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조선 기사

韓日교류 400만명 시대의 충격

『심야에도 잠들지 않는 서울의 활력과 사람 냄새가 좋다』

글 정순태 기자  2005-0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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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에 한국을 찾아온 외국인 관광객수가 처음으로 500만명을 돌파하여 532만명에 이르렀다. 이와 같은 한국관광 붐을 견인한 것은 일본인 여행객들이었다. 한국관광공사에 따르면 2000년의 訪韓(방한) 외국인 관광객 중 일본인은 그 절반(48.3%)에 가까운 247만2054명으로 집계되었다.

1999년 이후 한국은 하와이를 제치고 일본인의 해외여행 목적지 제1위의 자리로 뛰어올랐다(하와이와 미국 본토를 합친 미국 전체의 1999년 일본인 관광객 유치실적은 484만명으로서 여전히 1위). 문화관광부는 금년의 訪韓 일본인 관광객수가 270만명에 달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한국인에게도 일본은 제1위의 해외여행 목적지가 되었다. 1999년의 경우 출국 한국인의 24.3%가 일본에 갔다. 訪日(방일) 한국인 여행객수는 IMF 사태의 영향을 받은 1998년에 82만명으로 급감했으나 이후 매년 꾸준히 증가하여 작년에 110만명을 기록했다.

이런 추세로 가면 21세기의 들머리 해인 2001년은 韓日 간 교류 400만명 시대를 개막시키는 元年으로 기록될 것으로 보인다. 訪韓 일본인 관광객은 1998년 이후 3년 연속 10% 이상의 높은 증가세를 기록해 왔다.

더욱이 2002년에는 韓日 양국이 월드컵 대회를 공동개최하기로 예정된 만큼 韓日 간 대량교류시대는 더욱 큰 폭으로 진전될 듯하다. 최근에 빚어진 韓日 간의 역사교과서 파동도 이런 大勢(대세)에 별다른 장애물이 되지 않았다.

밤 12시가 지난 시각, 동대문시장 두산타워에서 친구와 함께 쇼핑중이던 20代 일본 여성 후미에씨에게 『서울에서 가장 인상적인 게 무엇이냐』라고 물었더니, 『서울사람은 밤에도 잠을 자지 않는 것 같다』면서 『이런 서울의 활기가 마음에 든다』라고 말했다. 이어 그녀는 『심야에도 쇼핑하고, 밥 사 먹을 수 있고, 인파로 북적거리는 곳은 지구상에서 서울뿐일 것』이라고 덧붙였다.


韓國 관련 프로 다뤄야 시청률 오르는 일본TV

요즘 일본에서는 TV, 일간지, 주간지, 월간지가 한국 관련 프로그램이나 기사를 다뤄야 시청률 또는 판매부수가 올라간다는 말이 나돌 정도다. 또한 비빔밥 체인점, 한국가정요리점 등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 성업중일 만큼 한국붐이 세차게 불고 있다.

작년 10월 일본 內閣府(내각부)에서 실시한 외교에 관한 여론조사에서 「한국에 대해 친근감을 느낀다」 라고 대답한 사람이 전체 응답자의 51.4%로서 「그렇지 않다」 라고 대답한 사람의 44.0%를 앞지르는 사상 두 번째의 역전현상을 보였다. 종전의 내각부 여론조사에서 「친근감을 느낀다」가 「그렇지 않다」를 앞질렀던 유일한 해는 서울올림픽이 개최된 1988년으로서, 당시에는 50.9% 대 42.9%의 비율이었다.

이와 같은 최근의 현상은 일본 중부지역 유력 방송사인 「TV 아이치(愛知)」의 사례를 보아도 알 수 있다. TV 아이치가 지난 2월5일부터 서울의 먹거리를 테마로 한 프로그램을 8회에 걸쳐 방영하자 시청률이 급격히 상승했다. 그래서 제2탄으로 계획중이던 「대만편」을 일단 보류하고 3월 초순 급거 「제주도편」을 취재하여 방영했다.

일본 최대의 해외여행전문지 발행처인 「루루부」社에 따르면 「루루부-한국판」이 90만 부가 팔려 2위인 「루루부-하와이판」의 80만 부를 누르고 최고의 판매실적을 보였다. 이것은 한국이 하와이를 제치고 해외여행 목적지 제1위에 오른 사실을 반영한 것으로 보여진다. 역시 일본의 유력 해외여행전문지 발행처인 다이아몬드社는 「세계를 간다-한국편」에 더하여 1년 前 「세계를 간다-서울편」을 발간했는데, 호평을 받고 있다고 한다.

일본 동북지방의 센다이市 시치가하마村에서는 매년 「인터내셔널 위크」 행사를 개최, 1개 국가를 중점 소개해 오고 있는데, 주최측은 최근의 한국붐을 고려하여 금년 테마를 「한국」으로 설정했다.

일본 최대여행사인 JTB(일본교통공사)는 금년 들어 일본여행사 사상 최초로 한국의 전북지역 관광기획인 「디스커버 인 全州(전주)」를 출시하여 활발한 送客(송객) 캠페인을 전개하고 있다. 이 관광기획상품의 募客(모객) 목표는 2만명이다.

미국의 시사주간지 「뉴스위크」는 지난 4월11일자에 「일본에 부는 한국열풍」이라는 제목의 특집기사를 실었다. 표지에는 피부 미용을 위해 온몸에 머그(진흙)를 바른 젊은 일본 여성이 찜질방에 들어가 있는 모습의 사진을 담았다. 도쿄지국 다카야마 히데코와 이토이 가이 기자가 공동 집필한 이 기사에서는 「오랜 경기 침체로 우월감이 사라진 일본인들에게 영화·음악에서 미용·IT(정보통신)사업까지 이제 한국은 선망의 대상」이라는 부제를 달았다.

뉴스위크는 「한국 열풍」의 배경에 대해 일본 경제가 10년 이상 장기 침체를 겪고 있는 반면 「한국은 구조조정을 비교적 성실하게 수행하면서 경제가 좋아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풀이했다. 그러나 최근의 환율 급등과 株價(주가) 폭락에다 현대그룹의 對外信認度(대외신인도) 추락과 대우그룹의 부도사태로 경제위기를 맞고 있는 한국인으로서는 이런 류의 과대평가가 자랑스럽다기보다는 오히려 민망할 정도이다. 이런 점에서 뉴스위크誌의 보도 내용은 다소 과장된 면도 없지 않다.


일본 관광객이 서울로 몰리는 까닭

그럼에도 일본의 젊은이 사이에 H.O.T. 엄정화 등 한국 인기 가수들의 음반이 불티나게 팔리고 있으며, 「쉬리」 등 한국 영화들도 연일 매진 사태를 빚고 있다는 뉴스위크의 보도 내용은 이미 그 실적으로 뒷받침되고 있는 현상임에 틀림없다. 특히 지하철 선로에 추락한 일본인을 구하기 위해 몸을 던진 한국인 유학생 이수현씨의 희생은 일본 열도를 감동시킨 사건이었다.

