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조선 기사

우리 시대의 원로 - 92세의 현역 宋邦鏞옹 (憲政會 원로 의장)

『盧武鉉 대통령은 대한민국의 고마움을 알아야 합니다』

글 정순태 기자  2005-0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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宋邦鏞(송방용). 이제는 그가 누구인지 잘 모르는 국민들이 더 많다. 그는 2代·3代 의원, 초대 참의원, 10代 의원을 역임한 분이다. 광복 이후 우리 정치사를 보면 그동안 5選·6選 의원도 적잖게 나오고, 9選의 최고 기록을 세운 분도 있다. 그러나 4選의 宋邦鏞처럼 깨끗하고 용기 있게 의정활동을 한 분은 그리 흔치 않다.

그는, 李承晩(이승만) 대통령의 終身(종신)집권을 위한 개헌안의 국회 표결에 앞서 집권 自由黨(자유당)의 「암호투표」 음모를 폭로했다. 또한 李대통령이 한글표기법을 舊韓末(구한말) 때의 맞춤법으로 되돌리려 하자 對정부 질문을 통해 그 부당성을 논리적으로 공박, 유명한 「李박사의 고집」을 꺾기도 했다.

5·16 이후 정계에서 물러난 뒤 한동안은 농장 경영을 했다. 1971년 朴正熙(박정희) 대통령의 간곡한 권유로 대통령 직속의 경제과학심의위원회 상임위원을 맡아 長期(장기) 국가발전계획의 입안에 헌신했다. 제1차 석유파동 직후인 1974년에는 정부의 長期자원대책위원장을 겸임했다.

그는 금년 92세이지만, 아직 정정하다. 宋옹이야말로 일제 강점시대, 6·25 전쟁, 4·19, 5·16, 개발연대 등 우리 현대사의 굽이굽이를 중요한 위치에서 체험, 후배들을 위해 값진 증언을 남길 수 있는 분이다. 현재, 그는 전직 국회의원의 모임인 憲政會(헌정회)의 원로회의 의장직을 맡고 있다.

그는, 지난 大選 때 헌정회를 방문한 盧武鉉 후보에게 『당신은 시한폭탄을 가지고 있는 것 같소』라며 여당 대통령 후보의 급진적인 노선을 비판하기도 했다. 이런 점에서 그는 아직도 「할 말은 하는 원로」이다. 그의 올곧은 삶과 생각을 듣고 교훈을 얻기 위해 그를 만났다.

그는 1913년 2월18일 전북 김제군(지금의 김제市) 봉남면 구정리에서 舊韓末 여수 군수를 지낸 송재기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조부 宋祥熙도 곡성군수를 지냈다. 先代로부터 매년 벼 1000石을 수확해 온 집안이었다. 방용 소년이 서당에 다니면서 천자문을 읽고 있을 무렵에 3·1 운동(1919년)이 일어났다. 만세운동은 전국으로 확산되고 있었다.

그의 동네와 가까운 원평 장터에서도 「대한독립만세」가 터져 나왔다. 여섯 살 먹은 소년으로선 「독립만세」의 정확한 의미는 알 수 없었지만, 「만세」를 부르는 사람들을 총칼로 마구 무찌르는 일본 헌병들에 대해 격렬한 적개심을 느꼈다고 한다.

아홉 살 때 뒷머리를 땋은 채로 신식 공부를 하려고 上京했다. 서울아이들은 그런 모습의 宋邦鏞을 「짱꼴라」라고 놀려 댔다고 한다.

『아버지는 작고하실 때까지 삭발을 하지 않고 상투를 튼 분이었습니다. 우리 집안은 일제 말기에 강요되었던 創氏改名(창씨개명)을 끝까지 거부했으며, 일제에 협력해야 하는 감투라면 그것이 비록 面 단위의 소소한 것이라도 모두 회피했습니다. 그런 아버지였지만, 내가 보통학교에 입학하니까 삭발은 허락해 주십디다』

소년은 취학 적령을 넘겨 공립 보통학교에는 입학하지 못하고, 기독교에서 운영하는 사립 永信학교를 다녔다. 이미 「小學(소학)」까지 읽은 터라 1학년 과정에서 배울 것은 별로 없었다. 1년 후, 청계천 長橋(장교) 인근의 공립 長薰(장훈)보통학교 2학년으로 전학하여 6년 과정을 마쳤다. 이어 감리교 선교사 아펜셀러 2세가 교장이었던 배재高普로 진학하여 5년 과정을 마치고 연희전문학교(연세大 前身) 문과에 입학했다.




朝鮮日報社 옥상에서 빵을 먹은 사연

『그때 연희전문은 보성전문(고려大의 前身)과 정례적으로 축구시합을 하고, 일본학생들이 다니던 京城高商(서울商大의 前身)과는 1년에 한 번씩 야구시합을 했거든요. 내가 3학년 때인데, 우리 연희전문팀이 京城高商팀과의 경기에서 짜릿한 역전승을 했어요.

전교생 400명이 동대문운동장에 가서 응원했는데, 모두들 감격했죠. 교가를 부르며 운동장을 빠져나와 일본인 거리 혼마치(지금의 명동)에 가서 한바탕 응원구호를 외친 뒤 광화문에 이르니 朝鮮日報社에서 「다녀가라」라는 전갈이 왔어요.

조선일보 사원들이 문 밖에 나와 있다가 개선장군처럼 몰려간 우리들을 맞으며 「수고했다. 옥상으로 올라가자」고 해요. 어느 틈엔가 옥상에다 빵을 마련해 놓았더군요. 우리더러 「배고프겠다. 많이 먹어라」고 권하는 거예요. 가슴이 뭉클했어요. 출출했던 터라 맛있게 먹고 나서 이번에는 貞洞에 있던 이화여전 기숙사 앞으로 몰려가 「우리 연희 이겼다」고 외치고 학교로 돌아왔어요』

─그렇게 서울 시가지를 휩쓸고 다녔는데, 별일은 없었습니까.

『민족감정을 부추긴다고 총독부에서 그 다음해부터는 京城高商과의 야구 정기전을 중단시켰어요』

─은사들은 어떤 분들이었습니까.

『한글은 최현배 선생님, 한문은 정인보 선생님에게 배웠습니다. 학장은 언더우드 2世, 한국 이름으로는 원한경 박사였는데, 그 분은 영어강독을 가르쳤습니다. 그 시간엔 영어만 사용해야 했습니다』

─그런 수업을 들었으니 영어 잘하시겠네요.

