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조선 기사

[인물연구]「소나무의 新世界」창출한 梅亭 閔庚燦 화백

열 살 때 혼자 美 군함 타고 중국行
화가로 大成… 40년 만에 귀국

글 정순태 기자  2005-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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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세기 韓·中 화단을 대표하는 大畵師(대화사)」라는 절찬을 받은 바 있는 梅亭 閔庚燦(매정 민경찬) 화백의 인생은 그 어떤 大河 드라마보다 파란만장하다. 지난 10월19일부터 31일까지 朝鮮日報 미술관에서 개최된 그의 古稀展(고희전)은 그의 삶이 지닌 非常함 때문에 더욱 감동적이었다.

그는 지금부터 60년 전인 1945년, 열 살의 어린 나이로 「얼떨결에」 美 해군 군함을 타고 아무 緣故(연고)도 없는 중국으로 건너가게 되었다. 곧 중국이 國共內戰(국공내전)에 휩싸였고, 이어 대륙이 공산화되는 바람에 귀국 길이 막혔다. 그는 萬里異國(만리이국) 땅에서 천애의 고아가 될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그 어린 소년이 중국에서 살아남아 南畵 大家들의 門下生이 되고, 39년간 수업을 쌓아 大成할 수 있었을까. 그 궁금증을 풀기 위해 古稀展 마지막 날의 현장에서 온종일 그를 만났다.

『광복 직후, 仁川港 부두에서 동네 아이들과 어울려 놀다가 美 해군 수병들을 따라 미국 배를 타게 된 겁니다. 장갑차와 군수물자를 실은 대형 상륙함이었어요. 미군 배를 타기만 하면 맛있는 초콜릿을 얼마든지 먹을 수 있을 것 같아 그냥 따라간 거예요』

梅亭보다 10년 年下의 필자도 6·25 전쟁 때 경험한 바이지만, 당시 GI(美軍 병사)들은 주둔지역 아이들에게 憧憬(동경)의 대상이었다. 아이들의 눈에 비친 「코쟁이」 GI는 산같이 쌓아 놓은 초콜릿과 추잉껌을 나눠 주는 산타클로스였다.

『나보다 몇 살 더 먹은 동네 아이 하나와 함께 둘이서 배에 올랐죠. 미군 수병들은 그 애보다 나이가 어린 나를 더 귀여워했어요. 그러니 그 애가 삐쳐서 내게 먼저 주먹질을 해 한판 붙게 되었어요. 船上에 GI들이 빙 둘러앉은 가운데 「西部영화」의 한 장면 같은 격투를 벌인 셈입니다』

─그래 판정은 어떻게 났습니까.

『그 애가 몸집이 좀 컸지만, 나는 일곱 살 때부터 철봉 같은 것을 해서 재빠르고 힘도 셌죠. 내가 이기니까 GI들이 손벽을 치면서 환호했어요. 그 애는 울면서 下船해 버렸어요. 나는 영웅이 되었죠. 싸움 중에 내 바지가 찢어졌는데, 수병들이 바느질을 해서 기워 줬어요. 내 고무신이 해졌다며 군화를 반으로 잘라내 조그만 구두까지 만들어 신기더군요』
瀑布杉松常帶雨 夕陽蒼翠忽成嵐

泉聲松?白雲中 450cm×290cm 2005

丹楓老樹幾經秋 100cm×70cm 2004

濤聲依舊 440cm×94cm 2005


上海·南京·漢口 등 대륙을 전전

─우쭐했겠네요. 그래도 날이 저물기 전에 집으로 돌아가야 어른들이 걱정하지 않았을 터인데요.

『아버지는 日帝 때 仁川에서 꽤 알아주는 이발관을 경영했어요. 이발의자를 셋이나 설치한 업소였으니까요. 당시만 해도 이발사는 하이칼라 직업이에요. 그런 아버지가 무슨 일인가로 일본사람과 다투어 家産(가산)을 날리고 난 뒤 술로 세월을 보냈어요. 어머니는 내가 여섯 살 때 술 마시고 때리는 아버지의 구박을 피해 가출해 버렸습니다』

소년은 지금 仁川 공설운동장이 있는 松林洞(송림동)에서 살았다. 아버지가 자주 집을 비웠기 때문에 집에 돌아가도 고아나 다름없었다.

─형제는요.

『제가 외동아들이었어요. 위로 누나가 둘 있었는데, 그때는 이미 시집을 가버리고… 그래서 美 수병들에게 「고아」라고 말했어요』

─아니, 그 나이에 벌써 영어회화를 했습니까.

『웬걸요. 「할로(헬로), 오케이, 원 투 쓰리」 정도나 했죠. 그래도 사람과 사람의 사이는 손짓과 얼굴 표정만으로도 통하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中國으로 건너가게 된 거군요.

