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조선 기사

[심층 인터뷰] 金忠烈 교수

東洋哲學界의 원로「金容沃의 옛 스승」

글 정순태 기자  2005-0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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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동양철학계의 석학 金忠烈(김충렬) 교수는 南冥學(남명학)연구원 원장을 맡고 있다. 남명학연구원은 壬辰倭亂(임진왜란) 때 발군의 공을 세운 義兵將(의병장)들이 거의 그의 門下(문하)에서 나옴으로써 「조선조에서 제일 성공한 교육자」로 평가받는 南冥 曺植(남명 조식)의 學行(학행)을 계승하려는 민간연구단체다.

올해는 南冥 탄신 500주년이 되는 해다. 필자는 南冥의 정신과 철학을 오늘의 우리들도 배워야 한다는 뜻에서 金忠烈 선생에게 인터뷰를 요청했다.

금년 71세인 金忠烈 박사는 1995년 고려대학 철학과 교수직에서 정년퇴임하고 고향인 강원도 原州(원주) 근교에 서재가 딸린 시골집을 마련하여 연구와 저술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지난 3월부터는 연세대학교 교수로 초빙되어 中庸(중용)철학을 강의하러 1주일에 한 번꼴로 서울나들이도 하고, 가끔은 제자들을 시골 서재의 다락방으로 불러들여 지도하기도 한다.

세속을 피해 굳이 시골로 들어간 金忠烈 선생이 요즘 무엇을 생각하고 어떤 교훈을 줄 것인지, 이런 것도 궁금했다. 이에 더하여 최근 TV방송에 출연하여 「中國哲學(중국철학) 붐」을 일으키고 있는 金容沃(김용옥) 교수를 둘러싼 世間(세간)의 是非(시비)에 대한 원로 학자의 견해도 들어보고 싶었다. 金容沃씨는 그가 고려대학 3학년 때 金忠烈 교수의 老莊思想(노장사상) 강의를 처음 듣고 「위대한 스승」으로 받들며 동양철학을 공부하기로 결심했다고 그 스스로 고백한 적이 있다.

金선생의 시골집을 찾아가는 길은 초행자로서는 꽤 까다로웠다. 영동고속도로의 文幕(문막) 톨게이트를 빠져나와 仁穆大妃(인목대비)의 아버지 延興府院君(연흥부원군)의 사당이 있는 安昌里(안창리)라는 마을로 들어섰다. 金선생 댁은 연흥부원군 사당 앞에서 좌회전하여 승용차 한대가 간신히 지나다닐 만한 좁은 길을 따라 1.5km만 더 들어가면 된다.

필자는 좀 묘한 생각이 들었다. 南冥學硏究院 원장의 집이 뜻밖에도 인목대비 아버지의 사당과 지근거리에 있다는 점 때문이었다.

南冥과 仁穆大妃는 생존한 시대가 서로 달라 恩怨(은원)관계가 있을 까닭이 없지만, 南冥의 제자들과 인목대비는 「不俱戴天」(불구대천)의 원수지간이었다. 왜 그랬을까?


집권 老論에 의해 폄하된 인물

임진왜란史에 이름이 올라 있는 南冥의 문하생만 해도 70여 명에 이르렀는데, 그 중에서도 來菴 鄭仁弘(내암 정인홍), 忘憂堂 郭再祐(망우당 곽재우) 등의 활약은 탁월했다.

倭軍(왜군)은 南冥 제자들의 善戰(선전)으로 낙동강을 이용한 兵站(병참)에 실패했을 뿐만 아니라 곡창지대인 慶尙右道(경상우도)와 湖南(호남)을 점령할 수 없었다. 이런 戰功(전공)에 의해 임진왜란 후의 정계에서 南冥의 제자들이 다수 참여한 정파인 北人의 발언권이 높아졌다. 鄭仁弘은 선조 35년(1602) 大司憲(대사헌)에 올라 北人정권의 영수가 되었다.

바로 그 해(1602)에 宣祖는 김제남의 딸(인목왕후)을 맞아 繼妃(계비)로 삼았고, 그 사이에서 1606년 永昌大君(영창대군)이 태어났다. 그로부터 宣祖는 후계자 문제를 놓고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세자 光海君으로선 억울했다. 임진왜란 발발 직후 그는 압록강변 義州(의주)로 피난을 가던 宣祖에 의해 평양에서 세자로 세워져 전라도 지역으로 남하, 分朝(분조)를 이끌면서 의병을 모집하는 등 국란을 극복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그러나 宣祖의 마음이 젊은 인목왕후와 어린 영창대군에 쏠리게 됨으로써 光海君의 세자 지위가 점점 위태로워졌다.

이에 鄭仁弘이 宣祖에게 세자 배척의 잘못을 極諫(극간)하는 疏(소)를 올렸다가 귀양을 갔는데, 그러던 중 宣祖가 급사했다. 1608년 光海君이 즉위하자 귀양에서 풀린 정인홍이 다시 대사헌에 오르는 등 大北정권이 들어섰다.

大北 정권은 永昌大君의 외조부 김제남에게 사약을 내리고, 永昌大君을 강화도로 귀양보내 죽이고, 인목대비를 西宮(서궁:덕수궁)에 유폐하면서 尊號(존호)도 깎았다. 大北 집권시절, 南冥은 영의정으로 추증되었다.

그러다 1623년 西人(서인)의 쿠데타인 仁祖反正(인조반정)이 일어나 光海임금이 왕위에서 쫓겨나고, 北人은 철저한 정치보복을 당했다. 鄭仁弘은 대역죄인이란 죄목으로 참수되었다. 이후 西人, 西人 중에서도 老論(노론)이 계속 집권하는 바람에 南冥에 대한 평가도 폄하되었다.

길을 헤매느라고 예상보다 한 시간쯤 늦은 점심 무렵에야 金선생 댁에 도착했다. 50평 규모의 서재 延慶堂(연경당)에는 1만2000권의 장서로 가득 채워져 있다. 밖에선 뻐꾸기가 「뻐꾹 뻐꾹」 하고 장닭도 「꼬꼬댁 꼬꼬」 한다. 선생이 손수 뒷산에서 길어온 山澗水(산간수) 한 사발을 벌컥 마시고 나니 오장육부가 시원했다. 日傘峯(일산봉)을 등진 延慶堂 앞으로는 횡성의 泰岐山(태기산)에서 발원한 蟾江(섬강)이 흐르고 있다.


한국판 로미오와 줄리엣의 만남

―선생님은 南冥學硏究院의 원장을 맡고 계신데, 하필이면 인목대비의 아버지 연흥부원군을 기리는 사당 근처에다 서재를 마련했습니까.

『이곳 地正面 안창마을은 내 처의 집안이 400년 간 世居(세거)해 온 동네입니다. 연흥부원군의 宗家(종가)가 바로 나의 처가입니다. 제가 태어나 자란 동네는 바로 저기 섬강 건너편의 文幕이구요』

―金선생님 서재의 堂號(당호)를 延慶堂으로 정한 데는 무슨 까닭이 있으십니까.

『집사람의 성씨가 延安金氏, 내 쪽이 慶州金哥여서 한 자씩 따다 붙인 것입니다』

―金선생님의 처가와 南冥의 제자들 사이엔 血怨(혈원)이 있는 셈인데, 그런데도 남명을 추앙하는 사람들이 선생님을 남명학연구원장으로 모신 배경이 무엇입니까.

『저의 13代 祖(慶州金氏 昌一)가 남명의 高弟(고제)인 守愚堂 崔永慶(수우당 최영경)을 스승으로 모셨습니다. 최영경은 선조 22년(1589) 東人 鄭汝立(정여립)의 모반사건을 뒤에서 조종했다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西人 鄭澈(정철)에게 혹독한 고문을 받아 옥사했습니다. 그는 士林에서 명성이 높았던 隱士(은사)였습니다. 사후에 무고함이 밝혀져 곧 대사헌으로 추증되었지요. 東人은 나중에 南冥을 받드는 北人과 退溪를 받드는 南人으로 갈라졌는데, 우리 집안은 원래 北人 계열이었지요』

―아이구, 그러면 선생님과 사모님의 만남은 한국판 「로미오와 줄리엣」의 사랑이 아닙니까.

