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조선 기사

[鄭淳台의 역사 기행] 서울版 문화혁명 -朴正熙 格下운동의 裏面

未完의 개혁가 正祖로 성공한 개혁가를 치다

글 정순태 기자  2005-0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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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正熙(박정희) 格下」운동이 본격화하고 있다. 景福宮(경복궁) 정문에 걸린 朴대통령 글씨의 한글 편액 「광화문」을 내리고 正祖의 글씨로 바꿔 달겠다는 兪弘濬(유홍준) 문화재청장의 발언이 그 신호탄이었다. 中國을 30년 후퇴시킨 「毛澤東(모택동) 방식의 文化革命(문화혁명)」이 盧武鉉(노무현) 정권下의 한국에서도 가능한 것인가.

같은 날(지난 1월24일), 경기도 수원시에 있는 正祖의 사당 華寧殿(화령전)에 걸린 朴正熙 필적의 편액 「雲漢閣(운한각)」도 철거되고, 그 대신에 現役 서예가가 쓴 편액이 걸렸다. 雲漢閣은 正祖의 眞影(진영)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곳인 만큼 光化門(광화문)의 현판을 正祖의 글씨를 集字(집자)해서 바꿔 달겠다는 발상과 맥락을 같이한다. 왜 하필이면 「朴正熙 지우기」에 正祖가 동원되는 것일까.

兪청장은 盧武鉉 대통령에게 『正祖와 닮으셨다』고 찬양했다. 보도에 따르면 兪청장은 지난해 10월31일 盧대통령과 함께 창덕궁 후원을 거닐며 「3시간 넘게 獨對(독대)」하면서 조선왕조 임금 가운데 학문의 成就度(성취도)가 가장 높았던 正祖와 現職 대통령을 같은 반열에 올렸던 것이다.

1개월여 전에 그를 발탁한 데 대한 보답의 뜻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 그는 盧대통령이 正祖와 비슷한 이유로 다음 세 가지 점을 제시했다고 한다. 즉, 『개혁을 기치로 내건 것, 수도를 이전하려다가 성공하지 못한 것, 소장 학자(혹은 각종 위원회)를 중시하려고 노력한다』는 것이다.

盧대통령이 『正祖를 잘 모르니 正祖에 대해 읽어 보겠다』고 답하자, 兪청장은 『正祖와 관련한 책을 보내겠다』고 했으며, 그 직후 鄭玉子 교수(서울大)의 「正祖시대의 사상과 문화」 등 세 권의 책을 보냈다고 한다. 다음은 兪청장이 盧대통령에게 보냈다는 「正祖시대의 사상과 문화」의 共著者(공저자) 중 한 분인 鄭玉子 교수가 그 책의 서문에 쓴 한 구절이다.

<조선시대는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와 상치되는 가치관과 방향성을 갖고 있었다. 현대는 민주주의라 하여 투표로 지도자를 선택하는 데 비해 조선시대는 세습 君主制였지만, 실제 지도자의 자질이나 지도자 교육이라는 측면에서 비교하자면 오늘날의 제도가 반드시 바람직하다는 해답은 나오지 않는다>


민족의 기술문화에 긍지 갖게 하는 華城

鄭玉子 교수의 논리에 따른다면 正祖와 盧대통령의 평면적 對比는 어렵다. 공교로운 것은 鄭교수가 서울大 奎章閣(규장각)의 現職 관장이라는 점이다. 서울大 규장각에는 正祖에 의해 창덕궁內에 세워진 규장각의 도서들을 옮겨다 보관하고 있다. 10년 전, 필자는 서울大 규장각에서 華城(화성: 水原城) 건설공사의 결과보고서인 「華城城役儀軌」(화성성역의궤: 10권 10책)를 일람하고 우리 민족의 기술문화에 대한 깊은 긍지를 갖게 되었다.

「華城성역의궤」에는 어느 성루에 못을 몇 개 박았는데, 그 값이 얼마라는 내용까지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기록을 남겼기 때문에 1970년대의 대대적인 華城 복원공사가 가능했다.

華城이 복원된 1970년대는 朴正熙 집권시절이다. 朴正熙는 전국의 문화재 복원사업에 매우 열정적이었다. 조선조의 유적으로서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으로 선정된 건축물은 宗廟(종묘)와 華城뿐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朴正熙는 自己成就(자기성취)의 희생자인지도 모른다.

儀軌(의궤)에는 공사내용별 담당 匠人(장인: 기술자)의 출신지와 성명을 기록함으로써 부실공사를 방지했다. 예컨대 八達門(팔달문) 옹성의 성가퀴를 쌓은 石手(석수)는 충청도 어느 고을에 사는 金 아무개라고 명시되었다. 요즘 용어로 말하면 土木實名制(토목실명제)를 시행했던 것이다.

「석공 1패에 매일 쌀 6되와 돈 4전5푼이 지급되었다(石手每牌 每日 米六升 錢四錢五分)」

이처럼 노동자에게 지불한 노임까지 낱낱이 적혀 있다.

1패라면 기술자 1명과 조수 1명의 2인 1조. 당시의 쌀값을 획일적으로 말할 수는 없지만 대체로 1전으로 쌀 2.5되를 샀다고 하니까 현금까지 합쳐 환산하면 石手 1패의 하루 노동의 代價는 쌀 17되를 받은 셈이다. 오늘날의 노임체계로 보면 高임금이라 할 수 없지만 가정경제에서 쌀의 비중이 지금보다 훨씬 높았던 당시의 상황으로 판단할 때 『華城 공사는 工匠(공장)들에게 정당한 노임을 지급하고 준공한 최초의 城役(성역)이었다』는 평가가 결코 어색하지 않다.

華城성역에는 돈 87만 냥(1냥은 10전)과 쌀 1500섬이 투입되었다. 사용내역을 보면 자재비 32만 냥, 인건비 30만 냥, 운반비 22만 냥, 기타 비용 9만 냥이었다(쌀 1500섬도 돈으로 환산됨). 총공사비의 3분의 1을 인건비로 썼다는 것은 당시로선 상당한 기술자·노동자 우대정책이라 해도 좋다.

러시아의 계몽군주로 회자되는 표트르 1세도 18세기 초에 새 수도 페테르부르크를 건설했다. 하지만 건설 당시 엄청난 사망자가 발생해 『페테르부르크는 해골 위에 세워졌다』는 비판을 받았다.

반면 正祖는 뙤약볕 아래 작업하는 노동자의 건강을 염려해 滌署劑(척서제)까지 하사하는 휴머니즘을 구사했다. 특히 華城 성내 팔달산 밑에 行宮을 지으면서 철거보상비를 초가 몇 칸이면 얼마, 기와집 몇 칸이면 얼마 하는 식으로 책정해 민원 발생의 소지도 없앴다.

華城의 공사는 방대한 규모에 비해 2년6개월이라는 짧은 기간에 완공했다. 이같은 工期 단축은 擧重機(거중기: 起重機) 등 다양한 운반기구를 사용한 데다 당시에 축적된 과학적 시공기술에 힘입은 것이었다.


正祖의 매력

서울大 규장각 관장으로서 正祖 연구의 大家인 鄭玉子 교수는 正祖를 어떻게 보고 있는가. 그녀가 본 正祖는 「매력」 있는 「帝王(제왕)」이었다. 兪弘濬 청장으로부터 『正祖와 닮았다』는 찬양을 받은 盧대통령이 만약 아래에 인용된 鄭교수의 글을 읽었다면 흐뭇했을지 모르겠다.

