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조선 기사

창간 25주년 기념 기획 연재 ① - 三星의 1등주의 速度경영 연구

李健熙의 天才經營으로 글로벌 一流 이룬「魔法」의 現場을 가다

글 정순태 기자  2005-04-09

  • 페이스북
  • 트위터
  • 카카오톡
  • 글자 크게
  • 글자 작게
李秉喆(이병철) 시대의 三星과 李健熙 시대의 三星은 質(질)과 量(양)에서 모두 변했다. 오늘의 三星은 이제 더 이상 국내 재계 1위의 자리를 다투는 기업집단이 아니다. 우선, 한 가지 숫자만 들어도 삼성은 한국의 唯一超强(유일초강) 그룹이다. 2004년, 삼성은 우리나라 直輸出(직수출)의 약 21%를 감당했다.

李秉喆 회장이 별세한 해인 1987년, 三星그룹의 매출액은 13조5000억원이었다. 그것이 李健熙 회장 취임 15년 후인 2002년에는 10배를 웃도는 141조원으로 증가했다.

稅前利益(세전이익)은 1987년의 1900억원에서 2002년의 14조2000억원으로 75배 급증했다. 同期대비 三星그룹의 주식 시가총액 역시 1조원에서 74조8000억원으로 75배 급증했다.

李秉喆 회장은 「돌다리도 두들겨 본다」는 신중 경영과 「온 세상이 다 썩어도 三星 내부에서만은 청결성을 유지, 반듯한 人材를 키운다」는 이념 아래 三星을 국내 제1의 名門 그룹으로 발전시켰다. 그러나 外形에서의 국내 선두자리는 밀어붙이기의 달인 鄭周永(정주영) 회장의 現代그룹에 내주고 말았다.

李秉喆 회장이 「人材第一」을 내세웠다면, 李健熙 회장은 「天才경영」을 외치며 天才의 확보를 독려해 왔다. 그는 天才를 활용한 「技術경영」·「速度경영」으로 三星을 「글로벌 일류기업」(2005년 삼성의 경영방침)의 반열에 성큼 올려놓았다.

특히 李健熙 체제 이후 三星전자의 기세는 눈부시다. 三星전자의 2004년의 경영성과를 보면 매출 57조6000억원에 영업이익 12조원, 순이익 10조8000억원(103억 달러). 세계적으로 純(순)이익 100억 달러를 돌파한 기업은 9개社(2003년 기준)뿐이다. 三星전자는 「100억 달러 클럽」에 가입하면서 세계 제8위의 超일류기업으로 變身(변신)했다.

세계를 향한 三星의 세찬 러시(Rush)…. 21세기의 한국인은 三星의 존재로 인해 지구촌의 골목(주변부)으로부터 벗어나 광장(중앙부)으로 진입하고 있다.

三星에 대한 認知度(인지도)도 무서운 속도로 상승곡선을 긋고 있다. 인터브랜드社가 발표한 2004년 三星전자의 브랜드 가치는 125억 달러로서, 20위를 차지한 SONY에 이어 세계 21위에 랭크되었다. 그동안 三星의 브랜드 가치 상승의 추세를 보면 2000년 52억 달러(43위)→2001년 64억 달러(42위)→2002년 83억 달러(34위)→2003년 108억 달러(25위)등이었다. 2010년까지는 세계 제1위 「코카콜라」의 現 브랜드 가치 700억 달러를 돌파하겠다는 것이 三星의 야망이다.


李健熙의 李健熙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불과 10년 전만 해도 세계시장에서 低價型(저가형) 전자레인지·TV 등을 판매하던 三星전자를 세계일류로 거듭나게 한 動因(동인)은 무엇이었을까? 三星전자, 특히 그 主力인 반도체 사업의 成功史에서 李健熙 회장의 역할은 온 세계가 주목하는 바 되었다.

三星의 반도체 사업 진출은 李秉喆 회장이 결정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지금의 李健熙 회장이 반도체 사업의 육성을 위해 아버지를 설득한 사실을 아는 사람은 의외로 적다. 李健熙 회장은 반도체 사업의 비전을 누구보다 먼저 이해하고 직접투자를 집행한 당사자이다.

三星은 1974년 우리나라 최초의 반도체 직접생산 기업으로서 부도 직전이었던 「韓國반도체(주)」로부터 인수 제안을 받았지만, 그룹 비서실은 「사업성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인수 불가」를 건의했다. 당시는 1970년대에 새롭게 시작한 전자부품 관련 회사인 三星전관과 三星전기가 사업상 어려움을 겪고 있었기 때문에 더 이상 전자분야에 투자할 만한 여력이 부족했다.

이때 李健熙 회장(당시 동양방송 이사)은 본인의 私財를 출연해 「韓國반도체(주)」를 인수했다. 그는 세계 전자산업의 추이를 주목하면서 반도체 사업의 무한한 가능성을 일찌감치 인식하고 있었다.

그때는 우리 언론도 몰랐다. 三星의 반도체 사업 진출 뉴스를 국내 全언론사가 외면한 가운데 오직 한 경제전문지(內外經濟)에서 1단짜리 기사로 보도했을 따름이었다.

『반도체가 얼마나 돈 많이 드는 사업인지 미리 알려져 있었다면 정부의 간섭 때문에 오늘날 세계 IT(정보통신)산업을 리드하는 한국의 반도체 산업은 없었을 것이다』라는 얘기가 있다. 또한 당시, 三星반도체에 취업한 여성 근로자의 고향 마을사람들은 『우리 동네 明子가 공부를 잘했는데, 「허리끈」 공장에서 일한다더라』라고 수근거렸다고 한다. 「반도」라면 허리띠, 즉 「벨트」의 일본식 발음. 그만큼 반도체에 대한 인식이 낮았음을 말해 주는 우스개에 다름 아니다.

사업 초기에 李健熙 부회장은 거의 매 주 해외로 나가 반도체 전문가들을 만나고, 日本 기술자를 몰래 데려와 우리 기술진에게 「과외공부」를 시키는 「기술 보따리 장수」도 서슴지 않았다. 三星은 「클린 룸」 관리와 收率(수율) 향상 등 초기 반도체 생산의 기틀을 다지는 데 「과외선생」들의 도움을 십이분 활용했다. 收率이란 한정된 크기의 웨이퍼(실리콘 棒을 감자칩처럼 얇게 썰어 낸 반도체의 原재료)에서 제대로 작동하는 반도체가 몇 개 나오는가 하는 비율이다.

삼성은 收率을 높이는 데 死活(사활)을 걸었다. 장비도 원료도 모두 수입하는 당시의 상황에서 收率마저 떨어지면 선진국 기업과 경쟁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사업의 성패를 좌우하는 터닝 포인트마다 그의 결단은 정확했다. 예컨대 美·日 업체들도 주저하는 1983년, 그는 器興(기흥)사업장의 新設 2라인에서 「6인치 웨이퍼」를 생산토록 했다.

「월드 베스트 제품」 창출에 대한 그의 집념은 D램뿐만 아니라 S램, 플래시, LCD(액정화면) 등 주력제품의 세계 1위 장악으로 나타났다. 승부정신도 강렬했다. 예컨대 2001년 도시바(東芝)의 「Nand형 플래시(데이터 저장형) 공동개발」 제의를 거절했다.

도시바가 누구인가? 120여 년의 역사를 지닌 巨大 기업이며, 한때 세계 메모리 반도체 시장을 장악했던 最强(최강) 기업이었다. 더욱이 Nand형 플래시 메모리 반도체 시장에 관한 한 당시까지 세계시장을 주름잡던 「至尊(지존)」이었다.

그런데도 李회장은 도시바의 제안을 거부했다. 왜일까? 공동개발로는 안정적인 위치가 보장되지만, 큰 성공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三星은 이미 구성해 놓은 연구팀에 박차를 가하고, 탐욕스럽게 시장을 장악, 2002년부터 Nand형 플래시 시장의 점유율 1위로 올라선 것이었다.

그렇다면 李健熙 회장의 업적은 어떻게 평가되어야 할 것인가? 왕조시대의 廟號法(묘호법)이지만, 집안을 일으켜 세워 나라로 만든 창업주는 太祖, 물려받은 江山을 더 강하게 만든 후계자를 太宗이라고 일컬었다. 다소 무리하게 三星을 王國에 비유한다면 李秉喆 先代회장은 太祖, 李健熙 회장은 太宗에 비견된다. 이제는 「李秉喆의 아들 李健熙」라기보다 「李健熙의 李健熙」라고 해야 더 정확한 기업사적 자리매김이 될 것 같다.