『그때(1956년) 내 나이가 스물여섯이었지요. 원래 처가 쪽 延安金氏는 집권 老論(노론)의 名門이고 저의 집안은 철저히 몰락한 北人에 이어 야당인 南人에 속했던 관계로, 두 집안은 섬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400년 간 가까이에서 살았지만 대대로 혼인을 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판에 내가 집사람과 결혼을 하려고 작심을 하고 손가락을 깨물어 血書四柱(혈서사주)를 써서 처가에 보냈습니다. 그랬더니 처음에는 처가 문중에서 의견이 분분했대요. 우여곡절을 거쳤지만 「시대가 바뀌었는데, 저희들 둘이 좋다면 좋은 게 아니냐」는 얘기가 나와 겨우 장가를 들 수 있었습니다』

―3남2녀를 모두 훌륭하게 키우고 해로하시는 선생님과 사모님을 「로미오와 줄리엣」의 비극에 비유해서 죄송합니다.

『우리 부부도 비극으로 끝날 뻔했던 일이 있기는 했습니다』

―어떤 일인데요.

『그 배경을 설명하려면 먼저 해야 할 얘기가 있습니다. 남명의 高弟인 정인홍의 후손들인 瑞山鄭氏(서산정씨) 문중에서 「來菴(정인홍) 선생 文集」을 만들면서 나더러 解題(해제)를 집필해 달라고 청탁을 하더라구요. 「역사 전공 학자에게 부탁하지, 왜 내게 찾아왔느냐」 라고 물으니까 「이미 30여 명의 학자들에게 청탁을 했는데, 모두 난색을 보이더라」고 대답을 해요. 「역적」으로 처형당한 鄭仁弘에 대한 평가가 그렇게 간단하지 않았던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來菴에 대해선 나도 잘 모르니까 연구를 해봐서 할 만한 일이면 하고, 그렇지 않으면 못하겠다」는 정도로 대답했습니다』


鄭仁弘에 대한 400년 만의 학문적 伸寃

―鄭仁弘이라면 崔永慶을 죽인 西人 정철을 탄핵하다가 파직을 당한 가운데서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大功(대공)을 세운 인물이 아닙니까.

『바로 그렇습니다. 鄭仁弘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바로 잡아야 합니다. 來菴(정인홍)이 인목대비 유폐사건에 관련되지 않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永昌大君의 죽음과는 무관합니다. 오히려 영창대군의 伸寃(신원)을 위해 애를 썼습니다.

大北이 집권한 光海君代에 실권을 휘두른 인물은 李爾瞻(이이첨)이었고, 내암은 벼슬을 꺼려하다가 大北정권의 상징으로서 영의정으로 추대되었을 따름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광해군을 축출한 仁祖反正 직후 내암은 89세의 나이인 데도 불구하고 참수형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西人의 大北에 대한 정치보복은 처절했지요.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反正으로 성립된 西人정권이 大北정권보다 백성을 위해 善政(선정)을 했느냐, 아니었느냐인 것입니다. 당시 정세는 滿洲(만주)에서 누르하치의 後金(후금)이 불같이 일어나 中原의 明과 천하쟁패전을 벌였습니다. 광해임금은 명과 후금에 대한 等距離(등거리)외교로 국가적 파국을 막아냈습니다. 반면 仁祖 정권은 尊明排金(존명배금)이란 명분론에 병적으로 집착하여 丁卯胡亂(정묘호란)과 丙子胡亂(병자호란)을 불러들여, 백성들을 土炭(토탄)에 빠지게 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그런 맥락에서 「내암선생문집」의 解題를 쓰신 것이군요.

『일찍이 丹齋 申采浩(단재 신채호) 선생도 日帝의 옥중에서 「정인홍傳」을 써서 정인홍을 우리나라 유수의 정치가로 손꼽았습니다. 정인홍을 신원하는 일은 남명 선생에 대한 역사적 평가를 다시 하는 데 필수적이라는 관점에서 집필을 결심했습니다. 사실 저는 우리 학계 처음으로 남명학을 포함시켜 한국사상사를 강의한 사람인데, 그 무렵부터 그런 생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원고를 작성하고는 먼저 집사람에게 보였어요. 학자가 역사자료를 갖고 쓴 것이니까 자기로선 이의가 없다는 거예요.

저의 해제가 들어간 「내암선생문집」이 (1978년에) 출간되니 대번에 반응이 왔습니다. 맨 먼저 우리 역사와 한학에 정통한 작가 李炳注(이병주: 故人) 선생이 붓을 잡고 「(자신이) 중학교 다닐 때 멋모르고 내암의 무덤 위에 올라가 내암의 죄업을 매도했는데, 金忠烈 교수의 글을 보니 아이구 그게 아니더라. 내가 잘못됐다」라는 내용의 글을 週刊朝鮮에 기고했어요. KBS방송에서도 곧이어 정인홍을 再평가하는 특집 프로그램을 내보냈지요』

―역적으로 몰렸던 정인홍을 실로 400년 만에 伸寃(신원)을 해 준 셈이군요.

『그런데 저의 처가 쪽 사람들이 방송을 듣고 「우리 연안김씨에게 정인홍은 不俱戴天(불구대천)의 원수인데, 종갓집 사위라는 자(김충렬 교수)가 감히 그럴 수 있느냐」고 들고 일어났습니다. 연안김씨 문중 어른들이 의론한 끝에 제게 질의서를 만들어 보냈습니다.

그때 제가 좀 고개를 숙였으면 그쯤 하고 넘어갔을지도 몰랐는데, 「뭐가 잘못됐습니까」 하고 뻣뻣하게 맞섰어요. 연안김씨 문중이 발끈하여 「그러면 이혼을 하라」고 해요. 「못하겠다」고 대들었습니다. 문제가 시끄럽게 돌아가 죽을 맛인데, 마침 대만대학에서 강의할 기회를 주어서 1년 간 나가버렸습니다. 출국 전에 내 논문(해제)을 100부쯤 인쇄하여 처가 문중에 돌리면서 「읽어 보고 이의가 있으면 논문으로 반박하시라」라고 했습니다. 그로부터 처가 쪽의 오해가 풀리기 시작했습니다』

金忠烈 교수의 개인사는 한국현대사의 격동·고통과 맞물려 있다. 그러면서도 그는 한문뿐만 아니라 중국말 구사도 특출한 동양철학의 碩學(석학)으로 손꼽히고 있다. 도대체 공부는 어느 틈에 했던 것일까?


軍 목부 7년, 花郞武功勳章 받은 사연

―선생님께서는 6·25 발발 이후 7년 동안이나 軍 복무를 하는 바람에 晩學(만학)을 하셨더군요. 화랑무공훈장까지 받으시고, 육군 중위로 예편하셨던데, 학자로서는 좀 색다른 이력이라고 느꼈습니다.

『어찌하다 보니 그렇게 되었습니다』

―어떤 경로로 입대하셨습니까.

『내 나이 스물로 원주농업학교를 갓 졸업한 해에 6·25 전쟁이 터졌습니다. 가족들과 함께 文幕을 떠나 피난을 가는데, 낙동강 북안에 이르니까 뒤에서 인민군의 포탄이 마구 날아와 바로 터지는 거예요. 혼비백산하여 낙동강을 건너 경북 淸道(청도)까지 내려갔어요. 그곳 피난민 수용소에 들어가 정신 없이 쓰러져 잠을 자는데, 모병관들이 들이닥쳐 젊은 사람들을 깨웁디다. 거기서 제5교육대라는 곳으로 실려가 1주일 간 사격훈련을 받고 곧장 최일선에 배치되었습니다. 이후 이등병 계급장을 달고 온갖 전투를 다 치렀어요』

―그러면 역전의 용사가 아니십니까.

『永川(영천)지구 방어전투에서 죽을 고비를 넘겼고, 낙동강 교두보에서 밀고 올라갈 때는 안동―원주―양수리―청량리를 거치는 (1950년) 9·28 서울수복 작전에 참전했습니다. 북진 때는 경기도 연천을 거쳐 평양 전투에 참여했고, 평양을 함락시킨 후엔 부대를 따라 三登(삼등)이라는 곳까지 올라갔습니다. 그러다 (1950년 11월) 중공군의 공격을 받아 오산까지 후퇴(1951년 1·4 후퇴)했습니다』

―선생님께서 받으신 화랑무공훈장은 어느 전투에서의 戰功 때문이었습니까.