<正祖라는 왕은 개인적인 매력도 함께 하고 있다. 前期의 世宗, 後期의 正祖라 할 만큼 正祖는 조선을 대표하는 제왕이고, 世宗이 학술 연구 기관이자 정책 수립 기관으로 集賢殿(집현전)을 설치한 데 비해 正祖는 奎章閣을 설치했다는 공통점도 있다. 게다가 正祖는 스스로 君師(군사:임금이자 스승)를 자부할 만큼 많은 글을 써서 「弘齋全書(홍재전서)」라는 개인문집까지 남겼다>

조선왕조 시대에 임금과의 獨對는 불법이었다. 신하가 임금을 만나는 자리엔 「左行右記」라 해서 史官 2人이 반드시 배석했다. 왼쪽에 앉은 史官은 王의 몸짓을, 오른쪽의 史官은 대화대용을 낱낱이 기록했다. 아첨이나 모략 그리고 國政(국정)의 誤導(오도) 등을 원천봉쇄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였다.

조선왕조 때 獨對가 이뤄지면 으레 정적에 대한 숙청 등이 뒤따라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그런데도 兪청장은 왜 獨對의 내용을 공개했을까.

「3시간 獨對」라면 결코 짧은 만남이 아니다. 공개된 대화 내용이 전부는 아니었을 터이다. 그렇다면 어떤 거사를 위한 「코드」를 맞추거나 「密旨(밀지)」가 오간 것인지, 그 전모는 알 수 없다.

어떻든 正祖는 아카데믹하게 접근해도 매우 드라마틱한 정치·정략적인 역사인물이다. 鄭玉子 교수는 正祖 연구에 대한 학계의 동향을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최고 통치자의 이상형으로서 正祖와 그 시대의 사상과 문화를 밝히는 일은 1970년대 이후 학계의 연구 과제가 되어 있다. 이에 대한 기존의 연구 성과로서는 이 시대의 새로운 시대사상으로 부상한 實學(실학)사상 내지 北學사상과 英祖·正祖代에 걸쳐 시행된 蕩平(탕평)정책에 대한 정치사적 연구가 있다. 아울러 正祖의 학예사상을 비롯하여 그의 권력 기반인 규장각의 문화 정책 수립, 正祖의 인적 기반 확보와 관련이 있는 抄啓文臣(초계문신) 교육 프로그램(文臣 재교육 제도), 비명에 죽은 아버지 사도세자의 복권과 그의 지역적 기반 다지기와 관련한 신도시 華城 건설 등에 관한 연구가 진척되었다>

正祖는 해외의 선진문물을 도입하는 데 있어 매우 적극적이었다. 즉위하자마자 乾隆帝(건륭제) 통치의 전성기였던 淸國에서 「古今圖書集成(고금도서집성)」 6000여 부를 도입하고, 그중 서양 과학기술 전문서인 「器機圖說(기기도설)」을 엘리트 신료들과 함께 집중연구했다. 이런 노력에 의해 집권 후반기의 華城 신도시 건설 때 거중기·녹로·유형거 등 운반과 하역용 중장비를 제조할 수 있었던 결정적 바탕이 마련되었다.


사도세자의 참혹한 죽음

正祖(재위 1776~1800)는 英祖 28년(1752)에 思悼世子(사도세자)와 惠慶宮 홍씨 사이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이름은 (산), 자는 亨運(형운), 호는 弘齋(홍재)이다.

英祖 38년(1762) 무더운 閏(윤) 5월13일, 사도세자가 못질하여 틈까지 막힌 뒤주 속에 갇혔고, 1주일 후 굶어 죽었다. 사건의 발단은 老論(노론)의 사주를 받은 羅景彦(나경언: 형조판서 尹汲의 청지기)이 형조에 올린 告變(고변)에서 시작되었다. 고변서의 내용은 세자가 그 주위의 내시들과 결탁하여 역모를 꾸미고 있다는 것이었다.

곧 나경언에 대한 英祖의 親鞫(친국)이 벌어졌다. 친국을 받던 나경언은 품속에서 사도세자의 비행 10여 조가 적힌 문건(제2의 고변서)을 올렸다. 세자의 잦은 미행, 세자가 사람을 죽인 일, 세자의 낭비 등에 관한 과장된 고발장이었다. 이에 英祖의 노여움이 폭발했다.

나경언을 사주한 배후세력에 대한 조사는 이뤄지지 않았다. 중신들의 요구에 따라 英祖가 나경언도 죽일 것을 허락했다. 이로써 사건은 일단 미봉되었다. 그러나 한 나라의 世子를 모함하여 죽인 일에 뒤탈이 없을 수 없었다. 이것이 바로 壬午事變(임오사변)으로, 그후 끊임없는 정쟁의 중심 테마가 된다.

사도세자의 아들 李(이산)은 11세의 나이로 할아버지(英祖)에게 아버지(思悼世子)가 죽임을 당하는 꼴을 목격하고 냉엄한 정치현실을 일찌감치 알아차렸다. 이런 世孫이 당시 임금까지 주무르던 老論 僻派(벽파)의 음해에 걸려들지 않으려면 好學(호학) 이외의 선택은 없었다. 그는 반나절에 13권의 책을 읽어낼 만큼 학업에 열중했다.

英祖가 왕위에 오른 지 어언 51년, 병석에 있은 지 10년이 가까워 오고 있었다. 英祖는 24세의 世孫에게 承命代理(승명대리)를 맡기려 했다. 이때 좌의정 洪麟漢(홍인한)은 『東宮은 노론이나 소론을 알 필요가 없고, 이조판서나 병조판서도 알 필요가 없으며, 국사에 있어서는 더더구나 알 필요가 없다』는 「三不必知說(삼불필지설)」을 내세웠다. 世孫의 권위를 전면 부정한 것이었다. 이는 世孫의 폐위를 공공연히 주청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홍인한이 누구인가. 그는 世孫의 외조부인 洪鳳漢(홍봉한)의 친동생이다. 豊山(풍산) 홍씨들의 상당수가 時派에 가담하여 世孫을 보호했지만, 그는 僻派(벽파)에 가담하여 世孫의 즉위를 반대했다.

그러면 洪鳳漢의 태도는 어떠했는가. 사도세자의 장인이었던 그는 세자가 뒤주에 갇히는 날 大勢를 돌이킬 수 없음을 알고 한강에 나가 여러 대신들과 뱃놀이를 하면서 끝내 세자의 죽임을 묵인했다. 그러나 英祖가 사도세자의 아사사건을 뉘우치자 재빨리 태도를 바꾸어 사도세자의 죽음을 초래케 한 金龜柱(김귀주: 英祖의 繼妃 貞純王后의 동생) 일당을 탄핵, 정권을 장악하는 한편 사도세자의 죽음의 전말을 적은 「垂義篇(수의편)」을 찬술, 對 僻派 공격의 근거로 이용했다.

홍인한의 「三不必知說」은 외척세력에 강한 불만을 품어 왔던 攻洪派(공홍파)를 결속케 했다. 少論계열의 徐命善(서명선: 正祖 治世에 영의정 역임)이 상소, 홍인한을 성토했다. 여기에 힘입은 英祖는 마침내 世孫의 손을 들어 주었다.

世孫의 대리청정 2개월 남짓 만에 英祖가 사망했다. 世孫은 英祖의 뒤를 이어 즉위했다. 그가 조선조 제22대 임금 正祖이다.

正祖의 침전에는 「蕩蕩平平室」이란 편액이 걸렸다. 아버지의 억울한 죽음과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 깊은 상처를 품은 채 성장했던 正祖는 당쟁의 폐해를 일소하기 위해 英祖代부터 추진되어 오던 蕩平策(탕평책)을 표방했던 것이다.

正祖의 탕평책은 峻論(준론) 탕평책이었다. 正祖는 英祖시대의 「혼돈의 탕평」과 구분하여 자신의 정치를 「義理의 탕평」이라고 규정했다. 이는 英祖 후반기의 탕평책이 「왕의 인척이나 權奸(권간)」에 의해 악용됨으로써 세간에서 「탕평을 주장하는 黨(당)이 옛날 黨보다 심하다」는 비판을 받았기 때문이다.