『그저 免無識(면무식) 정도예요』

─학창 시절의 낭만 같은 건 없습니까.

『2학년 때인데 학교 측에다 수학여행을 보내 달라고 졸라도 허락을 하지 않아요. 그때 제가 반장이었는데, 학교에 알리지 않은 채 開城으로 놀러갔다가 사흘 만에 돌아왔지요. 아, 그랬더니 백낙준 선생님이 우리를 불러 야단을 치셨어요. 주모자인 나는 속절없이 징계를 받게 생겼어요.

부학장이던 유억겸 선생님에게 불려갔어요. 「자네, 수업을 거부하고 단체로 여행한 것을 옳다고 보느냐, 그르다고 보느냐」라고 물으십디다. 「잘못되었습니다」라고 답했더니 「그러면 시말서 써」 라고만 말씀하십디다. 그리고는 더 이상 문제삼지 않으셨어요』

─유억겸 선생님은 器局(기국)이 큰 분이셨군요.

『유억겸 선생님은 월급으로 300~400원은 받으셨을 터인데 7~8원짜리 허름한 양복을 입으셨어요. 그 대신에 선생님은 자신의 월급을 쪼개어 가난한 운동부 학생들을 자주 먹였습니다. 운동부 예산 같은 것이 따로 없었던 시절이었거든요. 그때 선생님들은 지식을 파는 월급쟁이가 아니라 민족의 미래를 생각하고 청년들을 키우는 志士(지사)였습니다』

─최근에 언더우드 4世가 한국을 떠났죠.

『언더우드家는 1世가 연희전문을 설립한 이래 4世에 이르기까지 학교에 헌신하여 오늘의 연세대학교로 키웠습니다. 언더우드 2世의 부인은 6·25 때 피란을 못해 공산당에게 학살을 당했습니다. 그 부인은 남편이 학교 일에 전념할 수 있도록 몸소 밭을 갈아 감자를 심고, 양을 키워 양젖을 짜내 생활을 꾸려갈 만큼 알뜰한 분이었어요. 요즘 사람들은 언더우드家에 대한 고마움을 잘 모르는 것 같습니다. 그러면 背恩忘德(배은망덕)이에요』




「흙」의 주인공 허숭이 되고 싶었던 수석 졸업생

1936년 봄, 宋邦鏞은 연희전문을 1등으로 졸업했다. 졸업식에서 졸업생을 대표하여 답사를 읽었다. 당시만 해도 각 대학 수석 졸업생의 프로필은 신문에 제법 비중 있는 기사로 보도되었고, 여러 직장의 스카우트 대상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시골로 내려갔다.

『친구들은 내가 시골로 간다니까 말리더군요. 하지만 나는 「브나르드(농촌계몽)」 운동을 하려 했어요. 이광수의 소설 「흙」의 주인공 허숭 같은 사람이 되고 싶었던 겁니다』

─당시 농촌의 형편은 어떻던가요.

『저녁 늦게까지 남의 논밭에서 일하고 자기 집에 돌아와 가족들을 위해 보리밥이라도 짓는 부인네는 그래도 행복한 사람이었어요. 그때는 먹고사는 것이 전부였던 시대였거든요. 참 못 먹고 헐벗었던 시절이었어요.

비 오는 어느 날의 얘기입니다. 급히 의논할 일이 있어 이웃 사람에게 만나자는 연통을 놓았는데, 그가 끝내 나타나질 않아요. 이상한 예감이 들어 우산을 받쳐들고 그 집에 가서야 그가 바깥 나들이를 할 수 없었던 형편을 알게 된 거요. 단벌 바지를 빨아 널어 놓았으니 입고 나갈 옷이 없었던 겁니다』

─일찍이 茶山 丁若鏞(다산 정약용)은, 농업은 공업보다 10배, 상업보다 100배 힘든 일이라고 했는데, 지주집 도련님이 경험 없는 농삿일을 할 만합디까.

『지게 지고, 발 벗고 논에 들어가니까 한동안 주윗사람들이 「어찌 저런당가. 아버지 눈에 들려고 그러는 거 아녀. 재산 거덜낼 거여」라고 합디다. 어떻든 나름으론 열심히 했습니다. 밤에는 야학을 열어 인동의 농촌아이들을 모아 한글을 가르쳤습니다』

그는 스물다섯 살 때 세 살 아래의 李福釗(이복쇠) 처녀와 결혼했다.

『동덕학교를 나와 서울에서 유치원 선생을 했는데, 마음이 고와서 아내로 맞았습니다. 3년 전에 세상을 떴습니다』

그의 침실 문갑 위엔 사별한 부인의 사진 액자가 놓여 있다. 노년에 찍은 사진이지만, 미인이다. 그런데 사진 액자 뒤에 뚜껑을 덮은 항아리 하나가 보인다.

─저건 뭡니까.

『아내의 유골함입니다. 외출할 때는 「여보, 나 다녀오겠소」 하고, 귀가하면 「여보, 나 다녀왔소」 라고 고합니다. 65년을 함께 살아온 사람 아닙니까. (내가 죽으면) 내 유골도 저 항아리에 함께 담아 납골당에 보내라고 (아들들에게) 일러두었습니다』

아내의 유골과 함께하는 생활, 곰곰 생각해 보면 참으로 아내에 대한 끝없는 사랑이다. 화제를 돌렸다.

─농장 경영으로 재산은 늘렸습니까.

『아니오. 그때 우리 집에서 벼 1000섬을 (수확)했는데, 할아버지가 分財(분재)를 하지 않고 별세하셨어요. 내가 아버지에게 「이러면 안 됩니다」고 건의해서 삼촌들과 우리 8남매의 몫을 나누었습니다. 그러고 나니 아버지와 내 몫을 합쳐 400석 쯤 되었습니다. 내가 아버지를 돌보기로 했습니다. 집안의 이런저런 뒤치다꺼리를 하고 나니 300석 정도로 줄어들었습니다』

─차남인데도 家督(가독)을 맡은 셈이군요.