민족사상 최고의 名堂자리

넓이 52만 평의 三星전자 水原사업장. 그 한복판에 新기술 창조의 코아(중심부)가 들어서고 있다. 「디지털미디어연구소」가 모든 외부 골조공사를 끝내고 내장 공사에 들어간 것이다. 디지털미디어연구소에는 오는 9월10일까지 三星전자의 연구인력 2만4000명 가운데 7000명이 집결한다. 이 37층 최첨단 건물의 높이는 현재의 국내 최고층 여의도 63빌딩보다 낮지만, 그 연면적(6만5000평)은 단일 건물로서 국내 최대 규모가 된다.

건물 외벽 쪽에 임시로 가설된 공사용 엘리베이터를 타고 옥상 위 非常 헬기장에 올라갔다. 지난 2월28일 아침, 아직 바람은 차지만, 이미 열흘 전에 雨水(2월18일)를 지났다. 이제 봄이다.

현재 三星그룹은 세계시장 점유율 기준으로는 월드 베스트 제품 18개를 생산하고 있다. 三星그룹의 매출액에서 월드 베스트 제품 18개가 차지하는 비중은 약 24.5%이다. 2005년에는 三星의 세계 제1위 제품은 30개를 웃돌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三星그룹의 대표선수는 三星전자다. 三星전자의 힘은 반도체로부터 나온다. 그렇다면 水原현장은 우리 민족사상 최고의 名堂자리이다. 필자가 아직 준공도 되지 않은 디지털미디어연구소의 옥상으로 올라간 까닭은 바로 이 今時發福(금시발복)의 吉地를 드높은 곳에서 조감해 보고 싶은 욕망 때문이었다.

37층 건물의 맨 꼭대기에 섰다. 북쪽으로는 光敎山(광교산)이 보인다. 그 기슭 아래로 펼쳐진 遠川(원천)저수지. 필자는 이날 이른 아침에 승용차를 몰고 서울로부터 이곳을 찾아오면서 아차 실수로 하릴없이 원천저수지를 한 바퀴 돌았다.

水原 인터체인지로 바로 들어왔으면 쉽게 찾아왔을 터인데, 한 칸 앞의 東수원 인터체인지로 진입하는 바람에 길을 좀 헤맸던 것이다. 하지만 어렵지는 않았다. 天才와 人材가 몰릴 디지털미디어연구소 건물은 水原벌의 어디서도 우러러보이는 水原의 최고층 건물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원천저수지 언저리에서도 「길 잃은 나그네」의 이정표 역할을 톡톡히 했다.

잠시 눈길을 서쪽으로 돌렸다. 원천저수지에서 흘러나온 遠川川(원천천)이 水原사업소의 서쪽 울타리 바깥을 휘감아 돈다. 그 너머로는 대규모 신흥 아파트촌이 林立(임립)했고, 좀 멀리로는 수원 市街의 서쪽을 감싸는 八達山과 華城(화성)의 西將臺(서장대)가 눈에 잡힌다. 조선조 中興(중흥)의 임금 正祖(정조) 때 쌓은 華城은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이다.

조선조의 국왕은 원칙적으로 漢城(한성)에서 100리 바깥으로 나들이할 수 없었다. 正祖가 왕궁에서 100리 거리에 華城을 쌓고, 그 인근에 억울한 죽음을 당한 아버지 思悼世子(사도세자)의 무덤(顯隆園)을 조성한 것은 「100리 규정」을 지킨다는 의미도 있었다.

三星이 水原벌의 일각을 이루는 靈通洞(영통동)에 전자기지를 조성한 데도 이유가 있었다. 서울에서 자동차로 「1시간 거리」― 서울에 가깝지 않으면 고급 인력의 확보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靈通洞, 즉 「神靈(신령)이 通하는 유비쿼터스 時代의동네」라는 이름 또한 神妙(신묘)하지 않은가.

신축 중인 미디어디지털연구소는 바로 곁에 25층짜리 정보통신연구소 건물과 짝하고 있다. 그 너머 남쪽으로 半導體(반도체) 사업의 제1기지 器興사업장(43만 평)과 제2기지 華城사업장(47만 평)이 펼쳐져 있다. 반도체라면 지난 10여 년간 우리나라 전체 수출액의 10%를 감당하며 한국인을 먹여 살린 「정보화 시대의 쌀」이며 「魔法의 돌」이다.

마침, 사업장 경내의 헬기장에서 헬기가 뜨고 있다. 이곳과 휴대폰을 만드는 三星전자의 龜尾사업장 사이에 하루 上·下行 2회씩 연결된다. 대부분의 탑승자들은 연구소의 성과를 생산현장으로 스피디하게 지도해야 하는 연구원들이다.

다시 눈길을 그 너머 동쪽으로 돌렸다. 멀리 숲 속에 매미 집처럼 맵시를 낸 圓形(원형) 건물 두 채가 자리 잡고 있다. 「三星노블카운티」. 超일류 편의시설과 의료시설로 이름 높은 양로원이다. 三星맨들에게 「요람에서 무덤까지」를 외쳤던 李健熙 회장의 「작품」이다.


速度戰 승리 위한 人材의「디지털ε밸리」집결

이제, 三星전자의 우수두뇌가 수원으로 집결하고 있다. 水原은 대한민국의 디지털을 리드할 무한한 에너지를 품고 있다.

1969년 三星전자의 水原공장으로 출범한 지 35년. 지금 이곳은 단순히 水原공장이 아니다. 한국의 실리콘 밸리, 디지털 혁명을 이끌어 가는 첨단기지라는 의미를 담아 「디지털ε밸리」라고 불리고 있다.

이제 세계시장에서 승자독점(Winner takes all)이나 2080법칙(상위 20%의 기업이 시장의 80% 차지)은 거부할 수 없는 도도한 물결이다. 선두기업이 거대한 독점 이윤을 긁고 가면, 후발 기업은 「이삭」이나 줍다가 결국 도태되고 만다. 기술개발 경쟁에 存亡을 건 速度戰(속도전)은 처절하다.

당연한 일이지만, 우수두뇌의 水原 집결은 三星전자의 숙원이었다. 연구 개발의 시너지(결합상승 효과) 향상과 미래 기술 확보를 위해 불가결한 네트워크의 완성이다. 여러 사업장과 서울에서 근무하던 기술·기획·개발 핵심인력들을 전부 水原으로 집결시켜 미래 기술 확보를 위해 전력을 기울이고 있는 것이다.

현재 디지털ε밸리에는 이미 정보통신연구소, 가전연구소, 메카트로닉스연구소, SOC연구소 등이 들어서 있다. 여기에 디지털미디어연구소가 문을 열면 5개 연구소의 집중체제. 이곳을 중심으로 速度戰에서의 필승을 위한 매머드 연구타운이 형성되는 것이다.

현재 三星전자의 연구개발 인력은 박사급 2300명, 석사급 8500명을 포함, 2만4000명에 달한다. 三星전자의 국내 全인력(6만2000명)의 38%에 점하는 인력이다. 2004년에 냉장고·청소기·자판기를 제조하던 家電부문이 光州사업장으로 이전됨으로써 超일류 연구타운의 형성에 好機(호기)가 도래했다.

연구타운은 세계 인종 전시장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여기에는 미국, 일본, 중국, 인도, 러시아 등 20여 개국 수백 명의 박사급 연구인력도 근무하고 있다.

水原사업장은 또한 「세계 마케팅의 메카」로 등장할 것이다. 「마케팅 리더십 연구소」 건립도 추진되고 있다. 생산이 있는 곳에서 연구를 한다는 차원에서 연구타운을 완성한 데 이어, 연구가 있는 곳에서 스피디한 경영체제 구축을 위해 해외 마케팅 인력의 본거지를 수원사업장으로 끌어들이려는 것이다.


色感과 畵質의 饗宴에 홀려

디지털미디어연구소 옥상에서 내려와 水原 본관(5층 하얀색 건물) 1층에 설치된 「디지털 전시관」으로 직행했다. 이곳엔 三星전자의 월드 베스트 제품(세계시장 점유율 1위) 등을 진열해 놓고 있다.