국내 관광업계에 따르면 이수현씨의 죽음 이후 한국에 호감을 갖고 한국을 찾는 일본 젊은이들이 급증하고 있다. 이 시점에서 최근 일본인들의 訪韓러시를 경제적·관광적 관점에서 살펴 볼 필요도 있을 것 같다.

일본관광업계에서는 최근의 한국행 여행붐을 安(안)·近(근)·短(단) 현상 때문이라고 말한다. 일본의 불경기 때문에 일본인의 해외여행 패턴이 저렴하고, 가깝고, 짧은 관광으로 변화하고 있다는 뜻이다. 일본인의 패턴 변화는 한국 관광산업을 위해서는 안성맞춤이다.

일본 기업의 週休(주휴) 2일제 실시율은 60%, 종업원 1000명 이상 대기업의 경우엔 82%에 달한다. 토요일, 일요일, 월요일 3일 간의 연휴제도인 「해피 먼데이(Happy Monday)」도 확대 실시되어 금년에는 8회나 된다. 2박3일 정도의 해외여행을 하기에 꼭 들어맞는 연휴기간이다. 이것은 訪韓 일본인 관광객의 滯韓(체한)일수가 평균 2.8일인 점과도 맞아떨어진다.

일본 정부는 그동안 무역수지의 흑자폭 급증에 따른 외국의 압력을 완화하기 위해 자국민들의 해외여행을 장려하는 정책을 시행해 왔다. 일본인 해외여행자 수는 매년 증가하여 2000년엔 1780만명에 달했다. 한국은 연간 100억 달러의 對日무역 적자를 기록하고 있다. 일본 정부는 관광정책에 의해 한국의 對日무역 적자를 일부 보전해 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좌석 잡기 어려운 일본발 서울行 노선-週間 9만여 석

일본인의 訪韓 목적을 보면 「여가·위락·휴가」가 58.5%, 「사업 또는 전문활동」이 31.6%, 「친구·친지 방문」이 5.8% 등이다. 일본인을 제외한 외국인의 訪韓 목적을 보면 「사업 또는 전문활동」이 가장 많다. 訪韓 미국인의 경우 「사업 또는 전문활동」이 75.4%, 「여가·위락·휴가」가 14.8%, 「친구·친지 방문」이 5.1% 順이다.

요즘 도쿄발 한국행 비행기 좌석은 적어도 1주일 前에 예약하지 않으면 잡기 어렵다. 한국행 항공편은 일본 21개 공항과 연결되고 있다. 여객수송능력은 週間 345편 9만3000석이다. 그런데도 도쿄-서울간 노선의 좌석은 만성적인 부족현상을 드러내고 있다.

작년 10월 아사히(朝日)신문 사장단은 청와대 면담시간이 갑자기 확정되는 바람에 서울행 비행기 좌석을 잡지 못해 부랴부랴 나리타(成田)공항에서 소형 自社전용 비행기를 타고 서울로 날아왔다고 한다. 일본의 항공업계에서는 韓日 양국의 국내공항으로 쓰이고 있는 하네다(羽田)공항과 김포공항을 바로 연결하는 차터(傭船) 비행기 사업을 추진하고 있으나 나리타 공항 소재지인 치바(千葉)현 주민들의 반대로 일단 사업을 연기한 상태이다. 그 대신에 하네다-제주 간 차터 비행기가 떠서 만성적 좌석 부족현상을 일부 해소한 일도 있다.

증편과 신규 노선 개설이 잇따르고 있다. 금년 4월 초에 仁川국제공항-나고야·오사카·히로시마·고마쓰 국제공항과 연결하는 노선에서 4편이 증편되었다. 인천국제공항과 미야자키·요나코와 연결하는 2개 신규 노선도 개설되었다.

그렇다면 대량교류 시대로 접어든 요즘 일본인의 한국에 대한 성적표는 어떨까. 그것은 訪韓 일본인 여행객의 만족도를 통해 추정해볼 수 있다. 한국관광공사의 2000년 외래관광객실태조사에 따르면 訪韓 일본인의 만족도는 5점 만점에 3.99에 그쳤다.

조사대상 13개국인의 만족도와 순위를 보면 1위 러시아(4.54), 2위 미국(4.51), 3위 프랑스(4.47), 4위 독일(4.39), 5위 영국(4.38), 6위 호주(4.37), 7위 캐나다(4.28), 8위 싱가포르(4.26), 9위 태국(4.20), 10위 일본(3.99), 11위 중국(3.92), 12위 홍콩(3.82), 13위 대만(3.76)이었다.

위의 조사에서 아시아권 관광객, 특히 관광한국을 견인하고 있는 일본인 여행객의 만족도가 낮았다는 것은 관광한국이 풀어가야 할 숙제가 아닐 수 없다. 어떻든 이런 조사 결과를 보면 일본인들의 한국에 대한 감정은 아직도 好·不好가 교차하고 있다고 해야 정확할 것 같다.


朝鮮 遊女와 1970년대의 기생관광

한국과 일본은 가깝고도 먼 나라였다. 조선왕조는 임진왜란을 도발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사후에 히데요시의 후계자를 멸망시키고 일어난 도쿠가와(德川)막부와 260년 간에 달하는 장기 평화관계를 이룩했지만, 상호교류의 수준은 그리 크지 않았다.

조선측에서는 한 번에 350~500명 규모의 朝鮮通信使(조선통신사)를 12회에 걸쳐 일본에 파견했는데, 그 숫자를 모두 합쳐 보아야 5200명 정도였다. 일본측의 사신은 아예 서울로 올라오지도 못하게 했다.

일본 사신의 上京路(상경로)가 임진왜란 때 왜병의 진격로로 악용되었기 때문이었다. 그 대신에 일본의 무역전진기지와 외교 교섭의 장소로 부산포에 草梁倭館(초량왜관)이 설치되어 있었다. 초량왜관에는 일본인들이 500명쯤 상주했다.

그러다 보니 초량왜관의 일본인 상인들과 조선의 遊女(유녀)들이 性교섭를 가지는 일이 가끔 벌어졌다. 초량왜관을 관할하던 東萊府(동래부)의 관헌들은 그런 遊女들의 목을 베어 왜관의 정문 앞에다 내걸기도 했다. 미풍양속을 지키기 위한 유교국가적 苦肉之策(고육지책)이었다. 그렇다면 1965년 韓日국교 정상화 이후의 양상은 어떠했을까.

1980년대까지만 해도 訪韓 일본인들은 귀국 후 한국에 갔던 사실을 감추는 경우가 많았다. 이른바 「기생관광」 때문이었다. 한국의 젊은 여성이 일본 유흥가에 대거 진출하기도 했다. 다음은 당시 한국의 恥部(치부)를 적나라하게 폭로함으로써 일본에서 대단한 화제를 모은 「일본인과 한국」이라는 책에서 인용한 대목이다.