『처음엔 국내항을 오가다 6개월쯤 후에 中國으로 건너가 天津港(천진항)에 입항하게 되었습니다. 天津港에서 중국의 東海岸을 따라 항해하여 上海에 입항해 짐을 부리고, 揚子江(양자강)을 거슬러올라 南京을 거쳐 漢口까지 갔다가 다시 上海로 돌아왔죠』

漢口라면 지금의 武漢. 대륙 한가운데의 內陸도시이지만, 增水期(증수기)인 여름엔 揚子江을 통해 1만t급 선박도 입·출항하고 北京과 京漢線 철도로 연결되는 교통의 요지였다.

그를 승선시켰던 미국 군함과 수병들은 임무를 마치고 이제 본국으로 귀환해야만 했다. 미국 시민권이 없는 경찬 소년은 그들과 동행할 수 없었다. 미군 수병들은 이제 웬만한 생활영어쯤은 구사하는 소년을 上海에서 활동하고 있던 미국인 선교사에게 맡겼다.
綠陰深處萬千松 162cm×132cm 2005

秋聲 181cm×97cm 2005


上海에 홀로 떨어지다

선교사는 취학연령이 이미 지난 경찬 소년을 上海에 있던 空軍子弟小學校 2학년 2학기 과정에 편입시켰다. 한 학기를 다녔지만 통학거리가 너무 멀었다. 소년은 染華(염화)여자중학교 附設 소학교로 전학하여 3학년 1학기를 다녔다. 하지만 중국어가 서툴러 진도를 따라가기 힘들었다.

『미국인 선교사는 國民黨 정부군의 上尉(상위: 당시 중국국민당 정부군의 尉官級 장교는 소위·중위·대위·상위의 4단계였음) 집에다 나를 맡겼어요. 중국어를 배우도록 한 겁니다. 그 上尉가 국민당 정부의 수도인 南京으로 발령이 나서 이사를 했습니다. 그를 따라 南京에 가서 그의 집 청소를 하고 때로는 심부름도 하면서 1년쯤 살았습니다.

宋牧(송목)이라는 옆집 아이와 친해져 나는 그 애에게 영어를, 그 애는 내게 중국어를 가르쳤습니다. 선교사가 내게 얼마간 돈을 부쳤고 본국으로 돌아간 미군 수병들도 간혹 선물을 우송했는데, 上尉 집에서 가로채 내게 전해지지 않았어요. 그러니 南京 생활이 싫어져 다시 上海 선교사 집으로 돌아가게 됐어요』

미국인 선교사는 소년의 교육을 浙江省(절강성)의 성도 杭州(항주)에 있던 그의 중국인 제자에게 맡겼다. 「중국인 제자」는 영어교사였다. 그때가 1948년, 소년의 나이 열세 살이었다. 그는 杭州에 있는 新民小學校 4학년으로 편입했다.

당시는 난세였다. 太平洋戰爭(태평양전쟁) 종전 직후부터 중국은 國共內戰에 돌입해 있었다. 毛澤東(모택동)의 中共軍이 揚子江(양자강)을 도하하여 국민당 정부의 수도였던 南京을 함락시켰다. 蔣介石(장개석) 총통이 이끄는 국민당 정부는 臺灣(대만)으로 쫓겨갔다. 1949년 9월1일, 北京 天安門 광장에서 毛澤東 주석은 중화인민공화국 수립을 선포했다.

이런 격동기 속에서도 경찬 소년에게는 행운이 다가왔다. 平生恩人을 만난 것이었다.
귀국 이후 소나무를 主소재로 삼는 등 한국화가로 변신하기 위한 梅亭의 노력은 치열했다.


平生恩人- 담임선생의 남동생 周昌穀

『내 담임이 周素珍(주소진)이라는 함자의 女선생님이었는데, 내가 미술에 자질이 있다면서 浙江美大(현재의 中國美大)에 재학 중이던 남동생 周昌穀(주창곡)에게 개인지도를 부탁하셨어요. 周昌穀 선생이 매주말 누나 집에 와서 내가 그린 그림을 보고 일일이 지도해 주셨어요』

周昌穀은 후일 「현대중국의 3大 인물화가 중 1人」으로 대성한 분이다. 뿌리도 없이 떠돌던 소년의 고달픈 삶, 이것이 轉禍爲福(전화위복)이 된 셈이었다.

중국 제1의 藝鄕(예향) 항주는 중국이 경제적으로 가장 번영했던 南宋 시절의 수도였다. 南宋 멸망 후 몽골족 元제국의 지배하에서도 항주는 경제와 예술의 중심지로 「黃金시대」를 구가했다. 明·淸 시대에 뛰어난 예술가가 이 지방에서 비 온 뒤의 죽순처럼 배출되었다.

특히 회화에서는 항주를 중심으로 하는 「浙派(절파)」가 대륙을 冠絶(관절)했다. 江蘇省 蘇州(소주)를 중심으로 한 「吳派(오파)」와 함께 중국의 畵壇(화단)을 兩分해 왔던 것이다. 吳派의 화풍이 文人畵的(문인화적)인 것에 비해 浙派의 화풍은 좀더 화려하고 기교적인 것으로 평가된다. 그림에 재능이 있었던 소년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동양화의 본바닥에 뛰어든 셈이었다.