三星전자가 만들어내는 세계시장 점유율 제1위의 제품은 D램(31%)·S램(Static RAM: 35%)·플래시 메모리(30%) 등의 메모리 반도체와, 반도체가 핵심부품인 TFT-LCD(超薄膜 液晶畵面: 22%)·VCR(비디오카세트 리코더: 20%)·모니터(21.2%)·컬러TV(10%) 등 8개이다. 세상은 참으로 많이 변했다. 문득, 10여 년간 외딴 섬에서 혼자 살다가 갑자기 첨단 문명세계로 돌아온 사람과 같은 느낌이 들었다.

1등은 아니지만 세계시장 점유율이 높은 三星전자의 전략제품들도 진열되어 있다. DVD 플레이어(Digital Versatile Disc Player: 17%), 캠코더(16%), 휴대폰(13.6%), LBP(레이저 빔 프린터: 11.8%) 등이다. 전시관의 첫 번째 코너에는 휴대폰 제품이 전시되어 있다. 현재 三星휴대폰은 CDMA(코드분할 다중접속 방식)와 GSM(유럽통화 표준방식) 시스템을 통틀어 세계시장 점유율 제3위이다.

해방둥이인 필자는 새로운 文物에 둔감하다. 필자의 집에서는 1980년대 말기까지 흑백TV를 시청하고, 손가락으로 다이얼을 돌리는 舊式 전화기를 사용했다. 新시대의 상징물인 휴대폰만 하더라도 아직 통화 이외의 다른 목적으로 작동시켜 본 적이 별로 없다.

이런 필자도 홈시어터 코너에서 잠시 발길을 멈추었다. 55인치짜리 대형 DLP프로젝션 TV 화면에서는 張藝謨(장예모) 감독의 영화 「英雄」이 돌아가고 있었다. 은행나무잎이 눈보라처럼 흩날리는 가운데 戀敵(연적)관계의 두 미녀 高手가 眞劒勝負(진검승부)를 벌이는 장면이다. 진홍색 의상과 샛노란 은행잎이 어우러져 色感의 饗宴(향연)을 이루고 있었다. 개봉관의 음향과 화질보다 선명하다.

어리둥절한 모습을 보인 필자에게 이곳 安在根 상무는 『102인치 PDP(가스放電을 이용하는 플라즈마 디스플레이)도 이미 개발, 작년에 발표했다』고 말했다.

「디지털 전시관」에 이어 三星전자의 역사와 발전상을 볼 수 있는 「역사관」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입구 좌측의 PDP 스크린을 통해 창업자 李秉喆 선대회장의 생애와 경영철학을 볼 수 있고, 그 옆에는 전자산업에 대한 창업자의 메시지가 적혀 있다.

『… 전자공업은 헤아릴 수 없이 다양한 제품과 광범위한 용도, 그리고 연관산업의 파급효과로 해서 무한한 개발과 발전이 예견되는 가장 새로운 성장산업이다―1969년 6월26일』

1969년에 설립된 三星전자는 금성사 등 기존의 국내 전자업체에 비해 10년 이상 늦게 출발한 업체이다. 「역사관」의 제1코너에는 「도전과 발전」이라는 문패가 붙어 있다. 三星전자의 역사를 창업期부터 현재의 新경영추진期까지 8期로 구분·정리해 놓았다.

제2코너를 들어섰다. 三星전자가 창업 이래 생산한 주요 제품들을 전시하고 있다. 그것은 三星의 기술발전사인 동시에 1970년대 이후 우리의 생활사였다. 합작회사인 三星산요가 1970년 11월에 처음 생산한 12인치짜리 진공관 흑백TV가 고색창연하다.

1970년대에 국내 최초로 생산된 간이식 냉장고, 라디오카세트 리코더, 超節電(초절전) 이코너 컬러(TV), 은하세탁기, 하이콜드 냉장고 등이 보인다. 그때 유행했던 CM송이 아스라하게 들려오는 듯하다. 1980년대에 국내 최초로 개발된 8비트 퍼스널 컴퓨터, 16비트 슈퍼 마이크로 컴퓨터 등 「골동품」도 전시되어 있다.


逆戰의 포인트 3라인 투자

1987년 2월, 李秉喆 회장은 제3라인을 지으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3라인 투자를 미루자는 의견이 많았다. 반도체 경기는 침체를 거듭하고 있었고, 새로운 라인에서 생산하게 될 제품은 다소 시간이 있어야 필요하게 될 것이라는 판단에서였다.

누적되는 적자도 큰 부담이었다. 1, 2라인 건설비만 4억 달러를 투자한 데다 1986년만 334억원의 적자가 예상되고 있는 상황에서 다시 3억4000만 달러를 투자한다는 것은 너무나 버거웠던 것이다.

三星 내부에서도 「반도체 사업 때문에 그룹이 거덜난다」는 소리가 터져나왔다. 정부의 일각에서는 「반도체 사업을 스크랩(解體)해야 한다」는 주장과 반도체를 지원한 일부 관료들에 대한 책임론이 들끓었다.

그러나 李秉喆 회장의 결심은 단호한 것이었다. 마침내 李회장은 주위의 만류를 물리치고 「내일 착공식에 기어이 참석하겠다」고 못 박았다. 1987년 8월7일, 3라인 착공식이 진행됐고, 이 행사는 李秉喆 회장 생애의 마지막 공식행사가 되었다.

3라인 공사가 한참 진행되고 있던 1987년 말 반도체 시장에 변화가 감지되기 시작했다. 그동안 일본 업체들은 1985년 이래 계속되는 경기 침체에 주눅이 들어 투자에 주춤했고, 미국의 모스테크, 내셔널, 세미컨닥터 등 대형 업체들은 아예 D램 사업에 손을 뗐다.

마치 三星의 3라인 투자를 기다렸다는 듯한 反轉(반전)이었다. 그 결과, 공급 부족 현상으로 가격이 반등했다. D램은 없어서 못 팔 지경이었다.

李健熙 회장 체제가 출범한 1988년은 三星에게 그동안의 적자를 모두 만회하고, 실로 오랜만에 흑자를 계상하게 한 年度였다. 이후 三星은 반도체 사업에서 자신감을 회복했다.

실제, 3라인이 준공된 것은 1988년 10월이었다. 만약 李秉喆 회장의 지시대로 건설을 진행했다면 1988년 초에 3라인을 완성했을 터였다. 그러나 그동안 1, 2라인을 풀 가동했어도 주문량을 다 소화하지 못했기 때문에 결국 3라인은 당초 李秉喆 회장이 생각했던 것보다 6개월의 기회손실을 본 셈이 되는 것이다. 만약 三星이 당시 6개월의 시간을 더 앞당겨 1메가 D램을 양산했다면 반도체 사업의 역사는 또 다른 양상으로 전개되었을 것이다. 그만큼 반도체 사업엔 시기의 선택이 중요하다.

「반도체 神話의 뿌리」를 만들어 낸 李秉喆 회장은 그 영광의 시간을 불과 석 달 남기고 유명을 달리했다. 하지만 그 후 단 한 사람도 3라인 투자가 「반도체 神話」의 요체이자 결정적 승부수였다는 점을 부정하지 못한다.


[취임 열흘 후 李健熙 회장의 솔직한 構想]


『한솥밥 먹는 三星 가족도 나를 몰라』

1987년 12월10일, 三星그룹의 새 총수 李健熙 회장이 「언론사 예방」의 일환으로 경향신문사를 방문한 자리에서 처음으로 「말문」을 열었다. 12월1일, 회장에 취임한 지 꼭 열흘 만이었다.

국내 최대의 재벌을 지휘할 46세의 李健熙 신임 회장은 李秉喆 先代회장과 무엇이 다른가. 그의 경영전략과 퍼스낼리티는 어떠하며, 그로 인해 三星의 문화는 어떻게 변할 것인가. 그에 관한 한 「아직」 말이 없었던 李健熙 신임회장은 당연히 언론의 표적이었다.

盧哲容 당시 경향신문 사장은 신임 三星그룹 회장을 만난 김에 세상의 궁금증을 일거에 풀어 보려고 했던 것 같다. 사장실로부터 필자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필자는 당시 경향신문사 記者로 일했다).

『鄭차장, 三星그룹 신임회장이 여기로 방문하는데, (사장실로) 빨리 인터뷰 준비해 올라와』

학창시절에 레슬링으로 단련되었다는 李회장은 떡 벌어진 가슴이 인상적이었다. 눈대중으로 키 170cm에 체중은 70kg가 실할 것 같았다. 검은색 양복의 가슴께엔 나비처럼 접은 삼베 喪章(상장)을 달고 있었다.

