하지 않아 전과를 올리지 못했다. 10월6일 劉綎은 순천왜성에 대한 포위를 풀면서 각종 무기와 군량을 방치한 채 富有倉(부유창)으로 퇴각했다.

이로써 남해안의 왜성에서 농성하던 왜군을 바다로 밀어넣기 위해 전개된 세 方面의 육상공격이 모두 실패로 끝났다.


거북선이 첫 출전하고 李舜臣이 어깨에 관통상을 입은 海戰 현장
泗川倭城 정상부에 세운 李忠武公 사천해전승첩기념비.

사천왜성의 언덕 바로 아래에 위치한 船津港으로 발길을 옮겼다. 이곳은 임진왜란 당시엔 「泗川船艙(사천선창)」으로 불렸다. 바로 李舜臣의 전라좌수영 함대가 임진왜란 발발 初연도에 일본 軍船 13척을 격파한 「사천해전」(1592년 5월29일)의 현장이다.

사천해전은 李舜臣 함대의 돌격선으로 침략의 원흉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간담을 서늘하게 할 만큼 맹위를 떨치게 되는 거북선이 처음 투입되었던 해전으로 유명하다. 이 전투에서 李舜臣은 어깨에 조총탄을 맞아 관통상을 입었다. 사천해전은 李舜臣 함대에는 제2차 출전기간에 전개된 첫 번째 해전이다.

1592년 5월27일 일본 軍船들이 사천·곤양 해역으로 육박하고 있다는 경상우수사 元均의 급보가 전라좌수영에 전해졌다. 李舜臣 함대는 이를 요격하기 위해 5월29일 새벽 河東-南海島 사이의 노량해협으로 출발, 元均과 합세했다. 함대세력은 戰船 26척이었다.

사천해전은 사천灣 입구를 지나던 일본 軍船 한 척을 추격하던 중 사천선창에 정박 중이던 왜선 12척을 발견하면서 전단이 열렸다. 왜선이 정박한 사천선창은 구릉의 단면에 위치해 있어 왜병은 지대가 높은 곳에서 조총을 발사했다.

전투가 처음 시작되었을 때는 선창에 이르는 水路가 좁고 썰물이어서 선체가 큰 板屋船(판옥선)은 진입할 수 없었다. 이에 李舜臣 함대는 물러나는 척하며 유인작전을 벌였으나 일본 水軍 수백 명이 구릉에서 내려와 배를 지키면서 조총으로 대항할 뿐이었다.

李舜臣은 해전을 포기할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그런데 때마침 조수가 밀물로 바뀌었다. 거북선을 선두로 한 李舜臣 함대는 사천선창 안으로 깊숙이 진입, 각종 총통을 발사했다. 일본 水軍은 구릉 위로 후퇴했다. 사천해전에서는 일본 측의 사상자도 많았지만, 우리 측의 부상자도 적지 않았다. 「亂中日記」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5월29일 맑음. …적의 무리는 두려워 물러났는데, 화살에 맞은 자가 몇백인지 그 수를 알 수 없고, 그 가운데 많은 수를 목 잘랐다. 군관 羅大用(나대용: 거북선 建造 실무책임자)이 총탄에 맞았고, 나 역시 어깨를 관통당했으나 중상에 이르지는 않았다. 사부와 격군 중에서도 총탄을 맞은 사람이 많았지만, 적선 13척을 불사르고 물러나 주둔하였다>

李舜臣 함대의 2차 출전은 일본 水軍이 전라도 해역으로 진격해 오는 데 대한 적극적인 대응이었다. 당초 李舜臣은 전라우수사 李億祺(이억기)에게 6월3일까지 전라좌수영에서 합류할 것을 요청했는데, 사천灣 지역의 적정이 활발하다는 통보를 듣고 5월29일 새벽에 서둘러 출전했다. 그 첫 전투가 사천선창에서 벌어졌던 것이다.


李舜臣의 전적지들
大芳鎭掘港. 조선시대에 왜구를 방어하기 위해 전함 2척과 상비군 300명이 주둔했던 곳으로 임진왜란 때는 李舜臣 함대의 기지로 활용되었다.