시대적 배경은 어수선했다. 1950년 북한 공산군의 남침으로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이 전쟁에 중공군이 「抗美援朝(항미원조)」라는 구실을 세워 美軍을 비롯한 유엔군과 격렬하게 싸웠다. 이런 정세 속에서도 소년은 남들이 6년간 다닌 소학교를 4년도 되지 않은 기간에 마친 것이다. 그는 1951년 9월, 항주의 中山中華中學校에 입학했다.

『공산주의 체제下여서 기숙사비와 학비는 전액 면제를 받았습니다. 중학교 입학 후에도 6세 年上의 周昌穀 선생은 나를 계속 지도해 주셨습니다』

중학교 5년 동안 그는 조각·판화·서양화·동양화 등 미술의 모든 장르와 만났다. 미술공부를 마음껏 할 수 있었다. 그는 행복했다. 꿈같은 세월이 흘렀다.


人生逆轉

그러나 중학 졸업 후 그의 진로는 막혀 버렸다. 浙江美大에 입학하려 했지만, 당국에 의해 不許되었다. 공산당 체제下 중국에서 신분은 「人民」, 「國民」, 「外國人」 등으로 나눠졌다. 그는 外國人이어서 졸업 후 취업이 보장되는 대학진학이 어려웠던 것이다.

그는 「開荒(개황)」, 즉 황무지를 개간하는 노력봉사를 자원했다. 開荒의 실적을 쌓으면 浙江美大 입학자격을 얻을지 모른다는 기대 때문이었다. 그는 1년 동안 항주 인근의 농촌에서 열심히 노동을 했다. 하지만 浙江美大 입학은 또다시 허락되지 않았다. 두 번에 걸친 입학 不許로 그는 깊은 좌절감에 빠졌다. 그러나 곧 기회가 왔다.

『1956년 浙江話劇團(절강화극단)에서 나를 畵員(화원)으로 불러 올리더군요. 나는 대번에 무대의 큰 배경그림을 그리게 되었습니다』

─누가 끌어 주었습니까.

『浙江話劇團의 배우로 스카우트된 단짝 친구가 「그림을 기막히게 잘 그리는 귀재가 있다」며 나를 추천한 것입니다』

이후 그는 미술가로서 탄탄대로를 걷게 된다.

『그해 浙江日報(절강일보)의 노동절(5월1일) 특집호에 내가 출품한 판화 「黃士旦口水電站」(황단구수전참: 수전참은 수력발전소)이 크게 실렸어요. 이것은 내가 미술인으로 등단한 것을 의미하는 거죠. 당시 話劇團에서 받았던 월급이 29元이었는데, 입선상금으로 14元을 받았어요』

그는 그후 浙江日報 미술통신원도 겸했다(1957~1962년). 그는 유능한 화원으로 지목되어 浙江話劇團의 무대설계를 25년간 도맡았다. 1962년엔 중국인 여성과 결혼하여 첫아들을 낳았다.


문화혁명 기간 黃賓虹 문하에서 배워
梅亭과 부인 李淑芳 여사. 中國 연극배우 출신인 李여사는 한사코 카메라 렌즈를 피했다.

─1960년 중반부터 10여 년간 중국대륙을 강타한 文化大革命 기간에 예술가·지식인·외국인은 紅衛兵(홍위병)들에게 筆舌(필설)로 형언하기 어려운 모진 박해를 받았는데, 閔선생께선 어떻게 견뎌 내셨습니까.

『文化大革命期 10년 동안 나는 周昌穀 선생의 引進(인진)으로 중국 南畵의 최고 대가 黃賓虹(황빈홍: 고인) 선생님의 門下에서 선생님의 기법을 열심히 배웠습니다. 黃선생님은 實技뿐만 아니라 미술이론가, 미술사가로서도 현대 중국의 제1인자입니다』

─어떤 지도를 받았습니까.

『黃선생님은 그때 벌써 구순의 연세였습니다. 내가 마지막 제자입니다. 내가 그린 그림을 보여 드리면 선생님은 한 말씀씩을 해 주셨습니다. 선생님은 당신의 畵風(화풍)과 좀 다른 潘天壽(반천수)·陸儼少(육엄소)·余仁天(여인천)·王伯敏(왕백민) 선생 등 다른 大家들에게도 저를 보내 지도를 받게 했습니다. 기라성 같은 은사들을 만나 그때 나는 하루 15시간씩 공부했어요. 은사들 가운데 지금 생존해 계시는 분은 王伯敏 선생뿐입니다』

王伯敏이라면 현존 중국화의 최고봉이다. 이번 梅亭의 고희전에 王伯敏 선생은 「如石之壽(여석지수)」라는 畵題를 붙인 그림 한 점을 보냈다. 이번 고희전에서 필자의 가슴을 뭉클하게 한 것은 梅亭의 평생은인으로 1986년에 별세한 周昌穀 선생의 節筆(절필)을 대한 순간이었다.