『나보다 일곱 살 위인 형님(宋始鏞)이 있었는데, ML(마르크스·레닌)黨 하다가 일경에 검거되어 1년쯤 징역을 살았습니다. 모든 것이 뜻대로 되지 않자 낙담한 끝에 난봉까지 좀 부리다가 내가 장가 든 해에 병사하셨어요. 지금 국립묘지 독립유공자 묘역에 묻혀 있어요』


『朝鮮·東亞日報는 민족의 교과서』

─서울생활을 했던 인텔리가 농촌생활을 하니 답답하진 않으시던가요.

『매일 집안일 하는 사람에게 자전거 타고 (김제) 읍내에 있는 조선·동아일보 지국에 가서 신문을 받아 오게 했어요. 당시 조선·동아일보는 우리들의 유일한 情報源(정보원)인 동시에 교과서였습니다. 사랑방에 조선·동아를 놔두면 동네 사람들이 와서 돌려가며 읽었죠』

─요즘 서울의 「홍위병」들은 걸핏하면 日帝 때 조선·동아가 親日을 했다고 성토하고 있는데요.

『나는 조선·동아가 親日신문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한 번도 없었어요. 나는 일제에 저항한 사람입니다. 나 같은 사람의 눈으로도 조선·동아는 우리를 배신한 신문이 아니라 확실한 민족지였습니다』

─조선·동아도 천황의 생일에 특집기사를 싣는 등 일제에 타협적인 모습을 보이지 않았습니까.

『물론 민족지라고 해서 盡善盡美(진선진미)했던 것 아닙니다. 그러나 일제 치하에서 신문을 내려면 어쩔 수 없었던 일이었습니다. 요즘 들어 「그러면 신문을 발행하지 않았으면 될 것 아니냐」는 선동가들의 억지가 철부지들에게는 먹혀들고 있는 것 같습니다.

나 같은 사람은 전깃불도 들어오지 않는 마을에서 호롱불 밑에 살았어요. 신문이 없었다면 갑갑해서 견딜 수 없었을 겁니다. 그때 조선·동아는 우리 민족에게 한 줄기 빛이었습니다. 신문의 논조는 전체의 흐름으로 평가해야 해요.

우리가 어디 「아」 다르고 「어」 다르다는 것을 모르고 신문을 봅니까? 일제 치하에서 신문을 발행하면서 「덴노 헤이카(천황 폐하)」 운운하거나 日章旗(일장기) 도안을 紙面에 집어넣었다고 해서 親日로 몰아칠 수는 없는 것이에요. 그러지 않으려면 해외로 망명할 수밖에 없잖았어요. 그때 우리가 모두 한반도를 떠날 형편도 아니었고, 또 모두 떠나서도 안 되는 것 아닙니까. 그렇다면 被식민지의 현실을 딛고 서서 민족의 계발과 진운에 보탬이 된 조선·동아일보의 역할은 당연히 평가되어야 하는 겁니다』


「조선의 얼」

─감명받았던 기사는 어떤 것이었습니까.

『내가 근 70년 전의 동아일보 체육부 기자 「이길용」이란 이름을 어떻게 아직도 기억하겠습니까?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 우승한 손기정 선수의 사진을 보도하면서 이길용 기자는 체육복 가슴께에 붙은 일장기를 지워버리지 않았습니까?

그때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따지고 보면 신문 제작상 그런 일이 어찌 이길용 등 몇몇의 공모만으로 가능했던 일입니까. 적어도 편집국·공무국 사원 모두의 공모였던 것입니다』

─일제下 민족지의 역할 가운데 가장 의미 있었던 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1930년대에 조선일보가 전개한 한글보급운동은 일본어 常用정책에 저항한 사실상의 독립운동인 것입니다. 특히, 조선일보는 鄭寅普 선생님이 기고한 「조선의 얼」을 근 2년간 매주 월·수·금 세 번씩 실었습니다. 「조선의 얼」은 우리 민족사를 맥맥히 이어온 선열들의 꿋꿋한 정신과 지혜를 담은 名文(명문)이었어요.

우리가 「조선의 얼」을 보고 얼마나 감동을 받고 용기를 냈는지, 요즘 사람들은 모를 거예요. 이런 조선일보가 어째서 親日신문입니까. 그뿐만 아닙니다. 조선일보는 많은 독립지사·문필가·지식인들에게 삶의 터전이 되었습니다. 광복 이후 우리나라를 이끌어 간 각계의 지도자들 중에 조선일보 출신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제2대 국회의원에 무소속 출마

광복 이후에도 그는 계속 농사를 지었다. 그런 그가 1950년 5·30 선거(제2대 국회의원) 총선거에 무소속 후보로 출마한다. 왜 갑자기 국회의원이 되려고 했을까.

『당시 김제 갑구 출신 제헌의원이 韓民黨의 趙漢栢(조한백)씨였습니다. 趙의원이 귀향활동을 하면서 面 유지들을 모아놓고 농촌의 현안을 거론하는데, 영 맘에 들지 않더군요. 나는 그 당시만 해도 자본주의만으로는 우리나라의 후진성을 해결할 수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거든요. 그런 판에 야학에서 내게 글을 배운 제자들이 몰려와 자꾸 출마하라고 졸라요. 그래서 국회의원이 뭔지도 모르고 덜컹 입후보했던 겁니다』

─지주집 자제였으니까 선거자금 때문에 쪼들리지는 않으셨겠네요.

『그때는 집안 살림이 기울었어요. 농지개혁을 하는 바람에 정부 발행의 농지증권을 받고 논밭을 넘겼거든요. 사촌 하나가 아편을 하면서 일을 저질러 놓아 그 뒷수습하느라고 돈을 쓰고, 식산은행에서 영농자금으로 빌려 쓴 빚을 갚고 나니 돈이 별로 없었습니다. 자전거 타고 다니며 유권자들 찾아다니며 유세를 했습니다』

─연설을 잘 하셨나보죠.

『목청만은 괜찮은 편이었어요. 잘 쉬지도 않구. 나는 미션계 사립학교 출신이어서 일찌감치 평등사상을 머리 속에 지고 다녔던 사람이에요. 평소에도 머슴, 갖바치, 무당 같은 사람들에게도 하대를 하지 않았거든요. 이런 하층계급에서 「서방님을 국회의원시켜야 한다」고 입소문을 내는 바람에 조직은 없어도 인기가 좋았어요』

─당시 호남은 韓民黨의 아성이었는데, 선생님 같은 성향의 후보는 탄압대상이 아니었습니까.