盧사장은 잠깐의 예방을 끝내고 돌아가려는 李회장을 往年(왕년)의 일선기자답게 붙잡고 질문공세를 폈다. 그 자리에 배석한 필자는 좌담에 끼어들 틈도 별로 없었다. 엉겁결에 1시간30분간 계속된 이 즉석 좌담에서 피력된 李회장의 「말」은 그 후 三星의 지향점과 거의 정확히 일치했다. 그중 일부만 여기에 옮겨 싣는다.

―신임 회장으로 취임한 이후 三星의 분위기가 달라지는 것 같습니다.

『그러던가요? 제가 선언하기를 「내년 봄까지는 혼자 떠들겠다」고 했지요. 부회장 시절엔 한솥밥을 먹는 三星 가족들도 저의 內面을 몰랐습니다. 후계자라는 것이 代行은 아니기 때문에 권한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잖아요? 그래서 앞으로 나서기 어려운 겁니다. 이제는 저의 경영 스타일 같은 것을 알려야 하니까 「말」을 해야지요』

후계자 시절, 그의 좌우명은 「傾聽(경청)」이었다. 「열 번 듣고 한 마디 하는 답답한 사람」이라던 그가 이제는 「말」을 하겠다고 선언했다. 그 「말」이 오랫동안 참아왔던 「라이온스의 포효」일 것 같은 느낌이었다.


『質이야 質!』

―李회장의 경영철학은 무엇입니까.

『三星의 이념인 事業報國(사업보국), 人材第一(인재제일), 合理追求(합리추구)는 불변입니다. 국민으로부터 신뢰받는 기업, 사위와 며느릿감을 안심하고 고를 수 있는 기업이 되도록 더욱 노력할 것입니다』

―三星이 지향하는 정책은 量的(양적) 팽창입니까, 質的(질적) 성장입니까.

『모든 것이 質로 가지 않으면 선진대열에 끼어들지 못합니다. 얼마 전에 몇 백만 달러 하던 컴퓨터가 이제는 10만 달러로 떨어졌으면서도 그 능력은 10배에 달하고 있어요. 우물쭈물하다가는 새로운 컴퓨터를 제대로 활용하기조차 어렵습니다. (中略) 일본 기업들은 이같은 시대의 변화에 부응, 과거 5년간 기간 기술요원들을 3~5배씩 늘렸습니다. 상품수명이 짧아졌으니 끊임없이 기술개발을 해야 할 필요성 때문이지요』

이때 이미 李회장은 質경영과 技術경영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로부터 5년 후인 1993년 6월, 李회장은 「新경영」을 선언하면서 三星맨들에게 『여태 내 말귀를 못 알아들었어. 고객에게 부끄럽지도 않아? 質이야 質!』이라고 질타하게 된다. 그렇다면 그는 質이란 話頭(화두)와 붙들고 5년의 세월 동안 고뇌·숙고하다가 드디어 「獅子(사자)의 울음」을 터뜨린 셈이었다.

―先代 회장의 권위주의적 경영방식은 李회장 시대에선 불식되는 겁니까(李秉喆 회장이 주재하던 사장단회의 경우 「御前會議」로 불리고 있었다).

『선친께선 전통적 유교사회에서 태어나 엄격한 가정교육을 받고 성장하신 분입니다. 선친의 엄격성 때문에 저도 사장단 회의 같은 때 말 한마디 제대로 못 했습니다. 그러나 권위주의적 성향은 선친의 성격적 특성이라기보다는 그분 세대가 가진 공통적 기질의 하나가 아닌가 하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사실, 선친은 알고 보면 참으로 자상하고 다정다감한 분이셨습니다. 나무 한 그루, 꽃 한 송이에도 情을 쏟으셨습니다. (中略) 저는 해방 전에 태어나기는 했지만(1942년생-편집자 注) 해방 이후 교육을 받았고, 미국에서 학창시절을 보낸 경험(와세다大에서 경제학, 조지 워싱턴大에서 경영학 전공-편집자 注)이 있어 시민의식과 개방적 기질이 몸에 배어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반도체가 시대의 총아가 되고 있습니다만, (三星에서) 다음엔 무엇이 나옵니까.

『고도화되고 그 활용범위도 넓어지는 반도체가 나옵니다. 성능 좋고 값도 싸게…. (中略) 비 오는 날에 브레이크를 밟으면 자동차가 미끄러지는데, 반도체가 들어간 안전장치 「센서 ABS」를 장착하면 네 바퀴가 동시에 멈춥니다. (中略) 그뿐입니까. 사람이 문을 열고 들어가면 불이 켜지고, 나가면 꺼지는가 하면 목욕시간에 맞춰 물이 나오게 하는 시스템도 모두 반도체에 의해 가능하게 됩니다』

요즘 전철을 타 보면 젊은이들 중 상당수가 「움직이는 백만원」이다. 온몸을 휴대용 전자제품으로 장식하고 무장하는 것이 新세대의 패션이다. 이제, 그들에게 휴대폰·MP3·PDA(개인 휴대 단말기) 등은 생활필수품화됐다. 18년 전에 이미 李회장은 오늘의 반도체 시대를 정확히 예견하고 있었다.


『세계 超일류 기업 치고 전투적 勞組 하는 데 없다』

―앞으로의 경영전략은 무엇입니까.

『1990년대까지는 세계적 超일류 기업으로 성장시킬 작정입니다. 첨단기술산업 분야를 더욱 넓히고, 해외사업의 활성화로 그룹의 국제화를 가속시키며, 새로운 기술개발과 新경영기법의 도입도 적극 추진하며, 또한 임직원들의 복지 향상에도 최선을 다해 三星人들이 일생을 걸어 후회 없는 직장이 되도록 하겠습니다』

당시 三星그룹 비서실 간부들조차 李健熙 회장을 『과묵하다』고 평했다. 그 때문에 「수줍음이 많은 성격」으로 비치기도 했다. 그러나 아니었다. 말머리가 勞組 결성 문제에 이르자 李회장은 단호했다.

당시는 「6·29선언」의 여파로 勞組결성 운동이 투쟁적으로 확산되고 있었다. 李회장의 취임 바로 다음 날인 12월2일 아침, 三星그룹 산하 중앙일보사 勞組(당시 조합원 61명)의 설립신고서가 서울 중구청에 접수되기도 했다.

『三星이 인정하지 않는 것은 勞組가 아니라, 노조의 필요성입니다. 다시 말하면 三星은 노조를 필요로 하지 않는 경영을 원칙으로 하고 있습니다. 三星은 1938년 창업 이래 확고한 경영이념을 바탕으로 기업경영의 불모지였던 이 땅에 三星式의 독자적인 경영풍토를 만들어 왔고, 그중에서도 특히 공존공영의 원칙을 중시, 이를 노사 간, 회사와 고객 간의 기본원칙으로 삼아 왔습니다.

노사관계는 화합과 대화의 場이어야지 갈등과 대립의 관계여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때문에 1960년 4·19혁명 이후, 미국·일본 등의 노사관계와 노조 없이도 잘 운영되는 사례들을 면밀히 검토, 우리 현실에 맞는 社友會·노사협의회·고충처리제도·경영현황발표회 등 각종 제도를 운영해 오고 있습니다』

소문과는 딴판이었다. 그는 어눌하지 않았다. 李회장은 1시간30분 동안 경영방침 등 자기 소신을 역설하고 귀사했다. 盧哲容 사장은 『어때? 「李健熙 회장이 어눌하다」는 세상의 뜬소문, 순 엉터리지』라고 말했다. 어떻든 三星그룹 내부에서는 「전투적」 노조가 발을 붙이지 못했다.


[「天才 重視 경영」시대의 三星]


두 가지 도전에 직면

1988년 정초에 「제2창업」을 선언한 李健熙 회장에게는 안팎으로 중대한 위기가 다가오고 있었다. 전용욱(중앙大)·한정화(한양大) 교수는 그들의 共著(공저) 「三星의 성장과 변신」(김영사, 1993)에서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관찰했다.

<三星은 제2창업이 시작된 이래 크게 두 가지 도전에 직면해 왔다. 하나는 새로운 환경의 변화를 맞아 과거 三星의 핵심 성공 요인이었던 「목표 지향성」, 「청결한 조직 풍토」, 「시장 합리성 추구」 등이 한계점을 보이고 있으며, 때로는 逆기능마저 나타내게 된 점이다.