그는 한국의 여성들이 경제건설에 빠져서는 안 되는 외화획득을 위해 국내외에서 「헌신적」으로 노력하고 있는 현상에 대해 문교부 장관으로서 만족의 뜻을 술회하면서 『이들 한국 기생, 호스티스들이 대거 일본에 진출, ○○를 팔면서 나라를 위해 밤낮으로 분투하고 있는 애국의 至情(지정)은 실로 존경해야 할 일』이라는 최대급의 찬사를 바쳤다.

伏字(복자)의 부분은 무뢰한이 사석에서조차 입에 담기 어려운 말이지만, 이 믿기 어려운 에피소드에 의해 M 문교부 장관은 지금 在日한국인 사회에서 超유명인으로서 이름을 날리고 있다>


한국은 일본인의 赤線지대

「일본인과 한국」은 「한국 여성의 육체가 일본인을 위한 생리적 배설물의 하수도로 되어가고 있다」면서 당시의 집권자 朴正熙 대통령에게 직격탄을 날리고 있다.

<「올바른 가치관의 정립」은 朴正熙 대통령이 가장 좋아하는 어구로서 그는 말할 때마다 이를 되풀이해 왔다. 朴정권이 내건 「올바른 가치관」을 국민에게 침투시키는 大役(대역)을 띠고 있는 것이 다름아닌 문교부 장관이지만, 그 「바른 가치관」이 무엇인지, 뜻밖에도 우리는 M 문교장관의 입을 통해 그 구체적인 해석을 알 수 있었다. 그런 까닭으로 이들 「○○를 팔기」 위해 일본에 파견되고 있는 한국의 여성들은 한국 정부로부터 「예술사절단」이라는 명목으로 여권이 발급되고 있는데, 그녀들이 틀림없이 「예술가」라는 증명서를 발급하는 것은 M 장관이 관할하는 문교부이다.

근착 타임誌(6월4일자)는 한국 정부로부터 「객실에서 외국인관광객을 위안하는 것을 허가한다」는 취지가 명기된 라이센스를 받고 있는 매춘부의 수가 서울에만 1500명, 한국은 지금 일본의 赤線(적선)지역으로 되고 있다고 보도했다. 매춘부까지 동원하는 관광수입은 1억2000만 달러(1973). 국제수지 적자에 고민하고 있는 한국 정부로서 매춘업은 불가결하다.

타임誌의 기사는 한국일보(5월31일자)에 「全文 번역」이라는 제목을 달아서 게재되었지만, 이와 같은 매춘관광이 「朴正熙 대통령을 포함, 한국 정부의 고관에 의해 적극적으로 장려되고 있다」고 술회한 원문의 부분은 삭제되었다. 자국의 대통령이 「뚜쟁이」라고 하는 사실을 활자화하기는 곤란했을 것이다>

위의 글을 쓴 사람은 당시 일본에서 발간되던 「民族時報(민족시보)」라는 매체의 주필이었던 재일교포 鄭敬謨(정경모)씨였다. 그는 反體制的 시각으로 한국을 바라보면서 한국의 호텔을 「公害(공해)산업」으로 인식한 사람이기는 했지만, 당시 우리 관광산업의 이면이 그러했던 것 또한 사실이다.


訪韓 러시를 주도하는 일본의 20代 여성

요즘은 일본發 한국行 여객기의 분위기부터 크게 달라졌다. 訪韓 일본인 여행객 가운데 20代 여성이 성별 연령별 구성비에서 제1위인 14.9%를 차지하고 있다. 일본의 20代 여성들 사이엔 『한국 가봤어요』가 인삿말처럼 번지고 있다고 한다. 그 다음으로 50代 남자 14.8%, 40代 남자 13.8%, 30代 남자 11.2% 등의 순이다. 성별 구성비는 남성 59,9%, 여성 40.1%로서 아직도 남성의 점유비가 높다.

그러나 여성의 점유율이 매년 증가하면서 韓日 직항노선 여객기 안의 분위기가 한결 밝아졌다. 어느 관광지이든 20代 여성 관광객이 가는 곳으로 관광객이 몰려든다는 점에서 한국을 찾는 일본 여행객은 계속 늘어날 전망이다. 일본인의 가족여행도 증가하고 있다.

일본 여행업계에서 한국관광 붐을 표현하는 키워드는 Every라는 영어단어이다. 즉, Every Time(언제라도), Everybody(누구나), Everywhere(일본 어디서든) 한국에 갈 수 있다는 뜻이다. 종전에는 2월과 3월이 비수기였지만, 이제는 연중 성수기로 이어지고, 성별 연령별의 구별도 없으며, 일본 전국에 산재한 거의 모든 국제공항에서 한국行 여객기가 뜨고 있기 때문이다.

도쿄발 서울행 항공요금은 도쿄-히로시마 간의 항공요금은 물론 도쿄-시모노세키 간의 新幹線(신간선) 철도요금보다 싸다. 일본인으로선 국내여행의 감각으로 한국 여행이 가능해진 것이다.

訪韓 일본 여행객의 방문지는 항공편이 몰려 있는 서울로 집중되고 있다. 한국관광공사의 2000년 외래관광객 실태조사(중복응답 가능)에 따르면 일본 여행객의 방문지는 서울 77.9%, 부산 17.2%, 제주도 7.4%, 민속촌(용인) 7.1%, 경주 7.1%, 판문점 2.8% 등으로 나타났다. 이런 수치는 엄밀한 의미에서 최근 일본인의 한국 러시가 「한국관광붐」이 아니라 「서울관광붐」이란 사실을 말해 주는 것이다.

그렇다면 서울 시내에서 일본 관광객이 선호하는 곳은 어딜까. 한국관광공사의 조사(중복응답 가능)에 따르면 명동 58.9%, 남대문시장 58.7%, 동대문시장 51.2%, 고궁 25.5%, 이태원 23.1%, 박물관 22.7%, 롯데월드 20.8%, 인사동 12.6%, 남산 9.1%으로 나타났다.

이런 현상은 1997년 홍콩이 중국으로 복귀한 이후 더욱 심화되고 있다. 이제 서울은 홍콩을 대신하여 일본인 관광객들이 가장 많이 찾는 쇼핑 장소가 된 것이다.

訪韓 일본인 쇼핑객의 절반 이상은 김치를 사간다. 쇼핑 품목별 조사(중복응답)에 따르면 김치 57.4%, 김 38.1%, 의류 31.6%, 피혁제품 29.7%, 향수·화장품 27.7%, 담배 23.4%, 액세서리 23.4%, 신발류 15.6%, 인삼·한약재 14.1%, 술 13.9% 順이다.

일본 관광객의 訪韓 중 활동에 대한 한국관광공사의 조사(중복응답)에 따르면 쇼핑 74.4%, 관광 58.4%, 식도락 37.6%, 미용관광 26.8%, 친구·친지 방문 12.3%, 갬블링(도박) 11.8%, 오락 9.0% 등의 순으로 나타났다.

이런 현상은 일반적인 일본인 해외관광객의 행태와 큰 차이를 보이는 것이다. 「JTB(일본교통공사) 리포트 2000」에 따르면 외국여행지에서 일본인 관광객이 행하는 주요활동(1999년)은 자연풍경 관람, 쇼핑, 역사문화 관광, 음식체험, 미술관·박물관 견학 등의 順이었다.