『전북도경 사찰과장 羅모라는 사람이 밑바닥에서 바람을 일으키는 나를 공산주의자로 몰아 구속영장을 청구했어요. 당시 전주지검의 박천일·주은하 검사가 나의 행적을 좀 알고 있었어요. 이분들이 「宋邦鏞이는 그런 사람 아니다. 만약 공산당이라면 선거가 끝난 뒤에 구속해도 늦지 않다」면서 은근히 나를 비호해 주었어요. 그럼에도 경찰은 내 선거사무장을 비롯한 선거운동원 182명을 유치장에 집어넣고, 「宋邦鏞은 이미 후보를 사퇴했다」고 소문을 내는 거예요. 오기가 나서 더 부지런히 자전거를 타고 다니며 「후보 사퇴하지 않았다」고 외친 겁니다』


『뿔 가진 놈에겐 날카로운 이빨은 주지 않는다』

─국회의원, 그거 아무나 하는 것 아니군요. 논두렁 정기라도 타고 나야 금배지를 단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당선 후 서울로 올라가려고 아버지께 인사를 드리니 나를 꿇어앉혀 놓고 「與齒(여치)에 不與角(불여각)이요, 與角(여각)에 不與齒(불여치)」라는 말을 아느냐고 물으십디다. 이 말이 뭐냐 하면 「하늘(조물주)이 날카로운 이빨을 가진 동물에겐 뿔을 주지 않고, 뿔 가진 놈에겐 이빨을 주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아버지는 「요즘 보면 명예와 富, 두 가지를 다 가지려고 아귀다툼을 벌이는데, 너는 돈 벌 생각은 아예 하지 말아라. 내가 노력해서 네게 좀 보태 주겠다. 국회의원은 명예직이다」라고 훈계하십디다』

─서른일곱 살의 나이에 국회의원이 된 아들이 행여 으스댈까 봐 선친께서 걱정을 하신 거군요.

『그때 국회의사당이 지금은 헐려 버린 옛 조선총독부 건물이었는데, 당선자 등록을 하려고 내가 거그를 갔더니 국회사무처 직원이 흘끔 보더니만 「여기 아무나 오는 곳 아니오」 하는 거여. 「등록하러 왔다」니까 「본인이 직접 와야 한다」고 해요. 「내가 본인이다」고 해도 픽 웃으며 상대도 해주지 않아요.

사실은 그때 내 몰골이 말이 아니었거든. 얼굴은 새카맣게 볕에 탄데다, 12년 전 결혼할 때 마련한 구닥다리 양복을 입었거든요. 그것도 선거운동 하러 다니느라고 엉덩이 부분이 해져서 비슷한 색깔의 천을 대어 미싱으로 둥글둥글 박은 바지였어요.

약간의 승강이를 하고 있는데, 국회사무처 차장 정운근씨가 나를 알아보고 달려나와 「영감님을 몰라봐서 죄송하다」고 사과합디다』


6·25 渡江

─새 양복 마련이 시급하셨겠네요.

『2代 국회가 개원되고 나서 이틀쯤 지나서 일요일인데, 맞춤양복을 찾으러 명동엘 나갔어요. 그날이 바로 6·25가 터진 날입니다. 지프를 탄 군인이 마이크를 붙잡고 「북한 괴뢰군이 남침했다」면서 「휴가·외출 장병들은 빨리 귀대하라」고 외칩디다.

다음날, 申性模(신성모) 국방장관과 蔡秉德 (채병덕) 참모총장이 국회에 출석하여 뭐라고 전황을 보고하는데, 요령부득이라 영 신통치 않아요. 정부와 국군을 믿어 달라고 해서 그런가 했는데, 국회엔 알리지 않고 정부만 먼저 피란을 가버린 거예요』

─선생님은 어떻게 피란을 했습니까.

『남침 사흘 만에 인민군이 서울에 들어오지 않았습니까. 6월28일 새벽에 이미 한강다리도 끊어졌습니다. 그날, 서대문 로터리 근방에 있던 처형집으로 피신했다가 헤엄이라도 쳐서 한강을 건널 요량으로 처가가 있던 마포로 내려갔어요.

그날 오후 3시 무렵에 처남과 함께 강 폭이 좁은 도하지점을 찾으려고 강변으로 향하는데, 처남의 아들이 급히 달려와서 「나루 아저씨가 배를 띄워 준대요」라고 외쳐요. 처가에서 아는 船頭에게 부탁했더니 「국회의원이 어찌 敵 치하에 숨어 지낼 수 있겠느냐」며 쾌히 「데려다 드리겠다」고 하더래요.

얼른 피란 보따리 하나를 챙겨 들고 나루터로 나갔어요. 나룻배에 이제 막 올랐는데 어디선가 피란민들이 우르르 달려나와 마구 배 안으로 뛰어들어와요. 그러니 배가 움직이질 못해.

船頭가 「(대안에) 갔다가 이내 되돌아와 실어 주겠다」고 설득하여 절반쯤 내리게 한 뒤에야 노를 저었어요. 그런데 서울 수복 후에 들은 얘기지만, 그날 오전에 인민군들이 강변까지 진출해 있다가 점심을 먹으려고 인근 학교 운동장으로 갔었대요. 나는 바로 그 점심시간에 요행히 나룻배를 탄 겁니다』

─渡江 후에도 고생 많이 하셨죠.

『영등포에서 근 100리 길을 걸어서 수원역에 도착, 거기서 겨우 석탄 실은 화물열차를 타고 대전까지 내려갔어요. 대전에 국회의원이 모여 있다는 곳을 찾아갔는데, 경비를 서던 경찰관이 「여기는 국회의원만 들어가는 곳」이라면서 못 들어가게 해요.

그때 나는 국회의원 신분증을 서대문 집 천장에다 감춰 뒀는데, 창졸간에 그냥 피란길에 올랐거든요. 「찡(증명서)」이 없어 난감하던 차에 마침 曺奉岩(조봉암) 국회부의장이 바깥으로 나오다 나를 보고 달려왔어요. 「아이구! 宋의원, 나 걱정 많이 했어. 살아왔구먼. 저녁부터 먹어야지」라며 반색을 해요. 竹山(죽산: 조봉암씨의 아호)과 나는 매우 다정한 사이였거든요』


生死의 갈림길

─대전도 오래 버틸 수 없어 곧 남하할 수밖에 없었죠.