「죄인의 아들」로 즉위

「죄인의 아들」로서 왕위에 오른 正祖는 지지세력을 규합하기 위해 정적들을 위협하고 회유하는 權道(권도)를 무수히 구사했다. 그는 堯(요)·舜(순)과 같은 聖王(성왕)을 자처했다. 구중궁궐에서 자랐지만 文武를 兼全(겸전)했다. 신료들과 활쏘기 시합을 할 때 마지막 화살 한 개를 일부러 허공에 날려야 신하들의 체면이 설 정도의 名弓(명궁)이었다.

正祖는 예술적 재능도 대단했다. 그가 그린 「파초도」와 「국화도」는 조선후기 文人畵(문인화)를 대표할 만한 수준의 작품이다. 예술가의 후원자였다. 正祖는 그의 御眞(어진)을 그린 檀園 金弘道(단원 김홍도)를 일약 현감으로 발탁하기도 했다. 眞景時代(진경시대), 즉 「正祖 르네상스」의 주역과 추동자는 바로 正祖 그 자신이었다.

正祖는 세손 시절뿐만 아니라 즉위 초에도 암살의 위기에 직면했다. 正祖 즉위년(1776) 洪相範(홍상범) 등 老論 벽파 계열의 자제 46명이 왕의 침소인 尊賢閣(존현각)에까지 침입한 역모사건이 일어났다. 이들은 궁궐 안의 내시·궁녀 등과 결탁하여 正祖를 시해하고 正祖의 庶동생인 恩全君(은전군)을 추대하려고 기도했다가 주살되었다.

正祖는 자신의 경호를 위해 숙위소를 설치하고 洪國榮(홍국영)을 숙위소 대장 겸 도승지로 임명하여 실권을 부여했다. 勢道를 잡은 홍국영은 왕비에게 소생이 없는 것을 기화로 그의 누이동생을 후궁으로 입궁시켜 「포스트 正祖」의 권력까지 도모했다. 1779년 홍국영은 훈련대장을 겸임했지만 그의 누이동생인 元嬪(원빈)이 병사했다. 그 이듬해, 홍국영은 탄핵을 받아 全가산을 몰수당하고 향리로 쫓겨났다. 울화를 풀지 못하고 전전긍긍하던 그는 이듬해 병을 얻어 죽었다.

이제 正祖는 자신의 왕권 강화에 직결된 정치기반의 확보에 나섰다. 그는 즉위 직후 奎章閣 설치를 명했고, 재위 5년부터 그 조직과 기능을 체계적으로 정비했다. 규장각이라면 원래 역대 임금의 御筆(어필)과 御製(어제) 등을 보관하는 왕실 도서관이다. 이렇게 신하된 사람의 입장에서 그 누구도 반대할 수 없는 설치 명분을 지니고 있었지만, 正祖는 『본래의 의도는 딴 데 있다』고 했다. 규장각은 실은 正祖의 왕권 강화를 위한 기획연구기관이었다.

규장각 閣臣(각신)은 학식과 덕행을 겸비한 신료들 가운데 선발된다고 했지만, 각신들의 면면을 보면 제1차적 자격 요건은 正祖가 신임할 수 있는 時派 인물임을 알 수 있다. 규장각의 각신은 제학 2명, 직제학 2명, 각신 1명, 대교 1명 모두 6명으로 구성되었다. 正祖시대에 규장각에 재직한 각신은 모두 38명이었다.

규장각신에게는 많은 특권이 부여되었다. 入直閣臣(입직각신)은 아침저녁으로 왕을 만나 의견을 개진할 수 있었다. 이 밖에 閣臣에게는 백관에 대해 請罪(청죄)할 수 있는 탄핵권을 주었다. 특히 入直閣臣을 거치면 바로 요직인 吏曹銓郞(이조전랑)에 추천되는 자격을 갖도록 했다.

正祖 6년 5월, 노론의 李澤徵(이택징)은 『규장각은 곧 전하의 私閣이지 나라의 公共閣(공공각)이 아니며, 여기의 신하들은 곧 전하의 私臣이지 조정의 신하가 아니다』고 비판했다. 심지어 老論의 영수로서 「비판적 참여자」였던 金鍾秀까지 正祖 8년 6월에 완성된 「奎章閣志(규장각지)」 발문에서 『겉으로는 禮貌(예모)를 가탁하고 있으나 안으로는 임금의 腹心(복심)이 따로 있다』면서 규장각을 경계했다.


抄啓文臣―왕권 강화를 위한 태스크포스

正祖 5년(1781)에는 抄啓文臣(초계문신) 제도가 신설되었다. 재능 있는 37세 이하 젊은 문신을 뽑아서(抄), 규장각에서 가르쳐(啓) 40세가 되면 졸업시키는 再교육제도였다. 초계문신은 이후 20년간 모두 138명이 배출되었다.

초계문신에는 1694년의 甲戌換局(갑술환국) 이래 정계에서 소외당했던 南人 계열의 젊은 엘리트들이 다수 선발되었다. 이들에 대한 正祖의 관심은 지대했다. 몸소 이들에게 학문을 가르치고, 숙제를 내고, 親試(친시)를 실시했다.

「正祖 스쿨의 엘리트들」은 왕권 강화를 위한 「태스크포스」였다. 그 「우등생」인 南人 계열의 李家煥(이가환)·丁若鏞(정약용) 등은 正祖의 깊은 총애를 받으며 「미래의 재상감」으로 성장했다.

正祖가 초계문신 제도를 시행한 목적은 무엇이었을까. 한국학대학원 朴賢謨(박현모) 교수는 다음과 같이 분석했다.

『유교의 유토피아 시대인 堯·舜·禹의 三代가 끝나고 君主가 세습되면서 임금의 길[宗統]과 스승의 길[道統]이 갈라졌으니 道統(도통)이 在野 山林에 있다는 것이 조선조 선비관료들의 다수 의견이었습니다. 이런 견해와 달리 正祖는 자신을 聖王의 지위에 놓고 新進 文臣들에 대한 再교육에 나서는 등 道統까지 장악하려 했습니다.

국왕 자신의 親講(친강)·親試가 한 달에 한 번씩 거행되었는데, 심지어 성적이 부진한 抄啓文臣에 대해서는, 그가 당당한 文科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매질까지 하며 독려했습니다. 드디어 抄啓文臣 제도가 신하를 경시하고 公論(공론)정치를 해친다는 비판이 제기되었습니다』

正祖 12년 1월, 少論系의 오익환은 다음과 같은 요지의 상소를 했다.

<자신의 총명을 믿으면 도리어 자만하게 되고, 진실과 거짓을 지나치게 살피면 억측을 하게 됩니다. 신하를 가르칠 수 있는 상대로 삼기를 좋아하시어 氣를 꺾고 윽박지르는 위엄이 간혹 諫臣(간신)에게까지 행해지고, 신하를 싫어하고 박대하시어 업신여기는 뜻이 貴近(귀근)에게까지 드러납니다. (中略) 이 때문에 大官들은 오직 임금의 뜻을 받들어 따르기만 힘쓰고, 관료들은 임금의 명령에 달려가 순종하기만을 일삼아, 진퇴를 명하는 대로만 하여 자신의 지조는 돌아보지 않고, 아첨이 풍습화하여, 충직을 바치는 사람이 없습니다>

오익환은 『말을 하지 않는다고 꾸짖어도 효과가 없고 바른 말을 하라는 傳敎(전교: 임금이 내린 명령)가 전혀 신뢰를 받지 못한다는 것이 오히려 당연하다』면서 公論정치 不在의 현실을 개탄했다. 그러나 正祖는 이런 비판을 王權보다 臣權의 우월을 주장하는 老論系의 저항으로 판단했다.