이 遺筆은 周昌穀 선생이 별세 1년 전인 1985년 옛 제자 梅亭에게 보낸 草書 한 폭이었다. 액자 안에 「東藝登高頂 世山列一峰」(동예등고정 세산열일봉: 276×69cm)이라 쓰여 있다.

─무슨 뜻입니까.

『「동방 예술의 높은 봉우리에 올라 이 세상 제1봉이 되라」는 뜻입니다. 선생은 그때 지병 때문에 당신의 앞날이 그리 길지 않을 것으로 짐작하고 제자의 精進(정진)을 당부하신 것입니다』

─미군을 따라 중국에 들어온 前歷(전력) 때문에 홍위병으로부터 비판 같은 건 받지 않았습니까.

『中國畵의 대가들이 나를 감싸 주는 데다 항주엔 친구들도 많았어요. 일 잘 하고, 공부 열심히 하는데 누가 날 건드려요. 나는 주먹도 세고 해서 아무도 날 만만하게 보지 않았어요』


劇團의 프리마돈나와 再婚

그는 판화·조각·篆刻(전각)·서양화·동양화를 두루 공부했다. 문화대혁명의 狂風이 가라앉은 후 그는 서서히 인기작가로 떠올랐다.

『그때 浙江話劇團에서 내가 받은 월급이 65元이었습니다. 1980년 이후 내 그림이 잘 팔렸어요. 내가 그린 그림값 중에 20%가 내 몫이었는데(나머지 80%는 정부의 몫), 그 액수가 한 달에 1500元에 달했습니다』

1980년 그는 甘肅省話劇團(감숙성화극단)의 演員(연원: 배우)으로 순회공연차 항주에 온 李淑芳(이숙방)씨와 만나 재혼했다. 첫 부인과는 성격 차이로 사실상 이혼한 상태였다고 한다.

『예술작업을 이해하지 못하는 여자와 함께 생활하기가 어려웠습니다』

─당시 李淑芳 여사는 무대에서 어떤 역할을 했습니까.

『노래를 하고 춤도 추며 연기를 했어요. 당시 甘肅省화극단은 중국 정부로부터 대상을 받은 화극단이었습니다』

인터뷰하는 閔화백과 좀 떨어져 관람객들과 담소하는 예순여섯의 李淑芳 여사는 아직도 젊은 시절의 고운 자태가 스러지지 않은 미인이다. 특히 깊은 눈과 높은 코가 인상적이었다.

─프리마돈나와 畵員의 만남은 어떻게 이뤄졌습니까.

『甘肅省화극단이 항주 공연을 위해 이동 중 무대 배경그림이 비에 젖어 퍼져 버렸어요. 공연이 다음날인데, 이거 큰일 아닙니까. 밤샘 작업을 해서 고쳐 주었습니다. 저 사람(李淑芳 여사)도 대단히 고마워합디다』

─누가 먼저 프러포즈했습니까.

『내가 먼저죠. 지금은 할멈이 됐지만, 그땐 30代라 예뻤죠. 항주 勝利劇場에서 공연을 보니까 춤도 잘 추고 노래도 잘 부르고…』

李淑芳 여사의 한국말은 아무래도 좀 어눌했다. 왕년의 프리마돈나였지만, 카메라 렌즈를 한사코 피했다.

─얼굴이 매우 특이하신데요.

『저 여자의 아버지는 중국인이지만, 어머니는 러시아인이에요. 하여튼 우리 집엔 雜種(잡종)이 많아요(破顔大笑)』

─雜種이 많다니요.

『우리 딸이 고려大 러시아어학과를 졸업했는데, 연세大에 유학 온 러시아 청년과 만나 결혼했거든요. 지금 둘이 서울에 살면서 러시아 무역업을 하고 있죠.

일곱 살짜리 외손녀가 외국인학교를 다니는데, 한국어·중국어·러시아어·영어를 제법 해요. 세 살짜리 외손녀도 언니에게 배워 한국어·중국어, 어떨 때는 영어까지 주절거리거든요』

─遺傳學(유전학)에서 말하는 雜種强勢(잡종강세)라 해야겠군요. 한국과 중국 대표팀이 축구경기 같은 것을 하면 식구끼리 편이 갈라지겠는데요.

『저 사람은 중국팀을 응원하지만, 축구야 죽었다가 깨어나도 중국이 한국을 못 이기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내 기분이 딱 좋고… 그 때문에 둘이서 토닥토닥 말싸움도 해요』

─중국 가정에서는 남편들이 요리를 하던데, 선생님도 요리를 잘하십니까.