그러면 일본인 관광객은 한국에서 돈을 얼마나 쓰고 갈까. 訪韓 일본인(개별여행 기준)의 지출경비(항공료 제외)는 1023 달러였다. 전체 외국인들의 평균 지출경비(1295달러)에 비해서는 적은 편이지만, 일본여행객의 滯韓일수(평균 2.8일)가 전체 외국인 여행객의 滯韓일수(평균 5.6일)에 비해 절반 수준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그 씀씀이가 오히려 큰 편이다.


在日동포와 서울서 결혼한 일본인 유학생

최근 일본인의 한국붐과 한국 여행 실태를 행정적 숫자가 아니라 체험을 통해 증언할 만한 사람은 없을까. 필자는 일본 마이니치(每日)신문 서울특파원 사와다 가츠미(澤田克己) 기자에게 이런 일본인이 있으면 소개해 달라고 부탁했다.

사와다 특파원은 그 적임자로 이소자키 아츠히도(石義崎敦仁·26)씨를 추천했다. 일본 게이오(慶應)대학 대학원 박사과정 3년차이던 1999년에 한국으로 유학 온 이소자키씨는 작년 12월 在日동포 4세인 李和江(이화강·22)씨와 서울에서 만나 연애 끝에 결혼했다.

둘은 서울대학교 어학연구소에서 함께 한국말을 배우던 클라스메이트였다. 현재 동숭동 대학로변에 있는 외국유학생 전용 원 룸 아파트인 국제회관에서 신혼생활중이다. 이소자키씨는 서울대 대학원 외교학과에, 부인 李씨는 성균관대학 국문학과에 다니고 있다.

이소자키씨의 장래 희망은 한반도 문제 전공의 교수가 되는 것이라 한다. 그는 금년 5월부터는 北京(북경)으로 건너가 駐中(주중)일본대사관의 전문조사원으로 일하며 2년 간 북한에 관한 관찰과 자료수집을 하고 본국으로 돌아가 한반도 연구자로서 명성이 있는 게이오대학 오코노키 마사오 교수 밑에서 박사과정을 마칠 계획이라고 한다.


『탑골공원에 가면 일본말을 삼가하라』

지난 4월5일, 광화문의 우거지 국밥집에서 필자와 처음 만난 이소자키씨는 기자의 요청보다 인터뷰 날짜를 며칠 미룰 수밖에 없었던 이유부터 설명하면서 거듭 『미안하다』고 말했다. 일본에서 그의 아버지, 어머니, 여동생과 장인, 장모, 처제가 한꺼번에 서울을 방문하는 바람에 관광 가이드역까지 하느라고 몹시 바빴다고 했다.

―어디를 안내했습니까

『남대문시장, 경복궁, 창덕궁, 국립민속박물관, 명동, 인사동으로 모시고 다녔습니다.

―가장 마음에 들어하던 곳은 어딥디까.

『저의 아버지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창덕궁과 비원을 매우 좋아하셨습니다』

―아버지가 무슨 일을 하시는데요.

『건축사입니다』

―처가식구들은 어디가 좋다고 합디까.

『남대문시장에 가니 사람 냄새가 물씬 나서 좋다고 하셨습니다』

―장인어른은 어떤 일을 하십니까.

『히로시마에서 자동차수리기술자로 일하십니다』

―국적이 서로 다른 사람끼리 결혼했는데, 兩家에서 반대는 없었습니까.

『전혀 없었습니다. 저는 김치를 매우 좋아하는 가정 분위기 속에서 자랐습니다』

―이번 서울 여행중 모두들 한국 음식은 잘 먹었겠네요.

『비빔밥, 갈비, 삼계탕을 좋아하시더군요. 재일교포 3세인 장인, 장모가 오히려 김치를 잘 못 드셨습니다. 처제는 매운 음식을 못 먹어 따로 돈가스를 사 먹기도 했습니다』

―여동생과 처제는 어디가 인상적이라고 합디까.

『신세대 패션거리인 동대문시장을 좋아하더군요』

―압구정동의 로데오 거리 같은 곳을 가보고 싶어하지 않습디까.

『한국 사람들은 흔히 일본인 여행객에게 서울 강남 번화가나, 여의도 63빌딩 같은 곳을 소개하고 싶은 모양이지만, 우리들에겐 사람 냄새가 물씬 나는 재래시장이 더 좋습니다. 강남 같은 곳은 일본에도 많습니다』

―이소자키씨는 한국어에 능숙하니까 양가 가족 이외에도 가이드를 부탁하는 친지들이 많지요.

『공부하러 온 것이 아니라 관광가이드를 하러 온 것이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 정도입니다. 주말이나 방학 때면 은사님, 선배, 친구, 후배들이 잇달아 서울로 들어옵니다. 이젠 서울의 구석구석을 웬만큼 잘 압니다』

―서대문 형무소 유적, 탑골공원, 천안의 독립기념관에는 가보았습니까.

『여러 번 갔습니다』

―그런 곳에 가면 어떤 기분이 듭디까.

『부끄러운 생각이 들어 말 한마디 하지 않고 가만히 견학만 합니다. 서대문 형무소 유적지에 가면 과거(일제시대) 독립만세를 부른 한국 여성이 일본 관헌에게 고문을 받는 실물대의 밀랍 인형이 전시되어 있어요. 오디오 시설에 의해 피투성이가 된 여성 인형의 입에서는 계속 처절한 신음소리가 흘러나옵니다. 얼른 그 자리를 피하고 싶더군요. 소름이 끼쳤습니다.

탑골공원을 가이드할 때는 미리 일행에게 「3·1독립만세운동의 발상지인 여기선 일본말을 하지 말라」라고 귀띔을 해 줍니다. 이곳에는 일본말을 알아듣는 70~80대 서울 노인들이 많이 놀러오는 곳이라 자칫하다간 봉변을 당하기 십상이거든요』

―서울의 밤 관광은 어떤 모습입디까.

『3년 전 일본에서 「한국의 밤을 걷는 방법」이란 책이 발간되어 화제가 되었습니다. 이 책에는 서울의 사창가에 가려면 몇번 전철을 타고 어느 역에서 내려 몇번 출구로 나와 어디로 접근해야 하며, 어느 가게의 서비스가 좋은지, 화대는 또 얼마인지 하는 내용까지 담고 있습니다. 한국 정부가 일본 정부에 항의하는 등 물의가 빚어지긴 했지만, 일본 관광객들에게는 상당히 인기 있는 책입니다』

―외국인 관광객들을 상대로 한 이태원의 룸살롱 같은 데도 가 보았습니까.

『선배들이 안내하라고 해서 같이 간 적이 있습니다』

―분위기가 어떻습디까.

『야한 편이지요』

―서울의 매춘관광은 어떤 정도입니까.