사천선창에 서면 軍事의 門外漢(문외한)이라도 이곳이 왜 전략의 요충인지를 느낄 수 있다. 사천선창 북쪽 멀리로는 천왕봉(1915m)으로부터 시작되는 지리산의 주능선이 힘차게 달리고 있다. 사천灣 건너 서쪽에는 지리산의 정기를 끝맺음했다는 금오산(849m: 하동군 古田面 현지에선 소오산이라고 불린다)이 우뚝하다. 소오산 뒤편으로는 섬진강 건너편 光陽 백운산(1218m)까지 눈에 들어온다.

지금의 선진항은 최근 해역 일부가 매립되어 옛날보다 크게 줄어들었다. 주위엔 횟집단지가 들어서 있다. 승용차를 타고 사천왜성을 한 바퀴 돌았다. 그 둘레가 2km 정도이다. 필자에겐 이번 사천왜성 답사가 세 번째이지만, 성내의 벚꽃나무 1000여 그루가 만개하는 봄철이면 이곳은 은백색 물결이 장관을 이룬다.

사천灣에 따라 조성된 해안도로를 따라 南行하면 준공 직전의 사천대교(현지 주민들은 서포대교라 부른다)가 보인다. 사천灣을 가로질러 용현면 주문리와 서포면 자혜리를 연결하는 다리다.

서포대교를 바라보며 계속 南行, 사천灣 입구로 나오면 창선·삼천포대교의 장관이 펼쳐진다. 삼천포(지금의 사천市)와 남해군 창선도를 연결하는 총연장 3.4km의 연육교이다. 남해에 떠 있는 모개섬·늑도·초양섬 위를 달린다.

閑麗水道(한려수도)의 중심에 위치한 이곳은 환상적인 해안 드라이브 코스이다. 멀리 서쪽으로는 남해도의 新노량과 하동군 금남면의 舊노량을 잇는 南海대교의 모습까지 아스라하게 보인다.

이곳까지 와서 500m 거리의 大芳鎭掘港(대방진굴항)을 그냥 지나칠 수 없다. 이곳은 고려 말 이래 왜구의 침입이 잦았던 사천평야를 지키기 위해 우리 수군이 주둔했던 곳이다. 임진왜란 때는 李舜臣 함대의 기지로 활용되었다고 한다.

지금의 堀港(굴항)은 조선 純祖(순조) 때 晉州牧(진주목) 관하 73개 面民을 동원하여 둑을 쌓아 축조한 것인데, 당시 토목공사의 수준이 만만찮음을 느낄 수 있다. 石築(석축)이 매우 야무지다.

주변 해역에는 부채꼴 모양의 참나무 말뚝으로 만든 죽방렴과 섬, 바다가 환상적인 조화를 이루고 있다. 죽방렴은 사천 지역의 대표적인 원시정치망 어업의 설치물로서 이곳에서 어획되는 「죽방멸치」는 최상품으로 이름 높다. 한 포대에 36만원을 호가한다.


연육교로 이어지는 삼천포-창선도-남해도-하동 一周코스

창선·삼천포대교를 건너 昌善島(창선도)로 넘어갔다. 창선도라면 정유재란 당시 對馬島主 소오 요시토시의 부대가 주둔했던 곳이다. 3번 국도를 타고 내려가다 창선면 지족에서 창선대교를 통해 해협을 건너가면 남해도의 지족이다. 지족에서 지방도로를 타고 20리쯤 달리면 무림삼거리. 무림삼거리에서 19번 국도를 타고 60리쯤 달리면 동쪽 언덕 위에 李舜臣 장군의 사당 李落祠(이낙사)가 들어서 있다. 이낙사 바로 아래 바다가 李舜臣 장군이 전몰한 觀音浦(관음포)이다.

이낙사를 참배하고 남해도 북단 新노량에서 남해대교를 넘어 하동군 금남면 舊노량으로 넘어갔다. 남해대교 아래 해협이 바로 노량해전 당시 朝明 연합함대와 일본함대가 처음 부딪쳤던 현장이다. 노량해협은 핏빛보다 선연한 석양에 물들어 있었다.

노량 앞바다를 낀 1002번 지방도로를 타고 가다 진교IC를 통해 남해고속도로로 진입했다. 20여분 만에 다시 사천IC를 통해 남해고속도로를 빠져나와 이제는 사천읍성으로 달렸다. 「사천읍성의 明月」은 예부터 이름 높다.