壯勇營 증강의 속셈

正祖로서는 臣權 중심의 노론계를 견제할 필요성이 절실했다. 孝宗 이후 尊周論(존주론: 중국의 漢族 정통왕조를 尊重함)과 北伐論(북벌론: 정통왕조 明을 멸망시킨 만주족의 淸을 정벌함)을 名分으로 삼고 臣權 강화를 주도해 온 老論은 그 어느 정치세력, 심지어 임금조차도 대항할 수 없었던 조선 政界의 主流(주류)였다. 다음은 배병삼 교수(한국정치사상사)의 견해이다.

『正祖는 아버지를 臣權주의자들의 손에 잃고, 先王인 英祖가 탕평책이라는 王權 중심적인 구호를 내걸었지만, 기존의 당파를 무마하는 유화정책(調劑保合)을 펴지 않으면 안 될 만큼 살얼음판 같은 정국추이를 절치부심하며 지켜보았을 것입니다. 이러한 심정은 正祖가 「(世孫 시절의) 내가 밤잠을 자지 못하고 책을 읽다가 새벽 닭이 울고 나서야 잠자리에 든 적이 몇 밤이었던가」라고 토로한 바 있었어요. 암살 위협 때문에 그랬어요. 그로서는 새로운 정치 패러다임을 형성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겁니다』

宿衛대장으로서 勢道家였던 洪國榮의 실각과 더불어 宿衛所(숙위소)가 혁파되고, 새로운 국왕 경호체제가 모색되었다. 正祖 6년(1782) 壯勇衛(장용위)라는 국왕 호위 전담 부대의 설치가 그것이었다.

軍權도 왕권 아래 일원적으로 통제되어야 했다. 正祖는 軍營(군영)이 5개로 나뉜 것은 家兵의 폐단과 통솔의 어려움으로 정치적 혼란을 초래한다고 보았다. 반대세력(노론 僻派)이 포진한 훈련도감 등의 최고지휘관 4명이 하나하나씩 반역죄로 처단되었다. 이어 壯勇衛를 확대 개편한 壯勇營(장용영)이 창설되었다.

출범 초기 3개 肖(초: 중대)에 불과했던 장용영은 正祖 17년에 이르러 漢城 주둔 內營軍 25초와 華城 주둔 外營軍 42초로 증강되었다.

正祖는 정적인 노론 僻派를 제압하기 위해 諸派(제파) 연합전선을 형성했다. 벽파의 논리에 따르면 그는 「죄인」 사도세자의 아들이었다. 어떻게든 벽파의 논리를 깨지 않으면 허수아비 임금을 면할 방법이 없었다. 正祖는 「아버지의 죄」를 벗기기에 집요했고 잔혹했다. 그의 외조부 洪鳳漢이 英祖의 눈치를 살펴 사도세자의 죽임을 방관했다고 해서 제사 모실 외사촌 하나의 목숨만 붙여 놓고 外家의 씨를 말리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正祖에게 있어 華城 건설 및 사도세자 무덤(顯隆園·현륭원) 이전은 「정적집단이 무릎을 꿇지 않으면 내가 죽는다」는 이판사판의 싸움이었다. 華城에 주둔했던 壯勇外營의 병력이 최대·최강이었던 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在京의 반대파가 저항하면 100리 거리에 포진해 있는 壯勇外營軍을 동원, 철퇴를 가하겠다는 무력시위의 냄새가 물씬했기 때문이다.

물론 華城 건설의 목적이 왕권 강화에만 있었다고 할 수는 없다. 「顯父(현부: 사도세자)에 융성하게 보답한다」는 의미의 顯隆園(현륭원: 후일 다시 隆陵으로 높임)이란 이름에는 아버지에 대한 正祖의 효심이 짙게 배어 있다. 또한 임진왜란(1592~1598)과 병자호란(1636~1637)에서 드러난 都城(도성: 서울) 방어체제를 보강하려는 목적도 간과할 수 없다.

도성의 북쪽은 북한산성, 서쪽은 강화도의 요새와 해협, 동남쪽은 남한산성이 배치되었지만 임란 때 왜적의 주요 접근로였던 정남쪽의 방비가 자연장애물인 한강 이외엔 너무 허술했던 것이다.

正祖의 탁월함은 華城을 단순한 군사·소비도시로 만들지 않았다는 점에 있다. 華城은 영남대로(제4대로: 서울-동래)와 제3대로(서울-호남)를 오가는 상인들이 통과해야 하는 교통과 상업의 요충지로 격상되었다. 또한 전국 최대의 牛시장을 개설하고, 큰돈이 돌아가게 하는가 하면 만석거·서호 등 인공저수지를 축조하고, 작물시험장도 설치하여 농업기술의 센터로 삼았다. 특히 한성·평양의 부호들을 유치함으로써 華城을 완전한 自足도시로 만들었다.

正祖는 신하를 다루는 데 있어 때로는 가혹했다. 예컨대 正祖는 그의 총신이었던 丁若鏞의 장인을 어쭙잖은 일로 트집을 잡아 禁軍(금군)들로 하여금 곤장을 치게 했다. 정약용의 장인은 변방에서 장수를 지내다 입조했는데, 그런 그에게 뜬금없이 창경궁의 돌계단을 뛰어올라가라는 기합을 주었다. 武官이긴 하지만 이미 쉰 살을 넘긴 그가 돌계단의 중간에서 어정거리자, 「명령 불복종」에 진노한 正祖로부터 그런 봉변을 당한 것이다.

正祖는 世宗과 같이 부드러운 군주가 아니라 권모와 술수를 종횡으로 구사한 군주였다. 華城 陵幸(능행) 때 正祖는 남태령을 넘어 과천으로 이어지는 길을 굳이 마다하고 지금의 시흥대로의 바탕이 된 능행로를 닦게 했다. 과천길 언저리에 사도세자 처벌에 적극 가담했던 벽파의 영수였던 金尙魯(김상로)의 형 若魯(약로)의 무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만큼 그는 반대파에 대한 원한에 사무쳤다.

正祖는 그에게 저항하는 세력에 대해 가혹하게 다뤘지만 老論 집권 70년간 소외되었던 南人을 중용하고, 老論 온건파와 少論을 포섭·수용했다.


[한국학대학원 연구교수 朴賢謨와의 인터뷰]


萬川明月主人翁의 의미

필자는 한국정치사를 전공하는 건국大 申福龍(신복룡) 교수에게 正祖의 정치에 관한 대표적 논문 한 편을 추천해 달라고 청했다. 申교수는 주저없이 한국학중앙연구원(舊한국정신문화연구원) 부설 한국학대학원 朴賢謨 연구교수의 논문 「正祖의 聖王論과 更張정책에 관한 연구」의 일독을 권했다. 朴교수가 서울大 정치학과에서 취득한 박사학위 논문이었다. 이 논문은 수정·보완되어 「정치가 正祖」(푸른역사·2001)라는 제목의 단행본으로 발간되었다.

1965년 전남 함평 출생이니 이른바 「386세대」의 신예학자다. 朴교수와의 인터뷰는 그의 사정으로 당초 예정보다 1주일 늦어져 지난 1월7일 오전 한국학대학원에 있는 그의 연구실에서 이뤄졌다.

―正祖가 聖王論을 주장하는 이론적 틀은 무엇입니까.