『한국 여성을 목적으로 삼는 일본인 관광객이 아직도 적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명동 주변 2급 호텔의 객실에 들면 프론트에서 「여자가 필요하지 않습니까」라는 전화가 걸려 오는가 하면 호텔 구내 화장실에는 「한국의 예쁜 여대생이 당신을 안내해 드립니다」는 따위의 스티커가 붙어 있으며, 호텔 밖으로 나가면 「좋은 곳으로 안내하겠다」며 접근하는 사람을 쉽게 만날 수 있습니다』


한국 가수에 매료되어 중학 2학년 때 서울 방문

―이소자키씨가 한국에 관심을 가지게 된 까닭은 무엇입니까.

『한국가요를 좋아했기 때문입니다』

―좋아하는 가수는 누구입니까.

『계은숙, 김연자, 조용필, 이성애, 최진희, 그리고 SES를 좋아합니다』

―언제부터 한국가요의 열렬한 팬이 되었습니까.

『실은 중학교 2학년 때부텁니다. 1988년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일본에서 한국붐이 불었습니다. 저는 조용필과 김연자씨 등의 노래 테이프를 틀어놓고 따라 부르면서 한국에 매료되고 말았습니다』

―언제 한국을 처음 방문했습니까.

『1988년 여름방학 때였습니다. 한국에 가고 싶다고 하니까 부모님이 중학 2학년 짜리였던 저를 혼자 보내지 못하고 동행해 주셨습니다. 그때 여동생까지 포함하여 4인 가족이 처음으로 서울관광을 했습니다』

―그후로도 한국을 자주 찾아왔습니까.

『방학 때마다 혼자서 한국을 방문했습니다. 모두 열 번쯤 됩니다』

―어디를 찾았는데요.

『서울은 물론이고, 부산, 경주, 강릉, 속초, 전주, 광주 등지를 돌아다녔습니다. 좋아하는 한국가수의 CD도 많이 사 모았습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곳은 어딥니까.

『부산 자갈치시장이었습니다. 사람 냄새, 바다 냄새가 물씬거렸습니다. 자갈치 시장에 가면 일본에서는 느끼지 못했던 삶의 열기와 만나게 됩니다』


대학 1학년 때부터 북한을 다섯 번 방문

―굳이 北京에 가서 북한을 연구하려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북조선은 지구상에서 가장 알려지지 않은 곳이지만, 北京에는 상대적이긴 하지만 정보가 좀 흐릅니다. 저는 北京에서 1년 간 중국어 연수를 받은 경험이 있고, 북조선지역도 다섯 번 여행했습니다』

―그렇게 많이 갔습니까.

『1994년, 1997, 1999년에 한 번, 1998년에는 두 번 방문했습니다』

―아니, 대학 1학년 때부터 북한을 여행했다는 얘기 아닙니까. 도대체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처음엔 강한 호기심 때문이었습니다』

―비자는 어떻게 얻었습니까.

『조총련에서 경영하는 여행사를 통해섭니다』

―무얼 타고 갔습니까.

『도쿄-北京 간은 비행기로, 北京-평양 간은 丹東(단동)을 거쳐 기차로 이동했습니다』

―북한을 방문하는 일본인들은 얼마나 됩니까.

『연간 600~1000명 정도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까.

―북한에 대한 첫 인상은 어떠했습니까.

『丹東의 호텔에서 바라본 압록강 건너편 신의주의 야경은 암흑 그대로였습니다』

―북한에 1년 간 머물며 비닐하우스 농법 등을 가르친 在日 한국인 농업전문가 이우홍씨가 저술한 「어둠의 공화국」과 「가난의 공화국」이라는 제목의 책을 읽은 적이 있습니까.

『저는 그 두 책이 북한의 실상을 가장 정확하고 솔직하게 전달했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저술한 북한여행기 같은 것은 대부분 북한의 참상을 제대로 쓰지 않았거나 모르고 썼다는 느낌이 듭니다』

―북한에 들어갈 때 동행자는 없었습니까.

『혼자 갔습니다. 평양역에 도착하면 으레 안내인 2명과 운전사 1명이 마중을 나옵니다』

―왜 안내원이 둘씩이나 됩니까.

『상호 감시를 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합니다』

―안내원이나 운전사에게는 어떻게 보답합니까.

『저는 학생의 신분이니까 담배 한 보루씩만 선물했습니다. 「카메라가 필요하다」는 단골 안내인이 있어 5000엔짜리를 사갖고 들어간 적은 있었습니다. 어른(일본인 관광객)들에게는 큰 걸, 즉 돈 같은 걸 요구한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여행경비가 수월찮았겠네요.

『항공요금을 빼고 여행사에 내는 2박3일의 여행경비가 8만 엔 정돕니다. 여기에 도쿄-北京 간 왕복 항공요금 4만 엔을 더하면 12만 엔이 됩니다. 쇼핑할 것이 없으니까 돈 쓸 일이 별로 없었습니다』

―평양에만 갔습니까.

『원산에도 간 적이 있습니다』

―무엇을 보았습니까.

『어린이의 머리칼이 누렇게 변색되어 있었습니다. 영양부족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북조선 사람들도 체제에 불만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金正日 때문에 이렇게 생활이 어려워졌다」는 불평을 듣기도 했습니다. 인기직종인 안내원의 월급이 2달러 정도라고 합니다』

―그래도 金正日에 대한 온갖 찬양문구가 북한 전체를 뒤덮고 있지 않습니까.

『겉으로 그런 척할 뿐입니다』

―북한사람들은 한국을 어떻게 생각합디까.

『한국 노래가 은밀히 유행하고 있었습니다. 「사랑의 미로」 「바람, 바람, 바람」을 좋아하더군요』


『우리의 스승은 후쿠자와 선생님뿐이다』

―모교(게이오대학)의 창립자인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란 인물에 대해선 어떻게 평가합니까.

『게이오대학의 재학생이나 졸업생 사이엔 「우리 스승은 후쿠자와 선생님뿐이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다른 교수들에게는 면전이 아니라면 흔히 君이란 호칭을 붙이지만 후쿠자와 선생님에 대해선 존칭을 쓰지요』

수년 전 초여름 어느 일요일, 필자는 게이오대학을 방문한 적이 있다. 그때 교정에 있는 후쿠자와의 흉상을 향해 젊은 남녀 한쌍이 절한 뒤 묵념하는 모습을 발견했다. 그 청년에게 까닭을 물으니까 『게이오대학 졸업생인데, 곧 결혼하게 되는 약혼자를 데리고 와서 후쿠자와 선생님에게 참배를 드렸다』라고 말했다.

후쿠자와는 명치유신 직후의 근대일본을 대표하는 교육자이며 사상가다. 현재 1만 엔권 지폐에는 그의 초상화가 새겨져 있다. 한국 근세사에서도 빠뜨릴 수 없는 인물이다. 그는 갑신정변(1884년) 실패 직후 일본으로 망명한 金玉均(김옥균) 등 개화파의 후원자였다. 원래 그는 西勢東漸(세세동점)의 물결을 조선-중국-일본 3국이 힘을 합쳐 막아내자는 三和主義(삼화주의)의 주창자였다.