邑城의 성문이 위치한 지대는 좀 높아 이곳에서는 아래쪽 시가지의 모습도 조감할 수 있다. 사천읍성에 오르면서 승용차는 먼저 숙소로 먼저 돌려보냈다. 읍성 내를 잠시 둘러본 필자는 다시 성문을 나서 내리막길을 내려왔다. 10여분쯤 터덜터덜 걸어 사천 鄕校(향교) 부근에 있는 그날 밤의 숙소를 찾아갔다.


豊臣秀吉의 죽음
昌善·三千浦대교.

1598년 10월9일, 5大老가 파견한 使者도쿠나가(德永壽昌)와 미야기(宮木豊盛)가 시마즈가 지키는 사천왜성에 도착, 히데요시의 죽음을 통보하고 철병할 것을 전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8월19일(日本曆 8월18일) 후시미(伏見)城에서 병사했지만, 그동안 극비에 부쳐 왔다.

5大老라면 도쿠가와 이에야스, 마에다 도시이에(前田利家) 등 5명의 실력자들이다. 이들은 임종 직전의 히데요시에게 그의 아들 히데요리(秀賴)를 후계자로 받들고 도요토미家를 배반하지 않겠다고 서약한 바 있었다.

철수시한은 11월16일(日本曆으론 11월15일). 모든 병력이 부산포에 집결하여 일본으로 철수할 계획이었다. 시마즈 軍은 우선 거제도로 가서, 그곳에서 順天倭城(순천왜성)의 고니시 軍의 도착을 기다려 함께 부산으로 이동하기로 되어 있었다. 5大老는 왜군의 철수를 지원하기 위해 아타케부네(安宅船) 500척을 보내기로 했다.

그러나 李舜臣과 陳璘(진린)은 히데요시의 죽음에 대한 정보를 입수했다. 朝明 연합함대는 순천왜성에 농성 중인 고니시 軍의 철수로를 끊으려고 했다.

당시, 고니시는 西路軍 대장 劉綎(유정)에게 다액의 뇌물을 먹여 철수로의 안전을 보장받고 있었다. 흥정에 능숙한 상인 출신의 고니시였던 만큼 그가 劉綎에게 보낸 뇌물은 史書에 기록된 일본도·조총 따위가 아니라 금덩이 같은 것으로 추측된다.

劉綎뿐만 아니라 明將들 대부분은 철수하는 왜군을 상대로 휘하 병력의 소모가 불가피한 결전을 벌일 의지는 없었다. 窮鼠勿迫(궁서물박), 즉 궁한 쥐는 쫓지 말라는 것은 兵法의 상식이기도 하다.

11월13일, 고니시는 10여 척의 선발대를 부산 쪽으로 출발시켰으나 앞바다(송도해협)를 차단하고 있던 朝明 연합함대에 격퇴당해 순천왜성으로 되돌아오고 말았다.

그는 西路軍의 대장 劉綎에게 사자를 파견하여 위약을 추궁했다. 劉綎은 李舜臣과 陳璘에 의한 海路 차단은 자신과는 무관한 일이라고 발뺌을 했다.


고니시의 간청
泗川읍성.

고니시는 陳璘과 李舜臣에게도 퇴로를 열어 주도록 간청했다. 陳璘도 劉綎처럼 뇌물을 먹기는 했지만, 그 후 정황으로 미루어 그가 만족할 정도는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李舜臣은 달랐다. 고니시가 보낸 사자에게 고니시와의 협상을 一言之下에 거부하면서 『원수의 敵이 어찌 나를 이토록 욕되게 하느냐』고 꾸짖었다. 그는 고니시가 사자를 통해 예물로 보낸 일본도와 조총 등을 접수하지도 않았다

「亂中日記」를 음미해 보면 李舜臣은 왜군과 협상을 벌일 생각은 애시당초 없었다. 그러나 작전상의 관점에서 보면 고니시의 간청을 들어주는 체하고 철수하는 고니시 軍의 배후를 쳤다면 오히려 전과가 더 컸을지도 모른다.

軍事에 있어서는 「적을 속이는 간사한 꾀도 꺼리지 않는다(兵不厭詐)」라고 하는데, 왜 李舜臣은 고니시의 뒤통수를 치지 않았을까. 물론, 하룻밤을 밝히며 兵書 한 권을 독파하기도 했던 李舜臣만 한 장수가 兵法의 기초인 「兵不厭詐(병불염사)」나 敵의 계략을 간파하여 逆이용하는 「將計就計(장계취계)」 따위를 모를 리 없다.