『2등병 소총수여서 내가 무슨 전투, 어떤 고지에서 싸웠는지 정확히 알 수가 없습니다. 「공격!」 하면 뛰어나가고, 「사격!」 하면 총을 쏘고, 「후퇴!」 하면 도주하고, 갑자기 대든 적에 대해선 단지 내가 살려고 총칼로 맞섰을 뿐이었습니다. 우리 소대원들이 처음엔 40명 정도였는데, 1·4 후퇴 후에 보니까 4명밖에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이후 반격에 나선 부대를 따라가 「鐵(철)의 삼각지」에서 벌어진 고지 쟁탈전에도 참전했습니다』

―전투를 잘해서 장교로 발탁된 것입니까.

『그런 게 아니고, 그때가 1953년 정초였는데, 소대장을 맡는 少尉(소위)가 자꾸 戰死하는 바람에 막 뽑아갔습니다. 그 바람에 갑종간부후보생 제52기생으로 차출되어 光州(광주)에서 6개월 코스의 교육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戰況(전황)이 급박해 1주일 앞당겨 소위로 임관되어 중부전선으로 올라갔습니다. 고지쟁탈전투를 벌이던 부대의 소위는 「소모품」으로 불렸습니다. 그런데 운 좋게도 바로 그때(1953년 7월27일) 휴전이 되었습니다』

―휴전 이후에도 예편을 하지 않으신 걸 보니 軍 복무가 적성에 맞았던 모양이지요.

『군대에서는 「고문관」이란 별칭을 얻었어요. 동기생들은 대위로 진급했는데, 나는 탈락되어 중위 고참이 되었지요. 내가 좀 꼬장꼬장해서 이른바 「후생사업」(병사들의 노동력을 이용한 軍의 부정한 돈벌이) 같은 것에 반대하고 상관에게 반발을 하니까 왕따를 시켜 자꾸 교육훈련을 받는 데로 보내더라구요. 그러다 운 좋게도 대구에 있던 군사정보학교 3기생으로 중국어반에 입교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중국어 회화는 가능했습니까.

『웬걸요. 내가 열두 살 때 四書(사서)를 다 읽었으니까 한문은 잘했지만, 중국말은 전혀 몰랐지요. 시험을 보기 위해 (강원도) 양구에 있던 책방에서 「중국어 회화 4주간」이라는 책을 사서 1개월 동안 벼락공부를 했습니다. (정보학교 입교) 인터뷰 때 겨우 중국어 몇 마디를 우물거리긴 했지만 순엉터리였어요. 그런데도 학과시험의 성적이 좋아서 입교시켜 주었다고 합디다』


『나는 臺灣에 빚을 진 사람』

―정보학교 외국어반을 졸업하고 어떤 보직을 받으셨습니까.

『외국어반은 1년 코스인데, 졸업을 못했습니다. 어느 날 라디오를 들으니 「국가유학생을 선발한다」는 뉴스가 귀에 들어와요. 당시만 해도 국가 유학생 시험에 합격하면 신문에 명단이 발표될 정도였습니다. 부대에 알리지도 않고 서울로 올라와 시험을 쳤는데 덜컥 합격이 되었어요.

정보학교에서는 사전에 알리지도 않고 일을 저질렀다며 유학 때문에 제대를 시켜 줄 수 없다는 거예요. 육군본부의 인사행정처로 찾아가 제대를 시켜달라는 「운동」을 벌였습니다. 다행히 예편되어 (1957년) 臺灣으로 유학을 갈 수 있었어요. 대만정부로부터 학비 면제에다 생활비까지 지급받았습니다』

金忠烈 선생은 1957년 대만대학교 철학과에 입학했고, 1962년에는 同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이어 대만문화대학의 박사과정에 들어가 1973년 「자연과 인간의 조화」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박사학위를 받는 데 10년이 걸렸군요.

『국내로 돌아와 경북대와 계명대에 출강했고, 1970년부터는 고려대학에 재직하게 되었습니다. 박사논문을 쓰는 데도 곡절이 좀 있었습니다. 대만문화대학 쪽에서는 孫文(손문)의 三民主義(삼민주의)에 관해 써달라고 요청했는데, 나는 文化哲學(문화철학) 쪽에 관심이 있어서 거절했습니다. 그랬더니 세월이 좀 흐르고 난 뒤 연락이 와서 「그러면 쓰고 싶은 것을 쓰라」고 합디다』

―선생님은 臺灣에 신세를 많이 지신 분이 아닙니까.

『나를 교육시켜 주었으니 고마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中華民國(중화민국)에 의리를 지키려고 나름의 노력을 해왔습니다』

―어떤 것입니까.

『중국의 저명한 학자 湯一介(탕일계) 교수가 訪韓(방한)하여 「당신은 왜 여태 중국의 학회에 오지 않느냐」고 묻습디다. 그래서 이렇게 대답했어요.

「첫째, 나는 6·25 사변 때 중공군과 싸웠다. 중공군 때문에 남북통일이 되지 않았다. 그러니 상호 간에 血帳(혈장)이 정리되지 않은 상태다. 둘째, 나는 中華民國에서 16년 간 공부하면서 큰 은혜를 입었다. 나는 중화민국에 의리를 지키겠다」

한동안 이렇게 버텼더니 臺灣 교수들이 「우리도 대륙에 갔으니 당신도 이젠 갔다 오라」고 권해서 요즘은 중국에서 학회가 열리면 참가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가 중국과 국교를 수립한 것은 국가 이익에 부합되는 일이지만, 대만에게는 너무한 것은 아니었습니까.

『日·中 국교 재개를 위해 北京에 간 일본의 다나카 가쿠에이(田中角榮) 수상이 毛澤東(모택동)을 만난 자리에서 대만의 蔣介石(장개석) 총통을 비판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모택동이 「장개석은 위대한 사람」이라고 받아버렸습니다. 다나카가 진땀을 흘렸다고 합디다. 그렇게 해놓고 모택동은 귀국하는 다나카에게 「十八史略」(18사략)한 권을 선물했습니다. 十八史略은 소학교 학생들이 읽는 역사책 아닙니까? 美·中 수교를 위해 訪中한 닉슨 미국 대통령이 모택동에게 받은 선물은 그것보다 훨씬 수준 높은 「楚辭」(초사)였습니다』


큰 가르침 준 鏡峯 스님과 方東美 선생

―선생님은 華嚴學(화엄학)에도 조예가 깊으신데, 불교공부는 언제 하셨습니까.

『광복 다음 해인 열여섯 살 때 염세주의에 빠져 잠시 落髮(낙발: 머리를 깎음)을 하고 오대산 월정사 상원암에 들어간 적이 있습니다. 거기엔 曹溪宗(조계종) 초대 종정이신 方漢岩(방한암) 스님이 계셨는데, 한 달 후에 「너는 중 할 놈이 아니니 내려가라」고 하십디다. 상원암에는 周易(주역)에 통달한 학승 呑虛(탄허) 스님도 계셨는데, 내가 漢詩(한시)를 지어 바치기도 했습니다. 묘하게도 方씨와 인연이 많은데, 내가 대만으로 유학을 가서 모신 스승도 화엄학의 大家(대가)이신 方東美(방동미) 선생님이었습니다』

金선생의 서재에는 方東美 선생의 사진 액자가 걸려 있다. 金容沃 교수가 쓴 「老子哲學 이것이다」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한학의 바탕 위에서 대만대학 철학과 학부에서 쌓아올린 그(김충렬 교수)의 실력, 그리고 그의 문학적 재치, 그리고 方東美 교수로부터 받은 東·西철학에 대한 비교문화론적 시각은 우리나라 당대 학계의 수준에서는 쉽게 접할 수 없는 그런 고귀한 것이었다>

―方東美 선생이라면 東·西 철학과 문학의 비교연구로 세계적 명성을 지닌 분이 아니십니까.