그런 그의 주장은 청일전쟁 개전을 앞두고 脫亞入歐(탈아입구)로 변했다. 脫亞入歐는 「나쁜 친구(조선과 중국)」를 버리고 「서양 문명국」과 보조를 함께해야 한다는 것으로, 결국 일본 제국주의의 이론적 뒷받침이 되었다. 그는 청일전쟁을 「야만(청국)」에 대한 「문명(일본)」의 전쟁이라고 규정했다.

―韓日 간에 새 시대를 열어가는 데 있어 한국인에게 부탁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무엇입니까.

『한국의 反日감정이 역시 우리 일본인에겐 걱정거리입니다. 한국 학생들은 일본 학생보다 韓日관계사에 대해 훨씬 많이 알고 있습니다. 예컨대 식사를 함께 하다가도 교과서문제와 독도문제만 나오면 대번에 일본을 공격합니다』


일본은 한국관광의 捕虜시장

경기대 李長春(이장춘) 교수는 한국관광정책학회의 회장이다. 그를 만나 세계관광의 흐름과 韓日 대량교류시대의 의미, 그리고 한국관광이 가야 할 방향 등을 질문했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訪韓 외국인이라면 미국인이 가장 많았는데, 그것이 1970년대 들어 일본인으로 바뀐 까닭은 무엇입니까.

『1965년 韓日국교정상화, 일본의 경제성장, 1968년 일본 정부의 해외여행자유화 정책 때문이었습니다. 또한 외국여행이란 원래 인접국끼리 왕성하게 마련입니다. 全세계의 관광량을 100이라 할 때 그 50 이상은 유럽국가 간에 발생하고 있습니다. 이에 힘입어 1999년 프랑스(세계 제1위)가 7140만명, 스페인 5200만명(세계 제2위), 이탈리아 3580만명(세계 제4위)의 외국인관광객을 유치하는 관광대국이 되었습니다.

스위스는 작은 나라지만 여러 나라와 국경을 맞대고 있다는 메리트가 있어 연간 1000만명의 외국인 관광객이 찾아가고 있습니다. 미국(외래관광객 4700만명:세계 제3위), 캐나다, 멕시코 간의 상호교류가 활발한 것도 자동차를 타고 쉽게 접근할 수 있기 때문이죠』

―1965년 韓日국교 정상화 이후 韓日 간 인적 교류는 어떤 과정을 거쳐 왔습니까.

『1965년도의 訪韓 일본인은 5000명 정도였습니다. 이후 訪韓 일본인은 급증하여 1970년 5만명, 1973년 47만명, 1979년 65만명, 1988년 112만명, 1999년 218만명에 이르게 됩니다. 訪日 한국인도 1975년 5만명, 1981년 11만명, 1988년 32만명, 1994년 105만명 등의 꾸준한 증가세를 보였습니다.

―韓日 간 대량교류시대는 계속될 것으로 보십니까 .

『앞으로 일본은 한국관광의 포로시장이 될 겁니다. 韓日 양국은 좋든 싫든 상호교류의 폭이 커질 수밖에 없습니다』

―한국 관광산업의 미래는 어떻습니까.

『한국은 13억 인구의 중국, 1억3000만명의 일본과 이웃하고 있어 큰 잠재여행객 시장을 끼고 있는 셈입니다. 남북통일이 되면 한국은 중국·러시아와 국경을 접하게 됩니다. 일본과는 프랑스-영국처럼 해저터널로 연결될 겁니다. 한국은 동아시아 물류와 관광의 중심이 되는 겁입니다』

세계관광기구의 장기전망에 따르면 2020년도에 해외여행을 가장 많이 하는 나라는 지금과 마찬가지로 독일(1억5300만명)이며, 현재 8위인 일본은 제2위(1억4200만명)로 뛰어오른다. 2020년에는 중국도 출국 관광객수에서 세계 제4위를 차지한다.

―관광산업은 정치적·군사적 변화에 민감하게 마련이죠.

『韓日국교 정상화 이래 급증추세에 있던 訪韓 일본인 관광객이 1974년엔 급격히 줄어들었습니다. 그해 8·15 기념식장에서 陸英修(육영수) 여사가 在日동포 테러리스트 文世光에게 피살되어 韓日관계가 일시 악화되었기 때문이지요. 또한 10·26 사태와 12·12 사태 직후인 1980년에도 訪韓 관광객수가 급감했습니다』


2010년엔 訪韓 관광객 1000만명

―한국관광의 중장기 전망은 어떤 그림입니까.

『訪韓 관광객수가 100만명을 넘어선 해가 1978년이었는데, 10년 후인 1988년에 200만명, 다시 10년 후인 1998년에 400만명을 돌파했습니다. 10년 만에 꼭 2배수로 증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추세라면 2008년에는 訪韓 관광객수가 800만명에 이르게 됩니다』

―그렇다면 2010년의 訪韓 관광객이 1000만명에 이른다는 계산이 나옵니다. 그런 규칙적 증가세가 앞으로도 가능할까요.

『訪韓 일본인 관광객의 증가 추세가 이미 궤도에 오른 데다 중국 정부가 해외여행자유화 정책을 단계적으로 확대 추진하고 있으니까 낙관해도 좋습니다. 작년의 경우 訪韓 중국인 관광객수가 50만명을 돌파, 우리 관광시장에서 제3위로 뛰어올랐습니다.

현재 중국에서는 해외여행이 가능한 계층의 숫자를 全인구의 5%인 6500만명 정도로 잡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 가운데 10%만 끌어오더라도 650만명이나 됩니다. 남북통일이 되어 육로가 트이면 訪韓 중국인 관광객은 폭증할 것입니다』

―訪韓 외국인들로부터 「한국은 관광자원이 부족하다」는 평을 듣고 있습니다.

『아직 한국에서 관광개발을 한 것은 별로 없습니다. 일본관광연구학회 회장 마에다 이사무(前田勇·릿쿄대학 교수)씨는 「일본은 이미 全국토 중 90%를 관광 상품화했는데. 한국은 그 10%만 관광상품화했다. 그런데도 양국이 연간 유치한 외국인 관광객수는 각각 500만명 정도로 비슷하다. 앞으로 어느 쪽이 기회가 더 클 것인가는 자명하다」 라고 말합니다. 남북통일이 되면 관광자원은 더욱 보강될 것입니다』

―남북통일 이후 관광자원화할 수 있는 곳은 어디입니까.

『DMZ(비무장지대) 3억 평과 民統線(민통선) 지역 7억 평입니다. 10억 평이라면 여의도의 1200배에 달하는 넓이지요. 50년 간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DMZ의 생태계는 세계적 명소가 될 것입니다.

지금의 民統線 지역을 환경친화적으로 개발하여 컨벤션센터, 만국풍물마을, 무공해산업단지 등을 건설하면 됩니다. 북한 지역의 3분의 1을 차지하는 개마고원은 연중 1개월만 제외하고 눈과 얼음으로 덮여 있는데, 이곳을 겨울 스포츠와 관광의 거대한 센터로 만들 수 있습니다』

―북한 곳곳의 명승지 암벽에다 크고 깊게 마구 새겨놓은 金日成·金正日 찬양문구는 어떻게 처리해야 합니까.