목표 지향성은 지나친 量 중심의 단기 업적주의에 치우침으로 인하여 내수시장에서 과당경쟁을 유발하고, 장기적인 전략성이 결여될 수 있는 문제점도 나타나게 되었다. 청결한 조직풍토를 유지하기 위하여 신상필벌의 원칙과 내부 통제 기능을 강화하다 보니 책임질 일을 하지 않으려는 보신주의가 만연하고, 조직의 활력이 떨어지는 경향도 나타나게 되었다. 합리추구의 부정적 측면으로, 지나치게 신중하게 사업성을 검토하다가 방어적이고 보수적인 의사 결정에 흐르게 되어 기회 손실이 있었다는 자체 반성도 나오게 되었다>

국내외적인 급격한 환경변화로부터 다가오는 도전은 더욱 엄중했다. 역시 「三星의 성장과 변신」에서의 인용이다.

<제2창업이 시작되던 1980년대 말 한국경제는 성장 잠재력이 소진되어 가는 가운데 새로운 잠재력을 찾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에 직면하고 있었다. 특히 1987년 6·29 이후 정치·사회적 격변기를 거치면서 노사분규, 급격한 임금인상, 기업에 대한 사회적 비판 고조, 시장 개방, 공산주의 붕괴 등은 이제까지의 환경 요소에 대한 가정을 근본적으로 바꾸게 하는 것이었다>

선진국의 기술보호주의, 일본 다국적 기업의 汎세계적 優位(우위) 구축, 세계 초일류 기업 간의 제휴·연합의 가속화 등은 한국 기업들에게 엄청난 도전이었다. 특히 날로 거세어 가는 선진국의 기술 공세, 세계경제의 글로벌化와 그에 따른 국내시장의 개방, 대기업에 대한 정치·사회적 분위기는 위기감을 고조시킬 수밖에 없었다.

李健熙 회장은 제2창업을 선언하면서 「변화와 개혁」을 강조했다. 매년 초에 열리는 경영자 세미나 같은 데서 그는 『위기의식을 갖자고 수없이 얘기했다』는 것이다. 다음은 「李健熙 에세이」에서 인용한 대목이다.

<그러나 몇 년이 지나도 달라지는 것이 없었다. 50년 동안 굳어진 체질이 너무 단단했다. (中略) 특히 1992년 여름부터 겨울까지 나는 불면증에 시달렸다. 이대로 가다가는 사업 한두 개를 잃는 것이 아니라 三星 전체가 사그라들 것 같은 절박한 심정이었다>

1993년 신년사에서 李健熙 회장은 『대나무도 매듭이 있어야 잘 자라듯, 三星의 미래를 위해서도 반성과 평가를 통한 새로운 결단이 있어야 한다』고 밝혔다. 그것은 전주곡에 불과했다. 드디어, 로스앤젤레스와 도쿄로 사장들을 불시에 불러낸 그는 포효하기 시작했다.

2월 로스앤젤레스 회의에 앞서 李회장은 사장들을 데리고 전자제품 판매장을 둘러보았다. 三星 TV가 매장 구석에서 먼지를 잔뜩 뒤집어쓴 채 처박혀 있었다. 세계 일류 제품과 三星 제품의 차이가 확연했다. 세계시장에서 三星이 얼마나 미미한 존재인가를 눈앞에 들이댄 것이다. 그리고 그는 분노했다.

『이건 물건이 팔리고 안 팔리고의 문제가 아냐! 우리 종업원, 株主, 나아가 국민과 나라를 기만하는 행위야!』

그 자리에서 변명하는 임원은 당장 퇴장당했다. 자그마치 9시간 가까이 질타를 당하고 함께 반성을 하고 개선책을 찾는 회의가 계속되었다.

3월에 도쿄에서 사장단회의가 다시 열렸다. 李회장은 사장단과 함께 일본의 경쟁력을 상징하는 아키하바라(秋葉原) 전자시장 등지를 둘러보고는 무려 12시간 동안의 토론을 강행했다.


세계의 높이·깊이를 가르쳐

「역사관」의 마지막 코너는 1993년 이후 「三星의 개혁」을 설명해 주고 있다. 1993년은 三星에 있어 매우 중요한 분기점이었다. 그해 6월7일, 李健熙 회장의 「프랑크푸르트 선언」이 발표되었다. 「제2창업 2기」의 출발, 즉 「新경영」의 선언이었다.

『나부터 변해야 산다. 마누라와 자식을 빼고 다 바꾸자』

그해 三星그룹 임원들은 거의 모두 해외로 불려나가 李회장의 특강을 들었다. 일본 연수팀의 경우, 규슈(九州)의 후쿠오카(福岡)에 상륙한 뒤 北上하면서 세계 제1의 자동차 생산기지 도요타(豊田)市를 거쳐 도쿄로 진입했다.

일행 100여 명은 이틀간 일본 최고급 호텔이며, 先代회장 이래의 오랜 단골 호텔 「오쿠라(大倉)」에 묵으며 李회장의 특강을 들었다. 지금은 斷煙(단연)했지만, 그때 李회장은 하루 국산 담배 「88」을 두 갑 이상 피우던 「줄담배」였다. 참여자들 중 호명된 10여 명은 다시 李회장과 小회의실에서 만나 밤을 새우며 토론을 벌이기도 했다.

『이건 불공정 게임 아녀? 우린 낮에 日本 인프라를 보러 강행군을 했는데, 李회장은 호텔에서 미리 토론 준비를 하는지도 몰라. 오너가 종업원에 「왜? 왜? 왜?」 세 번만 물으면 우리 종업원은 답변이 궁해지게 마련 아냐』

이렇게 소곤거리는 사람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李회장의 「말의 깊이」와 「눈의 높이」로부터 배우는 재미도 여간 쏠쏠하지 않은 것이었다. 濫讀(남독)에 가까운 多讀家(다독가)이며, 전문서적의 精讀家(정독가)인 그의 말은 종횡무진했고, 반론을 제기하기가 만만찮았다. 記者職 참가자들은 李회장과의 밤샘토론에는 불려가지 않았다. 어떻든 해외연수 참가자들은 저마다 상당한 감동을 먹었다.

일본 연수 참가자들은 후쿠오카의 하카타港에서 알뜰한 港灣(항만) 인프라를, 시고쿠(四國)와 혼슈(本州)를 연결하는 세계 最長 세토(瀨戶) 다리에서 월드 스케일을, 세계 제1의 자동차 생산라인에서 「도요타 方式」을, 도쿄都廳 청사에서는 일본 경쟁력의 수준을 배웠다. 당시 1人 1泊 요금이 자그마치 5만 엔이라던 오쿠라호텔에서도 다른 호텔과 무엇이 다른지를 배울 수 있었다. 그 핵심은 고객에 대한 종업원의 예절이었다.

로스앤젤레스 연수팀은 4人 1組가 되어 렌터카를 이용, 각 팀이 스스로 결정한 일정에 따라 미국 西部해안으로부터 東部해안까지 횡단하기도 했다. 참가자 중 한 분은 『미국이라면 그전에도 바쁜 일정의 회사일로 수십 번 다녀온 곳이지만, 1993년의 자동차 횡단 이후에야 처음으로 미국이 어떤 나라인지, 感(감)이 잡히더라』고 회고한다. 李회장은 글로벌 시대의 전개에 맞춰 三星人들에게 「세계의 높이와 깊이」를 체험시켰던 것이었다.


금값보다 비싼 반도체

디지털ε밸리, 즉 52만 평의 水原사업장에는 三星전자(TV·모니터·DVDP·캠코더·R&D센터)를 중심으로 하여 三星전기(전자 핵심부품), 三星코닝(코팅유리), 三星SDI(PDP·有機TL·2차전지) 등 3개 계열사가 둘러싸고 있다(괄호 안은 주요 생산품). 연건평 40만 평이며 여기에 모인 인력은 총 3만2700명이다.

오전 내내 고요하기만 하던 이곳이 낮 12시 무렵부터 젊은이들로 갑자기 붐비고 있다. 수원지원센터 李台睦(이태목) 부장은 사원식당으로 필자를 안내, 점심을 대접했다. 1식 5찬, 質경영을 강조하는 사업장의 사원식당에 걸맞게 음식의 質도 일류였다. 특히, 봄나물을 듬뿍 넣고 끓인 청국장의 맛은 추억거리로 남을 것 같다.

점심 후 水原사업장에서 나와 용인市 器興邑(기흥읍) 농서리 소재 器興사업장을 향해 출발했다. 이번에도 삼거리에서 길을 잘못 들어 東灘面(동탄면) 소재 華城(화성)사업장까지 내려갔다.