『正祖는 자신을 단순한 聖人이 아니라 聖王이라고 자임했습니다. 「君主의 길」과 「聖人의 길」이 나뉘기 이전에 존재했던 三代시절의 堯·舜처럼 국왕 자신이 정치의 핵심 주체이자, 君師로서 잘못된 정치를 바로잡고 臣民을 교화해야 한다는 王權강화론인 것입니다. 정치의 중심 주체인 국왕이 대립하는 朋黨(붕당)을 적극적으로 조정·중재하고 잘못된 법과 제도를 개혁해 나가야 한다는 주장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그가 그리려고 했던 정치의 모습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그는 국왕과 백성의 관계를 「달」과 「냇물」로, 왕과 신하를 「달빛」과 「구름」에 비유하여 설명하곤 하였죠. 그 자신을 「모든 냇물을 비추는 달빛과 같은 존재(萬川明月主人翁·만천명월주인옹)」로 비유했던 것입니다』

―正祖의 號(호)가 바로 萬川明月主人翁 아닙니까. 朴교수는 만천명월주인옹을 正祖가 구사한 「달빛의 메타포」라고 멋지게 표현하셨던데….

『世宗의 「月印千江之曲」에서도 나타났던 이같은 「달과 냇물」의 메타포(隱喩)는 求心性(구심성)과 직접성을 특징으로 하는 儒家的 君主像(유가적 군주상)의 전형을 보여 줍니다. 국왕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조선조의 소용돌이 정치는 西洋 정치에서 강조되는 「太陽王(태양왕)」의 이미지와 대조를 이룹니다.

즉, 모든 대상을 향해 강렬하게 투사돼 「햇빛」을 연상시키는 태양왕과 달리, 어둠 속에서 커다랗게 홀로 떠 있는 「明月王」의 이미지는 고도의 求心性입니다. 햇빛은 사물을 내려다보게 하는 遠心性(원심성)을 갖는 데 비해 달빛은 고개를 들어 우러러보게 하지 않습니까. 달빛은 또한 햇빛과는 달리 직접성을 특징으로 합니다』

―맨눈으로 바로 쳐다볼 수 없는 해와 달리, 달은 중간에 어떤 것도 가려져 있지 않을 때 가장 잘 보이죠.

『正祖는 高度의 재량권과 통합력을 가진 萬機總攬(만기총람)의 君主로서 백성들과 직접적으로 만나는 聖王의 모습을 그리려고 했던 거죠』

―좋은 정치가 베풀어지려면 국왕(달빛)과 백성(냇물) 사이에 어떤 중간세력(구름)도 놓여 있지 않은 상태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말이군요.

『종래 士林정치의 구도, 즉 君-臣-民의 3단계 구도에서 臣의 역할을 부정 내지 최소화, 君-民 2단계 구도를 지향한 것이죠』

―그런 正祖도 즉위 초기에는 국왕의 행동반경을 제약하는 제도적·이념적 조건들을 부정하기보다는 그 조건의 틀 안에서 문제점을 개혁하거나 再해석함으로써 왕권을 강화하는 방식을 취하였습니다.

『그러나 최대 정치세력인 老論을 분열시켜 온건파를 회유하는 한편으로 정계의 非主流(비주류)였던 南人과 少論을 중용하여 老論의 강경파에 맞서게 합니다. 「디바이드 앤 룰(분리·통치)」의 통치술을 구사한 겁니다. 正祖는 淸要職(청요직)의 권한을 약화시켜 名分論的 士林정치의 폐단을 막고, 老論세력의 私兵으로 변질된 기존의 5개 軍營을 약화시키는 대신에 친위부대인 壯勇營을 증강시켜 이를 배경으로 개혁정책을 추진했습니다』

―正祖는 자신의 반대세력(僻派)을 심리적으로 위협하여 내부 분열과 붕괴를 유도했죠.

『자신의 뜻을 거스를 땐 혹독한 형벌을 내렸다가도 그것을 반성하는 기미를 보이면 과분한 대우를 함으로써 신하들의 충성경쟁을 유도했죠. 그는 壯勇營의 확대와 관련하여 「깊은 뜻이 따로 있다」거나 「장차 기대하는 바가 있다」면서 僻派 신하들의 억측을 유도하는가 하면 재위 19년(1795)에는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의 회갑을 맞이하여 몸소 갑옷을 입고 직접 군사훈련을 지휘하여 僻派 세력으로 하여금 「깜짝 놀라며 두려워 움찔하게」 만들기도 했습니다』


『龍고기가 어떻다 말하기보다 돼지고기라도 먹는 게 낫다』

―正祖는 宋나라 神宗代의 대표적 개혁론자인 王安石(왕안석·1021~1086)에 대해 再평가했습니다. 즉위 초기에는 「更張(경장)을 했다가 나라를 망친 정치가의 전형」으로 비판했다가 집권 중반 이후 개혁의 군주인 神宗의 名臣으로 높이 평가했던 것입니다.

『正祖는 즉위 초 왕권이 약한 상태에서 노론의 신하들이 英祖의 개혁정책을 원래대로 되돌려놓으려 하자 현상유지의 필요성에서 王安石을 「거리낌 없이 멋대로 행한 소인배」로 낮췄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지지세력이 어느 정도 규합된 이후엔 王安石을 높이 평가합니다. 능력이 있는 인물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개혁안에는 兵制의 개혁과 같은 좋은 것들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正祖는 「(實在하지도 않는) 龍의 고기가 어떻다고 말만 하는 것보다는 돼지고기라도 먹는 것이 낫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다스려지는 정치(無爲而治)를 강조하는 신하들의 주장을 논박하기 위한 절묘한 레토릭이었습니다』

―正祖 개혁에서 경제부문의 업적으로는 辛亥通共(신해통공)이 손꼽힙니다. 商행위에 있어 독점적 지위를 누리던 시전상인들을 견제한 경제 자유화 정책인데, 이 정책의 시행으로 民生이 얼마나 개선되었습니까.

『신해통공을 시행한 다음 달에 蔡濟恭(채제공)은 「어물의 물가가 갑자기 싸졌다」, 5개월 후에는 「장작값이 옛날 수준으로 돌아갔다」고 보고했습니다. 丁若鏞도 「1년 정도 시행해 보니 물품과 재화가 모두 모여 들고 백성들의 씀씀이가 풍족하게 되어 백성들이 크게 기뻐하였다」고 「牧民心書(목민심서)」에다 기록했습니다』

신해통공의 핵심은 禁亂廛權(금난전권)의 폐지이다. 금난전권이란 「난전을 펴지 못하게 하는 시전상인의 특권」을 말한다. 조선후기 상업의 발달과정에서 六矣廛(육의전)을 비롯한 시전상인들에게 금난전권이 부여돼 이들에 의해 상품의 전매권이 장악돼 있었다.

금난전권은 物流(물류)를 막아 도시의 경제질서를 왜곡시킬 뿐만 아니라 물가상승을 부르고 영세상인·수공업자·도시빈민층의 생계에 위협을 가하고 있었다.

『금난전권의 폐지는 권세가들과 결탁한 관료들의 부패 고리를 혁파한 것이기도 했습니다. 더욱이 특권 상인들의 다수는 노론 계열의 閥閱(벌열)들의 경제적 후원자 역할을 맡았기 때문에 금난전권의 철폐(국가에서 필요한 물품을 공급하는 육의전에 대해서만은 금난전권을 인정해 줌)는 개혁정책의 중요 장애물을 제거하는 일이었습니다』

신해통공의 시행은 正祖 15년(1791) 南人의 영수 蔡濟恭에 의해 주도되었다. 채제공은 좌의정이었지만 영의정과 우의정이 선임되지 않은 獨相(독상)체제로 老論 강경파에 대항하면서 이같은 경제개혁을 단행했다.

금난전권은 중·근세 유럽의 상인 길드적 특전과 본질적으로 동일한 존재였다. 신해통공은 신흥 상인자본이 시전제도와 같은 보수적·특권적·봉건적 상업조직의 구각을 타파하고, 당시의 사회·경제적 요구를 관철하여 상업발전의 새로운 계기를 마련했다.