다시 「亂中日記」로 돌아가 李舜臣의 품성을 추적해 보면 그는 조선왕조의 儒敎(유교) 이데올로기 속에서 성장한 선비 스타일의 꼿꼿한 武人이었음을 확실히 느낄 수 있다. 임란 당시 戰時행정의 名재상 柳成龍(유성룡)도 그의 저서 「懲毖錄(징비록)」에서 李舜臣을 「단아하고 근엄한 선비」와 같은 무장으로 표현했다. 이런 李舜臣이 退路를 열어 주는 문제를 놓고 敵將과 협상을 벌인다는 것은 그와 가장 인연이 먼 일일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고 싶은 것은 宣祖(선조) 임금에 대한 李舜臣의 抗命(항명) 문제이다. 정유재란 직전 고니시는 그의 政敵인 가토 기요마사의 渡海(도해) 날짜와 항로를 경상우병사 金應瑞(김응서)에게 2중첩자를 통해 가만히 통보했다.

고니시는 李舜臣 함대의 손을 빌려 가토를 제거하고 난 다음, 歸航하는 李舜臣 함대를 요격하려는 속셈을 가졌던 것으로 판단된다. 당시 李舜臣 함대가 釜山浦보다 더 먼 울산 해역까지 진출하여 가토를 잡는다는 것은 능력 밖의 일이었다.

당시 왜군은 거제도와 그 以東의 해안 곳곳에 倭城을 쌓고 조선 水軍의 부산포 공격을 견제하고 있었다. 설사 李舜臣 함대가 울산 해역까지 기습적으로 진출, 가토를 잡는다고 해도 귀로에 왜군의 반격을 피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것은 불과 몇 달 후 元均의 패전에서 증명된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宣祖는 李舜臣에게 가토를 요격할 것을 거듭 명했다. 고니시의 계책을 이미 간파한 李舜臣은 王命에 따르지 않았다. 이것을 「抗命」이라고 한다면 宣祖 조정의 軍事文化가 低級(저급)했다고 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천리 밖에서 싸우는 장수에게는 王命을 따르지 않고 戰場의 實情에 따라 兵을 운용하는 便宜從事(편의종사)의 권한이 당연히 부여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軍事文化가 低級했던 宣祖 조정
泗川倭城. 숲 속에 박혀 있는 바위들은 사천왜성의 중심건물인 혼마루(本丸)의 초석들. 왜성 너머로 보이는 바다는 사천해전의 현장인 船津港.

최근에 종영된 KBS의 역사드라마 「불멸의 李舜臣」은 그의 「抗命」을 부각시켜 그를 모반 직전까지 가는 인물로 극화했다. 물론, 자신의 빈약한 정통성에 의한 열등감과 허약한 전쟁지도력에 의한 자책감을 지녔던 宣祖 임금에게 常勝장군 李舜臣의 당당함이 오히려 밉게 보일 수 있었을 것이다.

더욱이 李舜臣은 가용병력 5000~1만8000명을 보유했다. 이는 그가 당시의 조선 장수들 중에서 최대·최강의 무력집단을 보유했음을 의미한다. 李舜臣은 그 자신의 의도와는 관계없이 宣祖 임금에겐 잠재적 위험인물이었을 것이다.

이런 정황을 고려한 것인지 모르지만, 「불멸의 李舜臣」에선 그가 王命을 전달하는 宣傳官을 연금하는 등 쿠데타 예비적 언동도 범하는 것으로 묘사했다. 이런 극화는 철저한 儒敎 이데올로기의 장수인 그의 품성을 간과한 역사 왜곡이다.


小西行長만은 놓칠 수 없었던 까닭

고니시 유키나가만은 반드시 잡겠다는 것이 李舜臣의 의지였던 것으로 보인다. 두 사람 사이에는 무시할 수 없는 누적된 악연이 있었다.

고니시는 정유재란 직후에 宣祖 임금이 李舜臣을 불신하도록 유도한 反間計를 구사하여 李舜臣의 목숨까지 오락가락하게 만든 장본인이었다.

만약 鄭琢(정탁)의 救命 상소가 없었다면 李舜臣은 제2차 문초에서 치명상을 입었거나 처형을 당했을 것이다.