『북한 당국이 뛰어난 자연을 더 이상 훼손하지 않도록 한국 정부가 유엔 등 국제기구와 연대하여 거론해야 할 것입니다. 특히 비무장지대는 지구촌에서 유일하게 훼손되지 아니한 자연공원인 만큼 이 지역은 통일 후에도 절대 보존될 수 있도록 지금부터 남북대화시 적극 협의해야 할 것입니다』

―韓日 대량교류시대는 양국의 관계에 어떤 영향을 끼칠 것으로 보십니까.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어록 중에는 「관광은 세계평화를 구현하는 진정한 힘이다」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韓日 양국은 비록 나쁜 과거가 있기는 하지만, 자주 만나면 서로 가까워지게 마련이지요. 더욱이 양국 간에는 문화적·역사적·지리적으로 공통점이 적지 않습니다. 거대한 인구·정치·군사 대국인 중국에 인접한 한국과 일본은 친하게 지내야 국가이익을 지킬 수 있습니다』

―訪韓 일본인이 쇼핑과 상권으로 몰리는 현상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시장도 중요한 문화상품입니다. 일본인들에게 인기 있는 김치 담그기 등의 체험관광도 그렇습니다. 절집 음식을 파는 인사동의 음식점이 일본인들로 미어터지는 것도 한국관광의 미래를 밝게 하는 것이죠』

―일본인 관광객들이 서울에만 몰리고 그러다 보니 滯韓일수도 2박3일 정도로 끝나지 않습니까.

『지방도시들도 외국인 관광객 유치를 위해 고민해야 합니다. 예컨대 경주는 불국사·석굴암 등 세계문화유산 등을 갖추고 있는 천년의 古都(고도)이지만 관광도시로서의 인프라는 아직 빈약합니다. 아이디어관광상품도 눈에 띄지 않아요.

백제의 古都 부여와 공주는 아직 교통도 불편하고 외국인에게 내놓을 만한 호텔이나 위락시설도 거의 없는 형편입니다. 관광기반시설을 보강하고 부여 정림사지의 5층탑과 공주의 무녕왕릉 등을 연결시키는 「백제관광 프로그램」을 개발하면 일본인 관광객들에게 「정신적 고향」 「문화의 원류」가 될 것입니다』


TV 史劇의 세트를 체험관광의 소프트웨어로 활용해야

그렇다면 한국관광의 문제점을 해소할 방안은 무엇일까. 한국관광의 활로에 관해 한나라여행사의 趙誠極 전무에게 물었다. 趙전무는 관광학을 전공한 경영학 박사이다.

―관광한국의 여건은 어떠합니까.

『우리나라처럼 4계절이 뚜렷하다는 것은 관광객 유치에는 오히려 마이너스 요인입니다. 관광객은 날씨가 포근한 곳을 좋아합니다. 그런데도 한국을 찾는 관광객수가 세계 20위권에 오른 것은 대단한 일입니다. 따지고 보면 이런 실적은 일본인 쇼핑객이 몰려왔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訪韓 외국인, 특히 일본인들은 쇼핑이 끝나면 볼거리가 별로 없다고 말합니다.

『그렇다고 우리나라가 중국의 만리장성 같은 大역사유적을 갖고 있는 것도 아니고, 태국과 같이 원시밀림 체험관광지를 만들 수도 없습니다. 이런 여건에서 관광객을 유치하려면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두루 갖춰야 하는데, 우리는 소프트웨어 부문에서 더욱 빈약합니다.

하드웨어 보강을 위해 수백억원을 들여 고궁의 殿閣(전각)만 복원하면 무얼합니까. 고궁에 가면 임금이 신하들과 함께 정사를 처리하는 모습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모습은 밀랍인형을 만들어서라도 재현시킬 수 있습니다.

지금 경복궁이나 창덕궁에 가서 殿閣의 문을 열고 내부를 들여다 보십시오. 거의가 마룻바닥뿐이지 않습니까. 이러 해서는 임금의 궁중생활이 어떠했는지, 문무관원들은 어떤 옷을 입고 임금을 알현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TV사극을 촬영할 때 사용한 세트 같은 것을 이용하면 됩니다. 聞慶(문경)새재에다 인기 TV사극 「태조 왕건」의 세트를 갖다 놓으니까 내국인 중심이긴 하지만, 대번에 연간 200만명이 찾는 관광명소가 되지 않았습니까』

―아이디어 관광상품의 개발이 필요하군요.

『일본에서 크게 히트한 영화 「쉬리」의 로케이션 장소였던 제주도 「쉬리언덕」을 관광상품화한 것이 하나의 성공사례입니다. 이것은 나고야-제주-쉬리언덕-쉬리여주인공과 함께하는 파티-나고야를 연결하여 3일 일정의 관광코스로 만들었고, 여기다 서울 방문을 추가하여 4일 일정으로 늘리기도 했습니다.

작년 8월엔 일본의 인기 그룹 「차게 & 아스카」의 서울 공연을 유치했는데, 이 그룹을 따라온 일본 관객이 6000명을 넘었습니다. 이밖에도 우리 관광업계는 「임진왜란 상품」 「DMZ 상품」 「조선통신사 상품」 「정동극장 난타 공연 상품」을 내놓아 호평을 받았습니다』


일본 중고생 해외 수학여행 유치는 관광수입 이상의 의미

―관광객의 취향이 갈수록 체험관광 쪽으로 변하고 있습니다.

『인사동 같은 곳은 적어도 가을 1개월쯤 조선왕조시대의 거리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곳 상인들 모두가 조선시대의 옷을 입고, 서당 훈장이 등장하여 붓글씨를 쓰고, 윷놀이판을 벌이고, 또 한쪽에서는 널을 뛰고, 떡메를 치게 하면 됩니다. 그러면 외국관광객들도 참여하여 조선왕조시대의 체험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한국은 지리적·역사적 연관성으로 인해 일본 중고생들에게 제1의 수학여행 목적지가 되고 있습니다. 이를 잘 유도하면 서울로만 집중되고 있는 訪韓 일본인의 지방분산을 꾀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한국관광공사의 자료에 따르면 1999년의 경우 1109개교 17만4000명의 일본 중고교생 해외수학여행자 가운데 250개교 4만2000명이 訪韓했다).

『미래 일본의 주역들에게 한국을 이해시킨다는 점에서 관광달러 획득 이상의 의미가 있는 일입니다. 지금 부산항은 하카다, 시모노세키, 대마도 등 일본의 3개항과 1주일에 25편(하절기 기준 8100석)의 여객선 정기항로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정기여객선 이외에도 부산-후쿠오카·고베 간에 스타 크루즈가 운항하고 있어요. 일본의 공립 중고교의 경우 해외 수학여행 때 항공편을 이용할 수 없다는 규제조항 등이 있습니다.