휴대폰 통화를 이용, 器興사업장 홍보팀의 코치에 따라 내려오던 길을 얼마쯤 되올라갔다. 기흥읍 농서리 삼거리에서 東進하면 곧 器興사업장이다.

정문 출입절차가 매우 엄중하다. 경비원들이 필자의 인적사항과 승용차 번호 등을 사전에 통고받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필자를 초청한 임직원에게 연락하여 신원을 재차 확인한 뒤에도 승용차 트렁크까지 열어 젖혀 내용물을 일일이 살폈다.

그럴 까닭이 있다. 엄지손가락만 한 반도체가 금값보다 비싸기 때문이다. 얼마 전, 총격전 끝에 죽은 마피아 조직원의 복부 밑에 깔린 「007가방」에서 발견된 「물건」은 마약이 아니라 반도체였다는 사실이 언론에 보도되기도 했다. 정문을 통해 K-1 事務棟(사무동) 지역의 「반도체 역사 전시관」으로 직행했다.


D램 반도체의 세계시장 석권

『세계가 놀란 한국인의 저력은 아무도 몰랐습니다. 三星이 이렇게 빨리 성장해 세계 기술을 선도하는 半導體 기술이 될 줄은…. 하지만 우린 무엇이 이를 가능하게 했는지 알고 있습니다. 밤낮의 구분을 잊은 채 기술개발에 매달렸던 수많은 연구원들, 그리고 「조국의 미래는 내 손에 있다」며 정성을 다한 현장의 사원들, 이러한 정성이 모여 우리는 1992년 D램 분야에서 처음으로 세계를 제패했습니다』

「현장 브리핑」에 가슴이 찡했다. 그때 나는 우리 사회를 위해 무엇을 했던가. 그들이 땀흘릴 때 나는 「목소리」만 크지 않았던가 하는 생각도 퍼뜩 떠올랐다.

三星전자가 TV·라디오 등 家電제품에 들어가는 부품을 자급자족하기 위해 1974년 12월20일 「한국반도체」라는 중소기업을 인수했음은 앞에서 썼다. LSI(대규모 집적회로)를 개발, 생산한다는 목표로 삼았던 한국반도체는 「三星반도체(주)」로 이름이 바뀌었다.

그러나 트랜지스터 같은 단순한 부품은 제조할 수 있었지만, 三星전자가 필요로 하는 부품을 만들기엔 기술력이 워낙 빈약했다. 三星은 일본 메이커에서 부품을 공급받으면서 바가지를 쓰는 등 설움을 받았다. 이것이 三星이 반도체 사업을 결심했던 배경이다. 1988년 11월1일, 반도체사업의 자금·인력 확보를 위한 차원에서 三星반도체가 三星전자에 흡수되었다.

三星전자는 1982년 超대규모 집적회로(VLSI)급 반도체의 기술개발을 위해 부천공장에 반도체연구소를 세웠다. 이때까지만 해도 三星전자는 家電제품에 들어가는 반도체를 소규모로 개발 생산했을 뿐 D램은 엄두조차 못 내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그 후 한국의 반도체 산업은 그 어떤 드라마보다 극적으로 성장해 왔다. 1983년, 三星전자가 세계에서 세 번째로 64K D램을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 대견한 일이었지만 미국과 일본과의 기술 차이는 아직도 4년6개월이었다.

차이는 점점 줄어들었다. 三星전자는 64K D램 개발에 성공한 지 9년 만인 1992년에 64메가 D램을 개발해 선진국을 완전히 따라잡았다. 반도체 총괄 경영지원실 이승백 부장의 브리핑은 감동의 절정으로 향했다.

『그리고 뒤를 이어 S램을 포함한 전체 메모리 분야에서 선두 위치를 확보하였고, 1995년부터 시작한 TFT-LCD(초박막 액정화면) 사업분야에선 사업 진출 불과 3년 만에 세계 최정상을 차지하는 쾌거를 이룩하였습니다』

그러면 TFT-LCD이란 무엇인가?

종래의 대표적 디스플레이(화면)는 TV에 사용되는 브라운管이었다. 하지만 두껍고 무거우며 전기를 많이 먹었다. 그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平板(평판) 디스플레이가 등장했다. 平板 디스플레이 중에서도 LCD(액정화면), 그중에서도 TFT-LCD가 가장 시장 및 기술 측면에서 유리하다.

三星전자는 D램 분야에서 거둔 성과를 발판으로 그 핵심부품인 S램과 플래시 메모리 분야에서도 이미 세계 제1위에 올라섰기 때문이다. 플래시 메모리는 요즘 각광받는 디지털 카메라, 디지털 캠코더, 초소형 저장장치 등에서 사용되는 핵심부품으로 「디지털 저장장치의 혁명가」로 불린다.

三星전자는 2004년 세계 플래시 메모리 시장에서 4조원에 달하는 매출로 60% 안팎의 점유율을 보였다. 2005년 매출 목표는 6조원. 플래시 메모리는 올 들어 공급이 수요에 비해 30% 가량 부족한 상태다. 이유는 플래시 메모리를 부품으로 사용하는 IT(정보통신) 기기가 폭발적으로 늘어났기 때문이다. MP3 플레이어가 대표적이다. 그 판매량은 2004년 3700만 대에서 2005년 7000만 대로 급증할 전망이다. 三星전자는 器興사업장 입구 주차장 부지 1만 평에 플래시 메모리 전용 제14라인을 증설 중이다. 14라인은 오는 7월부터 양산에 들어간다.

『…통합되고 융합되는 전자기기들, 반도체는 디지털 컨버전스 시대의 중심에서 최상의 제품을 제공하고, 기술을 선도하며, 이를 통해 고객과 우리 자신의 꿈을 실현하는 가치 창조자의 길을 걸어갈 것입니다』

언제 어디서나 자유롭게 네트워크에 접속할 수 있는 정보통신 환경. 바로 이 「유비쿼터스」 시대의 도래로 세계는 점차 시간과 공간의 경계가 사라지고 있다. 노트북 하나로 일과 여가를 동시에 해결할 수 있으며, 휴대폰만 있으면 집 밖에서 집 안 家電제품을 작동시킨다. 상상 속에서나 가능했던 디지털 라이프가 이미 우리 생활 속에서 실현되어 가고 있다. 三星전자가 지향하는 디지털 라이프는 三星전자의 비전인 「디지털 컨버전스를 주도하는 기업」에서 출발한다는 것이다.


스택 방식과 트렌치 방식

4메가 D램은 반도체 개발사에서 특별한 의미가 있다. 1메가 D램까지는 칩의 表面積(표면적)만을 이용해도 필요한 방(Cell)을 다 만들 수 있는 평면구조가 가능하지만, 4메가 D램부터는 표면적만으로 필요한 방을 다 만들 수 없었다.

이 때문에 필요한 용량의 회로를 만들기 위해서는 아래로 파들어 가는 트렌치(trench)로 할 것인지, 아니면 회로를 위로 쌓아 올리는 스택(stack)으로 할 것인지를 결정해야만 했다. 이 결정이 중요한 것은 한번 추진한 연구방향이 잘못되면 회복 불능의 기술격차가 발생하기 때문이었다.

일본에서는 도시바(東芝)와 NEC가 트렌치를, 그리고 히다치·미쓰비시·마쓰시타전기·후지쓰는 스택 공정으로 4메가 D램을 개발하고 量産(양산) 채비를 서두르고 있었다. 두 개의 방식을 모두 검토하던 三星은 최종 결정의 기로에 섰다.

李健熙 회장이 결단했다.

『三星은 스택으로 간다』

많은 연구자들의 의견을 청취하고 해외의 유력 학자들의 견해를 종합해 내려진 결론이었다. 구멍을 파야 하는 트렌치는 그 안을 들여다볼 수 없어 검증이 어렵지만, 위로 쌓는 스택은 언제든지 검증할 수 있기 때문에 스택을 선택한 것이었다.

결단이 내려지자 신속한 움직임이 뒤따랐다. 실무진은 작업을 시작한 지 두 달 만에 전체 공정을 스택으로 확 바꿔 버렸다. 이어 1988년 1월 중순에는 완전한 4메가 D램 동작 칩의 先制 대량생산에 돌입했다. 그 뒤 스택 기술이 16메가 및 64메가 D램 기술로 표준화됨으로써 「정답」으로 입증되었다.