李舜臣은 고문을 받고, 옥살이를 하고, 겨우 출옥하기는 했지만, 일개 졸병으로 강등되어 白衣從軍(백의종군)을 해야 했다. 白衣從軍 중에 홀어머니가 별세했지만, 그는 빈소조차 지킬 수도 없었다. 이만하면 李舜臣에게 고니시는 한 하늘 아래 함께 살 수 없는 不俱戴天(불구대천)의 원수인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그의 피땀으로 육성된 180척의 함대는 그를 모함한 후임자 元均의 무모한 부산포 공략으로 왜군에게 궤멸되었고, 그의 본영이었던 한산도는 불타고 말았다. 이것은 조선 水軍의 南海제해권을 왜군에게 빼앗겼음을 의미한다.

순천왜성 봉쇄작전 당시 李舜臣의 심리상태는 참으로 참담했다. 13척의 戰船으로 133척의 倭船을 격파한 명량해전 직후 李舜臣의 牙山(아산)집은 왜군의 보복 공격을 받았다. 이때 그가 가장 사랑했던 그의 셋째 아들 이면이 대항하다 전사했다.

아들의 죽음을 전하는 둘째 아들 이열의 편지를 보고 李舜臣은 그의 일기(1597년 10월14일자)에 이렇게 울부짖었다.

<…내가 죽고 네가 사는 것이 이치의 마땅함인데, 이런 이치가 어디 있느뇨! 천지가 캄캄하고 햇빛이 안 보이네. (中略) 아직은 참고 연명이야 한다마는 마음은 죽고 형상만 남아 울부짖는다. 통곡, 통곡하노라>

거제도에 모여 있던 시마즈 요시히로, 소오 요시토시, 다치바나 무네시게(立花宗盛) 등 서부 방면 왜장들은 사천왜성에 갇힌 고니시를 구출하기로 했다. 부산포에 주둔해 있던 데라자와 히로다카(寺澤廣高), 다카하시 나오츠쿠(高橋直次)도 지원에 나섰다.

11월18일 밤 왜선 500척은 昌善島와 사천선창에 집결하여 順天倭城으로 진발했다. 해로로 100여 리 길이다.

順天倭城을 봉쇄하고 있던 朝明 연합함대도 밤 10시경 일본함대를 영격하기 위해 노량(남해도와 하동 사이의 해협)으로 나아갔다. 李舜臣은 元帥旗(원수기) 아래에 제단을 설치하고 『원수의 적을 섬멸한다면 이 몸은 죽어도 후회없습니다』고 하늘에 빌었다.

朝明 연합함대는 2대로 나눠졌다. 陳璘의 함대는 좌익이 되어 죽도 앞바다에, 李舜臣 함대는 우익이 되어 남해도의 觀音浦(관음포) 앞바다에 포진했다. 척후선이 일본함대가 사천灣을 통과하고 있다고 통보하면 연합함대는 노량해협을 향해 급진했다.


노량해전, 연합함대의 대승

노량해전은 11월19일 새벽 2시경 양측 함대가 노량해구에서 조우하면서 시작되었다. 달빛도 없는 어둠 속에서 일본함대가 먼저 조총을 발사했다. 연합함대로부터 호준포(한 발에 100발 정도의 산탄이 발사됨), 霹靂砲(벽력포)가 일제히 불을 품고, 천·지·현·황字 총통으로부터는 대장군전·장군전·次大箭·皮翎箭(피령전)이 적선을 향해 발사되었다. 이 화살들은 6~12尺(1.8~3.6m)에 달했다

전세는 朝明 연합함대가 火攻을 펴면서 일본함대에 크게 불리한 상황이 되었다. 이날의 바람은 겨울철의 북서풍이어서 風上에 위치한 朝明 연합함대가 風下에 위치한 일본함대보다 훨씬 유리했다.

불화살의 집중공격을 받은 일본 군선들은 순식간에 화염에 휩싸였다. 연합함대는 火功에 능숙했는데, 일본 측 자료에 따르면 「火壺(화호)」라는 화염병도 활용했다. 활로를 찾으려고 하는 일본 군선의 船腹을 판옥선이 뱃머리로 들이받아 큰 구멍을 내어 침몰시키기도 했다.