正祖의 한계

―正祖가 文體反正(문체반정)을 일으킨 것은 개혁이 아니라 反動(반동)이 아니었습니까. 이 회오리 때문에 北學派(북학파)의 리더 朴趾源(박지원)은 正祖로부터 자아비판을 강요당하고, 그의 기행문 「熱河日記(열하일기)」는 불온서적으로 낙인 찍혔습니다.

『正祖가 非정치적인 文體문제를 들고 나온 이면에는 당시 정계 다수파인 老論 세력을 견제하고 西學문제로 失勢한 南人 계열을 지원하려는 의도도 없지 않았습니다. 文體反正의 대상이 되었던 인물들은 주로 老論系 인물들이었거든요』

文體反正은 속되고 타락한 문체를 바르게 되돌려야 한다는 위로부터의 文風(문풍) 개혁운동이었는데, 구체적으로는 老論系의 청·장년들이 北學이라는 명목으로 배워 구사하던 明末淸初의 稗官體(패관체) 글쓰기를 겨냥한 것이었다.

―正祖는 「文體 타락」의 최대 원인이라고 지적한 외국서적을 수입금지하여 「좋지 않은 문체」를 볼 수 없도록 원천봉쇄했습니다. 이 바람에 明淸문집, 패관소설, 西學書의 유입을 엄금하는 명령이 正祖 10년, 11년, 15년, 17년에 걸쳐 잇달아 내려졌습니다. 세계를 향한 正祖의 시각이 너무 협소했던 것 아닙니까. 당시 淸國은 康熙帝(강희제)-擁正帝(옹정제)를 거쳐 乾隆帝(건륭제)의 治世로 이어지는 국운 피크期였습니다.

『그것이 正祖의 한계 아니겠습니까』

병자호란 이후 國是로 통했던 것은 反淸, 즉 北伐論(북벌론)이었다. 북벌론은 애시당초 실현 가능성이 전혀 없었으며, 집권층의 정책적 구두선에 불과했다. 민족적 위기의식을 고조시켜 반대파를 제거하기 위한 對內用 기만책이었던 것이다.

―西學에 대한 正祖의 태도는 어떻게 보십니까.

『正祖는 天主敎(천주교) 논쟁에 모종의 정치적 음모가 숨어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실제로 천주교 논쟁은 당쟁으로 비화될 가능성이 농후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위험에도 불구하고 西學의 과학·기술의 측면만이라도 수용했더라면 조선후기 사회가 국가적 폐쇄주의로 치닫는 잘못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천주교 문제를 公論 차원에서 진지하게 검토할 수 있는 기회를 차단하고, 순전히 정치·기술적 차원(權道)에서 대응한 겁니다. 당쟁에 대해 일종의 정신적 外傷(외상)을 가지고 있었던 正祖는 어떤 문제가 公論化되는 것을 몹시 두려워해 서둘러 차단하려는 형태를 보였습니다』


『正祖는 실패한 개혁가』

―조선왕조의 知的 임금의 쌍벽이라고 할 수 있는 世宗과 正祖의 차이점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正祖는 다종다양한 정치세력을 한자리에 모이게[統] 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言路를 활짝 열어 公論의 정치를 활성화[通]하는 데까지는 나가지 못했습니다. 그의 탁월한 정치적·학문적 역량에 비추어 볼 때, 이는 하지 못함[不能]의 문제가 아니라 하지 않음[不爲]의 문제였습니다.

반면 世宗은 국가적 어젠다를 던져 놓고 신하들에게 난상토론을 시켜 컨센서스(합의·동의)를 도출했습니다. 그런 토론을 듣기만 하다가 答(답)이 나오면 국방은 金宗瑞(김종서), 외교는 卞季良(변계량), 총괄은 黃喜(황희)라는 식으로 실무책임을 맡겨 장기 근속토록 했습니다. 이것이 世宗과 正祖의 중요한 차이점이었습니다』

―正祖의 개혁정책 및 통치방식은 그의 死後에 그가 전혀 의도하지 않은 勢道정치를 등장시켰습니다.

『正祖 말기의 독재통치는 言官과 史官 제도의 약화를 초래해 權臣(권신)·戚族(척족)의 전횡을 견제할 수 없도록 만들었습니다. 특히 正祖의 급작스런 사망으로 아홉 살의 임금(純祖)이 뒤를 이었어요. 英祖의 繼妃(계비) 정순왕후 慶州 김씨가 대왕대비로서 垂簾聽政(수렴청정)을 했는데, 사도세자를 모해한 장본인이었으며, 그녀의 친정은 골수 노론 僻派였습니다. 그녀는 선왕(正祖)에 의해 「廢家(폐가)」가 되었던 「친정의 원한」을 풀기 위해 「僻派를 끼고 흉독한 짓을 마음대로」 했습니다. 즉 「先王의 장례를 마치자마자 관직에 있던 時派를 모조리 몰아내 조정의 반이 비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女君(정순왕후)과 老論의 독주를 견제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제거되었던 결과입니다』

―正祖 死後에 천주교도에 대한 격렬한 정치적 탄압, 즉 辛酉迫害(신유박해)가 일어납니다. 僻派정권은 正祖가 키워 놓았던 측근세력과 西學派를 처형·丈殺(장살) 또는 장기 유배에 처하고, 다수의 北學派 및 經世學派(경세학파)를 제거했습니다. 僻派정권은 정순왕후의 사망으로 5년 만에 붕괴하고, 純祖(순조)의 장인이며 노론 時派로서 초계문신 출신인 金祖淳(김조순)이 정권을 잡아 이후 60년간 지속되는 安東 김씨의 勢道政治를 열었습니다. 安東 김씨의 長期 勢道정치로 조선왕조의 國運이 기울고 말았습니다. 그런 만큼 正祖의 개혁이 좋은 평점을 받기 어렵겠습니다.

『正祖를 신중한 정치가로 볼 수는 있지만 탁월한 정치가, 즉 자신이 추구했던 聖王으로 평가할 수는 없다고 봅니다. 그는 재위 24년이라는 짧지 않은 기간과 先王 英祖가 마련한 기반에도 불구하고 그는 실패한 개혁가가 되고 말았습니다』

―正祖의 개혁이 실패한 까닭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정치가는 기본적으로 「바람직한 것」과 「가능한 것」 사이에서 늘 갈등하는 존재이며, 결과를 예측할 수 없는 불확정적 상황에서 희미하게 존재하는 가능성의 싹을 보고 결정을 내리는 모험적 존재입니다. 탁월한 정치가는 「가능한 것」과 「바람직한 것」 사이의 간격을 좁히는 한편으로 얼핏 보기에 불가능해 보이는 일을 가능하게 만들어 가죠.

이런 점에 비추어볼 때 正祖는 「바람직한 것」의 중요성을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그것을 「가능한 것」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들었습니다. 과도한 조심성으로 인해 불가능해 보이는 것을 가능하게 만들어 내는 정치적 모험을 감행하지 못한 겁니다』

―正祖와 朴正熙를 비교하면 어떻습니까.

『蔡濟恭 같은 신하가 다섯 명만 있었어도 正祖의 개혁은 성공했을 것입니다. 朴正熙에게는 人材를 끌어올 수 있는 軍이란 집단이 있었습니다. 또한 朴正熙가 주도한 새마을운동에서는 面서기 같은 하급관리들까지 자신들이 새로운 역사의 중심에 있는 것처럼 열심히 뛰기도 했구요』

正祖는 未完(미완)의 개혁가였고, 朴正熙는 성공한 개혁가였다. 현재 베트남에서는 朴正熙 작사·작곡의 「새마을노래」가 가사만 약간 개작되어 불려지고 있다. 반면에 대한민국에서는 「朴正熙 지우기」가 한창이다.