『중국에서는 공산당 정부 수립 이후 「男女同權(남녀동권)」이라 해서 여자의 발언권이 엄청 세졌죠. 중국에서는 「남편은 요리하고 부인은 TV를 본다」는 말이 있거든요. 그러나 나는 워낙 바빠 요리를 자주 하진 않아요. 우리 집사람의 고집이 보통 아닙니다만, 한국 남자는 원래 좀 으스대는 성격이니까 날 이기진 못해요』

필자는 10년 전 중국 丹東 부두에서 모터보트를 타고 압록강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압록강 연안의 북한과 중국 사람의 생활상을 살핀 적이 있다. 북한 여성들은 아이까지 업고 강가에 쪼그리고 앉아 빨래를 하고, 남성들은 둔덕 위의 나무 그늘에 모여 담배를 피우는 모습이 자주 눈에 들어왔다. 반면 중국 쪽 강가에는 남자들이 빨래방망이를 두들기고 있었다.


39년 만에 귀국

이야기가 좀 건너뛰었다. 다시 閔선생의 중국 체재 시절로 되돌아간다.

─중국에서 명성을 얻고 돈도 잘 버셨는데, 왜 귀국하려고 하셨습니까.

『나는 중국에서 작품활동을 하면서도 내 그림에 「仁川人」, 「三千里江山」, 「望鄕」, 「朝鮮人」이라고 새겨진 遊印(유인)을 찍었습니다. 1982년의 한 전시회에서 이 遊印을 유심히 본 미국인 女선교사가 그런 遊印을 사용하는 까닭을 물었어요. 내 출신이 여차여차한 사람이라고 털어놓았더니 그녀가 서울에 있는 驪興閔氏(여흥민씨) 종친회까지 찾아가 나의 존재를 알린 것입니다. 여흥 민씨 종친회보에 나의 사연이 실리자 仁川과 大田에 사는 내 사촌 둘이 나를 초청했던 것입니다』

─美·中관계는 1972년 닉슨 대통령의 중국 방문으로 회복되었습니다만, 韓·中관계는 아직 국교가 없을 때 아닙니까.

『사촌이 내 호적원본을 떼서 대한적십자사에 증빙서류로 제출하면서 나의 귀국을 호소했습니다. 대한적십자사와 중국적십자사가 협상을 벌여 나의 신병을 홍콩주재 우리 영사관으로 넘겨 나의 귀국이 실현되었습니다』

─고국으로 돌아간다니까 중국사람들은 뭐라고 합디까.

『공안부 간부가 「돈 많이 버는데 뭐 하러 귀국하느냐」고 물어요. 그래서 金屋銀屋不如自己草屋(금으로 지은 집이나 은으로 지은 집도 조국의 초가집보다 못하다) 樹高千丈葉落歸根(천장 높이의 나뭇잎도 자기의 뿌리로 되돌아간다)고 대답했습니다』

1983년 6월21일, 그는 39년간의 중국 생활을 끝내고 마흔아홉 살의 나이로 영구 귀국했다. 그의 부모와 두 누나는 이미 故人이 되었다. 귀국 후 그는 중국화에 연연하지 않고 한국 화가로 변신하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다.

그의 부인과 아들·딸도 1986년 한국 국적을 취득했다. 아들 閔威씨(42)는 고려大 중국어학과를 졸업하고, 현재 항주에 거주하면서 무역업에 종사하고 있다.


畵筆 들고 조국 山河 편력

그는 곧 화필을 들고 조국의 산하를 편력하며 한국적 美景에 몰입했다. 마침내 중국적 화풍의 기초 위에 한국적인 화경이 조화를 이루어 韓·中 양국의 어떤 화가도 추급을 불허하는 그만의 독창적인 畵流(화류)를 창출했다. 그 결실이 1984년 8월24일에 개최된 한국문예진흥원과 KBS 공동 주최 그의 귀국전이었다. 언론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평가를 받았다.

<동양화의 본고장인 중국에서 연마된 대담하고 거시적인 화풍의 파격적인 大作과 역동적인 大筆 구사의 산수풍경화 등으로 그의 뚜렷한 역량을 확인시켰으며, 그로써 그는 중국으로부터의 歸國作家라는 입장에서 한국 전통화단에 이채롭게 진입한 대륙적 畵意와 역동적 筆力의 화가로 당장 주목받게 되었다>

다음은 미술평론가 이구열씨의 평가.

<그의 작품은 즉흥적인 붓놀림과 潑墨(발묵), 破墨(파묵), 破筆(파필) 등의 전통적 기법을 자유롭게 구사한 寫意(사의)의 水墨畵(수묵화)와 水墨淡彩畵(수묵담채화)를 끊임없이 그리면서 그의 풍부한 저력을 나타내고 있으며, 직업적인 열정과 역량으로서 梅亭의 화필 작업은 그의 수업 바탕인 중국의 대륙적 표현기질로 이루고 있어, 한국화의 유연한 보편적 형태와는 다른 특성을 보인다>

─발묵·파묵·파필은 무엇입니까.

『발묵은 먹물이 번지어 퍼지게 하는 기법, 파묵은 흐린 먹물 바탕 위에 다시 진한 선을 긋는 기법, 파필은 붓 끝에 물감이 거진 다한 상태에서 힘차게 운필하여 線이 서너 갈래로 갈라져 나오게 하는 기법이죠』
梅亭과 그의 제자들. 門下生들의 모임인 蒼梅會 회원들은 스승의 古稀展에 매일 10여 명씩 나와 자원봉사를 했다.