『전주로 내려갔어요. 민심이 흉흉하니까 전북도에서 나더러 민심수습을 위해 유세를 해달라고 부탁을 해. 국회의원으로서 해야 할 일이긴 하지만, 당장 나 자신도 어찌해야 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우리 국군을 믿고 동요하지 말라」는 말을 하기 어려운 것 아닙니까. 고민스러웠어요.

그런 판에 인민군은 이리까지 밀고 내려왔다는 소식이 들려 왔어요. 김제 을구 출신 최윤호 의원, 부안 출신 최병규 의원과 함께 김제읍으로 내려갔습니다. 읍내에서 약국을 열었던 최윤호 의원 댁에서 하루밤을 지낸 후 셋이서 봉남면에 있는 내 집에서 1박 하고 부산으로 내려가기로 했어요.

그런데 다음날 아침이 되니 최윤호 의원이 「이제 가면 언제 되돌아올지 모르는데, 20리 밖에 계시는 부모님께 인사도 드리지 않고 떠나면 되겠느냐」면서 돌아서는 거예요. 그래서 최병규 의원과 둘이서만 길을 떠나는데, 뒤에서 누가 「형님, 형님」 하고 부릅디다.

돌아보니 최병규 의원의 외사촌 동생이었어요. 그는 「외갓집도 못 본 체하고 그냥 지나치실 겁니까」라고 하더군요. 최병규 의원이 「잠시 둘러보고 뒤따라가겠다」며 처지더군요. 결국, 두 의원은 피란을 하지 못하고 敵치하에서 좌익들에게 붙잡혀 피살되었습니다』

─삶과 죽음의 갈림길이었군요.

『나는 30리 길을 걸어 봉남면 고향집에 돌아와서 일본 방송을 들으니 전황이 절망적이에요. 서둘러 집을 나서 밤길을 걷고 기차도 타고 해서 광주로 내려갔어요. 광주에서 다시 기차를 타고 진주로 가는데, 보성의 오르막 철로에서 기차가 힘이 달려 자꾸 뒷걸음을 치는 겁니다.

기차가 용을 써서 겨우 터널을 지나는데, 화통에서 뜨거운 불꽃이 올라 확 번지는 바람에 기차 지붕 위에 타고 있던 피란민들이 화상을 입은 채 무더기로 땅바닥으로 떨어져 죽는 참사가 빚어지더라구요』

─생지옥이었군요.

『진주 조금 못 가서 기차가 힘에 부쳐 꾸물거리고 있는데, 마침 화물차를 타고 가던 옥구 출신 지연해 의원을 만났습니다. 피란국회가 대구로 내려가 있다고 해서 그리로 간다기에 동승했습니다. 삼랑진 못 미쳐서 검문소를 지나는데, 군인 하나가 다가서더니만 「누구냐」고 물어 「국회의원」이라고 했더니 「국회의원 놈들 다 쏘아 죽여야 한다」고 대들어요. 「국회에서 국방비를 대폭 삭감하여 나라가 이런 꼴을 당한다」고 흥분하는 거예요. 池의원, 성질 대단했던 분입니다. 「이놈들, 반란군 아니냐」고 호통을 치더군요.

국민의 대표도 그를 보호해 주는 정부가 없을 때 얼마나 비참한 존재인지를 실감했습니다. 이럭저럭 우리는 삼랑진을 거쳐 대구로 갔습니다. 그러나 대구도 위험해 피란국회는 다시 부산으로 내려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釜山 정치파동 때의 도피생활

─피란수도 부산에서 벌어진 정치파동은 심각했죠. 전방에서는 敵과 싸우고 있는 상황에서 왜 그런 권력투쟁이 벌어진 것입니까.

『야당은 李承晩 대통령 가지고는 안 되겠다고 해서 내각제 개헌을 추진하고,李承晩 지지세력은 대통령 직선제(당시 헌법에서는 대통령을 국회에서 선출하도록 했다)로 개헌하려고 야당을 탄압하는 바람에 빚어진 정치파동이었어요.

李대통령은 직선제 개헌을 추진하기 위해 張澤相(장택상) 국회부의장을 국무총리로 임명, 張澤相이 이끌던 「신라회」 소속 국회의원 20여 명을 빼갔습니다. 그러고도 勢가 불리하니까 「국제공산당의 비밀정치공작사건」을 조작해 정헌주·서범석 등 의원 8명을 잡아 가두었어요』

1952년 5월25일, 李承晩 대통령은 「잔여공비 소탕」이란 이유를 내세워 경남·전북 지역에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5월26일 정오에는 47명이 탄 국회 전용 버스를 헌병들이 포위, 견인차로 헌병대에 끌고 가는 등 공포 분위기를 조성했다.

─그때 선생님은 고생 많이 하셨죠.

『나는 무소속 의원이지만, 민국당의 내각제 개헌안에 서명했기 때문에 구속 대상이었어요. 太完善(태완선) 의원과 부산국제시장 2공구 골목 안의 허름한 2층집에 숨어서 지냈습니다. 그곳이 해군 중위 太씨의 집이었는데, 그 太중위의 어린 딸이 나중에 유명 배우가 된 太賢實이에요』

─현역 의원이 파렴치범처럼 숨어 지냈으니 분통이 터졌겠군요.

『당장엔 다른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태현실의 부모 집도 위험하다고 해서 이번에는 태봉선이란 분의 집으로 거처를 옮겼어요』

─하필이면 왜 太씨 성을 가진 분들의 집만 피란처로 삼았습니까.

『아, 太씨는 희성 아닙니까. 태완선 의원은 문중을 빛낸 인물이라고 해서 문중 사람들의 보호를 받은 겁니다. 나는 원래 太의원과 가깝게 지냈으니 따라간 것이구요. 숨어 지내는 동료 의원들과 연락을 하면서 서로의 안부를 묻고 전하는 것이 고작이었죠. 曺奉岩 국회부의장의 방을 거점으로 해서 尹吉重씨가 필요한 정보와 안부를 중계하는 역할을 맡았어요』

─太씨 문중에 얼마 동안 신세를 지셨습니까.

『太씨 집 두 곳에서 20여 일간을 숨어 지냈는데, 또 다른 피신처로 옮겨야 할 형편이었습니다. 張勉(장면) 박사의 측근인 경향신문 사장 한창우씨의 도움으로 신부복을 빌려 입고 신부합숙소에 잠입했어요. 신부합숙소에서 지내는 것이 몹시 불편했는데, 뜻밖의 호강도 누렸어요. 그건 밖에서는 구경도 못 했던 와인이 무진장 많아 심심찮게 마실 수 있었거든요』


발췌 개헌안 통과

당시 경찰은 출석을 거부하는 야당 의원들을 일일이 연행하고 외출마저 통제했다. 의사당은 무장경관과 헌병에 의해 포위당한 상황이었으며, 국회의원은 사실상의 감금 상태였다.