만약 판단 착오로 트렌치를 포기하지 않았다면 도시바와 NEC처럼 눈물을 흘릴 뻔했다. 도시바와 NEC는 4메가 D램 초기 제품에 트렌치 방식을 채택했다가 품질 및 收率 저하로 다시 스택으로 바꾸는 등 헤매다가 결국 히다치에 D램 부분의 선두자리를 빼앗기고 말았다.

다음은 「李健熙 에세이」에서 인용한 대목이다.

<나는 지금도 그렇지만 복잡한 문제일수록 단순화해 보려고 한다. 두 가지 기술을 단순화해 보니 스택은 회로를 고층으로 쌓는 것이고, 트렌치는 지하로 파들어가는 식이었다. 지하를 파는 것보다 위로 쌓아 올리는 것이 더 수월하고 문제가 생겨도 쉽게 고칠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반도체 산업은 「타이밍業」이다. 불확실한 미래를 예측하여 수조원에 이르는 先行투자를 감행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도 빠르지도 않고 늦지도 않게….


공격경영, 8인치 그리고 12인치

李회장의 승부수는 1993년에도 빛났다. 器興사업장의 반도체 5라인을 8인치 웨이퍼 量産 라인으로 결정한 것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6인치 웨이퍼가 세계 표준이었다. 면적이 제곱으로 증가하니까 6인치와 8인치는 생산량에서 두 배 정도의 차이가 난다. 8인치가 量産 능력 확보에 유리한 것임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지만, 기술적인 위험 부담 때문에 누구도 8인치를 선택하지 못하고 있었다.

三星의 「8인치」 先行투자는 엄청난 리스크를 감수한 결정이었다. 물론, 사업의 성패를 좌우하는 이같은 대형투자의 결단은 李健熙 회장의 몫이다.

李회장은 잠시의 주저함도 없었다. 오히려 일본 업체들이 주저하고 있는 「지금이 千載一遇(천재일우)의 기회」로 판단했다. 다음 「李健熙 에세이」에서 인용한 대목이다.

<나는 고심 끝에 8인치로 결정했다. 실패하면 1조원 이상의 손실이 예상되었던 만큼 주변의 반대가 심했다. 그러나 우리가 세계 제1위로 발돋움하려면 그때가 적기라고 생각했고, 越班(월반)을 하지 않으면 영원히 기술 후진국 신세를 면치 못하리라고 판단했다>

三星은 1993년 6월3일, 5라인을 성공적으로 준공했다. 매월 8인치 웨이퍼 2만장을 가공할 수 있는 5라인이 가세하자 三星은 웬만한 경쟁은 덩치만으로 밀어붙일 수 있게 되었다.

5라인을 준공한 1993년에 三星은 D램을 포함한 메모리 전체 부문에서도 세계 매출 1위로 올라섰다. 新기술에 대한 先行투자는 12인치 웨이퍼 도입에도 적용되었다.

당시 업계에는 『12인치를 최초로 투자하는 것과 마지막에 투자하는 것 모두 바보다』라는 말이 나돌 정도로 12인치 투자에 대해 모두가 자신 없는 상황이었다. 더욱이 반도체 시장은 바닥을 기고 있었다.

12인치 기술의 최신 트렌드(경향)를 주목하던 李健熙 회장은 다시 결단했다.

『三星은 12인치 시장에서도 선두를 유지한다』

누구도 나서지 못하던 대규모 투자의 시점을 또 한 번 결정한 것이었다. 결국 三星은 메모리 업계 최초로 12인치 웨이퍼를 도입했다. 이로써 최초 투자의 전통을 지키며 경쟁사와의 격차를 벌려 놓았다.

三星에는 李秉喆 선대회장과 李健熙 회장의 경영 스타일을 놓고 다음과 같이 대비한다.

『선대회장은 「돌다리도 두드려 본다」고 했는데, 李健熙 회장은 「나무다리라도 건너가라, 그것도 뛰어라」고 독려한다』

技術주기가 계속 단축되고 단시간에 기술을 확보하지 못하면 경쟁에서 낙오할 수밖에 없다. 반도체 기술이 1984년에서 1994년까지 10년 동안에만 무려 4000배가 진보했다. 李健熙 회장이 「스피드 경영」을 강조해 온 까닭이다.

三星은 숨돌릴 새도 없이 반도체 6, 7라인에 착공, 1994년 7월부터 가동에 들어갔다. 당시, 각종 전문기관의 수요 예측은 부정적이었고, 三星 내부 자금 사정으로도 추가투자는 무리한 상황이었다. 일본 업체들도 투자를 머뭇거리고 있었다.

역전극은 언제나 짜릿한 것. 그 결과, 16메가 D램의 개발은 일본과 동시에 착수했지만, 量産 시기를 앞당기면서 8인치 웨이퍼에 양산체제를 활용함으로써 경쟁력에서 앞설 수 있었다. 이를 계기로 三星전자는 세계시장에서 일본 업체를 따돌려 1993년 10월 이래 반도체 메모리 분야에서 不動의 세계 1위를 차지할 수 있었다.


無공해 美人

반도체 라인을 보여 달라는 요청을 받은 이승백 부장은 필자를 6인치 웨이퍼로 非메모리 반도체를 생산하는 제2라인으로 안내했다. 이곳의 주요제품은 DDI(디스플레이 드라이버 IC), ASIC(주문형 IC), Media(DVD, 모니터 제품용 반도체) 등이다.

유리창 너머로 라인 내부를 관찰했다. 작업자들은 백색 방진복에다 마스크 차림이었다. 손에는 장갑을 두 겹으로 끼고 있다. 실내온도 23℃의 청정한 작업장에서 하루 8시간 근무라지만, 거의 서서 해야 하는 작업인 만큼 노동강도가 보기보다 센 편이다. 4개조로 나뉘어 하루 3개조가 순차적으로 투입되기 때문에 설날이나 추석에도 라인이 멈추지 않는다. 512메가 D램 라인 하나만 스톱해도 月 1조원의 손실이 발생한다고 한다.

작업을 마친 「반도체 아가씨」들을 기숙사 응접실에서 만났다. 과연 소문대로 「無공해 美人」들이었다. 작업을 앞두고는 기초화장까지 금지된 아가씨들인 만큼 피부가 유별나게 해맑았다. 7년 경력의 原州 출신 金仙榮(27)씨, 2년 경력의 서울 아가씨(20), 1년 경력의 光州 아가씨(19)들로 모두 女商·女高 출신이다.

三星 내부에는 「女工」이란 말이 없다. 사표를 쓸 각오가 아니라면 「현장사원」이라고 불러야 한다. 과연, 그럴 만큼 연봉도 높았다. 작년에 金仙榮씨는 3500만원, 2년 경력자는 2200만원, 1년 경력자는 2000만원을 받았다고 했다.

세 아가씨는 모두 외출복 차림이었다. 金仙榮씨는 서울 언니 집에 가기로 되어 있고, 서울 아가씨는 위장병으로 구내 병원에 가야 한다고 했고, 光州 아가씨는 고향에 얼른 다녀올 작정이라고 했다. 光州 아가씨에게 물었다.

―고향친구들에게 자랑할 거 있어요.

『회사 30주년 기념 선물 「미니켓」을 가지고 갑니다』

―미니켓이 뭡니까(모르면 물을 수밖에 없다).

『MP3·캠코더·디카가 컨버전스(融複合·융복합)된 三星제품이에요』

―얼마짜린데요.

『70만원이래요』

(이어 原州 아가씨에게 물었다)

―시집가도 여기서 근무할 건가요.

『새벽에 들어오는 신부를 어느 신랑이 좋아하겠어요』

―그러면 여기 女직원들, 결혼하면 그만두나요.

『대개 그렇죠. 20년 근속하고 있는 언니도 있어요』

―돈은 좀 모았나요.

『월급의 60%는 저축해 왔어요.

―기숙사비 내고 용돈도 써야 할 터인데….

『이곳의 한 달 기숙사비는 몇만원 정도예요』

그리고 나서는 세 아가씨가 모두 까르르 웃었다. 마음들이 회사 밖으로 향한 처녀들을 오래 붙잡아 둘 수는 없었다. 관리를 맡은 女과장을 앞세워 기숙사(진달래棟)의 2인실·4인실 숙소 등, 요리실습실·피아노실 등 교육시설, 헬스장·노래방·홈패션실·요가실·DVD룸·홈시어터 등 취미시설, 미용실·피부관리실 등 편의시설을 둘러보았다.

깔끔했고, 짜임새도 있었다. 글로벌 일류 三星제품을 만들고, 거기에 맞춰 춤추고 노래한 「無공해 美人」들, 과연 이들의 신랑감은 누구일까.