한국화가로 변신하기 위한 치열한 노력

귀국 전까지 그는 중국의 國花(국화)인 매화를 많이 그렸지만, 귀국 이후 소나무를 主소재로 삼았다. 한국화가로 변신하기 위한 그의 노력은 치열했다. 아호도 「樂松齋(낙송재)」라 지어 「梅亭」과 함께 사용했다.

『소나무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나무 아닙니까. 秋史 김정희가 귀양지 제주도에서 그린 소나무 그림 「歲寒圖(세한도)」는 중국사람들까지 감동시켰죠. 애국가에도 南山 소나무가 등장하고…. 한국사람의 소나무 사랑은 그만큼 각별해요. 한국사람이 좋아하는 소나무를 관찰하기 위해 틈만 나면 강원도- 동해안-남해안-서해안을 거듭 여행하면서 스케치를 했어요. 설악산의 백담사, 남해안의 하동포구 80리, 서해안 牙山의 현대농장 등지에서 기품 있는 소나무 숲과 계곡을 만나 깊은 감명을 받았죠. 한국화를 그리기 위해 그 생태까지 살폈습니다』

歸國展에 이어 KBS 주최 초대전(1988년 8월24일), 1990년에는 인데코 갤러리 초대전이 열렸다. 1992년 10월14일에는 조선일보사가 조선일보 미술관에서 초대전을 개최했다. 이후 여러 차례의 국내외 개인전을 열었다. 그의 작품도 독립기념관, 정부청사, 조선일보사 사옥, 고려대학교 박물관, KBS·MBC·SBS 사옥, 인천시청 청사, 인천일보 사옥, 현대아산병원 등 여러 곳에 걸렸다.

특히 조선일보 창간 80주년 기념 「白松圖展」(2000년 3월30일~4월18일)에서 그는 『韓民族의 상징인 소나무의 강인한 생명력을 독창적인 화법과 독특한 필치로 표현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현재 71세인데 古稀展을 왜 금년에 개최했습니까.

『작년에 열 작정이었는데, 허리 디스크를 앓아 1년을 연기한 것입니다. 귀국 이래 22년간 하루도 쉬지 않고 작업을 했거든요. 이번 전시회가 끝나면 며칠 쉬고 운동 좀 할 생각입니다』

─건강은 어떠십니까.

『당뇨가 좀 있고, 혈압도 조금 높습니다』

그런데도 그의 얼굴을 보면 맑고 푸근하다. 키는 크지 않지만(166cm), 체격은 청년처럼 단단한 모습이다.

─점심 때 약주를 좀 하셨다면서요.

『젊어서는 술을 좀 마시는 편이었지만, 요즘은 소주 한 병이 주량입니다』


동양화·서양화 기법의 合作

행운이었다. 大家로부터 그의 작품 98점 하나하나에 대한 설명을 직접 들을 기회를 잡았기 때문이다. 그의 古稀展에서 가장 큰 작품인 「泉聲松?白雲中」(천성송뢰백운중 450×290cm) 앞에 섰다. 동양화의 특징이라면 으레 餘白美(여맥미) 운운하는데, 이 그림은 600호 화폭을 山水로 가득 채운 구도이다. 특히 원근법과 明暗(명암) 처리의 기법에서 서양화를 방불케 한다.

─서양화 같은 동양화를 보고 있는 느낌입니다.

『나는 판화로부터 시작해 서양화를 먼저 배우고 난 뒤 동양화를 공부했습니다. 그래서 내 그림은 동양화와 서양화 기법의 合作입니다. 동양화에서는 「線(선)」을 중시하고, 서양화는 「面(면)」과 「공간」을 중시합니다. 나는 線·面은 물론 「빛(光)」·「물(水)」을 살리는 새로운 기법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빛과 물은 水墨畵에 있어 생명의 根源(근원)입니다』

─한때 선생님의 그림을 「觀念山水畵(관념산수화)」라고 비평한 사람도 있었는데요.

『이 그림을 보십시오. 백담사에서 오세암-봉정암을 거쳐 대청봉으로 가는 길에 이런 구도가 많습니다. 이 그림에서 보이는 폭포와 계곡, 그리고 기암과 소나무… 모두 우리 눈에 친숙한 것들 아닙니까. 나는 끊임없이 우리 山河를 답사하면서 스케치합니다. 觀念山水畵라는 비평은 턱없는 비판입니다』

─동양화가는 어떻게 스케치를 하십니까.

『似象非象(사상비상), 사물과 똑같이 하는 것이 아니라 그 특징을 잡아 스케치하는 방식입니다』

梅亭 선생과 필자는 작품 「瀑布杉松常帶雨 夕陽蒼翠忽成嵐(폭포삼송상대우 석양창취홀성람)」 앞에 섰다. 소나무가 뿌리를 내린 기암의 색감이 油畵(유화)를 방불케 한다.