─은신처에 잘 숨어 있다가 그런 의사당에 뭣하러 출석하셨습니까.

『張勉 박사로부터 「모든 것이 풀린 듯하니 국회로 나오라」는 전갈이 왔어요. 반갑게 생각하고 국회로 갔는데, 결국은 발췌개헌안이 통과되는 데 들러리가 되고 말았어요. 張박사가 정보를 잘못 받은 거지요. 張박사는 유엔군이 李承晩 대통령의 독재에 제동을 걸어줄 것이라고 믿는 것같았어요』

발췌개헌안은 국회의원과 국무총리를 겸하고 있던 張澤相이 마련한 절충 개헌안이었다. 정부와 야당이 낸 정반대의 두 개헌안에서 필요한 부분을 묶었다고 하여 「拔萃案(발췌안)」이란 이름은 붙었지만, 그 핵심은 대통령 직선제였다.

발췌개헌안은 1952년 7월4일 밤 9시 기립표결 결과 찬성 163표, 기권 3표로 통과되었다. 이로써 국회에서의 간선으로는 再選이 불가능했던 李承晩 대통령에게 계속 집권의 길이 열리게 되었다.

─발췌개헌안에 대한 반대 진영의 전열이 그렇게 쉽게 무너진 까닭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李承晩의 카리스마와 역량을 뛰어넘는 지도자를 찾기 어렵다는 현실적 한계도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선생님은 왜 反이승만 노선을 견지했습니까. 「강을 건너면서 말을 갈아타지 않는다」는 말도 있는데….

『그렇다고 李承晩 정권의 독주를 방관할 수 없는 것 아닙니까. 독재정권을 견제하는 것은 국회의원의 존재 이유입니다』


暗號투표공작 폭로

宋邦鏞은 1954년 제3代 총선거(5·20선거) 때도 무소속으로 김제 갑구에서 출마했다. 그러나 李정권의 조직적인 야당계 후보 탄압과 부정선거로 여당인 자유당이 절대다수 의석을 확보했다. 그런 가운데서도 그는 再選의 고지를 넘었다.

『3代 국회의원 총선거 기간에 나의 선거운동원을 무려 212명이나 유치장에 집어넣습디다. 反이승만 노선을 걸었다고 보복을 당한 것입니다』

자유당은 3代 국회 개원과 더불어 李承晩 대통령의 종신집권을 위한 개헌 작업에 들어갔다. 자유당이 마련한 개헌안의 골자는 초대 대통령에 한하여 중임 제한을 철폐하는 것이었다. 이 개헌안은 李起鵬(이기붕) 외 135명의 의원 서명으로 1954년 9월6일 국회에 제출되었다. 표결을 앞두고 자유당과 정부는 무소속 의원의 매수와 官製민의까지 동원하여 반대 의원들의 압박했다.

─선생님은 표결 직전에 자유당의 암호투표 공작을 폭로하셨죠.

『민국당 소속 李哲承(이철승) 의원이 내게 와서 「宋선배, 자유당에서 암호투표를 하려는데 폭로해 줄 수 없느냐」고 부탁하면서 「무소속인 宋선배가 폭로해야 효과가 크다」고 해요.

그래서 「증거물이 있느냐」 고 물으니까 「증거물은 柳珍山 의원이 갖고 있다」고 합디다. 柳珍山 의원을 만났더니 「무소속 金모 의원을 찾아 보라」고 해요. 金의원을 찾아갔더니 보복이 두려운지 입을 닫아 버려요. 거듭 설득을 했더니 그가 암호 기입할 부분을 지정한 모의 투표용지를 내놓으면서 「절대로 출처를 밝히지 말라」는 거예요. 내가 이걸 들고 나가 의사진행 발언을 통해 흑막을 폭로한 겁니다』

─자유당은 왜 「암호투표」를 하려 했습니까.

『자유당이 개헌안을 통과시키려고 무소속 의원들을 대거 매수했는데, 이탈 표의 방지대책으로 그런 무리수를 강행한 것입니다』

1954년 11월27일 202명이 개헌안에 대한 찬반투표에 들어갔다. 개표 결과 찬성 135명, 반대 60표, 기권 6표, 무효 1표로 부결되었다. 재석 203명의 3분의 2선에서 1표가 모자라 자유당 소속 최순주 국회부의장은 부결을 선포했다.

─그러다 「四捨五入(사사오입)」이라는 기상천외의 수학이 등장했죠.

『부결 선포 후 자유당 간부들은 즉각 철야 대책회의를 열어 203명의 3분의 2는 135.333…이라는 데 착안하여 0.333…은 1인의 인간이 될 수 없으므로 四捨五入해야 한다는 억지의 논리를 세운 거예요. 203명의 3분의 2는 135이 타당하다는 겁니다. 11월29일 국회 본회의에서 李起鵬 의장이 부결 선포를 번복한 뒤 「통과되었다」고 방망이를 친 겁니다』


恩師 최현배의 칭찬

사사오입 개헌으로 憲政의 위기를 느낀 민국당과 야당 성향의 무소속 의원들은 對與투쟁을 강화하기 위해 새로운 원내교섭단체 호헌동지회를 결성했다. 이어 호헌동지회가 중심이 되어 민주당이 결성된다. 宋邦鏞 의원은 호헌동지회의 총무부장을 맡았다.

─선생님은 호헌동지회의 실무총책을 맡은 분인데, 왜 민주당에 입당하지 않았습니까.

『竹山(조봉암의 아호)은 「지팡이를 짚고서라도 민주당에 참여하겠다」고 했지만, 雲庭(운정: 장면의 아호)과 維石(유석: 조병옥의 아호)은 「竹山과는 절대로 당을 함께 할 수 없다」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竹山이 進步黨(진보당)을 창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대동단합을 못 한 민주당에 나는 환멸을 느껴 무소속으로 남았습니다』

─1959년 여름, 竹山은 간첩 梁明山(양명산)에게서 정치자금을 받았다는 누명을 쓰고 사형을 당했습니다만.