이런 것은 일본 중고생의 해외 수학여행지로 부산권이 압도적 우위를 차지할 수 있는 객관적 조건이기도 합니다. 부산은 한국 제1의 항도인 동시에 제2의 상업도시이며, 가야문화권의 핵심무대이자 천년의 古都 경주와 1시간 거리로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訪韓 외국인관광객의 서울 집중 현상은 갈수록 심화되고 있다. 한국관광공사의 설문조사(중복응답)에 의하면 내한 외국인관광객 중 서울 방문자는 1998년 76.9%에서 1999년 81.7%, 2000년 84.7%로 매년 급증하고 있다.

반면 부산은 1999년 22.9%에서 2000년 17.8%로 가장 크게 떨어졌다. 2000년 다른 지방의 방문율도 모두 소폭 감소하여 민속촌(용인) 13.2%, 경주 9.1%, 제주도 8.2% 등으로 나타났다.


「100년이 지난 지금 생각해도 반성해야」

한국관광공사는 수학여행으로 한국을 방문한 일본 고교생을 대상으로 제1회 감상문 콩쿠르대회를 개최했다. 특상 수상자는 아이치(愛知)교육대 부속고등학교 2학년 이시이 다카후미(石井貴章)군이었다. 제목은 「새가 되고 싶다」. 한국을 방문한 일본의 청년이 한국과 한국인에 대해 어떤 이미지를 갖게 되는지를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발췌 소개한다.

<임진강 건너편은 북조선. 그 날 오두산 통일전망대에서 본 북의 땅은 안개 때문에 흐릿했다. 그것은 마치 한국과 북조선의 관계와 같았다. 앞이 보일 것 같으면서도 보이지 않는 조선 통일. 자유국가와 공산국가 사이에는 얼마나 큰 장벽이 놓여 있는 것일까.

멀리 북조선을 바라보면서 일본어가 유창한 가이드의 이야기에 빠져 들었다.

『새나 물고기는 이 강을 지나 한국과 북조선을 왔다갔다 할 수 있지만, 사람은 어느 날 느닷없이 그어진 이 군사분계선을 넘어 왕래하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부모 자식 간이라 할지라도 이 보이지 않는 벽으로 나눠져 있으면, 서로 만나는 것은 물론 서로의 생사 안부조차 알 수가 없습니다』

난 슬퍼졌다. 왜 이런 고통스런 현실이 계속되어져야 하는가. 총으로 무장한 많은 군인들을 보면서 떠오른 생각이다.

(중략) 경복궁을 답사했을 때 목격한 대형 그림. 1895년 10월에 일어난 사건으로 일본공사 미우라(三浦梧樓) 등이 민비를 살해하는 장면이 생생하게 그려져 있었다. 그림을 본 순간, 나도 모르게 등골이 오싹해졌다. 이럴 수가…. 민비를 살해하고 시신마저 불태웠다니.

당시 일본 정부의 정책 수행에 그 존재가 거북했다는 이유로 일국의 왕비를 살해한 것이다. 있어서는 안 될 일을 일본인 멋대로 저질러버린 것으로, 100여 년이 지난 지금, 내가 봐도 반성해야 할 일이고 어리석은 일이라고 느꼈다.

(중략) 민비가 시해당한 10여 년 후, 한국의 영웅 安重根(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사살했다. 安重根은 일본인에 의해 사형에 처해졌다. 한국의 왕비를 죽인 일본인은 實刑(실형)을 받지 않았는데 ….

불국사, 석굴암, 국립경주박물관, 청와대, 롯데월드 등을 둘러보았다.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잊을 수 없는 것이 건국대 부속고등학교와의 교류회다.

서울 도심의 교통혼잡을 뚫고 건대부고에 도착했다. 교류회가 시작되면서 학생대표로 인사말을 하기로 되어 있던 나는 펜팔 친구와의 만남도 다가오고 있어 이중으로 긴장하고 있었다. 나는 다음과 같은 인사말을 했다.

『앞으로도 계속 편지를 주고 받으며 우리 모두가 「작은 日韓 친선대사」가 되었으면 합니다. 아직 日韓관계는 「가깝고도 먼 나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상대방에 대한 고정관념이 양국관계를 차갑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서로 「가깝고도 사이 좋은 나라」가 되도록 하는 것이 우리들의 과제입니다』

행사 후의 개인교류 시간을 통해 펜팔친구인 영민의 안내를 받으며 캠퍼스 내를 돌아보았다. 돌아갈 무렵에는 『이제 어디로 가니?』 『언제 일본으로 돌아가니?』 라고 물어와 짧은 만남과 이별의 아쉬움을 느끼게 했다. 나는 『꼭 편지 쓸게』라고 말했다. 그리고 나서 내가 한국말로 『또 만나자』 라고 했더니 영민도 일본말로 『마타 아이마쇼』(또 만나자) 라고 말했다. 기쁘면서도 섭섭했다. 버스 문은 무정하게 닫혔다.

한국에서의 추억은 너무 많아서 정말이지 여기에 다 쓸 수가 없을 정도다. 고속도로 휴게소 상점의 친절함, 많은 것을 배우게 한 가이드의 설명, 맛있는 불고기와 비빔밥. 내가 너무나 좋아하는 나라, 한국을 방문할 수 있었던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


「일본 사람을 싫어하는 한국 사람은 보지 못했다」

韓日 대량 교류시대는 양국 국민들 간에 상호이해의 폭을 넓혀 놓은 것 같다. 마이니치신문 서울특파원으로 2년째 근무하고 있는 사와다 가츠미(澤田克己) 기자는 『일본을 좋아하지 않는 한국 사람은 있는 것 같지만, 일본인을 싫어하는 한국인은 보지 못했다』고 말했다.

일본 영화 「러브레터」, 「철도원」이 한국의 젊은층에게 큰 인기를 모았고, 한국어 가사로 번역된 일본영화 주제가 「아이 러브 유」는 지난 4월 초 TV가요 인기차트 제1위에 오르기도 했다. 한국 청소년들의 방에 일본의 인기 가수나 배우의 사진이 붙어 있는 것도 이젠 흔한 일이 되었다.

일본인 관광객들의 행태에 대한 한국인의 평가도 실제 접촉을 많이 해 본 직종의 사람일수록 더욱 호의적이다. 일본인 관광객들을 자주 승차시키고 있다는 서울 35바1787호 모범택시 운전기사 정진태씨는 『일본인은 조용하고 예의가 바르다』 라고 말했다.

특히 일본의 20代 여성에 대해서는 『한국의 20代 여성처럼 화장도 진하게 하지 않고 몸가짐도 단정하며 순진하다』라고 극찬했다. 일본인의 매춘관광에 대한 질문에는 『일본인에게 콜걸을 공급하는 매춘조직은 있지만, (모범택시 운전을 처음하던) 9년 전보다 조금 줄어든 것 같다』라고 말했다.

롯데호텔의 면세점에 근무하는 두 미혼여성은 『일본인들은 대체로 정직하고 공중도덕을 잘 지키고 브랜드 상품을 유별나게 좋아한다』라고 말했다. 『흠을 들자면 무엇이냐』는 필자의 질문에는 『하룻밤에 얼마냐고 묻는 엉큼한 일본인도 더러 있다』며 살짝 얼굴을 붉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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