현재, 기흥사업장內 기숙사 12개棟에 입주해 있는 「반도체 아가씨」는 모두 5686명이다. 사업장 울타리 바깥에 있는 남자 기숙사의 현재 인원은 3026명이다.

器興사업장을 나와 金善凡 과장과 함께 華城사업장으로 넘어갔다. 샛길로 질러가니 금방이다. 47만 평 규모에 7200명의 임직원이 일하는 곳이다. 10라인부터 14라인(현재 건설 중)까지 5개 메모리 라인이 집결되어 있다(器興사업장의 1~9라인에선 非메모리 반도체 생산).

작년 12월6일, 華城사업장에서는 반도체 사업 진출 30주년 기념행사가 열렸다. 三星은 30년간 반도체 부분에서만 매출 110조원, 순이익 29조원을 기록했다. 특히 1994년 이후 우리나라 전체 수출에서 10% 이상을 차지하며, 국가경제의 「孝子」가 되었다.

李健熙 회장은 기념식이 끝난 후 「반도체 역사 전시관」을 거쳐 「꿈의 기술」이라 불리는 90나노(nano: 10억 분의 1 수준의 정밀도를 요구하는 極미세가공 과학기술) 공정이 적용된 13라인을 둘러보았다. 기념행사에 앞서 李회장은 「반도체 전략회의」를 주재했다.

회의에서는 2010년까지는 반도체 신규 라인에 25조원을 투자해 누적매출 200조원, 신규 일자리 1만 개를 창출하기로 결정했다. 회의 석상에서 李회장은 다음과 같은 묻어 둔 말을 털어놓은 것으로 전해졌다.

『반도체 산업 진출 당시, 경영진들은 「TV도 제대로 못 만드는데 너무 최첨단으로 가는 것은 위험하다」고 만류했지만, 우리가 앞으로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은 하이테크 산업밖에 없다고 생각해 과감한 반도체 투자를 감행했습니다. (中略) 반도체에서 시기를 놓치면 기회손실이 큰 만큼 先占投資(선점투자)가 중요합니다』


반도체 성공의 요인-제품 차별화

三星전자가 판매하는 메모리 제품은 다른 업체의 제품보다 높은 가격을 받는다. 그것은 오로지 三星만이 독점 제공할 수 있는 제품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세계 게임기 시장의 양대 산맥인 마이크로소프트의 엑스 박스(X-BOX)와 소니의 「플레이스테이션(Playstation)」에 들어가는 그래픽 메모리는 100% 三星 제품이다.

三星전자의 「반도체 총괄」을 이끄는 黃昌圭 사장은 「차별화 또 차별화」를 강조한다. 세계 메모리 시장을 석권한 CEO 치고는 매우 단순한 입버릇이다. 하지만 메모리 반도체에 있어 차별화를 구현하기란 그렇게 단순한 일이 아니다.

컴퓨터에 사용되는 범용 제품이면서도 남들이 따라올 수 없는 특징적인 것은 一見 평범하면서도 非凡(비범)한 사람을 찾는 일과 같다. 三星은 이러한 「非凡」의 원천이 「標準(표준)」을 주도하는 데 있다고 판단한다. 그런 면에서 三星은 이미 强者다.

반도체 분야 3大 학회로 알려진 IEDM(International Electron Devices Meeting), VLSI(Very Large Scale Integration), ISCC(International Solistate Circuit Conference)에서 발표되는 三星의 논문 수는 세계 최다를 기록한 지 이미 오래다. 우수 논문만 발표 가능한 이 3大 학회에서 三星은 총 51편의 논문을 내놓았다.

다음 단계에서는 국제적인 標準化 기구를 통해 원천기술을 산업의 표준으로 만드는 데 노력한다. 표준은 한 번 결정되면 시장 장악의 절대적 요소가 된다. 그 표준을 벗어나는 모든 사양은 업계에서 배제되기 때문이다.

현재, 三星은 국제표준화기구(JEDEC) 이사회 의장, 멀티미디어카드협회(MMCA) 이사회 의장, 모바일표준화협의회(MIP) 이사회 멤버이다. 이같이 三星은 세계 주요 표준화 기구의 주도를 통해 DDR(더블 데이터 레이트: 전송률이 두 배 빠른 램), DDR2, DDR3 시장을 개척했다.

이제 三星은 더 이상 주변부가 아니라 세계 기술과 시장의 코아(중심부)가 되고 있다.

특히 三星의 플래시 메모리 부문의 「세계 최초 개발」 기록이 계속되고 있다. 2002년 9월 2기가(1기가는 1000메가) Nand 플래시(데이터 저장형), 2003년 9월 4기가 Nand 플래시, 2004년 60나노 8기가 Nand 플래시 개발이 그렇다. 2003년 1월 이후에는 세계 반도체 업계 2위(全분야 합산)로 약진해 있다.


세계 반도체 산업의 不夜城

三星은 사업장이나 직무의 성격에 따라 융통성이 있지만 대체로 「8·5制」를 채택하고 있다. 오전 8시 출근, 오후 5시 퇴근이다. 新경영 초기에는 7·5制까지 강행했다.

퇴근시간을 넘기며 필자에게 「新문명」을 가르쳐 준 30代의 金善凡 과장에게 저녁을 함께 하자고 제안했다. 華城사업장 인근의 갈비집에서 식사를 하면서 「반도체 사업의 성공과 李健熙 회장의 역할」이란 話頭를 던져 보았다. 그는 준비된 답변을 했다.

『반도체 사업은 얼마나 의사결정을 빨리 하느냐는 「경영자의 결단력」, 그리고 개발기간을 얼마나 단축하느냐 하는 「시간과의 싸움」으로 승패가 좌우됩니다. 三星의 반도체 사업 30년史에서 회장님이 보여 준 결단력은 세계 시장을 석권하는 데 결정적이었습니다』

―예컨대 어느 시기의 어떤 결단력 말하는가.

『이건 저의 말이 아니라 전문가들의 공통된 평가입니다. 1983년 器興사업장 건설 시 설계와 공사를 병행하여 1년 반이 걸리는 工期를 6개월 만에 완공해 제품생산을 2년이나 단축했습니다. 그해 2라인 건설 시에도 리스크를 무릅쓰고 6인치 웨이퍼를 선택했습니다. 당시 세계 대부분의 업체가 사용 중인 5인치 웨이퍼를 포기하고 시험생산을 통해 테스트 중인 6인치 웨이퍼를 선택해 後發(후발)의 핸디캡을 극복했습니다. 이로써 생산성이 1.4배 증가하는 효과를 거두었어요…』

「보충강의」에 의해 필자에게 「복습」을 시키는 것이었다. 그의 설명은 알뜰했다. 하여튼 三星 사람의 특성은 성실함이다. 金과장도 그러했다. 新문명에 대한 이해도가 낮은 필자의 엉뚱한 질문에 그는 꽤나 고생했을 터이다.

「젊은 그」는 헤어지면서 『鄭위원님, 여길 한 번 더 오실 것 같습니다』라고 예언(?)했다(그의 예언은 적중했다. 나흘 후 필자는 다시 水原사업장과 器興사업장으로 찾아가 보충취재를 해야만 했다).

三星은 華城사업장을 나노기술과 메모리 복합화 기술 등을 적용한 메모리 생산단지로 키워 인근 器興사업장과 더불어 「세계 반도체 산업의 메카」로 육성할 계획이다. 회식을 끝낸 시각은 밤도 깊었지만, 華城사업장과 器興사업장은 말 그대로 不夜城(불야성)을 이루고 있었다.

필자의 답사 후에도 三星전자의 勝戰譜(승전보)가 거듭 날아왔다. 삼성전자는 세계 최대인 82인치 초박막 액정화면(TFT-LCD)의 개발을 발표했다. 65인치를 내놓은 일본 샤프를 제치고 5개월 만에 세계 頂上을 탈환한 쾌거였다.

지난 3월6일에는 삼성전자와 LG전자가 세계 처음으로 고속 이동 중에 動영상 통화가 가능한 3.5세대 휴대폰을 개발했다는 소식도 들려왔다. 유럽 방식인 3세대 핸드폰보다 6배나 빠른 초당 14.4메가 비트를 전송하는 「꿈의 이동전화」라고 한다. 이제, 三星은 글로벌 超일류를 향한 「좋은 흐름」을 탄 것 같다.●
Copyright ⓒ 정순태의 역사산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