포위를 당한 일본함대도 결사적이었다. 明의 부장 鄧子龍은 70세가 넘는 노장이었지만, 家兵 200명과 함께 조선 군선을 타고 분전했다. 그러나 난전 중에 明의 군선으로부터 발사된 불화살이 그의 座乘船(좌승선)에 잘못 맞아 불붙었다. 이에 家兵들이 소화작업에 급급하던 중 왜병들이 일본도를 휘두르며 뱃전에 뛰어올라 登船, 육박전을 벌이는 와중에 그는 중상을 입은 끝에 사망했다.

동녘 하늘이 밝아 오던 무렵, 일본함대의 일부는 동쪽으로, 또 다른 일부는 남쪽으로 도주했다. 李舜臣 함대는 남쪽으로 도주하는 일본함대를 觀音浦(관음포) 안으로 몰아넣었다.

현재의 관음포는 간척사업에 의해 포구가 그다지 깊지 않지만, 당시에는 입구가 좁은 자루 모습의 灣(만)이었다. 추격당한 왜선은 뱃머리를 돌려 횡대 대형을 갖추고 현측에 철포대를 배치, 일제사격으로 응전했다. 이에 대해 李舜臣 함대는 대장군전과 호준포를 발사했다.

때마침 조류가 썰물로 바뀌는 바람에 시마즈의 부장 가바야마 히사다카(樺山久高) 등이 탄 배가 좌초했다. 가바야마는 수하 500여 명을 이끌고 남해도에 상륙 도주했다.

관음포 앞바다에서는 이후에도 처참한 사투가 계속되었다. 이런 격전 중에 李舜臣은 왜병의 총탄을 맞고 쓰러졌다. 이때 李舜臣은 『전투가 한창 급하니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는 유명한 유언을 남겼다.

노량해전은 11월19일 정오경에 朝明 연합함대의 대승으로 끝났다. 시마즈 요시히로, 다치바나 무네시게, 소오 요시토시 등 倭將들은 50여 척의 군선만 거느리고 부산 방면으로 도주했다.

당시 좌의정 李德馨(이덕형)은 노량해전 후 현지를 둘러보고 왜선 200여 척을 격침하고 사상자가 수천 명이라고 宣祖 임금에게 보고했다. 이보다 며칠 앞서 明나라 軍門에서 우리 조정에 통보한 전과는 『일본 군선 100척을 포획했고 200척은 분멸했으며 500여 급을 참수했고, 물에 빠져죽은 왜병은 不知其數』라고 했다.

李舜臣 연합함대의 손실도 적지 않았다. 戰船의 상실은 없었지만 李舜臣 휘하 副將級 10여 명이 전사했다.


朝鮮 수군과 日本 수군의 愚劣 확정
1598년 11월19일 노량해전에서 李舜臣은 敵의 流彈을 맞아 전사했다. 위의 그림은 당시 일본 쪽에서 그린 노량해전圖이다.

고니시 유키나가는 노량해전이 한창일 때 순천왜성에서 빠져나와 가만히 猫島(묘도) 서쪽 水路를 통과하여 남해도의 남쪽을 우회하여 부산으로 탈출했다.

관음포에서 좌초하여 남해도에 상륙한 가바야마(樺山久高)의 부대는 약 10km를 도주하여 지금의 船所里에 위치한 남해왜성에 입성했다.

남해왜성은 정유왜란 발발 초기에 일본의 수군장들이 쌓은 성으로 소오 요시토모가 주둔하고 있었는데, 노량해전 당시에는 空城이었다. 가바야마는 천신만고 끝에 귀국했는데, 1609년 2월 도쿠가와 幕府의 명령에 따라 사쓰마藩이 琉球(유구: 현재의 오키나와)를 정복할 때 총대장이 되었던 인물이다.

노량해전은 7년전쟁 최후의 決勝戰이었다. 이 해전은 조선 水軍이 주도했다는 점과 해전사상 최대 규모의 승리였다는 점에서 그 역사적 의미가 크다.

최후의 부대였던 시마즈 요시히로 軍이 부산포를 떠난 것은 1598년 11월27일(日本歷 11월26일)이었다. 일본은 무모한 침략전쟁을 도발하여 5만 명 이상의 병력을 잃고 패전했다. 패전은 武將들 간의 감정적 대립에 기름을 부은 꼴이었다.