[朴正熙의 저서 「국가와 혁명과 나」]


『도둑맞은 廢家 인수』

正祖는 재위 2년 6월 更張大誥(경장대고)를 내리면서 당시 나라 사정을 『병든 사람이 허약으로 혈맥이 막혀 버린 것과 같은 꼴』이라고 했고, 朴正熙는 5·16 거사 직후 『도둑맞은 廢家를 인수하였구나!』라고 한탄했다.

그래도 正祖의 즉위 무렵은 朴正熙의 집권 前後보다는 다소 나았다. 18세기 조선사회의 변화 원인은 농업기술의 발전에서 찾을 수 있다. 즉, 직파법에서 이앙법(모내기)으로 이행됨으로써 제초작업에 필요한 노동력을 절감시키고 이모작을 가능케 했다. 朴正熙의 「국가와 혁명과 나」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나라가 가난하였다고 하지만 기실 얼마나 가난하였던가. 여기에 하나의 산 자료가 있다. 혁명이 나던 1961년도 민주당 추가경정예산안이 바로 그것이다. 총규모 6088억 환의 내역인즉, 국토개발사업비조로 제공된 잉여농산물 1000만 달러(130억 환)를 합치면 美 對充資金(대충자금)의 총규모는 3169억 환으로, 이는 국내자원에 대하여 52%의 비율이다. 이같이 국가운영의 기본 살림인 나라의 예산마저도 미국에 의존하고 있었던 것이다>

1960년대 초반에는 「내일이라도 미국의 원조나 관심이 끊어진다면」 우리에겐 살아갈 방법이 없었다. 1960년 12월호 韓銀 「조사월보」에 의하면 광복 후, 즉 1945년부터 1959년까지 26억9000만 달러에 달하는 막대한 원조를 받았다.

<이같이 방대한 규모의 원조를 받았으면서도, 국가의 기간산업은 「후진국의 초보 상태」에 머물고 있을 뿐, 중소기업(산업), 수출산업은 위축될 대로 되어 「극심한 수요 부족과 물가의 앙등, 수출의 부진」으로 해마다 수천만 달러에 달하는 국제수지의 역조를 나타내고 있다>

위와 같은 국가 경제의 결과는, 「수백만의 실업자와 年年 수만 호에 달하는 絶糧農家(절량농가)가 속출」했다. 그런데도 한국은 60만의 대군을 유지해야 했다. 미국은 대충자금에 의한 간접 軍援(군원) 이외에 1945년 9월 이래 1959년 말까지 약 13억 달러에 달하는 직접 군사원조를 제공하였다. 朴正熙는 당시 한국의 고민을 다음과 같이 집약했다.

<軍을 유지하려면 경제 재건을 제약하여야 하고, 경제를 재건하려면 軍을 감축하여야 한다. 국가의 사정은 進退維谷(진퇴유곡),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형편이다>

1959년 수출 총액은 불과 1916만 달러인 데 비해 수입 총액은 어떤가. 入超(입초)가 5936만 달러인 7852만 달러였다. 1955년 이래 연평균 약 5000만 달러 선의 이 국제수지의 역조는 그대로 지속되고 있었다.


民主黨 정권에 대한 비판

원내 의석의 3분의 2를 능가하는 절대적인 안정선을 부여함으로써 「국가대권을 백지위임하다시피」 하였는데도 민주당은 끝내 분당, 정치불안을 자초했다. 「자유당 못지않은 의혹 사건이 속출」하였고, 「벌족류의 계보정치를 서슴지 않는 후진정치의 전형」이었다.

4·19 혁명 이후의 左派 세력 대두, 그 세력은 광복 이래 최대 규모로 강성하였고, 「中立朝鮮을 제창하는」 사태에 이르게 되었다. 650대 1의 對달러 환율은 「하루아침에」 1300대 1로 껑충 뛰어올랐고, 사회의 혼란을 틈타 정치인들은 「이권과 파쟁에 골몰」했다.

<완전히 무정부 상태라 할 수 있었다. 진정 그와 같은 것을 민주주의의 滿開相(만개상)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우리가 아는 민주주의 상식에 수정을 가하지 않을 수 없다. 같은 보수주의 노선으로 동일성의 사회를 실현할 바에는 민주적 정치권능보다 일관성 있는 강력한 지도원리가 요청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朴正熙는 「애국군대는 감내나 방관이란 허명을 내세워 부패한 정권과 공모할 수는 없었다」며 5·16 쿠데타를 정당화했다.


[대변인 金聖鎭의 朴正熙·正祖 대비]


正祖 시대와 朴正熙 시대의 末期 현상

陸英修 여사 피격사건 때 청와대 대변인, 10·26 朴正熙 대통령 시해사건 때 문공부 장관이었던 金聖鎭씨가 朴正熙의 유신 말기와 正祖의 재위 말기를 비교한 글을 썼다. 다음 구절은 그의 저서 「대통령」에서 인용한 것이다.

<朴正熙의 유신 말기는 마치 조선조 22대 임금 正祖의 집권 말기와 비슷한 점이 있다. 두 사람이 각기 집권 전반기에는 혁혁한 역사적 업적을 남겼음에도 집권 말기에는 그 의욕이, 그 사명감이 너무나도 컸기 때문에 그만 스스로 지쳐서 쓰러지고 만 것 또한 흡사했다고 할 것이다.

正祖가 만년에 互對法(호대법)을 폐기하고 자의적 인사를 단행하여 蕩平策의 경직성을 극복하려다 실패하고 勢道정치의 문을 열어 놓은 것과 마찬가지로, 朴正熙도 「김종필 對 4人체제」, 「4人체제 對 이후락」 그리고 「이후락 對 박종규 등 反이후락 세력」 등으로 互對法을 이용하여 국정을 다스리던 참에 金載圭의 저항에 부딪혀 실패로 끝나고 全斗煥·盧泰愚의 新군부 통치시대의 문을 열어 놓은 것이 그것이다>

正祖의 인사정책의 핵심은 互對法, 즉 大乘氣湯(대승기탕)의 탕평책이었다. 大乘氣湯의 탕평책이란 국왕의 정책을 지지하는 세력과 반대하는 세력을 맞서게 하되 두 정치세력을 매개하고 조화시킬 수 있는 제3의 세력을 함께 등장시켜 서로 조화를 이루는 방식을 말한다.

예컨대 재위 13년, 時派인 南人의 蔡濟恭을 좌의정으로, 僻派인 노론의 金鍾秀를 우의정으로 맞서게 하는 한편 소론의 李在協(이재협)을 영의정으로 임명하여 蔡濟恭과 金鍾秀를 중재·조화시키려 했다. 그러나 소론의 李在協은 양자를 중재하기는커녕 소론 강경파를 사주하여 국왕의 탕평책 및 장용영의 설치를 신랄하게 비판함으로써 正祖의 의도는 좌절되고 말았다.

<大統領府는 청와대 비서실, 청와대 경호실, 그리고 중앙정보부(지금의 국가정보원)라는 3개 대통령 직속기관으로 구성되며, 이들 직속기관은 서로 非적대적 관계에서 팽팽한 협조적 긴장관계를 유지하는 가운데 각기 독립적으로 고유의 직분을 수행할 때 올바른 기능이 발휘된다. 그러나 그같은 힘의 긴장 속 균형이 와해되고 있었다>

朴正熙 정권의 말기증세는 「청와대內의 야당」 陸英修 여사의 서거에서 비롯되었다.


[국회에서 목격된 金載圭의 진짜 모습]


무능한 중앙정보부장

陸여사의 피격사건으로 朴鐘圭가 인책 사퇴한 경호실장 자리에 車智澈이 앉았다. 그 직후 비서실장 金正濂(김정렴)도 日本대사로 임명되어 청와대를 떠났다. 그후로부터 「청와대內의 비서실과 경호실의 정치적 비중이 뒤바뀌는 형국」이 되었다. 金桂元은 비서실장의 직위에 있으면서도 車智澈보다 중용되지 못했으며, 金載圭 중앙정보부장도 車智澈에게 「굽히는 모습」을 드러냈다.