─기암의 壁面(벽면)이 우툴두툴해서 입체적으로 보입니다. 동양화에서 저런 건 어떻게 가능한 겁니까.

『물을 많이 쓰죠. 화폭에다 종이를 씌워 붙이고 물을 흘리고 난 뒤 종이를 빼내는 수법으로 바위 형태를 만들어 내죠. 이건 중국과 일본에는 없는 특수기법입니다. 이 기법을 전수하기 위해 浙江美大에서 1993년 이후 계속 나를 교수로 초빙했지만, 아직도 할 일이 많아 응하지 않았습니다』

이어 그의 작품 「綠陰深處萬千松(녹음심처만천송)」 앞. 솔잎의 하나하나가 연두색 또는 찬란한 노란색으로 처리되어 있다. 동양화의 물감이 어떻게 이처럼 다채로울 수 있는지 궁금했다.

『다 동양화 물감이에요. 물감 원료를 직접 가공해서 사용하고 있죠. 요즘 한국사람들은 彩色(채색)을 아주 좋아해요』

陳泰夏(진태하) 인제大 석좌교수는 梅亭을 「東洋의 레오나르도 다빈치」라고 한다. 『다빈치가 엄격한 관찰을 바탕으로 새로운 美의 세계를 창출했듯이 梅亭 역시 古稀의 연령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끊임없이 사물을 觀照(관조)하면서 작품 활동에 정진하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梅亭의 水墨法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그의 水墨法은 지금까지의 모든 기법을 실험하고 연찬하여 이제 절정에 달하였다. 다만 墨 일색으로 형언할 수 없을 만큼 다양한 먹빛을 연출한다. 곧 그의 표현대로 『검으면서도 생동하게(墨活), 연하면서도 퍼지게(淡舒), 스며들면서도 신묘하게(渗奇)』와 같이 梅亭의 수묵기법은 자유자재로 변화무쌍하여 한마디로 그 窮極을 예측할 수 없다>


俗氣 없는 인품

『沈銀河가 온다』면서 갑자기 카메라맨들이 몰려들어 술렁거렸다. 수년 전 30代의 나이로 영화계에서 갑자기 은퇴한 沈銀河씨는 그후 梅亭 선생 門下에서 2년6개월간 수묵화를 배웠다고 한다.

지난 10월18일 화제를 모은 결혼식장에서 카메라 세례를 받고 번거로웠던 탓일까, 그녀는 이날 전시장 가까이까지 왔다가 발길을 돌린 것으로 전해졌다.

─청담동에 있는 선생님의 화실에서 제자들도 가르치신다면서요.

『일주일에 3일간 가르치는데, 20~30명씩 옵니다』

그의 문하생 모임이 「蒼梅會(창매회)」이다. 이번 古稀展에도 매일 10여 명씩 나와 스승을 도왔다.

─자택은 어디에 있습니까.

『경기도 安山에 아파트(78평)가 있지만, 요즘은 아침저녁으로 다니기 번거로워 청담동 화실에서 內子와 함께 기거하고 있어요. 화실 위에 있는 조그만 방에서 지냅니다』

梅亭 선생의 한국말은 어눌했다. 필자는 미술의 門外漢이다. 그런데도 이날 8시간에 걸친 인터뷰는 물 흐르듯 했다. 곰곰 생각해 보니 이것은 梅亭 선생의 인품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라 느껴진다.

그에게는 俗氣(속기) 같은 건 없었다. 무슨 질문에 대해서든 꾸밈 없이 답변했다. 梅亭 선생에게 『사흘 후에 청담동 화실로 찾아가 뵙겠다』고 하여 응낙을 받았다. 「사흘 후」로 날을 잡은 것은 古稀展의 피로를 좀 푸신 후에 만나야겠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中國 안 갔으면 깡패 됐을 것』

사흘이 지나고 난 날, 오후 2시30분 청담동 삼익아파트 앞에 있는 「인재빌딩」 3층으로 梅亭 선생을 찾아갔다. 입구에 「梅亭畵室」이라는 현판이 붙어 있었다. 서예의 대가 如初 金膺顯(여초 김응현)옹의 글씨였다. 90평 규모의 화실에는 작업대와 그림틀, 그리고 여러 제자의 그림들이 붙어 있었다.

─그간 좀 쉬셨습니까.

『전시회가 끝나고도 이것저것 뒤처리할 것이 있어 좀 바빴어요. 아침에 저 앞 강변에 나가 오리들에게 먹이를 주면서 한두 시간씩 걸었죠』

─한강변에 야생오리가 찾아옵니까.

『요즘 많이 와요. 새우깡 같은 것을 던져 주면 아주 좋아해요』

─원래 동물을 좋아하시군요.