『方東美 선생은 중국 철학의 양대 학맥 중 하나인 南京(남경)학파를 대표하는 학자입니다. 毛澤東이 蔣介石 총통의 臺灣 철수 후에 아쉬워한 것이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故宮(고궁)박물관의 문화재가 대거 臺灣으로 옮겨진 것이고, 또 하나는 臺灣에 方東美를 빼앗긴 것이라는 얘기까지 있습니다. 모택동과 方東美 선생은 「소년중국회」라는 단체에서 함께 일한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나는 좋은 스승을 만나는 運(운)을 누린 사람입니다』

―그것이야말로 큰 복이 아닙니까. 잠깐의 만남이지만, 깊은 가르침을 베푼 분도 있으시지요.

『그런 분이라면 鏡峯(경봉) 스님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1980년의 이른바 「서울의 봄」이 왔을 때 유신체제 반대 운동에 참여했던 나는 민주화의 轉機(전기)라는 밝은 전망을 갖고 陽山 通度寺(양산 통도사) 극락암에 가서 경봉 스님을 뵈었습니다. 고승과 만나는 자리라 漢詩 한 수를 지어 올렸습니다. 풀이하면 「넓고 넓은 세상 보고 싶어 높고 높은 봉우리에 올랐네. 거기서 굽어보는 세상은 어느덧 가을이러라. 십년 쌓였던 울분을 토해 내니 만리에서 바람 불어 뱃전을 치더라」 라는 내용인데, 이제 유신시대가 끝났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랬더니 경봉 스님이 물음을 내립디다.

「가을이드노」

「예, 가을입니다」

「가을은 어디로부터 오노」

「여름으로부터 옵니다」

「가을은 어디로 가노」

경봉 스님의 물음에 나는 말문이 막히고 말았습니다. 가을이 가면 겨울이 오는데, 내 詩는 「겨울」을 훌쩍 뛰어넘어 바로 「봄」이었던 것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경봉 스님이 「겨울을 거치지 않고 어찌 봄이 오나!」 하고 나무라십디다. 얼른 일어나 큰 절을 올렸습니다. 경거망동을 할 때가 아니라는 가르침을 내린 것입니다』

―그 직후에 「서울의 봄」은 신군부에 의해 짓밟히고 말았지 않습니까. 경봉 스님과는 어떻게 헤어지셨습니까.

『다음날 이른 아침에 일어나 세수를 하려고 나서다 안개가 자욱한 靈鷲山(영취산)을 우러러보고 과연 佛之宗家(불지종가)를 품을 만한 名山(명산)이라고 감탄했습니다. 그래서 경봉 스님에게 올리려고 「신령스런 봉우리 만길 벼랑이 하늘 위에 꽂혀 기묘한 음악되어 들려 오더라…」 운운의 詩 한수를 또 지었습니다.

경봉 스님이 이 詩를 보시고, 「소리가 들리드노」라고 물으셔서 「莊子(장자) 가로되, 소리 없는 데서 소리를 들으라고 했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이번에는 큰 스님이 나무라지 않고 「꽤 했네」라고 하십디다. 그리고는 병환중이신 데도 불구하고 나에게 글을 내리겠다며 부축을 받아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습니다. 나는 석 장을 써 주십사고 말씀드렸습니다. 큰 스님은 「無盡緣起」(무진연기)라고 쓰시고는 힘이 드시는지 「욕심도 많다. 한 장만 가지거라」 라고 하시고 다시 자리에 누우셨습니다』


金容沃과 金忠烈

―그러면 선생님의 弟子運(제자운)은 어떻습니까.

『글쎄요. 제자들 중에서 대학교수가 30여 명 나왔습니다』

―제자로서 金容沃 교수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가 나와의 師生(사생)관계를 부인했다니까 제자가 되는지, 아닌지… 아무튼 그런 얘기는 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김충렬과 김용옥의 관계를 김용옥의 글(老子哲學 이것이다)을 통해 알아볼 수밖에 없다. 두 사람의 만남은 다음과 같이 시작된다.

<내가 대학교 3학년 때, 1970년 이른 봄에 김충렬 선생님은 계명대학 철학과에서 고려대학 철학과로 전근 오셨다. 내가 그에게서 처음 수강한 과목은 「老莊철학」이었는데, 그는 첫 시간부터 「老子道德經」을 강의했다. (중략) 몇 명의 아이들과 밀약을 하고 김충렬이라는 새로 부임한 교수의 정체를 폭로하려고 마음가짐을 단단히 하고서 강의에 임했다. 그리고 계속 직사포 같은 질문을 맹렬히 퍼부었다. 그런데 이건 또 웬일인가? 그의 강의내용은 이전에 내가 접했던 동양철학과는 확실히 격이 달랐고, 그 내용의 방대함과 계발성에 있어서 나의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중략) 난 김충렬 교수와의 투쟁에서 셋째 시간에 완전히 항복하고 말았다. 그야말로 나의 위대한 스승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가 전달한 라오쯔(老子)의 모습에서도 「인류의 역사에서 이렇게 생각한 사람도 있었구나!」 하면서 난 감복의 감탄을 연발했다. 그리고 동양철학의 思惟(사유)야말로 인류의 미래를 구원할 수 있는 예지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고, 한민족의 문제도 현실에 집착하기보다는 이러한 거대한 예지로부터 근원적으로 다시 생각하며 풀어 나가야겠다는 어떤 영감에 사로잡혔다. 그것이 바로 내가 김충렬 교수의 老子 강의를 들은 세 번째 시간에 결심한 모든 것이었다. 난 나의 인생의 모든 것을 거기서 이미 작정해버렸던 것이다>

김용옥씨가 쓴 글 대로라면 그는 金선생님의 제자임에 틀림없다. 그런데도 김용옥씨는 師弟(사제)관계의 결별을 선언했다. 왜 그랬을까?

「老子哲學 이것이다」에 따르면 김용옥씨가 1987년 고려대학 교수직에 복직하려 했을 때 김충렬 교수가 반대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위의 책을 보면 김용옥씨는 1985년 「非정통성의 運脈(운맥)을 타고 올라온 이준범(총장)이란 인물 밑에서 교수 노릇을 하는 것은 수치스런 일」이라면서 그 자신도 사표를 쓰고 고려대를 떠났다. 그러다 1987년 6·29 선언 후 김용옥씨가 복직을 하려 하니 이준범 총장, 신일철 문과대학장, 윤사순 총무처장 등 모두가 반대했다. 그는 김충렬 교수에게도 복직을 부탁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후 김용옥씨는 다음과 같이 도전하기 시작했다.


師弟之情을 끊는 순간…

<…안티테제로서의 동양적 자연주의를 나는 자연주의의 오류(naturalistic fallacy)라고 부른다. (중략) 그것을 지배하고 있는 틀은 황똥메이(方東美)―김충렬 류의 천인화해론(Comprehensive Harmony)이며, 또 그것은 기껏해야 전통적 天人相感論의 조화이론의 속박을 근원적으로 탈피하는 것이 아니다. 사실 이런 조화이론은 동양 운운치 않아도 서양의 근대정신이 이미 탈피해 버린 중세기적 사유 속에서도 무수히 발견되는 것이다.

난 이따위 동양사상은 도저히 새로운 근대적 인간관을 창출할 수 없다는 생각에 도달하였다. 김충렬 선생이 나와의 사제지정을 끊는 순간 이미 나의 사유는 그와의 사상적 맥을 완전히 절단시켰던 것이다. 그것은 어찌 본다면 하나의 공포였지만, 그것은 동시에 나에게 있어선 하나의 새로운 「作爲」의 창출이었다>

―일본의 저명한 역사학자 쓰다 소키치(津田左右吉)도 그의 저서 「일본사상과 중국사상」에서 老子사상을 「神仙說」(신선설)을 골간으로 하여 保身術(보신술), 成功法(성공법)을 가르치는 處世學(처세학) 정도로 낮춰 보았는데요.