<朴正熙 말년의 청와대를 에워싼 권력의 암투는 金桂元-金載圭 연합세력 對 車智澈을 각기 대립축으로 삼고 전개됐으며, 여기에 朴正熙의 딸 槿惠가 이미 세상을 떠난 어머니 陸英修의 「청와대內 야당」이라는 생전의 역할을 인계라도 한 듯 권력암투에 본인도 의식하지 못한 가운데 말려들어 그 양상은 더욱 복잡성을 띠게 되었다>

金載圭는 중앙정보부장으로서 부적합했다. 신민당의 5·30 전당대회 당일, 金載圭는 朴대통령의 물음에 서슴없이 「李哲承의 당선이 확실하다」고 보고했다. 그러나 그 시각에 이미 전당대회장의 분위기는 「金泳三 당선」이었다. 그 직후 車智澈은 그의 비서로부터 「金泳三 선출」이라는 짤막한 메모를 전달받았다. 중앙정보부장 金載圭로서는 치명적인 실수였다.

金載圭가 직무집행상의 무능을 드러낸 것은 직전 보직인 건설부 장관 재직 때 이미 드러났다. 당시 국회 출입 기자였던 필자는 金載圭 건설부 장관의 무능에 깜짝 놀란 바 있었다. 그는 상임委(국회 건설委) 정책질의 때 사무관·서기관급 부하들이 미리 써주는 답변서의 페이지가 뒤섞여 있어도 그대로 읽었다.

1977년 늦여름 어느 날, 국회 건설委에서 벌어진 해프닝이다. 金載圭 장관이 박용만·문부식·이진연 등 야당의원의 질의에 답변하다가 『장관이 그런 것도 모르느냐』는 핀잔을 받았다. 그 순간, 金載圭는 입을 꽉 다물고 세 야당의원을 노려보았다.

그때 사회를 맡은 고재필(지난 1월 作故) 건설위원장은 깜박 졸고 있었던 것으로 보였다. 원만한 성품의 고재필 위원장은 그런 경우에 평소 같으면 방망이를 쳐서 정회시킨 다음에 위원들과 장관을 회의장 옆방으로 불러 화해시키곤 했기 때문이다. 필자는 세 야당의원을 쏘아보는 金載圭의 눈에서 어떤 광기를 느꼈다. 세 야당의원도 말문을 닫았다. 그런 험악한 장면이 30초쯤 지속되었다. 유정회 간사이던 이도선 의원이 뛰어나와 고재필 위원장이 쥐고 있던 방망이를 낚아채 두들김으로써 일촉즉발의 장내를 수습했다.

이런 金載圭를 중앙정보부장으로 발탁한 것은 朴正熙의 用人術과 총명이 한계를 보인 것으로 판단할 수밖에 없다. 『정치는 내가 알아서 하는 것이니 경호실장은 으스대기나 하고 비서실장은 술친구나 하면 된다』는 朴正熙의 오만과 방심도 작용하였을 터이다. 10·26 사태 당시 궁정동 大연회장에서 경호실장은 경호실장답지 못했고, 비서실장 역시 비서실장답지 못했다.


시해현장에서 제 몫을 한 사람은 신재순뿐

권총도 휴대하지 않았던 車智澈은 金載圭에게 일격을 당한 후 자신의 임무를 잊고 화장실로 도피했고, 金桂元 역시 대통령이 피격당하는 데도 복도로 뛰어나가 자신의 몸부터 숨겼다. 오직 술시중을 들던 신재순씨만 『각하, 괜찮습니까』라고 물으며 손바닥으로 朴正熙의 등 뒤로 흘러나오는 출혈을 막았다.

朴正熙가 궁정동 安家에서 「大연회」, 「小연회」를 자주 가졌다는 것은 자기관리에 허점을 보인 것이다. 의전과장 박선호 등 金載圭의 부하들이 金載圭의 명령 하나로 국가원수 시해사건에 가담했다는 것은 朴正熙에 대한 존경심이 엷었다는 얘기에 다름 아니다. 그럼에도 『각하, 괜찮습니까』라는 신재순의 물음에 『난 괜찮아』라고 한 朴正熙의 마지막 답변은 영웅적이었다.

대한민국의 다행은 朴正熙가 죽은 타이밍이었고, 북한의 불행은 金日成의 長壽(장수)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金載圭가 민주화를 위해 「유신의 심장」을 쏜 것이 아니라 「야수의 심정」으로 자신을 인정해 주지 않는 「야속한」 朴正熙를 쏜 것이었지만, 결과적으로 그것은 한국의 정치발전에 도움이 됐는지 모른다.

正祖의 죽음과 관련해서는 아직도 毒殺說(독살설)이 제기되고 있다. 正祖의 독살설은 그의 등창 치료방법이었던 「鉛薰方(연훈방)」과 얽혀 있다. 연훈방은 환부에 수은을 태운 연기를 쐬는 치료법이다. 正祖는 10여 차례의 연훈방을 시술받아 수은에 중독됐을 가능성이 있다는 주장이다.

南人들 사이에서는 正祖가 僻派 집단과의 권력투쟁에 패해 독살당했다는 소문이 공공연히 떠돌았다. 이에 영남 士林 중에는 관아에 나아가 시위를 벌이는 사람도 있었다.

반론도 만만찮다. 正祖 사망 당시 內醫院 도제조가 時派의 우의정 李時秀였던 점, 그리고 1804년에 정국의 주도권을 잡은 金祖淳 등은 正祖가 키운 時派인데도 불구하고 正祖의 죽음과 관련해서는 아무런 이의 제기가 없었던 점을 들어 毒殺說은 근거가 희박하다는 것이다. 朴賢謨 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실체적 진실」이 아니라 하더라도 다수가 믿으면 「정치적 진실」로서 힘을 가지게 됩니다. 그때 僻派는 五晦筵敎(오회연교) 때문에 正祖에게 큰 위협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南人 등 時派는 正祖가 오회연교를 한 지 28일 만에 갑자기 승하하자 독살한 것 아니냐는 의구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五晦筵敎」는 「5월 晦日(30일)의 經筵(경연)에서의 下敎」라는 뜻이다. 오회연교에서 僻派에게 등골이 오싹할 만큼 겁을 집어먹게 한 것은 「시대상황에 따라 義理도 달라진다」는 대목이다. 그것은 正祖가 英祖와의 약속을 뒤집고 壬午義理(임오의리: 사도세자의 정당성)를 천명한 것이다. 이제, 僻派로서는 正祖가 없어져야 할 존재가 되었다.

그러나 正祖가 49세의 나이로 급사했다고 해서 「僻派의 시해」라고 단정할 수 없다. 격무로 인한 心身의 마모에 의해 그의 수명을 단축시켰다는 것이 오히려 자연스런 해석일 것 같다.

正祖와 朴正熙의 죽음은 그 어떤 것이었든 극적이고 非常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국정개혁에 자기 한 몸을 바쳤다는 점에서도 닮았다. 그럼에도 「朴正熙 지우기」에 正祖가 동원되는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폼페이우스 立像 밑에서 암살당한 시저를 생각하면서

시저는 로마 원로원에 있는 政敵(정적) 폼페이우스의 立像 밑에서 벌떼같이 달려든 자객들의 칼에 찔려 사망했다. 시저와 폼페이우스는 로마의 天下를 놓고 결전을 벌이다 시저가 승리했다. 이집트로 도주한 폼페이우스는 클레오파트라에 의해 살해되어 그의 목만 로마로 되돌아왔다. 그래도 원로원의 폼페이우스 立像은 철거되지 않았던 것이다. 로마제국처럼 잘 되는 나라에서는 「역사인물 지우기」 따위의 바보짓은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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