1600년 9월의 세키가하라 전투의 패전에 의해 도요토미(豊臣) 정권이 붕괴했다. 명분 없었던 조선 침략이 도요토미 정권의 멸망을 재촉하는 원인이 되었던 것이다.●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1535~1619)

세키가하라의 「敵中突破」로 武名 떨쳐

사쓰마의 시마즈家는 가마쿠라 幕府 이래의 戰國大名(전국대명·센고쿠다이묘)으로서 규슈(九州) 최강의 藩主였지만, 1587년 규슈 정복에 나선 히데요시에게 勢不利를 느끼고 항복했다.

요시히로는 임진왜란 초전에 제4진의 대장으로 강원도를 점령했다. 제4진은 요시히로의 직할 병력 1만 명과 모리 요시나리(모利吉成)의 2000명, 다카하시(高橋九郞)·아키쓰키(秋月三郞)·이토(伊東祐兵)의 각 1000명 등 모두 1만5000명으로 구성되었다.

시마즈 요시히로는 1600년 9월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敵中突破(적중돌파)」로 武名을 떨쳤다. 세키가하라 전투는 히데요시의 死後에 그의 어린 아들 히데요리(秀賴)를 받드는 西軍(병력 8만 명)과 새로운 「天下人」을 노린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의 東軍(병력 12만 명)이 격돌한 大會戰이었다.

세키가하라 전투에 요시히로는 불과 1200명의 병력을 이끌고 西軍에 가담했다. 이는 요시히로가 西軍의 총대장 이시다 미쓰나리(石田三成)의 요청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동시에 도쿠가와에게 맞서 올인작전을 벌이지 않겠다는 그의 생각이 반영된 병력 동원으로 풀이된다.

西軍의 이시다 미쓰나리, 우키다 히데이에, 고니시 유키나가의 부대 등이 모두 궤멸된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최후까지 버틴 軍勢는 생존자 500명 정도의 요시히로의 부대였다. 전멸 직전 요시히로의 사쓰마勢는 한 덩어리가 되어 도쿠가와의 本陣을 정면으로 강타했다.

총대장 도쿠가와를 지키기 위해 東軍이 주춤하는 사이에 요시히로 부대는 적진을 돌파, 탈출로를 열었다. 東軍은 요시히로를 추격했지만, 요시히로의 행동은 단순한 도주가 아니었다. 퇴로의 좌우에 소수의 銃兵을 남겼다. 이 伏兵은 자신들이 전사할 때까지 東軍의 추격을 저지했다. 이런 거듭된 복병 작전으로 대장의 목숨을 지킨 사쓰마 부대가 오사카城에 입성했을 때 생존했던 병력은 80명에 불과했다.

가고시마에 돌아온 요시히로는 和戰 양면책을 구사했다. 그는 스스로 사쿠라지마(櫻島)에 칩거하면서 도쿠가와에게 恭順(공순)의 뜻을 표시하는 한편으로 그의 형 요시히사(義久)와 아들 타다츠쿠(忠恒)로 하여금 3만 병력을 동원하여 도쿠가와 이에야스와의 결전에 대비토록 했다.

요시히로가 세키가하라에서 보인 大탈주는 이에야스의 뇌리에 강한 인상으로 남았다. 이런 요시히로가 謝罪使를 보내는 등 납작 엎드리자 이에야스는 요시히로의 罪를 불문에 부치고 영지(65만 석)를 깎지 않고 그대로 인정해 주었다.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1600)

『이제 대왕의 수레는 어디로 갑니까』 宣祖 조롱

유키나가가 태어난 사카이(堺: 오사카)는 세토 內海로부터 수도권에 진입하는 「바다의 현관」으로서 무역의 중심지였다. 사카이에서 유키나가의 생가는 무역업 및 창고업을 경영한 유력한 海商이었던 만큼 그는 항해술에 뛰어났다. 전국시대의 海商은 무장을 하고 해적질도 했던 만큼 히데요시에 의해 水軍將으로 발탁되었다. 그때가 그의 나이 21세.

그는 히데요시의 기대에 부응, 비추(備中)의 다카마쓰(高松)城 공략과 주고쿠(中國) 정복에서 크게 활약, 세츠守에 올랐다. 「太閤記(태합기)」에 의하면 힘이 세고, 지모도 출중한 데다 살갗이 희고 長身이어서 범상하게 보이지 않았다.