『쓰다 소키치는 학문적 업적도 있지만, 중국을 내리 깎던 日帝에 복무했던 학자입니다. 老子는 인간 세상의 비극, 특히 정치가 불러일으키는 非인간적 사태에 집중적 관심을 갖고 거기서 벗어나기 위한 처방으로 道德經을 쓴 것입니다. 국가권력을 팽창시키기 위해 과도한 세금을 수탈하고 정복전쟁을 위해 民草(민초)들을 동원하는 데 반대했다는 점에서 그는 무정부주의자이며 휴머니스트였습니다. 老子 같은 비판자가 권력의 專橫(전횡)과 부패를 막을 수 있는 것입니다.

老子 道德經은 신비주의적인 것이 아니라 탁월한 정치철학서입니다. 그래서 日帝의 군국주의자들이 老子를 유별나게 싫어했습니다. 하지만 순박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대변자라면 단연 老子입니다. 오늘날에도 老子가 중요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지요』

―김용옥씨에게 師弟之情(사제지정)을 끊은 사실이 있습니까.

『그의 복직 문제와 관련, 오해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민주화 운동을 하다 강제로 쫓겨난 교수는 자동적으로 복직되었지만, 스스로 사표를 내고 나간 사람에게는 해당되지 않았어요. 결국 다시 채용하는 형식을 밟아야 했는데, 많은 교수님들이 반대했어요.

나는 김용옥 교수의 복교에 반대하지 않았고, 그를 고려대에 남겨두려고 노력한 사람입니다. 보십시오. 지금 내가 퇴직한 지 5년이 되는데도 후임이 없지 않습니까? 김용옥이가 있었으면 내 학문의 생명도 高大에서 지속되는 것인데 안타깝습니다.

내가 당시 경북지방의 某 신설대학의 총장과 친구 사이여서 그를 그 대학에 가라고 한 일은 있습니다. 그건 (그에 대한) 다른 교수님들의 분위기가 가라앉을 때까지 시간을 좀 벌자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불응했습니다』

―김용옥씨는 그의 저서에서 그의 복귀를 반대한 某교수에 대해선 「高大 철학과는 그 사람 혼자 마음대로 주무르는 거니깐 그 反共철학자에게 갖은 아부를 다하까!」 라는 말까지 했습니다.

『지금 처음 듣는 얘깁니다』

―김용옥씨의 TV강연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학문적 발표가 아니어서 「論語이야기」라는 제목을 붙이지 않았습니까. 우리 사회에 동양학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으니까 거기에 대해 좋은 쪽으로 생각하고 싶네요』

김충렬 선생은 김용옥씨와 관련된 필자의 질문에 곤혹스러워하며 가능한 한 답변을 아끼려고 했다.


『改憲 안하면 자살하겠다』

―선생님께서는 1987년 全斗煥(전두환) 당시 대통령에 의해 4·13 호헌조치가 발표되자 「직선제 개헌」을 주장하면서 이것이 관철되지 않으면 「자살하겠다」고 선언했던 적이 있으시지요.

『지금 「자살」 운운했던 말을 들으니 쑥스럽네요. 좀 경박했던 것 같구요. 그러나 그때는 절박했습니다』

―어떻게 해서 개헌운동에 앞장을 섰습니까.

『1987년 3월인데, 교정에서 李相信(이상신) 교수를 만났더니 「(개헌운동을) 한번 합시다」고 해서 나도 「합시다」라고 동의했습니다. 그래서 내가 (고려대) 교수들을 한 분 한 분 찾아다니며 동참을 요청하고 서명을 받아냈습니다. 28명의 교수가 서명을 해서 3월28일에 시국선언을 했습니다.

그런데도 「체육관 선거」를 계속하겠다는 이른바 「4·13 호헌조치」가 발표되었습니다. 그래서 이문영, 이상신, 김우창, 권창은, 윤용 교수와 나 등 8명이 「또 한번 (시국선언을) 하자」고 뜻을 모았습니다. 이 8인 회의에서 내가 「개헌 안 되면 나 하나 희생하겠다」는 각오를 밝혔습니다. 그때 이문영 교수가 「정신적 지주」이고 이상신 교수가 「실질적 야전사령관」이었지만 표면적으론 내가 앞장을 좀 섰지요.

연세대생 李韓烈(이한열)군이 최루탄에 맞아 숨지자 高大 교수 대표로 조의를 표하러 연세대학을 방문하여 연대 교수들과 대책을 협의하고 高大로 돌아오자마자 본관 앞에서 연좌데모에 들어갔습니다. 그 날이 4·19 기념일인데, 동참한 高大 교수가 19명이었습니다』

―개헌이 안 되면 정말로 자살할 생각이셨습니까.

『그때 나는 필리핀, 대만에서도 민주화 바람이 세차게 부는 것을 목격하고 우리 사회의 변화에 대해 어떤 확신 같은 것을 느꼈습니다. 설사 나의 확신이 틀리더라도 내 나이 쉰일곱이었으니까 책 몇 권 더 못 쓰고 죽는 것 아니냐고 마음을 다지고 있었습니다. 그런 판인데, 총무처장을 맡고 있던 윤사순 교수가 나를 만나고 난 뒤 학교 당국에 「낭설이 아니다」라고 해서 나의 결심이 밖으로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당시 노신영 국무총리의 정무비서관을 하던 분이 臺灣大學의 선배인데 나를 찾아와서는 말을 빙 돌려서 「국회의원 하나가 개헌을 안하면 자살하겠다는 얘기가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타진을 합디다. 그래서 내가 「국회의원이 왜 자살합니까? 대학교수가 죽겠다면 죽습니다. 개헌 안하면 나 자살할 겁니다」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아, 그러니까 6·29 선언이 선생님의 생명을 구한 셈이군요. 그 날 선생님께서 너무 기뻐서 술을 엄청나게 마시고 귀가하다가 집 앞의 돌계단에 넘어져 큰 상처를 입으셨다는 얘기가 전해져 오고 있습니다.

『6·29 선언 때문에 「살았다」고 기뻐한 것은 사실이지만, 돌계단에 넘어져 다쳤다는 얘기는 사실과 다릅니다. 그건 테러를 당한 겁니다』


『역사는 엄중하니까 기다려 봅시다』

―테러라니요.

『高大 교수 출신으로 야당을 하던 許某 의원이 「고향」이란 일식집으로 저녁 초대를 했어요. 거기에 가니까 야당 의원 몇명이 모여 있더군요. 자리가 자리인 만큼 차기 大選(대선) 후보 얘기가 자연스럽게 나왔는데 내가 「야당은 단일화되어야 한다. 두 金이 단일화를 못하면 제3者가 나와야 한다. 그러지 못하면 군인이 또 집권할 것이다」는 말을 했어요.

그러니 누군가가 「그것이 학계의 의견이냐」고 물어서 「누구든 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 아니냐」고 대답했지요. 이어 「그러면 누가 단일후보가 돼야 하느냐」고 물어요. 그래서 「이번에는 김대중씨가 김영삼씨에게 양보하는 것이 좋겠다」고 했어요. 그러니까 누가 「야! 너하곤 술 안 먹어」 하고 고함을 쳐서 파장이 돼버렸어요.

그래서 일어서는데 누군지 모르지만 내게 일격을 가해요. 무술의 고수 같았습니다. 순간 얼굴의 가죽이 벗겨지는 듯한 통증을 느끼고 쓰러져 정신을 잃고 말았습니다. 나중에 깨어나 보니 우리 집 방안이었는데, 가족들의 말에 의하면 내가 고급 승용차에 실려 왔다는 겁니다』

―선생님께서는 직선제 개헌 운동에 신명을 바쳤는데, 대통령 직선제 쟁취로 탄생한 「문민정부」나 「국민의 정부」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런 거 꼭 대답해야 합니까. 세상이 다 아는 일을 새삼스럽게 내가 무슨……. 역사는 엄중하니까 기다려 봅시다』

―앞으로 어떤 사람이 국가지도자가 되는 것이 바람직하겠습니까.

『이제 싸움 잘하는 정치9단은 안 됩니다. 바른 가정에서 정직하게 자라면서 제대로 공부하여 학식, 인격, 경륜을 갖춘 인물이어야 합니다. 학식이 없으면 天下의 이치를 바로 볼 수 없습니다. 인격이 부족하면 신뢰성을 의심받게 됩니다. 경륜이 없으면 지혜롭게 국가를 이끌어갈 수 없습니다』

―우리 사회가 당면한 가장 큰 문제는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도덕성의 상실이라고 생각합니다. 경제가 잘못되고 있는 것도 그 뿌리를 가만히 살펴보면 도덕이 무너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도덕적 의식이 없으면 이기주의로 나가고 도둑질을 해놓고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게 됩니다.