『竹山은 일제 때 공산당을 하다가 해방정국에서 朴憲永(박헌영)의 남로당을 비판하고 공산주의와 결별한 인물입니다. 초대 농림부 장관으로 입각, 李承晩 정부의 토지개혁을 성공적으로 수행했어요. 梁明山은 광복 이후 남북 간을 오가며 밀무역도 하던 사업가였어요.

당시 우리 정보기관에서도 梁明山을 통해 북한 관련 첩보를 입수했다고 합디다. 竹山과 梁明山은 일제 때부터 알고 지내는 사이였어요. 따라서 설사 梁明山에게서 정치자금을 좀 얻어 썼다고 하더라도 竹山을 간첩으로 몰아 죽일 수는 없는 겁니다. 그것은 정치보복이며 사법살인이었습니다』

─인간 曺奉岩은 어떤 인물이었습니까.

『돈이 있으면 집에 가지고 들어가지 못하는 사람이었어요. 정 많고 친구 좋아했어요. 윤길중·신도성·김수선, 그리고 내가 그의 단골 파트너였습니다. 「배뱅이」 노래 잘 불렀어요. 일제 特高에게서 손톱 밑을 대침으로 찌르는 고문을 받아 손가락이 썩어 문드러져 악수할 때는 상대방에게 자기 손을 맡겨 버렸어요. 자기는 상대방의 손을 쥘 수 없으니까…』

─그의 사상은 어떠했습니까.

『공산주의는 안 되는 사상이라고 하대요. 人性에 맞지 않다는 겁니다』

─선생님은 그 유명한 「李박사」의 고집을 꺾으셨죠.

『어느 날, 李承晩 대통령이 뜬금없이 평지풍파를 일으키더군요. 「현행 한글맞춤법이 너무 어려우니 소리 나는 대로 표기하도록 하라」고 이선근 문교부 장관에게 지시한 겁니다. 미국 생활을 오래한 탓이겠지만, 李박사에게는 구한말式의 한글 표기가 편리했던 모양이었어요. 아, 그게 말이나 되는 겁니까. 구한말 이래 한글학자들이 독립운동하는 심정으로 발전시켜 온 한글 아닙니까.

내가 연전 문과에서 외솔 최현배 선생님에게서 한글을 배운 사람 아닙니까. 그냥 넘어갈 수 없었거든요. 對정부질문을 통해 그 부당성을 조목조목 지적했더니 여론이 확 돌아요. 당시 최고의 시사월간지 「사상계」가 내 연설 원고 全文을 실었어요. 결국 李박사가 고집을 꺾고 한글표기 간소화 방침을 철회합디다. 최현배 선생님이 나를 불러서 「옳은 일 했다」고 칭찬을 많이 해주십디다』

─국가지도자 李承晩을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李박사가 下野하여 梨花莊(이화장)에 물러나 있을 때의 일입니다. 그때 自由中國(자유중국)의 蔣介石(장개석) 총통이 위로의 편지를 보냈습니다. 李박사는 이런 답장을 썼습니다.

「각하, 나를 왜 위로하십니까. 우리나라에는 불의를 보고 항거하는 100만 학도가 있는데…」

대통령이 이쯤 돼야 하는 것 아닙니까』


정계 현실에 절망

宋邦鏞은 제4代 총선 때 김제 갑구로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4·19 학생의거로 1960년 4월26일 李承晩 대통령이 하야했다. 宋邦鏞은 그해 여름 초대 참의원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왜 하필 참의원을 하려 하셨죠.

『4·19 후에 제5代 총선거에 입후보하려고 김제로 내려갔는데, 과거에 「아나키스트(무정부주의)」 하던 선배가 나더러 이번에는 자기가 나서겠다며 지역구를 양보하라고 해요. 그 양반과 내가 함께 출마하면 표가 갈라져 둘 다 떨어지겠더라구요. 그래서 전북 전체에서 6명을 뽑는 참의원선거에 출마한 거예요』

─제2공화국 때는 데모가 심했죠.

『일본 신문에서는 한국의 사회혼란을 빚대어 「아케데모 구레데모 데모크라시…」(날이 새도 저물어도 데모놀음)이라고 썼어요. 현석호·김영선·태완선씨 등 민주당 정권의 實勢 각료들을 만나 「쿠데타 소문 있던데…」라고 물으면 「에이, 그런 걱정 하덜 말어」라고 합디다』

그러나 張勉 정부의 집권 10개월도 되지 않아 5·16 쿠데타(1961년)가 일어났다. 제2공화국은 붕괴되고 군정이 시행되었다.

1963년 「舊정치인」의 정치활동이 허용되면서 민주당 舊派는 民政黨, 민주당 新派는 민주당을 창당했다. 야당이 분열하면 선거에서 군정세력을 이기기 어려울 것으로 예견되었다. 이에 따라 재야 정치세력의 단일 정당으로서 「국민의 당」 창당이 추진되었다.

이 해 8월1일 「국민의 당」 창당발기인대회가 개최되어 발기인 63人이 선정되고, 김병노·허정·이범석이 공동대표최고위원으로 선출되었다. 宋邦鏞은 발기인의 1인으로서 조직위원장을 맡았다.

─참여한 인물의 면면을 보면 「국민의 당」은 지명도가 높은 「舊정치인」들이 총망라된 정당이었습니다. 그런데 실패한 까닭은 무엇입니까.

『尹潽善(윤보선)과 許政(허정)씨가 대통령후보 자리를 놓고 다툰 때문입니다. 결국 윤보선系를 중심으로 한 民政黨 주류들과 민주당 정통파들의 이탈로 「국민의 당」은 실세화되지 못했습니다. 「정계 중진」이라는 분들이 심지어 1개 지역구의 공천문제로 서로 대립하다가 당을 깨는 상황에 나는 절망했어요. 그래서 잠시 복귀했던 정계에서 다시 물러선 겁니다』


『宋邦鏞 데려오지 못하면 당신도 그만두소』

정계를 은퇴한 宋邦鏞씨에게 김현철 국무총리가 『정부로 들어오소』라고 권유했다. 엄민영 駐日대사도 宋邦鏞씨에게 저녁을 내면서 『朴대통령이 같이 일하자고 하더라』는 뜻을 전했다고 한다. 그는 거절했다. 그런 그의 마음을 돌린 사람은 당시 경제기획원 장관을 맡고 있던 太完善씨였다.