『내가 이 건물 옥상에 올라가면 비둘기가 60~70마리나 몰려옵니다. 내가 먹이를 주니까요. 이웃에선 비둘기들의 배설물 때문에 싫어하는 것 같아 고민이에요. 난 동물을 좋아합니다. 한때는 강아지 18마리와 구관조까지 길렀죠』

─如初 선생과 자별하신 모양이죠. 梅亭 선생의 고희전에 「君子之風」이라 쓰인 휘호(180×40cm)를 보내고, 화실 입구에 거는 현판까지 써 주셨습디다.

『如初 선생은 나보다 8년 연상이십니다. 귀국 2년 후인 1985년 프랑스 여행을 함께 한 적이 있는데, 그때부터 가까워졌습니다. 그 후엔 내 작품의 畵題도 자주 써 주십니다. 그래서인지 「梅亭이 중국에 가서 좋은 선생들을 만나지 못했다면 깡패가 됐을 것」이라는 허물없는 농담도 하셔요』

옆에서 작업하던 여성 제자 한 분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깡패」라는 용어를 필자가 오해할 것을 걱정하는 눈치였다.

『제가 친구 몇 명과 함께 如初 선생님 밑에서 글씨를 배우고 있다가 如初 선생님의 권유로 梅亭 선생에게 그림을 배운 지 20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如初 선생님은 「기왕 그림을 배우려면 畵格·人格을 겸비한 梅亭 선생님에게 배우라」고 하셨어요. 처음엔 말이 잘 통하지 않아 筆談을 했지만, 우리 선생님 같은 분 없어요. 나 말고도 선생님에게 지난 20년 계속 배워 온 제자들이 많아요. 한 선생님에게 20년씩이나 사숙하는 것, 드문 일입니다』

─그렇게 배웠다면 美展 같은 데 입상하셨겠네요.

『1992년 國展에서 입선했고, KBS 주최 전국대회에서도 입선·특선으로 뽑힌 적이 있습니다. 저는 별로고요, 여기서 공부하는 선생님의 제자들 중에 국전에 특선한 분, 초대작가도 적잖게 나왔습니다』

이렇게 인터뷰에 끼어든 李英淑씨는 영문학과를 졸업했지만, 딸이 서울美大에 진학하자 자신도 미술공부를 하고 싶어 梅亭의 제자로 입문했다고 한다.

마침 梅亭의 일곱 살과 세 살 먹은 외손녀 둘이 인터뷰를 하고 있는 화실로 뛰어들었다. 두 아이는 러시아인 아버지를 닮아 인형과 같은 슬라브族의 얼굴이다. 두 아이를 데리러 梅亭의 부인 李淑芳 여사가 곧 뒤따라 나왔다. 李淑芳 여사는 인터뷰 자리에 앉으라는 필자의 권유에도 사양하면서 두 외손녀를 데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李英淑씨에게 질문) 李淑芳 여사는 한국말 잘 합니까.

『귀국 초기 1년간 연세大 한국어학당에 다니며 공부하셔서 우리말을 잘 하십니다. 워낙 조용한 성품이어서 잘 나서지 않으시죠』


德不孤 必有隣

다시 梅亭 선생에게 질문을 했다.

─雲甫 金基昶(운보 김기창) 화백이 생존해 계실 때 친하게 지내셨다던데….

『귀국 직후에 내가 그린 그림 다섯 장을 들고 12세 年上인 雲甫 선생 댁에 찾아가 지도해 달라고 청했죠. 처음엔 말이 없데요. 기분이 안 좋아 그냥 물러나려 했더니 선생이 「잠깐만!」 하더니 「李可染(이가염)을 아느냐」을 물어요. 「중국에서 黃賓虹 선생님 밑에서 함께 배운 師兄」이라고 했습니다.

雲甫 선생이 「아, 그러냐」면서 「그림 한 점 줄 수 있느냐」고 해서 「고르십시오」라고 했어요. 雲甫 선생이 20호 小品 하나를 가지시더군요』

─그런 인연이 있었군요.

『그 후로 전화로 「식사 한번 하자」 하더니만, 나를 자주 불러내 데리고 다녀요. 문예진흥원장을 맡고 있던 宋志英 선생(故人)도 인사시켜 주었는데, 내 그림을 보고 歸國展을 열어 주시겠다는 거예요. 그래서 내 귀국전을 문예진흥원과 KBS가 공동 주최하게 된 것입니다. 宋선생은 중국어를 잘 하셔서 나와 자주 만났죠』

「梅亭畵室」에서의 인터뷰가 2시간을 훌쩍 넘어섰다. 중국 제1의 杭州 특산 龍井茶(용정차)의 香韻(향운) 속에서 진행된 인터뷰를 이제는 끝내야 했다. 가만 생각해 보니 梅亭은 인생의 굽이굽이에서 참으로 좋은 스승과 知己를 만난 인물이다. 그것이 어찌 우연만이겠는가. 德不孤 必有隣(덕불고 필유린), 덕이 있으면 외롭지 않고 반드시 이웃이 있다고 했다. 그의 畵格은 그의 겸손한 인품으로 더욱 빛날 것 같다.

『아직도 부족합니다. 내가 가야 할 길이 아직도 멉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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