山河(산하)를 빼앗겨도 언젠가는 되찾을 수 있지만 마음을 죽여버리면 희망이 없어집니다. 심성 자체를 고쳐야 할 것입니다. 南冥 선생도 宣祖에게 올린 상소문에서 부정부패의 실상을 직언하면서 「정치는 임금의 마음 먹기에 달려 있음」을 강조하곤 했습니다』


나약한 書生이 아니라 실천력 갖춘 선비

―曲學阿世(곡학아세)가 판치는 오늘날에 있어 더욱 돋보이는 역사인물이 南冥 선생입니다. 南冥은 저 유명한 丹城疏(단성소)에서 당시의 정치 문란을 조목조목 거론하면서 「慈殿(자전)은 밖의 소식이 막힌 깊은 궁궐 안의 한 寡婦(과부)에 지나지 않고, 殿下(전하)는 先王(선왕)의 한 나이 어린 孤兒(고아)일 뿐」이라는 破天荒(파천황)의 비판을 가했습니다. 요즘의 지식인, 특히 언론인들이 본받아야 할 대목이 아니겠습니까.

『진실로 오늘날의 지식인이 본받아야 할 大언론입니다. 요즘 언론은 조선왕조 시대의 士林(사림)의 수준에 까마득히 미치지 못합니다. 지금 언론도 南冥의 용기와 비판정신을 배워야 합니다』

위 상소에서의 「殿下」는 불과 12세의 나이로 왕위에 오른 明宗(명종)이다. 「慈殿」은 明宗의 어머니로서 明宗 즉위 후 8년 간 攝政(섭정)을 했고, 물러나서도 그녀의 친동생 尹元衡(윤원형)을 통해 조정의 實權(실권)을 장악하여 부패무능의 「女人天下」(여인천하)를 이끌었던 文定王后(문정왕후)를 말한다.

―丹城疏에 대한 조정의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明宗은 단성소의 내용을 깊이 생각지 않고, 王 자신을 「孤兒」, 특히 대비를 「寡婦」라 하고 한 구절에 분개, 承政院(승정원)에 명하여 南冥을 「不敬君主罪」(불경군주죄)로 다스리도록 했습니다.

당시 明宗은 文定王后가 시키는 대로 따르는 「마마보이」에 불과했습니다. 그야말로 「고아」라고 칭한 南冥의 지적이 합당했던 것입니다. 明宗의 命은 드디어 史官(사관)과 經筵官(경연관)들의 반대에 부딪치게 됩니다』

이렇게 史官과 경연관이 들고 일어나는 바람에 明宗은 자신의 경솔함을 시인하고, 治罪의 命을 거둬들였다. 南冥의 이 상소는 한바탕 풍파를 일으키긴 했으나 이를 계기로 士林의 言路(언로)가 크게 신장되었다.

―南冥은 儒學者(유학자)로서는 이례적으로 평소 劍(검)을 차고 다녔다고 합디다. 그 까닭은 무엇입니까.

『南冥은 나약한 書生(서생)이 아니라 용기 있는 선비였습니다. 「배운 것을 실천하지 않으면 안 배움만 못하고, 오히려 죄악을 범하는 것이 된다」고 그는 늘 반성하고 다짐했습니다.

이렇게 실천을 중시하여 학문을 실천을 위한 하나의 工具(공구)로 보았기 때문에 南冥은 학문을 하는 한편으로 자신의 담력과 인내심을 기르는 수련을 병행했습니다. 그가 물을 가득 담은 대접을 두 손으로 받쳐들고 밤을 새운다든지, 惺惺子(성성자)라는 방울을 달고 다니며 스스로를 경각시킨 것이라든지, 검을 차고 다닌 일들은 모두 實踐當體(실천당체)인 자신을 용기 있고 강건하게 만드는 공부였던 것입니다』


南冥學의 요체는 敬과 義

―南冥의 劍은 어느 정도 되는 것이었습니까.

『그리 크지는 않았습니다. 지금은 행방이 묘연한데, 광복되기 수년 전까지는 보존되고 있었습니다. 그때 촬영한 사진을 보면 30cm 남짓한 것입니다. 南冥의 劍과 얽힌 다음과 같은 일화도 있지요.

새로 부임한 경상감사 李陽元(이양원)이 南冥과 만난 자리에서 「劍을 차고 다니니 무겁지 않습니까」라고 눙을 쳤습니다. 이에 南冥은 「벼슬아치들이 옆구리에 차고 다니는 錢袋(전대: 돈주머니)보다는 무겁지 않지요」라고 받아버립니다. 李陽元도 상당한 인물이었습니다. 대번에 「수양이 부족한 제가 山林에 실례를 범한 것 같습니다」고 사과했습니다』

―수백년 동안 보존되어 오던 南冥의 칼이 하필이면 日帝 때 사라졌습니까.

『글쎄요. 아무튼 日帝 때는 南冥이 「義兵의 아버지」라고 하여 평가절하되었습니다』

―南冥은 그의 劍에 內明者敬 外斷者義(내명자경 외단자의)라는 銘文(명문)을 새겼다는데, 그 까닭과 뜻이 무엇입니까.

『敬(경)과 義(의)는 南冥學의 요체입니다. 劍의 명문을 풀이하면 「(학문을 익힘으로써) 마음을 밝게 하는 것이 敬이고, 敬의 外的(외적) 발현이 義」라는 것입니다. 敬으로 內心(내심)이 명철해졌으므로 그것으로 비추는 세상만사는 그 是非眞假(시비진가)가 왜곡될 리 없습니다. 그러나 眞知(진지)도 판단으로만 끝나서는 無知(무지)·無明(무명)과 다를 게 없지요. 거기에는 是(시)는 是, 非(비)는 非라는 엄격한 處斷(처단)이 필요합니다』


행동하지 않고는 못 견디는 도덕적 용기

―知行合一(지행합일)을 중시한 陽明學(양명학)과 相通(상통)하는 점도 있군요.

『南冥이 陽明學을 수용한 것은 분명하지만, 南冥 스타일의 학자는 세상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의 知行合一에는 사명에 불타는 용기와 抗節(항절)이 서려 있어 擊節感(격절감)을 주는 것이 특징입니다. 남명의 不苟從(불구종: 구차스럽게 따르지 않음) 不苟默(불구묵: 구차스럽게 침묵하지 않음)은 무서울 정도의 수양과 克己(극기) 공부에서 나온 것입니다.

원래 학자들이란 알면서도 행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것은 용기가 없어서이기도 하지만. 사실인즉 그 안다는 것이 內明(내명)의 경지에까지 이르지 못했기 때문이요, 內明하면 행동하지 않고는 못 견디는 도덕적 용기가 스스로 생기게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敬과 義는 一事(일사)의 양면인 셈인 것입니다』

―南冥이 선비의 전형으로 손꼽힌 것은 그의 出處(출처)가 모범적이기 때문이었겠지요.

『治世(치세)에는 벼슬에 나아가 세상을 경영하고, 亂世(난세)엔 野로 물러나 자신을 지키며 후학을 가르치는 出處야말로 선비가 지녀야 할 大節(대절)의 으뜸이었습니다. 지조 없이 아무 때 아무에게나 出仕(출사: 벼슬에 나아감)하는 것을 苟祿(구록: 구차하게 관록을 얻음)이라 하여 천하게 여겼던 것입니다』

―明宗과 宣祖가 벼슬하라고 여러 번 불렀음에도 불구하고 거절함으로써 南冥은 君臣之義(군신지의)를 저버린 不仕主義者(불사주의자)라는 혹평도 받지 않았습니까.