당시 사카이는 국제적 분위기의 자유도시였던 만큼 南蠻人(남만인: 유럽인)과 예수會 선교사들도 자주 드나들어 유키나가는 해외사정에 정통했을 뿐만 아니라 아버지(小西隆佐)와 함께 세례를 받았다. 그의 영향력에 의해 그의 부하들 중에도 「키리시탄(크리스천: 舊敎 신자)」이 많았다. 유키나가의 아버지는 히데요시를 섬겨 재무장관의 역할을 했다.

1587년 히데요시가 규슈를 정벌한 후에는 가토 기요마사와 함께 규슈 중부지역을 반분하는 다이묘(大名)가 되어 南규슈의 雄藩(웅번) 사쓰마를 견제하는 역할을 맡았다. 임진왜란을 앞두고 가토 기요마사와 함께 규슈 西岸에 대본영격인 나고야(名古屋)城을 축성했다.

임진왜란 때는 침략군의 제1진(병력 1만8700명)을 이끌고 도해했다. 제1진은 유키나가의 직할부대 7000명, 그의 사위이며 對馬島主인 소오 요시토시의 5000명, 마쓰우라(松浦鎭信)의 3000명, 아리마(有馬晴信)의 2000명, 오무라(大村喜前)의 1000명, 고토 스미하루(五島純玄)의 700명으로 구성되었다. 이들의 공통점은 소오 요시토시를 제외한 모두가 규슈에 영지를 지닌 「키리시탄」 영주들이었다.

임진왜란 初戰은 고니시 유키나가의 독무대였다. 1592년 4월13일 부산포에 상륙하여 부산진성과 동래성을 함락시킨 데 이어, 상주에서는 순변사 李鎰(이일)의 부대를 궤멸시키고, 충주에서는 도순변사 申砬(신립)의 부대를 달래강에 밀어넣은 다음 일로 북상하여 개전 20일 만인 5월3일 漢城에 1번 입성했다.

이어 선조 임금을 추격하여 예성강을 건너 개성을 점령하고, 다시 대동강을 건너 평양성을 뺏고, 의주로 몽진한 선조에게 『이제 대왕의 수레는 어디로 가시렵니까』라는 야유에 찬 書狀을 보내기도 했다.

유키나가는 처음부터 히데요시의 조선 침략에 찬성하지 않았다. 對조선 무역의 파탄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그는 임진왜란 발발 후 계속 조선과의 강화를 추진했다. 히데요시의 죽음으로 전후 7년전쟁이 종전되지만, 1600년 일본열도의 패권을 놓고 격돌한 세키가하라 전투에 西軍으로 참전,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東軍에 패전함으로써 파란만장한 생애의 종말을 맞게 된다.

그는 패전 직후 도주·은신하다가 붙잡혀 교토의 六條河原에서 참수형을 당했다. 교리상 자살할 수 없는 가톨릭 교도였기 때문에 사무라이로서 샛부쿠(切腹)를 하지 못하고 묶여 목이 베이는 「치욕」을 당한 것이라 한다.



소오 요시토시(宗義智·1568~1615)

도쿠가와의 조선 국교 정상화에 이용돼

對馬島(대마도)의 宗氏 20代 島主. 히데요시에 의해 도발된 임진왜란은 조선으로부터 벼슬을 받고 對조선 무역으로 살아온 요시토시에겐 충격적이었다.

그는 임진왜란 3년 전 히데요시의 使者로 漢城으로 올라와 히데요시의 침략 의도를 넌지시 귀띔을 하면서 임진왜란 당시 왜군의 주력 병기인 조총(철포) 2정을 선조 임금에게 바치기도 했다.

물론 그는 부산포-양산-밀양-청도-경산-대구-인동-선산-상주-유곡-문경-조령-안보-연풍-괴산-이천-廣州-한성에 이르는 上京路를 밟아 오면서 주변의 關防시설 등을 정탐하는 임무도 수행했다.

위의 中路는 임진왜란 발발 후 왜군 主力의 북진로가 되었다.

요시토시의 아내는 「마리아」라는 세례명을 가진 고니시 유키나가의 딸이었다.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 당시 그는 장인 유키나가와 함께 西軍에 가담함으로써 패전 후 절체절명의 궁지에 빠졌다.

요시토시가 反도쿠가와 진영에 속했으면서도 斷絶을 모면한 것은 조선과의 국교회복을 갈망한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있어 그가 對조선 외교에 빠트릴 수 없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그 대신에 그는 그의 아내 마리아와 이혼을 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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