『太完善씨와 나는 부산 정치파동 때 한 방에서 은신했던 동지 아닙니까. 당시 내가 고려大 앞 제기동에서 살았는데, 그의 집도 이웃에 있어 서로 왔다갔다 했어요. 하루는 그가 한잔 걸치고 귀가하면서 먼저 우리 집에 들러 이런 엄살을 부려요. 朴대통령이 자기더러 「宋邦鏞이를 데려오지 못하면 당신도 그만두소」라고 하더라는 겁니다.

결국, 며칠 후 내가 경제과학심의위원회 상임위원 발령장을 받으러 청와대로 올라갔습니다. 그때 朴대통령은 JP와 함께 있다가 내가 왔다는 전갈을 받고 현관까지 달려나와 「협조해 주셔서 감사합니다」고 해요. 이게 인간 朴正熙이에요』

─경제과학심의위원회 무슨 일을 하는 기구였습니까.

『경제와 과학의 발전을 위해 장기 계획을 세우는 헌법기관이었어요. 상임위원은 장관급이고, 非상임위원은 학계의 석학들이었습니다』

─선생님은 원래 경제통 아닙니까.

『원래 내가 시골에서 소 몰던 사람 아니오. 근데 2代 국회에 들어가니 뜻밖에도 재경委에 배치되었어. 재경委에는 오위영·이재형·이충환 등 쟁쟁한 실력파들이 소속되어 있었습니다.

나는 무식한 질문이나 하는 국회의원이 되기 싫어 「경제가 이런 거구나」 하고 깨달을 때까지 코피 흘려 가며 공부를 했어요. 그러다 보니 상임委 배정 때 재경위원회로만 보내더군요』

─국회의원을 하면서 정부를 비판하다가 막상 정부 기관에서 일해 보니 어떻습디까.

『좋은 경험 많이 했습니다. 외국에 여행하면서 견문도 넓혔습니다. 아르헨티나에서는 포퓰리즘 정치의 後果(후과)를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아르헨티나라면 1950년대만 해도 세계 5大 富國에 낀 나라였어요. 그런 나라가 페론의 집권으로 경제가 결딴났거든요』

─1970년대의 아르헨티나는 어떤 모습이었습니까.

『내가 駐아르헨티나 대사관 직원들에게 신세를 좀 져서 귀국에 앞서 저녁을 대접하겠다고 했어요. 대사관 직원 12명 등 우리 일행 17명이 「아사도」를 먹으러 갔죠. 「아사도」라는 것은 장충체육관만큼 큰 음식점 안의 여기저기에다 쇠고기를 통째로 걸어놓고 손님의 요청하는 부위를 떼내어 즉석에서 숯불로 조리를 해주는 요리입니다.

우리 일행 17명은 포도주까지 곁들여 포식했는데, 음식값이 미화로 환산하니 불과 13달러였어요. 그만큼 아르헨 화폐의 對달러 환율이 폭락해 있었던 거예요. 대중영합적인 경제정책을 쓰면 나라 망하는 것 금방입니다』


『당신은 시한폭탄 가지고 있는 것 같소』

─후보 시절의 盧武鉉 대통령이 헌정회를 방문했을 때 선생님께서 苦言을 하셨다면서요.

『내가 그때 盧武鉉 후보에게 「우리나라는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했기 때문에 이만큼이라도 나라 모양을 갖추게 된 것입니다. 나라를 계속 발전시키려면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를 떠나선 안 됩니다. 그런데 盧후보 당신은 시한폭탄을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盧대통령에게 그때 그 말을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싶습니다. 대한민국에서 폭탄이 터질 수는 없는 것입니다』

─盧武鉉 대통령은 왜 자꾸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훼손시키는 일에 적극적일까요.

『盧武鉉 대통령은 대한민국의 고마움을 알아야 합니다. 李承晩 대통령은 외국에 나갈 때 맥아더 장군이 보내주는 군용기를 탔습니다. 그때 나라 형편이 그랬어요. 요즘 盧武鉉 대통령은 당당하게 國籍機(국적기)를 타고 가 외국 원수들과 만나 頂上외교를 하고 있잖아요.

얼마 전 영국 왕실에서는 盧대통령을 위해 이례적인 환영행사를 베풀더군요. 영국 여왕과 함께 황금마차도 타고. 이건 인간 盧武鉉이 위대해서가 아니라 대한민국의 대통령이기 때문에 받은 환대였던 것입니다.

대한민국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독립한 나라 가운데 유일하게 경제발전과 민주화를 이룩한 나라입니다. 盧대통령은 대한민국의 고마움을 알아야 합니다. 나는 盧武鉉 대통령의 포퓰리즘을 싫어합니다. 선동정치는 결국 나라를 망치기 때문입니다』

宋옹은 현재 서울 마포구 마포동에 있는 43평짜리 아파트에서 외손자 林玄澤씨와 함께 산다. 5남매를 두었으나 큰아들과 막내딸은 죽고, 3남매는 미국·칠레에 산다. 외손자 林씨는 軍복무(공군 중위)를 마치고 현재 외국인 회사에 재직하고 있는 31세의 총각이다. 林씨에게 노년한 할아버지와 함께 사는 것이 불편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가정부가 일주일에 세 번 와서 일해 줍니다. 제가 할아버지를 돌보는 게 아니라 할아버지가 저를 돌보아 주십니다』

이 기사 작성을 위해 宋옹과 네 차례 만났다. 세 번은 인터뷰였고, 한 번은 제1공화국 시절에 국회 출입기자로 뛰었던 전직 정치부 기자들과 만나는 자리에 필자가 끼어든 것이었다. 공교롭게도 네 차례 다 필자는 宋옹과 반주를 곁들인 식사를 함께 했다. 그는 아직도 백세주 한 병 정도, 소주 반 병 정도 마셨지만, 자세가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그의 건강비결은 무엇일까.

그는 학창시절에 유도선수였고, 여든 살까지 테니스를 쳤다. 테니스는 「이제는 무리」라는 의사의 충고를 받고 그만 두었다고 한다.

『그 이후엔 하루에 7000보를 꼭 걷습니다. 목표를 채우지 못하면 집 안에서라도 빙빙 돌지요. 월·수·금요일엔 헌정회 사무실에 출근합니다. 출근하지 않는 날엔 독서를 하고 친구들이 찾아오면 어울려 바둑을 두기도 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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