『당시의 정치적 분위기로 보아서는 벼슬을 거부하는 선비가 있어서 士林를 규합, 왕권을 견제하는 것이 生民(생민)을 위해야 할 지성들의 사명이라 믿었기 때문에 南冥은 자질구레한 벼슬의 미끼에 쉽게 낚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렇다고 남명이 行道(행도)의 의지가 없었느냐 하면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당시 정권이 탐욕스런 尹元衡(윤원형) 등 奸臣(간신)들에 의해 농락되고 있는데도 임금이 이들을 신임하니까 부득이 行道를 버리고, 守道(수도)를 택한 것이지요. 南冥은 많은 선비들의 추앙을 받는 이른바 道學君子(도학군자)들이 가볍게 벼슬에 불려나가 자기의 경륜도 펴지 못하고 이름만 더럽히는 꼴을 보아왔기 때문에 자기만이라도 孤高卓節(고고탁절)한 선비의 기상을 지켜야 한다고 판단했던 것입니다』

―南冥이 죽은 후에는 在野(재야) 선비들에 대한 조정의 대접이 크게 달라지지 않습니까.

『李鐸(이탁)이 영의정을 할 때 南冥에게 벼슬을 줘도 그가 나오지 않은 것은 그것이 한직이었기 때문이라고 지적, 임금에게 그 개선책을 상주했습니다. 그후 隱逸(은일: 과거를 기피한 山林)로 기용된 선비가 掌令(장령)·持平(지평) 등 탄핵기관의 핵심보직으로 일하고, 종2품에서 그치는 승진한계를 무너뜨려 정승에까지 오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뒤에 山林 출신인 尤庵 宋時烈(우암 송시열: 老論의 영수), 許穆(허목: 南人의 영수)이 각각 집권하게 된 것도 모두 不仕를 고집한 南冥의 영향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宋尤庵과 許穆은 다 같이 「남명 조식 선생 神道碑(신도비)」를 써서 그의 德을 추앙했습니다.

남명 이후 隱逸을 과거 출신보다 높이 평가하여 士尊官卑(사존관비)의 풍조가 일어나기도 했지요. 따라서 남명이 士林에 끼친 영향은 그 누구와도 견줄 수 없는 獨步的(독보적)이었던 것입니다』

宋우암은 「남명 선생 신도비문」에서 『완악한 벼슬아치들을 청렴케 하고 나약한 선비들이 기개를 떨쳐 일어나게 함으로써 국가의 명맥을 장구케 하였으니 선생의 이름은 이 겨레, 이 강토와 더불어 영원할 것이다』라고 적었다.


왜군의 보급로를 끊은 南冥 문하 의병장들

―南冥의 제자들이야말로 綺羅星(기라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조선교육사」를 쓴 李萬圭(이만규) 같은 이는 「조선조 儒賢(유현) 중에서 가장 성공한 교육가를 든다면 단연 남명이 으뜸」이라고 했는데, 南冥의 교육방법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南冥은 章句(장구)를 외거나 설명하는 것보다는 그 涵義(함의)와 정신을 悟得(오득)하도록 자기계발력을 북돋워 주었습니다. 그의 自得爲己之學(자득위기지학)과 實踐躬行(실천궁행), 그리고 學而致用(학이치용)의 실무교육으로 길러진 人材들은 마침내 16세기 말엽에서 17세기 초엽에 이르는 국가적 위기에 구국을 위해 결정적 역할을 합니다』

南冥 문하생 가운데 儒賢(유현)과 名官(명관)으로서는 吳建(오건: 남명의 首弟子. 이조정랑 역임), 金孝元(김효원: 東人의 영수), 김우옹(남명의 외손서로서 이조참판, 宣祖의 변덕스런 성품을 비판했다가 정여립의 난에 억울하게 연루되어 귀양감. 贈 이조판서), 鄭逑(정구: 대사헌을 지내다 山林으로 은거함. 贈 영의정), 鄭琢(정탁: 좌의정 재직 때 權臣 윤원형을 탄핵한 直臣. 贈 영의정), 崔永慶(최영경) 등이 손꼽힌다.

그러나 南冥을 더욱 빛나게 하는 것은 뭐니뭐니 해도 그의 문하에서 배출된 뛰어난 의병장들이다. 임진왜란 때 활약한 南冥 문하 의병장들로서 대표적 인물은 鄭仁弘, 郭再禑, 李大期(이대기), 金眄(김면), 趙宗道(조종도) 등이다.

―南冥 문하생들의 用兵(용병)이 탁월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南冥은 임진왜란 30여년 전에 왜구의 침범을 예견하고 국방적 대비를 절감하여 학생들에게 兵法(병법)을 가르쳤습니다. 남명은 孫子兵法(손자병법), 六韜三略(육도삼략), 武侯心經(무후심경) 등에 정통했지요. 선생의 文集(문집) 중에는 兵을 움직이려면 軍糧(군량)과 무기를 어떻게 조달해야 하고, 隊伍(대오)를 어떻게 편성해야 하는지, 그 구체적인 방법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남명 문하의 의병장들은 문무를 겸전하여 거의 전부가 성공했습니다.

임진왜란 때 3대첩 중 하나로 손꼽히는 晉州城(진주성) 전투의 예를 들어봅시다. 그때 郭再祐 부대는 진주성에 입성하지 않고 진주 외곽의 산 위에 포진하여 밤새도록 횃불을 움직여 疑兵(의병)으로 삼고 진주성을 포위한 왜병에 退路(퇴로) 차단의 심리적 압박을 가하면서 守城戰(수성전)으로 고투하는 우군의 사기를 올렸습니다. 평양까지 치고 올라간 왜군이 더 이상 북진을 하지 못하고 패퇴한 것은 그들의 보급로가 남명 문하의 의병장들에 의해 끊어졌기 때문입니다』


南冥이 山林을 固守한 까닭

南冥 曺植은 연산군 7년(1501) 6월26일(음력) 경남 합천군 삼가면 兎洞(토동)의 외가에서 아버지 彦亨(언형)과 어머니 仁川李氏(인천이씨) 사이의 3남5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본가는 三嘉板峴(삼가판현)에 있었다. 다섯 살 때까지 외가에서 자라던 南冥은 아버지가 文科(문과)에 장원급제를 하고 벼슬길에 오르자 서울로 이사를 해서 아버지로부터 문자를 배웠다.

小學期(소학기)에 들어서서는 李潤慶(이윤경: 판서 역임), 李浚慶(이준경: 영의정 역임) 형제, 李恒(이항: 隱逸) 등과 죽마고우로 자라면서 학업을 닦았다. 아버지가 端川(단천) 군수로 나가자 잠시 거기서 지내면서 經傳子史(경전자사)와 천문, 지리, 醫方(의방), 수학, 弓馬(궁마), 陣法(진법) 등 대장부가 갖추어야 할 지식과 재능을 두루 익혔다.

18세 때 서울로 돌아온 南冥은 名門(명문) 출신으로 나중에 隱逸로 추앙받는 成守琛(성수침)과 成運(성운) 종형제를 만남으로써 심경에 큰 변화를 일으킨다. 南冥은 그들의 영향을 받아 俗氣(속기)를 떨쳐버리고 보다 높고 넓고 깊은 경지를 추구하기 시작하여 儒書(유서) 이외에 老莊(노장)과 佛書(불서)를 섭렵했다.

20세에는 생원·진사 양과에 각각 1등과 2등으로 급제했다. 이럴 무렵에 己卯士禍(기묘사화)로 趙光祖(조광조)와 더불어 숙부인 彦卿(언경)이 사약을 받고 죽자 南冥은 그의 진로를 隱逸로 잡아버린다.


모든 것이 마음 먹기에 달린 것, 理發, 氣發 논쟁은 쓸데없는 일

―南冥과 동갑인 退溪 李滉(퇴계 이황)은 그렇게도 학문에만 정진하는 隱逸이 되기를 바랐으면서도 文科를 하여 벼슬살이를 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退溪는 그 시대에 내로라고 할 만한 가문이 아니었습니다. 본가가 처가보다 신분이 낮아 하시를 당할 처지였지요. 그는 집안을 일으키고, 홀어머니를 기쁘게 해드리기 위해 文科에 응시했던 것입니다』

―南冥과 退溪는 평생 서로 만나지는 않았지만 서로 편지를 주고받는 知己(지기)관계가 아니었습니까. 그럼에도 南冥은 退溪의 出處에 대해서만은 비판적이었는데, 왜 그랬습니까.

『退溪가 제자들에게 자신의 碑銘(비명)에 「退陶晩隱」(퇴도만은: 늦게 도산으로 물러난 隱逸)이라고 써줄 것을 당부했는데, 그 소식을 들은 南冥은 文科 출신이 어떻게 「晩隱」이라고 쓸 수 있느냐는 의문을 제기한 적이 있습니다. 退溪가 뭣 때문에 어지러운 조정에서 벼슬을 하고 싶었겠습니까? 그래서 退溪는 무슨 계기만 있으면 말머리를 돌려 陶山(도산)으로 낙향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

―栗谷 李珥(율곡 이이)는 九度壯元(9도장원: 과거에서 아홉 번 장원)으로 그 이름을 떨쳤습니다. 그의 과거시험 답안인 天道策(천도책)은 지금 읽어 보아도 어떻게 짧은 시간에 그렇게 논리정연한 글을 작성할 수 있었는지 놀랄 지경입니다.

『栗谷 역시 신분상승을 위해 과거를 했습니다. 그러나 당시 士林에서는 그에 대해 「시험 치는 데 골몰한다」고 비웃기도 했지요. 율곡의 친구인 成渾(성혼: 성수침의 아들)은 「그대와 나는 벗인데, 남들 보기가 부끄럽다」는 편지를 보냅니다. 이에 栗谷은 「그대는 모르는 소리를 하지 마라. 누가 우리 집안을 알아 주나. 그대는 조상을 잘 두어서 유복하지만, 나는 벼슬을 하지 않으면 먹고 살 수가 없는 형편이다」는 요지의 답장을 보냈습니다』

―南冥은 당시 학계에서 벌어진 理氣(이기) 논쟁에 대해 어떤 시각을 갖고 있었습니까.

『退溪의 理發論(이발론)이나 栗谷의 氣發論(기발론)에 대해 南冥은 「별 소용도 없는 것을 가지고 논란거리로 삼는다」는 입장을 보였습니다. 理發이니 氣發이니 하지만 결국은 心(심:마음)에 달린 것입니다. 그는 모든 생명을 주재하는 것이 心이라고 보는 主心論者(주심론자)였습니다.

모든 행위를 명령하는 것이 心이며, 心을 다스리기 위한 공부가 敬이며, 敬을 밖으로 표출하는 용기가 義인 것입니다. 따라서 모든 것이 心發(심발: 마음먹기)에서 오는 것이므로 心을 말하지 않고 理發이니 氣發이니 하는 것은 있을 수가 없다는 논리지요』


諸葛亮을 평가하지 않은 예리한 史觀

南冥은 26세에 아버지가 별세하자 고향인 三嘉(삼가)에 장사를 지내고 3년의 시묘살이를 했다. 30세 때 처가가 있는 金海(김해)로 이사하여 거기에 山海亭(산해정)을 짓고 학문과 인격을 닦았다. 여기에 절친한 벗 成運을 비롯, 이청향당, 이황강, 신송계 등 名流(명류)들이 모여들어 南冥은 己卯士禍(기묘사화) 이후 떨어졌던 士氣(사기)를 응집, 재기를 도모하는 중심인물이 되었다.

―士林의 중심인물이 되려면 경제적 기반이 필요했을 터인데, 南冥에게 그럴 만한 재물이 있었습니까.

『南冥은 재력이 별로 없었지만, 처가가 金海의 대지주였습니다. 長子相續(장자상속)은 경제가 피폐해진 임진왜란·병자호란 이후에 정립된 제도이고 南冥 당시의 상속제도에서는 남녀평등이었습니다. 남명은 부인의 재력을 기반으로 시쳇말로 하면 연구소인 山海亭을 세울 수 있었습니다』

48세 때는 18년 간 학문기반을 닦았던 金海를 떠나 다시 고향 합천으로 돌아와서 鷄伏堂(계복당)과 雷龍亭(뇌용정)을 지어 후진을 가르치고, 한편으로는 處士(처사)로서 언론을 發(발)하여 국정을 비판했다. 이 무렵부터 조정은 士林을 포섭하기 위해 벼슬길로 나오도록 했지만, 南冥은 모두 사퇴했다.

―남명이 김해에서 합천으로 거처를 옮긴 까닭은 무엇입니까.

『첫 부인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 병으로 요절하는 등 가정적인 풍파를 겪었습니다』

이런 가운데 南冥은 오덕계, 정내암, 노옥계 같은 기성학자들이 문하로 들어와 士林의 宗師(종사)로 추대되었다. 특히 여기서 올린 이른바 丹城疏가 조정을 놀라게 하고, 士林을 진동시킴으로써 그의 名望(명망)은 극치를 이뤘다. 남명은 61세가 되자 지리산 천왕봉을 바라보는 경호강변 德山(덕산: 경남 산청군 시천면)에 山川齋(산천재)를 짓고 후학들을 지도했다.

―남명이 만년에 다시 德山으로 옮긴 것도 경제적 이유 때문이었습니까.

『남명의 조카사위가 덕산을 屬縣(속현)으로 삼은 晉州(진주)의 만석꾼인 進士(진사) 하종학인데, 그가 남명의 후원자로 나섰습니다. 德山서원 일대의 토지가 晉陽河氏(진양하씨) 집안의 소유였지요』


우주와 人生

―남명은 66세 때 布衣(포의)로 새로 등극한 宣祖와 獨對(독대)하여 治國之方(치국지방)과 學問之要(학문지요)를 진언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겉모양만은 劉備(유비)와 諸葛亮(제갈량)이 만난 隆中對(융중대)를 방불케 하는데, 실제 문답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宣祖는 남명에게 諸葛亮에 대해 물었는데, 이것은 왕 자신을 諸葛亮이 劉備에게 한 것처럼 보좌해 달라는 완곡한 표현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남명은 宣祖를 劉備처럼 在野를 포용할 만한 인물로 보지도 않았는 데다 諸葛亮도 크게 평가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後漢(후한)의 역사적 소명은 이미 끝났는데, 劉備의 三顧草廬(삼고초려)에 감읍한 제갈량이 天下三分之計(천하삼분지계)를 들고 나와 천하통일을 지연시킴으로써 더 많은 사람들의 피를 흘리게 했고, 劉備의 목표인 漢室(한실)의 부흥을 성공시키지도 못했다는 것입니다. 남명은 제갈량이 유비에 대한 義理는 지켰는지 모르지만, 天下에 대한 義理는 지키지 못한 인물로 평가했습니다. 역사를 보는 남명의 눈이 참으로 예리합니다』

南冥은 1572년 2월8일 72세로 德川에서 별세했다. 운명 직전 문병을 온 제자들에게 死後 칭호를 處士로 할 것을 당부했다. 處士는 벼슬하지 않고 在野에 있는 선비의 通稱(통칭)이다. 이어 그는 자기의 학문이 敬義 두 글자로 집약되는데, 이는 하늘의 日月과 같은 것으로 변할 수 없는 진리이니 힘써 持行(지행)할 것을 유언했다.

南冥의 부음을 들은 宣祖는 『온 나라가 텅 비어 본받을 데 없음을 어찌하랴…』는 祭文(제문)을 지어 추모했다. 山林處士에게 내린 국왕의 祭文으로서는 파격적이었다. 국왕 스스로가 제자의 禮(예)를 표했던 것이다.

―제가 선생님께 꼭 여쭈어 보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21세기에 동양철학이 어떻게 인류 발전에 기여할 수 있겠습니까.

『21세기에 인류가 해결해야 할 문제는 自然(자연)과 人性(인성)을 되찾는 일이지요. 그럴려면 물질생산에 있어 서양의 직선 발전 방식을 지양, 동양의 순환과정 진행 방식으로 바꿔야 하며 가정의 가치을 중시하며 교육의 출발점으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내가 동양철학을 공부하는 목표는 추상적 관념으로 호도된 동양의 지혜와 정신을 오늘에 맞게 재활시켜 인간 세상을 至善(지선)으로 이끄는 생명의지로 역동케 하려는 것입니다』

―오랜 시간 가르침을 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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